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습니다. 술정리 서 삼층석탑도 있으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한 사찰로 보기에는 힘들어 보였고 술정리 동·서삼층석탑으로 명시된 것에 많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인근에 절의 표시나 절을 알리는 당(깃발)을 묶은 깃대를 고정한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일단은 사찰 터가 있었다고 생각되었으며 품었던 의문은 곧 풀렸습니다.
술정리 동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입니다.
당시 가람배치의 형태는 대웅전 앞쪽에 좌우로 각각의 탑을 세우는 2탑 1금당 형식이며 술정리 동 삼층석탑은 절터에서 동·서 어느 쪽인지 아직 정확하게 확인된 바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술정리 동 삼층석탑이라 이름 한 것도 1km쯤 떨어진 서쪽의 삼층석탑(술정리 서 삼층석탑. 보물 제502호)과 알기 쉽게 구분하기 위해서 붙여진 명칭이라 합니다.
2004년 11월 (재)동아문화연구원에서 낸 보고서에서는 “2002년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동삼층석탑에 대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규명하고 석탑을 둘러싼 주변 사지(寺址)의 규모와 성격을 추측할 수 있는 자료의 수집을 위해 이 일대에 대한 정밀지표조사를 한 결과, 동삼층석탑 주변 일대의 민가와 담장 등에서 확인되는 석재와 각종 문헌기록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곳에 ‘인양사(仁陽寺)’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를 보면 술정리 동 삼층석탑 일대는 인양사지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번 창녕여행에서 창녕 군청 옆 비각 안에 인양사 조성비를 보고 왔던 터라 그 조성 비문에서 인양사조성비를 금당 뒤쪽에 세웠다고 추정했습니다.
인양사 조성비 부근에 절의 중심건물인 금당이 있었고 술정리 동 삼층석탑이 인양사 삼층석탑이라 보면 인양사의 규모는 정말로 대단하다 하겠습니다.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은 이층기단 위에 삼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 석탑입니다.
그리고 불국사의 석가탑과 비슷한 모습에 군더더기 없는 절제미에 위풍과 당당함을 갖춘 아름다운 탑이며 경상남도에 남아 있는 석탑 중에는 가장 오래된 탑입니다.
일명 ‘사지탑(寺址塔)’이라고 불리는 술정리 동 삼층석탑은 1965년 해체복원을 했습니다.
당시 해체를 하는 과정에서 3층 몸돌의 사리공에서 청동잔형사리용기, 사리병과 사리7과 등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입니다.
술정리 동 삼층석탑은 현재 상륜부는 모두 남아 있지 않으며 납의 높이는 5.75m에 이릅니다.
또한, 탑은 크고 웅장하며 기품있는 모습입니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이층의 기단을 올렸습니다.
아래 기단과 위층기단의 각 면 모서리 기둥인 우주와 가운데 기둥인 두 개의 탱주를 새겼으며 몸돌은 각 모서리에 우주만 새겼습니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하며 끝 모서리님 귀가 약간 들렸습니다.
그 아랫면에 5단의 층급받침을 두었습니다.
2008년 10월~2009년 7월까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에서 석탑의 서편지역에서 문지로 보이는 건물지 1동과 계단 유구, 일부만 남아 있는 3동의 건물지를 확인했습니다.
고려 시대로 보이는 건물지 1동에서 ‘송림사’ 명문이 들어간 기와가 발견되어 한때 송림사로 불렸다는 사실도 유추해 볼 수 있었습니다.
술정리 동삼층석탑을 보고 난 뒤 그 너른 광장 끝에는 국가 민속문화재 제10호인 창녕 진양 하씨 고택이 있습니다.
이집의 특징은 요즘 좀처럼 볼 수 없는 초가집이란 점입니다.
대문채에도 초가지붕이라 처음에는 이게 문화재인 초가집이구나 하며 신기하게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진양 하씨고택인 초가집은 이 대문채가 아니고 대문을 들어서면 그 안쪽에 자리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대문이 굳게 잠겨져 있습니다.
대문에는 작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평일에만 개방하고 주말에는 폐쇄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일요일에 찾았던 터라 개인 살림집인 고택 주인의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멀리서 찾아간 우리로서는 그냥 발걸음을 돌린다는 게 많이 아쉬웠습니다.
대문채 앞으로 기와건물인 사랑채가 있고 그 뒤에 초가지붕인 안채가 있어 밖에서는 까치발을 들어도 보고 보일만 한곳이 있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아도 초가집이 워낙 낮아서 볼 수 없었습니다.
많이 아쉬웠으며 다음번에 평일 날 한번 찾아야겠습니다.
구조는 4칸의 일자형 건물로 흔히 말하는 초가삼간입니다.
맨 왼쪽 1칸은 부엌이며 그다음은 안방 1칸에 대청이 1칸, 대청과 연결된 건넛방이 1칸입니다.
이제는 찾아가봤자 아파트 뿐이지만 그 당시를 회상하며 꼭 한번은 부산에 있었던 산업 현장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런 기회가 빨리 찾아왔습니다.
한일그룹의 모태인 경남 모직의 옛터는 전포동에 있었습니다.
삼성그룹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었던 제일제당 터는 부전동에 있었으며, LG그룹과 GS그룹 모태였던 락희화학(럭키치약) 터는 연지동에 있었습니다.
국제그룹의 모태였던 국제상사와 동명목재, 대양고무, 진양고무 등 수많은 기업이 부산 진구에서 발판을 마련했고 대한민국의 경제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급변하는 기업환경과 변화의 큰 파도를 넘지 못한 기업도 있었습니다.
지난 주말에 부산진구에서 태동하여 대한민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그룹의 모태와 서면 영화관을 잇는 ‘서면근대산업유산추억길’을 걸어 보았습니다.
부산 진구청에서 서면근대산업유산추억길을 조성했으며 2개 주제로 4개 코스입니다.
한때 부산 경제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신발산업입니다.
6대 신발기업이 있었을 정도로 부산하면 신발입니다.
그 중심에 부산진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코스 이름도 그때의 생각을 반추해보는 황금신발길 A·B 코스와 서면영화길 A·B 코스입니다.
이들 코스는 문화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면 각각 2시간쯤 걸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4개 코스를 한번에 엮어서 걷기로 했습니다.
걷다보니 서면근대산업유산추억길 코스에서 조금은 벗어나 지름길로도 걸었습니다.
서면근대산업유산추억길을 걸어보고는 개인적으로 걷기가 힘들어 보였습니다.
이는 이정표와 제반 시설이 아직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전체적인 거리는 대략 9km에 4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거리는 별로 의미가 없지만, 우리나라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기업의 뿌리가 되었던 곳을 빠지지 않고 보려는 노력은 했습니다.
지금부터 서면근대산업유산추억길을 출발합니다.
출발지는 양정 송상현부사 동상에서였습니다.
송상현부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성의 성문을 걸어 잠그고 결사 항전을 벌이다 순절한 분입니다.
롯데캐슬스카이아파트 옆 대양고무 흥아타이어 안내판
왜장은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다면 길을 빌려 달라“고 했지만 송상현부사는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으로 답하고 부사와 동래성을 지키던 군졸과 백성은 끝까지 동래성을 사수하다 장렬히 산화했습니다.
건널목을 건너 송상현광장을 가로질러 서면 방향으로 향합니다.
메타세콰이어나무가 일렬로 늘어선 사이로 난 길입니다.
보도블록이 갈려있는 길이지만 키큰 나무로 기분은 상쾌했습니다.
광장 너머에는 높은 아파트가 늘어서 있었습니다.
롯데캐슬스카이아파트이며 옛날 흥아타이어가 공장을 돌렸던 곳입니다.
그 왼쪽 도로 건너편에는 대양고무가 있었으나 지금은 서면 한신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40대 이상 중장년층은 슈퍼카미트란 브랜드를 잘 알고 있습니다.
부전시장
당시 군계일학의 여러 유수업체가 부산 신발산업을 꽉 잡고 있었을 때인 1976년에 혜성같이 나타났던 슈퍼카미트 브랜드 대양고무는 1993년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겨가면서 전포동 시대를 마감했습니다.
흥아타이어 또한 파란만장한 역사의 부침속에 그 명맥은 끝까지 유지하였고 현재에는 공장을 옮겨 넥센타이어로 생산 중입니다.
지금은 롯데캐슬아파트 옆 담벼락에 당시 진양고무와 흥아타이어가 있었다는 작은 안내판만 서 있습니다.
부전역 곰장어거리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적십자빌딩과 옛 부산 동부터미널이 있던 자리입니다.
동부터미널은 온천동 롯데백화점자리로 옮겼다가 지금은 노포동 부산종합터미널로 옮겨 갔습니다.
중앙대로를 건너 부산 최대의 시장인 부전시장으로 갑니다.
‘없는 것이 없다’는 부전시장은 특히 기장에서 동해남부선을 운행하는 새벽 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습니다.
직접 밭에서 재배한 채소를 반티에 이고서 부전시장에서 퍼뜩 팔고는 다시 돌아가던 애환이 점철된 부전시장을 나오면 바로 부전역입니다.
부전역은 동해남부선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늦게까지 사람들로 항상 붐볐고 그러다보니 기장에서 잡아온 장어로 부산에서 가장 먼저 곰장어 거리가 생겼습니다. 소줏잔을 기우리는 서민들의 배를 불려 주었던 곰장어는 자갈치가 유명하지만, 부산 곰장어의 원조는 부전역 곰장어 거리라고 합니다.
광복 직후부터 시작하여 대부분 40~50년은 훨씬 넘겼다고 합니다.
부전역 계단을 올라 육교를 건너면 미군 부대는 이전하면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부산시민공원이 있습니다.
이 일대가 1900년대 초에는 비옥한 농경지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세수를 목적으로 서면 경마장이 들어섰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는 기마 부대 설치와 1941년 태평양전쟁을 대비하여 제72병참경비대와 임시군속훈련소(노구치부대)를 설치했습니다.
부산시민공원
일제는 해방이 될 때까지 군수품 야적장으로 사용했습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주한미군 부산기지사령부가 들어섰습니다.
부산시민공원의 역사를 한눈에 보는 박물관을 둘러보고 비로자나반가석불과 협시불이 있어 옛 절터였나 싶어 안내판을 보았습니다.
옆에 마두관세음보살 표석이 있는 것을 추정하면 경마대회를 열면서 사고사나 병사한 말의 위령재를 올렸을 때 사용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부산 시민공원 역사관
부산시민공원 내 옛 서면 경마장 경주로
이곳을 나오면 국립부산국악원입니다.
우리나라 국립국악원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곳이 부산이라 합니다.
이곳을 지나 초읍 어린이대공원으로 가는 도로에 ‘LG사이언스홀’ 건물이 있습니다.
LG그룹의 모태인 옛 락희화학(럭키화학) 자리입니다.
우리나라 치약의 대명사였던 럭키화학 공장은 연지자이아파트 자리이며 옛터 한쪽에 1998년 LG그룹의 모태를 상징하는 엘지사이언스홀을 개관했습니다.
다시 서면 방향으로 내려오면 진양사거리입니다.
진양은 국제화학을 창업한 양태진 회장에게 두아들이 있었습니다.
국제상사 양정모 회장과 진양고무 양규모씨입니다.
진양사거리 황금신발상
국제상사는 ‘프로스펙스’를 상표로 진양고무는 ‘왕자표’ 신발을 생산했습니다.
이곳 진양사거리부터 부산 진구청 일원까지 진양고무가 있었던 곳입니다.
한때 한국 신발산업의 메카였음을 보여주는 황금신발상을 2015년에 설치했습니다.
바로 인근에 굴다리가 있습니다.
굴다리 담벼락에는 서면 근대산업의 역사를 보여주는 벽화를 보면서 옛 추억도 떠올려봤습니다.
굴다리마을
이곳을 지나면 이번에는 동해남부선 철로에 놓인 굴다리입니다.
이곳의 마을은 경부선 선로와 서로 엉키며 삼각형을 하고 있고 굴다리를 통행해서 마을로 들어선다 해서 굴다리 마을이라 부릅니다.
다시 철둑 아래로 난 길을 따라 부전역 쪽으로 가면 부산진구 상징탑과 황령산 봉수대 모형이 나옵니다.
부산진구 조형물
황령산 봉수대 조형물
서면 로터리 조형물
영광도서 앞에서는 옛날 서면로터리 상징탑 모형을 지나 롯데 백화점 옆에 설치된 스웨덴 참전기념비를 찾았습니다.
스웨덴은 중립국으로 한국전쟁에 의료지원으로 참전했습니다.
1950년 9월23일 이곳에 설치되었던 유엔군 사령부 산하의 스웨덴 야전병원은 1950~1953년까지 한국전쟁에 참가했어 세운 기념비입니다.
이제 옛 서면 극장가를 찾아갑니다.
지금은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1947년 서면 최초의 극장인 북성극장, 동보. 태화, 대한극장 등 총 16개의 극장이 성황을 이루었으나 현재에는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당시 극장 뒷골목은 베어링 볼트 등을 판매하는 부산 최대의 공구골목이었습니다.
서면 공구거리 조형물
지금은 카페와 맛집으로 모두 바뀌었으며 공구건물의 흔적은 보도블록에 스패너 모양과 인근에 공구를 형상화한 노란 원통형 조형물만 남았을 뿐입니다.
이면도로를 따라 범냇골방향으로 갑니다. 한전부·울지역본부가 예전 전차가 다녔던 서면 종점이며 직진하면 동천앞입니다.
장미길
동천약어조형물
왼쪽에 장미길이 있고 더샵센트럴스타 아파트입니다.
삼성그룹의 핵심 공장이었던 백설표 제일제당이 1953년에 공장가동을 시작했던 곳입니다.
맞은편 동천 건너 범냇골과 부산금융단지 일대는 합판 왕국으로 이름 날렸던 옛 동명목재 부지였습니다.
경남공고를 거쳐 부전 카페거리를 지나면 경남모직 옛터인 NC백화점입니다.
경남공고 교정의 고 강수영 열사 기념비
부전 카페거리
1956년 미국의 원조를 받아 전포동에 경남모직이 처음 세워졌으며 K 앙고라 텍스는 양복과 양장 원단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경북 봉화군 춘양 면소재지인 의양리 134번지에 머리를 식히기 아주 좋았을 정자가 있습니다. 이름은 한수정(寒水亭)인데 뜻을 보면 “찬물과 같은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는 정자”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는 역시 찬물을 한 바가지 둘러써야 잘 되는가 봅니다. 춘양면 소재지인 춘양장터 인근에 있는데 아침을 먹으려고 나섰다가 찾게 되었습니다.
사방은 낮은 담장으로 둘려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출입문이 꽉 잠겨 있어 속속들이 내부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낮은 담장 덕분에 수려한 한수정의 정원과 건물은 멀리서 보는 것 만으로도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수정이 있는 이곳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충재(沖齋) 권벌(權伐. 1478~1548)이 거연헌(居然軒)이란 건물을 처음 지었다가 소실하자 그의 2대손인 석천(石泉) 권래(權來. 1562~1617)가 1608년(선조 41년)에 다시 건물을 짓고 한수정이라 이름 했습니다.
1741년인 영조 17년에 중수했다가 1991년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 일부가 불탔으며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원래 상태로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충재 권벌은 본관이 안동이며 호는 충재 또는 훤정(萱亭), 시호는 충정(忠定)입니다.
1496년 연산군 2년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1507년인 중중 2년에 문과에 급제해 사관과 삼사, 승정원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을사사화 때 소윤일파에 의해 삭주로 유배 가서 그곳에서 숨졌으나 선조 때 신원이 회복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봉화 삼계서원에 배향되었습니다.
한수정 정자는 앞면 3칸에 옆면 2칸의 ‘T'자형 건물이며 홑처마 팔작지붕건물입니다. 바닥은 1단을 높였고 양측에 각각 2칸인 온돌방을 넣고 나머지는 모두 마루를 깔은 형태입니다. 한수정 주위 3면에는 와룡연이라는 연못을 팠으며 초연대라 불리는 넓은 반석과 보호수로 지정된 400년 된 회나무 등이 둘린 아름다운 정자 정원입니다.
한수정은 경암 이한응(1778~1864)의 춘양구곡가(春陽九曲歌)에서 제 8곡입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7호
봉화여행을 하면서 1박을 청했던 곳이 아름다운 지명인 바래미마을의 소강고택입니다. ‘바래미’는 바다였다는 뜻이며 아주 오래전에 이 일대가 바다였는지 알 수 없지만 최근까지도 마을 안의 논과 웅덩이에서 조개들이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마을이 포근하고 아늑한 게 정말로 아름다웠습니다.
한옥스테이를 했던 소강고택 포스팅은 다음에 하고 우선 바래미마을 인근에 있는 해저만회고택을 포스팅하겠습니다. 소강고택에서 새벽 일찍 일어나 계속 누워 있기도 뭐하고 해서 카메라를 들고 마을 구경삼아 동네 한 바퀴 했습니다. 소강고택 이외에도 많은 고택이 즐비했는데 그중에서도 소강고택의 건너편 마을에 있는 해저 만회고택을 이정표만 보고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해가 떠오르기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찾아가기가 부담스러웠지만, 외관만이라도 만나볼 욕심에 찾았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지 대문이 없는 개방식 비슷한 고택이었습니다. 주위 고택은 솟을 대문에 높은 담장이 둘러싸여 바깥에서는 전혀 내부를 볼 수 없었는데 만회고택은 대문이 없어서 바깥에서도 훤하게 사랑채가 잘 보였습니다.
특히 새벽바람을 가르며 시골 마을을 걸을 때는 개 짖는 소리에 동네가 떠나갈 듯 시끄러워 마을을 둘러보기가 여간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그래도 행운인지 모르겠지만 만회고택은 집을 지키는 강아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에 만회고택의 자랑인 사랑채를 가까이서 보게 되었으며 집주인이 잠에서 깰까 싶어 조용하게 사진을 찍고 소리소문없이 나왔습니다.
만회고택은 봉화군에서 애국심으로 큰 자랑인 고택건물입니다. 건물의 웅장함도 있지만 만회고택의 사랑채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산실이라 더욱 눈길이 갔습니다. 봉화 해저 만회고택이 자리한 해저리에는 조선 숙종 때 관찰사를 지냈던 팔오헌 김성구 선생이 처음 자리를 잡아 의성김씨가 세 가를 이루었습니다.
지금의 만회고택인 안채는 김건수씨 6대조께서 마을에 들어와 여씨(余氏) 성을 가진 분이 살던 집을 사들여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안채는 1690년대에 지어졌다 합니다. 이 집을 만회 고택이라 부르는 것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김건수(1790~1854)선생의 호인 만회헌(晩悔軒)에서 따왔습니다.
만회고택의 사랑채인 명월루(明月樓)는 만회선생이 건립했으며 1850년에 전체적인 수리를 했다고 합니다. 백두대간의 흥 걸 찬 기원이 감도는 명월루의 지세는 예로부터 명산 대천을 찾는 많은 시인 묵객들이 시를 읊고 학문을 닦던 곳으로 이곳에서 약 1,000여 편의 시가 쓰였다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명월루는 봉화 해저리에서 독립운동의 산실역을 담당했다 합니다. 특히 해저마을 주민 전체가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14명의 독립운동가를 마을에서 배출한 독립유공자 마을입니다. 그 이유를 보면 성주 대가면 출신인 심산 김창숙 선생이 명월루에 거처하면서 해저마을의 많은 사람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독립 자금도 지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랄 일은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열렸던 제2회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비밀리에 파견하면서 독립청원서를 보냈는데 독립청원서의 초안을 명월루에서 작성하였다고 하며 독립유공자 마을인 해저 마을의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 외 많은 독립운동의 지원 등을 의논했던 장소에 명월루가 이용되었다 하니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사실 만회고택의 안채는 이른 아침이라 내부를 볼 수 없어 많이 아쉬웠지만, 사랑채인 명월루를 보는 것만으로도 큰 만족을 하였습니다. 이제부터 만회고택 명월루를 알아보겠습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먼저 만나는 게 사랑채인 누각형태의 명월루입니다.
사랑채가 명월루임을 알리는 현판이 돌출한 누마루에 달렸어 눈에 확 띄었으며 이외에도 만회고택과 사랑채의 툇마루에 앉으면 시원한 바람을 느낀다는 청풍헌 현판도 따로 걸려 있습니다. 사랑채는 앞면 4칸이며 옆면 1칸 반 규모로 만회고택은 앞쪽에 일자형의 중문간채와 'T'자 형의 사랑채, 안채는 ‘∩’자형이며 전체적으로 튼 ‘ㅁ’자 배치입니다.
안채를 중심으로 좌우로 연결된 건물이 사랑채로 이어지며 안채의 동쪽 날개 끝에서 동쪽으로 치우쳐져 사랑채가 자리했습니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했으며 전면의 툇마루와 누마루에는 둥근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사용하여 건물의 멋과 권위를 한층 더 높였습니다.
사랑채 옆의 안채로 드나들던 출입문인 중문간채는 퇴락하여 1981년에 철거했다가 다시 복원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찬찬히 이곳저곳을 꼼꼼하게 둘러보고 싶었지만 이른 아침 남의 집을 찾아서 내 욕심대로 보는 것도 실례이고 그리고 소강고택에서 다음 일정으로 일행들도 기다릴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돌아 나왔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해저 만회고택에서 한옥체험 민박도 하고 보지 못했던 안채와 수박 겉핥기로 보았던 사랑채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챙겨봐야겠습니다.
다섯 칸의 두곡종택과 나란히 자리했으며 옥류암은 절의의 상징인 홍우정의 은거지답게 키가 크고 우람한 소나무가 빼곡하게 정자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선생은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에다 이마를 찍어 이마가 깨져 피가 철철 흘렀다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수모를 당하자 전쟁이 벌어졌을 때 명분과 의를 지키려면 운명을 걸고 결전을 해서야 옳았다는 척화를 주장하며 낙향하여 봉화의 문수산 아래에다 은거하면서 세운 정자입니다.
옥류암의 유래는 정자와 종택 사이의 옥구슬 같은 물이 솟는 샘에서 나왔으며 이 물줄기는 문수산에서 흘러내린다 합니다. 옥류암은 1637년 처음 지어졌으며 1756년에 중건 하면서 기와를 얹었습니다. 그리고 미수 허목선생의 옥류암 현판과 대산 이상정선생의 기문이 걸렸다 합니다. 가로 120cm, 세로 60cm였던 옥류암 현판은 도난당했다가 되찾아 안동에 있는 국학진흥원에 현재 보관하고 있습니다.
정자는 다시 1876년에 중수하였으며 앞면 3칸에 옆면 1칸 반 크기에다 팔작기와집에 정자주위에 토석담장을 둘렀습니다. 정자 앞 왼쪽으로 사주문을 세워 출입하게 했습니다. 정자 바깥으로는 3개의 연못을 만들었는데 시문에 연과 구기자, 국화, 소나무, 매화, 대나무를 심었다는 기록 등에 조선시대 민간 정원의 건축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연구자료라 합니다.
두곡 홍우정은 옥류암에 기거하면서 학문 증진과 후학을 양성했으며 태백오현과 교류하며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 내 차라리 죽을지언정 불의와 타협해 살고 싶지 않다”며 끝까지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사재감직장을 잠깐 지냈을 뿐입니다.
사후에 영조는 두곡선생의 절의를 칭송하며 이조참의에 추증하였고 영조가 직접 ‘숭정처사’라는 칭호를 내렸습니다. 산림처사는 들어보았지만 숭정처사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1816년에 순조(16년)는 이조판서로 추증하고 이듬해에 ‘개절공’의 시호를 내렸으며 선생의 위폐는 구봉사와 문산사에 봉안했습니다.
옥류샘
봉화 옥류암
본관은 남양이며 자는 정이, 호는 두곡이며 형조판서를 지낸 조부 만전당 홍가신(1541~1615)과 부친은 한성서윤 홍영이며 다섯 형제 중 맏이로 대사헌과 대사성, 이조판서를 지낸 홍우원과 무과에 급제해서 제주목사와 수사를 지냈던 청백리 홍우량이 선생의 아우였습니다. 봉화 옥류암은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31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전남여행/목포여행)목포 이훈동 정원. 개인 소유 정원이 문화재, 목포 유달산 이훈동 정원
목포여행을 하면서 유달산 아래 이훈동 정원을 둘렀습니다. 이훈동 정원은 주변에 많은 근대문화유산과 함께 꼭 찾게 됩니다. 이훈동 정원은 1930년인 일본 강점기에 지어진 정원입니다. 그런데 1988년 3월에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5호로 지정될 정도로 문화재적 가치가 뛰어난 정원이라 합니다.
그래서 그 궁금 정을 풀 욕심에 주위 근대 문화유산과 함께 보고 왔습니다. 이훈동 정원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이 소유한 정원입니다. 그런데 조금은 독특한 이력을 가진 정원이라 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우찌다니 만빼이가 지은 집을 이곳과 이웃한 해남 출신인 전 국회의원 박기배씨가 사들였던 것을 조선내화 창업주 이훈동이 사들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원과 어울리는 건물도 눈에 들어오지만 이훈동 정원은 유달산의 남서쪽 기슭에 자리했으며 목포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등 전망이 정말 좋았습니다.
일본인이 처음 정원을 만들어서 그런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일본풍이 많이 느껴지는 정원입니다. 이훈동 정원이 호남 일원에서 개인 정원으로는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합니다. 그런 만큼 입구에서부터 대단한 규모를 갖추었으며 안뜰과 숲과 개울을 갗 춘 정원은 물론이고 계단을 이루는 후원까지 각종 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나무의 종류만도 113종류인데 우리나라 토종이 37종, 일본원산종 39종, 중국원산종 25종이며 그와 12종이라 합니다. 특이하게도 건물을 들어서는 현관앞에는 암수 한 쌍의 향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이는 사람이 심은 게 아니고 스스로 발아해서 이만큼 자랐다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일본에서 화산이 터지면서 그 영향으로 향나무 씨앗이 바람에 날려 목포까지 날아와 싹이 텄다는 조금은 황당한 이야기가 있는 나무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훈동 정원에서 가장 멋졌던 정원수는 땅에 붙을 듯 드러누웠던 소나무였습니다. 얼마나 감탄을 했던지 정원수로서 가격을 매겨보기도 했습니다. 가격이 억하면서 억수로 비싸겠다며 생각을 하고 후원 계단을 올랐습니다.
유달산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고 목포 시내와 바다가 가슴이 탁 터게 시원하게 펼쳐졌습니다. 정원은 대체로 남부지방이 원산지인 난대성 상록수가 많았습니다. 이훈동 정원이 있었던 곳은 목포항과 가까워 당시 많은 일본인이 거주했던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식 석물과 석등, 5층과 7층 석탑이 정원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원의 기본설계는 작은 계곡을 끌어들이는 등 우리나라 조선 시대의 정자 정원 양식을 따랐다 합니다. 현재 이훈동 정원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당시의 모습은 많이 잃었지만 그래도 일본식 정원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일제강점기 종로통을 주름잡았던 김두한의 일대기였던 드라마 야인시대가 촬영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모든 남성을 티브이 앞에 잡아 놓았던 야인시대의 촬영지 이훈동정원 목포여행에서 둘러보세요.
광양 백운산 둘레길 7코스를 걸으면서 중간에 만났던 중흥사. 중흥사을 휘감은 편백숲이 사찰의 분위기를 잘 말해주었으며 청량감까지 들었습니다. 중흥사는 신라 경문왕 때 도선국사께서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천년고찰입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중흥사 당우는 폐사된 절터를 1963년에 중건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중흥사의 사격을 이야기해주는 것은 석조물인 중흥사삼층석탑과 쌍사자 석등, 석조지장보살반가상 뿐입니다.
중흥사의 흥망성쇠는 중흥산성과 아주 밀접합니다. 중흥산성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시대 초기로 보고 있는데 이는 출토된 와편 등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중흥산성의 규모는 중흥사 뒤의 200~400m 대의 6개 산봉우리와 계곡을 끼고 조성된 포곡형 토성입니다.
임진왜란 때는 중흥산성이 승병과 의병의 훈련 장소가 되었으며. 승병과 의병의 훈련장이란 정보를 입수한 왜군의 습격을 받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그때 의병과 승병은 모두 전사하고 중흥사도 함께 불타면서 폐사되었습니다. 필자는 중흥사에서 가장 만나고 싶었던 게 예술성이 뛰어나면서 화려한 중흥사 삼층석탑과 중흥사쌍사자석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중흥사쌍사자석등은 국보 제103호로 지정되었지만 중흥사에 있지 않고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흥사쌍사자석등의 운명도 참 기구합니다. 중흥사쌍사자석등은 조선 말기까지 중흥사터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삼층석탑과 함께 궂궂하게 하늘을 받치며 그 자태를 뽐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시샘하는 놈들이 있었으니 그게 일제강점기 때인 1913년에 일본인이 밀반출을 시도하려다가 주민의 강력한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에는 경복궁에다 보관했습니다. 그러다 국립광주박물관에 이관하여 보관 중인데 하루빨리 원래 자리인 광양의 중흥사로 옮겨 왔으면 합니다.
현재 중흥사에는 중흥사쌍사자석등의 모조품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중흥사쌍사자석등과 삼층석탑이 창건 당시 위치가 맞는다면 현재의 가람배치인 대웅전의 위치는 많이 달라져보입니다. 보통 금당을 중심으로 가운데 삼층석탑을 세우고 그 좌우에 석등을 배치하는 순서로 짐작하건대 말입니다.
그럼 필자가 보고 감탄과 함께 탄성을 질렀던 중흥사 삼층석탑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중흥사 삼층석탑은 지난해 보았던 군위군의 지보사삼층석탑과 느낌에서 비슷하다 생각했으나 중흥사삼층석탑을 보면서 정교한 조감솜씨와 사방불인 여래상과 인왕상, 보살상, 사천왕상을 도드라지게 세긴 것을 보고 더욱 뛰어난 예술작품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한곳에 필이 꽂히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것을 열심히 관찰합니다. 그 케이스가 이번 중흥사삼층석탑인데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즐겼다가 함께한 일행은 중흥사를 빠져나가 둘레길을 따라 흔적도 없어 사라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을 접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흥사삼층석탑은 신라 말기에 조성된 석탑이며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지금은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각과 장식이 매우 화려해서 예사롭지 않아 보였습니다. 탑의 몸돌과 지붕돌인 옥개석은 하나의 돌로 되었으며 각 층의 몸돌 네 귀퉁이에는 운주인 기둥을 굵직하게 나타내었습니다.
옥개석의 아래 층급받침은 3단이며 처마 밑은 수평으로 처리했습니다. 1층의 몸돌에는 동서남북 각 면에다 연꽃 대좌 위에 앉은 여래불을 새겼으며 이는 사방불로서 어디에나 부처님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1층 몸돌을 받치는 기단은 각 면을 모두 둘씩 나누었고 앞면에는 인왕상을, 그 반대편인 뒷면은 보살상을 , 좌우 양쪽 면은 사천왕상을 새겼습니다.
그리고 2.3층의 몸돌은 급격하게 작아지면서 기단과 비교하면 기단부가 너무 크게 보이는데 이는 전체적인 석탑의 안정감은 뛰어나다 하겠습니다. 중흥사쌍사자석등은 모작이지만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중흥사쌍사자 석등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쌍사자 석등은 연꽃무늬 받침돌 위에 두 마리의 사자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서서 석등을 받치고 있는 형상입니다.
중흥사쌍사자석등은 하나의 돌을 조각해서 석등을 만들었을 정도로 그 조각 예술이 정말 빼어나다하는데 오리지널 중흥사쌍사자석등을 보지 못해 정말 많이 아쉬웠습니다. 어서 빨리 돌아오라 오버 중흥사 쌍사자 석등. 그리고 전남유형문화재 제142호 석조지장보살반가상은 시간 관계로 보지 못해서 그냥 패스합니다. 다음에 다시 한번 갈 기회가 있기를 바라봅니다.
동해와 남해 쪽으로 가다 보면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조선을 침입한 왜군이 교두보를 마련하려고 쌓은 왜성 등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 울산 북구의 정자동을 갔다가 조금은 독특한 ‘유포석보’란 이름을 한 산성을 만나고 왔습니다.
울산 북구 정자동 박제상공 사왜시발선처와 유포석보 주소:울산광역시 북구 동해안로 1455-6
유포석보는 정자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만들어진 석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유포석보는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먼저 이름도 생소하고 그래서 마을 주민을 잡고 유포석보가 어딥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이 마을에 살지만 그런 곳은 처음 듣는다고 했습니다.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 큼지막한 유포석보 안내판을 드디어 찾았습니다. 화살표는 오른쪽 마을 길로 안내했습니다.
마을을 들어서서 산성의 흔적을 아무리 찾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을안의 향나무 식당에다 유포석보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분도 곰곰이 생각하다가 아!! 저기 전봇대 뒤에 하얀 판이 보이죠! 하면서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자세히 보니까 들어오는 입구 오른쪽 대나무 숲 꼭대기였습니다.
왔던 길을 돌아 나와 동해안로 도로에서 10m쯤 들어서면 ‘동해안로 1467-4’호 민가에서 오른쪽 좁은 길로 들어서면 대나무 숲에 올라서서 맨 끝에 안내판과 석성의 흔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유포석보 석성 주위에는 채소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유포석보는 조선 시대의 보로 고을의 수령인 만호가 관리하는 제진을 보조하는 방어적 시설로 최전방에서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역할을 주로 하면서 위급할 때에 주민의 대피장소로 이용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전투를 하는 규모가 작은 성을 말합니다. 보 주위는 봉수대가 설치해 있어 즉시 신호나 기타 소리로서 주민대피를 시키면서 인근 지역에 알리는 첨병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정자동의 유포석보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와 있습니다. 삼도 도체찰사 정분이 왜구를 막기 위해서 성을 쌓을 것을 건의했으며 1450년에 문종이 즉위하면서 목책 성을 설치했으나, 1452년에 다시 석성을 쌓을 것을 건의해서 1455년인 세조 원년에 기존의 목책 성에서 5리 떨어진 곳에다 석성을 쌓기 시작하여 4년 만에 완공했습니다.
정자항의 유포석보는 왜구의 동태를 살피는 방어기지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경상좌병사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정자동 유포석보는 병영·울산과 경주의 군사 3백 명이 3교대로 주둔하면서 수비할 만큼 중요했던 곳입니다. 유포석보의 규모는 전체 둘레가 약 755m였고, 계곡을 끼고 능선과 구릉의 낮은 평지 주위에다 쌓았습니다.
유포석보
현재 유포석보는 황폐할 정도로 그 존재가 파괴되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정자항 방파제 공사를 하면서 유포석보의 큰 돌을 빼서 쌓았다 합니다. 남아 있는 석성의 규모를 보면 동문 쪽에 2m 정도의 높이로 약간 남아 있습니다. 유포석보는 바닷가에 들어섰지만, 육군이 담당했으며 조선시대 최초의 석보라는 점에서 그 가지와 의의가 매우 높다는 평가입니다.
신라충신 박제상공 사왜시발선처비석
이곳 유포석보는 신라 시대 충신이었던 박재상의 발선처 비가 있습니다.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입니다. 왜국에 볼모였던 미해(미사흔)를 구출하려고 사신을 가장하여 율포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띄웠다 합니다. 그 율포가 현재 북구 정자동의 유포마을로 보고 있습니다. 유포석보에는 박제상이 왜국으로 떠난 곳을 기리는 ‘신라충신 박제상공 사왜시발선처’ 비석을 세워 놓았습니다.
유포석보를 한 바퀴 돌면서 정자항의 전경과 멀리까지 펼쳐지는 바다 풍경은 그야말로 작은 나룻배 한 척도 보일 만큼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일본으로 떠난 박제상의 흔적을 더듬으면서 왜군의 방어 진지인 유포석보를 만나보세요 유포석보는 1998년 10월에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7호에 지정.
(울산여행/북구여행)강동해변의 아름다운 포구 당사항과 당사해양낚시공원 용바위 여행. 당사항
울산광역시 북구에 대표어항인 정자항과 판지항을 여행하면서 이번에는 세 번째 여행지 당사항입니다. 당사동은 마을 입구에 500년이 넘은 큰 느티나무와 당산제를 지내는 당(堂) 집 때문에 당사동이 되었습니다. 당사동에는 자연산만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당사자연산직판장이 있으며 이곳에서 아주 저렴하게 자연산 회를 먹을 수 있고 포장도 할 수 있었습니다. ㅎㅎ 지금은 한창 가자미가 제절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당사항을 한바퀴 돌아보았습니다. 당사항 등대는 특이하게도 한국의 고전미를 연상시켰습니다. 지붕에는 기와를 올렸으며 창문은 우리 전통 문향을 넣어 아주 친근감이 있어 좋았습니다. 어항에는 작은 배들이 묶여 있고 작은 물결에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습니다. 당사항은 한적함이 묻어나 보였습니다.
그래도 방파제에는 많은 낚시꾼이 손맛을 느끼려고 자리를 잡고 낚싯대를 드리우며 분주해 보였습니다. 마침 등대 쪽으로 가는 데 아쉬운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제법 큰 물고기를 낚아 올렸는데 바로 눈앞에서 고기가 그만 달아나 버린 모양입니다. 그 물고기 오늘 십년 감수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 물고기는 입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금방 다시 낚싯바늘에 코가 꿸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ㅋㅋ 다시 등대를 돌아 나와 용바위 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당사동 용바위는 두 개의 바위로 이루어졌습니다.
원래에는 하나의 바위였는데 지금은 그 가운데가 칼로 가른 듯 쪼개져 두 개의 바위가 되었습니다. 이 틈을 용굴 또는 용난터, 용왕미기, 굴방구라 합니다. 옛날에 호랭이가 담배 피우던 어느 날 옥황상제가 다스리는 하늘나라에서 거북이와 뱀이 앙숙처럼 싸움만 하며 지냈습니다.
보다보다 옥황상제는 할 수 없이 거북이와 뱀을 지상으로 내려가서 살라고 했습니다. 이 둘은 지상에서 벌을 받으면서도 서로 다투었는데 평소 묵직한 행동을 했던 거북이를 옥황상제는 더욱 신임하였습니다. 옥황상제는 하늘에서 이 둘의 행동을 자세히 보았더니 거북이가 밤낮없이 모함과 음모를 꾸미는 것을 알았습니다.
옥황상제는 뱀의 죄를 용서하면서 금비늘 날개옷과 뿔, 발톱, 여의주를 내려주면서 하늘로 다시 승천하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자 동굴에 살던 뱀이 용으로 모습이 변하면서 용은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고 승천을 시작했습니다. 용은 의기양양하게 꼬리를 힘껏 내리쳤고 그러자 큰 바위는 둘로 쪼개졌습니다.
용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무룡산 정상에서 한바탕 질펀하게 춤을 추고 나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울산 북구에는 용이 춤을 췄다는 무룡산이 있으며 승천하면서 꼬리로 내리쳤다는 바위는 현재 당사항 용바위가 되었습니다.
용바위는 문중의 개인소유로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당사해양낚시공원입구를 통해 용바위에 만든 용 조형물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보는 조망은 당사항에서 최고였습니다. 가까이는 넘섬까지 다리를 만든 당사해상낚시공원이, 멀리는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가 하늘까지 맞닿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사해양낚시공원은 강동 주민의 관광 활성화와 소득향상을 위해서 2013년 7월에 개장을 했으며 총 35억 원의 공사비가 들었다 합니다. 바닥이 보이는 그물형태 구름다리인데 바다로 뻗어나간 길이만도 약 220m이며 유료로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낚시는 성인 기준 하루 1만 원이며 넘섬까지 갔다 오는 구름다리 입장은 1천 원입니다.
그리고 전망대와 편의 시설까지 갖추었다고 하니 당사항에서 최고의 볼거리중 하나라고 합니다. 개장시간은 하절기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동절기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제한하며, 낚시꾼은 탄력적 운영으로 오전 5시 30분부터 밤 8시까지 가능합니다.
그리고 주요 어종은 참돔, 우럭, 농어 등 낚시꾼의 어심을 자극하는 다양한 어종이 잡혀 손맛을 느끼기에 최고라 합니다. 어족 자원 보호로 1인 2kg까지 제한한다고 합니다. 당사해양낚시공원을 연결하는 넘섬은 파도를 다스리는 아그락 할매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사마을 앞바다의 파도가 잔잔한 것은 이야기보따리를 아주 잘 푸는 그 할매 덕분이라 합니다.
할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온갖 미물이 다 모여들었는데 그중에는 파도도 있었습니다. 파도는 성질이 매우 급해 항상 큰 너울을 일으키며 왔습니다. 그때마다 큰 파도는 마을을 덮쳤으며 마을은 물난리로 큰 피해가 났습니다. 그러자 할매는 경계 표시를 하려고 큰바위 하나를 바다에 던지고 나서 파도에게 “너는 이 바위를 넘지 말고 여기서 이야기를 들어라” 명령하였습니다.
그 뒤부터 파도는 바위를 넘지 않았으며 마을은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합니다. 이후부터 파도가 바위를 넘어오지 않는다 해서 넘섬이라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당사항에서 금천마을로 넘어가는 짤록이 오른쪽 바닷가에 용바위가 있으며 두 마을을 연결하는 통로를 ‘벌레목’이라 합니다. 지금은 용바위를 상징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벌목’이 변해서 벌레목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벌(伐)은 ‘치다’를 뜻하며 “용이 꼬리로 쳤다”는 뜻입니다.
벌레목을 빠져나오면 해안에 작은 바위가 널려 있습니다. 그중 꼭 못된 거북이를 닮은 바위가 있었습니다. 저놈이 뱀에게 누명을 덮어씌운 놈이 아닌가 하며 꿀밤을 한방 주었습니다. 갑자기 금천마을 앞에는 몽돌해변이 펼쳐졌습니다. 파도에 밀려온 몽돌이 산더미를 이루었습니다.
자그락자그락 몽돌을 밟으며 걸었습니다. 그리고 로켓을 닮은 붉은 등대를 보러 갔습니다. 로켓을 닮은 등대를 타고 우주를 한번 여행해보는 꿈을 꾸어 봅니다. 어물동에서 북쪽의 해안을 따라 신명동까지 길이가 13km이며 폭은 40m인데 이를 강동해변이라 통칭 부릅니다.
정자항, 판지항, 당사항도 모두 이 강동해변에 포함됩니다. 강동해변은 동해에서 남쪽으로 치우쳐져 있으며 청정바다는 물론이고 주상절리와 검은 몽돌이 펼쳐진 수려한 자연 경관을 자랑합니다. 또한, 신년 해맞이는 물론이고 일출맞이 장소로서도 최적지로 알려져 많은 사진작가가 아름다운 일출 사진 촬영을 위해 찾는다고 합니다.
동해의 아름다운 해안인 강동 해변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 풍경을 한눈에 담아 보세요. 울산 북구의 정자항, 판지항, 당사항을 함께하는 3항 3색 겨울 바다여행을 즐겨보세요. 정말 아름다운 바다를 경험하게 됩니다.
겨울은 하얀 설원의 산도 좋습니다만 철썩이는 파도가 방파제를 때리는 겨울 바다도 괜찮은 여행입니다. 그래서 울산의 대표항구인 울산시 북구 정자항에 갔습니다. 정자항도 규모가 대단했습니다. 때마침 날씨는 뺨을 애를 정도로 추웠습니다. 그리고 파도는 무서울 정도로 자르르하며 자갈을 애무하는 우렁찬 소리를 내며 방파제를 때렸습니다.
정자항은 1971년 12월에 국가 어항으로 지정되었으며, 정자는 오래전 마을 한가운데 정자나무인 느티나무가 24그루 있어 마을 주민의 휴식처인 정자역할을 했다 합니다. 그래서 정자(亭子)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 정자마을의 동북쪽은 북정자이며 남서쪽은 남정자라 부릅니다.
또한, 두 개의 등대도 있는데 각각 남·북방파제 등대라 부릅니다. 울산 하면 생각나는 게 고래입니다. 선사시대부터 울산에서는 고래의 포획이 이루어졌으며 그게 벽화로 남아 있습니다. 정자항에는 울산의 유명한 고래를 조형물로 세운 등대가 있습니다. 이 등대는 귀신고래를 형상화하여 각각 세웠는데 귀신고래 등대라 부릅니다.
남 방파제 등대는 흰색인 귀신고래이며 북 방파제 등대는 붉은색 귀신고래 등대입니다. 정자항 남·북방파제 등대는 2010년에 건립한 귀신고래 모양의 조형 등대인데 왜! 귀신고래 등대를 세웠는가 하면 울산의 정자항 부근 해역이 귀신고래가 회유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래는 멸종되다 시피해서 현재 전세계인이 보호하는 어획금지 어종이며 울산 앞바다가 새끼를 낳기 위해 이동하는 귀신고래의 경로라 합니다. 왜 귀신고래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부르는지 궁금한데 귀신고래는 암초가 많은 바닷속에 신출귀몰하듯이 귀신같이 나타났다 사라져서 얻은 이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2년 천연기념물 제126호에 지정하여 관리 중입니다. 어마무시하게 큰 게 위엄과 웅장함가지 갖춘 등대입니다. 귀신고래는 흰색과 붉은색이 없습니다. 등대라 국제기준에 따라 흰색 등대는 좌현표지를 말합니다. 그럼 북방파제의 붉은색은 홍 등대라 하는데 우현표지를 뜻합니다.
정자항은 여름철에는 남동풍이 불며 겨울철에는 북서풍이 많이 분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자항 주위로 작은 암초가 많아 운항하는 배들은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실제로 보니까 정자항 주위 바다에 솟아오른 기기묘묘한 바위가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정자앞 바다의 주요 어종은 문어와 가자미입니다.
안그래도 정자항이나 주위 작은 포구에 가자미를 말리려고 늘어놓은 것을 자주 봤습니다. 현재 정자항은 가자미가 제철이라고 합니다. 쫀득하니 감칠 맛나는 가자미회를 생각하며 입맛을 다셔봅니다.
그리고 요즘 정자를 대표하는 게 대게입니다. 대게 하면 영덕이 유명하고 또한 울진이 있지만 아마 수온의 변화로 대게 어장이 남쪽으로 많이 내려와 정자 앞바다에서 잡아 올립니다. 이제 울산 정자도 대게로 유명해서 정자 대게라고 따로 불립니다.
남해나 서해안의 바다 빛깔이 180도 다른 동해안의 바다는 그야말로 에메랄드빛인 청정해역입니다. 부산에서 멀지 않은 울산 정자항만 가도 그걸 느끼고도 남습니다. 그만큼 맑은 동해 기운이 넘쳐나는 울산 정자항 여행을 한번 계획해 보세요.
여기는 고등어를 잡는분들입니다. 은어 씨알만한 고등어를 모래에다 많이 묻어 놓았는것을 봤습니다. ㅎㅎ
경북의 오지마을인 봉화여행은 벌써 하고 왔는데 차일피일 여행 포스팅을 미루다 보니 이제 포화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봉화여행에서 밀린 숙제 한 곳을 하려 합니다. 봉화에는 100여 개가 넘는 정자가 있어 정자의 고장이라 하는데 그중에서도 번잡하지 않고 한적하여 신선이 내려와 머물렀을 정도로 조용하고 아담한 명소 와선정을 소개합니다.
와선정은 태백산이 있는 봉화군에서도 춘양목으로 유명한 춘양면 소재지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마침 춘양면소재지 고택에서 1박했던 터라 안내판의 와선정을 보고 이른 아침에 운동 삼아 휑하니 차를 몰고 둘러보고 왔습니다. 와선정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 244번지에 속칭 골띠마을에 위치합니다.
작은 주차장에서 나무로 만든 아치형의 오현교를 건너면 바로 토담을 두른 와선정 정자입니다. 그런데 오현교 아래를 보면서 입이 쩍 벌어졌습니다. 골짜기의 깊이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꼭 편편한 암반을 끌로 깊게 긁어낸 듯 패인 골짜기에는 높이 5m의 폭포가 걸려 있으며 그 옆에 벼랑에다 와선정을 세웠습니다.
낭떠러지에서 쏟아내듯 떨어지는 물보라가 은색으로 반짝여 은폭이라 불리며 그 폭포를 안은 바위가 사덕암인데 이는 “덕 있는 사람을 기다리는 바위”로 풀이하자면 태백오현의 뒤를 이어 다시 와선정은 ‘덕 있는 사람’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외에도 폭포 옆 바위에는 와선정과 사덕암의 글씨가 남아 있으며 와선정은 산림 처사의 은둔처로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곳에 다섯 분의 은자가 소요하며 시문을 나누고 후진양성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을 태백오현이라 불렀습니다. 태백오현은 잠은 강협(1602~1671), 포옹 정양(1600~1668), 각금당 심장세(1594~1660), 두곡 홍우정(1595~1654), 손유당 홍석(1604~1680)을 칭하는데 모두 고려와 조선에서 명문가로 이름을 더날였던 후손들입니다.
1636년(인조14년)에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청태종에 세 번 절하고 9번을 땅에다 이마를 박으며 조아린 ‘삼배구고두례’인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자 이들은 결기의 심정으로 벼슬을 버리고 태백산 기슭으로 내려왔고 모두 와선정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살면서 대명절의를 지키며 서로를 위로하고 우의를 다졌다 합니다.
은폭
그들이 우위를 다졌다는 와선대에다 세운 와선정은 앞면 2칸, 옆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인 마루 형태의 건물입니다. ‘와선정기’를 보면 와선정은 1832년(순조32년) 후손인 강씨와 심씨가 합해 정자를 세우고 난 후 ‘와선지’ ‘사덕암지’의 뜻을 따라 와선정이라 이름 하고 1895년에는 정자를 수리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각문을 들어서자 작은 돌계단을 내려서면 바로 정자의 뒷면입니다. 계곡을 마주하며 세살분합문을 들어 올리는 열개식인 앞면과 달리 뒷면은 판자로 막아 각각 칸에 작은 문을 1개씩 달았고 좌우에는 흙담 1칸에 1칸은 여닫이문을 달아 출입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건물은 통간이며 우물마루에다 정자 바깥의 네면은 쪽마루를 돌렸지만, 뒷면을 제외한 삼면에는 평난간을 설치했습니다.
‘태백오현’은 조선 정조 14년에 왕명으로 병자호란 때 재신척화 순절자를 기록한 추념록인「존주록배신열전」에서 이들 다섯 선비를 태백오현이라 기록하고 받들며 경의를 표한대서 유래되었다 합니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월정교. 신라 최고의 다리였던 경주 월정교 복원 공사가 끝나갑니다.
신라의 고도는 서라벌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경주가 옛날 신라의 수도입니다. 그런 경주에 현재 신라의 전성기를 방불케 하는 대역사가 진행 중입니다. 그 대역사가 월정교 복원공사입니다. 월정교는 경주를 관통하는 하천인 남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천에는 신라 천 년을 상징했던 다리가 하나가 아니고 두 곳이 있었다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두 곳의 다리가 월정교와 춘양교입니다. 두 곳 모두 지금까지 무너진 교각 잔해만 하천바닥에 널부러저 있었습니다. 그 두 교각 중 한 곳인 월정교가 현재 새로운 대역사를 쓰고 복원이 되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월정교 여행을 하고 왔습니다. 여행이라 했지만, 아직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아 멀찍이서 주변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궁금해서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에게 물었습니다. 언제쯤이면 공사가 끝나는냐고예 ㅎ ㅎ 그 관계자의 말로는 월정교 공사는 거의 끝났으며 주변 조경공사만 마무리하면 된다 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내년 봄에는 모든 공사가 끝나 일반인도 관람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내년 봄을 손꼽아 기다려봅니다.
처음 월정교 복원공사를 본 게 아마 2년 전 즘 되는 것 같습니다. 그때도 월정교 외관은 마무리된 것 같았는데 그러다 잊고 지내다, 최근에 블로그에서 월정교 야경 사진을 보고 당장 달려가야겠다 싶었습니다. 월정교 야경사진은 남천에 흐르는 불이 반영되어 정말 내 마음을 홀딱 반하게 만들었습니다. 포스팅 날짜를 보니까 그때가 11월 초순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남산 둘레길을 겸하면 되겠다 싶어 경주를 찾았습니다. 이른 아침인지라 상쾌한 기분을 즐기고 싶어 경주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월정교까지 걷기로 했습니다. 3km 남짓한 거리를 걸으면서 경주의 다른 문화재를 곁눈질로 보는 즐거움도 누렸습니다. 계획은 도착해서 낮의 월정교를 찍고 둘레길을 걸은 다음 야경을 담으면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다는 생각으로 월정교에 도착했지만, 월정교와 맞닥뜨린 나의 두 눈은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실망보다 더한 낙담에 한숨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블로그의 반영 야경은 어떻게 찍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월정교는 아직 겉모습만 마무리되었고 주변은 황량함 그대로였으며 특히 반영이 아름다웠던 월정교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물이 담겨 있을 만한 웅덩이도 없을 뿐 아니라 남천의 물도 말라 조금의 반영도 기대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웅장한 월정교의 누정과 교각의 모습에 그저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신라 시대의 월정교가 과연 이런 웅장하고 거대한 모습이었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들었습니다. 그래도 섬세한 누각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천년 고도 경주를 상징하는 건물로서는 손색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월정교는 춘양교와 함께 서라벌의 왕궁을 들어서는 다리였습니다. 두다리는 신라 경덕왕 19년인 760년에 궁궐 남쪽을 흐르는 문천에다 놓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1280년인 고려 시대 충렬왕 6년에 중수했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500년 이상을 신라와 고려 시대를 넘나들면서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한 것은 틀림이 없나 봅니다.
월정교를 들어서면 곧바로 반월성의 끝과 연결되고 요석공주가 머물렀다는 요석궁이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은 자료로만 요석궁의 흔적을 찾을 수 있으며 조선 시대에 세워진 경주향교와 최 부자 고택이 있고 경주 교동마을의 고택체험과 상가로 탈바꿈했습니다. 현재 복원된 월정교의 19m 아래에는 요석공주와 원효대사 간의 연결 고리가 된 ‘유교’의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원효는 의상과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가 도중에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닫고 그 길로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와 노래로서 민중 속을 파고드는 포교에 힘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원효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느냐.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라며 노래하고 다녔습니다.
태종무열왕은 원효의 노랫말을 알아듣고는 원효대사를 왕궁으로 불렀습니다. 원효는 태종무열왕이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는 바로 그 길로 궁궐로 향했습니다. 원효는 문천(지금의 남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물에 풍덩 하고 빠져 걸쳤던 옷이 모두 젖어버렸습니다. 그 전갈을 태종무열왕이 받고는 당장 급한 거 없다며 먼저 젖은 옷과 몸을 말리라며 요석궁에 머물게 했습니다.
요석궁에는 무열왕의 공주인 요석공주가 머물던 궁이며 그날 밤 당장 사달이 났습니다. 그 사이에서 신라의 성현 중 한 분인 설총이 태어났습니다. 그 후 원효는 파계하여 소성거사라 하면서 대중 속을 파고드는 포교를 했습니다.. 원효가 발을 헛디뎌 빠졌던 다리의 흔적이 월정교 바로 아래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원효가 문천의 다리를 건널 때는 복원된 월정교처럼 누각을 올린 다리가 아닌 그저 평범하고 난간 없는 다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월정교 발굴조사에서 배 모양의 교각을 확인했는데 이는 상류에서 내려오는 센 물살을 고려한 듯 보입니다. 다리 길이는 60.57m이며 교각의 폭이 13m 인 것을 보면 오늘날 건설해도 거대한 다리라 생각됩니다. 교각 사이의 발굴조사에서 타다남은 목재와 기와 조각이 나왔던 것을 추정하면 교각 위에다 누각이 연결된 누교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이런 거대한 다리가 완공되었던 것도 놀랐지만 그 위에다 누각을 올린 다리라니 이를 보면 신라의 건축기술도 대단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월정교의 복원은 2008년~2013까지 66.15m의 교각과 누교 복원을 마쳤으며 그리고 총 110억 원을 들여 2017년까지 교량의 양쪽 끝에다 앞면 5칸, 옆면 3칸, 최고 높이 15.67m의 중층 건물인 문루를 각각 완공했습니다. 문루는 옆에서 보면 여덟 팔자 형태인 팔작기와지붕에 주심포양식입니다. 월정교는 2016년 형산강 8경에 선정되었고 국가지정문화재에 춘양교와 함께 사적 제457호에 지정되었습니다.
함안을 대표하는 여행지는 함안군 가야읍 내에 있는 말이산고분군입니다. 이는 함안군을 소개하는 여행 광고판에 빠지지 않고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게 말이산고분군이며, 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번 함안 기차여행에서 함성 중학교의 함안 주리사지사자석탑과 함안읍의 소고기국밥, 그리고 무진정, 대산리 석조삼존상을 보고 성산산성을 올랐습니다.
이번에 걸으면서 다니는 함안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말이산고분군과 함안박물관만을 남겨 놓았습니다. 무진정에서 성산산성을 올라 바로 말이산고분군으로 코스를 잡았지만, 산성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말이산고분군 방향으로 내려서는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내가 하산길을 찾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조남산에서 백산마을로 내려가는 길이 있을 법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산행도 아니고 해서 느긋한 함안여행만을 생각하며 편안한 길로만 걷기로 하였기에 애써 무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시 출발지였던 무진정주차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성산산성 길은 무진정으로 돌아오게끔 길이 나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진동에서 가야읍으로 들어가는 도로를 따라 걸었습니다. 조남산을 돌아서니 왼쪽에 꼭 누에같이 납작 엎드린 말이산이 나타났습니다. 산 능에는 봉긋한 고분군도 보여 단박에 말이산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백산마을로 들어가는 마을길을 보며 왼쪽으로 꺾었습니다. 가로수의 은행나무는 자신의 몸을 둘렸던 나뭇잎을 모두 털어내는 듯 몸을 막 털듯이 떨었습니다. 그러자 우수수 은행잎은 떨어져 바람에 나뒹굴었으며 온 천지를 노랗게 물들였습니다. 그런 함안여행은 나의 발걸음을 더욱 급하게 했습니다.
성산산성이 있는 조남산
겨울의 해는 짧아 노루 꼬리만큼 남은 해의 꼬리를 붙잡으며 바쁘게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백산마을을 지나 도로를 건너서 말이산고분군의 끄트머리에 닿았습니다. 보통 말이산고분군은 함안박물관 쪽이나 함안군청 쪽에서 둘러보지만 저는 함안 읍내의 여러 문화재를 둘러보고 말이산고분군의 끝 부분인 31번 고분군부터 밟기 시작했습니다.
말이산고분군은 사적 제515호입니다 처음에는 사적 제84호 도항리 고분군과 사적 제85호 말산리 고분군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같은 시기에 조성된 하나의 고분군임을 발굴조사에서 밝혀지면서 통합하여 2011년 7월 재지정했습니다.
함안군 가야읍의 말이산고분군은 아라가야의 왕과 귀족의 무덤이며 당시 찬란했던 아라가야의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로 아라가야의 도읍인 가야읍의 말이산 구릉지에 조성되어있습니다. 말이산(末伊山)의 뜻을 보면 머리산을 차음하여 한자로 표기한 것이며 이는 최고권력자를 상징하는 ‘우두머리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말이산의 규모는 남·북으로 1.9km 정도 길게 늘어선 주능선과 서쪽으로는 여덟 개의 지능선이 완만하게 흘러내려 그 구릉지에 고분군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지금 모습과는 다르게 북동쪽으로도 더 능선이 뻗어 나갔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진주~마산간 도로와 철도가 가설되고 마을이 커지면서 훼손되었다 합니다.
말이산고분군을 걷다 보면 주능선과 가지 능선의 봉우리에는 대형의 고분이 있고 가지능선의 산 사면에는 중소형고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말이산고분군은 현재 37개가 관리중이며 모두 번호를 붙여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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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외에도 고분으로 보이는 게 100여 기 정도이며 봉분이 깎여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생각한다면 1,000여 기 이상의 고분이 있었지 않았나 추정하고 있습니다. 말이산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때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처음 발굴이 이루어졌습니다.
일본은 한반도 침략의 정당성인 임나일본부설(4세기 후반 고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백제와 가야·신라를 정벌해 임나일본부를 설치하고 200여 년간 지배했다는 학설)의 증거를 찾으려는 목적으로 6 가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말이산 4호 고분을 찬물에 밥 말아 먹듯 후다닥 10일 만에 발굴을 끝마쳤다 합니다.
그리고 1990대에 들어와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10여회 이루어졌고 이때에 아라가야 최고지배자의 고분들로 밝혀졌습니다. 말이산고분군에는 기원전부터 6세기 전반의 다양한 무덤 양식인 덧널무덤, 널부덤, 구멍식돌덧널무덤, 앞트기식돌방무덤 등이 조성되어 있어 아라가야의 성립에서 멸망까지를 고분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입니다.
그중에서도 규모가 큰 고분은 아라가야 전성기였던 5세기 후반에 조성된 무덤으로 구덩식돌덧널무덤 방식이며. 길이가 10m에 너비가 2m인 무덤 안에서 5명의 순장인골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또한, 출토된 유물로는 불꽃무늬토기와 수레바퀴모양토기 등의 특이한 모양의 토기류와 쌍용문, 둥근고리큰칼, 투구, 갑옷, 말갑옷, 새모양장식 미늘쇠 등 철의 왕국이라 불렸던 아라가야의 발전된 다양한 철기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말이산고분군은 고분을 따라 둘레길이 아름답게 이어집니다. 경주에 있는 신라의 봉분은 대부분 평지에 자리했다면 가야의 말이산고분군은 야트막한 구릉에 봉긋하게 솟았습니다. 멀리서 보면 여인의 아름다운 젖무덤이 연상될 정도로 유려한 곡선을 보여 예술의 사진이 나올 법도 한데 ㅋㅋ 마음먹은 대로 사진은 찍히지 않았습니다.
오뚝 솟은 고분을 끼고 탐방로는 이어졌습니다. 무덤을 보면서 산 자와 죽은 자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순간의 찰나인 한 끗 차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무슨 도를 터득한 사람도 아닌데 많은 봉분이 내 마음마저 차분하게 만들었습니다. 왼쪽 구릉 끝에 함안박물관건물이 보였습니다.
해는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으면서 붉은 물을 토해내듯이 온 하늘을 붉게 물들였어 마치 하늘이 광란을 일으키는 것 같았습니다. 말이산고분군에서 맞는 저녁노을은 정말 탄성을 자아낼 만큼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걸음을 재촉하면서 함안박물관에 내려갔지만, 박물관은 업무를 마감하고 문을 닫은 뒤였습니다.
아쉽지만 이곳에서 출토된 많은 문화재는 다음 함안여행에서 보라는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입구에 수레바퀴모양토기 모형을 보는 거로 만족하고 내려왔던 고갯길을 다시 올라 함안군청 방향으로 내려가면서 함안 말이산 고분군 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성산산성이 있는 조남산은 작은 산이지만 한바탕 부산을 떨고 올라야만 산성을 한 바퀴 돌 수 있습니다. 성산산성을 쉽게 찾을 수 없었던 게 스마트폰의 지도에는 조남산으로 나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발 전에 미리 성산산성의 위치를 확인했고 무진정이 있는 괴항마을에서 산으로 오르는 들머리를 찾았습니다.
처음에는 마을을 굽어보는 큰 나무에다 덱으로 전망대를 만들었고 그 옆으로 돌계단이 깔끔하게 설치되어 있어 아마 저 돌계단이 성산산성으로 오르는 길인가 싶다며 무진정과 대산리 석불상을 보고 되돌아와 돌계단 길을 올랐지만, 무덤가는 길이었습니다.
다시 내려와 마을 중간의 골짜기로 오르는 넓은 길로 들어섰습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연둣빛 대나무가 길을 막아서면서 산길이 좁아지는 게 이 길도 아닌 것 같다며 다시 내려왔습니다.
동행한 일행은 "성산산성은 함안의 초·중·고등학생이 많이 찾는 유서 깊은 문화유적지라 길이 잘되어 있습니다"며 말했지만 스미트폰 앱의 지도에도 조남산으로 나와 우리는 "이산이 아닌가 보다"며 포기하고 말이산고분군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무진정을 지나면서 주차장에서 성산산성의 작은 안내판을 보게 되어 얼마나 반가웠던지 ”여깄네“하면서 돌아가신 아버님을 우연히 만날 만큼 반가웠습니다. 무진정 주차장에서 성산산성까지 거리는 약 700m 이며 과연 성산산성은 함안군민이 모두 찾는다는 문화유적지라 들머리부터 보도블록이 고갯마루까지 넓게 깔렸고 나머지는 흙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산산성을 조남산에 있다 하여 조남산성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진즉 알았다면 마을 소로로 올라도 되는데 ㅋㅋ 미처 그 생각을 못하고 성산산성을 찾는다고 죽도록 고생만 하고 일정도 차질이 생기고 하여튼 남은 일정을 생각해서 빨리 성산산성을 올라야 했습니다.
무진정 주차장에서부터 임도는 제법 가팔랐습니다. 한숨을 돌리며 턱 마루에 서서는 편안하게 길이 이어졌습니다. 멀리 하얀 띠가 보여 ”저게 뭐꼬“하며 가까이 가니 성산산성 발굴현장을 보호용 부직포를 덮었는데 현재에는 발굴이 중단된듯했습니다. 성산산성 안내판에는 조남산 정상부에 머리 띠 모양으로 둘러쌓은 퇴뫼식 산성이라 했습니다.
1991년 이후 4년간의 발굴조사를 하면서 석성임을 확인했습니다. 워낙 긴 세월을 지나다 보니 성벽이 허물어져 꼭 언덕처럼 낮게 보였습니다. 이 때문에 흙과 돌을 섞어 쌓은 산성이라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성산산성은 납작하게 다듬은 돌을 수직형태로 차곡차곡 쌓은 석축산성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합니다.
성산산성의 전체길이는 1.4km인데 가운데 작은 분지를 감싸며 그 주변의 높은 곳을 따라 성을 쌓았습니다. 남북은 긴 대신에 동서는 짧으며 타원형 형태입니다. 동쪽과 서쪽·남쪽에 각각 성문이 있고 우물 1개와 건물터 2곳도 확인되었습니다. 이 성산산성은 성(城)이 있는 산이라 해서 성산(城山)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지도서와 함주지에 가야 고성이라 기록하였으나 출토된 유물을 보면 대부분 신라기와, 토기 조각, 목제품, 과일씨 등 신라 시대 유물이라 합니다. 그리고 동문 터에서 27점의 목간이 나왔다 합니다. 목간은 종이 대신 나무에다 기록해 놓은 것을 말합니다.
성산산성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12년 동안 16회나 발굴조사를 하면서 6세기 중 반경에 쌓은 신라 시대 석축 산성임을 밝혀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동쪽 성벽 부근에서 부엽공법시설과 암거시설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배수시설이 눈에 띄는데 이는 계곡지형을 고려한 집수에 대비해 부엽층으로 덮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고대문서 역할을 했던 목간과 농공구와 방망이, 토기 이외에도 다양한 생활 목기가 나왔습니다. 2017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보도자료를 보면 2014년~2016년까지 17차 발굴조사를 했으며 출토된 23점의 목간에서 6세기 신라의 율령체계와 신라 왕경인(王京人)의 관직명인 ’대사(大舍)‘ 등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도 확인했다 합니다.
특히 네 면에 모두 글자가 기재된 사면 목간은 총 3점이 나왔는데 17차 발굴조사에서 나온 사면 목간 1점은 재질이 소나무이며 길이 34.4cm. 두께 1.0~1.8cm로 깎아 만들었고 총 56글자가 쓰여 있었다합니다.
이 목간을 보면 진내별 지방의 촌주가 중앙 출신 관리에게 보고서 형식으로 올린 문서로 6세기 중반의 신라 지방사회에까지 문서행정과 강력한 중앙정부의 공권력이 율령을 통해 지방까지 지배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합니다.
함안 성산산성의 출토된 목간은 총 308점이며 이는 현재까지 출토된 우리나라 목간의 절반 정도로 많은 수량입니다. 함안여행에서 쉽게 지나치기 쉬운 함안 성산산성은 영남 최고의 민간정원인 무진정과 함께하면 아주 멋진 여행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