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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여행)도덕산 도덕암. 경주의 북쪽에 숨은 듯이 자리 잡은 도덕산 도덕암

 

암자는 자리한 위치에 따라 여행객에게 많은 감동을 준다. 그 만큼 산자수려한 위치에 터 잡은 암자에 더 많은 호기심을 느끼며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한 암자가 있다. 경주 안강의 도덕산으로 정상이 702m인 수더분한 산이다. 그야 말로 별 특징이 없는 산으로 경주와 영천의 경계를 이루며 솟아 있다. 그래도 경주에서는 제법 높은 축에 들어가는 도덕산 언저리에 작은 암자가 자리 잡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여행)도덕산 도덕암. 신라 선덕여왕이 찾아 왔다는 도덕산,

 

이 산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의 선덕여왕이 이곳을 찾아 왔다하여 두득(덕)산으로 불렸다 한다. 어찌 덕만공주와 느낌이 비슷한 것 같다. 그러다 조선중기때 회재 이언적에 의해 도덕산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여행)도덕산 도덕암. 신라 경덕왕때 창건된 유서 깊은 고찰 도덕산 도덕암

 

안강 도덕산 도덕암의 기원은 신라 경덕왕(742년~765년)때 창건 된 암자로 풍진세상을 견디며 천년고찰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원래는 아래 옥산리 정혜사의 12개 부속 암자중 하나였다한다. 어떠한 연유로 정혜사가 패사를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는 도덕암만 남겨놓고 모두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도덕암의 사찰 명칭도 창건 당시의 이름이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그 이유는 동방오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에 의해 뒷산을 도덕산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에 도덕암으로 부른 것은 아닌지.

 

 

 

 

지금이야 도덕암 오르는 암자길이 뚫여 승용차도 쉽게 올라오게 되었지만 필자가 처음 암자를 찾을 당시에는 대단한 불심이 아니라면 엄두도 내기 힘든 그런 위치에 있어 그저 절의 명맥만 유지할 정도였다. 최근에 다시 찾아보니 이제는 콘크리트 포장이 된 차도가 뚫여 그때와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여행)도덕산 도덕암. 동해 일출 관망 장소 도덕산 도덕암

 

이곳 도덕암은 암반을 깍아 만든 터에 제비가 둥지를 틀듯이 바위에 엉겨 붙어 있다. 옥산리 마을에서는 영험이 있는  기도처로 말려져 있다. 대웅전은 앞면3칸에 옆면 1칸의 그야말로 형식만 갖준 모양으로1890년대에 그려진 탱화가 한점 남아 있어 그 이전에도 암자의 명맥은 유지가 된 것 같다. 

 

 

 

 

도덕암에 올라보면 암자의 위치에 놀란다. 앞으로 펼쳐지는 전망은 그야말로 그칠것이 없다. 동해에서 올라오는 일출을 감상할 수 있는 멋진 조망을 가진 암자로 이곳에서 하루 쯤 지낸다면 그야말로 몸에 찌든 때가 정화가 된다는 느낌이 들 것 같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 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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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강동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의 역사. 양동마을



 경주의 대표적인 양반마을은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의 유래를 보면 경주(월성) 손씨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1433~1484)선생이 청송 안덕에서 560여년전에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처가인 양동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살면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여강이씨 찬성공 이번(1463~1500)과 손소의 딸이 혼인을 하면서 처가인 양동에 이주하여 살았다. 두분 사이에 큰 아들로 동방오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을 낳았다. 결국 회재 이언적은 손소의 외손자로 이곳 양동마을에는 손씨와 이씨가 서로 마을을 형성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동마을은 어떠한 특징이 있는 마을일까. 손소도 장가를 들어 처가인 이곳에 이주하였고 그의 사위인 이번도 이곳으로 이주와 살면서 처가입향의 마을로 불린다. 그러나 처음 이 마을에 입향한 손소의 처 류씨부인은 그 당시 무남독녀였던 관계로 풍덕 류씨는 절손되어 현재에 외손인 손소의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강동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의 인물. 양동마을


양동마을은 조선 중기 때 부터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조정에 진출한 사림들에는 세조 5년(1459년)에 손소공이 문과에 급제를 하여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여 큰 공을 세워 공신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둘째 아들인 우재 손중돈은 성종2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 ,우참찬등 조정의 요직를 두루 거치며 청백리에 올랐다. 그리고 손소의 외손자인 대 유학자이자 경세가인 문원공 회재 이언적이 배출되면서 퇴계 이황에 앞서 성리학의 기틀을 만들며 해동부자라 하였다. 회재이언적은 동방5현의 한분으로 종묘배향과 문묘에 종사되어 역대임금과 공자와 함께 위패기 모셔지고 전국의 20여곳의 서원에서 배향되기도하였다. 양동마을에서는 월성손씨와 여강이씨에서 모두 문과 26명, 무과14명 사미76명으로 과거에 급제한 분만 116명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양동마을은 주차장을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먼저 만나는 건물이 양동마을 문화관으로 조선시대 양동마을의 모습과 양동마을에서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이 미니어쳐로 제작이 되어 한눈에 볼 수 있게 편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무료로 볼 수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관람료 4천원.


이곳을 지나면 매표소 건물이 나온다. 입장료는 4천원. 사실 작진 않은 관람료라 많은 가족이라면 부담도 간다. 그러나 이곳은 조선시대 양반 마을의 전형을 볼 수 있고 500년전의 건축물을 볼수 있는 몇안되는 곳 중의 한곳이라 의미가 남다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양동초등학교를 지나면 양동마을의 전경이 펼쳐진다. 정면에 먼저 크게 보이는 가옥이 향단건물로 전체를 차근차근 돌아보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시간 제약상 다 볼 수는 없고 양동마을에서 대표적 가옥으로 15~16세기에 지어진 관가정, 서벽당, 향단, 무첨당을 중심으로 보면서 주위에 몇군데를 관람해도 두시간은 후딱 지나가 버린다.




 


 필자는 양동마을의 매점에서 왼쪽으로 관가정을 먼저 관람을 하기 위해 왼쪽으로 걸었다. 관가정 아래 양동마을의 주민들이 현재 생활하고 있는 초가집이 많이 보인다. 주민들의 피혜가 가지 않도록 그냥 겉 모습만 보고 지나친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관가정.



먼저 관가정 입구에 늘어진듯 서 있는 고목나무에 눈길이 간다. 이곳에서 오른쪽 오르막을 가면 관가정의 솟을 대문이 나타난다. 관가정으로 중종때 청백리에 옹았던 우재 손중돈선생의 옛집이다. 관가정의 앞쪽은 탁 트이게 하여 낮은지대에서 농사를 짓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건물 배치를 한것이 특이하다.


 

 


관가정은 '농사 짓는 광경을 내려다 보는 정자'라는 뜻으로 손중돈은 이곳 관가정 의 탁 트인 누마루에 올라 세상사 다 잊고 안강 들판을 바라보았을 것으로 보인다.이름그대로 누마루가 있는 정자로 양동 마을 초입의 물봉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관가정을 나와 영귀정과 설천정 관람을 위해 관가정 뒤 산길을 따라 간다. 먼저 영귀정 가옥과 만난다. 



영귀정

 

 


영귀정은 향토문화재로 회재 이언적 선생이 만년에 이곳에 모옥을 지어 놓고 시를 읊으면서 산책을 하던 곳으로 후손들에 의해 정자를 지어 선생을 추모하고 있다.




 

 

 

 

 

 

 

 

 

 

설천정사는 향토문화재로 회재 이언적의 세째 손자였던 설천정 이의활공이 학문을 강학하기 위해 지었던 정자라 한다.  그 앞에 초가집이 한동 지어져 있다.


 

설천정사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무첨당.



무첨당은 보물제 4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기왓집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자이자 문신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이 경상감사 재직때 지은 종가별당이다.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생활하였다는데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의 장손자인 이의윤의 호로'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무첨당에 걸린 편액중에 흥선대원군이 이곳 무첨당에서 하루  묵고 남겼다는 '좌해금서' 그 뜻은 '선비는 책을 읽어야 하지만 풍류도 알아야 한다'며 조선 선비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하였는데 필체를 보면 그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대성헌은 경상북도 민속 문화재 제34호로 높은 언덕에 위치하며 18세기 중엽에 지어졌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되며 'ㅁ'자를 이루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낙선당


낙선당은 손소의 셋째 아들인 만재 손숙돈이 분가 할 때 지은 건물로 낙선당은 병자호란때 순절한 손종로(1598~1636)의 호에서 따 왔다. 




 

 


낙선당은 1540년대 건물이라지만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천석꾼의 집으로 창고가 많은 것이 특징이며 건물의 구조를 보면 대문채 사랑채 안채로 나누며 중문채와 함께 'ㅁ'의 형태지만 조금은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서백당.



서백당은 중요 민속문화재 제23호로 당호의 뜻은 '매일 하루에 참을 인(忍)자 100번을 쓴다'는 의미이며 서백당의 유래를 보면 어느 해 중국에 9대가 한집안에 살았는데 왕이 이곳을 지나다 그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어찌 9대가 이리 한집에 살 수 있었냐고 물어니 그는 붓과 종이를 들고 오더니 참을 인(忍)자를 100번 쓴다음 임금에게  이러면 안될 것이 없다하였다. 월성(현 경주)손씨 손소(1433년)~1484년)가 이곳에 처가 입향을 하면서 이곳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곳이 월성손씨의 종택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향단.



향단은 보물제412호이며 회재 이언적(1491년~1553년)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때 병환중인 모친을 돌 볼 수 없어 중종이 지어준 건물이다. 다시 이언적이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그의 동생 이언괄에게 물려 준 후 여주이씨 향단파의 종가가 되었다.  향단이란  이언괄의 손자인 향단공 이의주의 호에서 이 집의 이름을 따왔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정충비각.



정충비각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2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비각은 조선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인 버린 손종로와 그의 노비 억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7년에 세웠다. 손종로는 광해군 10년인 1618년 무과에 급제하여 병자호란때 쌍령전투에서 그의 노비 억부와 함께 전사하여 그의 시체를 찾지못하고 옷을 넣은 관으로 장례를 치렀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옥산서원.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는 회재 이언적선생의 고향이자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1491~1553)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그의 사후인 선조 5년인 1572년에 경주부윤의 이제민이 지방 유림들과 함께 세웠다. 옥산서원 입구에서 150m의 진입로는 자계천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이 숲길을 이루어 햇볕 한 점 들어올 틈이 없다. 시냇물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이곳 옥산서원은 그야말로 낙원이 따로 없을 것 같은 곳이다.



 

 

 


먼저 정문에는 ‘역락문(亦樂門)“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이는 논어의 학이편에서 '유붕이자원방래 불역락호아(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에서 따왔다한다. 그 뜻은 서원을 찾는 손님에게 더 없이 정답고 편안하다는 의미로 당대의 명필가 한석봉의 필체라 한다. 또한 유생들의 휴식장소인 무변루와 강당인 구인당의 필체도 한석봉의 글씨이다. 구인당의 맞은 편에 흰바탕에 검은 글씨인 옥산서원의 현판 글씨 또한 추사 김정희의 필체로 알려져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 조선시대 양반마을 양동마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양동마을 독락당.



독락당은 건물 자체가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는 동방오현의 한분인 회재 이언적이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지은 사랑채다. 그는 이곳에 앉아 책을 보며 소일을 하였다. 현재에도 그의 후손이 거주를 하고 있으며 안으로 빼꼼히 보니 가정집이라 출입을 삼가해 달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독락당을 못보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가장 멋스런 건물은 자계전에 반쯤 발을 빠트리고 있는 독특한 계정이다. 널따른 암반위에 생긴 그대로 자연석을 이용해 쌓아 올린 2층 누각은 계곡과도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양동마을 홈페이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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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뜻.서백당(書百堂).

 

우리 속담에 참을 인(忍)자 세번을 쓰면 살인도 면한다는 옛말이 있다. 아무리 밉고 죽이고 싶은 철천지 원수라도 기껏해야 忍자 세번으로 그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 진다고 하는데 그럼 매일 하루에 참을 인(忍)자 100번을 쓴다면 어찌 될까. 철천지 원수라도 33번은 살릴수 있다. 이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당호를 가진 곳이 있다. 경주 양동마을의 서백당으로 원래는 서인백(書忍百)이었다한다. 서인백의 유래를 보면 어느 해 중국에 9대가 한집안에 살았는데 왕이 이곳을 지나다 그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어찌 9대가 이리 한집에 살 수 있었냐고 물어니 그는 붓과 종이를 들고 오더니 참을 인(忍)자를 100번 쓴다음 임금에게  이러면 안될 것이 없다며 빙긋이 웃었다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 경주손씨 종택.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곳이 경주 양동마을의 서백당이다. 월성(현 경주)손씨 손소(1433년)~1484년)가 이곳에 처가 입향을 하면서 이곳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곳이 월성손씨의 종택이다. 흔히종택은 어떤곳인가 종손은 문중을 위하여 자신은 버려야하는 무거운 자리다. 그럼 얼마나 많은 참을 인(忍)자를 가슴에 새겼는지 알 수있다. ㅎㅎ 뜬 구름 같은 이야기는 접어두고,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 물자형 명당..

 

양동마을에 있는 서백당에 대해 알아보자. 서백당의 입지는 양동마을을 감싸고 있는 설창산과 문장봉에서 뻗어 내려온 네줄기의 능선이 물(勿)자 형을 이루는 독특한 지형을 이룬다. 이는 양동마을 주차장이 있는 입구에서는 그 마을 존재 조차 보이지 않으며 안으로 들어서야만 양동마을의 모습이 들어나 온전하게 볼 수있는 물자형세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 3명의 현인 배출.

양동마을은 예로부터 이중환의 택리지와 일제강점기때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풍수에도 삼남의 4대 길지로 언급한 명당터로 알려져 있다. 손소는 세조2년에 서백당을 지을때 지관으로 부터 이곳의 지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곳을 정한것으로보여진다.  서백당이 있는 이곳은 혈이 모이는 지점으로 3명의 현인이 배출된다는 곳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 손중돈과 이언적 배출 또 한명은.

손소때에 벌써 두명의 현인이 태어 난것을 알 수 있다. 손소의 둘째 아들이 우재 손중돈(1463년~1529년)으로 정2품 의정부 우참잔의 벼슬에 올랐던 분이며 손소의 외손자며 손중돈의 생질인 동방5현의 회재 이언적이 또  한분이다.

 

 

사랑채와 내실을 가르는 작은 담장으로 왼쪽은 사랑채며 담장 오른쪽은 3명의 현인중 두명은 배출 되었지만 남은 한분은 반드시 월성손씨에서 배출 되어랴 한다며 며느리만 해산을 할 수 있다는 산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 550년 향나무 손소가 직접 심어.

아직도 월성손씨 종택에서는 한분의 현인이 태어날만을 학수 고대하고 있는데 이곳 서백당에서는 손씨의 며느리는 서백당의 산실에서 해산을 할 수 있지만 출가한 딸은 서백당의 산실에서 몸을 풀수 없다고 하며 몸을 풀러온 딸들은 이웃의 일가 친척집으로 내려 보낸다한다. 마지막 남은 현인 한분은 반드시 월성손씨에서 나와야 한다는 뜻이며 다른 문중에 빼앗길 수 없다는 것으로 보인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의 구조는.

서백당의 구조를 보면 먼저 한일자형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앞에 사랑채와 만난다. 사랑채와 연결되는 안채는 'ㅁ'자 형태를 취하며 오른쪽으로 손소를 모신 사당이 있다. 안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고 사랑채는 지붕의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사랑방과 잠을자는 침방이 대청을 두고 'ㄱ'자 모양으로 놓여 있다. 그리고 대청을 사이에 두고 사랑방과 작은 사랑방이 서로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작은 사랑방을 모서리쪽에 두었다. 툇마루가 작은 사랑방과 대청으로 연결된 점이 이채로우며  서백당 현판의 맞은 편에는 손소가 이 집을 짓고 기념하기 위해 직접 심었다는  550년된 향나무를 보며 월성손씨에게는 서백당의 존재가 어떠한지 알 수 있을 것다.

 

 

 

현재에는 안채 방향으로 가는 입구는 출입을 통제하는 바리게이트가 설치되어 있다. 양동마을의 여러 건물이 현재에도 그의 후손들이 함께 거쳐를 하고 있어 건물의 보존상태가 얼마나 양호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550년의 풍진 세월도 잘 견디며 이어온 건축물 서백당. 우화하며 화려한 것 같으면서도 단정한 여인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아름다운 고가의 모습이다.

 

 

 

 

 

 

세월의 때가 켜켜히 배어나오는 기둥과 마루에는 그 당시 손중돈과 이언적이 태어났을때의 븐주한 모습이 그려지며 지금 보고 있는 향나무를 그 당시 두 현인도 보았다고 생각하니 그  흔적을 찾아보며 서백당을 내려와 향단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월성손씨 며느리에게만 내어 준다는 산실.

 

 

 

 

 

 

 

 

 

 

 

 

 

 

 

 

 

 

 

 

 

양동아을 문화관에 있는 서백당 미니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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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단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건물인 행랑채. 무슨 요새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동마을 향단. 99칸의 대 저택 경주 양반마을 향단.


현재의 향단 가옥은 회재 이언적(1491년~1553년)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때 병환중인 모친을 돌 볼 수 없어 중종이 지어준 건물이다. 다시 이언적이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그의 동생 이언괄에게 물려 준 후 여주이씨 향단파의 종가가 되었다.  향단이란  이언괄의 손자인 향단공 이의주의 호에서 이 집의 이름을 따왔다. 





향단의 솟을 대문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동마을 향단. 집주인 개성이 독특한 99칸의 대 저택 경주 양동마을을 대표.



조선 중기 살림집의 모습이 아닌 집주인 개성이 묻어나는 독특한 건축물로 지금의 행랑채는 1976년 보수 공사를 할때 위로  더 올라 안채와 더욱 가깝게 되었다. 원래 99칸의 양반가옥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지만 6.25 한국동란때 전화로 인해 소실되어 현재 56칸이 남아 있다. 향단은 양동마을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오는 건물로 그 만큼 자리한 곳이 양동마을을 대표할 만한 곳이다. 보물 제 412호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동마을 향단. 99칸의 대 저택 경주 양반마을 향단. 풍수지리를 이용한 요새 같은 모습.


향단의 구조를 보면 일반 양반 기와집과는 달리 독특한 평면 구조이다. 몸체는 풍수지리에 따라 월(月)자 모양을 하고 여기다 한일(一)자 모양의 행랑채와 칸막이를 두어 용(用)자 모양을 이루었다. 행랑채 사랑채 안채가 모두 한몸체이고 마당이 두개인 특색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동마을 향단. 99칸의 대 저택 경주 양반마을 향단. 밖에서는 안의 모습을 볼 수 없어.


행랑채 뒤편에 있는 본채는 행랑채와 똑 같은 규모로 중앙과 좌우 양쪽 끝을 이어서 방으로 연결한게 흥(興)자 모양의 한건물 처럼 배치가 되어 있다. 이곳을 방문하면 아쉬움 점이 많다. 아름답고 독특한 구조의 향단 건물은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눈에 들어오는 일자형의 행랑채 모습만이 볼 수 있다, 빠삐용의 요새 같은 모습으로  향단안의 구조는 밖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동마을 향단. 99칸의 대 저택 경주 양반마을 향단. 멀리서 보는 향단의 모습 너무 아름다워.


이곳은 현재에도 여주이씨 향단파의 후손들이 거주를 하고 있어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을 언뜻언뜻 볼 수 있는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할 수 없이 내려와 연밭이 있는 입구쪽의 먼발치에서 전체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한다. 멀리서 본 향단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멀리서 본 향단의 모습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동마을 향단. 99칸의 대 저택 경주 양반마을 향단. 양동마을 의 유래는


경주의 대표적인 양반마을은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의 유래를 보면 경주(월성) 손씨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1433~1484)선생이 청송 안덕에서 560여년전에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처가인 양동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살면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여강이씨 찬성공 이번(1463~1500)과 손소의 딸이 혼인을 하면서 처가인 양동에 이주하여 살았다. 두분 사이에 큰 아들로 동방오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을 낳았다. 결국 회재 이언적은 손소의 외손자로 이곳 양동마을에는 손씨와 이씨가 서로 마을을 형성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동마을은 어떠한 특징이 있는 마을일까. 손소도 장가를 들어 처가인 이곳에 이주하였고 그의 사위인 이번도 이곳으로 이주와 살면서 처가입향의 마을로 불린다. 그러나 처음 이 마을에 입향한 손소의 처 류씨부인은 그 당시 무남독녀였던 관계로 풍덕 류씨는 절손되어 현재에 외손인 손소의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양동마을 문화관의 향단 미니어쳐







향단 건물의 독특한 구조(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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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의 모습.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낙선당. 낙선당은 손종로의 호에서 따와...


낙선당은 손소의 셋째 아들인 만재 손숙돈이 분가 할 때 지은 건물로 낙선당은 병자호란때 순절한 손종로(1598~1636)의 호에서 따 왔다. 





낙선당의 입구. 처음 보이는 건물이 대문채.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낙선당. 낙선당은 천석꾼의 집을 말해주듯 곳간을 많이 두고 있다.


낙선당의 가옥 주인은 천석꾼으로 알려져 있어선지 나락을 보관하는 곳간이 많은 것이 특징이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디딜방아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안에서 본 대문채.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낙선당. 낙선당은 1540년대 건물이라지만...


낙선당은 1540년대 건물이라지만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다. 건물의 구조를 보면 대문채 사랑채 안채로 나누며 중문채와 함께 'ㅁ'의 형태지만 조금은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낙선당 편액.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낙선당. 낙선당은 건물 형태는....


서백당 뒤로 비탈진 오르막을 오르면 만나는 낙선당은 먼저 대문채와 만난다. 대문을 통할 수 없고 오른쪽으로 들어서서 안에서 대문채를 보면 정면3칸에 옆면 1칸으로 중간에 출입구인 대문을 두고 왼쪽에는 행랑채를 달고 오른쪽은 마굿간을 두었다. 



대문채와 곳간채.




행랑채 오른쪽으로 4칸의 곳간채 건물에 방을 한칸 넣었고 대문채를 마주보며 사랑채를 지었다. 사랑채는 중문채와 연결 되는 것 같이 한일(一)자 형으로 길게 이어져 있지만 안채와 서로 연결 된다. 



중문채로 7칸.



정면 4칸에 옆면 1칸의 사랑채는 왼편에 2칸의 대청을 넣었고 오른쪽으로 사랑방을 2칸 넣어 방을 만들었다. 그 옆 중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중문채를 통해 들어가면 안채.




중문채는 모두 7칸으로 긴 형태의 건물이다. 중간에 1칸의 중문이 있고 왼편에 2칸은 방이며 나머지는 모두 나락을 보관하는 창고를 만들었다. 현재 안채는 아직도 손종로의 후손이 이곳에 거처를 하고 있어 들어 가 볼 수 없다.






낙선당의 모습과 이곳 안채 사랑채등을 자세히 보면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기단에 비해 매우 낮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양동마을의 양반가옥중에서는 가장 낮은 축대가 아닌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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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리 자계천의 독락당.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도덕산~자옥산 산행. 도덕산~자옥산 산행 개요.


신라 경덕왕때 주민의 평안함을 염원하는 뜻에서 안강이라 한것이 지명으로 굳어 졌는데 그만큼 넓은 안강들로 인해 살기 좋은 고을인 것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안강의 차디찬 북풍을 막아주는 도덕산과 자옥산은 경주 안강을 대표하는 산으로 들머리에 있는 독락당과 옥산서원이 동방오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의 숨결이 묻어난다. 이곳 양동마을과 옥산리는 회재 이언적을 빼고는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채취가 골고루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신라시대때 부터 붉은 옥이 많이 생산되었다는 자옥산. 그 아래 있는 마을이라 옥산이라 자연스럽게 불렸고 신라의 선덕여왕이 이곳을 찾아 왔다한다. 궁궐에 많이 필요한 옥 때문에 온것은 아닌지 도덕산의 옛이름도 선덕여왕이 찾아 왔다하여 두득(덕)산으로 불리다가 조선중기 회재 이언적에 의해 도덕산으로 바꾸어 졌는데 이산을 오르면 자연적으로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를 깨닫고 먼저 인간이 되도록 하는게 아닐지 모를일이다. 요즘 인간 같잖은 사람들이 많아 도덕산을 열심히 올라볼 것을 권한다.

 

 

독락당 주차장. 도덕산~자옥산 출발지.




장산서원 빗돌을 따라간다.




독락당 뒤 운치 있는 숲.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갈림길.






정혜사지십삼층석탑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도덕산~자옥산 산행. 도덕산~자옥산 산행 경로.


산행경로는 경주시외버스 정류장 옆 시내버스 주차장에서 203번을 이용한다. 양동마을을 거쳐 안강읍을 경유하여 버스 종점인 독락당 주차장에서 내리면 된다. 독락당~정혜사지십삼층석탑~민내마을 삼거리~도덕암 입구~도덕암~도덕산~사거리 안부~자옥산~전망대~산장식당~독락당 버스 정류장 순으로 산행 시간은 3시간30분이며 휴식시간을 포함하면 4시간30분에서 5시간쯤 소요된다. 










도덕산의 모습




민내마을 갈림길 도로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도덕산~자옥산 산행. 도덕산~자옥산 산행 독락당 주차장에서 시작.



먼저 주차장에서 독락당을 보고 왼쪽 장산서원 빗돌 방향의 도로를 따른다. 세심권역 전통체험 학습장을 지나고 독락당을 왼쪽으로 돌아 뒤쪽 숲을 끼고 간다. 숲이 끝나는 지점에 이정표가 서있다. 오른쪽 자계천을 건너면 포항시 기계면(3.2km)임도 방향. 도덕산은 장산서원 0.6km의 직진방향이다. 곧 정혜사지십삼층석탑 갈림길 이정표와 만난다. 왼쪽으로 정혜사지십삼층석탑이 보이고 도덕산과 자옥산를 잇는 안부 사거리에서 내려오는 하산길이 이곳에서 만난다. 석탑을 보고 나와 장산서원 방향(0.5km)을 따른다.




도덕암 갈림길. 왼쪽으로 오른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도덕산~자옥산 산행. 도덕산~자옥산 산행 도덕암을 거쳐 도덕산 정상으로...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르면 '산방을' 안내판을 지나면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도덕암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걸어 간다. 호룡산 관음사 안내판이 서 있는 삼거리 도로에서 오른쪽은 민내마을(2.12km)방향. 도덕산(2.66km)은 직진한다. 비포장 임도길로 바뀌고 4분이면 왼쪽 풀숲에 도덕암을 가르키는 안내판이 숨어 있다. 이곳이 도덕산 들머리다. 현재 도덕암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도덕암까지 차로 올라 갈 수 있는 전에 없던 임도 길이  뚫여 있다. 도덕산은 도덕암 산길을 오른다. 초입부터 나무계단을 올라야 한다. 잠시 뒤 산길로 변하고 햇빛 한줌 들지 않는 숲 그늘 오름길이다. 다시 돌계단을 오르면 산길은 다시 오르막이 나온다. 15분이면 도덕암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 산길은 도덕산(2.03km) 방향. 오른쪽 도덕암 방향으로 직진한다. 곧 도덕암으로 오르는 임도와 만나며 콘크리트 포장이 완벽하게 되어 있다. 이곳에서 왼쪽의 도덕산 방향으로 올라도 도덕암으로 가진다. 도덕암 오르는 콘크리트 임도 길도 급경사라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승용차로 도덕암까지 오를때도 급경사와 곡각이 심하여 운전에 주의를 해야 하겠다. 7분이면 다시 도덕암(0.06km)과 도덕산(1.56km) 갈림길과 만난다. 머리를 들면 도덕암의 요사채를 볼 수 있다.  오른쪽 임도를 따라 도덕암으로 간다.







도덕암 오르는 콘크리트 포장길.




이정표 오른쪽으로 도덕암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조낭이 탁월한 도덕암.




산령각 앞의 전망대.




산령각 앞에서 본 어래산.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도덕산~자옥산 산행. 도덕산~자옥산 산행. 도덕암의 경치가 탁월.



도덕암은 여느 절처럼 규모가 크지 않다. 작은 암자 수준으로 이곳에서 보는 전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정면 기계면으로 임도가 구불구불 넘어가고 그 오른쪽에 어래산이 솟아 있고 왼쪽으로 봉황의 자리인 봉좌산이 큰 덩치로 솟아 있다. 이곳에서 수도꼭지를 틀어 시원한 물을 한바가지 들이키니 폐부의 때를 씻어 버리기에 충분하다.  누구나 이곳에 오르면 도덕의 경지에 도달할 것 같다. . 도덕산 오르는 산길은 암자 입구에서 바위를 왼쪽으로 돌아 오르는 길이며 도덕산과 산령각 가는 길이다. 작은 산령각 앞에도 바위로 된 멋들어진 전망대를 만난다. 도덕산 정상은 산령각 왼쪽의 덱으로 만든 계단길이다. 산신각 위의 덱 전망대에서 마지막으로 주위를 일별하면 다시 본격적인 오르막 산길이다. 7분이면 오래된 이씨묘를 지나고 왼쪽으로는 잘게 부서진 너덜이 길게 내려와 있다. 오르는 산길 옆으로 3m는 됨직한 반듯한 바위가 서 있고 주위로 고만고만한 바위가 층 덤을 이루고 있다. 9분이면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덱 계단이 바위에 걸려 있다. 이곳을 올라서면 곧 능선이다. 자옥산과 도덕산을 연결하는 능선으로 왼쪽은 자옥산 방향, 도덕산 정상은 오른쪽 30m 앞이다.








도덕산 정상 밑 갈림길.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도덕산~자옥산 산행. 도덕산~자옥산 산행. 선덕여왕이 다녀 갔다는 도덕산.



오르막을 오르면 정상석이 3개나 서 있는 도덕산 정상이다 . 2010.3월 한맥회에서 세운 정상석이 눈길을 끈다.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포항의 기계쪽 풍경과 봉좌산~어래산 능선 그리고 들머리인 옥산리의 보면 고도감이 엄청 높아 도덕산의 높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도덕산의 유래는 신라시대에 선덕여왕이 이곳에 다녀 갔다고 두득(덕)산이라 불리다가 조선중기 동방오현의 한분인 회재 이언적이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되어 낙향하여 옥산리 자계천에 독락당을 짓고 1533년 중종28년 사산오대를 명명하면서 도덕산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자옥산 방향은 삼거리까지 되돌아 간다.  왼쪽은 도덕암에서 올라온 길이며 자옥산 방향은 직진한다. 산길은 내리막이다. 바위를 잡고 내려서는 곳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타나고두 길다 서로 만나지만 오른쪽 산길이 전망대에 올라선다. 서쪽인 영천방향과 낙동정맥길인 삼성산이 오룡리를 감싸고 있다. 도덕산과 자옥산의 능선길은 숲이 짙어 하늘이 보이지 않는 초록색 오솔길이다. 왼쪽 능선을 따라 정혜사지 방향으로 내려가는 희미한 갈림길을 나타나면 오른쪽 뚜렷한 산길을 내려간다. 




도덕산과 자옥산 사이 사거리 안부 .







자옥산 정상.




계정마을 갈림길




안강들과 읍면 전망대.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도덕산~자옥산 산행. 도덕산~자옥산 산행 자옥산 아래 산장 식당으로 하산.



도덕산 정상에서 약25분이면 사거리 안부. 왼쪽으로 정혜사지십삼층석탑(1.65km)으로 하산하는 길이 열려 있다. 오른쪽은 오배마을(1.43km), 자옥산(0.74km)은 직진한다. 70m 뒤 다시 갈림길과 만난다. 왼쪽 정혜사지십삼층석탑 방향으로 내려서는 길이 더 뚜렷하다. 오른쪽으로 서서히 올라간다. 자옥산까지는 대체적인 오르막 산길로 이어진다. 월성최씨묘에서 한숨을 돌리고 정상이 다 와 가는지 산길은 한결 수월하다. 정상 직전의 갈림길에서 왼쪽은 옥산리 산장식당으로 바로 하산을 하고 오른쪽을 오르면 곧 정상이다. 검은 빗돌이 자옥산 정상임을 알리고 그 옆으로 돌로 쌓아 올린 축대가 있다. 

















독락당 주차장 하산.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도덕산~자옥산 산행. 도덕산~자옥산 산행. 마무리는 독락당 주차장 원점회귀



숲으로 가려 조망은 전혀 볼 수 없다. 하산을 서두르면 정상석 앞으로 난 길을 10m 내려서면 하곡저수지(4.24km) 갈림길. 왼쪽에 다시 갈림길이 나온다. 하곡저수지 계정마을(1.74km) 스텐리스 이정표가 서 있다. 계정마을 방향으로 하산한다. 곧 오른쪽으로 편편한 바위가 나타나고 그 끝에 두사람이 바위에 걸터 앉아 안강들판과 읍내를 바라 볼 수 있는 멋진 전망대를 만난다. 다시 산길로 복귀하면 이번에는 왼쪽으로  편편한 바위로 된  전망대를 열어준다. 하산길은 고도를 낮추기 위해 갑자기 뚝 떨어지고 묘지 한기를 지나면 소나무 숲길로 바뀐다. 에돌아 나가는 편안한 소나무 숲길을 따라 자옥산 정상에서 40여분이면 산장식당 주차장이 나오고 곧 토산도요 앞 도로다. 독락당 주차장은 왼쪽 도로를 따라 가면 지척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도덕산~자옥산. 도덕산~자옥산 교통편. 



일단은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까지는 가셔야 겠죠.

교통편은 경주시외버스 터미널을 나오면 오른쪽으로 50m만 가면 시내버스주차장이 나온다. 그곳이 양동마을가는 버스 주차장이다. 안강행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203번 버스로 오전 6시20분, 7시30분, 9시15분, 10시30분, 12시30분으로 45~55분이 소요된다.


승용차는 네비로 독락당이나 정혜사지십삼층석탑을 치면 된다. 위치는 버스 종점인 독락당 앞에서 장산서원 방향으로 따라가면 된다. 독락당 뒷편 자옥산과 도덕산의 부드러운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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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무첨당.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무첨당의 뜻

 

조선 중기의 기왓집으로 조선시대 성리학자이자 문신인 회재 이언적(1491~1553)이 경상감사 재직때 지은 종가별당이다.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생활하였다는데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의 장손자인 이의윤의 호로'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무첨당은 여강이씨 종가 별당 건물.

 

무첨당의 용도는 친구와 벗하며 손님접대와 독서등의 용도로 만들었다. 현재에도 무첨당에는 이언적의 장손인 여강이씨 이지락선생과 그의 아들이 지키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무첨당은 동방5현의 여강이씨 이언적은...

 

이언적은 어떤 인물인가. 본관은 여주이며 자는 복고 호는 회재 또는  자계옹이다. 아버지  찬성공 이번(1463~1500)은 여강이씨로 성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성균관 생원으로 손소의 8남매중 둘때달과 혼인을 하여 처가인 양동마을로 입향하였다, 그의 맏아들이 회재 이언적으로 동방5현의 한분이다. 중종9년인 1514년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벼슬길에 올랐고 그 후 1530년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 되어 옥산에 독락당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한다.  중종32년인 1537년에 김안로가 죽자 다시 복직하며 중종의 신임을 받지만 명종2년인 1547년에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모함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고 만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무첨당은 여강이씨 종가 별당 그 구조는.

 

무첨당의 구조를 보면 조선 중기의 건물로서  앞면5칸 옆면 2칸의 규모로 건물 내부를 세부분으로 나누어  가운데 3칸을 대청을 넣고 좌우 1칸씩은 온돌방을 넣었다. 대청은 앞면 기둥 사이를 개방하고 누마르에서도 대청을 향한 쪽은 개방되도록 하였다. 대청의 뒷면은 벽채를 만들어 문짝을 달았다. 평면은 'ㄱ' 자 형으로 둥근 기둥과 네모기둥을 세워 방과 마루를 구분하였다.(문화재청 참고)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무첨당. 무첨당의 편액 좌해금서는 대원군 필체.

 

무첨당에 걸린 편액중에 흥선대원군이 이곳 무첨당에서 하루  묵고 남겼다는 '좌해금서' 그 뜻은 '선비는 책을 읽어야 하지만 풍류도 알아야 한다'며 조선 선비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하였는데 필체를 보면 그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반마을 양동마을  무첨당 교통편.


일단은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까지는 가셔야 겠죠.

교통편은 경주시외버스 터미널을 나오면 오른쪽으로 50m만 가면 시내버스주차장이 나온다. 그곳이 양동마을가는 버스 주차장이다. 안강행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203번 버스로 오전 6시20분, 7시30분, 9시15분, 10시30분, 12시30분으로 30~35분이 소요된다.

그외 안강행 버스를 이용하면 양동마을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양동마을까지 걸어가면 된다. 양동마을 주차장에서 8분소요.


승용차는 네비에다 양동마을을 치면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안채로 이언적의 후손 이지락 선생이 생활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필체 좌해금서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관가정. 관가정이 있는 양동마을 유래에 대해...

 

경주의 대표적인 양반마을은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의 유래를 보면 경주(월성) 손씨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1433~1484)선생이 청송 안덕에서 560여년전에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처가인 양동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살면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여강이씨 찬성공 이번(1463~1500)과 손소의 딸이 혼인을 하면서 처가인 양동에 이주하여 살았다. 두분 사이에 큰 아들로 동방오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을 낳았다. 결국 회재 이언적은 손소의 외손자로 이곳 양동마을에는 손씨와 이씨가 서로 마을을 형성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동마을은 어떠한 특징이 있는 마을일까. 손소도 장가를 들어 처가인 이곳에 이주하였고 그의 사위인 이번도 이곳으로 이주와 살면서 처가입향의 마을로 불린다. 그러나 처음 이 마을에 입향한 손소의 처 류씨부인은 그 당시 무남독녀였던 관계로 풍덕 류씨는 절손되어 현재에 외손인 손소의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양동마을 문화관의 무첨당 미니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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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접시꽃이 담장으로 피어 있다. 1981년 이전에는 담장이 없어 관가정에서 바로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관가정. 관가정이 있는 양동마을 유래에 대해...

 

경주의 대표적인 양반마을은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의 유래를 보면 경주(월성) 손씨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1433~1484)선생이 청송 안덕에서 560여년전에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처가인 양동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살면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여강이씨 찬성공 이번(1463~1500)과 손소의 딸이 혼인을 하면서 처가인 양동에 이주하여 살았다. 두분 사이에 큰 아들로 동방오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을 낳았다. 결국 회재 이언적은 손소의 외손자로 이곳 양동마을에는 손씨와 이씨가 서로 마을을 형성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동마을은 어떠한 특징이 있는 마을일까. 손소도 장가를 들어 처가인 이곳에 이주하였고 그의 사위인 이번도 이곳으로 이주와 살면서 처가입향의 마을로 불린다. 그러나 처음 이 마을에 입향한 손소의 처 류씨부인은 그 당시 무남독녀였던 관계로 풍덕 류씨는 절손되어 현재에 외손인 손소의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예전에는 없던 일각대문.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관가정. 청백리 우재 손중돈의 옛집 관가정.

 

 

관가정은 조선 전기에 손소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김종직의 문인이며 1482년(성종1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며 벼슬길에 오른 후 우참찬에 이른 인물로 성종때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우재 손중돈(1463~1529)의 옛집이다.

 

 

사랑채인 관가정의 모습.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관가정. 관가정의 뜻은...

 

관가정은 '농사 짓는 광경을 내려다 보는 정자'라는 뜻으로 손중돈은 이곳 관가정 의 탁 트인 누마루에 올라 세상사 다 잊고 안강 들판을 바라보았을 것으로 보인다.이름그대로 누마루가 있는 정자로 양동 마을 초입의 물봉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관가정. 관가정은 보물 제442호.

 

 

이곳은 특이하게  건물이 이루어져 있다. 보통은 대문이 행랑채와 붙어 있는데 관가정은 사랑채와 연결되도록 한게 일반 양반 가옥과는 다르다. 보물 제442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관가정. 관가정의 가옥 구조는...

 

 

관가정의 가옥 구조를 보면 상채와 안채가 'ㅁ'자 모양으로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사랑채 나머지는 안채로 구성된다. 집의 배치는 중문을 중앙에 두고 서쪽에 사랑채, 동쪽과 북쪽에 안채를 두었다. 안채의 동북쪽에는 사당을 배치하고 관가정의 동쪽, 북쪽, 서쪽으로는 담장을 둘러  막았다.

 

 

관가정에서 바라본 향단의 모습.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관가정. 현재의 관가정은 담장으로 인해 옛모습과 달라

 

 

그러나 현재의 관가정은 손중돈이 거쳐하였던 조선 전기 때의 관가정 모습과는 다르다. 처음 건립 당시 관가정은 사랑채의 앞쪽으로 탁트이게 하여 낮은 지대의 경관을 바라보게 하여 운치를 주었는데 1981년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전면에도 담장을 올려 대문을 내고하여 본래의 관가정과 다르게 복원되었다. 농사짓는 광경을 내려다 보는 정자란 관가정의 의미가  담장으로 인해 일부 가려져 아쉬울 뿐이다.  

 

 

보수를 하면서 새로 쌓은 담장으로 조망이 가려지는게 흠이면 ㅎ름.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관가정. 관가정 내부는 뒷족 작은 문에서 볼 수 있어요.

 

이곳 관가정 옆에는 어마어마한 향나무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 흡사 하늘로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랄까. 세월의 때가 켜켜히 묻은 향나무도 관가정과 함께 숱한 역경을 딛고 지금에 이른 것 같다. 관가정은 전면에서 보면 긴 일자형으로 밖에 볼 수 없다. 'ㅁ'자형이라 뒷쪽으로 돌아가면 작은 창문을 열어 두었다. 그 문이 대청과 연결되는 창문으로 관가정 건물 내부를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다.(양동마을 문화관의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

 

 

 

 

 

 

 

 

 

관가정의 모습.

 

 

 

 

용이 승천 하는 듯한 오래된 향나무

 

 

관가정의 서쪽 모습

 

 

관가정의 뒷면 모습. 중앙에 작은 쪽문을 볼 수 있다.

 

 

관가정 뒷쪽의 사당.

 

 

쪽문을 통해 관가정 내부를 한번 들여다 보자.

 

 

관가정 내부의 모습 전면이 사랑채와 대문이 붙어 있다.

 

 

관가정 오른쪽으로 안채의 모습.

 

 

 

쪽문 왼족의 모습으로 안채.중간이 대청으로 연결된다.

 

 

관가정의 서쪽 모습. 중문이 붙어 있다. 중문 왼쪽은 사랑채. 오른쪽은 안채로 구분 된다.

 

 

 

 

중문의 모습.

 

 

 

 

 

 

 

 

 

양동마을 문화관에서 미니어쳐로 만들어진 관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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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정혜사지13층석탑. 통일신라시대 9세기 작품의 정혜사지십삼층석탑.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는 아주 특별한 석탑이 있다.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으로 기존의 석탑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자옥산과 도덕산 그리고 봉좌산과 어래산의 능선을 서로 연결하면 엎어놓은 밥그릇 모양으로 감싸고 그 안으로 흘러 내리는 계곡인 자계천 골짜기 안에 신라시대의 절터에 세워진 정혜사지 십삼층 석탑. 







☞(경북여행/경주여행)정혜사지13층석탑. 통일신라시대 9세기 작품의 정혜사지십삼층석탑 독특한 모양의 석탑.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신라 성덕왕 원년에 당나라 백우경에 의해 자옥산아래 경치 좋은 곳에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웠는데 그 후에 그곳에다 절을 세우고 정혜사라 하였다며 '동경통지'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현재 정혜사터에 탑이 남아 있는데 이탑을 정혜사지 십삼층 석탑이라 부른다.  맨 밑단은 흙으로 쌓아 올렸고 그 위에 기단을 올려 십삼층의 탑신을 세웠다. 







☞(경북여행/경주여행)정혜사지13층석탑. 1층에 감실이 만들어진 정혜사지십삼층석탑.


현재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을 보면 독특한 모양의 정혜사지 십삼층 석탑은 다른 곳에서 찾아 보기가 힘들다. 1층의 탑 몸돌은 거대하며 네모서리에 사각기둥을 세우고 그 안에 보조 기둥을 세워 감실을 만들었고 문을 달았다. 이것은 열린공간을 추구하고자한 의지를 표현하였다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정혜사지13층석탑. 통일신라시대 9세기 작품이며 국보 40호인 정혜사지십삼층석탑.


2층 부터는 몸돌과 지붕돌이 급격히 작아져 지붕돌만 올려진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조각이 아닌 별개의 다른 돌로 만들었고 직선으로 내려 오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날렵하게 하늘로 들려 있다. 비교적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은꼭대기 머리 장식의 받침돌인 노반만 남아 있다.  국보 제 40호로 지정.





☞(경북여행/경주여행)정혜사지13층석탑. 통일신라시대 9세기 작품의 정혜사지십삼층석탑.


필자도 여러곳의 절터에서 만난 석탑을 여럿 보았지만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은 독특한 모양이라 더욱 눈길이 간다. 웅장하며 2층 부터 조금씩 작아지며서 13층 까지 쌓아 올린 석탑의 정교함에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한다. 통일신라시대 9세기 작품으로 추정.  







☞(경북여행/경주여행)정혜사지13층석탑. 통일신라시대 9세기 작품의 정혜사지십삼층석탑. 교통편



일단은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까지는 가셔야 겠죠.

교통편은 경주시외버스 터미널을 나오면 오른쪽으로 50m만 가면 시내버스주차장이 나온다. 그곳이 양동마을가는 버스 주차장이다. 안강행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203번 버스로 오전 6시20분, 7시30분, 9시15분, 10시30분, 12시30분으로 45~55분이 소요된다.


승용차는 네비로 독락당이나 정혜사지십삼층석탑을 치면 된다. 위치는 버스 종점인 독락당 앞에서 장산서원 방향으로 따라가면 된다. 독락당 뒷편 자옥산과 도덕산의 부드러운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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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 홀로 즐긴다는 독락당.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의 사랑채.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는 동방 오현의 한분인 회재 이언적이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지은 사랑채다. 그는 이곳에 앉아 책을 보며 소일을 하였다하는데 아쉽게도 여러번 가봤지만 어찌 이곳은 갈때마다 이리 문화재 공사로 출입을 삼가해 달라고 하는지 모를일이다. 할 수 없이 오른쪽 자계천에 구름처럼 걸린 정자 '계정'을 보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경북여행/경주여행) 홀로 즐긴다는 독락당.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의 사랑채 최고 건물은 자계천의 계정.

독락당은 건물 자체가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에도 그의 후손이 거주를 하고 있으며 안으로 빼꼼히 보니 가정집이라 출입을 삼가해 달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독락당을 못보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가장 멋스런 건물은 자계천에 반쯤 발을 빠트리고 있는 독특한 계정이다. 널따른 암반위에 생긴 그대로 자연석을 이용해 쌓아 올린 2층 누각은 계곡과도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경북여행/경주여행) 홀로 즐긴다는 독락당.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의 사랑채 자연석의 암반위에 세운 계정.

 

계정의 독특한 면은 계곡쪽의 아궁이다. 바닥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닌 1m이상 올려져 있다. 자연상태의 암반을 그대로 이용을 하다 보니 이런 독특한 모양이 된것 같다.  그날 자계천 작은 소에  누군가 낚시줄을 드리우며 세월을 낚았다. 일을 끝내고 소일삼아 고기를 잡는다며 부자지간이라 소개 하였다.

 

 

 

 

☞(경북여행/경주여행) 홀로 즐긴다는 독락당.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의 사랑채 옥산정사로도 불려.

짙은 그늘을 드리운 이곳에서 회재선생도 낚시줄을 드리우며 세월을 보낸것은 아닌지. 그때의 모습이나 지금의 자계천은 변하지 않고 500년을 이어져 왔다. 독락당은 조선중종 11년인 1516년에 세워졌고 옥산정사로도 불린다. 안내판을 보면 낮은 단위에 세워진 정면4칸 측면2칸의 여덟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대청은 3칸에 2칸이고 나머진 1칸에 2칸의 온돌방을 넣었다. 독락당 옆 자계천 천변으로 담장을 세웠는데 그 곳에 나무살을 달아 독락당 대청에서 계곡을 바라 볼 수 있도록 처리를 하였다는 게 이색적이다.

 

 

 

 계정은 양진암이라 불리며 회재 선생이 1533년에 완공을 하였다한다. 이곳 마루에 앉아 계곡을 바라보며 회재선생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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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두마을 버스 회차지점으로 정면의 작은 다리를 건너간다. 뒤로 보이는 산이 선도산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선도산. 내남면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오지의 산 선도산 개요


경주에는 선도산으로 불리는 산이 두곳 있다. 한 곳은 경주 시내 서악동으로 형산강 건너 솟은 선도산(仙桃山. 390m)을 말하며 경주를 대표하는 산이다. 경주에는 신라 5악중 이곳 선도산을 서악이라 하였다. 서술산 도는 서연산으로도 불리며 선도산 아래에는 오릉이라하여 다섯왕릉의 무덤이 있다. 선도산 정상 아래에는 마애삼존불입상이 새겨져 있어 신라인들은 선도산을 서방정토로 안내하는 산으로 여기고 이곳에 삼존불을 모셨는데 그만큼 신라인에게는 중요한 산이었다. 






청두마을의 당산나무

 

 

청두마을을 지나가는 마을길로 하늘터밭 안내판을 따라간다.

 

 

 

 

고개에서 본 청두마을 그뒤 왼쪽으로 불끈 솟은 역산과 오른족으로 고사리재.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선도산. 내남면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오지의 산 안심리 선도산.


그러나 경주시 내남면에도 선도산이 있다. 높이는 경주 서악동의 선도산보다 높은 502m의 산으로 안심리 청두마을과 수통골에서 선도산으로 부른다. 전자의 선도산과는 다르게 이곳은 경주의 그 흔한 불교 유적 하나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 그러나 이곳의 지명이 안심리라 불리며 경주에서도 가장 오지 속에 속하는 곳이다. 이곳은 전란도 피해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마을의 뜻을 가지고 있다. 가까이는 한국동란때 경주 시내에서 이곳으로 피난을 온 분들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살았고 그분들이 눌러 앉아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하니 숨은 안식처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숨은 안식처 경주시 내남면의 선도산 산행을 가보자. 




 

 

수통골마을 전경

 

 

빈집을 표시하는 듯 대나무가 두개 걸려 있다.

 

 

 

 

수통골 소요유펜션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선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선도산. 내남면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오지의 산 선도산 산행경로.


경주터미널 옆에서 안심리행 버스를 이용하여 청두마을 버스 회차지점에 하차를 하면 산행이 시작된다. 산행 경로를 보면 청두마을버스정류장~청두마을.당산나무~수통골~능동~아홉살고개~선도산 정상~510m봉~무덤~도진방고개~전망대~창두리재만디·고랭지채소밭~고사리재~역산을 돌아~복안산 능선 삼거리~552m봉~준주봉 갈림길~청두마을 버스정류장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다. 산행거리는 9㎞ 며 산행시간은 4시간30분안팎, 휴식을 포함하면 6시간쯤 소요 된다. 이번 선도산~역산 산행은 번듯한 길이 아닌 개척코스로 산길이 다소 거칠지만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코스이며 한창 철쭉이 만개하여 그 어느 산행지보다 좋은 곳이다.




능등으로 올라가는 취재팀.

 

 

 

 

 

 

상신리로 넘어 다닌 아홉살고개

 

 

 

 

철쭉이 능선으로 군락을 이룬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선도산. 내남면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오지의 산 선도산. 청두마을에서 시작.


일단 청두마을 버스 회차지점에서 내려 허물어진 작은 다리를 건너 '하늘터밭(수통골)' 안내판을 따라 올라간다. 마을의 쉼터 역할을 하는 올 곧은 당산나무를 지나면 길이 오른쪽으로 굽는다. 안심리 이름그대로 마을이 편안한 안식처 같은 분위기다. 뛰엄뛰엄 있는 마을을 벗어나 대숲을 지나면 작은 고개를 넘는다. 수통골 마을이 그림 같이 나타난다. 이곳은 펜션이 많은데 한옥 스타일의 '하늘터밭' 펜션을 지나면 그 아래 소요유펜션를 만난다. 펜션 밑 돌담이 둘러쳐진 집 모퉁이를 돌며 왼쪽 길로 들어선다. '칠암정사'의 2층 누각이 보이고 그길을 따라가면 제법 너른 공터가 나온다. 공터 끝 계곡을 건너면 무덤이 여럿 나온다. 그 중 가장 큰 무덤을 이곳 마을에서는 능등이라 부른다.




 

 

이 바위 뒤로 502m의 선도산 정상이다.

 

 

도진방고개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선도산. 내남면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오지의 산 선도산 숨은 철쭉산행.


이곳을 오른쪽으로 돌면 희미한 옛길이 내려간다. 다시 작은 계곡을 건너면 무덤이 나오고 산모퉁이를 돌면 곧 길이 갈라진다. 왼쪽 직진하는 오르막이다. 근래에 사람의 흔적을 찾기 힘든 산길을 오르면 아홉살고개다. 이곳 주민들이 이 고개를 넘어 상신리로 다녔다하는데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을 정도다. 왼쪽으로 꺾어 능선을 오른다. 급경사를 치고 오르면 무덤을 만나고 능등에서 바로 올라오는 길이 왼쪽으로 보인다. 이곳부터 주위로 철쭉 군락이 시작 되는데 편안한 산길을 오른다. 철쭉이 너무 무성하여 배낭을 잡아채 지나가기가 어려울 정도다.




선도산 산행중에 만나는 유익한 전망대.

 

 

박달리 도진마을

 

 

 

 

 

 

고랭지 채소밭인 창두리재 만디.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선도산. 내남면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오지의 산 선도산 청두마을 뒷산이 정상.


오르막 능선을 따라 10여 분이면 봉우리에 선다. 수통골 마을 뒤에서 툭 튀어나온 작은 봉우리를 자래봉이라 하는데 그 끝이 이곳까지라며 밭일을 보시던 마을의 촌로가 이야기를 하여 자래봉이라 명명 하였다. 뚜렷한 산길은 없다. 왼쪽 10시 방향으로 내려가면 다시 안부로 직진하여 살짝 오르는 길이다 이곳에도 정상을 향해 온통 철쭉으로 둘러싸여 있다. 능선에 오르면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무리지어 있고 곧 무덤 2기가 나오며 뒤쪽에 완만하게 솟은 곳이 502m 선도산 정상이다. 국립지리원 발행의 지형도를 보면 그 뒤편에 510m봉이 솟아 있지만 마을 뒤의 봉우리가 선도산이라하며 지형도에도 이곳을 선도산으로 표시를 하고 있다. 주변의조망은 전혀 볼 수 없다. 직진하면 직선거리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510m봉이 보인다. 직진하면 내리막이며 곧 무덤을 지나 조금 더 가 완만한 경사를 오르면 510m봉이다. 직진해서 내려간다. 이곳에서 주의를 해야한다. 왼쪽으로 도는 듯 살짝 내려서면 뜸하던 철쭉나무가 다시 많아진다. 살짝 급경사를 내려서면 정돈 된 무덤을 만난다. 이곳에서 바위 왼쪽으로 내려간다. 근래에 사람의 흔적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능선에 급한 내리막 길이다. 주의를 하여 내려서면 옛 임도를 가로질러 다시 내려간다.왼쪽으로 묵은 임도길의 흔적이 다시 나타나며 이곳을 직진해 내려가면 소나무가 숲을 이룬 도진방고개다. 도진에서 올라오는 넓은 임도급의 길이 오른쪽에 보이고  왼쪽은 묵었지만 산행 출발지인 청두마을로 내려가게 된다.




 

 

 

 

 

 

임도삼거리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선도산. 내남면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오지의 산 선도산 도진방 고개를 넘어 산행.


직진하여 10분이면 오른쪽으로 탁 트인 바위전망대가 나온다. 오늘 산행에서 처음 만나는 전망대로 발아래 박달리 도진마을과 정면에 보이는 능선이 단석산에서 이어지는 낙동정맥 이다. 오른쪽 끝에 단석산이 보인다. 5분 정도면 안부를 지나 급경사 오르막이 나온다. 20분 가까이 발이 푹푹 빠지는 비탈을 오르면 갑자기 앞이 휑한 고랭지 채소밭이다. 청두마을에서 이곳을 창두리재만디라하며 경주 시내가 보인다하였다. 날씨가 흐렸지만 경주시내와 남산의 금오봉과 고위봉이 보이고 정상에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아직 농사 철이 아니지만 고랭지 채소를 5월중으로 파종을 한다고 하니 반드시 채소밭 끝으로 임도를 따라 산자락을 빙 돌아가야한다. 채소밭 끝자락을 지나 임도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는다. 이길을 따라가면 청두마을로 갈 수 있지만 차량은 지난 태풍의 영향으로 아직 복구공사가 끝나지 않아 통행이 어렵다. 다시 고랭지 밭이 나오고 임도는 능선을 넘어 갈때 임도를 벗어나 오른쪽 능선으로 들어선다.




고사리재

 

 

 

 

 

 

준주봉 갈림길에서 왼쪽인 직진을 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선도산. 내남면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오지의 산 선도산 복안산과 이웃한 산.


철쭉이 빼곡히 터널을 이룬다. 이곳을 비집고 들어서면 능선을 따라 갈 수 있다. 20분 정도 가면 고사리재 안부다. 청두마을에서 이곳 고랭지 채소밭에 농사를 짓기위해 많이 넘어 다녔던 길이라 한다. 그러나 이곳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 직진하면 산길은 편안하다가 봉우리를 두고 가팔라진 산길을 돌아간다. 마을에서 보면 우뚝 솟은 봉우리로 역(屴)산이라 불린다. 10분이면 분지를 이룬 능선에 다다르고 삼거리다. 여기서 직진하는 오른쪽은 복안산을 거쳐 양지마을로 내려간다. 출발지인 청두마을은 왼쪽 평평한 능선을 따라간다. 준주봉 방향으로 울산과 경북의 경계선이다. 살짝 올라서면 지형도상의 552m봉을 지나면 경사가 느껴지지 않는 평탄한 길을 10여 분 간다. 그 뒤 약간 경사진 내리막이 이어진다. 여기서 산길은 갈라지는데 이정표나 별다른 표시가 없어 주의해야 한다. 오른쪽으로 꺾이는 내리막 길은 시도경계를 따라 준주봉으로 가는 능선이고 청두마을 하산로는 직진하는 내리막을 타야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선도산. 내남면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오지의 산 선도산은 청두마을 원점회귀.


하산길을 따라 나무를 베어낸 흔적이 있어 쉽게 하산을 할 수 있다. 경사가 가팔라 주의를 해야하며 이곳에도 철쭉이 군락을 이룬다. 10여 분 내려가면 급경사로 가는 로프를 매어두었다. 이곳을 지나면 왼쪽으로 산길을 찾으며 내려선다. 100m를 채 못 가 길이 왼쪽으로 90도 꺾여 사면을 가로질러 능선을 갈아탄다. 능선은 완만하게 내려가다가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틀어 급경사를 내려간다. 마을 콘크리트 길이 보이고 산길은 오른쪽으로 돌아가지만 끝에 주택마당으로 들어서기 때문에 이곳에서 왼쪽으로 작은 계곡을 건너 내려서면 역산밭골에서 내려오는 계곡과 만난다. 다시 오른쪽 수로 둑을 따라가다 왼쪽으로 내려서면 무덤이 있고 도로다. 왼쪽에 작은 다리를 건너면 오전의 출발지인 청두마을 버스 종점인 회차지이다.




하산 후 만나는 청두마을 회차지점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선도산. 내남면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오지의 산 선도산 교통편.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경주 시내로 먼저 가야한다. 도시철도 1호선 종점에 내려 노포동 동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경주로 가는 버스는 오전 5시30분부터 대략 15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경주에 도착하면 터미널을 나와 오른쪽으로 50m가량 가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구일' 행 507번 버스를 타고 청두 회차지점까지 가면 된다. 다만 오전에는 8시40분에 출발하는 버스만 청두까지 올라가고 오전 6시10분, 10시50분 버스는 아래의 안심마을회관까지만 간다. 산행을 마친 뒤에도 안심마을회관으로 내려가야 한다. 오후 4시40분, 7시, 8시25분. 경주에서 부산행 버스는 밤 9시50분까지 15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원점회귀라 승용차 이용이 편리하다. 경부고속도로 경주IC에서 내려 나정교 삼거리에서 언양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35번 도로로 계속 가다가 904번 도로로 옮겨 내남면사무소 앞을 지나 3㎞ 정도 더 가서 안심리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700m 정도 가서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안심마을회관을 지나 콘크리트 길로 쭉 올라가면 청두마을이다. 반드시 버스 회차지점을 피해서 주차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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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용장사곡석가여래좌상. 남산의 석불중에서 특이한 모습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용장사지에 있는 용장사곡 석가여래좌상은 남산의 석불중에서 가장 특이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황남빵 같은 삼륜대좌에다그 위에 올려진 석불좌상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하다.

 

 

 

 

이 불상은 미륵장육상으로 추정되는데 1932년 일제강점기때 일인들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에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불상의 불두는 달아나고 없다.

 

 

 

 

석불좌상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목에 3줄의 삼도가 그어져 있고 좌측 어께에는 가사의 매듭이 묶여져 있어 조각이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마무리되어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용장사곡석가여래좌상. 미륵장육상으로 추정...


용장사지에는 현재 3기의 보물이 남아 있다. 삼층석탑과 마애여래좌상 그리고 석가여래좌상인데 그 나름의 특징이 있지만 이곳 석가여래좌상이 가장 웅장하며 멋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불두까지 남아 있다면 이불상은 용장사지가 아닌 남산에서 가장 멋진 불상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신라 석공의  조각 기법은 남다른 것 같다. 시루떡 주무르듯이 바위를 깨어 이리 예술성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내니 말이다.

 

 

 

 

경주남산에 혹 여행을 가실분들은 이곳 용장사지는 꼭 함 들러보자. 한번 방문으로 3개의 보물을 접할 수 있는 잇점이 있다. 그것도 남산에서는 예술성이 아주 뛰어난 작품들로 힐링의 기쁨도 느끼고 올수 있다. 8세기 작품으로 추정,

 

 

 

다양하게 잡아 본 용장사곡석가여래좌상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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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경주 남산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

 

경주 남산을 걷다 큰 바위를 보면은 유심히 바라보게 된다. 혹 아직 발견이 돼지 않은 여래불이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특히 반듯하게 90도 깎여져 있는 바위를 보면은 더욱 더 눈알을 굴려 찾게 된다. 이곳에 혹 옛 신라 석공의 조각이 미처 발견되지 못한체 숨어 있어 내가 그것을 찾아내는 그런 공상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경주 남산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

 

그 만큼 남산은 다양한 바위면에 많은 불상들이 조각되어져 그 바위와 함께 천년 이상을 쉼쉬며 이어져 왔다. 남산에 있는 수많은 암자와 수많은 석탑,  불상이 천년이상을 이어오는 동안 많은 전쟁과 숭유억불 정책으로 사라지고 깨어지고 파묻히고하는 고난의 새월을 견디며 남아 있는 문화재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경주 남산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 높이가 10M.

 

오늘 포스팅한 삼릉계곡의 선각여래좌상은 삼릉계곡 석불여래좌상과 이웃하고 있다. 바위 높이가 10m나 되는 암벽이다. 그것도 중간에 길게 찢어진 형태의 바위면에 여래불이 조각되어 있다. 그 당시 조각 기술로 어찌 이리 큰 바위의 상단에 새겼는지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경주 남산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 돋을 새김이 특징.

 

가로로 갈라진 홈의 윗면에는 불상을 조각하였고 아랫쪽에는 연꽃대좌를 걸치듯조각하였다. 얼굴 부분은 돋을새김을 하였지만 그 아랫부분인 몸은 앝게 돋을 새김을 하였고 그외 광배와 대좌는 선으로 처리를 한게 특이한 점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경주 남산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경북유형문화재 159호

 

이 선각여래좌상은 경주 남산의 여러 불상 중에서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특징을 보면 얼굴은 큼지막하며 둥글고 넓은 모습을 하며  민머리 위해 상투모습을 새겨서 인지 머리와 구분이 없는 모습이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59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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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전체가 문화재 실감

 

경주에는 길거리에 뒹구는 돌맹이도 문화재란 이야기를 한다. 그만큼 흔한게 사실이고 지금 이리 굴러 다니는 돌맹이도 그 당시 부터 굴러 다닌것이기 때문이다. 그 만큼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데 얼마나 많으면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옆에 시내버스주차장이 있다. 그곳 한켠에 가면 이리 석불입상이 서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전체가 문화재 실감. 경주 노서동 석불입상

행색이야 초라한 모습이지만 엄연히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천년이상을 그 자리에서 지켜왔다. 모습이야 험난한 세월을 겪어선지 너무 안타까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불두는 처참하게 깨지고 불신은 또한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이 심하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국립공원 노서동 석불입상. 남항사의 석불입상...

 

광배는 머리둘레의 두광과 몸둘레의 신광이 2중선으로 처리가 되어 있으나 신광의 선은 형체도 알 수 없을 정도다. 이곳에서 북쪽 인근에 삼랑사터 당간지주가 남아 있고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삼랑사 남쪽에 남항사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곳을 남항사터로 추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이곳은 경주시내버스 주차장으로 하루 수백 아니 수천대의 버스들이 드나들고 있는 버스 주차장이 되어 버렸다. 

 

 

 

 ☞(경북여행/경주여행)노서동석불입상. 현재 경주시내버스 주차장

 

옛 절터의 흔적은 그 어느 곳에서도 전혀 알 수 없고 이곳 전각 안의 불상만이 매연을 뒤집어 쓴체 그때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나와 100m 거리에 자리한 석불입상이 주차장 한쪽 귀퉁이에서 옛 남항사 절터였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어 왠지 가슴이 먹먹하다.

 

 

 남항사에는 신라 효소왕때 11면 관음보살이  삼랑사 경흥스님의 병을 완치하게 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사찰로 현재 그 사찰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1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 156-8

찾아가기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나와 형산강 강둑 큰 도로를 따라 100m가면 경주시내버스 정류장이다. 그곳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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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상서장과 시대의 풍운아 최치원. 최치원 그는....

최치원은 868년인 문성왕때 약관 12세의 나이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7년만인18세에 귀국하여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를 하였다. 그러나 신라 말기의 조정은 그에게 그 어떤 것도 뜻을 펼칠 수 없어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란 상소문을 이곳 상서장에서올렸고 그것이 더욱 조정대신들로 부터 미운털이 되었다. 이에 40세에 그는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여행길을 오르는데 그의 행적을 보면 놀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부산 해운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여진다.  동백섬에 그의 호를 딴 해운대란 각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낙동강 하구였던 물금 임경대에서 그는 낙동강의 저녁노을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지리산 쌍계사 위 불일폭포에서 학을 불러 타고 다녔고 재임시에는 함양의 태수로 있으면서 상림숲을 조성하여 물난리 등 재난을 막기 위해 인공림을 조성하여 현재에도 그 덕을 후대에서 관광지로 덕 보고 있다.

 

 

 

 말년에는 가야산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생활을 하며 짚신 한짝을 남겨두고 홀연히 학을 불러타고 신선이 되었다 한다. 현재 경주최씨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경주최씨는 원조 최소벌도리공의 24대 손이 최치원공이다.

 

 

 이곳 상서장은 진성여왕에세 나랏일을 걱정하며 '시무십여조'를  올린곳으로 조선 순조 이후에 건립한 것이라 한다. 그만큼 최치원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분으로 생각된다. 최치원은 신라말의 정치상황에 높은 학식과 능력을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산천을 떠돌며 여생을 마감한 최초의 풍운아가 최치운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46호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274번지로 서라벌 대로에 위치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전국의 사찰에는 원효의 전설이 없다면 사찰로서 대접을 못 받고 전국의 명승에는 고운 최치원의 전설이 없는 곳이 없는데 이를 보면 두분은 모두 신출귀물한 분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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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여행. 경주 남산리 삼층석탑은 통일 신라 작품


경주여행은 남산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화랑교육원이 있는 남산리 방향으로도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많은 불상과 서출지 그리고 칠불암등이 있지만 이곳에서는 석탑은 처음 소개를 하는 것 같다. 서출지에서 칠불암 방향으로 올라가다보면 남산을 등지고 선 곳에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인 쌍탑을 찾아 볼 수 있다.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여행. 경주 남산리 삼층석탑은  보물 제124호 


이곳 남산리 삼층 석탑은 여타 삼층석탑 처럼 쌍탑이라 불리는 똑 같은 모양의 쌍둥이 삼층석탑이 아니다. 불국사의 석가탑 다보탑 처럼 동서 탑의 모양이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더욱 특이한 모습인데 동쪽의 탑은 모전 석탑의 형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바위를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양식으로 바닥돌 위에 다듬은 돌 8개를 서로 어긋나게 놓아 물리게 끔 하였다. 그리고 층마다 몸체돌 하나와 지붕돌 하나씩을 쌓아 올렸다. 지붕돌은 벽돌을 쌓아 만든 것처럼 처마밑과 지붕 위의 받칩이 각각 5단이다.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여행. 경주 남산리 삼층석탑 서탑은 팔부증상을 새김


  서탑은 이중 기단위에 삼층으로 쌓은 일반 석탑형식이다. 윗기단의 몸체를 보면은 팔부중상을 돋을 새김한 것이 이채롭다. 팔부중상은 신라중대 이후에 나타나며 탑은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의 한 표현이다.  불교에서는 석탑이 어떤 존재인가. 불가에서는 석탑을 부처님 보듯이 아주 신성시한다. 그 이유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사리를 탑에다 봉안하였기에  석탑은 모든 중생들이 부처님을 따르고 공경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탑이 7.04m이며 서탑은 5.85m로 동탑이 조금 더 높다.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여행. 경주 남산리 삼층석탑 9세기 통일신라 작품


경주 남산을 등지고 솟아 있는 경주 남산리 삼층석탑은 그 만큼 정교하며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9세기 작품으로 그 당시의 뛰어난 예술성을 알 수 있으며 서쪽의 석탑은 사면에 돋을 새김한 팔부증상의 모습에다 섬세하면서 세밀한 뛰어난 석공의 솜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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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보리사석불좌상. 완벽한 불상 경주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경주 남산 배반동에는 신라시대때의 불상이 남아 있다. 경주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으로 신라시대 보리사 터로 추정되는 곳에 경주 남산에서는 가장 완벽하고 빼어난 완성미를 자랑하는 불상이다. 보리사 절터의 불상이라하여 보리사 석불좌상으로도 불리며 미륵곡에 있다하여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이라 부른다. 보물 제136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보리사석불좌상.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규모는...


좌대를 포함한 석불 좌상의 전체 높이는 4.36m이며 좌대를 뺀 석불좌상의 높이만 2.44m의 거대한 석불로 남산의 불상중에서는 가장 완벽하게 남아 있다. 그 당시 보리사와 함께 조성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보리사는 사라지고 없지만 이 석불좌상만은 천년의 미소를 잃지 않고 남아 있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보리사석불좌상.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연꽃무늬가 돌려진 팔각대좌 위에 석가여래좌상이 앉아 있다. 반쯤 감은 듯 뜬 눈으로 이세상을 굽어 보며 살이 오른 통통한  얼굴에다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 자애로운 모습이다. 오른손은 무릎위에 두고 손가락의 끝은 아래로 향하며 왼손은 배 부분에 살포시붙혀 놓은 모습으로 세속의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는  부처님의 온화한 모습을 하고 있다.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보리사석불좌상.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의 광배가 특이하다.


석가여래좌상 뒤를 돌린 광배의 모습이 세심한 조각솜씨를 옅 볼 수 있다. 연꽃 띠를 돌려 놓은 사이사이에 석불좌상을 새겨 놓고 마감처리는 불꽃 형상으로 하였다. 특이한 것은 광배의 뒷면인데  이곳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의 광배 뒷면은 모든 병든자를 구원해 준다는 약병을 든 약사여래좌상이 선각되어 있다.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보리사석불좌상.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의 광배 뒷면은 약사여래좌상이 선각


자세하게 뒷면의 광배를 들여다 보아야만 느낄 수 있다. 약사여래좌상의 모습이 광배에 스며들어 잇는 듯 은은하게 나타나는 신비한 모습이다. 필자도 석불뒤의 광배를 여럿 보았지만 광배 뒷면을 약새여래좌상이 새겨진 것은 이곳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에서 처음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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