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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은 동서의 지리산 종주외 덕두에서 웅석봉을 잇는 지리 대종주로 흔히 태극기의 태극모양이라 지리산 태극능선이라 부른다. 지리산하면 이 지리종주로 뭍 산꾼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는데 이제 그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지리산 둘레길이 지난 525일 개통되었다. 5년전에 처음 시작된 지리산 둘레길이 이제 하나의 연결선이 된 것이다. 많은 둘레꾼들을 불러 모았던 지리산길이 이제 명실상부한 274km의 고리로서 처움과 끝이 없는 오직 시작만 있는 이곳을 최근에 개통된 둘레길 13구간을 다녀 왔다. 대축~원부춘 구간은 하동군 악양면 대축마을 입구에서 출발해 평사리 들판을 왼쪽에 끼고 악양천을 따라가다가 푸조나무 보호수~입석마을~최참판댁 갈림길~말바위~서어나무숲~상사바위~웃재~좁새바위~조운사를 거쳐 원부춘마을회관에서 마무리한다. 전체 답사거리는 8.5정도로 답사 시간은 4시간~4시간30, 휴식을 포함하면 5시간~5시간30분 걸린다.

 


 

 

 

 

 

둘레길에는 많은 이정표가 설치 되어 있는데 참고로 이정표의 빨간색 화살표는 지리산 둘레길을 시계 방향으로 가리키고, 검은색 화살표는 시계 반대 방향이다. 출발은 악양 대축마을 입구 표지석이다. '대축마을의 유래'가 새겨진 마을 표지석과 '악양 대봉감 정보화마을' 안내판이 서 있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둘레길 대축~삼화실 구간을 걸을 수 있다. 출발 지점에서부터 평사리 들판 너머 형제봉(1115.5m)이 우뚝 선 모습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원부춘으로 가는 둘레길은 최참판댁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 축지교를 건넌다. 이정표와 둘레길 안내판이 서 있는 갈림길. 왼쪽은 동정호와 최참판댁을 거쳐 오르는 토지 길이고 오른쪽은 입석마을을 거쳐 바로 오르는 둘레길이다. 토지 길이 1.7더 길다. 두 길은 입석마을 바로 위에서 만나 우리는 입석마을로 바로 가는 오른쪽 길을 택했다.

 

 

 

 

 

 

 

오른쪽에 악양천을 접하고 왼쪽으로는 평사리 너른 들판을 두고 걷는다. 이날따라 무척 바람이 심하게 분다. 정면에는 멀리 청학동의 묵계로 넘어가는 잘록한 회남재, 그 왼쪽으로 형제봉과 삼신봉 그리고 지리산의 주 능선인 영신봉으로 연결된다. 흔히 이 능선을 남부능선으로 통칭한다. 둘레길이 남부 능선을 넘어서서 원부춘으로 이어진다. 콘크리트 둑길을 10여 분 걸어가면 길이 왼쪽 마을 방향으로 휘며 악양천과 헤어진다. 200m쯤 가서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 올라가면 입석마을 표지석이 서 있는 도로다. 그 왼쪽으로 사각사각 그리는 대숲 길을 오르면 수령 300년의 보호수 푸조나무가 서 있다 마을에서는 당산목을 모신 곳으로 흔히 당산이라 부른다. 이곳에도 둘레꾼을 위해 조성된 평상과 벤치가 있다. 여름의 문턱이라 그런지 푸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며 이마의 흐른 땀을 식혀 준다. 잠시 뒤 마을회관이 있고 형제봉주막이 나오면 왼쪽 골목길로 오른다. 마을 안을 가로질러 오르면 아스팔트 포장이 끝나고 두 갈래 콘크리트 길이 나타나면 둘레길은 왼쪽이다.

 

 

 

 

 

 

 

마을을 벗어나 감나무 단지 사이로 오르면 임도길은 오른쪽으로 돈다. 최참판댁으로 돌아온 길과 다시 만나 포장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한숨을 돌리며 뒤돌아 보니 출발한 대축마을과 평사리들판 섬진강이 살짝 시야에 들어온다. 입석하제를 지나면서 깃대봉과 칠성봉, 그리고 둘레길이 넘어 오는 삼화실재와 구재봉 능선이 펼쳐진다. 그 우측 섬진강 건너 광양 백운산과 억불봉이 장쾌한 스카이라인을 긋고 있다. 보문사 표지석이 서 있는 갈림길에서는 오른쪽 길이다. 가파른 오르막이 한 동안 이어지는데 콘크리트 임도를 6~7분 오르면 마당물로 불리는 쉼터가 나타난다. 두그루의 굵은 나무 그늘에 평상과 벤치가 설치돼 있다. 이곳이 마을 주민이 논밭일을 나오면 쉬었다는 곳이라한다. 이곳을 지나면 비로서 흙길이 시작된다. 이정표에 대축 3.65, 원부춘 4.90로 표기돼 있다. 지금 오르는 둘레길은 형제봉을 오르는 등산길의 일부분으로 가파르게 능선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원부춘마을까지는 산행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3~4분 가면 길가에 선 넙득한 바위에 빨간 스프레이로 '산불조심'이라고 쓴 말바위를 지난다.

 

 

 

 

 

 

 

이 곳을 올라서면 울창한 서어나무 숲을 지난다. 주변의 나무와 확연히 달라 쉽게 구별이 간다. 그늘이라 시원하긴 해도 조망은 어려운 구간으로 지그제그 산길이 웃재까지 이어진다. 웃재 직전 왼쪽 사면에 길게 누워 있는 큰 바위가 뜻을 이루지 못한 머슴이 이곳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였다하는데 연애바위 또는 상사바위라 한다. 형제봉 주능선 위의 웃재에는 둘레길 이정표가 서 있다. 오른쪽은 신선대를 거쳐 형제봉으로 오르는 산길이고 왼쪽은 신선봉 고소산성을 지나가는 하산길이다. 둘레길은 정면으로 내려간다. 100m쯤 가면 큰 나무가 서 있는 전망대인 좁새바위가 있다. 뒤로는 높이 선 바위가 흡사의 장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후로는 산 사면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인다.

 

 

 

 

 

 

하산길이라 생각하면 큰 오산 만만찮은 오르막이 몇 차례 나타난다. 웃재의 고도가 GPS상 해발 650m 정도인데 원부춘으로 내려서기 전 가장 높은 지점이 750m가량 된다. 흙길과 바윗길을 번갈아 가며 40분 정도를 가면 길 좌우로 큰 바위의 잠겨진 문을 열고 들어가는 듯한 곳을 지난다. 5분 정도 더 가면 이정표(대축 6.21, 원부춘 2.34)가 서 있다. 이곳이 12코스의 최고점인 gps로 약750m를 가르킨다. 이제 부터는 본격 내리막길, 10여 분 돌아가니 고로쇠 물을 받는 곳인 듯 파이프가 어지러이 널려 있다. 급 내리막을 벗어나니 지난여름의 생채기들이 계곡 이곳저곳에서 도려진 모습으로 흔적이 되어 남아 있다. 큰 감나무가 서 있고 이내 물이 흐르는 계곡을 만난 뒤로는 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30여 분 정도 내려가면 너른 바위에 평상과 벤치가 있다. 바로 아래 조운사에서부터 콘크리트 임도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대축~원부춘 구간이 끝나는 원부춘마을회관 앞이다.

 

 

 

 

 

 

 

 

 교통편

대축마을로 가려면 일단 하동까지 가야 한다.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하동 가는 버스는 오전 7시부터 대략 1시간 간격으로 있다. 소요시간 2시간 30, 요금 1800. 하동에서 대축마을을 가려면 악양행 버스를 타고 가다 대축마을에서 내리면 된다. 오전 740분에 첫차가 출발하고 이후 8, 930, 10, 11, 1240분 등에 출발한다. 소요시간20. 원부춘에서 하동으로 가는 버스는 오후 35분 한 대밖에 없다. 시간 맞추기가 어려우므로 택시를 이용해 화개로 간 뒤 다시 하동이나 부산 가는 버스를 타는 것이 편리하다. 요금은 7000~8000. 하동읍으로 바로 가면 요금이 배가량 나온다. 택시 화개면 (055)883-2332, 883-2240, 하동읍 (055)882-1111

 

 

 

 

 

 

 

먹을 만한 집

 

하동시외버스터미널 오른쪽 건물에 1976년부터 자리를 지켜온 명성 콩국수가 있어 포스팅하였다. 하동에서는 유명하지만 인근의 진주 사천 광양 등에서도 일부러 이집의 콩국수를 맛보러 먼 길을 마다하고 달려온다는 명성콩국수(055-884-3312). 국수라 하기에는 면발이 굵고 칼국수라 하기에도 좀 그러하고 그 중간의 가락국수 굵기로 보면 될 것 같다. 국물이 구수한게 그야말로 걸죽하다. 콩국수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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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각 지자체에서 열을 올리고 추진하는 것이 시민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쉽게 걸을 수 있는 둘레길 조성이다. 그래서 인지 각 지자체마다 많은 둘레길이 만들어져 있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하여 가장 큰 문제로 대두 되는게 현지 분들과 마찰이다.




 

 

현지인들과 둘레꾼들에 의해 간혹 발생하는데 가장 큰 문제점은 둘레 길을 걷는 둘레꾼들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기인한다. 현지인들이 힘겹게 키웠던 농산물이 둘레꾼들에 의해 절취가 되는 상황인데 어릴 때 가끔 하여 왔던 참외서리니 수박 서리니 하는 정도로 생각을 해서 하는 애교 수준으로 받아 넘겨 줄 것으로 쉽게 생각을 한다.

 

 

 

 

 

 

힘들게 가꾸어 온 농산물을 하루아침에 뜯어 가 버리니 조금씩 농사를 짓는 현지인들로서는 얼마나 황당할까. 그래서 자구책으로 나온 게 황당한 경고 문구이다. 얼마나 답답하면 이런 문구를 붙일까. 얼마나 많은 분들이 절취를 하길레 이리 지리산 둘레길에 두 눈을 부릅뜬 우수광 스러운 ... ㅎㅎ

 

 

 

 

 

항상 감시를 하고 있다는 암시를 보여 주는 그림에다 애서 가꾼 남의 농산물 가져가도 됩니까.’라는 애교 섞인 문구를 둘레길에 붙혀 놓았을까. 둘레길을 걷다 만나 보니 당황스러웠다. 지금 이 사진을 찍기 위해 농작물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현지인들이 보면 탐탁지 않게 생각을 하는게 아닌지... 둘레꾼이나 산을 찾는 산꾼 그리고 한적한 마을 길을 걷는 여행자는 아마 위와 같은 행동을 하시는 분이 없을 것이지만 꼭 눈으로만 자연을 보고 느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여행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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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남창역사

등록문화재 제105호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남창리42-1

여행을 다니다 보면 시골의 한적한 역사의 건물에 마음을 빼앗겨 본적이 있을까. 사실 요즘 역사의 건물들을 보 면은 예전의 건물들을 헐고 새로운 역사의 건물로 거듭나고 있다. 마음속 어느 한 켠에 간직하였던 옛 역사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이곳 동해 남부선을 따라 많은 건물들이 역사의 흐름속에 사라지고 이제는 몇 안 되는 건물이 등록문화재란 이름으로 보존이 되고 있어 다행 아닌 다행으로 여겨진다. 울산의 남창역사도 일제 강점기인 1935년에 12월 16일에 보통 역으로 출발을 하였다.

 

 

 

 

 

 1978년에 온산공단으로 온산선을 내면서 역을 확장한 것 말고는 시골 역사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남창역사의 특징은 시골 역사이면서도 건물 후 면부 지붕의 중앙부에 두 개의 박공을 중첩시켜 건물의 무게감을 더 주었고 전체 건물 형태에서 정면임을 나타낸 것으로 보여 진다.

 

 

 

 

 

 

 

 일제 강점기 때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고 한다. 2002년에 남창 역사를 전면 보수를 하였는데 그때도 기본 틀은 유지를 하면서 평 슬레이트 지붕에서 맞배지붕으로 개량을 하고 창호 및 창문틀을 교체하였다 한다.

 

 

 

 

 

 

보수 정비로 인하여 건물 부분 부분의 건축 재료는 바뀌었지만 평면의 형태는 남창역사 준공당시의 모습에서 변형이 거의 없고 지붕을 빼고 벽면의 재료도 바뀌었지만 건립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건축물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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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을 하다보면 그 지자체 단체장의 자연에 관한 상식을 옅볼 수 가 있다. 쉽게 말하면 단체장의 자연보호 수준을 볼 수 있는데 양산과 울산광역시의 단체장은 자연을 생각하는 마음은 눈 곱 만큼도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번에 답사한 대운산은 실직적으로 보면 너른 품은 부산 울산 양산이 경계를 이루고 있지만 최고봉의 정상은 양산과 울산이 서로 양분을 하고 있다. 서쪽의 양산은 동쪽의 울산시 보다는 산 세면이라던지 계곡미에서는 좀 떨어지지만 천성산과 함께 많은 시민들이 사랑하고 아끼는 산인데 최근에 이 대운산을 심한말로 걸레로 만들어 놓았다. 산 전체를 임도를 돌려 사과 껍질 깍듯이 산을 헤집어 놓아 경악을 감출 수 없는데 이번 여름철 장마에 온전하게 대운산이 남아날지 심히 의심스러우며 반대편의 울산쪽은 또 어떠한가. 공업 도시 답 게 이곳은 온 산을 하나의 첨단시설을 덮어 쓴 로봇 산으로 만들려는지 대운산 정상을 위시하여 2봉으로 내려서는 능선길에다 돈을 얼마나 발라 놓았는지 쉽게 말하면 등산화를 벗어 두고 실내화로 갈아 신고 다녀야 할 형편이다. 얼마나 산을 보호 한답시고 이런 식으로 데크로 산길 전체를 덮는지 모르지만 그런다고 등산로가 보호가 되는지 묻고 싶다. 데크 밑을 보면은 그 곳의 환경은 생각을해 보았는지 또 아니면 토사 유출을 막는다고 옆의 나무를 잘라 나무계단을 막는 등 너무 쉽게 자연을 보호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대운산의 산행은 철쭉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요즘 변덕이 심한 날씨로 인해 철쭉 개화시기를 맞추기가 힘이 든다. 오늘 사진은 일주일 전 취재 산행임을 밝히며 이번 주의 대운산 산행에서 철쭉을 조금은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기대를 해본다. 전체적인 산행 코스는 양산 서창의 그린빌아파트를 출발해 전망대 산불초소~전망 바위봉(GPS 388m)~운동시설~산불지역~대추남만디(대추봉·634m)~범솔밭 임도 삼거리~헬기장 삼거리~대운산 정상~(헬기장 삼거리)~용당동 갈림길~상대봉 입구~대운산제2·자연농원 삼거리~안부 갈림길~무명폭포를 거쳐 울산시 울주군 온양읍 내광마을에서 마무리한다. 이번 답사의 총 산행거리는 11정도로 순수 산행시간은 4시간30~5시간, 휴식시간을 포함하면 5시간~5시간30분이 걸린다.

 

 

 

 

 

 

 

 

 

 

산행은 그린빌아파트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면 오른쪽이 그린빌, 왼쪽이 한내들 아파트이다. 한내들아파트와 그린빌아파트 사이로 200m가량 올라가면 도로와 만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30m 가면 왼쪽으로 넓은 흙길의 임도가 시작되는 곳에 이정표(대운산 정상 4.3, 약수터 0.2)가 서 있다. 너른 길을 따라 200m 가면 벤치가 있는 곳에서 작은 계곡을 건넌다. 약수터는 이곳 물가에 있다. 계곡을 건너 산길이 이어진다. 체육시설물이 들어 선 곳을 지나면 주 능선에 올라선다. 오른쪽은 명곡방향 또는 푸르지오 아파트로 내려 가진다. 여기서 왼쪽으로 올라간다. 곧 산불감시초소가 서 있고 건너편 천성산과 웅상읍의 모습이 시원하다.

 

 

 

 

 

 

 

 

 

서창 주민들이 많이 올라서 인지 여기저기 많은 길이 나 있다. 다 만나는 길이라 신경 쓸 것이 없다. 그저 능선 따라 완만한 경사를 오른다 생각하면 된다. 삼각점(경남-188)이 설치 된 곳에 올라서는데 소나무의 모습들이 굉장히 특이하다. 잠시 뒤 바위 봉우리(388m) 전망대다. 정면으로 대운산에서 천성산으로 연결되는 용천북지맥과 시명산이 보인다. 발아래 깊은 골은 시명골로 명곡으로 흘러간다. 여기선 직진해서 내려간다. 이곳을 지나면 임도를 만나고 오른쪽 운동기구 방향을 보며간다. 운동시설을 지나면 바로 왼쪽으로 쌍 무덤이 보인다. 이곳에서 쌍 무덤을 왼쪽을 돌아 능선을 따라간다. 임도를 따라가도 나중에 다시 만나는데 범솔밭임도 삼거리로 올라가진다. 이번 산행에서 최고의 오르막이 기다린다. 10여 분 오르면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산불의 흔적이 시작된다. 한동안 이어지는데 급한 오르막이며 산불지역을 보니 화가 치미르 오른다. 사소한 부주의에 수십년 아니 수백년 된 아름드리나무들이 고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양산시 웅상읍과 천성산을 볼 수 있는 전망대를 지나면 대추남만디 정상 직전 갈리길에 오른다. 여기서 왼쪽 대추남 만디에 잠시 올라갔다 내려와야 한다. 이정표 옆 표지목에 친절하게 대추남(나무)만디(봉우리)라고 뜻을 풀어놓았다. 서창 쪽으로 조망이 트이지만 올라올때의 조망과 별 차이가 없다. 여기서는 서창 대동아파트와 용당동으로 하산할 수 있다. 대운산 방향은 다시 올라왔던 길을 내려가 직진한다. 여러 갈래로 뻗은 가지가 특이한 소나무를 지나고 5분이면 이정표가 선 시명사 삼거리다. 오른쪽은 시명사(1.5) 방향이고 답사로는 왼쪽이다. 다시 임도 끝 지점과 만난다. 119 표지목(대운산 2-19)이 있는 곳에서 산길로 접어든다. 이곳을 지나면 갈림 길이 나오고 우측으로 바위 쉼터가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조금전 왼쪽 갈림길과 다시 만나고 또 다시 갈림길이 나오면 왼쪽으로 틀어 가면 세 갈래 임도가 만나는 범솔밭 삼거리다.  이곳이 쌍 무덤 갈림길에서 임도를 따라 올라 오면 여기서 만난다.  시명산 산행과 시명사로 하산하는 길이 오른쪽 임도 표지석 뒤로 열려 있다. 정면으로 올라가는 임도는 대운산 정상 바로 아래에서 끝난다.

 

 

 

 

 


 

 

 

 

 

 


 

주등산로는 임도를 몇 차례 가로지르면서 이어진다. 곧 임도를 가로질러 간다. 침목 계단을 오른 이후로는 임도를 오른쪽 아래에 두고 정상 아래까지 산길 따라 올라간다. 10여 분 올라가면 전망대와 용당동(3.8) 이정표가 선 삼거리다. 직진이다. 임도는 여기에서 끝나고 헬기장이 나타난다. 둘레에 연분홍 철쭉이 피어 있는 대운산 2봉 갈림길이다. 직진하여 나무 계단 을 100m 올라가면 대운산 정상이다. 올라가는 내내 좌우로 화사한 철쭉이 터널처럼 에워싸고 있다. 표지석을 둘러싼 정상부 전체가 나무 데크로 덮여 있다. 답사로는 올라온 길을 되돌아 헬기장까지 내려간다. 오른쪽 대운산 제2(1.6) 방향으로 접어든다.

 

 

 

 

 

 

 

 

 

잠시 나무 계단을 내려서서 200m가량 가면 용당동(4), 탑골, 대운산 자연 휴양림 삼거리다. 직진해서 계속 내려간다. 목재 데크 길이 한동안 이어진다. 이정표가 선 삼거리다. 답사로는 정면의 데크를 오르면 된다. 다시 상대봉 입구 철쭉제 행사장을 지난다. 행사장 근처엔 약수터가 있다. 잠시 뒤 삼거리다. 직진하면 제2봉이고 답사로는 왼쪽 '대운산자연농원·휴휴사' 방향의 임도를 따라간다. 구불구불한 임도 길이지만 울울창창한 나무들로 인해 지겹지 않으며 20여분이면 안부 갈림길이다. 이곳이 일명 상대봉(668m)에서 바로 내려서면 만나는 지점이다. 대운산자연농원으로 내려가는 임도에는 콘크리트 포장이 시작되게 되는데 이곳에서 맨 오른쪽 임도형의 소로를 찾아 들어가야 내광마을로 갈 수 있다.

 

 

 

 

 

사면을 따라 난 길을 10분가량 가다 보면 길이 오른쪽으로 90도 꺾이면서 내려간다. 이곳을 벗어나면 오솔길로 연결되고 우측으로 계곡이 나타난다. 광청골 상류로 알려지지 않은 계곡이지만 연이은 폭포와 소가 장관을 이룬다. 경사지고 미끄러운 길을 조심스레 10분 정도 내려가면 오른쪽 아래 높이 5m가량의 무명폭포가 바위 뒤에 숨어 장관이다. 이곳을 지나면 보타사로 오르는 포장도와 만난다 우측으로 내려가면 보명사를 지나고 한적한 도로를 따라 35분 내려가면 내광마을 앞 큰 도로다.

 

 

 

 

 

교통편

도시철도 1호선 노포동역 앞에서 301번 시내버스를 이용해 서창의 '그린빌아파트' 정류장에 내리면 된다. 40분 소요.

 

날머리인 내광마을에서는 507번 울산 시내버스를 타고 남창까지 가서 부산행 열차 편으로 갈아타는 것이 편리하다. 내광마을 출발은 오후 145, 445, 810(막차)으로 '남창 시장앞에서 내리면 울산에서 해운대행 버스를 이용해도 되고 또는 남창역까지는 금방이다. 445분 버스 출발 시각에 맞춰 산행을 마무리하는 게 좋다. 남창역에서 부전역으로 가는 열차는 오후 527, 69, 740분에 있다.

 

 

 

 

 먹을 만한 맛집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남창역, 그 앞에는 남창 시장이 있다. 남창 옹기종기로 이름을 바뀌었다는곳, 이곳은 예로부터 외고산의 옹기마을에서 구워 온 옹기의 집산지로 인해 특화시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장터의 이름도 최근에 옹기종기란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곳 남창 우시장은 140년 전통의 선지국밥으로 지금도 약 15군데가 성업을 하고 있다. 소의 부산물로 만들어 지는 남창의 선지국밥은 그 명성이 자자하여 일부로 먹으러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골 전통시장도 둘러 볼 겸 겸사겸사 여유를 가지고 가면 좋을 것 같다. 남창 시장에 왔어 먹지 않고 가면 후회한다는 선지국밥. 그 많은 국밥집 중에서 전통의 선지 국밥집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깔끔해 보이는 장터국밥집으로 찾아 갔다.

이름처럼 이곳이 옛 남창장터이니까 이름대로 옛날부터 해온 곳이 아닐까 싶어 전에부터 찾아간 집이라 이번에도 역시 고고 ... 일행 중에 선지국밥을 안 먹는 분이 있어 소머리 곰탕과 함께 주문을 하였다. 딸려 나오는 밑반찬은 부추와 김치 등으로 깔끔하니 먹을 수 있다.

선지 특유의 냄새로 인해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데 선지의 효능은 예로부터 알려져 있어 몸을 도운 다는 의미로 남창의 맛집 선지국밥 한 그릇을 하고 돌아오면 좋을 것 같다. 먹고 난 뒤 남창 시장도 한바퀴 돌고 하면 더욱 풍성한 나들이가 될 것이다. 남창시장 장날은 3일과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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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자매담에서 찍은 반영 사진입니다. 어느쪽이 윗부분인지  좀 갈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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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풍산행과 억새산행은 가을 산행의 2대 백미다. 특히 억새산행만 놓고 본다면 부산을 비롯한 영남의 산꾼들은 그야말로 복 받은 사람들이다. 부산 시내만 살펴 봐도 승학산 백양산 금정산 철마산 등 가볍게 훌쩍 다녀올 만한 억새산행지가 즐비하다. 게다가 조금만 발품을 팔면 신불산 영축산 간월산 천성산 화왕산 경주 무장산 등 전국적 명성의 억새산행지를 다녀올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영남알프스 일대는 전국 최고의 억새평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원도 정선의 민둥산이나 철원의 명성산, 전남 장흥의 천관산, 광주 무등산 등을 모두 가봐도 가을의 신불평전이나 천황산 사자평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또한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산꾼들은 보다 새로운 억새명산을 찾아 헤매기 일쑤다. 억새군락지의 규모 면에서야 조금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처음 밟아보는 산에서의 새로운 느낌이 충분히 그 아쉬움을 상쇄해 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새로운 느낌의 억새산행지를 찾는 부산 울산 경남 산꾼들의 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고싶은 마음으로 '근교산&그너머' 취재팀은 이번 주 충남 제일의 억새산행지로 알려진 오서산(烏棲山·790.7m)을 찾았다.




■ 충남 제3위 봉우리… 10㎞ 남짓 4시간 걸려

   
충남 보령시와 홍성군의 경계에 우뚝 솟은 오서산은 서해 낙조를 감상하기 좋은 포인트로 알려져 있지만 정상부 능선에 펼쳐진 억새밭으로 인해 산꾼들에게는 가을철에 가장 인기가 높은 산이다. '근교산&그 너머' 이창우 산행대장이 정상 주변 억새밭을 통과하고 있다.
충남 보령시 청소면과 홍성군 광천읍의 경계를 이루는 오서산은 서해안의 산 답게 규모가 육중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둔산(879m) 계룡산(847m)에 이어 충청남도에서 세 번째로 높다는 점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 특히 계룡산 대둔산 등이 내륙으로 치우쳐 있는 데 반해 오서산은 천수만이 코 앞에 내려다 보이는 해안에 위치해 있고, 야트막한 바닷가 산들에 비해 월등히 높기 때문에 옛날부터 서해 중부해안을 항해하는 뱃사람들에게는 '서해의 등대산'으로 통한 산이다.

따라서 정상부에서 바라보는 서해 일몰과 천수만의 풍광이 더 없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특히 정상 주변에서 오서정에 이르는 2㎞ 남짓한 능선에 넘실 대는 억새의 물결은 서해의 잔잔한 파도, 시원한 바람, 새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새롭고도 특이한 가을산의 풍경을 연출한다. 부산 기준으로 왕복 700㎞에 달하는 먼 거리이기는 하지만 원거리 당일 가을 산행지로 충분히 가볼만 한 산이다. 오서산이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까마귀와 까치가 많이 서식했다고 해서 명명됐다. 요즘은 까마귀는 잘 보이지 않고 까치는 간간이 눈에 띈다.




산행은 보령시 청소면 성연리 성연주차장에서 출발해 이곳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로 진행된다. 총거리 10㎞,산행시간은 휴식 포함 4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전세버스를 이용하는 산악회들은 주로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에 위치한 정암사(淨岩寺)에서 출발, 보령 관내인 성연리 주차장으로 하산하는 코스를 애용하지만 취재팀은 자가용 이용자의 차량 회수 용이성 등을 고려해 원점회귀 코스를 잡았다.



■ 정상~오서정 2㎞ 억새능선 걷는 맛 일품

   
산행 기점인 성연리 성동마을의 거대한 은행나무.
주차장에 있는 산행 안내도를 한 차례 훑어 본 후 성동마을 진입로를 따라 오른다. 인근에 칠갑산이 있어서일까. 이 마을에도 콩밭이 많다. 하지만 철이 철인지라 '콩밭 메는 아낙네'는 잘 보이지 않는다. 키 크고 둥치 굵은 은행나무 아래를 지날 때 어엿한 풍채를 자랑하는 육산(肉山)인 오서산 일대가 병풍처럼 둘러 서 있음을 알게된다. 10분 후 마을안 갈림길에서 '등산로(시루봉) peak 3.1㎞' 이정표가 가리키는 우측으로 길을 잡는다. 나중에 하산하게 되면 이 지점에서 다시 합류하게 된다는 점, 미리 알아두자. 간이 매점을 지나고 서서히 마을을 벗어나 오르막이 시작된다. 울창한 밤나무밭을 통과해 오르면 임도를 만난다. 임도를 가로질러 '시루봉 0.8㎞' 이정표를 보면서 오르는 길은 참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짙은 숲길. '국제신문 근교산 취재팀' 리본을 본 인근 산꾼들이 하산하면서 "아유, 반갑구먼유. 인터넷으로 기사 잘 보고 있는 팬이어유. 부산서 여기까지 참 멀리도 왔네유. 산행도 취재도 즐겁게 하고 가세유"라며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반가움을 표시한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비교적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15분 후 만나는 갈림길에서 이정표 상 '오서산 정상 2.3㎞' 방향으로 15분만 더 오르면 해발 559m인 시루봉이다. 어느새 이마와 등줄기에 땀이 흥건하다. 시루봉을 지나 정상까지는 이제 완만한 오르막 능선길이어서 크게 힘든 구간이 없다. 정상에 가까워 질수록 키 큰 나무들은 사라지고 주변 풍광이 시원하게 드러난다. 시루봉에서 출발해 30분쯤 가면 무인산불감시카메라가 설치된 봉우리를 지난다.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국립 오서산자연휴양림으로 하산 할 수 있지만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와 있는 정상을 향해 능선길로 직진한다.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인 억새의 향연이 펼쳐진다. 서해를 넘어 온 바람에 몸을 실은채 이리저리 춤 추는 억새가 장관이다.





   
시루봉에서 정상으로 향하다 뒤돌아본 풍경.
3분 후 닿은 오서산 정상에는 높이 2m 안팎의 큰 정상석과 그보다 조금 작은 정상석 2개가 나란히 서서 산 아래 천수만을 바라보고 있다. 서쪽 보령 방향은 천수만과 원산도 등 서해안의 크고 작은 섬들이, 동쪽은 고추로 유명한 청양군의 농촌마을들이 훤하다. 진행 방향 능선을 따라 시선을 좇아가면 멀리 오서정 자리에 설치된 전망데크가 보인다. 능선을 따르는 길은 흔들리는 억새를 친구 삼아 신나게 내달릴 수 있는 구간이다. 5분 후 금북정맥에 합류되는 갈림길을 만난다. 우측으로 가면 공덕고개로 내려서게 되지만 취재팀은 '정암사 2.5㎞' '오서정 1.0㎞' 이정표를 따라 정면 바위 왼편을 비켜 직진한다.






■ 천수만 등 서해 바다 바라보는 조망도 일품

   
오서산 정상에서 주위를 돌아보면 사방 거칠 것 없다.
10분 후 '성동마을 2.4㎞'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을 지나 좀 더 가면 쉰질바위 갈림길을 통과한다. 다시 7분 후 '성연 용못' 갈림길에서 잠시 멈춰서 지도를 확인한다. 직진한 후 오서정 전망데크에 들렀다가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와서 왼쪽 성연 용못 방향으로 하산해야 하는 주요 갈림길이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부터 3분 후 닿는 오서정 전망데크에 이르는 구간의 억새밭이 정상 부근에 비해 훨씬 더 풍성한 느낌을 주고 주변 풍치도 빼어난 느낌이다. 전망데크에서 직진해 왼쪽으로 휘어지는 능선길을 따라 내려 서면 정암사까지 가거나 던목고개를 거쳐 아차산까지 갈 수 있다.

전망데크에서 다시 갈림길로 돌아오면 본격적인 하산이다. 잠시 후 돌탑을 지나 10분쯤 가면 갈림길을 만나는데 무조건 직진해야 한다. 유순한 산길은 마치 산책로를 걷고 있는 느낌이다. 30분 후 화장실과 산행안내도가 서 있는 문수골 임도에 닿으면 직진하지 말고 임도를 따라 왼쪽으로 꺾는다. 신암터마을의 '오서산 시남산장' 표지석 앞을 통과하면 임도 갈림길을 만나는데 우측 주차장 방향 임도를 따른다. 10분쯤 가면 출발할 때 거쳤던 성동(성골)마을 은행나무 인근 갈림길에 닿는다. 천수만 너머 서해 바다로 떨어지는 태양의 불그스럼한 빛그림자가 사위를 감싼다.



◆ 떠나기 전에

- 1박2일로 '신비의 바닷길' 무창포 가 볼만

   
오서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1.5㎞가량 떨어진 오서정 주변의 억새밭이 가장 풍성한 느낌을 준다.
충남 보령은 사실 부산 시민들로서는 당일에 다녀오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오서산 산행을 계획할 때 아예 1박2일 정도로 계획을 짜서 하루는 산행을 하고 하루는 여행을 해 보는 것도 좋다. 보령은 여름철 머드축제로 유명하지만 '서해안의 해운대'라고 불리는 대천해수욕장도 유명하다. 또한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신비의 바닷길 현상이 일어나는 곳 가운데 서해안에서 최고로 꼽히는 무창포해수욕장도 좋다. 바닷길 갈라지는 현상은 여름철이 아닌 계절에도 지속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매력적인 볼거리가 될 듯하다. 매월 음력 보름날과 그믐날을 전후 해 하루 2~3회씩 해변에서부터 석대도까지 1.5㎞의 바닷길이 열린다. 바닷길을 따라가며 게 조개 등을 잡아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 바닷길을 볼 수 있는 날짜와 시간은 보령시 문화관광홈페이지(http://ubtour.go.kr/index.jsp)를 통해 미리 확인할 수 있다.





◆ 교통편

- 대중교통 이용 불편, 편도 4시간 잡아야



산행 기점인 보령시 청소면 성연리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당일 산행을 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 낫다. 자가용을 이용하더라도 고속도로를 5차례나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다소 복잡하다. 우선 대구부산고속도로를 이용, 동대구에서 경부고속도로로 옮겨 탄 후 대전의 회덕분기점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탄다. 6분 후 유성JC에서 당진대전고속도로로 갈아탄 후 31㎞쯤 가서 서공주JC에서 다시 서천공주고속도로를 타고 청양 서천 방면으로 간다. 20㎞쯤 가서 만나는 청양IC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간 후 학암삼거리에서 정산 공주 방면으로 우회전, 4㎞쯤 가다가 서정리사거리에서 칠갑산로를 보면서 청양 보령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3㎞쯤 가서 천장삼거리에서 청양 보령 방면(칠갑산로)으로 우측 도로를 타고 12㎞쯤 간 후 탄정삼거리에서 보령 대천해수욕장 방면으로 청양우회로를 타고 좌회전한다. 36번 국도다. 이후 11㎞쯤 가다가 화성면쪽 우측(강고지1길)으로 빠져나가 610번 지방도로를 타고 화성면 소재지로 들어선다. 화성우체국 인근 화성삼거리에서 화강-신산로 청소방면으로 우회전(610번 지방도), 6.5㎞쯤 가다가 용두삼거리에서 오서산 청소 방면으로 우회전, 4㎞쯤 가면 주차장에 닿는다. 4시간 소요.



문의=생활레저부 (051)500-5169,
  • 국제신문
  •  이창우 산행대장 010-3563-0254
  • 이승렬 기자 bungse@kookje.co.kr




  • 여기로 들어가시면 본인이 촬영한 오서산 억새산행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200&key=20111014.2202819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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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피는 동백섬에 봄은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너무나 유명한 대중가요의 한 대목이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노래 가사에도 등장하는 오륙도는 부산의 관문이자,
    부산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그래서 서면로타리의 조형물에도 오륙도가 들어가 있었는데 지금은 교통의 급격한 증가로 철거가 된 후 박물관에 전시를 하고 있다 한다.
    그만큼 부산 사람들에게는 오륙도를 부산의 대표 상징물로 여기고 있다.




    오륙도는 용호동 앞바다에 떠 있는 여섯 개의 바윗섬을 말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다섯개의 바위섬인데, 그래서 오륙도인가.
    그중 맨 좌측의 섬이 썰물때는 우삭도로 하나의 섬이 되지만 밀물때는 방패섬과 솔섬으로 나누어져 두 개로 보이게 된다하여 오륙도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 산천조’에는 현재의 오륙도를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절영도(현 영도)의 동쪽에 있으며 동쪽에서 보면 여섯 봉우리로 보이고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로 보인다하여 오륙도라 부른다고 정의를 하고 있으며 보는 방향에 따라 섬의 숫자가 달라 보인다 하였다.



    오륙도는 육지에서 가까운 것부터 우삭도인 방패섬과 솔섬,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으로 불리며 12만년전에는 육지에 붙어 있는 하나의 작은 반도 였다 한다.
    오랜 침식 작용과 거센 파도에 의해 육지에서 분리 되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오륙도 중에서도 가장 높은 섬은 송곳섬이며 굴섬은 여섯섬 중에서 가장 큰 섬으로 굴이 있으며 굴안에서는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물이 천장에서 떨어지고 있다.
    등대섬은 밭섬으로 부를 정도로 윗 부분이 평탄하였는데 등대가 세워지고 부터는 등대섬으로 부르고 있다.




    사실 오륙도를 가장 잘 볼 수 잇는 곳은 어딜까. 용호동의 이기대와 신선대 쪽이 아닐까 싶다.
    지금 용호동의 SK 아파트 앞에는 해맞이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각종 꽃들이 피어 오륙도와 함께 장관을 연출하며 주민들의 쉼터로 제공되어 많은 시민들이 휴식을 위하여 이곳 해맞이 공원을 찾고 있다.
    이곳에서 보는 오륙도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섬으로 보인다.
    일자로 널어서 있는 섬들이 서로 겹쳐져 있기 때문이며 그래도 신선대에서는 아쉬운대로 오륙도의 면보를 볼 수 있지만 너무 멀리 보이는 것이 아쉬움이라면 무리일까.

    명승 제24호

     

    지하철 경성대부경대역에서 택시를 이용하거나 마을버스 또는 시내버스131번을 이용하면 된다.




    가족끼리 해맞이 공원에 나온 시민들의 모습

    벌써 코스모스가 핀 해맞이 공원으로 오륙도와 함께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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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하면 빼 놓을 수 없는 분이 있다. 이곳 강진에서 18년 동안 만덕산 아래에다 초당을 짓고 목민심서등 많은 저서를 남긴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유배지이기 떼문이다. 그를 신임하던 정조가 승하하자 1801년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순조에 의해 강진으로 유배되어 외가인 해남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에서 유배가 풀렸던1818년 까지 머물며 제자를 가르키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한다. 목민심서,경세유표, 흠흠신서 외에 60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하니 이곳 다산초당은 그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곳이다.

     





    다산의 유배생활중 그의 스승이자 제자이기도 한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남다른 교분을 쌓았다. 그 교분을 이어준 길이 현재 천일각과 동암사로 내려오는 800여m의 오솔길로  다산이 혜장선사를 만나기 위해 오르던 길이다. 길 옆 한줌 흙과 풀 한포기를 사랑했던 다산. 이 길 옆에는 현재 야생차밭과 천연기념물인 동백숲이 그의 흔적을 대신하고 있다. 동백꽃이 뚝~뚝~ 떨어 질때 다산은 혜장선사를 만나기 위해 이길을 걷고 있지 않을까?....

    천연기념물 동백숲






    '천일각'은 '하늘 끝 한모퉁이'란 뜻으로 천애일각을 줄인 뜻이다. 다산의 유배 생활때는 없던 건물이며 1975년 강진군이 건립하였다. 승하하신 정조대왕과 그의 형 정약전이 흑산도에 유배를 가 있을 때 이곳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그의 마음을 달랬을 것으로 추측을 하여 정자를 세워 다산의 추억을 떠 올리게 하였다.



    '송풍루'라 불리는 '동암'에다 다산이 저술을 하기 위해 읽은 책 2000여권을 보관했다 한다. 그의 유배 생활 대부분을 여기에서 보내며 그의 저술인 목민심서도 여기서 집필을 하였다 한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복원을 하였고 현판의 글씨인 보정산방과 다산동암은 추사의 친필과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다산초당은 해남 윤씨에서 거처를 제공한 장소로 해남윤씨 윤단의 산속 정자로 정약용과 교분을 나누면서 그의 거처로 제공을 하였다 한다.이곳에서 다산은 제자를 가르고고 목민심서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1957년 다산유적 보존회가 복원을 하면서 초가를 걷어 내고 기와를 얹었는데 다시 초가를 얹어 본래의 모습되로 복원을 한다하니 하루 빨리 원래의 모습이 되었어면 한다. 

    다산초당 오른편에 작은 연못이 있다. 연지석가산으로 연못안에 돌로 쌓은 작은 산이다. 연못은 다산이 오기 전 부터 있었다하며 다산이 바닷가의 돌을 줏어와 연못에다 돌을 쌓아 작은 산을 만들고 잉어를 키웠다 한다. 이 잉어로 하늘의 날씨를 알아 내었고 유배가 풀려 난 후에도 제자들에게 잉어의 안부를 물었을 정도로 귀히 여겼다한다 . 



    다조로 다산이 이곳에 거처를 정하기 전 부터 있었던 돌로 약천의 물을 떠와 솔방울로 불을 피워 차를 끓였던 부뚜막으로 사용을 하였다 한다. 다산초당의 3경


    약천으로 다산이 초당뒤 촉촉이 습기가 베인 곳을 직접 파 만들었다는 샘으로 이물을 끓여 차를 마섰다 한다. 다산은 약천의 물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하였다,다산초당의  제2경


    유배가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기전에 다산이 직접 새겼다는 '정석' 글자로 자신의 성인 丁자만 따서 새겨 놓았다.





    그길을 따라 내려오면 죄우로 대나무를 잘라 펜스를 설치하여 운치를 다하고 먼저 만나는 서암은 지금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지붕이 곧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어 안타깝다. 서암은 윤종기등 18명의 제자가 머물며 차와 벗하며 학문을 연구하는 뜻으로 '다성각'이라 불렸다 한다 1808년에 지어진후 잡초에 묻혀 폐허가 된 이곳을 강진군에서 1975년 다시 복원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산초당을 내려 오는 길은 수림의 길을 찾아 내려 오는 길이다. 바람소리도 정겹게 들리는 오솔길을 따라 올라서면 먼저 산길에 뱀이 서로 몸을 꼬아 지옥의 형벌을 받는 느낌인 뿌리의 길과 만난다. 주변의 수백년된 소나무의 뿌리가 땅 위에 엉키고 설키고 하는 모습 또한 볼거리이다. 시인 정호승은 이곳 소나무의 뿌리를 보고 시를 남겼다.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교통편
    부산에서 남해고속도로를 이용, 순천IC에서 내린 후 시내를 통과해 순천만 방향으로 가다가 2번 국도를 만나면 보성 벌교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10분 후 삼거리에서 다시 보성 벌교 방향으로 좌회전, 계속 2번 국도를 타고 강진읍까지 간다. 강진읍 평동교차로 램프에서 다산초당 안내판을 보면서 우측으로 내려선 후 해남 진도 방향으로 좌회전, 18번 국도를 탄다. 1.6㎞쯤 가서 만나는 호산교차로에서 다산초당 백련사 방향으로 좌회전, 1㎞가량 가다가 기룡교를 지나고 강진만의 철새 전망대 그리고 백련사 입구,  다산초당 입구인 덕남면 만덕리 귤동마을이다. 강진콜택시(061-434-6161)


    먹을만한집

    강진에는 한정식이 유명하지만 그래도 한정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숯불로 돼지고기를 구워 나오는 집이 있다. 모든 그릇은 강진이 도예의 고장 답게 청자인 도자기에 음식물이 담겨져 나온다. 강진읍 영파리 소재 청자골식당(061-433-7404)은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감칠맛 나는 숯불 돼지고기 정식을 먹을 수 있다. 남도 특산 홍어와 싱싱한 상추가 곁들여져 봄철 입맛을 북돋운다. 2인분2만원,3인분2만천원, 4인분2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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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사는 후백제를 개국한 견훤 빼 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경상도 상주땅의 가현현에서 농민이었던 아버지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는 광주북촌의 부잣집 딸과 지렁이와의 사이에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어 호족의 집안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신라말에 나라의 기강이 헤이해지고 가뭄과 기근으로 전국에 농민의 반란이 자주 일어 났다. 이때를 틈타 견훤이 자신의 사병을 동원하여 무진주(현 광주)를 공격하여 무진주를 함락하고 완산(현 전주)주도 공격하여  도읍을 완산주로 정하고 스스로 백제의 왕이라 불렀다.
    세력을 점차 넓혀 신라와 대적을 하고 신라와 접경지역을 함락하여 그 위세를 떨쳐 이윽고 927년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게 된다.
    그 후 고려 왕건과 신라의 공산전투에서 치열한 싸움을 하여 왕건을 패하게 하고 신숭겸장군의로 인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왕건 군사와 안동에서 최후의 결전을 하지만 안동전투에 패한 견훤은 국운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전주로 돌아온 견훤은 왕이계승을 첫째인 신검에 주지 않고 네째 금강에게 왕위를 물여줄여고 하니 신검과 둘째인 양검,용검이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살해하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 미륵전 지하에 유폐시키니 견훤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망을 쳐 왕건에게 투항을 한다.
    견훤은 자신이 세운 백제를 정벌 할 것을 권하며 선산에서 신검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여 왕건에게 패하고 양검과 함께 왕건에게 투항을 하니 삼국통일이 이루어진다. 금
    산사의 돌무지개문은 견훤이 신검에게 유폐될때 이문으로 통해 금산사로 들어 갔다합니다. 비운의 석문은 그 때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월의 흐름 앞에는 위풍당당한 돌무지개문도 어쩔 수 없는지 복원공사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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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악산 금산사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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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금산사계곡에 걸쳐 있는 해탈교를 올라서야만 금산사 경내로 들어 갈 수 있다.
     세속의 모든 번뇌와 찌꺼기를 벗어 버리고 오라는 뜻 인지 그 이름 또한 의미가 크다. 먼저 반기는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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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문이다.
    속새의 인간은 금강이란 예기만 들어도 무엇인가?
    특이하고 깨끗함이 있어 근접하기가 힘이 들 것으로 생각한다.
    야생화에도 애기나리보다 금강애기나리, 금강초롱등 수많은 꽃에도 금강 이름만 붙어도 한층더 고귀함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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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밀적금강, 나라연금강, 문수동자, 보현동자 의 모습이 수호신 처럼 모서져 있다.
    아쉬움은 앞으로 그물망이 쳐져 있어 보는 이를 안타갑게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밀적금강:금강의 무기를 가지고 부처님을 경호하는 야차신입니다.항상 부처님에게 친근하여 부처님의 비밀한 서적을 들으려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밀적금강:금강의 무기를 가지고 부처님을 경호하는 야차신입니다.
    항상 부처님에게 친근하여 부처님의 비밀한 서적을 들을여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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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연 금강:천상의 역사로서 그 힘은 코끼리의 백만배쯤 된다고 합니다. 나라연과 같은 힘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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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현동자:보현보살이 동자로 화현 한 것으로 석가모니불의 우협시보살로 진리의 광대행을 맡고 있으며 행원의 실천을 나타내기 위해 코끼리를 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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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동자:문수보살이 동자로 화현한 것으로 석가모니불의 좌협시보살로 지혜를 맡고 있으며
    위험과 용맹을 나타내기 위해 사자를 타고 있습니다. 금강문을 지나면 기다리는 하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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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왕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문을 들어서면 속세와 선계의 경계선상을 가르는 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금산사를 지키는 4대천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절을 지키며
    1994년 금산사를 새롭게 중수할때 건립을 하였다 합니다.
    천왕문안에도 마찬가지로 4분의 수호신이 지키고 있습니다.
    일명 4대천왕이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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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왕문울 빠져 나오면 넓은 우측 돌기둥 두개를 볼 수 잇습니다. 가지런하게 서 있는 돌 기둥은 당간지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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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간지주:보물제28호. 사찰을 상징하는 괘불이나 깃발을 세울때 버팀목으로 사용하는 석조물이다.
    이 지주는 높이가 3.5m이며 양지주가 남북으로 마주보며 서 있다. 기단석과 간대를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는
    국내유일의 당간지주이다. 통일신라 시대인8세기 이후에 건립되었어며 간결한 것 같습니다.
    범어사 당간지주 보다는 더 기품이 있어 보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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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과 거북이
    흔히 빗돌의 받침으로 많이 사용을 한다.
    그 빗돌의 주인을 기다리는 용과 거북이는 우리에게는 친근감을 준다. 거북이는 무병장수를 뜻하며 용은 전설속의 짐승으로 신비감을 우리에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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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제루: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에 이어 만나는 보제루는 누각으로 1976년 신축을 한 현대건물이며 1998년 증축하여 금산사 개산1400주년 기념관으로 바꾸었다합니다. 지금은 학술회의, 미륵십선수련회등 강당으로 활용한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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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제루 밑을 들어서면 넓게 조성된 광장을 만나게 됩니다.
    금산사를 대표하는 모든 보물들이 이름표를 달고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면에 대적광전이 우측에는 그 유명한 금산사 미륵전. 좌측으로는 대장전과 석등등 짜임쇠 있는 구조와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찬찬히 둘러보면 금산사의 역사를 피부로 느낄 수 있어며 견훤의 한숨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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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 넓은 광장입니다. 어디부터 둘러 볼까? 고민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래도 학창시절 국사 교과서에서 본 3층 미륵전이 우선이겠지예.
    우측으로 압도하는 거대한 미륵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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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풍도 단단한 미륵전.
    견훤의 아픔을 다 받아주고 그의 설음을 다 어루만져준 미륵전입니다.
    3층 건물이지만 안으로 들여다 보면 뚫여 있어 1층 입니다.
    미륵전은 진표율사가 미륵장육상을 봉안하기 위해 766년 혜공왕 2년애 건립한 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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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당내에는 삼존상으로 미륵불, 법화림보살, 대묘상보살이 조성되어 있다. 미륵전은 원래 용리 살고 있던 연못이었으나 참숯으로 연못늘 메워 용을 쫒아내고 그자리에 미륵전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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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련대;보물 제23호로 지정,
    연화대 형식으로 조각한 불상의 좌대로 높이가 1.52m, 둘레가 10m에 달하는 거대한 연화대이다.
    전체가 한개의 돌로 되어 있어나, 여러개의 돌로 만든것처럼  상중하의 3단 양식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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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계단 여인상"입니다. 40계단을 대표하며 양동이를 이고 아기를 업고 있는 우리의 어머님의 모습입니다. 이 동상은 인쇄골목 40계단 문화관 건물 앞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양동이를 이고 애기를 업은  어머님이 40계단을 내려오고 있네요. 40계단 여인상의 모델로 수도 없이 오르내렸을 이계단을....이분은 지금 어디예 계시는 궁금합니다. 40계단 문화관 5층에 전시를 해 두었습니다.

    현재의 40계단 모습입니다. 중간에 아코디언을 켜는 아저씨가 않아있네요.
    그분 등뒤에는 스피커가 들어 있는 박스가 있습니다 이박스의 보턴을  누르면 박재홍님의 경상도아가씨가 흘러 나옵니다.

     

    그시절에는 계단 좌우로 아무것도 없었는데 지금은 계단 옆으로 집이 꽉 들어서 있습니다.

    아코디언을 켜는 아저씨의 모습입니다. 그때 그시절에는 길거리의 악사들이 많은 시절이였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생각나는 모습입니다. 뻥티기를 하는 아저씨와 그옆에 꼬마의 모습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이 그때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뻥 소리와 함께 김이 무럭무럭나며 주위로 박상이 튀어나와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워 먹을여고 두 귀를 막고 서 있는 모습... 

    피난시절 고달픔도 잊고 자식에게 젖을 물리는 우리 어머님의 모습
    입니다. 지금 난장의 옷가게가 진을 치고 있어 그때의 모습과 너무 대조적입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물이 귀한 시절입니다. 지금이야 집집마다 수도꼭지를 틀면 뜨거운 물 찬물이 콸콸 쏟아지지만 그때는 공동우물로 물이 귀한 시절이였습니다. 온 가족이 총 출동하여 이고 지고하여 물을 져 나르는 모습입니다.

    고단한 삶의 모습입니다. 전쟁후 먹고 살기 힘들때 지게를 지고 물건을 져 나르는 역전지게꾼이나 막노동을 하며 하루 날품팔이를 하는 우리 아버님의 모습입니다.
    지게에 등을 데고 누워 있는 모습에 한켠에 고무신을 벗어 놓은 그 모습이 얼마나 힘이 드시는지...우리 모두의 아버님입니다. 아버지의 휴식

     테마 거리의 모습입니다. 전봇대하며 전봇대위의 까치집 그리고 중간의 영화 벽보하며 생각나는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40계단 테마거리를 알리고 있습니다. 중앙동 팔성관광에서 동광동으로 오르는 길이 중앙동 국민은행 옆으로 이어지는 테마거리를 알리는 안내판입니다. 팔성관광 건너편에 설치 되어 있습니다.


    중앙동 국민은행 옆의 40계단 조형물입니다. 평화의 문으로 기찻길에는 희망찬 내일을 향한 등불을 형상화 했다합니다.

    부산역을 나타내는 기찻길의 모습이 있어며

    부산항을 나타내는 항구의 모습을 형상화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힘든 고비를 넘기기 위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터온 세월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1950년 6.25가 발발하고 전세는 불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으로 다 수용을 못하고 피난온 사람들은 부산의 대표적인 엄광산 구봉산 용두산 아래 터를 잡고 계단식으로 거적 데기나 판자로 엮어 만든 동네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판자촌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게 중앙동의 40계단입니다.
     40계단이 생긴지는 뚜렷하게 알 수 없지만 중앙동에 새마당이 생긴게 1908년이니까 미루어보건데 동광동5가 언덕베기 윗길에서 중앙동4가 새마당으로 내려오는 길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 40계단이 널리 알려져 피난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곳이 된 것입니다.
    6.25로 인해 피난민들이 이곳 40계단에서 구호물자로 흘러 나온 물건을 거래하는 난장이 생기고 국제시장과 함께 피난민들에게는 애환이 서린 곳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피난민들이 모두 모이다 보니 전쟁통에 잃어버린 가족과의 상봉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합니다.

    지금도 부모님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박재홍님이 부른 “경상도 아가씨”로 첫구절에 “사십계단 층층대에 앉아우는 나그네”로 시작되는 이노래는 가사가 피난민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 사십계단이 지금의 40계단으로 부산시 중구 동광동에는 40계단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40계단 문화관으로 동광동 인쇄골목에 위치를 하며 40계단과 함께 테마거리를 조성하여 부모님들에게는 피난살이의 힘겨웠던 추억을 생각하게하고 자라는 청소년들에게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되도록하기 위해 그때의 물품이나 모형을 만들고하여 전시를 해 놓았습니다.

    40대 후반 필자인 나도 추억이 떠 오르는 게 있었습니다.
    양은으로 만든 도시락 구슬 딱지등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물건이 꽤 많아 꼭 한번 부모님과 자녀분과 함께 찾아 가 보길 권해봅니다.


    이제 부터는 40계단 문화관의 모습입니다.



    5층 입구에 들어면 만나는 모습입니다. 상설 전시실로 1876년 개항이전부터 개항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 광복 6.25등 중구의 역사를 이야기한 중구 연표가 전시되어 있다.


    광복전후 부산의 사회상과 6.25로 인한 피난시절 부산 모습을 잘 나타내었어며



    밥벌이 물전쟁 삶의 애환이 묻어 있는 그시절의 물품을 전시하여 장년층의 애환을  되살리고 있다.


    피난시절의 꿀꿀이 죽 옥수수죽등 그때의 먹거리를 나타내었어며





    전쟁중에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으며 어려움 속에서도 배움의 꿈을 키워 왔던 천막교실의 모습입니다. 봉숭아학당의 저요저요 하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풍금에서 흘러나오는 반주에 노래도 부르고....

    박재홍님의 경상도 아가씨와 그 당시의 음반들과 전축

    어렵던 시절 가지고 놀던 장남감입니다. 생각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양은 도시락과 교복, 추억의 책가방등 그때의 학용품하며...

    전쟁물자를 이용하여 필요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을 하였습니다. 재떨이하며. 사물함 그리고 호롱불대신으로 사용을 하였다합니다.





    닥종이로 그때의 모습을 만들어 6층 특별전시실에 일부 전시를 해 놓았습니다.
    천막으로 엮은 집 앞에서 피난민들의 모습입니다.

    망~개~떡~ 외치는 망개떡장수의 외침이 귓전에 맴돕니다. 



    6층 특별전시실 중앙에 전시된 그 당시의 군용석유램프 그리고 화덕, 불을 피우기위한 시설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4개의 사각 기둥안에는 그 때의 모습을 찰흙으로 나타내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상영을 할때 돌리는 영사기입니다. 한참 재미 있을 때 보면 필름이 지지지~하며  끊어져 다음장으로 넘어가면 휙~하고 휘파람을 불며 난리를 치던 그때그시절의 영사기입니다.

    풀빵입니다.지금이야 추억으로 먹지만 그때는 한끼를 때우기 위한 식사였습니다.

    전쟁통에 죽이라도 얻어먹을여고 줄을 서는 모습입니다.

    많은 식구가 단칸방에 칼잠을 자던 시절입니다. 자세히 보니 흥부네 가족입니다.


    그때 난전의 모습입니다. 아무것도 없던 배고픈 시절에는 부러울 것이 없는 가게 아저씨입니다.

    가마니로 엮은 움막입니다. 움막안에 자는 꼬마와 밖에서 뭔가를 열심히 하는 엄마 그때의 모습입니다.

    40계단 문화관 전경입니다. 5~6층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번쯤은 둘러볼 것을 권해봅니다.  


    참고로 중구문화의집 051-600-4541
    40계단기념관 051-600-4041
    주소:부산시 중구 인쇄골목 2길81(동광동5가 44-3)
    개관일:매주 화요일~일요일(월요일휴관)
    관람시간:오전10시~오후7시까지이며 토.일요일은 오후5시까지
    교통편은 지하철 1호선 중앙동역하차, 13번 출구로 나와서 5분거리임
    버스는 17,26,27,40,41,61,81,82,85,87,88,103,134,508번임
    홈페이지:www.bsjungg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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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전야제는 모두 해 뜨는 관광지로 서로 가려고 아우성이다. 주로 동해 정동진, 낙산사등 강원도를 먼저 생각을 할 것이다. 그 것도 아니면 공업도시인 포항, 호랑이 꼬리인 호미곶이 아닌가 추측을 할 것이다. 그러나 틀 린 말이다. 한반도 아니 유라시아 대륙에서 가장 먼저 뜨는 해를 볼 수 있는 곳이 울산시 울주군과 양산시에 자리하고 있다. 산으로 치자면 영남알프스의 최고봉인 가지산이다. 가지산이 가장 먼저 해뜨는 것을 볼수 있어나 바닷쪽으로 긴산등성이가 가로막아 바다에서 떠 오르는 해를 볼 수 없고 양산시 상북면과 웅상읍에 걸쳐 있는 천성산이 현재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를 볼 수가 있는 곳이다. 그럼 산이 아닌 우리 주위에서는 어디일까. 가장 빠른 일출 장소는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의 간절곶 이다, 그래서 2000년 1월1일부터 매년 해 맞이 행사를 하고 있어며 간절곷이란?,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먼바다로 나가면서 육지쪽으로 바라보면 서생면의 돌출된 지형인 간절곶이 긴 간짓대처럼 보여 이름이 유래 되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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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에 설치된 등대로 한반도에서 가장 빠른 일출을 볼 수 있다 한다.

     

    그 간절곶에는 등대와 소망우체국, 대마도로 건너간 부군을 기다리는 박제상의 가족 동상, 새천년의 비상이란 기념비와 동방의 햇불이 여기 간절곶에 조형물로 만들어져 오고가는 관광객들에게 볼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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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절곶 등대는 동해 바다를 지나 다니는 선박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1920년 3월부터 등대의 불 빛은 꺼지지 않고 동해바다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그 불빛은 46km밖에서도 등대불을 볼 수 가 있다 한다. 등대탑의 높이는 17m이고 8각 콘크리트로 설치되어져 있다. 현재는 개방되어 오전 10시부터 오후 4~5시까지 관람을 할 수 있다 한다. 그 앞에는 2000년 1월1일 새천년을 기원하며 세운 “새천년의 비상”이란 조형물이 웅장하게 서 있다. 신성하며 장수와 복을 가져다 주는 거북이로 기단을 만들어 울주군의 번영을 기원하고 있다. 그옆으로는 소망우체통을 볼 수 가 있다. 높이 5m, 둘레 2.4m, 무게 7t으로 규모가 엄청 큰 우체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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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서 가장 큰 우체통으로 소망을 담아 보내는 소망우체통


    세계에서 가장 큰 우체통이 무료엽서로 인해 선거법 위반의 논란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울주군에는 독특한 산이름이 있다. 이름하여 치술령, 치술령을 올라보면 동해바다를 훤히 볼 수 있는 망부석 또한 볼 수가 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미사흔을 구하고 대마도에서 화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신라충신 박제상, 그 망부석에 올라 돌아 올 부군을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 그의 혼이 파랑새가 되어 은을암에 숨어 들었다는 이야기가 모두 간절곶의 세모자 동상에서 볼 수 있다.

    박제상을 기다리는 세모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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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끈쥔 주먹의 어부과 모습과 함께 동해의 파도가 춤을 추는 간절곶에서 추억을 한번 만들어 보세요. 그리고 간절곶 옆 서생면 대송리 평동의 수연횟집(대표 지연근 052-238-9023)을 소개한다. 자연산 회만을 고집하는 이집은 주인장이 직접 바다에 나가 잡아 오기 때문에 계절에 맞는 횟감을 내 놓아 항상 싱싱한 육질의 회맛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식사와 함께 매운탕 맛이 자연산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맛에 담백하며 숟가락이 절로간다. 밑 반찬 또한 바닷가에서 채취한 자연식단을 채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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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산만을 고집하는 수연횟집, 광어 참돔 우럭 달게이 꼬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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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초류인 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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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암 주논개의 약사
    1574년 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출생
    부친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남
    집안은 대대로 훈장집으로 주위의 존경을 받았서며 논개는 4갑술(갑술년,갑술월,갑술일,갑술시)의 사주를 안고 태어났다 한다. 그래서 주달문은 딸아이의 사주가 예사롭지 않아 여자애지만 장차 크게 될 인물임을  알았다한다.
    논개란? 딸이 술(戌)시에 낳았으니까 개을 낳은 것과 같고, 거꾸로 읽어면 "놓은 개"즉 논개가 되므로 역신도 시샘을 하지 않을 것이란 뜻이란다.
    1578년 5세때 부친 주달문 사망 후 모녀는 숙부 주달무집에 의탁함.
    숙부는 어린 조카 논개를 김풍현집에 민며느리로 보낸다고 약조한후 금품을 받고 달아남.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어린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신을 하지만 김풍헌의 제소로 장수관아로 잡혀와
    재판을 받게된다. 재판관은 최경회현감으로 모녀에게 무죄로 석방을 하니 갈곳이 없는 논개모녀는 최경회의 집에 머물며 잔심부름을 하며 지냄.
    논개나이 17세(1590년)때 담양부사인 최경회와 부부의 연을 맺음.
    그후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한 후 고향인 화순을 가면서 논개는 고향 장수로 보낸다.
    2년뒤 1592년 임진년에 임진왜란이 터져 상중이지만 최경회는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어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진주성 전투때 패한후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을 한다.
    논개는 남편 최경회가 순국했다는 소식에 논개는 왜놈들이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에 관기들과 함께 촉석루에 들어간다. 관기처럼 곱게 단장한 주 논개는 촉석루 아래 바위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안고 남강물에 투신하여 순국한다. 그후 뜻을 같이한 민관군이 논개의 주검을 안고 고향인 장수군 장계로 떠나지만 고향인 주촌의 논개집안에서는 출가외인으로 논개의 주검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을 하여 , 할 수 없이 함양군 서상면 깃대봉 아래 논개의 주검을 안장한다.   (사)의암주논개정신선양회에서  발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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