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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하동여행/악양여행)박경리 토지 최참판댁, 대하소설 '토지' 무대 평사리 최참판댁을 여행하고 왔습니다. 


토지는 1969년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994년 까지 25년간을 집필한 우리나라 최대의 대하소설입니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대표작으로 KBS와 SBS에서 여러번 드라마로 제작되어 시청자로부터 많은 인기를 끌었던 국민 드라마입니다.


 

소설속의 토지 무대는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입니다. 2001년도에 하동군에서는 토지속의 최참판댁을 소설 밖으로 나오게 한 뒤 건물을 준공하여 토지을 찾는 많은 관광객에게 볼거리와 이야기꺼리를 제공하였습니다.



 

현재 평사리에는 드라마 세트장과 함께 평사리 문학관, 최참판댁 소설의 무대를 만날 수 있습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최참판댁과 이용 일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가 됩니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그리고 광복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토지는 전5부16권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럼 소설속의 토지 무대인 악양 평사리로 최참판댁를 만나 보겠습니다.

 

 

구한말인 1897년.. 하동의 평사리에는 5대째 지주를 하는 만석꾼 최참판댁.......그곳은 무듬이들로 불리는 악양들판이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경치가 너무 좋아 중국 호남성 악양에 견줄만하다는 하동의 악양에도 똑 같은 이름의 동정호와 들판을 지키는 부부소나무가 내려다 보입니다.


 

평사리는 악양 소상팔경중 7경인 ”평사리 흰모래밭에 기러기가 줄지어 앉고 있다“의 평사낙안(平沙落贋)에서 음을 취하였다는 평사리 상평마을 최참판댁. 섬진강의 흰모래밭에 기러기가 줄지어 날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며 악양 들판을 보노라면 토지속의 최참판댁이 또렷히 그려집니다.

 

 

최참판댁은 주말이면 관광버스를 이용한 단체관광객과 가족단위의 관광객이 넘쳐 납니다. 필자도 섬진강을 따라 걷다가 찾아온 최참판댁, 걸어오면서 악양들판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곳에서 과연 만석꾼이 나올 수 있을까하며 만석이 나올 논의 규모를 생각하다 보니 최참판댁 입구 매표소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악양면은 최참판댁과 함께 국제슬로시티로 인증을 받았는데 국내에서는 5번째이며 세계에서 111번째라합니다. 차를 재배하는 곳으로는 세계 최초로 인증을 받았다는 안내판에  달팽이가 친환경을그려내는 것 같습니다. 





 

일단은 관광지라보니 '최참판댁 관람료'가 있습니다. 어른 1,000원, 청소년과 군인 800원, 어린이 600원


 

 

최참판댁 입구는 평사리의 상평마을입니다. 마을길을 따라 많은 상점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음식점및 악세서리 가게등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을 만나게 됩니다. 


 

상평마을의 공동 우물입니다.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저도 시원한 우물물을 한바가지하고 올라갑니다. 곧 드라마 촬영을 위해 지어졌던 세트장이 시작됩니다. 요즘은 민속박물관이나 가야 만날 수 있고 볼 수 있는 초가집이 마을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소설속의  토지 무대를 사진으로 만나봅니다. 끼이익~~끼이익 물레방아가 소음을 내며 돌아갑니다..... 


 

 

 

 

 

 

 

 

 

 

 

 

 

 

 

 

 

 

 

 

 

 

 

 

 

 

 

 

 

이제 최참판댁을 보기 위해 입구로 들어서면 최참판댁 촬영지를 알리는 안내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촬영되었네요. '군도' '꽃들의 전쟁' '구가의 서' '맏이'등 이 이곳에서 쵤영이 되었습니다. 


 

 

 

그럼 최참판댁 구경을 사진으로 시작하겠습니다. 


 

관광객이 마굿간으로 몰려가니 소가 머리를 흔들며 음메~음메~하는게 신기한지 어르신들이 많이 구경을 하고 있습니다. ㅎㅎ 진짜 소가 아닌 모형입니다. 


 

 

 

 

 

 

 

 

 

 

 

 

 

 

 

 

 

 

 

 

 

 

 

 

 

 

 

 

 

 

 

☞최참판댁 교통편

하동에서 평사리를 가기위해서는 화개, 쌍계사, 악양 완행버스를 이용해야 합니다. 오전6:30분, 8시, 9시15분, 10시10분, 11시40분


하동에서 평사리 최참판댁 버스시간표






2014/10/24 - (경남여행/하동여행)화개장터. “있어야 할건 다 있구요 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2014/10/21 - (경남여행/하동여행)악양 평사리공원.오토 캠핑장과 함께 섬진강을 즐길 수 있는 조망처 평사리공원에서 힐링을 하다. 평사리공원


2014/10/20 - (경남여행/하동여행)하동8경의 백사청송 하동송림 찾아가기. 하동송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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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4 - (광양여행/하동여행)광양 하동 걷기 좋은 섬진강 둘레길. 광양 망덕포구~하동 하동송림 섬진강 둘레길을 걷다.1


2014/10/12 - (하동여행) 하동터미널 버스시간표. 군내버스, 직행버스, 고속버스 시간표가 있는 하동버스터미널


2014/10/11 - (경남여행/하동여행)하동 걷기 좋은 코스 하동포구~평사리 최참판댁 섬진강 둘레길을 걷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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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하동여행)화개장터. “있어야 할건 다 있구요 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화개장터 삼매경에 빠지다


화개장터는 영호남의 화합을 상징하는 장터입니다. 그 이유는 김한길이 곡을 쓰고 가수 조영남이 부른 화개장터를 들어보면 그 해답이 나옵니다. 필자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구례와 하동, 광양이 만나는 곳에 장이 섰던 화개장터를 찾아갔습니다. 평일인데도 엄청 많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화개장터는 지리산이 품고 있어 그런지 온통 약초와 산나물 천지였습니다. 화개장은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유래를 보면.


 

 화개장터는 섬진강에 강물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사람이 모여 들었습니다. 삼한시대 부터 장터가 있었다는 구전으로 역사가 아주 오래된 곳입니다. 그러다 조선시대인 1726년에 최고의 번성기를 이룹니다. 남원과 상주의 상인까지 이곳에서 거래를 하였고 섬진강을 통해 중국비단과 제주도 생선까지 들어 올 정도로 화개장의 물동량이 엄청나 전국 7위 규모의 거래를 이루는 큰 장터 였습니다.


 

그러나 화개장은 6.25 한국동란과 함께 된서리를 맞습니다. 전쟁이 휴전되고 지리산으로 숨어든 빨치산의 토벌 등으로 산촌은 피폐되면서 화개장도 차츰 설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 후 산업화의 발달로 전통시장인 화개장은 명맥마저 끊어져 오다가 조영남의 ‘화개장터’와 함께 2001년 봄에 지금의 화개 장터가 개장되었습니다.

 

 

하동군 화개면 탑리의 화개 장은 지금은 "있을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다"는 조영남의 노랫말 처럼 전통시장의 규모보다는 관광지 역할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생활필수품 보다는 지리산에서 생산되는 온갖 진귀한 약초와 산나물이 시장 전체를 이룹니다. 


 

자 지금 부터 화개장터를 둘러 보겠습니다. 이곳을 둘러보아도 약초 판매장, 저곳을 둘러보아도 약초판매장, 가게마다 약초의 품목을 적은 종이가 다닥다닥 붙어 수십개가 넘어 보입니다.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신기한 이름도 많습니다. 필자가 아는 이름도 좀 보입니다. ㅎㅎ 마가목, 산더덕, 표고버섯, 산마, 능이버섯, 자연산 송이, 둥굴레, 돼지감자, 곤드레 만드레하는 그 곤드레....ㅋㅋ황기, 죽순나물 등 말린 것과  건조하지 않은 생 약초까지 즐비합니다. 꼭 한방 약초원을 걷는 것 같습니다.


 

 

 

전통장터에서 볼 수 있는 이것은 ....아주머니가 야산에서 따온 것 같습니다.  ㅎㅎ 요고는 약으로 한다는 돌배. 배가 아주 크다고 생각하는데 돌배는 아주 작아요. 얼라(애기) 주먹 만 합니다. 


 

담벼락에 붙어 지리산에서 유명한 햇밤을 판매하는 아주머니입니다. 우리 부모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한때 효자 상품이었던 밤도 이제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는데 올해는 밤 값이 좋아 아주머니의 굽은 등이 쭉 폈서면 합니다.


 

 

옛날 시골 장터에서는 반드시 있는 대장간입니다. 집안 텃밭에서 기르던 야채를 들고 나와 내다 팔고 이곳에 들러 호미며 낫을 손질하고 사고하며 장터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곳 대장간. 대장간 앞에 화개장터를 찾는 관광객이 제일 많이 몰려 있습니다. ㅎㅎ


 

 16세 까까머리 중학생일때 처음 쇠망치를 잡았다는 탁수기씨의 대장간은 어느듯 50여년인 넘어 대장 장인이 되었습니다. 진열된 칼이며 호미며 낮은 대장장의 삶을 보여 주듯 지금도 망치로 두드리며 담금질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요즘은 보기 힘든 풍경 화개장터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누런 호박을 보면 가을을 떠 오르게 합니다. 초가지붕에 걸려 있는  호박, 어릴 때 늘 상 봐 왔던 일상입니다. 호박이 엄청 크네요. ㅎㅎ 한사람이 들 수 없을 정도로 큰 호박, 반으로 뚝 잘라 호박죽을 하면 너무 맛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호박떡도 하면 두명먹다 한명 어디로 간다고 해도 모를 맛이죠. 부모님과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늙은 호박도 사고 이번 주말에는 화개 장터를 찾아보는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화개 장터는 화개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곳에 있습니다. 섬진강에는 은어와 참게로 유명하여 화개 인근에 음식점에서는 은어구이, 은어회, 참게탕으로 요리를 하는 집이 즐비합니다. 시원한 참게탕이 급 땡기는데요.....살아 았는 은어와 참게가 수족관에 가득합니다. 


 

 

하동에서 유명한 대봉감으로 만든 곶감입니다. 필자의 고향에서는 '불통감'이라 했는데 ㅎㅎ 일반 곶감보다 훨씬 당도가 높고 맛있습니다.  말랑말랑 한게 산행을 할때 간식으로 최곱니다.


 


화개장터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있습니다. 장터에서 반드시 먹고 온다는 국밥입니다. 물건을 내다 팔고 아이들 간식거리도 사고하며 이곳에서 주린 배로 막걸리 한사발과 먹었을 것 같은 장터국밥, 어르신들에게는 추억의 장소입니다. 


 

 

 월래 화개 장터 자리는 지금의 화개터미널자리입니다. 김동리가 1948년에 쓴 소설 ‘역마’에 나오는 화개장터의 풋풋한 맛은 지금 찾을 수 없지만 그래도 옛 추억의 한 면은 화개장터를 찾는다면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화개터미널 맞은 편에 옛 장터임을 알리는 화개장터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주위에는 많은 볼거리가 있습니다. 봄이면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우는 쌍계사 10리 벚꽃길, 천년사찰 쌍계사, 박경리 ‘토지’의 무대였던 악양 평사리 최참판댁, 구례의 피아골과 연곡사, 영호남을 잇는 남도대교, 광양매화마을 등 사계절 솔솔한 구경거리가 만만치 않은 곳입니다. 아참 빠질 수 없는 게 또 있습니다. 섬진강의 풍치 또한 놓치지 마세요.

 

☞(경남여행/하동여행)화개장터. “있어야 할건 다 있구요 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하동에서 화개장터 교통편.


하동터미널에서 화개가는 버스는 무지무지 많음. 직행은 오전8시20분, 9시30분, 10시30분, 11시30분 등 1시간 간격으로 11회 운행하며 군내버스인 완행도 많이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2014/10/21 - (경남여행/하동여행)악양 평사리공원.오토 캠핑장과 함께 섬진강을 즐길 수 있는 조망처 평사리공원에서 힐링을 하다. 평사리공원


2014/10/12 - (하동여행) 하동터미널 버스시간표. 군내버스, 직행버스, 고속버스 시간표가 있는 하동버스터미널


2014/10/11 - (경남여행/하동여행)하동 걷기 좋은 코스 하동포구~평사리 최참판댁 섬진강 둘레길을 걷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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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30 - (경남여행/하동여행)쌍계사.한 겨울 칡꽃이 핀 자리에 쌍계사를 짓고 꽃이핀 마을이라 화개마을


2010/05/25 - 지리산 남부능선의 최남단 하동 형제봉을 부춘골에서 오르는 새코스


2009/05/29 - 지리산 쌍계사 중앙에 자리잡은 진감선사 대공탑비의 화려한 예술성입니다.


2008/06/05 - 하동 촛대봉(728m)


2008/07/23 - 토벌대와 파르티잔간의 격전지 -지리산 대성골


2013/05/18 - (전남여행/구례여행)섬진강에 솟은 하천산~밥봉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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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하동여행)악양 평사리공원. 캠핑장과 함께 섬진강을 즐길 수 있는 조망처 평사리공원에서 힐링을 하세요,


동학혁명에서 근현대사까지를 담은 대하소설 박경리 '토지'의 배경으로 유명한 곳이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입니다. 또한 최참판댁의 만석지기 악양들인 무님이 들이 섬진강과 함께 그림 같은 모습으로 펼쳐집니다.



평사리는 비옥한 토지에다, 섬진강을 통한 해상 교통의 발전, 신라와 가야시대에 번성되었던 역촌은 육로 교통이 함께 활발하여 외래 문물 교역이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악양면은 중국의 악양과 닮았다하여 붙혀진 이름이며 평사리공원이 있는 섬진강 모래밭을 ‘금당’이라 하고 작은 호수를 ‘동정호’로 악양의 동정호에 빗대어 붙혀진 이름입니다.



현재 동정호는 확장을 하여 생태공원으로 새롭게 꾸며져 있습니다. 평사리의 유래는 악양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악양 소상팔경’의 하나인 평사낙안과 같다하여 평사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평사리 토지길을 걷다보면 섬진강변에 마련된 평사리 공원은 공원의 기능과 함께 오토캠핑장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19번 국도에 있는 평사리공원은 여름이 끝나 갈 무렵에 찾아갔습니다. 평사리의 최참판댁을 찾는 관광객과 막바지 여름을 즐기려는 캠핑 족이 함께 어울려 평사리 공원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붐볐습니다.

 


이곳 백사장과 화개면 쌍계사 일대에는 요즘으로 말하면 영화 세트장이 꾸며졌습니다. 1955년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이 촬영된 지역으로 한국전쟁 중 빨치산들의 삶과 몰락을 그린 영화이며 그 당시 많은 논란을 낳았던 작품입니다.

 



이곳 백사장에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주인공 노경희가 지리산에서 내려와 자유를 찾아가는 장면을 촬영하였던 곳입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과 하동군에서 영화의 고향 ‘피아골’ 촬영장소란 표지석을 세워 놓았습니다. 필자도 태어나기 이전의 영화지만 ‘피아골’의 이름만 들어도 그 영화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구례군 토지면의 피아골은 유명합니다.



이곳에는 ‘상사의 내 하동’ 김동현, ‘섬진강’ ‘섬진강 탄곡’의 이영하가 작사한 섬진강 노래비와 토지의 등장 인물인 ‘서희와 길상’의 캐릭터도 함께 세워져 있습니다.




이야기가 있는 문화 생태 탐방로 섬진강을 따라가는 박경리 ‘토지길’ 중 평사리 공원 제1코스가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대형 안내판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부부소나무, 동정호, 최참판댁, 평사리 들판으로 걸어 갈 수 있습니다.

 




베롱나무의 꽃잎은 하나 둘 떨어지고 분수의 물줄기는 조금은 추워 보이지만 그래도 놀러온 아이는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평사리 공원은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요즘 많이 찾는 오토캠핑장이 이곳에도 조성되어 있어 가족과 함께 주말을 찾는다면 섬진강을 보면서 캠핑도 즐길 수 있습니다. 밤하늘에 우수수 떨어지는 별똥별과 하늘에 수정같이 반짝이는 별은 사실 도심에서 만나기 힘든 모습이지만 이곳에는 맑은 날이면 항상 만날 수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캠핑의 즐거움을 느껴보세요. 또한 가까운 곳에 관광지가 즐비합니다. 화개장터와 쌍계사, 피아골과 연곡사, 구례 토지면 운조루의 타인능해 유래등 교육과 볼거리가 너무 많은 곳 하동여행 즐거움을 두배 얻고 갑니다.

 

사진으로 만나는 하동군 악양 평사리공원














악양들의 동정호

악양들의 부부소나무

토지의 서희와 길상


☞하동군 최참판 댁과 평사리 공원 교통편


부산에서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공원까지 대중교통 이용도 편리하다.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오전 7시, 8시, 9시, 10시, 11시 등 대략 1시간 간격으로 하동터미널로 출발한다. 악양 평사리 공원은 하동공용터미널에서 화개, 쌍계사, 악양방면 완행버스를 이용하녀 개치마을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한다. 오전 6시30분, 7시40분, 8시, 9시15분, 10시10분, 11시40분. 하차후 악양삼거리에서 왼쪽 악양교를 건너 200m쯤 19번 도로를 따라가면 평사리공원입구에 안내판이 있다. 단 최참판댁은 버스를 타고 악양면사무소를 지나 평사에서 내린다. 하동터미너로 돌아가는 교통편도 자주 있다. 버스가 30분~1시간 간격으로 다닌다. 하동터미널에서 부산으로 가는 버스는 오후 2시30분, 3시20분, 4시30분, 5시30분, 6시20분, 7시30분(막차)에 출발한다.




2014/10/20 - (경남여행/하동여행)하동8경의 백사청송 하동송림 찾아가기. 하동송림


2014/10/16 - (경남맛집/하동맛집)섬진강과 토지 최참판댁도 보고 하동읍내시장 간판없는 팥칼국수 먹고 왔습니다.


2014/10/11 - (경남여행/하동여행)하동 걷기 좋은 코스 하동포구~평사리 최참판댁 섬진강 둘레길을 걷다. 2


2014/09/22 - (경남맛집/하동맛집)동흥식당. 하동여행에서 재첩국이 맛있는 동흥식당 "재첩국 한그릇하이소".


2014/09/24 - (경남여행/하동여행)하동숙박 테마모텔. 현지인이 추천한 하동에서 가장 깨끗하다는 숙박지 테마모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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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하동여행)하동8경의 백사청송 하동송림 찾아가기


하동송림의 소나무는 우리나라 고유 수종으로 어디든지 잘 자랍니다. 조선시대에서는 선비들의 고고한 자태를 상징하여 정자 등에 풍치림으로 많이 심었습니다. 특히 다른나무와 달리 소나무는 나무가 크고 잘 자라며 특히 바람에 강해 강이나 해안가의 바람과 모래를 막아주는 방풍림이나, 방조림으로 많이 심었습니다. 



전국에 여러 방풍림이 조성 된 곳이 있으나 하동송림 또한 대표적인 곳으로 천연기념물 제445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섬진강가의 하동송림은 섬진강을 통해 불어오는 강바람과 모래바람, 범람하는 섬진강의 홍수를 막기 위해 1745년(영조21년)에 도호부사를 지냈던 전천상(1705~1751)이 심었습니다.



목민관으로서 모래와 강바람을 막아 백성을 편안하고 잘살게 하기 위해 광평리 일원에 심었던 방풍림인 하동송림은 그 길이만도 2km에 이르고 26,000㎡의 면적입니다.



일제 강점기인 1935년 하동과 광양 다압면을 잇는 섬진교를 건설하면서 홍수를 막기 위한 제방공사로 송림이 많이 훼손이 되었습니다. 그런 아픔을 뒤로하고도 풍상과 함께 오랜 세월을 버텨온 600여그루의 노송과 300여 그루의 어린 소나무가 남아 전국 제1의 인공 숲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동 송림은 섬진강의 모래밭과 어울려 빼어난 풍광을 자랑합니다. 하동 8경의 백사청송(白沙靑松)은 이곳을 말하며 현재 섬진강의 맑은 물, 백사장과 함께 어울려 하동 군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습니다. 티비 드라마 식객 촬영지 입니다.

하동송림 교통편:하동버스 터미널에서 도보 15~20분 거리.





하동 송림 사진으로 여행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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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창원여행)우산을 펼쳐든 모양을 한 400년된 진전면 여양리 소나무.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는 북으로 여항산이 병풍처럼 둘러 쳐져 있는 산간벽촌의 마을입니다. 태산 준령인 낙남정맥이 막고 있어 마을은 궁색할 정도로 옛 모습을 간직한 산골로 이곳 여향리 산 38번지에 400년의 풍상을 견뎌온 소나무가 있다하여 찾아 갔습니다.

 

독립가옥 집 뒤 언덕에 우산를 펼쳐든 모습의 여양리 소나무는 풍모가 예사 소나무가 아닙니다. 소나무는 예로부터 사시사철 푸르름 때문에 선비의 곧은 절개와 비교를 하여 정자 옆에 풍치림으로 많이 심었는데 이곳 여양리 소나무에도 내려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곳 여양리는 밀성(밀양)박씨 집성촌으로 옥방에 거주하던 박선비는 진주로 왕래 할 때 호랑이를 불러 타고 다녔고 이 소나무가 호랑이를 맞이하였다는 전설입니다. 소나무의 높이는 10m, 둘레는 3m, 너른 품으로 모든 사람을 품어 줄 듯한 인자한 어머님의 모습을 닮아 여양리 마을사람들을 모두 품을 것 같습니다. 여양리 소나무는 정자목으로 1993년 3월 창원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하였고 여양리 밀양박씨 문중에서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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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하동여행)하동숙박 테마모텔. 현지인이 추천한 하동에서 가장 깨끗하다는 숙박지 테마모텔.


하동여행을 다녀오면서 하동전통시장 옆의 테마모텔에서 숙박을 하였습니다. 저녁식사를 하동읍에서 재첩으로 유명한 동흥식당에서 시원하게 재첩국을 한그릇하고 사장님에게 잠잘 곳을 부탁 하니 친절하게 여러곳을 소개하시면서 테마모텔이 제일 깨끗하고 새건물이라는 말씀.ㅎㅎ 요사진 아침에 나오면서 담은 테마모텔 사진입니다.





저녁을 먹고 찾아간 테마모텔은 하동전통시장옆에 위치를 하고 있어 찾기도 쉽습니다. 건물도 높고 엄청 큰 건물이라 멀리에서도 눈에 확 들어옵니다. 주차공간은 외부에도 있지만 1층이 주차장으로 편리합니다. 



주차를 하고 옆문으로 들어서면 테마모텔 안내실입니다. 무인 객실 판매기도 비치가 되어 있습니다. 침대 방도 있지만 동성지간이라 온돌방을 요청하였습니다. ㅋㅋ 요즘 나이가 쬐끔 들어가니 따뜻한 온돌이 여행에서 너무 좋습니다. 여행의 피로도 풀기에 너무 좋고요.



방을 배정 받아 올라갑니다. 엘리베이터가 있어 쉽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방문을 열고 키를 같다 붙히니 자석인지 자동으로 탁 붙습니다. 갑자기 방안에 환하게 전기가 들어 왔습니다.



내부로 들어갑니다. 온돌방이라 그런지 실내가 넓어 갑갑하지 않습니다. 보통 침대 룸은 더블침대가  놓여 방안이 꽉 찬 느낌이었는데 운동장 같았습니다. 마음대로 딩굴수 있어 온돌방도 꽤 괜찮습니다.



방안에 들어오면 먼저하는 일이 티비와 컴퓨터를 켭니다. ㅎㅎ 하루종일 걷고 다닌다고 세상 정보 담을 쌓고 살았는데 오늘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을 하는 게 우선 필수니까요....



밑의 냉장고를 열어보니 생수가 3개 들어 있습니다. ㅎㅎ 다른 곳 보다 생수가 한병 더 있군요. ㅋㅋ 왜 여기는 보양 음요는 없는지. 다른 곳에는 복분자, 석류등 마실게 들어 있는데 말입니다. 좀 아쉬움..........공짠데 ㅎㅎ





온돌방의 내부를 다 봤다면 이제 화장실과 욕실로 가야겠습니다. 사실 오늘 하루 종일 땀을 너무 흘렸는데  빨랑 몸을 씻어야 겠습니다. 땀 냄새가 너무 나서요.



어. 욕실에는 욕조가 없습니다.  겨울에 따뜻한 물로 몸을 녹힐 뿐들은 참고를 해야 할 듯.......그래도 따신물에 몸을 담구는게 피로회복에 최곤데 그냥 사워만 가능하여 아쉬울 것 같습니다. 오늘은 샤워만 합니다.



샤워기 옆으로 세면대와 변기가 놓여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깨끗하며 깔끔합니다.



온돌방의 전체적인 모습입니다. 소파에 앉아 냉장고에 있던 일회용 커피로 차한잔을 먼저합니다. ㅎㅎ 어떤분들은 밤에 커피를 먹고 난 뒤에 잠을 자지 못한다는데 저는 그런 걱정이 전혀 없습니다. 잠을 잘 자니까요.  



천장의 모습입니다. 에어컨이 저쪽에 달려 있습니다. 나 여기 있어요 하며 불빛이 보입니다. 지금 가동니 되고 있습니다. 






티비 옆 화장대라 하나요. 그 앞의 모습입니다. 수건과 사용을 할 수 있는 물품들이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전망을 보기 위해 창문을 열어봤습니다. 이날 일기예보에 태풍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하늘을 보니 무거운 구름이 걸려 있지만 날씨는 괜찮았습니다. 오늘 여행에도 좋은 날씨를 빌어 봅니다. 낮은 산이 하동읍을 감싸고 있고 너무 좋은 읍 소재지입니다. 파란 건물은 하동읍내시장으로 인근에서는 가장 큰 시장입니다.





◆하동 숙박지 테마모텔 영업정보◆

★상호:테마모텔

★주소: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 267-4

★전화:055-883-1661

★주차장 유




하동을 알리는 상징물

하동 전통시장인 읍내시장

하동 송림숲

섬진강

하동 터미널 4층에 찜질방이 있습니다. 나홀로 여행객에게 너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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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용산서원. 정무공 최진립장군 용산서원, 한옥 고가 숙박도 할 수 있습니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가면 용산 서원이 있습니다. 조선의 무신인 정무공 최진립(1568~1636)을 제향하며 자는 사건, 호는 잠와, 본관은 경주입니다. 경주최씨 최진립 장군의 위패를 모신 곳입니다. 그의 고택은 인근에 경주 최부자 집으로 유명한 충의당입니다. 처음 흡흡당으로 부르던 건물은 1760년경에 와 건물을 수리하면서 충의당으로 현판을 바꾸었습니다.

 

 

경주 최부자하면 아마 모르시는 분이 없을 것으로 유명합니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용산서원과 이웃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이 이어진 경주최부자 이야기는 근대에 와서도 그 명성이 자자합니다.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해주는 대목입니다.

 

 

벼슬은 진사이상을 금하며 재산 또한 만석 이상을 넘지 않도록 하고 흉년에 남의 논밭 사는 것을 금하며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입니다. 이외에도 경주최부자의 쌀뒤주는 지금도 우리에게 회자하는 바가 큽니다.


 

경주 최부자의 유래는 최진립 장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육의당 최계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장에 나갔습니다. 또한 1597년 정유재란때도 서생포에서 왜군과 싸워 이겼고 권율장군과 합세하여 도산에서 승전을 하여 ‘선무원종공신’에 오르며 훈련원정을 제수 받습니다.

 

 

금나라의 침입으로 조정은 명나라 구원병을 요청하지만 반대하여 유배길에도 오릅니다. 인조반정 이후 사면되어 첨절제사에 복지하고 공조참판을 거쳐 1630년 전라좌수사에 올랐고 경기수사에 제수되어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직합니다.

 

 

1634년에는 전라수군절도사가 되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으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합니다. 적에 의해 남한 산성은 포위되고 최진립은 인조를 구하고자 출전하여 용인 험천 전투에서 전세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청군에게 패해 전사를 합니다.




 

 

1937년 병조참판에 추서와 함께 청백리에 이름이 오르며 시호 정무를 하사 받습니다. 한국관광공사 용산서원을 참고하면 용산서원은 1699년(숙종25) 경주부윤 이형상이 최진립 장군을 향사하기 위해 지역 유림과 함께 건립 하였고 1701년 강당과 남북재를 세워 강당을 민고당, 양 협실을 흥인재, 명의재라 하고, 남재를 호덕재, 북재를 유여재 문을 식강문이라 하였습니다. 1711년에는 '숭령사우'의 묘액이 내려졌고 원호도 용산서원이라 하였습니다. ‘숭열사우’의 글씨는 이익의 형 이서의 글씨라 합니다. 1870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되었다가 1924년 에 다시 세웠습니다.


 

용산서원은 전면에 교육시설인 민고당을 배치하고 그 뒤쪽에 단을 올려 숭렬사를 둔 전학후묘의 구조도 되어 있습니다. 숭렬사는 정면3칸 측면 1칸이며 민고당은 정면4칸, 측면2칸의 규모로 중앙의 2칸은 마루를 두고 양쪽편에 흥인재와 명인재의 1칸 방을 넣었습니다. 또한 전사창은 정면3칸, 측면 1칸 규모로 향사나 제사등 행사때 제수를 마련하는 곳이며 고사와 유사실도 두었습니다. 용산 서원입구에는 그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으며 1993년 2월에 경상북도기념물 제88호로로 지정되었습니다.


◆용산서원 사진으로 둘러보기

 

 

 

 

 

 

 

 

 

 

 

 

 

 

 

 

 

 현재 용산서원 부속건물인 한옥고택에는 민박을 할 수 있습니다. 2인실부터 대형 10~15인실까지 갖추어져 있습니다. 한옥고택 민박체험은 2인 기준 5만원이며 예약 및 문의는 054-748-2507


 

◆용산서원 한옥 고택에서 숙박도 가능합니다. 사진으로 둘러보기


 

 

 

 

 

 

 

 

 

 

 

 

 

 

 

 

 

 

 

 

 

 ◆정무공 최진립 장군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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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거창여행)김숙자사당. 영남사림파의 발흥이 된 거창 남상면 강호 김숙자 사당을 보고오다.


이중환의 택리지를 보면은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왔고,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영남사림파의 근간이 된 강호 김숙자로부터 시작되었다 합니다. 김숙자는 점필재 김종직의 아버지로 더욱 유명합니다. 또한 그의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성리학의 가르침을 받아 성리학의 태두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김숙자는 1389년에 출생하여 1456년 처가인 밀양에서 사망을 합니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본관은 선산이며 호는 강호. 강호산인으로 블리어 졌습니다. 김숙자는 어릴때부터 총명하여 부친 김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숙자 나이 12세가 되면서 그 당시 고려 말의 충신 야은 길재가 공민왕을 폐위하고 왕의 자리에 오른 태조를 향해 고려의 신하로 있던 사람이 어찌 두 임금을 섬기겠는가 하며 고향 구미의 금오산 아래에서 은둔하며 망한 고려에 대한 충절을 끝까지 지킵니다.

 

 

야은 길재가 고향으로 낙향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김숙자는 그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됩니다. 스승으로부터 소학과 경서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의 학문의 갈증은 해가 갈수록 더 하였는데 그 때 역학에 밝은 윤상이 황간 현감으로 내려 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배우겠다는 일념하나로 단숨에 김천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그의 가르침을 청하니 그의 열의에 감복하여 주역의 이치를 세세하게 가르쳐 줍니다.


 

그는 약관 25세 때인 1414년 생원시에 합격을 하고 5년 뒤인 1419년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합니다.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1436년에 추천으로 ‘세자우정자’가 되었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성균관 사예를 끝으로 1456년 그는 벼슬을 사직하고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옵니다.


 

김숙자는 그를 따르는 제자나 아들인 김종직에게 스승이었던 야은의 가르침을 빠짐없이 실천하도록 하였고 또한 김종직은 일생을 스승이자 아버지인 김숙자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도록 행동을 하였습니다.





 

남을 가르키기를 좋아하여 남다른 열정을 학문에 쏟았고 또한 길재로부터 이어온 학풍에 따라 공부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라며 ‘동몽수지’의 유학자설정속편을 알고 난 뒤 소학으로 넘어가는 순서를 두고 그것을 차례차례 따르게 하였습니다.

 

 

김숙자의 고향은 선산입니다. 선산의 낙봉서원에 제향되어 있는데 이곳 거창군 남상면 대산리에도 김숙자 사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6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으며 8월에 찾아간 김숙자사당은 관리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김숙자의 후손들이 1706년에 세운 김숙자사당은 정문인 명성문을 통과하여 본체인 추원당 뒤편에 높은 단을 쌓아 만들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3량 구조로 된 맞배지붕 건물이며 명성문은 정면5칸, 측면1칸에 한일자 형태입니다. 중간에 솟을 대문인 출입문을 넣고 양쪽 2칸은 방과 광 등을 넣어 사용 하였습니다.


 

 본체인 추원당은 정면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정면에 툇마루를 넣고 계자 난간을 둘렀고 건물 왼쪽에 방1칸과 대청은 2칸을 넣었고 오른쪽에도 온돌을 넣은 방 2칸으로 되어 있습니다.


 

필자가 찾아간 추원당의 명성문 문짝은 파손이 되었는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추원당을 두르고 있는 담장도 허물어져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루 빨리 관리가 된 김숙자사당을 기대해 봅니다.

 

 

 

 

 

 

 

 

 

 

 

 

 

김숙자 사당을 찾아가는 마을 입구에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목이 있습니다. 한국화의 소재로도 너무 잘 어울리는 소나무는 수령이 300년이나 된 보호수로 1982년에 지정되었습니다. 둘레는 6.7m며 높이는 27m 대산리 한산마을 입구에 있어 김숙자 사당을 찾아가는 길에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웃 동네인 남상면 전척리에는 일원정이 있습니다.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의 칠현을 제향하는 곳으로 1905년 김숙자 후손들과 유림들이 건립하였답니다. 꼭 같이 둘러보면 좋습니다. 내비에 '김숙자사당'으로 입력하면 됩니다.



2014/09/02 - (경남여행/거창여행)거창 감악산 산행. 감악산 산행에서 만나는 뼈속까지 시린 물맞는 약수탕에서 물맞이를 하다.


2014/08/27 - (경남여행/거창여행)감악산 연수사. 물맞는 약수탕이 유명한 감악산 연수사에서 얼음물을 맞다.


2014/08/26 - (경남여행/거창여행)점필재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의 일원정을 만나고 왔습니다. 거창 남상 일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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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거청여행)점필재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의 일원정을 만나고 왔습니다.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에는 일원정 누각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황강이 흐르고 뒤로는 거창의 진산인 감악산이 우뚝 솟아 있는 배산임수의 자리에 자리한 일원정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선산 김씨 강호 김숙자()1389~1456)의 후손들과 지역의 유림들이 건립을 하였던 정자입니다.



이곳은 김숙자와 함께 정몽주, 길재,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등 칠현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이분들 모두 조선시대 성리학의 계승을 받들며 이어왔던 분들입니다.

 




그럼 김숙자선생은 어떤 분인지 궁금합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인 김종직 선생은 모두 다 잘 아실 것 같습니다.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부친으로 스승이었던 야은 길재로 부터 성리학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다시 많은 제자와 그의 아들인 김종직에게 실천 중시 학풍을 물려주게 되고 김종직은 평생을 두고 아버님의 가르침을 따랐다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선산 출신인 김숙자를 배향하는 일원정이 왜 있는 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종직은 밀양에서 출생을 하였고 그의 무덤도 현재 밀양에 남아 있는데 그의 부친 김숙자에 관한 유물이 이곳 거창에 남아 있다하니 말입니다. 한 가지 의문이 풀리는 것은 김숙자의 처갓집이 밀양이며 김숙자 또한 관직을 사직한 후 밀양으로 내려와 그해 사망하는데 조선시대 처가에 들어가 사는 풍속을 보면 김종직선생의 밀양이 고향인 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현재 거창 남상에는 김숙자 유물이 두 점 있습니다. 1706년에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남상 대산리의 김숙자 사당이며 1905년 선산김씨 후손들과 지역 유림들이 건립한 남상 전척리 일원정입니다.



본채와 객사로 이루어진 두 채의 건물 일원정은 어떤 연유로 이곳까지 내려와 지어졌는지 관리하는 후손 분에게 물어보았지만 시원한 답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 문화재 청을 인용하여 보면 본채인 일원정은 정면 4칸에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지붕이며 2칸은 넓은 마루를 깔았고 온돌을 깔아 넣은 2칸의 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었고 계자난간을 설치하였습니다.




오른쪽의 객사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방과 마루를 넣었습니다. 일원정은 서원 역할도 한 것으로 보이며 일원정을 마주하고 김숙자 신도비가 황강 언덕에 세워져 있습니다. 신도비는 일정에 쫒기다 보니 사진으로 담아오지를 못했네요.



거창의 일원정은 경상남도 남상면 전척리 530번지에 선산김씨 문중의 소유로 1983년 8월에 문화재자료 제7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교통편은 내비에 일원정을 입력하면 위치가 바로 나옵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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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함안여행)함안 무진정. 한여름의 무더위도 걱정없는 정자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함안의 무진정. 


전국으로 여행을 다녀보면 많은 고택과 고가를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연못을 두고 그 위 언덕에 정자를 올려놓은 곳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의 아름다운 민간정원 세 곳이 모두 이러한 경우입니다.




보길도의 세연정과 담양의 소쇄원, 영양의 서석지는 모두 발 아래 독특한 모양의 연못과 정원을 두고 있으며 한국의 민간 정원중 최고로 꼽고 있습니다. 필자도 이곳을 모두 다녀 보았습니다.




이번 함안군 함안면 여행에서 만난 무진정도 3대 한국의 아름다운 민간정원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연못에 비친 무진정 정자의 모습은 따로 표현할 말이 부족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무진정을 찾아가는 길은 단순합니다. 남해고속도로를 타고가다 함안IC로 내려 오른쪽으로 꺾어 가야읍을 관통하는 함안대로를 10여분 달리면 오른쪽에 우거진 숲과 연못이 보입니다. 이곳이 함안면 괴산리 무진정입니다.

 


무진정 누각에는 1542년 6월 어느날 지은 주세붕선생의 무진정 기문이 있습니다. 선생은 그해 완공된 무진정을 보고 “지리산에서 삼백리를 말갈기가 떨치듯 물결이 용솟음치듯 치달아 함안의 진산인 여항산을 이루며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고 고개를 치켜드는 것 같은 산마루에 집을 지은 것이 무진정이다”며 무진정을 격찬하고 있습니다.

  


무진정은 조삼선생이 낙향하여 남은여생을 후진양성에 힘쓰기 위해 지은 정자로 그의 호를 따 무진정이라 하였습니다. 선생은 생육신의 한사람인 조려(1420~1489)의 손자로 1473년에 태어나 1489년에 진사시에 합격을 하고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 창원, 대구, 성주, 상주의 부사와 목사에 재수됩니다.



선생은 관직에 있으며 목민관으로서 청렴함과 선정을 배풀어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습니다. 이에 시기와 질투, 당파싸움만 일삼는 조정관리에 환멸을 느낀 조삼선생은 낙향을 결심합니다. 낙향 후 그의 절친인 신재 주세봉과 한강 정구 선생등과 교류합니다.

  


앞면 3칸에 옆면이 2칸인 무진정은 여덟 팔자모양 형태의 팔작지붕이며 앞면의 중앙에는 온돌방 대신 마루방을 넣었습니다. 또한 정자 전체를 지면에서 띄운 누마루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진정이 있는 이곳 아래에는 물길이 흐르는 습지였다합니다. 이곳에 축대를 올리고 조삼선생이 연못 둘레에 왕버들과 느티나무 그리고 소나무를 직접심어 오늘날의 무진정 모습이 되었다합니다.




요즘 여름 날씨는 장난이 아니게 무덥습니다. 특히 가마솥 무더위를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더운 한낮에도 이곳에만 들어서면 시원한 느낌이 드는 것 같습니다.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 무진정은 그 바람이 여항산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라 더욱 좋은 것 같습니다. 여름철의 무진정은 동서남북 문짝을 들어 올려놓았습니다.



삼베옷을 입고 대청에 드러누워 시원한 바람을 맞고 가면 너무 좋을 것 같으며 여름철 최고의 피서지인 함안군 함안면의 무진정 어때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무진정은 1976년 12월20일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함안 무진정 구경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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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합천여행)용주면 황계폭포. 합천8경에서 돋보이는 황계폭포의 굉음에 간담이 서늘합니다.........


남명 조식선생은 합천의 황계폭포를 찾아와 지은 두시가 전하는데 그 중 한시가 황계폭포 입구에 세워놓은 자연정의 빗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럼 남명선생이 칭송과 극찬을 한 황계폭포 시를 읊어 보겠습니다.



“달아맨 듯 한 줄기 물 은하수처럼 쏟아지니.

구르던 돌 어느새 만 섬의 옥돌로 변했구나.

내일 아침 여러분들 논의 그리 각박하지 않으리.

물과 돌 탐내고 또 사람가지도 탐낸다 해서.“






황계폭포는 경상남도 합천군 용주면 황계리 산 156번지에 마치 하늘에 걸린 듯 지면으로 내려 꼽히며 2단의 폭포를 이룹니다. 폭포를 두르는 좌우로 병풍을 두르듯 암벽이 둘러쳐져 인간의 근접을 허락하지 않는 그런 곳에 황계폭포는 걸려 있습니다.



황계폭포를 보기 위해 들어가는 입구는 오직 덕계교 방향 뿐입니다. 이곳에서 물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자연정을 만나게 됩니다. 입구 안내판에 600m는 잘못 표기된 것 같습니다. 200~250m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자연정과 남면선생의 시 한수를 감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층암절벽에 푸른 이끼를 이고 있는 것이 숱한 세월을 견디어 온모습과 떨어지는 굉음에 등골이 한여름의 오아시스처럼 싸늘합니다.



바람소리 물소리를 맞으며 짙은 숲을 나오면 계곡은 왼쪽으로 꺾어 2단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상단은 이마가 툭 튀어 나온 바위위에서 물을 쏟아내고 하단은 두줄기의 물줄기가 마치 용이 하늘로 먼저 올라가듯 경쟁을 하는 모습입니다.



폭포 밑의 소에는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짚어 명주실 한꾸러미를 다 풀어도 닿지 않는다며 마을의 구전을 들어보면 용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합니다.



인근의 동네사람들이 여름철에 모여 황계폭포에서 물맞이를 많이 했다며 논일 하다 이곳에서 물을 맞고 더위를 달랬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합천군 안에서는 이만한 폭포는 찾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덕분인지 황계폭포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에 합천 8경 중 7경에 황계폭포의 이름을 올려놓았습니다.



옛날부터 근방에 이름을 알려 주위의 황매산과 허굴산, 금성산, 악견산이 모여 합천의 명산인 대병3산이 되었는데 이 황계폭포가 일조를 하였습니다. 울퉁불퉁한 바위로 이루어진 산세와 함께함께 절경을 이루는 황계폭포는 시인묵객들이 빠질 수 없는 곳입니다.





지리산을 노래한 남면조식선생을 위시하여 많은 분들이 황계폭포를 예찬하였다합니다. 황계폭포를 찾아 얼마남지 않은 여름 무더위를 훅~~하고 날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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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함안여행) 함안대산리석불, 함안여행에서 만날 수 있는 함안 대산리 석조삼존상을 보고 왔습니다.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의 대사골 마을에 3구의 불상이 현재 남아 있으며 '함안 대산리 석조삼존상'이라 부릅니다. 불상이 고려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어 그 당시 창건된 사찰터로 추정을 합니다.

 

 

그러나 왜, 언제 폐사되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현재는 절터에 마을을 이루고 있습니다. 좌우의 협시보살 사이에 머리와 손 , 다리등이 훼손된 석불이 있습니다.


 

 

석불 뒤로 일부 광배만 남아 있는데 불상을 깎은 돌의 질과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불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리 처참하게 파괴가 되었는지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좌우의 협시보살을 보면 두 불상의 모양이 서로 비슷하게 조각이 되어 있고 손모양만 약간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두 보살상의 대좌는 모두 상대와 하대로 나누어졌고 팔각으로 된 하대에는 코끼리 눈을 본떠 만든 문양인 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안상 안에 귀꽃이 새겨져 있으며 상대는 원형이며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좌대위의 보살상은 긴 얼굴을 하고 눈, 코, 입은 훼손되었는데 특히 눈 주위로 더 파괴가 심합니다.

 


 

두 보살상 모두 머리에는 두건 같은 복두를 쓰고 우리 고유의 한복 같은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단정하게 여민 옷은 가슴에서 서로 교차되어 길게 내려온 옷 위로 왼쪽 어깨에 매듭을 한 고리로 고정을 한 편단우견 차림의 겉옷을 또 하나 걸치고 있습니다.

 

 

허리에는 끈 묶음을 하였고 주름이 긴 옷은 무릎 부위에서 타원형으로 묘사 된 게 이런 특징은 고려시대의 불상 양식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약간은 무거운 느낌의 옷을 표현하였고 왼쪽의 보살은 가슴과 배에 손을 대고 있으며 오른쪽의 보살은 왼손을 배에 올리고 오른손은 물병을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공식명칭은 ‘함안 대산리 석조삼존상’으로 불리며 1963년 1월 보물 제71호로 지정되었고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던 것을 전각을 지어 보호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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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함안여행)함성중학교 교정의 함안 주리사지 사자석탑.  해태상을 보는 것 같아요. 주리사지 사자석탑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소재지 인근에 있는 함성중학교에는 독특한 불교 유적이 현재 세워져 있습니다. 교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공적비와 사자석탑 등 절터에 있던 파석을 옮겨 놓았는데 그 연유가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현재의 유물은 함안군 여항면 여항산의 주리사터에 있었던 것으로 일제시대때 함안면사무소로 옮겨왔고 그 후 광복을이 된 뒤 다시 이곳 함성중학교로 옮겨 오면서 기단부와 몸돌등도 하나 없이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합니다. 현재의 남아 있는 석재와 그 당시 조성 방식과 석탑의 규모를 볼때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5층 석탑으로 추정이 됩니다.





몸돌은 남아 있지 않지만 지붕돌은 완만한 흐름으로 균형감을 잘 이루었고 네 귀퉁이의 처마 끝을 살짝 올려 곡선의 아름다움을 살린 석탑입니다. 상륜부는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주리사지 사자석탑은 기존의 석탑과 다른 특징을 보여 줍니다.



네 마리의 사자로 몸돌을 떠받들도록 한 것은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석탑과 제천 월악산 사자빈신사지석탑 등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석탑입니다.

 



주리사지 사자석탑의 네 마리 사자를 보면은 모두 앉아 있는 모습을 하며 밖으로 들어 낸 이빨에서 사자의 위용을 나타내었습니다. 우람한 눈은 살아 있는 듯 생동감이 넘치고 휘날리듯 섬세하게 조각된 갈기는 백수의 왕 사자를 잘 표현하였다는 평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주지’를 보면은 주리사터는 현재 주서리 좌촌마을과 대촌마을 사이로 추정하며 함안면 북촌리 함안 중학교 교정에 주리사지 사자석탑을 복원 해 놓았습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으며 복원을 할 때 제작연대가 비슷한 월악산 사자빈신사지석탑의 사자탑재 부분을 참고하였고 상륜부는 지리산에 있는 실상사삼층석탑을 보고 3층 규모로 복원을 하였습니다.



현재의 주리사터 사자석탑은 수려하며 완벽한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네 마리의 사자도 기쁜지 금방이라도 사자가 몸을 세우며 포효할 것 같습니다. 현재의 모습으로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함안 주리사지 사자석탑 안내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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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영양여행)일월면 월록서당. 조지훈의 주실마을에 있는 월록서당을 만나다.

 경북에서 하늘아래 오지인 곳이 영양이라합니다. 그만큼 많은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영양땅. 그중에서도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은 영산 일원산의 산신인 해와 달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많은 문인들이 배출된 곳으로 그중에서도 근대에 와서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이곳 주실마을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먼저 주실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마을 입구를 가리는 울울창창한 숲입니다. 조지훈 선생의 시비가 서 있으며 어릴적 선생이 개구쟁이처럼 뛰어 놀았던 곳이라 합니다. 마을로 들어서는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방둑길이 이어집니다.

 


이곳에 일월산을 등지고 서 있는 주실마을의 월록서당은 영산 서당을 서원으로 승격한 후 서당으로는 영양군에서 가장 먼저 생겼습니다. 1765년 영조41년에 주곡리의 한양조씨, 도곡리 함양 오씨, 가곡리 야성 정씨가 힘을 합하여 세운 서당으로 옥천 조덕린의 손자인 월하 조운도(1718~1796) 선생, 만곡 조술도 선생이 중심이 되어 1773년에 건립하였습니다.






서당 옆으로는 장군천이 흐르고 마을 뒤를 감싸고 있는 매방산 아래에 그림과 같이 앉아 있습니다. 서당을 마주보고 선 문필봉의 영향으로 많은 명현석학이 배출된 월록서당은 최근에 복원공사를 한 흔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건물의 외벽과 문짝 등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어 있어 이곳을 찾았던 필자의 마음도 한결 가벼운 마음이었습니다.







서당을 빙 두른 담장은 방형의 토석으로 쌓아 올린 낮은 담장을 둘러 밖에서도 내부를 훤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월록서당을 들어서는 입구를 앞쪽에 배치를 하였으며 맞배지붕의 사주문을 올려 출입구로 삼았습니다. 서당 건물은 정면 4칸에 측면 2칸의 일자형 목조와가의 홑처마집으로 좌우 1칸씩은 큰 온돌방을 넣었고 중앙의 2칸은 마루를 깔았습니다.


월록 서당의 현판 글씨는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번암 체제공 선생의 친필이라 전하며 조선 후기 건축구조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월록서당은 경상북도 율형문화재 제17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에 현재 있습니다.

조지훈 생가와 문학관등 주변에 많은 문화재가 있는 주실마을 영양여행에서 꼭 찾아 보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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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영양여행)원리 주곡고택, 경북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옥의 모습을 보여주는 주곡고택을 만나보세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지로 통하는 곳이 여럿 있습니다. 그중에서 영양도 어느 오지 못 지 않게 육지 속의 섬으로 부릅니다. 그 흔한 고속도로에서 영양을 가기위해서는 사방팔방으로 1시간은 더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청정의 영양을 지난번에 댕겨 왔습니다. 영양은 흔히 청정의 오지 덕분으로 은둔의 땅이라 생각합니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선인들이 모든 벼슬을 내려놓고 몸을 숨기며 후학을 양성한 곳이 골짜기마다 숨어있어 이곳은 인근 양반의 도시 안동과 함께 많은 고택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두들마을로 부르는 곳에 아담하며 단장한 모습의 주곡고택입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두들마을에는 재령이씨 집성촌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주곡고택 또한 조선 중기 유학자였던 우계 이시형의 손자인 이도(1636~1712)선생이 석보면 주남리에 세웠는데 그의 사후에 후손들이 1830년(순조30년)에 두들마을로 옮겨왔다 합니다. 자는 중수, 호는 주곡으로 퇴계 이황과 학봉 김성일의 영남학파 학통을 그대로 계승한 갈암 이현일의 제자로 만년에 세상에 나가지 않고 후학 양성에 매진한 분입니다.




 


주곡고택은 경상북도 중에서도 추운 날씨인 북부지방 민가 건물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ㅁ'자형의 뜰집형 구조로 지어졌으며 생활하는데 편리성을 주기위해 사랑방에다 물치장이라 불리는 벽장과 감실방 벽감 아래의 널로 된 제사상등 그 당시 생활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부엌에 묻어 놓은 불두멍도 현재에는 남아 있는 곳이 드물어 귀중한 산간지방의 옛 생활문화를 엿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주곡고택은 지금도 이도의 후손들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집안 내부를 볼 수 없고 그냥 겉모습만 보고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일부 내용은 문화재 안내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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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청도여행)유천마을 오누이시인 이호우, 이영도 생가를 찾아 갔습니다.


 청도군의 청도읍은 길게 청도천을 끼고 고구마처럼 둘레를 이룹니다. 그 청도읍의 맨 남쪽 끝에는 밀양과 몸을 썩고 있는 유천마을이 있습니다. 경계는 청도군에 속해있지만 청도군과 밀양시를 한 몸으로 묶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내호리라는 공식 지명이 있지만 유천으로 더 유명한 곳입니다. 동창천과 청도천이 만나 밀양의 북천수가 되는 이곳 유천은 이름처럼 서정적인 아름다움은 고장입니다.

 

 

경부선의 옛 역명이 유천이었고 밀양땅 옥산 마을의 산모랭이를 돌아 유천마을을 가로 질러 노루목을 지나가던 철길에는 덜컹 그리며 달리던 완행열차도 추억의 철길과 함께 사라지고 이제는 쌕쌕이 같은 소리를 내는 KTX만 굉음을 내며 역과는 상관없는 듯 무정하게 터널로 들어 갑니다.


 

아름다운 유천은 시인의 마을로 불립니다. 오누이인 이호우와 이영도님이 태어난 곳이 이곳 유천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거목으로 많은 작품 활동을 하셨던 두 분의 모습이 지금의 생가를 보면 닫혀진 철문처럼 답답합니다.


 

마당에 풀들이 자라고 화단에는 이름모를 꽃들이 피지만 후손들이 모두 떠나버린 이호우, 이영도 생가에는 감나무만 키 큰 담장 위에 삐쭉 올라와 무성한 잎을 드리우며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감나무도 창문 밖으로 낭낭히 울리던 두분의 책 읽는 소리를 들었겠지요. 스르륵 스르륵 풀벌레 소리와 와랑 와랑 흘러가는 하천의 물소리, 동창천에서 멱감고 청도천에서 다슬기를 잡으며 청도의 자연이 이 두 분의 시심을 키운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호우(李鎬雨. 1912~1970))님은 이영도님의 오빠입니다. 1912년 이곳 생가에서 태어 나 1940년 문장지에 시조 ‘달밤’으로 문단에 오릅니다. 1955년 이호우 시집을 간행 하였고 제1회 경북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는 시조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대표작품으로는 ‘개화’, ‘별’, ‘바위 앞에서’ 등이 있으며 여동생 이영도와 오누이 시집인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중 제1권인 ‘휴화산’을 발간하였습니다. 그의 호는 이호우(爾豪雨).


 

이영도(李永道. 1916~1976)님은 이호우의 누이동생으로 여류시조시인입니다. 호는 정운이며 경상북도 청도읍 내호리 속칭 유천에서 1916년 출생하였습니다. 1946년 죽순지에 ‘제야’를 발표하며 등단을 하였고 1954년에 그의 첫시집인 ‘청저집’과 ‘석류’, ‘언약’등의 시조집을 발표하였습니다. 수필집으로 ‘춘근집’, ‘비둘기 뜨락’, ‘머나먼 사념의 길목’ 등이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보릿고개, 달무리등이 있으며 호는 정운. 청마 유치환님이 5000여통의 연서를 보냈는데 그 상대방이 정운 이영도님입니다. 1967년 청마가 부산 초량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정운님은 죽기 직전까지 보냈다는 수많은 편지 중 200여통을 추려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 라는 책으로 출간을 하였고 또한 부산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거쳐를 옮기지만 갑자기 뇌출혈로 눈을 감습니다.


 

 

 유천 이호우와 이영도님의 생가가 있는 곳은 1960~1970년대의 거리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73년된 정미소는 아직도 주민들의 벼를 찧어 내고 그 당시 폐관된 영화관의 모습도 볼거리이며 구멍가게, 사료점방등 옛 추억의 건물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청도군에서는 청도천과 동창천이 만나는 강언덕에 오누이 공원을  만들어 두 분의 시비를 세워 공원으로 조성해 놓았지만 정작 생가는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만하지 말고 청도군에서는 두 오누이의 생가를 하루빨리 해결(?)하여 닫혀진 철문을 개방하여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헛걸음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안내판을 보면 두분의 생가는 1910년경에 건축된 근대기 단층 한옥 기와집으로 안채와 사랑채를 ‘ㄱ'자 형태로 배치하였고 시조시인 남매의 생가로서 문화사와 향토사적 가치가 높아 등록문화재 제293호로 지정하였습니다.


 ◆시조시인 이호우와 이영도 생가, 오누이 시비공원 구경하기◆

 

 

 

 

 

 

 

 

 

 

 

 

 

 

 

 

 

 

 

 

 

 

 


교통편을 보면 경부선 상동역에서 도보로 20여분 안팎이면 닿고 상동역에서 버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가 운전은 신대구 부산고속도로 밀양톨게이트를 빠져나와 밀양 청도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긴늪 유원지 앞 사거리에서 청도방면 25번 국도를 우회전합니다. 약 7분이면 상동역을 지나고 신곡삼거리에서 좌회전한 후 상동교를 건너면 옥산 삼거리가 나옵니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옥산버스정류장 앞 갈림길에서 좌측(직진형) 마을길로 들어서면 청도천을 건너 유천마을입니다. 이곳에서 우회전하면 좌측에 이호우, 이영도 생가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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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청도여행)영화세트장이 아니예요. 청도군 유천에는 세월을 돌려놓은  6~70년대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경상북도 청도군 유천에는 청도천과 동창천이 서로 만나 밀양강이 됩니다. 이곳부터 밀양강이 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 산자수려한 곳의 마을이 유천으로 옛날부터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영남대로가 이곳을 지나갔고 청도읍과 경주 산내, 그리고 밀양방면으로 각각 갈라지는 삼거리라 항상 많은 사람들이 붐볐습니다. 그 영향으로 이곳에는 1960년~1970년대의 번창했던 그 당시 마을의 분위기가 남아 있습니다.



그 당시 건물중 가장 압권인 것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 가동된 유천의 정미소입니다. 현재나이로 73세입니다. 그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흔적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외벽은 흙을 발라 만들었지만 지금은 덕지덕지 흙으로 덧 쉬운 흔적도 세월에 묻혀 또하나의 역사가 된지 오래입니다.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마을주민의 쌀 빻는 기능을 그대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켜켜히 내려앉은 먼지가 그 세월의 깊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곳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고요..... 관리하시는 분의 말로는 이곳에서 영화촬영도 했다합니다....



옛 추억을 회상하고 어릴적 추억의 한 토막을 꺼 집어내어 봅니다. 필자의 마을에 있던 정미소의 모습도 이러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정미소를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현대화의 도정공장에 밀려 모든 마을에서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청도읍 유천에서 만나는 정미소에서 어릴적 추억을 떠 올려 봅니다. 그리고 마을에 옛 영화관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이야 가동을 멈춘지가 30~40년이 넘어 그 건물만 남아 있으며 몇해전에 영화관 건물에 불도 나 더욱 초라한 모습입니다. 들리는 풍문으로는 개그계의 돈키호테 전유성씨께서 한때는 탐을 냈다고 합니다. 그리만 되었다면 훨씬 더 좋았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영화관이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 마을 규모를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읍면단위에서도 보기 힘든 영화관입니다.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은 마을 분을 만났습니다. “영화관에 손님이 넘쳐 낫제”하시며 “나도어릴 때 많이 댕겼제”하십니다.



일제 강점기때 지어진 듯한 구멍가게며. 사료점방등 오래된 건물이 영화 세트장 처럼 오가는 손님은 없어도 여름의 햇볕을 받아 꾸벅꾸벅 졸고 있습니다.




나 어릴 때 추억을 찾아 떠나는 여행으로 너무 좋은 곳 청도 유천, 이곳은 청도가 낳은 이호우 이영도 시인의 마을로 '시인의 마을'로 부릅니다. 그 집의 대문을 두들려 봅니다.  


교통편을 보면 경부선 상동역에서 도보로 20여분 안팎이면 닿고 상동역에서 버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자가 운전은 신대구 부산고속도로 밀양톨게이트를 빠져나와 밀양 청도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긴늪 유원지 앞 사거리에서 청도방면 25번 국도를 우회전합니다. 약 7분이면 상동역을 지나고 신곡삼거리에서 좌회전한 후 상동교를 건너면 옥산 삼거리가 나옵니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옥산버스정류장 앞 갈림길에서 좌측(직진형) 마을길로 들어서면 청도천을 건너 유천마을입니다. 이곳에서 우회전하면 정미소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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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 영양울진여행) 낙동정맥 구주령이 아닌 구실령.옥녀당의 전설이 있는 구실령 너무 아름다운 고개입니다.


전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곳에는 고개가 있습니다. 수많은 고개에는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요즘은 당산나무와 당집에서 고개를 안전하게 넘어가게 해달라며 길손이 작은 돌을 올린 후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모습은 전설의 고향에서나 종종 볼 뿐 만나기 힘든 모습이 되었습니다.





한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은 물론이며 낙동정맥 또한 동서를 가르다 보니 수많은 고개가 만들어 졌습니다. 모든 고개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다 있습니다. 전설 없는 고개가 없을 정도로 우리 민초와 밀접하게 연결된 수많은 고개 중 육지속의 섬으로 불리는 경북 영양군 수비면과 울진군 온정면을 연결하는 곳에는 구주령(九珠嶺:표지석에 구주령으로 표기)이 있습니다.






지금은 88번 지방도가 뚫여 있어 수월하게 자동차를 이용하여 넘어 갈 수 있습니다. 이곳 구주령에는 특이하게도 현재 옥녀당의 당집이 남아 있습니다. 그 이유를 보면 조선시대 인조 때입니다. 영해부사로 근무하던 지방관리 황씨에게는 옥녀라는 예쁜 딸이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서로 행정관할이 영양군으로 나누어 져 있지만 그 당시에는 영양은 영해부에 예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옥녀는 아버지의 명을 받아 아흔 아홉 구비를 돌 정도로 험준한 구주령을 넘어 수비의 영양관아에 공문서를 전달하고 다시 영해로 돌아가다 이곳 구주령에서 그만 병을 얻어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본신리 주민들은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죽은 옥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구주령에 봉분을 올리고 옥녀당의 사당을 세워 매년 음력 정월 보름달에 동제를 지내왔습니다.


 



현재까지도 옥녀의 무덤은 관리가 잘 된 상태며 이는 아이를 원하는 부인이 옥녀의 무덤에 먼저 벌초를 하면 득남을 하거나 바라는 소원을 이루게 해준다는 속설로 주민과 고개를 넘는 분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성으로 돌보아온 때문입니다.





이곳 온정면 구주령 안내석에는 “이곳이 구슬 아홉 개를 꿰어 놓은 형상”이라 구주령이 되었다는 설명이며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는 사진 찍기 좋은 녹색명소로 지정을 한 아름다운 곳입니다. 특히 동해에서 솟아 오른 해돋이는 장관이라 합니다.

 



 



울진신문 2010년 8월9일자 김용주님 기고에는 구주령이 아닌 구실령으로 불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필자(김용주)의 유년기 시절에도 구주령이 아닌 구실령으로 불렀고 구지재, 도부재로도 불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를 제시하였는데 임진왜란때 탄액을 받은 영의정 이산해(토지 이지함의 조카)는 평해에 유배를 와 ‘기성록’을 남기게 됩니다. 그 책속 달촌기내용중 김용주님의 글을 인용하면 “산이 영동(嶺東)과 접하게 되어서는 서남쪽이 가장 높은데, 기성(箕城, 평해의 옛 이름)에서는 주령(珠嶺)이 되며, 주령의 한 가닥이 다시 동쪽으로 30여 리를 뻗어 삼성산(三聖山 : 이는 지금 평해읍의 뒷산 삼성봉)이 된다.”에서 주령(珠領)의 주는 ‘구슬주’자로 구슬은 경상도 일부에서 사투리 ‘구실’로 발음을 하여 구실령입니다. 또한 1776년 이긍익의 ‘연려길기술’, 1808년 서영보의 인문지리서 ‘만기요람’에도 주령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주잠(珠岑)으로 표기를 하여 잠은 령과 함께 고개를 뜻하니 주령이 되어 구주령으로 불리는 고개는 잘못된 이름이며 구실령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구지재는 구실령의 한 골짜기 이름에서 유래가 되었고 도부재는 경북 북부쪽에서는 보부상을 도부꾼으로 부릅니다. 평해와 영양에서 생산된 해산물과 농산물은 도부꾼을 통해서 험준한 구실령을 넘어 거래가 되어 도부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고개라 도부재로도 불렸다 합니다. 하루빨리 자신의 이름인 구실령을 찾아야 겠습니다.(참고:울진신문 김영주님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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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영양여행)영양산촌생활박물관. 산간벽촌의 생활을 한눈에 전시한 곳이 영양에 있습니다.영양산촌생활박물관.


산골의 삶이 어떠한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영양에 가면 오지라는 이름 속에 산간지역의 생활상을 전시한 곳이 있습니다. 영양산촌생활박물관으로 이름에 나와 있듯이 우리 산촌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전시를 한곳입니다.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졌고 한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지나는 경상북도 북부와 강원도는 대부분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영양군에서 조성한 산촌생활박물관를 자녀들과 함께 방문을 하면 또 하나의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눈부신 경제성장의 발전으로 그 당시 산촌의 생활상을 많이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경제 대국을 있게 한 우리민족의 강인함과 억척스러움을 영양산촌생활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양산촌생활박물관은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영양군에서 가장 높은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이 흐르고 뒤로는 아름다운 영양의 자양산 자락에 2006년 9월 개관을 하였습니다.














마을이 터를 잡으면서 함께 생긴 게 마을 입구 또는 마을내의 당집입니다. 이를 서낭당으로 부르며 영양지역에서는 주로 마을입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을의 안녕과 풍요, 개인적인 길흉사를 빌면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또한 산간지방에서 우리가 거주하며 생활하였던 주가지를 이곳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투방집, 너와집, 굴피집등으로 꾸며져 있으며 산촌을 대표하는 너와집을 보면 바람을 막아주는 벽은 흙 또는 나무로 만들었고 지붕은 볏단으로 만든 초가지붕, 억새, 갈대가 아닌 산중에서 구하기 쉬운 ‘너와’라고 부르는 소나무 조각으로 포개어 덮었습니다.








이를 ‘느에집’, ‘능애집’이라고도 합니다. 영양산촌생활박물관 야외 전시장에서는 서낭당 체험과 다양한 너와집의 생활을 체험 할 수 있으며 상설전시와 기획전시가 이루어지는 본관 전시관도 둘러보았습니다.












전통문화공원에는 효녀심청, 별주부와 토끼, 견우와 직녀, 선녀와 나뭇꾼, 흥부와 놀부등 모두들 알고 있는 전래동화가 꾸며져 있고 효자조검, 효자숙부인, 효자 오삼성 등 귀감이 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 공원 안에 채워져 있습니다.


 



◆영양산촌생활박물관 둘러보기◆




















물레방아확:통일신라시대 사찰인 일월면 용화리 용화사에 있었던 역암으로 만든 돌확으로 충격을 흡수 할 수 있도록 타원형으로 만들었습니다. 높이1,240mm, 둘레는 4,100mm, 무게는 4.6톤입니다. 








★보릿고개 넘기

해방 후까지 우리에게는 보릿고개 넘기란 말이 있었습니다. 가을철 쌀을 수확하여 한겨울을 나면 식량이 집집마다 다 떨어지게 됩니다.  그 이듬에 봄에 보리를 수확할때까지 굶주림에 시달리는 상황을 보릿고개 넘는다라 하였습니다. 한끼 배를 채우기 위해 하루종일 일을 하였으며 이도 아니면 들과 산으로 먹을 것을 찾으러 나가야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칡을 캐거나, 나물과 쑥을 뜯거나 소나무 껍질을 먹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생활로 봄철 춘공기는 산촌의 생활을 더욱 궁핍하게 하였습니다. 





★봄철 산나물 다듬기 

산촌 생활에서 봄에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일상입니다. 집집마다 산나물을 뜯어 데쳐 말리는 작업을 해야만 1년을 견디는 양식이 되며 부식입니다.

 






★보리타작

보리가 익기만을 기다리며 삶과 죽음을 넘는 보릿고개를 넘겼습니다. 노랗게 잘 익은 보리를 베고 , 나르고, 이제 굶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을 가지는 모습입니다.


 

★건강한 여름나기



★풍요로운 가을



★소중한 꿀따기












일월산 미륵동굴

해와 달의 정기가 어린 일월산은 일자봉과 월자봉의 두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울때 극락세상을 열어 중생을 제도한다는 미륵불을 모신 동굴로 기도처입니다. 미륵불은 석가가 열반에 든후 56억 7천만년후에 나타난다는 미래의 부처님입니다.  





★영양의 여신

영양군의 일월산 월자봉 아래에는 황씨부인당을 모시고 있으며 구주령은 아홉개의 구슬을 꿰어 놓은 듯한 험준한 태산준령에 있는 고개로 낙동정맥이 지나갑니다. 영양 수비면에서 울진 온정면 백암온천을  연결하는 고개로 정상에 옥녀를 모신 서낭당이  있습니다. 황씨부인을 중심으로 왼쪽에 옥녀가 오른쪽으로는 황씨 부인의 두 딸이 장갈령과 동산령을 지키고 있습니다. 







































































































★영양상여

상여는 시신을 묘지까지 운반하는 용구를 말합니다. 마을마다 공동으로 마련하여 상여집에 보관을 했다가 장례에 썼습니다. 영양상여는  제작기법이 뛰어나 1988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영양산촌박물관에서 남이포선바위 관광지로 이어지는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외씨버선길의 일부분으로 거리는 0.9km며 부모님과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분도 충분히 완주 할 수 있는 흙길입니다. 이곳 영양산촌생활 박물관에 들러 전시된 자료를 하나하나 보면서 어릴적의 추억을 떠올려도 보고 우리 조상들의 지혜도 느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필자도 겪었던 생활이 조금은 전시되어 있어 많은 감명을 받고 둘러본 영양산촌생활박물관 자라나는 아이들과 방문하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선바위관광지




◆영양군여행 영양산촌생활박물관 이용안내◆

★영양산촌생활박물관

주소: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연당2리 20번지

전화:054-680-6179

휴관일: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 추석

관람시간:하절기(3~10월):09시~18시

동절기(11~2월):09~17시

폐관 1시간 전까지 입장가능

주차장 유







2014/05/08 - (경북여행/영양여행)육지속의 섬이라는 경북영양 1박2일 여행에서 여중군자 장계향의 음식디미방과 청록파 시인 조지훈을 만나다.


2014/05/11 - (경북맛집/영양맛집)두들마을 맛집 음식디미방체험관, 조선 양반가의 특이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장계향의 음식디미방.


2014/05/13 - (경북여행/영양여행)영양 서석지. 조선시대 민가 3대 정원중 하나인 영양의 서석지의 아름다움을 보고 왔습니다. 경정과 서석지


2014/05/16 - (경북여행/영양여행)한글최초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을 보고 만들어 본 석류탕. 음식디미방 석류탕 체험


2014/05/17 - (경북여행/영양여행)석천서당. 올곧은 선비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두들마을 석계 이시명 의 석천서당을 가다.


2014/05/29 - (경북여행/영양여행)영양 선바위 관광지. 영양군 반변천 최고의 관광지 남이포 선바위에서 남이장군의 전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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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여행에서 법흥사 칠층전탑과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동부동 오층 전탑을 보고 왔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번 여행길이 딱 그 짝입니다. 안동 여행길에 꼭 찾아가고 싶었던 게 국보 제16호인 법흥사지 칠층 전탑입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크다는 법흥사지 칠층전탑은 지금 위장막을 치고 복원공사 중이었습니다.



 




기존의 탑과는 완전 다른 형태의 전탑입니다. 신라시대부터 탑이라면 보통 화강암으로 깎아 쌓아 올린 석탑 등으로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만 . 붉은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전탑은 부산 쪽에서는 그리 흔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벽돌을 쌓아 탑의 형태를 갖춘 법흥사지 칠층전탑은 그 높이만 해도 16.8m, 기단 폭은 7.75m로 어마어마하여 국내의 석탑중 경주 감은사지의 석탑인 쌍탑보다도 더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탑이 남아 있는 곳이 법흥동으로 이는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의 전탑으로 추정합니다. 전탑의 방식을 보면 단층기단에 칠층인 몸돌은 차츰 크기를 줄여가며 쌓아 올렸고 법흥사터에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과 철도가 놓여 있습니다. 법흥사지 칠층 전탑은 새로운 모습으로 복원이 되면 그때 다시 찾아보기로 하고 고성이씨 탑동파종택을 담 넘어 보았습니다.


 

 




이곳도 현재는 공사 중이였는데 안동시 법흥동에 있습니다. 고성이씨 후손들이 생활하고 있어 집안으로는 들어 갈 수 없다는 점이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고성이씨 탑동파종택은 중요민속자료 제185호로 고택 뒤로는 야산이 둘러쳐져 있고 집앞으로 법흥사 칠층전탑이 담에 가깝게 붙어 있는 모습입니다.


 

 



1704년 조선 숙종 30년 좌승지였던 이후식이 법흥사 터였던 이곳에 지었고 북정은 영조 51년(1775년)에 그의 후손 이종주가 지었다합니다. 종택의 규모를 보면 솟을대문채, 사랑채, 안채, 정자와 연못 등을 갖추고 후에 방앗간채, 사랑채, 외양간채가 추가로 지어졌습니다.


 

 




안채는 정면8칸에 측면6칸으로 자연석 축대위에 세웠으며 동쪽에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은 배산임수를 잘 조화시킨 전형적인 사대부 저택으로 현재에도 잘 보존과 관리가 되고 있습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국보인 법흥사지 칠층 전탑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 안동역 옆으로 이동을 하여 보물 제56호인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을 보았습니다. 동부동 오층전탑은 안동역과 접하고 주위의 도심화로 인해 더욱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탑으로 6.25 한국전쟁으로 일부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고 1962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을 하였습니다. 오층전탑이 있는 이곳은 법림사 터로 전하는데 전탑 옆 당간지주가 남아 있어 이를 뒷받침해 줍니다.


 

 




 



탑의 높이는 8.35m, 탑신부 길이는 27.5cm, 넓이 12.5cm, 두께 6cm로 무늬가 없는 벽돌로 길고 짧음이 어긋나게 5층으로 쌓았습니다. 오층 전탑은 월래 7층으로 법흥사 칠층전탑과 같이 금동제의 상륜부가 있었다하며 불상을 모시는 감실이 각층에 형식적으로 설치되었고 2층 남쪽면에는 인왕상 2구를 조각한 판석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탑이 세워진 뒤 여러번 수리를 하면서 원형이 변형되었고 외관도 많이 손상되었다합니다.


 

 




오층전탑과 함께 남아 있는 안동 운흥동 당간지주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0호이며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로 높이가 260cm입니다. 당간지주는 절에서 불기, 괘불을 거는 깃대를 고정시키는 돌기둥이며 보통 대웅전 앞에 세워져 있습니다. 위부분은 6.25 한국전쟁 때 파손되었고 당간을 받치던 둥근 주좌돌이 당간지주 사이에 남아 있습니다. 무늬등이 없는 것으로 간결하고 소박한 모양이며 동부동의 오층전탑과 함께 법림사와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2014/04/13 - (경북맛집/안동맛집)안동하회마을 맛집 간고등어 일직식당. 한국인의 밥상 최불암도 먹고 갔다는 안동간고등어 일직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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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거제도여행)거제도 최고의 숙박지 애드미럴호텔. 환상의 섬 거제도에 환상의 숙박지는 애드미럴호텔.


거제도는 한려수도해상국립공원에서 속하며 가장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여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봄이면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습니다. 천혜의 해안경관과 인프라를 구축하여 남해 관광의 1번지로 우뚝 서 있는 거제도, 이곳을 환상의 섬 거제도라 부릅니다.



 




어디서 오든 거제도 여행은 짧기만 합니다. 그 만큼 여행의 재미를 느낄 수 있고 볼거리가 많아 당일 여행은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입니다. 대표적인 관광지만 해도 거제8경인 외도 보타니아, 거제 해금강, 바람의 언덕과 신선대, 학동 몽돌해변, 여차에서 홍포까지의 비경,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구조라와 명사해수욕장, 칠천량 해전공원, 공곶이, 동백섬으로 유명한 지심도, 청마유치환 생가, 김영삼 전대통령 생가등 나열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또한 거제11명산은 계룡산과 선자산, 망산, 산방산, 노자산 가라산등 전국의 산꾼을 불러 모우고 있습니다. 필자 일행도 산이면 산, 관광지면 관광지등 찾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자주 가는 거제도에 숙박은 항상 대우조선의 애드미럴 호텔에서 합니다. 거제도에 있는 특급호텔로 최고의 시설이 갖추어 있습니다.



 




애드미럴 호텔의 시작은 1982년 개관을 하였습니다. 개관당시에는 조선경기의 호황으로 거제도에 있는 대우조선에는 많은 내.외국인 바이어와 기술자가 찾았고 이분들을 고객으로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분들에게 내 집같이 편안하고 안락한 휴식공간을 제공하며 시작하여 지금은 거제도 제일의 호텔이 되었습니다. 특히 부부가 아닌 동성 여행객에게도 너무 편안 애드미럴 호텔. 비즈니스식인 1인용 침대가 설치되어 있어 우리 일행은 쌍수를 들어 환영을 하였습니다. 여행객이 모두 남자들이라 ㅎ ㅎ



 




특히 애드미럴 호텔은 아침식사가 끝내줍니다. 뷔페식으로 이루어진 아침식사는 건강식으로 밥이면 밥, 요즘 젊은 층에 인기 있는 아침식사대용으로 건과류와 곡물 포스트, 야채등 다이어트를 선호하는 분들에게도 너무 좋은 아침 식단이 갖추어져 있어 먹고 즐길 수 있습니다.



 




거제도 여행에서 너무 좋은 숙박지 특급호텔 애드미럴 호텔에서 푹 쉬고 다음 여행지로 출발합니다. 거제도에서 즐거운 여행하고 오세요


 

 


 




 




 




 




 




 




 




 




 




 




 




 




 




 




 




 




 




 




 




 




 




 




 




 




 




 




 




 




 




 




 



거제도 숙박지 애드미럴 호텔 영업정보

★상호:(주)웰리브 애드미럴호텔

★주소:경상남도 거제시 사건도길 16 (옥포동)

★예약전화;055-687-3761~5

★객실수 129실

★주차 110대



 

거제포로수용소유적공원



 

거제 해금강



 


외도 보타니아


 


칠천량 해전 유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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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영양여행)영양 선바위 관광지. 영양군 최고의 관광지 남이포 선바위에서 남이장군의 전설을 만나다.


일자봉과 월자봉이 있는 일월산은 영양군의 진산입니다. 이곳에는 반변천의 발원지 뿌리샘이 있습니다. 뿌리샘은 영양읍과 선바위가 있는 남이포를 거쳐 낙동강으로 합류하는데 그 길이만도 106km입니다.



 

 

 

당연히 반변천 최고의 경관지는 입암면 연당리에 있는 입암으로 불리는 선바위와 남이포입니다. 서쪽의 청계천이 합류하는 남이포에 영양군에서는 이곳을 선바위 관광지로 산촌생활박물관, 농산물직판장, 석문교, 효공원, 동굴형민물고기전시관등을 조성하였습니다.



 

 

 

남이포와 선바위는 남이장군의 설화가 있습니다. 남이장군은 조선 세조때 이곳에서 역모를 일으킨 반란군을 평정하였다는 곳으로 영양군지지를 보면은 자양산 끝인 자금병과 함께 석문이라 하였고 입암, 신선바위, 선바위로도 불렀습니다.


 

 

 

 

운룡지에 지룡의 아들인 아룡과 자룡 형제는 역모를 꾀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남이장군를 출정 시켜 반란군을 진압하게 하였고 남이 장군은 다시 반란이 일어날 것을 막기 위해 차고 있던 칼로 산맥을 잘라 물길을 돌려 버리는데 이곳이 남이포입니다.



 

 

 

반변천 건너에서 바라보는 선바위는 남이장군이 칼로 산맥의 기운을 끊었던 흔적인 틈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청계천이 만나는 모서리에 정자인 남이정이 있습니다.



 

 

 

그 뒤 천길 단애의 절벽이 브이(V)자를 그리며 예리하게 두부가 잘려 나간 것 같이 뚝 잘려 나간 모습을 보고 있으면 믿을 수 없는 설화지만 역모를 꾀한 용의 전설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양군에서는 남이포의 선바위를 두고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인 '쌍계입암'의 실제 모델이라 합니다.

 



 

 

 

 

영양여행에서 꼭 가보고 싶은 남이포와 선바위, 그리고 이웃한 연당리에 조선시대 3대 민가 정원인 정영방의서석지가 있습니다. 상서로운 돌마다 이름이 있다는 아름다운 정원 서석지와 함께 영양에서 즐거운 여행을 하였습니다.



 

 

 

 

 

 

 

 

 

 

 

 

 

 

 

 

 

 

 

 

 

 

 

 

 

 

 

 

 

 

 

 

 

 

 

 

 

 

 

 

 

 

 

 

 

 

 

 

 

 

 

입암으로 불리는 선바위

 

 

 

청계천과 반변천이 만나는 남이포 전경

 

 

 

 

 

 

 



조선시대 3대 민가 정원 서석지


 







2014/05/08 - (경북여행/영양여행)육지속의 섬이라는 경북영양 1박2일 여행에서 여중군자 장계향의 음식디미방과 청록파 시인 조지훈을 만나다.


2014/05/11 - (경북맛집/영양맛집)두들마을 맛집 음식디미방체험관, 조선 양반가의 특이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장계향의 음식디미방.


2014/05/13 - (경북여행/영양여행)영양 서석지. 조선시대 민가 3대 정원중 하나인 영양의 서석지의 아름다움을 보고 왔습니다. 경정과 서석지


2014/05/16 - (경북여행/영양여행)한글최초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을 보고 만들어 본 석류탕. 음식디미방 석류탕 체험


2014/05/17 - (경북여행/영양여행)석천서당. 올곧은 선비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두들마을 석계 이시명 의 석천서당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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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동해의 꽃으로 부르는 경주 양남 부채꼴 주상절리.독특한 경주주상절리를 보면서 누구나 감탄하게 됩니다.


경상북도 양남면 하서리에는 나룻배가 건너 다녔다하여 진리로 부르는 마을이 있으며 현재는 이곳에 하서항이 있습니다. 법정동명은 하서4리로 신라 17대 내물왕 때 밤나무가 너무 많은 포구라 하여 율포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신기하게도 마을로 들어오는 진입로가 없어 하서에서 배를 타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지금은 이곳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부채꼴 주상절리가 있어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찾는 명승지가 되었습니다. 누워있는 주상절리, 위로솟은주상절리, 기울어진 주상절리, 부채꼴 주상절리등 주상절리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이곳에는 주상절리 조망공원도 조성되어 있습니다.






주상절리는 뜨거운 용암이 빠르게 식으면서 만들어진 구조이며 주상절리의 생성은 지하에 있던 뜨거운 마그마가 지각의 약한 부분을 뚫고 표면으로 분출되어 식거나 지면의 갈라진 틈 등을 따라 흐르다가 식으면서 만들어지는 현상입니다.






동해안은 신생기 말기에 현무암질 용암이 광범위하게 분출된 지역임을 암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경주 양남면 주상절리는 5각 또는 6각형의 돌기둥이 수평으로 발달해 있는데 흡사 장작을 쌓아 놓은 모습을 한 누워있는 주상절리와 신생대 말기에 분출된 현무암 용암이 냉각되면서 수많은 세월을 풍화와 침식을 거치며 5~6각형의 기둥으로 모습이 나타나 위로 솟는 주상절리, 기우러진 주상절리등 다양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경주주상절리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부채꽃 주상절리가 가장 인기가 있습니다. 이곳에 분출된 현무암질 용암은 수직방향이 아닌 수평방향의 주상절리가 마치 부챗살과 같은 모습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경주 부채꼴 주상절리를 한송이 해국이 바다위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핀 것 같아 ‘동해의 꽃’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경주양남면 주상절리의 부채꼴 모양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희귀한 현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독특한 모양의 주상절리로 천연기념물 제536호로 지정되어 경주시에서는 이곳을 주상절리 야외박물관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읍천항을 끼고는 경주주상절리와 읍천항 벽화마을, 양북면과 감포읍의 문무대왕수중릉, 이견대, 감은사지등과 연계하여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기에 너무 좋은 여행지입니다.



 




이곳은 kbs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 촬영지로 이곳에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담아내며 사극드라마의 재미를 더욱 느끼게 하였습니다.


























































































2014/05/21 - (경주여행/감은사지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여행) 호국용 문무대왕의 혼이 깃든 경주 감은사지 이견대 대왕암 이른 봄여행


2014/05/24 - (경북여행/경주여행)그림이 있는 어촌마을 읍천항 갤러리. 읍천벽화마을 나드리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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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그림이 있는 어촌마을 읍천항 갤러리. 읍천벽화마을 나드리 좋아요.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읍천항은 한때 조용한 포구로 동해안을 드라이버하는 사람들이 가끔 들르는 곳이었습니다. 이웃한 경주 주상절리가 열리고 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게 되면서 이제는 동해안의 1번지의 관광지로 탈바꿈하였습니다. 


 



읍천항과 이웃한 곳에는 월성원자력 발전소가 있고 그 사이에 있는 읍천항. 읍천항은 “아름다운 지역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월성 원자력본부에서 벽화마을을 조성하였습니다. 읍천항의 벽화마을은 전국의 내노라하는 작가분에서부터 그림을 전공하는 분까지 다양한 분들이 모여 작품을 뽐내었고 항구의 모습과 어릴적 추억이 꿈틀거리는 벽화들로 가득합니다.





읍천의 유래를 보면 신라시대때부터 어업 중심항구로 이곳 인근에서 자연부락으로 가장 큰 마을을 형성하였습니다. 읍내, 읍냇개, 읍내포라고 부르던 것이 읍천, 읍천포라 부르게 되었으며 월성원자력이 이곳에 들어오면서 읍천마을은 아마 많은 위축이 된 것 같습니다.





현재의 읍천항은 살아 있는 벽화들로 인해 활기를 되찾고 있습니다. '◆◆그림이 있는 어촌마을 읍천항 갤러리'란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시작된 벽화마을 읍천항, 이번 주말 아이들과 함께 경주 주상절리의 둘레길이자 해파랑길인 파도소리를 걸어보고 철썩이는 파도와 함께 멋진 그림을 감상해 보세요. 



 



독특한 기둥모양의 주상절리가 ‘동해의 꽃’으로 변화한 모습은 대한민국의 신비일 정도로 독특한 모습입니다. 월성원자력을 지나 양북과 감포에 걸쳐있는 문무대왕의 수중릉과 신라31대 신문왕이 동해의 용에게서 만파식적을 받았던 이견대, 왜구로부터 신라를 지키기 위해 동해의 용으로 변한 문무대왕이 몸을 쉬게 하였던 감은사지등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이곳은 가족 나들이를 하기에 너무 좋은 곳입니다.








그림이 있는 어촌마을 읍천항 갤러리 읍천항 둘러보기






































































































































 




2014/05/21 - (경주여행/감은사지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여행) 호국용 문무대왕의 혼이 깃든 경주 감은사지 이견대 대왕암 이른 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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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여행/감은사지 이견대 문무대왕수중릉 여행) 호국용 문무대왕의 혼이 깃든 경주 감은사지 이견대 대왕암 여행.


경주는 노천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많은 신라시대의 불교유적이 있습니다. 경주 남산을 위시한 경주 시내에 수 없이 많은 문화재를 보면서 신라인의 예술성과 믿을 수 밖에 없는 전설 등을 듣고 있노라면 그 속으로 자연히 빨려 들어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만큼 흥미 진지한 이야기가 있는 신라의 서라벌  속으로 달려가 봅니다.



 

 

 

이번 경주 여행은 양북면과 감포읍에 있는 문무대왕 전설의 감은사와 이견대, 문무대왕릉의 대왕암을 찾아 갔습니다. 고향이 경주라 자주는 가 보질 못하지만 그래도 여러 번 가보았던 곳이며 학창 시절 때 한번쯤 들었던 호국용 이야기와 만파식적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먼저 토함산의 추령고개(지금은 추령터널을 지나면 금방임)를 넘어 쏜살같이 내려가면 일렁이는 동해 바다가 펼쳐집니다. 바다에 닿기 전 왼쪽으로 웅장한 쌍탑이 있는곳이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의 감은사지입니다.



 

 

 

감은사지는 문무대왕이 죽어 호국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는 곳입니다.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굴복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은 언제나 바다 건너 왜구가 걱정이었습니다. 왜구와 가까운 위치에 있던 남해안과 동해안의 경주와 울산에는 왜구의 잦은 출몰로 백성들의 핍박이 심해 부처님의 원력으로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문무왕은 감은사를 짓습니다.


 

 

 

 

문무대왕은 절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자 그의 아들인 31대 신문왕이 부왕의 유업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며 ‘아버지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인 ‘감은사’로 이름 하였습니다. 현재 감은사지는 동탑과 서탑이 세워져 있으며 옛 절터의 흔적인 금당 터가 남아 있습니다.


 

 

 

 

금당터 아래는 움푹 파여진 모습이며 이곳으로 동해의 용으로 화한 문무대왕이 대종천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서 몸을 쉬게 하였다는 곳입니다. 1959년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는데 금당의 바닥구조는 마치 바위를 깎아 마루를 깔듯이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어 문무왕의 전설이 더욱 신빙성을 갖게 합니다.



 

 

 

금당 앞의 쌍탑을 보겠습니다. 국보 제 112호 지정된 감은사지 동서 3층석탑은 682년 신문왕 2년에 창건된 감은사의 부속 석탑입니다. 창건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탑으로 높이는 13.4m에 이중 기단 위에 몸체돌을 세우고 처마 밑은 직각으로 꺾어 5단의 계단식 받침이 층단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지붕돌 위는 곡면을 이루어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은사지 동서 3층 석탑의 특징은 하나의 큰돌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닌 수십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점이며.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서탑을 해체복원하였고 1996년에는 동탑을 해체하여 복원하였습니다. 그 때 동서 탑에서 금동제 사리함과 사리가 들어 있는 수정 사리병이 발견되었습니다.



 

 

 

 

 

 

 

 

 

 

 

 

 

 

 

 

 

 

 

 

 

 

 

 

 

 

 

 

 

 

 

 

 

 

 

 

 

 

 

 

 

 

 

 

 

 

 

 

 

 

 

 

 

 

 

 

 

 

 

 

 

 

 

 

 

 

 

 

 

 

 

 

감포읍 대본리에는 이견대가 있습니다. 신라 문무왕이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다며 수중릉을 만들었던 대왕암을 볼 수 있는 정자입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신문왕은 호국용이 된 부왕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를 완공하였고 이견대는 바다에 나타난 용을 보고 나라에 큰 이익을 얻었다는 곳으로 신문왕은 이견대에서 문무왕과 김유신이 보냈다는 대나무로 만든 피리인 만파식적를 받았던 곳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이견대는 중국의 주역인 ‘비룡재천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에서 글귀를 빌려 “큰 용이 바다에 있는 것을 보았다”다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문왕이 문무왕을 생각하며 세웠던 이견대는 없어졌지만 현재의 이견대에 세워진 정자는 1970년에 발굴하여 건물지를 확인하고 1979년에 신라의 건축 양식을 추정하여 세웠던 정자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에는 해안과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암초가 있습니다. 옛날부터 대왕암, 문무대왕 수중릉이라 불렀습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을 모신 곳으로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군주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왕암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들었는데 현재도 알 수 있듯이 동서남북으로 네 군대 인공수로가 있습니다. 물은 동쪽으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하여 항상 수면이 잔잔하게 유지가 됩니다. 그 속에 길이 3.7m, 폭 2.06m의 거북모양의 돌로 만든 덮 게가 놓여 있고 그 안에 문무대왕의 유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알기 위해 이곳 대왕암 발굴 계획을 세웠다가 곧 철수를 하였다 합니다. 조사를 하면 대왕암이 문무대왕릉의 전설이 맞다, 아니다는 금방 알 수 있겠지만 모든 진실을 꼭 밝혀내는 것보다도 국민의 가슴속에 각인되어 있는 위대한 문무대왕의 큰 뜻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참고:신라사람들 ‘동해지역 문화유적 답사 자료집’ http://www.isill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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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영양여행)석천서당. 올곧은 선비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두들마을 석계 이시명 의 석천서당을 가다.


영양의 산골 언덕에 형성된 마을이 있습니다. 두들마을이라 불립니다. 이는 재령이씨 석계 이시명(1590~1670) 선생이 개척한 마을로 선생의 자는 화숙이며 호는 석계입니다. 그의 부친은 운악 이함으로 1590년 영해부 인양리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612년 진사시에 합격을 하지만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의 예를 갖추는 삼전도의 치욕적인 굴욕을 통탄하며 선생은 영해의 나랏골에서 영양의 석보로 옮겨와 석계초당을 짓고 네 아들과 함께 은둔하며 속세를 등집니다.



 



또한 1653년에 선생은 세상에 더 이상 나오지 않을 요령으로 일월산 수비 골짜기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를 보다 못한 부인 장계향이 권유를 하여 처갓집 인근인 안동 풍산읍에 거처를 정하여 명나라의 이름을 따 대명동이라 이름 짓고 후학 양성에 매진합니다.



 



장인 경당 장흥효(1564~1633)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퇴계 이황과 학봉 김성일의 학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석계 이시명 선생은 처사의 삶을 사는 올곧은 장인 장흥효처럼 벼슬길에 연연하지 않는 강직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두들마을의 석계초당은 이시명 사후에 그의 넷째 아들인 이항재가 두들마을에서 부친의 유업을 이었고 그가 죽자 자손들이 영조46년인 1770년에 석계초당을 중건하고 그 이듬해 완공하여 석천서당으로 고쳐불렀습니다.


 

 



순조31년인 1831년에 후손들과 지역 유림이 힘을 합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였고 고종28년인 1891년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서당고에는 ‘석계선생운집’ ‘항재선재운집’ ‘영천집’등 목판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석천서당은 두들산을 배산으로 한 경사진 언덕에 남서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서당 주위로 방형의 토석 담장을 둘렀고 오른쪽으로 3칸의 출입문을 내었습니다. 건물은 정면 4칸에 측면2칸으로 팔작지붕이며 좌우 1칸은 온돌이 들어간 큰 방을 달아 내고 가운데 2칸은 큰 마루를 깔았습니다.



 



건물의 정면과 좌우에는 2자의 쪽마루를 달아 평난간을 둘렀고 좌우의 방에서 마루로 향하게 한 창호의 모습이 특이합니다. 석천서당의 툇마을에 앉아 있노라니 낭낭한 학동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머리를 들고 담장 밖을 내려다보면 마을 앞을 흐르는 화매천과 영덕군 지품면으로 이어지는 911번 지방도, 농부의 바쁜 손놀림이 봄이 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318, 

문화재자료 제79호



 




 




 




 




 




 




 




 




 





 







2014/05/08 - (경북여행/영양여행)육지속의 섬이라는 경북영양 1박2일 여행에서 여중군자 장계향의 음식디미방과 청록파 시인 조지훈을 만나다.


2014/05/11 - (경북맛집/영양맛집)두들마을 맛집 음식디미방체험관, 조선 양반가의 특이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장계향의 음식디미방.


2014/05/13 - (경북여행/영양여행)영양 서석지. 조선시대 민가 3대 정원중 하나인 영양의 서석지의 아름다움을 보고 왔습니다. 경정과 서석지


2014/05/16 - (경북여행/영양여행)한글최초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을 보고 만들어 본 석류탕. 음식디미방 석류탕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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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영양여행)한글최초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을 보고 만들어 본 석류탕.

340여년전 조선 중기의 음식 맛은 과연 어떤 맛일까 궁금합니다. 여중군자 장계향의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은 ‘음식의 맛을 내는 방문’의 뜻으로 이 책안에 조선시대 양반가의 음식 조리법이 그대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장계향이 19세에 석계 이시명에게 시집 온 후 줄곧 경북영양의 두들마을에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두들마을은 조선시대 광제원이 있던 자리로 언덕위에 원이 있던 마을이란 뜻의 원두들, 원리라 부르고 있습니다. 실제 이곳 두들마을을 방문해본 필자의 눈으로도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언덕위에 그림 같이 앉아 있어 내려다보는 경관은 그 어느 곳과 비교하여도 멋들어진 모습입니다.

 

 

 

 

 

이곳의 시계는 1600년대 장계향선생의 음식디미방을 집필하던 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 온 느낌입니다. 음식디미방 체험관, 음식디미방 교육관, 음식디미방 전시관, 장계향 선생 예절관 등 고래등 같은 건물이 세워져 있고 재령이씨의 고가들이 더해진 모습에 흡사 조선시대 양반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일행은 이곳의 음식디미방 교육관에서 음식디미방 체험프로그램 중 석류탕을 직접 만들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음식디미방에 기록된 여러 음식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보고 시식도 할 수 있는 전통음식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어 영양군 문화관광과(전화 054-682-7764)에 신청을 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음식디미방은 장계향 선생이 일흔이 넘은 나이에 쓴 현존하는 최초, 최고의 한글 조리서입니다. 언문으로 쓴 것은 재령이씨의 부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읽도록 하기 위함이며 전통 음식의 지침서로서 가문의 전통을 잇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이 음식디미방에 담겨 있습니다.

 

 

 

 

 

음식디미방에는146항목의 음식 조리법과 조리기구를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고 또한 술을 만드는 방법이 51항목으로 그 당시 양반가의 손님 접대가 상당한 비중이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음식디미방을 기초로 만드는 음식 만들기 체험은 석류탕과 빈자법, 석이편법, 잡과편법중에서 석류탕에 도전을 하였습니다. 얼핏 들어서 재료에 석류가 들어가나 싶겠지만 석류는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만두 같이 빚어내는데 석류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석류탕으로 부릅니다.

 

 

 

 

 

석류탕의 재료를 보면은 꿩고기 또는 닭이나 기름진 고기와 무, 미나리, 두부, 표고버섯, 석이버섯, 잣가루, 밀가루등이 체험관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먼저 만두에 들어가는 소를 만들어야 합니다. 고기를 잘게 썰어 다지듯이 두드립니다.

 

 

 

 

 

무, 미나리, 두부, 표고버섯, 석이버섯을 잘게 썰어 두드린 다음 기름장에 후춧가루를 넣고 후라이팬에 고기와 달달 볶아주면 석류탕의 만두 소가 완성 됩니다. 이제 석류탕의 만두피를 만들어야 합니다. 밀가루를 가는 체에 친 다음 물로 반죽을 합니다.

 

 

완성된 석류탕. 음식디비방의 조리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적당히 달구어진 후라이팬에 1~2스푼 정도 반죽한 밀가루를 올려 스푼으로 돌려 피를 얇게 만듭니다. 지진 피에 만두 소와 잣가루를 함께 넣은 뒤 손으로 작은 석류 모양으로 만들어 주면 석류탕의 만두는 완성됩니다.

 

 

여중군자 장계향 흉상

 

 

 

재령이씨 집안에서 내려오는 반가 음식인 석류탕은 육수에 고기가 들어간 석류 모양의 만두로 종가를 찾아오는 손님들의 접대 음식으로 많이 이용이 되었다 합니다. 직접 고기도 다지고 밀가루도 불에 지지보며 직접 손으로 석류 모양의 만두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음식디미방 조리서를 재령이씨 석계종파 종부께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장계향 음식디미방 조리책을 이용하며 남든 음식 정부인상은 이곳 체험관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조금은 서툴고 피가 얇아 옆구리도 터지고 하였지만 열심히 만들어 너무 좋은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장계향 음식디미방 체험관에서 너무 즐거운 석류탕 체험과 맛도 보고 하였습니다. 하 하 세계 유명 호텔의 쟁쟁한 요리사는 모두 남자라는데 이 길로 함 나셔 볼까요.

 

 

 

 

 

 

 

 

 

 

 

 

 

 


 


음식디미방 홈페이지 캡쳐


 

 

 


 

2014/05/13 - (경북여행/영양여행)영양 서석지. 조선시대 민가 3대 정원중 하나인 영양의 서석지의 아름다움을 보고 왔습니다. 경정과 서석지


2014/05/11 - (경북맛집/영양맛집)두들마을 맛집 음식디미방체험관, 조선 양반가의 특이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장계향의 음식디미방.


2014/05/08 - (경북여행/영양여행)육지속의 섬이라는 경북영양 1박2일 여행에서 여중군자 장계향의 음식디미방과 청록파 시인 조지훈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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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영양여행)영양 서석지. 조선시대 민가 3대 정원중 하나인 영양의 서석지의 아름다움을 보고 왔습니다. 


조선시대 3대 정원으로 불리는 아름다운 정원이 현재 남아 있습니다. 담양의 소쇄원과 보길도 세연정 그리고 영양의 서석지입니다. 필자는 담양 소쇄원과 보길도 세연정을 가보았는데 영양의 서석지는 좀체 볼 기회를 찾지 못하다가 이번에 영양을 1박2일 여행 하면서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왔습니다. 막 은행나무 고목에 물이 올라 초록색으로 옷을 갈아 입고 있었습니다.

 

 

 

 

 

봄의 서석지도 좋지만 은행나무에 노란 단풍잎이 물드는 대구의 도동서원처럼 가을의 서석지도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서석지는 석문 정영방 선생이 1636년 영양의 입암으로 이주하여 서석지와 경정, 주일재, 운서헌, 유종정을 짓고 인근의 석계 이시명, 조전, 조임과 교류를 하였던 별서입니다.

 

 

 

 

 

 

 

 

그럼 정영방 선생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선생은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에서 1577년(선조10년) 출생하여 5세때 5촌 당숙이었던 정조의 양자가 되어 안동의 송천으로 옮겨갑니다. 그 후 상주 우산에 거처하던 우복 정경세의 제자가 되어 학문을 갈고 닦아 1605년인 선조38년에 진사시에 오르게 됩니다.

 

 

 

 

 

스승 정경세가 조정에 천거하지만 광해군 때 어지러운 정국에 회의를 느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낙향하여 산림거사를 자처하며 초야에 묻혀 학문연구로 일생을 보냅니다.

 

 

 

 

 

 

경정앞에 만든 연못인 서석지에서 이곳의 연당마을 지명이 유래되었고 정영방선생은 마을 주변에서 찾은 아흔개의 작은 바위를 연못 안에 배치 하였습니다. 암석 하나하나 마다 이름을 지어 시를 짓는 것이 바위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작업이였고 그 자체가 경정과 함께 한폭의 산수화였습니다. 선생은 연못안의 암석이 흰빛을 띤 상스러운 돌이란 뜻으로 서석이라 하였습니다

 

 

 

 

 

인공으로 만든 연못인 서석지 주위로 경정과 주일재를 두고 있습니다. 주일재 앞에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를 심어 조선시대 꼿꼿한 선비 정신을 나타내는 사우단을 만들어 경정에 앉아 서석지를 바라보며 항상 마음을 갈고 닦았을 것 같습니다. 

  

 

 

 

서석지는 가로가 13.4m 세로가 11.2m 에 높이는 1.3~1.7m의 크기로 모양은 요(凹)자형 입니다. 연못안에 상운석등 평소 물위에 드러낸 것이 60여개고 침수 된 돌이 30개로 물이 읍청거에서 유입되어 토예거로 나가는 양을 일정하게 유지하게하여 넘치는 법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선비의 정신이 아닌지요. 조선시대 민가의 3대 정원인 서석지에 연꽃이 필때 쯤 경정에 앉아 시원하게 여름을 나고 싶습니다.

 





 

 

 


 

 

 

 

 

 

 

 

 

 

 

 

 

 

 

 

 

 

 

 

 

 

 

 

 

 

 

 

 

 

 

 

 

 

 

 

 

 

 

 

 

 

 

 

 

 

 

 

 

 

 

 

 

 

 

 

 

 

 

 

 

 

 

 

 

 

 

 

 

 

 

 

 

 

 

 

 

 

 

 

 

 


 



조선시대 민가 3대 정원 완도 보길도 세연정

 




조선시대 민가 3대 정원 담양 소쇄원


 






2014/05/08 - (경북여행/영양여행)육지속의 섬이라는 경북영양 1박2일 여행에서 여중군자 장계향의 음식디미방과 청록파 시인 조지훈을 만나다.


2014/05/11 - (경북맛집/영양맛집)두들마을 맛집 음식디미방체험관, 조선 양반가의 특이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장계향의 음식디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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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영양여행)육지속의 섬이라는 경북영양 1박2일 여행에서 여중군자 장계향의 음식디미방과 청록파 시인 조지훈을 만나다.


1년쯤 되었을까? 우연한 기회에 장계향과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에 관한 책을 읽다가 책장을 접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조선 여인 장계향에 관한 음식 조리서와 김유의 ‘수운잡방’의 내용을 저술한 책으로 ‘선비의 멋 규방의 맛’으로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실 기획으로 이숙인외 4명의 공저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잊고 있다가 지난 주 영양군에 1박 2일 여행을 가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장계향의 음식디미방 조리서에 나오는 음식을 직접 체험도 하고 고가 체험도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연락을 받고 사실 많이 망설였습니다.


 



경북영양은 아시는 분들 사이에서는 육지 속의 섬이라 할 정도 교통의 오지에 속합니다. 요즘 도로의 발달로 거미줄처럼 나 있는 고속도로에서도 1시간을 더 달려가야만 진입할 수 있는 영양군, 그러나 여중군자 장계향선생을 알 수 있는 기회다 싶어 찾아간 영양군 장계향의 두들마을, 긴 버스여행에 지친 마음을 가지고 조금은 늦은 점심을 먹기로 하였습니다.








두들마을의 57횟집(054-683-8057)에 미리 전화를 해둔 터라 정식을 먹었는데 이곳의 차려 진 채소는 모두 이곳 영양이 원산지라 믿고 먹을 수 있다합니다. 단 이곳은 미리 예약을 해야만 음식을 드실 수 있습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두들마을을 먼저 둘러 보기로 하였습니다.









두들마을은 석계고택, 석천서당, 이원박고택, 유우당 등의 고택과 여중군자 장계향 예절관, 음식디미방체험관, 교육관, 전시관등이 있습니다. 이곳은 우리들도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영웅시대’등의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이며 종가집입니다.






그의 광산 문학관(054-682-8123)과 북카페도 이곳에 세워져 이문열 선생의 집필실로 사용됩니다. 이문열의 ‘선택’은 장계향선생이 주인공이며 장계향의 넷째 아들인 항재 이승일의 12대 손이라 합니다.


 















그럼 먼저 여중군자 장계향은 어떤 분인지 궁금합니다. 70세가 넘어 최초의 한글 조리서를 집필한 분으로 남아 있는 한글조리서중 가장 오래된 책입니다. 장계향은 경북 안동의 서후면 경당 장흥효(1564~1633)의 외동딸로 영해 인량리에 살던 부친의 제자 석계 이시명(1590~1674)에게 19세에 출가를 합니다.









전처소생의 자식을 합해 10명의 자녀를 모두 훌륭하게 키워냈습니다. 장계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조판서등 모두 벼슬길로 나아간 아들 7형제를 ‘칠현자’로 부르며 그의 어머니 장계향을 여중군자로 남자도 받기 힘든 군자의 칭호를 받을 정도로 군자로서 덕을 갖춘 여성이라 칭송을 하고 있습니다.





음식디미방의 뜻은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으로 풀이되며 표지 2장을 합해 30장이며 총 146종류의 음식을 수록하였습니다. 면과 떡이 18종, 생선과 고기 74종, 주류 및 초류인 식초가 54종으로 일상생활에서 먹는음식의 재료와 조리법, 보관법을 상세히 기록하여 조선후기 반가음식의 특성을 잘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먼저 ‘음식디미방 전통주 체험관’에서 칠일주를 빚었습니다. 막걸리로 발효과정이 7일이라는 7일주도 만들어 보고 음식디미방 체험관에서는 저녁을 겸한 장계향의 음식디미방 요리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전통 음식 체험 메뉴는 소부상(3만원)과 정부인상(5만원)으로 필자 일행은 정부인상을 체험하였습니다. 전채로는 감향주와 도토리죽(단호박죽)이 나왔고 숟가락으로 퍼먹는 술인 감향주는 이곳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전채가 나오고 나면 주요리가 나옵니다.


 




음식디미방에 소개된 방식으로 요리한 잡채, 어만두, 동아누르미, 연근채, 화전, 빈자법, 수증계, 대구껍질누르미, 가제육이 나오고 밥을 포함한 식사류 한상차림이 준비됩니다. 식사를 끝내면 후식으로 석이편, 오미자화채가 나왔습니다.






장계향의 음식디미방 요리의 재료는 무공해 청정지역의 신선한 야채와 해물, 화학조미료를 배제한 우리몸에 이로운 재료들로 모든 음식 준비를 합니다. 음식디미방 체험(체험문의 054-682-7764)을 원하실 때는 3일전에 미리 예약을 하여야만 됩니다.






음식 재료준비를 위해 필요하며 10인 이상이면 가능합니다. 한팀이 10명이 아닌 예약손님이 10명을 넘어 면 준비가 된다합니다. 요즘 같은 주말에는 예약 손님이 넘쳐 언제든지 체험을 할 수 있다 합니다.






요리 체험을 하고 난뒤 장계향 예절관에서 장계향 선생에 대한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필자 일행은 이원박 고택에서 고택 체험을 하고 다음날 아침은 전날 점심을 먹었던 57횟집에서 먹었습니다.






이번에는 음식디미방 교육관에서 시연 및 실습을 받았습니다. 실습 메뉴는 석류탕이며 일종의 만두입니다. 만두소는 꿩고기, 닭고기 혹은 기름진 고기를 다지고 무, 미나리, 두부, 표고와 석이버섯, 잣가루를 볶은 다음 만두피에 넣고 만두의 모양이 작은 석류를 닮게 만들어 맑은 장국에 안쳐 한그릇에 3~4개씩 담아 술안주로 쓴다고 합니다. 시연과 실습을 마치고 주실마을의 청록파 조지훈 생가로 갔습니다.






영양에 조지훈선생의 생가가 있는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생가인 호은종택이 ‘경북도 기념물 제78호’로 종택 앞에 봉우리가 붓끝 모양인 문필봉과 연적봉이 있고 이곳에 물을 대는 골짜기가 있어 주실마을은 연적에 먹과 글이 마를 날이 없다합니다. 그 덕분인지 주실마을은 학자가 많이 나오는 곳으로 현재 박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마을이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된 주실숲에서 조지훈의 서정적인 시심이 탄생한 것은 아닌지 이곳 주실마을에는 지훈문학관과 조지훈 시비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어디선가 조지훈의 대표 시인 ‘승무’가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





주실마을을 뒤로하고 영양 산촌생활박물관을 갔습니다. 경북 영양의 산간지역 생활상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전시한 박물관으로 많은 볼거리가 있으며 무속인들 사이에는 황씨 부인을 모신 일월산을 성산으로 여기는 것도 이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산촌생활박물관에서 입암면 신구리 선바위 관광지로 이어진 둘레길을 따라 걸어 갑니다.














선바위 가든(054-682-7429)의 산채비빔밥으로 맛난 점심을 먹고 분재수석야생화 전시관을 보았습니다. 선바위는 촛대를 세워 놓은 것 같은 바위 모습을 하며 조선시대 남이장군이 역모자들의 난을 평정한 전설이 전하는 곳으로 절벽을 끼고 두 하천이 서로 만나는 이곳을 남이포라 합니다. 이곳에서 마지막 영양 여행지인 서식지로 갔습니다.












선바위와는 가까이 있어 꼭 찾아 가 볼 것을 권합니다. 보길도 세연정, 담양의 소쇄원과 함께 우리나라 3대정원으로 불리며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조선 광해군 5년인 1613년 석문 정영방 선생이 경정 앞에 만든 연못입니다.


 



선생은 광해군때 세상이 어지럽자 이곳 서석지에서 은둔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합니다. 서석지는 ‘상스러운 돌이 가득한 연못’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영양 여행을 마무리 하고 안동으로 나와 부산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여행을 한 영양의 이모저모 특히 장계향 선생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으며 조지훈생가와 서석지등 1박2일동안 짧은 시간에 영양의 구석구석을 여행 하였습니다. 이제 영양에서 보고 경험하였던 여행지를 포스팅하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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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고성여행)고성 상족암. 인디아나 존스의 한장면이 연상되는 고성 상족암과 공룡발자국 화석.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와 월흥리 그리고 이웃한 하일면 춘암리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상족암 군립공원이 있습니다. 이곳의 지형은 특이하여 남해의 해안선을 따라 펼쳐지는 한려수도의 모습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고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자랑합니다.


 



그 중에서도 바위가 밥상다리 모양을 하고 있어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상족암이 최대 볼거리입니다. 쌍발이라고도 불리는 상족암은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코끼리의 뒷다리로 보였습니다.





이 곳 고성의 상족암은 우리나라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할 정도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1982년에 상족암을 전 후한 6km의 해안선에 무수히 많은 공룡발자국이 발견되어 전국적인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중생대 백악기에 살았던 공룡 발자국 화석은 2발 보행 공룡과 4발 보행공룡 등 다양한 종류의 공룡 발자국 화석이 남아 다양한 공룡이 함께 살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제411호인 새발자국 화석등 약 1억년전에 형성된 중생대 백악기의 지층 해안을 따라 2000여족에 그 거리만도 41km 달합니다. 고성 상족암 일원의 공룡발자국은 용각류, 조각류, 수각류 등 다양하며 브라질, 케나다와 함께 세계 3대 공룡발자국 화석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상족암에는 해식 동굴이 뚫여 있습니다. 옛날 오랜 옛날에 하늘의 선녀가 상족암의 경치에 반하여 내려와 이곳 동굴에 베틀기를 차려 놓고 옥황상제의 금의를 짰다하며 지금도 베틀모양의 바위가 남아 있으며 선녀가 목욕을 하였다는 선녀탕이 굴 안에 있습니다.





그 외에도 상족암 군립공원에는 공룡박물관이 있습니다. 이곳 고성에서 생활한 공룡과 초식, 육식등 다양한 공룡를 만날 수 있는 전시관으로 자녀와 함께 찾는다면 공룡나라 고성의 새로운 면을 느낄 것입니다. 또한 인디아나 존스가 부럽지 않을 공룡 여행이 될 것입니다.





☞(경남여행/고성여행)고성 상족암 대중교통편이 궁금해요. 


고성 상족암에 가기위해서는 먼저 대중교통편은 부산 서부 터미널에서 경상남도 고성 터미널까지 가야 한다. 부산서 통영가는 버스로 고성에서 하차한다. 오전 5시40분이 첫차이며 30~4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고성버스터미널에서는 삼천포행 버스를 타고 가다 상족암에서 하차하면 된다. 오전8시20분, 11시, 오후2시, 6시30분으로 4회 운행. 






☞(경남여행/고성여행)고성 상족암 교통편 자가운전은?. 인디아나 존스의 한장면이 연상되는 고성 상족암과 공룡발자국 화석.


부산에서 승용차를 이용시에는 남해 고속도로 사천IC를 내려 3번 국도의 삼천포 방향으로 달린다. 사천읍을 통과하여 송포교차로에서 왼쪽 길이 삼천포 방향이다. 3.7km를 가다 신치삼거리에서 오른쪽 도로를 2.2km 가면 목전빌딩사거리에서 시외버스터미널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다시 우회전 하면 고성 방면 77번 도로다. 5.6km 직진한 후 정곡삼거리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3km 달리면 공룡박물관 정문이며 이곳에서 상족암은 지척이다. 내비게이션에 상족암을 입력하면 길안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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