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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영양여행)음식디미방 두들마을 영양풍력발전단지 서석지 선바위 영양군 초청 여행블로거기자단 팸투어


음식디미방 두들마을 영양풍력발전단지 서석지 선바위 영양군 초청 여행블로거기자단 팸투어

경상북도 영양군의 음식디미방 장계향 선생의 여중군자로서의 면모 재조명 및 명문종가 종택. 음식과 주변 역사문화 관광지를 연계한 영양군 팸투어가 다음, 네이버 등 포털사이트 블로그에서 여행카테고리를 운영하고 있는 여행블로거들이 모인 최초의 모임인 여행블로거기자단을 대상으로 4월 26일(토요일)~ 27일(일요일) 1박2일 일정으로 진행됩니다.

 



영양군 초청 여행블로거기자단 팸투어에서는 음식디미방만들기체험 (석류탕 정부인상,소부상 등), 두들마을, 영양풍력발전단지, 고택체험, 전통주 제조체험(칠일주등), 서석지, 산해리 봉감모전5층석탑, 산채정식, 선바위관광지, 영양산촌생활박물관, 주실마을(조지훈생가) 등 경상북도 영양군 문화 관광 여행지 맛집 농촌체험 취재가 진행됩니다.

 



 

다음, 네이버, 싸이월드, 티스토리, 야후 에서 여행 관련 블로그 를 운영하고 있는 여행블로거 들의 자발적 모임인 여행블로거기자단 은 지자체및 기업에서 초청하는 팸투어에 참가 한 후 각자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에 관련 기사를 올려 우리나라 문화 관광 여행 명소를 온, 오프라인을 통해 알려 국내 관광산업을 활성화 시키고자 모인 서포터즈 성격의 모임입니다.

 



여행블로거들이 개별 여행블로그에 올린 여행 기사들은 자가용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여행하는 개별여행(가족여행) 및 단체 여행객들이 여행을 가기전에 인터넷에서 정보를 검색하여 여행일정을 계획하는데 기본 자료가 됩니다

 



여행블로거들이 자신의 여행블로그에 올린 문화, 관광, 맛집, 농촌체험, 농수산특산물, 맛집 포스팅은 지자체를 찾는 관광객 다변화 및 유치극대화, 지역의 다양한 연계관광자원의 발굴 및 여행 활성화에 일조하고 있습니다.




l. 팸투어 주제 : 영양군 음식디미방 팸투어

2. 장 소: 경상북도 영양군청 관내

 

3. 일시: 2014년 4월 26일(토요일)~ 27일(일요일) 1박2일

4. 출발 장소 : 서울역지하철 14번출구

5. 진행: 경상북도 영양군청 / 한국생산성본부. (주) 여행자클럽

@ 블로거 참가 인원 : 여행블로거 25~30명 내외

@ 참가신청 마감일 : 4월 21일(월요일) 13시

--------------------(진행상의 사유로 조기 마감될수 있습니다)

 



@ 참가신청자격 및 선정 우선 순위

1. 여블단(팸투어, 포스팅, 게시판, 댓글) 활동이 적극적인 회원

2. 블로그 댓글 과 추천 등 여블단 블로그 방문이 활발한 회원

3. 단장이 팸투어 참가를 특별 초청한 사람

4. 게시판 활동이 활발한 새내기 정회원 10% 내외 참여 가능

5. 블로그 운영과 카페 활동을 긍정적으로 하는 정회원 이상 활동우수자

@ 팸투어 참가회비: 10,000원(1박2일 일정/회칙에 의한 기자단 운영경비)

@ 일반진행경비는 주최 측에서 부담 합니다.

@ 준비물 : 카메라와 간단한 필기도구, 세면도구(수건포함)

@ 참가자 할일 : 팸투어 이후 빠른 시일내에 5개 이상 블로그와 카페에 포스팅

@ 팸투어를 처음 신청하시는 회원은 여행자보험 가입을 위해 주소 및

주민번호를 카페지기에게 이메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여블단장 : 강경원(마패) faron@hanmail.net / 문의 - 010-5482-1325

@ 신청게시판 :

여행블로거 기자단 카페

다 음 : http://cafe.daum.net/tourbloger

네이버 : http://cafe.naver.com/tourblo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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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204호 밀양상동터널. 1905년 경부선  개통때 뚫은 밀양 상동터널 벛꽃이 한창.


밀양시 상동면 경부선의 상동역 건너편에는 지금도 밀양상동터널이란 이름으로 터널이 남아 있습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된 철도 시설 문화재입니다. 경상남도 밀양시 상동면 옥산리 887번지로 옥산리와 안인리의 경계를 이루는 곳입니다. 이곳은 옥교봉의 산세가 단애를 이루는 곳으로 사람도 겨우 다닐 정도로 층암절벽이었습니다.



 

 

 


 1905년 1월1일 왜인들은 한반도를 수탈할 목적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철도를 깔았습니다. 그해 5월28일에 개통식을 열었는데 밀양 상동 터널은 그 당시에 빈지소를 감싸고 있는 바위를 뚫고 건설된 그야말로 획기적이라 할 만큼 대단한 기술이었다 합니다. 두 개의 터널로 이루어진 상동터널은 40m와 60m로 아래편에는 사각의 견치돌을 붙이고 위쪽인 천장은 붉은 벽돌을 쌓는 건축기술로서 당시에서는 아주 수준 높은 건축방식이었습니다.



 

 

1960년 초에와 경부선 철도의 노선이 변경되어 밀양강 건너편의 금산리로 옮겨 가고 기존 철로는 레일을 걷어내고 콘크리트 포장을 하여 차량과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곳은 유천 강변이라 하여 80~90년대 여름철에는 많은 휴가객이 몰려들었던 곳입니다.



 

 

 

 

그 당시는 유천역이었는데 현재에는 상동역으로 이름을 바꾸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난 주말 찾았던 밀양 상동터널은 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벚꽃이 절정이었습니다. 숫제 꽃비가 내릴 정도로 벚꽃이 날렸는데 비오는 중에도 차량을 몰고 온 연인들을 많이 볼 수 있을 정도로 한적한 데이트 장소입니다.



빈지소

 

 

청도천과 동천에서 흘러내린 강물이 서로 만나 이때부터 밀양강이 됩니다. 밀양강은 상동역 앞을 흘러 밀양의 영남루 앞을 지나 자연스럽게 낙동강에 흡수되는데 상동역 앞의 휘어진 곳을 빈지소라 부릅니다. 밀양강(응천강) 상류 북천수는 잔잔하게 흐르던 물의 흐름이 이곳에 와 급해지면서 암반에 부딪혀 꺾여 돌아가게 됩니다.





 

 

물이 부딪힌 부분은 자연스럽게 패여져 깊은 수심을 이루지만 그 반대편에는 삼각주가 형성되어 넓은 공터로 바뀌어 밤벌로 현재 부릅니다. 이곳 물가에 개구리 먹이인 밥풀 즉 부평초, 빈초가 많이 자생하여 빈주가 되었다가 빈지로 변음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빈지소

 


 이곳 빈지소에는 자라전설이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 하씨 성을 가진 분이 이곳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고기장수로부터 등에 왕(王)자가 선명한 큰 자라를 한 마리 사 이곳 빈지소에다 살려주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어느 해 대홍수가 발생하여 마을이 물바다가 되어 꼼짝 없이 모두 죽을 지경이 되었다합니다.



 

 

 

 

그 때 큰 자라가 나타나 마을 앞 건너편의 제방을 무너뜨렸는데 물이 그 무너진 제방으로 흘러가면서 마을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합니다. 하씨로부터 목숨을 구한 자라가 은혜를 갚았다며 미물도 이리 은혜를 갚는다며 이 마을의 하씨들은 그 이후부터 자라를 잡거나 먹지 않는다 합니다.



 

 

근대문화유산인 밀양상동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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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부북면 퇴로리 '오구' 촬영지 여주이씨 고가를 보고 왔습니다.

 

경북에는 안동이 있다면 경남에는 밀양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하나요. 조선시대때 경북에는 안동이 양반들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면 경남에는 밀양이라는 이야기입니다. ㅎㅎ 밀양에도 많은 양반촌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밀양 교동이고 또한 손숙장관이 나왔던 산외면 다죽리 그리고 부북면의 퇴로리등 손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양반의 득세가 얼마나 센지 박정희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대구에서 밀양으로 통과하게 하였는데 밀양의 양반님들이 시끄럽다고 우리 동네로는 통과 할 수 없다며 강력 반대 하여 경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할 정도입니다.

 

 






지금이야 신대구고속도로가 생겼지만 밀양의 발전이 그 덕택으로 더 늦어졌다네요. 이야기가 옆길로 빠진 것 같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밀양 부북면 퇴로리의 여주이씨 고택입니다.

 




 

퇴로마을에도 유독 고가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황토 담장을 돌려놓은 기와집의 모습은 그 당시 세도가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특히 퇴로리의 중심에는 여주이씨 고가가 마을을 대표할 정도로 큰 규모입니다.

 









퇴로마을 버스 정류장에 내려 오른쪽 개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돌면 큰 고택의 담장이 연결 됩니다. 그 왼쪽으로 따라 갑니다. 마을 길 끝에 ‘오구’ 촬영지라며 안내판이 붙어 있습니다. 먼저 만나는 이병수 고가로 근대문화유산이며 등록문화재 제15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에도 그의 후손이 살고 있고 담장이 높아 발끝을 들어도 집안 내부는 볼 수가 없습니다. 오른쪽으로 흙 담장을 따라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주이씨 고가의 규모가 엄청 큰 데요. 필자는 이병수 고가에서 왼쪽 골목으로 돌면 좌우로 아름다운 흙 담장과 연결되고 오른쪽으로 한바퀴를 돌면 이익구 고가 앞에 닿습니다.

 




이곳에는 문이 열려 있으며 최근에 대문이 수리가 된 것 같습니다. 여주이씨 자유헌공파의 종갓집으로 1890년 이만백의 7대손인 항재 이익구(1838~1912)가 마을에 입주하면서 세웠다합니다. 조선시대 후기 지방 선비의 집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합니다.




 

필자가 대문을 통해 들어가 보았습니다. 흙과 돌을 섞어 기와를 올린 담장으로 구분을 하였는데 같은 형태의 고가가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먼저 정침 안채는 정면 7칸, 측면2칸의 규모로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어져 청덕당이라는 당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서익랑과 정면5칸과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에 ‘성헌’의 현판이 걸려 있는 중사랑이 안채와 마주보며 자리하고 출입문 왼쪽에 종가사당 건물이 배치되었습니다. 중사랑 앞의 작은 문이 열려 있는데 그 문으로 나가보니 또 하나의 건물이 비슷한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별채로 청덕당인 안채의 동쪽에 있습니다. 이 건물은 항재 이익구의 손자인 후강 이재형(1891~1970)이 결혼과 함께 분가를 하여 지어진 건물로 안채와, 동서익랑, 사랑채로 지어졌습니다.

 



 

안채는 정면7칸과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어져 '사현합‘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사랑채는 정면5칸에 측면 1칸 반의 크기로 팔작지붕을 이루며 쌍매당의 당호가 걸려 있고 또한 후강유서, 담재, 청덕고가의 현판이 함께 걸려 있어 있습니다.


 





 


 


쌍매당의 남쪽으로 통하는 쪽문이 이병수의 고가로 통하는 문으로 보입니다만 문을 걸어 놓았습니다. 항재 이익구의 차남이 분가하였던 집으로 마당을 중심으로 북쪽에 ’一‘자형 안채와 서쪽에는 ’ㄱ‘ 사랑채, 안채와 마주보고 곳간채가 자리한 형태입니다.

 







특이한 점은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과 건물의 배치를 따랐지만 전, 후퇴 공간의 확장과 건물의 내부 수납공간을 크게 하는 등 근대 한옥의 특징을 보여 주며 사용된 재료 또한 기존과 다르게 근대 재료를 사용하여 건축하였습니다.

 




퇴로마을에는 앞으로 퇴로 수리못 또는 가산저수지, 용호, 남호로 불리는 큰 저수지가 있습니다. 1931년 일제 강점기때 만들어진 저수지로 둘레가 10리나 됩니다.  퇴로마을은 앞으로는 가산저수지, 뒤로는 돛대산이 둘러 싸여 아늑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돛대산 정상 인근에는 인위적으로 지맥을 끊은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수였던 이여송이 조선의 산천지리를 술사와 살피며 큰 인재가 날 만한 곳은 산의 맥을 끊었다합니다. 그 때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퇴로마을에는 명당으로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여주이씨의 청덕당과 쌍매당터가 예로부터 명당터로 마을에서도 명당이라 부릅니다. 따뜻한 봄이 왔습니다. 5월의 꽃 이팝나무가흐트러지게 꽃을 피우는 위양지와 함께 밀양의 고가 여행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2014/04/01 - (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위양못(위량지). 5월이면 사진작가의 단골 출사지인 위양못에 댕겨 왔습니다. 이팝꽃은 없지만 역시 밀양8경의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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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위양못(위량지). 사진작가의 단골 출사지 위양못과 이팝꽃이 함께한 절경이 밀양8경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밀양수산제, 제천의 의림지, 김제벽골제 저수지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라며 학창시절에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 외에도 신라시대에 축조되어 남아 있는 저수지가 전국적으로 여럿 있는데 그 중 밀양의 위양못은 전국의 아름다운 저수지중 최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밀양에도 둘레길이 여럿 조성되어 있습니다. 밀양시 부북면에는 가산저수지와 위양못을 도는 둘레길이 만들어져 있어 봄을 찾아 떠나 보았습니다. 5월의 위양못은 이팝나무 꽃이 흐트러지게 피기 시작할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때는 부산과 영남의 사진애호가들이 앞 다투어 찾는 곳으로 환상의 작품을 만들어 냅니다. 계절을 앞질러 찾아간 위양못의 모습은 그 나름대로 충분히 아름다웠습니다.








이팝나무의 꽃은 없지만 그 대신 한아름이 넘는 오래된 버드나무와 잘 생긴 소나무가 위양못을 에워싸고 있어 그의 존재만으로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위양못에는 다섯 개의 섬이 있습니다. 못의 중앙에 완재정의 정자가 놓여 있어 화악산과 위양지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과 같았습니다. 꽃이 없어 화려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수묵화의 배경이 되기에는 충분한 곳이었습니다.





밀양 문화원의 위량리편을 보면은 완재정의 정자는 안동권씨의 학산 권삼섭을 기리기 위해 지었던 정자로 완재정 편액의 뜻은 '완전히 물 한가운데 있다'는 뜻의 시경의 '완재수중앙'에서 따왔다 합니다. 








위양지는 처음 신라때에 축조되었습니다.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에 위치를 하며 북쪽으로는 청도와 경계한 화악산의 고봉이 솟아 있어 풍치 또한 뛰어나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밀주구지에 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여 위량리를 양양부곡이라 하고 있습니다. 저수지의 이름도 여기에서 연유하여 양양지(陽良池)로도 부릅니다. 축조 당시에는 제방의 둘레가 4.5리에 규모의 저수지로 축조 당시 모습은 사라지고 규모 또한 차츰 줄어들어 지금은 수리구역의 제방으로 바뀌었으며 제방 넓이가 68척, 길이가 547척이 되었다 합니다.











완재정은 안동권씨 일가의 제숙소로 이 저수지의 물로 그 아래 마을에서 모두 농사를 짓고 하여 ‘양민을 위한다는 뜻’의 위양못이 되었습니다.








또한 위양못의 제방에는 인위적으로 나무를 심어 풍치를 가꾸어 시인묵객이 이곳에 들렀을 정도로 유명하였습니다. 밀주구지에는 “1634년 인조12년때 임진왜란으로 훼철된 제방을 부사 이유달이 수축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으며 1987년 문화재자료 제16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에도 안동권씨 문중의 소유로 관리되고 있는 위양못을 돌아오는 5월에 다시 들러 하얀 이팝꽃과 함께한 위양못을 다시 볼까 합니다. 위양못과 이팝꽃의 그 아름다움에 밀양을 대표하는 경관으로 밀양8경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위양못(위량지). 사진작가의 단골 출사지 위양못대중교통편


자가운전시에는 네비게이션에 위양못으로 입력.

밀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북면 가산리로 가는 버스가 오전 7시20분, 8시50분, 10시50분 등에 있습니다. 기사님께 위량못 입구에 세워 달라고 부탁을 하면 됩니다. 밀양역에서는 부북면사무소까지 가는 4번 시내버스가 하루 15회 운행하며 밀양역에서 택시는 10,000원 안팎, 10분 정도면 도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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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독락당과 정혜사지13층석탑 겨울여행지로 다녀 왔습니다.

 

여행을 간다는 것은 항상 가슴 설레 게 합니다. 사계절 여행을 꿈꾸며 떠나 갈 때마다 그 느낌이 다르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봄에 찾는 느낌 여름에 찾아 가는 느낌, 가을에 보는 느낌, 그리고 겨울의 여행지는 어떠합니따. 이 모두 계절마다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자신만의 색으로 뽐내고 있습니다. 겨울여행지로는 쓸쓸하다고 하는 경주 안강으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안강은 양동마을과 함께 회재 이언적의 유적지가 많이 전하고 있습니다.

 

 

 

 

경주 안강하고도 옥산 골짜기에는 한겨울의 삭풍 때문인지 어실어실 한 느낌입니다. 먼저 독락당을 찾아갔습니다. 지난해 여름인 7월에도 이곳 독락당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독락당은 어찌 찾아 갈 때마다 문화재 보수 공사를 하는지 작년 7월에도 문화재 보수를 한다며 출입을 할 수 없어 옆 계곡에서 독락당 최고의 비경인 계정만 보고 돌아 갔습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독락당과 정혜사지13층석탑. 독락당과 계정 보수를 끝내고 산뜻한 모습입니다.

 

이번 겨울에 찾은 독락당은 다행히 보수공사가 없어 내삼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조선 양반가옥의 전형인 솟을 대문이 그 당시 양반가의 위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정면으로 길게 이어진 건물이 먼저 눈에 보입니다. 처마 밑에 경청재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회재 이언적 선생이 1538년(중종33년) 3월에 청백리에 가자되어 청백은 공경지심에서 나온다"하여 그의 후손들이 경청재로 이름을 붙였다합니다.

 

 

 

 

본 고택은 1601년(선조34년)3월12일 회재 이언적의 손자 휘, 준과 순 형제가 독락당과 계정이 있는 옥산 별업을 받들어 지키기 위해 '화의문'을 작성하면서 세운집입니다.

 



 

 

 

 

 

‘화의문약설’에는 선조인 회재 이언적의 별서인 독락당과 계정을 보호하고 보수 유지함에 있어 회재 이언적의 후손들이 약간의 토지를 내 놓아 그 뒤에 후손들 중 궁핍하여 이 토지로 인해 다투는 일은 선조에 대한 불효로 간주한다는 내용입니다. 독락당은 옥산 정사로도 불리며 동방오현의 한분인 회재 이언적이 만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을 하여 지은 사랑채 건물입니다.

 

 

 

 

현재 이곳 여강이씨종택인 독락당은 경청재이외에는 사실 볼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알림’을 보면은 “이 고택은 회재 이언적선생의 아들 잠계공 이전인의 후손이 살고 있는 종택이므로 본 종가에 특별한 문의외 출입을 금지합니다”란 안내판을 보고는 도저히 들어가 볼 수 없었습니다. 내 만족을 위해 여기서 생활하시는 분들의 사생활을 침해 할 수 가 없기 때문에 아쉽지만 참아야 하겠습니다.

 

 

 

 

 

 

 

 

독락당의 여강이씨 종택은 흙 담장이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흙사이에 기와(?)가 박혀 있는 흙담장으로 인해 독락당은 더욱 무게가 느껴집니다. 작년의 복원 공사로 인해 써까레와 흙담장등이 아름답게 바뀐 모습입니다. 경청재 현판을 보고 아래채와의 사이에 있는 작은 문이 자계천으로 나가는 골목길입니다. 좌우측의 아름다운 토담으로 된 골목길을 걷는 재미가 참 좋습니다

 

 

 

 

그리고 중간쯤에 산청의 남사마을을 대표하는 크로스 나무는 아니지만 이 골목에도 비스틈한 고목이 걸쳐져 있습니다. 현재 자계천에는 지난해 떨어진 낙엽이 물위에 널 부러져 있습니다. 회재선생이 이 모습을 보시면 어떤 생각을 하실지 궁금합니다. 계곡에 몸을 담그듯이 쌓아 올린 독특한 계정은 아궁이가 자계천쪽으로 나와 있습니다. 아궁이도 사람의 허리쯤 높이에 걸려 있습니다.

 

 

 

 

 

 

 

 

널다란 자연석 암반위에 쌓아올린 돌로 2층 누각을 만든 것이 우리 선조님들의 풍류를 알 수 있습니다. 계곡과 정말 잘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독락당은 1516년(조선 중종11년)에 정면4칸에 측면2칸의 여덟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지어졌습니다. 건물의 중간에 대청을 넣었는데 정면3칸 측면2칸이고 그 좌우에 정면1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만들었습니다.

 

 

 

 

대청에 앉아 자계천을 볼 수 있게 독락당 옆 담장에 나무로 문살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입니다. 계정은 1533년 완공되었는데 계정안쪽에 걸린 현판에 양진암이란 필체가 눈길을 끔니다. 퇴계 이황의 필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내삼문의 입구로 다시 나가면 국보 제40호인 정혜사지13층 석탑을 찾아 갑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독락당과 정혜사지13층석탑. 국내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정혜사지 13층 석탑 보고 왔습니다. .

주차장에서 장산서원 표지석을 보고 따라가면 됩니다. 독락당을 왼쪽으로 돌아가면 독락당과 계정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종택 뒤편으로는 큰 고목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수령이 수백년은 됨직한 나무를 지나면 왼쪽으로 미려한 모습의 큰 석탑을 만나게 됩니다. 통일 신라시대 9세기 작품이며 정혜사 터에 세워져 있습니다.

 

 

 

 

창건연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동경통지'의 기록에 보면은 신라성덕왕 원년에 당나라 백우경이란 분이 자옥산 아래에다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운 후 그 뒤에 절을 세우고 정혜사라 하였다합니다. 정혜사지13층 석탑은 흙으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십삼층의 몸돌을 세운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다시 걸음을 돌려 다음 여행지인 회재 이언적의 옥산서원과 세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겨 봅니다.겨울 여행지로서도  독락당과 자계천변의 계정 그리고 정혜사지13층 석탑이 손색이 없습니다. 

 

 

 

 

 

 

 

 

 

 

2013/06/24 - (경북여행/경주여행)정혜사지13층석탑. 국보 40호인 통일신라시대 9세기 작품의 정혜사지십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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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스파밸리 포레스트12)대구여행에서 숙박 걱정마세요 스파밸리 포레스트12 끝내줘요.


어디 가족끼리 또는 연인끼리 여행을 떠날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럴 경우 숙소가 가장 많은 문제점이 되는데 대구여행에서는 그런 경우를 싹~~ 지울 수 있었습니다. 

1박2일 대구여행에서 포레스트12의 숙박시설을 이용하였는데 입구의 스파밸리에서 ‘포레스트 빛의 정원’도 둘러보고 겨울철에 개장한 야간썰매장에서 신나게 아이들과 즐기며 뛰놀다 ‘빌라드포레’에서 따뜻하게 피로를 풀 수 있습니다. 

황토방으로 각각 독립된 형식으로 지어져 기족끼리 너무 좋았습니다. 포레스트12는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조용하며 숲과 함께 상쾌한 기분을 마음껏 느낄 수 있습니다. 

숲과 바람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가 문지방 앞에서 들리고 각종 나무들이 내뿜는 생명의 소리는 우리를 더욱 건강하고 풍성하게 해줄 것 같습니다. 이곳 포레스트12의 빌라드포레는 편백나무와 황토벽돌로 마감을 하여 음이온과 피톤치드가 다량으로 뿜어져 나와 들어서면 내내 상쾌한 기분을 만들어 줍니다. 

건강하고 여유롭게 여가를 즐길 수 있는 포레스트12 빌라드포레에서 멋진 추억을 만들 고 왔습니다. 빌라드포레는 빌라드포레 한실과 스위트, 그리고 호텔타입 스텐다드로 꾸며져 있습니다. 저희는 한실을 택했는데 역시 따뜻한 온돌이 최고였습니다. 아 침대도 있더군요.


 





이용시간은 입실 15:00/퇴실 오전11:00

빌라 드포레 이용요금

 객실명  객실종류  객실수  기준인원  최대인원  주중1월1일~3월31일  주말 1월1일~3월31일
 빌라드포레  호텔스텐다드  12  2명  3명  15만원  20만원
   한실스텐다드  14  2명  4명  15만원  20만원
   한실(취사형)  3  2명  4명  17만원  22만원
   스위트  3  4명  6명  30만원  40만원

 20:00시이후 체크인시 070-7005-5312로 사전에 연락바랍니다.


  • 조식(기준인원에 한함)포함, VAT포함

  • 기준인원 : 조식이 제공되는 인원 수 


  •  최대인원 : 객실당 최대로 수용 가능한 인원 수



◆빌라드포레 이용 안내와 객실 이용 안내




◆포레스트12 한실 스텐다드와 취사형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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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창원여행)저도 콰이강의 다리. 사랑을 약속하는 장소로 유명한 콰이강의 다리 저도 연륙교.

 

창원시에는 콰이강의 다리로 불리는 붉은 철난간의 다리가 있습니다. 마산합포구 구산면 구복리에서 저도를 연결하는 다리로 현재 두 개의 다리가 놓여진 모습이 특이합니다. 통합 창원시의 시조인 괭이갈매기를 형상화하여 2004년 12월에 새롭게 개통한 저도 연륙교는 미려하며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창원에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 옆에 서로 마주하며 철교가 초라한 모습으로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 구산면에서는 붉은 철교가 더 인기가 높습니다. 붉은 철교가 너무 노후화 되어 새로운 연륙교를 놓았지만 인기를 끌고 있는 다리는 새로운 저도 연륙교가 아니라 철골로 엉성엉성 엮은 구 연륙교입니다.

 



 

 

 

구 연륙교는 모양도 특이하여 콰이강의 다리로 불리면서 영화의 촬영지가 되었습니다. 1987년 놓여진 철교는 창원은 물론이고 부산 경남에서 젊은 연인에게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다리길이는 170m이며 너비는 3m, 높이는 13.5m로 영화속의 무대였던 미얀마와 태국을 연결하는 콰이강의 다리와 비슷하여 일명 ‘콰이강의 다리로’ 불립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입구에 콰이강펜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콰이강의 다리는 영화 박신양과 이미연이 출연한 영화 ‘인디언 썸머’에서 남여주인공이 이곳에서 이틀을 보낸 뒤 떠나는 신이 촬영되었던 곳으로 알려지면서 사랑을 찾는 연인들의 약속장소로 많이 방문합니다.

 

 

 

 

현재에도 이곳은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으며 그와 함께 무슨 사랑의 언약인듯 주인을 알 수 없는 자물통이 철 난간에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사연도 각각인 내용을 담은 자물쇠는 햇볕을 받아 더욱 반짝이고 서로의 믿음과 약속으로 열쇠를 잠그고 다리 밑 바다로 던지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다리를 걸으면서 우리도 젊을 때 이런 때가 있었나하면서 자물통의 글씨를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부부간의 사랑도 확인하고 연인들의 변치 않는 사랑을 맺어준다는 저도 연륙교를 찾아 콰이강의 다리도 건너보고 인근에서 바다의 우유인 굴도 먹으며 주말에 가볍게 댕겨 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명 콰이강의 다리로 불리는 저도 연륙교

 

 

용두산에서 본 저도 연륙교 모습

 

 

 

 

 

 

야경이 아름다운 저도 연륙교

 

 

 



2014/01/05 - (경남여행/창원여행)창원 용두산. 겨울 바다를 찾아 떠나는 저도 비치로드와 용두산의 멋진 바다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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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삼랑진여행)삼랑진 작원관, 임진왜란때의 항전지 작원관을 여행하다.

 

부산에서 한양으로 오르는 길을 영남대로라 부릅니다. 한양에 이르는 영남대로에는 두개의 관문이 있으니 밀양의 작원관과 문경의 유명한 주흘관으로 문경새재길을 말합니다. 오늘 포스팅은 밀양의 작원관으로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검세리 101번지에 낙동강을 끼고 양산과 밀양의 경계지점에 있습니다.

 

 

 

작원관의 역할은 관원의 숙소이며 출입자와 화물 등을 검문하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남해로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는 기능을 하였고 작원진에서 낙동강을 통해 오르내리는 화물과 사람을 검문하던 곳입니다.

 



 

 

물금에서 낙동강을 끼고 굽이굽이 돌아 삼랑진에 내려서기 전에 안태마을에서 왼쪽으로 낙동강을 바라보며 현재의 복원된 작원관을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작원관은 현재의 자리보다 조금 더 양산쪽으로 내려가 있었다합니다.

 

 

 

 

밀양의 작원관에 대해 알아보면 밀양시가 3억원 이상을 들여 한남문과 누각인 공운루를 1년7개월만에 현재의 모습으로 1995년 완공하였다합니다. 작원관 옆 산비탈의 양지 바른 곳에 임진왜란때 장렬히 산화한 호국영령의 위령탑도 함께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은 원동에서 삼랑진으로 신불암고개를 넘어가는 험준한 산세로 차량들도 숨이 차는지 갤 갤 그리며 힘들어 합니다. 그 당시에는 날짐승도 겨우 넘는다 할 정도로 바위도 많고 험한 곳으로 영남대로길은 낙동강을 따라 이곳 작원관지를 지나갑니다. 이 길을 험하다는 뜻인 작원잔도라 불렀습니다. 길이 너무 험하다 보니 한양으로 가던 관원들이 쉬어가던 원이 생기며 작원이라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때인 1592년 임진년 4월 왜인들이 동래성을 함락하고 물밀듯이 영남대로를 따라 작원관으로 향했다합니다. 소서행장의 휘하 마쯔우리가 지휘하는 왜군은 작원관을 공격하였고 이에 우리 조선군은 수 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밀양부사였던 박진과 그의 부하 이대수, 김효우 그리고 민관이 힘을 합해 최후까지 분전을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300여명이 목숨을 잃고 패한 곳입니다.

 

 

 

 

지금도 묵묵히 낙동강이 흐르는 것 처럼 역사도 따라 흘러 갑니다. 400년전의 임진왜란이 요즘 일본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다시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후손에게는 그런 참담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작원관의  위령탑을 보며 마음을 새기는 계기가 되어서면 합니다. 자녀와 함께 봄에 이 길을 찾아가 보길 권합니다. 안태호와 천태호를 잇는 벚꽃길과 천태사등 너무 좋은 야외 나들이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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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양산원동여행)낙동강 가야진사. 신라와 가야의 접경지 용당나루터와 용신설화가 전해오는 가야진사.

 

태백산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1300리를 달려와 부산 을숙도에서 남해 바다로 거침없이 흘러갑니다. 그런 낙동강은 황산강의 옛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아마 그 연유는 윗 지방에 홍수가 나면 이곳 하류에는 항상 누런 황톳물이 흘러내려 황산강으로 불린것은 아닌지 개인적으로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도 낙동강의 하류에는 황산이란 이름이 구전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물금에서 원동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길을 황산잔도라 불려지며 물금장을 황산장으로 불렸던 것을 보면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낙동강은 신라와 가야의 접경 지역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크고 작은 충돌이 생겼고 황산강의 상류인 원동과 김해시 상동을 잇는 용당에는 용당나루터 있었습니다.

 



 

 

 

이곳은 신라 눌지왕(재위 417~458)때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강을 건너고 왕래하던 나룻터가 있던 곳으로 일명 옥지주로 불렀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를 이어오기까지 낙동강을 건너는 뱃길의 안전과 강물의 범랑을 막기위해 제사를 지내왔던 곳으로 가야진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재도 원동의 당곡마을 건너편 모래톱에는 1406년(태종6)에 지어진 가야진사의 사당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의 한강, 금강, 포항의 곡천강등과 함께 국가의 주요 4대강에 제사를 지냈덩 ‘사독’의 하나였다고 삼국사기에 나와 있다합니다. 나라에서는 매년 이곳에 향축과 칙사를 보내어 국가의식으로 매년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다합니다. 세월이 흘러 현재에도 그 전통은 이어져 이곳에서 마을의 안녕과 홍수로부터 마을을 지켜줄 것을 기원하며 가뭄이 들 때에는 이곳에서 용신에게 비를 내려줄 것을 염원하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합니다.

 

 

 

 

사당을 보면 정면 1칸에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작은 건물입니다. 사당 안에는 제상과 함께 머리 셋 달린 용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용은 상상속의 동물로 물을 다스리는 신입니다. 천태산과 강 건너 용산을 잇는 지점으로 땅의 기운이 모이는 곳에 가야진사가 있다 합니다.

 

 

 

 

 

현재 가야진사가 있는 이곳은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사업으로 대대적인 정비를 거쳤습니다. 주위를 모두 정비되고 발굴작업도 거쳐 현재는 공원화되어 자전거 길의 쉼터와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습니다.

 

 

 

 

 

☞(경남여행/양산원동여행)낙동강 가야진사. 신라와 가야의 접경지 용당나루터와 조강지처를 버린 용의 전설이 궁금해요.

 

가야진사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옵니다. 옛날 호랑이가 담배를 피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양주도독부의 전령이 공문서를 가지고 대구로 가던 길에 이곳 원동의 주막에 하루를 묵게 되었습니다. 그 날밤 꿈에 용 한 마리가 나타나 자신은 요 앞 용소에 살고 있는 용이라 이야기하며 남편용이 첩만을 사랑 하고 자신은 멀리하니 그 첩용을 죽여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면 꼭 그 은혜를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음 날 용의 딱한 사정을 듣고 전령은 용소로 달려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용 두 마리가 밀월을 즐기는 것을 보고 첩용과 남편용임을 직감하고 전령은 단숨에 용을 한 마리 죽였습니다. 그러나 전령은 실수로 그만 첩룡이 아닌 남편용을 죽이게 된 것을 안 본처용은 죽은 남편용 앞에서 슬피울다가 전령에게 보답을 한다며 그를 태우고 강 속 용궁으로 사라졌다는 용신설화입니다.

 

 

 

 

 

그 이후 주변 마을에는 가뭄과 기근등 재앙이 끊이지 않아 지금의 자리에 사당을 짓고 용세마리와 전령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봄 가을에 돼지를 잡아 통째 용소에 던지는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 가야진사에는 그 용신제의 전수를 위한 전수관도 함께 지어져 있습니다.

 

 

 

 

가야 진사 맞은편에 낮이 막한 둥근 산이 용산입니다. 보기에도 용이 강물 안으로 머리를 박고 있는 모습으로 최근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현재 이곳 용산 목을 가로지르며 부산대구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목이 끊어져 용의 기운이 다 빠졌다하여 마을에서 진정을 하여 끊어진 고속도로 위를 연결하는 공사를 실시하여 겨우 숨만 이어지도록 해놓았습니다. 용산 앞에는 물빛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여 깊이를 모르는 웅덩이가 전설 속에 첩과 함께 밀월을 즐긴 용소입니다.

 

 

 

 

 

 

 

 

 

 

 

 

 

 

가야진사

 

 

사진상의 강이 낙동강입니다. 강건너편에 흰 건물이 있는 앞이 용소이며 오른쪽 작은 산이 용산입니다. 그 뒤로 현재 신대구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발굴당시 유적지와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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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거제도여행)거제도 포로 수용소 유적공원, 끝나지 않은 분단의 역사 우리는 알아야 한다.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는 1950년 6월25일 발발한 한국동란을 생각하시면 몸서리를 치며 치를 떠신다. 그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집을 버리고 피난과 아비규환속에 살아온 나날들을 생각하시며 다시는 그런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며 손 사레를 치시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자라 왔다.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세대에게는 그런 부모님의 말씀을 이해를 하지 못하고 ‘뭐, 그럴까?’하며 의구심을 가지고 자랐던 것도 사실이다.

 

 



 

 

이곳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방문하면 왜 우리의 부모님이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며 손 사레를 치는 이유를 조금은 알수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1983년 경상남도문화재 자료 제 99호로 지정되어 유적공원으로 보호관리되고 있어 아이들과 함께 찾아가면 더욱 좋은 교육이 되겠다.

 

 

 

 

지금이야 통영과 거제도를 잇는 거제대교와 부산가덕도와 거제도를 연결하는 거가대교로 인해 거제도는 섬보다는 육지에 더 가깝게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동란때는 이곳이 육지에서 가까운 섬이었지만 고립된 섬으로 전쟁 통에 생포된 포로들을 수용하는 포로수용소가 있었던 곳이다. 지리적으로 육지와 떨어져 빠삐용처럼 섬안에서 포로를 관리하기가 좋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분수광장, 6.25 참전 16개국의 국기와 유엔기가 게양되어 있다.

 

 

거제포로수용소는 왜 생겼을까. 1950년 6월25일 새벽4시를 기해 북한인민군은38선 전역에서 일제히 기습 남침을 감행하였다. 전쟁발발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는 그야말로 중과부적의 열세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급기야 한강철교를 폭파하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며 임시 수도도 대전으로 옯기는 판국이었다. 국군은 미군과 유엔에서 파병한 연합군의 지원을 얻게되고 전세는 소련제 탱크로 중무장한 북한군에 티격태격 밀리며 낙동강까지 이르게 되었다.

 

 

 

 

낙동강을 넘겨주면 부산이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로 국군과 연합군은 낙동강을 마지막 보루로 삼아 목숨을 걸고 혈전을 벌렸다. 지금도 영남지방을 흐르는 낙동강에는 우리국군의 목숨을 건 전투가 많이 전해 온다. 다행이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켜 국군과 연합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을 하였다. 그러나 100만이 넘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며 38도선을 경계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탱크전시관, 1950년 6월25일 일요일 미명에 남침의 선봉에 섰던 소련제 T-34탱크 모형,

 

 

전쟁으로 생포한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경남 거제도의 고현을 중심으로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 인민군이 15만명, 중공군이 2만명등 17만3천명의 포로를 수용하였다. 그 포로들 중에는 여자포로도 3백명이 있었다하며 포로수용소 내부의 생활상을 자료를 통해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거제포로수용소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포로들이 자치적으로 수용소 생활을 하도록 되었다. 그런중에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간에 유혈폭동이 일어 났고 1952년 5월27일에는 수용소의 사령관이었던 돗드준장이 포로에게 납치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1953년 한국정부에서 일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게 되고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전쟁은 끝이 아닌 잠시 쉰다는 의미의 휴전이 되고 거제포로수용소는 폐쇄되었다.

 

 

 

 

현재에도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이어져 60년이 되었지만 이는 종전이 아닌 휴전임을 항상 명심해야 더 이상의 전쟁을 막을 수 있다. 끝나지 않은 분단의 역사를 보여주는 거제도포로수용소는 그 당시 수용소의 건물 일부와 포로의 생활상, 막사, 사진, 의복등 생생한 자료와 기록물을 볼수 있는 전쟁역사의 산교육장이다. 자녀와 함께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찾아 그 당시의 모습을 경험 해보는 것도 너무 좋을 것 같다.

 

 

흥남철수작전 기념비.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래 배경이 되었던 흥남항에서 10만명의 피난민과 국군, 유엔군이 배를 타고 탈출.

 

 

 

 

 

 

디오라마관 국내최초 최대규모의 디오라마관.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배치상황, 생활상, 폭동현장이 생생하게 재현.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군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38도선에서 전면전을 개시하면서 불법남침.

 

 

국군의 사수. 밀려오는 북한군을 맞아 치열한 참호 전투를 벌리고 죽어간 아군들.

 

 

끊어진 대동강 철교,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게된 피난민들이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건너기 위해 사투를 벌리고 있다.

 

 

M.P다리, 헌병초소가 지켜선 다리로 포로출입의 주요 관문, 이곳을 통과하면 포로들의 생활상을 경험할 수 있다.

 

 

 

 

 

 

 

 

 

 

포로생포관, 투항하거나 생포된 포로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였다.

 

 

 

 

포로수송의 모습. LST에 승선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해상 이송되.

 

 

포로사상대립관, 철모속에서 반공포로와 친공포로의 사상대립을 볼 수 있다.

 

 

 

 

여자포로관, 여자도 남자포로와 동일한 수용소 생활을 하였다.

 

 

 

 

 

 

 

 

포로폭동체험관.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졌던 친공포로의 폭동과 친공, 반공포로들간의 격돌장면을 만날 수 있다.

 

 

 

 

 

 

철모광장,포로수용소 유적관 기념 청동 조형물로 참전 16객국의 지도와 국기를 달고 있다.

 

 

야외막사, 포로수용소의 막사와 감시초소, 취사장, 생활도구까지 완벽하게 재현하였고 영화 흑수선 촬영현장이기도하다.

 

 

 

 

 

 

 

 

 

 

 

 

무기전시장,M577 장갑차, M46 전차, UH-1 헬기, 2.5톤 카고등 군수품을 전시하였다.

 

 

 

☞(경남여행/거제도여행)거제도 포로 수용소 유적공원, 끝나지 않은 분단의 역사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관람안내시 주의점.

★역사의 현장인 유적지를 보호하고 쾌적한 관람을 위해 관람예절을 준수,

★음식물 반입과 안내견 이외의 애완동물 출입은 금지,

★전시물에 손을 대거나 손상을 입힐 수 있는 행동 삼가,

 

 

 

 

 

☞(경남여행/거제도여행)거제도 포로 수용소 유적공원, 끝나지 않은 분단의 역사 알기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이용 안내.

 

 ★거제도포로수용소 입장시간과 휴관일(홈페이지 캡쳐)


★거제도포로수용소 관람요금(홈페이지 캡쳐)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전시관 안내◆

(홈페이지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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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영덕여행)블루로드 축산 죽도산 전망대. 대나무가 많아 죽도로 불려.


삼면이 바다로 이루어진 우리나라는 바다의 길잡이인 많은 등대가 설치되어 있다. 그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인 인천의 팔미도 등대는 1903년  6월1일 근대식 등대로 불을 밝히며 지금까지도 뱃사람의 안전를 책임지고 있다.  수많은 등대의 역활이 배의 안전을 책임지는 길잡이 역활에서 이제는 벗어나 그 지방의 독특한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하나의 관광 상품화가 되었다. 


 



불을 밝히는 것은 당연한 등대의 역활이고 영덕 해맞이 공원의 창포말 등대 처럼 대게의 집게발을 형상화한 등대는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우는 효자 노릇을 독특히 하고 있다. 영덕의 창포말 등대에서 약 15km의 거리를 두고 또 하나의 독특한 등대가 있다. 축산면 축산항구 옆에 솟은 죽도산 등대가 그것이다.






☞(경북여행/영덕여행)블루로드 축산 죽도산 전망대. 죽도가 육지화 되어 현재는 축산항이 되었다.


죽도산의 이름에서 보듯이 죽도산 전망대는 동해의 작은 섬이었다. 일제강점기때 이곳을 매립하여 죽도와 연결시켜 현재의 죽도산전망대가 육지화 되었다.  죽도산의 죽도는 대나무가 많은 뜻에서 죽도라 불렀는데 축산면 경정리의 대게 원조마을에서는 잡아 올린 게의 다리가 길어 죽도에 있던  대나무의 긴 다리와 마디가 흡사하여 대게로 불렀다 할 정도로 죽도는 대나무로 숲을 이룬다.


 



1935년 처음 이곳 78m의 고스락에 죽도 등대가 세워졌다. 칠흑같은 망망대해에서 축산항으로 들어오는 배에게 죽도산 등대는 그 안내자 역할을 톡톡히 하였고 포항의 장기곶과 울진 중간에서 그의 역할은 하늘의 북극성처럼 빛을 발해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을 책임졌다.




 


☞(경북여행/영덕여행)블루로드 축산 죽도산 전망대. 블루로드 B코스의 죽도산 등대 대나무가 많아 죽도로 불려.

2011년 5월에 죽도산 등대는 전망대의 기능을 갖추고 새롭게 태어 났다. 주위에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덱계단이 설치되고 곳곳에 동해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되었다. 그와 함게 해맞이공원의 창포말등대와 블루로드길로 서로 연결되어 지금은 새로운 명소로 각광 받고 있다.

 





 

죽도산 전망대에 올라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해안선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선 마을과 아름다운 해안선에 모두 입을 벌리며 감탄을 하게 만든다. 5층의 전망대에 올라가면 전망은 더욱 넓어져 사방팔방 막힘이 없이 시원한 전망을 열어준다. 특히 발아래 바라다 보는 축산항의 모습은 여인의 허리만양 잘록하게 들어가 더욱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경북여행/영덕여행)블루로드 축산 죽도산 전망대. 죽도산 전망대 재원.


죽도산 전망대의 등대를 이루는 전망대의 높이는 26.9m로 약7층 건물의 높이다. 1층은 엘리베이터를 탈수 있는 로비이며 2층은 외곽에 관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5층으로 올라가면 죽도산 전망대로 이곳에 휴식을 취하면서 쉴수 있는 의자가 설치되어 있고 재수가 좋은날은 돌고래가 무리지어 유형하는 모습을 망원경을 통해 볼 수 있다. 6층은 불을 밝히는 등대의 기계실이며 7층은 불을 밝히는 등대로 일반인은 이곳에 출입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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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달성여행)대구 도동서원,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배향하는 도동서원


도동서원은 동방오현의 한분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이며 도동이란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도동서원의 볼거리는 서원 입구를 지키고 있는 400년된 은행나무로 서원의 건립을 축하하며 한강정구선생이 직접 심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켜켜히 세월의 때가 묻어 시멘트 기둥에 한몸을 뉘이고 있지만 그의 풍모만은 하늘로 뻗어 올라가 꼿꼿한 선비의 기상을 보여 준다. 그런 이유로 서원 앞에는 은행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대구여행/달성여행)대구 도동서원, 한강 정구가 심었다는 400년된 은행나무의 기품이  대단 도동서원


현풍IC에서 도동서원까지는 약 10km거리이다. 다림재를 넘어  낙동강을 따라  강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도동서원은 도산서원, 소수서원,병산서원, 옥산서원과 함께 우리나라 5대서원이며 보물제 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구여행/달성여행)대구 도동서원,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배향하는 도동서원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도 살아남아,


원래 도동서원은 1568년 조선선조원년에 비슬산 자락에  쌍계서원으로 처음 건립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화마로 불타고 1604년인 선조37년에 이곳으로 옮겨와 1607년에 도동서원으로 사액되었다. 1871년 고종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모든 서원은 훼철되지만 도동서원과 함께 47개 서원은 제외되어 도동서원은 현재의 모습으로 남게 된다. 



400년된 은행나무로 도동서원 앞에 있다. 도동서원 완공기념으로 한강정구선생이 직접심었던 나무다.

 

 

도동서원은 기존의 서원과는 다른 형태다. 일반 서원은 남향을 바라보고 있지만 도동서원은 낙동강으로 인해 북쪽을 향해 앉아 있다. 그때문에 중정당의 대청마루에 앉아 흘러가는 낙동강을 바라 볼 수 있는 도동서원의 풍치는 그야말로 가을의 노란 은행나무와 함께 장관을 연출한다.



 

 


☞(대구여행/달성여행)대구 도동서원, 중정당의 기단에 4개의 용머리는 낙동강의 범람을 막기위한 비보 역활 도동서원


도동서원으로 오르는 길은 1973년에 복원된 2층 누각 수월루를  지나가면서 시작된다. 좁다른 층층 돌계단을 올라 좁은 환주문을 들어서면 도동서원의 경내다. 정면에 강당인 중정당이 있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두줄의 급한 돌계단이 퇴색한 모양을 하고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말해주고 있다. 서원과 사당을 구분짓는 내삼문은  꼭꼭 잠겨져 있고 이곳은 김굉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그때 도동서원을 관리하시는 분이 올라오시며 보여줄것이 있다고 같이 가잔다.  사당옆의 담벼락을 가르키며 전국 서원에서 유일하게 도동서원에만 있다는 작은 창을 가르켰다. 문을 빼꼼히 밀어 왼쪽 담벼락을 보니 사각모양의 창틀이 보였다. 그 창틀의 용도는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태울때 나는 연기를 그 구멍으로 빠져나가게 하였다.


 


 

 

도동서원도 여느 서원처럼 수월루에서 사당까지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전학후묘의 양식으로 앞에는 공부를 하는 강당을 뒤로는 신주를 모신 사당이 위치함을 말한다. 




2층의 수월루. 이곳을 지나면 도동서원으로 올라갈수 있다.

 

 


강당인 중정당은 스승과 함께 학문을 닦고 배우는 공간이며 그 아래에는 동재인 거인재와 서재인 거의재를 서로 마주보게 두어 유생들은 이곳에서 생활을 하였다.  또한 중정당을 받치는 기단을 자세히보면 완구의 블록을 쌓는 것처럼 잘짜여진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사이사이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 4개와 다람쥐 모양의 동물이 장식되어 있다. 



 

 

용은 물의 신을 의미한다. 도동서원의 기단에 있는 4개의 용머리는 여름철에 수시로 낙동강의 물이 범람을 하여 서원으로 들이치지 못하도록 하며 아울러 화재로 부터 서원을 보호하기위한 비보책이다. 도동서원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흙과 기와로 쌓은 맞담으로 중정당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만큼 도동서원의 흙담장은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도동서원의 중정당은 정면5칸에 측면 2칸반의  규모로 옆에서 볼때 사람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좌우 1칸씩은 온돌방을 넣었고 앞으로 툇마루도 달았다. 온돌방 사이에 3칸의 대청마루를 넣어 툇마루와 서로 통하게하였다. 가을의 도동서원은 샛노란 은행잎으로 인해 한층 더 중후한 모습을 선사하는 곳으로 많은 문화재 답사팀들의 단골코스로 익히 이름이 알려져 있다. 대구 달성 여행지의 도동서원으로 떠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중정당을 위해 들어서야하는 환주문 아래에 설치된 조형물.

 

 

서재인 거의재로 유생들이 생활하는 곳

 

 

 

 

 

 

강당인 중정당

 

 

바둑판처럼 퍼즐 맞추듯 쌓은 기단의 모습과 낙동강의 범람을 막기위한 비보로 설치한 용머리의 모습.

 

 

 

 

 

 

동재인 거인재

 

 

 

 

 

 

 

 

 

 

 

 

 

김굉필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내삼문.

 

 

 

 

 

 

 

 

김굉필의 신주를 모신 사당

 

 

사각 모양의 창틀이 다른 서원에는 없다. 그용도는 재사를 모시고 난뒤 축문을 태우면 저 창문으로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되어 있다.

 

 

 

 

내삼문 앞에서 바라본 낙동강의 모습

 

 

 

 

 

 

 

 

 

 

보믈로 지정된 아름다운 도동서원의 흙담장

 

 

 

 

 

 

 

 

 

 

 

 

도동서원의 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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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영덕여행)영덕 해맞이 공원 창포말등대, 영덕 해맞이 공원의 독특한 대게등대에 깜짝놀래

영덕의 해맞이 공원에 댕겨왔다.  영덕 블루로드의 알짜베기 코스인 2코스를 걷기 위해 찾아간 해맞이 공원 . 마침 날씨가 흐려 걱정을 하며 떠난 여행이었다. 부산에서 출발할때는 비올 확률이 높다는 기상청의 일기예보였는데 그래도 다행이 비올 기미는 보이지 않아 이곳에서 멋진 모양의 해맞이 등대를 보았다. 또한 해맞이 공원을 조성하게 된 경위도 알게 되었는데 그 조성된 이유가 엉뚱하다. . 

 

 


 


 

1997년 그 당시에 동해쪽의 해안선을 따라 도깨비 불처럼 산불이 이곳 저곳에서 많이 났다. 영덕읍의 창포리 일대의 산도 예외는 아니었고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타다만 소나무가 산 전체를 뒤 덮어 동해안 절경이 흉물이 되었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국토공원화 사업과 공공근로사업으로 강구면과 축산면의 해안선을 따라 해안형 자연공원을 조성하였다. 화재로 산림이 모두 잿더미가 된 상태에서 복구의 첫 삽을 들어 ‘자연 그대로의 공원’ 조성 기치를 내걸고 동해의 일출이 가장 아름다운 곳인 창포리에 해맞이 공원을 만들게 되었다.

 

 

 

 

이곳 해맞이 공원 전면에는 야생화 2만3천여 포기와 고유의 향토수종인 꽃나무 900여그루가 심어져 있어 봄과 여름에는 장관을 이룬다는데 마침 늦은 가을철에 찾다보니 화려한 꽃밭과 그 위에 아름다운 창포말등대를 함께 볼 수 없는게 아쉬웠다.

 

 

등대 내부로 걸어서 전망대로 올라 갈 수 있는 해맞이공원의 대게등대

 

 

블루로드 1코스 종착점이자 2코스 출발점인 해맞이 공원의 창포말등대는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어 두 눈을 사로 잡는다. 영덕의 상징인 대게를 형상화하여 만든 등대는 보는 순간 영화 ‘킹공’에서 킹콩이 빌딩 외벽을 잡고 있는 것이 연상 되었다.그만큼 독특한 모양을 하여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낮에 보았던 게등대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밤에도 찾아가 보았는데 조명으로 인해 더욱 웅장한 느낌이었다. 대게가 마치 꿈틀대며 등대를 잡고 올라가는 모습 같았다. 동해쪽으로 여행을 계획하거나 블루로드 해안선의 둘레길을 계획할 경우에 꼭 창포말등대를 둘러 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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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막 칠천의 메아리로 아이라이너 영상관에서 상영하는 칠천량 해전을 영상화한 모습. 수군이 몰숨을 걸고 싸웠던 그당시를 영상으로 꾸며  전쟁의 참상를 생각해 보는 공간이다.
 

 

 

 

☞(경남여행/거제도칠천도여행)임진왜란 패전지  칠천도. 패전도 우리의 역사 원균의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을 만나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란 없다" 지금의 화두에 가슴이 와 닿는말이다. 거제도 칠천도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다. 칠천량 해전으로 불리며  칠천도와 거제도 사이에 흐르는 지금의 칠천교가 놓여져 있는 부근이다. 이곳 일때가 정유재란때 원균이 이끌던 조선수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어이없게 참패를 당한 현장이다.  칠천량 해전은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에게는  유일하게 패배하였던 해전으로 그로인해 우리의 수군이나 조선백성은 많은 어려움과 핍박을 받았다.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군선을 버리고 뭍으로 후퇴하다. 쫒아 온  왜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이 칠천도 해전으로 우리 조선 수군은 군선이 160척, 1만여명의 조선수군이 칠천량에서 장렬하게 전사를 하였다. 통제사 원균이 선조의 명으로 전세의 불리함을알면서 출전할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과 조선수군의 허망한 죽음이 헛되지 않아 통제사로 다시 복귀한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에서 남은 군선 12척을 가지고 왜군의 군선 133척을 통쾌하게 섬멸시키며 수장시키는 쾌거를 이룬다. 이는 칠천도 해전의 패배로 땅에 떨어졌던 사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거제도 칠천도에 무슨일이 일이.... 칠천량 해전의 쓰라린 기억을 다시한번 생각하고  칠천량 해전으로 숨져간 우리 조선수군의 혼백을 위로하는 추모공원이 올해 조성되었다. "칠천량 해전 공원"이며 거제시 하청면 연구리 산 85-4번지 일원에 1만 2519㎡ 면적에 칠천량 해전에서 전몰한 조선수군의 추모와 해전의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다.

 

칠천량 해전 전기관은 모두 8개의 테마로 꾸며져 있다. 역사적 배경과 그 과정 그리고 결과등을 지금 부터 소상하게 알아보자.

 

 

옥게마을에 먼저 주차를 하여야 한다. 칠천도에는 캠핑장등 많은 시설이 만들어져 있다.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좌우로 바다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임진왜란때 조선수군의 군선인 판옥선을 본따 만들었다는 칠천도 해전 전시관 건물. 선미와 후미를 알 수 있다.




칠천량의 전망대로 거제도 본섬의 모습이 조망된다. 1597년 7월 16일 새벽 이곳에서 칠천량 전투가 벌어진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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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막은 희망의 메아리로 작품명은 "평화의 바다" 조형물이 광장에 만들어져 있다. 칠천량 해전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조상의 인내와 끈기, 새로운 희망과 미래를 담고 있다.


 








 

 

7막 치유의 메아리 추모의 바다에서는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조선수군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의 벽과 제단을 만들어 그 당시 순국한 1만여명의 우리 수군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1막은 역사의 메아리란 주제로 7년간의 임진왜란 역사와 칠천량 해전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다.  

 












 

2막은 기억의 메아리로 "조선수군을 보다"로 꾸며져 있다. 조선수군의 중추적인 군선이었던 판옥선의 단면과 구조를 연출하였고 함선 안의 생활을 옅볼 수 있다.



























 

3막은 회한의 메아리 "칠천량 해전의 배경"으로 꾸며져 있다.그당시 승전을 거듭하던 이순신장군을 몰아내기 위해 요시라의 반간계 장면을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볼 수 있고 선조가 이순신을 파면과 하옥을 하고 원균을 삼군수군통제사로 임명하여 가덕도와 부산포의 패전도 알아 볼 수 있도록하였다.
























 

4막 아픔의 메아리 "칠천량에서의 패배"를 테마로 꾸며져 있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파괴된 함선의 잔해와 바다로 내몰린 조선수군의 끔직한 모습을 모형과 영상으로 접할 수 있다.

 


 












5막은 부활의 메아리 "칠천량 해전의 결과"로 꾸며졌는데 전쟁으로인해 우리 백성들이 처한 처참한 상황을 볼 수 있다.


















앵산 정상에서 본 칠천도




칠천도에 연결된 다리 부근이 칠천량이다.



 

이곳 칠천량 해전 전시관을 방문하면 임진왜란때 우리 수군의 상황과 칠천도 해전 그리고 명랑대첩의 역사적인 의미와 배경을 소상히 알 수 있다. 역사의 교육장으로 임진왜란의 상황을 자라나는 아이에게 들려 준다면 그 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겠다. 거제도 방문시 자녀와 함께 방문하여 임진왜란과 칠천도해전을 다시한번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 보자.

 

 

◆칠천량 해전 전시관 관람안내

관람시간: 09:00~18:00

휴관일: 매년 1월1일, 매주 월요일 ,설날및 추석당일

(단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휴관)

관람료: 어른:2천원. 청소년,군인1천5백원. 어린이 1천원

주차장: 무료

 

칠천량해전공원홈페이지 발췌




칠천량해전홈페이지 발췌




칠천량해전홈페이지 발췌




네모안이 칠천량으로 추정 되는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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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금강 사자바위 일출(거제시청홈페이지 발췌)

 거제도 홈페이지 발췌

 

거제 해금강 하늘에서 본 전경(거제시청홈페이지 발췌)

 거제도 홈페이지 발췌

 



 

 

☞(경남여행/거제도여행)해금강, 바다의 금강산 거제도 해금강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한다. 국어사전에 금수강산을 찾아보니 “비단에 수를 놓은 듯 매우 아름다운 산천”의 뜻을 가졌다. 한마디로 천하의 절경지를 표현할때 금수강산이란 이름을 붙힌다. 그중 금강도 같은 말로 금수강산을 줄인 표현이다. 금강산은 천하절경을 대표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산으로 알려져 있고 그에 못지않은 곳을 소금강 또는 금강동천등에 비유를 한다.

 

 

 

 

☞(경남여행/거제도여행)해금강, 바다의 금강산 거제도 해금강 1971년 명승2호 지정.

산에는 금강산이 있다면 바다에는 해금강이 있다. 우리나라에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수식어가 모자랄 금강산은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분류한다. 바다를 끼고 이루는 기암절벽이 금강산 못지않다는 해금강은 가까운 경상남도 거제도에도 있다. 금강산의 해금강과 비교하여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바다의 금강 거제도 해금강은 명승에 걸맞게 우리나라 명승 제2호로 1971년 지정이 되었다.

 

 

 

 

☞(경남여행/거제도여행)해금강, 힌려해상국립공원 거제도 해금강은 거제8경,

거제시에서 정한 거제8경에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해금강이 올라있어 거제도가 해금강이며 해금강이 거제도일 정도로 거제도를 대표하는 관광지다. 거제 해금강은 경상남도 거제시 남부면 갈곶리 해금강마을에서 남쪽 바다로 500m 거리를 두고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섬의 모양이 칡뿌리가 뻗어 내린 것처럼 기묘한 바위가 흘러내려 갈도라 불렸지만 현재에는 해금강으로 완전히 굳어진 상태다.

 

 

 

 

☞(경남여행/거제도여행)해금강, 진시황의 불로장생초의 섬 거제도 해금강 서불과차.

해금강의 최고봉은 116m이며 섬의 면적은 0.1㎢로 예로부터 신비한 약초가 많은 섬으로 알려져 약초섬이라 불렸다. 중국의 진시황도 소문을 들었는지 영구불멸의 명약인 불로장생초를 구하러 동남동녀3천명과 서불을 이 섬에 보냈다. 서불은 자신이 이곳을 지났다는 뜻으로 “서불과차”라는글자를 해금강과 마주보는 갈곶리 우제봉 암벽에 세겼는데 1959년 전국을 초토화 시킨 태풍 사라호때 글자만 떨어저버려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버린 아름다운 섬 해금강. 유람선은 외도 관광과 함께 2시간30분 소요된다.

 

 

 

 

☞(경남여행/거제도여행)해금강, 거제도 해금강의 사자바위 일출이 장관.

다대항에 있는 다대유람선터미널에서 출항하는 다대1호를 타고 해금강으로 출발하면 좌측으로 시원한 전경이 펼쳐진다. 해금강을 이루는 신선대와 바람의 언덕, 우제봉 전망대가 가까이 보이고 우제봉을 돌아가면 서서히 갈도였던 바위섬 해금강이 나타난다. 먼저 해금강에서 뚝 떨어진 작은 바위는 사자가 포효하는 모습을 하고 있어 사자바위로 부른다.

 

 

 

 

이른 아침 사자바위 사이로 떠오르는 해는 거제도 일출 포인트의 제1경으로 많은 사진작가가 탐을 내는 일출 장소다. 이곳을 지나면 해금강은 옹립한 바위 직벽이 마치 철옹성을 연상시키듯 거대한 장막처럼 솟구쳐 있다. 그 중간에 불뚝 솟은 미륵불은 좌우로 바위가 둘러져 화려한 연꽃잎에 둘러 쌓인 것 같이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지나가는 어선들의 안전을 지켜주는듯 엷은 미소를 짓고 있는 듯 하다.

 

 

 

 

☞(경남여행/거제도여행)해금강, 바다의 금강산 거제도 해금강 십자동굴이 볼거리

넉살 좋은 유람선 선장님의 해설을 뒤로하고 이번에는 해금강 최고의 비경인 십자동굴을 들어간다. 암벽과 암벽사이로 빨려 들어가듯 그 큰 유람선은 스르르 밀려 들어가니 앞으로 더 이상 전진을 하지 못한다. 사방으로 바위병풍을 이룬 십자동굴은 동굴안이 십자로 갈라져 그리 부른다. 이곳을 나오면 송곳 같은 촛대바위등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해금강의 비경에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온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지금부터 해금강 구경을 하도록하자.

 

 

우제봉전망대

 

 

사자바위

 

 

해금강과 사자바위

 

 

사자바위

 

 

 

 

 

 

 

 

미륵바위

 

 

 

 

 

 

 

 

 

 

 

십자동굴

 

 

 

 

 

 

 

 

 

 

촛대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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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거제도여행)거제섬꽃축제, 해바라기가 국화과에 속한다는군요. 거제섬꽃축제

 

거제시 거제면에는 가을 축제인 거제섬꽃축제가 11월2일 부터 10일까지 9일동안 열리고 있다. 거제섬꽃축제를 찾아가는 입구는 정문과 후문쪽으로 두군데 있다. 필자는 거제시 스포츠 파크를 통해 들어가는 후문 방향으로 찾아갔다.


 






 

매표소 건물을 지나면 목재덱 다리를 건너가게 된다. 이곳을 지나면 본격적인 거제섬꽃축제현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9만3천제곱미터의 큰 규모에  6개 분야 60개의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거제섬꽃축제는 1억송이와 150여종의 국화품종으로 100여개의 조형물로 이루어진 전국적인 규모의 꽃축제다.

 

 



 

후문에서 처음 만나는 꽃이 해바라기로 국화과라는 사실에 먼저 놀랬다. 태양을 따라 다닌다는 해바라기 그래서 방긋웃는 어린아이를 해바라기꽃에 비유를 한다. 마음속에 희망을 상싱하는 꽃으로 자리잡은 해바라기가 우리의 마음을 급 빙긋하게 만든다.

 

 



 

이제 도심에서는 좀체로 만나기 힘든 해바라기 거제시 거제면 가제섬꽃축제에 가면 어릴적 추억과 함께 만날수 있다. 가족과 또는 연인과 함께 가을꽃인 국화와 코스모스가 축제를 대표한다면 한여름 그 찌든 무더위도 태양을 피하지 않으며 오로지 태양만을  바라보고온 해바라기야 말로 거제섬꽃축제에서 가장 상징성을 가진 꽃이다. 거제섬꽃축제를 찾아 즐거운 추억도 만들면 좋을 것 같다.

 


 

 

해바라기는 국화과로 1년생풀이다. 원산지는 중앙아메리카로 우리나라전역에서 심어져 왔어며 해바라기의 어원은 "꽃이 해를 향해 핀다"는 중국어 향일규(向日葵)에서 유래되었다. 영어로는 Sunflower라하며. 헬리안투스(Helianthus)를 번역한것이다.  해바라기 씨에는 종자유가 포하되어 있어 식용, 비누원료, 도로원료등에 사용되며 한방에서는 구풍제와 해열제로 쓰인다. (다음백과사전 이상태 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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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열암곡석불좌상. 입을 닫고 살기위함인지 마스크를 한 열암곡석불좌상.



◆경주 열암곡 석불좌상◆

경주 열암곡석불좌상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13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산 119

남산에는 많은 불상과 삼층석탑등 신라시대의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곳이다. 흔히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경주 남산. 남산에서 삼릉과 화랑교육원이 있는 남산리를 서남산과 동남산의로 분류한다. 두곳의 문화재는 사실 여러번 포스팅을하였다. 열암곡 석불좌상이 남남산도 봄에 다녀왔던 곳으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 석불좌상 주위로 눈이 그 당시에도 남아 있어 계절상 다시 곧 겨울이 올 것 같아 더 늦기전에 포스팅을 하였다. 남산에서면 인간과 함께 공존해온 숨결의 변화를 느껴보게된다. 남산 노곡리 열암계곡 7부 능선에 능선에 자리한 열암곡석불좌상은 항마촉지인의 자세로 연꽃좌대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2005년 처음으로 주변에 파손된 상태로 남아 있던 불두가 발견되어 정비를 하게 되었는데 주변에 흩어져 나뒹굴던 파편을 찾아내어 끼워맞추는보수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열암곡석불좌상을 보면은 육계는 낮고 넓다. 얼굴은 양감이 있지만 코와 입주변은 깨어진 상태로 꼭 마스크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불상을 보면은 당당한 자세로 안장감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혼신을 다하여빚어낸 어느 석공의 걸작품이다. 석불좌상의 광배는 화염문과 당초문 그리고 9구의 화불을 섬세하게고 세세하게 새겨 놓았다. 석불좌상을 받치고 있는 연화좌대는 상대는 앙련을 3단으로 두고 하대는 복련을 새겼다. 상하대 사이의 팔각 기둥인 중대석은 만들어 끼웠다. 이 불상은 석굴암의 본존불과 비슷하며 8~9C 통일신라시대의 조각양식과 수법을 따르고 있다.





 







광배의 모습.







마스크를 한 열암곡석불좌상




열암곡석불좌상.
















열암곡신발견마애불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열암곡석불좌상 때문에 열암곡신발견마애불도 이곳에서 발견, 열암곡석불좌상.


이곳에는 전국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열암곡신발견마애불 발견되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곳 열암곡의 신대륙 마애불의 발견은 참 우연이라 할 수 있다. 기존에 있던 열암곡석불좌상 때문이다.  경주의 많은 불상이 머리가 떨어져 나간 상태로 불신만 발견되고 아니면 불두만 남아 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 열암골의 석불좌상도 불두는 사라지고 몸만 남아 있었다. 그게 2005년에 우연찮게 답사객에 의해 계곡에서 불두가 발견이 되었다. 2007년도에 석불좌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앞으로 넘어져 불상의 존재를 알 수 없는 바위의 석불입상이 또 발견하게 된 것이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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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은 향교다. 각 고을마다 향교가 있었는데 이곳 하동에도 물론 하동향교가 있었다. 읍내를 배회하다가 찾아갔는데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였다. 풍화루를 새로 세우고 동재에도 한창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매년 조금씩 문화재 복원공사가 진행된다 하였다.

 

 

 

 

복원공사중이라 그런지 자재로 향교 내부가 너무 어수선하여 볼짬도 없었다. 공사하시는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제 단청공사만 남았다는 이야기였는데 지금쯤은 올해 공사는 모두 마무리가 되였을 것 같다..  하동향교를 들어서기 위해서는 풍화루를 통해서 들어간다. 향교 정문의 역활을 하며 2층의 누각이다. 정면3칸에다 측면이 2칸으로 팔작지붕 모양세다. 유생들의 휴식과 여름철에는 이곳에 나와 학업등 다양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하동향교는 1415년인 태종15년에 고전면 고하리에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향교는 유교의 옛 성현을 받들고 모시는 곳으로 이곳에서 인재 육성과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긴 조선시대 교육기관이다. 교육기관의 중추적인 역활을 담당하였던 하동향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화재로 소실되어 버린다. 그 후 1660년에와 현종때 횡천면에다 복원을 하였다.

 

 

 

 

1736년 영조12년에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게 되었는데 일반향교와 같이 전학후묘의 배치를 따랐다. 하동향교도 교육과 제례의 두 영역으로 나누었는데 명륜당은 교육을 담당한 공간으로 앞쪽에다 배치를 하고 제례를 모시는 공간인 대성전은 뒤쪽에다 두었다. 명륜당, 대성전,내삼문, 풍화루, 동서재등의 건물로 이루어졌는제 산비탈의 지형적인 영향으로 향교의 중심축인 명륜당이 한쪽으로 조금 비켜 앉아 있고 한단 밑 좌우로  동재와 서재를 두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3호이며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읍내리에 현재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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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여행)일제강점기 일본인 식수원이었던 힐링숲 법기수원지 여행. 


법기수원지

부산에서는 일제강점기때 조성된 수원지가 셋 있다.

서구의 구덕수원지, 초읍의 성지곡수원지, 그리고 양산 동면의 법기수원지로 일본인들이 깨끗한 물을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한다. 구덕수원지와 성지곡수원지는 시내에 있어 식수원의 역할은 사라지고 그대신 공원의 유원지을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동면의 법기 수원지는 현재에도 부산의 선동 두구동 청룡동 남산동의 7,000여 세대에 맑은 물을 공급하고 있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까지도 출입이 엄격히 통제를 하였는데 최근에 수원지를 개방했다고 하여 주말에 방문을 하였다.
    



 법기수원지는 1927년에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래서인지 79년만에 개방을 한다고 하니 많은 시민들로 인해 북새통을 이루었다.
넘쳐나는 차량과 인파로 인해 법기수원지는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필자도 그 틈새에 끼어 출입구를 들어서니 배낭을 벗어 놓고 가란다
.


법기수원지 주소: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법기리 332



 여기는 상수원 보호를 위해 배낭등 일체 음식물을 담아 올 수 있는 가방은 반입을 통제한다는 것이였다. 사물함이 따로 비치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땅바닥에 그냥 놔두고 가라니 참 기가 찰 노릇이다. 분실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는.
‘할수없이 목마른 놈이 우물판다’는 속담처럼 따라 할 수 밖에, 배낭을 벗어 놓고 걸어가니 가족과 함께 또는 친지와 직장동료, 산악회등 많은 사람들이 개방된 법기수원지를 보기 위해 들어왔다.




우측으로 돌아가니 여름이 지나가는 문턱에도 나무들은 한껏 푸른색으로 치장을 하고 80년 가까이 속내를 감추었던 그들의 모습을 한풀한풀 속살을 벗겨 내 주었다.
우측으로 일제때 심은 것으로 보이는 반송이 늠름하게 서 있고 취수원 취수구가 보였다. 여기서 원수가 빠져나와 물이 공급되는 것 같아 철문 안을 보니 굵은 파이프가 설치되어 있다.



다시 나와 댐 밑을 따라가니 좌측으로는 수목이 펼쳐진다. 참 아름다운 길이다.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뻗어 올라있다.
30m는 됨직한 나무들의 모습에 새삼 감탄을 한다. 성지곡이나 구덕수원지에도 이 같이 조성을 해 놓았는데 말이다.



안내판을 보니 1932년 준공되었고 총저수량은 1,507천톤이며 최고수위가 197m나 된다고 하는 그래도 꽤 깊은 것 같다. 댐을 오르는 계단에는 좌측통행으로 오르내리고 있다. 사람들로 인해 밀려 올라가는 형국으로 댐 위에 있는 반송이 인상에 남는다.



90년 정도된 소나무로 이곳 댐 조성과 함께 옮겨 심은 것으로 문화제로 지정이 되어 있다 하며 반송인 소나무에 매료되어 너도나도 사진을 찍는다고 난리다.
 그러나 소나무가 너무 낮아 보호관리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나무에 올라 가지마세요’라는 작은 명찰을 달고 있다.



넓은 호수를 도는 길은 아직 개방이 되지 않으며 우측으로 원수가 빠져 나가는 탑이 꼭 뱃길을 인도하는 등대 같이 법기수원지를 인도하였다.
계단을 내려와 편백나무, 삼나무가 도열된 길을 빠져나오면 법기수원지 탐방은 끝나는 것이다.


최근에 신문이나 방송의 뉴스에 법기수원지 많은 인파로 몸살, 인원제한과 법기수원지 2차 개방 잠정 중단등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아니 그러면 처음부터 개방을 하지 말던지 성급하게 개방은 왜 했는지 모를 일이다,







사실 대중교통편을 이용하라해서 버스를 타고 입구에서 걸어 들어가 고작 댐 한번 올라가 보고 내려오는 것을 위해 하루의 시간을 투자해야 할까. 5분를 위해 그 많은 시간을 투자하라니,
잠시 둘러보고 가는 관광객이면 별 이견이 없겠지만 하루를 가지고 나선 사람들은 법기수원지 5분을 보고 돌아가야 한다니 분통이 터질일 아닌가.



보고나온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고작 댐과 나무 몇그루 보기 위해서는 오지 않았다는 볼멘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정도면 성지곡수원지에 가도 다 똑 같은 모습이다.
수원지둘레길을 걸어보기 위해 찾아 왔다는 이야기인것이다. 필자인 나도 수원지둘레길을 걸어볼 욕심으로 찾았는데 실망 실망만 하고 돌아 나와야 하였다.





지금은 성숙된 시민의식을 믿어야 할때이다. 회동수원지도 부산 시민의 식수원이며 시민의 식수원을 부산 시민에게 물의 상태를 보여 줌으로 해서 더욱 보호가 되지 않을까.
자기가 먹을 물에 침을 벹겠는가 말이다. 회동수원지도 개방된 마당에 법기수원지는 왜 개방을 전면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것은 79년만에 개방이 되었다하니 몰려드는 것이고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여지며 하루빨리 둘레길 조성을 하여 인파를 분산하는게 더 좋은 방법일 것이다. 나 같아도 5분을 위해서는 다시 찾을 생각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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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산정

(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칠산정. 세월 앞에 장사 없다. 문화재 관리의 현주소 밀양 칠산정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78호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미촌리 796번지

칠탄산 아래에는 두 재실이 있다.
칠탄정을 아랫재실 칠산정을 윗재실이라 구미마을에서는 부른다.

모두 손씨 집안의 재실이지만 칠탄정은 밀성손씨의 오한 손기양이 만년을 보내던 별업이고 칠산정은 일직손씨로 본관은 안동이다.

시조는 고려시대때 중국 송나라의 전란를 피해 우리나라로 귀화하였는데 원래 순씨였다 한다.
현종의 이름이 순이라 음이 같아 현종이 손으로 사성하였다.
현종때 개국공신으로 손응이며 그의 후손으로 충정왕때의 영의정인 ‘삼중대광판삼사사’ 정평공 손홍량이고 8세대인 격재공 손조서에와 일직손씨의 꽃을 피운다.
세종14년에 진사에 그리고 1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학사로 수양대군에게 단종이 폐위되면서 정치에 환멸을 느껴 낙향을 하게 된다.
그의 '두우시'에는 옛 단종을 그리워하며 ‘두견새도 나와 같아, 밤낮으로 끊임없이 우는구나’ 하며 신하는 두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며 세조가 이조참판에 재수함에도 거절을 하고 이곳 월연정 옆 용호정(밀양시 용평동 장선마을)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평생을 단종을 그리워하며 세상을 등지며 보냈다.
산외면 다원리 혜산서원에서 봉향을 하고 있다.











칠산정은 격재공의 13세손인 처사 손응룡의 묘하재숙소이다.
손응룡의 증손자 죽암 손건이 즉 7개의 골짜기와 7개의 능선이 합해지는 곳이라하여
칠산이라하며 일곱실이라고도 하는 이곳에
1863년 9월에 창건을 하여 모선재, 구호당이라 하였다.
1895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5세손인 손기형이 1906년에 중수 하여 칠산정이라 하였다.







근대 초기 밀양지방의 양반재실로 별업을 겸한 재각이다.
정당의 마루는 재회의 장소로 좌우 온돌방은 재관들의 거처로 제수마련은 방앗간채와 고직사에서 하였다.
청송루의 누각은 온돌방과 누마루를 넣어 전사청, 직방등의 기능을 하였다.

 




문화재로 지정된 칠산정도 세월 앞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피부로 느껴진다.
새로 올린 지붕(모양만 기와 모양)이 복원공사의 전부인지 모르지만 한복에 구두을 착용 한 것 처럼 엉성한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여기도 칠탄서원 처럼 대청마루에는 쥐생원들이 이집의 주인인양 쥐똥들이 즐비하고 청송루의 누마루는 음산한 기분 마저 든다.
언제까지 방치를 할런지 모르지만 지금 이상태라면 곧 또하나의 문화재가 사라질 판이다.
칠산정을 관리하였던 후손들의 기거한 건물의 모습은 칡덩굴에 집의 흔적만 보이고 땜질하듯 문화재 보수를 한후 관리를 하지 않으니 밑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전체적으로 관리를 하지 않는 문화재는 청도의 선암서원처럼 보수를 해 임대를 하여 고택체험이나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찾을 수 있고 훈기가 있는 곳으로 먼저 바꾸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그래야만 자연적인 파괴는 면할 수 있을 것 같다.





















찾아가는 길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밀양행 시외버스는 오전 7시부터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  1시간 소요. . 들머리인 단장면 미촌리 구미마을은 감물리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오전6시10분, 8시10분 11시50분, 구미교를 건너 우측 구미마을회관앞을 지나 마을 뒤 우측깊은 골짜기를 보고 따라간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울산 언양 24번~금곡인터체인지에서 단산마을로 내려서표충사 단장면 방향으로 내려선다. 금곡교를 건너 우회전하면 사촌마을~구미마을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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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탄서원(七灘書院)

☞(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단장면 칠탄서원. 문화재라며 밀양관광책자에 나오는 칠탄서원이 흉가수준이라니...


밀양, 청도를 여행하다 보면은 많은 문화재와 만나게 된다.
유형문화재 또는 문화재자료란 이름으로 지정이 되어 있어 큰 기대를 하고 찾아간다.
기대를 하고 간 만큼 우리의 고가들을 보고 오는 기쁨 또한 매우 크다.

청도 신지리의 만화정, 운강고택, 선암서원, 삼족대등과 밀양의 오연정 월연정 금시당등 선조들의 풍류를 느끼면서 찾아가는 재미 또한 솔솔하여 만족을 하고 돌아 온다.
어떠한 경우에는 안을 들어 갈 수가 없어 까치발을 들고 고택을 보는 것으로 만족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잘 정돈되고 관리가 되고 있는 문화재를 보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 올 수가 있었다.





밀양의 칠탄정을 찾아가는 길은 보통의 문화재 가는 길과 다르다.
단장천이 앞을 막고 있어 구서원이 있는 활성2교 다리를 건너야만 찾아 갈 수 있다.
구역은 단장면에 속하지만 단장면에서는 들어갈 방법이 애매하다.
넓은 동천(칠리탄)을 도강하던지 아니면 구미마을의 안법천을 신을 벗고 건너 가야 칠탄서원으로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 마을어른들의 이야기로는 밀양읍내나 학생들의 동굣길도 모두 이길을 따라 칠탄정을 거쳐 활성동의 살내 ~금시당 옛길을 따라 밀양으로 갔다하는데 지금은 인걸도 간데없고 옛길도 사라지고 고가 또한 흉가로 방치되고 있어니 찾아간 나로서는 황당하면서 마음이 아프다.
 


밀양시에서 발행하는 관광홍보 책자인 밀양여행 46P에 문화제자료 제72호 칠탄서원과 혜산서원이 함께 나와 있는데 관리 상태는 천차이다.
칠탄서원은 밀성손씨의 오한 손기양(1559~1617)이 임진왜란때 석동산(지금의 운문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웠서며 만년에는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학문을 가르쳤던 곳이다.
1725년에 그의 후손들이 다시 중건 하여 진암서당으로 고쳐부르다가 1844년에 청절사를 지어 손기양의 위폐를 모시고 칠탄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때와 서원 철폐령에 의해 서원은 헐려 버리고 1914년에 다시 건물을 올렸다.

 
‘ㅁ'형태의 건물로 묘우 앞에 정면 5칸인 팔작지붕의 강당이 있다.
좌우로 1칸씩 방을 넣었고 중앙의 3칸은 마루를 넣었다. 강당앞에는 좌우로 누각 형식의 동,서재가 있고 정문역시 문루를 통해 드나들게 하였다.
사실 칠탄 서원 앞을 흐르는 강은 밀양강의 지류로 동천이라 부른다.
엄연이 말하면 구미마을에서는 이곳만 잘라 칠리탄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단장리 앞의 경주산에서 두 물길이 서로 만난다.
산내천과 단장천이 서로 만나 칠리를 흐르면서 여울을 만드는데 그야 말로 아름다운 곳으로 칠리탄이라 하며 칠탄서원이 칠탄산 자락에 숨은 듯 자리 하고 있다.



칠탄서원을 찾아가면 문화재 관리 실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4동의 건물이 곳 허물어 지기 일보 직전이며 천장으로 다닌 쥐때문에 마루마다 까만 쥐똥들이 천지이며 방문과 대청을 닫고 있는 문짝들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들렁거리고 허리까지 자란 잡풀로 인해 이곳이 문화재가 되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하지만 엄연히 문화재란 안내판이 붙어 있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아마 남량특집극 전설의 고향 촬영 섭외장소로 이용하면 딱인데...









































찾아가는 길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밀양행 시외버스는 오전 7시부터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 주말에는 오전 9시40분과 오전 10시20분에도 있다. 1시간 소요. . 들머리인 산외면 활성2동은 밀양터미널에서 남명리 얼음골행 및 표충사행 어떤 버스를 타도 다원마을에 정차한다.
얼음골6시10분 9시35분 (직행)10시55분 7시05분 8시, 9시05분, 10시40분, 11시30분
표충사6시20분 9시10분 (직행)7시35분,8시45분 10시10분 11시20분
그리고 감물행 고례행 국전행 시내버스도 이용할 수 있다.
다원정류장에선 하차한 후 버스진행 방향으로 직진하면 '율전 구서원 또는 리더스CC'를 가리키는 팻말을 따라가면 된다. 20분쯤 걸린다. 구서원 입구 활성2교 다리를 건너 리더스cc 입간판에서 왼쪽 동천을 따라가는 산길이 열려 맀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울산 언양 24번~금천리 용평~굴다리 통과~(이후 리더스CC 팻말 따라 가면 됨)~금천리 남기리 용평 방향 좌회전~신동국밥, 금천마트 지나~화동 표지석~용평 용활 방향 좌회전~동천변 활성2교 부근에 주차를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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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산외면 죽원재사. 밀양시 옛고을 다원리 오한 손기양의 죽원재사를 찾아서...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다원마을은 손씨 집안의 고택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모두 한집안의 후손들이 일가를 이루어 살고 있는 줄 알고 있지만 마을을 찾아가면 두 손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외면사무소를 기준으로 하여 죽동과 죽서로 나누는데 왼쪽은 환경부장관을 지낸 손숙씨의 고향인 일직손씨 집성촌이 혜산서원을 매개로 하여 이루고 있으며 오른쪽인 다원2리는 조선조 초기에 생원 손겸재가 입촌한후 죽원재사의 오한 손기양의 후손인 밀성손씨가 세거를 이루고 있다.

이곳 죽포정사는 산외면 사무소 뒤 평전산 아래에 있는 오한 손기양의 재실로 5대손인 죽포 손사익에 의해 1753년에 건립되었다. 치재소인 죽원재사와 죽포 손사익의 죽포정사가 각각 보존되어 있다. 이곳 죽원재사도 건립된후 세월의 흔적을 지울 수 없어 황폐화 되어 오다가 1956년에 다시 중수를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한다.












백송

































모당천

예전에는 죽원재사를 가기위해서는 모당천을 거쳐 갔는데 이 모당천도 재미 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중국 원나라때 난리를 피해 이곳까지 피신을 온 모씨와 당씨가 식수를 구하기 위해 팠던 샘으로 모당샘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다죽리에는 모씨와 당씨는 한명도 거주를 하지 않으며 국내의 당씨성을 가진 사람들중 밀양이 본관인 사람들은 처음 이마을에 온 당씨들의 후손이라 한다.



찾아가는 길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밀양행 시외버스는 오전 7시부터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  1시간 소요. 부산역에서는 밀양행 열차가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 6시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10시20분등  많이 있다 밀양역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밀양시외버스터미널로 간다 .  밀양터미널에서 남명리 얼음골행 및 표충사행 어떤 버스를 타도 다원마을에 정차한다.
얼음골6시10분 9시35분 (직행)10시55분 7시05분 8시, 9시05분, 10시40분, 11시30분
표충사6시20분 9시10분 (직행)7시35분,8시45분 10시10분 11시20분
그리고 감물행 고례행 국전행 시내버스도 이용할 수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울산 언양 24번~금천리 용평~굴다리 통과~ 산외면 다원리 방향 우회전~산외면 사무소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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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영남루,. 무더운 날에 밀양 영남루에 올라 시원한 대청마루를 생각한다.


밀양하면 먼저 떠 올리는 것이 무엇일까?. 표충사, 사명대사, 영화 밀양촬영지, 얼음골,등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십중팔구는 밀양의 영남루를 먼저 생각할 것이다.
그만큼 영남루는 외지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으며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은 그런 곳이다. 영남루는 어떤 누각일까. 밀양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축물로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힌다.

1300리를 달려와 바다로 빠지기 전에 합류되는 마지막 낙동강 지류인 밀양강가에 솟은 건축물이다. 밀양읍성의 아동산 자락을 휘감아 도는 밀양강가 주위로 정면의 일자봉에서 용 한마리가 힘차게 꿈틀대며 밀양강 용두연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형상의 용두산과 좌측으로는 호두산 즉 범머리산이 월연정 앞의 월연에서 물을 뿜는다하여 호분탄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름하여 좌백호 우청용이며 용두목아래에는 밀양강이 빚어낸 최고의 절경지가 펼쳐진다. 삼문동을 감싸며 흐르는 밀양강, 종남산에서 흘러내린 말머리산인 마암산과 방울재 옆의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복호암이 감싸는 절경의 중심에 2층으로 시원하게 누각을 올리니 이를 영남루의 앞 정원이라 한다. 






영남루는 밀양강과 조화를 이루며 밖에서 보는 외적임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3대 누각답게 영남루는 내적인 아름다움도 무시할 수 없다. 화려한 단청과 영남루를 화재로부터 보호를 하기 위해 물의 수호신인 용을 영남루에 새겨 넣었고 영남루 안 내 귀퉁이에 봉황과 용 거북이를 그려 넣어 영원한 영남루를 꿈꾸었을까. 누각을 연결하는 월(月)자형 계단을 넣어 한층 영남루의 품격을 더 높혔고 밀양강에 구름이 끼여 있는 운치 있는 영남루를 생각해보라. 신선이 따로 없을 것이다. 그것을 항상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루 끝을 운상인 구름모양을 돌려놓았고 꽃병에 화려한 꽃들이 꼽혀 있는 조각들이 영남루를 돌려 놓아 사시사철 구름위에 화려한 꽃들이 장식되어진 영남루가 되게 하였다.

이런 곳에다 시가 빠질수가 있을까. 당대의 명필가인 퇴계이황, 목은이색, 문익점등 많은 분들이 시문을 현판으로 남겨 놓았다. 처음 이자리는 신라 경덕왕때에는 영남사란 사찰이 있었다 한다. 그 사찰네 부속 건물인 누각을 고려 공민왕때인 1365년 밀양부사인 김주에 의해 규모를 더욱 크게 확장을 하였다 하며 현재의 누각은 1844년에 이인재부사가 중건을 한 것으로 보물제 147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영남루 마루에 올라서면 많은 글씨체를 볼 수 있다. 영남루, 영남제일루, 교남명루등 많은 현판들 속에 1843년 7살의 이현석군과 11세의 이증석은 이인제부사의 아들이며 그들은 형제인데 어린나이에 대단한 필력으로 영남루와 영남제일루의 현판글씨를 남겨 지금도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날씨가 자꾸 무더워지고 여름으로 달려가고 있는 요즘이다. 영남루 누각마루에 올라 앉아 시골의 대청마루에 걸터 않아 여름을 달래던 추억을 생각하며 향수에 젖어 보면 어떨까.










































누각을 서로 연결하는 月자의 계단



















찾아가는 길;
부산역에서 무궁화호나 새마을호 열차로 밀양역까지 간다. 무궁화호 첫 차는 오전5시10분에 있고 20~4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43분 소요, 3800원. 밀양역 앞에서 영남루에 가는 시내버스는 수시로 있다. 1, 1-2, 5, 6번 등 다양하다. 10분 소요.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에는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밀양 방면으로 24번 국도를 타고 긴늪사거리에서 직진, 밀산교를 건넌 후 표지판을 따라 영남루 앞으로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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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상동 박연정. 강물에 노니는 물고기 수를 헤아렸다는 수어대가 있는 밀양의 박연정

조선 중기 학자이자 최초의
 운문산 유람기인 '유운문산록(遊雲門山錄)'을 남긴
 수헌(壽軒) 이중경(李重慶·1599~1678)선생은 운문산을 들어서는 들머리를 이곳 박연정이라하였다.


박연정은 양무공 김태허(1555~1620)장군의 별장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원래는 이곳이 능성 현감을 지낸 이담용의 관란정이란 정자 터 였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이곳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터에다 양무공이 박연정을 지었다.





그후 중창과 확장을 거쳐 박연정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약70년  뒤인 1682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소실이 되고 말았다.
이곳은 양부공의 박연정이 있었다는 곳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180년 뒤인 양무공의 9대손인 영장 김난규가 폐허가 된 이곳에 다시 정자를 중건하였다.



일제시대때인 1938년에 후손들에 의해
충의문이 세워지고 1966년에 추유재가 새워졌다.
박연정 뒤로 돌아나가는이곳에 수어대의 천길절벽이 서있다.
동창천의 물이 맑아 수어대 아래 연에서 노니는 물고기의 수를 헤아렸다.
그 위 갂아지른 절벽은 빙허대로 바위절벽을 돌아올라 동창천을 바라보면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암반이 튀어 나와 있다.그래서 빙허대인가.


이방위 또는 아방위로 불리는 빙허대
바위의 모양이 어린애의 모습과 같다하며
주변의 오례산성과 그 아래 빼어난 절경으로 인해
넋을 잃고  허공에 의지하게 된다는 빙허대
 그 암반위에 푸른노송이 용트림을 하듯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 만년송이라 부른다.
만년송과 빙허대 수어대 박연정이 함께 어울려 빼어남을 더한다.


'박연'은 임진왜란 때
밀양부사와 울산군수를 역임하며 전공을 세웠고
전후 정일품인 호위대장에 이른 무신인 양무공 김태허의 호(號)이다.
그는 관직을 버리고 이곳 고정리 뒷말리산(소천봉) 끈티인 박연정에서 만년을 보냈다.
이 쪽문을 통해 박연선생이 빙허대에 올랐을까.











암반인 빙허대와  그위에 자라는 만년송


빙허대에 올라서면 북으로 동창천과 오례산성등 주위의 경치가 빼어나다.



모정마을 가는 길의 양무공의 가묘터





찾아가는길
부산역에서 상동역 무궁화 열차는 7시45분. 상동역에서는 신곡리행 버스가 상동파출소앞 정류장에 오전9시5분경에 지나간다(밀양터미널에서 8시50분출발).모정마을 박연정 앞 하차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밀양 방향으로 가다가 첫 번째 만나는 사거리(긴늪사거리)에서 청도 방향으로 우회전, 25번 국도를 탄다. 상동역 지나서 상동교를 건너지말고 고정리 매화리 방향 직진한다. 고정리를 지나 매화리 방향을 진행하면 모정마을 표지석과 만나고  그뒤로 박연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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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청도여행)금천면 입암정. 청도군 신지리 입암정 찾아가기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입암마을 선암서원 옆에는 입암정이란 정자가 있다.
국헌정이라고도 부르며 마주보는 어성산과 그 우측에는
소요당 박하담이 매사냥을 즐겼다는 방응봉이 솟아 있고

 그 아래 동창천이 굽이쳐 소와 애암을 만드니 봉황애라 부른다.
임진왜란때 동래성이 함락당하고
종과부적으로 청도땅까지 밀려들어 온 왜적과 맞서 싸운 신지리 밀양박씨 문중의 14의사 중 한분으로
동창천 굽이치는 이곳에 국헌 박경윤선생이 낙향하여 말년을 보내던 곳이다.
소요당박하담의 손자이며 임진왜란때는 구국의 정신으로 왜적과 싸운 창의공신이며
제우당 박경전과 국헌선생은 형제지간로

임진왜란으로 적천사에 보관중이던 예부운락이 소실되자
충북영동으로 달려가 원판을 구해
1573년 선조6년에 다시 복각한 만력판이 현재 남아 있다.
입암정의 이건물은 여러번의 중수를 거쳐 1901년에 후손들에 의해 다시 지어 졌다.
그러나 세월의 무게는 견디지 못하고  
2010년 7월에 후손들에 의해 다시 그 때 모습 그대로  건립을 하였다 한다.  
지금은 옛 모습은 사라지고 없지만
봉황애와 용두암인 선암의 전설을 안고 또 한세기를 버틸수 있을 것 같다. 
입암정과 마주보고 있는 건물은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고 폐가 수준에 이르고 있다.
입암정에 간 날이 마침 국헌정의 문중에 행사가 있어 이곳에 많은 후손들이 왔다한다. 
평소에는 거주하는 후손 없이 문이 잠겨진 상태로 있어 들러 볼 수 없지만
선암서원 만하정과 함께 선조들의 충의정신을 옅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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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청도여행)금천면 선암서원. 청도 선암서원에서 전통 고택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다네요


선암서원은 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박하담의 위폐를 모신 곳이다.
매전면에 있던 위폐를 조선 선조때 이곳으로 옮겨와 선암서원을 개창하였다.
고종때 재차 중건을 하여 선암서당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암서당은 여타 서당과 달리 가정집인 살림집과 함께 건립이 되어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살림집이 위치를 하는데 좌측으로 안채이며
우측으로는 사랑채인 득월정이 서로 담하나를 두고 경계를 짓고 있다.
득월정 옆 중문을 들어서면 소요당인 서원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소요당은 정면5칸 측면2칸으로 좌우로 전퇴를둔 방을 두었다.
중앙의 마루에는 뒤를 문을 달아 서로 통하도록 하였고
 천장의 공포는 서원으로서는 보기 힘든 조각품으로 짜 맞추어져 있다.
방을 꾸민 기둥은 평주로 꾸몄다. 일반적으로는 보통 고주로 기둥을 세우는데
선암서원은 특이한 기법을 사용하였다.






청도땅 신지리 선암서원 뒤편에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교과서나 책에서는 듣지 못했던
충의 의미를 돼세기는 한집안의 이야기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임란창의14의사전적비'로 임진왜란때 왜적이 동래성을 함락하고 물밀듯이 청도땅으로 쳐들어 왔다. 

이곳 밀양박씨 박하담의 후손들이 분연히 일어나
삼촌과 조카,형제,부자지간의 14의사가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하고자 어성산에서 산성을 구축하고 왜적과 싸웠다.  
이 전쟁에서 천성만호 박경선은 전쟁중 손목이 잘려 나가는 부상을 입고서도
왜장을 끓어 안고 봉황애에서 떨어저 전사를 하였다.
그 봉황애가 전적비 뒤에 보인다.






파련형의 안초공을 사용하여 평주를 세운 선암서원 모서리 기둥의 모습

소요대




선암서원 뒤 쪽문을 내려서면 이마을 지명이 유래된 입암, 죽 선바위가 있다.

마을에서는 용두암으로 부르며 그 아래 소를 용두소라 부른다.
마을의 이야기로는 지금 바위 밑에 용머리 형상의 바위가 붙어 있었는데
태풍의 폭우로 인해 쓸려 내려 가

현재는 용의 머리 부분은 떨어저 나가고 물길도 돌려저 버렸다 한다.
 이 용두소 일대를 소요대라 통칭하여 부른다.

선암서원을 들어서는 출입문


안채의 모습

사랑채인 득월정과 돌담을 하나 두고 갈라저 있다.

사랑채인 득월정은 정면4칸 측면 1칸으로 구성이 되어 있고
정면 2칸은 마루를 넣었고 2칸은 방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뒤로는 문을 달아 놓아 수시로 열 수 있도록 처리를 하였다.






소요당 선암서원과 살림집을 갈라 놓은 중문의 모습

중문을 들어서면 수백년은 됨직한 백일홍 두그루가 뒷문옆에 심어저 있다.
이 배롱나무가 꽃을 필때는 선암서원은 더욱 한폭의 그림 같이 
탐방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것이다.


선암서원 천정의 다포식공포로 예술성이 돋보이며
서원으로서는 보기드물게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현재는 박향숙 씨가 서원을 관리하면서

전통고택 숙박체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백일홍 꽃이 활짝 피는 여름 휴가철에는 방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인터넷홈페이지(http://sunam.co.kr)
또는 전화(070-4150-8445)로 예약 문의를 할 수 있다.







선암서원의 뒤 건물로 장판각이다.

선암서원의 보물을 보관하였다.
배제예부운략판목, 지방문화재인 해동속소학판목, 14의사록판목을 보관하였는데
현재는 안동국악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










찾아가는길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청도역에서 내린다. 부산역 기준 오전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 6시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10시20분 등 자주 있는 편이다. 1시간 소요, 4800원. 청도역에서 나와 왼쪽으로 5분 거리에 있는 청도버스터미널에서 운문사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신지리에서 하차한다. 오전 7시40분, 9시20분, 10시40분, 11시30분 등 하루 8회 출발한다. 3200원.

자가운전의 경우 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린 후 좌회전, 긴늪사거리에서 청도방향 25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한다. 상동역 지나 신곡삼거리에서 좌회전, 상동교를 건넌 후 25번 국도를 버리고 오른쪽 매전 금천 방향 58번 국도를 탄다. 동창천을 따라가다보면 매전면 소재지의 처진소나무를 지나 매전교를 만난다. 우회전 해 매전교를 건너 진행하면 금천면 신지리 들어서면 선암서원 입간판이 보인다. 좌측으로 들어서면 곧 서원 앞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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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청도여행)금천면 운강고택, 조선시대 양반가의 대 저택 청도 운강고택

운강고택(雲岡故宅)

본 건물은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1479~1560)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 청도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하며 후학 양성을 위해 서당을 지은 자리에
조선선조9년인 1809년에 박정주가 분가를 하면서 지은 살림집으로
그후 운강박시묵과 그 후손인 박순병에 의해 크게 확장을 하여 지어졌다.
집안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 모두 독특한 'ㅁ'자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그 당시 양반가문의 생활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주위의 여러 고택속에서도 보존 상태가 양호한 운강고택은
돌담으로 둘러 처진 골목을 따라 들어가야 한다.
'ㄱ'자 형태의 골목길을 들어서면

막다른 골목 끝 오른편으로
솟을대문이 운강고택의 분위기를 말해준다.

지금은 모두 떠나고 비어있어 항상 문은 잠겨져 있다.

그문을 열고 들어서니 정면에 이 집안의 주인이 머물며 손님을 맞이하였던 사랑채가 있다.
왼쪽으로 또 하나의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의 모습을 보면....



대문과 함께 붙은 행랑채로 아마 그집에서 일을 하던 하인들의 숙소로 사용되어 진것 같다,

큰 사랑채 왼쪽으로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연결된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안채로 들어서면 마주보이는 곳이 곳간

우측은 안주인이 거주하였던 안채 건물이 나온다.
















안채건물


안채건물은 치마를 입은 아녀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마루 밑으로 하나의 발판이 더 붙어 있는 것이 이채롭다.





안채의 화장실모습으로 안에는 큰 볼일 바깥에는 남자용인 작은 볼일을 보는 곳이다.

그 중간을 가로 막는 벽 위에 문양의 그림








 찾아가는길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청도역에서 내린다. 부산역 기준 오전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 6시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10시20분 등 자주 있는 편이다. 1시간 소요, 4800원. 청도역에서 나와 왼쪽으로 5분 거리에 있는 청도버스터미널에서 운문사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신지리에서 하차한다. 오전 7시40분, 9시20분, 10시40분, 11시30분 등 하루 8회 출발한다. 3200원.

자가운전의 경우 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린 후 좌회전, 긴늪삼거리에서 청도방향 25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한다. 상동역 지나 신곡삼거리에서 좌회전, 상동교를 건넌 후 25번 국도를 버리고 오른쪽 매전 금천 방향 58번 국도를 탄다. 동창천을 따라가다보면 매전면 소재지의 처진소나무를 지나 매전교를 만난다. 우회전 해 매전교를 건너 진행하면 금천면 신지리리에 하차를 하면 고택이 즐비한곳에 운강고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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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양산여행)배내골 풍호대. 막으면 벙어리, 뚫어면 바람이 난다는 배내골 풍호대 이야기

배내골 풍호대(風乎臺)
흔히 양산시 원동면에는 물에 배 맛이 난다는 골짜기가 있다.
 예로 부터 물맛이 시원하여 배맛을 느낄 정도로 최고의 수질을 자랑하는 이곳은 배내골이다.
흔히 이천(梨川)으로도 불리는 배내골은 한때는 부산 양산, 울산의 휴양지로 각광을 받아 여름철에는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것도 잠시 이제는 양산과 밀양의 경계지점에 배내골 물을 모조리 담아먹는 밀양댐이 생겨 식수원보호지역으로 묶여 버렸다.
 그래도 배내골의 풍호대는 예나 지금이나 배내골 입구를 지키고 서 있다. 고점에서 석남사 방향으로 뚫인 도로를 따라 20여분 따라가면 우측편으로 노송이 우거지고 그 아래 배내골의 맑은 물이 소를 이룬곳이 나온다. 풍호대로 주변에 둘러 쌓인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조선조때 시인묵객이 꽤 드나들은 것 같다. 그중 천은 박기섭선생이 여기에다 대(臺)를 쌓고 글 공부를 하며 여생을 보냈다 한다.





풍호대 아래에는 특이한 바위굴이 있다.

두륜산의 명물인 코끼리 코 모양인 구름다리 처럼 생긴게 여기 풍호대 아래에도 있다.
그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평소에는 수량이 적어 물이 내려 가지 않으며 여름철 우기시에는 이 아래로 물이 흘러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바위굴에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마을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다.
전해내려오는 전설은 바위굴을 막아 버리면 이마을에 벙어리가 태어나고 그대로 뚫은 상태로 놔 두면 동네 아낙네들이 바람이 난다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을에서는 차라리 막는 것 보다는 뚫인 상태로 두는게 낫다하여 그대로 두었다 하는 바위굴이다. 


찾아가는길

승용차는 경부고속도로 양산IC~언양 35번 국도~배내골 어곡터널 어곡양산지방공단 좌회전~어곡터널~배내골 어곡지방산업단지 우회전~용선 배내골 1077번 지방도~에덴벨리CC 안내판~신불산고개~에덴벨리~배내골~하양교 지나 석남사 배내골 69번 우회전~고점교~풍호대



예전의 풍호대 마을에 지금은 펜션이 들어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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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청도여행)금천면 만화정과 세심정, 한국동란때 이승만대통령이 머물렀다는 만화정과 그뒤 세심정

흔히 옛 양반들의 집성촌으로 아직까지도 그 당시의 건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 여럿 있다.
안동 하회마을의 풍산류시 집성촌,
지리산 가는길의 남산예담촌 그리고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등 여럿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부산에서 가까운 곳 중 찾기는 쉽지가 않다. 
최근까지 알려지지 않은 곳이 청도 땅에도 있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그곳에 버금가는 고가들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곳이 영남알프스 둘레길에도 있다.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로 한때는
이곳이 금천면의 면소재지로 이름을 날리던 곳으로 도로 좌우편으로 옛 고가들이 줄을 서 있다.
도암고택, 운강고택등 밀성박씨의 한집안이 가계를 이루어 내려 오는 곳으로
운강고택의 부속건물로 지어진 만화정을 이야기하려 한다.
 동창천변 절벽에 자리를 잡은 정자 만화정(萬和亭)은 한옥마을의 백미로 꼽힌다.
청도의 여러 한옥 마을중에서도 여기 신지리의 고택이 으뜸이며
만화정은 동창천과 주위의 영남알프스의 풍광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한옥마을의아름다움을 더욱 빛네고 있다.

 





만화정은 본래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소요당(逍謠堂) 박하담(1479~1560)이 건립한 서당 터였는데
그의 11세 손인 박정주(1789~1850)가 분가해서 살림집으로 지은 것이다.
이후 박정주의 아들인 운강(雲崗) 박시묵이 더욱 확장,
현재의 모습처럼 정자 형태로 변형했고 이곳에 강학소를 열어 지역 후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으며
그의 아들인 진계 박재형은 해동속소학 등 38권의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주변의 선암서원 등과 함께 청도 지역 학문의 요람 역할을 했다.


 


운강과 진계가 이곳에서 학문을 갈고 닦고
후학들에 대한 교육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원래 이곳에 서당을 세웠던
소요당의 높은 인품과 학풍을 이어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요당은 조선 중종 때
사마시에 합격했지만 여러 관직을
모두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저술과 학문연구에 매진한 성리학자였다.
.
.
.
소요당 박하담의 후손들이 이곳 만화정 앞 뜰에 모여
형제 삼촌 조카 부자지간의 14명이 의병을 궐기하여  임진왜란때
동래성이 왜군에게 떨어져 15일만에 청도로 밀려 올라왔을때
밀양박씨 14명이 의연히 일어나 어성산에서 싸웠다한다.



특히 무오사화 등을 거치면서 더욱더 세속적인
출세와 벼슬길에 대한 마음을 접게 된 소요당은 본격적으로 지역 발전에 이바지하게 된다.
그는 삼족당 김대유 등과 함께 운문사 아래에 최초의 사창(社倉)을 지어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던 백성에게 환곡법을 실시하는 등 빈민구제사업에 매진했다.
또 남명 조식, 삼족당 김대유 등 당대의 대학자들이 소요당을 찾아와 학문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같은 학풍과 인품이
12대손인 운강 박시묵대와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것이다.


찾아가는 길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청도역에서 내린다. 부산역 기준 오전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 6시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10시20분 등 자주 있는 편이다. 1시간 소요, 4800원. 청도역에서 나와 왼쪽으로 5분 거리에 있는 청도버스터미널에서 운문사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신지리에서 하차한다. 오전 7시40분, 9시20분, 10시40분, 11시30분 등 하루 8회 출발한다. 3200원.

자가운전의 경우 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린 후 좌회전, 긴늪삼거리에서 청도방향 25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한다. 상동역 지나 신곡삼거리에서 좌회전, 상동교를 건넌 후 25번 국도를 버리고 오른쪽 매전 금천 방향 58번 국도를 탄다. 동창천을 따라가다보면 매전면 소재지의 처진소나무를 지나 매전교를 만난다. 우회전 해 매전교를 건너 진행하면 금천면 신지리 만화정 앞에 닿는다.















만하정 뒤 쪽문을 열고 나가면 세심정으로 갈 수 있다.
안강의 옥산서원의 세심정처럼
 마음을 씻는다는 뜻의 정자가 있었다한다. 











만화정을 화폭에 담는 노 화백의 모습







지금 세심정의 정자는 사라지고 없지만 동창천편에
외로이
만하정과 함께 옛 선현의 글씨가 또렷이 남아 있다. 
잡초가 웃자라 있고 주변의 상태로 보아서는 버려진체로 남아 있는
이곳에도하루빨리 문화재의 대책을 수립하여 잡초를 제거하고 보호책을 마련하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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