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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둘레길은 고가인 정자 또는 누각, 그리고 산과 들, 하천을 끼고 도는 것이 전부이다.

마을마다 숱한 전설과 이야기 그리고 애환이 스며 있는 밀양의 둘레길은 그중에서도 단장면에 와 절정을 이룬다.
이번에 걷고자하는 바드리 둘레길은 밀양의 3대 고지의 마을에 속한다.
일이 오치요,이가 소월리로 현 바드리를 말하며 삼이 감물리로 밀양의 대표적인 오지마을이다.
먼저 바드리를 가기위해서는 표충사 입구 삼거마을에서 삼평교를 건너 우측 산비탈을 돌아 바딜리 고개를 오르는 도로가 제1코스요 고례리 평리마을 입구에서 산비탈을 타고 오르는 임도가 제2코스이다.



 
차를 이용할 수 있는 길은 두 곳이며 나머지는 등산길과 옛길이다.
그래서 바드리 마을을 오르는 옛길을 범도마을에서 찾아 보기로 하였다.
먼저. 아불마을에서 하차를 하면 우측으로 제2아불교가 보이고 삼거리 길이다.
 
아불마을의 옛 지명은 아화라고 불렸는데 옛날 스님이 지나가면서 이마을에 불이 난다고 이야기를 하였지만, 마을에서는 대스럽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한다. 그 후 2년만에 스님의 예언대로 마을 전체에 불이 나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불이 나고 난후 부처님의 가호를 바란다는 뜻에서 아불로 마을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 아불마을에는 아직도 공동 빨레터가 있으며 한때는 작은 주막거리에 불과하였지만
1922년 표충사에서 사립표충학원을 설립하고 그후 태룡초등학교 산동분교를 설립하며 마을의 규모는 점차 커져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범도마을은 버스에서 내려 밀양댐 방향으로 들어서면 된다.

이곳부터 평리까지 이팝나무가로수 길이 조성되어 봄이면 이팝꽃 축제 행사도 하고 있다.
밀양댐이 생기면서 조성된 이팝나무길이 둘레길을 걷는 둘레꾼들에게 또다른 구경거리를 제공한다.
쉬엄쉬엄 600m를 걸어면 범도리의 중심마을인 범도마을과 만난다.
이곳의 지형이 행주형으로 배가 나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데 선수가 정각산이며
선미는 뇌암산으로 백마산 아래 번데기마을 뒷산을 노 끝을 삼아 나아가는 배의 형국이라 한다.
범도마을 뒤로는 미물산(메물산.374m)이 백마산과 연결되고 마을 앞으로는 단장천의 일부인 고사천이 흐른다.
이곳에 범도연 또는 도연으로 불리는 검푸른 소가 있다.
이곳 마을의 지형이 마치 물위에 떠 있는 돛단배와 같은 지형이라 예로부터
이 마을에는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이 생겨 침몰한다는 속설 때문에 집집마다 우물을 파지 않았다 한다. 지금도 마을의 식수는 맞은편 진주동으로 넘어가는 큰골에 물을 받아 식수로 이용한다고 하는데 그것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이곳에서는 뱃놀이를 즐기기 위해 배를 탔다는 뱃머리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마을의 표지석에서 마을 뒤 산길을 찾아 나섰다.
깻잎 밭의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길이 없다는 대답뿐,
혹 옛날 나무하러 다닌 길이라도 없습니까 물어니 재실을 지나 올라가면 된다한다.
오르는 길은 두길 달성서씨재실인 화친문을 지나면 미물산으로 포장길이 이어지는데
부근이 모두 대추밭으로 도저히 옛길을 찾을 수 가 없어 할 수 없이 다시 내려와 우측의 능선을 보고 들어서면 임도길은 밤밭을 돌아 올라 능선으로 진입 할 수 있다.
길의 흔적이 뚜렷하지 않으며 산세가 굉장한 오름으로 이어진다.
잠시 뒤 달성서씨재실에서 올라오는 뚜렷한길과 만난다. 오르막을 치고 오르면 미물산(374m), 이곳에 큰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여름철에 덧자란 수풀이 온 무덤을 덮고 있으며 좌측으로 내려서면 둘레길 다운 산길을 만난다.
직진길과 우측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는 갈림길에서 우측길로 돌아가면 무덤, 여기서 다시 넓은 임도와 만난다.


표고버섯 재배를 위해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는 임도를 따라가면
좌측은 삼거마을로 내려가고 바드리(2.5km)로 갈라지는 삼거리길,여기서 직진인 우측길로 진행한다.
포장길이 이어지지만 밀양 제2의 고지마을 답게 덥지가 않다.
예쁜 별장같은 집과 또 한채의 민가인 번데기마을을 지나면 백마산의 모습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상까지 확인 가능한 백마산은 해발 450m로 분포되어 있는 바드리 마을 뒤에서 불쑥 솟은 것처럼 보인다.
미물산에서 백마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흔히 백마에 비교를 하며 걸어온 둘레길을 백마의 등쪽으로 보면 된다.
머리는 미물산이며 백마산이 꼬리에 해당한다.
산상이 별구인 바드리마을은 일조량이 풍부하여 고랭지 채소와 그중에서는 바드리 무가 전국적으로 알아준다.
당도가 뛰어난 사과등으로 바드리는 현재 풍요로운 산상의 마을을 꿈꾸고 있다.
아주 먼 옛날 백마산 정상에 산사태가 져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였는데 소월산(所月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 마을이름이 바드리가 되고 소월리로 표기를 하였다.

바드리에서 평리마을로 내려 오는 길을 따라 쉬엄 쉬엄 걸어면
대종교 수도원 앞의 우물에 시원한 냉천수가 장마로 인해 물을 쏟아 내고 있다.
갈림길 여기서 우측 돌아가는 길을 내려서면 뒤돌아 보는 백마산의 위용이 웅대하다.
새로지은 별장 같은 집도 지나고 평리마을 입구인 1051번 지방도로에 내려선다.
좌측이다. 평리마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그
 뒤 옛길을 따라가면 황토로 지은 미타원과 만난다.
지장보살을 모신 선원이며 연못에는 거북이를 닮았다는 바위가 있다.
마을 촌로에게 미타원에 대해 물어 보니 원래 그 자리는 논이였으며 몇해전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살고 있다며
거북바위에 대해 물어보니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곳을 지나면 마을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하는 당숲이 성지곡아래에 자리를 하고 있다.
그곳을 벗어나면 평리마을회관앞이다.
평리마을은 농암대와 사회동 그리고 배내골에서 내려오는 퇴적물이 쌓여 들판을 이루어 평지를 이루고 있어 평리마을로 불린다.




달성서씨재실

범도연의 모습




바딜리고개







번데기마을

백마산의 모습




바들리마을입구






바드리마을에서 평리로 내려서는 갈림길 부근의 가옥


대종교의 우물










1051번 지방도로 평리마을 입구


미타원과 연못안의 거북바위


평리마을의 당숲

평리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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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국밥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밀양일 것이다.
국밥의 원조는 밀양하면 요즘은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앞에 수식어로 붙는다.
그래서인지 간판이름이 밀양돼지국밥이란 상호가 많이 있다.
밀양돼지국밥의 원조는 밀양시 무안면 무안시장에서 1940년경 최달성옹이 처음 양산 식당이란 상호로 문을 열었다.
그 후 그의 아들이 다시 시장옥이란 국밥집을 열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3대째 가업을 이어온 국밥집은 큰아들이 아버지가 하시던 시장옥을 이어 받아 상호를 바꾸어 무안식육식당으로 둘째가 제일식육식당을,
막내인 최수곤사장은 할아버지의 양산식당을 이어 받아 동부식육식당으로 가업을 이어
누구랄 것도 없이 돼지국밥집의 원조임을 자부 하고 있다.
이집의 특징은 멀건 국물로 나와 손님이 직접 간을 맞추어 먹어야 하는게 특징이면 특징이다.

그래서 인지 밀양시내와 영남지방에는 유달리 돼지국밥집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밀양이란 간판을 달고서 영업을 한다.
돼지국밥의 원조지인 밀양 무안까지 가서 먹을 수 없지만 밀양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국밥집이 있어 소개를 한다.
터미널을 나와 영남루방향인 좌측으로 100m가면 도로 우측으로 밀양돼지국밥집(055-354-9599)과 만난다.
단층집으로 주방은 전부 노출된 개방식이다.
수육을 만드는 장면부터 국밥을 만드는 과정을 직접 모두 눈으로 확인을 할 수 있다.
옛날 어렵던 시절 장터에서 고깃 기름이라도 배불리 먹어 볼 수 있는 음식인 돼지국밥이 지금도
손 쉽게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으로 각광을 받는 서민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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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시 단장면 사연리 사연마을에서 용회동으로 넘어가는 범머리산 아래에 침유정이란 정자가 있다.
1900년에 태동에 거주한 전 군수 안장원에 의해 별장으로 건립되었으며 
현재에도 연못이 조성 되어 있다.

 그 당시에는 범머리산 아래에 있다하여 범머리 못으로 불렀다하며
물이 맑기로 거울과 같다하여 경호정이라 불렀다.

범머리산이 의령남씨들의 선산이며 판서 남오와 침류정 남우문 부자의 무덤이 있어 
이 정자를 사촌의 의령남씨들이 1953년도에 구입 하였다 . 

후손들이 그들 추모하기 위해 구입을 하고 침류정이란 현판을 걸었다.
최근에 와서는 벽진이씨 성을 가진 분이 재차 구입을 하여 리모델링을 거친후 ‘침유정펜션’이란 고택체험장을 조성하였다.

들어서면 먼저 허리까지 오는 아담한 담장이 눈길을 끈다.
침유정 마루에 앉아 범머리못에서 배를 뛰우며 새들이 날아와 배회하는 모습과
사연리를 감싸는 취경산의 모습을 훤히 볼 수 있도록한 담장이 낮아 
세상의 눈높이에 맞추었을까. 


현재의 주인 말로는 낮은 담장에도 못으로 내려가는 중문이 달려 있었는데
수리를 하면서 중문을 없에 버리고 똑 같은 높이의 담장으로 고쳤다 한다.
아래를 보니 연못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아직 남아 있다.

그리고 침유정 정자의 색은 고색창연하다.
원래는 나무기둥과 벽채의 모든 나무에 짙은 갈색톤의 색칠이 되어 있었다하며
수리를 하면서 모두 사포로 밀어 색상을 밝게 하였다한다.
지금도 마루에 않아 있으면 나무에서 나오는 향기가 정자를 감싸며 머리를 맑게한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연못에 드리워진 고목이 특이하다.
물쪽으로 비스듬이 누워있는데 물푸레나무로 이리 큰 나무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주위에도 죽은 물푸레나무를 볼 수 있다.

침유정에 두 번 답사를 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는 수리중에 들렀다.
구경을 해도 되는냐 이야기를 하니 수리가 끝나면 그 때 와서 구경을 하라고하였지만
이왕 온김에 보고 가라하여 침류정을 보게 되었다.
영남알프스 둘레길을 하면서 많은 정자와 누각을 보았지만
이곳 침류정 만큼 내 마음에 쏙 와 닫는 곳은 없었다.

정면 4칸에 측면 2칸,  2칸은 마루를 넣었는데 양쪽 모두 문을 달아 놓았다.
그리고 2칸은 방을 넣어 방문은 양쪽으로 붙어 있지만 방은 1개로 꾸며져 있다.
방 앞으로는 툇마루를 넣어 놓아 여기 앉아 바깥세상을 바라 보며 자연을 감상을 하였을 것 같은 모습을 상상해 본다.


수리때의 침유정 모습-

















수리가 끝난후의 침유정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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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불원은 옛합판 왕국 동명목재 고강석진 회장께서 사재를 털어 창건을 하여 부산시에 헌납을 하였다 합니다.
1977년 5월22일 개원하여 처음으로 불법을 펼쳐진 날이라 합니다. 사실 동명불원에 가 보면 우리네 절집같은 푸근한
마음이 들지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왜 일까요.
지금까지 생각하고 왔는 우리 사찰의 건물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동남아의 영향을 받아 올린 건물이라 용마루가 길게 뻗어 나와 있으며 외관 또한 화려하게 지어졌습니다. 건물의 규모는 엄청 큰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님들이 있는 절집의 분위기 보다는 어느 사원에 들어선 것 같은 분위기는 나만의 생각일까. 



먼저 일주문과 만나게 됩니다.

사찰을 들어서는 이 건물은 용당으로 넘어가는 도로위에 지어져 모든 차들이 이 밑으로 통과하게 지어져 있습니다. 

건물을 들어서는 입구입니다. 동명불원이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그 위에 전각을 올려 범종각이 조성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모든 번뇌에서 구재해 준다는 범종은 무게가 27톤으로 경주 에밀레종보다 6톤이나 더 무겁다하며 국내에서는 최대의 종이라하네요.


부산시 남구 용당동 비룡산 동명불원은 동남아시아의 영향을 받아 전체적으로 건물들이 용마루가 뻗어 나간 형태로 지어 졌다. 대웅전을 본전으로 부속건물로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관음전,극락전,나한전의 당우가 있다.





사찰을 들어서기 위해서는 일주문을 지나 좌측으로 틀면 천왕문 격인 사천왕상을 통과해야 한다. 불국정토를 지키고 불법을 수호한다는 사천왕상은 악귀들을 밟고 서 있으며 사천왕문의 설계는 입상작으로 결정되어 지어졌다 한다.



대웅전

안의 내부에는 석가세존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미륵보살을 우측에는 제화갈라보사릉 3본을 모섰다. 법당의 높이는 16m로 가운데는 기둥을 세우지 않아 전체적으로 공간의 활용과 시원한 공간배치를 할 수 있도록 하였고 양쪽 벽에는 비천상과 천장의 중앙에는 4마리의 용머리로 꾸며 놓았다. 큰 대웅전에 걸맞게 목조개금불상은 국내 현존하는 불상중에서는 가장 큰 것이다.




대웅전 우측의 관음전입니다. 들어오는 입구 건물의 종각 반대편에 있는 건물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곳으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삼존불 즉 중앙의 아미타불과 좌우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보시는 곳이다.



화려하게 꾸며진 대웅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화려하고 큰 것 이외에는 감응이 전달 되지 않는 건물입니다.그리고 모든 건축물이 목재로 지어진 것이 아니고 시멘트로 올린것 같습니다. 자연의 조화가 아쉬운 마음입니다


 

 

 

 

 


 

 



불교에서는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사찰 당우인 극락전읩니다.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극락보전, 무량수전,무량전, 보광영전, 아미타전이라고도 합니다.


 
산신각 방향으로 올라가면서 본 동명불원입니다. 왼쪽 건물이 대웅전이며 덕망탑과 부덕탑도 보이는 군요. 전면에 보이는 건물이 관음전입니다. 건물의 형태는 'ㅁ'자로 지어져 있으며 대웅전 앞에는 주차공간으로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대웅전 앞으로는 두 개의 석탑이 서 있는데 좌측의 탑은 효자효부를 기리는 뜻에서 덕망탑이라 하고 우측의 탑은 부덕탑으로 젊은 선남선녀가 불법에 귀의하여 덕망과 부덕을 잘 닦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탑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처음 보는 탑의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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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남구 동명오거리에서 시작하는 신선대~이기대 갈맷길은 부산을 대표하는 해변의 산책코스이다. 하루 짬을 내어 들러 보면 부산에도 이런 곳이 있구나 할 정도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오륙도와 해운대 신시가지 그리고 신선대에서 바라보는 태종대와 영도, 북항의 모습에 부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먼저 동명오거리에서 동명대학교를 올라가는 도로를 올라서자.

동명불원과 만난다. 비룡산 동명불원, 콘크리트로 지은 동명불원은 합판왕국 동명목재강석진회장이 사재를 털어 창건한 사찰로 너무 규모만 키운 것 같은 느낌이다. 동명불원 앞에서 산길로 접어들면 본격적인 둘레길을 걸을수 있다. 해송이 둘러쳐진 산길에는 사유지로 동명학원의 재단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여럿 서 있다. 바위를 이룬 암반의 전망대와 만나지만 조망은 신통찮다. 이내 봉오리산 정상에 올라선다.

보이는 것은 신선대 부두와 북항의모습등이 화려한 채색을 하고 있다. 사방을 둘러볼수 있는 봉오리산은 보오지산으로 용당의 주산이다. 용당을 들어서는 대문역활을 하는 산으로 이 산 아래를 대문녘이라 부르고 있다. 옛날에 이산에서 ‘봉화를 지피는 산’. ‘봉화지기가 있는산’이라 하여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다. 일제시때때 까지는 정상에 불을 피운 시설이 남아 있었다 하는데 지금은 찾을 수 없으며 정상아래 작은 동굴에서 봉수군이 머물럿다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만 엿볼 수 있다.

다시 산책길을 따라가면 해경송신소 앞 삼거리 갈림길과 만난다. 직진을 하면 유선정 체육공원과 신선대길을 만난다. 봉우리에 올라서면 운동시설과 사각정자가 나오며 왼쪽은 천주교묘지를 거쳐 오륙도 앞 해맞이 공원으로 바로 가고 신선대는 직진을 한다. 화장실 이정표를 보고 내려가면 신선대와 봉오리산을 갈라 놓은 도로 직전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된다. 도로를 가로질러 가면 신선대로 이어진다.

매점 우측인 차단시설 뒤로 들어서면 산책길이다. 또 갈림길과 만나면 직진의 계단길을 오른다. 좌측길은 신선대에서 다시 나오는 길로 남겨 둔다. 바로 올라서는 봉우리가 신선대 정상이지 싶지만 정상은 직진하여 건너편에 보이는 봉우리가 정상이다. 신선대 갈림길을 건너 올라서면 정상, 태종대와 영도 북항의 모습이 바닷바람과 함께 시원하게 밀려든다. 발아래 신선대의 콘테이너가 쉴새 없이 움직인다.

신선대는 용당동 왼쪽 해안의 절벽과 정상을 일컫는데 이곳 주변의 산세는 못을 둘러싼 용의 모습과 같다하여 용당이라 부르며 비룡산의 산이름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신라말 최치원이 신선이 되어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무제등에 신선의 발자국과 타고온 백마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다. 다시 산불초소 뒤로 내려서면 기념비가 서 있다.

1797년 10월 윌리엄 브로우턴 함장과 승무원들이 ‘프로비던스’호의 부속선을 타고 이곳 용당포에서 주민들을 만나것을 기념하여 그의 상륙 200주년에 맞추어 그가 처음으로 올라 부산을 관측하였던 이곳에다 기념비를 세웠다 한다. 다시 매점까지 내려가는 길은 너른 임도길을 따라가면 된다. 신선대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내려서면 애국지사 정몽석묘소 안내판이 나온다. 안내판을 따라가면 된다. 경남하동 출생으로 1919년 3월 진주장날 독립만세를 주도 하였고 독립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한다.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됨. 매점이 있는 도로에서 우측으로 오륙도 선착장을 따라가면 된다.

sk뷰 아파트 좌측으로 들어서면 오륙도가 한눈에 바라뵈는 이곳은 해맞이공원으로 부른다. 쉼터와 각종 꽃들이 화려한 군무를 자랑한다. 밀물과 썰물에 의해 다섯 개에서 여섯 개로 보인다는 오륙도를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이기대 해안길을 걸어보자. 포진지위 갈림길, 직진은 순환도로, 농바위는 우측길이다. 700m, 흙길을 밟으며 부부기 다정히 손을 잡고 걷는 이길, 용호중대 밑 이정표를 지나면 농바위가 보이며 바닷가의 해안 선을 따라간다. 안전시설물도 잘 되어 있으며 느림의 미학을 느껴 볼 수 있어 좋은 것 같다. 해녀들의 연락수단으로 이용하였다는 농바위를 뒤로 하면 본격적인 계단과 인공의 시설물을 많이 만난다.

러나 그 고생도 힘들지 않으며 파도 소리에 취해가면 어느새 치마바위 이정표와 만난다. 복잡한 해안 구조에 갈맷길을 내어 놓아 언제 걸어도 좋은 것 간다. 동해안까지 이어지는 해파랑길이 이곳 오륙도 출발지로 지금 해파랑길의 일부분을 걷고 있는 것이다. 동성말 2.8km 안내판을 뒤로하고 이어지는 바닷풍경과 해운대의 고층 건물들이 마천루의 한 부분을 보는 것 같다. 영화 해운대 촬영지 안내판을 보고나면 동성말은 지척이다. 중간에 거북모양으로 만들어진 해녀막사와 만나는데 현재에도 10여명의 해녀들이 이곳에 자맥질을 한다고 되어 있다. 구름다리를 지나면 동성말 전망대로 갈맷길도 끝이 난다. .

























용당의 이기대는 어떤 연유로 부르게 되었을까.

조선시대 동래 지역 좌수영의 역사와 지리를 소상하게 기록한 책인 동래영지에도 이기대는 나와 있다. 좌수영에서 남쪽 15리에 이기대가 있으며 두기생의 무덤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하며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어 이기대의 이름에 관한 정확한 이야기를 알 수 없지만 수영출신의 향토사학자였던 고최한복씨에 의하면 임진왜란때 외군이 수영성을 함락하고 난뒤 기뻐서 축하연을 배풀었는데 수영의 두 기생이 연회에 참석을 하였고 술에 취한 왜장을 끓어 안고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었다하며 그후 두 기생의 무덤이 이곳에 있어 그리 부르게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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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동백섬에 봄은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너무나 유명한 대중가요의 한 대목이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노래 가사에도 등장하는 오륙도는 부산의 관문이자,
부산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그래서 서면로타리의 조형물에도 오륙도가 들어가 있었는데 지금은 교통의 급격한 증가로 철거가 된 후 박물관에 전시를 하고 있다 한다.
그만큼 부산 사람들에게는 오륙도를 부산의 대표 상징물로 여기고 있다.




오륙도는 용호동 앞바다에 떠 있는 여섯 개의 바윗섬을 말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다섯개의 바위섬인데, 그래서 오륙도인가.
그중 맨 좌측의 섬이 썰물때는 우삭도로 하나의 섬이 되지만 밀물때는 방패섬과 솔섬으로 나누어져 두 개로 보이게 된다하여 오륙도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 산천조’에는 현재의 오륙도를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절영도(현 영도)의 동쪽에 있으며 동쪽에서 보면 여섯 봉우리로 보이고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로 보인다하여 오륙도라 부른다고 정의를 하고 있으며 보는 방향에 따라 섬의 숫자가 달라 보인다 하였다.



오륙도는 육지에서 가까운 것부터 우삭도인 방패섬과 솔섬,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으로 불리며 12만년전에는 육지에 붙어 있는 하나의 작은 반도 였다 한다.
오랜 침식 작용과 거센 파도에 의해 육지에서 분리 되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오륙도 중에서도 가장 높은 섬은 송곳섬이며 굴섬은 여섯섬 중에서 가장 큰 섬으로 굴이 있으며 굴안에서는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물이 천장에서 떨어지고 있다.
등대섬은 밭섬으로 부를 정도로 윗 부분이 평탄하였는데 등대가 세워지고 부터는 등대섬으로 부르고 있다.




사실 오륙도를 가장 잘 볼 수 잇는 곳은 어딜까. 용호동의 이기대와 신선대 쪽이 아닐까 싶다.
지금 용호동의 SK 아파트 앞에는 해맞이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각종 꽃들이 피어 오륙도와 함께 장관을 연출하며 주민들의 쉼터로 제공되어 많은 시민들이 휴식을 위하여 이곳 해맞이 공원을 찾고 있다.
이곳에서 보는 오륙도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섬으로 보인다.
일자로 널어서 있는 섬들이 서로 겹쳐져 있기 때문이며 그래도 신선대에서는 아쉬운대로 오륙도의 면보를 볼 수 있지만 너무 멀리 보이는 것이 아쉬움이라면 무리일까.

명승 제24호

 

지하철 경성대부경대역에서 택시를 이용하거나 마을버스 또는 시내버스131번을 이용하면 된다.




가족끼리 해맞이 공원에 나온 시민들의 모습

벌써 코스모스가 핀 해맞이 공원으로 오륙도와 함께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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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해안으로 둘러져 있는 도시이다.
조금만 움직여도 해안길을 마음대로 걸을 수 있는 바닷가로 나갈 수 있다.
영도의 절영해안산책로, 송도해안길인 볼레길등 수많은 해안의 길을 가지고 있는 복 받은 도시이다.
이곳 이기대 해안길인 부산의 갈맷길은 해벽에 솟은 특이한 바위가 있다.

농바위가 그곳으로 흔히 농바위하면 장롱만한 바위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그 해석이 틀린다.
바닷가의 등대 역활도 하는 이 바위는 제주도 성산포에서 건너온 해녀들의
연락수단으로 부르게 되었다는데 그 이유가 재미 있다.
남천동에 거주하던 해녀들은 당시로서는 농바위에 물질간다는 등의 연락수단으로 아마 불런것 같다.
농은 보통 장롱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버들채나 싸리로 엮어서
함처럼 만들어 종이를 바른 궤를 포개어 놓은 모습이라 한다.
경상도말로 네모난 당시기 모양을 의미하는 것 같다.

농바위의 모양이 그 당시기를 여러개 얹어 놓은 모양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 남구청에서 발행한 ‘남구의 민속과 문화’에 보면은 이 농바위를
부처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항해하는 배들의 무사 귀환을
비는 듯에서 돌부처상 바위라 부른다한다.

바다에서 생활하는 어부들은 무사히 조업을 마치고 만선을 꿈꾸며
돌아올 수 있도록 해달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농바위는 공깃돌 같은 바위들의 포개어 져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위로는 작은 바위 두개가 포개어져 있고 그 밑으로
큰 받침대 역활을 하는 바위위에 서로 어긋나게 포개어져 있는 바위가 절묘하게 모습을 보인다 .
보는 사람들이 모두 한결 같이 하는 말이 저바위 입으로 후~~하고 불면 떨어지겠다 하며 연신 불안하게 생각을 한다.
그리고 보면 이곳은 한해에도 여러개의 태풍이 지나가는 길목인데도
아직도 굳굳하게 지키는 것을 보니 자연의 조화앞에 감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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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단장면 보문사의 대웅전과 선바위모습

밀양 단장면 보문사

밀양시 단장면 무릉리 노곡마을 뒤산을 수리덤산이라 부른다.

산 정상일대에 바위 층덤이 절벽을 이루고 있어 이곳에 수리매가 서식을 하였다 한다.
이곳 아래에 보문사란 작은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절의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앉은 폼새 만은 천년고찰의 고승대덕이 수도하였을 법한 그런 위치이다.
발아래로는 이상향인 꿈속에라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도연명의 ‘무릉원기’인 무릉도원에서 따 왔다는 무릉리 마을이 펼쳐지고
 흡사 산 아래로 구름 바다가 펼쳐지면 신선이 되어 다닐 것 같은 그런 곳이다.
필자가 걸음을 옮겨 걸어 올라가니 꽤나 다리품을 팔아야 하며 경사도 또한 만만치 않아 힘이 들었다.




그래서 올라가는 중간중간 고급 전원주택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옛집들을 몰아내고
텃줏 대감인양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모습이 여기의 풍경과 어울리지가 않은 것 같았다.
이곳 보문사는 올해 나이로 68세이다.
창건연대는 어느 천년고찰에 비유할때가 되지 못하지만
노스님 한분과 기거하는 보살님의 자비로움이 관광지의 고찰에서 볼 수 없는
그런 사찰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노스님은 올해 나이로 79세이며 법랍은 56세인 주지 신행스님으로
아직고 텃밭을 일구시며 할 일을 찾아 호미를 덜고 나가신다.
잘 쉬시다가 가’란 말씀과 함께,

이곳 보문사에는 신기한 바위가 3개 있다.
대웅전과 붙어 있는 선바위로 마을에서는 입암으로도 부른다.
이 바위의 모습에 보문사를 창건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모습이 신기하다.
이리보면 사람의 얼굴이요. 저리보면 부처님의 모습이라.
그래서 사람이 곧 부처란 그 말이 실감나는 곳이다.

그 밑으로 자리 잡은 작은 바위는 흔들바위로 멀리서 보아도 흔들리는 그 모습이 확인된다.
또 하나는 요사채 좌측의 마당바위로 옛 밀양땅에서 관직을 버리고
국전리에서 여생을 보내며 이곳에 올라 시 한수 읊조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늑한 공간으로 소나무가 둘러져 있다.

그래서 인지 보문사는 더욱 정갈하며 정감이 가는 작은 암자이다.




 











흔들바위

마당바위


찾아가는 길

부산에서 밀양행 열차를 이용한다. 오전 5시10분,50분 6시35분, 55분, 7시45분, 8시35분,9시25분, 10시20분등 다양하게 있다.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하며 밀양시외버스 터미널에서는 국전행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하루 5회로 6시20분 8시40분, 12시50분, 17시, 19시이며 무릉에서 하차를 한다.

 

부산에서 신대구부산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밀양요금소를 빠져 나오면 24번 국도와 만난다. 울산 얼음골 표충사 방향으로 우회전을 하여 금곡인터체인지에서 우측 표충사로 내려선다. 금곡교를 건너면 단장면으로 1077번 지방도인 표충사 방향으로 직진한다. 단장면 소재지의 면사무소 앞에서 1077번 지방도인 무릉리 국전리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된다. 곧 무릉버스 정류장과 만나고 정류장 직전 노곡교를 건너면 자암서당을 지나 보문사 주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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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삼랑진에는 만어산이란 작은 산이 있다.
그곳에는 만어산의 명성을 알리는 작은 사찰이 자리 하고 있어 더 유명하다.
만어사로 고려시대 명종10년인 1180년에 보림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 한다.
그러나 만어사의 창건은 그 이전부터 창건설화를 가지고 있어
그 설화로 인해 만어사의 존재감은 더욱 부각 되고 있다.

실제로 만어산을 올라보면 만어사에만 그런것이 아니라
산 골짜기 마다 바위들이 에워싸고 있어 신비감 마저 든다.

그 수많은 바위들은 물고기의 설화를 가지고 있어 더욱 신비롭다.
밀양의 3대 신비로 불가사의로 분류된다.
창건연대는 가락국의 수로왕까지 연대가 올라간다.
못된 독룡을 불법으로 버릇을 고쳐 주기 위해 부처님에게 부탁을 하는데
여섯 비구와 일만의 천인을 대리고 왔다는 전설로
지금 대웅전 앞의 너덜들이 비구와 천인들이 변해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또 하나는 동해 바다의 왕자가 자신의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무척산의 스님을 찾아가 자신이 거쳐 할 곳을 부탁하니
그 스님이 가다가 서는 곳이 인연이라 이야기를 하였다.
왕자 뒤를 일만의 물고기가 따랐다하는데 현재 만어사 위치에서 인연이 닿아 서 버렸다.
그래서 왕자는 하나의 바위로 변하고 지금은 그 바위를 왕자가 변한 미륵불이라 한다.
왕자를 따르던 일만의 물고기 떼는 지금 대웅전 앞의 너덜인 바위로 변했다 한다.
이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전설 같은 바위들이 이리 보면 물고기 같은,
저리 보면 사람 같은 수많은 바위들이 얽키고 설키고 하여 계곡을 메우고 있다.
그중에는 여섯비구가 변해버린 바위에는 청아한 종소리나 쇳소리가 난다하여 더욱 신비롭다.
지금 만어 불영 경석을 보면 바위 마다 쇳소리 종소리를 확인해 볼려고
돌맹이를 두들겨 바위마다 맞은 상처가 여기저기 나 있는 것 또 한 사실이다.

많은 탐방객들이 얼마나 두들겨 대면

거주하시는 스님 왈

‘만어사 바위 다 깨진다’며 고래고래 고함을 다 치실까.

근래에 와서는 전에 없던 소원바위가 있다.
큰 나무 밑에 둥근 바위가 놓여져 있다. 먼저 바위를 들어보면 잘 들리지만 내려 놓은 뒤 소원을 이야기하고 들면 잘 들리지 않는다는 소원바위가 탐방객들의 발걸음을 잡고 있다.

창건설화대로라면 이 사찰은 2000년이 되어 가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지금은 가람의 형태가 단출하지만 한때는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선사가 이곳에 들러 미륵불을 직접 참배를 하였다 한다.

‘멀리서 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사라져 부처영상이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고 하였다.
바위의 미륵불을 보면 대단한 힘을 느낄 수 있다.
부처 영상의 모습을 떠나 바위에서 느낄 수 있는 힘이랄까.

그 무언가 생각을 하게 해 준다.

만어사 8부 능선에 자리잡은 만어사는 허왕후가 도래한
고대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해 주는 전통 고찰이다.

이곳은 오랜 가뭄이 지속되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신라 왕의 공불처였다고 되어 있다한다.

만어사불영경석이 지방기념물 제152호에서 2011년 1월 천연기념물로 제528호호 승격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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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배낭을 메고 떠나 본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도심의 한복판에서 일상 탈출을 꿈꾸며 살아가는 요즘에는 아무 생각 없이 떠난다는 것에 묘한 매력을 느껴 본다.
그곳이 어디 던 지 간 에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의 탈출, 탈출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요즘이다.
이번 주에는 어디로 탈출을 해 볼까. 내 몸 안의 또 다른 내가 내게 거든다.

‘밀양의 감물 리가 어떤냐’ 고.

감물리,

좋은 곳이지,

물이 달다는 그 한마디면 모든 것이 끝나는게 아닌지

그럼 감물리를 가볼까.

가기전에 조금은 그곳을 알아야 하니까. 공부나 해 볼까.

밀양시 단장면 감물리로 구기 중촌 용소 점촌 당고개, 대뱅이마을을 거느리고 있다.
골이 깊고 산이 많은 곳이며 특징은 감물리를 감싸는 모습이 연화형으로 연꽃이 감싸는 형국이다.
그래서 인지 감물리에 들어서면 백두산의 분화구를 닮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
곳에도 천지와 같은 감물 저수지가 자리하고 구기 마을 뒷산을 천지봉 또는 천제봉으로 기우제를 지낸 산으로 감물리를 대표하고 있다

감물리를 이야기 할때 따라 붙는 수식어가 또 있다.
밀양에서 고산마을 즉 오지마을로 통한다.
첫번째가 오치, 두 번째가 소월리(현 백마산 바드리), 세 번째가 감물리로 밀양의 3대 오지에 속한다.
그래서 인지 이곳은 산상의 별구이다.
안법리에서 감물리를 오르는 길은 갑자기 고도를 높이면서 병주둥이 같은 입구를 들어서면 안쪽이 갑자기 넓어 지면서 감물리 마을이 훤히 들어난다. 그 만큼 안쪽이 넓은 분지형을 이룬다.
그리고 부산 인근에서는 그래도 작은 다랭이 논이 있는 곳이기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감물리로 들어오고 나가는 길은 모두 네 곳으로 주 통행로가 북서쪽의 표충사 입구에서 올라온다.
또 한곳은 20~30년 전까지 교통이 불편했을 때 단장면 면사무소로 가기위해서 뻔질나게 다녔던 깨밭고개길이다.
나머지 두곳은 모두 삼랑진으로 넘어가는 길로 당고개와 감물고개로 많은 사람들이 넘어 다닌 눈물과 애환의 고개이다.
높은 마을 답게 여기서도 인구의 감소가 심각한 곳이였다.
살고 있는 주민 또한 많은 어려움을 격고 먹고 살기 위해 도회지로 모두 떠나버린 것이다.
몸에 상처가 나면 새 살이 돋듯이 근래에 와 전원마을을 찾는 도시민들에 의해 다시 주목 받는 곳이 되었다.
한 때는 먹고 살기 힘들어 떠났던 곳이 이제는 살기 위해서 들어오는 곳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감물리를 오르는 골짜기와 능선상의 곳곳을 보면 별장 같은 주택들을 수도 없이 보게 되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감물리저수지 위 삼거리에서 감물고개를 넘어가는 2차선 도로를 올라가면 U자형 커브길에 용소마을 가는 갈림길과 만난다.
직진형 왼쪽 길로 들어서자. 농로 같은 마을 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중리마을 가지 이어지는 계단식 다랑이 논이 펼쳐진다.
남해의 가천마을에는 비교 할 수 가 없지만 이곳의 다랑이 논은 편안함과 포근하면서 친근감을 주는 그런 곳이다.
그곳을 지나면 용소마을로 감물리에서는 가장큰 마을이지 싶다.
이마을 아래에 웅덩이가 있었는데 그곳에 살던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 회관을 지나면 사거리 갈림길이다. 직진은 당고개로 삼랑진의 안촌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당고개 만당에는 예전에 당이 있었다 하여 당고개로 불린다.
지금도 큰 당산나무가 당고개를 지키고 있으며 오고가는 나그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있다.

중리마을을 가기위해서는 왼쪽으로 다랑이 논 사잇길로 내려서야 한다.

논과 논 사이를 연결하는 농로길이 운치있는 길이다. 당집과 당산나무가 서 있는 곳을 지나 다랑논을 끼고 오르면 중리마을로 감물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뒤편으로는 깨밭고개에서 석이덤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아늑한 마을이다.
마을을 관통하는 계곡의 물소리가 암반의 골을 타고 시원하게 내려간다. 회관앞에서 돌아나간다.
옛 감물초등학교터로 내려 가면 용소마을에서 걸어 왔던 길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다.
고깔봉, 감물고개, 구천산, 당고개하며 그 아래 자리잡은 마을과 다랑이논이 편안한 고향의 모습을 보여준다.

옛 감물초교 앞에는 구기마을 이정표가 서 있다. 여기서 우측으로 들어서면 깨밭고개 구기마을 방향이다. 좌측으로 옛 정미소 건물이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감물저수지가 만수위에 차 있다.
깨밭고개 오름길을 만나고 구기마을 회관 앞에서 왼쪽으로 틀어 감물저수지를 돌아내려 가면 오붓한 옛길이 기다리고 있다.
저수지 뒤로 둘러쳐진 산줄기하며 마을, 물에 반사되는 빛이 별천지에 와 있는 느낌이다.
저수지 둑 아래 대뱅이마을 갈림길로 비탈진 마을에 품질이 우수한 대밭이 있다하여 대밭마을이며 죽방,대뱅이로 불렀다.
지금은 죽봉으로도 부런다.
다음기회에 대뱅이마을을 가기로 하고 안법리로 내려가는 도로를 따라간다.

우측으로는 감물저수지에서 흘러 내린 물이 골짜기를 타고 내리는데 그 위세가 대단하다. 계곡 도한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경치에 취해 슬렁슬렁 내려오면 어느새 안법보건소가 있는 삼거리길이다. 왼쪽으로 법산 사지마을 거쳐 만어사로 해서 삼랑진으로 가는 길이다.

감물리 사람들은 감물저수지에 대해 저수지는 감물리에 있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데 정작 혜택은 그 아래 마을인 안법리와 사촌마을에서 그 덕을 본다면서 하소연 하며 빙긋이 웃는다.













































찾아가기

밀양행 무궁화호는 부산역 기준 오전 5시10분부터 20~4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소요시간은 43분이다. 3800원. 밀양역에서 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한 뒤, 감물리행 새마을버스를 이용한다. 오전 새마을버스는 오전 6시10분, 8시10분, 11시50분 등 하루 5차례 출발한다. 약 30분 소요.

자가용의 경우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24번 국도 표충사 얼음골 언양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금곡교차로에서 표충사 방향으로 빠져나가 금곡교를 지나자마자 오른쪽 감물리 방향으로 진입, 계속 직진하면 감물리에 닿는다. 감물저수지 지나 마을 입구 삼거리에서 주차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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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부내륙 최대 폭포 낀 500m대 육산,  원점회귀 8.5㎞ 코스 여유 있게 4시간 산행
- '3대 악성' 중 1인 난계 박연 자취 짙어
- 투구봉서 바라 본 서재마을 풍광 절묘, 계곡 폭포 낀 여름 나들이 산행지 제격



 


충북 영동읍에 들어서면 곳곳에 '국악과 과일의 고장, 영동'이라는 현수막과 안내판이 걸려 있다. 포도와 배 복숭아 등이 달고 맛있기로 유명하니 '과일의 고장'이라는 표현은 수긍이 가는데 대체 '국악의 고장'이라니? 문외한들은 의아해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곳이 바로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 등과 함께 '한국의 3대 악성(樂聖)'으로 불리는 조선 초기 문신이자 학자 음악가로 명성을 날렸던 난계(蘭溪) 박연(朴堧·1378~1458)이 태어나고 생을 마감한 고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금세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충북 영동과 옥천의 경계에 솟은 월이산은 '한국 3대 악성' 중 한 사람인 난계 박연 선생이 즐겨 찾던 옥계폭포를 품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가 볼만한 산행지다. 강수량이 많은 여름철에 옥계폭포는 더욱 웅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번 주 '근교산&그 너머' 취재팀은 박연 선생의 자취가 오롯이 남아 있는 월이산(月伊山·551.4m)을 찾았다. 영동과 옥천의 경계에 솟아 있는 아담한 육산인 월이산은 '달이 떠오르는 산'이라는 뜻으로 '달이산'으로 불리기도 하는 내륙의 숨은 명산이다. 합쳐서 8.5㎞ 남짓한 거리에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오르내려 3시간30분이면 여유있게 산행을 마무리할 수 있어 부담이 없다. 특히 월이산 산행의 백미라고 불리는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옥계동의 옥계폭포(玉溪瀑布)는 높이만 30m에 달해 '중부내륙 최대 폭포'로 인정받고 있는 곳이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철에는 폭포수의 유량이 늘어나면서 굉음도 더욱 커지고 물보라도 짙게 피어오르기 때문에 폭포 앞에 서 있으면 그 어떤 초강력 에어컨 바람을 맞는 것보다 더 시원한 느낌을 받는다. 옥계폭포 앞에서 젊은 시절의 박연은 피리(퉁소)를 불면서 훗날 대음악가로 성장할 기반을 닦게 된다.

옥계폭포와 함께 월이산의 또 다른 명소는 정상과 서봉 사이에 있는 암봉인 투구봉(범바위)이다. 산 중 마을인 서재마을에서 보면 영락없는 투구 모양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 거대한 암봉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광이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국악의 향기를 맡으며 웅장한 폭포와 맑은 계곡, 삼림욕하기 좋은 순한 등산로를 따를 수 있으니 월이산은 여름 나들이 산행지로 제격이다.


   
옥계폭포 위 계곡의 작은 다리를 건너는 취재팀.

산행은 영동군 구역인 옥계폭포 아래 천국사 주차장을 기점으로 하는 원점회귀로 진행된다. 천국사~옥계폭포~폭포 위 갈림길~449봉~갈림길~정상~투구봉~서봉(천모산·506m)~서재마을 입구~천화원(단학수련원)~폭포 위 갈림길~옥계폭포~천국사 순이다. '국제 선불교 조계종 본사'라는 다소 복잡해 보이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천국사 앞은 옥계폭포 주차장 역할을 한다. 최신식 화장실과 쉼터가 잘 갖춰져 있다.

장마철인 탓에 예고 없이 빗줄기가 쏟아진다. 하지만 일부러 우중산행을 즐기는 산꾼들도 있는데 이 정도 비가 무슨 대수랴. 옥계폭포 방향으로 차량 통행이 가능할 정도의 널따란 임도를 따른다. 쌈밥이 맛있기로 유명한 폭포가든을 지나면 높다란 보를 가진 옥계저수지가 나온다. 빗물이 수천 개의 동심원을 그려내는 저수지가 호젓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저수지를 막 벗어났을까 싶은데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물 쏟아지는 소리. 바로 말로만 듣던 옥계폭포다. '국악의 고장 영동'이라는 말이 탄생하게 된 공간적 배경이기도 한 옥계폭포 앞 광장에는 관모(冠帽)를 쓴 박연 선생이 대금을 불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 한 동상이 멀리서 온 길손을 반갑게 맞이한다. 광장 곳곳에서는 영화 '천년학'의 배경음악이 폭포수 소리와 어우러지며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월이산 정상에서 서봉 가는 길에 만나는 로프 구간.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쏟아져 내린 폭포는 절벽을 깎아 내고 숨막힐듯한 절경을 만들어냈다. 600여 년 전 음악을 사랑했던 '소년 박연'은 그 아래에서 피리를 불며 청운의 꿈을 꾸었으리라. 인근 마을에서 태어난 박연은 유독 이 폭포를 좋아했는데, 특히 그는 어느 날 쏟아지는 폭포수 밑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는 난초를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에 반해 자신의 호를 난초 난(蘭)에 시내 계(溪)를 붙여 '난계'라 지었다고 한다.

이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정자 뒤로 등산로가 열려 있다. 지름 30㎝가량의 금속관이 설치돼 있는 것이 보인다. 이 대형 관로는 가물 때 저수지의 물을 폭포 위로 끌어올려 다시 흘려보내 폭포수의 유량을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하기 위한 시설이라고 한다. 3분쯤 오르면 폭포 위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넌다. 다리와 폭포 사이의 웅덩이는 옛날에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예저수'라고 알려져있다. 다리를 건너 2분쯤 가면 갈림길이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올랐다가 산행 막바지 왼쪽 길을 통해 원점회귀하게 된다.


   
월이산 대표 암봉인 투구봉에 서면 서재마을이 보인다.

오른쪽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그렇게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 바위에 붙어서 자라는 부처손이 유달리 많다. 중간 중간 멋진 전망대를 지나지만 제법 많이 내리는 비로 인해 세상이 온통 뿌옇게 변하는 바람에 시원한 조망을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30여 분 오르면 449m봉에 닿는다. 봉우리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금강 본류의 물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능선길을 이어가면 15분 후 갈림길 역할을 하는 448m봉이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왼쪽 능선길. 20분 정도만 더 가면 어느새 울산 박씨 무덤과 헬기장이 있는 정상에 닿는다. 맑은 날씨 같으면 정상에서 천태산 서대산 등 주변의 명산들이 모두 드러나는 멋진 풍광이 연출될 텐데 짙은 운무 탓에 보이지 않아 더욱 아쉽다.

직진하면 옥천군 원동리 숯가마골로 내려서는 길이지만 옥계폭포로 원점회귀하려면 올라온 방향에서 볼 때 왼쪽으로 꺾어야 한다. 울산 박씨 묘비 앞을 통과해 왼쪽으로 20m만 내려서면 함양 박씨 묘가 있따. 점심 식사 하기에 딱 좋을 정도의 널찍한 터가 있고 서재마을 방향인 남쪽을 조망할 수 있다. 제법 가파른 내리막이 이어진다. 서재마을로 하산하는 갈림길을 통과하고 '천모산 안내판'을 지나 능선을 계속 따르면 로프가 설치된 암벽구간이 나온다. 하지만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으니 큰 무리없이 오를 수 있다. 로프구간을 지나면 어느새 투구봉 위에 올라 있음을 알게 된다. 발아래에는 산으로 둘러싸인 서재마을이 드러나고 오른쪽으로 서봉(일명 천모산)에서 국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올록볼록한 봉우리들이 드러난다.

   
옥계폭포 앞 광장에 있는 피리 부는 박연 선생 동상.

투구봉에서 서봉까지는 10분이면 닿을 수 있다. 손바닥 크기의 판자에 국사봉 술목재 마니산 방향 화살표가 가리키는 왼쪽으로 하산길을 잡는다. 15분쯤 가다가 한차례 갈림길이 나오면 능선길을 버리고 왼쪽 11시 방향으로 비스듬히 난 길을 택한다. 445m봉의 왼쪽 산허리를 타고 가는 길이다. 5분 후 본격적인 내리막 지능선을 타고 가다 보면 풀이 나지 않은 무덤 갈림길. 이곳에서 왼쪽으로 떨어지면 서재마을이지만 우측 길을 계속 따른다. 10분 후 연못까지 갖춘 멋진 양옥집 앞에 닿으면 임도로 이어진다. 5분 후 만나는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다가 '일지명상센터' 표지판이 보이는 갈림길에서 명상센터 방향으로 계속 길을 따른다. 자동차도 갈 수 있는 길이다. 10분 후 '천화원' 입구를 통과, 계속 직진하면 옥계폭포 위 갈림길에 닿는다. 나머지 구간은 산행 초반 거쳤던 길과 겹치니까 별다른 어려움 없이 폭포 밑까지 내려설 수 있다. 단, 비가 많이 오면 천화원에서 옥계폭포 상단 사이 계곡에 물이 급격히 불어나니 조심하자.


# 떠나기 전에

- 옥계폭포는 '음폭'… 불임 여성들 소원 빌어

월이산 옥계폭포와 관련된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마을사람들은 옛날부터 이 폭포를 누워 있는 여자의 음부로 보고 '음폭(陰瀑)', 즉 여자폭포로 불렀다고 한다. 옥계폭포의 옥(玉) 자도 '여자'를 뜻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폭포수 떨어지는 웅덩이 바닥에서 '양(陽)바위'가 불룩 솟아나자 마을 사람들이 경관을 헤친다며 이 바위를 잘라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 후로 마을의 남자들이 젊고 늙음을 가리지 않고 한두 명씩 객사하거나 병사하는 변고가 이어졌다. 마을에서는 거의 재앙 수준이었다. 급기야 주민들은 양바위를 잘랐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으고 옮겼던 양바위를 원래의 자리로 옮겼다. 그 뒤로는 신기하게도 마을이 평온을 되찾았다고 한다. 자연의 이치인 음양의 조화를 인위적으로 깨뜨릴 수 없다는 교훈을 담고 있는 듯하다. 지금도 불임인 여성들이 이 폭포를 찾아 아기를 갖게 해달라는 치성을 드리는 사람이 많다.


박연은 조선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세종 때 예문관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거친 문신 겸 학자로 특히 궁중의 음악인 아악과 종묘 제례악의 틀을 완성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종류의 악기도 개발하고 완벽한 조율을 이뤄낸 음악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특히 훗날 세종대왕이 되는 세자 충녕의 스승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박연은 거문고 등 악기 연주에도 능했는데 특히 피리 연주는 가히 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세조 2년에 셋째 아들이 계유정난에 연루돼 참형을 당한 후 자신은 파직 당해 한강 나루에서 배를 타고 귀향길에 오를 때 그와의 작별을 아쉬워하는 벗들에게 배 에서 피리 연주를 했는데 그 곡조가 너무도 아름답고 구슬퍼서 모든 배가 멈추고 강물이 울었다고 전해 온다. 옥계폭포 주차장에서 영동읍 방향으로 1.5㎞만 가면 난계국악박물관이 있으니 산행 후 들러볼 만하다. 난계사당도 박물관 옆에 있다.


# 교통편

- 영동IC서 내려 읍 통과 후 4번 국도 우회전


경부고속도로 영동IC에서 내려 영동 무주 방향으로 19번 국도를 따라 직진한다. 영동읍내에 들어서면 구교사거리에서 대전 무주 방향으로 좌회전, 250m쯤 가다가 구교삼거리에서 무주 대전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영동교를 건너 4번 국도를 타고 옥천 대전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10㎞가량 가면 옥계폭포 입구 사거리에서 좌회전 한다. 3시간 소요.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일단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 영동역에 하차한 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청주행 시외버스를 타고 고당리 옥계폭포 입구에서 내린다. 30분 소요. 시외버스는 오전 8시45분, 10시, 11시10분 등 하루 8회 운행한다. 버스정류소 옥계폭포까지 걸어서 30분가량 걸린다.

문의=주말레저팀 (051)500-5169

  • 이창우 산행대장 010-3563-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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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자식과 부모의 사랑, 연인들의 사랑, 부부의 사랑등을 이야기 할때는 나무에 비교를 하기도 한다.
연리근, 연리지, 연리목으로 종종 비교를 하여 천연을 기다린 사랑이라 어쩌구 저쩌구 하며 애틋한 표현을 하기도 한다.
오늘 소개하는 나무는 소나무로 부부의 사랑을 의미하는 연리목이다.



밑둥치부터 서로 부부의 사랑을 확인 하듯이 붙어서 올라와 완전히 한 몸이 되어 버린 소나무로 그 크기에 놀란다.
장정3명이 양팔을 벌여야 겨우 안을 수 있는 크기로 수 백년을 비바람과 태풍을 맞으며
능선에서 부부의 사랑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자연의 저항을 지켜 왔을 것을 생각하니 경의로움 마저 든다.
 연리목은 보는 방향에 따라서는 모습이 다르지만 한 방향에서는 서로 부부의 사랑을 확인하는 듯 몸이 꼬여저 올라가고 있다.


 나무에도 엄지와 양지가 있는 것 같다.
음지 쪽은 햇볕이 들지 않아 나무에 푸른 옷을 걸치고 있다.
이 이끼도 이들 부부의 사랑만은 어쩌지를 못하는 것 같으며
이 모습은 아내나무가 몸을 45도로 꺽어 남편나무에게 애교 아니면 투정을 부리는 모습처럼 보이는 것  같다.


어떤 방향은 부부가 서로 다정하게 포웅하는 모습이다.
왼쪽의 나무가 얼굴을 치켜들고 오른쪽 소나무와 서로 눈을 맞추며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똑같이 아픔을 공유하며 천년을 이어져 가자고 하는 것 같다. 흔히 천년 사랑이라고도 하니 말이다.
 


이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수백년 동안 부부의 사랑을 지켜 온 것 처럼 앞으로도 쭉~쭉~ 그곳에서 사랑을 키워나가길 빌어 본다.

 

이 연리목은 등산로와 많이 떨어져 있어 쉽게 찾을 수 없지만
위치하고 있는 데가 해발 650m의 능선상이며
부부나무의 품이 얼마나 큰지 나무아래에는 여타 나무들을 찾아 볼 수가 없다.

풀도 쉽게 자라지 않는 것 같았다.
산행하면서 또는 관광지의 연리목, 연리근, 연리지를 많이 보았지만 이 크기는 처음인 것 같은 대형의 연리목이다.
위치는 밀양시 단장면 고례리 향로산 인근의 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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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년 전인 밀양 단장면 무릉리 노곡마을의 작은 서당에는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낭하게 울려 퍼졌다.

그 글 읽는 소리가 퍼져 인근의 수많은 유생들이 이곳에 찾아 들었다.
이름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진나라때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의 별천지 모습이  이를까
논에는 막 모내기를 끝내고 한가로운 농촌의 풍경과 주변의 대추나무에는
겨울옷을 벗어버리고 이제는 초록색의 여름옷으로 바꾸어 입은 자연의 모습이
무릉리 마을 사람들이 꿈꾸는 무릉도원이 아닐까.
그래서 인지 이곳도 전원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다. 

 


선생은 수림덤산을 배경으로 산자수려한 이곳에 
유하여 지상낙원인 무릉도원을  꿈꾸었을까. 
이곳은 1913년 소눌 노상직(1854~1931)선생이 망명지 만주에서
이곳 무릉리로 돌아와 저술과 후진양성을 위해 세운 강학소이다.
‘자암’은 서당뒤 서북쪽에 있는 붉은 색을 띠는 바위로
마을에서는 뿔근바위 즉 자암에서 자암서당이라 하였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 직후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파지장서에 유림대표 137명, 문인 14명과 함께
서명 한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의 제자가 일천에 이를 정도로 그의 학문과 열의는 인근에서는 따를 자가 없었고
1930년에는 근방 사연리 말방마을에 사남서장을 짓고
후진양성과 책을 보관하였다 하는데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작금의 자암서당은 글 읽는 수많은 사람들은 온데 간데 없고 
마당에 웃자란 잡풀만이 무성하여 황량한 바람소리만 들릴뿐이다.
서당건물과 안가는 서로 담장과 서당건물이 쳐져 분리를 해 놓았다.
출입문은 두 개로 밖에서 보면 살림집으로 들어가는 문과 서당으로 들어서는 문이 있다.
현재는 안가로 들어서면 좌측에 안채가 있고 정면에는 서고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도 지금은 살림을 살지 않으며 서고문을 열어보니 책꽃이만 짜여져 있고 책은 볼 수 가 없었다.
세월 앞에 어 쩔 수 없는지 살림집의 출입문에 붙은 작은 사랑채에 후손들이 기거를 하는 것 같다.







모양세로 보아 할머니 한분만이 이 자암서당을 지키고 있는 것 같다.
할머니의 발이 되어 줄 유모차가 마당에 나딩굴고
 평상에는 살림들이 누워 있으며 수돗가 옆에는 세탁기가 자리를 하고 있다.
자암서당으로 들어서는 중문은 함석이 문 앞에 기대어져 최근에는 들어선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중문을 열고 들어서니 우측으로 서당의 출입문과 화장실이 서 있으며
두동의 건물이 서 있었다.

자암서당으로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가 없는 가 보다. 
문 짝 등 보수를 한 흔적은 찾을 수 가 있었지만 마루위에는 잡동사니등이 너부러져 있고
회칠을 한 벽들은 떨어지고 마당앞의 잡풀은 자랄대로 자라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자암서당의 간결하면서도 기품있는 모습에서
선생의 올 곧은 모습과 선생의 열의에 찬 교육열을 옅볼 수 있었다.












자암서당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4호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무릉리

자암서당은 소눌 노상직(1854~1931)선생이 망명한 만주에서 돌아와 저술과 후진 양성을 위해 세운 서당으로 선생은 이곳에서 3.1운동 직후에 파리평화회의에 보내기위한 파지장서에 서명을 하였고 그의 학업과 덕망에 천여명이 넘는 제자를 배출하였다. 선생은 이곳에서 또함 많은 저술 활동을 펼쳐 성리절요, 동국씨족고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찾아가는길

 

부산에서 신대구부산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밀양요금소를 빠져 나오면 24번 국도와 만난다.
울산 얼음골 표충사 방향으로 우회전을 하여 금곡인터체인지에서 우측 표충사로 내려선다.
금곡교를 건너면 단장면으로 1077번 지방도인 표충사 방향으로 직진한다.
단장면 소재지의 면사무소 앞에서 1077번 지방도인 무릉리 국전리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된다.
곧 무릉버스 정류장과 만나고 정류장 직전 노곡교를 건너면 자암서당이다.

부산에서 밀양행 열차를 이용한다. 오전 5시10분,50분 6시35분, 55분, 7시45분, 8시35분,9시25분, 10시20분등 다양하게 있다.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하며 밀양시외버스 터미널에서는 국전행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하루 5회로 6시20분 8시40분, 12시50분, 17시, 19시이며 무릉에서 하차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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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어사 삼층석탑

보물 제466호

소재지: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일연선사가 쓴 삼국유사의 어산불영조(魚山佛影條)에 보면은
만어사삼층석탑은 고려시대 명종10년인 1180년에
동량 보림스님이 만어사를 창건하면서 함께 건립된 삼층석탑이라 한다.

 

1단의 기단 위에 올린 삼층석탑으로 총 높이가 3.7m이며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한 개 씩의 돌로 만들어 올렸다.
기단이나 탑신부는 모두 완전하게 보존되고 있으나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안아 후에 다른 석재를 이용하여 보주를 올렸다.
전체적으로 탑신부의 비율이 안정감 있게 만들어 졌고 단아한 모습의 고려시대 탑이다.
현재 삼층 석탑이 서 있는 자리 뒤로 넓은 터가 옛 법당자리이며
지금의 대웅전은 원래의 법당지에서 옮겨 건립되었다 한다.
그러나 삼층석탑만은 창건될때의 그 자리에 위치를 하고 있다 한다.






위의 만어산 삼층석탑은 몇해전의 모습으로 현재는 탑신부의 이끼며 바위의 이물질이 모두 정리가 된 모습입니다. 

찾아가는 길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삼랑진IC~김해 삼랑진 58번(만어사 10㎞)~양산 삼랑진역 좌회전, 1022번 지방도~굴다리 통과(삼랑진역 앞에서) 양산 원동 좌회전~ 우곡리에서 만어사 표지판을 보고 만어사 방향~만어사 주차장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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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진 만어산은 만어사를 품고 있다.
만어사란 사찰로 인해 전국적으로 알려진 산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밀양의 작은 산에 불과한 초라한 산이
땀흘리는 표충비, 무봉사 태극나비, 얼음골의 시례빙곡과 여기 만어사의 불영경석으로
밀양의 4대 신비중 하나가 된 것이다.
이곳 사찰의 근원은 대웅전 앞의 삼층석탑과 삼국유사에서 1181년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전해지는 설화에 의하면 가락국의 김수로왕까지
그 근원이 올라가는 천년이 넘은 고찰이다.
만어사를 대표하는 것은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도 아니요.
대웅전 앞의 소원을 들어주는 바위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까 만어사는 뭐니뭐니 해도 만어사 절 밑으로 깔려 있는
 너덜을 빼고는 만어사를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 바위 하나하나에 전설과 설화가 깔려 있는 것이다.


먼저 삼국유사에서 창건설화와 만어사 어산불영경석에 대해 알아보자.
수로왕때 가락국안의 옥지라는 연못에 못된 용이 살 고 있었는대
만어산의 나찰려와 서로 사랑에 빠졌다 한다.
그들이 사랑을 하게 되면서부터 하늘의 노여움을 산 는지
벼락과비, 우박, 가뭄으로 백성들은 흉년이 들고 4년 동안 기근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에 수로왕은 신통력으로 그들을 막아 볼려고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처님 도움을 받아 여섯 비구와 일만의 천인을 데리고와
독룡과 나찰녀의 항복을 받아
그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함께 받게 하여 설법에 감응을 받아
여섯비구와 일만의 천인들이 만어사 앞를 가득 메운 바위들이 되었다 한다.
그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수로왕이 이곳에다 절을 지었다하는 이야기가 하나이며  


또 하나는 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에 따르면
동해 용왕의 아들이 자신의 명이 다한 것을 알고
무척산의 신통한 스님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는데
그 스님이 가다가 멈춰 서는 곳이 인연이라 이야기를 하였다.
왕자가 길을 나서니 일만의 고기떼가 그를 따르고 왕자가 멈추어 선 곳이 이곳 만어사라 하였다.
지금 미륵전 안의 미륵돌은 동해용왕의 왕자가 변하였다하는 미륵바위이며
그의 뒤를 따르던 일만의 고기떼들은 바위로 변했다 한다.
사실 만어산의 바위들은 이곳뿐만 아니라 산 전체로 분포되어 있어 장관을 이룬다.
그리고 만어사 앞의 바위들을 두들겨 보면은 맑은 종소리와 또는 쇳소리를 내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여섯비구즉 용이 변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동해의 왕자와 고기떼가 만어사로 왔을 때 나왔다는
미륵전 옆의 작은 샘터가 있다.
그래서 인지 동해의 밀물과 쓸물때 샘터 물높이가 달라진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낙동강이 범람할때도 이곳 샘터의 물이 넘쳐 난다는 이야기 있다 한다.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스님은
만어사의 어산불영경석과 미륵불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는데
만어사 경석중 금과 옥의 소리를 내는 것이 있으며
미륵불은 멀리서 보면 부처 형상이 보였다가 가까이 가보면 사라져 버린다고 하였다.
문외한인 내가 바위를 가깝게도 보고 멀리서도 보았지만
그저 바위로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방문화재 제152호에서 2011년 1월10일 천연기념물 제528호 승격되었다 합니다.



아래내용은 밀양시장님이 주민에게  만어사에 관한 답변 내용이며 일부 옮겨 왔습니다.
"1996년3월11일 경상남도 문화재(기념물 제152호)로 지정되어 관리해 오다가
만어사에 있는 경석이 오랜 풍화과정을 거치면서 암괴가 마치 양파가 벗겨
지듯 풍화되는 모습이 한반도 지질형성과정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만어산 정상부에서 700m이상 펼쳐져 있는 바위가 주변경관과
어울려 독특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는 등 탁월한 경관적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청에서 현장 심사하여 금년 1. 10(월) 국가지정 문화재(천연기념물
제528호)로 승격 지정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는 길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삼랑진IC~김해 삼랑진 58번(만어사 10㎞)~양산 삼랑진역 좌회전, 1022번 지방도~굴다리 통과(삼랑진역 앞에서) 양산 원동 좌회전~ 우곡리에서 만어사 표지판을 보고 만어사 방향~만어사 주차장 순

만어사 055-356-2010
밀양문화관광과055-359-5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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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의 한천정사와 유허비

영동 월유봉아래에는 우암 송시열(1607~1689)에 관한 유적지가 남아 있다.
예로부터 물 좋고 정자 좋고 산세 또한 좋은 곳에는 의례히 시인묵객들이 들어와 풍류를 노래하고 강학과 후진 양성을 하였다.
이곳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달도 머물고 간다는 월유봉 아래에 우암선생은 초당을 짓고 강학하며
골짜기마다  풍치 좋은 곳에 한천팔경이라 이름을 붙혀 후세에 까지 전해지고 있다.
월유봉, 사군봉, 용연대, 산양벽, 화헌악, 법존암, 청학굴, 냉천암으로 월유봉 아래에 모두 있다.

선생은 충북 옥천군 구룡리에서 태어 났다.
모친 곽씨부인은 밝은 달과같은 구슬을 삼키는 태몽을 꾸어 우암선생을 잉태하였다 한다.그
래서 인지 이곳 달도 머물렀다 간다는  한천마을에 선생도 은거를 한 것일까.
한때 후대에 와 이곳 고려시대의 암자터로 추정 되는 이곳에
한천서당을 짓고 선생을 배향 하는 제사를 지내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하는데,
고종때 대원군에 의해 서원 철폐령에 훼철 되었다가
지역 유림들에 의해 1910년에 한천정사(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28호)가
건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 한천정사는 추풍령에서 내려오는 추풍령천과 민주지산의  물한리 계곡이 초강천을 이루어 오다 서로 합수되고 백화산과 사군봉 사이를 흐르는 석천과 신흥리에서 또 다시 합수되어 
초강천을 이루며 이곳 월류봉에서 절정을 이룬다. 

한굽이 두굽이 돌아가는 이곳에다 서재를 지은 것을 보면 우암선생의 기품을 엿 볼 수 있다. 
한천정사 우측 강가에는 우암 송시열선생의 유허비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46호로 지정 되어 있다.
 이 유허비는 1779년인 정조3년에 후손과 유림들에 의해 우암선생이 이곳에 은거를 하며
후진을 양성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정면과 측면 각1칸에 맞배지붕으로 건립되었다.






우암송시열 선생의 유허비







한천정사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황간IC에서 내려 황간삼거리에서 국도 4호선을 타고 김천 방면으로 우회전한 후, 마산삼거리에서 백화산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월류교를 건너 삼거리에서 좌회전(901번 지방도) 한 후 원촌교를 건너면 다시 삼거리를 만나는데 왼쪽으로 300m만 가면 월류봉 표지판이 있다. 좌회전해 200m만 가면 월유봉 대형 주차장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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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을 영남대로라 한다.
시대의 배경은 변하지만 이 영남대로는 변하지 않고 면면이 이어져
현재의 동맥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선시대때 과거길, 파발마의 길, 보부상들의 애환의 길, 백성들의 눈물의 길,
피난의 길등 아주 다양하게 이용이 되었다 ,
부산을 출발 낙동강을 끼고 올라가 밀양읍성을 거쳐 올라가는 영남대로는
내일동~교동을 거쳐 지금의 밀양대공원 충혼탑 뒤 제사고개로 해서 청도땅으로 영남대로는 이어졌다.


고개마다 애환과 눈물의 사연이 오롯이 배여 있는 우리의 옛길,
과거길의 선비들도 영남대로를 따라 한양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며
과거급제의 꿈을 안고 걸었던 이길,

과거길에 오르는 선비들은 관로인 영남대로를 두고
이곳 추화산 사잇길인 용평고개로 둘러 현재의 밀양대공원 충혼탑으로 돌아 갔다 한다.



이곳 용평고개에는 보기에도 비범한 모과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 있다.
수령 300년 이상을 이고개에서 오고가는 길손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이고개에는 원래 700살을 견더온 모과나무가 있었다 한다.
언제부터인가 이 모과나무 아래에서 치성을 드리는 무당이 살았는데
무당의 과욕으로 인해 그만 모과나무에 불을 내고 말았다.

그 후 모과나무는 죽고 어느 봄날 줄기에서 모과나무 새싹이 돋아 현재의 모과나무로 자랐다 한다.
이 모과나무를 자세히 보면 한그루가 아닌 여러그루가 자라면서
한그루의 모과나무로 되었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보는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 모과나무에도 슬픈 이야기가 전해온다.
용평동에 거주하는 윤할머니는 모과나무에 대해 과거길의 선비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나무였다 한다.
‘과거길의 선비들에게는 관도가 아닌 이길로 다녔제’. 모과나무의 효엄을 믿어
일부로 이길로 돌아 이 모과나무 아래에서 과거급제를 할 수 있도록 빌고 갔다는 것이다.
지금 이 모과나무 믿 둥치가 썩어 큰 구멍이 나 있다.
과거길에 오른 선비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피로가 몰려와 잠깐 눈을 붙일 요량으로
밑둥치의 구멍에 기대어 잠을 자다 변고를 당하고 말았다한다.
그후 한양 과객들은 ‘밀양은 몰라도 모개 남자는 안다’는 이야기가 회자될 정도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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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 침수정(枕潄亭)

경상북도 기념물 제45호

경상북도 영덕군 달산면 옥계리

옥계 침수정 포항시와 청송군 영덕군의 경계지점으로 오롯이 영덕군에 속해 있다.
영덕군의 남쪽 오지를 담당하고 있다.
하옥천과 항리천이 서로 만나는 곳,
내연산과 동대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팔각산을 휘감아 돌아 옥계천을 이루니
여기에 조선정조8년 인 1784년에 손성을이 누각인 침수정을 짓고 강학을 하였다. 




침수정은 계곡 자연의 형태를 그대로 이용하여 올린 누각으로
일각문을 세워 담장을 돌려 출입로를 만들었지만
그 반대인 옥계계곡 쪽으로는 담장을 돌리지 않아 자연의 옥계계곡을 그대로 볼 수 있게 하였다.
누각은 정면2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자연상태를 이용하여 기둥을 세우고 만든 누각으로 주변의 절경과 잘 어울린다.





손성을은 이곳 옥계계곡에다 누각을 짓고
침수정(枕潄亭)이라 현판을 걸었는데
베개침(枕)자와 양치질할 수(潄), 즉 침수정이라 하였다.
이곳 옥계계곡의 풍치가 그만큼 아름다워
손성을이 세속의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이곳에 눌러 않아 목침을 베고 하늘을 쳐다보고,
옥구슬 굴러가는 물소리에 심취되어 도연명의
무릉도원이 여기가 아닐까 하였을 것이다.





침수정 주위로는
진주암과 삼귀암 학소대 병풍석 일월봉등 옥계37경이 포진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침수정을 두고 침수정의 아름다운 정원 역활을 톡톡히 하고 있다.
침수정 뒤편으로는 여덞자 병풍인 팔각산이 쳐져 있어
기암속에 자리 잡은 진경산수화를 보여 주고 있다.






찾아가는 길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를 기준으로 경부고속도로 경주ic~울진 포항 7번 국도~울진 영덕 28번 국도(포항외곽도로)~울진영덕 7번 국도를 타고 가다 삼사해상공원을 지나면 만나는 첫 삼거리에서 달산 방면 좌회전~옥계 주왕산 얼음골 부남 방향 좌회전~침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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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장안사라는 사찰이 3군데이다.

김춘주가 삼국통일을 이룬후 나라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염원하여 전국에 장안사를 세웠다한다.
금강산과 남쪽의 부산 좌천(그 당시 양산) 장안사 그리고 중앙에 위치한 예천 장안사이다.

예천의 비룡산 장안사는 바닷속의 용궁으로서
내성천이 비룡산을 감싸고 있는 곳에 세운 사찰로
신라시대 경덕왕인 759년에 운명조사께서 장안사를 창건하였다.
그후 고려시대때는 지도림화상이 조선시대로와 덕잡, 법립 두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장안사는 고려때 당대의 문장가인 백운 이규보가 머물며 글을 짓는 등
많은 인물들이 이곳을 스쳐간 유사 깊은 곳이다.



최근에 조성된 아미타 대불







 물돌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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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산 쌍계사

경남 하동을 대표하는 사찰은 쌍계사이다.
쌍계사 입구의 십리 벚꽃길이 아니라도 쌍계사 만으로도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하는 쌍계사는 지리산 남부 능선의 삼신봉 아래에 위치를 하고 있다.

일반 사찰의 일주문에는 지리산과 별 관계가 없어도
지리산을 앞에 붙여 지리산00사라 붙이는데 왜 쌍계사는 지리산의 일개봉우리인 삼신봉을 앞에 갖다 붙였을까.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쌍계사를 가기위해서는 쌍계사 주차장에서 화개천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먼저 최치원이 바위에 새겼다는 쌍계석문을 지나야 한다.
정강왕이 두계곡이 만난다하여 쌍계사란 이름을 하사해
그것을 기념해 새겼다는 쌍계석문을 통과하면 큰 주차장과 만난다.
주차장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쌍계사로 들어선다.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22년인 723년에 대비, 삼법 두스님이
당나라 남선종의 6대 혜능 스님의 머리뼈를 모셔와 꿈속의 계시대로
눈속에 칡 꽃이 핀 자리에다 머리뼈(頂上)를 모시고 절을 지었는
현재의 금당자리가 칡꽃이 피어 있던 자리였다 한다.
그 후 어찌되었는지 절은 황폐화 되었다가
서기830년에 진감혜소국사게서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와 이곳에다 혜능의 영당을 짓고 크게 중창을 하여 옥천사라 하였다.
886년인 정강왕때 사명이 쌍계사로 바뀌었는데
입구의 화개란 명칭도 겨울에 칡꽃이 피었다는 전설로 생겨났다.
그래서 인지 봄메는 벚꽃이 십리를 뒤 덮고
산에는 이른 봄부터 많은 꽃들이 피어 쌍계사를 더욱 화려하게 만든다.
부도탑을 지나면 일주문과 만난다.

 



쌍계사 일주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6호로 속세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서는
경계의 문으로 마음을 정갈이하고 옷깃을 다시 한번 여미어 본다.
일주란 양쪽에 한 개씩의 기둥을 세워 지붕을 받치게 하고 있다하여 부르는데
1641년인 인조19년에 벽암스님에 의해 세워졌는데
1977년에 고산스님에 의해 중수를 하였는데
세월의 무게에 의해 보조기둥을 세워 일주문의 성격을 잃어버렸다.
겹처마에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왜관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쌍게사 금강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금강이란
사찰에 들어갈 때 불법을 받들고 속세의 더러운 때를 씻고 들어간다는 의미로
사천왕이 있는 천왕문과 유사하며 840년 신라문성왕2년에 진감선사가 창건을 하였다.
그후 인조19년인 1641년에 벽암스님에 의해 중수되었고 근래
1979년 고산스님에 의해 중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악을 물리치고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를 모시는 곳으로
정면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으로 밀적금강과 나라연 금강을 모시고 있다.
현판은 벽암스님의 글씨이다

 




쌍계사 천왕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6호 사
천왕은 부처에 귀의하여 부법을 수호하고 수도승과 불자를 돕는 4명의 사천왕으로
부처가 거처하는 이상향인 수미산에는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국천왕이 동서남북으로 각각 다스리며
이곳을 들어서면 수미산 즉 부처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순종30년인 1704년에 백봉스님에 의해 창건되었고 1
825년과 1978년에 각 중수를 하였다.
불교음악인 범패의 창시자
진감선사가 여기 섬진강에서 노니는 물고기를 보고
여덟음률로 작곡을 하였다하여 팔영루라 한다.






팔영루 앞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것으로
최근에 조성된 구층석탑이다.










쌍계사 대웅전

보물제500호

임진왜란때 소실 된 것을 1632년 벽암대사에 의해 중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에는 여래불을 모시고 정면5칸 측면3칸의 큰 규모로
팔(八)자모양의 팔작지붕을 얹었다.
건물의 외관은 정교한 수법으로 조각되었고
화려한 단청으로 인해 더욱 돋보이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불교 건축물이다.


쌍계사 적묵당 과 설선당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6호, 제153호

요사체로 스님들이 기거하고 공부를 하는 곳으로
진감선사가 840년인 문성왕2년에 대웅전과 함께 창건을 하였다.
1641년 중창을 하고 1978년애 고산스님에 의해 중수되었다.
정면6칸 측면3칸으로 규모가 꽤 크고 홑처마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로

국보제47호이며 쌍계사에서 유일한 국보이다.

진감선사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 신감대사에게 계를 받고
수행에 전진하다 830년 신라로 돌아왔다.
그의 범상치 않은 법력과 학문에 왕과 백성들에게 많은 신망을 얻었다.
그후 77세때 옥천사(현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헌강왕은 885년에 ‘진감선사대공탑’를 세우게 하였고 2년후인 887년에 완공되었다.
탑비의 글은 고운 최치운이 짓고 썻는데 그의 사산비명의 하나로 꼽힌다.
현재 탑비를 보면 6.25한국동란과 빨치산 소탕때 총탄에 의해 깨어진 자국을 볼 수 있다.

 







쌍계사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호

석등은 빛으로 부처님의 진리를 비추어
중생을 깨우치게 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의미로
절에서는 중요하게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탑과 함께 대웅전인 법당 앞 에 위치를 한다.




쌍계사 마애불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

자연석의 바위 한 면을 돋을 새김을 한 마애불로 고려시대 작품으로 보인다.

감실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 불상 주위를 깊이 파 내었고
전체적으로 품기는 느낌이 너무 소박하여 부처의 모습보다는 승려의 모습 같은 느낌이 든다.













쌍계사 명부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3호

명부전은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의식이 행해지는 곳으로
지장전 시왕전으로도 불린다.
조선후기에 와 민간 신앙이 불교와 혼합이 되는 양식을 보여 주는 것으로
명부전에는 지옥의 중생을 구한다는 지장보살을 중심에 두고
그 좌우에는 죽은자의 잘 잘못을 따져 영혼이 가야 할 곳을 정해주는 명부의 10대 제왕을 모신 곳이다.
1687년 숙종13년에 성안대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1710년 신민대사에 의해 중수를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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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서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7호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일직손씨의 격재 손조서를 추모하기 위해
1753년에 서산서원으로 건립되었다.

격재 손조서는 조선시대 충,절,의 신하로
자는 인조 호는격재 휘는 조서 본관은 안동으로 안동 손씨라고도 한다.

벼슬은 통종대부호조참의, 집현전 학사등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로
이곳 밀양 용평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436년에 급제를 하여 사헌부 감찰 병조정랑
재임시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한직으로 물러났다.

그후 수양대군이 단종을 손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용평으로 낙향하여 용연정을 짓고 강학하였다.

그후 수양대군인 세조가 여러번 불렀으나 벼슬을 사양하며
이곳 용연정에서 세상과 문을 닫고 살았다.


그의 학덕은 점필재 김종직의 반열이요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이 스승으로 삼았던 격재선생.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으로
고종때와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면서
서원은 훼철되어 서산고택, 또는 철운재로 편액되었다..

지금 혜산서원에 들어서면
여타 밀양서원 예림서원등을 둘러 보아도 서원을 가르는 담장이 사실 없다.

그러나 혜산서원은 서원안의 건물을 담장으로 나누어 진 것을 볼 수 있다.
혜산서원은 전(田)자의 모양을 취하고 있다.
일반서원은 보통 일(一)자 형태로 교육과 제례의 배치를 하는데
혜산 서원은 북쪽에는 사당, 북동쪽에는 강당건물을 남서쪽에는 제수를 준비하는 전사청 남동쪽에는 서당으로 각각 구분을 하여 담장이 쳐져 있다.


당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한 조치로 보이며
서원이 아닌 재실과 가정집으로 위장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 진다.

1971년 옛 서원 터를 넓혀 중건한 후
각지역으로 흩어진 일직손씨 오현들을 한자리에 모셨다 한다.

현재 이곳에는 격재 선생의 문집책판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8호가 보관되어 있다.






































혜산서원의 600년 된 차나무

다죽리 혜산 서원 안에는 600년된 차나무 세그루가 있다 한다.
다죽리 인근인 엄광리에는 야생차밭이 있는데 그 유래를 보면
보두라는 중이 중국에서 가져와 차나무를 엄광사부근에 심었는데
그 차나무가 다죽리까지 번졌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일직손씨의 손관은 본관이 안동의 일직면으로
손관이 안동에서 밀양으로 세거지를 옮길 때 함께 가져 온 것으로 전해지는 국내에서는 보기드문 차나무이다.



혜산서원 앞의 차나무








찾아가는 길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밀양행 시외버스는 오전 7시부터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  1시간 소요. 부산역에서는 밀양행 열차가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 6시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10시20분등  많이 있다 밀양역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밀양시외버스터미널로 간다 .  밀양터미널에서 남명리 얼음골행 및 표충사행 어떤 버스를 타도 다원마을에 정차한다.
얼음골6시10분 9시35분 (직행)10시55분 7시05분 8시, 9시05분, 10시40분, 11시30분
표충사6시20분 9시10분 (직행)7시35분,8시45분 10시10분 11시20분
그리고 감물행 고례행 국전행 시내버스도 이용할 수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울산 언양 24번~금천리 용평~굴다리 통과~ 산외면 다원리 방향 우회전~산외면 사무소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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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자연의 생태계는 새끼를 낳아 키우는 계절인것 같다.
그래서인지 산길에서 산토끼가  등산로 상에 나와 있다가
나를 만나니 움직여야 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곰곰히 생각을 하며 
몸을 최대한 낯추며 숨기고 있다.
그리고  아직 어미한테 자기보다 큰 짐승에 대한 대처법을 배우지 못하였겠지만
그래도 습관적으로 몸을 최대한 낯추면서 몸을 숨길려고 하는 습성은 자연에서 배우는 것 같다. 







이번에 임도길에 만난는 것은 꿩새끼 인것 같은데 아마 새끼들 무리에서 이탈을 한 것 같다.
어미를 찾는다고 얼마나 울던지 얼른 어미가 나타나도록 자리를 비껴 주었지만...
그날밤을 잘 보냈는지 모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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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산정

(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칠산정. 세월 앞에 장사 없다. 문화재 관리의 현주소 밀양 칠산정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78호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미촌리 796번지

칠탄산 아래에는 두 재실이 있다.
칠탄정을 아랫재실 칠산정을 윗재실이라 구미마을에서는 부른다.

모두 손씨 집안의 재실이지만 칠탄정은 밀성손씨의 오한 손기양이 만년을 보내던 별업이고 칠산정은 일직손씨로 본관은 안동이다.

시조는 고려시대때 중국 송나라의 전란를 피해 우리나라로 귀화하였는데 원래 순씨였다 한다.
현종의 이름이 순이라 음이 같아 현종이 손으로 사성하였다.
현종때 개국공신으로 손응이며 그의 후손으로 충정왕때의 영의정인 ‘삼중대광판삼사사’ 정평공 손홍량이고 8세대인 격재공 손조서에와 일직손씨의 꽃을 피운다.
세종14년에 진사에 그리고 1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학사로 수양대군에게 단종이 폐위되면서 정치에 환멸을 느껴 낙향을 하게 된다.
그의 '두우시'에는 옛 단종을 그리워하며 ‘두견새도 나와 같아, 밤낮으로 끊임없이 우는구나’ 하며 신하는 두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며 세조가 이조참판에 재수함에도 거절을 하고 이곳 월연정 옆 용호정(밀양시 용평동 장선마을)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평생을 단종을 그리워하며 세상을 등지며 보냈다.
산외면 다원리 혜산서원에서 봉향을 하고 있다.











칠산정은 격재공의 13세손인 처사 손응룡의 묘하재숙소이다.
손응룡의 증손자 죽암 손건이 즉 7개의 골짜기와 7개의 능선이 합해지는 곳이라하여
칠산이라하며 일곱실이라고도 하는 이곳에
1863년 9월에 창건을 하여 모선재, 구호당이라 하였다.
1895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5세손인 손기형이 1906년에 중수 하여 칠산정이라 하였다.







근대 초기 밀양지방의 양반재실로 별업을 겸한 재각이다.
정당의 마루는 재회의 장소로 좌우 온돌방은 재관들의 거처로 제수마련은 방앗간채와 고직사에서 하였다.
청송루의 누각은 온돌방과 누마루를 넣어 전사청, 직방등의 기능을 하였다.

 




문화재로 지정된 칠산정도 세월 앞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피부로 느껴진다.
새로 올린 지붕(모양만 기와 모양)이 복원공사의 전부인지 모르지만 한복에 구두을 착용 한 것 처럼 엉성한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여기도 칠탄서원 처럼 대청마루에는 쥐생원들이 이집의 주인인양 쥐똥들이 즐비하고 청송루의 누마루는 음산한 기분 마저 든다.
언제까지 방치를 할런지 모르지만 지금 이상태라면 곧 또하나의 문화재가 사라질 판이다.
칠산정을 관리하였던 후손들의 기거한 건물의 모습은 칡덩굴에 집의 흔적만 보이고 땜질하듯 문화재 보수를 한후 관리를 하지 않으니 밑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전체적으로 관리를 하지 않는 문화재는 청도의 선암서원처럼 보수를 해 임대를 하여 고택체험이나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찾을 수 있고 훈기가 있는 곳으로 먼저 바꾸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그래야만 자연적인 파괴는 면할 수 있을 것 같다.





















찾아가는 길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밀양행 시외버스는 오전 7시부터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  1시간 소요. . 들머리인 단장면 미촌리 구미마을은 감물리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오전6시10분, 8시10분 11시50분, 구미교를 건너 우측 구미마을회관앞을 지나 마을 뒤 우측깊은 골짜기를 보고 따라간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울산 언양 24번~금곡인터체인지에서 단산마을로 내려서표충사 단장면 방향으로 내려선다. 금곡교를 건너 우회전하면 사촌마을~구미마을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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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도봉 정상아래의 경주이씨 묘지에서 본 전망으로 왼편 용의 날등처럼 울텅불텅한 바위능선이 구봉산의 아홉봉우리와 그 옆 피라미드형의 주봉인 천왕봉, 그 우측으로 복두봉 

(전북여행/진안여행)진안 명도봉 산행. 오고가는 것은 구름뿐, 햇빛도 반나절밖에 못보는 희안한 계곡을 아시나요-진안 명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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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두봉 우측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각우목재로 떨어졌다 다시 운장산 동봉을 세우고 주봉, 서봉이 성곽처럼 이루고 그 우측으로 연석산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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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일암 반일암 사무소 옆 주차장에서 주자천을 건너 산길은 이어진다. 원시림의 산길은 발아래 너덜길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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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중 만난 하늘말나리를 배경으로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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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비알의 산길에 산죽까지도 산행을 방해하고 더욱 취재산행을 힘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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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체만한 바위를 만나기도 하고 낙엽이 깔린 산길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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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다섯번째 댐의 규모와 최근의 가뭄으로 수량이 많이 줄어든 용담댐도 볼 수 있고  정상직전의 전망대에서 본 구봉산

진안 명도봉

정상은 황홀한 조망, 산밑은 시원한 계곡

운일암반일암(雲日巖半日巖).

뭣인고 하니 계곡 이름이다. 듣기에 따라 다소 해괴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 이름은 아마도 국내 계곡 이름 중 가장 길지 않나 싶다. 깎아지른 기암절벽을 휘감아 흐르는 냉천수는 곳곳에 크고작은 폭포와 소를 만들어 그야말로 대자연의 절경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장삼이사들에게 익히 알려진 마이산이 있는 전북 진안의 최북단인 주천면에 위치한 이 운일암반일암은 북으로 병풍을 두른 듯한 무명의 명덕봉(해발 846m)과 남쪽의 명도봉(해발 863m)에 의해 형성된 일종의 기나긴 협곡이다. 이 운일암반일암을 따라 운장산 북쪽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과 명도봉 및 명덕봉 골짝에서 흘러내리는 지류가 만나 주자천을 형성한 뒤 국내 다섯 번째 규모인 용담호를 거쳐 금강 상류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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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도봉 정상 인근 전망대에 서면 진안 일대의 웬만한 봉우리들이 죄다 확인될 정도로 조망이 환상적이다.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상어이빨처럼 날카롭게 돌기된 구봉산, 여성의 젖꼭지 모양의 암봉인 복두봉, 운장산 동봉 주봉 서봉 등 1000m급 고봉준령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www.kookje.co.kr

이름이 다소 독특하면 필히 사연이 있는 법.

예부터 깎아지른 절벽 밑으로 길이 없어 하늘과 돌, 나무만 있을 뿐 오가는 것은 구름밖에 없다는 뜻에서 운일암(雲日巖)으로 불렸고, 하루 중 햇빛을 반나절밖에 볼 수 없다 하여 반일암(半日巖)이라 명명됐다 전해온다. 또 다른 설도 들린다. 시집가는 새색시가 수십길 아래 깎아지른 절벽 위를 가자니 너무 겁이 나 울면서 기어갔다 하여 운일암, 공물을 지고 가던 관리가 이 길이 어찌나 험했던지 불과 얼마가지 못하고 해가 떨어진다 하여 '떨어질 운(隕)' 자를 써 운일암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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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전설로 유추해 보면 이 운일암반일암은 상당히 험하지만 절승에 다름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번 주 산행지는 운일암반일암을 들머리로 하는 명도봉. 산 자체는 평범하다. 하지만 정상에서 구봉산 운장산 복두봉은 물론 저멀리 덕유능선이 그려내는 산그리메는 일품이다. 구봉산 운장산은 들머리를 기준으로 한다면 운일암반일암에서 차로 각각 6~7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으며 진안읍내에 우뚝 선 마이산은 차로 10여 분 소요된다.

산행은 진안군 주천면 운일암반일암 관리사무소(주차장)~주자천~산죽길~능선안부~사거리~정상 직전 전망대~명도봉 정상~경주 이씨묘(전망대)~너덜길~도로(샬롬수양관 입구)~칠은교~팔각정(도덕정)~관리사무소. 날머리와 들머리의 거리는 1.8㎞. 이 구간을 포함해도 순수하게 걷는 시간은 3시간20분 정도.

운일암반일암 관리사무소 옆 주차장을 가로지르며 산행은 시작된다. 정면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명도봉이다. 민물고기 포획금지를 알리는 안내판 옆으로 난 계단을 내려가 주자천을 건너면 노란 원추리가 활짝 웃으며 뭇 객을 맞는다. 산으로 접어들면 주자천과 나란히 내달리는 오솔길을 만난다. 좌로 50m쯤 가면 우측으로 산죽길이 열려 있다. 본격 들머리다.

한마디로 아주 거친 낙엽 깔린 돌길 오르막이다. 돌도 고정돼 있지 않아 꽤 신경 쓰이고 바닥엔 이끼류가 널려 있다. 울창한 숲이 하늘을 가려 약간은 음침한 기분도 든다.

외길이라 길찾기는 어렵지 않다. 차츰차츰 오를수록 산죽과 넝쿨 칡뿌리 등이 뒤엉켜 무성한 원시림을 떠오르게 한다. 한 줄기 빛이 겨우 숲 바닥에 꽂힐 정도로 울창하다. 20분쯤 뒤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경사가 심해진다. 바닥도 한 보 내디디면 반 보 밀릴 정도로 미끄럽다. 이러한 구간은 능선 안부에 닿는 20분 정도 계속된다.

계속되는 급경사 오르막길. 숨고르기를 하라고 길이 순해지지만 그것도 잠시. 집채만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아 왼쪽으로 우회하면 지옥같은 낙엽길 된비알이 기다린다. 스틱을 이용해도 고통스러울 정도로 경사가 심하다. 다행히 5분이면 오르막은 끝나고 사거리에 닿는다. 정면은 또 다른 운일암반일암의 들머리인 명천여관 쪽에서 올라오는 길, 우측은 전망대. 전망대에 서면 발아래로 들머리와 운일암반일암을 기준으로 마주보고 있는 명덕봉이 우뚝 솟아 있다.


산행팀은 좌측으로 향한다. 한 굽이 올라서면 농짝만한 바위가 버티고 있어 다시 좌측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일순간 폭 꺼지며 수직 바위절벽 측면으로 내려섰다 올라선다. 주변이 온통 바위 전시장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바위들이 널려 있다. 바위 좌측으로 우회해 올라가면 이끼 낀 바위 아래 큰 굴이 보이고, 산길은 그 우측으로 꺾어진다.

이어 만나는 또 다른 굴 좌측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바위군이 엉켜있어 길이 없는 듯 보였으나 다행히 밧줄이 걸려 있어 큰 무리없이 의지해 오른다. 도중 어른 손바닥 크기의 두꺼비가 눈길을 붙잡는다. 산 자체가 습한 데다 햇빛마저 투과되지 못할 정도로 울창하다 보니 산중에 두꺼비가 살고 있는 듯하다. 두꺼비가 있으면 반드시 천적인 능구렁이가 있기 마련이니 참고하시길.

밧줄을 잡고 올라 6분이면 오르막은 끝이 나며 비로소 산행리본이 시야에 들어온다. 곧 우측으로 전망대가 하나 보인다. 나뭇가지 사이로 구봉산과 그 뒤로 덕유산, 발아래 주천면 소재지, 그 우측으로 유량은 줄었지만 용담호가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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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최고의 피서지로 손꼽히는 운일암반일암 계곡.

명도봉 정상은 전망대에서 6분이면 올라선다. 서울 사는 출향인들의 모임인 명도회가 2년 전 세운 조그만 정상석이 서 있지만 조망은 숲에 가려 아예 없다. 하지만 우측으로 약간 돌아 돌탑봉에서 남쪽 방향으로 내려서면 경주 이씨묘가 위치한 너른 전망대가 기다린다. 좌측에서부터 우측으로 상어이빨처럼 날카롭게 돌기된 구봉산과 그 주봉인 삼각뿔 모양의 천황봉(1002m), 여성의 젖꼭지 모양의 암봉인 복두봉(1018m), 운장산 동봉 주봉(1126m) 서봉, 그 우측 낮은 봉이 연석산(925m) 등 1000m급 연봉들이 마치 장벽을 이뤄 솟아 있다. 근래에 보기 드문 장관이다. 구봉산 뒤론 덕유능선이 희미하게 손에 잡힌다. 참고로 경주 이씨묘 우측 열린 길로 40m쯤 가면 또 다른 전망대를 만난다. 앞서 본 조망과 큰 차이는 없지만 이곳에 서면 명도봉에서 복두봉으로 이어지는 종주길이 확연히 보인다. 참고하시길.

이제 돌탑봉에서 날등을 따라 하산길로 내려선다. 산죽이 도열해 있는 사납고 드센 너덜길의 연속이다. 전체적으로 습한 산이라 미끄러워 자칫 방심하면 부상의 염려가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여기에 굵은 칡뿌리가 숲 바닥 여기저기 꼬여 널브러져 있고, 나무를 타고 내려온 덩굴줄기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어디선가 타잔이 '아~아아!'하고 나타날 분위기다.

30여 분 지루한 너덜길을 걸으면 갈림길. 왼쪽은 너덜길의 연속, 오른쪽은 능선길로 너덜이 끝나는가 싶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이렇게 28분이면 너덜이 끝나고 산죽길을 거쳐 7분 뒤 도로에 닿는다.

샬롬수양관 입구와 칠은교를 지나 우측으로 주자천을 따라 운일암반일암의 절경을 감상하며 걸으면 30분 뒤 관리사무소 앞 주차장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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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일암반일암 계곡에서 경관이 가장 빼어난 지점에 도덕정 정자가 하나 있다.

# 떠나기 전에

- 주자천, 고려 때 송나라 주자 종손이 다녀간 때문 명명

엄밀히 말하면 운일암반일암은 명도봉과 명덕봉이 이뤄놓은 계곡 내 비경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하지만 장삼이사들은 운일암반일암 계곡에 더 익숙하다.

운일암반일암으로 가는 도로변의 물길의 이름은 주자천. 마치 함양 용추계곡으로 불리는 곳이 실은 지우천이라는 진짜 이름을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주자천이라는 이 이름은 고려 때 송나라 주자의 종손인 주찬이 다녀갔다 하여 명명됐다고 전해온다. 지금도 인근 주천사에서는 주찬 선생을 추모하는 제사를 올린다.

관리사무소가 위치한 지점이 운일암반일암 관광지의 중간 지점에 해당되며, 도덕정이라는 팔각정이 위치한 지점이 운일암반일암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영덕 옥계계곡에서 가장 풍광이 빼어난 지점에 선비 손성을이 침수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듯이 말이다. 팔각정 주변에는 부처바위를 비롯 용소바위 족두리바위 등 집채 내지 농짝만한 기암괴석들이 깎아지른 절벽과 작은 폭포 그리고 울창한 수목과 어우러져 여러 폭의 한국화를 그려내고 있다. 짧은 산행과 더불어 계곡의 정취를 맘껏 느낄 수 있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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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일암반일암으로 오가는 도중 구봉산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 교통편

- 새로 생긴 익산장수 고속도로 진안IC로 나와야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대전통영 고속도로~(장수분기점에서)익산장수 고속도로 진안IC~무주 진안 30번 우회전~용담 795번 지방도 직진~용담 군청 군의회 방향 직진~진안군청 지나~(진안사거리에서)금산 용담 795번 좌회전~금산 용담댐 운일암반일암 우회전~금산 주천 운일암반일암~동상 운일암반일암 55번 좌회전~운일암반일암 관리사무소 앞 주차장. 익산장수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진안 마이산의 모습을 오롯이 볼 수 있다. 대중교통편은 당일치기로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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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도봉 정상임을 알리는 정상석과  복두봉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이 있는 경주이씨묘, 돌탑뒤로 내려서는 칠은이골 방향으로 하산길이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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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로 발아래 너덜길이 이어지고 타잔이라도 금방 나올 것 같은 원시림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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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일암 반일암 계곡
문의=국제신문 산행팀 (051)500-5168
사진=이창우 산행대장 www.yahoe.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글=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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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산 흥국사

☞(부산여행/강서구여행)월명산 흥국사. 김수로왕과 허왕후가 폐백을 올렸다는 사찰 월명산 흥국사 찾아가기


월명산은 보배산과 마병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에 지능선을 여럿 두고 있다.
명동 마을로 내려서는 능선에 솟은 작은 봉우리이며 보배산은 보개산으로도 알려져 있다.
부산 강서구와 창원시를 경계하며 옛날 보배산에서 보물이 나왔다한다.

산마다 전설이 없는 산이 없듯이 여기 보배산에도 허왕후에 관한 전설이 숨겨져 있는 산이다. 
강서구 지사동 명동마을의 골짜기를 타고 오르면 월명산 흥국사란 작은 사찰을 만나게 된다.










천태종의 이 사찰은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전설이 전해 오는 사찰로 명월사의 옛 터로 보고 있다.
1706년 증원의 ‘월명산흥국사사적비문’를 보면 김수로왕이 48년에 명월산 밑에서 친히 왕후 허씨를 맞이하여 환궁을 하였는데 허왕후는 입고 온 비단바지를 벗어 이산의 산신에게 바쳤다 하며 김수로왕과 허왕후가 이산에서 폐백을 올렸다 한다.
왕은 허왕후의 아름다움을 달에 비유하여 이산을 월명산으로 칭하였다.

 











가락국 태조왕 양후 유허비


흥국사에는 칠성각 건립 때 출토된 사왕석1개가 있는데
중앙에는 앉아 있는 부처님의 모습하며
그 좌우로 코부라뱀이 부조가 되어 있다. 이를 사왕석이라 한다.
열반에 든 부처를 보호한다는 뜻이란다. 

우리나라 불교 조각에서는 유래가
없는 조각품으로
인도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증거로 보고 있다.








흥국사를 들어가는 길은 큰 산으로 들어서는 착각이 든다,
우거진 숲속에 자리잡은 흥국사는 최근에 창건되어 깨끗한 절의 이미지를 하고 있다.
규모 또한 작지만 사찰의 면모를 갖추고 부처님의 도량으로 법통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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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말양 아리랑길 금시당 산책로. 숲길이 아주 인상적인 옛날 학교 등굣길 밀양 금시당 산책로


길...

길은 무엇일까?.

우리들의 삶의 흔적일까.

우리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땅 바닥을 기다가 어느듯 걷기에 익숙해지면 집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때부터 길과 익숙해지며 살아가는 것 같다.
골목길을 벗어나면 찻 길등 많은 길 속에서도 우리들 마음속에 담고 있는 오래된 옛길은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다. 






중년층의 연령대는 학교 갈 때 책보따리 허리춤에 묶고 동네 친구들과 갱빈 길을 뛰어 가던 학교길을 생각할 것이며 지금 세대는 포장된 시멘트길 위에서 걷던 길만 생각할 것이다.
밀양시 산외면사무소에서 만난 아무게씨는 지금이야 교통편이 수월해져 버스나 승용차를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지만 근무초에는 2시간의 출퇴근길을 걸어 다녔다고 한다.
한여름에는 땡볕의 농로길을 지나 금시당에서 용두목까지 이어지는 길을 이야기 할때는 엄지 손각락을 치켜세우며 그때를 회상하며 묘한 웃음도 지어보인다.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의 길이 되어 버린 이길. 또한 단장면 미촌리와 활성동 구서원의 학생들이 밀양의 등굣길로 이용하던 이길, 이 길 도 어느듯 학생들의 등굣길도 끊어져 버리고 출퇴근길도 사라지고 밀양장날의 보따리 장날길도 이용하지 않으니 자연적으로 길의 생명을 다하고 묻혀 버린 길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둘레 길의 붐을 타고 많은 길들이 살아나고 있다.
금시당에서 용두목을 지나 가곡동으로 이어지던 이길도 산책길이란 명목으로 다듬어져 아름다운 길로 탄생한 것이다.
밀양강을 끼고 걸어가던 이 길은 한 때는 학생들의 재잘거림이.
어머니, 할머니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삶의 고단한 길이 지금은 한가족이 오순도순 정답게 이야기를 하면서 걸을 수 있는 길로 탈바꿈하였다.
총 길이는 1.8km이며 밀양강으로 불어 오는 시원한 강바람이 그만이다.



밀양시 가곡동 용두목에서 출발하는 이길은 팔각정이 있고
산성산 오름길과 금시당 산책길로 갈라진다.


산림욕장 안내도가 서 있고
 밀양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길을 확인 할 수 있다.



금시당 1.8km
이정표를 뒤로 하고
좌측길로 들어서면
갈림길과 만난다.


숲과 강의 어울림,
금시당 산책로 가는 길이란
 안내판에서 왼쪽 계단을 내려가보자. 


계단에서 본 밀양강과
신대구부산고속도로의 신길이 밀양강을 가르지르고 있다.
그 뒤로 밀양시내에서 바라보면 한일자로 보인다하여
일자봉으로 불리는 산성산이
용두목으로 길게 내려 오고 있다.


용두목 취입보

일제 강점기때 건설된 용두목 취입보로
비록 일본인의 구상과 설계로 건설된 것이지만
아직도 그목적 그대로 100년 이상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인상 깊은 곳이다.
 이 관개시설은 1909년 일본인 마쓰시타 데이지로가 구상해서 만들어낸 자연유화식 인공 터널 수로다. 밀양강에 보를 만들고 용두산 아래로 암반의 터널을 뚫어 물길을 낸 다음 
밀양강 건너편 종남산 아래 마을 까지 수로를 만들어
상남면 일대 예림리 등 4개 마을 592㏊의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에서 건설된 것이다. 
현재도 이 수로는 이들 지역의 농사를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고 한다.
전체 수로의 길이는 6438m이고 산 아래를 관통하는 터널의 길이만 433m에 달한다.

 


취입보를 내려가서 보는
용두산의 모습과
그 아래 흘러가는 용두연의 검푸른 모습에
등골이 오싹한다.


용두보의 모습으로 상남면 일대의 높은 지대에다
물을 대기 위한 보로 작은 폭포를 보는 것 같다.
떨어지는 물소리가 시원한 여름의 땀을 식혀 주기에 충분하다.





본격적인 금시당 산책길로 들어서보자
키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따가운 햇볕도 감히 침투하지 못할 
그늘이 있는 옛길이다.


 


10년
아니면
100년
아니 그 이전 부터
우리와 함께한 이길









산책길을 걷던 꾼들은
신대구 고속도로가 아름다운 이길을 반감시겼다며 흥분을 하였다.
아름다운 이길이 고속도로 밑에서 잘려져 변형이 되어 있었다


 


밀양강에는 작은 모래섬들이 여럿있다.
그중에서 하나인 암새들이라 부르는 이섬도
북천과 동천에서 흘러 내려온 토사들이
모여 작은 섬을 만드니
 암소들이라 부르는 이섬에는 한때 습지가 많았는데
사라호 태풍때 그 습지가 모두 메워졌다 한다.
용두산 용두암의 암자와 모랫섬에 소가 많아서 암소들,
암새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암새들 뒤로는 추화산과 화악산의 모습이 확인된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의 모습으로
이 고속도로가 용두산의 능선을 관통하여
부산으로 향해 달려간다.


용두산과 용두목 천경사의 모습이다.
길게 목을 뺀 용두암이 용두연으로 머리를 쳐 박고 물을 먹고 있는 것일까?.


아름다운 이길을 따라가보자
시누대가 사각사각 바람에 살랑이고
발아레 이름모를 꽃들이 다투어 피어 있고
숲속의 산새가 합창을 하고 있다.


















금시당건물이 보이고 옛길도 이제는 막바지이다.
금시당은 여주이씨 이광진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낙향하여 있는 것을 현재 자신의 처신이 옳았다 하여 금시당으로 편액하였다.


금시당 입구
큰소나무가 장관인 소나무 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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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탄서원(七灘書院)

☞(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단장면 칠탄서원. 문화재라며 밀양관광책자에 나오는 칠탄서원이 흉가수준이라니...


밀양, 청도를 여행하다 보면은 많은 문화재와 만나게 된다.
유형문화재 또는 문화재자료란 이름으로 지정이 되어 있어 큰 기대를 하고 찾아간다.
기대를 하고 간 만큼 우리의 고가들을 보고 오는 기쁨 또한 매우 크다.

청도 신지리의 만화정, 운강고택, 선암서원, 삼족대등과 밀양의 오연정 월연정 금시당등 선조들의 풍류를 느끼면서 찾아가는 재미 또한 솔솔하여 만족을 하고 돌아 온다.
어떠한 경우에는 안을 들어 갈 수가 없어 까치발을 들고 고택을 보는 것으로 만족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잘 정돈되고 관리가 되고 있는 문화재를 보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 올 수가 있었다.





밀양의 칠탄정을 찾아가는 길은 보통의 문화재 가는 길과 다르다.
단장천이 앞을 막고 있어 구서원이 있는 활성2교 다리를 건너야만 찾아 갈 수 있다.
구역은 단장면에 속하지만 단장면에서는 들어갈 방법이 애매하다.
넓은 동천(칠리탄)을 도강하던지 아니면 구미마을의 안법천을 신을 벗고 건너 가야 칠탄서원으로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 마을어른들의 이야기로는 밀양읍내나 학생들의 동굣길도 모두 이길을 따라 칠탄정을 거쳐 활성동의 살내 ~금시당 옛길을 따라 밀양으로 갔다하는데 지금은 인걸도 간데없고 옛길도 사라지고 고가 또한 흉가로 방치되고 있어니 찾아간 나로서는 황당하면서 마음이 아프다.
 


밀양시에서 발행하는 관광홍보 책자인 밀양여행 46P에 문화제자료 제72호 칠탄서원과 혜산서원이 함께 나와 있는데 관리 상태는 천차이다.
칠탄서원은 밀성손씨의 오한 손기양(1559~1617)이 임진왜란때 석동산(지금의 운문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웠서며 만년에는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학문을 가르쳤던 곳이다.
1725년에 그의 후손들이 다시 중건 하여 진암서당으로 고쳐부르다가 1844년에 청절사를 지어 손기양의 위폐를 모시고 칠탄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때와 서원 철폐령에 의해 서원은 헐려 버리고 1914년에 다시 건물을 올렸다.

 
‘ㅁ'형태의 건물로 묘우 앞에 정면 5칸인 팔작지붕의 강당이 있다.
좌우로 1칸씩 방을 넣었고 중앙의 3칸은 마루를 넣었다. 강당앞에는 좌우로 누각 형식의 동,서재가 있고 정문역시 문루를 통해 드나들게 하였다.
사실 칠탄 서원 앞을 흐르는 강은 밀양강의 지류로 동천이라 부른다.
엄연이 말하면 구미마을에서는 이곳만 잘라 칠리탄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단장리 앞의 경주산에서 두 물길이 서로 만난다.
산내천과 단장천이 서로 만나 칠리를 흐르면서 여울을 만드는데 그야 말로 아름다운 곳으로 칠리탄이라 하며 칠탄서원이 칠탄산 자락에 숨은 듯 자리 하고 있다.



칠탄서원을 찾아가면 문화재 관리 실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4동의 건물이 곳 허물어 지기 일보 직전이며 천장으로 다닌 쥐때문에 마루마다 까만 쥐똥들이 천지이며 방문과 대청을 닫고 있는 문짝들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들렁거리고 허리까지 자란 잡풀로 인해 이곳이 문화재가 되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하지만 엄연히 문화재란 안내판이 붙어 있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아마 남량특집극 전설의 고향 촬영 섭외장소로 이용하면 딱인데...









































찾아가는 길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밀양행 시외버스는 오전 7시부터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 주말에는 오전 9시40분과 오전 10시20분에도 있다. 1시간 소요. . 들머리인 산외면 활성2동은 밀양터미널에서 남명리 얼음골행 및 표충사행 어떤 버스를 타도 다원마을에 정차한다.
얼음골6시10분 9시35분 (직행)10시55분 7시05분 8시, 9시05분, 10시40분, 11시30분
표충사6시20분 9시10분 (직행)7시35분,8시45분 10시10분 11시20분
그리고 감물행 고례행 국전행 시내버스도 이용할 수 있다.
다원정류장에선 하차한 후 버스진행 방향으로 직진하면 '율전 구서원 또는 리더스CC'를 가리키는 팻말을 따라가면 된다. 20분쯤 걸린다. 구서원 입구 활성2교 다리를 건너 리더스cc 입간판에서 왼쪽 동천을 따라가는 산길이 열려 맀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울산 언양 24번~금천리 용평~굴다리 통과~(이후 리더스CC 팻말 따라 가면 됨)~금천리 남기리 용평 방향 좌회전~신동국밥, 금천마트 지나~화동 표지석~용평 용활 방향 좌회전~동천변 활성2교 부근에 주차를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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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산외면 죽원재사. 밀양시 옛고을 다원리 오한 손기양의 죽원재사를 찾아서...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다원마을은 손씨 집안의 고택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모두 한집안의 후손들이 일가를 이루어 살고 있는 줄 알고 있지만 마을을 찾아가면 두 손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외면사무소를 기준으로 하여 죽동과 죽서로 나누는데 왼쪽은 환경부장관을 지낸 손숙씨의 고향인 일직손씨 집성촌이 혜산서원을 매개로 하여 이루고 있으며 오른쪽인 다원2리는 조선조 초기에 생원 손겸재가 입촌한후 죽원재사의 오한 손기양의 후손인 밀성손씨가 세거를 이루고 있다.

이곳 죽포정사는 산외면 사무소 뒤 평전산 아래에 있는 오한 손기양의 재실로 5대손인 죽포 손사익에 의해 1753년에 건립되었다. 치재소인 죽원재사와 죽포 손사익의 죽포정사가 각각 보존되어 있다. 이곳 죽원재사도 건립된후 세월의 흔적을 지울 수 없어 황폐화 되어 오다가 1956년에 다시 중수를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한다.












백송

































모당천

예전에는 죽원재사를 가기위해서는 모당천을 거쳐 갔는데 이 모당천도 재미 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중국 원나라때 난리를 피해 이곳까지 피신을 온 모씨와 당씨가 식수를 구하기 위해 팠던 샘으로 모당샘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다죽리에는 모씨와 당씨는 한명도 거주를 하지 않으며 국내의 당씨성을 가진 사람들중 밀양이 본관인 사람들은 처음 이마을에 온 당씨들의 후손이라 한다.



찾아가는 길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밀양행 시외버스는 오전 7시부터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  1시간 소요. 부산역에서는 밀양행 열차가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 6시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10시20분등  많이 있다 밀양역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밀양시외버스터미널로 간다 .  밀양터미널에서 남명리 얼음골행 및 표충사행 어떤 버스를 타도 다원마을에 정차한다.
얼음골6시10분 9시35분 (직행)10시55분 7시05분 8시, 9시05분, 10시40분, 11시30분
표충사6시20분 9시10분 (직행)7시35분,8시45분 10시10분 11시20분
그리고 감물행 고례행 국전행 시내버스도 이용할 수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울산 언양 24번~금천리 용평~굴다리 통과~ 산외면 다원리 방향 우회전~산외면 사무소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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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활성동 영원사지. 밀양 용두산의 잠자는 용을 깨우기 위해 세운 사찰  영원사지


영원사지

밀양시 활성동 구서원마을에는 요즘 많은 차량들이 들락거린다. 구서원 골짜기 안의 절골과 부도골을 까뭉게고 현재는 리더스란 골프장이 들어서서 많은 차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옛것과 현재의 만남이랄까.

이 골짜기는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을 배향하기 위해 절을 폐한 그 터에다 1567년에 부사이경우가 이곳에다 덕성서원을 창건하였다. 퇴계이황의 점필서원이란 현판 글씨를 걸고 강학하던 장소로 1637년인 인조15년에 운례촌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상남면 예림동 예림서원으로 옮겨 배향을 하고 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서원이 떠난 옛 서원 자리라 하여 구서원 또는 구손. 덕성동으로 불린다. 





영원사지는 칠탄산과 일자산인 산성산 즉 자씨산 아래에 자리를 잡았던 사찰로 자씨산의 형국이 용이 엎드려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자씨산 아래에 절을 세워 잠자는 용을 깨우기 위해서 창건을 하였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초기로 보고 있으며 고려 말에 대학자인 익재이재현의 익재집에 ‘조계종 자씨산 영원사 보감국사비명서’에 그 기록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때의 석불좌상3구와 부도탑의 귀부와 이수를 1974년 부도골에서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옛 영원사에는 선조루란 누각이 있었고 사찰의 영화는 온데 간 데 없고 지금은 산사면을 파내어 골프장이 들어서 그때의 영원사를 기억하는지 모를 일이다....

지난주 일주일 상간으로 두번이나 찾아 갔는데 하루는 잡초가 무성한 상태로 관리가 되어 있었고 재차 방문때는 잡초가 깨끗하게 제거되어 있어 내마음도 이발을 한양 가볍게 돌아 올 수 있었다.



영원사지 보감국사 묘응탑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호

경상남도 밀양시 활성동

보감국사는 1313년에 고려 충숙왕 이 왕위에 오르자 왕사로 책봉되었다. 그 후 2년 뒤 물러나 영원사로 들어와 주석하였다.
송림사에서 입적을 하였는데 보감국사는 수도승의 최고경지인 좌탈입망인 앉은자세로 입적을 하였다한다.
현재는 거북모양에 용의 머리를 올린 귀부와 용이 서로 엉켜 있는 이수만 남아 잇고 그의 행적을 기록한 비신은 행방을 알 수 없다.
밀양읍지에는 보감국사 비문은 이제현이 지었고 그의 속명은 김혼구(1250~1322)로 보각국사 일련의 제자였다.








영원사지 보감국사 부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호

사찰의 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관하는 곳이고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보관하는 곳은 부도라 한다.
여기 영원사지의 부도는 고려시대 보감국사의 부도로 현재는 몸체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지만 각 부재들이 8각으로 처리하며 통일 신라 시대 양식을 취하고 있다 하겠다.
남아 있는 받침대는 상중하대로 상대는 연꽃잎 여덟장이 겹쳐저 하늘로 향해 조각되어 있고 중대는 복잡하게 소용돌이치는 구름문양이 돌려져 있다.
하대는 팔각으로 돌려 코끼리의 눈을 형상화한 안상을 새겨 넣었다.
그 위를 덮은 지붕돌은 기왓골과 막새기와까지 나타낸 정교한 조각품으로 통일신라 말기를 계승한 고려시대 부도이다.
































찾아가는 길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밀양행 시외버스는 오전 7시부터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 주말에는 오전 9시40분과 오전 10시20분에도 있다. 1시간 소요. . 들머리인 산외면 활성2동은 밀양터미널에서 남명리 얼음골행 및 표충사행 어떤 버스를 타도 다원마을에 정차한다.
얼음골6시10분 9시35분 (직행)10시55분 7시05분 8시, 9시05분, 10시40분, 11시30분
표충사6시20분 9시10분 (직행)7시35분,8시45분 10시10분 11시20분
그리고 감물행 고례행 국전행 시내버스도 이용할 수 있다.
다원정류장에선 하차한 후 버스진행 방향으로 직진하면 '율전 구서원 또는 리더스CC'를 가리키는 팻말을 따라가면 된다. 20분쯤 걸린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울산 언양 24번~금천리 용평~굴다리 통과~(이후 리더스CC 팻말 따라 가면 됨)~금천리 남기리 용평 방향 좌회전~신동국밥, 금천마트 지나~화동 표지석~용평 용활 방향 좌회전~동천변 활성2교를 건너 골프장 가든을 지나 갈린길에서 마을 안길인 우측길을 따라 활성2통 마을회관을 지나면 대추밭에 부도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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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아리랑길 추화산 둘레길. 밀양의 옛이름 추화군의 추화산 둘레길을 걸어보니


밀양의 진산은 북으로 감싸고 청도와 경계를 잇는 화악산이요, 안산은 남산으로 불리는 종남산을 말한다. 이 외에도 밀양을 대표하는 산으로는 여럿 있다.
가지산, 운문산, 천황산, 재약산등 1000m를 넘는 이른바 영남알프스를 이루는 영남의 지붕하며 그 줄기에서 뻗어 나온 만어산, 정각산, 구만산등 수많은 봉우리들이 밀양을 이야기할 때 대표라 하며 언급된다. 그러나 밀양을 대표하는 산은 정녕 어디 일까?.





1000m 넘는 산도 아니요. 영남알프스에 언급되는 산도 아닌 아주 작은 밀양시내의 한 봉우리에 불과한 추화산이지 않나 싶다.
밀양은 ‘삼국지위서동이전’에 수록된 내용을 보면 변진24개국으로 ‘미리미동국’이라는 작은 부족국가에서 시작을 하였다.
변한으로 가락국에 속해 있던 것을 505년 지증왕 6년에 신라에 병합되어 추화군으로 되었다한다.
그 추화군의 시초가 이곳 추화산에서 나왔다하니 밀양을 대표하는 종산이 아닐까.
200m를 조금 넘는 높이는 사실 등산이란 이름은 무색하고 요즘 열풍을 일으키는 둘레길로 이야기를 하면 간단하게 오를 수 있는 길이다.




추화산을 걷는 길은 여러곳이 있지만 밀양 화장장 뒤에서 둘레길을 시작하였다.
넓은 길을 따라 발걸음을 떼면 좌측으로 자두와 대추나무 과수원이 있고 사거리 고개에 올라선다. 이 고개마루에는 큰 모과나무가 당당히 서 있는데 그의 모습이 아주 특이하다.
여러개의 줄기가 서로 붙어 하나의 줄기로 자라고 있어 신기할 따름이다.

이곳을 지나면 독립투사 전홍표의 묘가 왼쪽으로 갈라지고 봉수대 가는 길은 직진한다.
잘 자란 소나무와 넓은 산길은 마치 우리를 수목원의 한 길을 걷는 기분 까지 들게하며 슬렁슬렁 한굽이를 오르면 사거리 갈림길과 만난다. 추화산 산허리를 도는 길이 좌우로 열려 있다.
봉수대는 직진을 하면 작은 고추가 맵다고 둘레길은 곧추선듯 갈지자로 이어진다.
추화산을 대표하는 짧은 순간이지만 구절양장길을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산성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의 둔덕을 올라서면 정면에 돌을 쌓아 올린 추화산 봉수대와 만난다.












옛날에는 통신방법의 하나로 사용을 하였던 것으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봉화를 올려 신호를 전했는데 여기서 추화산이란 이름이 나왔다. 추화산 성은 봉수대를 감싸며 정상일대에 쌓아 올린 가야시대의 산성이다.

한때는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로 신라와 가야가 접경을 이루고 그 이후에는 신라와 백제, 후백제와 고려가 시대를 달리하며 서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돌과 흙을 혼합하였고 이 성벽의 둘레는 약1.4km이며 동,서,남쪽 세군대에 성문을 설치하고 북쪽내려가는 계곡에는 우물과 연못 및 부속건물을 두었는데 현재 우물한개가 복원이 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성황사는 추화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산성의 부속건물로서 두분을 성황신으로 모시고 있는데 박욱은 나말여초에 군도를 토벌하여 태조가 고려를 건국할 때 삼한벽공장군이 되었다.
또한 손긍훈도 고려태조의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사도를 추증하고 광리군으로 봉하였다 하여 이 두분를 사당의 신으로 모섰다 한다.

다시 둘레길로 돌아와 봉수대에서 바라보는 밀양시가지는 산성산에서 내려오는 용의 모습과 삼문동을 섬으로 만들며 흘러가는 밀양강의 운치하며 크고 작은 산들이 좍~ 펼쳐진다.
1.4km의 산성 둘레길도 함 걸어보자. 발아래 성벽을 밟으며 걷는 이 길은 어느 둘레길 보다도 편안하며 우거진 숲속에 불어오는 강바람에 더운줄도 모르고 걸을 수 있는 호젓한 산책길이다.
둘레길은 영천암으로 내려서는 포장길을 따라 영천암의 물맛을 보고 중국에서 들어온 범종을 둘러보며 재사고개를 거쳐 충혼탑으로 내려서면 간단하지만 여운이 남는 걷기를 할 수 있다.



























재사고개는 교동의 충혼탑에서 범북으로 넘던 옛길로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 올라가는 영남대로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에서도 주막껄등 그당시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유적의 흔적을 찾았다한다. 이곳 재사고개는 장삿꾼이나 과객등 많은 사람들이 다닌길로 내려오는 이야기 한토막이 있다.

한겨울 자정이 지나 소금장수가 소금을 지게에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이곳 고개로 올라오더니 지게을 내리고 쉬는게 아닌가. 땀을 딱으며 한숨을 돌린후 다시 청도장으로 가기 위해 지게를 지는데 소금장수는 너무 피곤해서인지 지게에 기댄체 선잠에 들고 마는게 아닌가.

그런데 반대편에서 백발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헐레벌떡 뛰어 이곳에 올라오며 가뿐 숨을 몰아쉬는데 그때 꼬끼요~~~하면서 닭울음소리가 들리는게 아닌가. 노인은 한숨만 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않으며 탄식을 하는데 소금장수가 그 연유를 물어니 노인은 자초지종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은 오늘이 자기 재삿날인데 만주에서 이곳까지만 오면 닭이 울어 재삿날에 음복을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하며 자신이 이곳 밀양에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 만주로 가면 조금 나을까 싶어 식솔을 대리고 만주로 이주를 했는데 그만 병이 들어 죽게 되었고 식솔들은 자신을 만주에다 묻어두고 다시 밀양땅으로 내려간이야기등을 들려 주었다.

자식들이 이곳 고개에서 라도 재사를 지내주면 음복이라도 하고 돌아 갈 수 있는데 하며 한탄을 하는게 아닌가. 소금장수는 마을에서 수소문을 하여 찾아가니 지난밤에 부친의 재삿날이라하며 만주에서 돌아가신 이야기를 하는게 아닌가.
지난밤의 이야기를 자식에게 들여주니 그 다음부터 음식을 만들어 이곳 고개에서 재사를 지냈다하여 재사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하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이일대가 공동묘지로 되어 있어 그 이야기와 맞아 들어가는 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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