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경남여행/거창여행)전생에 와 본 곳이라는 원효대사의 창건 설화가 있는 우두산 고견사 여행. 거창 우두산 고견사 


방가방가

 

경남 거창군 우두산에 

거창 항노화힐링랜드에 

Y자형출렁다리가 새로 

생겼다해서 다녀왔습니다. ㅎㅎ


카카오지도 캡쳐

거창 우두산 고견사 주소:경남 거창군 가조면 의상봉길 1049

거창 우두산 고견사 주차장·거창 항노화힐링랜드 주차장  주소:경남 거창군 가조면 수월리 산 19-1




2020/11/12 - (경남거창여행)거창 우두산 거창 항노화힐링랜드내 'Y자형 출렁다리' 여행. 거창 Y자형 출렁다리

2020/11/03 - (경남거창맛집)보양식으로 가을에 먹는 걸쭉한 어탕국수가 최고!! 거창 구구추어탕. 거창 구구추어탕 어탕국수

2020/10/31 - (경남거창여행)샛노란 은행나무 단풍잎이 절정인 의동마을 은행나무길. 거창 의동마을 은행나무길

2020/08/01 - (경남거창여행) 거창 수승대 주위 마실 걷기로 하루를 시작하기. 거창 수승대

2020/07/25 - (경남거창여행)여름철 걷기 좋은 거창 월성계곡 서출동류 물길트레킹. 월성계곡 서출동류 물길

2020/07/23 - (경남거창여행)암반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마치 눈가루가 흩날리는 듯하다는 월성계곡 분설담 여행. 분설담

2020/07/21 - (경남거창여행)4층 반석 위에서 바둑을 두는 기분은,,, 거창 월성계곡의 사선대, 거창 사선대

2014/06/29 - (경남여행/거창여행)우두산 고견사. 거창을 대표하는 고견사 원효, 의상, 최치원의 전설이 남아 있는 거창 가조 우두산 고견사 둘러보기.

2014/07/01 - (경남여행/거창가조여행)거창 가조 미녀봉 산행. 만삭의 여인을 닮은 아름다운 산 거창 미녀봉 등산 넘 좋은 산행지.

2014/01/09 - (경남여행/거창가조여행)우두산 고견사. 예술성이 뛰어난 고견사 동종 보고 왔습니다. 고견사 동종




그전에 의상봉(1032m)과 

우두산(1046m) 산행을 하면서 

고견사를 둘러보았습니다.



고견사 주차창으로도 불리는 

거창 항노화힐링랜드 주차장에서 

고견사 표지석을 보고 

30여분을 오르면 고견사입니다.

 


고견사에서 바로 

의상대사가 수도 했다는 

의상봉이 보입니다. 

고견사는 해인사 말사입니다.

 


신라 문무왕 7년인 667년에 

원효와 의상스님에 의해 창건했습니다.



창건 당시에는 견암사로 불렸는데 

이는 원효가 고견사를 창건할 때 

이곳에 와서 보니 

전생에 와 본 곳이라 한데서 유래합니다.

 


고려말 공민왕 9년인1360년에 

달순과 소산이 김신좌와 함께 중건하였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고려 왕조인 왕(王)씨의 명복을 빌기위해서 

전지 50결을 내리고 매년 2월 10일 

내전의 향을 보내 수륙재를 지내게 했습니다.



견암사에서 1630년 설현, 금복, 

종해스님이 중건하면서 

고견사로 개칭했습니다. 

고견사는 연륜에 비해 

그리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현재 보물 제1700호인 고견사 동종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3호에 지정된 석불이 있습니다.

 


고견사 동종은 

대웅전 안에 봉안해 있어 보질 못했지만 

1630년인 인조 8년에 

설봉 스님이 제작한 종으로 보고 있습니다. 



높이는 97.2m, 입의 지름 59.7m이며 

천판위에 음통을 갖추지 않은 

두 마리 용이 새겨져 있으며, 

용의 이마에 ‘王’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외 고견사에서 

꼭 보고와야 하는 게 있습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최치원이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입니다.

 


수령이 1000년이 넘은 은행나무이며 

보호수로 지정되어 

고견사 입구를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고견사는 전통사찰 제 90호에 지정되었습니다.

728x90

728x90




(충북여행/영동여행)영동 백화산 반야사와 배롱나무가 장관. 영동 반야사와 배롱나무


7월 중순부터 100일 동안 꽃이 피고 지고를 반복한다는 나무를 배롱나무라 합니다. 

일명 백일홍이라고도 부릅니다. 

배롱나무는 전국의 유서 깊은 서원이나 정자, 고찰 등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어 이맘때가 되면 배롱나무를 찾아 여행을 떠나곤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영동 백화산 자락의 반야사를 찾았습니다.




영동 백화산 반야사 주소: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산 3

영동 백화산 반야사 전화:043-742-4199



2017/10/25 - (충북여행/영동여행)양산팔경 영동 강선대. 영동 최고의 관광지 송호국민관광지 영동 강선대 여행

2017/09/20 - (영동맛집/황간맛집)민주지산맛집 월류봉맛집 황간 원조동해식당. 착한 마음으로 끓인 올갱이국 원조 황간 동해식당.

2010/08/31 - (충북여행/영동여행)영동 월류봉 산행. 월류봉의 비경에 반해 달도 머물고 간다는 영동의 월류봉



 


반야사에는 500여 년을 훨씬 넘긴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있습니다. 

배롱나무의 개화로 이맘때면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으며 꽃 또한 가장 화려하다 하여 지난 주말에 여행하고 왔습니다. 

반야사 배롱나무와 함께 삼층석탑의 수려한 자태가 너무나 잘 어울리고 보기가 좋아 정말 한 폭의 그림 같은 사찰분위기였습니다.



지금 반야사는 충북 영동군에 자리하지만, 현재의 위치에서 직선거리로 200m쯤 석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경상도와 충청도를 가르는 도경계상의 백화산 자락에 ‘탑벌’로 불리는 너른 터가 반야산 옛터였다고 합니다.




1950년경에 이곳에 있던 삼층석탑을 지금의 반야사 극락전 앞으로 옮겨 세웠는데 사찰에서 석탑은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봉안하는 불탑으로 불상과 함께 절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여 보통 대웅전 앞에 세웁니다. 

이를 짐작해보면 반야사는 ‘탑벌’에 처음 지어졌다가 언제부턴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 아닌지 짐작해 볼수 있습니다.

 


아니면 석천을 사이에 두고 탑벌과 현재의 반야사 모두 반야사 경내였다가 홍수 등 피치 못한 사정으로 지금의 반야사로 모두 옮겨온 것은 아닌지 반야사의 배롱나무 수령이 500년이 넘었다고 하니 그 이전에 옮겨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반야사의 창건은 의견이 분분합니다.



원효대사 창건설과 의상대사의 10대 제자였던 상원스님이 728년 성덕왕 27년에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남아 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851년인 신라 무염국사(800~888)가 창건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합니다.

 



무염국사는 황간의 심묘사에 주석하면서 사미승인 순인을 보내어 연못에 살던 못된 용을 쫓아내고 연못을 메워 그 자리에 반야사를 창건했다고 합니다. 

반야사는 조선 세조와 인연이 깊은 사찰로 알려졌습니다. 세조는 수양대군으로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몸에 피부병이 따라다녔습니다.

 


세조는 신미대사의 주청으로 반야사를 중건하고 회양 법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문수동자가 나타나 세조를 절 뒤쪽계곡인 명경대의 영천에 안내하여 목욕할 것을 청했습니다. 

세조는 목욕을 하고 나자 피부병이 씻은 듯이 낫게 되었고 하늘을 뛸듯이 기쁜 나머지 문수보살의 지혜를 상징하는 ‘반야’란 어필을 하사했습니다.세조의 어필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반야사 건물은 한국전쟁으로 거의 소실되었다가 근래에 들어 중창 불사가 이루어져 지금의 사격을 갖추었습니다. 

반야사에는 반야사 3경이 있습니다. 

보물 제1371호인 삼층석탑과 배롱나무, 긴꼬리를 세운 호랑이 너덜을 반야사에서 꼭 보고와야 한다고 합니다.

 


마침 제가 방문했을 때도 반야사 배롱나무는 붉게 타올라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높이가 7~8m에다 나무 둘레는 1.5m인 쌍둥이 나무입니다. 

반야사 배롱나무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한양 천도를 도왔던 무학대사가 항상 들고 다니던 주장자를 꽂아두었는데 그게 둘로 갈라져 쌍 배롱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입니다. 









반야사에서 가장 오래된 삼층석탑은 배롱나무와 함께 한몸이라 생각할 만큼 삼층석탑의 배경으로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반야사 삼층석탑은 신라말과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단층 기단형의 삼층석탑입니다. 

반야사가 창건되고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석탑 양식에서 고려 초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대석에 1단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탑신을 올렸으며 2층의 탑신은 1층에 비해 높이가 급격하게 낮아지며 1층의 지붕돌 층급받침은 5단인데 반해 2층과 3층의 층급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상륜부는 노반만 남아 있습니다.




반야사 3경 중 마지막은 호랑이 너덜입니다. 

호랑이 너덜은 반야사 경내에 들어서면 정면의 산비탈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앞발에 힘을 주면서 꼬리를 치켜든 게 옴팡 포효하는 호랑이 모습입니다. 

호랑이 너덜은 악귀를 물리치는 천왕문 역할을 하며 반야사를 지키는 수호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 반야사의볼거리중 단연 으뜸은 석천 위의 깎아지른 기암절벽 위에 위태롭게 선 문수전일 것입니다.

반야사를 여러 번 방문했지만, 문수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것만으로 항상 만족했습니다. 

이번에도 명경대 건너에서 보는 것으로 반야사 문수전을  보고 반야사를 갈무리했습니다.

 





반야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 말사이며 백화산에서 타고 내리는 큰 물줄기가 태극문양으로 휘감아 돌아나가는 곳에 연꽃 모양의 지형을 만들었습니다. 

반야사는 연꽃의 가운데에 자리했다고 합니다.

 

영동 반야사 문수전




이외에도 반야사에 남아 있는 유물은 입구의 조선 후기 부도와, 대웅전 안에는 석가여래좌상과 협시보살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봉안했습니다. 

1890년(고종 27년) 청주 보국사에서 제작한 후불탱화와 신중탱화, 1753년(영조 29년) 김천 봉곡사에서 조성한 지장탱화 등이 현재 남아 있습니다.

728x90

728x90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영산암. 독특한 'ㅁ'자 건물 구조 영산암  


안동 천등산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7곳의 고찰 중 당당히 이름을 올린 봉정사가 있습니다. 

봉정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절집이란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게 두 점인 극락전과 대웅전이 국보에 지정되었으며 그 외 많은 보물을 보유한 사찰입니다.

 




안동 봉정사 영산암 주소: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2

안동 봉정사 영산암 전화:054-853-4181



2016/12/26 - (안동여행)안동법흥사지칠층전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국보 제16호 안동 법흥사지칠층전탑 여행.

2016/06/18 - (경북여행/안동여행)의성김씨 학봉종택. 안동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 종택을가다. 의성김씨 학봉종택

2016/06/17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고건축물인 극락전, 대웅전이 있는 안동 천등산 봉정사를 만나다.

2016/06/16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삼층석탑. 봉정사의 고 건축물 극락전과 같은 고려 중엽의 봉정사 삼층석탑을 만나다. 봉정사 삼층석탑

2016/06/13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고금당, 화엄강당. 안동 봉정사의 보물인 고금당, 화엄강당과 요사채인 무량해회를 만나다. )안동 봉정사 고금당, 화엄강당

2016/05/27 - (경북여행/안동여행)천등산 봉정사 극락전, 화려하지 않은 담백한 맛이나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최고 오래된 목조건물 안동 봉정사 극락전 여행. 봉정사 극락전




 그리고 봉정사이외에는 유명한게 100m 떨어진 부속암자인 영산암입니다. 

영산암은 고찰 봉정사에 버금가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영산암의 독특한 건물 구조가 먼저 관광객의 시선을 끌게 합니다.



영산암은 절집에서 보기 힘든 'ㅁ' 자 건물을 하고 있습니다. 

'ㅁ'자 건물은 주로 경북 산간지역에서 추위를 막으려고 집 짓는 구조입니다. 

이런 건물구조가 사찰에 들어온 것을 보면 조금은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산암은 우화루와 석가모니와 제자를 봉안한 응진전과 염화실, 삼성각과 승방인 송암당, 관심당의 6개 건물로 이루며 정확하게 건물의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하나 내려오는 사료를 보면 조선 후기인 19세기 말엽 건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우화루와 송암당의 연결마루




영산암은 지형의 높낮이를 최대한 활용하여 지은 건물로 3단의 마당 구성과 영산암의 입구인 우화루의 왼쪽을 헐어내고 송암당과 누마루로 연결한 것을 보면서 ‘ㅁ’자 구조의 단점이라 할 수 있는 폐쇄적인 느낌은 이 이 연결 마루 때문에 색다른 느낌이 들게 하는 절집입니다.

 









영산암은 건물의 공간 처리를 잘 반영한 뛰어난 조경처리를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우화루 아래로 통하는 출입구를 들어서면 먼저 만나는 늘어진 가지의 반송에서 한여름 무더위를 식혀주는 그늘을 만들고 만발한 화초는 아기자기한 영산암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끼게 합니다.











이는 선경이 따로 없는 편안한 마음이 들어 한참을 마루에 앉아 머물게 했습니다. 

영산암을 들어서는 입구의 우화루 현판은 봉정사 극락전 앞의 누각 현판이었다고 전하며 우화의 의미는 석가모니께서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처음 설법하자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데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릴 만큼 아름답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안동 봉정사 영산암은 특별한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26호


728x90

728x90


(군위여행/군위가볼만한곳)선방산 지보사삼층석탑. 예술성이 뛰어난 군위지보사삼층석탑 


경북 군위를 여행하면서 마지막에 들렀던 지보사입니다. 사찰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지보사에는 아름답기로 둘째라 하면은 서러워할 삼층석탑이 있어 많이 알려진 사찰입니다. 군위읍 소재지에서 동북 방향 6km 거리인 상곡리 선방산 골짜기에 있습니다.





군위 선방산 지보사 주소: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상곡리 280

군위 선방산 지보사 전화:054-383-2898




2009/04/05 - (경북여행/군위여행)군위 아미산. 부처의 눈썹이 과연 이럴까?-경북 군위군 아미산(402.4m)

2014/12/02 - (경북여행/군위여행)화본역과 화본마을 추억여행. 화본역과 화본마을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어릴적 추억 여행을 떠나보세요.

2014/12/05 - (경북여행/군위여행) 중앙선 화본역. 아름다운 간이역 화본마을의 화본역을 여행하다.

2014/12/13 - (경북여행/군위여행)산성면 화본마을, 화본역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

2014/12/26 - (경북여행/군위여행)군위 화본리 오층석탑. 군위 덕림사 화본리 오층석탑을 만나다.




마을 앞이 마치 배를 띄운 모습과 같다 하여 선방산이라 합니다. 그런 유서 깊은 산에 지보사가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습니다. 현재 지보사의 상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673년 신라 문무왕 1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이야기만 전하며 지보사의 유래는 이 절에 세 가지 보물이 있었다 하여 지보사라 불렸다고 합니다. 그 보물은 큰 가마솥과 절에 단청을 입히는 물감에 쓰였다는 천연의 오방색 흙과 맷돌인데 현재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민족문화 말살을 획책하며 일본사람이 지보사의 보물을 모두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소실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지보사는 근대에 와서 1942년과 1972년에 각각 중수하였으며 대웅전, 삼성전, 서별당과 요사채, 그리고 경내에 보물 제 682호인 지보사 삼층석탑이 남아 있어 천년 사찰의 맥을 잇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지보사 삼층석탑을 알아보겠습니다. 지보사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렸으며 머리 장식인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지붕돌 등이 많이 깨어져 훼손 상태가 심하지만, 안정감과 세련미에 우아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몸돌을 바치는 기단석은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줍니다. 기단의 각면 모서리와 가운데에는 기둥문양인 탱주를 조각했으며 두 기둥 사이에 각각의 무늬를 새겼습니다. 아래층은 동물상인데 사자 같아 보이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위층 역시 팔부중상을 두 탱주사이의 각면에 새겨 넣었습니다.















또한, 기단 윗면과 몸돌 사이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판돌을 별도로 끼워 한층 더 삼층석탑의 품위를 높였습니다. 맨 아래층 몸돌에는 부처님을 모시는 감실을 뜻하는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별도의 돌을 올린 옥개석은 밑면에 4단인 받침이 있습니다.


































지보사 삼층석탑은 기단석과 판돌로 인해 전체적으로 우뚝한 느낌이며 석탑의 조각수법을 보면 통일신라 석탑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728x90

728x90


 (함양여행/함양가볼만한곳)지리산 서암정사. 석굴법당 극락전의 불교예술품을 지리산 서암정사에서 만나다 


지리산 언저리를 돌다가 함양의 마천 칠선계곡 입구에 있는 서암정사를 둘러보고 왔습니다. 벽송사의 암자로 처음 시작했다가 절로 승격된 서암정사는 석굴법당으로 서는 현재 우리나라 근대 불교의 아름다움 예술품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한 100년 이후에는 아마 불교 문화재로 승격되는 것은 떼 놓은 당상 같은 그만큼 예술성이 모두 빼어났습니다.




칠선계곡 서암정사 주소: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279-2

 칠선계곡 서암정사 전화:055-962-5662


2008/10/13 - (경남여행/함양여행)지리산 칠선계곡 비선담 단풍 여행. 지리산 칠선계곡의 비선담에도 붉은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2008/10/17 - (경남여행/함양여행)지리산 칠선계곡 산행. 3시간짜리 칠선계곡을 더 길게 산행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2010/03/14 - (경남여행/함양여행)지리산 휴천 법화산 법화사. 지리산 천왕봉의 바람소리도 정겹게 들리는 법화산의 법화사

2009/08/13 - (경남여행/함양여행)오도재 지암재. 한국의 아름다운길 100선 함양 지암재




벽송사 갈림길에서 서암정사는 왼쪽 길이며 “경건한 마음가짐 그 얼굴 거룩하고 어지러운 행동거지 스스로 몸을 더럽힌다”가 조각된 돌기둥의 글을 읊조리며 마음을 씻어 봅니다.



그리고 일주문인양 곧 만나는 큰 두 개의 돌기둥에도 '백천강하만계류(白千江河萬溪流) 동귀대해일미수(同歸大海一味水)'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뜻을 옮겨보면 “백천 강물 만 갈래 시내가 흘러 바다에 돌아가니 한물 맛이네”라며 나중에는 모두 ‘똑 같아진다’는 아리송하지만 불가의 뜻을 생각하며 서암정사 경내로 들어섭니다.




봄꽃이 입구를 화사하게 바꾸어 꼭 무릉도원을 보는 듯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서암정사 안내도를 뒤로하면 또다시 갈림길입니다. 같은 값이면 이번에는 절을 지키는 사천왕상이 있는 대방광문으로 향합니다.




사천왕상은 수미산 정상에 있는 제석천을 받들며 불법에 귀의하는 대중을 지켜주는 호법신입니다. 비파를 들고 있는 지국천왕, 용을 들고 있는 광목천왕, 검을 들고 있는 증장천왕,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왕이 동서남북을 지키며 손에는 각각의 상징물을 들었고 사대천왕, 호세사천왕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같이 모두 험상궂게 생겼으며 서암정사의 사천왕상은 경주 석굴암의 사천왕상을 참고해 조각했다 합니다. 매번 사천왕이 배치된 천왕문을 지나면 죄지은 것도 없는데 마음이 조리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이래서 인간은 한갓 미물에 불과한 게 아닌 가 생각해봅니다.






석문을 통과하면 초라하게 있던 법당 대신에 화려하지만, 전통 불교 건축물과는 조금 다른 대웅전이 기다립니다. 이는 대만 자광사의 후원으로 건립하였으며 2012년에 완공했습니다. 한국 전통사찰 건물로는 잘 볼 수 없는 아(亞)자 형태이며 중층구조에 겹처마를 한 건물입니다.





그리고 금니사경 전시관도 있는데요? 사경은 불경을 베끼는 일을 말하며 먹으로 불교 경전을 베끼는 것을 초본이라 하고 그 위에다 금 가루를 가지고 경전을 입히는 것을 금니사경이라 합니다. 서암정사 금니사경 전시관에는 서암정사 창건주 원응스님의 작품이 전시 중입니다.





스님은 지리산 희생 영가의 명복을 비는 발원을 가지고 시작한 서암정사의 완공을 축원하면서 1985년 수행의 한 과정으로 처음 시작했습니다. 15여 년 만에 80권의 화엄경전 58만7261자의 방대한 금니사경 대불사를 이루었습니다. 고도의 집중력과 탈자나 오자 없이 한 자 한 자 옮기는 고된 수행 작업 때문에 스님은 여러 차례 실명의 위기를 모두 불심으로 이겨 내셨다 합니다.




이번에는 서암정사의 최고 걸작이라는 석굴법당 극락전을 보겠습니다. 서암정사와 이웃한 벽송사는 마천의 칠선계곡 산행 때마다 항상 함께 들렀습니다. 그 당시 석굴에 조각한 서암정사 석불을 보면서 받은 느낌은 경이롭기까지 했습니다. 사방은 물론이고 천정까지 빈틈없이 조각해 놓은 서암정사의 불교 조각 예술품을 볼 때마다 입에서는 알 수 없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서암정사의 창건에 관한 내용은 극락전의 조성 내력에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6·25 한국전쟁에 전국이 전화에 휩싸였고 특히 지리산은 전쟁 전후에도 좌·우의 이데올로기 속에 빨치산과 토벌대의 격심한 요동이 한참 동안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지리산은 전쟁의 아픈 상처를 그대로 간직한 채 대자연의 섭리에 몸을 맡기며 전쟁의 아픈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갔습니다.

 



원응스님은 부산에서의 인연을 정리하고 청산에 묻힐 생각에 심산유곡의 수행처를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다 스님과의 인연지로 벽송사에 닿았으며 당시에 벽송사에서 수행생활은 전쟁 직후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함 그자체였습니다. 마음의 갈등도 여러 번 찾아왔지만, 그때마다 전쟁의 상흔 속에 남아있던 법당의 색이 바랜 새까만 부처님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고 하였다합니다.




그러다 10여 년의 세월이 바람처럼 구름처럼 후다닥 지나갔습니다. 1970년대 초반의 어느 해에 지리산 벽송사 빈터에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스님은 이날도 벽송사에 남은 전쟁의 폐허를 수습하였습니다. 원응스님은 나른한 오후 선정에서 깨어나 잠시 경내를 거닐다가 알 수 없는 기운에 이끌렸습니다. 스님은 흔적만 겨우 남은 묵은 길을 찾아들었다가 그리고 딱 발을 멈춘 곳이 지금의 서암정사터입니다.

 


2008년 10월 서암정사 석굴법당 극락전 사진 입니다





옛 서암정사 모습





스님은 무엇인가에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어 주위를 살피고는 이곳이 부처님의 성지임을 단번에 느꼈다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굴법당 전면인 큰 바위를 마주하고는 그만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의 영산회상과 아미타상을 상상하였고 지극한 마음으로 염원하자 마음 깊은 곳에서 아미타불의 세계가 그려졌습니다.

 



스님은 전쟁의 참화로 지리산에서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상처를 달래고 남북의 첨예한 대립의 벽을 허물고, 부처님의 대자대비함으로 평화로운 사회가 실현되는 발원으로 부처님의 세계인 서암정사 조성을 시작하였습니다. 30여년 만에 스님이 마음속으로 느꼈던 아미타불세계를 석굴법당에 조성하고 오늘날의 서암정사를 완공하게 되었다합니다. 지금의 석굴법당 극락전은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2008년 10월 서암정사를 방문하면서 담았던 극락전 사진을 여기 올렸습니다




극락전의 아름다운 불교 예술 세계를 만나보세요. 이외에 야외에도 불교 예술품이 많이 있습니다. 눈과 마음으로 부처님의 세계를 만나보세요. 서암정사에서의 여행은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728x90

728x90


(진안여행/진안가볼만한곳)마이산 금당사. 절집 여행 마이산 금당사


전라북도 진안의 마이산은 명승지 제12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조선의 태종이 붙인 이름으로 말의 두 귀를 연상하는 마이산은 그만큼 빼어난 산세를 자랑합니다. 그 마이산의 품 안에 자리한 금당사는 마이산도립공원 내에서 가장 큰 사찰로 남부 마이산의 대부분이 금당사의 경내에 포함합니다. 그 크기가 약 42만 8천 평으로 실로 대단한 규모입니다.

 





진안 마이산 금당사 주소: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39-1

진안 마이산 금당사 전화:063-432-4441


2017/04/26 - (진안여행)마이산 탑사·은수사. 흔들릴지언정 무너지지 않는 돌탑 마이산 탑사·은수사

2017/04/15 - (진안여행)마이산 고금당 나옹암. 마이산 전망 일번지 고금당 나옹암을 찾아가다.

2016/04/02 - (전북여행/진안여행)진안 천반산 산행. 천반산의 죽도는 기축옥사를 피해 정여립이 몸을 숨겼던 곳입니다. 정여립 모반 사건의 역사를 추적하는 천반산 죽도 산행.

2011/06/27 - (전북여행/진안여행)진안 명도봉 산행. 오고가는 것은 구름뿐, 햇빛도 반나절밖에 못보는 희안한 계곡을 아시나요-진안 명도봉




금당사의 기록은 삼국유사 제3권 홍법조에 나와 있습니다. 금당사는 현재의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광대봉 기슭의 암반에 서기 650년 백제 시대 의자왕 10년에 무상과 금취 두화상이 고금당에 있는 나옹굴(현재 나옹암 자리)에 금동사란 이름의 열반종 사찰을 창건하고서입니다. 현재의 고금당이 금당사의 시초가 됩니다.

 


그리고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화상이 나옹굴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며 이성계는 도장골에서 백일기도를 한 후 신인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인 금척을 받은 금척천명지가 마이산입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자연석굴인 동굴이라 혈암사란 이름으로도 나타나는 등 마이산의 이름과 같이 금당사도 다양하게 불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때에 절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금동사는 고금당으로, 새 절은 금당사로 절명칭을 교통정리 했습니다. 




마이산은 특이하게 생긴 만큼 신라 때는 서다산, 고려 때는 용출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면서 속금산이라 부르고 다시 태종이 마이산이라 한데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또한, 국난에 처했을 때마다 마이산의 금당사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승군의 사령부로 북상하던 왜군에 금당사에 주둔했던 승군은 전멸당하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많은 전각이 깡그리 불태워졌습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일어난 동학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녹두장군 전봉준의 딸은 마이산으로 몸을 피해 10년 동안 고금당에서 은신했으며 1906년 4월에는 마이산 주필대에서 정재 이석용장군에 의해 호남 최초의 항일의병인 창의동맹이 결성되는 등 마이산은 독특한 산세만큼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이 나라를 지키는 구국의 성지였습니다.

 




그런 금당사가 2000년 이후 사격을 갖추는 불사를 진행하여 대가람으로 변모했습니다. 현재 금당사 소유의 문화재는 먼저 보물 제1266호인 금당사 괘불탱입니다. 1692년인 숙종 18년에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높이는 약 9m에 폭이 약 5m 크기입니다.



천 가운데 관세음보살상을, 좌우에 20구의 작은 보살상을 배치했으며 우리나라 괘불 중에서 화관에 4마리의 봉황이 그려진 것은 금당사 괘불탱이 유일하다 합니다. 명원과 조지연 등이 그렸으며 그만큼 채색이 화려하고 유려한 모습입니다. 가뭄이 오랫동안 지속하면 탱화를 걸어두고 기우제를 지냈으며 그때마다 비가 왔다는 속설이 있는 신령스러운 괘불입니다.




그리고 대웅전의 주불인 금당사 목불좌상입니다. 이 불상은 처음 제작을 할 때 남원 부사의 도움을 받았으며 108명의 스님이 옮겨온 수령 천년된 금강산 은행나무로 조성했습니다. 한 때 도난당했다가 되찾았으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그 기념으로 중국 스님이 조각했다는 이야기도 전하는 불상입니다. 전북 지방문화재 제18호.





이번에는 금당사를 들어서는 입구에 조성된 고려 중기의 석탑입니다. 원래는 연못 가운데 있었으며 남아 있는 부재로 보면 석탑은 오층탑으로 임진란과 병자호란 때 크게 파괴되었습니다. 숙종 때에 현재의 위치에 옮겨 고쳐 세웠습니다. 석탑을 보면 받침대 중간의 돌과 상륜부는 분실된 것을 후대에 새로 만들어 넣었고 구조와 제작수법에서 고려 시대 작품임을 추정하고 있습니다.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22호.






그리고 금당사의 법고인데 현재 금산사 성보박물관에 보관중이며 호남의병 창의동맹 결성 당시부터 3년 동안 의병활동에 북소리를 울렸다 합니다. 이외에도 금당사 주위로는 나옹화상의 전설이 남아 있는 명소가 여럿 있습니다. 용마봉은 나옹화상이 타고 다녔다는 말 이름에서 따왔으며 나도산은 나옹화상이 도를 깨우쳤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 합니다.






728x90

728x90

 

(정선여행/정선가볼만한곳)고한 태백산 정암사, 5대 적멸보궁 태백산 정암사 여행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한곳인 태백산 정암사, 앞 번에 태백산 정암사의 수마노탑 포스팅을 하면서 정암사에 대해 약간 언급했습니다만 이번 포스팅에서 정선군 태백산 정암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정암사 역시 통도사, 법흥사, 봉정암, 상원사와 함께 자장율사께서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정선군 태백산 정암사 주소: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2

정선군 태백산 정암사 전화:033-591-2469


2017/02/07 - (정선여행)태백산 정암사 수마노탑.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정암사 수마노탑 여행.

2017/01/16 - (정선맛집)강원랜드 하이원맛집 메밀촌막국수. 해발 700m 고한, 겨울철 먹어야 제맛인 막국수는 메밀촌막국수가 최고

2016/12/30 - (정선여행/정선가볼만한곳)만항재. 겨울 만항재는 카메라 셔터만 누르면 작품이 된다는 곳.

2011/06/11 - (강원도여행/정선여행)동강 백운산 산행. 구절양장을 여기 두고 한말인가?. 비경의 정선 동강 백운산

2008/12/21 - (정선맛집)하이원맛집 황태명가. 하이원맛집 백운산 맛집 황태전문점 황태명가 정선 700m고원의 황태전문점 황태명가




 

먼저 자장율사께서 정암사를 세우게 된 계기를 알아보겠습니다. 자장율사께서 강릉의 수다사에 주석하면서 문수보살의 친견을 서원하던 차에 하루는 꿈속에서 당나라 유학 시절 오대산 북대에서 범어계를 주던 법승을 만났습니다. 그러면서 자장율사보고 내일 날이 밝으면 대송정에서 만납시다 하며 사라졌습니다. 

 

 

스님이 잠에서 깨어나 대송정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소승을 만났는데 문수보살께서 태백산갈반지에서 만나자 하신다며 전하고 사라지자 다음날 자장은 갈반지를 찾으려 길을 떠났습니다. 태백산 아래에 당도하여 갈반지를 물었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갈반지의 뜻인 갈은 칡을 뜻하고 반은 소반을 뜻해 스님은 제자에게 칡넝쿨을 찾게 했는데 온 산속을 헤매다가 마침내 칡넝쿨이 감겨있는 곳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칡넝쿨 가운데 10마리의 구렁이가 서로 몸을 꼬면서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이곳이 갈반지임을 직감하고 제자들에게 능구렁이를 쫓아내는 화엄경을 독송하게 하자 뱀은 몸을 풀고 사라졌습니다. 그날 밤 자장은 꿈을 꾸었습니다.

 

 

낮에 능구렁이가 나타나 “스님. 그동안 전생의 업을 참회하며 큰 스님을 기다렸습니다. 스님께서 경과 법문을 설하여 저의 몸에 뱀의 허물을 벗겨주시고 저희가 있었던 자리 밑에는 금은보화가 가득하니 절을 세우는데 쓰십시오”하며 사라졌습니다. 7일 동안 자장은 경을 독송하자 마침내 뱀은 해탈하고 죽었습니다.

 

 

 

 

제자에게 그 자리를 파보게 했더니 금은보화가 쏟아져나왔습니다, 스님은 이곳이 문수보살을 친견할 인연지라 생각하고 645년에 석남원을 창건하였으며 오늘날의 정암사 시초입니다. 그리고 스님은 산꼭대기에다 탑을 세우려 했지만, 번번이 탑이 무너져 세울 수 없게 되자 백일기도를 올렸고 마지막 날밤 하늘에서 칡 세 줄기가 내려와 멈추었으며 현재 멈춘 자리에 수마노탑과 적멸보궁, 법당이 세워졌습니다.

 

 

 

 

태백산 정암사로 많이 알려졌지만 갈래사로도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며 여기 지명 또한, 갈래가 되었습니다. 자장율사는 칡 세 줄기가 내려온 곳 중 한 곳인 천의봉 아래에다 수마노탑을 세웠습니다. 수마노탑은 서해 용왕이 물 위로 운반하여 보낸 마노석을 쌓은 탑에서 유래합니다. 정암사 경내에서 석교인 일심교를 건너 돌계단을 100여 미터 올라야 합니다.

 

 

 

 

천의봉에서 내려온 급경사 능선을 깎아 축대를 쌓고 그 위에다 수마노탑을 세웠으며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입니다. 이 탑은 통일신라의 거대한 모전석탑 형태에서 정제되고 정교한 수법으로 쌓았으며 옥개석과 우각, 추녀 밑의 상향을 보면 고려 시대 양식을 보입니다.



또한, 청동제로 만든 상륜부의 정교함과 전탑 아래 배례석의 구름 모양인 안상과 연꽃무늬인 연화 조각 수법 등이 고려시대 모전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마노탑은 1972년에 해체 복원되었습니다. 복원 이전에는 전탑의 파손 상태가 매우 심했습니다.



 

해체를 하면서 3층 옥신에서 기단부 사이에 5개의 탑지석을, 기단맨 아랫부분에서는 청동합과 은제외합, 금제외합 등의 사리장엄구가 함께 나왔다 합니다. 여러 번 수리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현재의 전탑 모습은 1653년에 중건되었으며 탑지석에 나와 있다합니다. 정암사 수마노탑은 보물 제410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수마노탑 아래에다 적멸보궁을 세웠습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하면서 참배하기 위한 공간으로 건립한 법당입니다. 극락교를 건너면 이곳은 적멸궁의 현판이 걸렸습니다. 그 뜻을 보면 “번뇌가 사라져 깨달음에 이른 경계의 보배로운 궁전”이라 합니다. 저 또한 불교도이지만 그 뜻은 심묘할 뿐입니다.

 

 

수마노탑에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했기 때문에 적멸궁에 따로 부처님을 모시지 않았으며 그 대신 선덕여왕이 자장율사에게 하사했다는 금란가사를 보관해왔습니다. 그러나 금란가사는 아쉽게도 현재에는 볼 수 없습니다. 1975년 11월 어느 날 도둑이 들어 현재까지 찾지 못한 상태라 합니다.

 

 

적멸궁은 천의봉 능선 끝에 있으며 서쪽을 향한 법당 앞에서 좌·우 두 계곡의 물길이 합쳐져 한 가닥으로 흘러갑니다. 이곳에다 적멸궁을 세웠으며 적멸궁을 받치는 축대는 주변의 자연석을 모아 쌓았습니다. 그 위에다 덤벙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으며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겹처마팔작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정암사 사적에 따르면 1770년(영조46). 1858년(철종9), 1919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현재 강원도문화재자료 제32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적멸궁


자장율사 주장자 


 

 적멸궁 뜰에는 자장율사가 정암사를 창건하고 그가 들고 다녔던 주장자를 꽂아 신표를 남겼습니다. 주목으로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산다’는 나무입니다. 1300여 년의 긴세월을 지나면서 죽었다던 주목은 다시 가지 일부가 살아나 현재 적멸궁 앞을 호위하는 듯 지키고 있습니다.


 

자장율사의 성품을 닮았는지 주목은 동서남북으로 길게 가지를 뻗은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이 자장율사 주장자인 주목을 선장단이라 부른다합니다. 주장자는 무엇인고하니 영화에서 보면 수염을 하얗게 기른 고승이 기묘하고 무겁게 보이는듯한 나무지팡이를 들고있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지팡이가 주장자입니다.



이는 스님이 좌선 또는 설법을 할 때 손에 들고 다니는 지팡이며 불법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가끔 유명 사찰을 가다 보면 고승이 자신의 지팡이를 땅에 꽂았는데 훗날 그곳에서 싹이 자라 고목이 되었다는 전설을 보았습니다. 그때는 신기해하며 다시 한번 그 사찰의 역사와 정통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정암사 또한 자장율사의 주장자가 유구한 세월 동안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보면서 천년사찰 정암사를 다시 한 번 더 보게 되었고 자연의 경외함까지 생각하게했습니다. 스님이 들고 다니는 주장자 윗부분에는 6개의 방울이나 쇠고리를 달아 소리를 내게 했는데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방울이나 쇳소리를 듣고 벌레나 미물이 발에 밟혀 죽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함이라 합니다. 주장자에 달린 6개의 쇠고리는 육환장이라고도 하며 육도 중생이 모두 해탈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정암사 계곡은 열목어 서식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정암사가 세계 열목어 서식지로서는 최남단에 해당하여 천연기념물 제73호로 지정하였습니다.

 


 


시베리아, 몽골 등 추운 지방인 북방계 어종으로 항상 수온이 20도 이하에서만 서식하는 물고기이며 이곳 정암사 계곡의 물이 그만큼 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눈에 열이 많아 항상 눈알이 빨개서 열목어라 불리고 찬물에다 눈의 열을 식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정암사 수마노탑

 

 

필자가 정암사에 들렀을 때 한참 관음전 중창 불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황금색을 띈 관음전 중창, 육화정사, 자장각, 삼성각, 목우당, 범종루, 적멸궁, 일주문, 수마노탑 등 많은 전각이 정암사 경내를 꽉 채웠습니다. 정암사 홈페이지를 보면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멀리 세속의 티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다”란 뜻의 정암사를 보면서 사방팔방 높은 산이 호위하는 괴괴한 정암사를 보면서 그 이름이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참고:정암사 홈페이지

728x90

728x90


(경산여행/경산가볼만한곳)구룡산 반룡사. 원효와 설총, 요석공주의 설화가 살아 숨쉬는 경산 구룡산 반룡사 여행.


경상북도 경산의 반룡사를 여행하고 왔습니다. 반룡사는 구룡산과 발백산 기슭에 자리한 사찰로 심산유곡에 둘러싸여 하늘만 빼꼼하 게 열려 선계가 따로 없는 곳에 자리했습니다. 반룡사로 이름한 사찰은 우리나라에 3곳 있으며 경북 고령 미숭산의 반룡사보다 더욱 유서 깊은 명찰입니다.





경산 반룡사 주소: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용전리 118-2

경산 반룡사 전화:053-852-1919


2016/02/06 - (경북여행/경산여행)삼성현역사문화공원 삼성현역사문화관. 경산시 남산면 삼성현 역사문화공원의 삼성현역사문화관에서 원효, 설총, 일연을 만나다. 2편

2016/02/03 - (경북여행/경산여행)삼성현역사문화공원과 삼성현역사문화관. 삼성현 역사문화공원 문화관에서 원효, 설총, 일연을 만나다. 1편

2016/01/23 - (경북여행/경산여행)경산 삼성산 산행. 원효, 설총, 일연선사의 고장 삼성현. 경산 삼성산 최고의 수질을 자랑하는 상대온천에서 온천산행 추천.

2016/11/10 - (경주여행)경주 분황사 여행. 가보지 않아도 가본것 같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석정, 화쟁국사비부, 보광전의 약사여래입상을 만나다.

2016/11/09 - (경주여행)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 최초의 석탑이자 유일한 경주 분황사 9층석탑을 여행하다. 분황사모전석탑




이곳 경산의 반룡사는 신라 문무왕(재위 661~680) 때에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원효대사(617~686)께서 창건한 사찰입니다. 원효는 압량인 이곳 경산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조씨는 '유성이 품속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원효를 잉태해 밤나무가 많은 율곡을 지나다 갑자기 산통을 느껴 큰 밤나무 밑에서 원효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15세에 어머니를 갑자기 여의자 충격을 받아 출가 하게 됩니다. 661년 문무왕 1년에 의상과 당나라 유학길에서 무덤 속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모든 일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초의 진리를 깨달아 그길로 유학길을 포기하고 혼자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원효는 선덕여왕이 창건한 경주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많은 책을 저술하였고 백성을 찾아다니는 불교 포교에 힘써 대승불교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원효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느냐,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하며 노래를 하고 다녔지만, 태종무열왕(재위 654~661)만 원효의 뜻을 알고 그를 궁으로 오게 했습니다.

 


원효는 소식을 듣고 태종무열왕을 만나기 위해 궁으로 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입고 있던 옷이 다 젖자 무열왕은 원효를 바로 요석궁에 보내어 젖은 옷을 말리게 했습니다. 이때 요석궁에는 과부가 된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가 궁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날 원효는 요석공주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고 열 달 뒤 요석공주는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분이 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3문장가인 설총입니다. 원효는 그길로 파계하여 소성거사라 자신을 부르며 노래로서 민중 속을 파고들어 불법을 전파합니다.



요석공주는 설총을 원효의 고향인 이곳 경산에서 낳았으며 설총을 데리고 원효가 창건했다는 구룡산 반룡사에 머물렀습니다. 김춘추는 공주와 외손자가 보고 싶으면 수시로 왕후와 함께 구룡산의 고개를 넘어 반룡사를 찾았는데 태종무열왕이 넘었던 고개라 하여 지금까지도 왕재라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어린 설총은 반룡사에서 성장하였으며 후에는 이두법을 집대성합니다.

 


원효가 창건했으며 설총과 요석공주가 머물렀던 반룡사는 태종무열왕의 후원을 등에 업고 대 사찰이 된 것은 자명한데 현재 반룡사는 오래된 문화재는 찾을 수 없고 가루가 될 정도로 처참하게 파괴된 석물의 부재들만 천년 가람 반룡사의 영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는 화엄 천태종의 고승 원응국사가 이곳에 주석하였으며 고려 11대 문종 때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현재 반룡사의 당우를 보면 모두 최근에 불사 되었으며 왜 오래된 건물은 하나도 남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요???





반룡사는 고려말에 쳐들어 왔던 몽골과 1592년 조선의 임진왜란으로 한순간에 모두 불타버리자 1641년인 인조 19년에 계운과 명언 두 대사에 의해 다시 한 번 도약을 하며 산내 암자로 내원암, 벽운암, 대적암, 은선암, 안적암 등 다섯 암자가 중창 또는 창건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에 의해 반룡사와 암자의 그 많은 당우는 모두 소실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 몇 동의 당우로 겨우 명맥만 이어오다 지금으로부터 약 80년 전에 또다시 일어난 화재로 반룡사는 전부 불탔습니다. 현재 반룡사의 당우는 문화관광부와 경상북도, 경산시의 지원과 신도의 불심으로 하나하나 복원 중에 있습니다.

 




반룡사는 화재로 소실될 때 급한 나머지 대웅전의 삼존불중 목조 관세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을 청도의 모 사찰에 옮기게 되었는데 되돌려 받지 못하였고 범종은 포항 보경사의 서운암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1991년에는 반룡사에 남아 있던 아미타불마저 도난당하는 수난을 당하며 아직 찾지못하고 있습니다.





반룡사 앞에는 창건 당시 흔적인 많은 부재가 널브러져 진열되어 있습니다. 부재 하나하나가 당시 반룡사의 규모와 역사를 말해주는 게 지금보면 모두 예사 모습이 아닙니다. 그만큼 반룡사는 신라 왕실의 기원사찰로서 대사찰의 규모였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728x90

728x90


(의성여행/의성가볼만한곳)경상북도 의성 비봉산 대곡사. 의성 대곡사 여행을 하다.


경상북도 의성군을 여행하면서 찾아간 비봉산 대곡사. 외진 곳의 사찰로서는 아주 대찰이었습니다. 비봉산 대곡사는 1368년 고려 공민왕 17년에 당시 선승이었던 지공·나옹선사 두 분의 왕사가 중건했으며 원래는 대국사라 불렀습니다.

 




의성 대곡사 주소: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봉정리 895

의성 대곡사 전화:054-862-4222


2016/11/15 - (의성군여행)의성군 비봉산 대곡사 대웅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보여주는 의성 대곡사 대웅전 여행.

2016/11/07 - (경북의성여행)대곡사 적조암. 비봉산 대곡사 적조암의 독특한 건축양식인 구포루 인법당.



지금 대곡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한국 향토사 연구 전국협의회’의 1989년 향토사연구 자료집에 대곡사의 창건연대를 신라말과 고려 초로 확신하고 1196년 8월 17일의 백운 이규보가 지은 ‘십칠일입대곡사 탐방시’와 대웅전 앞의 다층석탑 양식 그리고 1960년에 대곡사 텃밭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후기 양식의 금동불상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대곡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겪으면서 완전히 소실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다 1605년인 선조 38년에 탄우대사가 대곡사 재건을 시작하면서 중창하였으며 1687년 숙종 13년에 대전 선사께서 중건하면서 대곡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전성기의 대곡사는 9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습니다. 모두 전란으로 전소와 황폐되었으며 지금은 산내암자로 적조암만 남아 있습니다.

 




현재 대곡사에 남아 있는 문화재는 대곡사 대웅전 (보물 제1831호), 경상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61호 대곡사 범종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9호 대곡사 명부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5호 대곡사 다층석탑이 있으며 부속건물로 나한전, 산신각, 종무소, 요사채가 있습니다. 의성 대곡사을 들어서는 일주문의 장대함에 먼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굵은 두 기둥에 달아 올린 공포의 화려함은 천년고찰 대곡사의 풍모를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먼저 만나는 게 대곡사 범종각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2층의 누각 형태로 보아 대곡사 범종루가 맞는 것 같습니다. 현재 사찰의 범종은 따로 범종각을 지어 그곳에다 달아 놓았으며 현재는 대곡사의 출입문을 지키는 누각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대곡사 범종각은 1368년 고려 공민왕 대 처음 건립됐습니다.

 

대곡사 범종각



그러나 1598년 정유재란 때 대부분 소실되면서 범종각 또한 불탔습니다. 지금의 범종각은 대곡사를 중창한 탄우대사와 중수한 태전선사에 의해 건립됐다 합니다. 범종각은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으로 중층의 누각입니다. 공포는 외2출목에 내3출목을 두었으며 건축양식을 보면 조선 후기에 지어졌습니다. 아마 대웅전의 건축을 범종각에 접목하여 모방한 것으로 보이며 종각 안에 있던 범종은 용문사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대곡사 다층석탑





대곡사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게 개인적으로 대웅전과 다층석탑입니다. 이런 형태의 석탑은 이곳 외에도 두 번 정도 더 본 것 같은데 지금 기억이 잘 나지 않으나 아주 특이한 석탑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다층석탑 기단부는 45cm의 화강암이며 점판암의 연화 대좌로 된 탑신부는 20cm, 탑신의 높이는 108cm입니다. 그러나 상륜부는 현재 유실된 상태입니다.

 








다층석탑의 전체 높이는 173cm로 12층이며 6층과 7층 옥개석 간의 체감비율이 차이가 다른 층에 비해 급격한 것은 그사이의 한 층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처음 만들어졌을 때 13층의 석탑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다층석탑은 각층 옥신석이 남아있지 않으며 옥개석도 부분적으로 손상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초기의 청석탑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남아 있는 이런 형태의 탑은 12기 정도로 문화적 가치가 아주 높은 편입니다.




대곡사 명부전



대곡사 명부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이 건물 또한 1605년과 1687년에 탄우와 대선 두 스님에 의해 중창·중건하였지만, 현재 명부전의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건물의 구조와 건축양식인 오량과 겹처마 맞배지붕을 보면서 17~18세기의 형식으로 지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성의 비봉산 대곡사는 의성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행지입니다. 

 











대곡사 대웅전












728x90

728x90


(의성군여행/의성군가볼만한곳)의성군 비봉산 대곡사 대웅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보여주는 의성 대곡사 대웅전 여행.


의성군의 비봉산 아래 고찰인 대곡사 여행을 하고 왔습니다. 대곡사는 산이 낮지만, 봉황이 날개를 펼친 듯 옹골찬 모습을 한 비봉산 기슭에 1368년 고려 공민왕 17년 지공스님이 원나라와 고려를 왕래하면서 불법을 펼친 것을 기념해 지은 절이라 합니다. 이는 처음 세운 목적에 따라 대국사로 불렀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대국사는 대부분 소실되었습니다.





의성 대곡사 주소: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봉정리 894

의성대곡사 전화:054-862-4222


2016/11/07 - (경북의성여행)대곡사 적조암. 비봉산 대곡사 적조암의 독특한 건축양식인 구포루 인법당.


 


그러다 1605년 선조 38년에 탄우대사가 중창하였는데 그 뒤부터 대곡사로 절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대곡사의 창건에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1960년 대곡사 앞의 작은 텃밭에서 통일신라 후기 것으로 보이는 금동 불상이 나왔고 고려 초기로 보이는 대웅전 앞의 다층석탑, 백운 이규보의 대곡사 탐방시구 등을 보면서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의성 비봉산 대곡사에는 현재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대곡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문화재는 대웅전입니다. 대웅전은 원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0호였다가 보물 제1831호로 2014년 6월에 승격 지정되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보물로 승격된 대곡사 대웅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왜 보물로 지정되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한데 대곡사 대웅전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 규모의 다포계양식의 팔작지붕으로 5량가 건물입니다. 1605년 탄우대사가 중창했던 대웅전을 1687년 숙종 13년에 태전선사께서 다시 중건했습니다.





대웅전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불단이 뒷줄의 평주선 보다 뒤쪽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불단의 위치가 평면구성이 같은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인 불전에서는 18세기 이후 점차 줄어드는 추세로 대곡사 대웅전은 17세기 후반인 중건 당시의 불교 건축물의 건축사적 흐름을 읽게 해줍니다.





또한 후면 서측협칸에는 창호 중간에 기둥을 두어 창문을 두 개처럼 보이게 하는 영쌍창구조이며 좌우 측면과 배면의 벽체에는 중인방 없이 세로 벽선을 세웠으며 정면과 양 측면의 기둥 아래쪽에는 쪽마루를 달아 낸 흔적인 큰 구멍이 남아 있습니다.





불전 정면에 마루를 둔 사례나 영쌍창과 세로 벽선은 18세기 이전 건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오래된 양식입니다. 다포계 형식의 포작은 내외 3출목이며 건물의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 면 기둥 간격을 똑 같게 하고 주간에 두 구씩의 공포를 배치하여 지붕 하중을 안정되게 받게 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건축공간계획과 구조계획이 함께 설계된 세심하고 능숙한 기법을 볼 수 있습니다. 기둥과 보 등의 부재를 보면 섬세한 가공이나 미적인 의장성은 최소화하고 가구의 구조는 간결하며 명확하게 결구된 양식입니다.





한마디로 대곡사 대웅전의 특징은 공포의 동일한 내외출목수, 배면 개구부의 영쌍창, 불단의 배치와 건의 마루 흔적 등을 보면서 대곡사 대웅전의 중건 당시 시기적 경향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




대곡사 대웅전은 의성지역의 불교사찰이 부흥하던 시기의 건축 양식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건축사적으로 대단한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화재청 보도자료 참고)












 

728x90

728x90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분황사 여행. 가보지 않아도 가본것 같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석정, 화쟁국사비부, 보광전의 약사여래입상을 만나다.


경주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분황사모전석탑 여행을 하면서 이번에는 분황사 모전 석탑을 제외한 분황사 내에 있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원효대사의 비석을 받쳤던 화쟁국사비부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로 신라 호국용의 전설이 있는 석정, 그리고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보광전의 약사여래입상을 소개하겠습니다.





분황사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2

분황사 전화: 054-742-9922




그러나 먼저 분황사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가야겠습니다.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창건하였습니다. 창건과 함께 모전 석탑이 완성되었는데 당대의 유명한 선승인 자장율사와 원효대사가 주석하면서 분황사의 사격을 더 높였습니다


분황사 석정


솔거가 그렸다는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 하며 755년 신라 경덕왕 14년에 강고내말이 구리 306,700근으로 약사여래상등을 주조하여 봉안했던 약사여래좌상은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또한, 분황사는 당간과 지주, 중문, 석탑, 3금당, 강당, 회랑을 갖춘 대가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말인 1238년 고종 25년에 몽골군과 조선 시대에 일어난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분황사의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습니다.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분황사는 두 전란이 끝나고 1609년인 광해군 1년에 중창하였으며 보광전에는 약사여래입상이 현재 분황사를 지키고 있습니다. 먼저 분황사의 석정을 보겠습니다. 신라 호국용의 설화가 전해오는데 돌우물로 겉면은 8각이며 내부는 둥근 원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우물을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전합니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아래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로 각각 불리는 우물에는 통일신라를 지킨다는 호국용이 살고 있었습니다. 때는 원성왕 11년인 795년입니다. 중국 당나라 사신이 와서 각각의 우물에 있는 호국용을 물고기로 만들어 잡아갔습니다.



어느 날 두 여인은 이 사실을 알고 원성왕을 찾아와 남편을 찾아달라 부탁하였습니다. 이에 원성왕은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이 잡아간 물고기로 변한용을 다시 돌려받아 자신들의 우물에 각각 풀어주었습니다.



이 우물은 통일신라 시대에 설치한 우물로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불교 탄압으로 고려까지 국교로 이어온 불교가 유교에 억압을 받았습니다. 급기야 사찰 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날라갔으며 이 석정에다 처박아 넣었던 아픔이 있습니다. 현재 통일신라의 돌우물 중에서 가장 크며 오늘날까지 우물로 사용될 만큼 상태가 깨끗하다 합니다.

 


이번에는 인근의 원효대사 받침돌로 사용된 분황사 화쟁국사비부입니다. 화쟁국사비는 1101년인 고려 숙종 6년 8월에 내린 조서에 분황사에 세워졌습니다. 숙종은 원효가 동방의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원효대사를 칭송하는 비석이나 시호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대상화쟁국사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유사가 비를 세우게 했습니다.



현재 비신은 사라지고 없으며 비 조각만 한두 개씩 발견되어 화쟁국사비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합니다. 비를 꼽았던 비대석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인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이 음각되어 있으며 직육면체인 비대에 비신을 꽂는 직사각형의 홈이 패여 있습니다. 이번에는 보광전의 약사여래입상입니다.


분황사 보광전 약사여래불


보광전은 1998년 3월에 수리하면서 건물을 해체하였습니다. 그때 벽화를 볼 수 있었으며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다는 기록과 1680년 5월에 중건하였으며 약사여래상은 만력 기유년인 1609년에 구리 5,360근으로 주조하여 봉안했다고 상량문에 나와 있다 합니다.

 


약사여래입상의 높이는 3.45m로 1800년대에 만들어진 청동제 불상입니다.  왼손에 들은 건칠제 약함 뚜껑 안쪽에 “건륭 39년 을미 4월 25일 조성야 “란 붉은 글씨가 남아 있으며 이는 1774년인 영조 50년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입상은 처음에는 755년 강고내미가 만들었다고 알려졌지만 원형은 거의 파괴되어 조선시대에 들어와 새롭게 보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분황사 약사여래입상은 얼굴이 둥글고 넓으며 낮은 상투 모양이 표현된 머리에는 석회를 뭉쳐 만든 나선형 머리카락을 부착하였습니다. 





양 어깨에 걸친 법의는 두껍게 처리했는데 이는 장대한 신체와 조화를 잘 이루고 있습니다. 대의 사이에 화형으로 접고 띠를 두른 군의가 ‘U '자형으로 층단을 이루며 흘러내리다가 무릎 밑에 이르러 3단으로 접혀 있습니다.



대좌는 아무런 조식이 없는 판석으로 대신하고 불상 앞에 놓인 석제 불단은 사천왕상이 새겨진 통일신라 시대의 탑몸돌의 받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불상의 양식을 보면 조선 후기로 제작연대가 확실하여 불상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문화재 안내판 참고)


 

분황사 관람안내

분황사 입장료: 어른 1,300원, 청소년및 군인 1,000원, 어린이 800원

 분황사 입장시간:08:00~17:30분 

728x90

728x90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 최초의 석탑이자 유일한 경주 분황사 9층석탑을 여행하다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은 무조건 경주였습니다. 국사 시간에 많이 접했던 신라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본다는 즐거움으로 가슴 설레었던 경주 여행은 그중에서도 필수 코스가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쌩쌩 달려 도착하지만, 당시에는 고사리 같은 손을 맞잡고 걸어서 석굴암을 올랐습니다.





분황사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로 94-11(구황동)분황사



또한, 불국사도 여행하였고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분황사였습니다. 이를 두고 흔히 경주 3대 여행지라 했습니다. 경주여행에서 꼭 빠지지 않고 본다는 분황사 9층 석탑은 불국사와 석굴암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어린 시절 저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초등학생의 어린 마음에 아무리 봐도 3층뿐인데 왜 9층 석탑이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며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과 같은 석탑이라 하는데도 전혀 모양이 달라 이상하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그저 아주 특별하구나 하며 뇌리에 강하게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게 벌써 40년도 훨씬 전 일입니다.



경주는 제가 태어난 고향입니다. 그 때문에 매년 한두 번씩 여행 삼아 찾아갑니다. 그때마다 분황사는 강한 뇌리감 때문인지 가보지 않아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해 항상 빼놓고 여행을 했습니다. 이제 성인이 되어 우리 문화재 찾는 것을 좋아해서 여러 곳의 탑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탑의 특성도 알게 되었고 덩달아 분황사 9층 석탑을 모전 석탑이라 부르는 것과 그 재질과 왜 9층 석탑이라 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경주 분황사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가보지 않아도 가본 곳 같은 분황사라 초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처음 가봤습니다.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모습과 분황사는 그대로 똑같았습니다. 그만큼 나에게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분황사는 신라 시대 634년인 선덕여왕 3년에 창건하였고 분황사 9층 석탑도 세워졌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을 보드라도 이웃한 황룡사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큰 규모로 보이지만 지금 분황사는 9층 석탑을 빼면 너무나 초라한 모습입니다.



분황사는 분황사 9층 석탑인 모전석탑이 분황사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덕여왕 시절인 창건 당시의 분황사는 당대의 선승인 자장율사와 원효대사가 주석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643년 당나라 유학 중 왕명을 받고 자장율사는 대장경 일부와 불전에 필요한 번당, 화개 등을 들고 귀국길에 오릅니다.



이에 선덕여왕은 분황사에 머물게 하면서 대국통의 벼슬을 내렸습니다. 또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원효는 분황사에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원효가 죽자 그의 아들인 설총은 원효의 뼈로 소상을 만들어 이곳 분황사에 모셨으며 소상은 고려 시대까지 남아 있었다 합니다.

 


당시 선덕여왕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조용한날이 없었습니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치열함 속에 선덕여왕은 국교인 불교에 의지하며 부처님의 힘으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 9층 석탑의 거대한 탑을 세웠으며 이로써 신라왕실의 권위를 더욱 굳건히 하고 백제와 고구려에 국력을 과시하는 포석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분황사 9층 석탑은 3층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게 9층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정말 웅장하였을 것 같습니다. 아쉽게도 고려 말 몽골의 침입과 조선 시대 임진왜란으로 분황사 9층 석탑은 파괴되었고 남아있던 전각 대부분도 소실하였다는 기록이 동경잡기에 있습니다. 이번 분황사 포스트는 분황사 모전 석탑입니다.



그 외 분황사에 남아 있는 원효대사 비석 받침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화쟁국사비부와 신라 호국용의 설화가 있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석정, 그리고 보광전의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약사여래입상은 따로 소개하겠습니다.







분황사 9층 석탑은 화강암 재질인 기존 석탑과는 형태가 다르게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쌓아 만들었다 하여 이를 모전 석탑이라 합니다. 모전 석탑은 중국에서 유행했던 양식이 신라의 석탑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통일신라로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인 화강암의 석탑으로 바뀌었습니다.





분황사 모전 석탑을 보면 자연석을 다듬은 막돌을 1.06m의 높이로 쌓아 그 기단 위에 넓은 화강암을 바닥 돌로 삼았습니다. 바닥은 정사각형의 형태로 한 변의 길이가 대략 13m이며 그 위에 벽돌 모양의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전탑입니다. 1915년 일제는 허물어진 분황사 9층 석탑을 수리한다고 해체하여 지금의 상태로 만들어 현재 3층 석탑이 된 연유입니다.

 




당시 2층과 3층 사이에는 돌로 만든 함속에 사리장엄구가 들은 은제 사리함 등이 나왔다 합니다. 1층 탑신의 네 곳에는 불상이 들었던 것으로 보이는 감실을 두었으며 출입구가 있습니다. 출입구 좌·우에는 사천왕인 인왕상을 두었는데 근육의 볼륨감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인왕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출입구에는 여닫는 석문을 달았습니다. 그리고 기단의 네 귀퉁이에는 동물상을 배치했으며 왼쪽은 사자와 흡사하고 오른쪽은 암사자를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추어 눈에는 물개와 흡사한 모습입니다.









이는 불국사의 다보탑에 배치한 사자 석상과 같은 이치로 불교에서 불탑을 수호하는 동물은 사자입니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사자상도 그와 같은 의미로 보입니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신라 석탑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자 신라 시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석탑이며 현재 국보 제30호입니다.














 

728x90

728x90


 

(포항여행/포항기볼만한곳)오어사. 포항에서 가볼만한 산사 운제산 오어사 여행.


포항 운제산 오어사는 신라 진평왕 때 창건된 천 년도 훨씬 넘은 고찰로 자장율사에 의해 창간되었다 합니다. 처음에는 창건과 함께 항사사라 불렀습니다. 오어사의 사찰명에서 재미있는 전설이 삼국유사 제4권 의해편에 전합니다.





☞2016/09/30 - (포항여행/포항가볼만한곳)포항 운제산 오어사 자장암.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는 운제산 오어사 자장암 절집구경. 자장암

2016/09/27 - (포항여행)운제산 오어사. 1300여년전 원효대사께서 쓰든 삿갓과 보물 제1280호 오어사 동종을 포항 오어사에서 만나다.




그 내용을 보면 혜공대사와 원효대사가 이곳 운제산에서 수행한 일화입니다. 혜공은 지금의 오어사인 항사사에 머물었으며 원효대사는 산자락에다 초막을 짓고 수행에 정진했습니다. 그 당시 혜공은 당나라에서 부처님의 전업을 잇는 유학을 다녀와 70여 명의 대중을 모아놓고 이곳 항사사에서 불법을 전하며 지냈습니다.




혜공은 원효가 중국으로 유학길에 오른다는 소문을 듣고 원효를 시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혜공은 원효에게 “먼 중국까지 가서 부처님의 대법을 깨우치려면 신통한 여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법력이 있는지 한번 알아보자”며 제한을 합니다. 혜공의 제한은 기발하였고 원효도 당장 수긍하였습니다.

 


절 앞 계곡의 물고기를 가르치며 각각 물고기를 한 마리를 잡아 삼켜 대변을 본 뒤 살아서 움직이는 물고기를 이기는 거로 하자며 두 대사는 물속에 첨벙 뛰어들어 각각 산 물고기를 한 마리 잡아 삼켰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는 죽어서 나오고 한 마리는 힘차게 헤엄을 치고 노니는 것을 보고 두 대사가 서로 “저게 내 물고기다”라며 서로 자기 물고기가 살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 뒤 항사사는 나오(吾)자에 고기어(魚)자를 써서 오어사(吾魚寺)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도력이 뛰어났던 두 고승도 내기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가 봅니다. 서로 내가 이겼다고 하니 말입니다.


오어사 대웅전


어찌했던 원효는 유학길에 두 번 올랐다가 한번은 고구려군에 잡혀 실패하고 한번은 의상과 함께 다시 당나라로 가던 중 동굴에서 잠을 자다 목이 말라 바가지에 든 물을 아주 맛있게 마셨는데 다음날 깨어나 지난밤 맛있게 먹었던 물이 해골바가지에 담겼던 물임을 알고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닫고 그길로 유학길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갑니다.



두 고승이 머물렀다는 포항 운제산의 오어사는 자장과 의상대사 등 신라의 4대 성인이 수행한 사찰이며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도 이곳에서 머물렀습니다. 지금이야 주변에 포항제철 등이 들어서서 사람들로 붐비지만, 당시에는 아마 절해고도의 정적만 감돌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님들의 용맹정진하는 수행공간으로는 아주 좋았을 것이며 주변의 산세 또한, 금강산이 따로 없을 정도로 빼어나 스님의 수행장소로는 최적이었던 가 봅니다. 운제산의 산 이름도 참 예사롭지 않습니다.



현재 오어사가 있는 주변을 보면 바위봉우리가 병풍같이 둘러졌는데 원효와 의상대사는 오어사가 마주 보는 계곡 건너 벼랑에서, 자장과 혜공은 지금의 자장암이 있는 바위벼랑 꼭대기에서 각각 수행하였고 이들은 구름을 불러모아 사다리를 만들어 서로 내왕해서 ‘구름사다리산’이라는 뜻의 운제산(雲梯山)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자장과 원효, 의상 등 모두 중국 종남산의 운제사에서 공부를 했거나 그에 관련된 전설이 있는 것을 보면 운제산이란 이름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오어사의 유물 박물관에는 관심을 끌게 하는 유물이 있습니다.


원효대사 삿갓

원효대사께서 사용했던 삿갓과 고려 시대 범종인 오어사 동종입니다. 원효대사 삿갓은 7세기로 추정하는데 1,300년의 시공을 뛰어넘었어 그런지 그 형태만 남아있으도 삿갓임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유구한 세월을 보여주는 듯 해어진 삿갓은 종이와 실로 짓고 안에는 솜을 넣고 바깥에는 아주 가는 풀뿌리로 만들었다 하니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대나무를 가늘 게 쪼개어 만든 느낌입니다.


오어사 동종






오어사의 중심건물은 대웅전입니다. 석가 삼존불을 주불로 모셨는데 언제 대웅전이 지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대웅전 상량문에 보면 1741년 영조17에 중수한 것으로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이며 포작은 3출목의 다포형식으로 1985년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88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52호로 승격 지정되었습니다.



대웅전 내부에는 주존불인 삼존불은 3단의 수미단 위에 봉안하였고 그 뒷벽에 후불탱인 불화를 걸었습니다. 또한, 삼존불을 모신 천장쪽으로는 연꽃봉우리를 조각한 닫집을 달았는데 화려한 게 웅장하며 분위기 또한 엄숙합니다. 천정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여 연꽃무늬로 화려하게 단청을 했으며 좌우로 조각된 두 마리의 용은 대웅전을 더욱 위엄있게 만듭니다. 



오어사의 대웅전은 내부에도 많은 공을 들였지만, 바깥에도 정교한 조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공포는 외2출목으로 구성했는데 밖으로 돌출된 보머리는 봉황과 귀포의 상부에는 용머리를 조각하여 대웅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대웅전의 앞쪽에 3칸의 문은 맨 밑에 청판, 가운데 꽃살, 위쪽에 빗살문양으로 삼분합문으로 구성했으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살은 조금씩 다른 모습입니다. 이는 꽃이 피는 모양을 다르게 표현한 세세한 조각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포항 여행에서 사찰을 여행한다면 반드시 가야 할 곳 중 하나로 오어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오어사의 산경과 함께 문화재인 오어사 동종, 웅장하면서 정교하고 화려한 오어사 대웅전을 만나보세요. 그리고 천년전의 원효대사 삿갓도 만나는 행운을 누려보세요.


 

728x90

728x90



(포항여행/포항가볼만한곳)포항 운제산 오어사 자장암. 부처님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는 운제산 오어사 자장암 절집구경.


포항 운제산 오어사의 산 내 암자인 자장암은 운제산의 사찰 중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산봉우리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오어사 뒤 깎아지른 수직 절벽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자장암은 밑에서 보면 간이 콩알만큼 쪼그라들 정도로 아찔합니다.







2016/09/27 - (포항여행)운제산 오어사. 1300여년전 원효대사께서 쓰든 삿갓과 보물 제1280호 오어사 동종을 포항 오어사에서 만나다.





오어사에서 자장암 오르는 산길은 거리는 짧지만, 된비알의 오르막이라 처음 오르는 사람은 아주 힘들다 합니다. 그러나 걱정 붙들어 매세요. 자장암은 오천읍 쪽에서는 차를 가지고 오를 수 있도록 도로가 잘 나 있습니다.





자장암은 제비 둥지처럼 작은 터를 아주 적절하게 이용했으며 관음전 나한전 산신각 등의 건물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단연코 수직 단애를 뭉개고 선 관음전이 으뜸의 장소입니다.







신라 시대의 대국통인 자장율사가 이곳에 머물렀던 암자 자장암은 관음전을 돌아가면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습니다. 이곳의 부처님 사리는 태국전 전 풋나지나윙 태국승왕이 보관하고 있던 사리 중 7과를 태국 유학승인 정신 스님이 기증을 받아 불기 2542년(1998년)에 이곳에다 금강계단을 세웠습니다.











자장암에서는 뭐니뭐니해도 관음전 앞에서 오어사로 내려다보는게 압권입니다. 이곳에서 보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은 ‘무섭다’입니다. 간담이 써늘할 정도 까마득하고 오어사에서 올려다보는 자장암의 위상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 준 난공불락의 요새 같습니다.









이름난 고승은 역시 이런 멋진 곳에서 수도를 하나 봅니다. 그래야 득도를 하고 고승의 반열에 오르나 봅니다. 포항여행에서 운제산 오어사와 함께 자장율사의 수도처 자장암도 함께 방문해보세요.


  











 



운제산 자장암


포항 운제산 자장암 주소: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 항사리 34-1

포항 운제산 자장암전화:054-285-0129 

728x90

728x90




☞(문경여행/문경가볼만한곳)사불산 대승사. 사면석불의 공양절인 공덕산 대승사 천년사찰 여행하기.  


문경의 공덕산에는 천년고찰인 대승사가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사불산으로 더 알려져 대승사 일주문 현판에도 사불산 대승사라 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사불산조에 나온 기록을 보면 사불산의 유래는 대승사와 윤필암 사이의 바위봉우리에 신라 시대 진평왕 9년인 587년 갑신년에 큰 돌이 붉은 비단보자기에 싸여 떨어졌는데 사면에 사방여래불이 조각되어 있다 합니다. 이 소문이 흘러 흘러 진평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왕도 기괴하게 생각하여 사면 석불의 바위가 떨어진 봉우리에 올라 친견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진평왕은 이곳에다 사면 석불을 공양하는 절을 짓게 하였는데 그게 오늘날의 대승사입니다.




◆문경 대승사 주위 가볼만한곳◆

2016/09/07 - (문경여행)문경 공덕산 윤필암과 묘적암 암자 여행. 경허, 성철, 청담 등 근대 선승의 수도처 문경의 사불산 윤필암과 묘적암 암자 여행

2016/07/08 - (문경여행/문경 가볼만한곳)문경 대승사 마애여래좌상. 머리에 뿔처럼 꽃무늬를 돋을 새김한 이색적인 불상을 만나다. 대승사 마애여래좌상

2016/07/07 - (문경여행/문경 가볼만한 곳)공덕산·사불산 사불암. 그럴싸한 전설이 정말 잘 어울리는 신비의 세계 사불암 사면석불, 공덕산·사불산 사면석불 사불암을 만나다.








사불암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하여 사불산 또는 역덕산이라 하고 사불암 공양절로 진평왕은 대승사라 이름하였습니다. 대승사는 묘법연화경을 외울 수 있는 자를 주지로 삼았는데 이대승사의 주지가 죽자 그의 무덤에 연꽃이 피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대승사는 1592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소하였습니다. 









그리고 1604년 선조 37년에 중창을 시작하여 1701년까지 근 100년 동안 대승사의 대웅전을 비롯하여 승당, 관음전, 조전, 미륵전, 금당, 십왕전 등 여러 전각을 신축하여 큰 사찰다운 뼈대를 갖추어나갔습니다. 1725년 영조 1년에 의학스님이 삼존불상을 개금하였는데 복장유물로 사리 1과와 705년 신라 성덕왕 4년에 금을 입힌 화엄경 7권이 함께 나왔다 하니 천년 고찰은 틀림없나 봅니다.







그 후에도 종각과 금강문, 천왕문, 일주문을 중건하였고 1831년인 순조 31년에 구담스님이 중창을 하고 9개의 산내 암자를 거느리는 등 대승사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1862년인 철종 13년에 명부전과 응진전을 제외한 대승사의 모든 전각이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의운, 취월, 덕산 스님 등이 중건을 시작하면서 다시 극락전, 회랑, 염불당, 동별당 등 많은 전각을 중건했지만 1956년 또다시 일어난 화재로 명부전과 극락전만 남기고 소실되었습니다.







1960년에 대승사는 남인, 기종, 대휴 스님에 의해 다시 한 번 중창 불사인 삼창을 시작하였습니다. 현재 주지인 철산 스님에 이르기까지 객사, 범종루, 백련당 회랑 등을 복원하면서 대승사의 옛 모습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습니다.


 



대승사의 많은 볼거리 중 가장 눈여겨볼게 보물 제991호인 대승사 금동보살좌상과 보물 제1634호 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입니다. 제가 누런 금붙이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금동불상에만 눈이 가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이외에도 대승사 목각 아미타여래 설법상과 관계문서는 보물 제575호에 지정되어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사실 사찰에서 법당의 본존불을 카메라를 들이대며 사진 찍기가 좀 민망한 곳도 있습니다. 유명사찰은 보통 사진촬영을 금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어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문경의 대승사에도 건물 외관만 사진을 찍고 불상 촬영을 하지 않아 대승사 포스팅을 하면서 너무 허전하여 문경시청 홈페이지의 문화재 사진을 출처를 밝히며 옮겨왔습니다.


 

노주석 






 




 





 

 

대승사 금동보살좌상(사진:문경시청 홈피)


대승사 금동보살좌상은 대승사의 선방에 주존불로 봉안하고 있습니다. 불상의 전체적인 높이는 90cm이며 보관 높이만 15cm에 불두를 포함하면 37cm, 어깨너비는 28cm, 무릎너비 57.5cm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입니다. 특히 머리에는 별도의 금속 보관을 썼는데 화려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사진:문경시청 홈피)


양쪽 귀의 보발은 여러 가닥이 흩어져 어깨를 덮고 있으며 이목구비는 원만한 얼굴에 미간에는 백호를,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습니다. 금동보살좌상의 조성 시기는 “정덕 11년 병자사월개금”의 기록이 남아 있어 1516년인 조선 중종 11년에 개금이 이루어졌으며 불상 조성 시기는 그보다 빠른 15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사진:문경시청 홈피)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사진:문경시청 홈피)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극락전에 봉안된 주존불로 불상 높이는 87.5cm, 무릎 너비가 63cm입니다.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1301년 고려 충렬왕 27년을 전후하여 조성되었음을 복장유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고려 후기의 불상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복장유물에서 수습된 다라니 12매는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조성하면서 불복장되어졌습니다.

 


문경 대승사 주소: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8번지

문경 대승사 전화:054-552-7105

728x90

728x90



☞(양산여행/양산가볼만한곳)양산 천성산 원효암. 천성산 원효암 마애아미타삼존불입상, 천성산 원효암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만나다.



경남 양산의 천성산 산정상인 원효봉 아래 해발 750여m에 선덕여왕 15년인 646년에 원효대사께서 창건한 암자가 있습니다. 암자 이름은 물론 원효대사의 이름을 따와 원효암으로 불리며 920.7m 정상 또한 원효산으로 불리다가 현재는 천성산 원효봉으로 제 이름을 정리한 상태입니다.



2016/09/13 - (양산산행/양산가볼만한곳)천성산 화엄벌. 가을 손님 맞이 천성산 화엄벌 억새 산행, 천성산 화엄벌 산행

2012/09/21 - (경남양산여행)천성산원효암. 원효의 전설이 가득한 천성산 원효암이 암자중 으뜸


 



원효암은 1905년 효은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내원사 말사입니다. 원효암의 현재 당우는 모두 근래에 불사 되어 새로운 모습이지만 원효암의 대웅전 옆 절벽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인 양산 원효암 마애아미타삼존불입상이 섬세한 조각 솜씨를 뽐내며 새겨져 있습니다. 또한, 법당 내부에는 1648년 인조 26년에 조성되었다는 양산 원효암 석조약사여래좌상과 복장유물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먼저 양산 원효암 마애아미타삼존불입상을 알아보겠습니다. 삼존불 입상은 가운데 아미타여래를 그리고 왼쪽에는 관음보살상과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상을 모셨습니다. 양산 원효암 마애아미타삼존불입상은 전체적으로 얕게 조각하여 평면에 가까우며 화화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아미타여래불은 입상으로 밑에서 쳐다보면 상반신보다 하반신이 훨씬 길게 보여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느낌입니다. 좌우 두 보살 상은 본존불을 향해 합장하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원형의 두광을 갖춘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화려한 보관인 긴머리가 어깨를 지나 허리까지 흘러내린 게 아주 유려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위 상단에는 나무아미타불 명문과 대세지보살 오른쪽에 세존응화2933년의 명문으로 주불이 아미타불이며 1906년인 근대 시기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산 원효암 마애아미타삼존불입상의 전체적인 느낌은 한 폭의 불화를 그린 듯 정교하고 섬세하며 안정감이 뛰어난 문화재로 길지 않은 역사에 비해 조각수법이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법당에 봉안된 원효암 석조약사여래좌상과 복장유물입니다. 사찰에서 촬영하기가 가장 껄꺼로운 게 법당 안에 모셔진 불상 촬영입니다. 그것도 종무소나 스님, 불자님이 법당 내부에 안 계시거나 멀리 떨어져 있으면 사진 촬영에 덜 거슬리는 데 가까이 있다면 촬영이 된다고 해도 불상을 담기에는 항상 마음이 무거워 원효암 법당의 석조약사여래좌상 사진도 딱 석 장 찍었는데 석 장 모두 흔들려서 아쉬웠습니다.


 



천성산 원효암 마애아미타삼존불입상






아미타여래불


그래도 아쉽지만, 포스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장이라도 올립니다. 원효암의 약사여래좌상은 높이는 77cm이며 하나의 돌을 조각한 석조불상입니다. 불상 조상기에는 통도사 약사전에 모셔진 것을 통도사 말사였던 원효암에 봉안하였다 합니다.



대세지보살


관음보살


 불상의 머리는 앞으로 약간 숙이며 등은 구부린 상태로 오른손은 아래로 내린 항마촉지인입니다. 왼손은 약사불상의 트레이드마크인 약함을 생략한 게 특이합니다. 그리고 결가보좌한 양다리 사이의 법의 자락은 단면이 두꺼워서 조선 후기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양산 원효암 석조약사여래좌상과 복장유물


복장유물로는 불상조성 발원문과 인쇄본인 다라니경, 오곡, 오향, 오색사를 포함한 후령통 등이 나왔습니다. 조선 후기의 다른 불상과는 다르게 석조불상으로 제작시기가 정확하게 밝혀져 조선 후기의 석불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양산 천성산 원효암 주소:경남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1-1

★양산 천성산 원효암 전화 055-375-4111




728x90

728x90



☞(문경여행/문경가볼만한곳)문경 공덕산 윤필암과 묘적암 암자 여행. 경허, 성철, 청담 등 근대 선승의 수도처 문경의 사불산 윤필암과 묘적암 암자 여행


문경 공덕산에는 천년고찰 대승사와 부속암자인 윤필암, 그리고 묘적암이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윤필암과 묘적암입니다. 공덕산은 사불산으로 더 알려져서 그런지 우리나라 고승들의 수도처로 나옹선사, 근대의 선승인 경허, 성철, 청담스님 등이 머물렀습니다. 윤필암은 1380년인 고려 우왕 6년에 각관스님에 의해 창건하였습니다.






윤필암 주소: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17

윤필암 연락처:054-552-7110

 

2016/07/08 - (문경여행/문경 가볼만한곳)문경 대승사 마애여래좌상. 머리에 뿔처럼 꽃무늬를 돋을 새김한 이색적인 불상을 만나다. 대승사 마애여래좌상


2016/07/07 - (문경여행/문경 가볼만한 곳)공덕산·사불산 사불암. 그럴싸한 전설이 정말 잘 어울리는 신비의 세계 사불암 사면석불, 공덕산·사불산 사면석불 사불암을 만나다.


  

 


그러나 윤필암의 암자 이름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인 신라 시대 원효와 의상이 각각 사불산 자락의 화장사와 미연사에서 수행할 때 의상의 이복동생인 윤필거사가 머물렀던 인연 때문이라 합니다.


 

 윤필암

 

 


대승사 사적에는 1645년(조선 인조 23년)에 서조, 탁장, 양사에 의해 중건했으며 1765년(영조 41년)과 1806년에도 창영 장로와 취운 종백이 각각 중건하였다 합니다 1885년에는 고종의 명으로 창명 스님이 다시 중건했지만, 현재 윤필암 건물 대부분은 1980년대 초에 지어졌으며 비구니스님의 수도 도량입니다.


 

 

 

 


윤필암은 특이하게도 사불전이 있습니다. 사불전은 양산 통도사 등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처럼 부처님을 따로 모시지 않고 사불전의 큰 창문을 통해 내다보면 정면의 바위인 사불암의 네 불상을 주불로 모셨습니다.


 

 


 

사불암 

 



윤필암은 수덕사의 견성암과 오대산의 자장암과 함께 3대 비구니 승방으로 사불전과 관음전 외에는 참관할 수 없으며 사불전 뒤 바위 위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묘적암 


묘적암은 윤필암에서 대략 400m 떨어져 있으며 8부 능선에 위치한 빼어난 조망처로 오래전부터 이곳은 고승들의 수도처로 알려졌습니다. 646년인 신라 선덕여왕 15년에 부설 거사께서 처음 암자 터를 잡았으며 1339년에는 나옹화상 혜근이 출가했던 곳입니다. 나옹이 처음 이곳을 찾아 요연선사께 출가를 청하자 “여기 온 것이 무슨 물건이냐?” 하며 물었습니다. 나옹이 말하기를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왔습니다만 보려 하여도 볼 수가 없고, 찾으려 하여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가르침을 청했더니 요연은 자신도 아직 찾지 못했다며 ‘눈 밝은 스님’을 찾아가라 하였습니다.





 문경 묘적암 주소:경북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산 8

 문경 묘적암 연락처:054-552-7096



 

 

훗날 나옹은 깨달음을 얻어 이곳을 다시 찾아 화목 4그루를 심었다 합니다. 그리고 나옹의 신통력을 볼 수 있는 전설이 내려와서 옮겨 봅니다. 꼭 울산시 대운산 기슭의 큰바위 얼굴에서 불국사에 난 불을 껐다는 원효대사와 동자의 전설이 엇비슷하여 신기하기만 합니다.


하루는 나옹이 공양 준비로 상추를 한창 씻고 있는데 가야산 해인사에 불이 난 것을 보고 상추를 씻다 말고 물을 해인사 쪽으로 던져 불을 껐습니다. 공양을 기다리던 도반은 나옹이 헐레벌떡 뛰어오자 왜 늦었느냐고 나무라니 해인사에 난 불을 끄고 온다고 대답하자 장난친다며 나옹을 꾸짖었습니다. 이에 나옹은 실수하듯 물그릇을 방바닥에 엎어버리자 스님은 어서 물을 치우라고 나옹을 나무랐습니다. 나옹은 엎질러진 물을 모아 공중에 날리며 빙빙 돌게 한 다음 주걱으로 물을 내려쳤습니다. 물은 마당의 작은 바위에 부딪히며 마음 심(心)자를 새겼다 합니다. 나옹선사의 경지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묘적암입구의 지혜수 


묘적암은 꼭 한옥의 가정집 같은 분위기입니다. 법당은 앞면 6칸에 옆면 3칸이며 가운데 3칸은 통칸으로 그 중앙에 문수보살을 봉안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쪽에는 툇마루를 달았으며 좌측에는 종무소와 부엌을 내었고 건물 왼쪽 처마 끝에 증축하면서 1칸*2칸의 작은 건물을 달아내었습니다. 이는 스님의 거처로 사용하며 일반신도의 접객 공간으로도 활용하고 있습니다.


 

왼쪽은 동봉당스님 부도이며 오른쪽은  동산당 일초선사 부도

 

묘적암은 1668년 성일 스님이 중건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00년 취원스님이 다시 중수하였다 합니다. 묘적암에는 1803년(순조 3년)에 조성한 공민왕사 나옹선사 진영과 조성연대가 알려지지 않은 동봉대화상진영이 있습니다. 그리고 묘적암 옆에는 나옹화상과 동봉화상의 부도가 있는데 안내판이 없어 정확하게 어떤 부도가 나옹화상의 부도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옹화상의 부도는 다시 확인한 결과 윗쪽에 홀로 고졸한 분위기를 한 부도라 합니다.



 

 

묘적암 나옹화상의 부도 

 


나옹선사 부도와 탑비는 여러 곳에 있는데 이는 아주 특이한 사례입니다. 여주 신륵사와 양주 회암사 터에 남아 있고  그리고 원주 영전사 터에 있던 부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왔으며 또 한곳이 이곳 묘적암입니다. 묘적암의 나옹선사 부도에는 “화상일완 장우도중 하유양공 접지유성(和尙一椀 藏于屠中 下有兩孔 接之有聲)”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는데 뜻을 풀이하면” 화상의 발우가 부도 속에 간직돼 있으며 밑면에는 두 개의 구멍이 닿으면 소리가 난다”라는 뜻입니다.



사불암에서 바라본 윤필암 전경

 

사불암에서 바라본 묘적암 전경 

 


나옹화상의 부도는 생각도 하지않고 건성건성 봐서 그런지 명문을 확인 할 수 없었습니다. 묘적암 주위에는 이외에도 심지바위, 안바위, 좌선바위와 1862년 조성한 나옹화상의 행적을 기록한 목각판 등이 남아 있는데 스님의 수행처라 볼 수 없는 게 정말 아쉬웠습니다. 묘적암은 스님의 수행처로 출입을 삼가달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어 발소리를 죽이며 조용하게 문밖에서 사진만 몇 장 담고 돌아 나왔습니다.



 사불암에서 본 윤필암과 묘적암 




 

728x90

728x90








☞(경주 남산 여행/경주 남산 가볼만한 곳)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경주 남산의 많은 불상과 석탑 문화재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경주남산칠불암마애불상군



경주 남산에서 화려한 불상 군을 자랑하는 칠불암 마애불상 군은 칠불암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모두 7구의 불상이 있습니다. 3구는 본존불과 좌우 협시보살이며 사면 기둥에다 각각 4구의 석불을 조각하였는데 각 불상의 조각 수법이 매우 뛰어나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은 보물 제200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제312호로 승격되었는데 현재 경주 남산의 많은 문화재 중 국보는 유일합니다.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 가볼만한곳


2012/09/24 - (경주남산여행)보리사 마애석불. 잔잔하며 엷은 미소가 아름다운 보리사 마애석불

2012/09/28 - (경주남산여행)장인의 조각솜씨에 경탄, 화강암을 시루떡이라 생각했는지-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2012/11/01 - (경주남산여행)살인미소 짓는 부처님의 모습이 경주남산 보리사 석불좌상으로 태어나다. 미륵곡석조여래좌상

2012/11/05 - (경주남산여행)각기 다른 동,서탑의 모양이 특이한 경주 남산리 삼층 석탑

2013/02/11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남산여행 상서장.시대의 풍운아 최치원과 상서장

2013/03/26 - (경북여행/경주남산여행)남산 최고의 자리에 있던 삼화령의 연꽃대좌 미륵불은 어디로 사라졌나

2016/04/26 - (경주여행/남산여행)염불사지 삼층석탑. 은은한 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린다는 경주 남산리 염불사지 삼층석탑 여행하기.

2016/04/28 - (경주여행/경주남산여행)동남산 서출지와 이요당, 연과 베롱나무가 꽃이 필때 최고 이름값을 한다는 1500년된 서출지와 조선시대 정자 이요당 여행.

2016/05/05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사마소. 출입문을 닫아 까치발로 목을 쭉빼고 눈도장만 찍었던 젊은 선비들의 강학소 경주 사마소 여행. 경주 사마소

2016/06/10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과 석조관음보살입상. 경주 중생사에서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과 국립경주박물관의 석조관음보살입상을 만나다.

2016/06/20 -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남산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을 보지 않고는 경주남산 여행을 했다고 할 수 없는 경주 남산의 모나리자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







칠불암 오르는 길은 남산의 특징인 소담한 솔 숲길이 이어져 칠불암 마애불상군 못지않은 아름다운 산길입니다. 칠불암에 올라서면 먼저 정면에 만나는 암상군에 입이 떡 벌어집니다. 그 아래 두부같이 각진 바위 면에 불상을 부조한 게 마치 어머니가 떡 주무르듯이 빚어 놓은듯합니다.
















본존불이 있는 바위는 높이가 426cm이며 본존불만은 260cm, 좌우 협시보살은 210cm로 전체 바위 면을 여백이 없을 정도로 꽉 차게 마애불 3구를 조각했습니다. 본존불은 머리가 소발이며 큼지막하게 육계가 솟았으며 풍만하고 네모진 얼굴에 힘이 넘쳐 보입니다.







조각기법은 부드러운 곡선을 처리하여 마애불의 전체적인 윤곽은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주 편안하게 합니다. 목에는 삼도가 없고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취하며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에 광배는 보주형의 무늬를 두드러지게 나타내었습니다.





연꽃 대좌는 연꽃잎이 위로 향하는 앙연과 연꽃잎이 아래로 향하는 복연의 이중 연화좌에 특이하게 9세기에 나타나는 연화문을 새겼다는 점입니다. 두 협시보살은 비슷한 양식을 취하며 약간 통통한 얼굴에 어깨는 벌어져 당당한 인상입니다. 왼쪽 보살은 꽃을 들고 오른쪽 보살은 정병을 들었으며 자세는 본존불로 향합니다.







본존불과 마주 보며 사각기둥에다 사면석불을 새겼는데 바위의 형태에 따라 불상의 크기를 달리하였습니다. 223cm~242cm가량 크기의 바위에다 사방 불을 새겼으며 모두 연꽃 좌대에다 광배는 보주형 두광을 갖추고 결가부좌를 하였습니다.


 





동쪽을 향하는 불상은 본존불과 같은 양식이며 왼손에 약함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불로 추정하며 서쪽를 바라보는 불상 또한 동쪽 면의 불상과 서로 닮은 모습입니다. 북쪽을 바라보는 불상 또한 남쪽 면의 불상과 비슷한데 다른 3불상과는 다르게 갸름하며 작은 얼굴에 조금 수척한 모습입니다.







사방 석불의 명칭을 보면 방위와 수인, 인계를 보고 추정을 하면 동쪽은 약사여래불, 서쪽은 아미타여래 불로 각 방위를 주재하는 부처님의 모습을 새겨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은 더욱 장엄해 보입니다.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은 통일신라 석굴암과 비슷한 시기인 8세기의 작품이며 경주 남산의 수많은 불상 중에서 가장 대표적입니다.



































728x90

728x90



☞(문경여행/문경 가볼만한곳)문경 대승사 마애여래좌상. 머리에 뿔처럼 꽃무늬를 돋을 새김한 이색적인 불상을 만나다.  대승사 마애여래좌상



문경 공덕산(사불산) 대승사에서 윤필암을 거쳐 묘적암으로 향하는 중간에 대승사 마애여래좌상이 숨은 듯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애여래좌상의 전체적인 높이는 대략 6m로 매우 큰 규모입니다.







◆경북 문경  가볼만한 여행지


2016/07/07 - (문경여행/문경 가볼만한 곳)공덕산·사불산 사불암. 그럴싸한 전설이 정말 잘 어울리는 신비의 세계 사불암 사면석불, 공덕산·사불산 사면석불 사불암을 만나다.

2016/06/04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일년중 부처님오신날 딱 하루만 산문을 개방하는 천년고찰 문경 희양산 봉암사 여행을 하다. 문경 봉암사

2016/06/03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희양산 봉암사. 봉암사의 꽃이라는 통일신라시대의 완벽한 예술품 문경 봉정사 삼층석탑을 만나다. 문경 봉암사

2016/05/26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 탑비. 보물에서 국보 제315호로 승격된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 탑비의 웅장함에 깜짝 놀라다. 봉암사지증대사탑비

2016/05/25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통일신라 최고의 걸작품 지증대사 부도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의 아름다움에 반하다. 봉암사지증대사탑

2016/05/23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극락전. 잦은 화재로 봉암사 전각중 유이하게 남은 보물 제1574호 봉암사 극락전의 독특한 목탑양식 당우를 만나다. 봉암사 극락전

2016/05/20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무릉도원의 선경인 용추동천의 백운대에 자리한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을 만났습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2016/05/17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 희양산 봉암사의 전성기를 이끈 정진대사 원오탑비를 만나다. 보물 제172호

2008/11/03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대야산 산행. 문경의 명산 대야산 용추폭포와 만추홍엽 단풍보기










편편한 자연석 바위에 양각과 음각으로 새겨 조성하였으며 불상의 위와 아랫부분에 균열이 간 것을 빼면 마애여래좌상은 아주 온전한 상태입니다. 어깨너비가 2.2m, 무릎넓이는 3.1m이며 그리고 마애불을 받치는 연화 대좌의 높이는 1.3m, 넓이는 3.7m로 음각된 이중 연화 대좌입니다.






그리고 신광과 두광은 음각하였으며 불두 위에는 모서리가 깨어진 사각 모양의 판석을 지붕돌로 끼웠습니다. 마애여래좌상의 유래와 만든이 등은 알 수 없으나 오래전부터 이곳에 미륵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다는 것을 추정하면 미륵불로 조성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애여래좌상을 천천히 둘러보면 머리는 소발에 육계는 편편한 게 솟았고 그 양편에 뿔처럼 꽃무늬를 돋을새김하여 아주 이색적입니다. 필자가 불상을 처음 보며 느낀 게 “토끼 귀를 달은 부처는 처음 본다”였습니다. 머리에 뿔을 새긴 부처님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두 귀는 아래로 처졌으며 얼굴은 정면으로 보면 약화현상이 뚜렷하고 통견에 매듭 띠는 가슴 밑으로 길게 늘어뜨린 모습입니다. 옷의 주름은 음각으로 나타냈으며 보통 목에는 3줄의 삼도를 새기지만 대승사 마애여래불좌상은 2줄의 삼도로 음각한 게 일반적인 불상 양식에서 벗어났다 하겠습니다.





왼손은 어깨까지 올리고 오른손은 복부에 붙이고 손가락은 약간 오므렸습니다. 광배는 머리와 상체를 감싸는 거신 광배이며 두광은 동심원형에 불꽃무늬를 채워 상체와 가부좌를 한 하체에 비해 더욱 뚜렷한 느낌입니다.



 


이 불상은 조각수법 등 여러 상황을 추측해보면 고려 시대 불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9호. (참고:대승사 홈피)




728x90

728x90

 


☞(영천여행/영천가볼만한곳)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 균형미가 아주 빼어난 고려시대 철불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을 만나다.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



우리나라에서 산수가 빼어나지 않은 곳이 없어 우리 강산을 금수강산이라 부릅니다. 그 때문인지 여행지를 다니다 보면 경치가 정말 아름다워 감탄을 하게 되는데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와 선원동을 끼고 흐르는 자호천의 그림 같은 풍광도 나의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고려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이 사색하며 즐겨 올랐다는 조옹대에서 자호천을 따라 병풍처럼 둘러쳐진 천애 절벽이 도연명이 무릉도원과 비견되었는지 ‘선원동’이라 했다는데 유래를 보면 조선 인조 때 정호례는 벼슬을 물리고 낙향하면서 중국 동진의 시인이었던 도원명의 시 ‘도화원기’의 신선이 산다는 ‘도화선곡’에서 마을 이름을 따왔다 합니다. 신선이 거처한다는 무릉도원의 풍경에 선원동은 너무나 잘 어울린다 하겠습니다.







 

◆영천여행/영천 가볼만한곳◆


2008/11/17 - (경북여행/영천여행)영천 거동사. 단풍이 황홀한 영천의 거동사입니다.

2016/05/06 - (경북여행/영천여행)영천 정각리 삼층석탑. 보현보살을 상징하는 보현산의 상징인 영천 정각리 삼층석탑 여행. 정각리 삼층석탑

2016/05/09 - (경북여행/영천여행)영천 자천교회. 115년 역사를 가진 한국 기독교 사적 제2호인 영천시 화북면 자천교회 여행. 자천교회

2016/05/11 - (경북여행/영천여행)영천 모고헌, 독특한 누각이 돋보였던 MBC드라마 화정 촬영지 영천 보현산 아래 옛 태고와 누각 모고헌 여행.

2016/05/18 - (경북여행/영천여행)영천 보현산~보현산 시루봉 산행, 하늘바라기에 좋은 산행지 보현산 천문대가 있는 영천의 지붕 보현산 산행. 영천보현산




 


사실 이번 여행은 임고서원과 선원동 철조여래좌상을 보기 위함인데 임고서원에서 대략 1.2km 가면 자호천에 놓인 양향교를 건너면 바로 삼거리 왼쪽이 선원동과 선원동 철조여래좌상 가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가면 다시 자호천을 건너고 선원동 마을입니다. 원래 이곳에는 선원동과 어울리는 큰 사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찾을 길 없으며 어떤 연유로 폐사되었는지 모르지만 인근 논에서 농사일하던 주민이 철조여래좌상을 처음 발견하였습니다. 지금의 환구 세덕사 주위가 옛 절터지만 그 안쪽에다 작은 절를 짓고 철불 좌상을 안치하게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지금 선정사는 한창 불사가 진행 중이었으며 새로운 대웅전에다 철불을 봉안했는데 이를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이라 합니다.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의 불두는 나선형의 머리카락에다 큼지막한 상투 모양의 육계를 하였습니다.


 

 

 

 


이마 위쪽에는 고려 불상에서 잘 보여주는 반달모양을 표현했으며 긴 눈썹에 크고 길게 눈꼬리가 올라간 눈 하며 코와 입, 인중, 양 볼에 깊게 팬 보조개 등 목에는 삼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얼굴은 근엄한 표정에다 넓은 어깨와 남성적인 당당한 가슴 하며 다리는 결가부좌 하였으며 균형미가 아주 뛰어난 불상입니다. 이리보니까 풍기는 느낌이 경주 석굴암 본존불과 흡사합니다.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의 법의는 우측 어깨를 드러내며 흘러내린 ‘우견편단’으로 몸에 밀착되어 잘록하며 균형 잡힌 몸의 곡선을 잘 드러내었으며 옷 주름은 간략하지만 결가부좌한 양다리 사이로 부채꼴 주름을 표현하였습니다.


 

 

 

 



대좌와 광배 그리고 철불의 양손은 발견 당시 분실하여 남아 있지 않았지만, 손은 다시 수리하여 복원하였으며 불상을 자세히 보면 주조하여 땜질로 붙인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의 전체 높이는 151cm인데 불두 높이와 무릎 높이는 각각 49cm, 101cm, 어깨와 가슴 넓이는 각각 77cm, 48cm입니다. 당시 철불 조성이 많았던 시기인 통일 신라 말의 섬세한 조각 수법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불상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969년 7월에 보물 제513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영천 선원동 철조여래좌상이 봉안된 선정사 대웅전 


  

 




728x90

728x90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남산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을 보지 않고는 경주남산 여행을 했다고 할 수 없는 경주 남산의 모나리자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 



경주에서 그것도 남산 여행을 할 때는 꼭 챙겨 가는 곳이 있습니다. 아니 안가면 뭔가 서운한 게 꼭 빠진 듯한 느낌이 들어 일부러 그곳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그곳이 어디냐고요??? 그곳은 바로 경주 남산의 바위 꼭대기에 조성된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입니다. 이리 설명을 해서는 조금 생소하다고요. 그럼 경주 남산에서 유일한 국보가 있는 칠불암이 있습니다.






◆경주남산 가볼만한 곳


2016/04/28 - (경주여행/경주남산여행)동남산 서출지와 이요당, 연과 베롱나무가 꽃이 필때 최고 이름값을 한다는 1500년된 서출지와 조선시대 정자 이요당 여행.

2016/04/26 - (경주여행/남산여행)염불사지 삼층석탑. 은은한 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린다는 경주 남산리 염불사지 삼층석탑 여행하기.

2013/09/11 - (경북맛집/경주맛집)경주남산맛집, 오리맛이 살아 있네 약천한방생오리전문점

2012/09/24 - (경주남산여행)보리사 마애석불. 잔잔하며 엷은 미소가 아름다운 보리사 마애석불

2012/09/28 - (경주남산여행)장인의 조각솜씨에 경탄, 화강암을 시루떡이라 생각했는지-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2013/02/11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남산여행 상서장.시대의 풍운아 최치원과 상서장

2013/03/08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남산)보일듯 말듯한 섬세한 조각기법이 예술.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2009/05/25 - (경북여행/경주여행) 경주남산 약수계곡 마애입불상. 불두는 달아나고 없지만 경주남산에서 섬세하고 가장 큰 경주 약수계곡 마애 입불상







칠불암을 기댄 곧추선 바위 꼭대기에 얹어진 집채만 한 바위에 부조한 마애불이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입니다. 남산의 많은 문화재 중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은 보물 제199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경주 남산의 많은 마애불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것 같습니다.





과하지 않은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미소를 보면서 신라인의 미소를 생각해보기도 하였습니다. 신라인의 미소를 머금은 듯한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은 경주 출신의 한사람인 저의 마음을 항상 찾을 때마다 포근하게 해줍니다.





누군가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모나리자의 아름다움에 빗대어 경주 남산의 모나리자라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정말 경주 남산에서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 생각하며 딱 어울리는 애칭 같습니다. 지금부터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만나보겠습니다.















최근에 만났던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은 전에 없던 안전시설물이 설치되었고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찾아가던 길이 조금은 위험해서 진입로를 돌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안전시설물인 나무 울타리입니다.







원래 이곳은 토함산 넘어 동해 일출이 장관입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햇볕을 받으면 마치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은 따뜻한 체온이 숨어 들어온양 갑자기 붉게 변하며 온화한 미소는 더욱 화사하게 변하고 근육은 살아 있는 듯 꿈틀 그리는 모습에 넋을 잃고 보았던 곳입니다. 그런 곳에 목책이 있어 이제 전체적인 감흥은 조금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머리에는 삼면보관 위로 보계가 솟아있어 보살상을 뜻합니다. 얼굴에 나타난 이목구비는 뚜렷하지만 약간은 통통하고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남성의 근엄한 표정과 온화함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천의는 몸의 윤곽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대좌 아래로 흘러내리며 두 손은 가슴까지 들었습니다.








오른손은 꽃가지를 왼손은 엄지와 장지를 붙이고 가슴까지 들어 올려 설법하는 모양을 취했습니다. 또한, 오른발은 대좌 아래로 내려 연꽃 위에 올렸으며 왼 다리는 대좌 위로 올린 유희좌와 비슷한 반가좌의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아주 드문 예로서 평가받으며 대좌 아래에 뭉글뭉글한 구름을 조각하여 마치 천상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경주여행에서 남산을 오르지 않고는 경주를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을 보지 않고는 경주 남산의 신라 예술품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저에게는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2005년 당시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좌상










728x90

728x90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고건축물인 극락전, 대웅전이 있는 안동 천등산 봉정사를 만나다. 



안동 천등산 봉정사는 부석사의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 있습니다. 수덕사는 가요의 ‘수도사 여승’이 대웅전보다 더욱 유명하며 부석사는 무량수전이 워낙 유명한데 그에 반해 봉정사는 상대적으로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저도 봉정사 방문 전에는 그저 극락전 정도 있다는 것만 알았지, 봉정사의 내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습니다.




 



 

 

봉정사 일주문


그러나 안동의 봉정사도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이 있는 것은 부인하지 못합니다. 봉정사의 문화재를 보면 극락전과 대웅전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고금당과 화엄강당은 물론이고 후불벽화,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보물이며 그 외에도 무수히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습니다. 최근까지 봉정사는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도력으로 종이 봉황을 날려 봉황이 앉은 곳에 절을 세웠으며 그중 한곳이 지금의 봉정사라하였습니다.


 

 


그러나 1971년 극락전 수리과정에서 상량문이 나왔으며 신라 문무왕 12년인 672년에 능인대사가 창건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봉정사를 품은 산은 처음에는 대망산이라 불렀습니다. 능인대사는 도를 터득하려고 대망산 바위굴에서 수도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다 천녀가 나타나 능인을 시험하기 위해 파계하여 함께 살 것을 유혹하지만, 끝끝내 부처님 말씀을 따르겠다며 거부하였고 천녀는 스님의 도력에 감복하여 옥황상제께서 내린 등불을 굴 안에 환히 밝히게 하였습니다.


 

 


스님은 더욱 수도에 전념하였고 도력으로 봉황을 접어 날렸는데 이곳에 내려앉아 봉정사를 창건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후 ‘하늘에서 등불이 내려왔다.’ 하여 천등굴이라 하였으며 산도 천등산이 되었습니다. 봉정사는 창건과 함께 대략 6번의 중수가 이루어졌습니다. 여러 번 어려운 과정을 겪었고 근대인 1950년 한국 전쟁 때는 인민군이 주둔하면서 사찰에 보관 중이던 여러 경전과 사지(寺誌) 등을 불태우는 곡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또한, 1999년 4월에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 방문을 하면서 이곳을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그럼 먼저 천등산 봉정사의 일주문을 보면 현판은 추사체의 맥을 잇는 서예가 은초 정명수(1909~1999)선생의 글씨입니다. 이외에도 해인사의 해탈문과 진주 촉석루 등 힘있는 선생의 여러 작품이 있습니다. 이곳을 지나 날아오르는 봉황을 닮은 듯 한 보호수 소나무를 지나고 계단을 오르면 봉정사를 들어서는 입구인 만세루입니다.


 

 

 

 


만세루는 봉정사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 고색창연하며 켜켜이 때가 묻었습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여느 사찰에서나 볼 수 있는 천왕문 등은 없지만 2층 누각 형태인 만세루 아래를 지나야만 법당에 이르게 됩니다. 만세루는 1680년(숙종 6년)에 세워졌으며 처음에는 덕휘루(德輝樓)라 불렀습니다.


 

 

만세루 


만세루는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대웅전에서 보면 마당 높이와 같은 단층입니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2층 누각으로 1층은 출입구 역할만 합니다. 그리고 2층은 휴식을 취하는 정자와 스님의 강학장소인 강당을 겸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016/05/31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만세루. 천년고찰의 풍미를 간직하며 묵직하여 봉정사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봉정사 만세루, 봉정사 만세루


 

 

 

 

 

 


만세루와 마주한 건물이 두 개의 봉정사 중심 건물 중 한곳인 국보 제311호 대웅전입니다. 대웅전도 극락전과 함께 고려시대에 창건되었으며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셨습니다. 대웅전은 1428년(세종 10년)에 불화기록과 1431년에 단청을 칠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1425년인 세종 7년쯤에 중창한 것이 아닌지 추정을 했는데 최근 고려시대 불화로 추정되는 후불벽화가 발견되어 대웅전 조성을 고려 말기로 보고 있다고도 합니다.


 

 

 대웅전


 

 

2016/06/02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고려후기의 고건축물로 평가받는 독특한 불전인 국보 제311호 봉정사 대웅전. 안동 봉정사



 

 

 


앞면 3칸에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특이한 것은 대웅전 앞면에 조선시대 누각 형태인 툇마루를 달아내었다는 점인데 고려와 조선의 건축양식이 접목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1963년 1월 보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국보로 다시 승격되었습니다.


 

 

 

 

 

 

 

 

 

극락전


그리고 대웅전과 함께 봉정사의 중심법당인 국보 제15호 극락전입니다. 우리나라 고려시대 건축물로 가장 오래된 곳 중 한 곳입니다.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봉안하며 무량수전, 아미타 전이라 부릅니다. 1972년 해체 수리하면서 인조 3년인 1625년 작성한 상량문 기록을 찾았는데 고려 공민왕 12년인 1363년에 극락전의 지붕을 수리했다고 되어 있어 벌써 그 이전에도 건물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16/05/27 - (경북여행/안동여행)천등산 봉정사 극락전, 화려하지 않은 담백한 맛이나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최고 오래된 목조건물 안동 봉정사 극락전 여행. 봉정사 극락전


 

 


극락전은 가운데다 두 개의 기둥을 세워 불당 벽을 만들어 불단을 설치했으며 닷집은 화려하지 않고 섬세하게 꾸몄습니다. 앞면 3칸에 옆면 4칸의 맞배지붕건물로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따른 고려시대 건물입니다. 처음에는 대장전으로 불리다가 극락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극락전 앞에는 고금당이 있으며 대웅전 앞에는 화엄강당을 세워 극락전과 대웅전을 두 개의 영역으로 만들었습니다. 고금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층건물로 맞배지붕을 하였습니다.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아 보여도 당시 건축기법이 주목받을 만큼 인상적이며 보물 제449호 지정되었습니다. 1969년 해체 수리과정에서 1616년인 광해군 8년에 고쳐 지었다는 기록을 찾았는데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엄강당 


화엄강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주심포 양식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화엄강당은 ‘양법당중수기’를 보면 17세기에 대웅전을 고쳐 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때 화엄강당도 창건이나 수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전의 대웅전을 고려하여 간결한 장식으로 꾸몄으며 법당과 강당의 차별성을 두려 했습니다. 보물 제448호.


 

 


2016/06/13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고금당, 화엄강당. 안동 봉정사의 보물인 고금당, 화엄강당과 요사채인 무량해회를 만나다. )안동 봉정사 고금당, 화엄강당



 

 무량양회


 

 

 

 

 

 


봉정사 삼층석탑


극락전 앞에 자리한 봉정사 삼층석탑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중 기단에 석탑은 전체적인 무게로 인해 기단부가 일부 깨져있습니다. 또한 상륜부 일부는 분실되었지만, 전체적으로 양호한 상태입니다. 고려시대 석탑이며 평범하며 일반적이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2016/06/16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삼층석탑. 봉정사의 고 건축물 극락전과 같은 고려 중엽의 봉정사 삼층석탑을 만나다. 봉정사 삼층석탑

 


 

 

 

 

 


 


728x90

728x90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삼층석탑. 봉정사의 고 건축물 극락전과 같은 고려 중엽의 봉정사 삼층석탑을 만나다. 봉정사 삼층석탑



 안동 봉정사에는 석조조형물 중 석탑으로는 유일하게 고려 시대 중엽에 극락전과 함께 조성된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2호로 지정되었으며 극락전 앞마당에 자리합니다. 봉정사 삼층석탑은 이중 기단으로 이루어졌는데 석탑의 전체적인 무게 때문인지 기단부 일부가 파괴되었습니다.







◆안동 봉정사 꼭 보야할 곳◆


☞2016/06/13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고금당, 화엄강당. 안동 봉정사의 보물인 고금당, 화엄강당과 요사채인 무량해회를 만나다. )안동 봉정사 고금당, 화엄강당

2016/06/02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고려후기의 고건축물로 평가받는 독특한 불전인 국보 제311호 봉정사 대웅전. 안동 봉정사

2016/05/31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만세루. 천년고찰의 풍미를 간직하며 묵직하여 봉정사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봉정사 만세루, 봉정사 만세루

2016/05/27 - (경북여행/안동여행)천등산 봉정사 극락전, 화려하지 않은 담백한 맛이나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최고 오래된 목조건물 안동 봉정사 극락전 여행. 봉정사 극락전

2016/05/19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명옥대. 퇴계 이황의 강학소 안동 명옥대에서 녹음방초를 즐기다. 명옥대

2016/05/24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천등산 개목사 원통전. 천등산의 지세로 안동에 소경이 많아 비보사찰이 된 개목사, 그후로 소경이 없어졌다는 개목사 원통전 여행,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 양화는 남아 있으며 그 외에는 분실되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삼층석탑은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습니다. 봉정사 삼층석탑은 이중기단의 방형석탑으로 기단부보다는 탑신부의 폭이 좁으며 각층 높이의 체감은 적당한 데 반해 옥개석은 높이보다 폭도 좁고 옥개석의 처마 또한, 반전이 약합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날렵하지 않은 약간 둔한 느낌을 준다는 평가입니다. 봉정사 삼층석탑의 전체높이는 318cm이며 기단부의 한변은 237cm로 2층 기단을 만들어 탑의 토대를 만들고 다시 삼층의 몸돌을 올려 전형적인 석탑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1단과 2단의 기단 각 면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기단부보다 폭이 확 좁아진 탑신부 각층의 몸돌 크기는 위로 올라갈수록 비례감 있게 줄어들면서 폭의 변화도 적습니다.


 

 

 

 


지붕돌은 높이에 비해 폭도 좁고 두께도 두툼한 게 당시에 조성된 다른 석탑과 비교해도 두드러지고 드러난 게 없는 그저 평범하며 일반적인 고려 중엽 석탑양식을 보여줍니다.


 

 

 

 

 

 

 

 

 

 

 

 


안동 봉정사 


☞봉정사 주소: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

봉정사 전화: 054-853-4181




728x90

728x90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고금당, 화엄강당. 안동 봉정사의 보물인 고금당, 화엄강당과 요사채인 무량해회를 만나다. )안동 봉정사 고금당, 화엄강당



  안동의 봉정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극락전과 그에 못지않게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대웅전이 국가 문화재인 국보로 지정되어있습니다. 그리고 봉정사는 국보 이외에도 고금당과 화엄강당이 보물로 지정된 유서 깊은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 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찰에서 이리 많은 목조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다는 자체가 드문 일입니다. 봉정사의 여러 목조건물을 소개했지만, 이번에는 고금당과 화엄강당을 포스팅하겠습니다.







◆안동 봉정사 둘러보기◆



2016/06/02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고려후기의 고건축물로 평가받는 독특한 불전인 국보 제311호 봉정사 대웅전. 안동 봉정사

2016/05/31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만세루. 천년고찰의 풍미를 간직하며 묵직하여 봉정사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봉정사 만세루, 봉정사 만세루

2016/05/27 - (경북여행/안동여행)천등산 봉정사 극락전, 화려하지 않은 담백한 맛이나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최고 오래된 목조건물 안동 봉정사 극락전 여행. 봉정사 극락전

2016/05/24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천등산 개목사 원통전. 천등산의 지세로 안동에 소경이 많아 비보사찰이 된 개목사, 그후로 소경이 없어졌다는 개목사 원통전 여행,

2016/05/19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명옥대. 퇴계 이황의 강학소 안동 명옥대에서 녹음방초를 즐기다. 명옥대






봉정사는 극락전과 대웅전을 각각 둔 두 개의 중심법당이 있습니다. 극락전과 대웅전의 공간을 가르는 건물은 화엄강당이며 고금당은 극락전 앞에서 화엄강당의 뒷면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먼저 고금당을 보겠습니다. 고금당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단층 목조건물에 맞배지붕을 올렸습니다. 고금당의 규모는 작아도 보물로 지정될 만큼 당시 건축 기법이 주목받을 만큼 인상적입니다.





고금당의 특이한 건축기법을 보면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한 주심포집 계통입니다. 기둥 윗부분에 꽂은 홑첨차와 그 위에 주두에서 나온 살미첨차가 겹쳐친 위에 다시 행공첨차를 가로로 놓았으며, 그리고 외목도리를 받쳐놓았습니다. 주두의 좌우 벽면에 배치된 첨차와 창방은 포벽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건물 뒷면은 원래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동의 봉정사 고금당은 해체 수리를 위해 1969년 찾아낸 기록을 보면 1616년(광해군 8년)에 고쳐 지었다는 기록뿐이며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1969년에 극락전과 함께 봉정사 건물 대부분이 해체와 수리과정에서 본모습을 많이 훼손하였습니다. 현재 옛 모습이 남아있는 곳은 방 앞쪽 쪽마루와 칸마다 달린 외짝문뿐이라 하니 고건축물의 보수는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하겠습니다.


 

안동 봉정사 고금당 


현재의 고금당은 앞면 3칸에 2짝 여닫이문을 달았으며 옆면과 뒷면은 벽으로 막았습니다. 북쪽 측면은 후예 팔작지붕으로 바뀌었고 남쪽의 지붕은 연장하여 칸을 막아서 부엌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방은 온돌을 넣어 선방이든 것을 요사채로 사용하였으며 방 앞에는 쪽마루를 깔고 벽간마다 띠살문을 달아 원래의 문짝이 아니라합니다. 

공포를 구성하는 첨차 형태 등을 보면 조선 전기의 특색을 잃어버렸으며 또한, 변형되어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중기로 그저 짐작만 할 뿐입니다. 당호는 고금당(古今堂)이라 쓰는데 금당의 뜻인 고금당(古金堂)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건물의 규모와 위치를 보면 봉정사의 중심건물인 불전으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하기 힘든데도 현재 불전을 뜻하는 고금당(古金堂)으로 사용 하고 있습니다. 보물 제449호





그리고 화엄강당은 대웅전 앞 경내로 올라서면 왼쪽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앞면3칸 옆면 2칸의 주심포 양식의 맞배지붕입니다. 화엄강당은 ‘양법당중수기’ 등에 남아 있는 기록을 보면 경내 극락전과 대웅전을 17세기에 고쳐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그때 화엄강당도 함께 창건이나 수리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안동 봉정사 화엄강당



강당으로서 규모가 큰 건물인데 부재들이 다른 기법과 섞여 절충형식을 보이면서도 대웅전의 위상을 고려하여 간결하게 장식을 갖추어 법당과 강당의 차별성을 두려 했습니다. 처음부터 강당으로 사용한 건물이라 기둥은 낮으나 공포를 크게 하여 외관과 균형을 맞추었습니다. 건물 내부는 남쪽 2칸이 부엌, 북쪽 4칸이 온돌방으로 되어 있는데 원래는 앞면 4칸, 옆면 4칸으로 현재 온돌방 뒤쪽에 4칸의 마루가 깔렸으며 부엌도 지금보다 넓었다고 하지만 언제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화엄강당은 봉정사 창건과 극락전 중창 그리고 조선 전기의 대웅전 중창 등 어떤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는 것을 보면 1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보물 제448호


 

 


안동 봉정사 무량해회


무량해회는 앞면 4칸에 옆면 3칸의 겹처마 집에 전면과 남쪽에 마루를 달고 양쪽의 중앙에 칸 벽을 설치하여 방으로 나누어진 요사건물입니다. 건물의 구조는 ‘트인 ㅁ자형’


 









 (참고:안동시청 홈피)

 

 


728x90

728x90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과  석조관음보살입상. 경주 중생사에서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과 국립경주박물관의 석조관음보살입상을 만나다.  


경주 동쪽에는 작고 야트막한 산인 낭산이 있습니다. 낭산에는 신라 선덕여왕의 능이 있으며 또한, 문무대왕의 주검을 화장했다고 추정하는 능지탑이 있어 신라인에게는 경애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이곳 능지탑 안쪽에 신라 시대 사찰인 중생사가 단아하다 못해 쇠락한 채 그 뿌리만 남아 있습니다.





◆경주 남산 인근 가볼만한 여행지 ◆


2016/06/07 -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국보 제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 덕동호로 수몰된 고선사터 삼층석탑과 비석받침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만나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2016/04/29 - (경북여행/경주여행)능지탑지. 문무대왕 화장터로 알려진 경주 능지탑지 여행. 능지탑지

2016/04/28 - (경주여행/경주남산여행)동남산 서출지와 이요당, 연과 베롱나무가 꽃이 필때 최고 이름값을 한다는 1500년된 서출지와 조선시대 정자 이요당 여행.

2016/04/26 - (경주여행/남산여행)염불사지 삼층석탑. 은은한 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린다는 경주 남산리 염불사지 삼층석탑 여행하기.

2013/09/07 -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입을 닫고 살기 위함인지 마스크를 한 열암곡석불좌상.열암곡석불좌상

2012/11/05 - (경주남산여행)각기 다른 동,서탑의 모양이 특이한 경주 남산리 삼층 석탑




]


능지탑을 지나 중생사로 찾아들면 경내에는 창건 당시의 사격을 알 수 있는 온갖 부재가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당시의 중생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석탑의 부재는 물론이며 불상의 좌대 등 성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게 없을 정도로 깡그리 파괴되어 지금은 옛 영화만 짐작할 뿐입니다.





경주 중생사지의 각종 부재들
















중생사




그리고 중생사 한쪽 작은 바위에는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이 흔적만 겨우 남아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눈을 부라리며 세심하게 봐도 그 형체만 겨우 짐작할 뿐인데 그래도 문화재적 가치가 아주 높아 보물 제66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은 특이하게도 보살상과 신장상을 나란히 배치하였으며 이런 예는 좀체 찾기가 힘들다 합니다. 경주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의 가운데에 있는 본존불을 자세히 보면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습니다. 양어깨를 감싸면서 내려온 옷은 고려 불화에서 지장보살과 매우 유사하며 머리와 몸에서 빛을 내는 모습에 손 모양은 생략되었습니다.









왼쪽의 신장상은 갑옷 차림에 오른쪽에 칼을 집고 있으며 한쪽 다리를 곧추세운 채 앉아 있는 유희좌를 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신장상은 두 손에 무기를 들고 있어 악귀를 쫓아내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모든 게 파괴된 와중에도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마애보살삼존좌상이라도 남아 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듭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석조 관음보살 입상


중생사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삼소관음중생사’로 기록 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관음보살의 전설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중국에서 시작됩니다. 중국에 황제의 사랑을 받은 궁녀가 있었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절세가인일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가졌던 모양입니다. 황제는 그림으로 궁녀를 길이길이 남기고 싶어 했고 어느 날 화가를 섭외하여 궁녀를 그리게 했습니다. 화가의 실력도 만만치 않아 아름다운 미모를 완벽할 정도로 똑같이 그려 하늘도 시샘을 했는지 그만 실수로 붓을 떨어트렸습니다.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속담처럼 그게 하필이면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인 배꼽 아래에 붉은 점을 찍고 말았습니다. 화가는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고칠 수 없자 그냥 황제에게 그림을 받쳤습니다. 황제는 감탄하며 그림을 찬찬히 보고 내려오다 배꼽 밑의 붉은 점을 보고는 눈동자를 고정하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자신만이 궁녀의 배꼽 밑에 붉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닌데 화가 난 천자는 화가를 가두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에 재상은 황제를 달래었고 황제는 화가에게 어젯밤 자신이 꾼 꿈을 똑같이 그려오면 죽음만은 면해주겠다 하였습니다. 이에 화가는 십일면관음보살을 그려 황제에게 바쳤고 황제는 깜짝 놀라며 자신이 꾼 꿈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아 감옥에서 풀어주었습니다. 화가는 상을 주질 못할망정 자신을 죽이겠다는 황제를 보고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해서 박사 분절에게 신라는 불교를 아주 숭상한다는데 그곳에 가서 나의 재주인 불화를 그리고 싶다며 함께 신라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화가는 신라 서라벌에 들어와 중생사에 머무르게 되었고 자신이 꿈에서 본 관음보살상을 조각하였는데 그 관음보살상이 지금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 중입니다.





화가가 누구인지 매우 궁금하지만 일연은 이 화가의 이름은 알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무제 때의 유명한 불화 화가인 ‘장승요’가 아닐까하고 추정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중생사의 관음보살은 여러 이야기가 전하는데 관음보살에게 기도 끝에 사내아이를 낳았지만 석 달이 되지 않아 후백제의 견훤이 쳐들어왔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피난을 갈 수 없어 관음보살 밑에 숨기고 떠났는데 백제군이 물러간 뒤 아이를 찾아가니 아이는 금방 목욕한 듯 촉촉하였고 입에서 젖 냄새가 났다 합니다. 후에 이 아이는 대성하여 큰 인물이 되었다 합니다.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삼국유사의 ‘삼소관음중생사’에 전합니다. 왜 관음보살입상이 경주박물관에 전시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면 관음보상상의 의문점이 풀립니다. 처음 발견 당시에는 머리와 몸체 좌대가 모두 따로따로였습니다. 보살상의 머리는 먼저 국립경주박물관에다 옮겨놓았고 몸체는 지금의 경주 낭산 서쪽인 능지탑 근처에 반쯤 묻혀 있었던 것을 찾아내었 습니다. 그때 인근의 노인장이 ‘이 불상의 머리는 경주박물관에 가져갔으며 그 모양은 여느 불상과 달리 길쭉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문화재 조사관은 보살 머리만 전시 중이던 박물관에 옮겨 몸체를 맞추었고 1997년 4월에는 몸체를 찾았던 근처에서 연꽃 대좌를 발견하여 지금의 석조 관음보살입상의 완벽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석조관음보살입상이 발견된 곳이 ‘중생사지’입니다. 이 관음보살은 독립된 예배대상으로는 신라 시대에 조성된 최대의 크기이며 높이가 376cm 통일신라 8~9세기에 조성되었습니다. 이 불상을 관음보살로 보는 이유는 관음보살상은 대게 보관에 작은 불상인 화불(化佛)을 새겼으며 한 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는데 이 보살상은 마모가 심하지만, 보관에 화불을 새겼고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관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자비를 베풀며 실천하는 보살로 자비를 상징합니다. 오래전부터 사부대중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했던 관음보살입니다. 경주 중생사의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과 국립경주박물관을 여행하면서 중생사지에서 옮겨온 석조 관음보살 입상은 꼭 챙겨보길 권합니다.



2013/01/27 -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경주 남산은 돌맹이도 문화재. 이대로라면 천년의 역사가 사라질 판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2013/01/29 -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성형수술로 다시 태어난 삼릉계마애석불좌상. 경주남산삼릉계석불좌상

2013/02/01 -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경주 남산을 대표하는 불상은 이것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

2013/02/03 -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 해준다는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2013/02/04 -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신발견 마애불을 보면 신이 있다고 믿을 수 밖에... 열암곡 신발견 마애대불

2013/02/17 -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특이하게 새겨진 경주 남산의 불상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

2013/02/21 -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신선암 마애보살 반가상. 신선이 빚었을 것 같은 우아한 모습

2013/03/08 -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남산)보일듯 말듯한 섬세한 조각기법이 예술.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2013/03/10 -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세계에서 가장 높은 석탑이 이것.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2013/03/16 -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힐링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용장사곡석가여래좌상

2013/03/26 - (경북여행/경주남산여행)남산 최고의 자리에 있던 삼화령의 연꽃대좌 미륵불은 어디로 사라졌나




728x90

728x90



(경주여행/국립경주박물관)국보 제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 덕동호로 수몰된 고선사터 삼층석탑과 비석받침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만나다. 고선사지 삼층석탑



 문화재의 보고 경주에서는 현재 많은 절터가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서는 문화재발굴조사로 그 빛을 발한 곳도 있지만, 또는 잡목에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곳이 부지기수입니다. 지난봄 경주국립박물관을 보면서 아주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이 고선사터의 비석 받침과 국보 38호인 고선사터 삼층석탑입니다. 

고선사터는 사실 생소합니다. 저도 생소한 절로서 보문호 하면 모두 알 것입니다. 보문호 상부댐을 덕동호라 하는데 원래 고선사가 있던 곳이 지금의 덕동호 물속이라 합니다. 










덕동호를 거쳐 경주 시내를 관통하는 하천을 알천이라 합니다. 그 상류는 경주시 암곡동이며 1975년 덕동호 건설로 암곡동의 고선사터가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선사터에 흩어져 있던 여러 문화재와 삼층석탑, 비석 받침 등 부재를 이곳 국립경주박물관 야외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고선사는 일연의 저서인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시대 신문왕(재위 681~692)때 원효대사(617~686)께서 주석하셨던 곳이라 합니다. 그런데 1914년 5월 이곳에서 원효대사 행적을 기록한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 비문조각을 발견했는데 그 내용에 비추어보면 686년 원효대사가 입적하기 이전에 고선사는 사찰의 규모를 갖춰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사(高麗史)’에도 1021년(현종 12년)에 고선사에 금란가사와 불정골 등을 내전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그 당시까지도 법통은 꺼지지 않고 상당한 규모의 사격은 계속 이어져 왔던 것 같습니다. 덕동호 수몰로 고선사터 발굴 조사를 진행하면서 금당터, 강당터, 중문터, 회랑터 등의 건물터와 금동불 등 건물의 부재인 기와, 전돌 등 많은 문화재를 발굴하였습니다.








먼저 원효대사의 손자인 설중업이 할아버지 원효대사를 기리며 고선사에다 세운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의 귀부인 비석 받침입니다. 거북을 닮은 받침돌은 머리 부분이 남아있지 않고 몸통 부분만 현재 남아 있습니다. 통일신라 9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전체높이는 약 70cm입니다.

 




귀부인 거북등의 가장자리를 따라 무늬 띠가 일정한 폭을 유지하고 등 부분의 귀갑무늬는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거북등 가운데 비좌인 비석을 꽂은 네모난 홈 주위를 돌아가며 연꽃무늬를 새겼습니다. 서당화상비(誓幢和上碑)의 서당화상은 원효대사를 뜻합니다.





1914년 고선사터에서 비신의 아랫부분을 발견하였으며 1968년 경주시 동천동의 한 민가 우물터에서 빨래판으로 사용하던 것을 우연히 발견하여 현재 경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남아있는 비신의 명문을 보면 원효의 사상과 업적에 관한 것으로 비문은 33행에 각행은 61자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있는 고산사터 삼층석탑입니다. 덕동호 수몰로 경주박물관 야외전시실로 옮겨온 고산사터 삼층석탑은 682년(신문왕 2년)에 세운 감은사터의 동·서삼층석탑과 너무나 닮아 보였습니다. 필자는 안내판을 보기 전에는 감은사터 삼층석탑의 짝퉁인 줄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2단으로 된 기단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렸는데 노반까지 높이가 10.2m에다 총 82장의 돌로 이루어져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판박이라 해도 쉽게 수긍할 만큼 똑같이 닮았습니다. 1.2층의 탑신과 옥개석은 여러 부재를 짜 맞추었는데 다만 3층 탑신석은 하나의 돌로 만든 게 사리함을 넣는 사리공 때문이라 추정됩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다른 점은 1층 몸돌 네 면에 문(문비)을 표현했는데 문화재 여행의 초보인 저는 감은사 삼층석탑에는 찰주가 남아 있지만 고선사터 삼층석탑은 없다는 점으로 구분해야겠습니다. 통일신라 시대 초기인 686년 이전에 새웠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삼층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는 통일신라 석탑입니다.













728x90

728x90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일년중 부처님오신날 딱 하루만 산문을 개방하는 천년고찰 문경 희양산 봉암사 여행을 하다. 문경 봉암사


문경 희양산 봉암사는 1년 중 부처님오신날 딱 한 차례 산문을 개방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여느 사찰처럼 불쑥 대웅전을 참배할 수 없으며 문경여행을 왔다고 해서 봉암사를 찾을 수도 없습니다. 이는 다른 도량과 달리 창건부터 지금까지 선도량으로 일관되게 이어졌으며 1982년 6월에 종단에서 봉암사를 특별수도원으로 지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봉암사의 경내는 법당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반경 4km라 하니 희양산은 물론이고 그 아래 백운대계곡 등 모두 봉암사 소유로 평소에는 출입을 할 수 없습니다. 봉암사의 내력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1100여 년 전 그러니까 879년(헌강왕 5년) 지증대사 지선이 창건했습니다.



봉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김천의 직지사 말사로 선종산문인 선문구산의 하나인 희양산문의 종찰입니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지선의 명성을 들었던 심층은 수행도량으로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겠다 하자 지선은 처음에 받을 수 없다며 거절하였습니다. 그 뒤 지선이 이곳을 둘로 보고 “스님의 수도 도량이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며 이곳에다 절을 세웠습니다.

 


지증은 용의 뿔처럼 우뚝 솟은 희양산의 바위봉우리와 그 아래에 펼쳐진 산자수려한 계곡을 보면서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산이 병풍처럼 둘러 처져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였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고 감탄하며 이는 필연적으로 하늘이 자신에게 수도 도량을 세우라는 ‘부처님의 계시’라 생각할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나 봅니다.

 


일개 범부인 제가 느끼기에도 지금의 봉암사는 그만큼 좋은 장소라 생각되었습니다. 지선이 절을 짓자 881년에 헌강왕은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으며 지증국사 이후인 935년(태조 18년) 정진대사가 머물 때는 3천여 대중이 봉암사에 몰려 동방장, 서방장으로 나누어 정진수도 할 정도로 선풍을 일으켜 꾸준하게 그 맥이 이어졌습니다.

 


조선 초기인 1431년(세조 13년)에 기화스님이 중수하였고 1674년(현종 15년) 신화스님은 화재로 소실된 봉암사를 중건하였으며 1915년에는 세욱스님이 쇄락한 당우를 중건하였고 1927년 지증국사의 비각과 익랑을 세웠습니다. 봉암사는 1947년 해방과 함께 새로운 변혁기를 맞습니다. 

이는 ‘봉암사 결사’로 성철스님이 앞장서고 청담, 자운, 우봉스님 이 네 분이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며 원을 세우고 결사 도량을 봉암사로 택했습니다. 그 후 20인이 동참하여 오늘날 봉암사 수행 도량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봉암사를 두른 암봉이 참 대단합니다.

 


봉암사 뒤 솟은 암봉은 희양산입니다. 여기에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조선의 흥한 기운을 끊으려고 희양산 정상 바위에다 칼로 다섯 줄의 홈을 파내어 혈도를 끊은 곳입니다. 참 나쁜 놈입니다.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합니다. 임진왜란으로 국운이 바람 앞에 등불인데 구원군의 최고장수인 이여송은 지관과 함께 우리나라 명당이란 명당의 혈도를 끊으러 다녔다 하니 그래 올케 전쟁을 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부처님오신날 봉암사는 절 입구 삼거리에서부터 일체 차량 진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부터는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봉암사 마을버스 종점까지 들어갔고 내려서 걸어 봉암사로 가야 했습니다.


봉정사 일주문은 경내 목조건물에서 봉정사 극락전 다음으로 오래되었습니다. 1900년경 봉암사 일주문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최소한 18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침류교를 건너면 먼저 한일(一)자로 길게 이어진 남훈루 현판이 걸린 가운데 문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봉암사에서 목조건물이 보물로 지정된 극락전을 먼저 만났습니다. 봉암사는 창건 이래 잦은 전란으로 소실되었지만 그중 극락전만은 용케 화마로부터 남아 보물 제1574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앞면 1칸, 옆면 1칸에 2층 건물인 봉정사 극락전은 겹처마에 네 모 반듯한 평면건물에 올린 사모지붕을 하였습니다.

 

 

 


그 중앙에 석탑의 상륜부를 올려 탑의 형식을 갖춘 건물입니다. 봉암사 극락전 내부에 어필각(御筆閣) 편액이 있으며 이는 신라 경순왕이 전란에 봉암사로 피신하여 원당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며 주위에 남아 있는 지명을 보면 더욱 신빙성이 있습니다.


2016/05/23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극락전. 잦은 화재로 봉암사 전각중 유이하게 남은 보물 제1574호 봉암사 극락전의 독특한 목탑양식 당우를 만나다. 봉암사 극락전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협시보살로 좌측에 문수보살을 우측에는 보현보살을 모셨습니다.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는 보물 제138호에서 2010년 1월 국보 제315호로 승격 지정될 만큼 귀부와 이수의 조각수법이 대단히 뛰어나고 비신의 높이는 273cm, 넓이 164cm, 두께 23cm로 웅장한 규모의 탑비입니다. 지증대사는 신라 진골로 경주김씨이며 법호는 도헌이며 선종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의 개산조입니다. 840년(문성왕 2년)인 17세에 영주 부석사에서 경의 율사를 은사로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헌강왕은 왕사에 임명하지만 거절하며 그가 창건한 봉암사로 돌아와 59세 법랍 43세에 입적하였습니다. 왕은 그에게 지증이란 시호를 내렸고 탑명은 적조라 하였습니다. 지증대사적조탑비는 통일신라 말기의 양식과 기법을 사용하였으며 893년에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대사의 공적을 찬양하는 비문을 짓고 분황사의 석혜강스님이 글씨를 각자 했습니다.


2016/05/26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 탑비. 보물에서 국보 제315호로 승격된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 탑비의 웅장함에 깜짝 놀라다. 봉암사지증대사탑비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은 대사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인 무덤입니다. 지증대사적조탑은 보물 제137호에 지정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59세에 봉암사에서 결가부좌하여 입적하자 헌강왕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통해하며 시호인 지증과 탑명인 적조를 내렸습니다. 지증대사적조탑은 신라의 승탑양식인 팔각원당형이며 높이는 341cm, 지대석 넓이는 228cm로 옥개석의 부분적인 파손 외에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하겠습니다.

 

 

 


부도는 기단부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된 아주 정교하게 조각된 부도입니다. 기단부의 중대석은 비파, 피리, 북 등을 연주하는 주악 인물상과 연꽃을 장식한 사리함, 공양천인상이 조각되었습니다. 또한, 중대받침석은 각 모서리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 조각을 세우고 그사이에 상반신은 사람이며 하반신은 새의 모습을 한 상상 속의 새로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인 가릉빈가를 새겼습니다.

 

 


그리고 상대석은 팔각의 탑신에 사리함을 보관하고 자물쇠가 달린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습니다. 좌우로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사천왕과 보살을 돋을새김하여 사리함을 수호하도록 했습니다. 지증대사의 부도는 화려하면서 장엄하며 정교하여 당시 신라예술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016/05/25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통일신라 최고의 걸작품 지증대사 부도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의 아름다움에 반하다. 봉암사지증대사탑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와 지증대사적조탑 보호각

봉암사 수도도량 공간으로 출입할 수 없습니다.  

 

 

 

 

금색전 

 


봉암사 삼층석탑은 육중한 희양산의 암봉을 떠받치는 듯 장엄 웅장하며 가볍고 날렵하지만, 결코 촐랑대듯 경망스럽지 않은 아름다운 봉황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지만, 상륜부까지 완벽하게 남아 있으며 예술성을 갖춘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석탑 중 한곳입니다.

 

 


봉암사 경내인 금색전 앞에 하늘을 받치는 기둥인 양 높게 솟아 있으며 전체 높이는 631cm, 상륜부 높이 238cm, 지대석 넓이 324cm로 대단히 큰 규모의 석탑입니다. 가장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완벽한 구성으로 남아 있는 상륜부로 노반 위에 네 개의 꽃잎을 돋을새김한 복발을 놓고 그의에 사각 모양의 양화를 올렸습니다.

 

 

 


방형모양에 4면과 각각의 모서리에 6엽과 4엽의 연꽃을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5단의 보륜을 올렸으며 팔각의 보개를 놓고, 십자 모양의 수연 끝에 용차와 보주를 차례로 세웠습니다. 오늘날까지 상륜부의 원형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 것은 철심을 관통하여 상륜부를 잡아주었기 때문이라 추정됩니다. 봉암사 삼층석탑은 균형 잡힌 모습에 안정감이 있으며 그 아름다움과 완벽미까지 인정받아 보물 제169호에 지정되었습니다.


2016/06/03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희양산 봉암사. 봉암사의 꽃이라는 통일신라시대의 완벽한 예술품 문경 봉정사 삼층석탑을 만나다. 문경 봉암사


 

 

 

 

 


범종각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을 보기 위해서는 봉암사 입구인 침류교로 되돌아 나오면 마애불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용추동천인 백운대계곡을 따라 700m가량 계곡 옆 소나무 오솔길을 따라가면 물소리가 요란한 백운대입니다. 바위를 타고 흐르는 물이 마치 옥구슬이 구른다 하여 옥석대로도 부릅니다. 등줄기의 땀을 식히며 푸른 녹음에 감탄하다 보면 그 한 쪽에 4m 높이의 편편한 바위에 조각한 봉암사 마애보살좌상과 마주합니다.

 

 

 

조선시대 승려 환적의천선사의 원불이라는 기록이 백운대 미륵비명에 나와 있으며 특이하게도 머리 부분은 깊게 파내어 감실 같은 느낌을 들게 처리했습니다. 몸통과 결가부좌한 다리 쪽으로 내려갈수록 조각이 옅어지며 머리에 쓴 보관에 꽃무늬가 있으며 반달 같은 양쪽 눈썹에 백호가 뚜렷하고 반쯤 뜬눈을 하고 있습니다.


 


두손은 연꽃을 들었고 목에는 삼도를 표현하였으며 법의는 양어깨를 덮은 통견을 얇게 선각하였고 옷의 띠 매듭, 주름선 까지 아주 유려하고 뚜렷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불상의 제작기법을 보면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며 신라말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백운대를 각자 한 바위와 돌로 암반을 두드리면 목탁소리가 난다는 목탁바위도 있습니다.

  

2016/05/20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무릉도원의 선경인 용추동천의 백운대에 자리한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을 만났습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스님의 수행 도량이며 부처님오신날까지도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어 문이 꽉 잠겨진 진공문.

 

 봉암사 설봉대사비

 

 

 


정진대사 원오탑비입니다. 보통 부도와 함께 조성하는데 특이하게도 멀리 떨어져있어 정진대사 원오탑인 부도는 보지 못하고 왔던 아쉬움이 있습니다. 정진대사 긍양은 신라말에서 고려 초 스님이며 성은 왕씨입니다. 스님이 열반에 들고난 뒤 공적을 각자한 비문으로 965년(광종 16년)에 세웠습니다. 정진대사 원오탑비의 높이는 273cm, 폭 161cm, 두께 26cm로 고려 초기의 조형미를 잘 보여줍니다.

 

 

 


비신은 청석이며 이수와 귀부는 고려 초기의 탑비 양식을 따랐습니다. 귀부에 비신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렸는데 거북 등에 비를 꽂는 비좌가 큰 게 특징이며 머릿돌인 이수에는 불꽃무늬에 둘린 연꽃봉우리 문양의 보주 장식이 웅장하게 조각되었습니다. 비문의 필체는 2cm 크기의 구양순체 해서로 당대의 문장가인 이몽유가 짓고 명필로 이름 날렸던 장단열의 글씨라 합니다.


2016/05/17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 희양산 봉암사의 전성기를 이끈 정진대사 원오탑비를 만나다. 보물 제172호


 

 

 

 


올해 부처님오신날 찾았던 문경 봉암사는 스님의 수도 도량이라 그런지 정말 맑고 깨끗한 법신이 머무는 느낌이었습니다. 처음 찾았던 봉암사라 그런지 아쉬움이 많은 여행이었으며 2017년 부처님오신날이 또 기다려지는 이유입니다. 그때는 더욱 자료 등을 준비하여 이번에 찾아보지 못한 곳을 여행해야겠습니다.

 

 

 

 

희양산 

 

◆문경 봉암사 정보◆

봉암사 주소: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봉암사전화:054-571-9088


☞2008/11/03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대야산 산행. 문경의 명산 대야산 용추폭포와 만추홍엽 단풍보기




728x90

728x90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희양산 봉암사. 봉암사의 꽃이라는 통일신라시대의 완벽한 예술품 문경 봉정사 삼층석탑을 만나다. 문경 봉암사



올해 부처님오신날 찾았던 문경의 절집입니다. 희양산 봉암사는 1년에 딱 하루만 사부대중에게 산문을 개방합니다. 그 때문에 1년을 기다린 많은 불자님과 관광객이 봉암사를 찾아 완전 봉암사는 북새통을 이룰 정도로 혼잡했습니다. 필자도 이번 기회에 마음만 항상 가지고 있던 봉암사 여행을 실행에 옮겼는데 지증대사탑과 탑비, 극락전, 정진대사원오탑비 등 모두 다 꼭 봉암사에 가야만 만나는 문화재였습니다.






◆문경 희양산 봉암사의 볼만한 문화재 구경하기◆


2016/05/17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 희양산 봉암사의 전성기를 이끈 정진대사 원오탑비를 만나다. 보물 제172호

2016/05/20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무릉도원의 선경인 용추동천의 백운대에 자리한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을 만났습니다. 봉암사 마애보살좌상.

2016/05/23 - (경북여행/문경여행)희양산 봉암사 극락전. 잦은 화재로 봉암사 전각중 유이하게 남은 보물 제1574호 봉암사 극락전의 독특한 목탑양식 당우를 만나다. 봉암사 극락전

2016/05/25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 통일신라 최고의 걸작품 지증대사 부도인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의 아름다움에 반하다. 봉암사지증대사탑

2016/05/26 - (경북여행/문경여행)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 탑비. 보물에서 국보 제315호로 승격된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 탑비의 웅장함에 깜짝 놀라다. 봉암사지증대사탑비




 


국보와 보물 이외에도 많은 문화재를 품고 있는 봉암사를 보면서 올해 봉암사를 잘 찾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봉암사의 꽃이라는 삼층석탑의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보면서 ‘깜짝하고’ 내 눈이 다 휘둥그레 졌습니다. 삼층석탑이 정말 완벽했기 때문입니다.


 

 


육중한 암반의 희양산을 떠받치는 듯 장엄하며 웅장하지만, 결코 그 모습은 둔하지 않으며, 가벼운 듯 날렵하지만 촐랑되지 않는 봉황의 모습과 닮아 통일신라 예술의 진가를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봉암사 삼층석탑은 신기하게도 이가 빠지듯 탑의 원형을 잃은 석탑이 대부분인데 상륜부까지 하나 빠짐없이 그때 당시의 모습을 갖춘 탑입니다. 그리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이처럼 완벽한 모습을 갖춘 탑은 잘 만나기 어려운데 문경까지 어려운 발걸음을 한 덕택에 예술성과 완벽미까지 갖춘 통일신라 석탑을 보게 되었습니다.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을 만나보겠습니다. 봉암사 경내 금색전 앞에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삼층석탑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9세기로 추정되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입니다. 전체 높이는 631cm. 상륜부의 높이는 238cm, 탑신을 받치는 지대석의 넓이는 324cm입니다.

 

 

 


특이한 점은 기단은 보통 2단 구조인데 이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식인 단층구조를 따랐습니다. 또한, 기단부를 이루는 지대석은 넓은 방형이며 그 아래에 곡선을 그리는 갑석 같은 1단의 받침을 표현했지만, 갑석이라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그 위에는 높은 굄 형식의 하대석이 기단의 중석을 받치고 있습니다. 중석은 4매 석으로 우주와 탱주를 모각했으며 갑석 아래에 엷게 부연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윗면에는 호형과 각형의 굄 장식이 탑신부를 받치고 있습니다.


 

 

 



 탑신부를 보면 옥개석과 옥신석이 각각 하나의 돌로 층마다 우주를 모각했으며 옥개의 층급 받침은 각층이 전부 5단에다 낙수면은 전각에 다다라 반전을 보여줍니다. 현재 가장 완벽하게 남아 있는 봉암사 삼층석탑의 상륜부는 2단의 갑석인 방형의 노반위에 편구형의 복발을 놓았습니다.




 

복발은 네 개의 꽃잎을 돋을새김하였고 사각 모양의 양화는 방형 모양에 4면과 각각 모서리에 6엽과 4엽의 연꽃을 배치하였습니다. 다시 5단의 보륜을 올리고 그 위에다 팔각의 보개를 놓고 십자 모양의 수연 끝에 용차와 보주를 세웠습니다.



 

 

 


오늘에까지 상륜부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철심을 관통하여 상륜부를 잡아주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상륜부의 보개는 1단의 받침에다 각 귀마다 연꽃이 조각된 귀 꽃을 새겼는데 이는 고려 시대 유행했던 석조 부도의 옥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봉암사 삼층석탑은 균형 잡힌 모습에 더욱 안정감 있어 보이며 우아한 아름다움은 장중한 희양산의 기세를 잡아주는 듯합니다. 평소에는 찾을 수 없는 문경 희양산 봉암사 내년 부처님오신날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봉암사 삼층석탑은 보물 제169호입니다. 





 

 

 

728x90

728x90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고려후기의 고건축물로 평가받는 독특한 불전인 국보 제311호 봉정사 대웅전. 안동 봉정사


 안동 봉정사에는 국보 제15호인 극락전과 국보 제311호인 대웅전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국보급 문화재인데 한 사찰에서 두 점이나 있는 것은 진짜 엄청나게 큰 천년고찰 아니고는 좀체 만나기 힘듭니다.

 





◆안동 봉정사 가볼만한 여행지와 안동 여행지 맛집◆


2016/05/31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만세루. 천년고찰의 풍미를 간직하며 묵직하여 봉정사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봉정사 만세루, 봉정사 만세루

2016/05/27 - (경북여행/안동여행)천등산 봉정사 극락전, 화려하지 않은 담백한 맛이나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최고 오래된 목조건물 안동 봉정사 극락전 여행. 봉정사 극락전

2016/05/24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천등산 개목사 원통전. 천등산의 지세로 안동에 소경이 많아 비보사찰이 된 개목사, 그후로 소경이 없어졌다는 개목사 원통전 여행,

2016/05/19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명옥대. 퇴계 이황의 강학소 안동 명옥대에서 녹음방초를 즐기다. 명옥대

2014/06/13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와룡산, 천하를 호령하던 용이 몸을 뉘며 쉬었다는 와룡산에서 안동호의 한반도 지형을 만나다

2014/06/10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여행에서 법흥사 칠층전탑과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동부동 오층 전탑을 보고 왔습니다.

2014/04/13 - (경북맛집/안동맛집)안동하회마을 맛집 간고등어 일직식당. 한국인의 밥상 최불암도 먹고 갔다는 안동간고등어 일직식당.

2014/02/03 - (경북맛집/안동맛집)안동하회마을맛집 남안동 휴게소. 안동에서는 꼭 먹어야 할 음식 1호 안동 간고등어 맛집 남안동휴게소




그러나 전통을 존중하는 고장 안동이라서 그런지 봉정사에는 두 점의 국보를 보유했습니다. 그것도 고려 시대에 창건됐다는 건축물로서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건물은 물론 봉정사 극락전입니다.





그럼 봉정사의 대웅전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아보고 왜 국보가 되었는지도 궁금했습니다. 그럼 봉정사 대웅전을 보겠습니다. 봉정사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모셨다면 봉정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봉안하고 좌우에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함께 모셨습니다.







대웅전은 1962년 해체·복원을 하면서 찾아낸 기록을 보면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쯤에 중창을 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대웅전은 오래된 당우로서 여러 번 보수가 이루어졌는데 ‘극락전 상량문’ ‘천등산 봉정사기(1728년)’ ‘양법당 중수기(1809년)’ 묵서와 1999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봉정사탁자조성기’ ‘법당중창기(1435년)’ ‘정면어칸기둥묵서(1436년)’ ‘대웅전개연중수기(1601년)인 4건의 고문서를 찾아내어 대웅전 변천에 관련된 내용을 함께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고문서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1809년까지 대략 9~10차례 대웅전을 보수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중 가장 빠르게 고친 것은 1361년(공민왕 10년)의 불단 묵서인데 이곳만으로는 중창의 근거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1428년(세종 10년)에 ‘ 불화 기록과 1431년 단청을 했다 것으로 되어 있어 그 기록을 근거로 1425년(세종 7년)쯤 전후에 중창한 것이라 추정할 뿐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고려 시대 불화의 기법과 형태를 담습한 후불벽화를 발견하여 대웅전의 조성 시기를 고려 말기에 가깝게 추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봉정사 대웅전은 앞면 3칸에 옆면 3칸의 규모로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을 한 건물이며, 공포는 장식하지 않은 2첨차의 다포양식입니다. 앞면에는 분합문을 내었으며 동·서면에 한 칸의 출입문을 달았고 뒷면에는 판문이었으나 폐쇄되어 있습니다.

 



고주를 법당 중심에 두었으며 불단과 후불벽체를 조성해 어칸과 협칸으로 나누었습니다. 1999년에 해체복원 하면서 후불벽화를 떼어낸 뒤 보존처리를 하여 봉정사 성보박물관에 따로 보관 중입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대웅전 앞면에다 조선시대 누각 형태인 툇마루를 달아내었는데 이는 고려의 건축 기법에다 조선 초기의 건축 양식을 함께 접목한 형태로 다른 사찰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습니다. 1963년 1월에 보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국보 제311호에 승격 지정되었습니다.


◆안동 봉정사 대웅전 사진으로 보기◆











 


 

728x90

728x90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만세루. 천년고찰의 풍미를 간직하며 묵직하여 봉정사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봉정사 만세루, 


안동시 천등산 아래의 봉정사는 일주문을 들어서면 여느 사찰에서 보는 천왕문 등은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경사를 이룬 산비탈에 길게 돌계단을 만들고 그 끝에는 2층으로 된 만세루가 천년고찰의 풍미를 간직한 채 묵직한 느낌을 주며 봉정사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 주는 데 손색이 없습니다.






◆안동 봉정사와 인근 여행지 맛집 둘러보기 ◆

2016/05/27 - (경북여행/안동여행)천등산 봉정사 극락전, 화려하지 않은 담백한 맛이나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최고 오래된 목조건물 안동 봉정사 극락전 여행. 봉정사 극락전

2016/05/24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천등산 개목사 원통전. 천등산의 지세로 안동에 소경이 많아 비보사찰이 된 개목사, 그후로 소경이 없어졌다는 개목사 원통전 여행,

2016/05/19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명옥대. 퇴계 이황의 강학소 안동 명옥대에서 녹음방초를 즐기다. 명옥대

2014/06/13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와룡산, 천하를 호령하던 용이 몸을 뉘며 쉬었다는 와룡산에서 안동호의 한반도 지형을 만나다

2014/06/10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여행에서 법흥사 칠층전탑과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동부동 오층 전탑을 보고 왔습니다.

2014/04/13 - (경북맛집/안동맛집)안동하회마을 맛집 간고등어 일직식당. 한국인의 밥상 최불암도 먹고 갔다는 안동간고등어 일직식당.

2014/06/10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여행에서 법흥사 칠층전탑과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동부동 오층 전탑을 보고 왔습니다.

2014/02/03 - (경북맛집/안동맛집)안동하회마을맛집 남안동 휴게소. 안동에서는 꼭 먹어야 할 음식 1호 안동 간고등어 맛집 남안동휴게소





 봉정사 만세루는 숙종 6년인 1680년 세워졌는데 오늘날까지 전해지면서 많은 보수가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건립하여 처음에는 덕휘루(德輝樓)라 불렸다는데 언제부터 만세루(萬歲樓)로 불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만세루는 봉정사를 들어서는 출입문 격인 누문입니다. 특히 봉정사는 산비탈을 깎아내어 너른 평지로 다듬기 위해 축대를 쌓았는데 축대 가운데 만세루를 만들고 그 아래 출입하는 계단을 내어 자연스럽게 경내로 올라오게 했습니다.

 

 

 


만세루는 밖에서 보면 2층 누각이지만 대웅전에서 보면 경내의 지면과 똑같은 단층으로 보입니다. 봉정사 만세루는 앞면 5칸에 옆면 3칸이며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홑처마 맞배지붕 2층 누각입니다.

 

 

 

2층 누각이지만 1층은 그저 출입구 역할을 하는 계단이 전부이며 2층은 건물의 형태 등으로 보면 정자 역할과 강당 역할을 겸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2층 바닥은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마루 바닥에 평난간을 둘렀으며, 공포를 구성하는 부재중 기둥의 머리에 보 방향으로 중첩해서 설치하는 장방형 단면의 긴 부재인 살미의 끝은 직절하였으며 내부의 기둥과 보를 연결해주는 보아지는 평평한 면에 도드라지게 새기는 초각을 하였습니다.

 

 


봉정사 만세루의 내부는 일고주 5량의 구조이며 누각을 받치는 기둥은 자연 형태 그대로 휘어지고 섞고 세월의 때가 켜켜이 묻은 나뭇결이 고색창연하여 외관상 보면 봉정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같아 보입니다.

 

 


만세루는 봉정사의 다른 건물과 다르게 전체적으로 장식을 거의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입니다. 현재 만세루에는 운판과 북, 목어를 설치하여 봉정사의 일상적인 행사가 이루어지며 덕휘루 현판과 기문 등이 걸려 있다는데 빠듯한 일정으로 바빠서 확인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요즘 같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반질반질 윤기 가득한 만세루 누마루에 올라 두 다리 쭉 뻗고 슬렁슬렁 불어오는 자연 숲 속 바람을 맞으면서 쉬고 싶은 그런 정자입니다. 2001년 11월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25호에 지정되었습니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