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만 계곡의 들머리는 동창천을 건너면 봉의리의 양촌마을 앞 당숲삼거리가 실질적인 들머리입니다.
구만 계곡은 약물탕의 빗장을 열고 들어서야만 구만 폭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덱계단이 놓여 아무나 올라갈 수 있습니다.
구만 계곡은 호리병같이 생긴 계곡에 큰 바위가 막고 있으므로 쉽게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 덕분인지 임진왜란 때에 마을 주민 9만 명이 난을 피했다 하여 구만산 구만 계곡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구만 계곡은 높낮이가 거의 없는 아주 편편한 계곡이 구만폭포 턱밑까지 이어지며 계곡의 품이 아주 넓습니다.
일반 산행객은 구만폭포 일명 통수폭포인 30m 직폭에서 시원한 물소리를 듣고 계곡주위 암반에서 즐기다가 내려오는 거로 만족합니다.
이는 구만 폭포를 지나면서부터는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구만 계곡과 구만 폭포를 올라 구만산을 가지 않고 구만 계곡 왼쪽 능선으로 올라 청도와 밀양의 경계선에 있는 고추봉(670m)을 올랐습니다.
그리고 밀양 3대 오지마을인 오치마을에서 하산하여 산내면다목적센터에서 원점 산행으로 마무리 했습니다.
구만산 구만 계곡~고추봉 산행경로를 보겠습니다.
경남 밀양시 산내면 송백리 산내면다목적센터~한천박물관~구만산장 입구 ~구만암~구만굴 갈림길~구만굴~구만굴갈림길~구만약물탕~구만폭포~ 구만산·육화산 갈림길~흰덤봉·고추봉능선 갈림길~658m 이정표 삼거리~육화산 삼거리~고추봉~산불초소(560.6m)봉~오치마을 입구 ~봉촌정~탁삼재~구만 계곡 갈림길~산내면다목적센터로 되돌아오며 전체거리는 약 13.5㎞에 산행시간은 5시간~5시간 30분 쯤 소요.
거라마을회관
구만 계곡은 여름철에는 차량 행렬로 마을과 도로는 북새통을 이룹니다.
우리는 멀리 떨어진 큰 주차장이 있는 산내면다목적센터에서 시작했습니다.
바로 산내천(동창천)에 놓인 봉의교를 건넙니다.
다리에서 본 영남알프스 북암산, 사자봉, 수리봉, 운문산 전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집니다.
한천박물관을 지나면 바로 양천 마을 입구 당숲 갈림길입니다.
왼쪽 도로가 구만 계곡가는 길입니다.
오치마을에서 내려오는 갈림길을 직진하면 가라 마을회관을 지나면 구만 계곡이 빗장을 채운 듯 산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구만산장 입구를 지나면 구만암에서 본격적인 구만산 구만 계곡 산행을 시작합니다.
구만암 갈림길에서 오른쪽은 능선을 올라 구만산 정상으로 바로 가는 코스입니다.
구만암 앞을 지나면서 키큰 나무가 하늘을 가린 울울창창한 숲 터널입니다.
10여 분이면 산길이 편안해지면서 왼쪽 바위에 구만굴이 보입니다.
구만굴은 왼쪽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항상 구만 계곡 구만산 산행을 하면서 궁금해했던 구만굴을 이번 산행에서 오르기로 하고 계곡을 건너 구만굴을 올랐습니다.
구만굴은 작은 굴이 있으며 본 굴인 구만굴은 대단한 크기였습니다.
광물 채집을 위한 인공 굴로 보였으며 궁금해서 봉의리 주민에게 알아보았지만 별 뚜렷한 정보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분 연세가 70이 넘었으며 어릴 적 굴 안에 한자가 쓰인 책이 많았다는 것을 보면 오래전부터 굴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철분이 많아서 그런지 붉은색을 띠며 떨어진 돌이 있어 낙석은 조심해야겠습니다.
그래도 구만굴에서 보는 전경은 또 다른 맛이 있었습니다.
구만 계곡 가는 길로 되돌아 내려와서 진행하면 바위가 계곡을 막아놓아 이곳을 넘어서야만 구만 계곡의 비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입구에 빗장을 채웠다고 했습니다.
구만약물탕
지금은 나무 덱계단이 놓여 누구나 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덱계단 오른쪽 바위에 물줄기가 떨어지는데 구만 약물 탕입니다.
물맞이 폭포로 항상 일정한 수량이 떨어지며 신경통 등에 좋다고 알려졌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구만 계곡을 끼고 오릅니다.
수량이 많다면 계곡화를 신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도 되고 아니면 계곡 옆 산길을 따라갑니다.
구만 계곡을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 너덜에 큰 돌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제 구만폭포는 다 왔습니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수직 30m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장관이었습니다.
제가 올랐을 때 수량이 적어 조금은 아쉬웠지만 비 온 뒤에 찾아가면 굵은 물줄기가 내리꽂듯 떨어지는 물줄기는 천둥소리가 나며 한마디로 악소리 날만큼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구만폭포는 일명 통수폭포로 불립니다.
아주 오랜 옛날 통장수가 지게에다 통을 지고 올랐습니다.
구만폭포을 오르다 지고 있는 통이 바위와 부딪혔고 통장수는 중심을 잃고 폭포 아래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 후 비 오는 날이면 가족을 그리워하는 통장수의 애끓는 울음소리가 폭포수에서 들렸다 합니다.
구만산과 고추봉가는 길은 구만폭포 직전 왼쪽의 나무 덱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힘겹게 오르면 폭포 위 골짜기로 들어섭니다.
구만폭포 아래의 계곡과는 다르게 잔돌만 깔렸습니다.
계곡을 끼고 50여m쯤 가면 왼쪽 산비탈로 오르는 산길이 보입니다..
급경사 오르막을 오르면 능선 안부에 올라섭니다.
이정표에 오른쪽은 흰덤봉 가는 길, 고추봉은 육화산인 왼쪽입니다.
고추봉 능선길은 아직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서 그런지 한사람이 겨우 다닐만한 거친 산길입니다.
청도의 산군과 발아래 장수골. 가까이는 육화산 등 전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전망대를 지나 한참을 가면 안부에 이정표 없는 갈림길이 있습니다.
왼쪽은 구만 계곡으로 내려가 집니다.
고추봉은 직진하는 능선에 올라서면 이정표가 있는 658m봉에 도착합니다.
왼쪽은 송백리이며 구만굴 가는 길이나 위험하고 산길도 뚜렷하지 않습니다.
오른쪽 육화산 방향으로 진행하면 산길은 더욱 거칠어지며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 닿습니다.
이정표에 방향 표시가 없는 오른쪽이 육화산 가는 길이며 고추봉 오치마을은 직진입니다.
고추봉을 우회하는 길이 있으나 무시하고 봉우리에 올라서면 전망이 시원하게 열립니다.
청도 대구와 밀양의 영남알프스 산군이 파란 하늘과 함께 시원스럽게 열립니다.
왼쪽에서 보면 화악산, 남산, 비슬산, 팔공산, 육화산, 보현산, 흰덤봉, 구만산, 사자봉, 운문산, 백운산, 천왕산,재약산 등이 펼쳐졌습니다.
오치마을은 계속 능선을 따라갑니다.
안부에서 다시 올라서면 560.6봉인 산불초소가 있습니다.
고추봉에서 잘 볼 수 없었던 밀양 쪽 전경이 열립니다.
정각산과 구만산 들머리인 산내면 소재지 송백리도 확인하며 하산합니다.
오치마을
발아래 움푹 파인 산속에 오치마을이 숨어 있습니다.
바드리, 솔방마을과 함께 밀양 3대 오지마을이며 오치마을 표지석이 있는 도로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는데 도로 옆 가로수에 사과가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선생은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으며 일본에 건너가 1932년에 오사카 나니와중학교 속성과를 수료했습니다.
1938년에 도쿄 국민예술원을 수료하면서 귀국하여 처음 부산 경남여고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이때 ‘중성’과 ‘백민’에다 1946년에 ‘바다’ 1948년에 ‘산골 아기’, 1949년 ‘6월의 아침’ 시를 발표했는데 소설가 이전에 먼저 시를 섰습니다.
1949년 9월 김동리의 추천으로 ‘신천지’에 ‘남이와 엿장수’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하였습니다.
1950년에 서울신문에 단편‘머루’가 입선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54년 첫 창작집 ‘머루’를 간행했습니다.
1955년 ‘현대문학’ 창간과 초대편집장을 11년 지내면서 1956년 ‘갯마을’ 1958년 ‘명암’, 1960년 ‘메아리’, 1965년 ‘수련’ 등 왕성한 문학 활동을 펼쳤습니다.
1979년 타계할 때까지 30년 동안 200여편의 많은 단편소설을 발표했습니다.
오영수문학관 아래 주차장에다 차를 대고 오른쪽 찻길을 올라가면 큰 나무 밑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아 무엇인가?’ 생각하시는 선생님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 옆에다 자리를 비워 놓았는데 이는 선생님과 기념사진을 찍게끔 놓았습니다.
여기서 기념사진을 한 장씩 찍고는 문학관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건물 왼쪽 너른터에는 누나 별 북 콘서트장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 밤하늘에 쏟아질 듯 떨어지는 별을 보면서 이곳에서 선생님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문학관 내부를 들어가면 정면에 오영수 선생의 큰 사진인 걸린 안내실 옆이 전시실 입구입니다.
“먼저 오영수는 누구인가?” 하며 빨간 테두리 안에 난계 오영수 선생의 흉상이 있습니다.
문화해설가님의 안내를 받으며 관람할 수 있습니다.
1949년 신천지 9월호에 발표된 고무신 중에서 “먼 산은 선 잠을 깬 여인의 눈시울처럼 자꾸만 선이 희미해 오고 수양버들은 아지랑이가 간지러운 듯 한들거렸다. 보리 이삭은 제법 파릿하고 남향집 밑에는 민들레가 놀란 듯 활짝 피었다”는 소설의 한 구절도 읽어보고 특이한 점은 선생의 그림 실력 또한 전문가 뺨칠 정도였습니다.
정말 깜짝 놀랬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광복 후 경남여고에서 미술 교사로도 활동 하셨다 합니다.
전시관에는 선생님의 많은 그림과 서예작품을 만날 수 있어 더욱 특별한 공간이었습니다.
선생의 많은 작품 중에서 대표작인 갯마을은 1953년 12월에 발표되었습니다.
부산 기장군 일광이 소설 속의 무대입니다.
그리고 1968년에 영화로 촬영되기도 했습니다.
울산 언양 여행을 계획한다면 언양읍의 난계 오영수문학관 여행을 계획하면 더욱 뜻 깊은 여행이 되겠습니다. 참고하세요.
맞습니다. 술정리 서 삼층석탑도 있으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 사찰로 보기에는 힘들어 보였고 술정리 동·서삼층석탑으로 명시된 것에 많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인근에 절의 표시나 절을 알리는 당(깃발)을 묶은 깃대를 고정한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일단은 사찰 터가 있었다고 생각되었으며 품었던 의문은 곧 풀렸습니다.
술정리 동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입니다.
당시 가람배치의 형태는 대웅전 앞쪽에 좌우로 각각의 탑을 세우는 2탑 1금당 형식이며 술정리 동 삼층석탑은 절터에서 동·서 어느 쪽인지 아직 정확하게 확인된 바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술정리 동 삼층석탑이라 이름 한 것도 1km쯤 떨어진 서쪽의 삼층석탑(술정리 서 삼층석탑. 보물 제502호)과 알기 쉽게 구분하기 위해서 붙여진 명칭이라 합니다.
2004년 11월 (재)동아문화연구원에서 낸 보고서에서는 “2002년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동삼층석탑에 대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규명하고 석탑을 둘러싼 주변 사지(寺址)의 규모와 성격을 추측할 수 있는 자료의 수집을 위해 이 일대에 대한 정밀지표조사를 한 결과, 동삼층석탑 주변 일대의 민가와 담장 등에서 확인되는 석재와 각종 문헌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곳에 ‘인양사(仁陽寺)’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를 보면 술정리 동 삼층석탑 일대는 인양사지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번 창녕여행에서 창녕 군청 옆 비각 안에 인양사 조성비를 보고 왔던 터라 그 조성 비문에서 인양사조성비를 금당 뒤쪽에 세웠다고 추정했습니다.
인양사 조성비 부근에 절의 중심건물인 금당이 있었고 술정리 동 삼층석탑이 인양사 삼층석탑이라 보면 인양사의 규모는 정말로 대단하다 하겠습니다.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은 이층기단 위에 삼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 석탑입니다.
그리고 불국사의 석가탑과 비슷한 모습에 군더더기 없는 절제미에 위풍과 당당함을 갖춘 아름다운 탑이며 경상남도에 남아 있는 석탑 중에는 가장 오래된 탑입니다.
일명 ‘사지탑(寺址塔)’이라고 불리는 술정리 동 삼층석탑은 1965년 해체복원을 했습니다.
당시 해체를 하는 과정에서 3층 몸돌의 사리공에서 청동잔형사리용기, 사리병과 사리7과 등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입니다.
술정리 동 삼층석탑은 현재 상륜부는 모두 남아 있지 않으며 납의 높이는 5.75m에 이릅니다.
또한, 탑은 크고 웅장하며 기품있는 모습입니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이층의 기단을 올렸습니다.
아래 기단과 위층기단의 각 면 모서리 기둥인 우주와 가운데 기둥인 두 개의 탱주를 새겼으며 몸돌은 각 모서리에 우주만 새겼습니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하며 끝 모서리님 귀가 약간 들렸습니다.
그 아랫면에 5단의 층급받침을 두었습니다.
2008년 10월~2009년 7월까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에서 석탑의 서편지역에서 문지로 보이는 건물지 1동과 계단 유구, 일부만 남아 있는 3동의 건물지를 확인했습니다.
고려 시대로 보이는 건물지 1동에서 ‘송림사’ 명문이 들어간 기와가 발견되어 한때 송림사로 불렸다는 사실도 유추해 볼 수 있었습니다.
술정리 동삼층석탑을 보고 난 뒤 그 너른 광장 끝에는 국가 민속문화재 제10호인 창녕 진양 하씨 고택이 있습니다.
이집의 특징은 요즘 좀처럼 볼 수 없는 초가집이란 점입니다.
대문채에도 초가지붕이라 처음에는 이게 문화재인 초가집이구나 하며 신기하게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진양 하씨고택인 초가집은 이 대문채가 아니고 대문을 들어서면 그 안쪽에 자리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대문이 굳게 잠겨져 있습니다.
대문에는 작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평일에만 개방하고 주말에는 폐쇄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일요일에 찾았던 터라 개인 살림집인 고택 주인의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멀리서 찾아간 우리로서는 그냥 발걸음을 돌린다는 게 많이 아쉬웠습니다.
대문채 앞으로 기와건물인 사랑채가 있고 그 뒤에 초가지붕인 안채가 있어 밖에서는 까치발을 들어도 보고 보일만 한곳이 있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아도 초가집이 워낙 낮아서 볼 수 없었습니다.
많이 아쉬웠으며 다음번에 평일 날 한번 찾아야겠습니다.
구조는 4칸의 일자형 건물로 흔히 말하는 초가삼간입니다.
맨 왼쪽 1칸은 부엌이며 그다음은 안방 1칸에 대청이 1칸, 대청과 연결된 건넛방이 1칸입니다.
경북 봉화군 춘양 면소재지인 의양리 134번지에 머리를 식히기 아주 좋았을 정자가 있습니다. 이름은 한수정(寒水亭)인데 뜻을 보면 “찬물과 같은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는 정자”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는 역시 찬물을 한 바가지 둘러써야 잘 되는가 봅니다. 춘양면 소재지인 춘양장터 인근에 있는데 아침을 먹으려고 나섰다가 찾게 되었습니다.
사방은 낮은 담장으로 둘려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출입문이 꽉 잠겨 있어 속속들이 내부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낮은 담장 덕분에 수려한 한수정의 정원과 건물은 멀리서 보는 것 만으로도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수정이 있는 이곳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충재(沖齋) 권벌(權伐. 1478~1548)이 거연헌(居然軒)이란 건물을 처음 지었다가 소실하자 그의 2대손인 석천(石泉) 권래(權來. 1562~1617)가 1608년(선조 41년)에 다시 건물을 짓고 한수정이라 이름 했습니다.
1741년인 영조 17년에 중수했다가 1991년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 일부가 불탔으며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원래 상태로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충재 권벌은 본관이 안동이며 호는 충재 또는 훤정(萱亭), 시호는 충정(忠定)입니다.
1496년 연산군 2년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1507년인 중중 2년에 문과에 급제해 사관과 삼사, 승정원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을사사화 때 소윤일파에 의해 삭주로 유배 가서 그곳에서 숨졌으나 선조 때 신원이 회복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봉화 삼계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한수정 정자는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T'자형 건물이며 홑처마 팔작지붕건물입니다. 바닥은 1단을 높였고 양측에 각각 2칸인 온돌방을 넣고 나머지는 모두 마루를 깔은 형태입니다. 한수정 주위 3면에는 와룡연이라는 연못을 팠으며 초연대라 불리는 넓은 반석과 보호수로 지정된 400년 된 회나무 등이 둘린 아름다운 정자 정원입니다.
한수정은 경암 이한응(1778~1864)의 춘양구곡가(春陽九曲歌)에서 제 8곡입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7호
봉화여행을 하면서 1박을 청했던 곳이 아름다운 지명인 바래미마을의 소강고택입니다. ‘바래미’는 바다였다는 뜻이며 아주 오래전에 이 일대가 바다였는지 알 수 없지만 최근까지도 마을 안의 논과 웅덩이에서 조개들이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마을이 포근하고 아늑한 게 정말로 아름다웠습니다.
한옥스테이를 했던 소강고택 포스팅은 다음에 하고 우선 바래미마을 인근에 있는 해저만회고택을 포스팅하겠습니다. 소강고택에서 새벽 일찍 일어나 계속 누워 있기도 뭐하고 해서 카메라를 들고 마을 구경삼아 동네 한 바퀴 했습니다. 소강고택 이외에도 많은 고택이 즐비했는데 그중에서도 소강고택의 건너편 마을에 있는 해저 만회고택을 이정표만 보고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해가 떠오르기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찾아가기가 부담스러웠지만, 외관만이라도 만나볼 욕심에 찾았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지 대문이 없는 개방식 비슷한 고택이었습니다. 주위 고택은 솟을 대문에 높은 담장이 둘러싸여 바깥에서는 전혀 내부를 볼 수 없었는데 만회고택은 대문이 없어서 바깥에서도 훤하게 사랑채가 잘 보였습니다.
특히 새벽바람을 가르며 시골 마을을 걸을 때는 개 짖는 소리에 동네가 떠나갈 듯 시끄러워 마을을 둘러보기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그래도 행운인지 모르겠지만 만회고택은 집을 지키는 강아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만회고택의 자랑인 사랑채를 가까이서 보게 되었으며 집주인이 잠에서 깰까 싶어 조용하게 사진을 찍고 소리소문없이 나왔습니다.
만회고택은 봉화군에서 애국심으로 큰 자랑인 고택건물입니다. 건물의 웅장함도 있지만 만회고택의 사랑채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산실이라 더욱 눈길이 갔습니다. 봉화 해저 만회고택이 자리한 해저리에는 조선 숙종 때 관찰사를 지냈던 팔오헌 김성구 선생이 처음 자리를 잡아 의성김씨가 세 가를 이루었습니다.
지금의 만회고택인 안채는 김건수씨 6대조께서 마을에 들어와 여씨(余氏) 성을 가진 분이 살던 집을 사들여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안채는 1690년대에 지어졌다 합니다. 이 집을 만회 고택이라 부르는 것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김건수(1790~1854)선생의 호인 만회헌(晩悔軒)에서 따왔습니다.
만회고택의 사랑채인 명월루(明月樓)는 만회선생이 건립했으며 1850년에 전체적인 수리를 했다고 합니다. 백두대간의 흥 걸 찬 기원이 감도는 명월루의 지세는 예로부터 명산 대천을 찾는 많은 시인 묵객들이 시를 읊고 학문을 닦던 곳으로 이곳에서 약 1,000여 편의 시가 쓰였다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명월루는 봉화 해저리에서 독립운동의 산실역을 담당했다 합니다. 특히 해저마을 주민 전체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14명의 독립운동가를 마을에서 배출한 독립유공자 마을입니다. 그 이유를 보면 성주 대가면 출신인 심산 김창숙 선생이 명월루에 거처하면서 해저마을의 많은 사람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독립 자금도 지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랄 일은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열렸던 제2회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비밀리에 파견하면서 독립청원서를 보냈는데 독립청원서의 초안을 명월루에서 작성하였다고 하며 독립유공자 마을인 해저 마을의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 외 많은 독립운동의 지원 등을 의논했던 장소에 명월루가 이용되었다 하니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사실 만회고택의 안채는 이른 아침이라 내부를 볼 수 없어 많이 아쉬웠지만, 사랑채인 명월루를 보는 것만으로도 큰 만족을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만회고택 명월루를 알아보겠습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먼저 만나는 게 사랑채인 누각형태의 명월루입니다.
사랑채가 명월루임을 알리는 현판이 돌출한 누마루에 달렸어 눈에 확 띄었으며 이외에도 만회고택과 사랑채의 툇마루에 앉으면 시원한 바람을 느낀다는 청풍헌 현판도 따로 걸려 있습니다. 사랑채는 앞면 4칸이며 옆면 1칸 반 규모로 만회고택은 앞쪽에 일자형의 중문간채와 'T'자 형의 사랑채, 안채는 ‘∩’자형이며 전체적으로 튼 ‘ㅁ’자 배치입니다.
안채를 중심으로 좌우로 연결된 건물이 사랑채로 이어지며 안채의 동쪽 날개 끝에서 동쪽으로 치우쳐져 사랑채가 자리했습니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했으며 전면의 툇마루와 누마루에는 둥근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사용하여 건물의 멋과 권위를 한층 더 높였습니다.
사랑채 옆의 안채로 드나들던 출입문인 중문간채는 퇴락하여 1981년에 철거했다가 다시 복원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찬찬히 이곳저곳을 꼼꼼하게 둘러보고 싶었지만 이른 아침 남의 집을 찾아서 내 욕심대로 보는 것도 실례이고 그리고 소강고택에서 다음 일정으로 일행들도 기다릴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돌아 나왔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해저 만회고택에서 한옥체험 민박도 하고 보지 못했던 안채와 수박 겉핥기로 보았던 사랑채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챙겨봐야겠습니다.
광양 백운산 둘레길 7코스를 걸으면서 중간에 만났던 중흥사. 중흥사을 휘감은 편백숲이 사찰의 분위기를 잘 말해주었으며 청량감까지 들었습니다. 중흥사는 신라 경문왕 때 도선국사께서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천년고찰입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중흥사 당우는 폐사된 절터를 1963년에 중건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중흥사의 사격을 이야기해주는 것은 석조물인 중흥사삼층석탑과 쌍사자 석등, 석조지장보살반가상 뿐입니다.
중흥사의 흥망성쇠는 중흥산성과 아주 밀접합니다. 중흥산성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시대 초기로 보고 있는데 이는 출토된 와편 등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중흥산성의 규모는 중흥사 뒤의 200~400m 대의 6개 산봉우리와 계곡을 끼고 조성된 포곡형 토성입니다.
임진왜란 때는 중흥산성이 승병과 의병의 훈련 장소가 되었으며. 승병과 의병의 훈련장이란 정보를 입수한 왜군의 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그때 의병과 승병은 모두 전사하고 중흥사도 함께 불타면서 폐사되었습니다. 필자는 중흥사에서 가장 만나고 싶었던 게 예술성이 뛰어나면서 화려한 중흥사 삼층석탑과 중흥사쌍사자석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중흥사쌍사자석등은 국보 제103호로 지정되었지만 중흥사에 있지 않고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흥사쌍사자석등의 운명도 참 기구합니다. 중흥사쌍사자석등은 조선 말기까지 중흥사터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삼층석탑과 함께 궂궂하게 하늘을 받치며 그 자태를 뽐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시샘하는 놈들이 있었으니 그게 일제강점기 때인 1913년에 일본인이 밀반출을 시도하려다가 주민의 강력한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에는 경복궁에다 보관했습니다. 그러다 국립광주박물관에 이관하여 보관 중인데 하루빨리 원래 자리인 광양의 중흥사로 옮겨 왔으면 합니다.
현재 중흥사에는 중흥사쌍사자석등의 모조품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중흥사쌍사자석등과 삼층석탑이 창건 당시 위치가 맞는다면 현재의 가람배치인 대웅전의 위치는 많이 달라져보입니다. 보통 금당을 중심으로 가운데 삼층석탑을 세우고 그 좌우에 석등을 배치하는 순서로 짐작하건대 말입니다.
그럼 필자가 보고 감탄과 함께 탄성을 질렀던 중흥사 삼층석탑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중흥사 삼층석탑은 지난해 보았던 군위군의 지보사삼층석탑과 느낌에서 비슷하다 생각했으나 중흥사삼층석탑을 보면서 정교한 조감솜씨와 사방불인 여래상과 인왕상, 보살상, 사천왕상을 도드라지게 세긴 것을 보고 더욱 뛰어난 예술작품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한곳에 필이 꽂히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것을 열심히 관찰합니다. 그 케이스가 이번 중흥사삼층석탑인데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즐겼다가 함께한 일행은 중흥사를 빠져나가 둘레길을 따라 흔적도 없어 사라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을 접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흥사삼층석탑은 신라 말기에 조성된 석탑이며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지금은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각과 장식이 매우 화려해서 예사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탑의 몸돌과 지붕돌인 옥개석은 하나의 돌로 되었으며 각 층의 몸돌 네 귀퉁이에는 운주인 기둥을 굵직하게 나타내었습니다.
옥개석의 아래 층급받침은 3단이며 처마 밑은 수평으로 처리했습니다. 1층의 몸돌에는 동서남북 각 면에다 연꽃 대좌 위에 앉은 여래불을 새겼으며 이는 사방불로서 어디에나 부처님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1층 몸돌을 받치는 기단은 각 면을 모두 둘씩 나누었고 앞면에는 인왕상을, 그 반대편인 뒷면은 보살상을 , 좌우 양쪽 면은 사천왕상을 새겼습니다.
그리고 2.3층의 몸돌은 급격하게 작아지면서 기단과 비교하면 기단부가 너무 크게 보이는데 이는 전체적인 석탑의 안정감은 뛰어나다 하겠습니다. 중흥사쌍사자석등은 모작이지만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중흥사쌍사자 석등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쌍사자 석등은 연꽃무늬 받침돌 위에 두 마리의 사자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서서 석등을 받치고 있는 형상입니다.
중흥사쌍사자석등은 하나의 돌을 조각해서 석등을 만들었을 정도로 그 조각 예술이 정말 빼어나다하는데 오리지널 중흥사쌍사자석등을 보지 못해 정말 많이 아쉬웠습니다. 어서 빨리 돌아오라 오버 중흥사 쌍사자 석등. 그리고 전남유형문화재 제142호 석조지장보살반가상은 시간 관계로 보지 못해서 그냥 패스합니다. 다음에 다시 한번 갈 기회가 있기를 바라봅니다.
동해와 남해 쪽으로 가다 보면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조선을 침입한 왜군이 교두보를 마련하려고 쌓은 왜성 등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 울산 북구의 정자동을 갔다가 조금은 독특한 ‘유포석보’란 이름을 한 산성을 만나고 왔습니다.
울산 북구 정자동 박제상공 사왜시발선처와 유포석보 주소:울산광역시 북구 동해안로 1455-6
유포석보는 정자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만들어진 석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유포석보는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먼저 이름도 생소하고 그래서 마을 주민을 잡고 유포석보가 어딥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이 마을에 살지만 그런 곳은 처음 듣는다고 했습니다.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 큼지막한 유포석보 안내판을 드디어 찾았습니다. 화살표는 오른쪽 마을 길로 안내했습니다.
마을을 들어서서 산성의 흔적을 아무리 찾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을안의 향나무 식당에다 유포석보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분도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 저기 전봇대 뒤에 하얀 판이 보이죠! 하면서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들어오는 입구 오른쪽 대나무 숲 꼭대기였습니다.
왔던 길을 돌아 나와 동해안로 도로에서 10m쯤 들어서면 ‘동해안로 1467-4’호 민가에서 오른쪽 좁은 길로 들어서면 대나무 숲에 올라서서 맨 끝에 안내판과 석성의 흔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유포석보 석성 주위에는 채소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유포석보는 조선 시대의 보로 고을의 수령인 만호가 관리하는 제진을 보조하는 방어적 시설로 최전방에서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역할을 주로 하면서 위급할 때에 주민의 대피장소로 이용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전투를 하는 규모가 작은 성을 말합니다. 보 주위는 봉수대가 설치해 있어 즉시 신호나 기타 소리로서 주민대피를 시키면서 인근 지역에 알리는 첨병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정자동의 유포석보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와 있습니다. 삼도 도체찰사 정분이 왜구를 막기 위해서 성을 쌓을 것을 건의했으며 1450년에 문종이 즉위하면서 목책 성을 설치했으나, 1452년에 다시 석성을 쌓을 것을 건의해서 1455년인 세조 원년에 기존의 목책 성에서 5리 떨어진 곳에다 석성을 쌓기 시작하여 4년 만에 완공했습니다.
정자항의 유포석보는 왜구의 동태를 살피는 방어기지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경상좌병사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정자동 유포석보는 병영·울산과 경주의 군사 3백 명이 3교대로 주둔하면서 수비할 만큼 중요했던 곳입니다. 유포석보의 규모는 전체 둘레가 약 755m였고, 계곡을 끼고 능선과 구릉의 낮은 평지 주위에다 쌓았습니다.
유포석보
현재 유포석보는 황폐할 정도로 그 존재가 파괴되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정자항 방파제 공사를 하면서 유포석보의 큰 돌을 빼서 쌓았다 합니다. 남아 있는 석성의 규모를 보면 동문 쪽에 2m 정도의 높이로 약간 남아 있습니다. 유포석보는 바닷가에 들어섰지만, 육군이 담당했으며 조선시대 최초의 석보라는 점에서 그 가지와 의의가 매우 높다는 평가입니다.
신라충신 박제상공 사왜시발선처비석
이곳 유포석보는 신라 시대 충신이었던 박재상의 발선처 비가 있습니다.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입니다. 왜국에 볼모였던 미해(미사흔)를 구출하려고 사신을 가장하여 율포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띄웠다 합니다. 그 율포가 현재 북구 정자동의 유포마을로 보고 있습니다. 유포석보에는 박제상이 왜국으로 떠난 곳을 기리는 ‘신라충신 박제상공 사왜시발선처’ 비석을 세워 놓았습니다.
유포석보를 한 바퀴 돌면서 정자항의 전경과 멀리까지 펼쳐지는 바다 풍경은 그야말로 작은 나룻배 한 척도 보일 만큼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일본으로 떠난 박제상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왜군의 방어 진지인 유포석보를 만나보세요 유포석보는 1998년 10월에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7호에 지정.
경북의 오지마을인 봉화여행은 벌써 하고 왔는데 차일피일 여행 포스팅을 미루다 보니 이제 포화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봉화여행에서 밀린 숙제 한 곳을 하려 합니다. 봉화에는 100여 개가 넘는 정자가 있어 정자의 고장이라 하는데 그중에서도 번잡하지 않고 한적하여 신선이 내려와 머물렀을 정도로 조용하고 아담한 명소 와선정을 소개합니다.
와선정은 태백산이 있는 봉화군에서도 춘양목으로 유명한 춘양면 소재지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마침 춘양면소재지 고택에서 1박했던 터라 안내판의 와선정을 보고 이른 아침에 운동 삼아 휑하니 차를 몰고 둘러보고 왔습니다. 와선정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 244번지에 속칭 골띠마을에 위치합니다.
작은 주차장에서 나무로 만든 아치형의 오현교를 건너면 바로 토담을 두른 와선정 정자입니다. 그런데 오현교 아래를 보면서 입이 쩍 벌어졌습니다. 골짜기의 깊이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꼭 편편한 암반을 끌로 깊게 긁어낸 듯 패인 골짜기에는 높이 5m의 폭포가 걸려 있으며 그 옆에 벼랑에다 와선정을 세웠습니다.
낭떠러지에서 쏟아내듯 떨어지는 물보라가 은색으로 반짝여 은폭이라 불리며 그 폭포를 안은 바위가 사덕암인데 이는 “덕 있는 사람을 기다리는 바위”로 풀이하자면 태백오현의 뒤를 이어 다시 와선정은 ‘덕 있는 사람’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외에도 폭포 옆 바위에는 와선정과 사덕암의 글씨가 남아 있으며 와선정은 산림 처사의 은둔처로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곳에 다섯 분의 은자가 소요하며 시문을 나누고 후진양성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을 태백오현이라 불렀습니다. 태백오현은 잠은 강협(1602~1671), 포옹 정양(1600~1668), 각금당 심장세(1594~1660), 두곡 홍우정(1595~1654), 손유당 홍석(1604~1680)을 칭하는데 모두 고려와 조선에서 명문가로 이름을 더날였던 후손들입니다.
1636년(인조14년)에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태종에 세 번 절하고 9번을 땅에다 이마를 박으며 조아린 ‘삼배구고두례’인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자 이들은 결기의 심정으로 벼슬을 버리고 태백산 기슭으로 내려왔고 모두 와선정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살면서 대명절의를 지키며 서로를 위로하고 우의를 다졌다 합니다.
은폭
그들이 우위를 다졌다는 와선대에다 세운 와선정은 앞면 2칸, 옆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인 마루 형태의 건물입니다. ‘와선정기’를 보면 와선정은 1832년(순조32년) 후손인 강씨와 심씨가 합해 정자를 세우고 난 후 ‘와선지’ ‘사덕암지’의 뜻을 따라 와선정이라 이름 하고 1895년에는 정자를 수리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각문을 들어서자 작은 돌계단을 내려서면 바로 정자의 뒷면입니다. 계곡을 마주하며 세살분합문을 들어 올리는 열개식인 앞면과 달리 뒷면은 판자로 막아 각각 칸에 작은 문을 1개씩 달았고 좌우에는 흙담 1칸에 1칸은 여닫이문을 달아 출입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건물은 통간이며 우물마루에다 정자 바깥의 네면은 쪽마루를 돌렸지만, 뒷면을 제외한 삼면에는 평난간을 설치했습니다.
‘태백오현’은 조선 정조 14년에 왕명으로 병자호란 때 재신척화 순절자를 기록한 추념록인「존주록배신열전」에서 이들 다섯 선비를 태백오현이라 기록하고 받들며 경의를 표한대서 유래되었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