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여행/영덕가볼만한곳)삼사해상공원 영덕어촌민속전시관. 영덕 어촌의 생생한 역사를 전시한 어촌민속전시관.
경상북도 영덕 하면 영덕대게를 제외하면 그리 볼거리나 먹거리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제가 영덕을 여러 군데 다녀보면서 영덕은 동해안의 가운데 있어 참말로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문화유적지는 물론이고 바다를 끼고 있는 해안선은 모두가 전망대일 정도로 공원으로 조성하여 영덕을 찾는 관광객에게 쉼터를 제공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영덕 첫 번째 공원은 삼사해상공원입니다.
삼사해상공원은 특히 동해안 일출 1번지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영덕군민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저도 이곳 삼사해상공원의 호텔에서 느긋하게 1박 하면서 공원 내의 여러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특히 삼사해상공원에서 꼭 봐야 할 곳이 있는데 영덕어촌민속전시관입니다,
영덕어촌민속전시관을 가려면 삼사해상공원의 너른 주차장을 가로질러 경북대종 종각을 보고 갑니다. 종각 오른쪽 도로를 오르면 영덕어촌민속전시관 안내판이 있고 곧 어촌전시관이 나옵니다. 출입문 옆에는 영덕의 상징물인 대게가 척하니 붙어있습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전시관은 일반 성인 2천원 등유료관람입니다. 현재 어촌민속전시관은 요즘 어촌에서도 보기 힘든 여러 가지 어로 기구와 전통 민속, 어촌생활를 찾아내어 보존하며 또한 우리 전통어업 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경상북도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어촌민속전시관입니다.
그 때문인지 2,494평의 부지에 지하 1층에 지상 3층, 총건평이 725평인 어촌전시관으로서는 매머드급으로 전시내용을 보면 각종 전시품은 물론이고 체험시설, 3D 입체 영상관, 옥외조형물과 편의시설까지 갖추었습니다.
전시실은 1·2 전시실로 나누어졌으며 제1전시실은 영덕 푸른 바다와의 만남, 영덕 어촌의 삶과 의식주, 영덕 어촌의 놀이와 문화, 동해안의 별신굿, 어선 제작과정, 및 대게잡이 당도리, 영덕의 어구와 고기 잡는 법 이외에도 전통어선 전시 등 다양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제2전시실은 어로 도구 유물전시와 해저의 지형, 영덕 앞바다의 비경과 항구체험 이외에도 영덕 특산물인 영덕대게에 대해 여러 가지 알 수 있는 유익한 공간입니다. 대게의 일생과 맛으로 보는 영덕대게. 대게잡이 체험과 해녀들의 삶, 어촌시장의 풍경 등 다양한 영덕어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영덕어촌민속전시관은 제가 방문했을 때는 늦은 시간에다 혼자였고 해서 3D 입체 영상관의 ‘대게 왕자의 모험’은 관람하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방문한다면 꼭 영상관과 영덕어촌민속전시관을 여유를 가지며 천천히 둘러보고 싶습니다.
또한, 7년간인 두 전란의 모든 과정을 기술한 징비록은 시경의 구절에서 따왔으며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라는 뜻이라 합니다. 전란의 참상을 당시 겪게 되었던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기록한 징비록. 류성룡은 노량해전이 벌어질 때 정인홍과 이이첨 등 북인의 상소로 영의정에서 파직당합니다.
그 길로 고향 안동으로 내려와 선조의 부름을 받지 않고 징비록을 저술했다 합니다. 1605년 9월에 하회마을의 물난리로 학가산 기슭의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기거하다 1607년 5월에 농환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하회마을의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의 후손과 그를 따르던 문하생들이 선생의 높은 뜻을 기려 1600년대에 건립했던 가옥으로 선생이 살았던 집은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 번의 중수와 증축이 이루어졌습니다. 현재 조선중엽의 전형적인 사대부집 양반가옥의 모습을 하며 문간채, 사랑채, 안채와 사당 등 52칸만 남아있습니다.
또한, 서애선생의 저서와 유품 등을 모아 전시하는 영모각이 따로 마련해 있으며 문간채 밖에는 엘리자베스 2세가 1999년 4월 방문하면서 심었던 기념식수가 있습니다. 하회마을 북촌은 양진당이 대표 가옥이라면 충효당은 남촌을 대표하는 가옥으로 서로 하회마을 길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충효당을 들어서면 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一’자로 놓여 있으며 그 뒤편에 ‘ㅁ'자를 한 안채와 안채에서 길게 연결된 사랑채가 있습니다. 사랑채 뒤로는 사당과 그 우측에 유물전시관인 영모각이 자리했습니다. 충효당 역시 안채는 관람할 수 없으며 사랑채와 영모각만 둘러볼 수 있습니다.
입구의 행랑채는 총 12칸으로 사랑채와 마주보며 사랑채의 정면에 솟을 대문인 대문간을 내었습니다. 사랑채는 앞면 6칸에 옆면 2칸이며 가운데 개방한 4칸 크기의 대청마루를 깔았습니다. 특이한 점은 대청마루 뒷면 오른쪽은 골판문을, 왼쪽은 머름이 없는 높은 살문을 달아내어 안채와 뒷마당을 오가게 했습니다.
왼쪽 2칸은 온돌방과 침방을 앞뒤로 놓고 오른쪽은 작은 마루와 방을 앞뒤로 두었습니다. 작은 마루는 앞쪽과 왼쪽에 골판문과 살문를 달았고 오른쪽은 개방한 상태입니다. 이는 사랑채가 서향으로 앉았기 때문에 여름 오후의 따가운 햇볕과 겨울의 매서운 북서풍을 막으려는 조처로 보이며 전면과 우측면은 쪽마루를 달아내고 계자난간을 돌려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각의 품격을 한층 더 높였습니다.
사당 옆에는 유물전시관이 있습니다. 막 전시관으로 들어서는데 빨리 나오지 않고 뭐하느냐는 일행의 전화가 빗발쳤습니다. 모두 하회마을 주차장에 다 도착했다며 빨리 나오라는 성화였습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유물관을 보지 못하고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동 하회마을 여행에서 양진당과충효각은 꼭 보고 나오길 추천합니다.
(안동여행/안동가볼만한곳)하회마을 풍산류씨 대종택 양진당.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 하회마을 양진당을 만나다.
안동 하회마을을 여행하면서 워낙 넓어 먼저 무엇을 보는 게 우선일까 하고 많은 고민을 모두 합니다. 그래서 저는 고민을 하다 보물 제306호인 풍산류씨 겸암 류운룡(1539~1573)의 대종가인 양진당과 보물 제414호인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충효당을 가장 눈여겨보고 왔습니다. 그럼 하회마을의 풍산류씨 대종택인 양진당을 둘러보겠습니다.
그러나 아쉽지만, 우리나라 고택 대부분이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어 일부를 제외하고는 내부를 볼 수 없습니다. 여기 양진당도 마찬가지로 사랑채로 들어서는 솟을대문에 딸린 방과 사랑채의 겉모습만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양진당은 확실하지 않지만 1600년대에 건립했다 하며 하회마을의 북촌을 대표하는 한옥입니다.
임진왜란에 안채가 불타 17세기에 중수하였으며 사랑채와 연결하는 부분에 당시 화재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합니다. 양진당은 특이하게도 고려말 건축양식과 조선 중기의 양식이 혼용된 모습이며 건립 당시에는 99칸의 저택이었지만 현재 53칸만이 남아 있습니다.
문간채에서 본 사랑채
하회마을에 처음 들어와 자리를 잡았던 풍산류씨 입향조는 누구인지 궁금했습니다. 이는 13세기에 전서 류종혜가 처음 이곳에 들어왔으며 그리고 가장 먼저 집터를 잡은 곳이 양진당입니다. 또한, 양진당은 하회마을의 여러 가옥과 다르게 정남향을 보고 있으며 하회마을은 풍수에서 연화부수형에 해당하는데 양진당이 연꽃의 꽃술 부위인 명당이라 합니다. 이를 보면 아마 풍산류씨의 대종가다운 면모를 당시에 갖추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 시대 양반가옥이 다 그러하듯이 안채와 사랑채는 독립된 형태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전체적인 건물 형태를 보면 좌측은 중문간채와 안채는 ‘ㅁ’자 형태이며 안채와 접해져 오른쪽에 ‘一’ 형태로 길게 이어진 사랑채가 있습니다.
사랑채
하회마을 주 통로에서 사랑채를 들어서는 입구는 솟을대문을 한 앞면 5칸인 문간채와 행랑채가 ‘一’ 형태로 길게 이어졌습니다. 가운데 출입문을 내고 좌우에 방과 마구간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높은 기단 위에 사랑채가 위엄있게 앉아있습니다.
가운데 작은문이 안채로 연결하는 통로
사랑채에는 입암고택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는 겸암 류운룡선생의 부친인 입암 류중영(1515~1573) 선생의 호에서 따왔으며 양진당은 겸암 류운룡의 6대 후손인 류영(1687~1761)의 아호에서 따와 오늘날 입암고택 또는 양진당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사랑채는 앞면 4칸 옆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며 겹처마는 하회마을에서 유일하다 합니다. 왼쪽에는 1칸씩의 온돌방과 서재를 넣었으며 오른쪽 3칸은 6칸의 통마루를 깔았습니다. 이곳에서 하회마을의 풍산류씨 문중회의 등이 열린다합니다.
하회마을에서 유일한 겹처마 건물
앞에서 보는 사랑채는 삼면에다 쪽마루가 달렸으며 앞면만 계자난간을 달았습니다. 그 왼쪽 끝에는 안채와 연결하는 작은 통로가 있으며 3칸의 대청은 각각이 4개의 문짝을 붙인 여닫이문을 달아 대청마루를 여닫게 했습니다. 사랑채 뒤 오른쪽에는 두 개의 사당이 있습니다.
문간채·행랑채에 붙은 마구간
큰 사당은 입암 류중영선생이, 작은 사당은 겸암 류운룡 선생의 신위를 모셨는데 두 분 모두 불천위 사당으로 후손 대대로 제사를 올린다 합니다. 짧은 시간에 하회마을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기는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바로 서애종택인 충효당으로 발걸음을 총총 옮겼습니다.
영덕군 여행에서 보고 왔던 평민의병장 신돌석장군 생가지와 유적지. 사실 의병장 신돌석장군 생가지를 방문하기 전에는 학창시절 들었던 장군의 이름과 그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장을 했던 게 아니었을까 막연하게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생가를 방문하면서 알았던게 구한말인 1896년 일어난 명성 황후 시해 사건으로 전국에서 들볼 같이 의병봉기가 일어났으며 신돌석 장군 또한 영해에서 봉기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장군은 태백산 호랑이라고 부를 정도로 전투에서는 용맹무상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을 정도로 신출귀몰했다고 합니다. 먼저 신돌석장군의 생가는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의 ‘복디미’ 마을에 있습니다. 생가터는 장군의 부친이셨던 신석주옹이 1850년경에 초가를 엮은 집을 지었으며 장군은 1878년 11월에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장군의 생가는 우리민족의 독립 의지를 꺾으려고 일본군은 정략적 차원에서 여러 번 불태워졌습니다. 1995년 민족정기회복 차원에서 앞면 4칸, 옆면 1칸 규모의 일자형 초가집을 옛터에 복원했습니다. 현재 생가는 도 지정기념물에 지정되었습니다. 장군은 왕건을 도운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손입니다. 성장하면서 범상치 않을 정도로 기개가 남달랐다 합니다.
본관은 평산이며 자는 순경, 호는 장산, 본명은 태호입니다. 그러나 장군은 어릴 적부터 돌석으로 불렸기에 현재 신돌석장군 생가지와 유적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장군은 유년기에 육이당 이중립에게 학문을 익혔으며 1896년 일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상투를 자르는 단발령을 시행하자 이에 항거하며 전국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났었고 장군도 100여 명의 동지를 모아 영해에서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김하락의 이천의진이 경주에서 영덕으로 밀려와 신운석의 영덕의진과 연합하여 강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에 장군은 중군장으로 전투에 참여하며 초반에는 우세하게 전세를 이끌었으나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그만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김하락 의병장은 자결하고 일월산으로 후퇴한 의병은 유격전으로 맞섰습니다. 신돌석장군은 영덕읍 남천쑤 전투에 참가하면서 그의 구국 의병 활동이 시작됩니다. 장군은 일본과의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워 수많은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1904년 기울어가는 국운을 보고 평해 월송정에서 시 ‘우국(憂國)’을 짓고 마음을 다잡았는데
“등루유자각망행(登樓遊子却忘行)
가탄단허낙목횡(可歎檀墟落木橫)
남아이칠성하사(男兒二七成何事)
잠의추풍감개생(暫倚秋風感慨生)“으로
그 뜻을 풀어보면
“월송정 누에 오른 나그네가 갈 길을 잊고서
떨어진 나무가 가로 놓인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
사나이 27세에 이룬 것이 무엇이며
가을바람이 부니 감개만 이는구나 “
장군이 남긴 유일한 시로 우국충정의 굳은 마음과 신념을 알 수 있습니다.
신돌석장군 유적지 주소: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산 60-5
신돌석장군 유적지 전화:054-734-6397
1905년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6년 3월에 영해지역 청년을 모아 영릉의병진을 조직하면서 본격적인 의병 항일을 전개하여 일본군 토벌에 나섭니다. 경상북도 청하, 영덕, 영해, 청송, 울진, 의성, 영양, 봉화, 삼척, 강릉 등 경상북도 북부와 강원도를 오르내리며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일본군은 태백산 호랑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합니다.
1908년 일본인은 더욱 간악하게 발악하자 그해 11월 장군은 의병대를 잠정 해산하고 만주로 활동무대를 옮기려고 장군의 외가가 있는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에 잠시 몸을 숨기려고 피신했습니다. 그러나 현상금에 눈이 멀었던 외사촌 김상렬, 상태, 상호 형제는 장군에게 독주를 먹이고 도끼로 무참하게 살해하여 장군은 만 30세의 짧은 나이로 12년을 의병 항쟁에 몸 바치며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가셨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1971년 국립묘지 유공자 묘에 안장했습니다. 또한, 영덕군과 국가보훈처는 선생이 태어난 축산면 도곡리에 생가 복원과 1999년 11월에는 사당과 동·서재 각 1동, 기념관을 조성하고 장군의 항일정신을 기억하는 성역화 작업을 마무리했습니다.
이제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이 왔습니다. 영덕대게축제와 영덕복사꽃축제가 열리면 많은 관광객이 영덕을 찾습니다. 영덕여행에서 평민의병장인 신돌석 장군 생가와 유적지를 찾는 여행도 매우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영덕여행/영덕가볼만한곳)영덕대게원조마을 차유마을. 영덕대게 원조마을 차유마을 여행을 하다.
영덕하면 퍼뜩 떠오르는게 영덕대게입니다. 그만큼 영덕의 대표 먹거리이며 수식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영덕대게 원조마을은 하면 대부분 사람은 고개를 꺄우뚱하며 영덕 아닙니까?하고 정확한 답을 내지 못합니다. 아니면 인기드라마였던 ‘그대 그리고 나’ 촬영지로 현재 많은 주목을 받는 강구항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드라마가 워낙 인기였으며 지금 영덕대게 축제도 이곳 강구항에서 열려 당연히 영덕의 강구항이 영덕대게 원조마을로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게 아닙니다. 영덕대게 원조마을은 영덕에서 7번국도를 따라 더 올라가야 합니다. 영덕군 축산면 소재지 못 미쳐 인 경정2리이며 차유마을이라합니다.
차유마을은 동해 바닷가 쪽에 있는데 독특한 지형을 하고 있어 바깥에서는 마을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마을 뒤쪽으로 산등성이가 길게 해안선을 따라 솟았는데 차유마을은 급한 비탈을 계단식으로 깎아내어 형성된 작은 해안마을입니다. 왜 차유마을이라 불렸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조대게마을을 알리는 기념탑에는 1345년인 고려 29대 충목왕 2년에 영해부사였던 정방필이 처음 부임하여 관내를 순시하게 되었습니다. 부사는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좁은 고개를 넘어야 했습니다. 영해부사 일행이 수레를 타고 고개를 넘어왔다 하여 차유(車踰)마을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왜 대게 원조마을의 타이틀을 얻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영덕에서 내려오는 대게에 관한 유래는 대략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고려 태조 왕건 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게에 관한 기록이 꽤 역사가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영해지역을 당시에는 예주라 했습니다. 예주 연역을 보면 고려 태조 왕건 23년에 태조가 오늘날의 영해지역을 처음 순시했습니다. 그때 태조의 주안상에 특별한 음식으로 이곳 축산 차유마을에서 잡아 올린 대게가 수라상에 올라왔다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조선조 초기에 여러 지방특산품을 중앙에 진상하는데 영덕군의 대게도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라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대게 먹는 방법은 두 손과 입이 최고입니다. 임금이라도 별수 없이 양손을 사용하고 입으로 대게 껍질을 깨고 얼굴에 게살을 묻히며 먹은 표시를 확 낸 모양입니다. 이런 주상의 모습을 보고는 신하들이 보기에 아주 망측하다는 생각을 했나 봅니다.
그래서 임금의 수라상에서 대게 요리를 빼버렸는데 임금이 대게 맛을 잊지 못해 하루는 신하에게 대게를 가져오라고 명했습니다. 지시를 받은 신하는 궁궐을 나와 바닷가를 누비며 대게를 찾았고 수개월 만에 겨우 지금의 축산면 죽도산 앞바다에서 대게를 잡는 어부를 만났습니다.
어부에게 지금 잡은게 이름이 무엇인가하며 물었지만, 어부는 대답하지 못하다가 ‘이상한 벌레’를 뜻하는 언기(彦基)라 대답했습니다. 신하는 대게를 들고 궁궐로 돌아왔으며 이름을 붙여야겠기에 의논을 하여 다리가 대나무 같이 생겼고 침이 있어 ‘죽침언기어(竹針彦基魚)’라 했습니다.
또는 대나무 마디를 닮은 다리가 여섯 마디라 ‘죽육촌어(竹六寸魚)’ 등의 이름으로 부르자는 공론을 벌이다가 사람의 손으로 게 껍데기가 벗겨져 대나무 죽(竹)자에 게해(蟹)자를 합해 죽해(竹蟹)라 부르게 되었으며 요즘 대게라 불리게 된 유래입니다.
또한, 대게잡이 어선이 항상 대나무 섬인 죽도산을 지나는데 잡은 대게의 다리가 죽도산의 대나무 마디와 같이 길쭉하여 대게라 부르게 되었다고도합니다. 이를 종합해 영덕대게 원조마을이 영덕군 축산면 강정리 차유마을이 되었다 합니다. 영덕군에서는 매년 봄이면 영덕대게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이때 이곳 차유마을 영덕대게 원조마을 표지석 앞에서 영덕대게 기원제를 올린다고 하니 대게 원조마을은 틀림없나 봅니다.
(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월광사지 동·서 삼층석탑. 대가야 비운의 태자 월광태자의 전설이 남아 있는 월광사지 동·서 삼층석탑
경남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서는 입구에는 월광사지란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옛 절터가 있습니다. 월광사터로 현재 이곳에는 동·서 삼층석탑만이 덩그런이 남아 있으며 보물 제129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월광사지는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인 월광태자가 창건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월광태자와 신라의 마의태자를 비운의 태자라 합니다. 모두 존망에 처한 나라와 함께 생을 마감했기 때문인데 마의태자는 모두 아시는 것과 같이 신라의 태자로 있을 때 고려 왕건에 의해 나라가 멸망합니다. 경순왕은 왕건에 항복하지만, 그의 아들인 마의태자는 금강산에 들어가 입었던 비단옷을 벗어 던지고 고려가 주는 양식을 먹고 사느니 풀뿌리를 캐 먹더라도 끝까지 신라인으로 남아 죽겠다며 삼베옷을 입고 일생을 마쳤다 하여 마의태자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그보다 빠른 삼국시대의 월광태자는 대가야의 태자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 대가야는 신라에 의해 멸망합니다.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월광태자를 왜!! 마의태자와 함께 비운의 태자라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아버지는 대가야의 이뇌왕이고 어머니는 신라의 이찬 비지배의 딸로 국가를 뛰어 넘어 결혼을 했는데 쉽게 말하면 대가야와 신라 간의 결혼동맹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 사이에서 월광태자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대가야와 신라의 동맹관계는 신라의 트집으로 오래가지 못하고 7년 만에 깨어져 끝내는 대가야는 신라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KBS의 역사스페셜 “대가야 최후의 왕자, 월광은 어디 갔나?” 편을 보면서 월광태자의 궁금증을 많이 풀 수 있었습니다. 월광태자와 도설지왕이 같은 인물이라는 뚜렷한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KBS 역사스페셜의 출연진은 월광태자와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도솔지를 같은 인물로 보고 있었습니다.
동시대의 인물로서 도설은 달을 뜻하며 월광 또한, 달빛으로 풀이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도설지는 단양의 신라적성비에도 그 이름이 나옵니다. 아마 신라가 한강유역의 고구려 영토를 점령하면서 대가야의 도설지도 장군으로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인 월광이 왜 신라의 장수로 출전했는지 그 이유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가야의 정세는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에서 국운이 녹록지 않았습니다. 우방이라 믿었던 백제가 느닷없이 창끝을 겨누며 공격해와 대가야의 영토인 남원, 임실, 하동유역까지 빼앗겨 더욱 위기감을 느낀 대가야는 마침내 신라에 혼인동맹을 제의하고 큰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나 이들의 혼인동맹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결혼 7년 만에 파탄이 납니다.
그 이유를 보면 결혼할 때 신라에서 따라간 하인들의 옷차림을 모두 대가야의 복식으로 바꾸어 입게 한 것을 문제 삼으면서 동맹은 휴짓조각이 되고 맙니다. 이에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다시 국가존망의 위기의식을 느꼈고 어느 한쪽과 동맹을 맺지 않으면 나라의 존립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급기야 가야 내부에서도 백제와 협력해야 한다는 파와 그래도 신라 쪽에 붙어야 한다는 파벌로 나누어졌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백제 쪽으로 기울어졌고 어머니가 신라 사람인 월광태자는 난처한 처지에 처해 신라로 망명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역사스페셜 출연진은 추정했습니다. 561년경에 세운 진흥왕 순수비에도 도설지란 이름이 등장하는데 같은 인물로 보면 신라에서 혁혁한 전공을 많이 세웠던 분 같습니다.
그러나 국제관계란 한 치 앞을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은 신라는 서로 짝짜꿍하며 힘을 합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가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다시 고구려와 손을 잡고 이번에는 백제를 공격합니다. 신라는 관산성에서 백제에 대승을 거두었으며 그와 반대로 백제와 협력관계인 대가야는 백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해 패하자 대가야의 몰락를 자초합니다.
562년 신라 진흥왕은 이사부를 총사령관에, 사다암을 선봉장으로 삼아 군사 5천을 내주어 대가야를 정벌케합니다. 대가야는 힘 한번 제대로 서보지도 못하고 520년 만에 멸망하여 신라에 복속됩니다. 그러나 신라로서는 가야 백성의 민심을 잠재우는 게 큰 문제였습니다. 신라는 대가야의 태자였던 월광을 왕으로 앉혀 잠시나마 내분을 수습하려 했으며 신라는 이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고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자 월광태자를 내쳤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를 보면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 월광은 대가야의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이라는 유추도 가능해집니다. 신라로부터 버림받은 월광은 더는 갈 곳이 없자 합천 가야산의 거덕사에서 출가해 인근에 월광사를 짓고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합니다. 월광태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나온 근거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다르게 월광태자를 설명하고 있으며 대가야와 신라의 혼인동맹으로 태어났으며 태자로서 승려가 되었고 여생을 월광사에서 보낸 것만은 사실로 보입니다.
월광태자가 여생을 보냈다는 월광사는 현재 옛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으며 창건 연대만 달리하는 비슷한 모양의 삼층석탑 두기만 월광 태자의 비운을 아는지 천 년의 세월 동안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월광사지 삼층석탑은 2층의 기단에다 3층의 몸돌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형태의 석탑입니다.
기단은 아래층과 위층 모두 각 면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우주를 조각했으며 몸돌의 모서리에도 마찬가지로 우주조각을 했습니다. 옥개석인 지붕돌은 밑면이 5단 받침으로 언뜻 보면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탑의 기단부는 서탑에 비해 많은 부재가 들어갔으며 서탑은 쓰러져 있던 것을 다시 복원하였다하며 여러 곳에 파손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기단석의 각 면 중앙에도 기둥을 새겼는데 서탑에는 2개지만 동탑은 1개뿐입니다. 두 석탑은 모두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고 서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각 부분의 구성방법과 양식에서 약간씩 다른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를 보면 두 석탑이 함께 만들어진 게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합천 하면 생각나는 여행지가 가야산과 해인사입니다.
물론 해인사는 법보사찰로서 국보인 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 대찰이며 최고의 여행지에 이견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가야 비운의 황태자인 월광태자의 사연이 알알이 새겨진 월광사지 동·서 삼층석탑을 만나보고 월광태자의 마음을 노래했을 ‘월광사지’
(남해미조여행/남해미조가볼만한곳)천하몽돌해수욕장. 천하마을의 몽돌해수욕장에서 힐링을 하다.
명승지가 아니라도 가보고 싶은 곳을 여행 하다 보면 그 마을의 지명이 사실 많이 여행자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이번에 찾았던 천하마을이 꼭 그러한 경우입니다. 천하 하면 먼저생각나는게 ‘온세상’을 뜻하거나 천상천하의 경우처럼 하늘 위에도 하늘 아래에도 이만한 마을이 없다는 뜻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천하몽돌해수욕장 주소:경상남도 남해군 미조면 송정리
그러나 미조면의 천하마을은 앞의 두 뜻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도 남해군 미조면의 천하 마을은 하늘 위에나 아래에나 이세상에서 딱 하나뿐인 만큼 아름다운 바닷가마을이란 의견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천하 마을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천하란 뜻은 ‘하천 아래’란 뜻인데 일제 강점기에 전국의 지명을 한 자로 바꾸면서 생겼났다 합니다. 원래 마을에서는 ‘내아래’ 뜻인 ‘내~래’라 불렀다 합니다. 내는 하천을 뜻합니다. 지금도 마을에서는 ‘내~래’라고 더 많이 부른다 합니다.
남해도에 무슨 하천이 있을까 싶지만, 해상국립공원인 금산에는 다홍치마의 주름처럼 많은 계곡이 뻗었는데 그중에서도 쇳개골과 내래골이라 불리는 두 개의 큰 계곡이 있으며 골짜기 안에서 서로 합쳐져 두 개의 저수지를 만들었습니다. 이 저수지는 일제강점기에 미조면의 식수원으로 사용되었으며 수량이 풍부하고 수질 또한 맑고 깨끗하다 합니다.
하천 아래인 천하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계절 내내 풍부한 수량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풍부한 수량만큼 여름철에는 바닷물도 맑아 많은 피서객이 찾아오며 봄·가을·겨울에는 도심의 찌든 때를 씻기 위한 힐링 여행지로 주목 받는 곳입니다.
필자도 이번 겨울에 남해바래길의 하나인 섬노래길을 걷기 위한 출발지로 우연히 찾았다가 천하 마을의 전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마을과 바다를 가르며 늘어선 수백 년 된 느티나무는 천하 마을의 고적을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항아리같이 움푹 들어 않은 겨울의 천하 마을은 ‘고요함’ 그 자체였습니다. 세찬 바람 소리만 생명이 살아 있다는 듯 더욱 요란하게 불어 제겼습니다. 마을은 고요함을 깨우는 건설장비의 기계음만 들릴 뿐 모두가 숨을 죽였습니다. 천하 마을은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마을로 통했다 합니다.
물이 풍부하고 품질이 좋은 나무가 금산에 지천으로 있어 집을 짓고 한겨울 땔감걱정이 없으며 물이 많아 농사도 짓고 물고기도 잡는 반농반어의 복 받은 땅인 천하 마을. 천하 마을 앞의 해변에는 다른 해수욕장과는 다르게 모래가 아니라 몽돌로 이루어졌습니다.
몽돌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으나 그러나 길게 이어진 몽돌해변을 보면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밀려드는 파도가 빠져나갈 때는 쟈르르 쟈르르하며 돌을 씻는 소리인지 돌이 구르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천상의 하모니 같이 아름답게 들립니다.
아름다운 숲과 해변의 몽돌 그리고 파도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세파에 찌들어 축 늘어진 어깨를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사람이 사는 세상이 꼭 이런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곳에서 KBS 2TV 드라마 ‘상두야 학교 가자’가 촬영되었던 곳입니다.
(청송여행/청송가볼만한곳)청송국가지질공원 백석탄. 포말을 일으키며 일렁이는 파도 같은 독특한 바위인 녹색길의 길안천 백석탄.
청송 국가지질공원 두 번째 여행지는 백석탄입니다. 만안자암단애와 백석탄은 길안천에서 쌍벽으로 꼽을 정도로 계곡의 유명세로 일찍부터 알려졌습니다. 백석탄은 만안자암단애와 같은 신성계곡인 길안천에 조성된 녹색길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곳에 자리하여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이 찾아들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등지며 우연히 찾아들었다가 이곳의 아름다운에 반해 몸을 의탁했던 곳이 고와마을입니다. 백석탄을 품은 고와마을의 유래를 보겠습니다. 조선시대 양전란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마을이 개척되었다 합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켰던 고응척(1531~1605)은 안동과 경계인 가랫재 전투에서 왜군과 싸웠지만 종과 부적으로 패하여 쫓기게 되어 고와마을로 숨어들었습니다. 다음날 고응척은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길안천과 백석탄의 풍경을 보면서 꿈인지 생시인지 분별할 수 없는 선계 같은 착각을 일으켰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난 뒤 마을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길이 없어 백석탄의 바위도 매끈한 게 너무 고우며 마음까지도 고와진다 하여 ‘고와’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합니다.
그리고 병자호란으로 또다시 나라가 전란에 휩싸이자 경주의 김몽화란 분이 왜군과의 전투에서 그만 순절하였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비분강개한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자 은거를 하려고 이곳을 찾아들었습니다. 김한룡은 이곳의 아름다운 자연에 푹 빠져 한평생을 보내리라 다짐하고 지금의 마을을 일구었습니다. 그리고 마을 앞을 흐르는 계곡을 고계라 이름하고 계곡 한쪽에다 아버지가 입었던 갑옷과 투구를 묻었다 합니다. 후에 사람들은 이곳을 장군대라 불렀습니다.
백석은 흰 돌을 뜻합니다. 실제 백석탄을 찾았던 저로서는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파도가 겹겹이 밀려오는 듯한 착각에 백석탄을 보면서 감탄했습니다. 길안천에서 최고의 선경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마침 우리가 도착했던 시각에 아주머니 한 분이 삼각대를 바치고 한곳에다 초점을 맞춘 듯 백석탄의 아름다움을 열심히 사진기에 담고 계셨는데 그 모습이 정말 진지해 보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백석탄의 모습을 차곡차곡 사진으로 담았을지 궁금했습니다. 청송군에서는 관내 가장 아름답다는 비경을 8경으로 지정했는데 신성계곡에서 백석탄에 이르는 3km의 계곡을 청송에서 가장 아름답다 하여 제1경으로 꼽았습니다. 그만큼 백석탄은 청송군민의 자랑으로 사랑받는 최고의 계곡입니다.
‘하얀 돌이 반짝거리는 개울’이라는 백석탄은 억겁의 세월 동안 깎이고 물이 흐르면서 닳아빠져 반들반들해지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에 따라 백석탄 곳곳에는 많은 이름이 붙었습니다. ‘마음을 씻는다’는 세심대. ‘고기를 낚는다’는 조어대, ‘갓끈을 씻는다’는 탁영대 등 은둔하여 유유자적하는 선비도, 혼탁한 마음이 스며들지 않기 위해 항상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갓을 정제하는 올곧은 선비도 즐겨 찾았던 백석탄은 청송 국가지질공원에서 빠질 수 없는 곳입니다.
백석탄이 생기게 된 원인을 보면 길안천이 흘러가면서 오랜 세월 동안 풍화작용과 침식으로 인해 암반에 크고 작은 구멍이 생겼는데 이를 포트 홀 또는 돌개구멍이라 합니다. 특히 백석탄은 흰빛을 내지만 푸른빛이 나는 듯한 돌로 이루어져 많은 관광객의 호기심을 끌고 있습니다. 백석탄도 퇴적암으로 이루어졌는데 다른곳과 달리모래알갱이가 굳어진 퇴적암이며 이를 사암이라 합니다.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의 백석탄이 모래알갱이 중에서도 풍화작용과 침식이 강하고 또한, 흰 모래로 이루어진 사암이기 때문이며 백석탄의 암석이 흰색이되었다하며 오랜세월 동안 깎여서 아름답고 독특한 지형인 백석탄을 만들었으며 다양한 지질를 관찰할 수 있는 곳 중 한곳이라합니다. .
청송의 지질명소를 여행하고 왔습니다. 청송에는 지금 세계지질공원회원국으로 청송 국가지질공원이 신청했으며 올해 세계지질공원에 회원국 가입이 확실시된다고 하니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질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특히 청송은 수직 단애를 이룬 암석과 바위봉우리가 엄청나게 많은 곳입니다. 그중에서도 이번에는 신성계곡에 조성된 둘레길를 녹색길이라 합니다. 그 중간에 있는길안천변 ‘만안자암단애’를 소개하겠습니다.
만안자암단애 주소:경상북도 청송군 인덕면 지소리 만안삼거리 새마을교 옆 길안천변
자암(紫巖)은 붉은 바위를 뜻하는데 만안자암단애의 바위색깔이 꼭 설악산의 적벽처럼 붉다며 ‘붉은 바위’ 뜻인 적벽으로도 불린다합니다. 설악산 천불동 계곡의 수백m 높이의 화강암 바위인 적벽에는 훨씬 못미치지만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을 두른 듯 그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 신성계곡의 대표 절경지 중 하나로 여름철에 많은 관광객이 휴식을 취하며 찾는 곳입니다.
만안자암단애를 이루고 있는 바위는 약 1억2천만 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에 만들어진 퇴적암입니다. 이는 돌멩이나 모래 등의 퇴적물이 깊이 묻혀 굳어진 것을 말하는데 이를 퇴적암이라 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지각이 융기하여 땅속에 있던 퇴적암이 지표면으로 올라오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퇴적암층 위로 물이 흐르며 퇴적암을 깎아내어 하천을 만들었습니다.
장구한 세월 동안 풍화와 침식으로 퇴적암이 깎여 나가면서 절벽을 만들고 그 절벽의 갈라진 틈인 절리를 따라 바위가 떨어져 나가고 물에 씻겨지면서 지금과 같은 수려한 모습의 만안자암단애가 만들어졌습니다. 청송국가지질공원인 신성계곡의 만안자암단애를 사진으로 구경해보세요. 정말 아름답습니다.
(안동여행/안동가볼만한곳)안동이천동석불상, 제비원석불, 제비원 미륵불로 불리는 오뚝이를 닮은 독특한 마애불.
이번 안동여행에서 전체 높이가 12.39m인 대불을 보고 왔습니다. 안동 ‘제비원 석불’이라고 불리는 안동 이천동 석불상입니다. 제비원 석불은 서쪽을 보고 있으며 높은 바위면에다 부처님의 몸을 얕게 새겼으며 그 위에 따로 불두를 조각하여 올린 마애불의 형태라하겠습니다. 현재 이천동 석불상은 불두의 뒷부분은 수직으로 잘려나간 자연석이며 머리 가운데에 육계를 큼지막하게 만들었는데 밑에서 보면 확인하기 힘들지만 얼굴 부분과 또 다른 돌을 다듬어 얹었습니다.
불두를 보면 얼굴은 부풀어 오른 듯 풍만하며 눈썹 사이에 백호를 양각하였고 실눈을 뜬 듯 좁으면서 길게 표현한 눈 위에 반원형의 눈썹을 짙게 나타내었습니다. 우뚝 솟은 코와 두툼하고 다부져 보이는 입술은 옅을 미소를 머금었으며 전체적으로 장중 근엄한 인상을 잘 나타내었습니다. 목에는 삼도를 새겼고 바위에 직선으로 얕게 새긴 몸체는 불두의 근엄함보다 아주 단순한 느낌입니다.
몸체에 걸친 법의는 양어깨를 감싼 통견입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왼쪽 어깨의 옷 주름과 오른쪽의 법의 자락이 서로 교차하여 접히고 가슴 밑으로 속옷의 띠가 보입니다. 양손은 모두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를 맞대어 오른손은 배에, 왼손은 가슴에 댄 입상이며 발밑에는 큰 연꽃 대좌를 음각하였습니다.
이천동 석불상의 구조를 보면 석불상을 새긴 바위 앞쪽과 오른쪽에도 높은 암벽이 막아 ‘ㄷ’자 형태의 구조입니다. 이는 석굴 형태로 17세기 초 안동읍지인 ‘영가지’에 불상 위에 기와지붕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불두 위로 닫집이 있었다 합니다. 지금도 이들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불상 어깨에 남아 있습니다,
석불 앞 바위 끝에는 연미사 중수기 비석이 현재 있으며 634년인 선덕여왕 3년에 명덕이 창건하였다 합니다. 부처의 몸체 위에다 부처 머리를 따로 만들어 올린 마애 석불상을 저는 경주 남산의 약수계곡 마애입불상만 알고 있었습니다. 17m의 거대한 불신에 불두는 증발하여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이리 온전한 형태의석불상인 이천동 석불상이 남아 있는 것을 이제야 보게 되어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이때까지 ‘제비원 석불’로만 알았는데 공식명칭은 안동이천동석불상으로 불리는것을 이번에 알았습니다. 개미가 코끼리를 보기 위해서는 멀리 떨어져야만 얼마나 큰지 코끼리 전체를 다 볼 수 있습니다. 거대한 이천동석불상도 마찬가지로 불상 바로 밑에서는 온전한 제비원의 석불을 한눈에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연미사 바깥으로 돌아 나와 공원에서 봐야만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이천동석불상 전체를 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마애의 불신과 불두를 따로 조합한 형태는 통일신라 후기와 고려 전기에 아주 유행했던 양식으로 안동 이천동 석불상도 이 시기에 조각된 고려 시대 석불상이며 1963년 1월에 보물 제115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안동 이천동 석불상 뒤편의 암벽 위에 단층 기단의 삼층석탑이 남아 있으며 고려 시대 석탑으로 보고 있습니다. 탑의 높이는 3.5m이며 이는 석불상 뒤에 흩어져 있던 탑재를 모아 복원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 때문에 현재 기단부와 탑신부의 구성과 비례 또한, 맞지 않아 부조화 서럽다 합니다. 아쉬운 점은 삼층석탑을 볼 수 있게 올라가는 길이 없는 건지 내가 찾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천동 석불상 옆에서 먼발치로 보고 왔습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9호,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이천동 석불상을 왜 제비원 미륵불, 제비원 석불이라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현재 미륵불이 있는 앞 넓은 공원이 오래전에 원(院)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원은 요즘으로 치면 여관으로 여행객이 쉬었다 가는 곳입니다. 고려 시대부터 교통의 중요한 길목에는 지방으로 출장을 가는 관리의 숙소로 사찰을 숙소인 원으로 국가에서 지정해 사용하게 했는데 연구사도 그중 한곳이었습니다.
이곳을 지나면 태산준령인 험준한 소백산의 죽령이나 나는 새도 쉬어 간다는 문경의 새재로 이어져 그 길목인 이곳 연비원에서 피로를 풀며 휴식을 취했다 합니다. 연(燕)은 ‘제비연자’로 제비에 원자가 붙어 제비원이 되었으며 왜 제비원이라 부르게 되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이곳이 제비원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게 이천동 석불상 때문입니다.
석불상은 ‘ㄷ'자 형태의 암벽으로 둘러싸였으며 그 위에다 석불상을 보호하는 기와지붕을 덮었다고 했습니다. 그 지붕을 덮은 모습이 제비와 비슷했는지 ’연자루(燕子樓)‘라 했으며 그 끝에다 요사를 짓고 제비의 꼬리를 뜻하는 연미사(燕尾舍)라 불렀습니다. 또한, 석불 아래 법당은 제비부리를 뜻하는 연구사라 했습니다.
그러다 1934년경 연미사 자리에 새로 절을 세우고 연미사(燕尾寺)라 개칭하여 오르게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석불을 보호하는 기와지붕을 올렸던 게 제비원의 시초가 되었으며 조선 중기에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연구사는 폐사되었고 이천동 석불만 전설이 되어 남게 되었으며 근대에 와서 연미사기 지어졌습니다.
이천동 석불상이 불두와 불신이 분리된 데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로 온 이여송이 칼로 내려쳤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여송은 전란이 끝나자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관과 함께 조선에 큰 인물이 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전국 명당의 혈을 끊으려 다녔습니다. 이여송이 제비원 앞에 이르자 갑자기 타고 다니던 말의 발굽이 땅에 붙어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이여송은 주위에 서 있는 석불을 발견하고 단칼에 석불의 목을 내리치자 불두는 땅에 떨어졌고 목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합니다. 지나가던 스님이 이를 보고 다시 불두를 제자리에 올려 놓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석불의 가슴에는 그 당시 흘렸던 핏자국과 왼쪽 어깨에는 이여송이 타고 온 말 발굽 자국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제비원은 민속신앙인 성주풀이의 본향이라 합니다. 성주풀이 소리에 ’성주 본향이 어디 에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일러라 사설로 알 수 있듯이 이곳 제비원 석불이 매우 뜻깊은 곳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불경스럽지만 제가 만나본 제비원 석불은 꼭 오뚝이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시골의 거랑이나 골짜기에 있는 작은 웅덩이에는 마을을 지키는 ‘찌끼미(지킴)’가 있다는 그럴싸한 전설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습니다. 꼭 그런 곳이 주위 어느 곳보다 산수가 빼어나 여름철이면 인근의 주민이 나와 더위를 식히고 아이들은 신이나 멱을 감고 무더운 여름철을 보내는 주민들의 사랑방 같은 역할도 합니다.
이번에 보고 왔던 석현마을의 소천리 새김글인 ‘첨앙대’는 마을의 찌끼미인 용이 둥지를 틀만 한 꼭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부산에서 청도군 금천면 소천리 첨앙대를 찾아가는 길은 밀양톨게이트에서 나와 중앙고속도로를 벗어나도 구절양장 같은 꼬불꼬불한 지방도를 한참은 거슬러가야 했습니다.
만송정
동곡리를 지나면서 산길은 더욱 외진 길로 바뀌고 막다른 길인 듯 보이는 곳이 청도군의 끝자락인 소천리(小川理)입니다. 이곳을 지나면 경산땅입니다. 소천리는 이름 그대로 작은 하천이란 뜻입니다. 이는 운문면의 대천과 비교하여 생긴 지명으로 지금은 운문댐이 들어섰지만 큰 하천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아 붙여진 지명입니다.
소천리는 4개의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동서남북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오직 하늘만 빠끔히 열려 있습니다. 이곳에는 산을 후벼 파내 큰 개울이 생길 수 없어선지 가늘지만 긴 골짜기인 부일천이 소천리 석현마을을 감으며 지나쳐갑니다.
일신탕
석현은 돌고개를 말합니다. 이는 경산시 용성면의 대종리와 경계하는 곳에 큰 바위가 있는 고개라 하여 돌고개라 부릅니다. 반룡사, 용천리, 용전리 등 이 주위의 지명은 대부분 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석현마을의 돌고개에서부터 장전마을까지 'S'자로 급하게 휘돌아가는 물길이 흡사 용이 물을 마시는 모습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런 곳에 진경산수를 뜻하는 경관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석현교를 건너는 왼쪽에 부일천을 밟고 올라선 바위가 있으며 휘어진 소나무와 포개 앉은 층층대는 빼어난 산수를 자랑해 석현마을에서는 오래전부터 솔찐바위라 부른다는 마을 할머니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현재 바위 옆에는 마을 쉼터가 만들어져 있으며 일찍이 청도의 선비들이 경치 좋고 산자수려하여 이곳에 숨어들어 자연을 노래하고 시를 짓고 벽에다 글을 남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석벽의 바위 면에는 여러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청도군에서는 이를 ‘소천리 새김글’이라 부릅니다.
가장 먼저 만나는 게 시멘트로 덧칠한 바위 위에 이끼를 뒤집어쓴 ‘첨앙대(瞻仰臺)’ 글씨입니다. 자연경관이 빼어났음을 나타내는 뜻이며 이 밖에도 ‘일신탕(日新湯)’, ‘만송정(晩松亭)’의 큰 글씨가 뚜렷한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만송정을 보면서 오래전에는 이곳에 정자도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박응곤, 박진수, 박영수의 시구 4수가 남아 있다는데 짙은 물길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 음각된 시구를 다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병술원춘(丙戌 元春)’ ‘신사 칠월 일(辛巳 七月 日)’은 조성 시기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들에 관한 정확한 인물정보가 남아있지 않아 조성 시기에 대한 확인은 어렵다합니다. 이를 토대로 조선 말기에 조성된 글씨로 추정만 하고 있습니다.
소천리 새김글은 청도군 금천면소재지인 동곡사거리에서 대구·경산 방면 지방도 919호선을 따라가면 소천리 장전마을에 이릅니다. 여기서 오른쪽 반룡사 방향인 ‘소천·대종길’을 따라가면 석현교인 작은 다리가 나타나며 다리 왼쪽 바위면에 소천리 새김글이 있습니다. 혹시 반룡사를 여행할 때 선비들의 쉼터 구실을 했던 소천리 새김글을 한번 찾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안동여행/안동가볼만한곳)안동법흥사지칠층전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국보 제16호 안동 법흥사지칠층전탑 여행.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면서 오래되었다는 전탑 중 하나인 안동 법흥사 칠층 전탑을 보고 왔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모전 석탑으로는 신라 시대의 유일한 석탑인 국보 30호 분황사 구층 석탑이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3층으로 남아 있지만, 이 분황사 모전 석탑이 9층의 모습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아마 최고의 높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은 그 높이가 16.8m이며 탑을 받치는 기단의 폭은 7, 75m로 현재 남아 있는 전탑의 규모로서는 우리나라 최고를 자랑합니다. 단층의 기단 위에 7층으로 몸돌을 조금씩 줄여가며 쌓았는데 모전 석탑 주위의 지명이 법흥동인 점을 보면 법흥사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석탑 이외에 어떠한 법흥사에 관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는 지금 전탑 주위로 고성이씨 탑동파 고택이 자리하고 있는 게 그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기단부에는 희미하게나마 판석에다 돋을새김으로 팔부신중과 사천왕상을 새겨놓았습니다.
이들 부조의 조각수법은 시대가 다르게 서로 차이가 나며 탑신부는 아무 무늬가 없는 회색 벽돌을 쌓았습니다. 전탑의 각층 옥개석의 윗면에 기왓장을 올렸던 것이 보기 드물게 남아 있습니다. 이를 보면 전탑 이전에는 목탑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으며 법흥사지 칠층 전탑은 목탑을 모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탑 이후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와서 화강암을 깎아쌓은 석탑으로 그 양식이 바뀌었는데 목탑-전탑-석탑으로 우리나라 석탑의 변천이 바뀌었습니다.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화강암 석탑의 많은 부분이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석탑임을 알 수 있습니다.
법흥사지 칠층 전탑의 상륜부는 금동제로 만든 상륜이 올려져 있었다지만 지금은 안타깝게 노반만 남아 있습니다. 법흥사지 칠층 전탑의 축조방식을 보면 기단은 방형이며 동·남·북 3면에 6장씩 팔부신중과 사천왕상을 판석에 세기고 맨 아래층의 탑신 밑면은 원분 모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정면의 계단은 단층기단 형식이며 8개의 계단 끝에는 높이 90cm, 너비 54cm인 부처님을 모신 감실을 두었습니다. 안동의 역사서인 ‘영가지’에 법흥사지 칠층 전탑을 1487년 성종 18년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때까지도 3칸 정도의 법흥사 건물이 남아 있었다합니다. 필자는 법흥사지 칠층모전석탑을 만나기 위해 2014년에도 찾았습니다.
당시 법흥사지 칠층모전석탑은 해체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전탑 외부를 가린 가림막만 보고 안타까워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안동여행 때 그때 보지 못했던 칠층 전탑을 만나기 위해 안동의 여행지를 바꿔가며 다시 찾았습니다. 석탑을 마주 보고 섰는데 그 웅장함은 보는 이를 압도하고도 남았습니다.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었으며 코스를 바꿔 왔던 보람이 있을 정도로 저에게는 감명을 주었습니다. 당시 해체복원 하는 과정에서 탑 내부에 나무 기둥을 세웠던 ‘심주’구멍이 확인되어 또 한 번 이목을 끌었습니다.
칠층 전탑이 워낙 높아서 가로 사진으로 다 담을 수 없었으며 전탑 바로 옆에는 철길까지 있어 어수선하고 협소해 보여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 전탑의 건립은 8세기 통일신라 시대로 추정하며 국보 제1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영덕을 들어서는 입구에 조성된 삼사해상공원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공원이 자리 잡은 곳이 삼사리입니다. 삼사리의 유래는 신라시대 때 이곳 출신 3명이 시랑 벼슬을 지냈다는 설과 시랑 벼슬을 한 3명이 숨어 살았다 하여 삼시랑 또는 삼시랑골이라 불렀는데 이 세분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삼사리란 마을지명이 생겼습니다.
삼사해상공원 주소: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삼사리 8-2
삼사해상공원 전화번호:054-730-6398
그래서일까요?? 삼사해상공원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아득한 느낌이 들며 무엇인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곳입니다. 삼사해상공원 입구에는 먼저 큰 아치로 삼사해상공원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어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삼사해상공원에는 다양한 볼거리가 있습니다.
봄에는 흐트러진 벚꽃길이 유명하며 또한 경북을 알리는 대종과 어촌박물관, 공연장, 그리고 부대시설인 숙박촌과 식당가가 조성되어 우리 일행도 이곳에서 미리 숙박 예약을 하여 겸사겸사 찾게 되었습니다.
삼사해상공원의 제1경은 역시나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일출입니다. 삼사해상공원은 영덕군에서 매년 1월 1일 해맞이 행사가 열리는 곳입니다. 내일 아침 일출을 기대하며 저녁 시간 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어 삼사해상공원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삼사해상공원의 멋진 조형물입니다. ‘바다의 빛’이란 이름답게 우아하고 멋들어진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밤에는 조명까지 들어와 더욱 화려했습니다. 영덕은 산과, 바다, 강이 어우러져 더욱 아름다우며 거친 파도를 뚫고 동해에서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바다의 빛’ 조형물에 고스란히 담아내었습니다.
영덕군민의 꿈과 희망, 영광이 조형물에 담겨 있으며 삼사해상공원은 영덕에서도 상징적인 공원입니다. 그 뒤로 검은 빗돌에 새긴 하산 김한홍 선생의 ‘해유가’시가 눈에 들어옵니다. 처음 뵙는 분이며 처음 보는 시구입니다.
첫 소절을 읽어보니 한일병탄의 암울했던 시기에 젊은 선비의 울분을 시로서 토해낸 듯하였습니다. 하산 선생은 1877년 영덕군 강구면의 작은 마을인 하직리에서 태어났습니다. 26세에 하와이의 수수사탕 농장 노무자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와이로 건너가 노무자 생활을 하다 대한제국 주하와이 영사관 서기로 발탁되었습니다.
그러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로 한일병탄이 되자 샌프란시스코로 건너와 장사를 하다 1908년 환국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칩거하면서 미국 하와이의 생활에서 보고 듣고 했던 것을 기록한 ‘해유가’를 남겼습니다. 해유가는 4.3조, 4.4조의 국한문 혼용체로 471행의 기행가사입니다. 내용을 보면 미국의 당시모습과 근대화를 이룬 일본, 조선 말기 암울한 우리나라의 모습을 가사형식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기행문이라 그런지 경주지역 등 제가 알고 있는 지명이 여러 곳이나 나오는데 해유가 비문인 ‘광화문 육조거리 잡초가 무성하고 보신각 옛집 앞에 검은 옷이 횡행이라“란 구절을 보면서 망한 당시 조선말기의 참담한 실상을 나타내었고 을사년에 미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젊은 선비의 분기탱천한 마음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착잡한 마음을 뒤로하니 큼지막한 꽃돌이 울적한 기분을 달래주었습니다.
영덕군 지품면에서 나왔다는 ‘천하제일 화문석’은 그 무게만 자그마치 20톤이라 합니다. 영덕에도 천연 매화 꽃돌이 나온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매화 향이 가득한 듯 자연이 만들어낸 화문석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감탄을 해 봅니다.
이번에는 경북대종이 있는 종각입니다. 경상북도 100년을 알리며 그 기념으로 경북대종과 종각을 조성하여 새해에 타종으로 대한민국의 아침을 깨우고 있습니다. 경북대종의 크기는 높이가 420cm, 지름 250cm, 무게가 29톤으로 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성덕대왕신종을 기본바탕으로 제작했습니다.
종신에 조각된 대금을 든 천인상과 사과를 든 비천상은 문화예술의 영덕과 경북의 대표특산물인 사과는 풍요롭고 살기 좋은 경북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강구항을 배경으로 유명한 드라마 촬영이 있었습니다.
1997년이니까 벌써 20년이 다 되었군요. MBC 주말 연속극 ‘그대 그리고 나’로 온 집안 식구를 티브이 앞에 붙들었으며 또한, 강구를 영덕대게의 대표 산지로 만든 드라마였습니다. 그리고 영덕어촌 민속전시관에는 영덕대게 잡는 방법 등 여러 전시품이 전시되어 어촌생활에 관해 볼 게 정말 많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새가 먹이를 많이 찾는다“는 속담처럼 동해에서 떠오른 일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직 사진을 담는 기술이 부족하여 잘 표현을 못했지만 마음만은 불타올라 삼사해상공원의 일출을 담아보았습니다. 영덕을 지나는 길에 한 번쯤 들렀다가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밀양여행/밀양가볼만한곳)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약산 김원봉, 석정 윤세주, 최수봉, 백민 황상규등 밀양 독립운동가 거리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안동을 양반의 고장이라면 밀양은 선비의 고장입니다. 선비가 곧 양반이라 할 분도 있겠지만, 그 뜻은 엄연히 다르며 선비는 하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자태가 고고한 학처럼 우아하고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사군자를 항상 곁에 둡니다. 그만큼 국가가 어려울 적마다 선비들은 들고일어나 자신의 목숨을 초계와 같이 버렸습니다.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주소:경남 밀양시 내일동 516-23
임진왜란·정유재란 등 많은 병란에도 민초와 선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조선 말기에도 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지며 위기를 겪었습니다. 이때에도 선비의 고장 밀양에서는 국난을 극복하는 운동이 들불같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밀양의 올곧은 선비정신이 그 밑바탕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밀양에서 일제 강점기 때에 저항 운동을 벌였던 항일 독립투사가 70여 분이나 나왔다는 게 이게 밀양의 선비정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런 선비정신인 밀양의 기개가 흐르는 곳이 내이동과 내일동를 가로지르는 해천입니다. 해천은 밀양 읍성의 방어를 위해 성벽 아래에다 파낸 인공하천입니다.
이는 1479년 조선 성종 10년에 일반 하천이던 것을 읍성 방어 목적으로 만들었으며 이를 해자라 하여 해천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해천 주위로는 밀양 항일운동의 본거지라 할 정도로 밀양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분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해천 옆 밀양 관아 앞에서 1919년 3월 13일 밀양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영남지역 최초의 독립 만세운동이라 합니다.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에는 3·13 밀양 만세운동을 비롯하여 밀양 출신으로 의열단 단장이던 약산 김원봉, 석정 윤세주, 최수봉 등 경남 밀양 출신 항일 독립운동가의 항쟁을 실감 나게 그린 벽화와 조형물 그리고 웹툰을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에 조성해 놓았습니다.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는 13개의 주제로 그려졌으며 3·13 밀양 만세운동과 김원봉, 윤세주의 새로운 조명과 생가터 발굴, 태극기 나무, 밀양 출신 독립군 69기 명패, 희망우체통, 시민 1,000여명의 메시지를 담은 타일 부착, 태극기 변천사, 천만 영화 ‘암살’의 그림벽화와 독립군의 활동상황, 조선의용대의 모습 등 말로만 듣던 독립운동의 수많은 자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시민의 휴식공간인 쉼터를 함께 조성하여 누구나 편하게 찾을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영화 ‘암살’과 ‘밀정’에 등장하는 약산 김원봉은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는 잊힌 분입니다. 일부 사람들에게만 겨우 알려졌던 약산 김원봉. 그분의 독립운동은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약산의 어린 시절 밀양 상동면 모정리에 있었던 고명학교에 백민 황상규와 윤세주 등이 함께 다녔습니다. 어릴 적부터 남다른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던 김원봉과 친구들은 ‘일왕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일장기를 학교 변소 똥통에다 처박아 넣고 일왕 생일 경축을 반대했습니다. 마침내 일장기 훼손 사건은 발각되었고 고명학교는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 조치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김원봉은 1916년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1919년에는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는 무장단체 의열단을 조직합니다. 일제의 주요기관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요인과 친일파 암살 등 항일무장테러조직인 의열단 단장을 맡은 김원봉은 23차례나 국내·외에 일본 요인 암살 및 주요 기관 폭파를 단행하여 일본경찰를 경악에 떨게 하였습니다.
김원봉은 당시 김구 선생 보다 더 많은 현상금이 목에 항상 붙어 다녔던 것을 보면 일제의 최고 경계 인물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활동하다 광복 두 달 후 임정 요인과 함께 상해임시정부 군무부장 자격으로 귀국하지만, 그에게 기다린 것은 친일 경찰 출신에게 뺨을 맞는 등 온갖 수난과 살해 위협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자괴감을 빠졌으며 1948년에 김구, 김규식과 함께 평양에서 열린 남북 연속회담에 참가했다가 혼자 북에 남았습니다. 그 후 국가검열성상, 노동상 등 북한에서 서열 3위로 오르는 등 여러 고위직을 거쳤습니다. 김일성에게는 한국동란의 공헌을 인정 받아 북한 최고훈장인 노력훈장을 받았던 인물로 한국동란과 대한민국을 교란하는 남파 간첩을 지휘하여 대한민국에 크나큰 해악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북한 김일성을 위해 많은 애를 섰으나 김일성은 권력 강화를 위해 미제스파이란 죄목으로 박헌영을 처형하고 1958년 소련파와 연안파 숙청을 하면서 함께 북한의 정권 수립에 일조한 약산 김원봉도 숙청당했다는 소문입니다.
한동안 김원봉의 이름은 금기어가 되었으며 2000년 이후 새롭게 조명받고 있습니다. 의열단에서 함께 활동했던 석정 윤세주는 약산 김원봉과 꼬치 친구로서 김원봉보다 두 살 아래였습니다. 생가 또한 해천변에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함께 다녔던 동화 중학이 폐교하자 서울로 상경하여 오성 중학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밀양으로 내려와 고향의 여러 동지와 규합하여 3·13 밀양 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 그 후 중국의 랴오닝 성 유하현으로 망명 합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학을 배웠으며 그곳에서 헤어졌던 친구 김원봉과 상봉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여 13인이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결성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거사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석정 윤세주는 폭탄을 휴대하고 국내에 잠입하지만 발각되어 실행에 옮겨 보지도 못하고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 윤세주와 많은 동지가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출옥하여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 단장을 맡고 창군된 조선의용군의 요직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1940년 겨울에 조선의용대 제3 지대를 이끌고 화북으로 나간 후 1942년 5월에 중국 태항산의 마전 전투에서 총탄으로 중상을 입고 흑룡동 동굴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정부는 독립장을 추서. 밀양 삼남면 마산리의 최수봉 또한 김원봉과 함께 동문수학했으며 그는 1920년 9월 14일 의열단 단원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 의거를 보고 고무되어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거사를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그의 투철한 애국심에 밀양경찰서는 반파하였으며 거사 후 붙잡혀 사형 선고 받았지만 대한 남아의 기개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당당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제는 급하게 사형을 집행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투거로 위축되었던 항일무장태러가 다시금 불붙는 계기가 되었다합니다.
올해 12월은 국가 보훈처에서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최수봉 의사를 선정했으며 정부에서는 1963년에 그의 높은 항일정신을 기려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이외에도 백민 황상규 등 밀양의 많은 독립투사의 행적을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태극기로 둘러싸인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를 걷다가 문득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 하는 소리가 내 귀에 쟁쟁히 울리는 듯 했습니다.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
(상주여행/상주가볼만한곳)상주자전거박물관. 우리나라 최초 자전거 박물관 상주자전거박물관 여행
경상북도 상주하면 삼백의 고장이라 합니다. 이는 누에고치, 쌀, 호랑이도 무서워한다는 곶감입니다. 그러나 그 삼백의 상주 이외에도 ‘자전거의 도시’ 상주라는 수식어가 최근에 따라붙었습니다. 솔직히 자전거 타지 않는 도시와 시골은 없습니다. 왜!! 유독 삼백의 상주를 ‘자전거의 도시’ 상주라 하는지 궁금했는데 상주박물관을 여행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상주는 현재 자전거 보유 대수가 한 가정에 2대꼴로 ‘마이카’ 시대가 아닌 ‘마이 자전거’ 시대 상주입니다. 대략 85,000대가 상주에서 굴러다닌다고 하니 상주가 왜 자전거 도시가 되었는지 여기에 그 해답이 있었습니다.
경상북도 북부가 다 그러하지만, 상주도 느낌으로는 아주 산골 같은 오지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보는 상주는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낙동강을 옆에 끼고 있는 관계로 충분한 물과 풍부한 일조권 등 거기다가 넓은 평야까지 이루어져 풍족한 쌀을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내륙에서 쌀 생산이 많은 것은 흔치 않은데 상주는 특이한 케이스같습니다.
그리고 상주를 둘러보면 주변에는 태산준령인 백두대간이 상주를 감싸고 있어 속리산 등 이름난 명산이 수두룩합니다. 그 덕택에 상주의 아름다움은 더욱 알려졌습니다. 그 험준한 산세의 품 안에는 야트막한 구릉 지대를 형성하였고 풍요롭고 윤택한 삶으로 사람 살기 좋은 모든 조건을 갖춘 도시 상주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상주역 개통기념으로 '조선 팔도 자전거 대회'가 열였습니다. 일본인은 당연히 자신들이 우승할 것이라 생각하였고 이번 기회에 일본인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전거 대회를 열었지만 정작 우승은 조선 최고의 사이클 선수였던 염복동선수가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주 출신 박상헌선수도 일본 선수를 물리치고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그동안 통한의 울분을 가슴에만 삭혔는데 이 대회를 기화로 대한남아의 자긍심을 표출해냈습니다.
당시에 ‘하늘에는 안창남, 땅에는 염복동’하며 온 조선 팔도에 메아리쳤다 합니다. 조선 팔도 자전거 대회를 기회로 상주의 자전거 100년 시대가 열렸으며, 오늘날의 ‘마이 자전거 상주’가 된 원동력입니다. 상주 자전거박물관은 지금 새로운 장소에 새로운 건물로 많이 확장되었습니다.
2002년 상주 남장동에 전국 최초로 개관했던 상주 자전거 박물관에도 한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자전거 바퀴 같은 건물이 아기자기했다면 2010년 10월 도남동에 새롭게 개관한 자전거 박물관은 3층의 현대식 건물로 박물관의 규모를 완전히 갖춘 형태였습니다.
이곳에 들어서기 전에는 사실 색다른 자전거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보통 자전거 하면 MTB인 산악자전거, 우리가 타는 일반자전거, 짐을 많이 싣는 짐자전거, 그리고 옛날 우체부 아저씨의 빨간 자전거. 아이들 세발자전거 등 통 들어도 10종류 안짝인데 이게 무슨 박물관까지 될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상주 자전거박물관을 방문하면서 나의 작은 상식은 처참히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상주 자전거 박물관은 들어서는 입구부터 만만치 않아 모든 게 자전거를 형상화한 두 바퀴를 뜻하며 또는 쌩쌩 질주하는 모습을 해 누구나 자전거박물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건물 오른쪽은 자전거 박물관을 들어서는 2층 입구입니다.
내부를 들어서면 2·3층이 상주 자전거박물관의 주 전시실로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로 꾸며져 있습니다. 상설전시관에는 세계 각국의 이색자전거인 클래식 자전거에 저의 눈이 뿅했습니다. 사실 이곳 상주 자전거박물관이 아니라면 이런 신기한 자전거를 어디서 보겠습니까. 클래식자전거는 1870년에서 1890년대 사이에 유럽과 미국 등에서 유행했던 자전거를 2004년도에 미국에서 재생산한 모형자전거로 관람객의 많은 관심을 끌며 전시 중입니다.
클래식 3인승 자전거는 앞바퀴가 16인치이며 뒷바퀴는 48인치의 4륜 자전거로 성인 3명이 탈 수 있으며 2개의 체인으로 동력이 전달되는 구조입니다. 완전 오래된 전통 자동차를 보는 듯 우아했습니다. 여기서 클래식 삼륜 자전거 등 특이한 자전거를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획전시실에는 상주에서 활동했던 자전거포를 전시실로 옮겨왔습니다. 남산 자전거의 김수길옹, 경북 자전거점 조창식옹, 벧엘 자전거점의 이점용 옹 등 이분들이 자전거 만물박사로 오늘날의 상주 자전거의 산증인이자 상주 자전거의 명맥을 있게 한 분으로 박물관의 전시공간을 채워 당시 상주 자전거포를 보면서 옛 추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할리데이비드슨(?) 자전거를 아세요. 무슨 뚱딴지 닽은 소리냐고요. 상주시와 자매도시인 미국 갤리포니아주 데이비스시와 2004년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피터 와그너 자전거 제조사에서 2010년에 기증한 ‘바운싱 윕시클’은 자전거의 할리 데이비드슨이라 해야 할까요? 보기부터 대단합니다.
2005년에 처음 제작되었으며 ‘길이라도 좋고 아니라도 좋다’며 물과 육지를 마음껏 달릴 수 있게 설계된 자전거입니다. 그리고 자전거의 황태자라는 '발드마이스터' 자전거 구경함 해보세요. 2008년 제작된 독일산입니다. 소재를 보면 너도밤나무의 일종인 나무로 프레임으로 만들었습니다.
비치 우드 판을 100겹까지 겹쳐 압축한 목재 프레임을 사용하였으며 그 외 포크, 핸들 바, 휠 등은 카본과 티타늄 소재로 만든 자전거 계의 명작인 나무자전거입니다. 이제 상주 자전거박물관 3층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먼저 만나는 게 5층 자전거입니다. 자전거 5대의 프레임을 5층으로 연결해 만든 자전거로 중심잡기가 까다로와 숙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탈 수 없는 자전거입니다. 2016년 '상주 이야기축제' 행사에 참여했던 자전거입니다. 그리고 상설전시실 안을 보면 자금까지의 자전거 형태와는 완전히 다른 초창기 자전거를 볼 수 있습니다.
3륜 고전 자전거로 핸들이 중앙에 있으며 P. 미소형 자전거는 1860년대에 프랑스인인 피에르 미쇼와 그의 아들 에네스트 미쇼에 의해 발명되었습니다. 오늘날 자전거의 형태인 페달로 바퀴를 돌리는 자전거이며 앞바퀴에 나무 페달을 달고, 안장 아래에는 흔히 ‘쇼바’라는 탄성을 가진 관스프링을 달아 승차감을 높여 오늘날의 자전거와 비슷한 형식입니다.
K. 맥밀런 자전거는 1839년 영국인 커크패트릭 맥밀런이 발명했으며 “최초로 사람이 땅에서 발을 떼고 달린 자전거”로 기록되었습니다. 1839년 대장간을 하던 맥밀런이 만든 최초 페달식 자전거로 좌우 두 개의 페달을 밟아서 연결봉과 크랭크를 통해 뒷바퀴를 돌리는 자전거를 고안해냈습니다.
드라이 지네는 1816년 독일인 칼폰 드라이스가 발명했습니다. 1816년에 프랑스에서 최초로 자전거 특허를 얻었지만, 개발은 1813년에 이미 마쳤던 드라이 지네는 세계최초의 자전거로 인정받으며 방향을 바꿀 수 있었던 첫 자전거입니다.
추억의 짐자전거...
상주에서 가장 오래된 1947년도산 자전거
자전거가 국내에 처음 들어온 것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개화기와 함께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하며 서재필 박사등이 처음 탔다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전거를 처음 보고 ‘괴물차’ 또는 ‘나르는 새’라고 불렀을 정도로 아주 신기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1898년 윤치호가 하와이에서 들여왔으며 급기야 1903년에는 조정에서 자전거 100대를 들여와 관리들에게 지급했을 정도로 인기였다 합니다.
제가 어릴 적에 가장 많이 봤던 자전거도 전시중이었습니다. 짐자전거라 불렸던 자전거로 쌀가마니, 많은 짐을 싣기에는 최고였으며 넘어지면 혼자힘으로 세우기도 쉽지 않았던 자전거였습니다. 그리고 제복을 입은 우체부 아저씨들이 타고 다녔던 빨간 자전거의 추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여 잊을 수가 없습니다.
현재 상주 자전거 박물관을 방문하면 200여 년 된 고전 자전거 모형이 전시중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기능성을 갖춘 자전거 등 요즘으로 말하면 잘빠진 꽃미남형 자전거도 전시되어 관람객의 마음을 빼앗으며, 자전거를 안전하게 타는 요령과 이동수단이 아닌 건강을 위한 자전거 등을 한자리에서 모두 만날 수 있습니다.
상주 자전거박물관에는 꼭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박물관 내에서 체험 자전거를 했다면 무료 자전거 대여소를 이용하여 자전거 체험도 즐겨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대여 자전거 종류는 2인승·3인승 자전거, 미니벨로 자전거, 르보아 자전거, 어린이용자전거, MTB 자전거 등이며 꼭 사용일 5일 전에 예약해야만 이용할 수 있습니다.
(상주여행/상주가볼만한곳)상주 경천대와 무우정. 상주 여행 1번지 정기룡 장군 전설과 경천대와 무우정 여행.
경상북도 상주여행 1번지 경천대. 경천대를 보지 않고는 상주여행을 하지 않았다 할 정도로 상주에서 가장 먼저 찾는 곳입니다. 경천대는 야트막한 155m의 무지산 아래에 'S'자로 휘도는 낙동강의 물줄기와 빼어난 절경을 빚어내며 솟구친 수직 단애의 바위는 경천대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도 남습니다.
낙동강은 어머니의 젖줄처럼 1,300리를 부드럽게 흘러 부산 하단의 하구에서 바다로 소리소문없이 스며듭니다.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은 우리와 아픔을 함께 해왔으며 근대에 와서는 낙동강을 이용하여 산업화의 기초를 세운 우리에게는 고마운 강입니다.
경천대 황톳길
엄마와 같은 부드러운 모습인 낙동강에 하늘을 바치는 기둥으로 부르는 무지산의 최고봉 옥주봉에서 그 흐름이 꺾여 낙동강 최고의 절경인 경천대를 만들었습니다. 경천대에 올라서면 상주시민이 가장 자랑하는 여행지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경천대 관광지 입구에는 육지의 이순신으로 임진왜란의 무패를 자랑하는 명장 매헌 정기룡장군(1562~1622)과 명마 동상이 있습니다. 정기룡장군은 유년시절 이곳에서 용마와 함께 수련하였고 바위에 홈을 파내어 말먹이 통을 만들었는데 그게 지금도 남아 있다 합니다.
경천전망대
이곳을 지나면 경천대의 유래비가 있는 표지석에서 왼쪽 돌계단을 오르면 무지산 전망대인 옥주봉(155m) 가는 길입니다. 전망대 오르는 길은 황톳길로 꾸며져 있으며 황토를 아주 작은 입자로 둥글게 만들어 구워 길게 등산로에 깔아 황톳길을 만들었습니다.
이곳을 지나면 곧 3층 건물인 무지산 전망대입니다. 2층에는 삼백의 고장이라는 상주 특산품인 쌀과 명주, 곶감 그 외에 청정 상주에서 생산되는 여러 물품이 전시 중이며 특히 할머니가 전해주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곶감’이야기를 형상화해 놓았습니다. 아련한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합니다.
이곳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3층의 전망대에서 보는 사방팔방 펼쳐지는 경관입니다. 유장하게 굽이치는 낙동강 하며 상주의 진산인 갑장산, 노음산 등 여러 명산이 한 폭의 그림을 펼쳐 놓은 듯합니다. 경천대 일부분만 봤는데도 눈이 휘둥그럴 정도로 깜짝 놀랄 풍경인데 경천대에서 만나는 풍경이 어떨까 더욱 궁금해집니다.
이래서 상주 경천대, 경천대 하나가 봅니다. 경천대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돌아가 만나는 갈림길에서 왼쪽 경천대·무우정 방향으로 내려서면 솔숲 사이에 4개의 큰 바위가 징검다리를 한 것 같이 늘어서 있는 게 보입니다. 이곳이 경천대입니다.
경천대(擎天臺)는 다른 말로 자천대(自天臺)라 합니다. 이는 ‘하늘이 만든 절경’을 뜻하며 그 아래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우제 터인 우담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상주에서 경천대를 가장 신성시했던 곳이라 여겨집니다. 오래전부터 빼어난 절경으로 많은 시인 묵객이 경천대를 찾아 들었으며 우담 채득기(1605~1647) 선생이 경천대 옆에다 무우정을 짓고 은거했던 곳입니다.
경천대
으며 우담 채득기(1605~1647) 선생이 경천대 옆에다 무우정을 짓고 은거했던 곳입니다. 경천대에는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이란 각자가 바위 사이 석판에 음각되어 있습니다.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연호로 청나라에 의해 망한 명나라를 받든다는 뜻입니다.
이는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조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면서 항복하였고 1637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심양에 끌려갔습니다. 우담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쫓아 군신의 의리를 다하였으며 봉림대군과 1645년 환국하였습니다. 우담은 봉림대군을 도와 북벌의 의지를 불태웠으며 자천대에다 승명사상을 뜻하는 경천대비를 세우자 후세 사람은 이를 경천대라 불렀습니다.
복수심에 불탔던 북벌은 중단되었고 우담은 봉림대군(효종)의 만류에도 곁을 떠나 경천대로 내려왔습니다. 이에 효종은 충신이 사는 곳을 눈으로 보고 싶어 화사를 보내어 자천동 28경을 그려오게 해 곁에 두었다 합니다. 경천대를 오르는 돌계단 중간쯤에는 바위에 세 개의 패인 구덩이가 있습니다.
오른쪽 두 개는 사각형이며 왼쪽은 둥근 모양인데 한 곳은 연을 기르던 곳이며, 세수대야와 명의로 이름 날렸던 우담답게 약을 제조했던 그릇인 약분이라 합니다. 무우정은 1636년 병자호란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승명의 의리를 지켜 은거하려 지은 정자로 ‘춤을 추며 비를 빈다’는 뜻입니다.
정자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무우정이 자리한 터가 기우제를 지냈던 장소인 우담입니다. 선생은 정자의 편액을 ‘무우’라 정하면서 ‘자연을 벗 삼아 도를 즐긴다’는 ‘풍호영귀’에서 그 뜻을 취했다합니다. 정자는 1748년 상주목사 이협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1948년과 2005년에 각각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무우정
경천대감음 편액
무우정에 걸린 편액을 보면 청음 김상용의 ‘우담신정기’, 택당 이식의 ‘무우정기’, 계당 유주목 등의 기문과 후손인 광식의 ‘경천대감음’이 걸려 있습니다. 무우정을 지나면 울울창창 하늘을 가린 키 큰 솔숲의 오솔길입니다.
이 길 끝에 걸린 나무다리를 건너면 현재 경천대 상도 드라마세트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2001년 10월에 MBC 창사 40주년 특별기획드라마 ‘상도’ 촬영지로 조성되었으며 그 후 여러 방송사에서 드라마 촬영장소로 인기를 끌었다 합니다. 물론 경천대를 찾는 관광객에게도 사진촬영지로 최고 인기코스입니다.
경천대 상도 드라마 세트장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은 최고 비경 지대로 움푹 팬 물웅덩이 모습을 하였습니다. 그 끝에는 길게 목을 쭉 뺀 용두봉이 감싸 안은 형국이라 용소라 부릅니다. 이곳에서 정기룡 장군이 명마를 얻었다는 연못입니다. 명마도 명장을 만나야 그 빛을 발하는 법 용소에서 뛰쳐나온 용마는 벌써 떼깔부터 달랐던 모양입니다.
건너편 회상리 매골 모래밭에서 빛을 발하며 뛰어놀던 용마를 발견하고 정기룡장군은 허수아비로 변장해 접근하여 용마의 길을 들였다 합니다. 매헌은 용마를 타고 금산전투에서 조경을 구할 때 신출귀물함이 마치 삼국지에서 유비 아들인 유선을 구하며 ‘칼춤을 췄다’는 조자룡과 닮았다 하여 ‘정자룡’이라 불렀다 합니다.
우암 송시열이 정기룡 장군의 신도비를 쓰면서 신마(神馬)라고 용마를 격찬했다는데 하늘에서 용마를 얻음으로서 매헌은 더욱 뛰어난 명장이 되었나 봅니다. 상주 1번지 매헌 정기룡 장군의 전설과 충신으로 이름을 드높혔던 우담 채득기선생의 은거지 경천대와 무우정에서의 낙동강 여행을 추천합니다.
2001년 10월 15일 방영된 MBC 창사 40주년 특별 기획 드라마였던 ‘상도’는 모두 아실 것입니다. 조선 후기 순조 때 거상이었던 임상옥의 일대기를 소설가 최인호는 ‘상도’란 제목으로 그려내었고 MBC는 50부작으로 드라마화하여 공전의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드라마 상도로 인해 거상 임상옥에 대해 더욱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임상옥의 일대기인 상도를 촬영했던 세트장이 경상북도 상주시의 경천대와 중동면 회상 나루터 관광단지 안에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먼저 경천대 관광지 안의 상도 드라마세트장입니다.
낙동강 1번지 전망대답게 많은 관광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또한 상도 드라마 촬영장까지 조성되어 경천대 이외에도 드라마세트장 자체만으로도 휘돌아가는 낙동강의 전경과 함께 관광지로서 손색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외에도 여러 방송국에서 사극 드라마 촬영장소로 자주 사용되었다 합니다.
◀상주시 경천대 관광지 상도 드라마 세트장▶
경천대 상도 세트장 주소:경북 상주시 사벌면 삼덕리 1-15
또 한곳의 드라마 상도 세트장은 낙동강 건너 옛 회상 나루 인근입니다. 회상 나루는 ‘상산지’에 그 기록이 남아 있으며 낙동강을 건너는 오래된 나루 중 한곳으로 중동면 회상리와 상주시 도남동을 연결했으며 객주는 물론이고 주막까지 갖추어 졌었다 합니다.
회상나루는 1980년대까지도 주막이 있었을 정도로 아주 큰 나루였으며 지금은 교량 건설과 교통의 발달로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아마 이곳이 드라마 상도 촬영지로서 최적의 장소가 아니었나 쉽습니다.
의주 상인 임상옥이 중국으로 떠나는 장면 등 많은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하니 다시 한 번 눈길이 갔습니다. 사실 드라마세트장을 여러 곳 찾아다녀도 봤지만 관리 부실로 버려지는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경천대가 있는 상도 세트장은 아주 관리가 잘되었으며 회상 나루의 상도 세트장도 현재 공사가 마무리 단계인 ‘회상 나루 관광지’가 완공되면 드라마 세트장으로 더욱 인기를 끌 것으로 보였습니다. 상주여행에서 경천대와 함께 여행해보세요.
용산은 높이가 겨우 400m대로 산 정상을 중심으로 동면과 남면은 완만한 경사로 석축을 쌓았으며 그와 반대로 북면과 서면은 경사가 급한 일부에는 속에다 돌을 넣고 바깥은 흙을 다진 석심토축(石心土築)을 한 퇴뫼식 산성 형태입니다.
용산 산성의 전체면적은 140,435㎡(42,481평)이며 장방형으로 성의 둘레는 대략 1.5km 크기입니다. 용산 산성의 특징은·동편에는 성을 내성과 외성으로 쌓았는데 이는 삼국시대 산성으로는 보기 드문 경우라 합니다. 현재 용산 산성의 성벽은 복원한 북문을 제외하면 훼손이 심해 원래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용산산성 북문
용산 산성을 조사하면서 밝혀진 결과는 다만 일부지만 안과 바깥의 양쪽 면을 돌로 쌓은 석축인 협축성(夾築城) 구간이 나타나고 또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한 쪽인 바깥에만 돌을 쌓은 석축인 편축성(片築城)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산성의 축조를 보면 이곳의 바위를 다듬어 큰돌로 지대석을 받쳤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위에다 30*25*30cm 크기의 돌을 깨어 한 쪽은 맞추고 허튼층으로 튼튼하게 쌓은 형식입니다. 성문은 동·서·남·북으로 한곳씩 두었으며 주 출입문은 북문으로 여겨집니다.
용산산성 북문의 우물터
이는 성문의 위치나 규모를 보면 폭이 429cm에다 490cm의 통로 길이인 규모에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가 150cm~250cm 정도인데 당시에는 성벽이 더높았을 것으로 보이며 이를 근거로 하여 일부 산성을 정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채성위에는 여장까지 갖추어진 성벽으로 여겨지나 현재 고대성곽의 여장형식을 추정할 수 없어 복원하지 않았다 합니다. 이와 함께 성안에는 여러 시설물이 있지 않았나 보고 있습니다. 성벽을 따라 장대와 망루가 곳곳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臺)의 흔적이 여러개 보이며 평지에는 창고의 흔적 터도 보입니다.
용산 산성의 외성에는 여러 개의 우물이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무지개 샘은 지금도 샘물이 땅속에서 솟아오릅니다. 예로부터 이곳을 기우제나 기도처로 사용하였으며 그 흔적인 돌탑과 돌계단 등이 남아 있습니다.
무지개샘
용산산성의 흔적인 외성
용산산성 동문터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김인문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군주로 임명되면서 장산성의 축조를 감독했다합니다. 장산성이 오늘날의 용산산성을 뜻하며 이를 토대로 삼국시대 산성으로 추정.
난포는 영천최씨 최철견(1525~1594)의 호이며 원래 경북 영천의 금호에서 20대 초반인 1546년 명종 첫해에 지금의 장소로 옮겨와 지었습니다. 이게 난포 고택이라 부르게 된 연유입니다. 난포 고택의 구조를 보면 안채와 사당, 그리고 좌우 행랑채, 안채와 마주 보고는 큰 사랑채와 좌우에 고방채, 중사랑채 또한, 큰사랑과 마주하고는 대문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의 가옥구조에서 많이 축소되었습니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과 수오당 등이 남아 있으며 조금의 변화는 있지만 난포 고택의 안채만은 옛날 모습 그대로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수오재
정침인 안채를 보면 앞면이 7칸에 옆면은 1칸 반인 한일(一)자형 건물입니다. 현재 건물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가운데 5칸은 지붕을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좌우 1칸은 지붕을 덧달아낸 형태로 마치 팔작지붕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건물 형태는 경상북도 영천, 경주, 경산등의 남부지방에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대청인데 특이하게도 문짝을 달았으며 뒷벽 쪽에다 다락을 넣어 대청을 양쪽 방과 연결하도록 했습니다.
남포 고택의 안채는 임진왜란 등 여러 전란에도 소실되지 않았으며 현재 건물의 상량문에는 1816년의 중수기록의 흔적과 지붕에 설치한 막새와편 명문을 보면 1809년인 순조 7년에 보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랑채는 앞면 4칸에 옆면 1칸의 맞배지붕 홑처마 지붕입니다.
현재 큰 사랑채와 대문채는 최근에 복원하였으며 사랑채의 개방된 누마루에서 보는 용성면의 진산인 용산을 바라보는 맛은 최고라 하겠습니다. 대문채 오른쪽에는 오래된 은행나무와 용산에서 옮겨 세운 수오재가 있고 난포 고택의 역사를 보여주는 500년 된 은행나무는 노란 물감을 드린 듯 난포 고택의 역사를 말해주었습니다.
난포 최철견은 낙향하여 용성의 곡란에서 지냈습니다. 그때 왜적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자 70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손자 인수와 증손자 준립 등과 함께 창의하여 영천의 권응수와 합세하여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특히 영천의 아화산성 전투에서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합니다
난포 고택은 명당으로도 전국에서 손을 꼽는다 합니다. 이는 1929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민속연구가 무라야마 지준이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면서 우리나라 고택 중에서 36곳을 대표 풍수적 길지로 선정하고 ‘조선의 풍수’란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중에는 난포 고택도 포함했는데 그는 난포 고택을 부용화 지형이라 설명했습니다.
난포고택 사랑채
고택 앞의 용산이 부용화라면 난포 고택을 향해 힘차게 내리뻗은 한줄기 굵은 능선은 부용화의 꽃대로 그 끝자락에 모인 혈에 난포 고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인지 17대 400여 년 동안 사람의 향기가 끊이지 않았던 게 명당터로서 살기 좋은 길지 중 한 곳인가 봅니다.
경산 용성면 난포고택 사진으로 즐기기
고향 생각이 절로 나는 손자와 할머니 조각상
난포고택 안채
정침인 안채를 보면 앞면이 7칸에 옆면은 1칸 반인 한일(一)자형 건물입니다. 현재 건물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가운데 5칸은 지붕은 옆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좌우 1칸은 지붕을 덧달아낸 형태로 지붕은 마치 팔작지붕처럼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대청인데 특이하게도 문짝을 달았으며 뒷벽 쪽에다 다락을 넣어 양쪽의 방과 연결되도록 했습니다. 남포 고택의 안채는 임진왜란 등 여러 전란에도 소실되지 않았으며 현재 건물의 상량문에는 중수기록의 흔적과 지붕의 막새와편 명문을 보면 1809년인 순조 7년에 보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랑채는 앞면 4칸에 옆면 1칸의 맞배지붕 홑처마 지붕입니다.
(예천여행/예천가볼만한곳)삼강나루 삼강주막. 낙동강인 삼강나루에서 대한민국 마지막 주모가 있었던 삼강주막 여행을 하다.
경북 예천의 삼강주막이 있는 나루를 여행하고 왔습니다. 삼강하면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 개의 강이 서로 만난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세 개의 강 중에서 첫 번째는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이여 두 번째는 경북 봉화에서 발원한 내성천이요, 세 번째는 경북 문경에서 발원한 금천입니다. 이 강이 모두 만나 큰 물줄기를 이루는 곳을 삼강이라하며 하나가 되어 낙동강이 됩니다.
삼강주막 주소: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166-1
삼강주막 전화:054-655-3132
지금이야 교통과 도로의 발달로 전국이 일일생활권에 들어 그만큼 빠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이곳 삼강나루터는 경남 김해의 낙동강하구에서 소금배와 물산을 실은 배가 경북 안동의 하회마을까지 올라갔으며 그 길목인 이곳 삼강나루에도 짐을 부려 놓고 갔습니다.
이곳에서 소금과 물산은 모두 영남 내륙으로 수송되어 항상 많은 사람으로 붐볐습니다. 또한, 동래를 출발하여 한양으로 향하는 영남대로도 세 갈래 길이었습니다. 그 길 가운데에는 각각 모두 큰 고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영남의 선비들은 추풍령과 죽령은 모두 피하면서 꼭 이곳 삼강나루를 건너 문경을 지나 문경새재로 넘어다녔습니다.
그 이유는 과거시험에서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죽 쑨다며 모두 회피했지만, 문경은 “반가운 소리를 듣는다”란 뜻으로 장원 급제 소식을 듣는다는 뜻에서 과거 보는 선비는 모두 삼강나루의 주막에서 유하거나 돛단배로 건너 문경를 지나 새도 넘어가며 쉬어 갔다는 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향했습니다.
삼강절경
삼강주막
오래전부터 삼강주막은 이곳을 찾는 사람에게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었으며, 과거객과 보부상들의 숙식처로 삼강나루의 주막은 매우 유용했습니다. 그 삼강주막이 최근인 2005년까지 존재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티브이의 사극 드라마에서 가끔 봤던 모습이 실제 있었다 하니 저 또한 믿기지 않습니다.
삼강주막 앞에서 “주모, 주모, 국밥 한 그릇 말아주시오”하는 소리가 삼 강에 메아리가 되어 들리는 것 같습니다. 현재 삼강나루에는 삼강주막의 마지막 주모 유옥연 할머니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옵니다.
1917년 이웃한 풍양면의 우망골에 태어났으며 16세에 결혼했지만 34세에 남편과 사별하자 2남 2녀의 어린 자식을 키우기 위해 전주인에게 삼강주막을 넘겨받아 2005년 10월 89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50여 년간 삼강나루를 지키는 마지막 주모가 되었습니다.
글자와 숫자를 배우지 못했던 유 할머니는 손님이 외상을 하면 부뚜막 위에 자신만이 알 수 있는 표시를 했습니다. 지금도 부엌의 토담 벽에는 할머니가 그은 금이 남아 있는데 막걸리 한잔이면 짧게 금을 그었고 한 주전자는 길게 금을 그어 표시했습니다.
뱃사람 외상장부
그리고 외상값을 다 갚으면 가로금을 그어 지웠으며 금을 그은 할머니는 누구의 외상값인지 훤하게 알고 있었으며 지금도 가로금이 그어지지 않은 것은 누군가 외상값이 남아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합니다.
삼강주막의 방 내부 여러곳으로 출입문이 붙어 있습니다.
유할머니의 외상장부
그리고 한쪽 벽에는 뱃사공들의 외상값도 금으로 그어져 있으며 그 위를 투명판으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는 관광객의 훼손으로 인한 조치로 보입니다. 유 할머니가 인수했던 삼강주막은 지금부터 110년 전인 1900년경에 처음 지어졌으며 부엌에서 방으로 통하는 여러 출입문을 보면 규모는 작지만, 그 기능에 충실해 지어졌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강주막은 건축역사 자료로서 희소가치와 당시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지역적인 역사와 문화적 의의가 있으며 2007년 말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또한, 주막 뒤에는 500년이 넘은 회화나무 3그루가 삼강나루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삼강주막 뒤 500년된 회화나무
무인판매 선물용 생막걸리입니다.. 이자체가 냉장고였습니다.
주모가 보내주는 우체통, 333일 뒤에 배달 된다네요.
삼강주막 차림표
소고기국밥입니다. 역시 주모가 끓여주는 국밥이 최고죠. 이 쇠고기 국밥을 먹고 부산으로 향했다는....
이번 경주 여행은 폐사지입니다. 황룡사지, 사천왕사지 등 폐사지라도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지를 뜻하는 감투(?)를 하나쯤 모두 쓰고 있는데 구황동 폐사지는 많은 부재가 남아 있음에도 문화재 지정 타이틀이 없이 그저 울타리만 둘려 잡초더미에 묻혀 있습니다. 이곳은 분황사와 황룡사지에서 도로 하나를 두고 있는 폐사지입니다. 사찰의 이름을 확인할 길이 없어서인지 모르지만, 동네 이름을 따와 구황동 모전 석탑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아니 사실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찰 이름을 비정할 수는 있습니다. 이유를 알아보면 현재 구황동 모전 석탑 지에서 일제강점기인 1930년경에 일본인이 ‘도림(道林)이란 기왓조각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추정해보면 도림사가 맞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으며 삼국유사에 ‘도림사는 입도림 곁에 있었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는 신라의 수도 즉 서라벌 입구에 자리했던 절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구황동 모전 석탑지가 도림사 폐사지가 맞다면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옵니다. 무엇이 재미있냐고요? 모두 아시는 이야기인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신라 48대 왕은 경문왕입니다. 경문왕 때의 이야기입니다. 경문왕은 어느 날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더니 자신의 귀가 당나귀 귀와 같이 길어져 있었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 큰일 났다며 좌불안석 같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당나귀 귀같이 귀가 길다는 비밀은 왕후와 신하들 모두에게도 비밀로 하였지만, 자신의 왕관을 만드는 사람인 복두장에게 만은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경문왕은 복두장에게 만약에 비밀을 발설하면 죽음뿐이라고 입단속을 시켰습니다. 하하 그리고 보면 사람이란 남이 모르는 비밀을 자신만 알고 있다면 입이 얼마나 근질근질 했겠습니까.
그것도 임금님 귀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요즘 같으면 ’특종‘감인데 말입니다. 아마 복두장이는 그 비밀을 말하고 싶어 제 명에 못 살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복두장이는 시름시름 몸을 앓았고 죽기 전에 비밀을 다 털고 갈 욕심에 도림사의 대나무 숲에서 “우리 임금님은 당나귀 귀”하며 큰소리로 외쳤고 복두장이는 죽었습니다. 그 후 바람만 불면 도림사 대나무 숲에서는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며 복두장이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경문왕은 큰일 났다며 사람을 시켜 도림사의 대나무숲을 모두 베게 하고 산수유를 심게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하며 소리가 났다 합니다. 이게 실제 사실이라면 경문왕은 황당해 했겠습니다.
모두 초등학교 때 수업시간에 재미있게 들었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전설의 실제 도림사라면 한 편의 드라마 같은 느낌입니다. 구황동 모전 석탑 지가 도림사였다 생각하니 어디선가 갑자기 복두장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이곳 구황동 모전 석탑지의 남아 있는 부재를 보면 통일신라 시대 모전 석탑 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전 석탑은 중국의 벽돌탑을 모방하여 만든 탑이라 하여 모전 석탑 또는 전탑이라 하며 남은 부재로 짐작해보면 분황사 모전 석탑과 같은 형태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허물어져 산산이 조각났지만 남·북 감실의 돌기둥 2쌍만은 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돌기둥이 배치된 모양으로 짐작해보면 탑은 정사각형이며 한 변의 길이가 4.5m쯤 되는 크기입니다.
이는 한 변이 13m인 분황사보다는 크기 면에서 아주 작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1층 탑신의 사면에다 감실을 넣고 사방불을 모신 형식이며 돌기둥에는 사천왕인 인왕상을 조각했는데 그 섬세함이 통일신라 조각 기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한 쌍의 인왕상 돌기둥은 금강역사상으로 국립경주박물관 고분관 입구에다 배치해 놓았다 합니다. 그러나 구황동 모전 석탑지의 부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게 화강암 석탑의 지붕돌인 옥개석과 탑신을 바쳤던 지대석입니다. 이를 보면 모전 석탑에 의문이 가는 것도 사실이지만, 저는 사학자가 아니라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구황동 모전 석탑지에 남아 있는 부재인 인왕상 돌기둥 등을 보면 모전 석탑임이 틀림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사천왕사지. 황량한 폐사지에 잡초만 무성, 초석만 천년 흔적을 말해주는 경주 사천왕사지 여행.
경주는 신라와 통일신라를 거쳐오면서 오늘날 수많은 불교 문화재가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이 나뒹굴어 혹시 돌멩이도 문화재가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경주를 문화재의 보고라 합니다. 그러나 경주여행을 하면서 황당한 경우를 당하는 게 더러 있는데 폐사지에서 그 많은 불교 문화재가 흔적도 찾을 수 없을 때 입니다. 이번과 같은 사천왕사지 방문이 꼭 그런 경우입니다.
경주 사천왕사지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935-2
사천왕 사지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세 가지 예지력에 등장하는 사찰입니다. 어느 날 선덕여왕은 신하들에게 자신의 죽을날을 미리 알려주며 도리천에 장사지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을 이해 못 한 신하들은 선덕여왕에게 도리천이 어딥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선덕여왕은 낭산 남쪽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다 그날에 진짜로 선덕여왕은 승하하였고 신하들은 모여 선덕여왕의 유언대로 낭산에다 장사지내며 왜 여기가 도리천이지 의아해했습니다. 그리고 30년쯤 후에 선덕여왕릉 아래 사천왕사란 절이 세워졌습니다.
왜 사천왕사가 지어졌으며 도리천이라 하는지 그 이유를 보겠습니다. 사찰의 일주문을 들어서면 첫 번째로 나오는 전각이 대부분 천왕문입니다. 이곳에 네 분의 사천왕을 모셨는데 모두 험상궂게 생겼으며 사찰로 들어오는 모든 악귀 등 부처님의 나라인 절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사천왕입니다. 불교에서 말하기를 28개의 하늘나라가 있으며 그중에서 첫 번째 나라가 사천왕이 지켜주는 시왕천이며 두 번째 나라가 부처님의 나라로 제석천왕이 다스리는 도리천입니다. 그러니까 사천왕사 위인 즉, 선덕여왕릉이 부처님의 나라인 도리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덕여왕의 도리천 예언은 맞아떨어졌으며 이 모든 게 삼국유사에 나와 있습니다.
그럼 사천왕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사천왕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각각 기술하고 있습니다. 679년 신라 문무왕 19년에 명랑법사가 부처님의 힘으로 당나라 군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낭산 남쪽의 신유림에 창건했다 합니다. 당나라군이 쳐들어오자 임시 건물을 짓고 명랑법사는 중국에서 배운 밀교인 문두루비법으로 바람을 불게 하고 파도를 일으켜 당나라 배를 모두 침몰시켰습니다. 이는 범어로 문두루는 무드라(mudry)의 음사로 ‘신인(神印)’으로 번역됩니다. 명랑법사는 1.2차 당나라군을 물리치고 나서 건물을 다시 고쳐 짓고 사천왕사라 했다 합니다. 현재 사천왕사지의 구조를 보면 통일신라 양식인 금당이 1개에 동·서탑 두 개의 목탑 형식으로 가람배치를 했는데 이는 통일신라 양식으로 사천왕사에서부터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사천왕사는 주춧돌과 목이 달아난 귀부 2개, 당간지주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어 당시 국찰의 면모를 갖추었던 사천왕사는 대사찰의 사격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폐허로 남아있던 사천왕사지는 일제강점기 때인 1918년 처음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1922년, 1928년에도 사천왕사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2006년에 들어 와 서탑지의 정밀조사가 다시 이루어졌습니다. 사천왕사의 체계적 인 발굴조사로 탑의 기단부와 하부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반파된 채로 남아 있던 녹유사천왕상전이 기단석에서 발견되어 사천왕상의 배치 등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합니다. 이 녹유사천왕상은 당시 신라 최고의 조각승인 양지스님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녹유사천왕상은 눈을 부릅뜨고 귀는 축 늘어 졌으며 익살스러운 치아와 생동감 넘치는 인체표현 등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갑옷과 테두리의 장식된 꽃무늬 등 모든 거 하나까지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게 조각하여 통일 신라 불교예술의 극치를 보는 것 같습니다.
현재 사천왕사지에서 볼 수 있는 유물은 사천왕사 입구에 세워진 사천왕사 당간지주입니다. 보통 사찰의 입구에 절을 알리는 당을 거는 깃대를 당간이라 하며 그 당간을 잡아주는 두 기둥을 말합니다. 지면에서 높이가 230cm에 당간의 폭은 50cm이며 현재 당간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특이한 점은 3개의 구멍이 있는데 가운데가 원형이고 나머지 상·하는 네모 구멍입니다. 또한, 당간을 받쳤던 당간 받침돌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경주 사천왕사지 목이 달아난 미석 받침돌 귀부
사천왕사지를 알리는 표지석
경주 사천왕사지 목탑지
사천왕사의 목탑지는 1금당 2 목탑의 양식을 따랐습니다. 동·서 2개의 목탑으로 금당지 앞에 좌우에 세워졌습니다. 동탑은 1.3m 높이로 흙을 쌓은 기단 위에 3칸 정사각형을 하고 있습니다. 목탑의 받침돌인 초석은 각각 정사각형이며 크기는 약 50cm입니다. 초석의 가운데 심초석은 약 118cm 크기의 네모 반듯한 모양이며 그 가운데 한 변의 길이가 30cm에 7cm 깊이로 패인 사리공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서탑지 또한 초석과 심초석이 동탑지와 같은 형태입니다.
경주 사천왕사지 금당터
금당지는 사찰의 가운데 위치하며 대웅전을 말합니다. 이곳 사천왕사의 중심부에도 금당의 기둥을 받쳤던 초석이 대부분 원형을 유지하며 남아 있어 금당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왼쪽 가운데 현재 없어진 3개의 초석은 무덤을 조성하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입니다. 남아 있는 초석으로 금당지의 크기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건물입니다. 그 가운데에 불상을 안치했던 지대석으로 추정되는 가로 약 200cm, 세로 약 100cm인 정사각형 받침돌 2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경주 사천왕사지 좌·우경루터
금당지에서 북쪽으로는 사천왕사 좌·우경루터입니다. 사천왕사의 좌·우경루는 금당지 앞의 동·서 목탑지와 배치되도록 세워졌습니다. 초석의 배치를 보면 경루는 3칸 4방의 건물이며 초석의 중심에 지름이 20cm 크기인 둥근 구멍이 패여 있어 아마 이곳에 어떤 시설물이 있었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습니다.
2006년 경주 사천왕사지 발굴 현장의 사진입니다. 가운데 금당지와 동·서 목탑지 그리고 좌·우경루터를 사진으로 확인할 수있습니다.(사진 국제신문 서순룡 기자)
사진 국제신문 서순룡 기자
녹유벽전(사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녹유벽전이란 녹색 유약을 바른 벽돌을 뜻하며 동목탑지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동목탑의 기단부를 장식했던 면석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녹유벽전(사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서탑목지에서 발견된 녹유벽전으로 기단부를 장식했던 면석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지만 폐사지인 사천왕사를 방문하면서 정말 아쉬웠습니다. 황량하게 변해버린 터에 잡초만 무성하고 그사이에 초석만 드문드문 보여 발굴 당시의 모습과 발굴과 함께 나왔던 유물을 볼 수 없었습니다. 사천왕사지에서 ‘녹유벽전’ 이외에도 ‘녹유사천왕상’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이곳의 유물은 현재 어디서 볼 수 있는지 참 궁금하고 아쉬운 부분입니다.(경주 사천왕사지 사적 제8호)
경주여행에서 이번에는 신라 제52대 효공왕릉을 찾았습니다. 897년에 왕위에 올라 912년 승하했으며 대략 15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효공왕릉 포스팅을 하면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효공왕은 성은 김 씨, 이름은 요로 신라 제49대 헌강왕의 서자로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경주 효공왕릉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14
어머니는 의명황태후 김 씨며 왕비는 이찬 예겸의 딸입니다. 효공왕의 출생은 드라마틱합니다. 부왕인 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만난 여인 사이에 태어났으며 51대 진성여왕의 뒤를 이어 895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권력을 강화하여 신라를 상대로 전쟁을 걸어왔습니다. 후고구려의 궁예가 패서도와 한산주의 30개 성을 공략하여 빼앗았고 옛 백제땅 일부를 후백제의 견훤에게도 빼앗겨 그야말로 신라는 진퇴양난이었습니다.
다시 903년에는 태봉을 건국한 궁예의 부하 왕건이 쳐들어와 금성과 주위 10여 개의 성을 빼앗아 갔으며, 907년에는 견훤에게 또다시 일선군 주위의 10개 성을 내주었습니다. 나라가 환란에 빠졌을 때 군주는 모름지기 정신을 차려 국난극복에 힘써야 하지만 거느린 애첩과 향락에 빠져 정사는 내팽개쳤습니다.
기우는 국세에 왕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졌고 이를 보다 못한 대신이 911년 효공왕의 애첩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효공왕도 오래가지 못하고 그다음 해에 승하했으며 시호를 효공이라하고 사자사 북쪽에다 장사 지냈다 합니다.
현재 효공왕의 능은 경주시 배반동 산 14에 사적 제183호에 지정되었습니다. 성덕왕을 빼고 신라왕릉 모두 다 그러하듯이 효공왕릉 또한 삼국사기의 사자사 북쪽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을 근거로 지금의 효공왕릉도 비정한 상태입니다.
효공왕릉을 보면 둥글고 흙으로 쌓은 원형봉토분입니다. 능의 지름은 약 22m이며 봉분의 높이는 약 5m로 봉분의 아래쪽에다 호석인 둘레돌을 돌렸다는 것을 드러난 돌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능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로서 당시 효공왕의 업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경북의성여행/경북의성가볼만한곳)대곡사 적조암. 비봉산 대곡사 적조암의 독특한 건축양식인 구포루 인법당.
경북 의성을 여행하다가 찾았던 비봉산 대곡사 적조암. 적조암은 대곡사의 9개 암자 중에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습니다. 먼저 적조암을 거느린 대곡사를 간략하게 언급하면 1368년인 고려 시대 공민왕 17년에 인도 승려 지공과 당시 왕사였던 나옹선사 혜근에 의해 창건하였다 합니다.
대곡사 적조암 주소: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대곡사길 200
대곡사 적조암 문의전화 054-862-6322
그러나 대곡사의 창건연대를 두고 다른 설도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말에서 고려 초로 보는 견해입니다. 백운 이규보의 대곡사 탐방에 관한 시와 인도 승려 지공 생몰연대, 그리고 대웅전 앞 다층석탑의 양식 등을 종합해 보면 더욱 그러하며 또한, 1960년에 통일신라 후기의 금동불상이 대곡사의 텃밭에서 발견되어 통일신라말에서 고려 초의 창건연대에 더욱 신빙성을 높여줍니다.
이번 포스트는 대곡사의 암자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적조암입니다. 대곡사 부속암자로 적조암만 남게 된 연유가 있습니다. 이는 정유재란으로 인해 대곡사와 함께 9 암자가 전란으로 모두 소실하였기 때문입니다. 대곡사에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암자 적조암에는 여느 산속 암자의 단출한 전각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높은 계단을 올라 적조암 경내에 들어서면 왼쪽에 조선 시대 사대부 집의 누마루식 건축 양식에 눈길이 갑니다. 사찰에 이런 건축양식은 좀체 볼 수 없는데 특이하게도 대곡사 적조암서 볼 수 있었습니다. 적조암을 품은 산은 비봉산입니다. 적조암의 상량문을 보면 "봉황이 머문다는 뜻이며 비봉산의 주맥에 적조암이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적조암 구포루 인법당
현재 독특한 건축 양식과 희소성으로 2014년 12월 18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2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대곡사 적조암의 구포루는 인법당으로 19세기 중반인 1847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18세기의 구포루 중창설을 보면 그 이전에도 건물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지금과 같은 건물 모습과는 다르겠지만 구포루 인법당은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대곡사에 머물렀던 고승들의 진영을 모시는 진영각으로 사용했지만, 현재는 불교중앙박물관을 이관한 상태입니다. 구포루 인법당은 앞면 4칸에 옆면 4칸 규모의 ‘ㄱ' 자형이며 5량가의 이익공건물입니다.
건물은 경사진 대지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앞쪽에다 앞면 2칸, 옆면 2칸은 마루를 넣었습니다. 누마루 밑을 보면 마루를 받치는 기둥을 세웠고 누마루 주위로는 툇마루를 달아내어 그 끝에는 계자 난간을 둘렀습니다.
뒤쪽 2칸은 온돌방을 넣었으며 이외에도 처마에는 활주를 세우고 사자 모양의 화반을 설치하는 등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당이 방으로 바뀌고 벽장을 내는 등 부분적인 건물의 변형으로 인해 아쉬움은 많으나 건축물의 문화재적 의미는 상당한 가치가 있다는 평가입니다.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경주 신문왕릉.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라 31대 신문왕릉을 여행하다.
신문왕은 신라 31대 왕으로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한 부왕 문무왕의 장자로 성은 김 씨, 이름은 정명 자는 일초입니다. 664년 문무왕 4년에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681년에 왕위에 올라 10년 남짓 통일신라를 이끌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의왕후이며 왕비는 소판 김흠돌의 딸인 김 씨였지만 아버지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켜 출궁 당하자 다시 일길찬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았습니다.
신문왕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많은 일을 한 분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감은사와 만파식적등 신문왕과 문무왕에 얽힌 흥미로운 전설로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신문왕이 즉위하던 그해에 장인인 김흠돌이 모반을 꾀했습니다. 모반의 사유가 궁색하지만 왕비인 딸이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일과 진복의 상대등 임명 건에 반기를 들었던 곳으로 유추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난을 평정하고 그에 연루된 모든 사람을 처형시켰는데 심지어 반란모의를 사전에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이찬 군관과 그의 아들까지 죽게 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기화로 신문왕은 귀족세력의 권력을 제어함과 동시에 전제왕권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신문왕 하면 퍼뜩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이견대에서 해룡으로부터 받았다는 피리 만파식적과 선왕인 문무왕이 왜군을 진압하기 위해 세웠던 감은사입니다. 지금은 절터의 흔적인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만 국보로 지정되어 그 터가 일부 남아 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감은사는 문무왕이 착공을 했지만, 완공을 못 보고 신문왕이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682년인 신문왕 2년에 완공했습니다.
처음에는 나라를 지킨다는 뜻인 진국사였습니다. 그러다 신문왕은 아버지 문무왕의 호국 충정에 감읍하여 감은사로 고쳐 불렀습니다. 문무왕은 죽으면서 용이되어 신라를 왜적으로부터 시키겠다며 동해에다 장사지낼 것을 유언하였습니다. 신문왕은 그 유지를 받들어 경주 낭산의 능지탑에서 문무왕을 화장하여 그 뼈를 감포 동해구의 물속 바위에 안장했는데 후세에 와 이 바위를 대왕암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감은사 금당은 일반사찰의 금당과는 다른 모습인데 꼭 돌다리 형태입니다. 이는 신문왕이 바다의 용으로 변한 부왕을 이곳에서 쉴 수 있게 금당 아래에다 바다로 연결된 통로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는 만파식적입니다. 만파식적은 만능 피리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피리를 불면 파도가 일렁이면서 강한 태풍으로 변해 왜군의 배를 모두 물속에 가라앉게 했다는 전설의 피리입니다.
신문왕은 부왕을 위해 감은사를 완공하자 다음 해 작은 산 하나가 감은사 앞바다에 떠 있다는 전갈에 “이는 호국용으로 변한 문무왕과 천신으로 변한 김유신이 보배를 주려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신문왕은 이견대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는 대나무 한줄기가 있었으며 낮에는 대나무가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다음날 대나무가 하나가 되자 왕은 산에 들어갔습니다.
어디선가 용이 나타나 그에게 검은 옥대를 주면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상스러운 피리라며 대나무가 하나가 되었을 때 베어 피리를 만들라 하였습니다. 신문왕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천존사에 보관하였으며 만파식적이라 하고 국보로 삼았습니다. 이번 신문왕 포스팅은 신문왕이 이룬 업적도 중요하지만, 만파식적과 감은사의 전설이 더욱 흥미로워 옮겨보았습니다.
신문왕은 옛 백제와 고구려 백성들을 융합하여 하나의 통일신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통일신라의 기틀을 다지는 등 국학 설립으로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녹읍 폐지와 관료전 지급 및 지방 통치를 위한 9주 5소경 제도를 완성하고 여러 국가제도를 정비하여 전제 왕권의 기틀도 마련했던 국왕입니다.
신문왕의 장지는 현재 경주 남산 아래에 있습니다.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봉토분이며 봉분 아래에는 둘레석을 돌렸는데 자연석을 블록 모양으로 다듬어 5단으로 쌓았습니다. 이는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호석이라합니다. 호석 맨 위에는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습니다. 또한, 호석 주위로 44개의 삼각형 받침돌로 호석을 받치게 했습니다. 남쪽으로 향하는 받침돌 한곳에는 출입구를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문(門)자가 새겨져 있다는데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신문왕릉은 둥근 모양으로 흙을 쌓은 원형봉토분입니다. 능의 밑 둘레는 약 92m에 높이는 8m고 봉분 앞에는 크고 긴 사각의 돌기둥을 여러 개 눕혀 쌓아 상석을 만들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문왕릉은 낭산 동쪽에다 장사 지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현재의 왕릉으로 비정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100% 맞는다고는 할 수 없는 일부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황복사지 인근에 있는 보문들에 십이지상 등이 남아 있는 능을 신문왕릉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왕릉은 논 가운데 폐허가 되어 있으며 지금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현재 공식적인 신문왕릉은 배반동에 있으며 이번에 포스팅한 곳입니다. 참고하세요. 경주에 엄습한 강력한 지진으로 신문왕릉의 출입문인 솟을 대문의 벽체가 떨어져 나간곳이 여러곳 있었습니다. 어서 빨리 보수가 필요해 보였습니다. 경주 신문왕릉 사적 제181호
신라 시대부터 서라벌의 진산으로 신령스러운 영산의 대상이었던 낭산과 명활산 사이에 있는 보문들에는 아직 가을걷이를 하지 않은 벼가 고개를 숙이며 누런 황금 들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보문단지를 간다고 북천 옆 도로를 따라 여러 번 다녔지만, 이곳 골짜기 안쪽이 이리 넓은 줄 이번 경주여행을 하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보문들을 가로질러 닿았던 보문사지는 보문들의 가운데 황금 들판을 울타리 삼아 무심한 듯 오늘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습니다. 보문동의 유래도 아마 이곳 보문사에서 나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중마을 또한 그런 것 같습니다. 특히 이곳 보문사지 주위로는 많은 절터가 남아 있습니다.
신문왕의 명복을 빌었던 황복사지가 그러하고 선덕여왕의 세 가지 예지력에서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장사지내라"는 유언이 현실이 되었던 사천왕사지가 보문사지와 함께 서로 삼각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보문사지의 건립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이곳에서 보문이라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보문사가 있었음을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금당의 부재와 건물 배치, 석재 유물 등을 종합해보면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진 절로 추정만 될 뿐입니다.
현재 보문사 터는 주위가 모두 논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금당지와 동·서탑지 등 모두가 1~2m 정도로 흙이 쌓여 높은 상태 있습니다. 금당지에는 건물의 기단석과 초석이 그대로 깔려 있으며 금당 지 앞 좌우 높은 단에는 동·서의 목탑지가 남아있습니다.
금당지의 모습입니다.
금당지 아래 옛날 논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석등 부재들...
동탑지에는 아무 흔적이 남아 있지 않으며 서탑지에는 현재 연꽃무늬가 조각된 목탑의 받침돌인 대형 초석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속리산 법주사의 목탑건물이나 황룡사 9층목탑과 유사했는지 알 수 없지만 지척에 있는 황룡사 9층 목탑과 같이 고려 시대 몽골침입 때 소실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서탑지의 모습입니다.
또한, 금당지 앞에는 석등의 받침돌과 옥개석, 초석 등이 뒹굴고 있는 게 신라 천 년의 뒷모습인 양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현재 보문사지 서쪽으로는 보물 제123호인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가 남아 있으며 62m 떨어진 북쪽으로는 보문사지 당간지주인지 확실하지 않은 보물 제910호 경주 보문리 연화문 당간지주가 있습니다.
이와 함께 보물 제64호인 경주 보문사지 석조가 남아 당시 보문사의 현역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그 높이가 3.8m이며 보문사지의 여러 부재와 같은 시기인 통일신라 시대 때에 조성되었습니다. 절을 알리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고정했던 두 개의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합니다
돌로 된 당간지주와 비교하면 당간은 철당간과 목당간 석당간이 있는데 당간지주보다 지금 남아 있는 문화재가 손꼽을 정도의 숫자입니다.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안쪽 면이 평면이라면 나머지 삼면은 아래쪽을 잘록하게 하고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약간씩 가늘어집니다.
당간을 고정했던 구멍이 상·중·하로 3개 뚫렸고, 북쪽의 돌기둥은 구멍이 반만 패여 있어 특이한 경우입니다. 두 기둥 중 북쪽 기둥은 윗부분이 부러진 상태이며 기둥 사이에 놓였던 당간 받침은 사라졌습니다. 또한, 전체적으로는 크고 소박한 모습입니다.
경주 보문사지 석조 또한 통일신라 때에 만들어졌습니다.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절에서 물을 담는 용도로 사용하였습니다. 가로 형태의 직육면체 바위 안쪽을 넓고 깊게 사각으로 파내었습니다. 또한, 내부와 외부는 별다른 장식이 없고 경주 보문사지 당간지주와 같이 그저 밋밋하며 소박한 모습입니다.
석조의 북쪽만 아랫부분에 배출구가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 사용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경주 보문들에서 만나는 천년전의 보문사는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흔적으로 남아 있는 유물로서 당시 보문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사적 제390호.
황복사는 의상대사가 653년에 19세에 출가했던 곳으로 통일신라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모후인 신목태후와 함께 692년 7월 2일에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이 석탑은 이중의 기단 위에 쌓은 삼층의 석탑으로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 통일신라 석탑이며 국보 제37호로 지정하였습니다.
석탑의 높이는 7.3m로 당시 성행했던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감은사지 삼층석탑보다 약 2m 정도 규모 면에서 작게 바뀌었습니다. 또한, 기단부의 하단 버팀 기둥인 탱주는 3개였던 개 가운데 기둥이 없이 2개이며 면석과 갑석은 각각 8매의 갑석으로 짜맞추었습니다. 그러나 상단의 면석은 8매에 갑석은 4매로 이것 또한, 차츰 간소하게 바뀌었습니다.
이와 함께 1층의 몸돌은 이때까지 여러 개의 돌을 짜 맞추었다면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하나의 몸돌을 사용했습니다.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5개 그대로이며 위층의 몸돌을 받치는 지붕돌의 상단은 2단의 각형 굄대로 아직은 신라 석탑양식이 많이 남아 있는 통일신라 석탑입니다. 이는 신라 시대 석탑양식에서 통일신라의 변화된 석탑양식의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석탑으로 보입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의 복장유물로는 금동사리함과 높이 12.2cm 금동여래좌상, 높이 14cm 여래입상이 있습니다. 이는 효소왕의 아들인 성덕왕이 신문왕과 효소왕의 두 선대 왕의 명복을 빌며 삼층석탑에 안치했는데 1943년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이 두 불상은 국보 제79호와 국보 제80호에 각각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입니다.
순금의 금동사리함 뚜껑 안쪽에는 효소왕이 부왕인 신문왕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692년 이 탑을 세웠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합니다. 탑을 세운 목적과 건립연대가 뚜렷하게 나온 석탑입니다. 필자는 경주여행에서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마지막으로 보고 왔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져 바쁘게 설치다 보니 석탑 주변에 절반가량이 땅에 묻힌 목이 잘린 귀부 2개를 보지 못하고 왔는데 그 귀부의 등에 ‘임금 왕(王)’ 자가 새겨져 있다 합니다. 또한, 북쪽 밭에는 이곳에서 나왔던 12지신상을 한곳에다 파묻었다 하는데 어떤 모습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한 번 찾아야겠습니다.
(경주여행/경주가몰만한곳)신라 27대 선덕여왕릉.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낭산 도리천의 선덕여왕릉 여행과 세가지 예지력.
경주 문화재 여행에서 이번에는 26대 진평왕의 뒤를 이은 27대 선덕여왕릉을 찾았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선덕여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으로 김춘추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오늘날 신라예술의 금자탑이라는 첨성대와 분황사를 창건하였고 황룡사 9층 목탑 등을 건립한 현명했던 군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신라불교 예술의 많은 부분이 선덕여왕 시절의 문화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티브이 역사드라마에 단골 소재로 선덕여왕은 꼭꼭 등장하여 드라마로 인해 선덕여왕은 아마 모르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3가지 예지력으로 선덕여왕은 더욱 유명합니다. 첫 번째가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자 당나라 태종은 축하의 뜻으로 모란꽃이 그려진 그림과 씨앗을 보내왔습니다.
이를 본 선덕여왕은 “이 꽃은 향기가 없구나”하자 신하들은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였고 왕은 모란꽃 씨를 심게 했습니다. 모란이 꽃이 피자 신하들은 모란꽃의 향기가 없음을 알게 되었고 선덕여왕에게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선덕여왕은 모란꽃 그림을 보고 “꽃이라면 자고로 향기를 쫓아 벌과 나비가 몰려들기 마련인데 그림에는 벌과 나비가 없으며 이는 남편이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현 경주시 건천읍의 부산성 아래에 얽힌 여근곡 이야기입니다. 선덕여왕이 즉위하고 4년 후인 635년에 영묘사를 짓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영묘사가 있는 여근곡에서 난데없이 개구리가 밤낮없이 며칠 동안 개굴개굴하며 시끄럽게 울었습니다. 이 소식이 왕에게 전해졌습니다.
왕은 알천과 필탄 두 장수에게 병사 2천을 주어 부산성 아래 옥문지에 백제군사 매복 사실을 은밀히 알리며 습격하라 합니다. 신라군은 살금살금 여근곡에 도착해보니 우소가 이끄는 백제군이 정말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신라군은 이를 급습하여 백제군을 섬멸시켰습니다. 궁궐로 돌아와 그 사실을 보고하며 “어떻게 백제군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선덕여왕은 빙긋이 웃으며 “개구리가 맹렬하게 우는 것은 병사를 말하며 옥문은 여자의 음부를 뜻합니다. 이는 여자는 음이고 그 색은 흰색이며 흰색은 서쪽을 가리키며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어 적을 쉽게 잡을 수 있었습니다”. 라 하였습니다.
세 번째 예지는 선덕여왕은 자신의 죽을 날을 미리 알고 있었다 합니다. 하루는 신하들 앞에서 선덕여왕이 말하기를 “내가 언제 무슨 날에 죽으면 도리천에다 장사지내도록 하세요”하자 신하들은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면 도리천을 알지 못하겠다며 왕에게 재차 물었습니다. 왕은 “도리천은 낭산 남쪽에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에 이르러 진짜 선덕여왕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문무백관들은 왕의 유언대로 낭산 남쪽에 장사지내며 왜 이곳이 도리천이지하며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679년 문무왕 19년에 선덕여왕릉 아래 사천왕사가 들어섰습니다. 불교에서는 28개의 하늘나라가 있으며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합니다.
사천왕사가 지키는 하늘나라가 첫 번째 하늘나라 사왕천이면 그 위에 제석 천왕의 도리천이 두 번째 하늘나라로 이는 선덕여왕릉이 부처님의 나라 도리천임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선덕여왕의 예언이 적중했다고 하며 선덕여왕의 셋 예지력은 일연의 삼국유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덕여왕릉은 낭산 남쪽 양지바른 곳에 모셔져 있습니다.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웠으며 신라 시대 서라벌의 진산으로서 신라인에게는 신성의 대상이었습니다. 413년 신라 실성왕 12년에는 낭산에 모인 구름이 누각같이 보이면서 오랫동안 그주위에 향기가 피어올랐다 합니다. 이에 실성왕은 신령이 내려와 노는 것으로 여기고 낭산의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때문인지 지금의 낭산은 우리 소나무가 울울창창한 자태를 뽐내며 선덕여왕릉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선덕여왕은 재위 632~647년으로 신라 27대 왕입니다. 성은 김 씨며 휘는 덕만이며 26대 진평왕과 마야부인 김 씨 사이에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선덕여왕릉은 아랫부분에 능을 보호하기 위해 2~3단의 막돌의 석축을 호석으로 돌렸습니다. 그 위의 봉분은 둥근 형태로 흙을 쌓아 올린 봉토분입니다.
능의 지름은 23,6m이며 높이는 6.8m로 낭산 사적지 163호 내에 사적 제18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신라 시대의 모든 왕릉은 성덕왕릉을 제외하고는 왕릉의 주인은 모두 관련 기록으로 비정한 상태입니다. 선덕여왕릉도 낭산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지금의 위치로 보고 있습니다.
(경주여행/경주가볼만한곳)신라 26대 진평왕릉. 천년 세월을 말해주는 듯 웅장한 노거수에 마음까지 편안한 경주 진평왕릉 여행.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에게도 농락당하는 아주 유약한 왕으로 묘사되었던 진평왕. 이번 경주여행은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릉을 찾았습니다. 진평왕릉은 낭산과 명활산 가운데 있는 보문들에 고목을 울타리 삼아 넓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낭산 도리천에 잠들어 있는 선덕여왕과는 가까운 거리로 아마 지금도 따뜻한 부녀의 정을 나눌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딸이니까요???
진평왕은 신라 왕 중에서 박혁거세에 이어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579년에 왕위에 올라 632년까지 53년 동안 왕위에 올랐다니 당시 정치 상황을 보면 그의 인생역정 또한, 파란만장했을 것만은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진평왕의 가족사를 보면 법흥왕이 불교를 국교로 공인한 이래 온 가족을 인도 카빌라국의 석가모니 왕실 가족의 이름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진평왕의 가계도를 보면 아버지는 24대 진흥왕의 장자로 태자로 책봉되었던 동륜이며 어머니는 입종갈문왕의 딸인 만호부인 김씨입니다. 26대 진평왕은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백정(伯淨)으로, 그의 부인인 왕비는 복승갈문왕의 딸로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 이름 따와 마야부인 김씨로, 그리고 아우도 정반왕의 아우들 이름인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이라 하였습니다.
진평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신체가 건장했으며 성장하면서 의지가 굳고 식견 또한 명철했다는 것을 통치과정을 보면 나타납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 그려졌던 진평왕처럼 유약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초반에는 할머니의 수렴청정이지만 먼저 관제의 정비를 서두르는데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이찬 후직을 병부령에 임명하여 각각 국정과 군권을 장악케 하여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581년에는 위화부를 설치하여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게 하는 등 여러 관제를 정비·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제 고구려와 잦은 다툼으로 국경은 조용한 날이 없었습니다. 603년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으로 쳐들어오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기도 하는 등 삼국 간의 숱한 전쟁에 정세는 더욱 격화하였습니다. 이에 진평왕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하는 데 주력합니다.
608년에는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원광법사에게 걸사표를 짓게 하여 수양제에게 고구려 정벌을 유도하였으며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와 더욱 돈독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숱한 위기로부터 신라를 지켜내었습니다. 남산신성을 축성하고 명활산성을 개축하는 등 서라벌의 방위에 진력하였으며 632년 진평왕이 죽자 한지에 장사지내고 당 태종은 국서를 보내어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하였습니다.
진평왕릉의 봉분은 높이가 약 8m이며 지름은 약 40m로 둥글게 흙을 쌓아 만든 원형봉토분입니다. 봉분의 아랫부분에는 자연석을 호석으로 돌렸고 지금은 바깥으로 몇 개 들어나 있습니다. 그리고 상석과 향로석은 후대에 설치했으며 세월의 흐름을 방증이라도 하듯이 굵고 늙은 노거수들이 수림을 이루어 아이들의 소풍장소로 정말 좋아 보였습니다.
때마침 청명한 가을 하늘에 벌써 유치원생들이 가을 소풍을 나와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서 진평왕도 꽤 흐뭇해하실 것 같습니다. 세월의 더께 속에 진평왕은 옛 역사는 그저 잊혔다고만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오늘 진평왕릉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해맑은 가을 하늘은 더욱 높은 거 같습니다. 사적 제180호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는 그 높이가 380cm이며 통일신라 시대 사찰로 옛 절터의 기왓장에서 ‘보문’이란 명문이 발견되어 보문사 절터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와 함께 보문사 금당과는 제법 많은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만큼 보문사 옛터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는 보문사지 금당터에서 서남쪽으로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두 기둥이 64cm 거리를 두고 남북방향으로 서로마주모고 있습니다. 마주 보는 안쪽과 바깥면 그리고 좌측과 우측면에는 아무런 조각장식이 없는 밋밋한 형태인데 단 바깥 측면은 양쪽 모서리를 깎아내어 각을 죽였습니다.
두 돌기둥에서 북쪽 돌기둥의 기둥 상부는 절단되었으며 마주한 남쪽 돌기둥은 원래 모습 그대로 온전한 상태입니다. 경주보문사지 당간지주의 특징은 안쪽은 평면인데 반해 그 외 삼면은 아래쪽은 잘록하고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가늘어지는 모양새입니다.
또한, 두 돌기둥에는 상·중·하로 각각 3개의 네모난 구멍이 뚫렸는데 상부가 절단된 북쪽 돌기둥은 구멍이 반쯤 뚫려 있으며 그와 반대로 남쪽 돌기둥의 구멍은 관통해 있어 당간을 고정했던 장치를 설치했습니다. 필자는 지금까지 여러 모양의 당간지주를 봤습니다.
두 돌기둥에 관통된 구멍은 많이 봤지만, 한쪽 기둥에만 구멍이 관통된 것은 매우 드문 형태이며 두 기둥 사이에 설치된 당간 받침돌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폐사지인 보문사의 규모는 정말 대단합니다.
그에 비해 당간지주는 장대하면서도 소박합니다. 또한, 수려하지 않지만 잘빠진 모습을 하고 있어 통일신라 예술의 진수를 느끼기에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