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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여행/안동가볼만한곳)안동 하회마을 여행. 풍산류씨 집성촌인 서애류성룡의 하회마을 여행


고장마다 같은 성씨가 모여 집성촌을 이루는 곳이 우리나라에 여러 곳 있습니다. 경주 양동마을과 영양의 두들 마을이 그러하고 또한, 안동의 풍천면 하회마을 등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나 안동의 풍천면 하회마을은 600여 년 동안 풍산류씨가 세거를 이루었던 곳이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동성마을 집성촌입니다.







안동 하회마을 주소: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1176-1

안동 하회마을 전화:054-85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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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지붕과 초가를 인 지붕이 조화롭게 마을을 이루는 안동 하회마을은 오랜 역사를 이어오면서 우리의 전통적인 유교문화와, 풍속을 가장 잘 이어오고 있는 곳 중 한 곳입니다. 정부에서도 이를 인정하여 안동 하회마을을 중요민속자료 제122호에 지정하였으며 2010년 7월에는 지구촌 사람들이 모인 유네스코에서도 지구촌이 보호할 유산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제3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우리나라의 풍속과 문화가 마을주민에 의해 긴 세월 동안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것을 이제는 우리나라를 넘어서 세계인이 지키고 이어갈 유산이라 평가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그이름을 올렸습니다.





하회마을의 지명도를 더욱 높인 것은 조선 시대의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 형제가 이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겸암 류운룡선생은 퇴계 이황의 문하로 과거에는 별뜻을 두지 않았으며 임금의 명으로 벼슬길에 나가 여러 직책과 인동 현감, 풍기군수, 원주목사 등에 재임하여 목민관의 본보기가 될 정도로 법을 공평하게 다스려 백성의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이조판서 추증과 문경공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또한,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불멸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을 선조에게 천거하여 두 전란을 승리로 이끌었고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징비록을 남겨 후세에 전란의 참상을 겪었던 후회와 교훈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우리는 이 두 분을 낙양의 정호와 정이 형제의 우애와 견주어 ‘하남백숙(河南伯叔)’이라 칭송합니다. 하회마을은 낙동강이 굽이쳐 'S'자로 크게 휘돌아 마을을 감싸며 강물이 흐르는 곳의 마을로 흔히 물돌이 마을이라 합니다.



하회는 여기에서 유래했으며 풍수적으로 태극형, 연화부수형, 행주형이라는 명당에 조선 시대부터 가장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이라 알려졌습니다. 태백산의 지맥이 마을의 주산인 화산을 솟구쳤다면 일월산의 지맥이 남산과 부용대를 빚어 그 사이로 낙동강의 물길이 흘러 ‘산태극 물 태극’의 가운데에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물에 떠있는 연꽃 모양’이라는 연화부수형의 풍수지리설에서 마을의 주산은 화산, 마을과 부용대 사이를 흐르는 낙동강을 따로 화천이라 하는데 이는 ‘연화’인 연꽃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마을의 가장자리에는 터줏대감인 최고령 600살의 느티나무가 지키고 노거수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된 독특한 형태의 마을입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집은 정남향 동남향을 보고 있다면 하회마을은 집의 앉은 모습이 일정하지 않습니다.또한, 기와집을 초가들이 빙 둘러싸며 배치된 게 이채롭습니다. 하회마을의 규모는 구한말까지 350여 가구였으나 현재 150여 가구만 남았습니다. 하회마을 내부에는 127가구에 437개 건물이 현재 있습니다.



하회마을에는 풍산류씨 세거 이전에 허씨와 안씨가 먼저 마을을 이루었다 합니다.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란 말이 전해오고 이는 안동 하회마을의 국보 제121호인 하회탈 제작자가 허 도령이란 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풍산 류씨가 하회미을에 자리를 잡게 된 연유를 알아보겠습니다.



풍산류씨 7세인 전서 류종혜공이 가뭄과 홍수는 물론이고 평상시에도 마을 주산인 화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강물의 흐름을 관찰하며 면밀하게 따져 최고의 명당으로 터를 잡았지만 그과정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집을 지으려고 뼈대인 기둥을 세웠지만, 그때마다 넘어져 건물을 지을수 없었습니다. 그때 꿈에 현몽하기를 이곳에다 터를 잡으려면 3년 동안 사람의 목숨을 구하여 살리는 활만인을 베풀라는 계시를 받고 그 길로 마을 입구 고개에다 초막을 짓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배가 고프면 음식을, 노자가 필요하면 노자를, 짚신이 필요한 사람에게 짚신을 나누어주고 베풂으로써 하회마을에서 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베풂의 삶 때문인지 서예선생 등 많은 명신을 배출하여 풍산 류씨는 대 명문가로 오늘날까지 번창하였습니다. 하회마을에는 서민과 선비들을 위한 놀이가 전래하는데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인 ‘하회별신굿탈놀이’로 이는 굿을 겸한 탈놀이를 말합니다. ‘하회선유불놀이’는 부용대 단애에서 열리는데 선유시회를 겸한 불꽃놀이가 밤하늘을 수놓습니다.





이 모든게 하회마을의 전부는 아니지만, 수박 겉핥기식의 작은 지식을 습득했다면 이제 마을 길을 따라 출발합니다. 시간상으로 많은 고가를 전부 둘러보지 못하고 주민이 모두 생활하고 있는 삶의 공간이라 관람할 수 있는 고택은 정해져 있습니다. 저는 마을길을 중심으로 둘러보았습니다.



초가집 지붕을 이엉하는 모습은 실제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어릴 적 고향에서 자주 보았지만, 한동안 보지 못했고 이제 이런 전통마을에 와야만 만나는 하나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먼저 화경당을 찾았습니다. 솟을대문 입구에는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문이 걸려 있습니다.





최근에 부주의로 작은 화재가 일어나서 부득이 취한 조처라 합니다. 목재건축물은 작은 실수 하나에도 큰불이 납니다. 우리 모두 주의를 해야겠습니다. 출입문에는 한국국학진흥원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풍산류씨 하회마을 화경당(북촌) 유교책판’ 명패가 붙어 있습니다.



화경당은 “화채로 어버이를 섬기고 경으로 임금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1797년인 조선정조 21년에 류사춘이 처음 집을 지었습니다. 사랑채와 대문채, 날개채를 짓고 1862년 철종 13년에 그의 후손인 류도성이 안채와 큰 사랑채. 사당을 지으면서 사대부 가옥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특히 큰 사랑채의 누마루에서 보는 풍광은 매우 아름다우며 큰 사랑채를 두른 300년이 넘은 노송들은 하회마을을 굽어도는 강물의 형상을 하고 있다합니다. 고가 내부를 못 보는 아쉬움은 크지만, 그래도 대문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골목을 돌아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하회마을의 중앙에 자리한 삼신당의 노거수를 찾았습니다. 처음 입향한 류종혜공이 심었다는 느티나무로 하당이며 화산 중턱의 상당서낭당과 중단국사당을 합해 삼당이라 하며 마을 주민의 소망을 비는 곳입니다. 정월 대보름 밤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동제를 상당과 중단에서 지내고 하당에서는 다음 날 아침에 제를 올리고 하회별신굿탈놀이도 열립니다.





이번에 찾은 고가는 하회마을 북촌의 대표 기와집인 양진당입니다. 풍산류씨 대종택으로 류종혜가 하회마을에서 최초로 지은 집입니다. 긴 세월동안 여러 번 어려움을 껶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화재로 일부 불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손으로 이어지면서 여러 번 새로 지었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웅장함을 잃지 않은 풍산류씨 대종택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문중의 모임을 이곳 사랑채에서 열리며 ‘양진당’은 풍산류씨 족보를 처음 완성한 류양(1687~1761)의 호에서 따 왔고 사랑채의 입암 고택은 류종영의 호에서 따왔습니다. 





다시 돌아 나와 이제 건너편의 서애 류성룡 종택인 ‘충효당’을 찾았습니다.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1999년 4월 이곳에서 묵었다는 뉴스를 여러 번 접해 사실 개인적으로 가장 보고 싶었던 고가입니다. 출입문인 솟을대문과 마주하고는 하회마을 방문을 기념하며 심었다는 구상나무가 있습니다.



 이 집은 서애류성룡 종택이지만 그 당시의 건물은 아니며 17세기에 지어졌습니다. 그의 손자와 제자들이 서예선생의 생전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었으며 류성룡이 유난히 제자들에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가르침을 강조해서 충효당이라 부르게되었습니다.

 






들어서는 대문체에 붙은 12칸의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는데 류성룡의 8세손인 유상조가 병조판서를 제수받고 부하군사를 수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현재 이곳에는 서예선생의 유물전시관도 있습니다. 하회마을을 나와 화천 둑길을 가기 전에 작천 고택이 있습니다.







건물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원래 두 채로 지어졌지으며 1934는 대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문간채가 쓸려나가면서 지금은 안채만 남아 있습니다. 류도관의 호에서 따와 작천 고택이라 부릅니다. 다시 하회마을 입구로 나가기 위해서는 강둑길을 따라갑니다. 천연기념물 제473호인 만송정 숲과 화천 건너 천길 단애를 이룬 부용대의 절경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겸암 류운룡공이 부용대의 거친 기운을 잡아주고 북서쪽으로 들어오는 허한 기운을 메우려는 비보로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어 만송정이라 하였으며 현재의 소나무는 1906년에 다시 심었다 합니다. 부용대는 하회마을 조망을 한눈에 하는 곳으로 60m의 단애로 이루어졌습니다.

 













만송정


 


부용대



부용대는 중국고사에서 취했으며 부용은 연꽃을 뜻합니다. 하회마을의 풍수가 연화부수형이고 마을이 들어선 모습이 연꽃 같다는데서 유래하고 하회마을 전망대라 하여 부용대라 부릅니다. 하회마을 북쪽의 언덕이라 하여 ‘북애’로도 불렸다는 부용대에는 옥연정사, 겸암정사, 화천서원이 현재 남아 있습니다. 하회마을에서는 나룻배를 타고 건너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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