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경남여행/거제여행)거제시 청마유치환 생가. 거제도 둔덕골 청마유치환님의 생가와 묘소 찾아가기

 

청마 유치환 선생의 고향은 어딜까?.
거제도 둔덕면 산방산 인근인 방하마을 뒷산에는 한국 문단의 거목인 청마유치환님의 묘지가 있다. 앞으로는 거제앞바다가 펼쳐지고 뒤로는 산방산에 맥을 이어지는 아담한 곳이며 둔덕골 방하마을에는 그의 생가와 기념관이 복원이 되어 있어 들러 볼 수 있다.
그의 시 거제도 둔덕골을 보면 8대째 둔덕골에서 살고 있으며 산방산 비탈알로 몇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로 시작되는 구절은그의 고향에 대한 애뜻함이 묻어 있다. 

 



청마선생은 1908년 음력 7월14일 부친 유준수씨와 모친 박우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유년기인 11세까지는 한학을 수학하였고 그후 일본으로 건너가 토쿄 토요야마 중학에 입학을 하였고 그 후 가정 형편이 어려워 귀국을 하여 1926년 동래중학교에 5년 편입을 하였고 연희전문학교를 수료하였다.
 1931년 문예월간 제2호에 "정적"을 발표하면에 문단에 등단을 하게 된다. 형 유치진과 동인지 "생리"를 발간하고
1939년 그의 첫시집인 "청마시초"를 발간하였다.
부산 남여상 재임시 불의의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하게 되며 그의 유작으로는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청령일기(1949)", "청마시집(1954)"등 14권의 시집이 있으며 특히 "깃발", "거제도둔덕골", "사모곡"등 그의 주옥 같은 작품을 남겼다.

청마기념관 앞의 300년된 거목.



청마기념관





청마유치환님의 흉상





























생가







생가에서 묘소로 가는 길 좌측으로 산방산의 모습이 웅장하다.




찾아가는길=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051-322-8301)에서 거제 고현행 버스는 오전 6시20분부터 20~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1만2600원, 2시간30분 소요. 고현버스터미널에서 둔덕면 산방행 시내버스를 이용, 방하리 청마기념관 앞에서 하차한다. 오전 8시, 11시, 오후 2시, 5시 등 하루 6회 운행하며 50여 분 소요. 산행 후 고현행 시내버스는 오후 3시25분, 6시25분에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남해고속도로 구지선 내서IC에서 내려 두 번째 사거리에서 좌회전한 후 곧바로 통영 거제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고성과 통영을 거쳐 신거제대교나 구거제대교를 건너자마자 1018번 지방도를 타고 둔덕면 방향으로 우회전, 10분쯤 가면 둔덕면 면소재지 농협 앞 4거리에 닿는다. 이곳에서 산방산비원 청마생가 표지판을 보고 직진하면 3분 후 청마생가 방향인 오른쪽으로 꺾어 청마기념관 앞 주차장에 주차할 수  있다.

 

 


 

 

728x90

728x90


 (경남여행/함양여행)휴천면 시암재 오도재 여행. 지리산 제일 관문 오도재

 

함양에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산마루를 부르는 이름이 오도재이다.
좌측으로 법화산과 우측으로 삼봉산을 두고 그 사잇 안부에 형성된 고개로 벽송사의 3대 조사였던 청매조사에 의해 "도를 깨우쳤다 '하여 오도재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기 위한 첫 관문이 두곳이 있다. 전자는 산청의 덕산을 거쳐 중산리로 오르는 고된 오르막의 산길이요. 후자는 오도재를 거쳐 백무동에서 하동바위를 거쳐 천왕봉을 오르는 길이다. 당대의 정여창 김일손등 시인묵객들은 지리산 천왕봉을 오를 때 모두 함양읍에서 이곳 오도재를 거쳐 지리산을 찾아 들었다. 그래서 함양군에서는 진정 지리산의 첫 관문은 이곳 오도재라 하며 오도재에 지리산 제일문이란 망루를 짓고 지리산의 제일관문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리산 쪽의 제일관문으로 벌써 조명이 꺼져있어 군청의 새심한 배려가 있어야 겠다.

보름달이 휘영창창한 오도재의 밤

산신각


 

 

 


 

 


728x90

728x90


(경남여행/김해여행)무척산 다이아몬드 흔들바위,  다이아몬드의 모습을 한 김해 무척산 흔들바위

 

설악산의 대표적 명소는 울산암과 흔들바위이다. 수학여행의 단골 메뉴로 흔들바위를 꼭 올라 궁금증에 너도나도 흔들바위를 밀어보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전국적으로 흔들바위가 여럿있지만 김해 무척산에도 흔들바위가 발견되어 새인들의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다. 한쪽에서 보면 다이아몬드 모양이고 다른 한쪽에서 보면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 자연의 조화에 신기할 따름이다.

 


 


10m의 바위위에 얹혀 있는 흔들바위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지금도 산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다. 김해 생림면에서 창작소설을 만들어 흔들바위를 더욱 상품화 할려고 노력하고 있다.
"김해문인 협회 가인"씨에 의해 만들어진 창작 소설의 내용을 보면 "가야국 거등왕이 어머니 허 수로왕비를 위해 모은암을 지었고 천상의 어머니 영혼은 자식을 위해 석달열흘을 천지신명에게 염원을 하니 무척산 아래 모은 암 옆에 여인의 모습을 한  바위가 생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흔들바위는 정면에서 쳐다보면 흡사 여인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다. 가야국을 수호하기 위해 아직도 때를 기다리는지 모를 일이다.
흔들바위를 가기 위해서는 모은 암 입구에서 좌측으로 500m,20분을 발품을 팔면 큰바위를 기단으로 삼아 서 있다. 그의 모습이 좌측으로  돌아서 보면 다이아 몬드가 박혀 있는 모습이라 하여 명명된 다이몬드 흔들바위는 옆 모서리 툭 튀어난 곳을 밀어 보니 전해져 오는 느낌이 있다. 그 큰바위가 흔들리는 느낌을 손으로 직접 느낄 수 있어 신기할 따름이다.

찾아가는 길=자가용을 이용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삼랑진 IC를 빠져나와 김해 방향 58번 국도를 이용하여 낙동강을 건너 무척산 모은암 입구 주차장으로 가면 되고 대중 교통편은 부산에서 김해행 버스 123번,128번,1004번 버스를 타고 김해시청을 지나 금강병원앞에서 하차한다. 여기서 생림행 버스인 60번과 61번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30분 소요.


허왕후가 화하여 변한 모습된 며인상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모습의 흔들바위. 모습이 위태롭다.

옆 모서리를 밀어 보고 있는 취재팀 뒤로 생림면 생철리 일대의 모습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728x90

728x90


(경북여행/경주여행) 경주남산 약수계곡 마애입불상. 불두는 달아나고 없지만 경주남산에서 섬세하고 가장 큰 경주 약수계곡 마애 입불상

 

경주 약수계곡 마애 입불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4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산1-1

 

경주 남산 금오봉 아래 약수골 골짜기 바위면에 새겨진 마애불로 남산에서 가장 큰 마애불이다. 경주 배리 삼릉 입구에서 하차를 하여 상선암 방향으로 따라 오르면 삼릉을 지나 소나 숲길을 따라 오르다 냉골의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서 상선암 방향을 버리고 계곡을 건너 우측 능선을 따라 금오봉으로 오르는 능선길을 따라간다. 정상 못미쳐 우측으로 약수골의 골짜기에 위치를 하고 있다. 

 



불두는 달아나 없지만 새겨진 몸의 높이가 8.6m의 거대한 조각상이다.
남산의 거대한 바위기둥의 한면을 다듬어 마애불을 조각하였고 불두인 머리는 다른 돌에 조각을 하여 따로 얹었는데 현재 불두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다.
길게 늘어진 겉옷은 양 어께에 걸쳐져 있으며 옷주름이 수직으로 길게 흘러 내린다.
속옷은 주름이 층층이 표현된 반원으로 새겨진 특이한 기법으로 보여지며  두발도 불두 처럼 따로 조각하여 붙였는데 한발이 아래에 떨어진 것을 찾아 마애불 앞으로 옮겨 놓았다.
섬세하게 조각되어 오른손은 내려서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이고 왼손은 가슴까지 올려 엄지와 셋째,넷째손가락을 붙인 것을 볼 수 있다. 이불상의 방향은 고위봉방향으로 보고 있으며 약수골의 급한 내리막에 위치를 하고  있다



 

급한 약수골의 산사면에 위치하여 있으며 짙은 숲으로 인해 조망권은 찾을 수 없다. 워낙 바위가 커 키큰 나무위에 올라와 있어 시원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달아난 불두의 모습이 아쉽다.

 

 


 

 

728x90

728x90


신형제횟집(055-643-3876). 사량면사무소 바로 옆에 있으며, 사량도 지리산 옥녀봉을  벗어나 만나는 첫 번째 횟집이다. 도다리회와 도다리쑥국 전문이다. 굳이 이 집을 택한 것은 도다리 김치말이와 도다리쑥국 때문. 맛있게 익은 신김치에 싸먹는 담백한 도다리회의 조합은 먹지 않고선 상상할 수 없는 별미. 해풍을 받아 향긋함이 육지의 그것보다 진한 쑥을 곁들인 도다리쑥국은 봄처녀 같은 여린 맛이 잃었던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하다. 4인 기준 한 접시 6만 원, 도다리쑥국 1인당 1만 원. 도심과 비교해 가격은 별 차이 없지만 양은 아주 푸짐하다.




특히 이집 김형주 사장은 이곳 토박이이자 산꾼. 사량도 지리산의 밧줄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설치된 것이라고 보면 될 정도로 지리산 전문가이다



도다리회 김치말이

도다리 쑥국







728x90

728x90

(경주여행/경주남산여행)경주 남산의 배동 삼릉과 경애왕릉 구경가기


경주 남산의 배리인 삼릉에는 현 재 다섯기의 왕릉이 위치를 하고 있다. 삼릉 좌우로 우측에는 경애왕릉. 좌측에는 지마왕릉이 있어 한번 들러보면 좋을 것 같다.

모두 소나무 숲 사이에 안장된 왕릉은 경주 남산을 배경으로 무심한 세월의 흔적을 남기며 현재까지 남아 있다.

현재의 왕릉이 자료나 전해 내려오는 기록에 의해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현재는 모두 하나의 역사속에 살아 있을 뿐이다.

이곳을 가기 위해서는 터미널에서 500번501번502번등을 이용하여 삼릉에 하차한후 삼릉과 경애왕릉을 본후 삼존불 지마왕릉 포석정등을 둘러보면 하루 해 가 짧음이 아쉬울 뿐이다.

<삼릉숲>




*경애왕릉

사적 제222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73-1

신라55대 경애왕(재위924~927)을 모신 왕릉으로 삼릉의 우측에 있다. 53대 신덕왕의 아들로 927년 남산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다.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죽는 비운의 임금이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을 해목령에서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일부에서는 경애왕릉이 해목령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아니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 부근의 일성왕릉이 경애왕이 아닌가하고 추정을 하는 사람도 있다. 높이가 4.2m로 흙으로 둥글게 쌓은 봉분으로 현재 남아 있다.





*배리 삼릉

사적 제219호

신라8대 아달라왕제 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의 무덤을 함께 모아 삼릉으로 부른다.

남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나무 숲을 자랑하고 냉골을 올라 남산을 오르는 산행로 또한 가장 많은 배동 삼릉에는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년중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아달라왕은 즉위시절 백제에서 침공을 하여 신라인을 잡아가자 아달라 왕은 친히 전장으로 달려갔고 백제군이 화친을 제의하자 포로를 석방하였다 한다. 능의 규모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18m

효공왕이 후손이 없어 죽자 백성들과 문무백관들이 헌강왕의 사위인 신덕왕(912~917재위. 박경휘)을 추대하였다. 견훤과 궁예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을 하였다. 능의규모는 밑둘레 61m. 높이5.8m. 지름18m로 두차려에 걸쳐 도굴을 당하였다. 1953년과 63년에 내부조사가 진행되어 깬돌로 쌓은 횡혈식동방 형태의 무덤으로 밝혀 졌다.

경명왕(917~924재위. 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능의규모는 밑둘레50m. 높이4.5m. 지름16m.





*지마왕릉

사적제 221호경북 경주시 배동 산30

황금대 능선 아래 포석정 인근에 있는 왕릉으로 신라6대 지마왕(112~134 재위)의 능이다.왕은 파사왕의 아들로 태어나 23년간 즉위하며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으로 부터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능의 규모는 밑둘레38m. 높이3.4m





<안내문 발췌>


 


728x90

728x90
 

(사명대사 기념관)

(사명대사 생가터인 유적지는 4만9146㎡의 부지에 사당인 숙청사,어린 유년기를 보낸곳을 육영당, 그리고 거처를 하던 사랑채를 사명당으로 각각 복원하였다 합니다)

(경남여행/밀양여행)사명대사 생가와 기념관. 사명대사의 고향 마을인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 댕겨 왔습니다.


1992년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됨
소재지: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번지
연락처:055-359-5647
사명대사는 조선 중종 39년인 1544년에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풍천임씨 집안의 둘째아들로 태어 납니다.
사명당이 태어난 고라리는 풍수지리설에 의 한 명당으로 주변에 하서산에서 이어진 능선이 영취산 종암산으로 흘러내린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고라리에서 그의 조부 때 부터 터를 잡아 살았는데 사명당은 커면서부터 매우 독특하였던 어린이 인 것 같습니다.




“번뇌를 하지 않고 쓴 글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하며. 부모님이 세상을 떠 자 그는 명종14년인 1559년에 김천의 황학산 직지사로 찾아가 신묵대사에 의해 출가를 하게 됩니다.

그후 그는 또다시 금강산의 보현사에 찾아가 서산대사의 제자가 됩니다. 1592년 사명당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를 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승문을 나와 승려들과 규합하여 평안도 순안으로 가 스승 서산대사가 이끄는 승병과 합세를 합니다. 그는“의승도 대장”이 됩니다.
여러번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또한 1593년 명나라의 구원군과 함께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는 전투에서도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번 왜구의 적진으로 찾아가 왜군의 상황을 염탐하기도 하고 휴전협정의 담판을 벌이기도 합니다.
사명당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선조37년인 160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적장과 담판을 하여 전쟁 중에 잡혀간 백성 3000여명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쾌거도 올립니다.
8개월간 일본에서 머문뒤 돌아와 그는 모든 공직을 버리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수도에 전념하였다 합니다.
그후 그는 해인사에서 입적하게 되는데 광해군이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내렸다 합니다.

지금도 해인사에 가면 홍제암이란 암자가 있습니다. 여기서 입적한 사명당의 시호에서 따 왔다 합니다. 사명대사의 부도탑도 현재 홍제암에 있다합니다

사명대사 유적지인 기념관과 생가지에서는 최근까지 입장료 2000원을 징수하였는데 지난 10월24일 입장료를 폐지하고 무료관람을 실시하고 있다합니다. 우리 부산의 충렬사와 대조가 됩니다.

*생가터 둘러보기









*기념관 둘러보기






 찾아가는 길: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밀양 청도 방향~창녕 밀양 24번~마산 창원 시청 법원 검찰청 방향~창녕 부북 24번 우회전~창녕 청도면 24번~합천 창녕~무안면~무안 부곡 30번 좌회전~창녕 부곡온천~사명대사 유적지(5㎞) 크게 우회전(영산정사)~갈림길에서 왼쪽(영농법인 농정, 갈탄보일러)~영취산 하서산 등산안내도 지나~영산정사 방향~다례 서가정 사명대사 유적지 영산정사 우회전~다례 서가정~사명대사 유적지순입니다.

*사명대사 기념관과 유적지는 밀양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를 클릭하시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http://tour.miryang.go.kr/01/04_01.php?pT_idx=15







728x90

728x90

세종대왕자태실

국가 지정 사적제444호

위치=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번지

세종대왕자태실
 
선석산 아래 세종대왕자태실은 선석산 애래 위치한 이곳 태봉(胎峯 258.2m)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세종대왕의 장자 문종을 제외한 모든 왕자의 태실과 단종이 원손으로 있을 때 조성한 태실등 모두 19기가 모여 있다.




태실은 세종20(1438)년부터 24년 사이에 조성되었다. 석물은 화강암으로 사용을 하였어며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온전한 형체로 모습을 유지하며 남아 있다. 그러나 수양대군(세조)의 즉위에 반대한 금성대군 이외 네왕자는 현재 태실의 경우 사각형 기단만 남아 있고 비석과 기간위의 석물은 모두 파괴되어 권력암투에서 밀려난 세력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수양대군(세조)의 태실로 태봉으로 봉하고 앞에다 가봉비를 세웠다.

세조인 수양대군 태실의 경우에는 왕위에 오른 후 태실을 옮기지 않았다. 그것은 세종이 평소에도 형제들 간의 우예를 강조하였기예 세조는 태실을 옮기지 않고 그 대신 임금의 태실을 태봉으로 봉하고 앞에다 가봉비를 세웠다한다.

태실의 석물을 살펴보자.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지상으로 나온 맨 밑에는 사각형의 기단을 두었다. 그리고 그위에 편구형의 중동석을 올 였다. 맨 위에 보주형의 상륜을 가진 개천석을 올린 구조로 되어 있다. 기단석 아래 지하에는 편평한 판석형의 개석아래에 사각형의 석함을 둔 형태로 되어 있다.각 태실앞에 세워둔 태실비에는

전면에

(大)君名胎藏(우측)

皇明正統*年*月*日 입석(좌측)의 명문을 세로 2줄로 각자하여 태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하였다. 1977년 정비사업의 과정에서 도자기류 4점과 지석3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경주와 대구박물관 그리고 경북대학 박물관에 소장을 하고 있다.

태실을 오르는 산길 아래로 선석마을과 그리고 관광안내소 주차장, 뒤로 보이는 산이 선석산이다. 태실지를 감싸는 형국으로 좌청룡 우백호에 연꽃의 꽃술에 위치하는 천하의 명당자리라 한다.

태실지를 오르내리는 길은 소나무로 둘러져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을 한다고 관광 가이드분이 귀뜸을 해준다.

세종대왕태봉 가봉비문

태실구조도

세종대왕자태실 분포도




진양대군의 태실

단종의 태실로 끝에 구석에 따로 위치해 있다.
단종의 태실은 가천면의 태실지에서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을 하여 이곳으로 옮겼다하는데, 그래서 다른 태실의 석물에 비해 이끼가 전혀 끼지 않았다. 


왕자들의 태실



19기의 석물중 금성대군등 수양대군의 왕위즉위에 반대한 다섯왕자의 석물은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다.


왕자들의 태실



태실석물을 보면 지상으로 나온 맨 밑에는 사각형의 기단을 두었다. 그리고 그위에 편구형의 중동석을 올 였다. 맨 위에 보주형의 상륜을 가진 개천석을 올린 구조로 되어 있다. 기단석 아래 지하에는 편평한 판석형의 개석아래에 사각형의 석함을 둔 형태로 되어 있다.

태봉바위에서 본 태실이 안치되어 있는 태봉산으로 연꽃의 꽃술에 비유를 하는 명당

 
이자리에 올라 세종대왕자태실 자리를 잡았다하여 태봉바위로 불린다.

신라 효소왕1년(692)에 창건된 유서있는 사찰로 세종대왕자태실지 와는 500m 떨어져 있어 세종대왕자태실 수호사찰이다. 
세종대왕자태실지를 정리하고 인터넷에 탯줄을 검색하니 깜짝 놀랬습니다.
탯줄을 넣어 밀봉을 한후  도장을 만들어 준다는 업체가 있어서예...
세종대왕자태실도 지금쯤이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명당자리도 필요없고 각자 탯줄도장이나 탯줄 악세사리를 만들어서 몸에 지니고 다닐수 있어니까예. 참 세상....  








728x90

728x90




가을철에는 전국의 산이 붉은 색으로 뒤 덮힌다.

설악산에서 내려 오는

단풍이 남으로 남하하여

지리산 칠선계곡 비선담

일원에도 붉른 빛을 토해 내고 있다.

어제 주말에 찾은 칠선계곡은

이제 단풍이 시작되는 단계이지만

올해 단풍은 가뭄이 심해 단풍이 붉게 물들기 전에

먼저 말라 버리는 현상으로

예년만 못할 것 같다.

그래도 계곡물에 비치는 붉은 단풍잎을 보니 모두 소녀처럼

들뜬 기분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선녀탕의 모습입니다.


10월 12일 벽송사의 단풍입니다. 조금씩 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풍은 사람에 따라 보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모든 것도 마찬가지지만 단풍도 한발 멀리서 보는 맛이
단풍감상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가까지서 보는 단풍은 너무 추한 이미지에 실망만 안고 만다. 벌레먹은 잎, 아니면 말라 비틀어져 있는 단풍잎그래도  단풍잎이 여러개 모여 빛을 받아 화려함을 뽐낼때가 단풍이 아름답다고 느끼는게 아닐까 싶다.









728x90

728x90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예림서원(禮林書院)
서원이란?.
조선시대 사설 교육기관을 말한다. 대유학자인 선현을 모시고 제를 올리는 곳으로 예림서원은 밀양출신인 점필재(店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여 1567년(명종22년)에 덕성서원으로 건립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1634년 인조12년에 현재의 위치인 후사포리에 옮겨와 예림서원으로 개칭을 하였다.1669년 현종10년에 친이 임금이 편액을 하사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현재의 예림서원은 1985년에 복원을 시작하여 1987년에 마쳤어며, 독서루와 구영당,육덕사를 일직선으로 배치를 하여 전면에는 교육기관을 두고 뒤로는 제를 올리도록 하였어며 예림서원을 들어서는 정문은 문이 3개인 2층의 누각을 이루고 있다. 독서루로들어올때는 맨 우측 문으로 들어와 나갈때는 맨 좌측문으로 나오는게 유교의 법도라고 관리하는 할머니가 일러주신다. 그리고 좌우로 돈선재와 직방재를 두어 공부하는 유생들을 기거하도록 하였어며, 독서루 2층 누대응 공부하는 유생들이 쉬면서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사용을 하였다 한가. 지금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남무를 걸쳐놓아 출입을 삼가하도록 하고 잇었다. 2층 마루가 썩어 혹 다리가 빠지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 까 싶어 출입을 막고 있었다. 할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2층에 올라가보니 군대군대 마루가 꺼져 있어 발리 복원이 필요할 것 같았다.  

중앙의 사당인 육덕사는 점필재 김종직을 모시고 좌측에는 오졸재 박한주(1459~1504),우측에는 송계 신계성(1499~1562) 선생을 모시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728x90

728x90
미녀봉은 88고속도로에서 가조T,G 못미쳐 좌측으로 머리를 풀어헤치고 누워있는 여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산이 미녀봉으로 88고속도로 건너편에는 우두산의 끝 장군봉 아래 돌출된 기암을 볼 수 있다. 기개있는 장군의 모습으로 미녀봉과 함께 애뜻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옛날 바다였던 이곳에 표루하는 배한척이 있었어니, 그 배에는 장군이 타고 있었다. 기개가 하늘을 찌르고 늠름하며 자태또한 사내라 하늘의 옥황상제는 그 장군을 아깝게 여겨 자신의 딸인 공주를 지상으로 보내 장군을 구하도록 한다. 그러나 장군과 공주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옥황상제는 진노하여 장군과 공주에게 형벌을 내려 영원히 산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다. 그 산이 미녀봉과 장군봉으로 일년에 딱 한번 그들은 서로 만나 회포를 풀게 하였다니 그날이 바로 칠월칙석날이라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거창 가조 들판을 내려다 보고 있는 장군바위,
그 좌측으로 미녀봉이 머리를 풀고 누워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머리를 풀고 누워 있는 여인의 모습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