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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여행/영덕가볼만한곳)영덕대게원조마을 차유마을. 영덕대게 원조마을 차유마을 여행을 하다. 


영덕하면 퍼뜩 떠오르는게 영덕대게입니다. 그만큼 영덕의 대표 먹거리이며 수식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영덕대게 원조마을은 하면 대부분 사람은 고개를 꺄우뚱하며 영덕 아닙니까?하고 정확한 답을 내지 못합니다. 아니면 인기드라마였던 ‘그대 그리고 나’ 촬영지로 현재 많은 주목을 받는 강구항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게원조마을 주소: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경정리 차유마을


2013/11/29 - (경북여행/영덕여행)블루로드 축산 죽도산 전망대. 동해의 전망대로 대나무가 많아 죽도인 죽도산 등대 전망대

2013/12/02 - (경북여행/영덕여행)해파랑길 블루로드 B코스. 해맞이 공원의 블루로드 해안가 멋진길 블루로드 B 코스.블루로드

2015/04/06 - (경북여행/영덕여행)영덕대게축제. 제18회 영덕대게축제 맛있는 체험도 하고 축제도 즐기는 영덕여행

2015/04/13 - (경북여행/영덕여행) 해맞이 공원 창포말 등대. 독특하게 대게모양인 영덕 해맞이 공원 창포말 등대




당시 드라마가 워낙 인기였으며 지금 영덕대게 축제도 이곳 강구항에서 열려 당연히 영덕의 강구항이 영덕대게 원조마을로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게 아닙니다. 영덕대게 원조마을은 영덕에서 7번국도를 따라 더 올라가야 합니다. 영덕군 축산면 소재지 못 미쳐 인 경정2리이며 차유마을이라합니다.



차유마을은 동해 바닷가 쪽에 있는데 독특한 지형을 하고 있어 바깥에서는 마을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마을 뒤쪽으로 산등성이가 길게 해안선을 따라 솟았는데 차유마을은 급한 비탈을 계단식으로 깎아내어 형성된 작은 해안마을입니다. 왜 차유마을이라 불렸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조대게마을을 알리는 기념탑에는 1345년인 고려 29대 충목왕 2년에 영해부사였던 정방필이 처음 부임하여 관내를 순시하게 되었습니다. 부사는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좁은 고개를 넘어야 했습니다. 영해부사 일행이 수레를 타고 고개를 넘어왔다 하여 차유(車踰)마을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왜 대게 원조마을의 타이틀을 얻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영덕에서 내려오는 대게에 관한 유래는 대략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고려 태조 왕건 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게에 관한 기록이 꽤 역사가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영해지역을 당시에는 예주라 했습니다. 예주 연역을 보면 고려 태조 왕건 23년에 태조가 오늘날의 영해지역을 처음 순시했습니다. 그때 태조의 주안상에 특별한 음식으로 이곳 축산 차유마을에서 잡아 올린 대게가 수라상에 올라왔다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조선조 초기에 여러 지방특산품을 중앙에 진상하는데 영덕군의 대게도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라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대게 먹는 방법은 두 손과 입이 최고입니다. 임금이라도 별수 없이 양손을 사용하고 입으로 대게 껍질을 깨고 얼굴에 게살을 묻히며 먹은 표시를 확 낸 모양입니다. 이런 주상의 모습을 보고는 신하들이 보기에 아주 망측하다는 생각을 했나 봅니다.





그래서 임금의 수라상에서 대게 요리를 빼버렸는데 임금이 대게 맛을 잊지 못해 하루는 신하에게 대게를 가져오라고 명했습니다. 지시를 받은 신하는 궁궐을 나와 바닷가를 누비며 대게를 찾았고 수개월 만에 겨우 지금의 축산면 죽도산 앞바다에서 대게를 잡는 어부를 만났습니다.





어부에게 지금 잡은게 이름이 무엇인가하며 물었지만, 어부는 대답하지 못하다가 ‘이상한 벌레’를 뜻하는 언기(彦基)라 대답했습니다. 신하는 대게를 들고 궁궐로 돌아왔으며 이름을 붙여야겠기에 의논을 하여 다리가 대나무 같이 생겼고 침이 있어 ‘죽침언기어(竹針彦基魚)’라 했습니다.

 


또는 대나무 마디를 닮은 다리가 여섯 마디라 ‘죽육촌어(竹六寸魚)’ 등의 이름으로 부르자는 공론을 벌이다가 사람의 손으로 게 껍데기가 벗겨져 대나무 죽(竹)자에 게해(蟹)자를 합해 죽해(竹蟹)라 부르게 되었으며 요즘 대게라 불리게 된 유래입니다.


 

또한, 대게잡이 어선이 항상 대나무 섬인 죽도산을 지나는데 잡은 대게의 다리가 죽도산의 대나무 마디와 같이 길쭉하여 대게라 부르게 되었다고도합니다. 이를 종합해 영덕대게 원조마을이 영덕군 축산면 강정리 차유마을이 되었다 합니다. 영덕군에서는 매년 봄이면 영덕대게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이때 이곳 차유마을 영덕대게 원조마을 표지석 앞에서 영덕대게 기원제를 올린다고 하니 대게 원조마을은 틀림없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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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맛집/봉양맛집)의성엠스클럽맛집 의성톨게이트맛집 서울깍두기. 밥도둑이 따로 없는 서울깍두기 고추장돼지불고기


의성 엠스클럽 맛집이자 중앙고속도로 의성톨게이트 입구에 있는 서울 깍두기를 포스팅하겠습니다. 의성군 봉양면 방향에 출장을 갔습니다. 부산으로 오려고 의성 나들목에서 승용차를 고속도로에 올리려는데 어두컴컴한 밤에 유난히 반짝이는 곰탕으로 유명한 서울 깍두기 간판이 보였습니다.






의성군 봉양면 서울깍두기 주소:경상북도 의성군 봉양면 경북대로 4362-5(도원리 971-3)
의성군 봉양면 서울깍두기 전화:054-833-7720




마!! 저기 가서 저녁으로 곰탕이나 먹자. 오늘 날씨도 엄청나게 추웠는데 따뜻한 사골육수로 몸도 녹이고 가자며 톨게이트방향으로 꺾다가 그대로 직진하여 유턴해가지고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식당은 도원삼거리에 있었는데 특히 부산에도 유명한 곰탕집 서울 깍두기가 있어 우리는 체인점인가 생각하며 들어갔습니다.





자리에 앉아 무엇을 먹을까 고민을 했습니다. 막상 곰탕을 먹을까 했는데 부산 서울 깍두기에서도 곰탕을 가끔 먹는데 이곳 의성까지 와서 곰탕을 하며 일행을 보니 다른 거 먹자는 눈치였습니다. 그래 무엇을 먹을까 하며 메뉴판을 보다가 퍼뜩 눈에 들어오는 메뉴가 있었습니다.









‘고추장 돼지 불고기’를 주문하면서 우리 부산에도 정말 유명한 서울 깍두기가 있는데 그곳하고 체인점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체인점이 아니고 주방에 사장님께서 모든 음식을 장만하고 요리를 하신다고 했습니다. 살짝 보니 연세가 지긋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막상 들어갈 때는 실내에 손님이 한 분도 안 계셨는데 우리가 들어가자 좀 있다가 손님이 줄줄이 사탕으로 밀려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금방 식당 안이 손님으로 북적였습니다. 일행에게 아니 무슨 시골에 이리 손님이 많노하며 이곳에서는 맛집으로 통하는 집인 같다며 내심 음식 맛에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다 아!! 주문을 잘못했다며 ‘의성 마늘 돼지찌게’를 시켜서야 했는데, 의성 하면 마늘 아이가?? 우짜노 물릴 수도 없고 마!! 그냥 먹자 다음에 이곳에 오면 꼭 의성 특산물인 의성마늘돼지찌개를 먹자며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그러나 모든 요리에 마늘이 들어가지 않는 요리가 없습니다. 하하 고추장돼지불고기에도 물론 마늘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조금은 위안을 가지며 기다렸습니다. 식탁 위에 아주 작은 김칫독이 두 개 놓였는데 배추김치와 깍두기를 작은 접시에 들어서 먹게끔 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양파절임과 고추장아찌가 반찬의 전부입니다.





고추장아찌를 보니 한여름에 차가운 우물물에 꽁보리밥을 물에 말아 밥 위에 척 걸쳐 먹던 생각에 입안에 군침이 돌았습니다. 드디어 메인 음식인 고추장 돼지 불고기가 나왔습니다. 쑥갓과 콩나물 대파 당면 등 갖은 채소와 고추장돼지불고기의 만남, 전자레인지 위에 올려 타지 않게 국자로 잘 저어줍니다.





고추장의 뻘건 양념이 정말 먹음직스럽고 매콤하게 보이는 게 나만의 생각일까요?? 일단은 아주 맛있어 보였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에다 고추장돼지불고기를 듬뿍 올리고 그 위에다 밥도둑인 고추 장아찌까지 올려봅니다. 입을 크게 벌리고 한입에 꿀꺽 삼켰습니다.












고추장아찌와 고추장돼지불고기의 매콤함에 호호하며 밥을 더욱 부르게 합니다. 바람 불어 추웠던 겨울날에 이런 맛있는 호사를 의성군 봉양면의 서울 깍두기에서 누렸습니다. 후식으로 커피와 시원한 수정과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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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맛집/청도맛집)한재미나리 미나리향기. 부드러운 한재미나리가 지금이 제철, 미나리 향기에서 맛보다.


제가 산행을 좋아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배낭을 둘러메고 전국을 싸돌아다닙니다. 그러나 설을 쉬고 대보름 사이에 가는 산행지는 꼭 정해져 있습니다. 그곳은 청도군 청도읍의 평양리에 있는 화악산입니다. 청도 화악산 하면 산행을 좋아하시는 분은 모두 왜 그러는지 아하~~ 하며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청도맛집 한재미나리 미나리향기 주소: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평양리 696

청도맛집 한재미나리 미나리향기 전화:054-371-5666



☞2015/02/03 - (경북여행/청도여행)청도 오지산행 토한산~통내산. 청도 토한산~통내산에서 겨울 산행을 하다.

2014/12/19 - (경북여행/청도여행)청도 꼬깔산~육화산 산행. 여섯가지 보물을 간직한 숨은 산 청도 육화산 산행.

2016/03/10 - (경북여행/청도여행)청도 와인터널. 옛 경부선 남성현터널이 감와인 숙성고가 되면서 청도 와인터널이라 부르고 필수 코스인 청도여행 1번지가 되었습니다.

2016/03/09 - (경북여행/청도여행)청도 대적사 극락전. 극락정토의 주재자 아미타불을 모신 대적사 극락전 내부 단청과 특이한 기단석의 불교 조각 예술을 만나보세요.

2016/03/08 - (경북여행/청도여행)청도읍성. 청도여행의 백미 청도읍성과 고마청, 일제강점기 읍성 철거 정책 때 교실로 사용되어 남게된 청도읍성 동헌 둘러보기.

2016/03/03 - (경북여행/청도여행)보물로 지정된 청도석빙고. 현존하는 석빙고중에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규모가 큰 조선시대 얼음저장고 청도석빙고.



맞습니다. 청도한재하면 그 유명한 한재미나리 집단생산지입니다. 미나리 집단 생산지하니까 얼마나 크다고 그러느냐 하겠지만, 이곳 한재미나리는 상리, 평양리, 음지리의 3개 리(理)가 그 큰 골짜기에 모두 미나리 농사를 짓습니다. 이곳 미나리가 얼마나 유명하냐 하면 화악산의 물이 워낙 차갑고 좋아 일찍이 이곳 미나리가 한양의 임금님께 맛있는 미나리로 진상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한재 미나리의 특징은 미나리의 복병이자 흡혈귀인 거머리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미나리 하면 가장 겁나는 게 거머리인데요. 거머리는 물이 따뜻하면 생긴다 합니다. 비닐하우스의 한재미나리는 아침에 지하수를 뽑아 물을 공급하고 오후에는 비늘하우스 실내 온도가 올라가면 미나리 비닐하우스의 물을 모두 빼버려 처음부터 거머리가 생기는 것을 차단합니다. 그래서 생으로 싱싱한 미나리를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화악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온 계곡이 비닐하우스로 별천지를 이룰 정도로 봄 미나리생산을 많이 합니다. 특히 설과 대보름 사이에는 미나리 물량이 적어 자체적으로 소화만 하고 대보름을 지나면 본격적인 생산을 해 서울·부산 등 전국 유명 백화점에 공급한다고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합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덜 바쁠 때 찾아가는 청도한재미나리, 그러나 일찍 나온 새가 많은 먹이를 먹는다고 이른 봄에 찾아가면 정말 아주 부드러운 미나리를 먹을 수 있습니다. 이른 봄의 미나리 즉 초벌인 미나리가 가장 부드럽고 맛이 좋기 때문입니다. 지금 청도 한재에는 연한 녹색 미나리를 먹기 위해 벌써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습니다.




저도 부드러운 초벌의 미나리를 먹기 위해 먼저 화악산 산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산행 내내 저녁요기로 삼겹살과 미나리를 먹을 생각을 하니 무겁던 발걸음이 정말 가벼웠습니다. 화악산은 악(岳)자가 붙어 산행이 만만치 않은데 미나리 덕분에 수월하게 산행을 마쳤습니다.





미나리는 한재의 많은 미나리식당과 대보름을 지나면 미나리판매장 자체에서도 먹을수 있지만, 삼겹살과 밥을 먹으려면 식당을 찾아가야 합니다. 저는 산행 입구인 평양1리 노인회관 옆에 있는 ‘미나리 향기’를 보고 오늘 저녁은 이곳에서 생각하며 산행 전에 미리 찜을 해두었습니다.





하산하여 바로 미나리 향기로 직행했습니다. 미나리는 사람에게 정말 좋은 식물입니다. 그 효능을 보면 한방에서는 수근이라하여 고열에 가슴이 답답하며, 심한 갈증 증상를 치료한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또한 이뇨작용으로 부기를 빼주고 해독작용과 혈압을 내려주며 여성의 대하증, 면역력 증가로 암 예방 효과가 있습니다.





특히 애주가에게는 술 마시기전에 미나리즙이나 술 먹은 후에 먹는 복국에 복어 독 중화에 미나리를 넣습니다. 그만큼 미나리로 만든 음식을 먹으면 숙취 해소에 정말 좋다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외에도 미나리는 건강한 먹거리로 날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미나리 향기의 첫인상은 사장님이 정말 친절했습니다. 우리가 고기를 굽으려고 집게를 들고 설치니까 고기를 구워주겠다 하였습니다 아니 뭐 삼겹살 몇 점 굽는데 우리도 구울 수 있는데 사장님이 직접 구워 실 것까지 있습니까 하니 사장임 왈 “제가 다 구워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하였습니다.





속으로 이유는 무슨 하며 있는데 사장님이 포도주 한잔을 권했습니다. 경기도에서 제부도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포도로 만들었으며 사장님의 본가에서 직접 포도농사를 짓는다고 합니다. 그 포도를 이용하여 포도 와인을 만드는데 제작과정에서 순도 50도의 증류수인 진으로 삼겹살과 한재 미나리를 더욱 맛있게 하는 불쇼를 보여줍니다.





아마 도수 높은 술에 불을 붙이면 돼지 특유의 잡내도 없애 주고 고기도 더욱 존득하니 맛이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했으면 초가삼간 다 태울 것 같았습니다. 크크 미나리 먹으려고 왔는데 불쇼까지 눈요기와 입요기까지 모두 만족하게 해주는 서비스 만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직접 포도 와인을 만들어 판매도 하며 이리 또 손님에게 한 잔씩 서비스도 돌리는데 와인 도수가 만만치 않은 18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염치불구하고 한 잔씩 더 서비스로 받아먹었습니다.







생미나리가 아삭아삭하니 삼겹살과 함께 먹고 불에 올린 부드러운 미나리도 삼겹살과 먹는 일거양득의 미나리 요리에 구수한 된장으로 끓인 저녁으로 밥까지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 집에서 나오는 식재료는 거의 직접농사를 짓고 만든 건강식이라며 원산지가 떡하니 메뉴판에 붙어 있습니다.







미나리 향기 식당에서는 미나리 500g에 8,000원, 생삼겹살 150g 9,000원. 참고로 한재미나리 가격은 1kg 11,000원에 판매합니다. 경기도에서 포도농사를 짓는 총각과 경북 청도의 미나리 농사를 짓는 처녀가 만나 가정을 이룬 게 크크 어찌 보면 우리는 천생연분이라며 그 덕분에 한재 미나리를 먹으러 와서 포도 와인을 얻어먹고 간다며 미나리 향기에 취해서 나왔습니다.


미나리향기





화악산에서 본 한재미나리 비닐하우스


화악산 정상


화악산에서 본  전경


화악산에서 본 전경


화악산에서 본 전경


화악산에서 본 전경


화악산에서 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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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미조여행/남해미조가볼만한곳)천하몽돌해수욕장. 천하마을의 몽돌해수욕장에서 힐링을 하다. 


명승지가 아니라도 가보고 싶은 곳을 여행 하다 보면 그 마을의 지명이 사실 많이 여행자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이번에 찾았던 천하마을이 꼭 그러한 경우입니다. 천하 하면 먼저생각나는게 ‘온세상’을 뜻하거나 천상천하의 경우처럼 하늘 위에도 하늘 아래에도 이만한 마을이 없다는 뜻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천하몽돌해수욕장 주소:경상남도 남해군 미조면 송정리

 



그러나 미조면의 천하마을은 앞의 두 뜻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도 남해군 미조면의 천하 마을은 하늘 위에나 아래에나 이세상에서 딱 하나뿐인 만큼 아름다운 바닷가마을이란 의견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천하 마을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천하란 뜻은 ‘하천 아래’란 뜻인데 일제 강점기에 전국의 지명을 한 자로 바꾸면서 생겼났다 합니다. 원래 마을에서는 ‘내아래’ 뜻인 ‘내~래’라 불렀다 합니다. 내는 하천을 뜻합니다. 지금도 마을에서는 ‘내~래’라고 더 많이 부른다 합니다.



남해도에 무슨 하천이 있을까 싶지만, 해상국립공원인 금산에는 다홍치마의 주름처럼 많은 계곡이 뻗었는데 그중에서도 쇳개골과 내래골이라 불리는 두 개의 큰 계곡이 있으며 골짜기 안에서 서로 합쳐져 두 개의 저수지를 만들었습니다. 이 저수지는 일제강점기에 미조면의 식수원으로 사용되었으며 수량이 풍부하고 수질 또한 맑고 깨끗하다 합니다.



하천 아래인 천하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계절 내내 풍부한 수량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풍부한 수량만큼 여름철에는 바닷물도 맑아 많은 피서객이 찾아오며 봄·가을·겨울에는 도심의 찌든 때를 씻기 위한 힐링 여행지로 주목 받는 곳입니다. 



필자도 이번 겨울에 남해바래길의 하나인 섬노래길을 걷기 위한 출발지로 우연히 찾았다가 천하 마을의 전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마을과 바다를 가르며 늘어선 수백 년 된 느티나무는 천하 마을의 고적을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항아리같이 움푹 들어 않은 겨울의 천하 마을은 ‘고요함’ 그 자체였습니다. 세찬 바람 소리만 생명이 살아 있다는 듯 더욱 요란하게 불어 제겼습니다. 마을은 고요함을 깨우는 건설장비의 기계음만 들릴 뿐 모두가 숨을 죽였습니다. 천하 마을은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로 통했다 합니다.



물이 풍부하고 품질이 좋은 나무가 금산에 지천으로 있어 집을 짓고 한겨울 땔감걱정이 없으며 물이 많아 농사도 짓고 물고기도 잡는 반농반어의 복 받은 땅인 천하 마을. 천하 마을 앞의 해변에는 다른 해수욕장과는 다르게 모래가 아니라 몽돌로 이루어졌습니다.






몽돌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으나 그러나 길게 이어진 몽돌해변을 보면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밀려드는 파도가 빠져나갈 때는 쟈르르 쟈르르하며 돌을 씻는 소리인지 돌이 구르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천상의 하모니 같이 아름답게 들립니다.






아름다운 숲과 해변의 몽돌 그리고 파도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세파에 찌들어 축 늘어진 어깨를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사람이 사는 세상이 꼭 이런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곳에서 KBS 2TV 드라마 ‘상두야 학교 가자’가 촬영되었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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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여행/청송가볼만한곳)청송국가지질공원 만안자암단애. 신성계곡 지질탐방로 녹색길 청송국가지질공원  만안자암단애를 만나다.


청송의 지질명소를 여행하고 왔습니다. 청송에는 지금 세계지질공원회원국으로 청송 국가지질공원이 신청했으며 올해 세계지질공원에 회원국 가입이 확실시된다고 하니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질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특히 청송은 수직 단애를 이룬 암석과 바위봉우리가 엄청나게 많은 곳입니다. 그중에서도 이번에는 신성계곡에 조성된 둘레길를 녹색길이라 합니다. 그 중간에 있는 길안천변  ‘만안자암단애’를 소개하겠습니다.






만안자암단애 주소:경상북도 청송군 인덕면 지소리 만안삼거리 새마을교 옆 길안천변



자암(紫巖)은 붉은 바위를 뜻하는데 만안자암단애의 바위색깔이 꼭 설악산의 적벽처럼 붉다며 ‘붉은 바위’ 뜻인 적벽으로도 불린다합니다. 설악산 천불동 계곡의 수백m 높이의 화강암 바위인 적벽에는 훨씬 못미치지만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을 두른 듯 그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 신성계곡의 대표 절경지 중 하나로 여름철에 많은 관광객이 휴식을 취하며 찾는 곳입니다.

 



만안자암단애를 이루고 있는 바위는 약 1억2천만 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에 만들어진 퇴적암입니다. 이는 돌멩이나 모래 등의 퇴적물이 깊이 묻혀 굳어진 것을 말하는데 이를 퇴적암이라 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지각이 융기하여 땅속에 있던 퇴적암이 지표면으로 올라오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퇴적암층 위로 물이 흐르며 퇴적암을 깎아내어 하천을 만들었습니다. 



장구한 세월 동안 풍화와 침식으로 퇴적암이 깎여 나가면서 절벽을 만들고 그 절벽의 갈라진 틈인 절리를 따라 바위가 떨어져 나가고 물에 씻겨지면서 지금과 같은 수려한 모습의 만안자암단애가 만들어졌습니다. 청송국가지질공원인 신성계곡의 만안자암단애를 사진으로 구경해보세요. 정말 아름답습니다.

 


‘만안자암단애’ 사진으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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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여행/울산가볼만한곳)진하 강양항. 초보 사진가 사상 처음 울주군 온산 강양항 일출촬영 좌충우돌 출사기


사진을 좋아하시는 분은 모두 다 간다는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온산읍의 강양항. 강양항은 회야강의 끝자락에 자리한 작은 포구이지만 언제부터인가 전국의 사진작가에게는 최고의 일출명소가 되었습니다. 일출은 기본이고 멸치잡이 어선과 물안개를 한 장의 사진에 모두 담아낼 수 있다는 강양항, 그래서 사진 초보인 저도 설레는 마음으로 사상 처음 강양항을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강양항 주소: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산읍 강양리 86



지난주 토요일 새벽 3시에 자동으로 눈이 뜨자 혹시나 늦잠자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더 잘 수가 없었습니다. 일단 5시에 출발하기로 하고 뜬눈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5시가 되어 연식이 오래된 디지털카메라를 챙겨 들고 놀이 삼아 울산 강양항으로 출발했습니다. 1시간을 조금 더 넘겨 어두컴컴한 강양항에 도착했습니다.





승용차가 주차된 채 시동이 걸린 게 여러 대 보였으며 관광버스가 내 앞에서 사람들을 한 차 내렸습니다. 서울에서 왔다는 K아카데미로 밤12시에 출발하여 이제 도착했다며 강양항 일출에 많은 기대를 하고 왔다 하였습니다. 저도 이번에 처음 왔다며 많은 분이 “강양항 강양항”하고 또한, 인터넷의 일출 사진을 보면서 정말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에 새벽 같이 달려왔다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래도 취미가 같아선지 금방 가까워졌습니다.

 








바다에 붉은 기운이 감돌고 바다 오른쪽에 작은 섬 명선도가 보였습니다. 소나무가 삐죽삐죽 솟은 명선도 왼쪽으로 아침 해가 걸리는 것을 사진에서 여러 번 봐 왔던 터라 벌써 강양항 일출 포인터인지 모르겠지만 많은 사람이 모래밭에 삼각대를 펼치며 진을 쳤습니다.







저도 왼쪽으로 더 빠져나와 바닷가 암초에 ‘모세의 기적’처럼 물이 갈라지는 틈을 이용하여 바위로 잽싸게 뛰어올라 한자리 잡았습니다. 삼각대를 일단 설치하고 카메라를 거치하니 뒤에서 “혹시 한자리 있습니까?” 하며 묻기에 한자리 정도는 날 것 같다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아마 서울에서 왔던 팀으로 보였습니다.



벌써 우리 뒤로 많은 분이 삼각대를 걸고 해가 솟길 기다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분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참 대단합니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셨다 하니”. 하하 이래서 취미생활은 무서운가 봅니다. 멀고도 먼 서울에서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오는 것을 보면.





그런데 오늘 강양항의 날씨가 그분들의 열정을 받혀주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낮은 구름이 수평선에 깔렸으며 일기예보에는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날씨였지만 너무 추워서 그런지 그날따라 멸치잡이 어선은 물론이고 물안개도 볼 수 없었습니다.



사진으로는 정말 흔하게 물안개와 그 속에서 멸치잡이 어선의 작업 모습을 손쉽게 볼 수 있었는데 이제 보니 그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아주 까마득하게 멀리 있는 한 두 척의 배뿐이었는데 저걸 렌즈로 잡아 당겨 담는다 하니 말입니다.저는 지레 포기를 해야 했습니다.

 




“아이고마 내사 멸치잡이 어선은 안되겠심더”, 마 일출이나 열심히 담아야겠심더”하며 해를 기다렸습니다. 그래도 그날의 해는 두꺼운 구름층을 뚫으며 “나 여깄다”하는 듯 사방, 팔방으로 몸을 태우며 빛을 내뿜었습니다. 그것고 잠시였습니다. 아직 초보 수준이라 일출 담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명선도와 해가 많이 떨어져 자리 선택을 잘못했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오토매틱에 워낙 질이 들은 상태라 무슨 사진이 잘 찍은 것인지 쉽게 구별할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어설픈 초보 사진가를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핑계인 “장비가 안 좋아서’를 속으로 돼내며 연장을 나무라고 마음의 위안을 찾았습니다.





역시 우리 집 앞 송도해수욕장이 나에게는 최고의 일출 포인트야 하며 일출 사진 찍기를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이제 보니 바닷물이 좀 전보다 많이 차오른 상태라 잘못하다가는 암초에 갇힐 판이었습니다. 삼각대를 철수하고 모세의 기적 순간을 기다렸다. 후다닥 뛰어 안전지대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때까지도 많은 진사님은 사진 담기에 열중이셨는데 참 대단한 열정과 장비에 주눅만 들고 진하해수욕장에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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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여행/태백가볼만한곳)황지공원 황지 연못. 낙동강의 발원지 태백시 황지공원의 연못인 황지 야경을 즐기다. 


지난 연말에 태백시에서 숙박하면서 긴긴 겨울밤을 보내기가 따분하여 시내 구경을 나섰습니다. 오랜만에 태백시에 온 이유도 있지만 닭다리에 소주라도 걸칠 요령으로 소주방을 기웃거리는데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가 연말의 분위기에 맞추어 네온 불빛으로 꾸며져 관광객을 맞았습니다.




 

 

황지는 1300리 낙동강의 발원지로 모두 알고 있습니다. 1486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 삼척도호부편에는 황지를 낙동강의 근원지라 하였고 심한 가뭄에는 관청에서 기우제도 지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신성시했습니다. 그러나 낙동강의 실질적인 발원지는 함백산의 금대봉 남쪽 골짜기인 너덜샘이며 이물이 태백시 황지를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간다고 합니다.

 

 

 

 

따라서 너덜샘이 낙동강의 발원지라면 황지는 낙동강의 상징적인 발원지가 됩니다. 그럼 황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황지는 3개의 연못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상지, 중지, 하지이며 둘레가 100m인 상지가 가장 크고 그다음이 둘레가 50m인 중지. 하지는 30m로 가장 작은 규모입니다.

 

 

 

 

상지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굴이 있는데 이곳에서 심한 가뭄에도 매일 5,000톤의 물이 솟아 나오며 삼복더위에도 얼음장같이 차갑고 맑은 물이 마르지 않고 솟아 1989년 식수원인 광덕댐이 완공되기 전까지 태백시민의 중요한 상수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낙동강의 발원지로서 대접을 받으며 태백시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습니다.

 

 

 

 

황지에는 그럴뜻한 전설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한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하면 그 집을 파내어 연못으로 만들어 버렸던 형벌을 내렸습니다. 여기 황지는 그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욕심 많은 사람의 최후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황지라 불리는 연못은 먼 옛날 황씨성을 가진 분의 집터였다 합니다.

 

 

지금도 그 집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당시에도 아주 큰 부자라 모두 황부자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구두쇠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하루는 인근 암자의 노승이 황 부자 집에 시주를 얻으러 왔습니다. 황부자는 시주를 받으러 온 노승에게 시주하는 게 아까워 시주 대신 마구간의 쇠똥을 퍼다 시주그릇에 부어주었습니다.

 


 이를 본 황부자의 며느리가 깜짝 놀라며 노승에게 달려가 쇠똥을 털어내고 쌀을 한데 박 시주하면서 시아버지의 잘못을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습니다. 스님은 며느리에게 “이 집의 운이 이것으로 다해 곧 큰 변고가 일어나니 살려거든 나를 따라서 오시오. 그리고 절대로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하니 며느리는 스님의 말을 듣고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도계읍 구사리의 산등을 지나는데 갑자기 등 뒤 집 쪽에서 뇌성벽력이 치며 땅이 꺼지는 듯 괴성이 들리자 며느리는 궁금하여 스님의 당부를 잊고 그만 돌아다보았습니다. 그때 며느리는 돌로 굳어버렸습니다. 이와 동시에 황 부자 집은 땅이 꺼지면서 연못이 되었고 황부자는 이무기로 변해 연못에서 죽을 때까지 살게 되었다 합니다.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불렀다하겠습니다.







3개의 연못 중에서 상지는 집터이며 중지는 방앗간터, 하지가 화장실 자리였다는 웃을 수도 슬퍼할 수도 없는 전설입니다. 황부자 집터라 하여 황지라 불렀는데 그 이전에는 하늘 못이란 뜻인 천황으로도 불렀다 합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도 없고 한도 없다합니다.

 



 

 

 

그 욕심을 잘 다스리는 게 가장 성공한 사람, 부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황지를 보면서 욕심의 번뇌를 내려놓고 왔지만, 이 포스팅을 하면서 다시금 생각하면 그래도 마음만 부자인 사람은 항상 배가 고픈 게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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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여행/안동가볼만한곳)안동이천동석불상, 제비원석불, 제비원 미륵불로 불리는 오뚝이를 닮은 독특한 마애불.


이번 안동여행에서 전체 높이가 12.39m인 대불을 보고 왔습니다. 안동 ‘제비원 석불’이라고 불리는 안동 이천동 석불상입니다. 제비원 석불은 서쪽을 보고 있으며 높은 바위면에다 부처님의 몸을 얕게 새겼으며 그 위에 따로 불두를 조각하여 올린 마애불의 형태라하겠습니다. 현재 이천동 석불상은 불두의 뒷부분은 수직으로 잘려나간 자연석이며 머리 가운데에 육계를 큼지막하게 만들었는데 밑에서 보면 확인하기 힘들지만 얼굴 부분과 또 다른 돌을 다듬어 얹었습니다.

 





안동이천동석불상 주소:경상북도 안동시 이천동 산 2

안동이천동석불상 전화:054-840-6591


2017/01/14 - (안동맛집)맛50년 헛제사밥.헛제사밥이라해서 헛배가 부른게 아니예요. 맛있는 음복음식 안동 맛50년 헛제사밥

2016/12/26 - (안동여행)안동법흥사지칠층전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국보 제16호 안동 법흥사지칠층전탑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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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16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삼층석탑. 봉정사의 고 건축물 극락전과 같은 고려 중엽의 봉정사 삼층석탑을 만나다. 봉정사 삼층석탑







불두를 보면 얼굴은 부풀어 오른 듯 풍만하며 눈썹 사이에 백호를 양각하였고 실눈을 뜬 듯 좁으면서 길게 표현한 눈 위에 반원형의 눈썹을 짙게 나타내었습니다. 우뚝 솟은 코와 두툼하고 다부져 보이는 입술은 옅을 미소를 머금었으며 전체적으로 장중 근엄한 인상을 잘 나타내었습니다. 목에는 삼도를 새겼고 바위에 직선으로 얕게 새긴 몸체는 불두의 근엄함보다 아주 단순한 느낌입니다.





몸체에 걸친 법의는 양어깨를 감싼 통견입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왼쪽 어깨의 옷 주름과 오른쪽의 법의 자락이 서로 교차하여 접히고 가슴 밑으로 속옷의 띠가 보입니다. 양손은 모두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를 맞대어 오른손은 배에, 왼손은 가슴에 댄 입상이며 발밑에는 큰 연꽃 대좌를 음각하였습니다.

 




이천동 석불상의 구조를 보면 석불상을 새긴 바위 앞쪽과 오른쪽에도 높은 암벽이 막아 ‘ㄷ’자 형태의 구조입니다. 이는 석굴 형태로 17세기 초 안동읍지인 ‘영가지’에 불상 위에 기와지붕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불두 위로 닫집이 있었다 합니다. 지금도 이들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불상 어깨에 남아 있습니다,

 




석불 앞 바위 끝에는 연미사 중수기 비석이 현재 있으며 634년인 선덕여왕 3년에 명덕이 창건하였다 합니다. 부처의 몸체 위에다 부처 머리를 따로 만들어 올린 마애 석불상을 저는 경주 남산의 약수계곡 마애입불상만 알고 있었습니다. 17m의 거대한 불신에 불두는 증발하여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이리 온전한 형태의석불상인 이천동 석불상이 남아 있는 것을 이제야 보게 되어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이때까지 ‘제비원 석불’로만 알았는데 공식명칭은 안동이천동석불상으로 불리는것을 이번에 알았습니다. 개미가 코끼리를 보기 위해서는 멀리 떨어져야만 얼마나 큰지 코끼리 전체를 다 볼 수 있습니다. 거대한 이천동석불상도 마찬가지로 불상 바로 밑에서는 온전한 제비원의 석불을 한눈에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연미사 바깥으로 돌아 나와 공원에서 봐야만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이천동석불상 전체를 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마애의 불신과 불두를 따로 조합한 형태는 통일신라 후기와 고려 전기에 아주 유행했던 양식으로 안동 이천동 석불상도 이 시기에 조각된 고려 시대 석불상이며 1963년 1월에 보물 제115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안동 이천동 석불상 뒤편의 암벽 위에 단층 기단의 삼층석탑이 남아 있으며 고려 시대 석탑으로 보고 있습니다. 탑의 높이는 3.5m이며 이는 석불상 뒤에 흩어져 있던 탑재를 모아 복원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 때문에 현재 기단부와 탑신부의 구성과 비례 또한, 맞지 않아 부조화 서럽다 합니다. 아쉬운 점은 삼층석탑을 볼 수 있게 올라가는 길이 없는 건지 내가 찾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천동 석불상 옆에서 먼발치로 보고 왔습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9호,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이천동 석불상을 왜 제비원 미륵불, 제비원 석불이라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현재 미륵불이 있는 앞 넓은 공원이 오래전에 원(院)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원은 요즘으로 치면 여관으로 여행객이 쉬었다 가는 곳입니다. 고려 시대부터 교통의 중요한 길목에는 지방으로 출장을 가는 관리의 숙소로 사찰을 숙소인 원으로 국가에서 지정해 사용하게 했는데 연구사도 그중 한곳이었습니다.



이곳을 지나면 태산준령인 험준한 소백산의 죽령이나 나는 새도 쉬어 간다는 문경의 새재로 이어져 그 길목인 이곳 연비원에서 피로를 풀며 휴식을 취했다 합니다. 연(燕)은 ‘제비연자’로 제비에 원자가 붙어 제비원이 되었으며 왜 제비원이라 부르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이곳이 제비원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게 이천동 석불상 때문입니다.

 




석불상은 ‘ㄷ'자 형태의 암벽으로 둘러싸였으며 그 위에다 석불상을 보호하는 기와지붕을 덮었다고 했습니다. 그 지붕을 덮은 모습이 제비와 비슷했는지 ’연자루(燕子樓)‘라 했으며 그 끝에다 요사를 짓고 제비의 꼬리를 뜻하는 연미사(燕尾舍)라 불렀습니다. 또한, 석불 아래 법당은 제비부리를 뜻하는 연구사라 했습니다.

 




그러다 1934년경 연미사 자리에 새로 절을 세우고 연미사(燕尾寺)라 개칭하여 오르게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석불을 보호하는 기와지붕을 올렸던 게 제비원의 시초가 되었으며 조선 중기에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연구사는 폐사되었고 이천동 석불만 전설이 되어 남게 되었으며 근대에 와서 연미사기 지어졌습니다.





이천동 석불상이 불두와 불신이 분리된 데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로 온 이여송이 칼로 내려쳤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여송은 전란이 끝나자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관과 함께 조선에 큰 인물이 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전국 명당의 혈을 끊으려 다녔습니다. 이여송이 제비원 앞에 이르자 갑자기 타고 다니던 말의 발굽이 땅에 붙어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이여송은 주위에 서 있는 석불을 발견하고 단칼에 석불의 목을 내리치자 불두는 땅에 떨어졌고 목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합니다. 지나가던 스님이 이를 보고 다시 불두를 제자리에 올려 놓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석불의 가슴에는 그 당시 흘렸던 핏자국과 왼쪽 어깨에는 이여송이 타고 온 말 발굽 자국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제비원은 민속신앙인 성주풀이의 본향이라 합니다. 성주풀이 소리에 ’성주 본향이 어디 에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일러라 사설로 알 수 있듯이 이곳 제비원 석불이 매우 뜻깊은 곳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불경스럽지만 제가 만나본 제비원 석불은 꼭 오뚝이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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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여행/청도가볼만한곳)경산 용성 반룡사를 찾아가다 금천면 소천리 석현마을 '소천리 새김글' 첨앙대 여행하기 


시골의 거랑이나 골짜기에 있는 작은 웅덩이에는 마을을 지키는 ‘찌끼미(지킴)’가 있다는 그럴싸한 전설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습니다. 꼭 그런 곳이 주위 어느 곳보다 산수가 빼어나 여름철이면 인근의 주민이 나와 더위를 식히고 아이들은 신이나 멱을 감고 무더운 여름철을 보내는 주민들의 사랑방 같은 역할도 합니다.






2016/11/29 - (경산여행)경산 용성 용산산성. 삼국시대 산성인 경산 용산 용산산성 여행. 용산 산성

2016/11/26 - (경산여행)난포고택. 경북 경산시 용성면 여행에서 꼭 가봐야할 곳 난포고택. 난포고택

2016/11/23 - (경산여행)구룡산 반룡사. 원효와 설총, 요석공주의 설화가 살아 숨쉬는 경산 구룡산 반룡사 여행.

2016/02/06 - (경북여행/경산여행)삼성현역사문화공원 삼성현역사문화관. 경산시 남산면 삼성현 역사문화공원의 삼성현역사문화관에서 원효, 설총, 일연을 만나다. 2편



첨앙대


이번에 보고 왔던 석현마을의 소천리 새김글인 ‘첨앙대’는 마을의 찌끼미인 용이 둥지를 틀만 한 꼭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부산에서 청도군 금천면 소천리 첨앙대를 찾아가는 길은 밀양톨게이트에서 나와 중앙고속도로를 벗어나도 구절양장 같은 꼬불꼬불한 지방도를 한참은 거슬러가야 했습니다.

 

만송정


동곡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더욱 외진 길로 바뀌고 막다른 길인 듯 보이는 곳이 청도군의 끝자락인 소천리(小川理)입니다. 이곳을 지나면 경산땅입니다. 소천리는 이름 그대로 작은 하천이란 뜻입니다. 이는 운문면의 대천과 비교하여 생긴 지명으로 지금은 운문댐이 들어섰지만 큰 하천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아 붙여진 지명입니다.

 



소천리는 4개의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동서남북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오직 하늘만 빠끔히 열려 있습니다. 이곳에는 산을 후벼 파내 큰 개울이 생길 수 없어선지 가늘지만 긴 골짜기인 부일천이 소천리 석현마을을 감으며 지나쳐갑니다.

 

일신탕


석현은 돌고개를 말합니다. 이는 경산시 용성면의 대종리와 경계하는 곳에 큰 바위가 있는 고개라 하여 돌고개라 부릅니다. 반룡사, 용천리, 용전리 등 이 주위의 지명은 대부분 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석현마을의 돌고개에서부터 장전마을까지 'S'자로 급하게 휘돌아가는 물길이 흡사 용이 물을 마시는 모습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런 곳에 진경산수를 뜻하는 경관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석현교를 건너는 왼쪽에 부일천을 밟고 올라선 바위가 있으며 휘어진 소나무와 포개 앉은 층층대는 빼어난 산수를 자랑해 석현마을에서는 오래전부터 솔찐바위라 부른다는 마을 할머니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현재 바위 옆에는 마을 쉼터가 만들어져 있으며 일찍이 청도의 선비들이 경치 좋고 산자수려하여 이곳에 숨어들어 자연을 노래하고 시를 짓고 벽에다 글을 남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석벽의 바위 면에는 여러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청도군에서는 이를 ‘소천리 새김글’이라 부릅니다.






가장 먼저 만나는 게 시멘트로 덧칠한 바위 위에 이끼를 뒤집어쓴 ‘첨앙대(瞻仰臺)’ 글씨입니다. 자연경관이 빼어났음을 나타내는 뜻이며 이 밖에도 ‘일신탕(日新湯)’, ‘만송정(晩松亭)’의 큰 글씨가 뚜렷한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만송정을 보면서 오래전에는 이곳에 정자도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박응곤, 박진수, 박영수의 시구 4수가 남아 있다는데 짙은 물길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 음각된 시구를 다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병술원춘(丙戌 元春)’ ‘신사 칠월 일(辛巳 七月 日)’은 조성 시기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들에 관한 정확한 인물정보가 남아있지 않아 조성 시기에 대한 확인은 어렵다합니다. 이를 토대로 조선 말기에 조성된 글씨로 추정만 하고 있습니다.

 






소천리 새김글은 청도군 금천면소재지인 동곡사거리에서 대구·경산 방면 지방도 919호선을 따라가면 소천리 장전마을에 이릅니다. 여기서 오른쪽 반룡사 방향인 ‘소천·대종길’을 따라가면 석현교인 작은 다리가 나타나며 다리 왼쪽 바위면에 소천리 새김글이 있습니다. 혹시 반룡사를 여행할 때 선비들의 쉼터 구실을 했던 소천리 새김글을 한번 찾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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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해돋이)아파트 베란다에서 본 2017년 정유년 해돋이가 장관


2016년 병신년도 가고 2017년 닭띠해인 정유년이 돌아왔습니다. 다사다난했던 묵은해를 보내고 새롭게 시작하는 새해의 출발은 당연히 해돋이인 일출 구경입니다. 동해 쪽이나 남해의 바닷가 인근에서 생활하시는 분은 새해 아침에는 모두 바다에서 솟는 듯 올라오는 해를 만나 소원을 빕니다. 그러나 내륙지방이나 서해 쪽은 조금이라도 빠른 해를 만나기 위해 동해 쪽으로 일출 투어를 나서며 해돋이 여행으로 그래도 조금은 설레는 연말연시 마지막 날을 들뜬 기분으로 보냅니다.






드디어 새해 1월 1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전국은 새롭게 만나는 밝은 해를 보기 위해 일출 명소마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북적입니다. 그중 한곳이 제가 사는 부산 서구 송도해수욕장입니다.

 




나의 근거지다 보니 해돋이를 보기 위해 집을 나선 적이 없었습니다. 2천 년 밀레니엄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매년 아파트 베란다에서 해돋이 구경을 했습니다. 물론 올해에도 그럴 기분으로 아침을 맞았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마음에 동요가 생겼습니다. 며칠 전에 송도해수욕장 옆 방파제에서 처음으로 해돋이 사진을 한번 담았습니다. 그 때 담았던 해돋이가 마음에 끌려섰고 묘박지에 가득 정박한 배와 함께 사진을 담아볼 욕심에 일출 시각에 맞추어 송도해수욕장 방파제로 출발했습니다.





아파트를 출발하여 도로로 나서자 말자 송도해수욕장 입구 사거리까지 차가 밀려 있기에 ‘왜! 이리 차들이 많노’ 하며 좌회전하여 오른쪽 샛길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그곳에도 일출을 보려고 택시를 타고 온 사람이 내리고 하였고 좁은 길에 주차한 차로 주차할 공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잘못하다가는 일출구경을 나왔다가 해돋이 구경은 고사하고 도로에서 보낼 판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겨우겨우 차를 돌려 차선책인 다시 집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해는 떠오르지 않았고 무사히 베란다에 나가 경건한 마음으로 2017년 정유년 새해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본 해돋이



이때까지 매년 해돋이는 집에서 봐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출을 보려고 온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해돋이를 보기 위해 찾은 수많은 차를 보고 역시 해돋이 최고 포인트는 따뜻하고 편안한 우리 집이 최고구나며 내년 새해에도 바깥에 돌아다닐 생각을 하지 말고 편안하게 귤 까먹고 집에서 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보지 못한 일출은 내일 아침 편안하게 송도해수욕장에 나가 다시 해돋이 구경을 해야겠습니다.



이곳 일출사진은 12월 29일 아침 송도해수욕장 방파제 옆에서 찍었던 해돋이 사진입니다.  묘박지라 항상 배가 있습니다. 배가 들어간 일출사진을 담아 보고 싶었고 다른분의 일출사진에 배와 함께 등장하는 해돋이 사진이 그게 그리 좋아보였습니다. 저도 한번 담아보았습니다만 역시 사진찍는 실력이 모자라 그저 형편없습니다.  요기 해가 떠오르는 곳은 배가 아니고 태종대 앞 주전자섬입니다. 꼭 배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ㅎ ㅎ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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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여행/정선가볼만한곳)만항재. 겨울 만항재는 카메라 셔터만 누르면 작품이 된다는 곳.


우리나라에서 자동차가 다니는 가장 높은 고개는 어디일까?? 대충 생각하면 강원도 아니면 지리산, 그것도 아니면 한라산 1100도로 등 무수하게 많이 열거할 것입니다. 그러나 포장된 자동차도로는 강원도 만항재입니다.





강원도 만항재 주소: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산 216-34




만항재는 백두대간이 흘러오다 금대봉에서 만항재보다 조금 낮은 두문동재를 세우고 다시 우리나라 제6위 고봉인 함백산을 만들었습니다. 함백산을 지나면서 엉거주춤 힘을 빼고 만항재를 만들고 그러고 나서 화방재에서 온 힘을 다시 모아 신령스러운 영산인 태백산을 고추 세웠습니다.



그러니까 만항재는 함백산과 태백산 사이의 고갯길이며 정선군 고한읍과 태백시 혈동, 영월군 상동읍을 연결 짓는 고갯마루입니다. 만항재는 사계절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읍니다. 봄이면 천상의 화원이라는 수식어답게 별의별 야생화가 능선을 따라 꽃 터널을 이룰 정도로 지천으로 핍니다.




한여름에는 얼음장 같은 계곡물이 흐르며 삼복더위의 무더위도 무색할 정도로 서늘하여 여름 휴양지로 유명한 만항재, 가을이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일 듯 함백산은 단풍으로 치장합니다.



만항재의 아름다움은 야생화의 천국, 삼복더위도 무색하게 하는 산상의 날씨, 붉게 물든 가을 단풍 등 안 좋은 계절이 없지만 역시 떠돌이 여행객이 생각하기에는 하얀 설국으로 치장하는 겨울동화 ‘만항재’가 가장 으뜸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주말인 토요일에 만항재를 찾았습니다.

 


그 전날인 금요일 부산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인제로 향했습니다. 중소형승용차에 스노체인을 준비하지 않고 출발한 1박 2일 강원도 여행은 나에게 큰 모험이었습니다. 중앙고속도로를 접어 들어 동명휴게소에서 쾌청하게 맑던 하늘은 진눈깨비를 약간씩 뿌렸습니다.






‘어! 눈이네’하면서 먼저 걱정이 앞섰습니다. 겨울에는 당연히 눈 오는 것은 기본이고 그것도 눈밭인 강원도를 찾아가는데 말입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도중에 우리 국토가 엄청나게 넓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억수같이 퍼붓던 눈발은 터널을 통과했더니 ‘무슨 눈’하며 하늘만 맑고 눈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는 귀신 곡할 것 같은 그런 짓을 여러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다행히 인제에서 눈 구경을 하면서 돌아다니다가 저녁에 태백으로 출발했습니다. 일단 태백시까지 가야 다음날 만항재를 올라가는 형편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밤새 눈이 억수로 와서 차량통행이 안된다면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태백시에 들어왔는데 시내는 물론이고 주위 산에 전혀 눈을 볼 수 없었습니다. 여기는 눈이 안 왔나 하면서 다음날 만항재로 출발했습니다. 화방재로 해서는 불안해서 안 되겠고 했어 두문동재터널을 통과하여 정선군 고한읍으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무사히 고한읍으로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태백하고 정선은 완전 달랐습니다. 도로를 제외한 모든 세상이 설국이었습니다. 우리는 차를 정암사 주차장에 주차하고 고한읍의 택시를 불렀습니다. 5분 만에 신속히 택시는 도착했습니다.




만항재로 오르면서 기사님은 우리 차를 보셨는지 그 차로는 만항재로 못 올라갑니다 하였습니다. “원주 제천을 지나면서 눈이 많이 오던데 여기는 눈이 안 왔습니까”하니 “여기는 그쪽에 비해 눈이 거의 안 왔습니다”하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면서 만항재에 눈이 오면 이 눈은 만항재 위쪽에 있는 군부대의 출입통로 확보를 위해 군인들이 먼저 제설작업을 펼친다 하였습니다. 우리는 눈 구경을 위해 이곳까지 왔지만, 이곳 부대 아니 강원도 산간에 근무하는 군인들은 매일 제설작업으로 고생한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무사히 1,330m 고지의 만항재에 도착했습니다. 나무 사이로 함백산과 태백산의 풍경이 펼쳐지는 게 높은 산의 고개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이쪽으로 넘어서면 영월 쪽, 저쪽은 태백 ㅋㅋ 오래전에 백두대간 종주를 한다고 이 능선을 지나간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저 기억 저편으로 가물가물할 뿐입니다.

 



벌써 만항재에는 많은 사람이 겨울 설경을 즐기기 위해 올라와 있었습니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쭉쭉 큰 나무는 모두 몸에 하얀 분칠을 하고 겨울을 즐기려는 듯 우리를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반겼습니다. 우리도 만항재 주변의 풍경에 혼을 빼앗긴 듯 깡충깡충 뛰면서 사진 찍기에 바빴습니다.

 


누군가 말을 합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만 하면 작품사진이라고 말입니다. 실제 누르는 족족 환상의 작품사진이었습니다. 만항재의 유래를 보겠습니다. 만항재와 이웃한 고개는 두문동재입니다. 흔히 방에만 들어박혀 있으면서 집 밖을 나가지 않는 것을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합니다.


 

그럼 두문동재의 두문동(杜門洞)은 바깥출입을 하지 않으려고 방문을 걸어 잠근다는 뜻이며 고려의 국운이 쇠하자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여 조선을 건국합니다. 이에 이성계의 조선에 반기를 든 고려의 신하들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기슭의 두문동에 들어가 끝까지 고려의 신하로서 절의를 지키며 살았는데 두문동에서 살던 일부가 강원도 정선의 고한읍 함백산 아래에 옮겨와 살았다 합니다.




 이들은 끝까지 고려의 충신으로서 절의를 지키며 다시 고려의 신하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이곳 고개에 올라와 고향 땅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었다 하여 ‘망향’이라고 불렀던 게 뒤에 ‘만항’이 되었으며 만항재라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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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여행/울산가볼만한곳)울기등대와 대왕암공원. 울산 방어진 울기등대와 대왕암공원 여행


울산에서 일을 보고 어슴푸레한 저녁 시간에 ‘울산의 끝’이라는 대왕암 여행을 하고 왔습니다. 오래전부터 울산 사람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대왕암을 감싸며 잘자라는 해송 군락을 보면서 알 수 있었습니다. 키 큰 고목이 울울창창 수림의 바다를 이루는 대왕암에 등대가 세워져 있습니다.





 

대왕암공원:울산광역시 동구 일산동 905

대왕암공원 전화:052-209-3751



 

100년도 전인 조선말에 일본은 이곳에다 등간을 설치하고 ‘울산의 끝’을 뜻한다는 뜻인 울기등간으로 이름하였습니다. 그 후에 이곳 지명 또한 울기가 되었습니다. 일본은 만주와 조선의 지배권을 독점하려고 러·일 전쟁(1904~1905)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일본해군은 동해와 대한해협의 해상권 장악을 목적으로 1905년 2월 긴급히 등간을 설치합니다.







대왕암 미르공원





이는 러시아 발트함대를 가덕도 앞바다에서 침몰시켰을 때 긴요하게 이용됐을 것으로 보이며 설치 당시에는 선박 항해 안전 목적보다는 군사 전략적인 측면에서 설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등간으로 있던 것을 고종 광무 10년 3월경에 높이 6m의 돔형 등대를 설치하였고 1972년에 기존 등탑에다 3m를 더 높여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87년 12월에 24m의 신 등탑을 건립한 뒤 울기등대 구등탑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울기등대의 구등탑은 백색이며 하부는 원형을, 상부에는 팔각형 구조로 총 높이가 9.2m입니다. 구한말 건축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근대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9월에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였으며 신 등탑은 온 세상을 밝히는 촛대를 형상화했습니다.



대왕암공원의 고래 턱뼈:울기등대 옆 대왕암 들어가는 입구에 긴 고래턱뼈가 세워져 있습니다. 1984년 2월 청구수산 소석 어선 4척이 군산 어청도 근해에서 조업중 참고래를 포획했습니다. 84년부터 92년까지 어청도 근해 비닷속에서 8년동안 기름빼기를 하여 1995년 4월15일에 고려턱뼈를 대왕암공원에 설치하였습니다. 길이 5m, 두께 40cm 각각의 무게는 250kg



울기등대가 있는 이 산을 대왕 바위산 또는 대양산이라고 합니다. 이는 문무대왕비가 죽어 문무대왕과 함께 용이 되어 그 넋이 대왕 바위에 잠들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대왕암으로 부르는 곳이 두 곳 있습니다. 신라 시대 30대 문무왕의 해중릉과 문무왕의 왕비가 용으로 화해 이곳에서 용신이 되었다는 울산 대왕암입니다.


 




울산 대왕암의 전설을 보겠습니다. 신라 시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뒤를 이어 삼국통일 염원을 이룬 문무왕은 지긋지긋한 전쟁은 끝났다며 경주 동쪽에다 전쟁터에서 사용했던 칼, 화살 등 무기를 묻고 난 뒤 무장사를 창건했습니다.

 




그리고 동쪽의 섬나라 왜군의 침입이 항상 근심거리였는데 이런 속마음을 “나는 죽어서 호국용이 되어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 수호하려고 한다”며 평소 가깝게 지냈던 지의법사에게 말했습니다. 681년 문무왕은 재위 21년 만에 승하하였고 그의 유언을 받들어 경주 양북면의 동해구 앞바다에 있는 암초에다 수중릉을 만들어 장사를 지냈습니다.










문무왕은 용이 되어 동해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으며 후세사람은 문무왕의 호국 염원을 기리면서 해중릉을 대왕 바위라 불렀습니다. 문무대왕이 승하하고 왕비도 세상을 떠난 뒤에 용이 되었습니다.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죽어서도 호국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고자 하는 문무왕의 거룩한 뜻을 왕비 또한 잘 알고 있어 왕비의 넋도 호국용이 되어 울산의 끝인 동해의 큰 바위 밑에 숨어들어 문무왕과 함께 동해를 지키는 용신이 되었다 합니다.

  









그 후에 울산 방어진의 끝에 있는 이 바위를 대왕 바위라 불렀으며 용이 잠들었다는 바닷속 바위에는 해초도 자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울산 방어진의 대왕암은 전설일지라도 문무대왕과 왕비의 호국 염원을 생각하며 창해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다를 태울 것 같은 붉은 저녁노을이 꼭 호국용으로 변한 문무대왕과 왕비의 모습 같아 자연스럽게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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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여행/안동가볼만한곳)안동법흥사지칠층전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국보 제16호 안동 법흥사지칠층전탑 여행.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면서 오래되었다는 전탑 중 하나인 안동 법흥사 칠층 전탑을 보고 왔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모전 석탑으로는 신라 시대의 유일한 석탑인 국보 30호 분황사 구층 석탑이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3층으로 남아 있지만, 이 분황사 모전 석탑이 9층의 모습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아마 최고의 높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 주소: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 7-9


2016/06/18 - (경북여행/안동여행)의성김씨 학봉종택. 안동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 종택을가다. 의성김씨 학봉종택

2016/06/17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고건축물인 극락전, 대웅전이 있는 안동 천등산 봉정사를 만나다.

2016/06/16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봉정사 삼층석탑. 봉정사의 고 건축물 극락전과 같은 고려 중엽의 봉정사 삼층석탑을 만나다. 봉정사 삼층석탑

2016/05/27 - (경북여행/안동여행)천등산 봉정사 극락전, 화려하지 않은 담백한 맛이나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최고 오래된 목조건물 안동 봉정사 극락전 여행. 봉정사 극락전

2016/05/24 - (경북여행/안동여행)안동 천등산 개목사 원통전. 천등산의 지세로 안동에 소경이 많아 비보사찰이 된 개목사, 그후로 소경이 없어졌다는 개목사 원통전 여행,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은 그 높이가 16.8m이며 탑을 받치는 기단의 폭은 7, 75m로 현재 남아 있는 전탑의 규모로서는 우리나라 최고를 자랑합니다. 단층의 기단 위에 7층으로 몸돌을 조금씩 줄여가며 쌓았는데 모전 석탑 주위의 지명이 법흥동인 점을 보면 법흥사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석탑 이외에 어떠한 법흥사에 관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는 지금 전탑 주위로 고성이씨 탑동파 고택이 자리하고 있는 게 그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기단부에는 희미하게나마 판석에다 돋을새김으로 팔부신중과 사천왕상을 새겨놓았습니다.



 












이들 부조의 조각수법은 시대가 다르게 서로 차이가 나며 탑신부는 아무 무늬가 없는 회색 벽돌을 쌓았습니다. 전탑의 각층 옥개석의 윗면에 기왓장을 올렸던 것이 보기 드물게 남아 있습니다. 이를 보면 전탑 이전에는 목탑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으며 법흥사지 칠층 전탑은 목탑을 모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탑 이후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와서 화강암을 깎아쌓은 석탑으로 그 양식이 바뀌었는데 목탑-전탑-석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변천이 바뀌었습니다.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화강암 석탑의 많은 부분이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석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법흥사지 칠층 전탑의 상륜부는 금동제로 만든 상륜이 올려져 있었다지만 지금은 안타깝게 노반만 남아 있습니다. 법흥사지 칠층 전탑의 축조방식을 보면 기단은 방형이며 동·남·북 3면에 6장씩 팔부신중과 사천왕상을 판석에 세기고 맨 아래층의 탑신 밑면은 원분 모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정면의 계단은 단층기단 형식이며 8개의 계단 끝에는 높이 90cm, 너비 54cm인 부처님을 모신 감실을 두었습니다. 안동의 역사서인 ‘영가지’에 법흥사지 칠층 전탑을 1487년 성종 18년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때까지도 3칸 정도의 법흥사 건물이 남아 있었다합니다. 필자는 법흥사지 칠층모전석탑을 만나기 위해 2014년에도 찾았습니다.



당시 법흥사지 칠층모전석탑은 해체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전탑 외부를 가린 가림막만 보고 안타까워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안동여행 때 그때 보지 못했던 칠층 전탑을 만나기 위해 안동의 여행지를 바꿔가며 다시 찾았습니다. 석탑을 마주 보고 섰는데 그 웅장함은 보는 이를 압도하고도 남았습니다.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었으며 코스를 바꿔 왔던 보람이 있을 정도로 저에게는 감명을 주었습니다. 당시 해체복원 하는 과정에서 탑 내부에 나무 기둥을 세웠던 ‘심주’구멍이 확인되어 또 한 번 이목을 끌었습니다.

 


칠층 전탑이 워낙 높아서 가로 사진으로 다 담을 수 없었으며 전탑 바로 옆에는 철길까지 있어 어수선하고 협소해 보여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의 건립은 8세기 통일신라 시대로 추정하며 국보 제1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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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여행/영덕가볼만한곳)강구 삼사해상공원. 동해안 일출 1번지 삼사해상공원 여행


영덕을 들어서는 입구에 조성된 삼사해상공원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공원이 자리 잡은 곳이 삼사리입니다. 삼사리의 유래는 신라시대 때 이곳 출신 3명이 시랑 벼슬을 지냈다는 설과 시랑 벼슬을 한 3명이 숨어 살았다 하여 삼시랑 또는 삼시랑골이라 불렀는데 이 세분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삼사리란 마을지명이 생겼습니다.

 

 

 

 


삼사해상공원 주소: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삼사리 8-2

삼사해상공원 전화번호:054-730-6398

 

 

그래서일까요?? 삼사해상공원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아득한 느낌이 들며 무엇인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곳입니다. 삼사해상공원 입구에는 먼저 큰 아치로 삼사해상공원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어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삼사해상공원에는 다양한 볼거리가 있습니다.

 

 

봄에는 흐트러진 벚꽃길이 유명하며 또한 경북을 알리는 대종과 어촌박물관, 공연장, 그리고 부대시설인 숙박촌과 식당가가 조성되어 우리 일행도 이곳에서 미리 숙박 예약을 하여 겸사겸사 찾게 되었습니다.

 

 

삼사해상공원의 제1경은 역시나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일출입니다. 삼사해상공원은 영덕군에서 매년 1월 1일 해맞이 행사가 열리는 곳입니다. 내일 아침 일출을 기대하며 저녁 시간 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어 삼사해상공원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삼사해상공원의 멋진 조형물입니다. ‘바다의 빛’이란 이름답게 우아하고 멋들어진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밤에는 조명까지 들어와 더욱 화려했습니다. 영덕은 산과, 바다, 강이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우며 거친 파도를 뚫고 동해에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바다의 빛’ 조형물에 고스란히 담아내었습니다.

 

 

영덕군민의 꿈과 희망, 영광이 조형물에 담겨 있으며 삼사해상공원은 영덕에서도 상징적인 공원입니다. 그 뒤로 검은 빗돌에 새긴 하산 김한홍 선생의 ‘해유가’시가 눈에 들어옵니다. 처음 뵙는 분이며 처음 보는 시구입니다.

 

 

첫 소절을 읽어보니 한일병탄의 암울했던 시기에 젊은 선비의 울분을 시로서 토해낸 듯하였습니다. 하산 선생은 1877년 영덕군 강구면의 작은 마을인 하직리에서 태어났습니다. 26세에 하와이의 수수사탕 농장 노무자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와이로 건너가 노무자 생활을 하다 대한제국 주하와이 영사관 서기로 발탁되었습니다.

 

 

그러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로 한일병탄이 되자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와 장사를 하다 1908년 환국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칩거하면서 미국 하와이의 생활에서 보고 듣고 했던 것을 기록한 ‘해유가’를 남겼습니다. 해유가는 4.3조, 4.4조의 국한문 혼용체로 471행의 기행가사입니다. 내용을 보면 미국의 당시모습과 근대화를 이룬 일본, 조선 말기 암울한 우리나라의 모습을 가사형식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기행문이라 그런지 경주지역 등 제가 알고 있는 지명이 여러 곳이나 나오는데 해유가 비문인 ‘광화문 육조거리 잡초가 무성하고 보신각 옛집 앞에 검은 옷이 횡행이라“란 구절을 보면서 망한 당시 조선말기의 참담한 실상을 나타내었고 을사년에 미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젊은 선비의 분기탱천한 마음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착잡한 마음을 뒤로하니 큼지막한 꽃돌이 울적한 기분을 달래주었습니다.

 

 

영덕군 지품면에서 나왔다는 ‘천하제일 화문석’은 그 무게만 자그마치 20톤이라 합니다. 영덕에도 천연 매화 꽃돌이 나온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매화 향이 가득한 듯 자연이 만들어낸 화문석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감탄을 해 봅니다.

 

 

이번에는 경북대종이 있는 종각입니다. 경상북도 100년을 알리며 그 기념으로 경북대종과 종각을 조성하여 새해에 타종으로 대한민국의 아침을 깨우고 있습니다. 경북대종의 크기는 높이가 420cm, 지름 250cm, 무게가 29톤으로 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성덕대왕신종을 기본바탕으로 제작했습니다.

 

 

 

 

종신에 조각된 대금을 든 천인상과 사과를 든 비천상은 문화예술의 영덕과 경북의 대표특산물인 사과는 풍요롭고 살기 좋은 경북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강구항을 배경으로 유명한 드라마 촬영이 있었습니다.

 

 

 


 

 

 

 

 

1997년이니까 벌써 20년이 다 되었군요. MBC 주말 연속극 ‘그대 그리고 나’로 온 집안 식구를 티브이 앞에 붙들었으며 또한, 강구를 영덕대게의 대표 산지로 만든 드라마였습니다. 그리고 영덕어촌 민속전시관에는 영덕대게 잡는 방법 등 여러 전시품이 전시되어 어촌생활에 관해 볼 게 정말 많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새가 먹이를 많이 찾는다“는 속담처럼 동해에서 떠오른 일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직 사진을 담는 기술이 부족하여 잘 표현을 못했지만 마음만은 불타올라 삼사해상공원의 일출을 담아보았습니다. 영덕을 지나는 길에 한 번쯤 들렀다가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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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여행/상주가볼만한곳)상주 낙동강 이야기길 경천대~비봉산 둘레길. 낙동강에 뜬 반달 경천섬. 경천대~비봉산 산행


상주 경천대와 이웃한 비봉산을 함께 걷는 산행 겸 둘레길인 낙동강 이야기길을 걷고 왔습니다. 출발지이자 도착지인 경천대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아주 유명한 관광지라 모두 한 번쯤은 둘러보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잠깐만 경천대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1,300리인 낙동강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곳이 이곳 경천대입니다. ‘낙동강 제1경’인 경천대는 그 아름다움을 하늘이 만들었다 하여 ‘자천대(自天臺)라 불렀습니다






경천대관광지 주소: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산 12-3

경천대관광지 전화:054-536-7040


2016/12/07 - (상주여행)상주자전거박물관. 우리나라 최초 자전거 박물관 상주자전거박물관 여행

2016/12/03 - (상주여행)상주 경천대와 무우정. 상주 여행 1번지 정기룡 장군 전설과 경천대와 무우정 여행.

2016/12/01 - (상주여행)상주 경천대와 회상나루관광지 상도드라마세트장. 상주시 상도드라마세트장



 






정기룡장군 동상

그러다가 1637년 조선 인조 15년에 우담 채득기 선생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빼앗겨 은거하며 무우정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였습니다. 채득기는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의 경천대비를 세겼으며 그 후부터 경천대라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경천대 표지석 갈림길

또한, 경천대는 정기룡 장군과 떼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경천대에서 심신을 단련하고 훗날 임진왜란의 명장이 되었습니다. 정기룡 장군은 전쟁에서 매번 승전보를 올리자 육지의 이순신이라 모두 불렀습니다. 그와 함께 경천대 아래 용연에서 용마를 얻었다는 전설과 바위를 파내어 말먹이 통을 만들었으며 그 흔적이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합니다. 관광지이자 명승지인 경천대에 대해 조금은 알게되었고 이제 둘레길 여행을 시작합니다.



먼저 경천대~비봉산 낙동강 이야기길 경로를 보겠습니다. 경천대 국민 관광지 주차장~경천대 표지석~무지산 전망대~경천대~무우정~상도 세트장~출렁다리~철탑 삼거리~양수장 앞 갈림길~상주 자전거 박물관~경천교~회상 나루터 표지석~청룡사 등산로 갈림길~이무기바위~비봉산 동봉~생태 터널~비봉산 정상~상주보 갈림길~청룡사~청룡사 입구 철문 앞 갈림길~회상 나루 관광지~회상 나루 표지석~구름다리~경천대 표지석~경천대 국민 관광지 순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전체적인 거리는 11km, 소요시간은 3시간 30분입니다. 그러나 경천대와 상주 자전거 박물관 구경, 비봉산 회상 나루 관광지, 상도 드라마세트장 등을 보다 보면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참고하세요.


황톳길

먼저 출발은 경천대 입구에 조성된 경천대 국민 관광지 주차장입니다. 곧 정기룡 장군 동상과 명마 동상이 있으며 명마는 올라타고 사진 촬영도 할 수 있습니다. 경천대 가는 도로를 따라갑니다. 고갯마루에 경천대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올랐다가 오른쪽으로 돌아오는 코스입니다.



전망대를 오르는 계단를 올라서면 황토로 만들었다는 구슬인 항토길 체험장입니다. 황토가 몸에 좋은 곳은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50m 길이에 작은 구슬 모양의 구운 황토를 가득 길에 깔아놓았습니다. 봄·여름·가을에는 맨발로 황토볼 체험을 하면 좋겠지만, 겨울이라 그냥 통과합니다.




무지산 전망대

전망대가 있는 무지산(155m) 정상까지는 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3층의 전망대에 올라서면 휘돌아나가는 물길인 낙동강과 상주의 명산을 한눈에 바라보는 빼어난 전망대입니다. 경천대를 가기 위해서는 다시 올라온 계단을 조금 내려가면 갈림길입니다. 오른쪽은 올라온 길이라면 경천대·무우정 이정표를 보고 왼쪽으로 내려갑니다.












다시 만나는 이정표에서 왼쪽 경천대를 보고 들어서면 곧 사진찍기 좋은 전망 덱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보는 용연과 용두봉, 그리고 경천대는 공깃돌 모양을 한 네 개의 큰바위가 쭈루루 놓여 있습니다. 전망 덱을 나오면 바로 갈림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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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으로 꺾어 나무 계단을 내려서면 경천대와 무우정을 만납니다. 먼저 경천대를 오릅니다.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끝까지 명나라를 잊지 않겠다는 승명 사상인 경천대비는 ‘조선의 하늘과 땅은 명나라 것이며 해와 달 또한,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의 것이다’라는 뜻을 석판에 새겨 남겼습니다.


경천대

이는 임진왜란으로 국난이 바람 앞에 등불이었을 때 그래도 원군을 보낸 데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이라 생각하지만 요즘 세상 같으면 미련스럽다며 빨리 청나라로 말을 바꿔 타야 했다고 모두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도 당시 조선에서는 모름지기 충신의 표상은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으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하였습니다. 하물며 군신의 의리도 이리 한데 그리 큰 대국이라 믿었던 명나라가 망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경천대, 하늘이 만들었다는 경치답게 낙동강 최고의 절경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입니다. 무우정으로 내려서는데 사람의 손으로 움푹 파 놓은 바위가 있습니다. 이는 채득기선생이 1645년 봉림대군과 환국하여 선생은 이곳 경천대로 돌아가자 효종(봉림대군)은 충신이 은거하고 있는 경천대를 눈으로라도 확인하고 싶어 화인을 보내어 자천동 28경을 그려오게 하여 곁에 두고 생각날 때면 그림을 펼쳐 보았다 합니다.

 

경천대비



우담 채득기 선생이 경천대에 머물면서 연꽃을 길렀던 소연분과 세숫대야인 관분, 신묘한 침술로 국난에 특채된 명의로서 약을 제조하려고 바위를 파내었던 패인 홈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무우정


무우정은 우담 채득기(1604~1647) 선생이 은거하며 지은 정자입니다. 무우정에서 솔숲 사잇길 끝에 계곡에 길게 걸린 나무다리를 건너면 상도 드라마세트장입니다. 초가집과 대장간 등 당시 거상 임상옥의 상도 드라마촬영의 생생한 모습을 보고 되돌아나와 나무다리 앞 갈림길까지 갑니다. 이곳에서 출렁다리 방향인 왼쪽으로 꺾습니다.







돌아나와 나무다리 앞 갈림길까지 갑니다. 이곳에서 출렁다리 방향인 왼쪽으로 꺾습니다. 상도 드라마 경천대 세트장 뒤편 계곡을 가로지르는출렁다리를 건너면 다시 철제 구름다리 직전 철탑 삼거리 앞입니다. 이곳은 비봉산을 올랐다가 다시 돌아와 구름다리를 건너서 출발지로 돌아가는 중요지점으로 눈여겨봐 둡니다.


경천대 상도드라마세트장





철탑앞 삼거리

철탑 방향인 비봉산(5.3km) 방향을 보고 왼쪽으로 꺾습니다. 용연을 감싸 안은 소나무 숲이 운치 있는 오솔길로 용두봉을 넘어서면 양수장 갈림길 도로에 내려섭니다. 이제 왼쪽으로 낙동강 자전거 길을 따라갑니다. 상주 자전거박물관 방향입니다.

 

 


양수장 앞




상주 자전거 박물관

독특한 건물에 온갖 자전거를 형상화하여 만든 조형물을 보면서 왼쪽 낙동강에 걸린 경천교를 건넙니다. 자전거 타는 모습을 한 조형물이 30여개나 설치되어 자전거 도시 상주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면 옛날 회상 나루터였음을 알리는 이정표와 표지석이 서 있는 사거리길입니다.

 




경천교




옛 회상나루 표지석 사거리

왼쪽은 MTB 코스이며 오른쪽은 비봉산과 회상 나루 관광지로 가는 낙동강 생태문화 탐방로입니다. 생태문화탐방로를 따라 산자락을 한 굽이돌면 ‘청룡사 등산로’를 알리는 이정표 갈림길입니다.


이정표 청룡사 등산로 입구




왼쪽 산으로 오르는 길이 ‘청룡사 등산로 ‘와 ‘비봉산’ 등산로입니다. 참고하세요. 비봉산 최고봉은 231m이며 비봉산 동봉 또한 224m입니다. 전체적인 산 높이는 200m대의 고만고만한 능선에 소나무 숲은 높은 산 부럽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여 꼭 심산의 능선을 걷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무기 바위

발아래 낙동강 가운데에는 모래가 밀려와 자연섬인 된 하중도 경천섬이 꼭 낙동강에 뜬 반달을 닮아 더욱 아름답습니다. 약 10분간을 오르면 청룡사 2.6㎞ 이정표와 승천 못 한 용를 닮았다는 이무기 바위를 지납니다.



삼거리인 능선에 올라서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산길은 더욱 넓어지고 최근에 산악자전거대회가 열렸는지 출입금지를 알리는 노란 테이프가 길게 산길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산길을 잃어버릴 염려도 없지만 생태 터널 까지 이 노란테이프를 따라가면 만고 땡입니다.

 



생태터널 위

봉우리인지 모르게 비봉산 동봉을 넘어서면 임도 급의 넓은 길과 합해지면서 오른쪽으로 굴곡 없는 편안한 능선길이 계속 이어집니다. 이 길은 생태 터널 위를 지나자마자 청룡사로 향하는 시멘트 길을 만납니다. 오른쪽은 청룡사. 왼쪽은 Y자 임도인데 그중에서 왼쪽은 생태 터널과 연결된 도로와 만나고 비봉산은 오른쪽 ‘낙동강 투어 로드’를 보고 임도를 따라 갑니다.


비봉산 전망덱

비봉산 정상을 지나 상주보 방향으로 이어지는 자전거 길이자 도보 길입니다 임도는 화장실을 지나서도 계속 꼬부랑길로 이어지다 절개지에 사태방지를 위한 철망 앞에서 임도를 이탈해 오른쪽 산길로 들어서면 곧바로 정상입니다. 정상에는 전망 덱이 있으며 아담한 비봉산 정상석도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전망 또한 완전 최고이며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일망무제입니다. 태백황지에서 시작한 강물은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며 굽이굽이 흘러와 빚어 놓은 경천대와 경천섬을 돌아 발아래 청룡사와 비봉산의 단애를 쓸어내리며 하염없이 흘러가는 영남의 젖줄 낙동강을 보노라니 벅찬 감동이 밀려옵니다. 낮은 산세에 품은 낙동강은 형언할 수 없는 그저 감동의 쓰나미였습니다.


청룡사



비봉산을 50m쯤 내려서면 다시 임도와 연결되고 곧 청룡사 갈림길 이정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청룡사(0.3km)로 향합니다. 참고로 직진하면 상주보(2.3km) 방향. 청룡사임도 중간쯤에 나무로 만든 오늘 산행 최고 전망대가 기다립니다.

 





하중도 경천섬

 

비봉산 정상에서도 온전하게 볼 수 없었던 하중도인 경천섬이 완벽한 반달 모양을 그리며 강물에 둥실둥실 떠 있고 상주보를 모두 관람하는 전망대였습니다. 워낙 넓어 한 장의 사진에 모두 담지 못했습니다. 청룡사로 들어오는 길을 따라 나가면 철문이 활짝 열려 있으며 왼쪽 전봇대 옆 능선이 회상 나루와 상도 촬영장(1km) 내려가는 하산길입니다.



청룡사


청룡사 철문 앞 하산길 입구



학전망대

5분쯤 내려가면 지금 공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인 회상 나루 관광지 주차장입니다. 이곳에서 도로를 따르지 않고 주차장과 객주, 상도 촬영장으로 새롭게 연결한 길을 걷습니다. 산 중턱에는 경천섬과 상주보 전망대인 학 전망대입니다. 금방이라도 강물을 박차며 날아갈 것 같은 모습을 하며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회상나루관광지와 멀리 동떨어진 게 실용면에서 아주 아쉬워보였습니다.

 



회상나루 관광지 객주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새롭게 단장한 객주이며 아마 펜션으로 운영할 것 같습니다. 때마침 낙동강을 바라보니 갈대와 강물을 불게 물들인 저녁 낙조가 서산으로 넘어가는게 장관이었습니다. 그리고 경천대에 이어 회상 나루에도 조성한 초가지붕의 상도 드라마세트장을 지나 도로를 7분 만 걸어가면 옛 회상 나루 표지석이 있던 사거리에 다시 닿습니다.

 

회상나루 관광지 상도드라마세트장



지금부터 왔던 길의 역순을 갑니다. 경천교와 상주 자전거박물관을 지나 양수장 앞에서 왼쪽 나무데크 길을 갑니다. 출발할 때 눈여겨본 철제 구름다리 밑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어 구름다리를 건너갑니다. 소나무 숲 오솔길을 따라가면 출발할 때 만났던 경천대 표지석이며 다시 경천대 국민 관광지 주차장으로 향하면 경천대~비봉산 상주 낙동강 이야기 길은 끝이 납니다.



 

대중교통편을 이용해서는 당일로 산행하기에는 먼저 교통편이 매우 불편합니다. 그래도 대중교통편을 알아보시는 분을 위해 올려보았습니다. 부산 도시철도 1호선 종점인 노포역에 있는 부산동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오전 8시40분, 11시25분 버스로 경북상주터미널로 갑니다. 그곳에서 경천대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면 되는데 오전 6시30분, 9시10분, 낮 12시25분, 오후 2시40분, 5시20분에 있습니다. 경천대에서 상주터미널로 나오는 버스는 오후 1시, 3시15분, 5시55분에 있으며 상주터미널에서 부산동부시외버스터미널로 출발하는 버스는 오후 1시, 2시20분, 3시45분, 6시50분에 있습니다. 자가운전시에 내비게이션은 경천대 관광지로 입력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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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여행/밀양가볼만한곳)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약산 김원봉, 석정 윤세주, 최수봉, 백민 황상규등 밀양 독립운동가 거리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안동을 양반의 고장이라면 밀양은 선비의 고장입니다. 선비가 곧 양반이라 할 분도 있겠지만, 그 뜻은 엄연히 다르며 선비는 하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자태가 고고한 학처럼 우아하고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사군자를 항상 곁에 둡니다. 그만큼 국가가 어려울 적마다 선비들은 들고일어나 자신의 목숨을 초계와 같이 버렸습니다.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주소:
경남 밀양시 내일동 516-23



임진왜란·정유재란 등 많은 병란에도 민초와 선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조선 말기에도 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지며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때에도 선비의 고장 밀양에서는 국난을 극복하는 운동이 들불같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밀양의 올곧은 선비정신이 그 밑바탕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밀양에서 일제 강점기 때에 저항 운동을 벌였던 항일 독립투사가 70여 분이나 나왔다는 게 이게 밀양의 선비정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런 선비정신인 밀양의 기개가 흐르는 곳이 내이동과 내일동를 가로지르는 해천입니다. 해천은 밀양 읍성의 방어를 위해 성벽 아래에다 파낸 인공하천입니다.





이는 1479년 조선 성종 10년에 일반 하천이던 것을 읍성 방어 목적으로 만들었으며 이를 해자라 하여 해천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해천 주위로는 밀양 항일운동의 본거지라 할 정도로 밀양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분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해천 옆 밀양 관아 앞에서 1919년 3월 13일 밀양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영남지역 최초의 독립 만세운동이라 합니다.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에는 3·13 밀양 만세운동을 비롯하여 밀양 출신으로 의열단 단장이던 약산 김원봉, 석정 윤세주, 최수봉 등 경남 밀양 출신 항일 독립운동가의 항쟁을 실감 나게 그린 벽화와 조형물 그리고 웹툰을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에 조성해 놓았습니다.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는 13개의 주제로 그려졌으며 3·13 밀양 만세운동과 김원봉, 윤세주의 새로운 조명과 생가터 발굴, 태극기 나무, 밀양 출신 독립군 69기 명패, 희망우체통, 시민 1,000여명의 메시지를 담은 타일 부착, 태극기 변천사, 천만 영화 ‘암살’의 그림벽화와 독립군의 활동상황, 조선의용대의 모습 등 말로만 듣던 독립운동의 수많은 자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시민의 휴식공간인 쉼터를 함께 조성하여 누구나 편하게 찾을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영화 ‘암살’과 ‘밀정’에 등장하는 약산 김원봉은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는 잊힌 분입니다. 일부 사람들에게만 겨우 알려졌던 약산 김원봉. 그분의 독립운동은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약산의 어린 시절 밀양 상동면 모정리에 있었던 고명학교에 백민 황상규와 윤세주 등이 함께 다녔습니다. 어릴 적부터 남다른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던 김원봉과 친구들은 ‘일왕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일장기를 학교 변소 똥통에다 처박아 넣고 일왕 생일 경축을 반대했습니다. 마침내 일장기 훼손 사건은 발각되었고 고명학교는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 조치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김원봉은 1916년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1919년에는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는 무장단체 의열단을 조직합니다. 일제의 주요기관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요인과 친일파 암살 등 항일무장테러조직인 의열단 단장을 맡은 김원봉은 23차례나 국내·외에 일본 요인 암살 및 주요 기관 폭파를 단행하여 일본경찰를 경악에 떨게 하였습니다.



김원봉은 당시 김구 선생 보다 더 많은 현상금이 목에 항상 붙어 다녔던 것을 보면 일제의 최고 경계 인물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동하다 광복 두 달 후 임정 요인과 함께 상해임시정부 군무부장 자격으로 귀국하지만, 그에게 기다린 것은 친일 경찰 출신에게 뺨을 맞는 등 온갖 수난과 살해 위협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자괴감을 빠졌으며 1948년에 김구, 김규식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 연속회담에 참가했다가 혼자 북에 남았습니다. 그 후 국가검열성상, 노동상 등 북한에서 서열 3위로 오르는 등 여러 고위직을 거쳤습니다. 김일성에게는 한국동란의 공헌을 인정 받아 북한 최고훈장인 노력훈장을 받았던 인물로 한국동란과 대한민국을 교란하는 남파 간첩을 지휘하여 대한민국에 크나큰 해악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북한 김일성을 위해 많은 애를 섰으나  김일성은 권력 강화를 위해 미제스파이란 죄목으로 박헌영을 처형하고 1958년 소련파와 연안파 숙청을 하면서 함께 북한의 정권 수립에 일조한 약산 김원봉도 숙청당했다는 소문입니다.





 한동안 김원봉의 이름은 금기어가 되었으며 2000년 이후 새롭게 조명받고 있습니다. 의열단에서 함께 활동했던 석정 윤세주는 약산 김원봉과 꼬치 친구로서 김원봉보다 두 살 아래였습니다. 생가 또한 해천변에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함께 다녔던 동화 중학이 폐교하자 서울로 상경하여 오성 중학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밀양으로 내려와 고향의 여러 동지와 규합하여 3·13 밀양 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 후 중국의 랴오닝 성 유하현으로 망명 합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학을 배웠으며 그곳에서 헤어졌던 친구 김원봉과 상봉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여 13인이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결성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거사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석정 윤세주는 폭탄을 휴대하고 국내에 잠입하지만 발각되어 실행에 옮겨 보지도 못하고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 윤세주와 많은 동지가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출옥하여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 단장을 맡고 창군된 조선의용군의 요직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1940년 겨울에 조선의용대 제3 지대를 이끌고 화북으로 나간 후 1942년 5월에 중국 태항산의 마전 전투에서 총탄으로 중상을 입고 흑룡동 동굴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정부는 독립장을 추서. 밀양 삼남면 마산리의 최수봉 또한 김원봉과 함께 동문수학했으며 그는 1920년 9월 14일 의열단 단원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 의거를 보고 고무되어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거사를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그의 투철한 애국심에 밀양경찰서는 반파하였으며 거사 후 붙잡혀 사형 선고 받았지만 대한 남아의 기개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당당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제는 급하게 사형을 집행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투거로 위축되었던 항일무장태러가 다시금 불붙는  계기가 되었다합니다.












올해 12월은 국가 보훈처에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최수봉 의사를 선정했으며 정부에서는 1963년에 그의 높은 항일정신을 기려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이외에도 백민 황상규 등 밀양의 많은 독립투사의 행적을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태극기로 둘러싸인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를 걷다가 문득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 하는 소리가 내 귀에 쟁쟁히 울리는 듯 했습니다.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






석정 윤세주






조선의용대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처 박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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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룡 장군 동상

(상주여행/상주가볼만한곳)상주 경천대와 무우정. 상주 여행 1번지 정기룡 장군 전설과 경천대와 무우정 여행.


경상북도 상주여행 1번지 경천대. 경천대를 보지 않고는 상주여행을 하지 않았다 할 정도로 상주에서 가장 먼저 찾는 곳입니다. 경천대는 야트막한 155m의 무지산 아래에 'S'자로 휘도는 낙동강의 물줄기와 빼어난 절경을 빚어내며 솟구친 수직 단애의 바위는 경천대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도 남습니다.





경천대 관광지 주소: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산 12-3

경천대 관광지 전화:054-536-7040

 

2016/12/01 - (상주여행)상주 경천대와 회상나루관광지 상도드라마세트장. 상주시 상도드라마세트장



낙동강은 어머니의 젖줄처럼 1,300리를 부드럽게 흘러 부산 하단의 하구에서 바다로 소리소문없이 스며듭니다.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은 우리와 아픔을 함께 해왔으며 근대에 와서는 낙동강을 이용하여 산업화의 기초를 세운 우리에게는 고마운 강입니다.


경천대 황톳길

엄마와 같은 부드러운 모습인 낙동강에 하늘을 바치는 기둥으로 부르는 무지산의 최고봉 옥주봉에서 그 흐름이 꺾여 낙동강 최고의 절경인 경천대를 만들었습니다. 경천대에 올라서면 상주시민이 가장 자랑하는 여행지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경천대 관광지 입구에는 육지의 이순신으로 임진왜란의 무패를 자랑하는 명장 매헌 정기룡장군(1562~1622)과 명마 동상이 있습니다. 정기룡장군은 유년시절 이곳에서 용마와 함께 수련하였고 바위에 홈을 파내어 말먹이 통을 만들었는데 그게 지금도 남아 있다 합니다.

 

경천전망대

이곳을 지나면 경천대의 유래비가 있는 표지석에서 왼쪽 돌계단을 오르면 무지산 전망대인 옥주봉(155m) 가는 길입니다. 전망대 오르는 길은 황톳길로 꾸며져 있으며 황토를 아주 작은 입자로 둥글게 만들어 구워 길게 등산로에 깔아 황톳길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을 지나면 곧 3층 건물인 무지산 전망대입니다. 2층에는 삼백의 고장이라는 상주 특산품인 쌀과 명주, 곶감 그 외에 청정 상주에서 생산되는 여러 물품이 전시 중이며 특히 할머니가 전해주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곶감’이야기를 형상화해 놓았습니다. 아련한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곳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3층의 전망대에서 보는 사방팔방 펼쳐지는 경관입니다. 유장하게 굽이치는 낙동강 하며 상주의 진산인 갑장산, 노음산 등 여러 명산이 한 폭의 그림을 펼쳐 놓은 듯합니다. 경천대 일부분만 봤는데도 눈이 휘둥그럴 정도로 깜짝 놀랄 풍경인데 경천대에서 만나는 풍경이 어떨까 더욱 궁금해집니다.


















이래서 상주 경천대, 경천대 하나가 봅니다. 경천대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돌아가 만나는 갈림길에서 왼쪽 경천대·무우정 방향으로 내려서면 솔숲 사이에 4개의 큰 바위가 징검다리를 한 것 같이 늘어서 있는 게 보입니다. 이곳이 경천대입니다.






 경천대(擎天臺)는 다른 말로 자천대(自天臺)라 합니다. 이는 ‘하늘이 만든 절경’을 뜻하며 그 아래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우제 터인 우담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상주에서 경천대를 가장 신성시했던 곳이라 여겨집니다. 오래전부터 빼어난 절경으로 많은 시인 묵객이 경천대를 찾아 들었으며 우담 채득기(1605~1647) 선생이 경천대 옆에다 무우정을 짓고 은거했던 곳입니다.




경천대














으며 우담 채득기(1605~1647) 선생이 경천대 옆에다 무우정을 짓고 은거했던 곳입니다. 경천대에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란 각자가 바위 사이 석판에 음각되어 있습니다.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연호로 청나라에 의해 망한 명나라를 받든다는 뜻입니다.



이는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조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면서 항복하였고 1637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심양에 끌려갔습니다. 우담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쫓아 군신의 의리를 다하였으며 봉림대군과 1645년 환국하였습니다. 우담은 봉림대군을 도와 북벌의 의지를 불태웠으며 자천대에다 승명사상을 뜻하는 경천대비를 세우자 후세 사람은 이를 경천대라 불렀습니다.





복수심에 불탔던 북벌은 중단되었고 우담은 봉림대군(효종)의 만류에도 곁을 떠나 경천대로 내려왔습니다. 이에 효종은 충신이 사는 곳을 눈으로 보고 싶어 화사를 보내어 자천동 28경을 그려오게 해 곁에 두었다 합니다. 경천대를 오르는 돌계단 중간쯤에는 바위에 세 개의 패인 구덩이가 있습니다.



오른쪽 두 개는 사각형이며 왼쪽은 둥근 모양인데 한 곳은 연을 기르던 곳이며, 세수대야와 명의로 이름 날렸던 우담답게 약을 제조했던 그릇인 약분이라 합니다. 무우정은 1636년 병자호란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승명의 의리를 지켜 은거하려 지은 정자로 ‘춤을 추며 비를 빈다’는 뜻입니다.

 


정자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무우정이 자리한 터가 기우제를 지냈던 장소인 우담입니다. 선생은 정자의 편액을 ‘무우’라 정하면서 ‘자연을 벗 삼아 도를 즐긴다’는 ‘풍호영귀’에서 그 뜻을 취했다합니다. 정자는 1748년 상주목사 이협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1948년과 2005년에 각각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무우정


경천대음 편액



무우정에 걸린 편액을 보면 청음 김상용의 ‘우담신정기’, 택당 이식의 ‘무우정기’, 계당 유주목 등의 기문과 후손인 광식의 ‘경천대감음’이 걸려 있습니다. 무우정을 지나면 울울창창 하늘을 가린 키 큰 솔숲의 오솔길입니다.






이 길 끝에 걸린 나무다리를 건너면 현재 경천대 상도 드라마세트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2001년 10월에 MBC 창사 40주년 특별기획드라마 ‘상도’ 촬영지로 조성되었으며 그 후 여러 방송사에서 드라마 촬영장소로 인기를 끌었다 합니다. 물론 경천대를 찾는 관광객에게도 사진촬영지로 최고 인기코스입니다.




경천대 상도 드라마 세트장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은 최고 비경 지대로 움푹 팬 물웅덩이 모습을 하였습니다. 그 끝에는 길게 목을 쭉 뺀 용두봉이 감싸 안은 형국이라 용소라 부릅니다. 이곳에서 정기룡 장군이 명마를 얻었다는 연못입니다. 명마도 명장을 만나야 그 빛을 발하는 법 용소에서 뛰쳐나온 용마는 벌써 떼깔부터 달랐던 모양입니다.



건너편 회상리 매골 모래밭에서 빛을 발하며 뛰어놀던 용마를 발견하고 정기룡장군은 허수아비로 변장해 접근하여 용마의 길을 들였다 합니다. 매헌은 용마를 타고 금산전투에서 조경을 구할 때 신출귀물함이 마치 삼국지에서 유비 아들인 유선을 구하며 ‘칼춤을 췄다’는 조자룡과 닮았다 하여 ‘정자룡’이라 불렀다 합니다.  



우암 송시열이 정기룡 장군의 신도비를 쓰면서 신마(神馬)라고 용마를 격찬했다는데 하늘에서 용마를 얻음으로서 매헌은 더욱 뛰어난 명장이 되었나 봅니다. 상주 1번지 매헌 정기룡 장군의 전설과 충신으로 이름을 드높혔던 우담 채득기선생의 은거지 경천대와 무우정에서의 낙동강 여행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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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여행/상주가볼만한곳)상주 경천대와 회상나루관광지 상도드라마세트장. 상주시 상도드라마세트장


2001년 10월 15일 방영된 MBC 창사 40주년 특별 기획 드라마였던 ‘상도’는 모두 아실 것입니다. 조선 후기 순조 때 거상이었던 임상옥의 일대기를 소설가 최인호는 ‘상도’란 제목으로 그려내었고 MBC는 50부작으로 드라마화하여 공전의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드라마 상도로 인해 거상 임상옥에 대해 더욱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임상옥의 일대기인 상도를 촬영했던 세트장이 경상북도 상주시의 경천대와 중동면 회상 나루터 관광단지 안에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먼저 경천대 관광지 안의 상도 드라마세트장입니다.

 


낙동강 1번지 전망대답게 많은 관광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또한 상도 드라마 촬영장까지 조성되어 경천대 이외에도 드라마세트장 자체만으로도 휘돌아가는 낙동강의 전경과 함께 관광지로서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방송국에서 사극 드라마 촬영장소로 자주 사용되었다 합니다.

 

◀상주시 경천대 관광지 상도 드라마 세트장▶

























경천대 상도 세트장 주소:경북 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1-15



또 한곳의 드라마 상도 세트장은 낙동강 건너 옛 회상 나루 인근입니다. 회상 나루는 ‘상산지’에 그 기록이 남아 있으며 낙동강을 건너는 오래된 나루 중 한곳으로 중동면 회상리와 상주시 도남동을 연결했으며 객주는 물론이고 주막까지 갖추어 졌었다 합니다.



회상나루는 1980년대까지도 주막이 있었을 정도로 아주 큰 나루였으며 지금은 교량 건설과 교통의 발달로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아마 이곳이 드라마 상도 촬영지로서 최적의 장소가 아니었나 쉽습니다.



의주 상인 임상옥이 중국으로 떠나는 장면 등 많은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하니 다시 한 번 눈길이 갔습니다. 사실 드라마세트장을 여러 곳 찾아다녀도 봤지만 관리 부실로 버려지는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경천대가 있는 상도 세트장은 아주 관리가 잘되었으며 회상 나루의 상도 세트장도 현재 공사가 마무리 단계인 ‘회상 나루 관광지’가 완공되면 드라마 세트장으로 더욱 인기를 끌 것으로 보였습니다. 상주여행에서 경천대와 함께 여행해보세요.


상주시 회상나루 관광지 상도 드라마 세트장






































 회상나루 관광지 상도 세트장 주소:경북 상주시 중동면 회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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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부산가볼만한곳)2016년 제8회 부산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 광복동 부산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 어둠의 밤을 밝히다.

 

와우!! 드디어 올해에도 

부산 광복동에 

제8회 부산 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가 

지난 11월 26일 점등식을 시작으로 

2017년 1월 8일 일요일까지 

장장 44일간 크리스마스 성탄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2015/12/01 - (부산여행/중구여행)2015 부산 광복로 크리스마스트리 축제. 12월의 크리스마스 부산 광복로에서 부산 크리스마스트리 문화 축제 빛을 밝히다.

2014/11/30 - (부산여행/부산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온누리에 기쁨을...제6회부산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2013/11/28 - (부산여행/중구여행/부산 크리스마스트리 문화축제)더욱 화려해진 제5회 부산 크리스마스트리 문화축제 개막식 전에 미리 댕겨왔습니다.

2012/12/01 - (부산크리스마스 트리 문화축제)화려한 트리 불빛에 깜짝 놀래, 미리가본 성탄절 축제 제4회부산크리스마스트리축제

2011/12/02 - 빛 축제 광복로에서 열리는 부산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의 그 화려함에 놀래다.




올해의 콘셉트는 

“Rejoice in the Birth” 탄생의 기쁨을 주제로 

부산이 들려주는 여덟 번째 크리스마스 이야기이며 

성탄절은 예수님의 생일날이라는 것은 

모두 아시는 사실…….

 


이번 시티스폿의 메인은 

생일날이면 빠질 수 없는 케이크 트리입니다. 

ㅋㅋ 

그 높이가 무려 6단 케이크에 

17m라 아마 진짜 케이크라면 

기네스 북 감은 따놓은 당상입니다.



올해에도 광복로와 부산 근대박물관, 

국제시장 사거리의 세 방향에서

 화려한 불빛을 밝혀 

메인인 시티스폿으로 집중하는데 

그래도 가장 볼 게 많은 곳은 

역시 광복로 쪽입니다.




축제 기간에는 

올해에도 

다양한 행사가 준비되었습니다.

 포토존에서 

가족과 연인의 멋진 사진을

 담을 수 있으며 

많은 문화행사도 준비 중입니다.




음악, 춤, 연주, 퍼포먼스, 무용 공연 등 

아마추어 팀의 다양한 무대공연인 

데일리 콘서트와 

시민참여프로그램인

 ‘나는 클수다’ 

공개오디션도 진행한다 합니다.



어서 빨리 부산크리시마스트리문화축제 

홈페이지에 신청하여 

끼를 발산해 보세요. 

그 외에도 다양한 행사가 진행 중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타임’에는 

인공 눈뿌리기 행사가 열리며

 소망 트리, 

보물찾기, 

성탄음악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시민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문화축제가 될 것 같습니다.



2016년 제8회 부산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 

많이많이 놀러오세요?



부산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 사진으로 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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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여행/경산가볼만한곳)경산 용성 용산산성. 삼국시대 산성인 경산 용산 용산산성 여행.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의 진산인 용산에는 삼국시대에 축성했다는 산성이 남아 있습니다. 때는 신라 시대 태종무열왕 3년인 656년에 쌓았으며 신라의 수도 서라벌로 통하는 대구~경산~청도의 길목을 지키는 국방상의 중요 요새 중 한곳입니다.





용산산성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134호

용산산성 주소: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 산 78번지


☞2016/11/26 - (경산여행)난포고택. 경북 경산시 용성면 여행에서 꼭 가봐야할 곳 난포고택. 난포고택

2016/11/23 - (경산여행)구룡산 반룡사. 원효와 설총, 요석공주의 설화가 살아 숨쉬는 경산 구룡산 반룡사 여행.



 용산은 높이가 겨우 400m대로 산 정상을 중심으로 동면과 남면은 완만한 경사로 석축을 쌓았으며 그와 반대로 북면과 서면은 경사가 급한 일부에는 속에다 돌을 넣고 바깥은 흙을 다진 석심토축(石心土築)을 한 퇴뫼식 산성 형태입니다.




용산 산성의 전체면적은 140,435㎡(42,481평)이며 장방형으로 성의 둘레는 대략 1.5km 크기입니다. 용산 산성의 특징은·동편에는 성을 내성과 외성으로 쌓았는데 이는 삼국시대 산성으로는 보기 드문 경우라 합니다. 현재 용산 산성의 성벽은 복원한 북문을 제외하면 훼손이 심해 원래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용산산성 북문



용산 산성을 조사하면서 밝혀진 결과는 다만 일부지만 안과 바깥의 양쪽 면을 돌로 쌓은 석축인 협축성(夾築城) 구간이 나타나고 또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한 쪽인 바깥에만 돌을 쌓은 석축인 편축성(片築城)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산성의 축조를 보면 이곳의 바위를 다듬어 큰돌로 지대석을 받쳤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위에다 30*25*30cm 크기의 돌을 깨어 한 쪽은 맞추고 허튼층으로 튼튼하게 쌓은 형식입니다. 성문은 동·서·남·북으로 한곳씩 두었으며 주 출입문은 북문으로 여겨집니다.


용산산성 북문의 우물터


이는 성문의 위치나 규모를 보면 폭이 429cm에다 490cm의 통로 길이인 규모에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가 150cm~250cm 정도인데 당시에는 성벽이 더높았을 것으로 보이며 이를 근거로 하여 일부 산성을 정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채성위에는 여장까지 갖추어진 성벽으로 여겨지나 현재 고대성곽의 여장형식을 추정할 수 없어 복원하지 않았다 합니다. 이와 함께 성안에는 여러 시설물이 있지 않았나 보고 있습니다. 성벽을 따라 장대와 망루가 곳곳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臺)의 흔적이 여러개 보이며 평지에는 창고의 흔적 터도 보입니다.



용산 산성의 외성에는 여러 개의 우물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무지개 샘은 지금도 샘물이 땅속에서 솟아오릅니다. 예로부터 이곳을 기우제나 기도처로 사용하였으며 그 흔적인 돌탑과 돌계단 등이 남아 있습니다.



무지개샘

용산산성의 흔적인 외성

용산산성 동문터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김인문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군주로 임명되면서 장산성의 축조를 감독했다합니다. 장산성이 오늘날의 용산산성을 뜻하며 이를 토대로 삼국시대 산성으로 추정.

 

용산산성 서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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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여행/경산가볼만한곳)난포고택. 경북 경산시 용성면 여행에서 꼭 가봐야할 곳 난포고택.


난포 고택을 처음 접하고서 생소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난포 고택은 경산하고도 용성면 곡란리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 전형적인 조선 시대 상류층 양반가옥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와 건물의 고택을 둘러 산 낮은 담장을 보면서 집주인의 성품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경산 난포고택 주소: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 526-6

난포고택: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0호


☞2016/11/23 - (경산여행)구룡산 반룡사. 원효와 설총, 요석공주의 설화가 살아 숨쉬는 경산 구룡산 반룡사 여행.

2016/02/06 - (경북여행/경산여행)삼성현역사문화공원 삼성현역사문화관. 경산시 남산면 삼성현 역사문화공원의 삼성현역사문화관에서 원효, 설총, 일연을 만나다. 2편

2016/02/03 - (경북여행/경산여행)삼성현역사문화공원과 삼성현역사문화관. 삼성현 역사문화공원 문화관에서 원효, 설총, 일연을 만나다. 1편

2016/01/23 - (경북여행/경산여행)경산 삼성산 산행. 원효, 설총, 일연선사의 고장 삼성현. 경산 삼성산 최고의 수질을 자랑하는 상대온천에서 온천산행 추천.




난포는 영천최씨 최철견(1525~1594)의 호이며 원래 경북 영천의 금호에서 20대 초반인 1546년 명종 첫해에 지금의 장소로 옮겨와 지었습니다. 이게 난포 고택이라 부르게 된 연유입니다. 난포 고택의 구조를 보면 안채와 사당, 그리고 좌우 행랑채, 안채와 마주 보고는 큰 사랑채와 좌우에 고방채, 중사랑채 또한, 큰사랑과 마주하고는 대문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의 가옥구조에서 많이 축소되었습니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과 수오당 등이 남아 있으며 조금의 변화는 있지만 난포 고택의 안채만은 옛날 모습 그대로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수오재



정침인 안채를 보면 앞면이 7칸에 옆면은 1칸 반인 한일(一)자형 건물입니다. 현재 건물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가운데 5칸은 지붕을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좌우 1칸은 지붕을 덧달아낸 형태로 마치 팔작지붕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건물 형태는 경상북도 영천, 경주, 경산등의 남부지방에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대청인데 특이하게도 문짝을 달았으며 뒷벽 쪽에다 다락을 넣어 대청을 양쪽 방과 연결하도록 했습니다.



남포 고택의 안채는 임진왜란 등 여러 전란에도 소실되지 않았으며 현재 건물의 상량문에는 1816년의 중수기록의 흔적과 지붕에 설치한 막새와편 명문을 보면 1809년인 순조 7년에 보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랑채는 앞면 4칸에 옆면 1칸의 맞배지붕 홑처마 지붕입니다.



현재 큰 사랑채와 대문채는 최근에 복원하였으며 사랑채의 개방된 누마루에서 보는 용성면의 진산인 용산을 바라보는 맛은 최고라 하겠습니다. 대문채 오른쪽에는 오래된 은행나무와 용산에서 옮겨 세운 수오재가 있고 난포 고택의 역사를 보여주는 500년 된 은행나무는 노란 물감을 드린 듯 난포 고택의 역사를 말해주었습니다.

 



난포 최철견은 낙향하여 용성의 곡란에서 지냈습니다. 그때 왜적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자 70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손자 인수와 증손자 준립 등과 함께 창의하여 영천의 권응수와 합세하여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특히 영천의 아화산성 전투에서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합니다




난포 고택은 명당으로도 전국에서 손을 꼽는다 합니다. 이는 1929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민속연구가 무라야마 지준이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면서 우리나라 고택 중에서 36곳을 대표 풍수적 길지로 선정하고 ‘조선의 풍수’란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중에는 난포 고택도 포함했는데 그는 난포 고택을 부용화 지형이라 설명했습니다.

 

난포고택 사랑채


고택 앞의 용산이 부용화라면 난포 고택을 향해 힘차게 내리뻗은 한줄기 굵은 능선은 부용화의 꽃대로 그 끝자락에 모인 혈에 난포 고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인지 17대 400여 년 동안 사람의 향기가 끊이지 않았던 게 명당터로서 살기 좋은 길지 중 한 곳인가 봅니다.



경산 용성면 난포고택 사진으로 즐기기














고향 생각이 절로 나는 손자와 할머니 조각상












난포고택 안채

정침인 안채를 보면 앞면이 7칸에 옆면은 1칸 반인 한일(一)자형 건물입니다. 현재 건물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가운데 5칸은 지붕은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좌우 1칸은 지붕을 덧달아낸 형태로 지붕은 마치 팔작지붕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대청인데 특이하게도 문짝을 달았으며 뒷벽 쪽에다 다락을 넣어 양쪽의 방과 연결되도록 했습니다. 남포 고택의 안채는 임진왜란 등 여러 전란에도 소실되지 않았으며 현재 건물의 상량문에는 중수기록의 흔적과 지붕의 막새와편 명문을 보면 1809년인 순조 7년에 보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랑채는 앞면 4칸에 옆면 1칸의 맞배지붕 홑처마 지붕입니다.


 









난포고택 안채 뒷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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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여행/경산가볼만한곳)구룡산 반룡사. 원효와 설총, 요석공주의 설화가 살아 숨쉬는 경산 구룡산 반룡사 여행.


경상북도 경산의 반룡사를 여행하고 왔습니다. 반룡사는 구룡산과 발백산 기슭에 자리한 사찰로 심산유곡에 둘러싸여 하늘만 빼꼼하 게 열려 선계가 따로 없는 곳에 자리했습니다. 반룡사로 이름한 사찰은 우리나라에 3곳 있으며 경북 고령 미숭산의 반룡사보다 더욱 유서 깊은 명찰입니다.





경산 반룡사 주소: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용전리 118-2

경산 반룡사 전화:053-852-1919


2016/02/06 - (경북여행/경산여행)삼성현역사문화공원 삼성현역사문화관. 경산시 남산면 삼성현 역사문화공원의 삼성현역사문화관에서 원효, 설총, 일연을 만나다. 2편

2016/02/03 - (경북여행/경산여행)삼성현역사문화공원과 삼성현역사문화관. 삼성현 역사문화공원 문화관에서 원효, 설총, 일연을 만나다. 1편

2016/01/23 - (경북여행/경산여행)경산 삼성산 산행. 원효, 설총, 일연선사의 고장 삼성현. 경산 삼성산 최고의 수질을 자랑하는 상대온천에서 온천산행 추천.

2016/11/10 - (경주여행)경주 분황사 여행. 가보지 않아도 가본것 같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분황사 석정, 화쟁국사비부, 보광전의 약사여래입상을 만나다.

2016/11/09 - (경주여행)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 최초의 석탑이자 유일한 경주 분황사 9층석탑을 여행하다. 분황사모전석탑




이곳 경산의 반룡사는 신라 문무왕(재위 661~680) 때에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원효대사(617~686)께서 창건한 사찰입니다. 원효는 압량인 이곳 경산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조씨는 '유성이 품속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원효를 잉태해 밤나무가 많은 율곡을 지나다 갑자기 산통을 느껴 큰 밤나무 밑에서 원효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15세에 어머니를 갑자기 여의자 충격을 받아 출가 하게 됩니다. 661년 문무왕 1년에 의상과 당나라 유학길에서 무덤 속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모든 일이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초의 진리를 깨달아 그길로 유학길을 포기하고 혼자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원효는 선덕여왕이 창건한 경주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많은 책을 저술하였고 백성을 찾아다니는 불교 포교에 힘써 대승불교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원효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느냐,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하며 노래를 하고 다녔지만, 태종무열왕(재위 654~661)만 원효의 뜻을 알고 그를 궁으로 오게 했습니다.

 


원효는 소식을 듣고 태종무열왕을 만나기 위해 궁으로 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입고 있던 옷이 다 젖자 무열왕은 원효를 바로 요석궁에 보내어 젖은 옷을 말리게 했습니다. 이때 요석궁에는 과부가 된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가 궁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날 원효는 요석공주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고 열 달 뒤 요석공주는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분이 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3문장가인 설총입니다. 원효는 그길로 파계하여 소성거사라 자신을 부르며 노래로서 민중 속을 파고들어 불법을 전파합니다.



요석공주는 설총을 원효의 고향인 이곳 경산에서 낳았으며 설총을 데리고 원효가 창건했다는 구룡산 반룡사에 머물렀습니다. 김춘추는 공주와 외손자가 보고 싶으면 수시로 왕후와 함께 구룡산의 고개를 넘어 반룡사를 찾았는데 태종무열왕이 넘었던 고개라 하여 지금까지도 왕재라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어린 설총은 반룡사에서 성장하였으며 후에는 이두법을 집대성합니다.

 


원효가 창건했으며 설총과 요석공주가 머물렀던 반룡사는 태종무열왕의 후원을 등에 업고 대 사찰이 된 것은 자명한데 현재 반룡사는 오래된 문화재는 찾을 수 없고 가루가 될 정도로 처참하게 파괴된 석물의 부재들만 천년 가람 반룡사의 영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는 화엄 천태종의 고승 원응국사가 이곳에 주석하였으며 고려 11대 문종 때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현재 반룡사의 당우를 보면 모두 최근에 불사 되었으며 왜 오래된 건물은 하나도 남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요???





반룡사는 고려말에 쳐들어 왔던 몽골과 1592년 조선의 임진왜란으로 한순간에 모두 불타버리자 1641년인 인조 19년에 계운과 명언 두 대사에 의해 다시 한 번 도약을 하며 산내 암자로 내원암, 벽운암, 대적암, 은선암, 안적암 등 다섯 암자가 중창 또는 창건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에 의해 반룡사와 암자의 그 많은 당우는 모두 소실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 몇 동의 당우로 겨우 명맥만 이어오다 지금으로부터 약 80년 전에 또다시 일어난 화재로 반룡사는 전부 불탔습니다. 현재 반룡사의 당우는 문화관광부와 경상북도, 경산시의 지원과 신도의 불심으로 하나하나 복원 중에 있습니다.

 




반룡사는 화재로 소실될 때 급한 나머지 대웅전의 삼존불중 목조 관세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을 청도의 모 사찰에 옮기게 되었는데 되돌려 받지 못하였고 범종은 포항 보경사의 서운암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1991년에는 반룡사에 남아 있던 아미타불마저 도난당하는 수난을 당하며 아직 찾지못하고 있습니다.





반룡사 앞에는 창건 당시 흔적인 많은 부재가 널브러져 진열되어 있습니다. 부재 하나하나가 당시 반룡사의 규모와 역사를 말해주는 게 지금보면 모두 예사 모습이 아닙니다. 그만큼 반룡사는 신라 왕실의 기원사찰로서 대사찰의 규모였지만 지금은 그 모습을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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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여행/의성가볼만한곳)경상북도 의성 비봉산 대곡사. 의성 대곡사 여행을 하다.


경상북도 의성군을 여행하면서 찾아간 비봉산 대곡사. 외진 곳의 사찰로서는 아주 대찰이었습니다. 비봉산 대곡사는 1368년 고려 공민왕 17년에 당시 선승이었던 지공·나옹선사 두 분의 왕사가 중건했으며 원래는 대국사라 불렀습니다.

 




의성 대곡사 주소: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봉정리 895

의성 대곡사 전화:054-862-4222


2016/11/15 - (의성군여행)의성군 비봉산 대곡사 대웅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보여주는 의성 대곡사 대웅전 여행.

2016/11/07 - (경북의성여행)대곡사 적조암. 비봉산 대곡사 적조암의 독특한 건축양식인 구포루 인법당.



지금 대곡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한국 향토사 연구 전국협의회’의 1989년 향토사연구 자료집에 대곡사의 창건연대를 신라말과 고려 초로 확신하고 1196년 8월 17일의 백운 이규보가 지은 ‘십칠일입대곡사 탐방시’와 대웅전 앞의 다층석탑 양식 그리고 1960년에 대곡사 텃밭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후기 양식의 금동불상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대곡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겪으면서 완전히 소실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다 1605년인 선조 38년에 탄우대사가 대곡사 재건을 시작하면서 중창하였으며 1687년 숙종 13년에 대전 선사께서 중건하면서 대곡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전성기의 대곡사는 9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습니다. 모두 전란으로 전소와 황폐되었으며 지금은 산내암자로 적조암만 남아 있습니다.

 




현재 대곡사에 남아 있는 문화재는 대곡사 대웅전 (보물 제1831호), 경상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61호 대곡사 범종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9호 대곡사 명부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5호 대곡사 다층석탑이 있으며 부속건물로 나한전, 산신각, 종무소, 요사채가 있습니다. 의성 대곡사을 들어서는 일주문의 장대함에 먼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굵은 두 기둥에 달아 올린 공포의 화려함은 천년고찰 대곡사의 풍모를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먼저 만나는 게 대곡사 범종각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2층의 누각 형태로 보아 대곡사 범종루가 맞는 것 같습니다. 현재 사찰의 범종은 따로 범종각을 지어 그곳에다 달아 놓았으며 현재는 대곡사의 출입문을 지키는 누각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대곡사 범종각은 1368년 고려 공민왕 대 처음 건립됐습니다.

 

대곡사 범종각



그러나 1598년 정유재란 때 대부분 소실되면서 범종각 또한 불탔습니다. 지금의 범종각은 대곡사를 중창한 탄우대사와 중수한 태전선사에 의해 건립됐다 합니다. 범종각은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으로 중층의 누각입니다. 공포는 외2출목에 내3출목을 두었으며 건축양식을 보면 조선 후기에 지어졌습니다. 아마 대웅전의 건축을 범종각에 접목하여 모방한 것으로 보이며 종각 안에 있던 범종은 용문사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대곡사 다층석탑





대곡사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게 개인적으로 대웅전과 다층석탑입니다. 이런 형태의 석탑은 이곳 외에도 두 번 정도 더 본 것 같은데 지금 기억이 잘 나지 않으나 아주 특이한 석탑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다층석탑 기단부는 45cm의 화강암이며 점판암의 연화 대좌로 된 탑신부는 20cm, 탑신의 높이는 108cm입니다. 그러나 상륜부는 현재 유실된 상태입니다.

 








다층석탑의 전체 높이는 173cm로 12층이며 6층과 7층 옥개석 간의 체감비율이 차이가 다른 층에 비해 급격한 것은 그사이의 한 층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처음 만들어졌을 때 13층의 석탑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다층석탑은 각층 옥신석이 남아있지 않으며 옥개석도 부분적으로 손상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초기의 청석탑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남아 있는 이런 형태의 탑은 12기 정도로 문화적 가치가 아주 높은 편입니다.




대곡사 명부전



대곡사 명부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이 건물 또한 1605년과 1687년에 탄우와 대선 두 스님에 의해 중창·중건하였지만, 현재 명부전의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건물의 구조와 건축양식인 오량과 겹처마 맞배지붕을 보면서 17~18세기의 형식으로 지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성의 비봉산 대곡사는 의성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행지입니다. 

 











대곡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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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여행/예천가볼만한곳)삼강나루 삼강주막. 낙동강인 삼강나루에서 대한민국 마지막 주모가 있었던 삼강주막 여행을 하다. 


경북 예천의 삼강주막이 있는 나루를 여행하고 왔습니다. 삼강하면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 개의 강이 서로 만난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세 개의 강 중에서 첫 번째는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이여 두 번째는 경북 봉화에서 발원한 내성천이요, 세 번째는 경북 문경에서 발원한 금천입니다. 이 강이 모두 만나 큰 물줄기를 이루는 곳을 삼강이라하며 하나가 되어 낙동강이 됩니다.





삼강주막 주소: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166-1

삼강주막 전화:054-655-3132



지금이야 교통과 도로의 발달로 전국이 일일생활권에 들어 그만큼 빠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이곳 삼강나루터는 경남 김해의 낙동강하구에서 소금배와 물산을 실은 배가 경북 안동의 하회마을까지 올라갔으며 그 길목인 이곳 삼강나루에도 짐을 부려 놓고 갔습니다.



이곳에서 소금과 물산은 모두 영남 내륙으로 수송되어 항상 많은 사람으로 붐볐습니다. 또한, 동래를 출발하여 한양으로 향하는 영남대로도 세 갈래 길이었습니다. 그 길 가운데에는 각각 모두 큰 고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영남의 선비들은 추풍령과 죽령은 모두 피하면서 꼭 이곳 삼강나루를 건너 문경을 지나 문경새재로 넘어다녔습니다.





그 이유는 과거시험에서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죽 쑨다며 모두 회피했지만, 문경은 “반가운 소리를 듣는다”란 뜻으로 장원 급제 소식을 듣는다는 뜻에서 과거 보는 선비는 모두 삼강나루의 주막에서 유하거나 돛단배로 건너 문경를 지나 새도 넘어가며 쉬어 갔다는 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향했습니다.




삼강절경




삼강주막

오래전부터 삼강주막은 이곳을 찾는 사람에게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었으며, 과거객과 보부상들의 숙식처로 삼강나루의 주막은 매우 유용했습니다. 그 삼강주막이 최근인 2005년까지 존재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티브이의 사극 드라마에서 가끔 봤던 모습이 실제 있었다 하니 저 또한 믿기지 않습니다.

 




삼강주막 앞에서 “주모, 주모, 국밥 한 그릇 말아주시오”하는 소리가 삼 강에 메아리가 되어 들리는 것 같습니다. 현재 삼강나루에는 삼강주막의 마지막 주모 유옥연 할머니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옵니다.








1917년 이웃한 풍양면의 우망골에 태어났으며 16세에 결혼했지만 34세에 남편과 사별하자 2남 2녀의 어린 자식을 키우기 위해 전주인에게 삼강주막을 넘겨받아 2005년 10월 89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50여 년간 삼강나루를 지키는 마지막 주모가 되었습니다.







 글자와 숫자를 배우지 못했던 유 할머니는 손님이 외상을 하면 부뚜막 위에 자신만이 알 수 있는 표시를 했습니다. 지금도 부엌의 토담 벽에는 할머니가 그은 금이 남아 있는데 막걸리 한잔이면 짧게 금을 그었고 한 주전자는 길게 금을 그어 표시했습니다.








뱃사람 외상장부

그리고 외상값을 다 갚으면 가로금을 그어 지웠으며 금을 그은 할머니는 누구의 외상값인지 훤하게 알고 있었으며 지금도 가로금이 그어지지 않은 것은 누군가 외상값이 남아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합니다.


삼강주막의 방 내부 여러곳으로 출입문이 붙어 있습니다. 


유할머니의 외상장부

그리고 한쪽 벽에는 뱃사공들의 외상값도 금으로 그어져 있으며 그 위를 투명판으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는 관광객의 훼손으로 인한 조치로 보입니다. 유 할머니가 인수했던 삼강주막은 지금부터 110년 전인 1900년경에 처음 지어졌으며 부엌에서 방으로 통하는 여러 출입문을 보면 규모는 작지만, 그 기능에 충실해 지어졌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강주막은 건축역사 자료로서 희소가치와 당시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지역적인 역사와 문화적 의의가 있으며 2007년 말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또한, 주막 뒤에는 500년이 넘은 회화나무 3그루가 삼강나루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삼강주막 뒤 500년된 회화나무 












무인판매 선물용 생막걸리입니다.. 이자체가 냉장고였습니다.   




주모가 보내주는 우체통, 333일 뒤에 배달 된다네요. 






삼강주막 차림표


소고기국밥입니다. 역시 주모가 끓여주는 국밥이 최고죠. 이 쇠고기 국밥을 먹고 부산으로 향했다는....


방안의 모습입니다. ㅎㅎ 따뜻하게 데워진 방바닥이 정말 좋았습니다.

 손님들의 낙서는 완전 .... 읽어 보는 재미도 솔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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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성여행/경북의성가볼만한곳)대곡사 적조암. 비봉산 대곡사 적조암의 독특한 건축양식인 구포루 인법당. 


경북 의성을 여행하다가 찾았던 비봉산 대곡사 적조암. 적조암은 대곡사의 9개 암자 중에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습니다. 먼저 적조암을 거느린 대곡사를 간략하게 언급하면 1368년인 고려 시대 공민왕 17년에 인도 승려 지공과 당시 왕사였던 나옹선사 혜근에 의해 창건하였다 합니다.



 

대곡사 적조암 주소: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대곡사길 200

 대곡사 적조암 문의전화 054-862-6322


 


그러나 대곡사의 창건연대를 두고 다른 설도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말에서 고려 초로 보는 견해입니다. 백운 이규보의 대곡사 탐방에 관한 시와 인도 승려 지공 생몰연대, 그리고 대웅전 앞 다층석탑의 양식 등을 종합해 보면 더욱 그러하며 또한, 1960년에 통일신라 후기의 금동불상이 대곡사의 텃밭에서 발견되어 통일신라말에서 고려 초의 창건연대에 더욱 신빙성을 높여줍니다.



이번 포스트는 대곡사의 암자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적조암입니다. 대곡사 부속암자로 적조암만 남게 된 연유가 있습니다. 이는 정유재란으로 인해 대곡사와 함께 9 암자가 전란으로 모두 소실하였기 때문입니다. 대곡사에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암자 적조암에는 여느 산속 암자의 단출한 전각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높은 계단을 올라 적조암 경내에 들어서면 왼쪽에 조선 시대 사대부 집의 누마루식 건축 양식에 눈길이 갑니다. 사찰에 이런 건축양식은 좀체 볼 수 없는데 특이하게도 대곡사 적조암서 볼 수 있었습니다. 적조암을 품은 산은 비봉산입니다. 적조암의 상량문을 보면 "봉황이 머문다는 뜻이며 비봉산의 주맥에 적조암이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적조암 구포루 인법당



현재 독특한 건축 양식과 희소성으로 2014년 12월 18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2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대곡사 적조암의 구포루는 인법당으로 19세기 중반인 1847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18세기의 구포루 중창설을 보면 그 이전에도 건물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지금과 같은 건물 모습과는 다르겠지만 구포루 인법당은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대곡사에 머물렀던 고승들의 진영을 모시는 진영각으로 사용했지만, 현재는 불교중앙박물관을 이관한 상태입니다. 구포루 인법당은 앞면 4칸에 옆면 4칸 규모의 ‘ㄱ' 자형이며 5량가의 이익공건물입니다.





건물은 경사진 대지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앞쪽에다 앞면 2칸, 옆면 2칸은 마루를 넣었습니다. 누마루 밑을 보면 마루를 받치는 기둥을 세웠고 누마루 주위로는 툇마루를 달아내어 그 끝에는 계자 난간을 둘렀습니다.







뒤쪽 2칸은 온돌방을 넣었으며 이외에도 처마에는 활주를 세우고 사자 모양의 화반을 설치하는 등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당이 방으로 바뀌고 벽장을 내는 등 부분적인 건물의 변형으로 인해 아쉬움은 많으나 건축물의 문화재적 의미는 상당한 가치가 있다는 평가입니다.










조계암의 중심건물인 극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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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보문리 사지. 경주 보문들의 천년 흔적 보문사지 여행.


신라 시대부터 서라벌의 진산으로 신령스러운 영산의 대상이었던 낭산과 명활산 사이에 있는 보문들에는 아직 가을걷이를 하지 않은 벼가 고개를 숙이며 누런 황금 들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보문단지를 간다고 북천 옆 도로를 따라 여러 번 다녔지만, 이곳 골짜기 안쪽이 이리 넓은 줄 이번 경주여행을 하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경주 보문리 사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848-6


2016/10/21 - (경주여행)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 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 황금들판의 보문들을 지키는 화려한 허수아비 경주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를 여행하다.

2016/10/28 - (경주여행)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 통일신라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를 만나다.

2016/10/26 - (경주여행)경주 보문사지 석조. 보물 제64호 절에서 물을 담아두는 돌그릇인 경주 보문사지 석조를 만나다. 경주보문사지석조



 

보문들을 가로질러 닿았던 보문사지는 보문들의 가운데 황금 들판을 울타리 삼아 무심한 듯 오늘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습니다. 보문동의 유래도 아마 이곳 보문사에서 나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중마을 또한 그런 것 같습니다. 특히 이곳 보문사지 주위로는 많은 절터가 남아 있습니다.

 


신문왕의 명복을 빌었던 황복사지가 그러하고 선덕여왕의 세 가지 예지력에서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장사지내라"는 유언이 현실이 되었던 사천왕사지가 보문사지와 함께 서로 삼각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보문사지의 건립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이곳에서 보문이라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보문사가 있었음을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금당의 부재와 건물 배치, 석재 유물 등을 종합해보면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절로 추정만 될 뿐입니다.

 

 

 

 

현재 보문사 터는 주위가 모두 논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금당지와 동·서탑지 등 모두가 1~2m 정도로 흙이 쌓여 높은 상태 있습니다. 금당지에는 건물의 기단석과 초석이 그대로 깔려 있으며 금당 지 앞 좌우 높은 단에는 동·서의 목탑지가 남아있습니다.

 

금당지의 모습입니다. 

 

 

 

 

 

 

 

 금당지 아래 옛날 논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석등 부재들...


동탑지에는 아무 흔적이 남아 있지 않으며 서탑지에는 현재 연꽃무늬가 조각된 목탑의 받침돌인 대형 초석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속리산 법주사의 목탑건물이나 황룡사 9층목탑과 유사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척에 있는 황룡사 9층 목탑과 같이 고려 시대 몽골침입 때 소실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서탑지의 모습입니다. 

또한, 금당지 앞에는 석등의 받침돌과 옥개석, 초석 등이 뒹굴고 있는 게 신라 천 년의 뒷모습인 양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현재 보문사지 서쪽으로는 보물 제123호인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가 남아 있으며 62m 떨어진 북쪽으로는 보문사지 당간지주인지 확실하지 않은 보물 제910호 경주 보문리 연화문 당간지주가 있습니다.

 

 

 

 

이와 함께 보물 제64호인 경주 보문사지 석조가 남아 당시 보문사의 현역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그 높이가 3.8m이며 보문사지의 여러 부재와 같은 시기인 통일신라 시대 때에 조성되었습니다. 절을 알리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고정했던 두 개의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합니다

 

 

돌로 된 당간지주와 비교하면 당간은 철당간과 목당간 석당간이 있는데 당간지주보다 지금 남아 있는 문화재가 손꼽을 정도의 숫자입니다.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안쪽 면이 평면이라면 나머지 삼면은 아래쪽을 잘록하게 하고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약간씩 가늘어집니다.

 

 

당간을 고정했던 구멍이 상·중·하로 3개 뚫렸고, 북쪽의 돌기둥은 구멍이 반만 패여 있어 특이한 경우입니다. 두 기둥 중 북쪽 기둥은 윗부분이 부러진 상태이며 기둥 사이에 놓였던 당간 받침은 사라졌습니다. 또한, 전체적으로는 크고 소박한 모습입니다.

 

 

경주 보문사지 석조 또한 통일신라 때에 만들어졌습니다.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절에서 물을 담는 용도로 사용하였습니다. 가로 형태의 직육면체 바위 안쪽을 넓고 깊게 사각으로 파내었습니다. 또한, 내부와 외부는 별다른 장식이 없고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와 같이 그저 밋밋하며 소박한 모습입니다.

 

 

 


석조의 북쪽만 아랫부분에 배출구가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사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경주 보문들에서 만나는 천년전의 보문사는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흔적으로 남아 있는 유물로서 당시 보문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적 제3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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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황복사지 삼층석탑. 신문왕의 명복을 빌며 세웠다는 국보 제37호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만나다. 


황복사는 의상대사가 653년에 19세에 출가했던 곳으로 통일신라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모후인 신목태후와 함께 692년 7월 2일에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석탑은 이중의 기단 위에 쌓은 삼층의 석탑으로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 통일신라 석탑이며 국보 제37호로 지정하였습니다.





황복사지 3층석탑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103


2016/10/31 - (경주여행)신라 27대 선덕여왕릉.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낭산 도리천의 선덕여왕릉 여행과 세가지 예지력.

2016/10/29 - (경주여행)신라 26대 진평왕릉. 천년 세월을 말해주는 듯 웅장한 노거수에 마음까지 편안한 경주 진평왕릉 여행. 진평왕릉

2016/10/28 - (경주여행)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 통일신라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를 만나다.

2016/10/26 - (경주여행)경주 보문사지 석조. 보물 제64호 절에서 물을 담아두는 돌그릇인 경주 보문사지 석조를 만나다. 경주보문사지석조

2016/10/24 - (경주여행)경주 구황동 당간지주. 분황사 당간지주로 추정되는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를 여행하다. 경주 구황동 당간지주

2016/10/23 - (경주여행)전 홍유후 설총묘.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던 신라 대문장가 설총묘 여행. 설총묘

2016/10/21 - (경주여행)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 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 황금들판의 보문들을 지키는 화려한 허수아비 경주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를 여행하다.



 

석탑의 높이는 7.3m로 당시 성행했던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감은사지 삼층석탑보다 약 2m 정도 규모 면에서 작게 바뀌었습니다. 또한, 기단부의 하단 버팀 기둥인 탱주는 3개였던 개 가운데 기둥이 없이 2개이며 면석과 갑석은 각각 8매의 갑석으로 짜맞추었습니다. 그러나 상단의 면석은 8매에 갑석은 4매로 이것 또한, 차츰 간소하게 바뀌었습니다.

 

 

 

 

 

 

 

 

 이와 함께 1층의 몸돌은 이때까지 여러 개의 돌을 짜 맞추었다면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하나의 몸돌을 사용했습니다.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5개 그대로이며 위층의 몸돌을 받치는 지붕돌의 상단은 2단의 각형 굄대로 아직은 신라 석탑양식이 많이 남아 있는 통일신라 석탑입니다. 이는 신라 시대 석탑양식에서 통일신라의 변화된 석탑양식의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석탑으로 보입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의 복장유물로는 금동사리함과 높이 12.2cm 금동여래좌상, 높이 14cm 여래입상이 있습니다. 이는 효소왕의 아들인 성덕왕이 신문왕과 효소왕의 두 선대 왕의 명복을 빌며 삼층석탑에 안치했는데 1943년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이 두 불상은 국보 제79호와 국보 제80호에 각각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

 

 

 

 

 

 

순금의 금동사리함 뚜껑 안쪽에는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692년 이 탑을 세웠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합니다. 탑을 세운 목적과 건립연대가 뚜렷하게 나온 석탑입니다. 필자는 경주여행에서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마지막으로 보고 왔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져 바쁘게 설치다 보니 석탑 주변에 절반가량이 땅에 묻힌 목이 잘린 귀부 2개를 보지 못하고 왔는데 그 귀부의 등에 ‘임금 왕(王)’ 자가 새겨져 있다 합니다. 또한, 북쪽 밭에는 이곳에서 나왔던 12지신상을 한곳에다 파묻었다 하는데 어떤 모습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한 번 찾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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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보문사지 석조. 보물 제64호 절에서 물을 담아두는 돌그릇인 경주 보문사지 석조를 만나다.


경주보문사지석조입니다. 석조는 돌로 만든 수조입니다. 절에서 물을 담아두는 돌그릇을 말하는데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보문사지는 신라 시대에서 신성시했던 낭산과 명활산성 사이의 보문들에 남아 있는 폐사지로 보문사란 명문이 새겨진 기왓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에 보문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주 보문사지 주소: 
경북 경주시 보문동 848-6



보문사로 인해 오늘날까지 이곳의 지명이 보문동으로 불리고 있으며 보문사 터의 규모를 보면 부처님을 모셨던 금당 터의 부재와 삼국시대에 성행했던 동·서의 목탑 터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필자의 짧은 지식이지만 황룡사 9층 목탑은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자장율사가 선덕여왕에게 청하여 불법으로서 왜적을 막으려 9층 목탑을 완공했습니다.





그러나 그 규모와 정교함이 만만치 않아서 그런지 왜!! 백제의 장인인 아비지를 불러 완공했는지 의문입니다. 신라에서도 많은 장인이 있었을 텐데요??? 이곳 보문사지에도 그런 유의 목탑인지 알 수 없지만 실제 동·서 쌍탑으로 있었다 하니 어떤 모습이었던지 궁금합니다.



목탑이라 하면은 불상을 모시고 또한 대부분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높이의 크기였습니다. 보문사의 입구에 세웠던 당간의 받침대인 당간지주 등이 옛 보문사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문사지 석조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가로로 긴 직육면체로 생긴 돌 안쪽을 넓고 깊게 파내었습니다. 그리고 안쪽과 바깥쪽에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깨끗하며, 밋밋하고 소박한 모습입니다.

 




이 석조는 물을 빼내었던 구멍이 실제 존재 하여 수조로써 사용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논바닥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며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6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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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안리불꽃축제)제12회 부산광안리불꽃축제 보고 왔습니다. 


올해 부산불꽃축제가 지난 토요일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열렸습니다. 벌써 12회째입니다. 이제는 완전 부산축제로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모두 이틀 동안 부산불꽃축제 행사가 열렸다면 올해는 딱 하루로 축소해 불꽃축제가 열렸습니다. 부산광안리불꽃축제의 많은 관람 포인트 중에서 어디서 봐야 가장 멋진 불꽃을 볼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하다 장산 유격대를 선택했습니다. 지난 11회 부산불꽃축제는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정면으로 봤습니다. 제작년 그러니까 10회 때에 이곳에 앉아 느긋하게 불꽃축제를 즐겼던 게 기억에 남아 찾았던 장산유격대, 내가 생각하고 찾았던 관람 포인트에도 벌써 많은 분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때가 아마 불꽃 발사 2시간 30분 전이었습니다. 좋은 관람 포인트는 모두 삼각대를 설치해 놓아 역시 “아침 일찍 나온 새가 먹이를 얻는다”고 부지런 하신 분이 좋은 결과물을 얻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불꽃 자체만은 광안리해수욕장이나 금련산 쪽에서 보는 게 부산불꽃축제의 가장 좋은 관람 포인트입니다. 남들은 불꽃 사진을 간추려 가장 좋은 사진을 몇 장 선택한다지만 내가 담았던 불꽃 사진을 보면서 너무 초라하여 선택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전부다 주르르 올렸습니다.




2015/10/26 - (부산여행/2015 부산불꽃축제) 일곱 빛깔 무지개가 가을 밤하늘을 수놓았던 부산 불꽃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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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전 홍유후 설총묘.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던 신라 대문장가 설총묘 여행. 


경주 보문동에 설총묘가 있다고 해서 다녀왔습니다. 설총하면 신라 중대 문장가로 알려졌지만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원효대사이며 어머니가 요석공주로 두 분 사이에 태어났다는 것이 더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보면 뼈대 있는 신라 왕족 집안입니다. 외할아버지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태종무열왕 김춘추이며 친할아버지는 나마담날로 설총은 경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경주설씨와 순창설씨의 중시조이며 신라 10현이자 고운 최치원과 강수와 함께 신라 3문장 가로 꼽고 있습니다.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일화를 보면 출가한 요석공주는 과부가 되어 다시 궁궐로 들어와 요석궁에 머물렀습니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긴 행로로 몸도 피곤하고 하여 동굴인 줄 알고 들어가 잠을 청했습니다. 잠을 자다 원효는 목이 말라 주위를 더듬다가 마침 손에 잡히는 바가지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그 물 참 꿀맛이다”며 다시 곯아떨어졌는데 아침에 눈을 뜨고는 뒤로 까무러칠뻔했습니다. 목이 말아먹었던 그물은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이었으며 지난밤 단꿈에 쩔어 잤던 곳은 무덤 속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설총묘는 지금 이발중 ㅋㅋ



원효는 그곳에서 일체유심초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며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서라벌로 돌아와 노래를 불으며 민중 속을 파고드는 불법을 전합니다. 그러자 어느 날 원효는 색다른 노래를 부르고 다녔습니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느냐.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 “하며 불렀지만 아무도 그 노래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태종무열왕만은 노랫말을 듣고 “자기한테 여자를 주면 뛰어난 현자를 낳게 하겠다”는 뜻으로 단박에 이해하고는 과부로 있는 자신의 딸인 요석공주와 맺어줄 묘책을 짜냅니다. 원효는 김춘추가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궁궐로 향하다가 그만 문천교에서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는 바람에 입고 있던 옷이 다 젖게 되었습니다. 태종무열왕과 원효는 서로 이심전심이듯이 손발이 척척 맞았습니다.





원효와는 별 바쁜 일이 없던 관계로 태종무열왕은 온몸이 젖었는데라며 옷을 말린 후 내일 보자며 바로 원효를 요석궁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김춘추는 요석궁에서 옷만 말리라 했는데 그날 밤에 바로 사달이 났고 10개월 후에 설총이 태어났습니다. 원효는 이 일로 파계승을 자처합니다. 모든 이야기는 여기서 설하고 설총은 중국의 한자를 우리말로 표현하는 이두를 만들었습니다.



코끼리 다리를 닮은 설총묘 석상다리



이두는 한자의 음과 훈인 소리와 뜻을 새겨 우리말로 적은 것을 말합니다. 유교 경전도 우리말로 풀이하여 고려 중기까지 사용했으며 이두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전까지 우리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설총이 저술한 우화적 단편 산문인 화왕계도 있습니다. 제목도 없이 삼국사기에 실렸다가 풍왕서란 이름으로 동문선에도 실렸으며 후대에서 화왕계로 불렀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외삼촌인 신문왕이 설총에게 마음이 울적한데 이를 풀 수 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자 설총은 향락을 멀리하고 도덕을 엄격히 할 것을 우화를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신문왕은 현명한 임금답게 글로 남겨 후세 임금은 모두 이를 본받도록 했습니다. 1022년인 고려 현종 13년에 홍유후라는 시호를 추증받았으며 최치원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고 1623년 조선 인조원년에 경주 서악서원에 제향 되었습니다 크기는 지름이 15m, 높이 7m이며 흙을 쌓아 올린 반구형으로 아랫부분에는 보호돌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봉분은 작지만 꼭 신라왕의 무덤 같으며 앞에는 큰 상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돌로 위패를 모시는 자리는 흡사 돌의자 같았습니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30호이며 전 홍유후 설총묘(傳 弘儒侯 薛聰墓)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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