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 최초의 석탑이자 유일한 경주 분황사 9층석탑을 여행하다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은 무조건 경주였습니다. 국사 시간에 많이 접했던 신라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본다는 즐거움으로 가슴 설레었던 경주 여행은 그중에서도 필수 코스가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자동차로 쌩쌩 달려 도착하지만, 당시에는 고사리 같은 손을 맞잡고 걸어서 석굴암을 올랐습니다.





분황사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로 94-11(구황동)분황사



또한, 불국사도 여행하였고 마지막으로 찾는 곳이 분황사였습니다. 이를 두고 흔히 경주 3대 여행지라 했습니다. 경주여행에서 꼭 빠지지 않고 본다는 분황사 9층 석탑은 불국사와 석굴암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어린 시절 저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초등학생의 어린 마음에 아무리 봐도 3층뿐인데 왜 9층 석탑이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며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과 같은 석탑이라 하는데도 전혀 모양이 달라 이상하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그저 아주 특별하구나 하며 뇌리에 강하게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게 벌써 40년도 훨씬 전 일입니다.



경주는 제가 태어난 고향입니다. 그 때문에 매년 한두 번씩 여행 삼아 찾아갑니다. 그때마다 분황사는 강한 뇌리감 때문인지 가보지 않아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해 항상 빼놓고 여행을 했습니다. 이제 성인이 되어 우리 문화재 찾는 것을 좋아해서 여러 곳의 탑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탑의 특성도 알게 되었고 덩달아 분황사 9층 석탑을 모전 석탑이라 부르는 것과 그 재질과 왜 9층 석탑이라 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경주 분황사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가보지 않아도 가본 곳 같은 분황사라 초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처음 가봤습니다.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모습과 분황사는 그대로 똑같았습니다. 그만큼 나에게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분황사는 신라 시대 634년인 선덕여왕 3년에 창건하였고 분황사 9층 석탑도 세워졌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을 보드라도 이웃한 황룡사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큰 규모로 보이지만 지금 분황사는 9층 석탑을 빼면 너무나 초라한 모습입니다.



분황사는 분황사 9층 석탑인 모전석탑이 분황사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덕여왕 시절인 창건 당시의 분황사는 당대의 선승인 자장율사와 원효대사가 주석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643년 당나라 유학 중 왕명을 받고 자장율사는 대장경 일부와 불전에 필요한 번당, 화개 등을 들고 귀국길에 오릅니다.



이에 선덕여왕은 분황사에 머물게 하면서 대국통의 벼슬을 내렸습니다. 또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원효는 분황사에서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원효가 죽자 그의 아들인 설총은 원효의 뼈로 소상을 만들어 이곳 분황사에 모셨으며 소상은 고려 시대까지 남아 있었다 합니다.

 


당시 선덕여왕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조용한날이 없었습니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치열함 속에 선덕여왕은 국교인 불교에 의지하며 부처님의 힘으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 9층 석탑의 거대한 탑을 세웠으며 이로써 신라왕실의 권위를 더욱 굳건히 하고 백제와 고구려에 국력을 과시하는 포석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분황사 9층 석탑은 3층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게 9층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정말 웅장하였을 것 같습니다. 아쉽게도 고려 말 몽골의 침입과 조선 시대 임진왜란으로 분황사 9층 석탑은 파괴되었고 남아있던 전각 대부분도 소실하였다는 기록이 동경잡기에 있습니다. 이번 분황사 포스트는 분황사 모전 석탑입니다.



그 외 분황사에 남아 있는 원효대사 비석 받침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화쟁국사비부와 신라 호국용의 설화가 있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석정, 그리고 보광전의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약사여래입상은 따로 소개하겠습니다.







분황사 9층 석탑은 화강암 재질인 기존 석탑과는 형태가 다르게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쌓아 만들었다 하여 이를 모전 석탑이라 합니다. 모전 석탑은 중국에서 유행했던 양식이 신라의 석탑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통일신라로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인 화강암의 석탑으로 바뀌었습니다.





분황사 모전 석탑을 보면 자연석을 다듬은 막돌을 1.06m의 높이로 쌓아 그 기단 위에 넓은 화강암을 바닥 돌로 삼았습니다. 바닥은 정사각형의 형태로 한 변의 길이가 대략 13m이며 그 위에 벽돌 모양의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전탑입니다. 1915년 일제는 허물어진 분황사 9층 석탑을 수리한다고 해체하여 지금의 상태로 만들어 현재 3층 석탑이 된 연유입니다.

 




당시 2층과 3층 사이에는 돌로 만든 함속에 사리장엄구가 들은 은제 사리함 등이 나왔다 합니다. 1층 탑신의 네 곳에는 불상이 들었던 것으로 보이는 감실을 두었으며 출입구가 있습니다. 출입구 좌·우에는 사천왕인 인왕상을 두었는데 근육의 볼륨감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인왕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출입구에는 여닫는 석문을 달았습니다. 그리고 기단의 네 귀퉁이에는 동물상을 배치했으며 왼쪽은 사자와 흡사하고 오른쪽은 암사자를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추어 눈에는 물개와 흡사한 모습입니다.









이는 불국사의 다보탑에 배치한 사자 석상과 같은 이치로 불교에서 불탑을 수호하는 동물은 사자입니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사자상도 그와 같은 의미로 보입니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신라 석탑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자 신라 시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석탑이며 현재 국보 제30호입니다.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