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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팔공산 동화사여행) 대구 팔공산 동화사. 약사 여래 근본도량인 팔공 총림 동화사 구경하기.


대구에는 팔공산이 있고 팔공산에는 동화사가 있을 정도로 대구에서 유명한 사찰 동화사를 보고 왔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 팔공총림 동화사는 중생들의 병을 치료하는 약사여래 근본 도량입니다.



동화사적비를 근거로 신라소지왕 15년인 493년에 극달 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로 부르다가 흥덕왕 7년인 832년 심지 대사가 중창을 하면서 오동나무가 겨울에 상서로운 꽃을 피워 동화사로 개칭하였다는 설이며 또 하나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진표율사로부터 영심대사에게 전해진 팔간자를 심지대사에게 받은 뒤 팔공산에 와 이를 던져 떨어진 곳에 절을 세우니 이곳이 동화사로 첨당 북쪽 우물이 있는 곳이라 합니다.



이 두 설화에서 신라흥덕왕 7년에 심지대사가 중창이 아닌 창건을 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또한 중창과 중건을 거듭했는데 신라 말인 934년 영조선사, 고려시대로 넘어와 명종 20년인 1190년에 지눌보조국사, 충렬왕 24년인 1298년 홍진국사에 의해서 각각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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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조선시대에는 선조39년인 1606년 유정사명대사, 숙종3년인 1677년 상숭대사, 영조8년인 1732년 관허, 운구, 낙빈, 청월 대사 등에 의해 중창과 중건을 이루어 현재의 대가람이 이루어 졌습니다. 동화사의 당우는 대웅전을 위시하여 천태각, 영산전, 봉서루, 심검당 등 이 영조 대 중창 된 건물이고 1992년 통일약사여래석조대불이 낙성 되면서 많은 건물들이 새롭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천왕문 격인 용호문을 들어서면 동화사를 구경할 수 있습니다. 










상서로운 새인 봉황은 대나무의 열매만을 먹고 오동나무에서 집을 짓고 알을 품습니다. 동화사 터를 풍수지리적으로 봉황이 알을 품은 모습인 ‘봉소포란형’의 지세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봉서루 앞 넓은 바위에 3개의 둥근 돌인 봉황알이 놓여져 동화사에 봉황의 정기가 서려서 인지 경건한 마음이 저절로 들게 합니다.







먼저 봉서루를 지나 동화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을 향합니다. 보물 제1563호로 지정되었고 조선 영조 3년인 1727년 중건된 건물입니다. 정면3칸에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장대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그 위에 배흘림의 두리기둥을 세웠습니다.



 임진왜란 이 후인 1606년 사명대사가 학인에게 중창을 하게하고 1677년 개창을 하였습니다. 1725년 을사년 큰불로 소실 된 것을 1727년에 천순, 낙빈당 홍제, 홍우, 의삼등에 의해 중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웅전에는 어칸과 협칸에 꽃살문인 연꽃, 국화꽃, 금강저를 새겨 넣어 더욱 우아하고 화려하게 보입니다.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으며 보물 제 254호로 지정되어 금당암 입구에 있습니다. 당간을 세우기 위해 좌우에 지탱하는 돌기둥입니다. 통일신라 때부터 사찰 앞에 설치했던 구조물로 두개의 기둥사이에 기다란 장대를 세우고 의장용 깃발인 당(幢)을 매달아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였습니다.






현재 동화사에서 가강 많은 관광객과 불교신자들이 찾는 곳은 1992년 11월27일 완공하여 점안 봉안한 통일약사여래대불입니다. 높이가 17m, 거기다 좌대 높이만 13m 에 달하는 불상으로 150억원의 공사비가 들어갔습니다. 현재 약사여래불의 최대 둘레는 16.5m이며 총높이는 30m로 국내 최대의 입불상이다. 불교인 만이 아닌 국민의 염원으로 이루어진 동화사의 통일약사여래대불은 병들고 아픈 전 국민의 상처를 꼭 어루만져 낳게 해줄 것을 믿습니다. 이외에도 동화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습니다.






이외에도 동화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습니다. 산내 암자에 흩어져 있는 비로자나불좌상, 비로암 삼층석탑, 금당암삼층석탑, 흥진국사부도 등의 보물과 문화재가 있습니다. 한참에 다 불러 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으로 다음 팔공산 동화사 여행에서는 이번에 보지 못한 여러곳을 꼭 찾고 싶습니다.


 ☞(대구여행/팔공산 동화사여행) 대구 팔공산 동화사. 약사 여래 근본도량인 팔공 총림 동화사 입장료와 관람안내


☞(대구여행/팔공산 동화사여행) 대구 팔공산 동화사. 약사 여래 근본도량인 팔공 총림 동화사 찾아가기

☞(대구여행/팔공산 동화사여행) 대구 팔공산 동화사. 약사 여래 근본도량인 팔공 총림 동화사를 찾는 방법 

봉황문에서 오르는 방법은 오래전부터 동화사의 주 출입구로 필자도 이곳으로 많이 올라 다녔습니다. 아마 동화사를 찾아오면 집단시설 지구로 오르는 도로 입구에 있습니다. 봉황문의 일주문을 통과하면 바로 우측 절벽에 창건당시 조성된 보물 제243호인 마애불좌상을 보게 됩니다. 옛 동화사를 오르는 길이라 창건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 보며 걷다 108계단을 오르면 통일대불전 갈림길이 나옵니다. 지금부터 동화사를 둘러 보시면 됩니다. 또한 방법은 새로 조성된 집단 시설지구에서 동화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현재 동화문이 주 출입문이 되었습니다. 연못 앞에 걸린 다리를 건너면 관광안내소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됩니다. 여느 사찰의 천왕문격인 용호문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동화사를 둘러보실 수 있습니다.(참고;동화사 홈페이지)




2014/11/10 - (대구여행/팔공산파계사)팔공산파계사. 고즈넉하니 가을 풍경이 너무 좋았던 팔공산 파계사 절집구경하기.


2014/11/06 - (대구여행/팔공산 산행)팔공산 서봉~파계봉 산행. 알찬 팔공산 산행코스 서봉~파계봉 산행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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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31 - (대구맛집/팔공산 동화사맛집)자연산 송이로 맛을 내는 6천원 순두부백반 너무 맛있어요. 팔공산 동화사, 갓바위 맛집 산골기사식당


2013/12/18 - (대구여행/달성여행)팔공산 동화사에서 비슬산 대견사지 중창 불사진행, 비슬산 대견사 새로운 관광지로 될듯.


2013/12/12 - (대구여행/팔공산 동화사)병들고 아픈 국민들을 어루만져줄 것 같은 동화사 통일약사여래대불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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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 양북면 함월산 기림사 여행. 경주의 천년사찰 왕의 길 기림사를 만나다. 


경주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습니다. 그 중 단연 경주를 대표하는 것은 불교문화재입니다. 이번 경주 여행에서는 신문왕 호국행차 길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인 함월산 기림사입니다.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장례를 모시기 위해 감포 대왕암으로 넘든 고갯길이며 이견대에서 동해의 해룡으로 변한 부왕에게 만파식적과 옥대를 받기 위해 넘든 길 또한 이 길입니다. 이곳 기림사는 신문왕의 행차길을 모두 보았든 사찰로서 경주 양북면 함월산 자락 도통골에 있습니다.

 


그럼 먼저 기림사의 유래를 알아보겠습니다. 기림사는 신라의 원효스님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찰입니다. 창건은 인도의 천축국에서 온 광유성인이 세웠는데 임정사라 불렀습니다. 옛날 인도 범마라국의 임정사라는 절에 광유성인이 오백제자와 함께 설법을 하며 중생을 제도하였습니다. 또한 서천국의 400여개 소국을 다스리는 사라수대왕은 정사보다는 무상도를 찾고자하였습니다. 이에 광유성인은 사라수대왕를 임정사로 초청을 하였습니다. 먼길 이라 다리가 아픈 원앙 왕비는 장자의 집에 비녀로 팔고 왕은 임정사에서 왕생계를 외우며 수행에 정진했습니다. 그 후 왕비는 장자의 집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극락’을 뜻하는 ‘안락국’으로 이름을 짓고 7년 후 부왕인 사라수대왕을 만나게 됩니다. ‘안락국’은 부왕의 가르침에 따라 광유성인의 제자가 되고 스승은 안락국에게 해동의 남쪽 지방에 명당자리가 있으니 그곳에다 절을 세워 불법을 전하고 중생을 교화하라며 안락국에게 떠날 것을 명합니다. 안락국은 스승이 가르쳐준 계림국의 명당 터인 이곳에 암자를 짓고 임정사라 하였습니다. 그 후 신라의 원효대사가 절을 확장하고 신라최초의 절이라는 뜻으로 부처님 당시 최초 절인 ’기원정사‘의 이름을 따 기림사라 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불교의 전래를 보면 고구려의 아도화상이 신라 눌지왕때인 417년에 처음 구미의 냉산 도리사에서 신라에 불교가 전파되었는데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를 일찍 받아들였지만 신라는 불교를 배척하다 아도화상에 의해 처음으로 들어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에 들어와 인도에서 허왕후와 장유화상의 우리나라에 불교를 처음 전래하였다는 남방전래설을 주장하는 분도 있으니 정확한 고증이 필요한 듯합니다. 필자는 뭐 기림사를 구경하기 위해서 온 것이니까 골치 아픈 문제는 생략 하겠습니다.



먼저 기림사 매표소를 통과합니다. 주차장이 어마어마 하여 사찰의 규모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주문을 지나면 본격적인 기림사 구경이 시작됩니다. 현판에는 ‘함월산 기림사’라 되어 있습니다.



기림사 본존불이 모셔진 대적광적은 오른쪽이며 삼천불전과 유물전시관은 왼쪽으로 갈라집니다. 필자는 대적광전이 있는 오른쪽으로 갑니다.


곧 무시무시한 사천왕이 문을 지키는 천왕문입니다. 아마 절 안으로 들어오는 사악한 무리들과 잡귀 등 모든 나쁜 것은 이곳에서 들어 올 수 없습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여 천왕문을 들어섭니다.






기림사는 창건당시부터 대적광전을 건립하여 삼신여래를 봉안하였고 약사여래불을 모신 약사전과 석조오백나한상을 모신 응진전, 삼층목탑과 정광여래사리각, 진남루와 무량수전 등이 건립되었다합니다. 그러나 사리각은 없어지고 삼층목탑은 초석만 남아 있습니다.

 


먼저 기림사의 문화재는 보물 제833호인 대적광전과 보물 제959호인 ‘금자사경’, 유물전시관에 있는 건칠보살상은 보물 제415호입니다. 또한 응진전 앞의 삼층석탑과 진남루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습니다. 기림사는 ‘한국33 관음성지’로 전통 사찰 제2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왼쪽으로 범종각이 올려다 보입니다. 정면에는 새롭게 복원과정을 거쳐 단장한 진남루가 있습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1호.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지만 기림사는 임진왜란 때 수군과 승병의 근거지가 되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측만 할 뿐입니다. 앞면 7칸에 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면 ‘사람인(人)’자 형태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우물마루를 깔았고 판벽에 창호가 설치되었으나 사용용도에 의해 지금은 창호가 바뀌면서 원형이 알 수 없는 상태라 합니다 





기림사 응진전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아라한을 모신 건물이며 신라 선덕여왕때 처음 지어진 것으로 전하지만 조선후기에 다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앞면 5칸, 옆면2칸으로 겹처마 맞배지붕입니다.




고려시대 때 지어진 삼층석탑





삼층목탑 초석터





기림사 약사전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2호입니다. 1600년대 이전 건물로 추정을 하며 조선 효종 5년인 1654년에 중창되었고 숙종 4년인 1678년에 약사법당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얕은 기단 위에 앞면3칸 , 옆면1칸으로 옆면에서 본 지붕은 사람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입니다. 지붕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다포양식이며 다른 건물과 다르게 옆면이 아닌 정면에 문을 둔 것이 특이합니다.





기림사를 대표하는 본전인 대적광전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입니다. 643년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그 후 조선 인조 7년(1629년)과 정조 17년(1793년) 등에 고쳐 지어 졌습니다. 1862년인 철종 13년에 기림사 대화재 때 유일하게 화를 면했던 건물입니다. 앞면 5칸, 옆면 3칸,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다포식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보물 제833호








이외에도 기림사는 삼천불전, 관음전, 삼성각, 명부전, 유물전시관, 매월당 등 부속건물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기림사 뒤 임도를 따라 왕의 길 입구를 조금 지나면 용연폭포가 나타납니다. 이 폭포는 신문왕이 받아온 옥대의 용 비늘 장식을 떼어 물에 담그니 용으로 변해 승천을 하면서 폭포와 연못이 생겼는데 주위와 함께 도통골의 비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관음전



삼천불전




명부전

삼성각






용연폭포



2014/12/20 - (경북여행/경주여행)왕의길-신문왕 호국행차길. 신문왕이 되어 왕의 길인 추원마을~기림사 둘레길을 걸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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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구례화엄사여행)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부처님의 빛으로 세상을 밝혀 줄 광명등 국보 제12호 각황전 앞 석등.

구례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여행지가 화엄사입니다. 많은 국보와 보물등 문화재를 품고 있어 문화재의 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화엄사를 빼 놓고 둘레길 여행을 할 수 없어 짧은 시간을 내어 둘러보기로 하였습니다.


 

범위가 워낙 넓어서 한 번에 다 볼 수 없다면 보지 못한 것은 다음기회에 만나기로 하면서 구경을 하였습니다. 화엄사에서는 각황전과 각황전 앞 석등, 동·서탑, 대웅전, 사사자석탑등 반드시 보고 올 것을 체크하고 올라갔습니다.


 

그럼 먼저 각황전 앞에 웅장한 모습으로 턱 버티고 있는 석등을 포스팅 하겠습니다. 국내에서 현존하는 석등 중에서 최고의 석등으로 가장 규모가 크다 합니다. 그 높이만도 636㎝로 돌을 깎아 만든 석등으로는 믿기지 않을 큰 규모로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감을 들게 합니다. 


 

각황전 앞 석등에 대해 문화재청 자료를 참고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석등은 사찰의 중심건물인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여 설치를 합니다. 광명등이라고도 하여 등불을 밝히는 공양이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중에서 최고의 의미를 가진다합니다.


 

석등은 모두 다섯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 화사석과 옥개석으로 위에 상륜부인 보주를 올립니다. 그 중 화사석은 등불을 밝히는 곳을 말합니다. 시대에 따라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 형태로 나누어집니다.


 

화엄사 앞 석등의 화사석은 팔각형으로 4개의 창문이 동서남북으로 뚫여 불빛이 사방으로 퍼지도록 한 백제의 화사석 형태로 통일신라시대에도 그 영향을 끼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대석을 보면 8각의 바닥돌 위에 큼지막하게 복련과 귀꽃을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중대석인 장고 모양의 간주석을 세웠습니다. 배가 불룩한 특이한 기둥형태의 간주석은 통일신라 후기에 많이 사용되었던 양식입니다. 그 위에 앙련을 조각한 상대석은 8각의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고 화사석 위에 올린 8각의 옥개석 지붕돌은 귀퉁이마다 큼지막한 귀꽃을 달았습니다. 또한 상륜부는 보륜과 보개, 보주가 완벽하게 남아 있는 석등으로 정상부를 크게 장식 한 것이 특징이며 전체적 완성미가 아주 뛰어난 작품입니다.


 

석등의 연대는 통일신라 헌안왕 4년인 860년에서 경문왕 13년인 873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을 하며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걸작품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국보 제12호

 

☞(전남여행/구례화엄사여행)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부처님의 빛으로 세상을 밝혀 줄 광명등 국보 제12호 각황전 앞 석등. 대중 교통편은....


부산에서는 화엄사를 찾아가기가 너무 편하다.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화엄사까지 바로 가는 버스가 첫차 오전 7시부터 평균 1시간 간격으로 있다. 3시간30분 안팎 소요. 화엄사 구경을 하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버스는 올 때 내렸던 화엄사 입구 버스정류소에서 타면 된다. 오후 1시10분, 3시10분, 4시10분, 5시10분, 6시10분(막차)에 구례 하동을 거쳐 부산에 도착한다.

승용차를 이용할 땐 남해고속도로로 가다가 순천분기점에서 순천-완주고속도로를 탄다. 황전IC에서 내려 구례구역과 구례군청 앞을 지나면 구례터미널을 거쳐 화엄사로 가면 된다. 내비게이션 화엄사 입력.



2014/11/25 - (경남여행/하동여행/구례여행)평사리~화개장터 섬진강 둘레길. 박경리의 토지길과 섬진강 100리 길을 따라 걷는 둘레길,


2014/11/17 - (전남맛집/구례맛집)구례 산수유맛집 영실봉식당. 제주산 갈치로 만든 갈치탕 얼큰 한 국물이 끝내줘요. 구례 영실봉 식당.


2014/10/30 - (전남맛집/구례맛집)화엄사 맛집 지리각식당. 지리산이라 더욱 맛있는 산채비빔밥 맛집 지리각식당.


2014/10/16 - (전남구례여행)구례공용버스터미널 버스 시간표 올려요. 노고단(성삼재)버스 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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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팔공산마애약사여래좌상. 약한자든 힘 없는 자든 모든 중생을 보살펴줄 것 같은 마애약사여래불


팔공산은 대구광역시와 군위, 경산등에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너른 품이며 시내에서 바라본 팔공산은 독수리 가 날개를 펼쳐든 산릉이 길게 이어져 대구사람들은 팔공산맥이라 부릅니다. 팔공산의 최고봉은 비로봉입니다. 정상을 호위한 위성봉은 좌청룡 우백호의 동봉과 서봉으로 이들 두 봉우리와 함께 삼두마차를 이루고 있습니다.

 



 

좌우로 뻗어 나간 능선과 봉우리에 보석처럼 빛을 내는 바위는 마치 기치창검을 두른 모습입니다. 그런 만큼 능선에는 옹골찬 기세로 기암괴석이 많아 사시사철 탐방객과 산꾼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넓은 품에서 수많은 계곡을 타고 내리는 명산명수의 팔공산은 많은 암자와 사찰이 곳곳에 포진하여 요즘 같은 가을철에는 더욱 즐거운 곳이 됩니다.


 

이제 자신의 몸을 불태우든 정열의 단풍도 한풀 꺾였고 대구 근교 사찰에서 볼 수 없는 많은 문화재를 이곳 팔공산에서는 수시로 만나고 볼 수 있어 그 재미가 솔솔 합니다. 팔공산 사찰 순례를 하다보면 대부분 사찰과 암자들이 등산로 입구나 7부 능선에 자리를 잡아 수월한 편이지만 관봉으로 불리는 갓바위와 비로봉 정상 아래에 있는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은 여간 큰마음을 먹지 않고는 만날 수 없는 부처님입니다.


 

갓바위 부처님은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 준다”는 소문으로 행렬의 줄이 꼬리를 물어 선본사에서 편하게 오를 수 있지만 비로봉 암벽에 새겨진 마애약사여래좌상은 어지간한 불심이 아니라면 엄두를 낼 수 없는 곳입니다. 팔공산 쪽 서봉을 찾는 다면 꼭 찾아보는 필자는 오랜만에 서봉~파계사 산행을 하면서 산행 경로를 벗어나 찾아 갔습니다. 가을의 정취도 불어오는 겨울 앞에는 맥을 추지 못한 듯 마애약사여래좌상에는 세찬 바람이 불었습니다.


 

누구의 정성인지 일찍부터 부처님 좌우로는 긴 촛대에 불을 밝혀 두었습니다. 이곳의 부처님도 갓바위 부처님과 같은 약사여래불로 약사발을 든 모습이며 중생들의 질병과 아픔 ,고통, 재앙을 소멸 시켜주는 부처님 입니다. 먼저 합장을 하며 기도를 합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인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은 불상의 왼손에 둥근 약그릇을 무릎위에 올려둔 모습이며 통일신라때 불상으로 자연암벽에 돋을새김을 하였습니다. 전체적인 불상은 선이 뚜렷하며 이목구비 또한 조화와 균형을 잘 이룬 모습입니다. 


 

오똑한 콧날에다 힘있는 턱과 눈썹, 잘록한 허리는 한결 세련미을 나타내 줍니다. 어깨는 둥글고 탄력감이 있으며 편단우견에 오른쪽 어께를 드러내며 왼쪽 어께로는 흘러내리며 비쳐지는 얇은 옷의 옷 주름 간격이 유려하며 규칙적이고 가슴에서 옷깃이 한번 뒤집어지는 것은 8세기에 제작된 불상임을 보여 줍니다.


 

불상 뒤로는 이중의 광배를 표현하였는데 화려하게 조각된 무늬가 부처님의 몸에서 나는 빛을 형상화 하였습니다. 광배의 안쪽과 바깥쪽에는 당초무늬와 불꽃무늬를 새겼고 불상을 안치한 연꽃대좌는 복련과 2겹의 앙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좌 아래에 두 마리의 용이 좌우에서 떠받드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대좌 밑을 받치는 용의 모습은 처음 보았고 특이하게 여겨졌습니다.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산 1번지에 위치를 하며 해발 약 1000m의 높이에 있습니다.(참고:문화재 안내판)


 

 

 




2014/11/10 - (대구여행/팔공산파계사)팔공산파계사. 고즈넉하니 가을 풍경이 너무 좋았던 팔공산 파계사 절집구경하기.


2014/11/06 - (대구여행/팔공산 산행)팔공산 서봉~파계봉 산행. 알찬 팔공산 산행코스 서봉~파계봉 산행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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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팔공산파계사)팔공산파계사. 고즈넉하니 가을 풍경이 너무 좋았던 팔공산 파계사 절집구경하기.


대구 팔공산 파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 말사입니다. 804년 애장왕5년에 심지왕상이 창건을 하였는데 파계사의 유래를 보면 ‘파계(把溪)’란 ‘물길을 잡는다’란 뜻으로 절 주위로 아홉 갈래의 계곡이 어지럽게 흩어져 땅의 기운을 한곳에 모우기 위해 절 아래 연못을 파고 파계사를 창건하게 되었다합니다.

 


현응대사나무

그 후 1605년인 선조38년에 계관이 중창을 하였고 1695년 숙종21년에 현응이 삼창을 하여 오늘날의 파계사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특히 파계사는 영조임금과 깊은 인연이 있는 사찰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에도 영조대왕의 도포와 영조임금 나무인 느티나무가 파계사에 남아 있습니다.



왜 영조대왕의 원찰을 파계사라 할까요. 그 이유를 보면은 조선의 19대 임금은 숙종입니다. 숙종은 후궁 화경 숙빈 최씨를 위해 파계사의 현응에게 세자 잉태를 위한 백일기도를 부탁 합니다. 백일기도가 끝나는 날 숙빈 최씨의 꿈에 농산화상이 전세의 과보에 따라 숙종의 왕자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을 현몽하였고 훗날 백일기도로 태어난 분이 연잉군입니다.



연잉군은 숙종과 장희빈에서 태어난 20대 경종의 뒤를 이어 조선 제21대 임금에 오른 영조입니다. 왕자를 생산하게 된 숙종은 그 보답으로 파계사 주위의 40리를 파계사에서 세금을 거둘수 있도록 명을 내리지만 현응은 그 대신 선대임금의 위패를 모실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올려 선조, 숙종, 덕종, 영조 네 분의 신위를 기영각에 모심으로 조선 후기에와 더욱 기세가 높았던 숭유억불정책의 칼바람을 피해 갈 수 있었다합니다.



1979년 파계사 원통전 관음보살상을 금칠하게 되었는데 불상안에서 영조의 어의가 나왔다 합니다. 1740년 건륭 5년 9월에 제작된 도포와 발원문에는 ‘탱불 일천불’을 희사하고 파계사를 왕실의 원당으로 삼으며 대왕의 청사상의를 복장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럼 파계사의 문화재를 하나하나 만나 보겠습니다.



먼저 매표소 전에 만나는 오래된 나무를 현응대사 나무라 부릅니다. 현응대사는 파계사를 삼창하고 숙종의 부탁을 받아 백일기도로 숙빈최씨에게 훗날 영조대왕인 왕자를 잉태케하였습니다. 수령이 260년 쯤 된 느티나무로 현응대사의 공덕을 기려 부르는데 팔공산에 단풍이 한창 들때 찾아간 파계사. 천년세월의 절집과 함께 너무 잘 어룰리는 고목이었습니다. 

 


파계사는 문화재 관람을 위해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통과해야 합니다. 일반 1,500원이며 승용차 주차비는 2,000원입니다.일주문을 통과하고도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파계사 주차장에 닿기 전에 왼쪽에 파계지로 불리는 저수지입니다. 파계사의 아홉갈래 물길을 한곳에 모아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팠다는 연못으로 파계사 창건 유래와 함께 합니다. 

 


먼저 파계사 안내도를 일별합니다. 파계사 경내를 들기위해서는 반드시 만나게 되는 큰 나무가 있습니다. 영조임금나무로 키가 엄청 큰 나무입니다. 


영조임금나무

수령이 약 250년 느티나무로 보호수며 높이가 17m, 둘레는 3.8m. 영조임금의 치적과 현응대사의 백일기도로 영조임금이 탄생하였고 왕실의 원당에 영조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어 영조임금나무로 이름을 붙였다합니다.




먼저 진동루 입니다.진동루는 파계사의 유래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절 주위로 아홉갈래의 물줄기를 따라 새어나가는 땅의 기운을 잡기 위해 연못을 파고 파계사라 하였는데 그것으로는 이곳의 기운을 모두 다스릴 수 없어 경내로 들어오는 입구에 문을 세우고 ‘진동’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먼저 계단을 올라 1층의 누문을 들어서면 파계사 경내에 들어서게 됩니다. 100여평의 넓이에 정면5칸, 측면3칸의 2층 규모로 팔작지붕을 올렸습니다. 현판에 팔공산 파계사가 걸려 있습니다. 정면으로 원통전과 좌측에 설선당, 우측에 적묵당입니다. 




 원통전을 기준으로 오른쪽은 파계사 적묵당입니다. 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9호이며 조선 광해군 12년인 1620년에 처음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 후 숙종21년인 1695년 현응이 삼창을 한 후 1920년에 중건을 한 후 보수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적묵은 ‘눈을 감고 조용히 명산한다’는 뜻으로 스님의 수양 공간 같습니다. 정면 5칸, 측면 6칸의 규모로 지붕은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팔작지붕이며 기둥 위에 공포를 두지 않고 기둥사이에 작은 접시 모양을 한 소로를 끼운 조선후기 건물로 소박한 분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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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전을 기준으로 왼쪽은 설선당입니다.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이며 대중의 공양간과 강습소로 사용하였던 건물입니다. 1623년 인조 1년에 계관법사가 중수를 하였으며 1646년과 1725년에 중건을 거듭하여 1976년에 현재의 모습을 하였습니다. 건물은 정면7칸, 측면7칸의 규모로 적묵당과 함께 아름다운 곡선를 가진 팔작지붕입니다. 초석은 북을 엎은 모양으로 그 위에 공포를 두지 않은 둥근 기둥을 세웠습니다. 간결하며 견실한 모양의 민도리집 구조양식입니다. 








원통전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220호 영조임금의 도포와 보물 제992호인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좌상 및 복장 유물이 있습니다. 파계사는 다른 사찰과 다르게 대웅전이 아닌 원통전에 관세움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있습니다. 원통은 ‘진리는 원만하여 모든 것에 통해 있다“는 뜻으로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올렸습니다. 지붕 처마를 박치기 위해 커다란 역삼각형으로 짜 맞춘 공포를 두 기둥사이에 장식한 다포양식으로 17세기 후반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좌상은 삼베에 여러번 옻칠을 도포한 방식의 불상입니다. 1979년 불상을 금칠할 당시 복장유물로 영조임금의 도포와 발원문이 함께 나왔고 1447년 세종29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1m8cm이며 머리에는 3중의 화관을 씌었고 목의 삼도와 오른손과 왼손에 나타난 손가락과 손바닥 모양을 보면 고려 후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보물 제1214호 파계사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담은 불화입니다. 1707년인 숙종33년에 연잉군이 왕자일 당시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시주한 불화이며 길이가 340cm, 폭은 254cm.  



파계사 기영각은 연인군이 탄생하면서 그 보답으로 현응의 청원을 받아들여 조선왕실의 위패를 모신 전각입니다. 숙종35년인 1696년에 현응이 창건. 정면3칸 측면2칸으로 팔작지붕이며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혀처럼 앞으로 나온 두 개의 익공에 연화와 연봉 등으로 위와 아래에 화려한 장식을 한 조선 후기 이익공계 양식을 한 모습입니다.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11호.

  





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8호인 파계사 산령각의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1976에 중건을 한 후 1979년에 보수를 하였습니다.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옆면에서 보면 사람인자인 맞배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기영각과 같은 공포를 사용하였는데 익공에 연봉과 연화로 장식하고 보 머리에 봉황머리를 끼운 초익공 양식을 하고 있습니다.  



팔공산 파계사를 찾았을 당시 추색으로 완전 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특히 지장전 가는 길에서 본 파계사 왼쪽 언덕은 그야말로 만추의 분위기를 보여 주어 아름다운 절집에 매료되어 넋을 빼고 바라보다가 일행의 그만 내려가자는 말에 부랴부랴 내려 왔습니다. 고즈넉한 파게사의 가을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안내판을 참고하였습니다. 





영조임금나무












2014/11/06 - (대구여행/팔공산 산행)팔공산 서봉~파계봉 산행. 알찬 팔공산 산행코스 서봉~파계봉 산행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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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거창여행)감악산 연수사. 물맞는 약수탕이 유명한 감악산 연수사에서 얼음물을 맞다.

경남 거창군 남상면에는 감악산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약수탕으로 유명한 연수사가 있습니다. 감악산 산정의 높이가 952m이며 연수사는 약 700m의 높이에 위치를 하여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너무 좋습니다. 높은 위치에 있는 감악산이지만 산 정상까지 올라가는 임도가 열려 있어 연수사 앞 까지 승용차가 올라가게 되어 누구나 쉽게 찾아 갈 수 있습니다.

 

 

연수사의 연혁을 보면은 신라시대인 애장왕 3년(802년)에 감악조사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창건설화를 보면은 감악조사가 지금의 절 남쪽에다 절터를 정하고 그곳에서 절에 사용할 기둥과 서까래등을 다듬어 세워 두었는데 밤새 나와 보니 서까래가 사라지고 없어 감악조사가 현재의 대웅전에서 발견하고 깨달은 바가 있어 지금의 절터에 연수사를 창건하게 됩니다.

 

 

연수사는 또한 신라 헌강왕이 이곳에 와 약수를 마시고 목욕을 하여 불치병인 중풍을 말끔히 치유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며 사찰의 이름도 약수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현재에도 이물을 맞기 위해 거창군민들은 여름휴가를 이곳에서 지낼 정도라 합니다.

 

 

물맞이 온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연수사 위에 있는 약수바위 아래에서 비가 오나 가뭄이 드나 사실사철 일정한 양이 나온다며 물 온도도 일정하게 유지한다 하였습니다. 올해 여름철에 필자가 직접 맞아 보았는데 물의 온도가 성능 좋은 냉장고에 넣어 둔 얼음물을 뒤집어 쓸 정도로 찬물 이였습니다. ㅋㅋ 이바 딱딱하며 부딪칠 정도였습니다.

 

 

 

그 뒤 연수사는 조선시대인 이조 숙종때 벽암선사(1575-4660)에 의해 다시 중수되며 연수사의 중흥기를 맞게 됩니다. 거창군에서 가조면의 우두산 고견사와 함께 쌍벽을 이룰 정도로 알려졌다는 연수사는 현재 변변한 문화재도 하나 없습니. 지금의 연수사가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은 1991년 혜일스님에 의해 대웅전등 건물이 들어섰고 그 후 주지 석전스님에 의해 증 보수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곳 연수사 일주문 옆에는 수령 6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실제로 보면 어마어마 할 정도 높고 큰 은행나무로 둘레가 7m, 높이는 38m, 동서남북으로 20m 이상 가지가 뻗어나가 가을철에는 노란 은행잎으로 감악산과 연수사를 물들입니다. 은행나무 침대가 아닌 연수사 은행나무는 전설이 전해내려 옵니다.

 

 

고려 때로 한여인이 왕손에게 시집을 갔으나 청상과부가 되어 유복자를 낳은 뒤 연수사로 들어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됩니다. 어느듯 10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아이는 건강하고 영민하게 무럭무럭 자랐는데  노승이 아이를 위해 공부를 시켜야 한다며 여승을 설득합니다.

 

 

그녀는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허락을 하였고 헤어지기 전날 아이는 홀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절 뒤에 전나무를 심고는 이 나무는 사철 푸르게 자랄것이니 저를 보듯이 키워 달라며 부탁을 합니다. 어머니 또한 아들에게 나는 절 입구에 은행나무를 심고 기다릴테니 혹 내가 없더라도 어미를 보듯 하라며 서로 헤어 졌다합니다.

 

 

그 뒤 모자의 애뜻함을 아는지 전나무와 은행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아들 전나무와 엄마 은행나무는 수백년을 서로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1980년 경 휘몰아친 강풍에 전나무는 부러져 죽고 은행나무만 잎이 무성하게 드리우며 아들 전나무를  그리워하며 연수사 앞 뜰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연수사 은행나무는 수나무라 합니다.




 

 

 

 

 

 

 

 

 

 

 

600년된 연수사 은행나무

 

 

 

 

연수사 물맞는 약수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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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합천여행)허불산 청강사. 4월에 가장 아름답다는 절집 허굴산 청강사를 보고오다.

우리는 야무지게 생긴 사람을 보고 속이 꽉 찼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만큼 빈틈이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자연에서도 흔치 않은 이름이 있습니다. 허굴산으로 속이 굴처럼 텅텅 비었다는 뜻인데 실제로 허굴산을 가까이 가 보면 완벽하게 꽉 차 있는 모습으로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기암괴석과 함게 황계천에 드리워진 황계폭포와 수백년은 됨직한 노송등 어느 하나 빠트림이 없이 완벽한 모인데 왜 허굴산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옛 전설에는 허굴산을 허불산으로도 불렀습니다. “산을 들어서는 입구에서 이산을 바라보면 산의 중턱에 있는 굴 안에 부처님이 좌정하여 있는 것 같아 바랑을 벗어두고 부처님을 배알하기 위해 올라가면 부처님은 없고 허굴만 있다하여 허굴산이라 한다고 합니다.



그 허굴산의 배꼽에 청강사란 아담한 절집이 현재 있습니다. 연꽃모양을 한 듯 입을 벌리고 선 큰 바위를 비집고 들어서 있는 작은 절집은 그래서 더욱 정이 갑니다. 청강사를 들어서는 입구에는 일주문 대신 수백년은 넘어 보이는 아름드리 정자나무가 청강사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절의 유래를 보면 청강사가 있던 이곳은 원래 고려 때에 창건된 허굴사의 절터였다합니다. 그러나 절터의 흔적만 남게 되었던 이곳에 처음으로 불사를 일으킨 이는 합천군 쌍백면의 유학자 정규락선생입니다.

 


선생은 스스로 청강거사라 하였고 1891년인 20세에 진사과에 합격 하지만 국운이 일인에 의해 짓밟히는 것을 보고 세상을 등져 허굴산에 은둔하며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후 이곳에 만귀암을 짓지만 선생은 입적을 하고 그의 아들인 정방해 선생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12동에 80여칸의 절을 완공하며 사찰의 규모를 갖추게 됩니다. 또한 만귀암은 부친의 아호를 따 청강사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는 불가에 귀의한 후손 혜광스님이 주지로 있습니다.



청강사는 당대의 선승 동산스님과 정강 스님도 주석을 하며 수행을 하신 곳으로 현재 대웅전에 모신 부처님은 거창 감악산 연수사에서 모셔온 인도 전단향 목불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또한 대웅전 현판은 독립운동가 오세창 선생의 글씨이며 로전과 산신각 그리고 칠성각의 현판은 서예가 오제봉선생과 정현복 선생의 글씨라합니다.



아담한 절집인 청강사는 있는 듯 없는 듯 허굴산과 함께 동화되어 있으며 청강사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4월이라 합니다. 이때쯤이면 산과 절을 에워싼 산 벚꽃이 마치 눈발이 흩 날리 듯 청강사를 감싼다합니다.



화려함은 없지만 아담하며 조용한 절집 합천 허불산 청강사를 대병면 여행시 찾아보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대웅전 현판글씨는 독립운동가 오세창 선생이 섰다.


거창 감악산 연수사에서 모셔온 인도전단향 목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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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거창여행)우두산 고견사. 거창을 대표하는 고견사 원효, 의상, 최치원의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거창 고견사. 


경남 거창에는 9할이 산으로 이루어 졌다할 정도로 산천지입니다. 그만큼 많은 명산 중에서도 전국적인 지명도를 갖춘 산이 소머리산인 우두산으로 꼽고 있습니다. 별유산으로 한때 불렸지만 제 이름찾기 일환으로 우두산은 국립공원 가야산과 어께를 맞대고 있으며 우두산 정상부 일부 또한 가야산 국립공원에 포함된 국립공원급의 산세입니다.






우두산에는 의상봉과 장군봉, 바리봉등의 산세로 사계절 내내 많은 등산객과 관광객이 찾고 있습니다. 이런 명산에는 반드시 명찰이 있습니다. 거창을 대표하는 사찰인 고견사는 원효대사 창건설화를 가지고 있으며 특이한것은 의상대사가 수도하였다는 의상봉 아래 고견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전생의 부부 같습니다. 반드시 의상이 있는 곳에 원효가 있고 원효가 있는 곳에 의상이 있을 정도로 두 분은 바늘과 실의 관계처럼 이곳에서도 서로 사이좋게 함께 한 모습입니다.







고견사는 677년인 문무왕 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던 견암사에서 그 유래를 두고 있습니다. 원효대사가 견암사를 창건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는데 이곳에 와 보니 전생에 이미 이곳을 다녀간 곳 이었다 합니다.






원효는 이곳에 절을 짓고 견암사라 하였으며 견암, 견암선사로도 불렀습니다. 고려를 멸망시킨 태조이성계가 전지 1백5십결을 내려 매년2월과 10월에 고려 왕조의 명복을 비는 수륙대재를 지냈게 하였다는 고견사.


 



가야산과 이곳 우두산 고견사는 신라말의 문인이자 대유학자인 최치원의 발자취가 찐하게 남아 있습니다. 가야산에서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고견사에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절 입구에 1000년의 비바람을 견디며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수고가 28m며 둘레는 6.01m의 초대형 급으로 2000년 3월에 보호수로 지정되었습니다.






고견사는 1358년 공민왕 7년에 지희스님이 중수를 하였고 6.25 한국전쟁때 폐허가 될 정도로 처참하게 파괴가 되었습니다. 1988년 대대적인 중창을 하면서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습니다.




조선조 1630년인 인조때 만들어진 보물 제 1700호 고견사 동종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3호 고견사 석불, 숙종대왕이 원효대사를 기려 내렸다는 강생원의 운영당 현판이 남아 있으며 은행나무, 의상대사의 전설이 있는 쌀굴, 20m의 미끈한 고견폭포도 고견사의 볼거리입니다.



























































































2014/01/09 - (경남여행/거창가조여행)우두산 고견사. 예술성이 뛰어난 고견사 동종 보고 왔습니다. 고견사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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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여행/군산여행)국내 유일 일본식 사찰 건물 동국사. 동국사에 일제 만행을 알리는 침탈 자료가 전시중입니다. 


전라북도 군산여행에서 빠지지 않고 보는 곳이 근대문화유산 거리입니다. 그 중에서도 군산시 금광동 135번지에 있는 국가등록문화재 제64호인 동국사는 국내에 하나뿐인 일본식 건축물 사찰입니다.


 

 




국내의 여느 사찰과는 다른 모양의 동국사는 일본내 어느 고택을 방문하는 그런 형태의 건물입니다. 동국사의 전신인 금강사는 융희 3년인 1909년 6월 일본 조동종 승려인 우찌다에 의해 포교소로 처음 시작되었는데 이때가 한일병합 1년전입니다.



 




1913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 현재의 대웅전과 요사를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동국사. 1945년 해방을 맞으며 정부로 이관되었다가 불교전북교당에서 1955년 인수를 하여 김남곡스님에 의해 동국사로 이름을 바꾸고 대한불교조계종 24교구 선운사의 말사입니다.



 



대웅전은 화려함과 예술성이 들어간 우리의 전통사찰 대웅전과는 완전 다른 모습으로 정면5칸, 측면 5칸의 정방형 단층팔작지붕 홑처마 형식의 기와 건물입니다. 형식은 에도시대 건축 양식으로 지어 외관은 화려함이 절제되고 소박한 형식을 갖추었습니다.



 




지붕의 경사각은 75도의 급경사를 이루고, 건물 외벽에 “문틀의 아래위 홈대에 문짝을 끼워서 문 한짝을 밀어 다른 한짝 옆에 붙혀 여닫는 문”인 미서기문으로 되어 있으며 용마루 또한 일직선으로 전통한옥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대웅전과 연결된 요사는 일본 전통 양식으로 지어졌고 복도를 이용해 법당과 요사가 서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동국사에 사용된 목재는 모두 일본에서 들여온 쓰기목으로 건물을 완공하였고 범종 또한 1919년 일본 경도에서 만들어 들여왔으며  종에는 창건주와 개산, 시주자, 축원문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1899년 일본인이 군산항을 강제 개항하게 하면서 해방때까지 군산은 많은 일인이 거주를 하였고 군산항을 통해 수탈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현재 동국사 대웅전 안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침략자료인 사진과 그 당시 자료가 함께 전시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스님이 조선침략에 대한 참회의뜻으로 기증하고 동국사에서 소장하고 있든 자료를 합한 5,000여점의 자료 중 일제의 무단 통치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300여점을 엄선하여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전시기간은 2014년 3월10일~ 6월30일까지이며 일본의 악행과 만행을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필자도 일제 강점기를 겪지 못했습니다. 책 또는 부모님께 일제의 만행과 치를 떨게한 잔혹함을 보았고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로 동국사는 우리나라 격동기와 개화기에 겪었던 암담함의 역사를 증명하는 건축물로서 다시는 우리 후손에게 이런 참담함의 역사를 물려주지 않는 교육자료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전북여행/군산여행)국내 유일 일본식 사찰 건물 동국사 소조석가여래삼존상 


군산 동국사 소조석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은 보물 제 1718호로 지정되어있습니다.

효종 1년인 1650년에 조성되었고 높이가 160cm이며 나무에 흙을 입혀 만든 불상입니다.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로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모시고 있으며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합니다. 김제 금산사 대장전에 있던 것을 해방 후에 동국사로 모셔 왔다 합니다.

 



 

 




 




 




 




 




 




 




 




 




 




 




 




 




 




 




 




 




 




 




 




 




 




 




 




 




 




 




 




 




 




 




 




 




 




 




 




 




 




 







2014/04/24 - (전북여행/부안/군산여행)1박 2일 바쁘게 다닌 부안 변산반도와 군산 근대문화유산거리를 여행하고 왔습니다.


2014/05/01 - (전북여행/군산여행)군산근대문화유산거리에서 만나는 국내 서양고전주의 3대 건물 구 군산세관를 보다


2014/05/04 - (전북여행/부안여행)변산반도 채석강과 적벽강. 서해안의 바다 경치 완결판 적벽강을 보고 왔습니다. 채석강과 적벽강


2014/05/05 - (전북여행/부안여행)새만금방조제홍보관. 단군이래 최대 토목공사로 우리나라 지도를 바꾼 새만금 방조제 현장과 홍보관을 보다.


2014/05/06 - (전북맛집/군산맛집)근대문화유산거리맛집 빈해원. 군산여행에서 꼭 먹고 온다는 62년 전통의 빈해원 자장면 맛보고 왔습니다.


2014/05/07 - (전북맛집/부안맛집)변산반도 내소사 맛집 느티나무식당. 느티나무 정자껄에 앉아 먹는 고향 같은 집 느티나무 식당 산채정식.


2014/05/14 - (전북여행/군산여행)군산 리츠프라자호텔. 군산여행 근대문화유산 거리 최고의 숙박지로 리츠프라자호텔이 최고예요.


2014/05/20 - (전북맛집/군산맛집)새만금방조제맛집 새만금횟집. 군산여행에서 꼭 맛보고 온다는 싱싱한 활어회는 역시 새만금 횟집이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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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고성여행)남해안 3대 기도도량 고성 무이산 문수암을 찾아가다. 


남해를 바라보며 많은 암자가 있습니다. 남해도 금산의 보리암과 여수 금오산 향일암 그리고 고성 무이산 문수암을 남해 3대 기도도량으로 불립니다. 얼마 전 부처님오신날 직전에 찾아간 무이산 문수암은 그야말로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자리에 절묘하게 자리를 잡아 남해 3대 도량의 첫 번째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조망이 좋았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쌍계사 말사인 문수암은 신라 31대 신문왕8년(688년)때 의상대사가 창건을 하였습니다. 의상대사의 문수암 창건 설화를 보면은 대사께서 남해 금산(보광산)으로 기도를 가던 도중 이곳을 지나다가 얼 풋 선잠을 들게 되는데 그때 노승이 나타나 “내일 아침에 걸인을 따라 보광산보다 무이산을 먼저가보라”는 꿈을 꾸다 깨어납니다.



 



의상대사는 꿈결이지만 이상타 생각하며 아침을 맞았습니다. 과연 의상대사 앞으로 한 걸인이 걸어가는게 아닙니까. 어디로 가시는 길이냐고 물어보니 무이산을 간다하기에 의상은 같이 갈 것을 부탁하며 동행을 하게 됩니다. 



 




걸인을 따라 산속을 걸어가던 대사는 점점이 떠 있는 수많은 섬들과 무이산 정상부 아래를 이루는 천길 단애에 다섯 개의 바위가 마치 오대산의 오대 중 중대라 하며절경에 감탄을 합니다. 걸인과 대사가 큰 바위 앞에 다다르자 걸인이 바위를 가르키며 “저곳이 나의 침소다”하니 또 한 걸인이 나타나 함께 바위 틈새로 사라져 버려 의상대사는 두 걸인이 들어간 바위를 유심히 보며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그 바위틈에서 문수보살을 보고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꿈속에 노승은 관음보살이고 두 걸인은 문수와 보현 보살임을 알게 된 의상은 이곳에다 문수단을 세우고 문수암을 창건합니다. 지금도 문수암 대웅전 안 오른쪽에 있는 바위 틈 석벽에 천연의 문수보살상을 볼 수 있도록 유리문을 달아 놓았습니다.


 

 




문수암은 의상대사 이후 많은 고승들이 거쳐 갔고 신라 화랑도가 이곳에서 심신을 연마하였을 정도로 산자수려한 모습으로 이곳을 오르는 모든 관광객은 감탄을 합니다. 문수암은 중창과 중건의 사료는 알 수 없고 워낙 급한 산비탈에 터를 닦아 세운 암자다 보니 사라호 태풍때 건물이 붕괴되어 새로 중건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1971년 입적한 청담스님은 1955년 이곳 문수암에서 수도를 하였고 한국불교 정화운동과 통합 조계종 2대 종정, 총무원장등을 지낸 한국 불교계의 큰스님으로 1973년 신도들에 의해 문수암에 청담대종사의 사리탑이 모셔져 있습니다.

 



 

청담대종사 사리탑

 




 




 




 




 




천불전

 




 




 




 




 




 




오른쪽의 유리문을 보면 문수 보현 두 보살이 들어 갔다는 바위 틈을 볼 수 있습니다.

 




 




 




 




 



 




반야사 약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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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여행/공주여행)계룡산 갑사. 봄의 향기를 따라갔던 계룡산 갑사 가을 갑사못지 않습니다. 


지난 가을에 질정 없는 발걸음이 추갑으로 유명하다는 갑사로 옮기게 하였다면 이번에는 춘마로 유명한 마곡사를 찾아가든 길에 들러 보았던 계룡산 갑사. 명산에 명찰은 계절을 상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춘마추갑의 가을갑사라지만 봄의 갑사도 봄바람난 여행객의 발걸음을 잡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나뭇가지마다 봄기운을 받아서인지 연둣빛 색감으로 서서히 옷을 갈아입는 갑사 오름길을 그야말로 자연의 천국이라 불러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재잘거리는 새소리와 겨울을 지낸 다람쥐의 몸동작에도 봄의 소리를 아는지 흥이 묻어나 있습니다. 갑사를 오르는 오리의 숲길에는 지난 가을의 붉은 단풍은 어디론가가고 대신 노란 황매화가 마치 마이다스의 손 인양 갑사를 황금의 사원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봄여름가을겨울 계절에 상관없이 계룡산은 돋아난 용의 등처럼 울퉁불퉁한 능선이 갑사와 함께 어우러져 마치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의 한 부분을 보는 것 같습니다. 4월의 갑사는 한창 바쁜 모습입니다.





5월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위해 예쁜 오색 연등이 갑사 하늘를 수놓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소원을 담은 연등의 모습이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계룡산 갑사의 창건은 고구려 아도화상입니다.





아도화상은 신라에 불교를 전래한 분으로 신라최초의 사찰인 선사의 도리사를 창건하고 고국인 고구려로 돌아가는 길에 계룡산을 지나게 됩니다. 그 때 상스러운 하늘의 기운이 계룡산을 비추니 아도는 그 빛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곳에는 천진보탑이 세워져 있어 부처님을 모시기에 위해 아도는 420년에 갑사를 창건합니다. 통일신라에는 의상대사가 갑사에 주석하여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의 법맥을 있게 됩니다.





부석사, 해인사, 범어사, 화엄사 등과 함께 계룡산 갑사는 나라의 으뜸사찰인 화엄10대 사찰중 하나가 됩니다. 임진왜란때 영규대사가 승병을 일으킨 곳이 갑사로 전국 최초라 하며 영규대사는의병장 조헌과 금산성 전투에서 왜적과 용감히 싸우다 전사를 하게 됩니다. 갑사의 표충원에는 휴정, 유정, 영규대사의 영정이 함께 모서져 있습니다.


   



물소리 바람소리도 더욱 정겹게 들리는 봄의 계룡산 갑사, 계룡산과 함께 찾는다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2014/04/09 - (충북여행/공주여행)마곡사신록축제 국고개역사문화축제 공산성수문장교대식 공주여행 여행블로거기자단 팸투어


2013/12/27 - (충남여행/ 공주여행)공주마곡사. 춘마추갑도 좋은데 가을 마곡사도 너무 좋아요.


2014/04/17 - (충남맛집/공주맛집)계룡산 갑사맛집 서울식당. 자연밥상 건강밥상인 갑사 서울식당 산채더덕구이 정식으로 봄을 먹었습니다.


2013/11/24 - (충남맛집/공주맛집)계룡산 갑사 맛집 꽃피는산골, 단호박 오리구이 정식 퓨전요리가 맛있는 꽃피는산골


2013/12/15 - (충남여행/공주여행)계룡산 갑사, 추갑으로 유명한 계룡산 갑사 보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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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장흥여행)장흥 가지산 산행. 천년 사찰 보림사를 품은 가지산 산행 개요.


명산에는 명찰이 있다는 것이 빈말이 아닌것 같다. 영축산은 통도사, 천황산은 표충사, 지리산은 화엄사 쌍계사 실상사, 토함산은 불국사, 팔공산은 동화사, 가야산은 해인사, 오대산은 월정사등 유명사찰과 명산이 이름을 같이하고 있다. 그 중 장흥의 가지산도 있다. 영남의 산꾼에게는 익혀 들어온 이름으로 울주군의 가지산과 동명이산이라 친숙한 면도 있지만 전국의 산꾼에게는 생소한 느낌의 산 일수도 있다. 그러나 장흥 가지산이 품고 있는 보림사의 규모를 보면 가지산을 명산으로 올리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신라의 원표대덕이 당나라와 인도를 순례하고 돌아와 왜 장흥의 가지산에다 암자를 세웠을까?. 가지산 정상부의 다섯봉우리는 불끈 솟은 암봉으로 홰치는 장닭의 벼슬 같이 앙칼진 모습을 하고 있다.


 

보림사 일주문







보림사 삼층석탑과 석등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




보림사 보조국사 창섭탑비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 탑



영남알프스 가지산 석남사를 창건한 도의선사의 제자인 염거선사로 부터 법통을 전수 받은 보조국사 체징이 860년(헌안왕4년)에 왕의 권유를 받고 이곳으로 내려와 암자를 크게 일으키며 보림사를 창건하였다. 보림사는 중국의 가지산 보림사. 인도의 가지산 보림사와 함께 동양의 3보림으로 불리며 통일신라 선문구산 중 가지산파의 선종 중심사찰이 된다. 보물이 숲을 이룬다는 보림사는 그 이름에 걸맞게 현재 국보2점과 보물8점 유형문화재 15점을 보유하고 단일 사찰로서는 불국사와 쌍계사 그리고 부석사 다음인 네 번째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장흥의 가지산을 찾기 위해서는 산행 계획에서 꼭 보림사 탐방을 권한다. 보림사는 보림사 삼층석탑과 석등이 국보 제44호로 지정되어 있고 철조비로자나불은 국보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외 보조선사 창성탑과 탑비, 동부도 서부동 사천왕문에 안치된 사천왕상등 예술성 있는 보물과 문화재를 보는 것은 산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전남여행/장흥여행)장흥 가지산 산행. 천년 사찰 보림사를 품은 가지산 산행 경로.


장흥 가지산 산행의 시작과 끝은 보림사로 잡으면 된다. GPS 산행거리는 다소 짧은 6km 이며 산행시간은 3시간 안팎으로 휴식시간을 포함하면 4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가지산 산행 경로를 보면 보림사 주차장~인동초 민주동지 기념비~학생의집 인근 가지산 등산로 입구~원당암 갈림길~약수터~소나무 산림욕장 갈림길~가지산 주봉(509.9m. 정상석봉)~정상석 봉우리 밑 보림사 갈림길~가지산 상봉(511m)~(정상석 봉우리 밑 보림사 갈림길)~이정표 사거리~공주 이씨 묘~망원석~약수터 갈림길~팔각정 전망대~숯굴~비자림산림욕장~팔각정 전망대 갈림길~동부도~보림사 주차장순이다.




















☞(전남여행/장흥여행)장흥 가지산 산행. 가지산 산행 들머리는 장흥 학생의 집 인근에서 출발.


보림사 입구 주차장에서 왼쪽 해우소 옆으로 돌아나간 도로를 따라간다. 서부도와 장흥학생 수련원 방향으로 10여분 이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구석마을과 서부도 가는 길이며 오른쪽 도로 우측에 인동초민주동지기념비를 지난다. 이곳을 지나면 곧 가지산 등산로 입구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우측으로 비스듬히 난 산행로를 오른다. 완만한 오르막을 200m쯤 가면 원당암 입구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원당암, 가지산은 이정표가 직진형 왼쪽을 가르킨다. 10분이면 넓은 터가 나온다. 옛날 암자가 있었던 곳으로 보이며 약수터가 있다. 잡목과 덩굴로 덮혀 있고 약수터는 지저분하여 마실 수는 없을 정도다. 산길은 조금씩 급경사로 바뀌며 주위는 소나무 숲으로 바뀐다.






















약 7분 뒤 소나무산림욕장 안내판과 보림사에서 올라오는 산길과 만나는 삼거리다. 가지산 정상은 왼쪽 방향이다. 주위로 남도 특유의 조릿대가 무성하다 산행로는 그 사이로 나 있다. 허리길을 완만하게 돌아가던 산길은 정상이 가까워 짐에 조금씩 오르막을 이루며 험해진다. 능선을 따라 오르는 등산로에 바위가 나타나며 20분 후 세로로 갈라져 있는 큰바위와 만난다. 소나무가 운치를 더 하고 이곳을 올라보면 멀리 월출산도 조망되어 망바위로 명명하였다. 진행 방향으로 머리를 들면 툭 불거진 암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상석이 있는 가지산 주봉으로 장흥군에서는 이곳을 정상이라 한다.




















올라온 산길을 뒤돌아 보면 왼쪽으로 탐진강을 가둔 호수가 약간 드러나며 보림사와 사이에 산세가 절묘한 형세를 이루고 있다. 양쪽 능선이 산태극 물태극을 이루며 산줄기가 용틀임을 하듯 보림사에 함부로 근접할 수 없도록 입구를 막고 선 느낌이라 이곳에 대가람이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원표대덕도 이곳에 올라 “저곳이다” 하며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산세를 뒤로하고 바위 능선을 따라 10분 쯤 오르면 가지산 정상석이 있다. 해발 509.9m 정상석뒤로 더 높은 암봉이 4개 더 솟아 있다. 장흥군에서는 이곳을 정상석이라 하지만 높이로 치면 실질적인 정상은 아니기에 산꾼들 사이에는 이곳을 가지산 주봉으로, 실질적인 정상을 상봉으로 정리하고 있다. 7부 능선에서 가지산 정상까지는 암괴를 이루며 장닭의 벼슬같이 솟아 단단단 근육질의 건강한 남성을 연상시킨다.



가지산 주봉






















 

주봉과 상봉에서 보는 풍광은 천하일품으로 작은 덩치의 산답지 않게 산의 물결을 이룬다. 남쪽으로 장흥의 명산인 제암산, 사자봉, 일림산, 수인산, 억불봉등이 그려낸 산세는 파도가 되어 밀려들고 서쪽으로는 들쭉날쭉 솟은 월출산의 암봉이 까마득한 곳에서도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낸다. 호남정맥의 능선이 북쪽에서 진군하듯 내려오다 가지산 상봉 직전에서 오른쪽으로 흘러 제암산으로 달려가는 모습은 마치 호랑이가 박차 오르듯 힘찬 모습이다. 주봉에서 바위를 살짝 내려가면 희미하지만 오른쪽으로 갈림길이 나온다. 이정표도 없어 지나치기 쉬운 곳으로 장흥군에서 왜 이곳에다 이정표를 하나쯤 세우지 않았는지 아쉽다. 두 번째, 세 번째 암봉을 차례로 지나면 네번째 암봉은 그냥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필자도 암봉에 올라보니 다섯째 봉우리로 가기위해 내려가는 길이 위험해 보여 다시 되돌아 내려왔다. 주봉에서 10분이면 마지막 암봉인 상봉에 닿는다. 다섯 개의 암봉이 서로 도토리 키 재기를 하듯 비슷비슷하게 솟아 있고 깎아지른 절벽과 주위로 빼어난 조망은 한층 가지산의 위용을 보여준다.



가지산 상봉


















 

상봉 직전에 호남정맥의 능선길이 오른쪽으로 흘러가고 보림사 하산을 위해서는 주봉 밑 까지 되돌아 가야한다. 정상석이 있는 주봉 직전 갈림길에서 왼쪽 방향으로 조금만 들어서면 바위틈에 작은 봉분의 무덤이 있다. 이곳에서 하산이 시작된다. 갑자기 하산길이 급경사를 이룬다. 이 길만 벗어나면 완만해지고, 15분이면 임도와 만나는 사거리 갈림길에 이정표가 있다. 오른쪽은 소나무 산림욕장 방향. 보림사는 직진하여 담장이 둘러진 공주 이씨 묘를 지난다. 이곳을 내려서면 다시 갈림길로 정면에 기암이 넘어 질 듯 솟았고 전망대인 ‘망원석’이다. 언 듯 보면 남근석으로 오해 할 수고 있을 것 같다. 안내판을 보면 옛날 보림사 스님들이 올라 와 먼 곳을 바라보며 수행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숯굴



망원석을 내려서면 대나무가 서 있는 약수터 앞 갈림길인데 이곳도 암자터로 보여진다. 보림사는 직진해도 되지만 오른쪽 방향의 팔각정 전망대를 보기 위해 능선을 오른다. 곧 능선의 팔각정 전망대에서 보림사 경내와 절을 가장 바라보기 좋은 지점으로 역광으로 인해 사진을 담을 수 없는 게 아쉽다. 다시 보림사 방향으로 내처 하산을 시작한다. 산길은 사선을 그으며 내려가고 옛날 절에서 쓰던 숯을 구웠던 숯굴과 안내판을 지나면 보림사 비자림산림욕장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림 숲은 피톤치트가 풍부하여 전국적으로 소문난 곳으로 산행이 아니라도 여름철 시원한 나무그늘에 앉아 쉬었다 가면 너무 좋을 것 같다. 산행은 막바지며 왼쪽 대각선으로 5분 가량 내려서면 팔각정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산길과 만난다. 오른쪽으로 부도밭이 있고 가장 아름다운 동부도는 보물 제155호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팔각원당형 부도로 통일신라 말기에 세운 부도로 추정하고 있다.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출발지인 보림사 주차장이 지척이다.









보림사 동부도.













보림사의 약수는 한국100대 명수에 들어 간다.







보림사 서부도




☞(전남여행/장흥여행)장흥 가지산 산행. 천년 사찰 보림사를 품은 가지산 산행 교통편.


원점회귀 산행으로 자가승용차가 편리하다. 부산에서 출발하면 남해고속도로와 섬진강 휴게소를 지나 호남고속도로 광양IC로 빠진 뒤 톨게이트를 나와 인동사거리에서 직진한다. 굴다리를 통과하면 세풍교차로에서 순천, 보성 방면 오른쪽 도로를 탄다. 광양톨게이트에서 세풍교차로까지 2.5㎞ 거리, 곧 광양~영암 고속도로와 연결되고 순천과 보성 방면을 통과 하며 70㎞를 달려 장흥IC에서 내린다. 나주, 광주 방면 오른쪽 도로를 10㎞쯤 타고 가 늑룡삼거리에서 화순·보림사 방면 오른쪽 도로로 2.6㎞ 가량 간다. 유치교차로에서 보림사 방면으로 왼쪽 도로를 타고 2.5㎞ 가면 보림사 주차장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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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 서부도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동부도 서부도. 예술성이 빼어난 보림사 동부도 서부도 보고 왔습니다.

 

전남 장흥군 유치면의 보림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습니다. 6.25 한국동란등 많은 전란속에서 전각은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아름다운 통일신라의 삼층석탑과 석등, 철조비로자나불상 그리고 보조선사 창성탑비와 탑, 동부도와 서부도, 여러기의 부도탑이 남아 보림사의 전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보림사는 9산선문 가지산파의 중심도량으로 헌안왕이 보조선사 체징을 주지로 권하게 되어 창건되었습니다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를 인도와 중국의 보림사와 함께 동양의 3보림이라 합니다.

 

 

보림사 동부도

 

 

보림사의 많은 문화재중 스님의 무덤인 보림사 동부도와 서부도에 대해서 찾아 보았습니다. 보통 부도는 사찰의 입구에 위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도골 또는 부도밭이나 비석골로 부르는데 이곳 보림사 부도밭은 동부도와 서부도 그리고 보림사 경내의 보조선사승탑등 세 곳으로 나누어져 특이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넘어 오면서 보림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 인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특히 동부도와 서부도의 거리는 족히 700m 는 됨직 떨어져 있는 거리입니다. 늦은 오후에 먼저 보림사 입구에 있는 보림사 동부도를 찾아보았습니다.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동부도 서부도. 예술성이 빼어난 보림사 동부도 구경하기

 

동부도는 여러 기의 부도들이 모여 있는 비탈에 가장 위에 모셔진 부도로 그 중 가장 뛰어난 보도입니다. 1963년 1월에 보물 제155호 지정되었고 전체적인 높이는 3.6m로 날렵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부도의 양식으로 보아 서부도와 보조선사 탑비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묘탑의 형식으로 보여 집니다.

 

 

 

 

 

 

부도를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지면에 지대석을 놓습니다. 보림사 동부도는 8각의 얇고 넓은 지대석 위에 상중하대석을 올렸는데 하대석과 상대석은 연꽃잎을 돌렸습니다. 하대석은 8장의 연꽃잎을 돌려 새겨 놓았고 각 귀퉁이마다 꽃 장식을 달아 조형미을 더 한 것 같습니다.

 



 

 

 

연꽃잎 밑으로 낮은 기둥을 8각으로 돌려 각 면마다 안상을 조각하여 받치고 있습니다. 중대석은 상대석보다 가늘고 낮은 8각의 기둥으로 표면에는 아무런 조각을 넣지 않았습니다.

 

 

 

 

상대석은 큰 연꽃잎 8장을 돌려놓았고 밑에는 3단의 낮은 받침이 있고 윗면에는 2단의 탑신 받침을 두었습니다. 8각형의 돌기둥인 탑신은 한 면에 자물쇠가 붙은 문이 새겨있고 지붕돌은 낮은 편으로 탑신과 만나는 부분에 3단의 받침을 두었다.

 

 

 

 

지붕돌 위로는 상륜부가 남아 있는데 간석이 있고 그 위에 꽃장식이 새겨진 보개를 놓았고 보륜과 이중연판위에 보주를 차례로 올렸습니다. 보림사 동부도는 세련된 조각 기법이지만 전체적으로 밋밋하고 입체감이 떨어지며 상대석에 비해 중대석이 낮고 가늘어 전체적인 불안감이 나타납니다.

 

 

 

 

 

 

 

 

 

 

보림사 서부도와 함께 있는 또하나의 부도.

 

 

 

 

 

 

 

 

 

 

보림사 서부도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동부도 서부도. 예술성이 빼어난 두기의 보림사 서부도 구경하기.

 

보림사 서부도는 보림사와는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구석마을에 자리한 서부도는 두기의 부도가 남아 있습니다. 두기 모두 기단, 몸체돌, 지붕돌이 8각원당형으로 기본형태는 닽으나 조각수법에서 차이가 난다. 전체 높이는 3m가 약간 넘고 1963년 1월 보물 제156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보림사 서부도는 네모난 지대석에 변형된 8장의 연꽃잎이 겹쳐져 아래로 향하여 놓였습니다(복련).중대석은 8각이며 상대석은 8장의 연꽃 무늬가 위를 향한 모양(앙련)을 하고 있습니다. 몸체돌은 8각으로 1단의 받침이 있으며 지붕돌은 약간 좁고 경사가 급하며 추녀 끝에 꽃 장식이 없습니다.

 

 

 

부도의 상륜부는 원형의 복발이 있고 그 위로 구름무늬와 연꽃잎이 새겨진 구슬모양의 보주가 겹쳐저 올려져 있습니다. 높이는 3.6m

 

 

 

 

다른 하나는 하대석의 각 판의 끝부분에 꽃장식이 있고 얇은 면을 돌려 8각을 이룹니다. 그리고 탑신의 한면에 문짝에 자물쇠 모양이 새겨져 있는게 앞의 부도와 다릅니다.

 

 

 

지붕돌은 추녀가 거의 파손되었고 경사가 급하며 부도의 상륜부인 보개, 보륜, 보주가 올려져 있습니다. 전체 높이는 3.2m 이며두 부도는 고려시대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고려 중기의 부도로 추정합니다.(내용은 문화재 안내판과 민족문화대백과를 참고하였습니다.

 

 

 

 

 

 

 

 

 

 

 

 

 

 


 

 

 

 

 

 

 

 

 

 

 

 


 

2014/02/25 -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 탑비와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 탑이 보물로 지정.


2014/02/19 -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석탑과 석등,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통일 신라 보림사 석탑과 석등



 

2014/02/08 -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국내 모든 사천왕상의 표준 모델이 된다는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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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 탑비와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 보물로 지정된 통일신라 가지산문의 보조선사 체징 탑비와 승탑.


전남 장흥군의 가지산 보림사에는 보조선사 창성 탑비와 승탑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 탑비’는 보물 제158호이며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 승탑’은 보물 제15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탑비와 승탑에 대해 알기 전에 보조선사 체징에 대해 궁금합니다.



 

 

체징은 신라 후기의 선승으로 804년에 충청남도 공주인 웅진에서 출생하엿습니다. 성은 김씨에 시호는 보조선사 그리고 탑의 호는 창성으로 880년 그가 입적한 후 3년 뒤에 헌강왕9년에 왕이 내려주었습니다.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 탑비. 보물로 지정된 통일신라 가지산문의 보조선사 체징 탑비


보조선사는 선문구산중 가지산파의 도의선사와 염거화상의 법통을 잇는 3대 조사로 숭상받고 있습니다. 보림사 보조선사탑비는 용의 머리를 닮은 거북 받침돌의 머리는 이목구비가 뚜렷하며 험상궂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목은 꼿꼿이 세웠으며 거북등에는 6각의 무늬가 새겨져 있고 등의 중앙에 비신을 꽂아 두는 4각형의 받침대에는 구름과 연꽃을 새겨 놓았습니다. 비의 몸돌은 대리석으로 보조선사의 행적과 창건 연가설화등 그의 관한 기록을 새겨 놓았는데 김영이 비문을 짓고 김원과 김언경이 글씨를 썼다합니다.



 

 

귀부와 이수는 화강암에다 새겼습니다. 머릿돌인 귀두는 구름과 용의 모습을 세밀하게 조각하였는데 답신과 귀두와 이수가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드문 일인데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는 탑의 모습을 완전히 갖추었습니다. 비의 총 높이는 3.46m로 규모 또한 엄청 커 그 당시 석비의 대표작이다.




 

 

 


 

탑비의 앞면 중앙에는 ‘가지산보조선사비영’ 이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통일신라인 884년(헌강왕 10년)에 세웠다.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 보물로 지정된 통일신라 가지산문의 보조선사 승탑.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은 부도탑으로 부도란 스님의 사리를 모신 일종의 무덤을 의미합니다. 보조선사 창성탑은 4.1m의 높이로 기단인 바닥돌과 몸체 돌 그리고 지붕돌이 모두 8각으로 팔각원당형을 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몸체 돌을 받치는 기단의 아래 받침돌에는 구름무늬를 매우 입체적으로 조각하였고 가운데 받침돌은 아래위로 띠를 두른 약간 배가 볼록한 모습입니다. 8개의 큰 연꽃 조각위에 탑신의 몸돌을 올렸습니다.



 

 

몸돌의 앞과 뒷면에는 문짝 모양을 넣었고 네 면에는 사천왕상을 새겻습니다. 몸돌위에 올린 지붕돌은 두터워 보이며 밑면에는 서까래를 표현하였습니다.



 

 

윗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파여져 있으며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올렸습니다. 복발(엎어 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과 보륜 바퀴모양 장식),보주(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등을 차례로 올려 놓았지만 완전한 모양은 아니라 합니다.


 

 

 

보조선사가 880년 77세의 일기로 입적한 후 4년 뒤인 884년에  세운 승탑으로  안정감과 함께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장성군 홈페이지 참고)



 

 

 

 

 

 

 

 

 

 

 

 

 

 

 

 

 

 

 

 

 

 

 

 




2014/02/19 -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석탑과 석등,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통일 신라 보림사 석탑과 석등


2014/02/08 -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국내 모든 사천왕상의 표준 모델이 된다는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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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경북여행/구미여행)태조산 도리사. 신라 최초의 사찰 냉산 도리사 여행하기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에는 고려 왕건의 전설이 서려 있는 태조산이 있습니다. 태조산을 냉산으로도 부릅니다. 이곳 태조산 7부 능선에 해동최초가람 태조산 성지 도리사가 있습니다. 천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신라 최초라는 가람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도리사를 보고 왔습니다.

 

 

 

 

경주 불국사 부산 범어사, 양산 통도사 김천 직지사 등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사찰이 이곳 도리사에서는 고개를 숙입니다. 도리사는 신라 눌지왕(417년)때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가 일찍 전래 되었지만 삼국 중에 유일하게 신라만 불교의 박해가 심하여 전파되지 않아 아도화상이 신라 포교를 위해 국경을 넘어 오게 됩니다.

 

 

 

 

아도화상은 선산 도개면에 있는 모례의 집 지하를 파고 굴실을 지어 거처하게 됩니다. 그럼 아도화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아도는 중국 위나라 아굴마의 아들로 묵호자라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고구려 사람으로 고도령입니다. 중국에서 사신으로 온 아굴마와 연정이 깊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아도입니다.

 

 



 

 

아도가 5살이 되며 출가를 시켰고 16세에 어머니가 출가한 아도화상을 찾아와 모든 사연을 이야기하며 아버지가 있는 중국으로 보내게 됩니다. 아버지 아굴마를 만나고는 현창화상의 문하에 들어가 3년간 수행한 후 고구려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나 어머니 고도령은 아들인 아도를 다시 신라 땅으로 보냅니다. 저는 아도화상의 어머님을 보고 맹자의 맹모삼천지교가 생각납니다. 그 만큼 그어머니에 그 아들인것 같습니다. 아도가 신라 땅인 선산 모례의 토굴에서 생활하게 된 과정으로 그는 이곳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합니다.

 

 

 

 

선산군 도개면 도개동의 우곡마을에서 낮에는 소와 양을 기르고 밤에는 마을 사람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설하며 지냅니다. 그 후 모례장자의 시주로 절을 세우고 경주(서라벌)를 댕겨 오다 태조산 아래 세운 절에서 엄동설한의 겨울인데도 복사꽃과 오얏꽃이 광채를 발하며 만발한 것을 보고 도리사라 하였습니다.

 

 

 

 

이게 신라 사찰의 기원이 되며 그 아래 마을을 도개마을이라 했습니다. 지금도 이곳에는 그 당시의 전설 같은 지명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도가 소와 양을 천마리 길렀던 ‘양천골. ’우천골‘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고 도개동의 윗마을은 외양간이 있었다하여 ’우실‘ 모례장자의 집터는 ’모례장자 터‘ 그리고 우물인 ’모래장자 샘‘이 현재에도 남아 있습니다.

 

 

 

 

신라 최초의 가람인 도리사에는 최초의 수식어답게 국보 한 점이 나왔습니다. 1976년 세존진신사리탑을 보수 복원하던중 금동육각사리함(국보제208호)과 부처님 진신사리 1과가 나왔습니다. 그 사리는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래할 때 모셔온 사리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은 적멸보궁 뒤 금강계단에 모시고 있습니다. 그때 출현된 금동육각사리함은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위탁 보관되어 있습니다.

 

 

 

 

도리사에서 꼭 보고 와야 할 곳이 있습니다.도리사 주차장 앞에는 서대 안내판이 붙어 있습니다. 이곳을 100여m 돌아가면 도리사 최고의 전망대를 볼 수 있습니다. 해평면과 구미의 진산 금오산과 그 앞을 휘감듯이 흘러가는 낙동강이 너무 편안한 모습으로 빛을 받아 반짝입니다. 그럼 도리사의 문화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경북여행/구미여행)태조산 도리사. 신라 최초의 사찰 냉산 도리사 극락전

도리사 극락전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318호

극락전은 도리사의 부속암자인 금당암의 법당으로 19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추정 됩니다. 1807년의 ‘도리사 금당암 중창기’와 1876년 ‘선산 도리사 법당 중수기’를 보면 극락전이 금당암 자리에다 세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앞면 3칸, 옆면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때 여덟 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입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으로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사이에도 다포 양식으로 꾸몄습니다. 도리사 극락전은 1970년 중건된 경복궁 근정전의 공포 구성과 같은 모습으로 내부는 대단히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극락전 내부에는 나무로 만든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경북여행/구미여행)태조산 도리사. 신라 최초의 사찰 냉산 도리사 석탑

도리사 석탑

보물제 470호

도리사 석탑은 화엄석탑이라 부르는 고려시대 석탑입니다. 국내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입니다. 앏은 지대석을 놓고 장대석을 세워 기단을 만든 판석으로 갑석을 삼고 그 위에 모전 석탑처럼 작은 석재를 쌓아 탑 신부를 구성하였고 노반위에 연꽃이 조각된 보주를 올려 놓았습니다.

 

 

 

 

 

 

 

 

 

 

 

 

 

☞(경북여행/구미여행)태조산 도리사. 신라 최초의 사찰 냉산 도리사

아도화상 사적비 및 도리사 불량탑 시주질비

아도화상 사적비 및 도리사 불량탑 시주질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1호

아조화상 사적비와 불량탑 시주질비는 도리사 석탑 왼쪽 비탈진 송림에 세워져 있습니다.

아도화상 사적비는 1655년(효종6년)에 세웠고 신라에 불교를 전한 사적을 적어 놓았습니다. 배면에는 자운비가 음각되어 있습니다. 자연석으로 전면에는 쌍용이 후면에는 4룡을 조각하고 그 사이에 운용을 조각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불량탑 시주질비는 도리사에 불량탑을 시사한 시주와 전답량을 기록한 것으로 1712년(숙종38년)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도화상사적비와 도리사 불량탑 시주질비 앞으로 특이한 모양의 바위가 놓여 있습니다. 흡사 고인돌이라 해도 믿을 것 같은 바위입니다. 네 개의 받침돌 위에 큰 바위를 올려놓은 모습으로 윗부분은 반듯하게 손질이 된 모습입니다. 이 바위가 아도화상이 낙동강과 해평면을 바라보고 와불의 모습을 한 금오산을 보며 도를 깨우쳤을 바위로 좌선대라 부릅니다.

 

 

 

 

 

 

 

 

 

 

 

 

☞(경북여행/구미여행)태조산 도리사. 신라 최초의 사찰 냉산 도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도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14호

도리사 극락전에는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1600년경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1968년에 개금 불사를 하였습니다. 개금시 불상 밑에서 1731년(영조7년)에 도리사를 중수한 기록이 발견되었습니다. 높이는 129cm, 견폭 61cm, 슬폭이 93cm이며 몸에 비해 불두가 크며 평면적이고 네모진 넓은 얼굴이 당시 불상 조각의 양식을 보여줍니다. 머리에는 낮은 나발과 작은 육계를 갖추었고 양미간 중앙에는 작은 백호가 있습니다.

 

 

 

세존사리탑

 

 

☞(경북여행/구미여행)태조산 도리사. 신라 최초의 사찰 냉산 도리사 세조진신사리탑.

세조진신사리탑

삼성각 앞으로는 세조진시사리탑이 있습니다. 1976년 보수공사를 진행하면서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려 올 때 모셔온 세존진신사리가 금동육각사리함에 봉안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금동육각사리함은 8세기 중엽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을 하며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어 직지사에 위탁 소장되어 있습니다.

 

 

 

 

직지사 홈페이지 캡쳐




도리사 극락전

 

 

 

 

 

 

 

 

 

 

 

 

 

 

 

 

 

 

 

 

 

 

 

 

 

 

 

 

 

 













태조산 도리사 일주문으로 도리사 사찰에서 4.5km 거리에 있습니다.

(문화재 안내판과 도리사 홈페이지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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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구미시여행)냉산(태조산)도리사. 신라 최초 사찰 도리사의 특이한 석탑


신라 최초의 사찰인 도리사는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냉산(태조산)에 있습니다 주위에 소나무가 많아 송곡리로 불려질 정도로 소나무의 운치가 천년고찰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도리사의 유래를 보면은 신라 눌지왕때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래한 고구려 아도화상이 이곳에 처음으로 절을 세웠습니다.

 




아도화상이 불교 포교를 위해 경주 땅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냉산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멀리서 바라본 냉산 골짜기에 한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화려한 모습으로 피어 있어 아 곳에다 절을 세우고 도리사라 하였습니다. 신라 최초의 사찰 답게 이곳에는 현재 특이한 모양의 도리사 석탑이 보물 제47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벽돌을 쌓은 듯한 도리사 석탑입니다. 모양부터 아주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탑은 도리사 극락전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 석탑입니다. 높이는 3.3m. 우리가 많이 보아 오던 석탑과는 그 형태를 달리하는 모습으로 모전석탑에 가깝습니다. 땅위에 10매의 길게 다듬은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탑의 기단 부분을 세웠습니다.


 



기단은 사면에 네모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의 각 면에 직사각형의 판석 6~7매를 병풍처럼 둘러 세웠고, 남면 중앙부에는 문짝이 새겨져 있습니다. 탑신 부분은 3중으로 각층마다 작은 석재를 중첩하여 얽거나 짜서 탑신부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벽돌탑인 모전 석탑의 형태입니다.


 



조각 양식과 돌 다듬은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엽의 석탑으로 추정하며 석탑의 위부분은 노반위에 연꽃이 조각된 보주를 올려 둔 형태입니다. 국내의 모전 석탑은 재가 본것중에서는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과 청도 불령사 모전석탑이 전부인데 그 만큼 귀한 석탑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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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양산원동여행)천태산천태정사. 웅장한 아미타여래좌상과 협시보살이 세계최대규모인 천태사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에 자리 잡은 천태사는 층암절벽에 비집고 들어 앉은 사찰이다. 천태사를 품은 천태산은 양산8경의 하나로 깊은 층덤을 이룬 바위가 태산같이 이루었다하여 천태암산으로 불려졌는데 실제로 천태정사 뒤로는 깎아지른 암벽이 양립하여 금강산을 옮겨 놓은 모습이다. 지금은 위에 상부댐인 천태호가 산을 막아 용연폭포의 낙차는 거저 민망할 정도로 볼품없게 되었지만 현재도 천태사와 함께 가장 방문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특히 가을철 신불암재로 올라가는 곳에서 바라보는 천태사 골짜기의 비경은 경남100경에 올라 있다.

 

  



 

필자는 이곳 천태사를 오래전 부터 찾던 곳이다. 주로 천태사 암자 뒤 바위인 천태슬랩에 암벽등반을 위해 찾았는데 그 당시 천태사는 조용하며 찾는이가 없는 한적한 절집으로 지금에 비해서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가면서 천태사를 찾는 관광객이 늘고 물금에서 삼랑진으로 이어지는 낙동강 드라이브 코스가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는등 하면서 천태사의 규모도 많이 확장되었다.  

 

 



천태사는 신라때인 원효대사께서 창건하였다한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그당시 많은 고승대덕이 이곳의 풍치에 매료되어 수도정진을 위해 찾았다는데 현재의 천태사는 옛 사찰의 모습은 찾을 수 없는 근래에 중창 불사가 된 사찰이다. 

 






천태사 맞은 편 바위 절벽을 깎아 내어 16m의 거대한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앙에 모시고 협시 보살인 왼쪽 대세지보살입상과 오른쪽에는 관세음보살 입상을 새겨 놓았다. 장엄하며 웅장한 부처님의 세계를 보는 것 같다.

 

 



천태사의 안내판을 보면은 무량수궁 아미타대불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천태사 중건주 진우대사는 천일기도 중 현몽으로 마애삼존아미타대불이 이곳 천연암벽에 모셔진 것을 알고 5년간의 불사 끝에 2009년 6월28일 봉안식을 가졌다. 아미타 대불과 좌우 협시보살은 규모면에서 세계 최대 삼존아미타대불이라 하며 그 앞에서면 크기를 실감할 수가 있다.
































☞(경남여행/양산원동여행)천태산천태정사. 웅장한 아미타여래좌상과 협시보살이 세계최대규모인 천태사 교통편.


대중교통은 양산시 물금읍 물금에서 천태사를 오가는 137번 버스를 타야 한다. 오전 7시25분, 10시, 낮 12시40분 등 6회 운행. 천태사 물금으로 나오는 차편은 오후 1시30분, 4시, 6시20분, 8시40분 출발. 부산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하여 원동역에서 내리면 편리하다. 부산역발 무궁화 열차는 오전 6시35분, 8시42분, 9시25분, 10시27분에 있다. 원동역에서는 원동초등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면 천태사로 갈 수 있다. 네비는 천태사를 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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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거창가조여행)우두산 고견사. 예술성이 뛰어난 고견사 동종 보고 왔습니다.

 

경상남도에는 거창한 동네가 있습니다. 1,000m가 넘는 큰 산으로 둘러진 거창한 거창군에는 산좋고 물 맑은 경남의 허파라 종종 이야기를 합니다. 오지와 때 묻지 않은 산세를 자랑하는 거창군에 많은 산들 중에서도 유독 거창군의 입구에 펼쳐진  우두산이 더욱 눈길이 갑니다. 우두산은 가야산 국립공원에 포함될 정도로 걸출한 산세를 자랑하며 맞은편에 암봉으로 홀로 우뚝 선 의상봉과 함께 꼭 소의 머리를 형상화 합니다. 의상대사가 수도하였다는 의상봉 그 아래 숨죽인듯 자리 잡은 고견사는 전통사찰 제90호로 지정되어 천년의 향기가 묻어납니다. 고견사는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7년(667년)에 원효와 의상스님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고견사의 창건 설화는 원효스님의 전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님이 고견사를 창건할 때 이곳에 와 서 보니 전생에 와 본것을 깨달았다하여 이름이 유래되었다합니다. 견암, 견암사, 견암선사로도 불려 지며 고견사의 명칭은 1630년 설현,금복, 종해스님들이 중건하면서 고견사로 개칭하였다합니다. 이곳 고견사에는 사찰의 연륜에 비해 문화재는 소박합니다. 많은 전란과 6.25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사찰은 폐허가 되모양입니다.  그 중 눈에 들어오는 것이 고견사 동종으로 대웅전 안에 모서져 있습니다. 보물 제 1700호이며 인조8년인 1630년에 제작된 동종으로 높이가 97.2m, 입의 지름이 59.7m로 이 당시인 17세기 전반의 동종 중 큰 규모라합니다. 옅은 붉은 색을 띠는 동종은 천판 위에 음통을 갖추지 않은 두 마리의 용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용의 이마에 특이하게 王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동종은 세부문양등 주조기술이 정교하게 표현된 설봉스님의 작품으로 현재 보관상태도 양호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범종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우두산 산행때 고견사를 가게 됩니다. 그 때는 '고견사 동종'을 챙겨 볼 것을 권합니다. 

 

 



 

 


 

 

 

 

용의 이마에 王자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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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여행/ 공주여행)공주마곡사. 춘마추갑도 좋은데 가을 마곡사를 보고 왔습니다.


마곡사는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의 태화산 아래 자리 잡은 천년 고찰입니다. 또한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 본사로 ‘춘마추갑’이란 애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휘하에 계룡산의 동학사 갑사를 말사로 두고 있습니다. 봄에는 마곡사요 가을은 갑사라 하여 호사가의 입에 '춘마추갑'으로 오르내립니다. 그 뜻은 봄에는 마곡사요 가을에는 갑사라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태화산 마곡사는 봄꽃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일주문에서 마곡사까지 이어지는 왕벚꽃나무는 마곡사에서는 장관을 연출하며 역시 춘마곡하며 혀를 두르게 합니다.


 

해탈문



마곡사 사적입안 의 기록를 보면 640년(백제 무왕 41년)에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하였습니다. 1172년 고려 명종때 보조국사가 중수하고 범일대사~도선국사~각순대사를 거치면서 마곡사는 보수와 중수를 거듭하며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영산전의 사액을 내렸다는 유서 깊은 마곡사입니다.


 



현재 마곡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마곡사에 있는 보물로는 대웅보전(보물제801호), 대광보전(보물제802호), 영산전(보물제800호), 오층석탑(보물제799호)사천왕문 해탈문 괘불, 목패, 세조가 타던 연, 청동향로가 유형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감지금니묘법연화경 제6권(보물제270호)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제 269호)도 남아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마곡사 까지 이르는 길은 오르막이 없는 평탄한 길입니다. 다리를 건너면 먼저 만나는 것이 마곡사 해탈문입니다. 불가에서는 해탈문을 법계로 들어서는 문이라하며 마곡사의 정문입니다. 1987년 충청남도문화재 자료 제66호로 지정되었고 해탈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해탈문은 겹처마 팔짝 지붕이며 건물은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기둥 사이에 모두 판장벽으로 돌려 막아 내부에는 금강역사상과 보현밀 문수동자상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해탈문을 통과하면 다시 마곡사 천왕문과 만나게 됩니다. 마곡사에서는 두 번째 문으로 호법신장인 사천왕상을 모신곳입니다. 마곡사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우락부락하게 생긴 모습을 하고 있으며 악귀와 모든 잡신을 물리치며 마곡사를 보호합니다. 1984년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2호로 지정되었고 1출목 익공식 공포를 짜 올린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된 박공지붕집입니다. 정면3칸 측면2칸으로 1910년 6월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마곡사의 영산전은 현재의 마곡사 건물중 가장 연륜이 오래된 건물로 1650년 중수되었다고합니다. 이곳에 고려시대에 만든 목불7구가 남아 있습니다.


  

천왕문



대광보전은 ‘삿자리를 짠 앉은뱅이’전설이 내려옵니다. 최근까지도 법당안에 삿자리가 깔려 있었다하며 1788년 중창되어 마곡사의 중심건물입니다. 내부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셨는데 건물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보도록 특이한 배치를 하였습니다. 이런 특이한 배치는 영광에 있는  불갑산 불갑사에서도 보았습니다. 





대웅보전은 대광보전 뒤 축대위에 2층 구조로 지어졌습니다. 내부는 통층구조로 되어 있고 전각 내부에는 싸리나무 기둥 이 네 개가 세워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 싸리나무 기둥을 안고 돌면 아들은 낳는다는 설화가 내려온다합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많은 신도분들이 이곳 싸리나무를 만지며 돌아 싸리나무가 윤이 나도록 반질반질하다 합니다.  대웅보전은 대웅전이라합니다.  법화경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큰영웅이라는데서 유래합니다. 대웅이란 부처님의 몸을 의미하며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석하시는 집으로 1785년에서 1788년에 걸쳐 중수되었다합니다.



마곡사에도 명부전이 있습니다. 사람은 한번 이세상에 태어나면 모두다 흙으로 돌아갑니다. 죽음에 대해 한번더 생각해보면서 그동안에 쌓았던 업장을 지장보살님께 참외하고 소멸을 하는 기도처를 명부전이라 합니다. 필자도 천봉산 대원사에서 미리 유언장도 작성해 보는 그런 경험도 해보았습니다만 죽음 앞에서는 모두 다 겸허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곡사를 들어서면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이 멋드러진 마곡사 오층석탑입니다. 대광보전 앞에 중심을 딱 잡고 자리하고 있는 마곡사 오층석탑은 다보탑 또는 금탑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탑의 2층 네면에는 ‘사방불’을 세겨 놓았고 상륜부에는 특이하게도 청동의 풍마등이 조성되어 라마식 보탑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곡사 오층석탑이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 마곡사 오층석탑은 특이한 이력이 있습니다. 나라의 기근을 3일간 막는 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합니다.  





마곡사에는 특이한 건물이 대광보전 한켠에 있습니다. 백범당으로 백범김구선생이 이곳에 출가하여 머룰렀다합니다. 백범김구선생은 1896년 일본군 중좌를 살해하고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그 후 탈옥하여 마곡사에서 몸을 숨기며 지내다가 법명을 원종으로 하여 출가를 한 이력이 이곳 마곡사에 남아 있습니다. 그 후 나라가 해방 된 후인 1946년 다시 마곡사를 방문하여 향나무를 식수하였는 데 이 향나무가 백범나무로 불리고 있습니다.





마곡사에는 울울창창한 나무의 봄기운을 받으며 걸을 수 있는 많은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솔바람길, 백범길등 처연히 떨어지는 동백꽃이 안스러운 겨울이 지나면 만물이 생솟음치는 봄이 찾아옵니다. 봄과 함께 이곳 마곡사를 찾아보길 권합니다. 아마 ‘춘마곡’의 아름다운을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필자는 춘마곡도 춘마곡이지만 빨간 낙엽이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마지막 가을 바람을 타고 갔습니다.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마곡사에는 그래도 아쉬움을 달래주는지 마지막 단풍이 제 색깔을 보여 주며 화려하게 입구를 장식하여 너무 좋은 가을 풍경을 접하고 왔습니다. 새봄이 찾아오면 다시 마곡사를 찾아갈 요량입니다. 질정없이 마음이 자꾸 마곡사로 가지는 것이 몸만이 아닌 마음도 마곡사의 봄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마곡사 홈페이지 발췌)


 




범종루







마곡사 오층석탑































대웅보전





































응진전










백범나무













대광보전































































◆공주 마곡사 찾아가는 길◆

마곡사 홈피 발췌



◆공주 마곡사 대중교통편과 시간표◆

마곡사 홈피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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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여행/공주여행)계룡산 갑사, 추갑으로 유명한 계룡산 갑사 보고 왔습니다.


계룡산을 대표하는 사찰로는 동학사와 갑사가 있다. 서로 용의 등짝인 계룡산 성곽 능선을 등지고 서 있다 보니 계룡산을  이야기 할 때 동학사와 갑사는 빠지지 않는다. 동학사는 도회지의 분바른 빤질빤질한 여인의 모습처럼 드러난 사찰이라면 갑사는 머리위에 수건을 두른 밭일을 하는 시골 아낙네의 수더분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지나친 편견일까. 그만큼 동학사보다는 갑사에 정감이 더 간다. 그리고 계룡산 갑사는 춘마추갑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 다닌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주변에 이른 봄꽃이 피어나면 봄이 왔다는 소식이다. 마곡사는 단연 벚꽃이 유명하다. 후두둑 후두둑 비바람에 떨어지는 질정 없는 꽃비가 너무 좋은 춘마의 마곡사라면, 핏빛의 붉은 단풍물이 뚝뚝 떨어지며 갑사를 휘감아 돌아 한바탕 ‘불난집의 호떡’을 보는 것 처럼 붉은 단풍을 따라 관광객이 몰려드는 계룡면의 가을 갑사를 호사가 들은 추갑이라 한다. 그만큼 갑사의 단풍은 붉은 빛을 토해낸다. 답사 당일은 마지막 단풍으로 절정을 이루었는데 이제 나뭇가지에는 휑하니 찬바람만 들고 땅 바닥으로 떨어진 단풍잎은 바람이 쓸면 쓰는 대로 흔들려 몸을 맡기며 낙엽은 자신의 몸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다.



 


계룡산은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악중에 서악이었고 고려시대로 넘어와서도 묘향산이 상악, 지리산이 하악으로 계룡산은 3악 중 중악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갑사의 창건은 신라최초의 사찰인 선산의 도리사를 창건한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다. 그가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땅 계룡산을 지날 때 이곳에 상서로운 빛이 감돈 것을 보고 찾아가니 천진보탑이 있었다. 그때가 420년으로 아도화상은 이곳에 갑사를 창건하게 된다. 통일신라시대때는 의상대사가 주석하여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의 법맥을 이어 화엄10대 사찰의 하나가 된다. 그와 함께 나라의 으뜸 사찰이 되며 임진왜란때에는 영규대사가 전국에서 가장 먼저 승병을 일으킨 곳이 이곳 갑사이다. 그는 왜적과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를 하였다. 이곳 갑사에는 표충원을 세우고 휴정, 유정,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시며 받들고 있다.







추갑의 갑사는 주차장을 지나 일주문에서 오르는 길이 가장 아름답다. 장정이 손을 뻗어 서로 잡을 수 없는 엄청 큰 둘레의 참나무가 노란잎을 드리우고 홍엽의 단풍으로 물든 갑사를 오르는 순례길은 갑사 구곡과 함께 하나하나 되짚어 보며 오르는 재미 또한 가을 갑사를 찾는 솔솔한 재미이다. 그것도 잠시 지금 쯤 계룡산은 울퉁불퉁한 계룡의 근육에 하얀 눈꽃이 피어나고 잠자던 계룡은 하얀  서릿발을 세우며 몸을 곧추세우듯 바람을 일으켜 눈가루를 날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와 반대로 겨울의 갑사는 하얀눈을 뒤집어 쓰며 자꾸만 자꾸만 그의 존재를 숨긴다.그런 겨울의 갑사는 그만큼 한적하니 좋은 여행지이다.
























기허당 영규대사의 영정

































갑사 석가여래삼세불도는 보물 제16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여래의 후불탱화로서의 영산회상도와 아미타여래의 후불탱화로서의 아미타회상도 2폭이며 화사인 의겸이 1730년에 제작한 불화이다.











석조약사여래입상








































갑사사적비







부도탑































철당간지주


 

☞(충남여행/공주여행)계룡산 갑사, 흔하지 않는 통일신라시대 철당간이 갑사에 있어요.


갑사에 가면 철로 된 당간 지주가 인상적이다. 보물제 260호. 당간이란 사찰에 행사가 있을 때 사찰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 두었던 곳을 말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잡아주는 두 돌기둥은 당간지주이다. 흔히 사찰의 대웅전 좌우로 똑 같은 모양의 돌기둥을 볼 수 있다. 갑사의 당간를 보면 네 면에 구름무늬의 운상을 새긴 기단위에 철 당간을 세우고 양 옆에 당간지주가 잡아주고 있다. 갑사의 철당간은  월래50cm인 원통의 철통 28개가 연결되었다 한다. 1899년인 고종35년에 벼락을 맞아 4개가 부러져 현재는 24개가 갑사를 지키고 있다. 갑사의 당간은 통일신라 때인 문무왕 20년(680)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간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로 보고 있다. 현재 갑사의 대웅전은 창건때와는 다른 위치에 있었던 것이 당간지주를 보면 알 수 있다.














◆계룡산 갑사 전각 배치도◆


(갑사 홈페이지 캡쳐)


◆계룡산 갑사 교통편◆

서울방면에서 오실 경우

경부고속도로 → 천안논산고속도로 → 정안 IC → 23번국도 → 갑사방면 진입 → 계룡면사무소 → 계룡저수지 → 갑사

 

부산방면에서 오실 경우

경부고속도로 → 호남고속도로 → 유성 IC → 32번국도 → 박정자 삼거리 → 마티터널 → 과학고등학교 지나 우측진입 → 청벽교차로 다리 아래

통과 → 갑사방면 진입 → 갑사

 

광주, 호남방면에서 오실 경우

호남고속도로 → 논산 IC → 논산시내 → 23번국도 공주방향 → 갑사방면 진입 → 계룡저수지 → 갑사

 

 고속버스 : 서울(남부터미널, 반포.강남터미널, 동서울터미널) ↔공주(신.구터미널), 1시간 50분

 시내버스 : 공주 ↔ 갑사

 ★대전, 공주, 버스시간표 




 

전화번호 : 공주종합버스터미널 : ☎ 041) 855-8114

                공주관광안내소 : ☎ 041) 856-7700

 

 

• 공주에서 갑사까지 시내버스 운행, 30분 소요

• 공주에서 갑사까지 택시로 20분 소요

• 대전 - 버스 : 유성(충남대 앞)에서 갑사까지 340번 버스, 50분 소요

• 대전 - 지하철 : 유성온천역에 하차 6번출구로 나오면 10m앞 정거장(340번 버스),(갑사홈페이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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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영광여행)불갑산 불갑사. 백제에서 가장 오래된 불갑사 인도스님  마라난타 존자가 창건 설.


불갑사는 삼국시대때에 백제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사찰로 보고 있다. 불교를 처음 전래한 인도스님 마라난타 존자가 남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 침류왕 1년(384년)에 영광땅 법성포로 들어와 이곳 모악산(불갑산)아래에 최초의 사찰을 세우니 그게 불갑사다. 각진국사가 도갑사, 봉갑사, 불갑사등 3갑사를 창건하여 그중 불갑사가 으뜸 사찰이 된다고하여 불갑사로 되었다. 또는 백제무왕(600~640년)때 행은 스님이 세웠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것하나 확실하지 않다. 자연적으로 뒤에 모악산으로 불리던 산도 불갑사에 의해 불갑산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여러가지 설중에는 남방불교를 주장하는 인도의 공주 허왕옥과 그의 오빠 장유 화상에 의해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전설과도 무관하지 않은듯 불갑사도 인도 불교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전설이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전남여행/영광여행)불갑산 불갑사. 백제에서 가장 오래된 불갑사 정유재란으로 전소 법릉스님에 의해 중창.


불갑사 고적기에 보면은 최초 창건시기를 백제 초기로 나와 있다. 그만큼 유장한 세월을 이어온 불갑사에는 현재 남아 있는 문화재는 빈약함에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를 보면 정유재란때 사찰은 모두 전소되고 사찰내 암자인 전일암만 겨우 남아 명맥을 유지하다 선조31년인 1598년 법릉선사에 의해 불갑사의 4차 중창의 불사를 일으키게 된다.  

 

 

 

 

 

☞(전남여행/영광여행)불갑산 불갑사. 불갑사 조선 말기 불교계의 시련으로 쇄락.


불갑사의 전각과 수많은 암자가 속속 제모습을 갖추고 불갑사의 중흥시기가 이때가 아닌가 싶다. 조선시대 말기에 들어와 1845년~1868년간인 20여년은 동안은  한국불교의 시련기가 되었다. 주석으로 불경소리가 끊이지 않던 불갑사도 승려들이 수행을 못하게 되고 더 이상 목탁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빈 절로 남게된 불갑사는 급격히 사세가 기울면서 모든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불갑사는 쇄락의 길을 걷게 된다.

 

 

 

 

 

☞(전남여행/영광여행)불갑산 불갑사. 백제에서 가장 오래된 불갑사 문살이 아름다운 대웅전 보물제 830호 지정.


그중 불갑사의 대웅전은 보물제 830호로 정유재란때 전소되었는데 현재의 대웅전은 18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순종융회3년인 1909년에 보수를 하였다. 정면3칸 측면3칸의 여덟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인 다포계 건물로 매우 화려한 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문살 또한 삼분합 소슬 빗살문으로 연꽃, 국화꽃, 보리수나무 무늬를 섬세하게 조각하여 대웅전의 모습을 더욱 더 아름답게 하고 있다.

 

 

 

 


☞(전남여행/영광여행)불갑산 불갑사. 불갑사 대웅전은 정면이 측면. 특이하게 부처님을 안치.


대웅전의 특이한점은 모든 사찰에는 대웅전을 사찰에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면서 삼존불을 전면으로 보도록 안치를 한다. 모든 불자들은 대웅전을 들어갈때는 측면의 작은 문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그러나 불갑사는 대웅전을 사찰의 중심에 두었지만 기존 사찰과 다른 점은 대웅전안에 모신 부처님은 대웅전의 정면이 아닌 오른쪽 방향 즉 측면으로 보도록 안치를 하였다는 점이다. 이곳은 대웅전의 전면이 정면이 아닌 측면이 되고 측면이 정면으로 되도록 한게 특이하다.  

 

 

 

 


☞(전남여행/영광여행)불갑산 불갑사. 불갑사 만세루는 2층이지만 문루형태가 아닌 특이한 모양세.


만세루는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건축물로 대웅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층형의 문루건물이다.  정면5칸, 측면4칸으로 옆에서 보면 사람인(人)자를 한 맞배 지붕 누각으로 되어 있다. 여타 사찰에서는 보통 누각 아래로 출입을 하여 대웅전으로 이루어지도록 문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불갑사 만세루는 특이하게 이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문루가 아닌 여름철에 스님들의 공부하는 공간으로 사용 되었다. 조성연대는 조선시대 후기로 추정되며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남여행/영광여행)불갑산 불갑사. 백제에서 가장 오래된 불갑사 사천왕상은 연기사에서 옮겨와 안치.


불갑사를 들어서면 만나는 천왕문에는 사천왕상이 모서져 있다. 이곳의 사천왕상은 특별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신라진흥왕때  연기조사가 나무로 조각을 하였다하며 국내 목조 사천왕상중에는 가장 큰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고종 7년인  1870년에 설두스님이 불갑사를 중창하면서 전북 무장 소요산의 연기사에서 목선 4척에 나누어 싣고  옮겨 와 안치를 하였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159호


 

 

 


☞(전남여행/영광여행)불갑산 불갑사. 불갑사의 뜻은 '으뜸 사찰' 불갑산은 '으뜸 산' 9월에는 꽃무릇이 '으뜸'인 불갑사. 


9월의 불갑산 불갑사는 으뜸의 산과 으뜸의 절을 실감하게 된다. 먼저 사찰을 감싸는 꽃무릇에 의해 불갑산 과 불갑사는 마치 붉은 빛을 토한 불길에 휩사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와 덩달아 전국의 관광객이 이곳 불갑산 꽃무릇을 보기위해 몰려오는지 불갑사와 불갑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9월의 불갑사에서 꽃무릇인 상사화의 매력에 빠져보았고 백제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불갑사도 천천히 둘러보면 좋은 여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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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영광여행)특이한 모양의 기둥에 깜짝, 불갑사 일주문. 일주문의 기둥이 두개.


천년고찰을 찾아 들어가는 길목에는 반드시 출입문격인 일주문을 지나게 된다. 절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문으로 사찰의 규모를 나타내기도 한다. 보통  사찰에 따라 따르지만 일주문을 흔히 조계문이라고도 부른다. 범어사의 일주문은 조계문으로 부르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어 위풍 또한 당당하다. 두개의 기둥이 일반적이지만 범어사 일주문은 네개의 기둥이 한일자 모양을 하고 있어 웅장하며 장엄함을 함께 보여준다. 

  









(전남여행/영광여행)울퉁불퉁 특이한 모양의 기둥에 깜짝, 불갑사 일주문. 일주문의 기둥이 두개.


불갑사를 찾아가는 입구에도 큰 규모의 일주문이 반긴다. 다른 사찰의 일주문 보다 엄청 높고 웅장하며 공포에서 풍겨나오는 무게는 여타 사찰에서 느껴보지 못한것 같다.  불갑사의 일주문은 두개의 기둥으로 세워져 있는데 그 기둥이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일반적인 사찰의 기둥은 깨끗하게 다듬은 원기둥을 사용한다. 그러나 불갑사의 일주문은 나무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기둥을 삼았다. 그러다 보니 울퉁불퉁한 가지가 정리가 되지 않은 모습으로 일주문을 받치고 있어  한번더 불갑사를 생각하게되는 것 같다.  대개 일주문등 큰기둥에는 수입목을 사용하지만 불갑사 일주문은 우리 느티나무를 자연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불갑사 여행시에 일주문의 기둥이 어떤 모습인지 확인해보세요 








(전남여행/영광여행)특이한 모양의 기둥에 깜짝, 불갑사 일주문. 일주문의 의미 알아보기.


일주문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조계문으로 불리는 일주문은 만법이 모두 갖추어져 일체가 통한다는 법리가 담겨져 있어 삼해탈문이라고도 한다. 즉 세속의 번뇌와 흐트러진 마음이 조계문을 통과함에 따라 마음을 다잡으며 진리의 세계로 들어 왔다는 것. 즉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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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여행/해남여행/달마산미황사)달마대사의 법신이 머무는 곳인 달마산 미황사.

 

해남읍에서 땅끝마을 방향으로 가다보면 독특한 산세에 눈이 절로 간다. 해남의 명산으로 미황사를 감싸고 있는 달마산이다. 능선으로 삐쭉삐쭉 솟아 있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만개의 부처님 모습과 닮았다는 달마산. 산세의 기운이 땅끝을 더 세워서 그런지  항상 달마대사의 법신이 머무는 곳이라 달마산이라 부른다.


 

 

달마산 미황사의 대웅보전 보물 제947호.


 

 

 ☞(전남여행/해남여행/달마산미황사) 독특한 미황사의 창건 유해. 달마산 미황사.

 

달마산에는 미황사가 있다면 미황사는 달마산에 있다. 미황사의 창건 설화를 보면 미황사의 설화가 왜 이곳에다 사찰을 창건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1692년인 숙종 18년에 지은 '미황사 사적기'에 나와 있는 기록을 보면 신라 경덕왕 때인 749년에 돌배가  달마산 아래 포구에 닿았다. 당시 의조화상이 마을 주민과 함께 포구로 나가 돌배를 맞이하였는데 배안에는 많은 경전과 불상이 실려 있었다.

 

 

미황사 일주문.

 

 

 ☞(전남여행/해남여행/달마산미황사)달마대사의 법신이 머무는 곳인 달마산 미황사. 검은 소의 전설이 있는 미황사.

 

화엄경 80권과 법화경 7권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성중, 16나한 그리고 탱화, 금환, 검은 돌을 함께 싣고 사람이 아닌 금인이 돌배를 젓어 이곳에 도착하였다 .  갑자기 검은돌이 갈라지더니 그곳에서 난데 없이 검은소가 나왔다. 그날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게 되었는데 금인이 나타나 '나는 돌배를 저어 왔는 우전국의 왕인데 부처님을 모실곳을 찾아 여러나라를 다니다 이곳에 이르게되어 달마산 꼭데기를 바라보니 만불(萬佛)이 나타남으로 여기에 부처님을 모시려하오. 그러니 검은소에 경전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거든 그곳에다. 부처님을 모시도록하시오'하며 사라졌다. 금인도 달마산의 기암이 설악산 천불동 계곡의 비유처럼 달마산에 솟은 기치창검들이 모두 부처님의 모습으로 여겨진것 같다. 

 

 

일주문의 용 조각.

 

 

 ☞(전남여행/해남여행/달마산미황사)달마대사의 법신이 머무는 곳인 달마산 미황사. 미황사의 뜻은.

스님은 깨보니 꿈이라 꿈도 회괴하다며 소등에다 경전을 올리고   뚜벅뚜벅 가는데 갑자기 소가 땅바닥에 눕더니 다시 일어서서 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닌가. 달마산 아래 골짜기에 다다라 검은 소가 땅바닥에 눕더니 꿈쩍도 하지 않으며 일어서지 않았다. 의조화상은 처음에 소가 잠시 누웠던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그 뒤에 눌러 앉은 자리에다 '미황사(美黃寺)'를 창건하였다.

 

 

 

 

 ☞(전남여행/해남여행/달마산미황사)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이 고색창연.  달마산 미황사.

미황사는 소와 인연이 깊은 사찰로 그 뜻을 보면  '미'는 소의 울음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따온 것이고 '황'은 금인의 색상이 누런 금빛에서 따왔다 한다. 이런 달마산 미황사가 1989년까지 비어진 사찰로 남아 있었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미황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특히 대웅보전은 보물947호이며 응진당과 명부전 또한 보물11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남여행/해남여행/달마산미황사)전국의 사진작가를 끌어 모우는 미황사의 독특한 매력. 달마산 미황사.

 

달마산 미황사의 대웅보전은 전국에서 사진작가를 많이 불러 모우는 곳 중의 한곳이다. 대웅보전과 달마산, 고색창연한 대웅보전과 함께 작품이 아닌곳이 없을 정도다. 특히 나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대웅보전 안쪽 천장인 공포의 아름다움에 감탄사만 연발을 하였다. 혹 미황사를 방문하시거나 그럴 계획이 있다면 꼼꼼히 살펴보자. 대웅보전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 하나에도 전설과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 천년고찰이다.

이야기 줄거리는 미황사 홈페이지에서 내용을 발췌하였습니다.

 

 

 

 

 

 

 

 

 

 

 

 

 

 

 

 

 

 

 

 

◆ 미황사 대웅전의 내부 모습◆


 

 

 

 

 

 

 

 

 

 

 

 

 

 

 

 

 

 

 

 

 

 

 

 

명부전

 

 

 

 

 

 

 

 

 

 

 

 

 

 

 

 

대웅보전의 기둥에도 용이 그려져 있다. 물을 다스리는 용이 화재를 막는 다는 의미로 보인다.

 

 

대웅보전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 거북이와 연꽃문양.

 

 

 

 

 

 

 

 

 

 

 

 

응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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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해남여행/대흥사)두륜산 대흥사,백제시대 천년고찰 해남 대흥사.


두륜산 대흥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천년 고찰이다. 예전에는 이곳 두륜산을 대둔산 또는 한듬산으로 불렸는데 사찰의 명칭도 대둔사 도는 한듬절로 불려졌다.근대에 와서 대흥사로 고쳐 불리워졌다.  대흥사 창건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가 426년에 정관존자에 의한 창건설화와 514년 아도화상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는 신라말의 고승이었던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전남여행/해남여행/대흥사)두륜산 대흥사,백제시대 천년고찰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 부도와 표충사 편액.



조선시대에 와서는 임진왜란때 승병을 일으킨 서산대사 휴정스님의 의발과 부도탑이 있는 곳으로 부도탑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1789년 정조대왕께서 임진왜란 서산대사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이곳 대흥사에 표충사 편액을 하사하였다 합니다. 아쉽게도 부도밭은 입구가 잠겨 있어 서산대사 그분의 부도는 멀 발치에서 볼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부도탑을 지나면 울창한 숲 그늘을 지나게 됩니다. 명산에 명찰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곳입니다. 그만큼 아름드리 나무들이 밀집되어 천년 고찰의 모습을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곳을 지나면 일반 사찰의 천왕문격인 해탈문을 지나게 됩니다. 이곳을 통과하면 모든 사바세계의 번뇌와 괴로움을 벗어 버리고 부처님의 셰계로 들어서는 경계일까요. 이곳을 지나면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며 대흥사의 참 모습을 보게 됩니다.


 

 


 넓은 들판 같은 두륜산의 품안에 자리 잡은 대흥사, 그 뒤를 두른 두륜산은 마치 스님이 팔을 배에 올리며 편안하게 누워있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연유인지 이곳을 찾는 모든 분들의 얼굴에는 근심걱정을 모두 잊은 듯 편안한 부처님의 얼굴인듯 아니면 해탈한 노승의 얼굴인 편안하게 누워있는 두륜산 능선은 그야말로 신기하다.


 

 


 이곳은 스님들의 수행공간과 함께하고 있어 왼쪽의 범종각을 보고 그 옆에 두그루의 느티나무를 만나게 됩니다. 연리근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습니다. 



 

 


☞(전남여행/해남여행/대흥사)두륜산 대흥사,백제시대 천년고찰 해남 대흥사.

추사 김정희와 원교 이광사의 편액 글씨.


이곳을 지나면 대흥사의 본전불이 있는 대웅보전으로 가게됩니다. 먼저 다리를 건너면 2층의 침계루와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는 신라말에 조성된 응진당 삼층석탑이 있고 대웅보전에는 원교 이광사의 편액이 걸려 있다. 오른쪽의 건물에 백설당과 무량수각 현판이 나란히 붙어 있다.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고 백설당은  해사 김성근이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남여행/해남여행/대흥사)두륜산 대흥사,백제시대 천년고찰 해남 대흥사.

1899년 대화재로 모두 소실되어 복원 불사.



현재의 건물들은 1899년에 대흥사의 큰 화재로 소실되어 그 이후 복원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웅보전도 개금불사가 진행중이라 본전의 부처님은 계시지 않았다. 대둥전은 부처님 몸을 의미한다. 내부에 모셔져 있던 삼존불은 1899년 화재로 소실되어 그 이후인 1901년에 조성되었다한다. 대웅보전의 건물도 그 당시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새로 복원하였다. 조선후기 다포계 건축양식이 잘 드러나며 정면의 화려한 용두장식으로 대웅보전의 아름다움을 더욱 잘 나타내고 있다.




 

 

현재의 대웅보전 편액은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날렸던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대웅보전의 현판에는 추사 김정희의 이야기가 전하는데 추사 김정희가 1840년 제주도 유배길에 이곳을 들러 대웅보전의 편액을 써서 이광사의 편액 대신 자신이 쓴 편액을 걸게하였다 한다. 그 후 유배에서 풀려 제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들러 자신의 편액을 떼고 이광사의 편액을 다시 걸게하였다한다.




 


 대웅전 오른편에는 윤장대가 있다.  윤장대를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아 소원이 성취된다는 의미가 있다.









범종루










연리근 나무




백설당 편액 원교 이광사의 작품



무량수각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양을 가다 대흥사에 들러 쓴 글이라한다. 추세체의 진미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대웅보전의 편액도 원교 이광사의 작품이다.

 

 

 

 

 

 

 

 

 

 

 

 

 

 

현재 대웅전안의 삼존불은 개금불사가 진행중이다.

 

 

 

 

 

 

 

 

 

 

 

 

윤장대



 

 

 

 

 

 

 

 

 

 

 

 

 

 

 

 

 

 

 

 

 

 

 

 

 

 

 

 

 

응진전 삼층석탑 보물제3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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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여행)도덕산 도덕암. 경주의 북쪽에 숨은 듯이 자리 잡은 도덕산 도덕암

 

암자는 자리한 위치에 따라 여행객에게 많은 감동을 준다. 그 만큼 산자수려한 위치에 터 잡은 암자에 더 많은 호기심을 느끼며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한 암자가 있다. 경주 안강의 도덕산으로 정상이 702m인 수더분한 산이다. 그야 말로 별 특징이 없는 산으로 경주와 영천의 경계를 이루며 솟아 있다. 그래도 경주에서는 제법 높은 축에 들어가는 도덕산 언저리에 작은 암자가 자리 잡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여행)도덕산 도덕암. 신라 선덕여왕이 찾아 왔다는 도덕산,

 

이 산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의 선덕여왕이 이곳을 찾아 왔다하여 두득(덕)산으로 불렸다 한다. 어찌 덕만공주와 느낌이 비슷한 것 같다. 그러다 조선중기때 회재 이언적에 의해 도덕산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여행)도덕산 도덕암. 신라 경덕왕때 창건된 유서 깊은 고찰 도덕산 도덕암

 

안강 도덕산 도덕암의 기원은 신라 경덕왕(742년~765년)때 창건 된 암자로 풍진세상을 견디며 천년고찰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원래는 아래 옥산리 정혜사의 12개 부속 암자중 하나였다한다. 어떠한 연유로 정혜사가 패사를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는 도덕암만 남겨놓고 모두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도덕암의 사찰 명칭도 창건 당시의 이름이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그 이유는 동방오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에 의해 뒷산을 도덕산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에 도덕암으로 부른 것은 아닌지.

 

 

 

 

지금이야 도덕암 오르는 암자길이 뚫여 승용차도 쉽게 올라오게 되었지만 필자가 처음 암자를 찾을 당시에는 대단한 불심이 아니라면 엄두도 내기 힘든 그런 위치에 있어 그저 절의 명맥만 유지할 정도였다. 최근에 다시 찾아보니 이제는 콘크리트 포장이 된 차도가 뚫여 그때와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여행)도덕산 도덕암. 동해 일출 관망 장소 도덕산 도덕암

 

이곳 도덕암은 암반을 깍아 만든 터에 제비가 둥지를 틀듯이 바위에 엉겨 붙어 있다. 옥산리 마을에서는 영험이 있는  기도처로 말려져 있다. 대웅전은 앞면3칸에 옆면 1칸의 그야말로 형식만 갖준 모양으로1890년대에 그려진 탱화가 한점 남아 있어 그 이전에도 암자의 명맥은 유지가 된 것 같다. 

 

 

 

 

도덕암에 올라보면 암자의 위치에 놀란다. 앞으로 펼쳐지는 전망은 그야말로 그칠것이 없다. 동해에서 올라오는 일출을 감상할 수 있는 멋진 조망을 가진 암자로 이곳에서 하루 쯤 지낸다면 그야말로 몸에 찌든 때가 정화가 된다는 느낌이 들 것 같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 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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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산 동림사. 인도의 태자 장유화상이 창건 동림사.


 김해시의 주산인 신어산은 김해시를 둘러 하나의 울타리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현재에도 신어산은 엄마의 품속 같이 넓고 아늑하여 김해 시민에게는 휴식처로서 그 역활을 다하고 있다. 김수로왕의 가야시대에도 신어산은 지금과 같은 역활을 하지 않았을까.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왕옥은 인도의 아유타에서 오빠인 장유화상과 함께 돌배를 타고 이곳으로 왔다. 


 






☞(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산 동림사. 인도의 태자 장유화상이 창건 동림사.남방전래설을 주장(?).


장유화상은 아유타의 태자지만 승려로서 불교를 전래하였다. 국내에서 아직 공식적으로는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지만 처음으로 불교를 전래한 인물로 회자된다. 장유화상에 의해 불교가 북방전래설로 들어 온것을 뒤집고 남방전래설로 들어 왔다며 그에 관한 전설 같은 이야기와 유물이 현재 남아 있어 더욱 신빙성을 준다.





☞(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산 동림사. 인도의 태자 장유화상이 창건 동림사.가락국의 안전과 번영을 염원하며 창건.


허왕옥의 오빠 장유화상은 이곳 가락국에서 서림사(현은하사) 동림사. 영구암, 부은암. 모은암, 장유암등 수많은 사찰을 창건하는데 오늘은 신어산의 동림사를 댕겨 왔다. 동림사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장유화상이 지금의 은하사(서림사)와 함께 가락국(43~532) 초기에 세웠다. 그 당시에는 규모가 꽤 큰 사찰로 서림사와 동림사를 창건하였는데 서림사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림사가 되었다한다. 장유화상이 이곳 동림사에 담은 뜻은 부처님의 뜻으로 가락국의 안전과 번영을 염원하며 창건을 하였다하며. 






☞(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산 동림사. 인도의 태자 장유화상이 창건 동림사.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화엄스님에 의해 중건.


1500년의 법통을 이어오던 동림사는 1592년 임진왜란과 함께 소실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후 영구암에서 주석하시던 하엄스님이 잡초로 뒤 덮혀 있던 이곳을 찾아내어 현재의 도량으로 일구었다. 현재의 동림사는 최근에 올려진 사찰로 지장보살을 불전에 모시고 있다. 






☞(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산 동림사. 인도의 태자 장유화상이 창건 동림사.은하사보다 한적한 동림사.


동림사는 일천한 역사에 비해 현재 남아 있는 문화재는 없지만 신령스러운 물고기란 뜻의 신어산를 뒤로 두고 분잡한 은하사에서 비해 한적하며 조용한 사찰로 한번쯤 찾아가 볼만 하다.






다대포에서 바라보면 거북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신어산. 그아래 자리잡은 동림사의 모습이 너무 조용하다.







대원보전




대원보전안에 모신 지장보살







동림사에서 머리를 들어보면 보이는 영구암의 모습




마침 찾아간 시간이 늦은 시간이라 비구니스님이 범종을 치고 계시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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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산 은하사 범종루 의 나무 기둥에 경악.

 

신어산의 은하사에는 특별한 건물이 있다. 먼저 은하사 경내를 들어서면 절을 대표하는 대웅전도 아니요 우리를 압도하는 목조건물은 2층의 범종루다. 굵은 나무를 다듬은 듯, 다듬지 않은듯 생긴 모습 그대로 기둥을 삼아 2층을 올린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나무 하나하나의 둘레를 보면 장정 두세명이 두팔을 벌릴 정도로 크며 굵은 밑 둥치를 보면 2천년 역사인 은하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곳 범종각은 2000년경에 세워졌다하니 짧은 역사에 비해  감동은 더 없이 크게 느껴진다.

 



 

 

 

 

☞(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산 은하사 범종루 의 나무 기둥에 경악. 은하사 달마야 놀자 촬영 사찰로 유명

 

 

김해와 부산에서는 은하사를 알 고 있지만 영화 '달마야 놀자'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전국적인 지명도의 사찰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사실 이곳은 오랜 역사에 비해 변변한 문화재는 보기 힘들다. 그중 대웅전과 그 안밖으로 그려진 벽화 정도인데 이리 어마무시한 범종루를 만나게 되니 필자가 몇군데 가보지 않았지만 가장 크며 장엄한 범종루로 보여진다. 

 

 

 

 

☞(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산 은하사 범종루 의 나무 기둥에 경악. 현수막등으로 경관 훼손.

 

 

한가지 아쉬운점이 있다면 범종루를 축대 높이로 맞추다 보니 2층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니 범종 목어등은 모두 2층에 올려져 있고 1층은 그냥 하나의 빈공간으로 남아 있는데 이것이 문제다.  종루 건물은 많은 시주를 들여 삐까번쩍하게 지어 놓고 1층 안을 들여다 보니 창고처럼 사용을 하고 있는게 관광객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리고 기둥에다. 홍보용 현수막을 막 묶어 두는게 처음부터 기둥을 이리 현수막 묶는 기둥으로 사용을 할려고  만들었지는 않을 것이다.

 

 

 

 

☞(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산 은하사 범종루 의 나무 기둥에 경악. 부산 김해시민에게 유명 사찰.

 

 

은하사를 찾는 관광객에게 좀더 나은 은하사로 감동을 주기 위해서라도 현수막은 따로 걸 수 있는 기둥을 세워 질서 정연하게 걸고 1층 종각안과 밖의 잡동사니들을 치워 더욱 멋진 범종루을 보여 주면 관광객의 한사람으로 너무 좋을 것 같다.  그리하면 은하사의 범종루는 단연코 더욱 유명세를 떨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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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말사인 신어산 영구암. 맑은날 대마도도 바라보인다.





☞(경남여행/김해여행)거북이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신어산 영구암


영구암은 김해의 영산인 신어산의 8부에 자리를 하고 있다. 영구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 14교구 범어사의 말사이다.   





  

영구암 대웅전



☞(경남여행/김해여행)거북이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신어산 영구암. 범어사 말사.


창건 연대는 영구암도 은하사나 동림사와 비슷한 시기로 보고 있는데 인도 아유타국의 태자인 승려 장유화상(허보옥)과 가락국 수로왕의 왕비로 허왕후(허왕옥)가 오빠인 장유화상과 함께 돌배를 타고 이곳 부산 강서구 망산도에 당도한 전설은 모두 알 것이다.




영구암 삼성각,



☞(경남여행/김해여행)거북이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신어산 영구암. 인도의 장유화상에 의해 창건.


그의 오빠 장유화상에 의해 후한 광무제 건무 18년(서기 42년)에 이곳 신어산의 서림주산에 김수로왕의 원찰인 영구암을 창건하였다 




삼성각내부



☞(경남여행/김해여행)거북이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신어산 영구암. 창건당시 구암사로 불리어.


신어산 정상부를 둘러 싸고 있는 바위병풍이 다대포 몰운대 방향에서 보면 거북이가 지혜의 바다로 중생을 태우고 나아가는 듯한 모습이라하여 창건당시에는 구암사로 불렀다.




영구암의 3층석탑의 노반.



그리고 영구암 주변으로 삐쭉삐쭉 기치 창검이 솟아 있어 영남에 오른쪽 금강을 의미하는 '우령 금강산'이란 명문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멀리서 바라보는 신어산은 거북이 몸체이며 영구암이 위치한 곳이 거북이 머리라 하여 영구암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다.







신어산의 이름에서 보듯 영구암 법당 밑의 우물에서 ‘신령스런 물고기’인 신어가 살았다는 전설에 의해 가야불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영구암 삼층석탑의 자리는 거북이의 머리에 해당하며 그곳에서 본 전망은 일망무제다.




☞(경남여행/김해여행)거북이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신어산 영구암. 영구암 삼층석탑은 인도간다라 양식의 노반.


영구암 3층석탑이 자리한 곳에서 남으로는 맑은날 일출과 함께 일본의 대마도가 선명하며 일몰은 가락국에서 영구암이 으뜸이라하였다. 그리고보면 해뜰때 일출과 일몰을 같이 볼 수 있는 곳이 흔치 않을 것 같다.   



 




 흥덕왕때는 현재 영구암의 뼈대인 축대를 쌓아 고려때에 불상과 삼층석탑을 조성하여 사세를 지켜오다 근자에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법당을 세우며 여러번의 중수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대웅전 앞에 고려때 세워진 영구암 삼층석탑이 있다.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473호며 신어산의  거북이 머리부분에 해당되는 돌출된 바위위에 세워져 있다. 






원래 삼층석탑으로 추정 되는데 남아 있는 석탑의 모양은 상 하대갑석과 1,2,3층의 옥개석과 노발 그리고 복발부분이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부재로 보면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추정되며 다른 석탑과 다른 특이 점이 발견되었다. 노반과 복발이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인도 간다라 지역 탑을 축소시켜 놓은 모습이라한다.





대웅전 내부


























흥덕왕때 처음 쌓았다는 영구암 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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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 관룡산 관룡사의 부도탑

 

부도탑은 고승들이 열반에 들고난 후 그의 행적과 뜻을 기려 세우는 탑이다. 그래서인지 연륜이 있는 오래된 사찰에는 여러기의 부도를 만날 수 있다. 이곳 관룡사에도 1300년의 연륜으로 7기의 부도들이 흩어져 있다. 필자가 확인한 것만해도 4개인데 모두 종형을 이루고 있는 조선시대 부도탑으로 보였다.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 관룡산 관룡사의 부도탑

 

관룡사의 부도탑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부도탑은 관룡사 뒤 청룡암 오르는 길에 한기가 놓여있다. 이 부도는 형태가 특이한데  꼭 쌓아 올린 탑처럼 떨어질까 불안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 부도는 탑신에 비해 지대석이 넓은 편이다. 그리고 3층의 기단석으로 받쳐져 있는데 하대석은 중심부의 방형석괴와 장대석을 서로  끼워 맞추어 만들었다.

 

 

 하나의 돌로 깍아 만든 중대석은 사방을 연판으로 처리를 하였다. 그 위의 상대석도 앙연을 이중으로 처리를 하였다. 상대석 위에 올려진 탑신은 둥근 공모양을 하고 있는데 무늬의 조각이 없는 소박함 그대로이다. 그 위에 갓 처럼 올려진 지붕돌도 팔공산 관봉의 갓바위처럼 단순한 모습에 서민적인 모습이다.

 

 

 

 그 위에 올려진 상륜부는 사라지고 없는 상태다. 부도탑의 전체적인 높이는 205cm이며 전체적으로 불안감을 준다. 조성연대는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로 추정하고 있으며 어느분의 부도탑인지 확인을 할 수 없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호며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관룡사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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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정상에 백련꽃이 피었다하여 창건한 연화사가 전신


 부산에서 수다사를 가기위해서는 대구부산고속도로를 타고 동대구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상행선인 서울방향으로 달린다 . 구미를 지나 김천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또 바꾸어 타 선산인터체인지에서 내린다. 이곳에서도 68번 지방도를 타고 상주방면으로 달리는데 주위로는 유순한 모습을 한 5~600m의 낮은 산들이 솟아 있다. 무을면사무소를 지나 상송리가 수다사 들머리다.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입구의 연리지 쌍정자 전설 


천년고찰답게 수다사로 들어가는 도로가 넓게 조성이 되어 있어 찾기는 쉽다. 마을을 지나 수다사로 가다보면 저수지 옆에 큰 느티나무가 양쪽에 서 있다.  쌍정자로 불리는데 나무의 모습이 특이하다. 서로 몸이 붙어 있는 연리목으로 이나무 아래에서 연인들이 사랑을 약속하면 그 사랑이 이루어 진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인지 유독 이나무에서 젊은 연인들이 찾아와 사랑의 약속을 하고 간다고 한다.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진감국사가 연화사로 창건 그 연혁


구미시와 상주시의 경계선상에 기양산으로 불리는 산이 있다. 그 산 정상 부근에 백길바위로 불리는 바위가 있다. 이바위가 백련봉으로 불리는데 그기에는 이런 연유가 있다. 수다사연혁인 '수다사약전'의 기록을 보면 진감선사 혜소스님이 연악산 정상에 흰연꽃 한송이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830년 문성왕때에 이곳을 사찰을 짓고 연화사를 창건하였다. 흰연꽃은 백길바위인 백련봉을 두고하는 것 같다. 



 

 

그 후 976년에 화재로 불타고 명종15년인 1185년에 각원대사께서 중창을 하여 성암사로 개칭을 하였다. 그러나 1273년에 뜻하지 않게 수해로 인해 사찰은 큰 피해를 보았다. 그러한 어려운 과정을 넘겨오다 선조5년인 1572년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대사가 크게 중수를 하여 감로수를 의미하는 수다사로 고쳐 불렀다. 사명대사에 의해 수다사는 임진왜란때 승병 일만여명이 '의국법회'를 열정도로 중흥기를 맞다가 1684년인 숙종 10년에 수다사는 또다시 화재로 잿더미가 되고 대웅전과 시왕전 극락당등 현재의 건물만 남게 되었다.현재 직지사말사이다.



 

 


수다사를 찾아간 이날에도 전국은 한파에 많은 눈이 내렸다. 수다사 일주문을 들어서서 경내로 올라가니 그야말로 적막강산이 이를 두고하는 말이랴. 바람소리만이 들리는 절마당에 난데 없이 개 짓는 소리가 나더니 어디선가 시커먼스한 놈이 나타나는게 아닌가.  깜짝이야. 너 늑대야 멍멍이야.... 생기기는 험상궂게 생겼지만 달려 들지는 않는다. 그래도 스님도 달려 안나오는 곳에 멍멍이가 달려 나오니 반갑기도하다. 사찰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다.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명부전 경상북도유형뮨화재 139호 


명부전은 앞면3칸 옆면2칸 크기로 지붕의 옆 모습이 사람인(人)자 모양의 겹치마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위에만 있는 주심포형식으로 이 양식은 신라시대때 사용되었던 양식이며 원래의 규모는 더 큰 것으로 여겨진다. 내부에는 각원대사가 조성한 지장보살좌상등의 불상이 모서져 있다. 그리고 내부 벽에는 영조42년인 1771년에 그렸다는 '지옥도'는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다.


 

 명부전의 지장보살좌상과 불상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수다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334호 


수다사 대웅전 내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개금불사로 인해 외형상 목조의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소나무의 결을 찾을 수 있다. 


특징을 보면 DAUM문화유산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발의 두정(頭頂)에 약간의 육계의 흔적이 보이고, 가늘게 뜬 눈, 코, 입술 등의 조각 수법이 정제되어 있으며, 우너만한 상호와 짧은 양 귀, 목에 둘러진 삼도가 조화를 이루어 위엄이 있어 보인다. 법의는 통견으로 의무늬 조각이 세련되었으며, 무릎 부분이 높고 넓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수다사 사찰측에 의하면 원래 삼존상으로 조성 되었다한다. 구미시 선산읍 원각사에 있는 대세지보살상의 복장에서 수다사불상조성연기가 나왔다한다. 원래는 삼존상이었으나 양 협시는 외부로 반출되어 대세지보살상은 구미시 선산읍 원각사에 봉안하고, 관세음보살상은 대구서봉암에 옮겨 봉안되었다. 


조성연기의 기록을 보면 1650년 효종1년 9월에 연악산 수다사에서 아미타불과 두 협시 불상의 삼존상 조성했다는데 현재 수다사 대웅전에 모서져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그 당시 조성된 주존불로 여겨진다. 복장유물에 나왔던 조성연기의 종이질도 검사를 하니17세기에 만들어졌다한다.아미타불과 두 협시보살의 삼존상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바로 당시 조성된 주존불이었던 것이다.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수다사 석가모니 후불탱화



대웅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후불탱화는 1731년 제작된 것으로 그 당시 17세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 주는 우수한 작품이다. 현재의 본존불 뒤에 걸린 탱화다. 후불탱화에 대해 '디지털구미문화대전'에서 잘 설명하여 그것을 인용하자면

 '수다사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화는 주존 탱화로서, 폭 39~40㎝ 정도의 세마포(細麻布)를 7폭 연결하여 종이를 여러 겹으로 배접(褙接)한 바탕의 중앙 연화좌에 석가모니불이 항마촉지인으로 결가부좌하고 있다. 정수리로부터 상부로 퍼져나가는 광명은 석가모니의 설법이 시방 세계를 비추는 것을 상징한다.


좌우에 8명의 보살과 사천왕이 자리 잡고 있는데, 보살은 석가모니불 좌대 양옆에 붉은 연화(蓮花)를 들고 서 있는 두 명의 보살을 제외하고는 모두 합장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화면 하단의 좌우에 있는 사천왕은 비파, 검, 용과 여의주, 창 등의 지물을 들고 있다.

보살상 위 좌우에는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이 양옆에 배치되어 있는데, 범천은 3목(目)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외 상단에는 다른 세계에서 온 부처,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을 포함한 10대 제자, 신장(神將) 들이 에워싸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 「수다사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화」의 주제는 석가모니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법하던 영산회(靈山會)를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이 탱화는 모사본이며 진품은 직지사에 보관하고 있다.

http://gumi.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1201942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수다사 건륭37년명 동종


수다사 건륭37년명 동종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건륭 37년 명문이 뚜렷하다, 즉 1772년(영조 48)에 조성된 것이며  '디지털 구미 문화대전'을 보면 '범종의 형태나 보살상과 유곽, 용뉴 등의 양식 및 수법은 다른 예와의 비교, 연구에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수다사 대웅전 내에 위치한다. 대웅전 불단 오른쪽 아래에 있으며, 사찰내에 있는 유일한 동종이다. 4구의 보살상과 유곽 사이에 대를 만들고 그 안에 명문을 새겼다. 명문은 9곳에 1행씩 모두 9행이 새겨졌는데, 그 내용은 ‘건륭삼십칠년임진 삼월일 화주근징장승통광능 경상우도 선산 서령 연악산 수다사 중종개조 중이백근야 삼강(乾隆三十七年壬辰三月日 化主僅澄將僧統廣能 慶尙右道 善山 西嶺 淵岳山 水多寺 中鍾改造 重二百斤也 三綱)’이다.'

http://gumi.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1201942


 

 

또하나의 볼거리는 이곳의 300년된 배롱나무는 봄이면 화려한 백일홍으로 장관을 이룬다. 수다사를 방문하였을때는 눈이 와 있었는데 기양산(연악산)~수선사 산행을 할때 폭설이 내려 하산 후 수다사는 그야말로 설국을 보여 주었다. 그때 다시 담은 사진을 함께 올렸다. 수다사는 겨울의 설국도 아름답지만 단풍이 드는 가을철에는 붉은 색으로 치장을 하여 더욱 화려한 수다사가 된다. 



 

 

 

 

 

 

 

 

 

 

 

 

흰연꽃을 의미하는 백길바위, 백련봉이라 부른다.



 ☞(경북여행/구미여행)구미 연악산 수다사 교통편


부산에서 구미를 거쳐 선산읍으로 가서 수다사 방향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동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구미 가는 버스는 오전 830, 940분에 있다구미터미널에서는 20번 버스를 타고 선산터미널로 가서 21, 21-1, 121번 버스를 갈아타고'상송수다사입구정류장에 내려 수다사까지 걸어 들어가면 된다구미에서 부산 행 버스는 오후 435, 740, 850(막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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