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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신라 52대 효공왕릉. 신라 52대 효공왕릉 여행.  


경주여행에서 이번에는 신라 제52대 효공왕릉을 찾았습니다. 897년에 왕위에 올라 912년 승하했으며 대략 15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효공왕릉 포스팅을 하면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효공왕은 성은 김 씨, 이름은 요로 신라 제49대 헌강왕의 서자로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경주 효공왕릉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14



어머니는 의명황태후 김 씨며 왕비는 이찬 예겸의 딸입니다. 효공왕의 출생은 드라마틱합니다. 부왕인 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만난 여인 사이에 태어났으며 51대 진성여왕의 뒤를 이어 895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권력을 강화하여 신라를 상대로 전쟁을 걸어왔습니다. 후고구려의 궁예가 패서도와 한산주의 30개 성을 공략하여 빼앗았고 옛 백제땅 일부를 후백제의 견훤에게도 빼앗겨 그야말로 신라는 진퇴양난이었습니다.



다시 903년에는 태봉을 건국한 궁예의 부하 왕건이 쳐들어와 금성과 주위 10여 개의 성을 빼앗아 갔으며, 907년에는 견훤에게 또다시 일선군 주위의 10개 성을 내주었습니다. 나라가 환란에 빠졌을 때 군주는 모름지기 정신을 차려 국난극복에 힘써야 하지만 거느린 애첩과 향락에 빠져 정사는 내팽개쳤습니다.



기우는 국세에 왕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졌고 이를 보다 못한 대신이 911년 효공왕의 애첩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효공왕도 오래가지 못하고 그다음 해에 승하했으며 시호를 효공이라하고 사자사 북쪽에다 장사 지냈다 합니다.





현재 효공왕의 능은 경주시 배반동 산 14에 사적 제183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성덕왕을 빼고 신라왕릉 모두 다 그러하듯이 효공왕릉 또한 삼국사기의 사자사 북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을 근거로 지금의 효공왕릉도 비정한 상태입니다.







효공왕릉을 보면 둥글고 흙으로 쌓은 원형봉토분입니다. 능의 지름은 약 22m이며 봉분의 높이는 약 5m로 봉분의 아래쪽에다 호석인 둘레돌을 돌렸다는 것을 드러난 돌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능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로서 당시 효공왕의 업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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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신문왕릉.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라 31대 신문왕릉을 여행하다. 


신문왕은 신라 31대 왕으로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한 부왕 문무왕의 장자로 성은 김 씨, 이름은 정명 자는 일초입니다. 664년 문무왕 4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681년에 왕위에 올라 10년 남짓 통일신라를 이끌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의왕후이며 왕비는 소판 김흠돌의 딸인 김 씨였지만 아버지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켜 출궁 당하자 다시 일길찬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았습니다.





경주 신문왕릉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453-1

신문왕릉 문의 전화:054-779-6396



2014/05/21 - (경주여행/감은사지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여행) 호국용 문무대왕의 혼이 깃든 경주 감은사지 이견대 대왕암 이른 봄여행

2016/04/29 - (경북여행/경주여행)능지탑지. 문무대왕 화장터로 알려진 경주 능지탑지 여행. 능지탑지

2014/05/27 - (경북여행/경주여행)동해의 신비 경주주상절리 파도소리길 걷기, 읍천항벽화마을,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감은사지 해파랑길 걷기




신문왕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많은 일을 한 분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감은사와 만파식적등 신문왕과 문무왕에 얽힌 흥미로운 전설로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신문왕이 즉위하던 그해에 장인인 김흠돌이 모반을 꾀했습니다. 모반의 사유가 궁색하지만 왕비인 딸이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일과 진복의 상대등 임명 건에 반기를 들었던 곳으로 유추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난을 평정하고 그에 연루된 모든 사람을 처형시켰는데 심지어 반란모의를 사전에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이찬 군관과 그의 아들까지 죽게 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기화로 신문왕은 귀족세력의 권력을 제어함과 동시에 전제왕권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신문왕 하면 퍼뜩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이견대에서 해룡으로부터 받았다는 피리 만파식적과 선왕인 문무왕이 왜군을 진압하기 위해 세웠던 감은사입니다. 지금은 절터의 흔적인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만 국보로 지정되어 그 터가 일부 남아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감은사는 문무왕이 착공을 했지만, 완공을 못 보고 신문왕이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682년인 신문왕 2년에 완공했습니다.





처음에는 나라를 지킨다는 뜻인 진국사였습니다. 그러다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호국 충정에 감읍하여 감은사로 고쳐 불렀습니다. 문무왕은 죽으면서 용이되어 신라를 왜적으로부터 시키겠다며 동해에다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습니다. 신문왕은 그 유지를 받들어 경주 낭산의 능지탑에서 문무왕을 화장하여 그 뼈를 감포 동해구의 물속 바위에 안장했는데 후세에 와 이 바위를 대왕암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감은사 금당은 일반사찰의 금당과는 다른 모습인데 꼭 돌다리 형태입니다. 이는 신문왕이 바다의 용으로 변한 부왕을 이곳에서 쉴 수 있게 금당 아래에다 바다로 연결된 통로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는 만파식적입니다. 만파식적은 만능 피리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피리를 불면 파도가 일렁이면서 강한 태풍으로 변해 왜군의 배를 모두 물속에 가라앉게 했다는 전설의 피리입니다.





신문왕은 부왕을 위해 감은사를 완공하자 다음 해 작은 산 하나가 감은사 앞바다에 떠 있다는 전갈에 “이는 호국용으로 변한 문무왕과 천신으로 변한 김유신이 보배를 주려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신문왕은 이견대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는 대나무 한줄기가 있었으며 낮에는 대나무가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다음날 대나무가 하나가 되자 왕은 산에 들어갔습니다.





어디선가 용이 나타나 그에게 검은 옥대를 주면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상스러운 피리라며 대나무가 하나가 되었을 때 베어 피리를 만들라 하였습니다. 신문왕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천존사에 보관하였으며 만파식적이라 하고 국보로 삼았습니다. 이번 신문왕 포스팅은 신문왕이 이룬 업적도 중요하지만, 만파식적과 감은사의 전설이 더욱 흥미로워 옮겨보았습니다.

 




신문왕은 옛 백제와 고구려 백성들을 융합하여 하나의 통일신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통일신라의 기틀을 다지는 등 국학 설립으로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녹읍 폐지와 관료전 지급 및 지방 통치를 위한 9주 5소경 제도를 완성하고 여러 국가제도를 정비하여 전제 왕권의 기틀도 마련했던 국왕입니다.







신문왕의 장지는 현재 경주 남산 아래에 있습니다.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봉토분이며 봉분 아래에는 둘레석을 돌렸는데 자연석을 블록 모양으로 다듬어 5단으로 쌓았습니다. 이는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호석이라합니다. 호석 맨 위에는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습니다. 또한, 호석 주위로 44개의 삼각형 받침돌로 호석을 받치게 했습니다. 남쪽으로 향하는 받침돌 한곳에는 출입구를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문(門)자가 새겨져 있다는데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신문왕릉은 둥근 모양으로 흙을 쌓은 원형봉토분입니다. 능의 밑 둘레는 약 92m에 높이는 8m고 봉분 앞에는 크고 긴 사각의 돌기둥을 여러 개 눕혀 쌓아 상석을 만들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문왕릉은 낭산 동쪽에다 장사 지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현재의 왕릉으로 비정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100% 맞는다고는 할 수 없는 일부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황복사지 인근에 있는 보문들에 십이지상 등이 남아 있는 능을 신문왕릉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왕릉은 논 가운데 폐허가 되어 있으며 지금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현재 공식적인 신문왕릉은 배반동에 있으며 이번에 포스팅한 곳입니다. 참고하세요. 경주에 엄습한 강력한 지진으로 신문왕릉의 출입문인 솟을 대문의 벽체가 떨어져 나간곳이 여러곳 있었습니다. 어서 빨리 보수가 필요해 보였습니다. 경주 신문왕릉 사적 제1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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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보문리 사지. 경주 보문들의 천년 흔적 보문사지 여행.


신라 시대부터 서라벌의 진산으로 신령스러운 영산의 대상이었던 낭산과 명활산 사이에 있는 보문들에는 아직 가을걷이를 하지 않은 벼가 고개를 숙이며 누런 황금 들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보문단지를 간다고 북천 옆 도로를 따라 여러 번 다녔지만, 이곳 골짜기 안쪽이 이리 넓은 줄 이번 경주여행을 하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경주 보문리 사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848-6


2016/10/21 - (경주여행)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 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 황금들판의 보문들을 지키는 화려한 허수아비 경주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를 여행하다.

2016/10/28 - (경주여행)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 통일신라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를 만나다.

2016/10/26 - (경주여행)경주 보문사지 석조. 보물 제64호 절에서 물을 담아두는 돌그릇인 경주 보문사지 석조를 만나다. 경주보문사지석조



 

보문들을 가로질러 닿았던 보문사지는 보문들의 가운데 황금 들판을 울타리 삼아 무심한 듯 오늘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습니다. 보문동의 유래도 아마 이곳 보문사에서 나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중마을 또한 그런 것 같습니다. 특히 이곳 보문사지 주위로는 많은 절터가 남아 있습니다.

 


신문왕의 명복을 빌었던 황복사지가 그러하고 선덕여왕의 세 가지 예지력에서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장사지내라"는 유언이 현실이 되었던 사천왕사지가 보문사지와 함께 서로 삼각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보문사지의 건립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이곳에서 보문이라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보문사가 있었음을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금당의 부재와 건물 배치, 석재 유물 등을 종합해보면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절로 추정만 될 뿐입니다.

 

 

 

 

현재 보문사 터는 주위가 모두 논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금당지와 동·서탑지 등 모두가 1~2m 정도로 흙이 쌓여 높은 상태 있습니다. 금당지에는 건물의 기단석과 초석이 그대로 깔려 있으며 금당 지 앞 좌우 높은 단에는 동·서의 목탑지가 남아있습니다.

 

금당지의 모습입니다. 

 

 

 

 

 

 

 

 금당지 아래 옛날 논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석등 부재들...


동탑지에는 아무 흔적이 남아 있지 않으며 서탑지에는 현재 연꽃무늬가 조각된 목탑의 받침돌인 대형 초석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속리산 법주사의 목탑건물이나 황룡사 9층목탑과 유사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척에 있는 황룡사 9층 목탑과 같이 고려 시대 몽골침입 때 소실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서탑지의 모습입니다. 

또한, 금당지 앞에는 석등의 받침돌과 옥개석, 초석 등이 뒹굴고 있는 게 신라 천 년의 뒷모습인 양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현재 보문사지 서쪽으로는 보물 제123호인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가 남아 있으며 62m 떨어진 북쪽으로는 보문사지 당간지주인지 확실하지 않은 보물 제910호 경주 보문리 연화문 당간지주가 있습니다.

 

 

 

 

이와 함께 보물 제64호인 경주 보문사지 석조가 남아 당시 보문사의 현역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그 높이가 3.8m이며 보문사지의 여러 부재와 같은 시기인 통일신라 시대 때에 조성되었습니다. 절을 알리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고정했던 두 개의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합니다

 

 

돌로 된 당간지주와 비교하면 당간은 철당간과 목당간 석당간이 있는데 당간지주보다 지금 남아 있는 문화재가 손꼽을 정도의 숫자입니다.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안쪽 면이 평면이라면 나머지 삼면은 아래쪽을 잘록하게 하고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약간씩 가늘어집니다.

 

 

당간을 고정했던 구멍이 상·중·하로 3개 뚫렸고, 북쪽의 돌기둥은 구멍이 반만 패여 있어 특이한 경우입니다. 두 기둥 중 북쪽 기둥은 윗부분이 부러진 상태이며 기둥 사이에 놓였던 당간 받침은 사라졌습니다. 또한, 전체적으로는 크고 소박한 모습입니다.

 

 

경주 보문사지 석조 또한 통일신라 때에 만들어졌습니다.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절에서 물을 담는 용도로 사용하였습니다. 가로 형태의 직육면체 바위 안쪽을 넓고 깊게 사각으로 파내었습니다. 또한, 내부와 외부는 별다른 장식이 없고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와 같이 그저 밋밋하며 소박한 모습입니다.

 

 

 


석조의 북쪽만 아랫부분에 배출구가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사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경주 보문들에서 만나는 천년전의 보문사는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흔적으로 남아 있는 유물로서 당시 보문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적 제3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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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황복사지 삼층석탑. 신문왕의 명복을 빌며 세웠다는 국보 제37호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만나다. 


황복사는 의상대사가 653년에 19세에 출가했던 곳으로 통일신라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모후인 신목태후와 함께 692년 7월 2일에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석탑은 이중의 기단 위에 쌓은 삼층의 석탑으로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 통일신라 석탑이며 국보 제37호로 지정하였습니다.





황복사지 3층석탑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103


2016/10/31 - (경주여행)신라 27대 선덕여왕릉.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낭산 도리천의 선덕여왕릉 여행과 세가지 예지력.

2016/10/29 - (경주여행)신라 26대 진평왕릉. 천년 세월을 말해주는 듯 웅장한 노거수에 마음까지 편안한 경주 진평왕릉 여행. 진평왕릉

2016/10/28 - (경주여행)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 통일신라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를 만나다.

2016/10/26 - (경주여행)경주 보문사지 석조. 보물 제64호 절에서 물을 담아두는 돌그릇인 경주 보문사지 석조를 만나다. 경주보문사지석조

2016/10/24 - (경주여행)경주 구황동 당간지주. 분황사 당간지주로 추정되는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를 여행하다.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

2016/10/23 - (경주여행)전 홍유후 설총묘.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던 신라 대문장가 설총묘 여행. 설총묘

2016/10/21 - (경주여행)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 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 황금들판의 보문들을 지키는 화려한 허수아비 경주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를 여행하다.



 

석탑의 높이는 7.3m로 당시 성행했던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감은사지 삼층석탑보다 약 2m 정도 규모 면에서 작게 바뀌었습니다. 또한, 기단부의 하단 버팀 기둥인 탱주는 3개였던 개 가운데 기둥이 없이 2개이며 면석과 갑석은 각각 8매의 갑석으로 짜맞추었습니다. 그러나 상단의 면석은 8매에 갑석은 4매로 이것 또한, 차츰 간소하게 바뀌었습니다.

 

 

 

 

 

 

 

 

 이와 함께 1층의 몸돌은 이때까지 여러 개의 돌을 짜 맞추었다면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하나의 몸돌을 사용했습니다.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5개 그대로이며 위층의 몸돌을 받치는 지붕돌의 상단은 2단의 각형 굄대로 아직은 신라 석탑양식이 많이 남아 있는 통일신라 석탑입니다. 이는 신라 시대 석탑양식에서 통일신라의 변화된 석탑양식의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석탑으로 보입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의 복장유물로는 금동사리함과 높이 12.2cm 금동여래좌상, 높이 14cm 여래입상이 있습니다. 이는 효소왕의 아들인 성덕왕이 신문왕과 효소왕의 두 선대 왕의 명복을 빌며 삼층석탑에 안치했는데 1943년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이 두 불상은 국보 제79호와 국보 제80호에 각각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

 

 

 

 

 

 

순금의 금동사리함 뚜껑 안쪽에는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692년 이 탑을 세웠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합니다. 탑을 세운 목적과 건립연대가 뚜렷하게 나온 석탑입니다. 필자는 경주여행에서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마지막으로 보고 왔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져 바쁘게 설치다 보니 석탑 주변에 절반가량이 땅에 묻힌 목이 잘린 귀부 2개를 보지 못하고 왔는데 그 귀부의 등에 ‘임금 왕(王)’ 자가 새겨져 있다 합니다. 또한, 북쪽 밭에는 이곳에서 나왔던 12지신상을 한곳에다 파묻었다 하는데 어떤 모습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한 번 찾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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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신라 26대 진평왕릉. 천년 세월을 말해주는 듯 웅장한 노거수에 마음까지 편안한 경주 진평왕릉 여행.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에게도 농락당하는 아주 유약한 왕으로 묘사되었던 진평왕. 이번 경주여행은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릉을 찾았습니다. 진평왕릉은 낭산과 명활산 가운데 있는 보문들에 고목을 울타리 삼아 넓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낭산 도리천에 잠들어 있는 선덕여왕과는 가까운 거리로 아마 지금도 따뜻한 부녀의 정을 나눌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딸이니까요???





경주 진평왕릉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608


2016/10/28 - (경주여행)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 통일신라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를 만나다.

2016/10/26 - (경주여행)경주 보문사지 석조. 보물 제64호 절에서 물을 담아두는 돌그릇인 경주 보문사지 석조를 만나다. 경주보문사지석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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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은 신라 왕 중에서 박혁거세에 이어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579년에 왕위에 올라 632년까지 53년 동안 왕위에 올랐다니 당시 정치 상황을 보면 그의 인생역정 또한, 파란만장했을 것만은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진평왕의 가족사를 보면 법흥왕이 불교를 국교로 공인한 이래 온 가족을 인도 카빌라국의 석가모니 왕실 가족의 이름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진평왕의 가계도를 보면 아버지는 24대 진흥왕의 장자로 태자로 책봉되었던 동륜이며 어머니는 입종갈문왕의 딸인 만호부인 김씨입니다. 26대 진평왕은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백정(伯淨)으로, 그의 부인인 왕비는 복승갈문왕의 딸로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 이름 따와 마야부인 김씨로, 그리고 아우도 정반왕의 아우들 이름인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이라 하였습니다.

 

 

 

 

 

 

진평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신체가 건장했으며 성장하면서 의지가 굳고 식견 또한 명철했다는 것을 통치과정을 보면 나타납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 그려졌던 진평왕처럼 유약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초반에는 할머니의 수렴청정이지만 먼저 관제의 정비를 서두르는데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이찬 후직을 병부령에 임명하여 각각 국정과 군권을 장악케 하여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581년에는 위화부를 설치하여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게 하는 등 여러 관제를 정비·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제 고구려와 잦은 다툼으로 국경은 조용한 날이 없었습니다. 603년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으로 쳐들어오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기도 하는 등 삼국 간의 숱한 전쟁에 정세는 더욱 격화하였습니다. 이에 진평왕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하는 데 주력합니다.

 

 

 

 

608년에는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원광법사에게 걸사표를 짓게 하여 수양제에게 고구려 정벌을 유도하였으며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와 더욱 돈독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숱한 위기로부터 신라를 지켜내었습니다. 남산신성을 축성하고 명활산성을 개축하는 등 서라벌의 방위에 진력하였으며 632년 진평왕이 죽자 한지에 장사지내고 당 태종은 국서를 보내어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하였습니다.

 

 

 

 

진평왕릉의 봉분은 높이가 약 8m이며 지름은 약 40m로 둥글게 흙을 쌓아 만든 원형봉토분입니다. 봉분의 아랫부분에는 자연석을 호석으로 돌렸고 지금은 바깥으로 몇 개 들어나 있습니다. 그리고 상석과 향로석은 후대에 설치했으며 세월의 흐름을 방증이라도 하듯이 굵고 늙은 노거수들이 수림을 이루어 아이들의 소풍장소로 정말 좋아 보였습니다.

 

 

 

 

 

 

때마침 청명한 가을 하늘에 벌써 유치원생들이 가을 소풍을 나와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서 진평왕도 꽤 흐뭇해하실 것 같습니다. 세월의 더께 속에 진평왕은 옛 역사는 그저 잊혔다고만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오늘 진평왕릉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해맑은 가을 하늘은 더욱 높은 거 같습니다. 사적 제1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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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 통일신라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를 만나다. 


경주보문사지당간지주는 보물 제123호에 지정되었습니다. 당간이라 하면 사찰에서 의식이 있으면 절 입구에 내다 거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말합니다. 이 당간을 지탱해주는 받침대를 당간지주라 하는데 두 돌기둥이 똑같은 모습을 하고 나란히 솟아 있습니다.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는 그 높이가 380cm이며 통일신라 시대 사찰로 옛 절터의 기왓장에서 ‘보문’이란 명문이 발견되어 보문사 절터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와 함께 보문사 금당과는 제법 많은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만큼 보문사 옛터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는 보문사지 금당터에서 서남쪽으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두 기둥이 64cm 거리를 두고 남북방향으로 서로마주모고 있습니다. 마주 보는 안쪽과 바깥면 그리고 좌측과 우측면에는 아무런 조각장식이 없는 밋밋한 형태인데 단 바깥 측면은 양쪽 모서리를 깎아내어 각을 죽였습니다.

 

 

두 돌기둥에서 북쪽 돌기둥의 기둥 상부는 절단되었으며 마주한 남쪽 돌기둥은 원래 모습 그대로 온전한 상태입니다.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의 특징은 안쪽은 평면인데 반해 그 외 삼면은 아래쪽은 잘록하고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가늘어지는 모양새입니다.

 

 

또한, 두 돌기둥에는 상·중·하로 각각 3개의 네모난 구멍이 뚫렸는데 상부가 절단된 북쪽 돌기둥은 구멍이 반쯤 뚫려 있으며 그와 반대로 남쪽 돌기둥의 구멍은 관통해 있어 당간을 고정했던 장치를 설치했습니다. 필자는 지금까지 여러 모양의 당간지주를 봤습니다.

 

 

두 돌기둥에 관통된 구멍은 많이 봤지만, 한쪽 기둥에만 구멍이 관통된 것은 매우 드문 형태이며 두 기둥 사이에 설치된 당간 받침돌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폐사지인 보문사의 규모는 정말 대단합니다.

 

 

그에 비해 당간지주는 장대하면서도 소박합니다. 또한, 수려하지 않지만 잘빠진 모습을 하고 있어 통일신라 예술의 진수를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 문화재 지정:보물 제123호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8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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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보문사지 석조. 보물 제64호 절에서 물을 담아두는 돌그릇인 경주 보문사지 석조를 만나다.


경주보문사지석조입니다. 석조는 돌로 만든 수조입니다. 절에서 물을 담아두는 돌그릇을 말하는데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문사지는 신라 시대에서 신성시했던 낭산과 명활산성 사이의 보문들에 남아 있는 폐사지로 보문사란 명문이 새겨진 기왓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에 보문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주 보문사지 주소: 
경북 경주시 보문동 848-6



보문사로 인해 오늘날까지 이곳의 지명이 보문동으로 불리고 있으며 보문사 터의 규모를 보면 부처님을 모셨던 금당 터의 부재와 삼국시대에 성행했던 동·서의 목탑 터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필자의 짧은 지식이지만 황룡사 9층 목탑은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자장율사가 선덕여왕에게 청하여 불법으로서 왜적을 막으려 9층 목탑을 완공했습니다.





그러나 그 규모와 정교함이 만만치 않아서 그런지 왜!! 백제의 장인인 아비지를 불러 완공했는지 의문입니다. 신라에서도 많은 장인이 있었을 텐데요??? 이곳 보문사지에도 그런 유의 목탑인지 알 수 없지만 실제 동·서 쌍탑으로 있었다 하니 어떤 모습이었던지 궁금합니다.



목탑이라 하면은 불상을 모시고 또한 대부분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높이의 크기였습니다. 보문사의 입구에 세웠던 당간의 받침대인 당간지주 등이 옛 보문사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문사지 석조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가로로 긴 직육면체로 생긴 돌 안쪽을 넓고 깊게 파내었습니다. 그리고 안쪽과 바깥쪽에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깨끗하며, 밋밋하고 소박한 모습입니다.

 




이 석조는 물을 빼내었던 구멍이 실제 존재 하여 수조로써 사용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논바닥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며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6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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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구황동 당간지주. 분황사 당간지주로 추정되는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를 여행하다. 

 

경주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황사와 절터인 황룡사지 중간에 하늘을 받치듯 우뚝하니 두 개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름하여 당간지주인데 경주 구황동에 있어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라 부릅니다. 보통 옛날 절터의 이름이 남아 있지 않으면 그 동네 이름을 따오는 게 관례인데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도 그에 따라 붙여진 이름입니다.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 주소:경북 경주시 구황동 315-2



옛날 절에서 사찰의 소속이라든지 절을 알리기 위해서 또는 여러 가지 일로 당이라는 깃발을 달았습니다. 깃발을 달던 깃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고정했던 장치를 당간지주라 합니다. 똑같은 형태를 한두 개의 돌기둥이 서로 마주 보게 세워졌으며 이 당간지주는 분황사 남쪽인 입구에 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 당간지주의 형식을 따랐으며 높이는 360cm에다 두 기둥 사이에 특이하게도 머리를 동쪽으로 향한 돌거북이를 당간 받침돌로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다른 당간지주를 보면 돌거북이를 받침돌로 사용했다는 점은 극히 이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당간을 고정하는 기둥에는 3개의 구멍을 설치했는데 이는 당간지주의 일반적인 형태이며 양 기둥을 서로 관통하도록 했습니다.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는 분황사 담장 밖에 나와 있어 황룡사 것으로 보이지만 아마 추측하건대 정황상 분황사 당간지주였을 것 같습니다.


2016/10/23 - (경주여행)전 홍유후 설총묘.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던 신라 대문장가 설총묘 여행. 설총묘

2016/10/19 - (함안여행)고려동유적지. 조선에 있었던 고려땅 고려동을 아세요. 함안 고려동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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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6 -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 성덕대왕신종. 엄마를 부르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에밀레종, 성덕대왕신종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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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2 -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 장항리 석조불입상. 도굴꾼에 의해 다이너마이트로 파괴된 장항리 석조불입상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복원된 상태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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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전 홍유후 설총묘.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던 신라 대문장가 설총묘 여행. 


경주 보문동에 설총묘가 있다고 해서 다녀왔습니다. 설총하면 신라 중대 문장가로 알려졌지만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원효대사이며 어머니가 요석공주로 두 분 사이에 태어났다는 것이 더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보면 뼈대 있는 신라 왕족 집안입니다. 외할아버지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이며 친할아버지는 나마담날로 설총은 경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경주설씨와 순창설씨의 중시조이며 신라 10현이자 고운 최치원과 강수와 함께 신라 3문장 가로 꼽고 있습니다.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일화를 보면 출가한 요석공주는 과부가 되어 다시 궁궐로 들어와 요석궁에 머물렀습니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긴 행로로 몸도 피곤하고 하여 동굴인 줄 알고 들어가 잠을 청했습니다. 잠을 자다 원효는 목이 말라 주위를 더듬다가 마침 손에 잡히는 바가지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그 물 참 꿀맛이다”며 다시 곯아떨어졌는데 아침에 눈을 뜨고는 뒤로 까무러칠뻔했습니다. 목이 말아먹었던 그물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이었으며 지난밤 단꿈에 쩔어 잤던 곳은 무덤 속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설총묘는 지금 이발중 ㅋㅋ



원효는 그곳에서 일체유심초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며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서라벌로 돌아와 노래를 불으며 민중 속을 파고드는 불법을 전합니다. 그러자 어느 날 원효는 색다른 노래를 부르고 다녔습니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느냐.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 “하며 불렀지만 아무도 그 노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태종무열왕만은 노랫말을 듣고 “자기한테 여자를 주면 뛰어난 현자를 낳게 하겠다”는 뜻으로 단박에 이해하고는 과부로 있는 자신의 딸인 요석공주와 맺어줄 묘책을 짜냅니다. 원효는 김춘추가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궁궐로 향하다가 그만 문천교에서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는 바람에 입고 있던 옷이 다 젖게 되었습니다. 태종무열왕과 원효는 서로 이심전심이듯이 손발이 척척 맞았습니다.





원효와는 별 바쁜 일이 없던 관계로 태종무열왕은 온몸이 젖었는데라며 옷을 말린 후 내일 보자며 바로 원효를 요석궁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김춘추는 요석궁에서 옷만 말리라 했는데 그날 밤에 바로 사달이 났고 10개월 후에 설총이 태어났습니다. 원효는 이 일로 파계승을 자처합니다.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 설하고 설총은 중국의 한자를 우리말로 표현하는 이두를 만들었습니다.



코끼리 다리를 닮은 설총묘 석상다리



이두는 한자의 음과 훈인 소리와 뜻을 새겨 우리말로 적은 것을 말합니다. 유교 경전도 우리말로 풀이하여 고려 중기까지 사용했으며 이두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전까지 우리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설총이 저술한 우화적 단편 산문인 화왕계도 있습니다. 제목도 없이 삼국사기에 실렸다가 풍왕서란 이름으로 동문선에도 실렸으며 후대에서 화왕계로 불렀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외삼촌인 신문왕이 설총에게 마음이 울적한데 이를 풀 수 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자 설총은 향락을 멀리하고 도덕을 엄격히 할 것을 우화를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신문왕은 현명한 임금답게 글로 남겨 후세 임금은 모두 이를 본받도록 했습니다. 1022년인 고려 현종 13년에 홍유후라는 시호를 추증받았으며 최치원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고 1623년 조선 인조원년에 경주 서악서원에 제향 되었습니다 크기는 지름이 15m, 높이 7m이며 흙을 쌓아 올린 반구형으로 아랫부분에는 보호돌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봉분은 작지만 꼭 신라왕의 무덤 같으며 앞에는 큰 상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돌로 위패를 모시는 자리는 흡사 돌의자 같았습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30호이며 전 홍유후 설총묘(傳 弘儒侯 薛聰墓)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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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 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 황금들판의 보문들을 지키는 화려한 허수아비 경주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를 여행하다. 


경주여행은 참 볼거리가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볼거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무궁한 역사를 가진 천년의 문화재입니다. 일반적으로 경주 여행하면 유명 순으로 여행하는 게 하나의 공식 아닌 공식이 되었습니다. 석굴암, 불국사 분황사, 첨성대니 국립경주박물관 경주최씨 고택 등 하면서 익히 알려지고 한 번씩 모두 들렀던 곳을 다시 여행할 때 계획을 세웁니다.







이번 경주여행에서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곳 보다는 덜 알려진 곳을 걸으면서 둘러보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경주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입니다. 문화재 안내판에는 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로 나와 있습니다. 이는 황금 들판으로 채워진 보문들 가운데에 보문사지가 있고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와 가까이 있기 때문으로 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보문동 또는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는 보문사 옛터와 실제적으로 보면 꽤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당시 보문사 터의 규모를 대강 짐작해 볼 수도 있지만 또는 다른 절터가 있었던지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당간지주는 보통 절 입구에 세웁니다. 절에서 불교 의식을 행할 때 부처님이나 보살의 공덕을 기린다든지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이라는 깃발을 다는 깃대를 말하는데 이를 당간이라 합니다.




연화문

당간지주는 당간을 세울 때 고정을 했던 돌기둥을 말합니다.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도 이런 맥락으로 세웠으며 보통 똑같은 크기로 밋밋한 형태의 두 기둥이 대부분인데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지주 끝에다 화려한 연화문을 장식한 게 특이하고 이채롭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당간지주로 높이는 146cm이며 이는 아랫부분이 매몰되어 다른 당간지주에 비해 작아 보이고 간대나 기단부의 구조가 어떠했는지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두 지주의 간격은 62cm이며 서로 마주 보고 있으며 사찰 창건과 함께 원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간지주 안쪽 면의 윗부분에는 너비 13cm의 크기로 구멍이 있는데 이는 당간을 고정했던 장식으로 보입니다. 또한, 당간지주의 양쪽 바깥 면의 윗부분에는 동그란 원안에다 지름 47cm의 팔엽연화문을 화려한 조각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제작연대는 8세기 중엽 이후로 추정하며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된 여러 개의 당간지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특이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합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말해 이 보문동(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의 소속 사찰은 인근의 보문사에서 세웠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합니다.











경주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 보물 제910호, 

경주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7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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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국립경주박물관 성덕대왕신종. 엄마를 부르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에밀레종, 성덕대왕신종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만나다. 


“에밀레, 에밀레”

“에밀레, 에밀레”

종을 치면 소리가 “에밀레 에밀레” 하며 꼭 어린이가 엄마를 부르는 듯해 그 종을 사람들은 에밀레종이라 불렀습니다. 이종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으며 처음에는 봉덕사에 있어 봉덕사 종이라고도하고 성덕대왕 신종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2016/10/14 -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 최치원의 사산비명 비석 귀부였던 국립경주박물관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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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7 -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국보 제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 덕동호로 수몰된 고선사터 삼층석탑과 비석받침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만나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경덕왕은 부왕인 성덕대왕의 생전 공덕을 기리고자 봉덕사에다 종을 만들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봉덕사신종은 그의 아들인 771년 혜공왕 때에 완성하는데 그게 성덕대왕신종입니다. 성덕대왕신종인 에밀레종은 종을 주조할 때 시주해온 어린아이를 종과 함께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성덕대왕신종


그 전설을 보면 경덕왕은 봉은사에 종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봉은사로 달려갔지만, 그때마다 종소리는 맑지 못하고 둔탁하며 깨지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내었습니다. 경덕왕은 실망하였고 주지 스님은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여 그렇다며 열성을 다하여 시주해올 것을 스님들에게 당부합니다. 경덕왕은 봉덕사 스님에게 정성을 다하여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당시 신라 백성들은 삶은 궁핍하여 매일 끼니 걱정을 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입에 풀칠할 건더기도 없는 생활이었는데 하루는 주지 스님이 시주를 받으러 한 농가에 찾아들었습니다. 그 여인은 주지 스님이 직접 시주를 받으러 왔는데 시주할게 없는 게 미안하여 “우리 집에서는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저 아이밖에 없습니다. 저 애라도 필요하시다면…….” 하면서 말끝을 흐렸습니다.


 

비천상

 

주지 스님은 깜짝 놀라며 “아이를 어찌 시주로 받습니까?” 하면서 돌아 나왔습니다. 그날 밤 주지 스님의 꿈에 “봉덕사의 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 아이가 필요하다”는 생생한 울림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잠을 깨었습니다. 고심 끝에 스님은 여인의 집으로 찾아가 그 아이를 시주로 받아 갈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여인은 깜짝 놀라며 눈물을 흘리면서 아이를 시주로 내어놓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다 부처님 뜻”이라며 합장을 하고 아이와 함께 돌아 나왔습니다. 그 뒤 봉덕사에는 새로운 종을 만들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아이를 넣어 종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리고 혜공왕은 물론이며 경주의 모든 백성이 종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알고 종소리를 들으려고 봉은사로 달려왔습니다. 왕과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스님은 종을 힘차게 쳤습니다.


 




그런데 청아한 어린이의 목소리가 엄마를 간절하게 부르는 듯 “에밀레, 에밀레” 하며 종은 슬픈 소리를 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소리를 듣고 아이가 엄마를 애타게 부른다며 ‘에밀레종’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하는 게 교리입니다. 그래서 에밀레종을 과학기술을 동원하여 종의 성분을 조사하였는데 뜻밖에도 사람의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고 아이를 넣어 만들었다는 에밀레종은 사실과 다르다고 밝혀졌습니다. 아마 성덕대왕신종의 신비로움을 강조한 게 아닌지 싶습니다.

 

용뉴와 음통





에밀레종의 크기를 보면 어마어마합니다. 높이가 333cm, 종구 너비는 227cm, 무게가 18.9톤의 초대형 종으로 국보제29호 지정 되었습니다. 또한, 종의 표면을 조각한 무늬를 보면 위쪽에는 보상화무늬와 모란당초무늬를 띠 모양으로 둘렀고 종신에는 4개의 유곽이 있으며 그 유곽안에는 각각 9개로 다 합쳐 36개의 유두가 있습니다. 흔히 유두는 연꽃봉우리와 비슷하여 연뢰라고도 합니다. 종을 치는 부분에는 두 개의 연화 당좌를, 또한 종신 가운데에는 손잡이가 달린 향로를 받쳐 들은 4구의 비천상은 연화좌위에 무릎을 꿇어 앉고 공양을 하는 모습입니다.



이는 우리나라 비천상의 대표라 할 만큼 아름답습니다. 성덕대왕의 극락왕생을 나타내는 듯한 비천상은 더욱 아름답고 정교한 모습을 하여 성덕대왕신종의 의미를 말하는듯합니다. 우리나라 사찰의 종은 불교를 의미하는 범자와 합해 범종이라 합니다. 범종의 소리는 부처님의 설법을 비유하며 종소리를 들으면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던 중생까지도 모두 구제받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종하면 한자로 쇠 금(金) 자와 아이 동(童)자를 합해 일반적으로 종(鐘)자를 쓰며 이는 중국과 일본의 종에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종은 쇠 금에 무거울 중(重 )짜가 합해진 새벽종·쇠북종(鍾)자입니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의 종은 우리 종과는 많이 다른데 종을 매다는 용뉴는 중국은 머리 둘 달린 용이라면 우리 종은 한 마리의 용이 머리와 다리를 힘차게 뻗치고 있는 형태입니다. 또한, 우리 종의 특징은 일본과 중국에는 없는 음통이 용뉴 옆에 붙어 있습니다. 성덕대왕신종은 상원사동종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범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빠트릴 수 없는 성덕대왕신종을 경주여행에서 만나보고 에밀레종의 의미도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에밀레, 에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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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국립경주박물관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 최치원의 사산비명 비석 귀부였던 국립경주박물관 숭복사 쌍거북 비석받침을 보다


경주여행에서 야외박물관이라는 경주 남산과 국립경주박물관을 보지 않고는 경주를 보고 왔다는 말을 하지 말아라 합니다. 그만큼 경주 남산과 경주박물관에는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습니다. 특히 국립경주박물관의 야외 전시장은 경주 시내에 흩어져 있던 많은 문화재가 관리 소홀로 도굴될까 싶어 옮겨 놓았는데 그 많은 석물 하나하나가 사연과 유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2016/10/13 -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 불두(부처머리). 1959년 사하라 태풍의 선물(?)이라는 경주 남산 철와골에서 발견된 초대형 불두를 경주 박물관에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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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7 -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국보 제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 덕동호로 수몰된 고선사터 삼층석탑과 비석받침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만나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2016/06/10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과 석조관음보살입상. 경주 중생사에서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과 국립경주박물관의 석조관음보살입상을 만나다.




경주 철와골 불두(부처머리), 경주 장항리 석조불입상, 경주 중생사 관음보살 입상 등 보면 볼수록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문화재입니다. 이번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에밀레종 인근에 안치된 경주 숭복사 쌍거북 비석 받침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귀부인 거북받침은 많이 봤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 쌍거북를 비석 받침으로 사용한 게 별로 없었습니다. 창림사지와 무장사지, 법광사지 등 겨우 손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온전한 형태가 이곳 숭복사 쌍거북 비석 받침이라 합니다. 먼저 숭복사 쌍거북 비석 받침이 발견된 숭복사지가 궁금합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원성왕의 능은 토함산 서동 곡사(숭복사)에 있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를 보면 숭복사는 원성왕의 명복을 빌었던 원찰입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최치원이 지었다는 사산비명의 탑비가 있었던 곳으로 그 최치원의 사산비명의 비석이 숭복사 쌍거북을 귀부로 사용했다 합니다.



왜! 귀부로 쌍거북을 받침으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창림사와 무장사, 숭림사는 모두 신라왕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던 사찰입니다. 창림사는 박혁거세가 신라 최초 궁궐터로 삼았던 곳이며 무장사는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이제 전쟁은 끝났다’며 모든 병기를 숨겼던 곳입니다. 896년 신라 진성왕 10년에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을 썼다는 사산비명은 국보 제47호인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국보제 315호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국보 제8호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와 이곳 ‘신라초월산대숭복사비’입니다. 사산비명중 유일하게 파손되어 비석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거북받침인 귀부와 반 토막 난 이수만 일제 강점기인 1930년경에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왔다고 하며 현재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신라초월산대숭복사비'도 현재까지 남아 있었다면 다른 사산비명과 함께 국보가 되는 것은 떼 놓은 당상인데 정말 아깝습니다. 그러나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함인지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에 최치원의 유일했던 사산비명을 숭복사지에다 새로 세웠습니다. 쌍거북인 귀부와 비문과 비신, 이수를 복원하여 세웠는데 비문의 글자체는 쌍계사의 진감국사 비문을 집자하였고 이수 또한 진감국사 탑비의 이수와 똑같은 모습으로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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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국립경주박물관 불두(부처머리). 1959년 사라호 태풍의 선물(?)이라는 경주 남산 철와골에서 발견된 초대형 불두를 경주 박물관에서 보다. 


강한 태풍이 우리에게 큰 피해를 주지만 또한 더러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도 하고 갑니다.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 중에서 우리 부모님 세대가 가장 끔찍했다 생각하는 태풍은 1959년 9월 17일 미명의 새벽에 한반도를 상륙한 사라호 태풍입니다. 최대풍속이 85m/s로 당시 사망과 실종자만 무려 849명과 이재민이 37만 명을 웃도는 한국 전쟁 이후 최대의 난리 아닌 난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라호도 큰 피해를 주고 가는 게 미안했던지 야외박물관이라는 경주 남산의 철와골에 대형 불두(부처 머리)만 덩그러니 남겨놓고 가버렸습니다.





 


이 부처 머리가 얼마나 큰지 높이는 153cm에 무게는 1.7톤으로 초대형 불두였습니다. 얼마나 크고 무거웠으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오는 것도 큰 문제였는데 군의 공병대까지 나서서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왔습니다. 불두를 자세히 보면 이목구비가 뚜렷한데 민머리에 틀어 올린 머리인 육계는 큼지막한 게 머리 위에 우뚝하고 이마에는 백호를 돋을새김했습니다. 또한, 반원형의 눈썹 하며 도톰한 눈두덩을 보면 마음씨 좋은 우리 옆집 아저씨의 모습입니다. 아쉽게도 오뚝했을 코는 사라호 태풍 때문인지 깨어졌으며 두툼한 입술은 옅은 미소가 베어져 나옵니다. 불두의 크기만으로도 석불상의 전체 크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입상이라면 10m 이상의 석불 상일 것이며 좌상이라도 최소한 6m 이상의 크기라야만 비례가 맞습니다.


 


그러나 철와골의 그 어느 곳에서도 이 불두를 지탱할만한 몸체를 찾을 수 없었다 합니다. 태풍에 의해 이곳으로 공중부양해서 떨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그저 신기할 뿐입니다. 그럼 과연 이 불두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지 추정을 하면 경주 남산의 열암골 마애불이 그 좋은 예입니다. 열암골 불상의 비례는 불두만 1/4인 4등신에 전체 높이는 460cm입니다. 즉 기도자의 시선을 고려하여 이목구비가 선명하며 뚜렷한 부처님의 머리를 크고 잘 보이도록 하고자 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인자한 얼굴이 기도하는 사람에게 가까이서 보인다면 더욱 숭배심이 생긴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뜻으로서 철와골의 부처가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아이러니하게 철와골에는 이 불두를 받칠만한 크기의 몸체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는 경주남산의 미스터리 중 하나입니다. 사고 만 치고 가는 게 미안해서 아마 사라호 태풍이 선물한 게 아닌지 싶습니다.


국립경주박물관 대형 불두 발견한 곳: 경주남산 철와골

경주 남산 철와골 불두 제작시기: 통일신라 8세기 말에서 ~9세기초


★국립경주박물관 주소: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전화: 054-740-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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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국립경주박물관 장항리 석조불입상. 도굴꾼에 의해 다이너마이트로 파괴된 장항리 석조불입상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복원된 상태로 만나다. 


국립경주박물관 입구를 들어서면 야외에 전시된 많은 불교 문화재가 있습니다. 통일 신라 불교예술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석불과 석탑 석등 등 수많은 석물의 부재를 전시 중인데 그중 유독 눈길을 끄는 상반신의 석불입상이 있습니다. 모습은 세월에 치여서 그런지 광배가 이리 깨어지고 저리 깨어지고 해 온전한 모습이 아닌데 실제로 조각 조각난 불상을 외과 수술로 봉합하여 지금은 흉물스러운 옛 모습은 사라지고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를 가득 담은 온전한 불상이 되었습니다.







아마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석상이며 일반 화강암과도 바위 색상이 틀려 보여 일반 석불이 황인종 부처님이라면 꼭 백인종 부처님일 정도로 전체적인 느낌이 특이한 모습입니다. 장항리 절터에서 옮겨온 석불은 이목구비가 너무나 뚜렷한 호남형의 불상으로 경주 양북면의 토함산 자락에 있었습니다.



 경주 장항리 사지는 사적 제45호로 지정되었으며 앞에서도 말했지만, 토함산에서 동쪽 사면으로 흘러내린 두 개의 계곡이 서로 만나는 곳에 있습니다. 두 계곡의 물은 대종천을 따라 감은사지 앞과 이견대를 지나 대왕암이 있는 동해로 흘러갑니다. 현재까지 절터의 이름은 확인된 바 없으며 그곳 동네 장항리의 이름을 따 장항리 사지로 부릅니다.



일제강점기 때 욕심 많은 도굴범이 무엇을 훔쳐가기 위함인지 모르지만, 다이너마이트로 처참하게 폭파해 버렸다 합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현재 장항리 동·서탑과 좌대 등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그중 서탑인 경주장항리오층석탑은 1987년 3월 국보 제23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서탑과 비교하면 동탑은 기단부가 남아 있지 않으며 파손상태가 심해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또한, 두 탑의 몸돌에 조각된 인왕상 조각은 매우 우수한 조각가의 섬세한 솜씨가 돋보이는 석탑입니다. 그와 함께 규모가 아주 큰 좌대가 인상적인데. 아래·위 2단입니다. 복련과 앙련의 연화 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진 상단과 그 아래 하단인 중대석은 8면에다 창문 모양의 안상을 만들었으며 4면에는 동물을, 또 다른 4면은 신장상을 조각하였습니다.



대강 짐작해도 이정도의 대좌라면 불상의 규모가 아주 큰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곳에 안치되었던 불상이 파괴되어 뒹굴던 것을 수습하여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갔습니다. 장항리 석조불 입상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간 경주국립박물관. 장항리석조불 입상은 높이 2.5m이며 통일신라 8세기 작품으로 추정합니다.



왜 하반신이 없는 상반신만 된 석조불상을 입불상이라 부르는지는 대좌에 남아 있는 불상을 세울 때 사용하는 촉구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석조불 입상의 전체적인 크기는 4.8m로 추정하는데 옛날의 척도를 보면 그 높이가 1장 6척입니다. 아주 큰 불상에 속하는데 이는 불교 경전에 석가모니 부처의 키가 1장 6척이라 하는데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광배는 부처님의 몸에서 빛을 발하는 듯 불꽃형상과 작은 부처님 등 하나의 섬세한 예술작품을 만나는 듯합니다. 지금의 모습은 깨어진 불상 조각을 하나하나를 시멘트나 접착제로 붙였으며 부족한 부분은 장항리 절터 주위에 있는 똑같은 바위를 찾아내어 복원하여 마감재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장항리석조불 입상은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석굴암의 본존불과 매우 유사합니다. 위엄 있는 표정에다 풍만하고 건강한 신체하며 사실적으로 나타낸 옷 주름 등의 조각수법에서 석굴암의 본존불과 같은 시기에 제작된 불상으로 보입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전시 중인 여러 불상 중에서 유독 돋보이는 부처인 장항리 석조불입상은 처참할 정도로 파괴된 상태라 문화재적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통일신라 예술의 가치를 충분히 느끼고 볼 수 있는 불입상입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주소: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전화:054-740-7500

입장료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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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과  석조관음보살입상. 경주 중생사에서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과 국립경주박물관의 석조관음보살입상을 만나다.  


경주 동쪽에는 작고 야트막한 산인 낭산이 있습니다. 낭산에는 신라 선덕여왕의 능이 있으며 또한, 문무대왕의 주검을 화장했다고 추정하는 능지탑이 있어 신라인에게는 경애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이곳 능지탑 안쪽에 신라 시대 사찰인 중생사가 단아하다 못해 쇠락한 채 그 뿌리만 남아 있습니다.





◆경주 남산 인근 가볼만한 여행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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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탑을 지나 중생사로 찾아들면 경내에는 창건 당시의 사격을 알 수 있는 온갖 부재가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당시의 중생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석탑의 부재는 물론이며 불상의 좌대 등 성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게 없을 정도로 깡그리 파괴되어 지금은 옛 영화만 짐작할 뿐입니다.





경주 중생사지의 각종 부재들
















중생사




그리고 중생사 한쪽 작은 바위에는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이 흔적만 겨우 남아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눈을 부라리며 세심하게 봐도 그 형체만 겨우 짐작할 뿐인데 그래도 문화재적 가치가 아주 높아 보물 제66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은 특이하게도 보살상과 신장상을 나란히 배치하였으며 이런 예는 좀체 찾기가 힘들다 합니다.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의 가운데에 있는 본존불을 자세히 보면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습니다. 양어깨를 감싸면서 내려온 옷은 고려 불화에서 지장보살과 매우 유사하며 머리와 몸에서 빛을 내는 모습에 손 모양은 생략되었습니다.









왼쪽의 신장상은 갑옷 차림에 오른쪽에 칼을 집고 있으며 한쪽 다리를 곧추세운 채 앉아 있는 유희좌를 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신장상은 두 손에 무기를 들고 있어 악귀를 쫓아내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모든 게 파괴된 와중에도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마애보살삼존좌상이라도 남아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듭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석조 관음보살 입상


중생사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삼소관음중생사’로 기록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관음보살의 전설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중국에서 시작됩니다. 중국에 황제의 사랑을 받은 궁녀가 있었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절세가인일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가졌던 모양입니다. 황제는 그림으로 궁녀를 길이길이 남기고 싶어 했고 어느 날 화가를 섭외하여 궁녀를 그리게 했습니다. 화가의 실력도 만만치 않아 아름다운 미모를 완벽할 정도로 똑같이 그려 하늘도 시샘을 했는지 그만 실수로 붓을 떨어트렸습니다.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속담처럼 그게 하필이면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인 배꼽 아래에 붉은 점을 찍고 말았습니다. 화가는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고칠 수 없자 그냥 황제에게 그림을 받쳤습니다. 황제는 감탄하며 그림을 찬찬히 보고 내려오다 배꼽 밑의 붉은 점을 보고는 눈동자를 고정하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자신만이 궁녀의 배꼽 밑에 붉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닌데 화가 난 천자는 화가를 가두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에 재상은 황제를 달래었고 황제는 화가에게 어젯밤 자신이 꾼 꿈을 똑같이 그려오면 죽음만은 면해주겠다 하였습니다. 이에 화가는 십일면관음보살을 그려 황제에게 바쳤고 황제는 깜짝 놀라며 자신이 꾼 꿈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아 감옥에서 풀어주었습니다. 화가는 상을 주질 못할망정 자신을 죽이겠다는 황제를 보고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해서 박사 분절에게 신라는 불교를 아주 숭상한다는데 그곳에 가서 나의 재주인 불화를 그리고 싶다며 함께 신라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화가는 신라 서라벌에 들어와 중생사에 머무르게 되었고 자신이 꿈에서 본 관음보살상을 조각하였는데 그 관음보살상이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 중입니다.





화가가 누구인지 매우 궁금하지만 일연은 이 화가의 이름은 알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무제 때의 유명한 불화 화가인 ‘장승요’가 아닐까하고 추정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중생사의 관음보살은 여러 이야기가 전하는데 관음보살에게 기도 끝에 사내아이를 낳았지만 석 달이 되지 않아 후백제의 견훤이 쳐들어왔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피난을 갈 수 없어 관음보살 밑에 숨기고 떠났는데 백제군이 물러간 뒤 아이를 찾아가니 아이는 금방 목욕한 듯 촉촉하였고 입에서 젖 냄새가 났다 합니다. 후에 이 아이는 대성하여 큰 인물이 되었다 합니다.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삼국유사의 ‘삼소관음중생사’에 전합니다. 왜 관음보살입상이 경주박물관에 전시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면 관음보상상의 의문점이 풀립니다. 처음 발견 당시에는 머리와 몸체 좌대가 모두 따로따로였습니다. 보살상의 머리는 먼저 국립경주박물관에다 옮겨놓았고 몸체는 지금의 경주 낭산 서쪽인 능지탑 근처에 반쯤 묻혀 있었던 것을 찾아내었 습니다. 그때 인근의 노인장이 ‘이 불상의 머리는 경주박물관에 가져갔으며 그 모양은 여느 불상과 달리 길쭉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문화재 조사관은 보살 머리만 전시 중이던 박물관에 옮겨 몸체를 맞추었고 1997년 4월에는 몸체를 찾았던 근처에서 연꽃 대좌를 발견하여 지금의 석조 관음보살입상의 완벽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석조관음보살입상이 발견된 곳이 ‘중생사지’입니다. 이 관음보살은 독립된 예배대상으로는 신라 시대에 조성된 최대의 크기이며 높이가 376cm 통일신라 8~9세기에 조성되었습니다. 이 불상을 관음보살로 보는 이유는 관음보살상은 대게 보관에 작은 불상인 화불(化佛)을 새겼으며 한 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는데 이 보살상은 마모가 심하지만, 보관에 화불을 새겼고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관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자비를 베풀며 실천하는 보살로 자비를 상징합니다. 오래전부터 사부대중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했던 관음보살입니다. 경주 중생사의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과 국립경주박물관을 여행하면서 중생사지에서 옮겨온 석조 관음보살 입상은 꼭 챙겨보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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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사마소. 출입문을 닫아 까치발로 목을 쭉빼고 눈도장만 찍었던 젊은 선비들의 강학소 경주 사마소 여행. 


경주 최씨고가 앞에는 경주 사마소(司馬所) 건물이 이건 되어 있습니다. 사마소 많이 들어봤던 이야기로 ‘사마소 유생들이 궁궐밖에 모여 상소 어쩌고 저쩌고~~’조선시대 사극드라마에서 꼭 빠지지 않는 대사입니다. 그럼 사마소는 도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합니다.







 

사마소는 조선시대에 과거에 합격한 그 지방의 생원과 진사들이 유학을 가르치거나 토론하던 장소였습니다. 고려말과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지방수령에 자문을 하던 유향소를 당시 훈구파들이 장악했는데 그에 맞서서 사마시 출신의 젊은 유생들이 만들었습니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아주 좋은 의미로 친목 도모와 학문연구 정치토론 등 향리의 교화와 지방관청의 행정 보조를 자임하며 아주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차차 세력화가 되면서 폐단이 생기게 되었고 유향소처럼 지방관청의 업무 간섭은 물론이고 심지어 수령을 능멸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또한, 권력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취하고 백성을 마구 잡아들여 벌을 주는 등 행패도 서슴지 않아 이를 보다 못한 류성룡이 선조에 사마소 폐지 상소를 올렸을 정도였습니다. 경주 사마소는 처음 세워진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1741년인 영조 17년에 다시 세워 풍영정이라 불렀습니다.


병촉헌.


그런데 사마소 현판과 풍영정 현판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는데 필자가 찾았을 당시 아마 사마소 수리가 있었는지 두 현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마소 현판은 1762년 부윤이었던 홍양한의 글씨이며 병촉헌은 1832년에 생원 최기영이 지었습니다.


 

사마소는 경주향교와 옛 월정교 터 인근에 세워져 있었는데 1984년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경주최씨 고가를 둘러보기 전에 이곳을 찾았는데 출입문이 꼭! 잠겨 있어 까치발로 눈도장만 찍어 정말 많은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경주 최씨 고가와 같이 경주를 찾는 많은 관광객에게 개방하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1985년 8월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호 지정


 

그리고 사마소 담벼락에 영광대란 안내판이 있습니다. 영광대는 그 옆에 놓인 돌기둥을 말하며 처음에는 사마소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1860년 경주 선비들이 하천에 나뒹굴던 월정교 석재를 모아 대를 쌓아 영광대라 불렀으며 이는 송나라 주희의 시인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한다”는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에서 따왔습니다. 뜻을 풀이하면 “책을 읽으면 그 속에 성현의 아름다운 말과 잘못하지 않게 타일러 주의를 시키는 글귀가 담겨 있음”을 의미한다 합니다.


◆경주 남산 여행지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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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6 -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힐링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용장사곡석가여래좌상


2013/03/26 - (경북여행/경주남산여행)남산 최고의 자리에 있던 삼화령의 연꽃대좌 미륵불은 어디로 사라졌나


2016/04/29 - (경북여행/경주여행)능지탑지. 문무대왕 화장터로 알려진 경주 능지탑지 여행. 능지탑지


2016/04/28 - (경주여행/경주남산여행)동남산 서출지와 이요당, 연과 베롱나무가 꽃이 필때 최고 이름값을 한다는 1500년된 서출지와 조선시대 정자 이요당 여행.


2016/04/26 - (경주여행/남산여행)염불사지 삼층석탑. 은은한 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린다는 경주 남산리 염불사지 삼층석탑 여행하기.


2014/11/23 - (경북여행/경주여행) 경주 최부자 충의당. 정무공 최진립장군 고택 충의당 찾아가기


2014/09/04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용산서원. 정무공 최진립장군 용산서원, 한옥 고택 숙박도 할 수 있습니다.


2013/09/07 -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입을 닫고 살기 위함인지 마스크를 한 열암곡석불좌상.열암곡석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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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능지탑지. 문무대왕 화장터로 알려진 경주 능지탑지 여행.


경주 능지탑지는 낭산 기슭에 있으며 통일신라 시대에 쌓은 건축물로 능지탑, 능시탑, 연화탑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능지탑지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죽어 감포 앞바다 대왕암에 모시기 위해 시신을 화장했던 곳으로 추정하는 장소입니다. 그 이유를 보면 발굴조사를 하면서 소조불상 조각이 출토되어 탑묘로 보는 이도 있지만, 내부의 그을린 흔적과 주위에 사천왕사 선덕여왕과 신문왕릉 등 당시 유적을 함께 보면 문무왕의 화장터로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합니다.





◆통일신라 문무대왕과 관계된 여행지를 모았습니다.


2014/05/27 - (경북여행/경주여행)동해의 신비 경주주상절리 파도소리길 걷기, 읍천항벽화마을,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감은사지 해파랑길 걷기


2014/05/25 - (경북여행/경주여행)동해의 꽃으로 부르는 경주 양남 부채꼴 주상절리.독특한 경주주상절리를 보면서 누구나 감탄하게 됩니다.주상절리


2014/05/21 - (경주여행/감은사지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여행) 호국용 문무대왕의 혼이 깃든 경주 감은사지 이견대 대왕암 이른 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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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0 - (경북여행/경주여행)왕의길-신문왕 호국행차길. 신문왕이 되어 왕의 길인 추원마을~기림사 둘레길을 걸어보세요.


2015/01/06 - (경북여행/경주여행) 양북면 함월산 기림사 여행. 경주의 천년사찰 왕의 길 기림사를 만나다.


2015/06/06 - (경북여행/경주여행)선무도 본산 골굴사. 아름다운 석불인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골굴사에서 힘자랑하지 말라" 선문도 골굴사 여행하기


2011/11/06 - 호국용 문무왕의 전설인 용문바위와 공양왕릉의 슬픈이야기


 


 

백제·고구려·신라의 삼국은 신라 태종무열왕인 김춘추의 뒤를 이은 문무대왕에 의해 삼국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 먼저 문무대왕을 알기 위해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백제를 치기 위한 원병을 청하지만 고구려는 신라 진흥왕이 차지한 고구려의 옛 땅인 한강유역 반환을 조건으로 내걸어 동맹은 파기되었고 어쩔 수 없이 당나라와 동맹을 맺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당 연합군입니다. 일부는 나당과 연합하여 통일을 이루었다 하여 진정한 삼국 통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빌려 먼저 백제를 치고 나면 고구려까지 칠 계획을 세웠습니다. 당나라 고종은 소정방에게 13만의 병력을 출병시켜 지금의 백마강 기벌포에 상륙하여 사비성을 공격하였고 태종무열왕의 명을 받고 출병한 김유신이 이끈 5만의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 장군이 이끈 5천의 결사대와 싸웠지만 죽기를 각오로 싸우는 백제에 4번이나 패했습니다.


 

 

그러나 화랑 출신인 관창에 의해 신라군은 전열을 제정비하여 백제군과 일전을 벌여 계백과 백제군은 전멸했습니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도 사비성으로 진격하자 의자왕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나·당 연합군에 항복 하고 멸망하였습니다. 이게 660년입니다.


 

 

그리고 667년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 공격에 나서게 되는데 그 당시 고구려는 중원을 호령하던 호랑이었지만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치면서 숱한 전쟁을 치러 그 후유증으로 종이호랑이로 전락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강력한 통치권력을 가진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세 아들과 동생은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힘겨루기를 하였는데 입지가 좁아진 장남 연남생은 당나라에 백기 투항하고 연개소문의 아우인 연정토도 신라에 12개의 고구려성을 받치고 항복해버렸습니다. 나당연합군은 이런 기회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당나라는 연남생을 길잡이로 하여 5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신라도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와 합세하여 평양성을 공격했지만 1여 년 동안 끈질기게 버티는 고구려군의 저항에 고전하다 668년 9월 마침내 평양성을 탈환하고 보장왕은 항복하였습니다.


 

 

 

신라와 당나라는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탈환했지만, 이들의 동맹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삼국이 통일되면 당나라는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 주기로 하였는데 그 약속을 먼저 파기하면서 신라를 공격하여 속국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군을 지원하며 당나라의 힘을 서로 분산시키게 만들었고 마침내 백제땅에서 웅진도독부를 없애고 완전히 당나라군을 몰아내었습니다. 그다음 675년 신라는 매소성 전투에서 당나라 20만 대군을 맞아 승리하였고 승기의 주도권을 잡은 신라는 평양의 안동도호부까지 요동성으로 몰아내고 667년 마침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당나라까지 물리친 문무왕은 668년 56세로 죽으면서 시신을 화장해 동해에 장사지내게 유언을 남깁니다.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까지 몰아냈지만 정작 마음 한구석에는 노략질을 일삼는 바다 건너 왜구가 걱정이었습니다. 문무왕은 불력으로 서라벌을 왜구로부터 막고자 왜구의 주 침입통로인 동해구에 감은사를 짓게 했습니다. 그러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자 신문왕은 그의 유조대로 낭산의 능지탑에서 화장하여 감은사 앞 바위에다 해중릉을 만들었습니다.


 

그에 관한 <삼국사기 권7 문무왕 21년조>에는 “내가 죽거든 열흘 후 창고 문 밖 뜰에서 인도 불교의식에 따라 검소하게 화장하라”하였는데 ‘창고 문 밖’이 지금의 낭산 능지탑지 일대라 합니다. 이전에는 문무왕의 화장터를 원성왕릉인 괘릉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조사과정에서 지금은 능지탑지로 완전히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문무왕의 세자 신문왕은 부왕 문무왕을 동해에 장사지내고 감은사를 완공하였습니다. 감은사는 용으로 변한 문무왕이 동해구로 따라 올라와 감은사 금당지 아래 석굴에서 휴식을 하였다 하며 신문왕이 이견대에서 하늘로 승천하는 용에게 받은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는데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만파식적’입니다. 문무왕은 죽어서까지도 신라를 시키고자 했나 봅니다.


 

 

그러나 현재 허물어져 있던 탑의 부재를 짜 맞추어 2층의 능지탑으로 복원했지만, 원래는 5층으로 된 능지탑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직도 주변에 많이 남아 있는 탑의 부재를 보고 문화재에 문외한인 저도 복원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하루빨리 원래 모습을 되찾았으면 합니다.


 

 남아 있는 능지탑지 부재들...

연화탑으로 부르는 능지탑은 연화문이 새겨진 석재가 기단과 탑신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단의 사방에는 12지신상을 배치했는데 현재 뱀상 호랑이상 용상은 사라지고 없는 상태입니다. 경주 동남산을 보고 나오면서 들렀던 능지탑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던 문무대왕의 호국용에 관한 전설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하니 옛 문화재를 여행하는 저로서도 능지탑지는 더욱 의미 있는 여행이었습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34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이제 또 다른 경주 여행지를 돌아보기 위해 출발합니다.



경주능지탑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6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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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남산여행)동남산 서출지와 이요당, 연과 베롱나무가 꽃이 필때 최고 이름값을 한다는 1500년된 서출지와 조선시대 정자 이요당 여행. 


봄이 시작될 무렵인 4월에 다녀왔던 양산 경주여행 이번 포스팅은 동남산의 서출지와 이요당입니다. 서출지와 이요당은 오래전에 가을이 시작될 때 한번 여행을 했으며 이번의 봄 여행은 또 다른 재미를 주었습니다.





◆서출지와 이요당 주위 가볼만한 여행지◆


2016/04/26 - (경주여행/남산여행)염불사지 삼층석탑. 은은한 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린다는 경주 남산리 염불사지 삼층석탑 여행하기.


2011/01/12 - (경주여행/남산 신선암 마애불)신선암 마애불에서 기도하는 보살님


2012/09/24 - (경주남산여행)보리사 마애석불. 잔잔하며 엷은 미소가 아름다운 보리사 마애석불


2012/11/01 - (경주남산여행)살인미소 짓는 부처님의 모습이 경주남산 보리사 석불좌상으로 태어나다. 미륵곡석조여래좌상


2013/02/21 -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신선암 마애보살 반가상. 신선이 빚었을 것 같은 우아한 모습




 

처음 서출지를 찾았을 때는 여름 뒤라 그런지 연잎이 서출지를 완전히 뒤덮고 있어 여름철 신록의 맛을 완전히 느꼈다면 이번 여행은 두꺼운 이불 같은 묵은 낙엽을 완전히 털어내고 서출지에 새봄에 맞는 새 이불을 덮을 준비를 하는 듯 연못이 말끔히 정돈된 상태였습니다.


 

서출지는 까마귀 전설이 있습니다. 왜 서출지에 까마귀 전설인지 궁금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신라 21대인 소지왕 때입니다. 어느 날 소지왕이 궁 밖을 나왔다가 어쩌다 보니 남산 아래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까마귀와 쥐가 나타났는데 쥐가 소지왕에게 하는 말이 “까마귀가 날아가는 쪽을 따라가라.” 하였습니다.


 

 

 

소지왕의 명을 받은 신하는 까마귀를 따라가는데 서출지 인근에서 멧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고 그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때 연못에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주면서 소지왕에게 꼭 전해 달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소지왕은 “봉투를 보면 두 명이 죽을 것이요 만약에 보지 않으면 한 명이 죽는다”는 글을 보고 소지왕은 생각하기를 편지를 보고 두 명이 죽는 것보다 차라리 보지 않고 한 명이 죽는 게 나은 생각이라며 봉투를 뜯어보지 않을까 했습니다.


 

 

 

신하가 봉투를 보고 말하기를 “두 명은 백성을 말하며 한 명은 임금을 뜻한다”며 소지왕에게 봉투를 뜯어 볼 것을 고하였습니다. 소지왕은 봉투 안의 편지에 화살로 거문고 통을 쏘라는 뜻인 ‘사금갑(射琴匣)’을 보고 궁궐로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 통을 쏘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악’하며 외마디 비명이 나 통 안을 보니 궁녀와 승려가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소지왕은 그들을 잡아 참형시켰고 서찰을 받아 임금의 목숨을 구한 연못이라며 서출지(書出池)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서출지에는 까마귀가 임금의 목숨을 구했다며 정월 보름에 감나무 밑에 찰밥을 묻어 까마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제삿밥을 주는 풍습이 생겼는데 이는 ‘오기일(烏忌日)’로 지금도 경주에는 그 풍습이 남아 있다 합니다.


 

 

서출지는 임씨 집성촌인 경주시 남산동에 있습니다. 연못의 둘레는 약 200m이며 조선 현종 5년(1664년)에 임적이라는 분이 서출지 연못에다 ‘ㄱ'자 모양을 한 정자를 짓고 이요당 현판을 걸었는데 남산과 연못의 운치가 너무나 좋아 그래서 이요당(二樂堂)이라 했던 것 같습니다.


 

 

 

 

서출지와 이요당은 연꽃과 꽃이 피면 백일 동안 간다는 백일홍이 필 때면 최고의 이름값을 할 정도로 볼만합니다. 그 시기에는 서출지가 전국 사진동호인의 출사 일 번지로 몸값이 제일 비싸집니다. 그때쯤 저도 삼각대를 들고 다시 한 번 서출지와 이요당 여행을 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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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남산여행)염불사지 삼층석탑. 은은한 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린다는 경주 남산리 염불사지 삼층석탑 여행하기. 


야외박물관이자 문화재의 보고로 부르는 경주 남산은 파도파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많은 문화재가 있습니다. 경주 남산 여행을 계획하면서 어떤 문화재와 다시 만날까 싶어 떠나기 전부터 내 가슴은 한참을 설레었습니다.




◆경주 남산 염불사지 주위 가볼만한 여행지◆


2012/09/24 - (경주남산여행)보리사 마애석불. 잔잔하며 엷은 미소가 아름다운 보리사 마애석불


2012/09/28 - (경주남산여행)장인의 조각솜씨에 경탄, 화강암을 시루떡이라 생각했는지-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2012/11/01 - (경주남산여행)살인미소 짓는 부처님의 모습이 경주남산 보리사 석불좌상으로 태어나다. 미륵곡석조여래좌상


2012/11/05 - (경주남산여행)각기 다른 동,서탑의 모양이 특이한 경주 남산리 삼층 석탑


2013/02/04 -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신발견 마애불을 보면 신이 있다고 믿을 수 밖에... 열암곡 신발견 마애대불


2012/09/30 - (경주여행)경주남산서출지. 추석날 고향 같은 분위기가 좋은 서출지와 이요당


2013/02/21 -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신선암 마애보살 반가상. 신선이 빚었을 것 같은 우아한 모습


2011/01/12 - (경주여행/남산 신선암 마애불)신선암 마애불에서 기도하는 보살님



 

이번에는 동남산 자락에서 필자가 처음 만나는 전 염불사지 삼층석탑입니다. 워낙 문화재가 많아 염불사지 삼층석탑은 따로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으며 절터인 염불사지만 사적 제31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전 염불사지 동탑

 

염불하면 다 아시지요.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외우는 독경 소리를 말합니다. 많은 사찰 이름에서 염불사는 사실 생소한데 이곳에는 삼국유사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어느 스님이 하루에 몇 번씩 시간을 정해 놓고 염불을 외우셨습니다. 그 소리가 서라벌 내 동서남북 360방 17만 호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목탁을 두드리며 나무아미타불을 외우셨습니다. 매일 스님의 독경 소리를 듣다 보니 사람들은 그를 공경하게 되었고 스님을 염불사(念佛師)라 불렀습니다. 그 후 스님이 입적하자 흙으로 스님의 소상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에 모시게 되었고 스님이 목탁을 치며 나무아미타불을 외웠던 동남산 아래 피리사(避里寺)를 염불사(念佛寺)로 고쳐 부르며 스님의 극락왕생을 빌었습니다.”


 전 염불사지 서탑

 

전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모두 무너져 있었고 탑재는 도지동의 이거사지 삼층석탑의 1층 옥개석과 조합하여 1963년 불국동 구정광장에 삼층석탑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다 2008년 1월 염불사지 삼층석탑을 복원하고자 해체하였고 2007년 6월부터 시작된 복원작업은 2009년 1월에 동·서 쌍탑인 삼층석탑을 복원 완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서탑에는 사리장엄구를 봉안했던 사리함이 다른 석탑에서 볼 수 없는 2개가 들어 있었고 3층 탑신의 방형 사리공이 투공되고 탑재 등을 종합해보면 전 염불사지 삼층석탑은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염불사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1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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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선무도 본산 골굴사. 아름다운 석불인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골굴사에서 힘자랑하지 말라" 선문도 골굴사 여행하기


중국에는 소림사가 있다면 한국에는 선무도의 총 본산인 골굴사가 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골굴사에서 힘자랑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무예를 갖춘 스님들이 수련하는 곳입니다.



가끔 중국 무협영화에서 봄 직한 고승들의 수련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골굴사는 역시 여느 절집과 조금은 다르게 들뜬 분위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끼게 했습니다.




골굴사에는 선문화관 등 선무도 수련을 하는 스님과 수련생의 모습을 종종 만나며 또한, 텔레비전에서 붕붕 몸을 날려 계단을 오르는 수련장면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런 선무도의 본산은 과연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여 찾아갔습니다.



골굴사는 경주에서 동해안 감포로 가기 위해서는 토함산과 함월산 사이의 추령을 넘습니다.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따라 이어진 4번 국도는 경주에서 아름다운 드라이버 길로 알려져 사계절 많은 관광객이 찾아듭니다.



경주 시내에서 20km쯤 달렸다면 만나는 골굴사는 이웃한 기림사와 함께 함월산 불교 유적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기림사 사적기를 보면 골굴사는 불교문화가 가장 왕성했던 신라 시대 6세기 천축국인 인도에서 온 광유선인이 함월산 아래 기림사와 함께 세운 사찰입니다.



골굴사 마애여래석불과 12처의 석굴로 가람을 엮어 법당으로 사용한 국내 유일의 석굴사원으로 기림사와 함께 불국사보다 200년이 앞서 창건됐습니다. 인도 사원의 석굴 양식을 따 른 골굴사는 용회암 암반에 마애불을 조성하고 목조와가를 올려 법당으로 사용했습니다.



지금 그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바위에 뚫려 있는 구멍의 흔적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겸재 정선의 “골굴 석굴도”와 “토함산 산중일기”를 쓴 정시한의 기행문에도 당시 기와를 얹은 석굴 사원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병풍을 보는 것 같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골굴사 일주문을 지나면 염주를 목에 걸고 있는 진돗개 강아지 동상을 만납니다. 겨울에 태어나 동아라고 불렀고 1990년에 골굴사와 인연이 닿았습니다. 강아지 때부터 골굴사를 찾는 신도와 관광객의 사랑을 독차지했는데 동아의 행동은 보통 개와 달리 일반대중과 함께 새벽 예불과 참선, 탑돌이를 따라 하며 기도를 위해 골굴사를 찾는 신도를 안내했습니다.



강아지의 기괴한 행동에 국내외 방송과 언론에 노출되어 유명세를 타기도 했지만, 더욱 신기한 것은 자기 죽음을 미리 알았는지 동아는 홀연히 사라졌다가 오륜탑 인근에서 그를 찾았고 모든 불자는 동아 보살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골굴사에서 선무도와 함께 가장 유명한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을 보기 위해 계단을 올랐습니다. 골굴사의 주존 불로 동남쪽을 향한 암벽 4m 높이에 새겨져 있습니다. 보물 제 58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문화재 안내판을 보면 “높다란 상투 모양의 머리와 뚜렷한 얼굴, 가는 눈, 작은 입, 좁고 긴 코의 독특한 이목구비와 얼굴 전체에 웃음을 띤 형태 등을 보면 신라 9세기 불상의 모습”을 나타냈다 합니다. 본전불 뒤 광배는 불꽃무늬를 형상화 했습니다. 








경주 골굴사 마애여래좌상





온화한 미소를 띤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을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도 편안해지는 것 같습니다. 동해를 바라볼 수 있는 시원한 조망에 자리한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을 보고 관음암과 대적광전을 둘러보았습니다. 마애불을 떠받치고 있는 암반은 상상속의 동물인 용의 머리를 닮은 것은 아닌지...... 용머리가 꼭 이 모양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륜탑





◆경주 골굴사 경내도◆

골굴사 홈피 캡쳐

◆경주 골굴사 찾아가는 길◆

골굴사 홈피 캡쳐

◆경주 골굴사 교통편◆

골굴사 홈피 캡쳐

◆경주 골굴사 주소: 경북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산 304

경주 골굴사 전화:054-744-1689


2015/01/06 - (경북여행/경주여행) 양북면 함월산 기림사 여행. 경주의 천년사찰 왕의 길 기림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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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3 - (경북여행/경주여행) 경주 최부자 충의당. 정무공 최진립장군 고택 충의당 찾아가기


2014/09/04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용산서원. 정무공 최진립장군 용산서원, 한옥 고택 숙박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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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4 - (경북여행/경주여행)그림이 있는 어촌마을 읍천항 갤러리. 읍천벽화마을 나드리 너무 좋아요.


2014/05/21 - (경주여행/감은사지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여행) 호국용 문무대왕의 혼이 깃든 경주 감은사지 이견대 대왕암 이른 봄여행


2013/09/07 -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입을 닫고 살기 위함인지 마스크를 한 열암곡석불좌상.열암곡석불좌상


2014/07/28 - (경북맛집/경주맛집)보문단지맛집 전통맷돌순두부. 콩으로 만든 순두부가 너무 맛있는 보문호 맛집 전통맷돌순두부.


2013/09/11 - (경북맛집/경주맛집)경주남산맛집, 오리맛이 살아 있네 약천한방생오리전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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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 양북면 함월산 기림사 여행. 경주의 천년사찰 왕의 길 기림사를 만나다. 


경주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습니다. 그 중 단연 경주를 대표하는 것은 불교문화재입니다. 이번 경주 여행에서는 신문왕 호국행차 길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함월산 기림사입니다.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장례를 모시기 위해 감포 대왕암으로 넘든 고갯길이며 이견대에서 동해의 해룡으로 변한 부왕에게 만파식적과 옥대를 받기 위해 넘든 길 또한 이 길입니다. 이곳 기림사는 신문왕의 행차길을 모두 보았든 사찰로서 경주 양북면 함월산 자락 도통골에 있습니다.

 


그럼 먼저 기림사의 유래를 알아보겠습니다. 기림사는 신라의 원효스님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찰입니다. 창건은 인도의 천축국에서 온 광유성인이 세웠는데 임정사라 불렀습니다. 옛날 인도 범마라국의 임정사라는 절에 광유성인이 오백제자와 함께 설법을 하며 중생을 제도하였습니다. 또한 서천국의 400여개 소국을 다스리는 사라수대왕은 정사보다는 무상도를 찾고자하였습니다. 이에 광유성인은 사라수대왕를 임정사로 초청을 하였습니다. 먼길 이라 다리가 아픈 원앙 왕비는 장자의 집에 비녀로 팔고 왕은 임정사에서 왕생계를 외우며 수행에 정진했습니다. 그 후 왕비는 장자의 집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극락’을 뜻하는 ‘안락국’으로 이름을 짓고 7년 후 부왕인 사라수대왕을 만나게 됩니다. ‘안락국’은 부왕의 가르침에 따라 광유성인의 제자가 되고 스승은 안락국에게 해동의 남쪽 지방에 명당자리가 있으니 그곳에다 절을 세워 불법을 전하고 중생을 교화하라며 안락국에게 떠날 것을 명합니다. 안락국은 스승이 가르쳐준 계림국의 명당 터인 이곳에 암자를 짓고 임정사라 하였습니다. 그 후 신라의 원효대사가 절을 확장하고 신라최초의 절이라는 뜻으로 부처님 당시 최초 절인 ’기원정사‘의 이름을 따 기림사라 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불교의 전래를 보면 고구려의 아도화상이 신라 눌지왕때인 417년에 처음 구미의 냉산 도리사에서 신라에 불교가 전파되었는데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를 일찍 받아들였지만 신라는 불교를 배척하다 아도화상에 의해 처음으로 들어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에 들어와 인도에서 허왕후와 장유화상의 우리나라에 불교를 처음 전래하였다는 남방전래설을 주장하는 분도 있으니 정확한 고증이 필요한 듯합니다. 필자는 뭐 기림사를 구경하기 위해서 온 것이니까 골치 아픈 문제는 생략 하겠습니다.



먼저 기림사 매표소를 통과합니다. 주차장이 어마어마 하여 사찰의 규모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본격적인 기림사 구경이 시작됩니다. 현판에는 ‘함월산 기림사’라 되어 있습니다.



기림사 본존불이 모셔진 대적광적은 오른쪽이며 삼천불전과 유물전시관은 왼쪽으로 갈라집니다. 필자는 대적광전이 있는 오른쪽으로 갑니다.


곧 무시무시한 사천왕이 문을 지키는 천왕문입니다. 아마 절 안으로 들어오는 사악한 무리들과 잡귀 등 모든 나쁜 것은 이곳에서 들어 올 수 없습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여 천왕문을 들어섭니다.






기림사는 창건당시부터 대적광전을 건립하여 삼신여래를 봉안하였고 약사여래불을 모신 약사전과 석조오백나한상을 모신 응진전, 삼층목탑과 정광여래사리각, 진남루와 무량수전 등이 건립되었다합니다. 그러나 사리각은 없어지고 삼층목탑은 초석만 남아 있습니다.

 


먼저 기림사의 문화재는 보물 제833호인 대적광전과 보물 제959호인 ‘금자사경’, 유물전시관에 있는 건칠보살상은 보물 제415호입니다. 또한 응진전 앞의 삼층석탑과 진남루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습니다. 기림사는 ‘한국33 관음성지’로 전통 사찰 제2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왼쪽으로 범종각이 올려다 보입니다. 정면에는 새롭게 복원과정을 거쳐 단장한 진남루가 있습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1호.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지만 기림사는 임진왜란 때 수군과 승병의 근거지가 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만 할 뿐입니다. 앞면 7칸에 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면 ‘사람인(人)’자 형태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우물마루를 깔았고 판벽에 창호가 설치되었으나 사용용도에 의해 지금은 창호가 바뀌면서 원형이 알 수 없는 상태라 합니다 





기림사 응진전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아라한을 모신 건물이며 신라 선덕여왕때 처음 지어진 것으로 전하지만 조선후기에 다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앞면 5칸, 옆면2칸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입니다.




고려시대 때 지어진 삼층석탑





삼층목탑 초석터





기림사 약사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2호입니다. 1600년대 이전 건물로 추정을 하며 조선 효종 5년인 1654년에 중창되었고 숙종 4년인 1678년에 약사법당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얕은 기단 위에 앞면3칸 , 옆면1칸으로 옆면에서 본 지붕은 사람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입니다. 지붕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다포양식이며 다른 건물과 다르게 옆면이 아닌 정면에 문을 둔 것이 특이합니다.





기림사를 대표하는 본전인 대적광전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입니다. 643년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그 후 조선 인조 7년(1629년)과 정조 17년(1793년) 등에 고쳐 지어 졌습니다. 1862년인 철종 13년에 기림사 대화재 때 유일하게 화를 면했던 건물입니다. 앞면 5칸, 옆면 3칸,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다포식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보물 제833호








이외에도 기림사는 삼천불전, 관음전, 삼성각, 명부전, 유물전시관, 매월당 등 부속건물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기림사 뒤 임도를 따라 왕의 길 입구를 조금 지나면 용연폭포가 나타납니다. 이 폭포는 신문왕이 받아온 옥대의 용 비늘 장식을 떼어 물에 담그니 용으로 변해 승천을 하면서 폭포와 연못이 생겼는데 주위와 함께 도통골의 비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관음전



삼천불전




명부전

삼성각






용연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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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왕의길-신문왕 호국행차길. 신문왕이 되어 왕의 길인 추원마을~기림사 둘레길을 걸어보세요. 


신라시대 이전부터 조선시대 말기까지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감포와 장기로 넘어가던 옛길은 지금의 도로인 추령고개라 생각한다. 일반적인 고갯길은 추령으로 넘어 다녔던 것으로 추정을 하지만 공식적인 행사를 위해 넘어 다녔던 길은 추령 대신 완만한 수렛재를 넘어 기림사 방향으로 다녔다.


용성국의 석탈해가 신라로 잠입할 때 이 길을 이용하였고 신문왕이 삼국을 통일한 부왕 김춘추의 유언을 받들고 감포 앞바다 대왕암에 장사를 지내기 위해 넘어 갔던 길 또한 수렛길이다. 신문왕이 김유신과 동해의 용이 된 부왕에게 옥대와 만파식적을 받기 위해서도 이 길로 넘어 다녔다 하니 현재는 왕의 길로 통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등 전란 때는 이 길을 통해 내륙 침입의 교두보가 되기도 하였다. 모차골과 수렛재를 지나 불령을 잇는 길을 경주시에서 새롭게 조성하여 신문왕 호국 행차길인 ‘왕의 길’로 명명하였다. 겨울을 반기는 12월에 잠깐 짬을 내어 걸어보았다.



신문왕 호국행차길인 왕의 길은 먼저 4번 국도 추령터널 입구인 추원마을에서 시작한다. 왕의길 둘레길 경로를 보면 추원터널 입구~추원마을 버스 정류장~추원마을 입구 갈림길~추원마을~모차골회관~추원사 갈림길~왕의길 주차장~ 신문왕 호국행차길 왕의길 시작~수렛재~숯가마터~세수방~불령(불령봉표)~용연폭포~왕의 길 끝~기림사~기림사 주차장순으로 전체거리는 약7.5km 이며 걷는 시간은 2시30분 안팎이 소요된다. 왕의 길은 기림사 탐방과 주위 골굴사, 감은사지, 이견대, 대왕암과 경주 양남면 주상절리 등의 여행지와 함께하면 1석2조의 효과가 있다.



추령터널 입구를 가기위해서는 먼저 경주시외버스터미널 맞은편에서 150번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추원버스정류장에서 하차를 한다. 정면 오른쪽으로 옛 추령으로 오르는 도로가 왕의 길 들머리다. '황룡석불암' '백련찻집' '황용약수터백숙' 방향 안내판을 따라간다.



추령터널이 뚫리기전에는 감포와 양남등 동해 바닷가로 나가기 위해서는 모두 이 고개를 넘어 갔는데 지금은 터널이 뚫여 상대적으로 한산한 도로가 되었다. 200m 쯤 가면 옛 추원마을버스정류장이 있고 왼쪽방향 ‘왕의길(신문왕 호국행차길)’ 2.4km 이정표가 있다.



추원마을로 들어서는 왼쪽 콘크리트 길을 간다. 계곡으로 불어오는 골바람이 매섭게 빰을 때리며 그럴수록 옷깃을 단단히 여미며 간다. 어릴 적 시골 마을을 보는 정겨움과 아득함이 있는 추원마을 앞 갈림길에서 정면 왼쪽에 '왕의 길 2.1km' 작은이정표가 보인다. 콘크리트 길로 들어서고 전형적인 산골 마을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담하게 자리잡은 정겨운 집은 찻집으로 바뀌어 있지만 주인장은 추운 날씨 때문인지 기척도 없다. 이 길을 따라 가면 왕의길 출발지점에 간다. 정겨운 길을 따라 마을을 벗어나 작은다리를 지나면 ‘추원모차골회관경로당’이 오른쪽에 있다. 


 


추원마을을 통 틀어 몇 가구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이곳에도 마을회관이 있는 것에 우리의 복지수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골짜기 안으로 들어선지 햇볕 때문에 한결 날씨가 포근하다. 어께를 펴고 당당히 걸어본다.



편평한 길은 모차골을 따라 이어지고 유래를 보면 더욱 이해가 된다. 신문왕의 행차시 마차를 타고 넘어갔다하여 마차골이 모차골로 되었다는 설명인데 오늘 걷는 길이 마차가 다닐 정도로 평탄한 길임을 알 수 있다. 그런다고 뛰지는 말자. 길 옆 키 큰 감나무에는 칼바람에 맞아 오돌오돌 떨고 있는 주홍색 감이 정겹다.




가지가 휘어지게 주렁주렁 메 달린 감을 보니 입안에 군침이 돈다. 곧 갈림길과 만난다. 오른쪽은 추원사 방향. 왕의 길 입구는 왼쪽의 직진 길이다. 계속되는 콘크리트길은 왕의 길 주차장을 지나서도이어진다. 



추원마을 입구부터 함께한 황용약수터 백숙 식당을 지나면 옛 추원사 절 앞에 이정표가 있다. 용연폭포 3.9km, 수렛재 1.4km. 곧 바로 왕의 길 ‘신문왕 호국 행차길’을 알리는 대형 안내판과 왕의 길 유래를 설명한 안내판이 보인다.




국립공원 지역을 알리는 안내판 앞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왕의 길을 걷는다. 나무는 참 특이하다. 사람과 반대로 여름에 두툼하게 입었던 옷들을 추운 겨울에 모두 벗어 던지며 앙상하게 뼈대만 남아 떨고 있는 것을 보면 참 미련덩어리라 싶다.




골짜기로 들어서면 추운 겨울에 덥다고 벗어버린 낙엽이 수북하다. 어떤 때는 낙엽이 복병이 되어 돌아온다. 항상 걸을 때 발밑을 조심해야한다. 마차가 다녔던 길이라 그런지 제법 넓다. 친구와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면서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모차골 계곡을 건너갔다 건너오는 길로 상세한 이정표와 안내판. 안전을 위해 설치한 보조목이 잘되어 있다. 또한 많은 통행으로 길이 뚜렷하여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다. 왕의 길은 숨 한번 크게 쉬지 않고 자연스럽게 고개 마루인 수렛재에 선다.








낙동정맥 삼강봉에서 이어지는 능선이 토함산을 지나 이곳에서 만난 뒤 포항 호미곶에서 끝나는 호미기맥 길로 안내판에 수레가 넘어 다녀 붙혀진 이름이라 한다. 완만하게 올라온 길에 비해서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 길에 산사면을 돌아 간다.




‘말구부리’ 지명으로 수레를 끌던 말이 이곳을 지나다 구부러졌다는 곳으로 수북한 낙엽 때문에 항상 발밑을 조심하자. 구르는 돌을 밟거나 발을 헛디딜 경우에는 넘어지기 십상이다. 숯가마터 아래쪽에 세수방 안내판이 있다. 



함월산 아래 깊은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신문왕이 이견대 앞 바다에서 동해 해룡에개 검은 옥대를 받아서 왕궁으로 돌아가다 이곳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을 하며 세수를 하였던 곳으로 세수방 또는 세수뱅이로 부른다.







완만하게 내려가는 산길은 곧 세수방계곡을 건너 산사면을 돌아간다. ‘용연폭포 1,9km 현위치 번호 경주 26-05’ 표지목을 지나면 불령은 지척이다. 고개마루의 작은 바위에 ‘불령봉표’가 각자되어 있다.




조선 23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묘에 사용할 제수경비를 충당하고자 함부로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임금의 명으로 불령에 봉표를 세우게 하였다. 용연폭포는 0.9km 거리, 불령을 내려서면 하산길은 완만하게 길게 내려선다.





편평하고 넓은 길을 따라 쉬엄쉬엄 걸어가면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왕의길은 이어진다. 직진해도 임도는 돌아 ‘지의류’ 안내판에서 만나게 된다. 키큰 소나무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간다. 곧 갈림길에 직진하여 도통골에 걸린 작은 다리를 지나면 용연폭포는 지척이다. 







어디선가 세차게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린다. 오른쪽 계곡에 용연폭포가 걸려 있다. 위쪽에서 아래를 향해 폭포를 볼 수 있는 편편한 바위 전망대가 있다. 정면에서 웅장한 폭포를 보기 위해서는 임도를 따라 ‘S'로 형태길 두 번째 도는 곳에 ’나무아미타불‘이 각자된 바위 왼쪽 펜스를 넘어 계곡으로 들어간다.



항아리처럼 움푹하게 파여진 암벽 가운데 10m 높이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용연폭포는 신문왕이 받았다는 옥대에 관한 전설이 있다. 옥대에는 살아서 움직이듯 용이 새겨져 있는데 용의 비늘 장식 한 개를 떼어 시냇물에 담그니 용으로 변해 승천을 하면서 깊은 소와 폭포를 만들었다.







폭포를 나와 내려가면 높은 암벽이 앞을 막는다. 왕의 길은 이곳에서 끝난다. 기림사로 향하는 길은 큰 암벽을 왼쪽으로 돌아간다. 다듬지 않은 나무를 기둥으로 세운 특이한 정자를 내려서면 바로 기림사 경내다. 경주시 양북면 기림사는 인도 천축국 광유 스님이 임정사를 세웠는데 선덕여왕 때 원효스님에 의해 절의 규모도 커지고 중수를 한 후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경북여행/경주여행)왕의길-신문왕 호국행차길 교통편.


대중교통편은 추령터널 입구 추원버스정류장으로 가기위해서는 먼저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야한다. 경주 터미널 밖으로 나와 맞은편 감포, 어일 방면 150번 또는 100번 버스를 타면 된다. 배차간격은150번은 60분이며 100번은 20분.

기림사에서 경주로 나오는 버스는 없다. 기림사 주차장에서 (오후 1회뿐 5시10분 출발)하는 양북면 소재지 어일행 버스를 타고 어일에서 경주터미널 행 150번이나 100번으로 갈아타야한다. 추원마을에 차를 주차하였다면 어일을 거쳐 경주터미널로 향하다가 추령터널을 지나 바로 내리면 추원정류장이다. 기림사에서 버스가 없다면 양북에서 택시(054-744-2025)를 부른 뒤 노선버스가 운행되는 안동삼거리에서 내려 경주터미널 행 100번 150번 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내비게이션에 추원마을 추령터널 입




왕의길 고도표

왕의길 지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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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 경주최부자 최진립 충의당. 정무공 최진립장군 고택 충의당 찾아가기


경주에는 볼거리가 너무 많은 곳입니다. 신라 천년의 역사가 그대로 숨 쉬고 있는 곳 경주, 남산과 경주를 아우르는 문화재를 모두 만나기 위해서는 몇 달을 둘러보아도 부족합니다. 그 만큼 많은 문화재를 품고 있는 곳이 천년 고도 경주입니다.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재는 석굴암 불국사 첨성대 분황사등 경주의 유명관광지라 모두다 한번 씩은 찾아 가본 곳입니다.  또한 초중고 수학여행 단골 코스 이기도합니다.

 

 

. 이외 관광지를 빼면 별로 보고 온 기억이 없습니다. 필자의 고향은 이곳 경주 외곽 남산 밑입니다. 저 또한 너무 알려진 곳만 찾아다녀 경주를 속속들이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친지방문이나 고향을 찾아갈 때 짬을 내어 잘 찾지 않는 경주의 문화재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대구 영남대학교를 설립한 경주최부자의 최진립장군 고택 충의당을 찾았습니다. 경주 근동에서 경주 최부자 하면 모르는 분이 없습니다. 그러나 막상 충의당을 찾아가면 너무 단촐한 풍경이라 처음에는 고택을 찾지 못하고 차로 이리저리 돌았을 정도입니다. 여느 알려진 고택을 생각하며 눈에 확 들어 날 것으로 생각을 하였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 세도가의 양반가옥 처럼 축대를 높혀 건물의 위압감을 주지도 않았고 또한 화려하지 않고 정갈하며 반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저 평범한 가옥 모습이었습니다. 그만큼 수수한 모습으로 과연 이곳이 경주최부자 집으로 연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문 앞에는 최진립 장군 동상과 함께 작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으며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사당이 있습니다. 바로 곁이 사랑채의 앞 마당이며 차를 마시는 공간인 경모각을 지나면 단아한 모습의 충의당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충의당으로 들어서는 대문입니다. 기와는 새로 올렸는지 개끗하며 고풍스러움과 옛 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모습입니다. 


 

충의당을 보면 경주최부자의 정신을 읽을 수 있습니다. 타인능해로 유명한 구례의 운조루와 함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곳이 경주 최부자이며 정무공 최진립장군의 정신이 깃들은 이곳 충의당이 그 시작이라 하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내부를 둘러 봅니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위패를 모신 사당 건물로 충열사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경주 최부자는 정무공 최진립장군에서 시작 됩니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경주읍성 전투에 참가를 하였고 1597년 다시 왜군의 재침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권율도원수와 함께 서생포 전투와 도산 전투에 참가하여 선봉에서며  전공을 세워 1600년에 여도만호로 임명되면서 무관의 길로 들어 섭니다. 선무원종 이등공신에 오르고 경원도호부사, 공조참판을 지내다 청나라의 공격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몸을 피해 있던 인조를 구하기 위해 69세의 노구를 이끌고 용인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그를 따르던 두 노비 옥동 기별과 함께 전사합니다. 사후에 인조는 자헌대부 병조판서와 정무라는 시호를 하사하고 청백리에 올렸습니다.


 

두 건물인 경묘각과 충의당. 


 먼저 경묘각으로 차를 마시는 곳 입니다. 안쪽에서는 유리를 넣어 내부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충의당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9호이며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492에 소재하고 있습니다. 최진립장군이 생활한 곳으로 전해지는 충의당은 흠흠당으로 불렸습니다. 1760년 건물을 중수하면서 후손에 의해 충의당으로 바뀌었고 집의 구조를 보면 조선시대 남부지방 양반집 형태인 ‘ㅁ'자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앞쪽 취의당을 중심으로 흠흠당과 고방채 그 뒤로 안채가 있으며 충의당은 앞면이 4칸, 측면 2칸으로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온돌과 마루를 각각 2칸씩 넣었고 흠흠당인 충의당은 사랑채로 사용하였습니다.


 

 

최진립장군의 모습인가요. 큰 칼을 앞에 세우고 두손을 모은 무인상이 사랑채 앞에 떡 버티고 있습니다.


 

 

 충의당 뒤로 돌아가면 만나는 안채의 모습입니다. 주인이 생활을 하고 있어 들어가기에 조심스러운 공간입니다. 

 방을 2칸 넣은 충의당 모습입니다. 앞쪽으로 툇마루가 달려 이곳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충의당과 마주보고 최진립장군의 6대조인 사성공 최예의 사당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며 마당에 잔디가 깔끔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 아녀자들이 출입하였을 것 같은 쪽문입니다. 이곳으로 나가면 밭뙈기와  마을길로 나가게 됩니다.  


 

 

 최진립장군 유물관입니다. 필자가 방문하였을때는 이곳에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전체적인 충의당의 모습입니다. 일반 살림집 같은 아늑함이 느껴지는 최진립 장군 고택 충의당.  

 

 

 흠흠당은 염근서흠 경절예흠에서 나왔습니다. "청렴하여 삼감을 흠모하고 굴하지 않는 곧은 절개를 흠모하다"는 뜻으로 인조임금이 진필를 하사하였는데 충의당을 들어가는 입구에 바위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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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당과 함께 전각인 충노각이 있습니다. 충노 옥동과 기별의 불망비로 이는 최진립장군의 후손인 가암 최채량 선생이 비문을 짓고 세웠습니다. 여기에는 일화가 전래져 오는데 장군은 두 노비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지만 두 종은 돌아갈 것을 마다하고 “주인이 목숨을 버려 충신이 되는데 어찌 우리 종들이 충노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며 끝까지 남아 최진립과 함께 죽었다합니다. 이 후 경주최씨 종가에서는 이들의 갸륵한 마음을 기려 장군의 제사를 받들고 난 뒤 두 충노의 제사를 지금까지 올리고 있다합니다. 


 보호수인 회화나무입니다. 내남면 이조리 최진립 장군 고택과 함께 너무 잘  어울리는 고목입니다.  

 

 


 

잠와 고택은 안채를 말합니다.  일(一)자형 건물로 왼쪽에는 부엌을 넣고 안방과 건너방 사이에 대청을 넣었습니다. 

 

 

 

월래는 초가 지붕이었는데 기와 지붕으로 바뀐 '우산초려'입니다. 안채에서 보면 오른쪽에 위치를 하며 충의당에 비해 소박하며 단독으로 숙박을 할 수 있게 욕실과 화장실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안마당에서 바라본 충의당 모습입니다. 사랑채인 충의당은 조선시대 남여의 생활 공간을 완전히 구별하여 충의당에 앉아서는 안채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는 구조입니다. 

 

 

 잠와고택과 현재의 흠흠당

 

 현재의 충의당은 한국관광공사 인증 한옥민박 체험 할 수 있습니다. 400여년 전 경주 고택에서 별헤는 밤을 즐겨보세요. 또한 500m 거리에 최진립장군을 배향하는 용산서원과 신도비각이 있습니다 




2014/09/04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용산서원. 정무공 최진립장군 용산서원, 한옥 고택 숙박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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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용산서원. 정무공 최진립장군 용산서원, 한옥 고가 숙박도 할 수 있습니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가면 용산 서원이 있습니다. 조선의 무신인 정무공 최진립(1568~1636)을 제향하며 자는 사건, 호는 잠와, 본관은 경주입니다. 경주최씨 최진립 장군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그의 고택은 인근에 경주 최부자 집으로 유명한 충의당입니다. 처음 흡흡당으로 부르던 건물은 1760년경에 와 건물을 수리하면서 충의당으로 현판을 바꾸었습니다.

 

 

경주 최부자하면 아마 모르시는 분이 없을 것으로 유명합니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용산서원과 이웃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이 이어진 경주최부자 이야기는 근대에 와서도 그 명성이 자자합니다.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해주는 대목입니다.

 

 

벼슬은 진사이상을 금하며 재산 또한 만석 이상을 넘지 않도록 하고 흉년에 남의 논밭 사는 것을 금하며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입니다. 이외에도 경주최부자의 쌀뒤주는 지금도 우리에게 회자하는 바가 큽니다.


 

경주 최부자의 유래는 최진립 장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육의당 최계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장에 나갔습니다. 또한 1597년 정유재란때도 서생포에서 왜군과 싸워 이겼고 권율장군과 합세하여 도산에서 승전을 하여 ‘선무원종공신’에 오르며 훈련원정을 제수 받습니다.

 

 

금나라의 침입으로 조정은 명나라 구원병을 요청하지만 반대하여 유배길에도 오릅니다. 인조반정 이후 사면되어 첨절제사에 복지하고 공조참판을 거쳐 1630년 전라좌수사에 올랐고 경기수사에 제수되어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직합니다.

 

 

1634년에는 전라수군절도사가 되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으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합니다. 적에 의해 남한 산성은 포위되고 최진립은 인조를 구하고자 출전하여 용인 험천 전투에서 전세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청군에게 패해 전사를 합니다.




 

 

1937년 병조참판에 추서와 함께 청백리에 이름이 오르며 시호 정무를 하사 받습니다. 한국관광공사 용산서원을 참고하면 용산서원은 1699년(숙종25) 경주부윤 이형상이 최진립 장군을 향사하기 위해 지역 유림과 함께 건립 하였고 1701년 강당과 남북재를 세워 강당을 민고당, 양 협실을 흥인재, 명의재라 하고, 남재를 호덕재, 북재를 유여재 문을 식강문이라 하였습니다. 1711년에는 '숭령사우'의 묘액이 내려졌고 원호도 용산서원이라 하였습니다. ‘숭열사우’의 글씨는 이익의 형 이서의 글씨라 합니다.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되었다가 1924년 에 다시 세웠습니다.


 

용산서원은 전면에 교육시설인 민고당을 배치하고 그 뒤쪽에 단을 올려 숭렬사를 둔 전학후묘의 구조도 되어 있습니다. 숭렬사는 정면3칸 측면 1칸이며 민고당은 정면4칸, 측면2칸의 규모로 중앙의 2칸은 마루를 두고 양쪽편에 흥인재와 명인재의 1칸 방을 넣었습니다. 또한 전사창은 정면3칸, 측면 1칸 규모로 향사나 제사등 행사때 제수를 마련하는 곳이며 고사와 유사실도 두었습니다. 용산 서원입구에는 그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1993년 2월에 경상북도기념물 제88호로로 지정되었습니다.


◆용산서원 사진으로 둘러보기

 

 

 

 

 

 

 

 

 

 

 

 

 

 

 

 

 

 현재 용산서원 부속건물인 한옥고택에는 민박을 할 수 있습니다. 2인실부터 대형 10~15인실까지 갖추어져 있습니다. 한옥고택 민박체험은 2인 기준 5만원이며 예약 및 문의는 054-748-2507


 

◆용산서원 한옥 고택에서 숙박도 가능합니다. 사진으로 둘러보기


 

 

 

 

 

 

 

 

 

 

 

 

 

 

 

 

 

 

 

 

 

 ◆정무공 최진립 장군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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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동해의 신비 경주주상절리 파도소리길 걷기, 읍천항벽화마을,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감은사지 여행


경주시내에서 벗어나 동해안쪽으로 조금만 벗어나면 경주 양남면의 경주주상절리를 만난다. 주상 절리는 2천만년전인 신생대 말기에 현무질의 용암이 분출하면서 공기와 만나 빠르게 식어 굳어지고 또는 흐르고 하여 다양한 모양과 형태로 생겨난 것을 말한다. 경주의 주상절리는 일반적인 수직주상절리와 함께 솟아오른 주상절리, 경사지거나 누워 있는 주상절리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어 국내외적으로 희귀하다. 특히 부채꼴 주상절리와 같은 독특한 모양은 동해의 푸른 바다에서 밀물과 썰물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여 바닷가에 피는 해국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피었다하여 ‘동해의 꽃’으로 부른다.


 

 



이곳 읍천리의 주상절리 조망공원에서 바라보는 부채골 주상절리를 보고나면 읍천항을 끼고 조성된 벽화마을을 만난다. 한수원(주)월성원자력본부에서 아름다운 지역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그림이 있는 어촌마을 읍천항 갤러리와 원자력홍보관, 그리고 후반부 경주 동해안 둘레길 막바지에 만나는 감은사지와 이견대, 문무대왕 수중릉에서 신라시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대왕이 죽어 호국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으로 이곳에서는 옷깃을 여미게 한다.


 

 




 




 




 




 




 




 




 




 




 




경주 양남면과 양북면을 잇는 동해안 둘레길은 주상절리가 있는 파도소리길과 해파랑 길을 걷는 구간이다. 둘레길 경로를 보면 하서항 파도소리길 입구~주상절리길~기울어진 주상절리~누워있는 주상절리~위로 솟은 주상절리~부채꼴 주상절리(주상절리 조망공원)~읍천항 ~읍천항 벽화마을~나아해변~월성원자력본부 홍보관~나산교차로~상라마을 정자쉼터~상라마을회관~범방재~솔밭골~구명사~구길마을회관~구길버스정류장~감은사지~해파랑길~이견대~대본삼거리~봉길리 문무대왕수증릉을 도는 둘레길로 GPS상 전체 거리는 17.5㎞. 휴식등 전체 소요시간은 약 6시간 이면 충분하다.



 




 




 




 




 




 




 




 




먼저 파도소리길에 있는 경주 주상절리를 보기위해서 하서항이 있는 하서4리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마을을 찾는 관광객을 위해 마련된 대형 주차장과 주상절리 파도소리길 안내판이 있다.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은 하서항에서 시작하여 읍천항까지 1.5㎞ 구간을 말하며 동해안을 걷는 해파랑길 11구간의 일부분이다. 주상절리 파도소리길에는 현재 다양한 모양의 주상절리를 걸어가면서 볼 수 있도록 전망대와 안내판 그리고 데크 등이 조성된 주상절리 조망공원으로 아름다운 해안길이다.



 




 




 




 




 




 




 




 




 




바다를 끼고 걷노라면 만나는 주상절리 마다 감탄을 하게 된다. 특히 주상절리의 핵심인 부채꼴 주상절리를 보면은 자연의 신비함에 저절로 입을 다물지 못 한다. 어떻게 이런 모습의 주상절리가 만들어 질 수 있을까하며 그저 자연의 경이로움에 놀랄 뿐이다. 덱으로 만든 전망대에 올라 좀 더 높은 위치에서 동해의 꽃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게 하였고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이 이곳에 촬영이 되었는지 안내판이 있다. 자연히 이곳에서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부채꼴 주상절리를 지나면 더 이상의 주상절리는 나타나지 않으며 출렁다리를 건너면 읍천항이 바라보이는 방파제다. 지금부터는 주상절리길이 끝나고 어촌마을에 조성된 벽화마을이 시작된다. 마을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라 여겨질 정도의 다양한 벽화로 가득찬 열린 미술관 '읍천항 갤러리'를 보고 걷노라면 자연스럽게 작품의 세계에 빠져 들며 유명작가의 작품부터 새내기 대학생의 작품까지 감상할 수 있다. 바다의 풍경과 해녀와 잠수부, 어촌인 읍천항의 생활상을 그대로 그림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있는 어촌마을’ 읍천항 벽화마을을 보면서 월성원자력이 보이는 나아 해변으로 걸어간다.


   

 




 




 





 



 










 

 



 




 




 




 

 





 




 



긴 해수욕장이 연결되는 나아해변에는 해파랑길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고 건너편에 월성원자력발전소가 가까이 보인다. 왼쪽에 방풍림 역할을 한 울울창창한 해송이 공원으로 조성 되어 있고 이 길을 따라 진행하면 월성원자력본부 출입문 앞에 닿는다. 직진하는 길은 옛 31번 국도로 감포, 포항 방면으로 이어지던 길이지만 새로운 도로가 뚫여 일반인의 출입은 통행이 제한된다. 왼쪽으로 유턴하여 90도 꺾으면 원전홍보관이 있는 갈림길이다. 홍보관에서 오른쪽 도로로 꺾어 100m쯤 가면 나아교차로다. 새로 뚫린 31번 국도가 왼쪽으로 흘러가고 '자연보호 표지석' 앞에서 왼쪽의 도로로 직진한다. 10여분 이면 31번 국도의 나산교차로인 사거리와 만난다. 횡단보도를 건너 직진하여 나산천을 끼고 상라리 방향으로 간다.




 




 




 




 




 




 




 




 




 




 



30여분 도로를 가면 상라교를 건너고 상라마을 정자나무 쉼터를 지나 3분 후 오른쪽으로 꺾어 상라마을로 들어선다. 마을회관을 지나면 바로 T자 갈림길, 여기서 오른쪽 콘크리트 포장길을 30m쯤 가면 마을길을 만나는 사거리다. 작은 수로를 넘어 직진하면 좁은 흙길의 농로를 따라 정면에 보이는 향나무 숲 방향으로 간다. 무덤을 두른 향나무 숲을 가로질러 다시 산자락에 보이는 무덤 방향으로 길을 올라간다. 만나는 무덤 오른쪽에 산길이 열려 있다. 임도 급의 넓은 길을 따라가면 큰 무덤 앞에서 길은 끝나고 오른쪽으로 난 산길을 타면 고개를 오르던 옛길로 여러기의 무덤이 있다. 마을에서는 이 고개를 범방재로 부르며 마치 분지를 이루듯 편평한 지형이다.





 




 




 




 



 




 









 



마을 분들의 구전에 의하면 일명 ‘범방우’하 하는데 이곳에 장군이 태어날 지형이라 하여 그것을 막기 위해 산을 깎아내어 평지로 만들어 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풍수를 보는 지관과 함께 다니며 우리나라 명당의 혈은 모조리 끊었다하는데 혹시 그가 이따위 짓을 하였는 것이 아닐까 짐작을 해본다. 현재는 사람의 왕래도 없어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주의를 해야하는 구간이다. 왼쪽으로 능선을 타다가 보이는 정면의 봉우리에서 오른쪽으로 흐르는 능선에 산길이 있다. 만나는 쌍무덤에서 오른쪽 능선을 향해 비스듬히 타면 능선에 닿고 오른쪽으로 산길을 따라 서서히 내려간다.





 




 





 




 



정면에 송전철탑이 있고 이곳에서 직진하는 길을 버리고 왼쪽 내리막길을 타야한다. 다시 송전철탑을 만나고 상당히 가파른 내리막이 시작된다. 앞으로 넘어질 정도로 급하지만 길은 뚜렷하다. 10분이면 계곡을 건너 둑을 따라 왼쪽의 묵정밭을 통과한 후 다시 비스듬히 산으로 오른다. 작은 고개를 넘으면 대나무 숲인 삼거리다. 직진하며 이곳 부터는 임도길이 시작된다. 5분이면 솔밭골 마을에 내려선다.




 




 




 




 




 




 




 



솔밭골엔 육신당 현판이 걸린 옛 서원이 있다. 관리가 되지 않아 허물어 지기 일보직전이지만 그 모습만은 선비의 모습이 살아 있는 듯 품위가 있다. 육신(六愼)은 말, 행동, 거처, 재물, 술, 여자인 여섯 가지를 삼간다는 뜻으로 문화 유씨 류태호가 그의 선친 류치능의 유훈을 받들기 위해 조선 고종 15년(1878)에 세운 서당으로 1998년 4월에 서원에서 보관중이던 235점의 서책과 문헌, 현판 등이 모두 도난당했다.


  


 




 




 




 


미니마을인 솔밭골은 동서남북이 모두 낮은 산으로 둘러져 그야말로 세상과 담을 쌓은 듯한 그런 마을같다. 부지런히 마을길을 걸어 20분이면 큰 마을인 구길리의 마을회관 앞을 지나고 다시 10분 이면 구길마을 앞을 가로지르는 대종천을 건너 구길버스정류장이 있는 929번 지방도와 만나고 감은사지는 우측으로 꺾는다. 도로에는 차량행렬리 빈번하고 인도가 따로 없어 주위를 해야 한다. 10여분 후 감은사지 도로 표지판이 나오고 왼쪽으로 꺾으면 국보 제112호인 감은사지 쌍탑이 있는 사적 제31호 감은사지에 닿는다. 동탑과 서탑으로 감은사탑은 제작연도를 알 수 있는 탑 중 가장 큰 규모라 한다. 쌍탑 뒤에 남아 있는 금당 터는 호국용으로 변한 문무대왕이 이곳 금당에서 몸을 쉬게하였다는 전설을 보여주는 듯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다시 이견대로 향하기 위해서는 해파랑길을 따라간다.


 


 




 




 




 




 



감은사지 관광안내선터가 있는 주차장에서 안내판 오른쪽 길이다. 마지막 민가 직전에 이견대 이정표가 있고 오른쪽 산길을 탄다. 급한 오르막을 5분쯤 타면 능선 갈림길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꺾어 능선길을 따른다. 잠시뒤 무덤에서 전망이 열리며 마지막 종착점인 문무대왕 수중릉이 한점으로 보인다. 도로에 내려 왼쪽 100m에 사적 제159호인 이견대가 동해바다의 대왕암을 바라보고 있다. 신라 31대 신문왕이 전설속의 피리인 만파식적을 부왕인 문무대왕에게 받았다는 이견대에서 왔던 길을 400m쯤 되돌아가면 대본삼거리, 왼쪽 대종천에 걸린 대종교를 건너 5분이면 봉길리 해수욕장에 닿고 사적 제158호 문무대왕 수중릉이 바라보인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바다건너 왜구로 부터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 이곳 바다 속의 암초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후세에는 이를 대왕바위, 대왕암, 문무대왕수중릉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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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언양JC에서 울산고속도로로 옮겨 타 울산톨게이트를 통과한다. 신복로터리에서 울산항 유니스트 방향으로 7번 국토를 타고 직진, 울산북구청 앞 교차로까지 간다. 이곳에서 강동 정자해변 방향으로 직진(31번 국도), 무룡터널을 통과한 후 12㎞가량 진행해 양남교차로에서 우측 해변으로 꺾으면 주상절리 입구 주차장에 닿는다. 둘레길 갑사 후 문무대왕릉에서 차량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매시 15분마다 있는 울산행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if !supportEmptyParas]--> 대중 교통을 이용할 경우 경주시외버스주차장 맞은편에서 150번 시내버스를 탄다. 첫차 오전 6시30분부터 7시10분, 8시, 9시10분, 9시50분 등 40~60분 간격 운행. 답사를 마친 후에도 문무대왕릉 앞에서 이 버스를 타고 경주시외버스터미널로 가면 된다. 막차는 양남면 소재지에서 오후 8시50분 출발한다.




 




 







2014/05/21 - (경주여행/감은사지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여행) 호국용 문무대왕의 혼이 깃든 경주 감은사지 이견대 대왕암 이른 봄여행


2014/05/24 - (경북여행/경주여행)그림이 있는 어촌마을 읍천항 갤러리. 읍천벽화마을 나드리 너무 좋아요.


2014/05/25 - (경북여행/경주여행)동해의 꽃으로 부르는 경주 양남 부채꼴 주상절리.독특한 경주주상절리를 보면서 누구나 감탄하게 됩니다.주상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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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그림이 있는 어촌마을 읍천항 갤러리. 읍천벽화마을 나드리 좋아요.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읍천항은 한때 조용한 포구로 동해안을 드라이버하는 사람들이 가끔 들르는 곳이었습니다. 이웃한 경주 주상절리가 열리고 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게 되면서 이제는 동해안의 1번지의 관광지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읍천항과 이웃한 곳에는 월성원자력 발전소가 있고 그 사이에 있는 읍천항. 읍천항은 “아름다운 지역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월성 원자력본부에서 벽화마을을 조성하였습니다. 읍천항의 벽화마을은 전국의 내노라하는 작가분에서부터 그림을 전공하는 분까지 다양한 분들이 모여 작품을 뽐내었고 항구의 모습과 어릴적 추억이 꿈틀거리는 벽화들로 가득합니다.





읍천의 유래를 보면 신라시대때부터 어업 중심항구로 이곳 인근에서 자연부락으로 가장 큰 마을을 형성하였습니다. 읍내, 읍냇개, 읍내포라고 부르던 것이 읍천, 읍천포라 부르게 되었으며 월성원자력이 이곳에 들어오면서 읍천마을은 아마 많은 위축이 된 것 같습니다.





현재의 읍천항은 살아 있는 벽화들로 인해 활기를 되찾고 있습니다. '◆◆그림이 있는 어촌마을 읍천항 갤러리'란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시작된 벽화마을 읍천항, 이번 주말 아이들과 함께 경주 주상절리의 둘레길이자 해파랑길인 파도소리를 걸어보고 철썩이는 파도와 함께 멋진 그림을 감상해 보세요. 



 



독특한 기둥모양의 주상절리가 ‘동해의 꽃’으로 변화한 모습은 대한민국의 신비일 정도로 독특한 모습입니다. 월성원자력을 지나 양북과 감포에 걸쳐있는 문무대왕의 수중릉과 신라31대 신문왕이 동해의 용에게서 만파식적을 받았던 이견대, 왜구로부터 신라를 지키기 위해 동해의 용으로 변한 문무대왕이 몸을 쉬게 하였던 감은사지등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이곳은 가족 나들이를 하기에 너무 좋은 곳입니다.








그림이 있는 어촌마을 읍천항 갤러리 읍천항 둘러보기






































































































































 




2014/05/21 - (경주여행/감은사지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여행) 호국용 문무대왕의 혼이 깃든 경주 감은사지 이견대 대왕암 이른 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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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여행/감은사지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여행) 호국용 문무대왕의 혼이 깃든 경주 감은사지 이견대 대왕암 여행.


경주는 노천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많은 신라시대의 불교유적이 있습니다. 경주 남산을 위시한 경주 시내에 수 없이 많은 문화재를 보면서 신라인의 예술성과 믿을 수 밖에 없는 전설 등을 듣고 있노라면 그 속으로 자연히 빨려 들어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만큼 흥미 진지한 이야기가 있는 신라의 서라벌  속으로 달려가 봅니다.



 

 

 

이번 경주 여행은 양북면과 감포읍에 있는 문무대왕 전설의 감은사와 이견대, 문무대왕릉의 대왕암을 찾아 갔습니다. 고향이 경주라 자주는 가 보질 못하지만 그래도 여러 번 가보았던 곳이며 학창 시절 때 한번쯤 들었던 호국용 이야기와 만파식적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먼저 토함산의 추령고개(지금은 추령터널을 지나면 금방임)를 넘어 쏜살같이 내려가면 일렁이는 동해 바다가 펼쳐집니다. 바다에 닿기 전 왼쪽으로 웅장한 쌍탑이 있는곳이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의 감은사지입니다.



 

 

 

감은사지는 문무대왕이 죽어 호국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는 곳입니다.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굴복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은 언제나 바다 건너 왜구가 걱정이었습니다. 왜구와 가까운 위치에 있던 남해안과 동해안의 경주와 울산에는 왜구의 잦은 출몰로 백성들의 핍박이 심해 부처님의 원력으로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문무왕은 감은사를 짓습니다.


 

 

 

 

문무대왕은 절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인 31대 신문왕이 부왕의 유업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며 ‘아버지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인 ‘감은사’로 이름 하였습니다. 현재 감은사지는 동탑과 서탑이 세워져 있으며 옛 절터의 흔적인 금당 터가 남아 있습니다.


 

 

 

 

금당터 아래는 움푹 파여진 모습이며 이곳으로 동해의 용으로 화한 문무대왕이 대종천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서 몸을 쉬게 하였다는 곳입니다. 1959년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는데 금당의 바닥구조는 마치 바위를 깎아 마루를 깔듯이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어 문무왕의 전설이 더욱 신빙성을 갖게 합니다.



 

 

 

금당 앞의 쌍탑을 보겠습니다. 국보 제 112호 지정된 감은사지 동서 3층석탑은 682년 신문왕 2년에 창건된 감은사의 부속 석탑입니다. 창건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탑으로 높이는 13.4m에 이중 기단 위에 몸체돌을 세우고 처마 밑은 직각으로 꺾어 5단의 계단식 받침이 층단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지붕돌 위는 곡면을 이루어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은사지 동서 3층 석탑의 특징은 하나의 큰돌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닌 수십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점이며.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서탑을 해체복원하였고 1996년에는 동탑을 해체하여 복원하였습니다. 그 때 동서 탑에서 금동제 사리함과 사리가 들어 있는 수정 사리병이 발견되었습니다.



 

 

 

 

 

 

 

 

 

 

 

 

 

 

 

 

 

 

 

 

 

 

 

 

 

 

 

 

 

 

 

 

 

 

 

 

 

 

 

 

 

 

 

 

 

 

 

 

 

 

 

 

 

 

 

 

 

 

 

 

 

 

 

 

 

 

 

 

 

 

 

 

감포읍 대본리에는 이견대가 있습니다. 신라 문무왕이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다며 수중릉을 만들었던 대왕암을 볼 수 있는 정자입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신문왕은 호국용이 된 부왕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완공하였고 이견대는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큰 이익을 얻었다는 곳으로 신문왕은 이견대에서 문무왕과 김유신이 보냈다는 대나무로 만든 피리인 만파식적를 받았던 곳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이견대는 중국의 주역인 ‘비룡재천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에서 글귀를 빌려 “큰 용이 바다에 있는 것을 보았다”다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문왕이 문무왕을 생각하며 세웠던 이견대는 없어졌지만 현재의 이견대에 세워진 정자는 1970년에 발굴하여 건물지를 확인하고 1979년에 신라의 건축 양식을 추정하여 세웠던 정자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에는 해안과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암초가 있습니다. 옛날부터 대왕암, 문무대왕 수중릉이라 불렀습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을 모신 곳으로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군주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왕암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현재도 알 수 있듯이 동서남북으로 네 군대 인공수로가 있습니다. 물은 동쪽으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하여 항상 수면이 잔잔하게 유지가 됩니다. 그 속에 길이 3.7m, 폭 2.06m의 거북모양의 돌로 만든 덮 게가 놓여 있고 그 안에 문무대왕의 유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알기 위해 이곳 대왕암 발굴 계획을 세웠다가 곧 철수를 하였다 합니다. 조사를 하면 대왕암이 문무대왕릉의 전설이 맞다, 아니다는 금방 알 수 있겠지만 모든 진실을 꼭 밝혀내는 것보다도 국민의 가슴속에 각인되어 있는 위대한 문무대왕의 큰 뜻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참고:신라사람들 ‘동해지역 문화유적 답사 자료집’ http://www.isill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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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도덕산~자옥산 산행. 겨울에 찾아 떠나는 근교산 도덕산~자옥산 산행 개요.


경주는 신라 천년의 살아 있는 역사가 있는 곳이다. 노천 박물관으로 불리는 경주 시내를 벗어나도 만나는 것이 문화재요 많은 문화재가 산을 이룬다. 부산에서 조금은 먼 것 같지만 그래도 부산과 이웃한 근교산으로 경주시를 많이 추천한다. 특히 경주 안강읍의 북쪽을 감싸는 도덕산~자옥산~봉좌산~어래산 코스는 도,좌,봉,어 4대 산을 많은 산꾼이 원점회귀 종주산행을 하는 곳이다. 옥산리를 한 바퀴 도는 산행코스로 보통의 걸음으로는 무리가 따른다. 그 중 짧은 코스를 선택하여 산행을 하였다. 이곳은 회재 이언적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옥산으로 내려와 은둔하며 살 요량으로 지은 집이 있다. 자개천 골짜기에 그림 같은 모습으로 자리한 계정과 또한 독락당이 그것으로 사랑채를 지어 후학을 지도하며 남은 여생을 보낸 곳이다. 그런 만큼 이곳은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독락당 또한 보기 드물게 보물로 지정 되어 있다. 독락당 뒤편에도 보기 드문 문화재가 있다. 도덕산 아래 정혜사지 터에 국보 40호인 정혜사지13층 석탑이 이곳 경주를 기단삼아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하늘을 받치고 있다. 산행 후에는 회재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과 그가 마음을 닦았다는 세심정에서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르고 오면 좋을 것 같다.



 















독락당의 계정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도덕산~자옥산 산행. 겨울에 찾아 떠나는 근교산 도덕산~자옥산 산행 경로.


경주 안강읍 옥산리 도덕산~자옥산 산행경로는 옥산리 독락당 주차장~독락당~정혜사지 13층 석탑~도화동~장산서원~관음사 삼거리~도덕암 입구 안내판 갈림길(등산로 입구)~ 도덕암 갈림길 이정표~정혜사지 갈림길 이정표~밀양 박씨 묘~도덕암, 자옥산 갈림길 이정표~도덕암~정상 밑 삼거리~도덕산 정상~(정상 밑삼거리)~전망대~정혜사지 갈림길 삼거리~정혜사지 13층 석탑 이정표 안부 사거리~정혜사지 13층 석탑 갈림길~자옥산 정상~전망대~산장식당~옥산리 독락당 입구 도로~독락당으로 원점회귀 산행 코스다. GPS 산행 거리는 약 8.8㎞에 산행시간은 3시간~3시간30분 안팎이며 휴식시간을 포함하면 더 잡아야 한다.













정혜사지13층석탑.




장산서원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도덕산~자옥산 산행. 독락당과 옥산서원 정혜사지 13층 석탑 뮨화재 즐비, 근교산 도덕산~자옥산 산행 


산행 시작은 경주 터미널에서 타고 온 203번 버스 종점으로 독락당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왼쪽 편에 높게 펼쳐진 산이 오늘 산행 할 자옥산과 도덕산이다. 산행 전에 먼저 보물인 독락당을 둘러보자. 보물 제 로 지정되어 있으며 동방오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이 낙향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1516년 지은 사랑채다. 현재 복원 공사가 되어 건물이 깔끔하게 정비가 되어 있다. 오른쪽 옥산천(자계천)에서 바라보는 ‘계정’을 보고 있노라면 당시 회재선생의 성품을 엿 볼 수 있다. 산행은 독락당 입구에서 왼쪽 장산서원 표지석 방향의 도로를 걸어간다. 독락당을 왼쪽으로 돌아가게 된다. 5분쯤 가면 자옥산과 도덕산 사이의 정혜사 터에 1200여년 세월을 견뎌온 정혜사지 13층 석탑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석탑이 보이고 잠시 들렀다 오자.



 

관음사 갈림길




도덕암입구로 실질적인 도덕산 입구












 

국보 40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혜사지 13층 석탑은 신라시대에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한 바퀴 둘러보고 돌아 나와 진행방향의 콘크리트도로를 따른다. 도화동에 도덕암 가는 길 이정표가 있다. 이곳에서도 바로 도덕암 방향으로 오를 수 있다. 무시하고 도로를 따라 다리를 건너편 장산서원이 나오고 서원을 돌아 뒤편으로 올라서면 삼거리인 관음사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관음사 방향이고 도덕산은 직진이다. 이곳을 지나면 포장길이 흙길로 바뀌고 다리를 건너면 왼쪽으로 도덕암 안내판이 위태롭게 걸려 있다. 석탑에서 15분 걸렸다. 이곳이 실질적인 도덕산 등산로 입구다. 왼쪽 산길로 들어서면 오른쪽 가시 숲에 숨어 있는 이정표가 보인다. 도덕산 정상까지 2.44㎞ 남았다.


















 

로프가 쳐진 길에 나무계단이 이어진다.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이 산길을 부분부분 덮고있어 더욱 산행의 운치를 더한다. 키 큰 소나무의 기운을 받으며 솔 숲길을 따라 간다. 20분이면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이다 오른쪽으로 도덕암의 절 마당까지 올라가는 콘크리트 임도가 보인다. 직진 길도 임도를 따라 도덕암 으로 바로 가지만 포장길이고 하여 왼쪽으로 도덕산 2.03㎞' 안내판을 보고 꺾어 산길을 올라간다. 이곳부터 산길은 급해지며 길은 한층 더 가팔라진다. 10여분을 힘겹게 오르면 도화동의 안내판에서 본 ‘도덕암 가는길’에서 올라오는 길과 서로 만난다. 이곳의 이정표에 정혜사지가 엉뚱한 방향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정표를 지나면 밀양 박 씨 묘와 만나고 명당 터라 그런지 전망이 너무 좋다.



 







도덕암









 

밀양박씨 묘위에서 다시 갈림길과 만나다. 이정표를 보면 왼쪽 능선으로 향하는 산길도 도덕산 방향이나 도덕암을 거쳐 도덕산을 가기위해서는 직진하여 도덕암을 보고 내려간다. 정면에 도덕암의 암자가 새둥지처럼 작은 모습을 하고 있다. 계단을 내려서면 콘크리트 임도와 만나고 곧 도덕암에 닿는다. 최근에 화장실을 완공하여 도덕암 암자보다 더 멋진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보는 전경은 그야말로 절경이라 할 만큼 빼어난 경관을 보여준다. 정면에 어래산 허리를 감아 올라가는 임도가 기계 방향으로 이어진다. 도덕산 정상을 가기위해서는 해우소 앞에서 시작한다. 산행은 우뚝 선 바위위에 오르면 작은 산령각이 나온다. 그 앞의 바위 전망대도 압권이다. 도덕암을 위에서 보면 산중에 이 정도의 넓은 터가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도덕암에서는 보이지 않던 봉좌산, 어래산 능선 뒤의 모습이 멀리까지 보이고 산행은 산령각 옆으로 난 덱 계단을 오른다. 암반에 만든 목재 덱 전망대가 나오고 이곳도 빼어난 경관을 보여주는 전망대다. 지금부터 정상 밑 삼거리까지 35분은 힘든 오르막길이다. 오르고 쉬기를 반복하면 급사면에 일자로 걸려 있는 덱 계단을 만나고 정상은 이제 지척이다. 곧 정상 밑 갈림길인 능선에 오르고 자옥산은 왼쪽 방향이지만 오른쪽 20m 지점이 도덕산 정상이다. 이곳에는 정상석이 3개가 설치되어 있다. 정상석 뒤로 능선을 따라가면 낙동정맥길과 만나고 능선 길은 운주산 방향 또는 봉좌산을 거쳐 어래산으로 돌아 내려오는 자.도.봉.어 종주 코스다. 그중 도덕산이 가장 높다.





















 

 

정상 우측 어래산 방향으로 나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도덕암 보다 경관이 더 크게 열린다. 이곳에서는 어래산 능선 뒤로 멀리 포항시와 동대봉산, 무장산, 토함산 그리고 동해 바다가 손에 잡힐 듯 보인다. 도덕산의 유래를 보면 신라 제37대 선덕여왕이 다녀갔다고 두득산이 되었는데 조선 중종 28년(1533년) 동방오현의 한분인 회재(晦齋) 이언적(1491~1553)이 고향인 이곳에 낙향하여 옥산리 주변에 4산5대를 명명하면서 도덕산이 되었다.
















사거리 안부






 

자옥산은 정상 밑 갈림길 까지 왔던 길을 내려간다. 삼거리에서 직진하여 능선을 따라 간다. 짧은 로프가 걸린 곳을 내려서면 직진하여 작은 봉우리를 올라서고 전망대다. 이곳에서는 정상에서 보지 못한 북쪽의 영남알프스와 서북쪽으로 팔공산이 하늘금을 긋고 있다. 발아래는 영천시의 끝자락인 고경면 오룡리의 벽촌마을 풍경도 보게 된다. 건너편에 불룩 솟은 자옥산을 보고 내려선다. 편안한 능선을 10여분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정혜사지13층 석탑으로 하산하는 능선 길. 자옥산은 오른쪽으로 10분쯤 더 내려서면 안부 사거리에 도착한다. 오른쪽은 영천시 고경면의 오배마을 방향, 왼쪽은 정혜사지13층 석탑으로 하산하고 자옥산은 직진한다. 안부의 높이는 GPS에서 420m를 보여준다. 자옥산까지 150m를 다시 올라가야한다.















 

초반은 급한 경사면을 오르지만 무덤을 지나면서 산길은 조금씩 완만해진다. 20여분이면 큰 돌탑이 있는 자옥산 정상에 닿는다. 신라시대 때 이곳에서 옥이 많이 생산되어 자옥산으로 불려졌다. 잡목 때문에 정상에서의 조망은 기대할 수 없어 바로 하산을 시작한다. 정상석에올라온 방향에서 동쪽 길로 내려간다. 어지러운 갈림길을 지나면 갑자기 바위들이 널려 있고 자옥산 최대의 전망대가 나온다. 정상에서 보지 못한 전망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안강읍의 풍경이 시원하다. 이제 본격적인 하산을 시작한다. 능선을 따라 신나게 30분쯤 내려서면 산장식당에 내려서고 다시 독락당 입구 도로에서 독락당 주차장은 왼쪽으로 300m쯤 더 가야 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도덕산~자옥산 산행 교통편. 


부산 노포동 동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경주행 버스는 탄다. 약 10분 간격으로 운행.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50m쯤 가면 경주시내버스 종점이고 안강을 거쳐 옥산서원까지 가는 203번 버스를 이용하여 반드시 버스 종점에서 하차한다. 오전 6시20분, 7시30분, 9시15분, 10시30분 등에 있다. 1시간 안팎 소요. 하산 후 옥산리에서 경주터미널로 나오는 시간은 오후 2시40분, 4시40분, 6시10분에 있다.

원점회귀라 자가운전도 편리하다. 네비에 독락당으로 찍으면 된다.



도덕산 고도표




도덕산 지형도











2014/02/07 -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독락당과 정혜사지13층석탑 겨울여행지로 다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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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독락당과 정혜사지13층석탑 겨울여행지로 다녀 왔습니다.

 

여행을 간다는 것은 항상 가슴 설레 게 합니다. 사계절 여행을 꿈꾸며 떠나 갈 때마다 그 느낌이 다르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봄에 찾는 느낌 여름에 찾아 가는 느낌, 가을에 보는 느낌, 그리고 겨울의 여행지는 어떠합니따. 이 모두 계절마다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자신만의 색으로 뽐내고 있습니다. 겨울여행지로는 쓸쓸하다고 하는 경주 안강으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안강은 양동마을과 함께 회재 이언적의 유적지가 많이 전하고 있습니다.

 

 

 

 

경주 안강하고도 옥산 골짜기에는 한겨울의 삭풍 때문인지 어실어실 한 느낌입니다. 먼저 독락당을 찾아갔습니다. 지난해 여름인 7월에도 이곳 독락당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독락당은 어찌 찾아 갈 때마다 문화재 보수 공사를 하는지 작년 7월에도 문화재 보수를 한다며 출입을 할 수 없어 옆 계곡에서 독락당 최고의 비경인 계정만 보고 돌아 갔습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독락당과 정혜사지13층석탑. 독락당과 계정 보수를 끝내고 산뜻한 모습입니다.

 

이번 겨울에 찾은 독락당은 다행히 보수공사가 없어 내삼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조선 양반가옥의 전형인 솟을 대문이 그 당시 양반가의 위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정면으로 길게 이어진 건물이 먼저 눈에 보입니다. 처마 밑에 경청재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회재 이언적 선생이 1538년(중종33년) 3월에 청백리에 가자되어 청백은 공경지심에서 나온다"하여 그의 후손들이 경청재로 이름을 붙였다합니다.

 

 

 

 

본 고택은 1601년(선조34년)3월12일 회재 이언적의 손자 휘, 준과 순 형제가 독락당과 계정이 있는 옥산 별업을 받들어 지키기 위해 '화의문'을 작성하면서 세운집입니다.

 



 

 

 

 

 

‘화의문약설’에는 선조인 회재 이언적의 별서인 독락당과 계정을 보호하고 보수 유지함에 있어 회재 이언적의 후손들이 약간의 토지를 내 놓아 그 뒤에 후손들 중 궁핍하여 이 토지로 인해 다투는 일은 선조에 대한 불효로 간주한다는 내용입니다. 독락당은 옥산 정사로도 불리며 동방오현의 한분인 회재 이언적이 만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을 하여 지은 사랑채 건물입니다.

 

 

 

 

현재 이곳 여강이씨종택인 독락당은 경청재이외에는 사실 볼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알림’을 보면은 “이 고택은 회재 이언적선생의 아들 잠계공 이전인의 후손이 살고 있는 종택이므로 본 종가에 특별한 문의외 출입을 금지합니다”란 안내판을 보고는 도저히 들어가 볼 수 없었습니다. 내 만족을 위해 여기서 생활하시는 분들의 사생활을 침해 할 수 가 없기 때문에 아쉽지만 참아야 하겠습니다.

 

 

 

 

 

 

 

 

독락당의 여강이씨 종택은 흙 담장이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흙사이에 기와(?)가 박혀 있는 흙담장으로 인해 독락당은 더욱 무게가 느껴집니다. 작년의 복원 공사로 인해 써까레와 흙담장등이 아름답게 바뀐 모습입니다. 경청재 현판을 보고 아래채와의 사이에 있는 작은 문이 자계천으로 나가는 골목길입니다. 좌우측의 아름다운 토담으로 된 골목길을 걷는 재미가 참 좋습니다

 

 

 

 

그리고 중간쯤에 산청의 남사마을을 대표하는 크로스 나무는 아니지만 이 골목에도 비스틈한 고목이 걸쳐져 있습니다. 현재 자계천에는 지난해 떨어진 낙엽이 물위에 널 부러져 있습니다. 회재선생이 이 모습을 보시면 어떤 생각을 하실지 궁금합니다. 계곡에 몸을 담그듯이 쌓아 올린 독특한 계정은 아궁이가 자계천쪽으로 나와 있습니다. 아궁이도 사람의 허리쯤 높이에 걸려 있습니다.

 

 

 

 

 

 

 

 

널다란 자연석 암반위에 쌓아올린 돌로 2층 누각을 만든 것이 우리 선조님들의 풍류를 알 수 있습니다. 계곡과 정말 잘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독락당은 1516년(조선 중종11년)에 정면4칸에 측면2칸의 여덟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지어졌습니다. 건물의 중간에 대청을 넣었는데 정면3칸 측면2칸이고 그 좌우에 정면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만들었습니다.

 

 

 

 

대청에 앉아 자계천을 볼 수 있게 독락당 옆 담장에 나무로 문살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입니다. 계정은 1533년 완공되었는데 계정안쪽에 걸린 현판에 양진암이란 필체가 눈길을 끔니다. 퇴계 이황의 필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내삼문의 입구로 다시 나가면 국보 제40호인 정혜사지13층 석탑을 찾아 갑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독락당과 정혜사지13층석탑. 국내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정혜사지 13층 석탑 보고 왔습니다. .

주차장에서 장산서원 표지석을 보고 따라가면 됩니다. 독락당을 왼쪽으로 돌아가면 독락당과 계정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종택 뒤편으로는 큰 고목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수령이 수백년은 됨직한 나무를 지나면 왼쪽으로 미려한 모습의 큰 석탑을 만나게 됩니다. 통일 신라시대 9세기 작품이며 정혜사 터에 세워져 있습니다.

 

 

 

 

창건연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동경통지'의 기록에 보면은 신라성덕왕 원년에 당나라 백우경이란 분이 자옥산 아래에다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운 후 그 뒤에 절을 세우고 정혜사라 하였다합니다. 정혜사지13층 석탑은 흙으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십삼층의 몸돌을 세운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다시 걸음을 돌려 다음 여행지인 회재 이언적의 옥산서원과 세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겨 봅니다.겨울 여행지로서도  독락당과 자계천변의 계정 그리고 정혜사지13층 석탑이 손색이 없습니다. 

 

 

 

 

 

 

 

 

 

 

2013/06/24 - (경북여행/경주여행)정혜사지13층석탑. 국보 40호인 통일신라시대 9세기 작품의 정혜사지십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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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금욕산~무릉산.  금욕산~무릉산 산행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는 신라 천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문화도시이며 역사도시이다. 시내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으로 여겨질 정도로 많은 문화재를 갖고 있다. 그만큼 관광객의 발길이 경주시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럼 산꾼의 눈에서 바라보는 경주는 어떠한가. 혹자는 경주에도 산행을 할 만한 산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경주하면 보통 남산과 토함산 단석산과 오봉산 그리고 도덕산등을 거론하며 누구나 알고 있는 산이라며 경주의 산을 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주에도 분명 오지의 산이 있다. 경주시 현곡면과 안강읍, 영천시와 만나는 능선에 낮지만 깊은 산군을 이루고 있다. 무릉산과 금욕산, 금곡산, 어림산등 골골을 이루어 짙은 안개가 숲을 이루며 사람들의 발걸음을 거부하는 그런 모습이다.

 

 

 

 

 

금곡산은 삼기산으로도 불리는데 이 골짜기를 화산골이라 부른다. 봄에는 화려한 꽃들이 골짜리를 가득 메웠을 정도로 아름답고 깊은 골짜기로 신라의 승려였던 원광법사도 이곳을 비껴가지 않았다. 원광법사는 화랑의 세속오계를 귀순과 추앙에게 내려준 인물로 이곳에서 금곡사를 짓고 수도를 하였다. 사후에 그의 부도탑이 이곳에 세워졌다. 그 부도탑은 임진왜란을 겪어면서 파괴가 되었고 현재는 남은 부자재를 이용하여 삼층석탑으로 세워 놓았다. 자료에 의하면 옛 원광법사 부도탑이 우리나라 최초의 부도탑이라 한다. 이번 금욕산~무릉산 산행은 금곡산 직전 갈림길에서 틀어 금욕산과 무릉산으로 달려간다. 산행시애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조용히 산행을 즐길 수 있으며 근래에 세워진 철탑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금욕산~무릉산.  금욕산~무릉산 산행 경로.


먼저 산행 경로를 보자. 경주시 현곡면 내태2리회관~곰바위 마을 당산나무~축사창고 산행 들머리~송전탑 위 무덤~금곡산 직전 사거리 안부~잇단 송전탑~밀양박씨묘~삼거리~금욕산 정상~배넘이 갈림길~폐 헬기장~덕고개(임도)~은진송씨묘~무릉산 정상~널기미 방향 삼거리~무릉산중계소~나막골~경주시 안강읍 근계리 마을회관. GPS 산행거리는 약 14㎞. 산행시간은 5시간이며 휴식을 포함하면 산행시간은 더 걸린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금욕산~무릉산.  금욕산~무릉산 산행 현곡면에서 올라 안강으로 하산.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정류장에서 출발한 시내버스를 타고 산행은 곰바위마을로 불리는 내태2리회관 정류소에서 하차한다. 산행 당일날 일기예보에는 강력한 한파라며 겨울 추위를 이야기하였다. 마을회관앞에서 산행 준비를 하는데 할머니께서 보시드니 산에 복령을 캐러 가느냐고 물어시며 날씨가 너무 춥다며 걱정을 하신다. ‘아니고예, 금곡산에 산행을 갑니다’. 하니 ‘아이고 이 추분데’하시며 ‘시내에 있는 우리 아들도 저리 배낭을 메고 산에 간다고 가더니만’ 하신다. ‘조심해서 올라가이소’하며 혀를 ‘쯧쯧’차신다. 할머니에게 ‘왜 곰바위라 합니까’하고 물어보니 ‘저 위에 곰바위 굴이 있다 아이가’ 하신다. 옛날 어느날 바위에 곰의 모습이 비쳐 웅암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 이곳의 법정동명인 내태리의 뜻은 ‘숲이 우거져 하늘에 별만 보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곰바위와 무관하지 않은것 같다.

 













 

 

 

내태2리 마을 회관 앞 콘크리트길이 마을을 가로 질로 골짜기로 들어간다. 마을 뒤로 보이는 마루금이 오늘 넘어야 하는 금곡산~금욕산 능선이다. 포장길을 따라가면 곧 두 그루의 당산나무를 지나 갈림길을 만난다. 왼쪽으로 작은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 50~60m 가면 오른쪽으로 축사건물이 나온다. 이곳이 산행 들머리로 머리를 들면 정면에 철탑이 보인다. 창고 같은 축사건물 마당을 지나 송전탑 방향으로 올라간다. 아직도 까치밥을 빨갛게 달고 까치들을 유혹하는 감나무가 시골의 정취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올라가다 감나무 밑에 달려가 까치야 미안하다며 홍씨를 따 입에 가져가니 밤바람에 세차게 맞아선지 더욱 빨간색을 띠고 있다. 홍씨는 얼어있어 서걱서걱하며 빙수를 먹는 그런 맛이다. 밭과 무덤을 잇달아 지나니 옛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송전탑을 지나 잘 단장된 넓은 터에 3기의 묘지 위에서 오른쪽으로 산길이 열린다. 등산로에는 지난 가을의 추억이 오롯이 남아 있다. 발목을 덮는 낙엽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바람소리와 함께 맴돈다. 10여 년 전에 금곡산 갈림길에서 이 길로 하산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보다는 사람의 흔적이 뜸했던지 산길이 예전 같지는 않은 것 같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래도 이정도면 산길이 뚜렷하다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태2리 마을 회관 정면 능선에서 금욕산은 오른쪽이지만 산길은 자꾸 왼쪽으로 산사면을 돌아간다. 금욕산과 반대 방향으로 연결된다. 나뭇가지가 배낭을 잡아 채기도하고 마른 계곡을 돌고 돌며 낙엽이 무릎까지 빠져가며 산길은 사면을 뱅글뱅글 돌아간다. 건너편 금곡산에서 내려온 능선에 ‘v'자 안부가 보인다. 산길은 자꾸 그 쪽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40여분쯤 가면 내태2리에서 미루마을 골짜기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 길이다. 오른쪽 방향이며 등산로는 더욱 뚜렷해진다.

 

 










 

 

5분이면 능선을 두고 희미한 갈림길과 만난다. 이곳에서는 오른쪽 방향인 직진 길을 오르면 곧 사거리 안부에 닿는다. 금곡산 갈림길로 넘어서면 리본이 많이 달린 곳이 금곡산 방향이다. 왼쪽은 내태재를 지나 어림산 방향이며 금욕산은 오른쪽 능선을 따른다. 잠시 후 송전탑과 만나며 전망이 열린다. 건너편 천도교 발상지인 용담정과 구미산이 하늘금을 긋고 벽도산, 단석산등 경주 영천의 산들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산길은 옛길을 따라 송전선로를 따라간다. 5분 간격으로 연이어 만나는 송전탑 3개를 지나면 오래된 밀양박씨 묘를 만난다. 상석에 세월의 때가 켜켜히 묻어 있다. 그리고도 송전탑을 다시 만나고 곧 효심사 방향으로 하산하는 갈림길과 만난다.



 

 

직진해서 급경사 오르막을 간다. 금욕산은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 직전의 봉우리를 넘어 내려가면 다시 안부고 곧 갈림길과 만난다. 금욕산 정상과 무릉산쪽 능선으로 갈라지는 중요한 지점이다. 금욕산 정상을 오르기 위해서는 오른쪽 능선을 타야한다. 가파른 오르막을 지나면 왼쪽으로 살짝 나무사이로 조망이 열린다. 멀리 영천의 보현산이 흰눈을 이고 있다. 건너편에 웅장한 산세가 금곡산이며 능선을 한참 에돌아 와도 옆에 금곡산이 솟아 있어 부처님 손바닥 안을 보는 것 같다. 금욕산 정상에는 삼각점이 박혀있고 나뭇가지에 정상임을 알리는 나무판이 걸려 있다. 정상에서 1시 방향으로 무릉산이 멀리 보인다. 이제 마지막 남은 목적지다.

 

 




 

 

금욕산 정상에서 5m 직진하면 바로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진덕여왕릉 또는 나원사, 안태봉 방향이고 무릉산은 왼쪽으로 희미한 길이다. 산길은 갑자기 쏟아져 내려간다. 잠깐이면 우회하는 길과 만나는 사거리다 무릉산은 직진 능선을 탄다. 앞에 보이는 봉우리를 왼쪽으로 돌아가면 산길은 급경사 내리막이 시작된다. 금곡산에서 금욕산으로 이어진 산길은 뚜렷했지만 무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은 주의를 하여야 한다. 산길이 희미한 구간이 간혹 나와 엉뚱한 곳으로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금욕산에서 하산을 하는 길은 안부 갈림길에서 멈춘다. 오른쪽 검단리 배넘이 마을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깊게 패여져 뚜렷하다. 무릉산은 직진한다. 능선을 가면 밀양박씨 묘를 지나면 폐 헬기장을 지나면 산길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안부로 내려서고 다시 능선을 올라 20여분가면 화산골과 연결하는 임도길이 있는 덕고개에 내려선다.

 

 







 

 

 

 

 

오른쪽은 검단리 신기동마을 방향으로 긴 산행에 탈출로는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하산한다. 왼쪽은 화산골 금곡사로 이어진다. 무릉산은 다시 직진하여 올라가야 한다. 산길은 뚜렷하니 봉우리를 우회하여 안부에 닿는다. 옛 임도길의 흔적을 따라 치받이 능선을 오른다. 봉우리에 올라서면 능선은 한결 편안하며 사람의 흔적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을 간직하고 있다. 고만고만한 봉우리를 오르내리면 은진송씨 묘에서 왼쪽으로 살짝 내려서면 이번 산행의 마지막 급경사가 기다린다. 미끄러짐을 주의하며 힘겹게 오르면 무인감시카메라와 산불초소가 있는 무릉산 정상이다. 예전에 왔을때는 까시나무와 잡풀이 우거져 있었는데 지금은 건물이 들어서면서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동쪽으로 포항과 동해가 가깝게 다가와 있고 그 아래로 무장산 동대봉산 토함산이 한눈에 싹 들어온다. 멀리 영남알프스의 고헌산과 가지산도 볼 수 있다. 하산은 정상석 왼쪽에 올라온 임도로 간다. 급한 임도길을 내려 설때 미끄러짐에 유의를 해야한다. 30분을 꾸준히 걸어가면 무선중계소가 나오고 흙길이든 임도 길은 포장길로 바뀐다. 20여 분 내려가면 나막골동네가 나오고 도로에서 왼쪽으로 따라가면 시내버스가 정차하는 근계리마을회관에사 산행을 마무리 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금욕산~무릉산.  금욕산~무릉산 산행 교통편.


부산 동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경주로 가는 버스를 이용한다. 15~20분 간격으로 자주 운행한다. 경주터미널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경주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다. 이곳에서 내태 방향 231번 시내버스를 탄다. 오전 6시20분(공휴일 제외), 7시24분, 9시40분, 11시50분, 오후 1시45분

하산후 안강읍 근계리에서는 212번 버스가 경주터미널까지 간다. 오후 3시, 5시55분 출발. 경주터미널에서 부산으로 가는 버스는 밤 9시50분 막차.

 


◆금욕산~무릉산 고도표◆




◆금욕산~무릉산 지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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