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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석탑과 석등,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가지산의 국보 문화재인 보림사 석탑과 석등

 

장흥의 보림사에는 국보급 문화재가 두 점 있습니다. 대적광전앞에 세워진 두기의 삼층석탑과 석등은 국보 44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 뒤 대적광전 안에는 철조비로자나불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이 또한 국보 제117호로 지정되어 불국사와 화엄사 부석사와 함께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어 문화재 보유 사찰의 4대 천왕이라 합니다. 보림사로 들어서면 정면에 눈에 확 꼿히는게 있습니다 . 남북으로 나열된 삼층석탑과 그 사이에 자리잡은 석등입니다.

 

 

 



 

두기의 삼층 석탑은 크기와 구조가 똑 같은 쌍둥이 탑이며 2단으로 기단을 쌓은 뒤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놓았습니다. 그 위에 노반의 머리 장식을 얹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입니다. 2단의 기단은 위층이 높고 반면에 아래층은 아주 낮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위층 기단의 맨 윗돌은 매우 얇습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깎아 쌓았고 각층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습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의 계단형으로 되어 있고 처마는 기단의 맨 윗돌과 같이 얇고 평평합니다. 지붕돌의 네귀퉁이는 심하게 들려 있고 탑의 꼭대기인 머리장식들은 차례대로 올려놓았습니다.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석탑과 석등,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석등의 의미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세상을 밝게 비추는 보림사 석탑과 석등

 

그럼 보림사 석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불교에선 석등의 의미가 너무나 큰 것 같습니다. 단지 불을 밝힌다는 그런 의미보다는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지혜와 가르침이 등불과 같아서 세상의 어둠과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밝혀주는 역할을 의미합니다. 그럼 보림사 석탑 사이에 있는 석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대적광전 앞에서 불을 밝혀 보림사 경내를 환히 비추어 줄 것 같은 보림사 석등도 석탑과 함께 국보 제44호입니다. 전형적인 신라시대 석등의 기법으로 네모꼴의 바닥돌에 연꽃무늬를 새긴 8각의 아래받침돌을 올렸습니다.

 

 

 

 

 

 

그 위에다 가늘고 긴 석주를 세우고 화사석을 받쳐주는 윗받침돌을 얹어습니다.다. 화사석은 8각으로 네면에다 창을 넣고 그 위로 다시 지붕돌을 올려 화사석을 덮었는데 각모서리 끝 부분에 꽃장식을 하였습니다. 석등의 지붕돌 위에도 여러 장식이 놓여 져 있습니다, 현재 보림사 경내에 남아 있는 석탑과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까지도 완벽하게 남아 있는 예는 드물어 불교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합니다. 탑속에서 나온 기록을 보면 석탑과 석등이 통일신라시대 경문왕 10년(870년)때쯤 만들어 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석탑과 석등, 철조비로자나불좌상.철조불상 중 가장 먼저 만든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림사의 석탑과 석등을 둘러 보고 대적광전앞으로 갑니다. 보림사의 전각은 중수과정을 거쳐오다 6.25 한국전쟁으로 전소하고 맙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조계산 송광사의 말사로 860년(헌안왕4년) 보조체징이 작은 암자를 크게 짓고 시작한 보림사는 통일신라시대에는 구산선문중 가지산파의 근본도량이 됩니다. 인도가지산 보림사와 중국 가지산 보림사와 함께 동양의 3보림으로 불려지는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는 대적광전의 꽃무늬 문살 문양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보림사 대적광전 안에 모셔진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철로 만든 불상입니다. 제작당시에는 불상을 올려둔 대좌와 불상 뒤를 두른 광배가 함께 있었다 합니다만 지금은 그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불상의 왼팔 뒤쪽으로 신라 헌안왕2년(858년) 무주장사(현재 광주와 장흥)의 부관인 김수종이 시주로 만들게 되어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라불좌상은 신라말부터 고려로 넘어오는 과정에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중에서 가장 먼저 만든 점에 주목 할 만합니다. (참고:문화재청 홈페이지)

 

 

 

 

 

 

 

 

 

 

 

 

 

 

 

 

 

 

 


 

2014/02/08 -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국내 모든 사천왕상의 표준 모델이 된다는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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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경북여행/구미여행)태조산 도리사. 신라 최초의 사찰 냉산 도리사 여행하기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에는 고려 왕건의 전설이 서려 있는 태조산이 있습니다. 태조산을 냉산으로도 부릅니다. 이곳 태조산 7부 능선에 해동최초가람 태조산 성지 도리사가 있습니다. 천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신라 최초라는 가람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도리사를 보고 왔습니다.

 

 

 

 

경주 불국사 부산 범어사, 양산 통도사 김천 직지사 등 이름만으로도 쟁쟁한 사찰이 이곳 도리사에서는 고개를 숙입니다. 도리사는 신라 눌지왕(417년)때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가 일찍 전래 되었지만 삼국 중에 유일하게 신라만 불교의 박해가 심하여 전파되지 않아 아도화상이 신라 포교를 위해 국경을 넘어 오게 됩니다.

 

 

 

 

아도화상은 선산 도개면에 있는 모례의 집 지하를 파고 굴실을 지어 거처하게 됩니다. 그럼 아도화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아도는 중국 위나라 아굴마의 아들로 묵호자라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고구려 사람으로 고도령입니다. 중국에서 사신으로 온 아굴마와 연정이 깊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아도입니다.

 

 



 

 

아도가 5살이 되며 출가를 시켰고 16세에 어머니가 출가한 아도화상을 찾아와 모든 사연을 이야기하며 아버지가 있는 중국으로 보내게 됩니다. 아버지 아굴마를 만나고는 현창화상의 문하에 들어가 3년간 수행한 후 고구려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나 어머니 고도령은 아들인 아도를 다시 신라 땅으로 보냅니다. 저는 아도화상의 어머님을 보고 맹자의 맹모삼천지교가 생각납니다. 그 만큼 그어머니에 그 아들인것 같습니다. 아도가 신라 땅인 선산 모례의 토굴에서 생활하게 된 과정으로 그는 이곳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합니다.

 

 

 

 

선산군 도개면 도개동의 우곡마을에서 낮에는 소와 양을 기르고 밤에는 마을 사람에게 부처님의 진리를 설하며 지냅니다. 그 후 모례장자의 시주로 절을 세우고 경주(서라벌)를 댕겨 오다 태조산 아래 세운 절에서 엄동설한의 겨울인데도 복사꽃과 오얏꽃이 광채를 발하며 만발한 것을 보고 도리사라 하였습니다.

 

 

 

 

이게 신라 사찰의 기원이 되며 그 아래 마을을 도개마을이라 했습니다. 지금도 이곳에는 그 당시의 전설 같은 지명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도가 소와 양을 천마리 길렀던 ‘양천골. ’우천골‘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고 도개동의 윗마을은 외양간이 있었다하여 ’우실‘ 모례장자의 집터는 ’모례장자 터‘ 그리고 우물인 ’모래장자 샘‘이 현재에도 남아 있습니다.

 

 

 

 

신라 최초의 가람인 도리사에는 최초의 수식어답게 국보 한 점이 나왔습니다. 1976년 세존진신사리탑을 보수 복원하던중 금동육각사리함(국보제208호)과 부처님 진신사리 1과가 나왔습니다. 그 사리는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래할 때 모셔온 사리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은 적멸보궁 뒤 금강계단에 모시고 있습니다. 그때 출현된 금동육각사리함은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위탁 보관되어 있습니다.

 

 

 

 

도리사에서 꼭 보고 와야 할 곳이 있습니다.도리사 주차장 앞에는 서대 안내판이 붙어 있습니다. 이곳을 100여m 돌아가면 도리사 최고의 전망대를 볼 수 있습니다. 해평면과 구미의 진산 금오산과 그 앞을 휘감듯이 흘러가는 낙동강이 너무 편안한 모습으로 빛을 받아 반짝입니다. 그럼 도리사의 문화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경북여행/구미여행)태조산 도리사. 신라 최초의 사찰 냉산 도리사 극락전

도리사 극락전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318호

극락전은 도리사의 부속암자인 금당암의 법당으로 19세기 초에 세운 것으로 추정 됩니다. 1807년의 ‘도리사 금당암 중창기’와 1876년 ‘선산 도리사 법당 중수기’를 보면 극락전이 금당암 자리에다 세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앞면 3칸, 옆면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때 여덟 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입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으로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사이에도 다포 양식으로 꾸몄습니다. 도리사 극락전은 1970년 중건된 경복궁 근정전의 공포 구성과 같은 모습으로 내부는 대단히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습니다. 극락전 내부에는 나무로 만든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경북여행/구미여행)태조산 도리사. 신라 최초의 사찰 냉산 도리사 석탑

도리사 석탑

보물제 470호

도리사 석탑은 화엄석탑이라 부르는 고려시대 석탑입니다. 국내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입니다. 앏은 지대석을 놓고 장대석을 세워 기단을 만든 판석으로 갑석을 삼고 그 위에 모전 석탑처럼 작은 석재를 쌓아 탑 신부를 구성하였고 노반위에 연꽃이 조각된 보주를 올려 놓았습니다.

 

 

 

 

 

 

 

 

 

 

 

 

 

☞(경북여행/구미여행)태조산 도리사. 신라 최초의 사찰 냉산 도리사

아도화상 사적비 및 도리사 불량탑 시주질비

아도화상 사적비 및 도리사 불량탑 시주질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1호

아조화상 사적비와 불량탑 시주질비는 도리사 석탑 왼쪽 비탈진 송림에 세워져 있습니다.

아도화상 사적비는 1655년(효종6년)에 세웠고 신라에 불교를 전한 사적을 적어 놓았습니다. 배면에는 자운비가 음각되어 있습니다. 자연석으로 전면에는 쌍용이 후면에는 4룡을 조각하고 그 사이에 운용을 조각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불량탑 시주질비는 도리사에 불량탑을 시사한 시주와 전답량을 기록한 것으로 1712년(숙종38년)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아도화상사적비와 도리사 불량탑 시주질비 앞으로 특이한 모양의 바위가 놓여 있습니다. 흡사 고인돌이라 해도 믿을 것 같은 바위입니다. 네 개의 받침돌 위에 큰 바위를 올려놓은 모습으로 윗부분은 반듯하게 손질이 된 모습입니다. 이 바위가 아도화상이 낙동강과 해평면을 바라보고 와불의 모습을 한 금오산을 보며 도를 깨우쳤을 바위로 좌선대라 부릅니다.

 

 

 

 

 

 

 

 

 

 

 

 

☞(경북여행/구미여행)태조산 도리사. 신라 최초의 사찰 냉산 도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도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14호

도리사 극락전에는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1600년경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1968년에 개금 불사를 하였습니다. 개금시 불상 밑에서 1731년(영조7년)에 도리사를 중수한 기록이 발견되었습니다. 높이는 129cm, 견폭 61cm, 슬폭이 93cm이며 몸에 비해 불두가 크며 평면적이고 네모진 넓은 얼굴이 당시 불상 조각의 양식을 보여줍니다. 머리에는 낮은 나발과 작은 육계를 갖추었고 양미간 중앙에는 작은 백호가 있습니다.

 

 

 

세존사리탑

 

 

☞(경북여행/구미여행)태조산 도리사. 신라 최초의 사찰 냉산 도리사 세조진신사리탑.

세조진신사리탑

삼성각 앞으로는 세조진시사리탑이 있습니다. 1976년 보수공사를 진행하면서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려 올 때 모셔온 세존진신사리가 금동육각사리함에 봉안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금동육각사리함은 8세기 중엽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을 하며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어 직지사에 위탁 소장되어 있습니다.

 

 

 

 

직지사 홈페이지 캡쳐




도리사 극락전

 

 

 

 

 

 

 

 

 

 

 

 

 

 

 

 

 

 

 

 

 

 

 

 

 

 

 

 

 

 













태조산 도리사 일주문으로 도리사 사찰에서 4.5km 거리에 있습니다.

(문화재 안내판과 도리사 홈페이지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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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구미시여행)냉산(태조산)도리사. 신라 최초 사찰 도리사의 특이한 석탑


신라 최초의 사찰인 도리사는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 냉산(태조산)에 있습니다 주위에 소나무가 많아 송곡리로 불려질 정도로 소나무의 운치가 천년고찰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도리사의 유래를 보면은 신라 눌지왕때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래한 고구려 아도화상이 이곳에 처음으로 절을 세웠습니다.

 




아도화상이 불교 포교를 위해 경주 땅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냉산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멀리서 바라본 냉산 골짜기에 한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화려한 모습으로 피어 있어 아 곳에다 절을 세우고 도리사라 하였습니다. 신라 최초의 사찰 답게 이곳에는 현재 특이한 모양의 도리사 석탑이 보물 제47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벽돌을 쌓은 듯한 도리사 석탑입니다. 모양부터 아주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탑은 도리사 극락전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 석탑입니다. 높이는 3.3m. 우리가 많이 보아 오던 석탑과는 그 형태를 달리하는 모습으로 모전석탑에 가깝습니다. 땅위에 10매의 길게 다듬은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탑의 기단 부분을 세웠습니다.


 



기단은 사면에 네모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의 각 면에 직사각형의 판석 6~7매를 병풍처럼 둘러 세웠고, 남면 중앙부에는 문짝이 새겨져 있습니다. 탑신 부분은 3중으로 각층마다 작은 석재를 중첩하여 얽거나 짜서 탑신부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벽돌탑인 모전 석탑의 형태입니다.


 



조각 양식과 돌 다듬은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엽의 석탑으로 추정하며 석탑의 위부분은 노반위에 연꽃이 조각된 보주를 올려 둔 형태입니다. 국내의 모전 석탑은 재가 본것중에서는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과 청도 불령사 모전석탑이 전부인데 그 만큼 귀한 석탑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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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국내 모든 사천왕상의 표준이 된다는 보림사 사천왕상 장흥 가지산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7할이 산이라 할 정도로 많은 산을 두고 있습니다. 이름난 국립공원의 명산 도 있지만 그도 못하면 동네 뒷동산의 규모까지 천차만별입니다. 그 많은 산에는 어김없이 산만큼 많은 숫자의 절집을 만나게 됩니다. 이름난 명산에 이름난 천년 고찰이 함께 한 곳도 있지만 그러하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동양의 3보림 가지산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국내 최고, 보림사 사천왕상.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에는 가지산이 있습니다. 가지산이란 이름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울산과 밀양의 경계지점에 영남알프스로 불리는 최고 봉우리가 가지산입니다. 그 아래 석남사를 품고 있는 가지산은 전국에서도 손을 꼽는 명산입니다. 장흥의 가지산은 그 가지산과 한자도 같습니다.

 



 

 

 

보림사가 있는 가지산과 석남사를 품고 있는 가지산은 유명산면에서는 석남사의 가지산이 우세합니다. 그러나 두 산이 품고 있는 보림사와 석남사의 두 절집은 모두 천년고찰로 그와 함께 고승대덕이 이곳을 거쳐 간 사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가지산의 보림사가 사찰로서는 더 필자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가지산 보림사는 경주 불국사, 구례 화엄사, 영주 부석사에 이어 국내사찰 중에서 네 번째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국보 2점, 보물8점, 유형문화재 15점으로 총 25점의 문화재로 보물이 숲을 이룰 정도입니다. 그럼 보림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도 가지산의 보림사,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함께 동양의 3보림으로 불리는 장흥 가지산 보림사는 신라 선문구산중 하나인 가지산파의 중심이 되는 사찰입니다. 천년 고찰 장흥 가지산 보림사의 문화재중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보림사 목조사천왕상에 대해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보림사 목조사천왕상은 보물 제1254호로 지정이 되어 있습니다. 제법 규모를 갖춘 사찰에는 천왕문을 두고 그 안에 사천왕을 모십니다. 안내판을 보면 사천왕은 동서남북 사천국을 다스리는 왕들로 불법의 수호신이라 합니다. 이곳 보림사의 사천왕상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여러 개의 나무를 잇대어 사천왕상을 만들었습니다. 표면에 천도 붙이고 회도 칠하여 채색으로 마무리를 했다는군요.

 

 

 

 

동방 지국천왕상은 호화로운 장식이 달린 보관을 쓰고 갑옷과 천의를 입고 분노한 얼굴 표정으로 칼의 손잡이와 칼끝을 받쳐들고 있습니다, 서방 광목천왕상은 부릅뜬 눈에 입을 벌리고 소리를 지르는 듯 위엄 있는 모습에 오른손은 깃발을 잡고 왼손에는 무엇인가 손에 올렸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절의 사천왕상에서 보았듯이 보탑이라 생각됩니다.

 

 

 

 

북방 다문천왕상은 높다란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띤 인자한 모습을 하고 짙은 눈썹과 긴 턱수염이 선비형의 모습과 가깝습니다. 비파를 들고 발아래에는 고통스러워하는 악귀가 무거운 발을 받쳐 들고 있습니다. 남방 증장천왕상은 굳게 다문 입에 근엄한 얼굴 표정을 하고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왼손에는 무엇인가 쥐고 있는 자세를 하고 있습니다.

 

 

 

 

보림사 목조사천왕상의 조성 시기를 보면은 천왕문의 목판과 ‘보림사중창불사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중종 10년(1515년)에 만들어졌고 2차례 중수되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사천왕상으로 유일하고 현재 가장 오래 된 것이며 조각이 우수할 분만 아니라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사천왕상으로서는 기본이 될 만큼 귀중한 유물입니다.(참고 문화재청 홈피와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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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양산원동여행)천태산천태정사. 웅장한 아미타여래좌상과 협시보살이 세계최대규모인 천태사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에 자리 잡은 천태사는 층암절벽에 비집고 들어 앉은 사찰이다. 천태사를 품은 천태산은 양산8경의 하나로 깊은 층덤을 이룬 바위가 태산같이 이루었다하여 천태암산으로 불려졌는데 실제로 천태정사 뒤로는 깎아지른 암벽이 양립하여 금강산을 옮겨 놓은 모습이다. 지금은 위에 상부댐인 천태호가 산을 막아 용연폭포의 낙차는 거저 민망할 정도로 볼품없게 되었지만 현재도 천태사와 함께 가장 방문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특히 가을철 신불암재로 올라가는 곳에서 바라보는 천태사 골짜기의 비경은 경남100경에 올라 있다.

 

  



 

필자는 이곳 천태사를 오래전 부터 찾던 곳이다. 주로 천태사 암자 뒤 바위인 천태슬랩에 암벽등반을 위해 찾았는데 그 당시 천태사는 조용하며 찾는이가 없는 한적한 절집으로 지금에 비해서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가면서 천태사를 찾는 관광객이 늘고 물금에서 삼랑진으로 이어지는 낙동강 드라이브 코스가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되는등 하면서 천태사의 규모도 많이 확장되었다.  

 

 



천태사는 신라때인 원효대사께서 창건하였다한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그당시 많은 고승대덕이 이곳의 풍치에 매료되어 수도정진을 위해 찾았다는데 현재의 천태사는 옛 사찰의 모습은 찾을 수 없는 근래에 중창 불사가 된 사찰이다. 

 






천태사 맞은 편 바위 절벽을 깎아 내어 16m의 거대한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앙에 모시고 협시 보살인 왼쪽 대세지보살입상과 오른쪽에는 관세음보살 입상을 새겨 놓았다. 장엄하며 웅장한 부처님의 세계를 보는 것 같다.

 

 



천태사의 안내판을 보면은 무량수궁 아미타대불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천태사 중건주 진우대사는 천일기도 중 현몽으로 마애삼존아미타대불이 이곳 천연암벽에 모셔진 것을 알고 5년간의 불사 끝에 2009년 6월28일 봉안식을 가졌다. 아미타 대불과 좌우 협시보살은 규모면에서 세계 최대 삼존아미타대불이라 하며 그 앞에서면 크기를 실감할 수가 있다.
































☞(경남여행/양산원동여행)천태산천태정사. 웅장한 아미타여래좌상과 협시보살이 세계최대규모인 천태사 교통편.


대중교통은 양산시 물금읍 물금에서 천태사를 오가는 137번 버스를 타야 한다. 오전 7시25분, 10시, 낮 12시40분 등 6회 운행. 천태사 물금으로 나오는 차편은 오후 1시30분, 4시, 6시20분, 8시40분 출발. 부산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이용하여 원동역에서 내리면 편리하다. 부산역발 무궁화 열차는 오전 6시35분, 8시42분, 9시25분, 10시27분에 있다. 원동역에서는 원동초등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면 천태사로 갈 수 있다. 네비는 천태사를 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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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거창가조여행)우두산 고견사. 예술성이 뛰어난 고견사 동종 보고 왔습니다.

 

경상남도에는 거창한 동네가 있습니다. 1,000m가 넘는 큰 산으로 둘러진 거창한 거창군에는 산좋고 물 맑은 경남의 허파라 종종 이야기를 합니다. 오지와 때 묻지 않은 산세를 자랑하는 거창군에 많은 산들 중에서도 유독 거창군의 입구에 펼쳐진  우두산이 더욱 눈길이 갑니다. 우두산은 가야산 국립공원에 포함될 정도로 걸출한 산세를 자랑하며 맞은편에 암봉으로 홀로 우뚝 선 의상봉과 함께 꼭 소의 머리를 형상화 합니다. 의상대사가 수도하였다는 의상봉 그 아래 숨죽인듯 자리 잡은 고견사는 전통사찰 제90호로 지정되어 천년의 향기가 묻어납니다. 고견사는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 문무왕 7년(667년)에 원효와 의상스님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고견사의 창건 설화는 원효스님의 전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님이 고견사를 창건할 때 이곳에 와 서 보니 전생에 와 본것을 깨달았다하여 이름이 유래되었다합니다. 견암, 견암사, 견암선사로도 불려 지며 고견사의 명칭은 1630년 설현,금복, 종해스님들이 중건하면서 고견사로 개칭하였다합니다. 이곳 고견사에는 사찰의 연륜에 비해 문화재는 소박합니다. 많은 전란과 6.25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사찰은 폐허가 되모양입니다.  그 중 눈에 들어오는 것이 고견사 동종으로 대웅전 안에 모서져 있습니다. 보물 제 1700호이며 인조8년인 1630년에 제작된 동종으로 높이가 97.2m, 입의 지름이 59.7m로 이 당시인 17세기 전반의 동종 중 큰 규모라합니다. 옅은 붉은 색을 띠는 동종은 천판 위에 음통을 갖추지 않은 두 마리의 용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용의 이마에 특이하게 王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동종은 세부문양등 주조기술이 정교하게 표현된 설봉스님의 작품으로 현재 보관상태도 양호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범종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우두산 산행때 고견사를 가게 됩니다. 그 때는 '고견사 동종'을 챙겨 볼 것을 권합니다. 

 

 



 

 


 

 

 

 

용의 이마에 王자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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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양산여행)김정한의 수라도 무대였던 소설속의 미륵당이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을 보다.

 

양산시 물금읍의 물금역을 나오면 물금취수장을 따라가는 길이 나옵니다. 이 길은 조선시대 한양으로 올라가는 3곳의 영남대로 중 한곳으로 부산을 거쳐 양산에서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는 중도의 영남대로입니다. 이 초입에 용화사의 작은 절집이 있습니다. 또한 한양으로 가는 영남대로상에는 위험한 길로 알려진 곳이 세 곳입니다. 황산잔도와 작원잔도 그리고 토끼벼루로 세 곳 중 두 곳이 이곳 물금과 원동 그리고 삼랑진을 잇는 낙동강 길에 있습니다.

 


 

 

 

낙동강을 예전에는 황산강이라 불렀습니다. 그 이름을 따온 황산잔도는 험하기로 익히 알려져 한양으로 올라가는 선비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황산잔도의 초입에 있는 용화사는 절의 사세에 비해 보물인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 연유를 보면 부산의 문인이었던 요한 김정한의 중편소설 ‘수라도’에 잘 나와 있습니다. 수라도의 배경은 이곳 화제리를 배경으로 쓴 소설입니다. 수라도의 내용 속에는 미륵당이 등장합니다.

 

 

 

 

☞(경남여행/양산여행)가야부인이 창건한 미륵당이 용화사, 수라도 무대였던  미륵당 석조여래좌상을 만나다.

가야부인이 시아버지 허진사의 제사장을 보고 오다 이곳 골짜기에 반쯤 묻혀 있는 미륵불을 발견합니다. 가야 부인은 그곳에 절을 세우기로 작정을 하지만 조선시대 사대부의 유교 관습에 의해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사위가 가야부인의 뜻을 알고 절을 짓는데 그곳이 지금의 용화사로 소설속의 미륵당입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지 미륵당에 얽힌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안내판에도 언급을 하고 있지만 낙동강 건너 김해시 상동면 감로사지에 있던 불상이라 합니다.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이 본국으로 가져가기 위해 옮겨 오다가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낙동강변에 버렸다는 전설입니다. 소설속에는 가야부인이 그것을 발견하게 되어 미륵당을 짓게 되는 것으로 나옵니다. 지금 용화사에는 용왕대재의 행사를 봄이면 한다고 합니다. 낙동강의 강물에서 건져 올렸다하여 용왕대재를 지낸고 있습니다.

 


 


 

 

 

용화사는 사실 미륵으로 불리는 석조여래좌상을 빼면 너무 초라한 절집입니다. 그럼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문화재 안내문을 보면 보물 제491호이며 소재지는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입니다.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항마촉지인여래상으로 양산에서는 유일하다고 합니다. 광배는 파손된 상태였고 불상은 낙동강의 뻘밭에서 건져 올렸는지 백색의 호분이 범벅되어 원형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지금 용화사의 석조여래좌상은 광배와 대좌가 완벽한 모습으로 갖추어진 상태입니다. 이는 복원과정을 거쳐 현재의 완벽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대좌도 대좌지만 대좌 뒤의 광배가 화려하며 조각수법이 매우 우수하다합니다. 하늘을 날고 있는 천인상과 구름을 세겨 본존상이 구름위에 떠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이 합천 청량사 석조여래좌상의 광배에도 나타난다합니다. 광배의 뒷면에는 하늘에서 하강하는 천인상 2구가 음각되어 있어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광배 뒷면에 공양천인상이 세겨진 것은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뿐이라합니다. 그만큼 아름다운 광배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무뚝뚝해 보이는 석조여래좌상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용화사에서는 낙동강이 보이지 않습니다. 강가 옆이면서도 낙동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가보면 용화사 앞으로 서울로 올라가는 경부선 선로가 놓여져 있어 항상 덜커덕 거리는 열차의 소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낙동강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낙동강을 볼 수 있는 굴다리가 뚫여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때 수탈의 목적으로 놓여진 경부선은 처음에는 단선으로 놓였습니다. 단선일때 붉은 벽돌을 돌려 놓은 동굴의 내부에 사각의 돌을 깍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모습이 그때의 상황을 그대로 굴안에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선이 되어 확장을 했던 굴다리의 모습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곳이 4대강 사업으로 자전거 길이 연결되어 시원하게 황산잔도를 볼 수 있어 여행삼아 가면 너무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을 둘러 보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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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여행/달성여행)비슬산은 신선이 거문고를 타고 있다는 뜻, 비슬산 대견사 새롭게 달성의 관광 명소가 될 듯. 


 달성군의 진산인 비슬산은 봄의 산으로 많은 상춘객이 진달래를 쫒아 산상의 화원을 찾는다. 비슬산 정상인 대견봉을 지나 월광봉을 거쳐 만나는 곳이 대견사지터다. 이곳 대견사지는 비슬산의 1,000m 능선에 위치를 하고 있어 인근에 이 정도의 높이에 절터를 간직한 곳이 드물 것 같다. 해발 1035m봉 아래 자리 잡은 대견사지는 삼층석탑과 마애불, 우물터가 남아 있다.



 

 

 ☞(대구여행/달성여행)드라마 추노 촬영지 비슬산 대견사지 중창 불사, 비슬산 대견사 새로운 관광 명소가 될 듯. 


대견이란 뜻을 직역하면 “크게 본다”는 뜻으로 이곳 비슬산 대견사는 이름과 어울리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비슬산은 산의 모습이 신선이 거문고를 타고 있다는 뜻의 ‘비파 비(琵)', '거문고 슬(瑟)’자를 쓰고있다. 비슬산의 산세가 신선이 거문고를 탈 정도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산세가 얼마나 빼어난 모습이었을까.  그런 비슬산의 아름다움이 중국 당나라까지 소문이 난 것일까. 



 


  ☞(대구여행/달성여행)대국에서 보았다는 대견사지 중창 불사, 비슬산 대견사 새롭게 달성의 관광 명소가 될 듯. 


중국 당나라 황제가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할려고 대야에 물을 담았는데 잠시 뒤 대야 안의 물을 쳐다보고 물안에 비치는 빼어난 산세에 그만 넋을 잃고 만다. 아름다운 산세와 옹립한 천길 바위 위에 지어진 사찰을 보고 황제는 신하에게 이르기를 중국의 구석구석을 다 뒤져 세숫대야안에서 본 그 사찰을 찾아 오라고 어명을 내린다. 신하는 중국의 구석구석을 다 뒤지지만 찾을 수 없어 급기야 신라에 까지 사람을 보내어 찾게하니 그 신하가 신라 땅을 샅샅히 뒤져 비슬산에 올라 이곳을 발견하고 이곳의 지형과 산세를 그려가 황제에게 보여주니 세숫대야에서 본 모습과 똑 같아 황제가 그곳에 절을 짓게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중국 당의 황제가 보았다는 뜻인 “대국에서 보았다”하여 대견사로 이름 지어 졌다.  대견사는 창건에 관한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9세기 신라 헌덕왕때 지어졌다고 전할분 정확한 연대등 모든 것이 알 수 없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임진왜란 이루로 이곳 대견사에 빈대가 들끓어 빈대를 견디다 못해 자연적으로 폐사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1900년도에 영친왕의 즉위를 축하하여 이재인이란 분이 대견사를 중건하였지만 1908년에 어떤이유인지 알수 없지만 페사를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우리 속담에 “빈대 잡다가 초가 삼간 태운다”는 속담이 생각이 난다.





 

 

현재 대견사지에는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대구 팔공산의 동화사에서 이곳 비슬산 대견사를 창건에 가까운 중창 공사를 진행중이다. 그리고 동화사 통일약사여래대불의 불교문화관에 임시로 모셔둔 부처님 진신사리를 이곳으로 모신다고 하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대견사의 모습에 기대가 엄청 크다.


 

 

 

2002년 대견사에 문화재 발굴 공사가 진행 되었다. 발굴에서 추정건물지 6동, 초석, 암.수막세편이 확인되었고 암막새에 대견사의 명문이 확인되어 구전으로 전해오던 대견사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와편에 만력39년(1611년), 숭정6년(1633년)등의 연호가 출토되어 그 당시까지 사찰이 남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대견사의 기록이 남아 있다. “대견사의 장육관음석상이 땀을 흘렸다"며 조정에 1416년과 1423년에 보고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견사를 떠 받쳤던 거대한 석축은 개창 당시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그 길이가 37.5m, 높이 6.56m이다. 축조방법은 막돌을 그대로 쌓은 허튼층 쌓기 수법을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인기 드라마 추노가 촬영되었다한다. 



 

 

비슬산 강우레이더 관측소

 

 

톱바위와 비슬산 강우레이더 관측소

 

   애추는 풍화된 암석조각들이 급사면으로 떨어져 내려가 절벽밑에 부채꼴 모양으로  쌓인 각진돌의 집단으로 흔히 칼바위를 말한다. 비슬산의 톱바위가 애추.



 

 

 

 

 

 

 

 

 

 

 

 

 

 

 

 

 

 


 ☞(대구여행/달성여행)드라마 추노 촬영지 비슬산 대견사지 중창 불사, 대견사지 마애불


대견사지 마애불은 대견사 터 암굴의 남쪽 입구 오른쪽 바위에 음각되어 있다. 하부에는 연꽃대좌를 새겨 놓고 대좌의 상면으로 아래가 넓은 5개의 원형을 중복되게 새겨 놓고 원형의 아래로는 고사리 문양을 대칭되게 새겨놓아 화염문에 휩싸인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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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여행/달성여행)드라마 추노 촬영지 비슬산 대견사지 중창 불사, 대견사지 삼층석탑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2호

대견사지 삼층석탑은 창건당시에는 9층탑(6층탑)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의 탑은 경주 남산 용장사의 삼층석탑과 비슷하게 암반을 기단석으로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절벽의 바위를 바닥돌로하고 그 위에 2층 기단의 3층탑을 세워 올렸다. 하층 기단에도 양쪽 모서리 부분과 가운데 기둥무늬를 돋을 새김했고 윗층 기둥돌과 몸돌의 양쪽 모서리에만 기둥무늬를 돋을 새김했을뿐 꾸밈없이 단순하며 소박하다. 지붕돌에는 4단의 지붕돌 받침과 2단의 괴임을 조각하였다. 통일신라 후기 또는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사찰의 창건연대와 같이 보고 있다. 1988년도에 높이 3.67m의 삼층탑으로 복원을 한 상태다.   

 

 

 

 

 

 

 

 

 

 

 

 

 

 

 

 

 

 

거북바위,

 

 

토르는 화강암의 기반이 지하에서 심층풍화로 인하여 부서진 세립물질이 제거되고 남은 화강암체를 말한다. 거북바위, 코끼리바위등을 말한다.



 

 

 

 

 

 

코끼리바위

 

 

 

 

 

 

 

 

 

 

 




 ☞(대구여행/달성여행)달성 비슬산 암괴류와 함께 비슬산 대견사 새로운 관광 명소가 될 듯. 

천연기념물 제435호

암괴류란 큰 자갈내지 바위크기의 암석덩어리들이 산사면의 골짜리를 타고 집단적으로 흘러내리면서 쌓인 것을 말한다. 비슬산 암괴류는 약 1만년전~10만년전인 빙하기 후대에 형성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생대 백악기 화강암의 거석들로 길이가 2km, 최대 폭이 80m, 두께 5m의 암괴로 그 규모가 대단히 큰 것으로 화강암지형에서는 보기가 힘들고 가치가 매우 높은 지형이다. 국내 암괴류중 가장 규모가 크다.

 

 ◆중창 불사 이전의 대견사지 보관사진 함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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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여행/공주여행)계룡산 갑사, 추갑으로 유명한 계룡산 갑사 보고 왔습니다.


계룡산을 대표하는 사찰로는 동학사와 갑사가 있다. 서로 용의 등짝인 계룡산 성곽 능선을 등지고 서 있다 보니 계룡산을  이야기 할 때 동학사와 갑사는 빠지지 않는다. 동학사는 도회지의 분바른 빤질빤질한 여인의 모습처럼 드러난 사찰이라면 갑사는 머리위에 수건을 두른 밭일을 하는 시골 아낙네의 수더분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지나친 편견일까. 그만큼 동학사보다는 갑사에 정감이 더 간다. 그리고 계룡산 갑사는 춘마추갑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 다닌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주변에 이른 봄꽃이 피어나면 봄이 왔다는 소식이다. 마곡사는 단연 벚꽃이 유명하다. 후두둑 후두둑 비바람에 떨어지는 질정 없는 꽃비가 너무 좋은 춘마의 마곡사라면, 핏빛의 붉은 단풍물이 뚝뚝 떨어지며 갑사를 휘감아 돌아 한바탕 ‘불난집의 호떡’을 보는 것 처럼 붉은 단풍을 따라 관광객이 몰려드는 계룡면의 가을 갑사를 호사가 들은 추갑이라 한다. 그만큼 갑사의 단풍은 붉은 빛을 토해낸다. 답사 당일은 마지막 단풍으로 절정을 이루었는데 이제 나뭇가지에는 휑하니 찬바람만 들고 땅 바닥으로 떨어진 단풍잎은 바람이 쓸면 쓰는 대로 흔들려 몸을 맡기며 낙엽은 자신의 몸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다.



 


계룡산은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악중에 서악이었고 고려시대로 넘어와서도 묘향산이 상악, 지리산이 하악으로 계룡산은 3악 중 중악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갑사의 창건은 신라최초의 사찰인 선산의 도리사를 창건한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다. 그가 고구려로 돌아가기 위해 백제땅 계룡산을 지날 때 이곳에 상서로운 빛이 감돈 것을 보고 찾아가니 천진보탑이 있었다. 그때가 420년으로 아도화상은 이곳에 갑사를 창건하게 된다. 통일신라시대때는 의상대사가 주석하여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여 화엄도량의 법맥을 이어 화엄10대 사찰의 하나가 된다. 그와 함께 나라의 으뜸 사찰이 되며 임진왜란때에는 영규대사가 전국에서 가장 먼저 승병을 일으킨 곳이 이곳 갑사이다. 그는 왜적과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를 하였다. 이곳 갑사에는 표충원을 세우고 휴정, 유정,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시며 받들고 있다.







추갑의 갑사는 주차장을 지나 일주문에서 오르는 길이 가장 아름답다. 장정이 손을 뻗어 서로 잡을 수 없는 엄청 큰 둘레의 참나무가 노란잎을 드리우고 홍엽의 단풍으로 물든 갑사를 오르는 순례길은 갑사 구곡과 함께 하나하나 되짚어 보며 오르는 재미 또한 가을 갑사를 찾는 솔솔한 재미이다. 그것도 잠시 지금 쯤 계룡산은 울퉁불퉁한 계룡의 근육에 하얀 눈꽃이 피어나고 잠자던 계룡은 하얀  서릿발을 세우며 몸을 곧추세우듯 바람을 일으켜 눈가루를 날리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와 반대로 겨울의 갑사는 하얀눈을 뒤집어 쓰며 자꾸만 자꾸만 그의 존재를 숨긴다.그런 겨울의 갑사는 그만큼 한적하니 좋은 여행지이다.
























기허당 영규대사의 영정

































갑사 석가여래삼세불도는 보물 제16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가여래의 후불탱화로서의 영산회상도와 아미타여래의 후불탱화로서의 아미타회상도 2폭이며 화사인 의겸이 1730년에 제작한 불화이다.











석조약사여래입상








































갑사사적비







부도탑































철당간지주


 

☞(충남여행/공주여행)계룡산 갑사, 흔하지 않는 통일신라시대 철당간이 갑사에 있어요.


갑사에 가면 철로 된 당간 지주가 인상적이다. 보물제 260호. 당간이란 사찰에 행사가 있을 때 사찰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 두었던 곳을 말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잡아주는 두 돌기둥은 당간지주이다. 흔히 사찰의 대웅전 좌우로 똑 같은 모양의 돌기둥을 볼 수 있다. 갑사의 당간를 보면 네 면에 구름무늬의 운상을 새긴 기단위에 철 당간을 세우고 양 옆에 당간지주가 잡아주고 있다. 갑사의 철당간은  월래50cm인 원통의 철통 28개가 연결되었다 한다. 1899년인 고종35년에 벼락을 맞아 4개가 부러져 현재는 24개가 갑사를 지키고 있다. 갑사의 당간은 통일신라 때인 문무왕 20년(680)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간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로 보고 있다. 현재 갑사의 대웅전은 창건때와는 다른 위치에 있었던 것이 당간지주를 보면 알 수 있다.














◆계룡산 갑사 전각 배치도◆


(갑사 홈페이지 캡쳐)


◆계룡산 갑사 교통편◆

서울방면에서 오실 경우

경부고속도로 → 천안논산고속도로 → 정안 IC → 23번국도 → 갑사방면 진입 → 계룡면사무소 → 계룡저수지 → 갑사

 

부산방면에서 오실 경우

경부고속도로 → 호남고속도로 → 유성 IC → 32번국도 → 박정자 삼거리 → 마티터널 → 과학고등학교 지나 우측진입 → 청벽교차로 다리 아래

통과 → 갑사방면 진입 → 갑사

 

광주, 호남방면에서 오실 경우

호남고속도로 → 논산 IC → 논산시내 → 23번국도 공주방향 → 갑사방면 진입 → 계룡저수지 → 갑사

 

 고속버스 : 서울(남부터미널, 반포.강남터미널, 동서울터미널) ↔공주(신.구터미널), 1시간 50분

 시내버스 : 공주 ↔ 갑사

 ★대전, 공주, 버스시간표 




 

전화번호 : 공주종합버스터미널 : ☎ 041) 855-8114

                공주관광안내소 : ☎ 041) 856-7700

 

 

• 공주에서 갑사까지 시내버스 운행, 30분 소요

• 공주에서 갑사까지 택시로 20분 소요

• 대전 - 버스 : 유성(충남대 앞)에서 갑사까지 340번 버스, 50분 소요

• 대전 - 지하철 : 유성온천역에 하차 6번출구로 나오면 10m앞 정거장(340번 버스),(갑사홈페이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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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영광여행)불갑산 불갑사. 백제에서 가장 오래된 불갑사 인도스님  마라난타 존자가 창건 설.


불갑사는 삼국시대때에 백제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사찰로 보고 있다. 불교를 처음 전래한 인도스님 마라난타 존자가 남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 침류왕 1년(384년)에 영광땅 법성포로 들어와 이곳 모악산(불갑산)아래에 최초의 사찰을 세우니 그게 불갑사다. 각진국사가 도갑사, 봉갑사, 불갑사등 3갑사를 창건하여 그중 불갑사가 으뜸 사찰이 된다고하여 불갑사로 되었다. 또는 백제무왕(600~640년)때 행은 스님이 세웠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것하나 확실하지 않다. 자연적으로 뒤에 모악산으로 불리던 산도 불갑사에 의해 불갑산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여러가지 설중에는 남방불교를 주장하는 인도의 공주 허왕옥과 그의 오빠 장유 화상에 의해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전설과도 무관하지 않은듯 불갑사도 인도 불교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전설이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전남여행/영광여행)불갑산 불갑사. 백제에서 가장 오래된 불갑사 정유재란으로 전소 법릉스님에 의해 중창.


불갑사 고적기에 보면은 최초 창건시기를 백제 초기로 나와 있다. 그만큼 유장한 세월을 이어온 불갑사에는 현재 남아 있는 문화재는 빈약함에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를 보면 정유재란때 사찰은 모두 전소되고 사찰내 암자인 전일암만 겨우 남아 명맥을 유지하다 선조31년인 1598년 법릉선사에 의해 불갑사의 4차 중창의 불사를 일으키게 된다.  

 

 

 

 

 

☞(전남여행/영광여행)불갑산 불갑사. 불갑사 조선 말기 불교계의 시련으로 쇄락.


불갑사의 전각과 수많은 암자가 속속 제모습을 갖추고 불갑사의 중흥시기가 이때가 아닌가 싶다. 조선시대 말기에 들어와 1845년~1868년간인 20여년은 동안은  한국불교의 시련기가 되었다. 주석으로 불경소리가 끊이지 않던 불갑사도 승려들이 수행을 못하게 되고 더 이상 목탁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빈 절로 남게된 불갑사는 급격히 사세가 기울면서 모든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불갑사는 쇄락의 길을 걷게 된다.

 

 

 

 

 

☞(전남여행/영광여행)불갑산 불갑사. 백제에서 가장 오래된 불갑사 문살이 아름다운 대웅전 보물제 830호 지정.


그중 불갑사의 대웅전은 보물제 830호로 정유재란때 전소되었는데 현재의 대웅전은 18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순종융회3년인 1909년에 보수를 하였다. 정면3칸 측면3칸의 여덟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인 다포계 건물로 매우 화려한 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문살 또한 삼분합 소슬 빗살문으로 연꽃, 국화꽃, 보리수나무 무늬를 섬세하게 조각하여 대웅전의 모습을 더욱 더 아름답게 하고 있다.

 

 

 

 


☞(전남여행/영광여행)불갑산 불갑사. 불갑사 대웅전은 정면이 측면. 특이하게 부처님을 안치.


대웅전의 특이한점은 모든 사찰에는 대웅전을 사찰에 중심에 두고 있다. 그러면서 삼존불을 전면으로 보도록 안치를 한다. 모든 불자들은 대웅전을 들어갈때는 측면의 작은 문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그러나 불갑사는 대웅전을 사찰의 중심에 두었지만 기존 사찰과 다른 점은 대웅전안에 모신 부처님은 대웅전의 정면이 아닌 오른쪽 방향 즉 측면으로 보도록 안치를 하였다는 점이다. 이곳은 대웅전의 전면이 정면이 아닌 측면이 되고 측면이 정면으로 되도록 한게 특이하다.  

 

 

 

 


☞(전남여행/영광여행)불갑산 불갑사. 불갑사 만세루는 2층이지만 문루형태가 아닌 특이한 모양세.


만세루는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건축물로 대웅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층형의 문루건물이다.  정면5칸, 측면4칸으로 옆에서 보면 사람인(人)자를 한 맞배 지붕 누각으로 되어 있다. 여타 사찰에서는 보통 누각 아래로 출입을 하여 대웅전으로 이루어지도록 문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불갑사 만세루는 특이하게 이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문루가 아닌 여름철에 스님들의 공부하는 공간으로 사용 되었다. 조성연대는 조선시대 후기로 추정되며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남여행/영광여행)불갑산 불갑사. 백제에서 가장 오래된 불갑사 사천왕상은 연기사에서 옮겨와 안치.


불갑사를 들어서면 만나는 천왕문에는 사천왕상이 모서져 있다. 이곳의 사천왕상은 특별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신라진흥왕때  연기조사가 나무로 조각을 하였다하며 국내 목조 사천왕상중에는 가장 큰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고종 7년인  1870년에 설두스님이 불갑사를 중창하면서 전북 무장 소요산의 연기사에서 목선 4척에 나누어 싣고  옮겨 와 안치를 하였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159호


 

 

 


☞(전남여행/영광여행)불갑산 불갑사. 불갑사의 뜻은 '으뜸 사찰' 불갑산은 '으뜸 산' 9월에는 꽃무릇이 '으뜸'인 불갑사. 


9월의 불갑산 불갑사는 으뜸의 산과 으뜸의 절을 실감하게 된다. 먼저 사찰을 감싸는 꽃무릇에 의해 불갑산 과 불갑사는 마치 붉은 빛을 토한 불길에 휩사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와 덩달아 전국의 관광객이 이곳 불갑산 꽃무릇을 보기위해 몰려오는지 불갑사와 불갑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9월의 불갑사에서 꽃무릇인 상사화의 매력에 빠져보았고 백제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불갑사도 천천히 둘러보면 좋은 여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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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영광여행)특이한 모양의 기둥에 깜짝, 불갑사 일주문. 일주문의 기둥이 두개.


천년고찰을 찾아 들어가는 길목에는 반드시 출입문격인 일주문을 지나게 된다. 절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문으로 사찰의 규모를 나타내기도 한다. 보통  사찰에 따라 따르지만 일주문을 흔히 조계문이라고도 부른다. 범어사의 일주문은 조계문으로 부르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어 위풍 또한 당당하다. 두개의 기둥이 일반적이지만 범어사 일주문은 네개의 기둥이 한일자 모양을 하고 있어 웅장하며 장엄함을 함께 보여준다. 

  









(전남여행/영광여행)울퉁불퉁 특이한 모양의 기둥에 깜짝, 불갑사 일주문. 일주문의 기둥이 두개.


불갑사를 찾아가는 입구에도 큰 규모의 일주문이 반긴다. 다른 사찰의 일주문 보다 엄청 높고 웅장하며 공포에서 풍겨나오는 무게는 여타 사찰에서 느껴보지 못한것 같다.  불갑사의 일주문은 두개의 기둥으로 세워져 있는데 그 기둥이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일반적인 사찰의 기둥은 깨끗하게 다듬은 원기둥을 사용한다. 그러나 불갑사의 일주문은 나무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기둥을 삼았다. 그러다 보니 울퉁불퉁한 가지가 정리가 되지 않은 모습으로 일주문을 받치고 있어  한번더 불갑사를 생각하게되는 것 같다.  대개 일주문등 큰기둥에는 수입목을 사용하지만 불갑사 일주문은 우리 느티나무를 자연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불갑사 여행시에 일주문의 기둥이 어떤 모습인지 확인해보세요 








(전남여행/영광여행)특이한 모양의 기둥에 깜짝, 불갑사 일주문. 일주문의 의미 알아보기.


일주문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조계문으로 불리는 일주문은 만법이 모두 갖추어져 일체가 통한다는 법리가 담겨져 있어 삼해탈문이라고도 한다. 즉 세속의 번뇌와 흐트러진 마음이 조계문을 통과함에 따라 마음을 다잡으며 진리의 세계로 들어 왔다는 것. 즉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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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여행/해남여행/달마산미황사)달마대사의 법신이 머무는 곳인 달마산 미황사.

 

해남읍에서 땅끝마을 방향으로 가다보면 독특한 산세에 눈이 절로 간다. 해남의 명산으로 미황사를 감싸고 있는 달마산이다. 능선으로 삐쭉삐쭉 솟아 있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만개의 부처님 모습과 닮았다는 달마산. 산세의 기운이 땅끝을 더 세워서 그런지  항상 달마대사의 법신이 머무는 곳이라 달마산이라 부른다.


 

 

달마산 미황사의 대웅보전 보물 제947호.


 

 

 ☞(전남여행/해남여행/달마산미황사) 독특한 미황사의 창건 유해. 달마산 미황사.

 

달마산에는 미황사가 있다면 미황사는 달마산에 있다. 미황사의 창건 설화를 보면 미황사의 설화가 왜 이곳에다 사찰을 창건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1692년인 숙종 18년에 지은 '미황사 사적기'에 나와 있는 기록을 보면 신라 경덕왕 때인 749년에 돌배가  달마산 아래 포구에 닿았다. 당시 의조화상이 마을 주민과 함께 포구로 나가 돌배를 맞이하였는데 배안에는 많은 경전과 불상이 실려 있었다.

 

 

미황사 일주문.

 

 

 ☞(전남여행/해남여행/달마산미황사)달마대사의 법신이 머무는 곳인 달마산 미황사. 검은 소의 전설이 있는 미황사.

 

화엄경 80권과 법화경 7권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성중, 16나한 그리고 탱화, 금환, 검은 돌을 함께 싣고 사람이 아닌 금인이 돌배를 젓어 이곳에 도착하였다 .  갑자기 검은돌이 갈라지더니 그곳에서 난데 없이 검은소가 나왔다. 그날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게 되었는데 금인이 나타나 '나는 돌배를 저어 왔는 우전국의 왕인데 부처님을 모실곳을 찾아 여러나라를 다니다 이곳에 이르게되어 달마산 꼭데기를 바라보니 만불(萬佛)이 나타남으로 여기에 부처님을 모시려하오. 그러니 검은소에 경전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거든 그곳에다. 부처님을 모시도록하시오'하며 사라졌다. 금인도 달마산의 기암이 설악산 천불동 계곡의 비유처럼 달마산에 솟은 기치창검들이 모두 부처님의 모습으로 여겨진것 같다. 

 

 

일주문의 용 조각.

 

 

 ☞(전남여행/해남여행/달마산미황사)달마대사의 법신이 머무는 곳인 달마산 미황사. 미황사의 뜻은.

스님은 깨보니 꿈이라 꿈도 회괴하다며 소등에다 경전을 올리고   뚜벅뚜벅 가는데 갑자기 소가 땅바닥에 눕더니 다시 일어서서 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닌가. 달마산 아래 골짜기에 다다라 검은 소가 땅바닥에 눕더니 꿈쩍도 하지 않으며 일어서지 않았다. 의조화상은 처음에 소가 잠시 누웠던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그 뒤에 눌러 앉은 자리에다 '미황사(美黃寺)'를 창건하였다.

 

 

 

 

 ☞(전남여행/해남여행/달마산미황사)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이 고색창연.  달마산 미황사.

미황사는 소와 인연이 깊은 사찰로 그 뜻을 보면  '미'는 소의 울음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따온 것이고 '황'은 금인의 색상이 누런 금빛에서 따왔다 한다. 이런 달마산 미황사가 1989년까지 비어진 사찰로 남아 있었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미황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특히 대웅보전은 보물947호이며 응진당과 명부전 또한 보물11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남여행/해남여행/달마산미황사)전국의 사진작가를 끌어 모우는 미황사의 독특한 매력. 달마산 미황사.

 

달마산 미황사의 대웅보전은 전국에서 사진작가를 많이 불러 모우는 곳 중의 한곳이다. 대웅보전과 달마산, 고색창연한 대웅보전과 함께 작품이 아닌곳이 없을 정도다. 특히 나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대웅보전 안쪽 천장인 공포의 아름다움에 감탄사만 연발을 하였다. 혹 미황사를 방문하시거나 그럴 계획이 있다면 꼼꼼히 살펴보자. 대웅보전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 하나에도 전설과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 천년고찰이다.

이야기 줄거리는 미황사 홈페이지에서 내용을 발췌하였습니다.

 

 

 

 

 

 

 

 

 

 

 

 

 

 

 

 

 

 

 

 

◆ 미황사 대웅전의 내부 모습◆


 

 

 

 

 

 

 

 

 

 

 

 

 

 

 

 

 

 

 

 

 

 

 

 

명부전

 

 

 

 

 

 

 

 

 

 

 

 

 

 

 

 

대웅보전의 기둥에도 용이 그려져 있다. 물을 다스리는 용이 화재를 막는 다는 의미로 보인다.

 

 

대웅보전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 거북이와 연꽃문양.

 

 

 

 

 

 

 

 

 

 

 

 

응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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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해남여행/대흥사)두륜산 대흥사,백제시대 천년고찰 해남 대흥사.


두륜산 대흥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천년 고찰이다. 예전에는 이곳 두륜산을 대둔산 또는 한듬산으로 불렸는데 사찰의 명칭도 대둔사 도는 한듬절로 불려졌다.근대에 와서 대흥사로 고쳐 불리워졌다.  대흥사 창건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가 426년에 정관존자에 의한 창건설화와 514년 아도화상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는 신라말의 고승이었던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전남여행/해남여행/대흥사)두륜산 대흥사,백제시대 천년고찰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 부도와 표충사 편액.



조선시대에 와서는 임진왜란때 승병을 일으킨 서산대사 휴정스님의 의발과 부도탑이 있는 곳으로 부도탑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1789년 정조대왕께서 임진왜란 서산대사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이곳 대흥사에 표충사 편액을 하사하였다 합니다. 아쉽게도 부도밭은 입구가 잠겨 있어 서산대사 그분의 부도는 멀 발치에서 볼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부도탑을 지나면 울창한 숲 그늘을 지나게 됩니다. 명산에 명찰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곳입니다. 그만큼 아름드리 나무들이 밀집되어 천년 고찰의 모습을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곳을 지나면 일반 사찰의 천왕문격인 해탈문을 지나게 됩니다. 이곳을 통과하면 모든 사바세계의 번뇌와 괴로움을 벗어 버리고 부처님의 셰계로 들어서는 경계일까요. 이곳을 지나면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며 대흥사의 참 모습을 보게 됩니다.


 

 


 넓은 들판 같은 두륜산의 품안에 자리 잡은 대흥사, 그 뒤를 두른 두륜산은 마치 스님이 팔을 배에 올리며 편안하게 누워있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연유인지 이곳을 찾는 모든 분들의 얼굴에는 근심걱정을 모두 잊은 듯 편안한 부처님의 얼굴인듯 아니면 해탈한 노승의 얼굴인 편안하게 누워있는 두륜산 능선은 그야말로 신기하다.


 

 


 이곳은 스님들의 수행공간과 함께하고 있어 왼쪽의 범종각을 보고 그 옆에 두그루의 느티나무를 만나게 됩니다. 연리근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습니다. 



 

 


☞(전남여행/해남여행/대흥사)두륜산 대흥사,백제시대 천년고찰 해남 대흥사.

추사 김정희와 원교 이광사의 편액 글씨.


이곳을 지나면 대흥사의 본전불이 있는 대웅보전으로 가게됩니다. 먼저 다리를 건너면 2층의 침계루와 만나게 됩니다. 이곳에는 신라말에 조성된 응진당 삼층석탑이 있고 대웅보전에는 원교 이광사의 편액이 걸려 있다. 오른쪽의 건물에 백설당과 무량수각 현판이 나란히 붙어 있다.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고 백설당은  해사 김성근이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남여행/해남여행/대흥사)두륜산 대흥사,백제시대 천년고찰 해남 대흥사.

1899년 대화재로 모두 소실되어 복원 불사.



현재의 건물들은 1899년에 대흥사의 큰 화재로 소실되어 그 이후 복원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웅보전도 개금불사가 진행중이라 본전의 부처님은 계시지 않았다. 대둥전은 부처님 몸을 의미한다. 내부에 모셔져 있던 삼존불은 1899년 화재로 소실되어 그 이후인 1901년에 조성되었다한다. 대웅보전의 건물도 그 당시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새로 복원하였다. 조선후기 다포계 건축양식이 잘 드러나며 정면의 화려한 용두장식으로 대웅보전의 아름다움을 더욱 잘 나타내고 있다.




 

 

현재의 대웅보전 편액은 당대의 명필로 이름을 날렸던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대웅보전의 현판에는 추사 김정희의 이야기가 전하는데 추사 김정희가 1840년 제주도 유배길에 이곳을 들러 대웅보전의 편액을 써서 이광사의 편액 대신 자신이 쓴 편액을 걸게하였다 한다. 그 후 유배에서 풀려 제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들러 자신의 편액을 떼고 이광사의 편액을 다시 걸게하였다한다.




 


 대웅전 오른편에는 윤장대가 있다.  윤장대를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아 소원이 성취된다는 의미가 있다.









범종루










연리근 나무




백설당 편액 원교 이광사의 작품



무량수각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양을 가다 대흥사에 들러 쓴 글이라한다. 추세체의 진미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대웅보전의 편액도 원교 이광사의 작품이다.

 

 

 

 

 

 

 

 

 

 

 

 

 

 

현재 대웅전안의 삼존불은 개금불사가 진행중이다.

 

 

 

 

 

 

 

 

 

 

 

 

윤장대



 

 

 

 

 

 

 

 

 

 

 

 

 

 

 

 

 

 

 

 

 

 

 

 

 

 

 

 

 

응진전 삼층석탑 보물제3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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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여행)도덕산 도덕암. 경주의 북쪽에 숨은 듯이 자리 잡은 도덕산 도덕암

 

암자는 자리한 위치에 따라 여행객에게 많은 감동을 준다. 그 만큼 산자수려한 위치에 터 잡은 암자에 더 많은 호기심을 느끼며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한 암자가 있다. 경주 안강의 도덕산으로 정상이 702m인 수더분한 산이다. 그야 말로 별 특징이 없는 산으로 경주와 영천의 경계를 이루며 솟아 있다. 그래도 경주에서는 제법 높은 축에 들어가는 도덕산 언저리에 작은 암자가 자리 잡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여행)도덕산 도덕암. 신라 선덕여왕이 찾아 왔다는 도덕산,

 

이 산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의 선덕여왕이 이곳을 찾아 왔다하여 두득(덕)산으로 불렸다 한다. 어찌 덕만공주와 느낌이 비슷한 것 같다. 그러다 조선중기때 회재 이언적에 의해 도덕산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여행)도덕산 도덕암. 신라 경덕왕때 창건된 유서 깊은 고찰 도덕산 도덕암

 

안강 도덕산 도덕암의 기원은 신라 경덕왕(742년~765년)때 창건 된 암자로 풍진세상을 견디며 천년고찰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원래는 아래 옥산리 정혜사의 12개 부속 암자중 하나였다한다. 어떠한 연유로 정혜사가 패사를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는 도덕암만 남겨놓고 모두 흔적도 찾을 수 없다.

 

 

 

도덕암의 사찰 명칭도 창건 당시의 이름이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그 이유는 동방오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에 의해 뒷산을 도덕산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 이후에 도덕암으로 부른 것은 아닌지.

 

 

 

 

지금이야 도덕암 오르는 암자길이 뚫여 승용차도 쉽게 올라오게 되었지만 필자가 처음 암자를 찾을 당시에는 대단한 불심이 아니라면 엄두도 내기 힘든 그런 위치에 있어 그저 절의 명맥만 유지할 정도였다. 최근에 다시 찾아보니 이제는 콘크리트 포장이 된 차도가 뚫여 그때와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여행)도덕산 도덕암. 동해 일출 관망 장소 도덕산 도덕암

 

이곳 도덕암은 암반을 깍아 만든 터에 제비가 둥지를 틀듯이 바위에 엉겨 붙어 있다. 옥산리 마을에서는 영험이 있는  기도처로 말려져 있다. 대웅전은 앞면3칸에 옆면 1칸의 그야말로 형식만 갖준 모양으로1890년대에 그려진 탱화가 한점 남아 있어 그 이전에도 암자의 명맥은 유지가 된 것 같다. 

 

 

 

 

도덕암에 올라보면 암자의 위치에 놀란다. 앞으로 펼쳐지는 전망은 그야말로 그칠것이 없다. 동해에서 올라오는 일출을 감상할 수 있는 멋진 조망을 가진 암자로 이곳에서 하루 쯤 지낸다면 그야말로 몸에 찌든 때가 정화가 된다는 느낌이 들 것 같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 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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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김해여행)은하사 대웅전의 쌍어문 문양이 특이.


신어산에서 가장 큰 사찰은 은하사다. 은하사는 인도의 아유타국의 허왕옥이 가야 김수로왕의 배필이 되기 위해 오빠 장유화상과 함께 강서구의 주포마을에 도착을 하였다. 허왕옥 이곳에서 배에 내려 처음으로 땅을 밟았다고 전한다. 그 후 김수로왕을 만나 신행길에 가락국의 왕궁으로 들어가 왕후의 자리에 오른다. 그의 오빠와 처음 본 신어산은 그들에게 어떤 마음으로 보았을까. 인도 아유타국의 산 같이 아담하게 여겼을까. 신령스런 물고기의 산 신어산에다 장유화상은 서림사를 창건하게 된다. 물론 그 옆에는 동림사와 함께...

 



 

 

 

☞(경남여행/김해여행)서림사가 곧 은하사. 은하사 대웅전의 쌍어문 문양이 특이.


서림사는 현재의 은하사 옛 명칭이다. 은하사는 현재의 신어산이 은하산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앞에도 언급하였지만 은하사의 창건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며 그저 전설에 전해 오는 이야기로 이게 사실이라면 은하사 동림사등 국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사찰로 인정을 받게 된다. 부산 강서구 지사동의 흥국사도 이곳에서 김수로왕이 허왕옥을 맞아 신방을 꾸민 곳이며 그 당시 돌배에 싣고 온 코브라 문양의 사왕석이 이곳에서 출토되어 전설이 사실을 뒷 받침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유물이다.

 

 

 

 

 

☞(경남여행/김해여행)은하사 임진왜란때 화재로 소실. 은하사 대웅전의 쌍어문 문양이 특이.


은하사에서 출투된 토기 파편을 보면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중기까지 법통이 이어오던 은하사는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동림사와 함께 잿더미가 되었다. 지금 대웅전의 모습은 조선 후기의 양식을 따르는 것으로 보아  그때에 와서 중건을 하였던 것 같다.

 


 

 

 

 

☞(경남여행/김해여행)김해 은하사.은하사 대웅전의 쌍어문 전설일 뿐일까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38호로 지정된 대웅전에는 부처님을 모시는 수미단에 허왕옥과의 전설과 연관되는 고기 문양이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쌍어로 이 문양은 가락국의 국장이자 하나의 상징이었다. 고대의 바빌로니아인들이 물고기가 인간을 보호해 준다며 하나의 상징처럼 여겼다. 이 후 인도에 전해지고 힌두교의 여러 신과 함께 인도에서는 널리 사용을 하였다. 그 쌍어문이 지금 은하사 수미단에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전설만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맞아 떨어지는 것 가다.

 

 

 

☞(경남여행/김해여행)신령스런 물고기산 신어산 아래 은하사 대웅전의 쌍어문 문양이 특이.


현재의 은하사 주차장애서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작은 연못과 만난다. 이 연못에 놓인 반야교를 지나 머리를 들면 정면에  초라한 건물이 나온다. 이곳을 들어서면 은하사의 선계에 들어선다. 정면에는 신령스런 물고기의 산인 신어산이 은하사를 감싸고 있는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역시 명산에는 명찰이란 말을 실감하게 된다.

 

 

 

 

 

☞(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동천으로 알려진 은하사. 은하사 대웅전의 쌍어문.


처음만나는 건물이 2층으로 된 범종루이다. 근래에 만들어진 범종루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웅장하며 장엄한 모습에 보는이를 압도한다. 계단을 오르니 발밑 한켠 바위에 신어동천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곳 경치가 뛰어남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경남여행/김해여행)은하사 대웅전의 쌍어문 문양이 특이. 힐링이 되어요.


정면으로 대웅전이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주위의 모습과 함께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신어산 은하사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가 '달마야 놀자'가 이곳 은하사에서 촬영이 되어 전국적으로 관광객이 많이 찾고 있다. 조용한 은하사에 들러 심신을 힐링해 보세요. 넘 좋습니다. ㅎㅎ



 

 

 

 

 

 

 

 

 

 

 

 

 사진:국제신문 홈페이지 발췌

 ☞(경남여행/김해여행)은하사 대웅전 수미단의 쌍어문 문양이 신기.


대웅전  수미단에 조각되어 져 있는 쌍어문으로 일반 사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인도의 아유타국 허왕후와 장유화상에 의해 들어 왔다는 남방불교 전래설을 주장하는 하나의 이유로 보인다.



 

 

 

 

 

 

 

 

 

 

이곳은 스님의 거처로 출입을 금지한다고 되어 있다. 이곳에 서림사가 위치하였다는 합니다. 신어산 은하사나 동림사는 대중 교통이 바로 연결이 되지 않는 불편함이 있다. 인제대학에서 하차를 하여 도로를 따라 걷는 수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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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산 동림사. 인도의 태자 장유화상이 창건 동림사.


 김해시의 주산인 신어산은 김해시를 둘러 하나의 울타리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현재에도 신어산은 엄마의 품속 같이 넓고 아늑하여 김해 시민에게는 휴식처로서 그 역활을 다하고 있다. 김수로왕의 가야시대에도 신어산은 지금과 같은 역활을 하지 않았을까.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왕옥은 인도의 아유타에서 오빠인 장유화상과 함께 돌배를 타고 이곳으로 왔다. 


 






☞(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산 동림사. 인도의 태자 장유화상이 창건 동림사.남방전래설을 주장(?).


장유화상은 아유타의 태자지만 승려로서 불교를 전래하였다. 국내에서 아직 공식적으로는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지만 처음으로 불교를 전래한 인물로 회자된다. 장유화상에 의해 불교가 북방전래설로 들어 온것을 뒤집고 남방전래설로 들어 왔다며 그에 관한 전설 같은 이야기와 유물이 현재 남아 있어 더욱 신빙성을 준다.





☞(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산 동림사. 인도의 태자 장유화상이 창건 동림사.가락국의 안전과 번영을 염원하며 창건.


허왕옥의 오빠 장유화상은 이곳 가락국에서 서림사(현은하사) 동림사. 영구암, 부은암. 모은암, 장유암등 수많은 사찰을 창건하는데 오늘은 신어산의 동림사를 댕겨 왔다. 동림사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장유화상이 지금의 은하사(서림사)와 함께 가락국(43~532) 초기에 세웠다. 그 당시에는 규모가 꽤 큰 사찰로 서림사와 동림사를 창건하였는데 서림사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림사가 되었다한다. 장유화상이 이곳 동림사에 담은 뜻은 부처님의 뜻으로 가락국의 안전과 번영을 염원하며 창건을 하였다하며. 






☞(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산 동림사. 인도의 태자 장유화상이 창건 동림사.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화엄스님에 의해 중건.


1500년의 법통을 이어오던 동림사는 1592년 임진왜란과 함께 소실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후 영구암에서 주석하시던 하엄스님이 잡초로 뒤 덮혀 있던 이곳을 찾아내어 현재의 도량으로 일구었다. 현재의 동림사는 최근에 올려진 사찰로 지장보살을 불전에 모시고 있다. 






☞(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산 동림사. 인도의 태자 장유화상이 창건 동림사.은하사보다 한적한 동림사.


동림사는 일천한 역사에 비해 현재 남아 있는 문화재는 없지만 신령스러운 물고기란 뜻의 신어산를 뒤로 두고 분잡한 은하사에서 비해 한적하며 조용한 사찰로 한번쯤 찾아가 볼만 하다.






다대포에서 바라보면 거북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신어산. 그아래 자리잡은 동림사의 모습이 너무 조용하다.







대원보전




대원보전안에 모신 지장보살







동림사에서 머리를 들어보면 보이는 영구암의 모습




마침 찾아간 시간이 늦은 시간이라 비구니스님이 범종을 치고 계시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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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산 은하사 범종루 의 나무 기둥에 경악.

 

신어산의 은하사에는 특별한 건물이 있다. 먼저 은하사 경내를 들어서면 절을 대표하는 대웅전도 아니요 우리를 압도하는 목조건물은 2층의 범종루다. 굵은 나무를 다듬은 듯, 다듬지 않은듯 생긴 모습 그대로 기둥을 삼아 2층을 올린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나무 하나하나의 둘레를 보면 장정 두세명이 두팔을 벌릴 정도로 크며 굵은 밑 둥치를 보면 2천년 역사인 은하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곳 범종각은 2000년경에 세워졌다하니 짧은 역사에 비해  감동은 더 없이 크게 느껴진다.

 



 

 

 

 

☞(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산 은하사 범종루 의 나무 기둥에 경악. 은하사 달마야 놀자 촬영 사찰로 유명

 

 

김해와 부산에서는 은하사를 알 고 있지만 영화 '달마야 놀자'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전국적인 지명도의 사찰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사실 이곳은 오랜 역사에 비해 변변한 문화재는 보기 힘들다. 그중 대웅전과 그 안밖으로 그려진 벽화 정도인데 이리 어마무시한 범종루를 만나게 되니 필자가 몇군데 가보지 않았지만 가장 크며 장엄한 범종루로 보여진다. 

 

 

 

 

☞(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산 은하사 범종루 의 나무 기둥에 경악. 현수막등으로 경관 훼손.

 

 

한가지 아쉬운점이 있다면 범종루를 축대 높이로 맞추다 보니 2층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니 범종 목어등은 모두 2층에 올려져 있고 1층은 그냥 하나의 빈공간으로 남아 있는데 이것이 문제다.  종루 건물은 많은 시주를 들여 삐까번쩍하게 지어 놓고 1층 안을 들여다 보니 창고처럼 사용을 하고 있는게 관광객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리고 기둥에다. 홍보용 현수막을 막 묶어 두는게 처음부터 기둥을 이리 현수막 묶는 기둥으로 사용을 할려고  만들었지는 않을 것이다.

 

 

 

 

☞(경남여행/김해여행)신어산 은하사 범종루 의 나무 기둥에 경악. 부산 김해시민에게 유명 사찰.

 

 

은하사를 찾는 관광객에게 좀더 나은 은하사로 감동을 주기 위해서라도 현수막은 따로 걸 수 있는 기둥을 세워 질서 정연하게 걸고 1층 종각안과 밖의 잡동사니들을 치워 더욱 멋진 범종루을 보여 주면 관광객의 한사람으로 너무 좋을 것 같다.  그리하면 은하사의 범종루는 단연코 더욱 유명세를 떨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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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말사인 신어산 영구암. 맑은날 대마도도 바라보인다.





☞(경남여행/김해여행)거북이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신어산 영구암


영구암은 김해의 영산인 신어산의 8부에 자리를 하고 있다. 영구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 14교구 범어사의 말사이다.   





  

영구암 대웅전



☞(경남여행/김해여행)거북이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신어산 영구암. 범어사 말사.


창건 연대는 영구암도 은하사나 동림사와 비슷한 시기로 보고 있는데 인도 아유타국의 태자인 승려 장유화상(허보옥)과 가락국 수로왕의 왕비로 허왕후(허왕옥)가 오빠인 장유화상과 함께 돌배를 타고 이곳 부산 강서구 망산도에 당도한 전설은 모두 알 것이다.




영구암 삼성각,



☞(경남여행/김해여행)거북이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신어산 영구암. 인도의 장유화상에 의해 창건.


그의 오빠 장유화상에 의해 후한 광무제 건무 18년(서기 42년)에 이곳 신어산의 서림주산에 김수로왕의 원찰인 영구암을 창건하였다 




삼성각내부



☞(경남여행/김해여행)거북이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신어산 영구암. 창건당시 구암사로 불리어.


신어산 정상부를 둘러 싸고 있는 바위병풍이 다대포 몰운대 방향에서 보면 거북이가 지혜의 바다로 중생을 태우고 나아가는 듯한 모습이라하여 창건당시에는 구암사로 불렀다.




영구암의 3층석탑의 노반.



그리고 영구암 주변으로 삐쭉삐쭉 기치 창검이 솟아 있어 영남에 오른쪽 금강을 의미하는 '우령 금강산'이란 명문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멀리서 바라보는 신어산은 거북이 몸체이며 영구암이 위치한 곳이 거북이 머리라 하여 영구암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다.







신어산의 이름에서 보듯 영구암 법당 밑의 우물에서 ‘신령스런 물고기’인 신어가 살았다는 전설에 의해 가야불교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영구암 삼층석탑의 자리는 거북이의 머리에 해당하며 그곳에서 본 전망은 일망무제다.




☞(경남여행/김해여행)거북이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신어산 영구암. 영구암 삼층석탑은 인도간다라 양식의 노반.


영구암 3층석탑이 자리한 곳에서 남으로는 맑은날 일출과 함께 일본의 대마도가 선명하며 일몰은 가락국에서 영구암이 으뜸이라하였다. 그리고보면 해뜰때 일출과 일몰을 같이 볼 수 있는 곳이 흔치 않을 것 같다.   



 




 흥덕왕때는 현재 영구암의 뼈대인 축대를 쌓아 고려때에 불상과 삼층석탑을 조성하여 사세를 지켜오다 근자에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법당을 세우며 여러번의 중수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대웅전 앞에 고려때 세워진 영구암 삼층석탑이 있다.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473호며 신어산의  거북이 머리부분에 해당되는 돌출된 바위위에 세워져 있다. 






원래 삼층석탑으로 추정 되는데 남아 있는 석탑의 모양은 상 하대갑석과 1,2,3층의 옥개석과 노발 그리고 복발부분이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부재로 보면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추정되며 다른 석탑과 다른 특이 점이 발견되었다. 노반과 복발이 하나의 돌로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인도 간다라 지역 탑을 축소시켜 놓은 모습이라한다.





대웅전 내부


























흥덕왕때 처음 쌓았다는 영구암 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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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골사 





☞(경남여행/밀양여행) 영남알프스 운문산 아래 석골사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에는 일천미터의 산군들이 둘러쳐져 영남의 알프스로 통한다. 산세가 험하며 깎아지른 단애가 병풍을 이루는 이곳에도 옛 선승들이 찾아 들어 둥지를 틀었다. 지금이야 가지산 운문산등 산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는 가지산을 위시한 이 산군을 운문산으로 불렸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가지산에서 낙동정맥이 흘러가는 안부에 울주군 언양에서 경북 청도군으로 넘어 다닌 재가 있어 현재에도 운문령이라 부르고 있다, 

 






☞(경남여행/밀양여행) 영남알프스 운문산 아래 석골사. 통도사 말사 석골사.


밀양 산내쪽에서는 운문산을 석동산으로도 불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당시에 이 근방에서 가장 먼저 의병이 이곳 운문산에서 일어나 석골계곡인 석골사는 의병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석골사 사실 이름 자체만을 생각하면 비장함이 감돌며 의시시한 느낌이 절명칭에서 풍긴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양산 통도사의 말사로 되어 있다. 







☞(경남여행/밀양여행) 영남알프스 운문산 아래 석골사. 비허선사 창건 석골사.


현재 청도쪽 골짜기에 운문산 자연휴양림이 자리 잡고 있다. 석골사는 석굴사 또는 노전사등으로도 불렸는데 560년(진흥왕 12년) 비허선사께서 창건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비허선사께서 이곳에 토굴를 짓고 수도하며 운문사를 중창한 보양국사와 친분으로 두 선승이 서로 왕래를 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773년(혜공왕 9년)에 법조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유측하건데 법조께서는 중창을 한 것 같다.






 

☞(경남여행/밀양여행) 영남알프스 운문산 아래 석골사.


운문사의 보양국사는 다 아시는 것처럼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알려져 있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인물로 태조왕건은 그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운문사는 창건이래 최대 번성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영향으로 석골사도 암자를 9개나 거느리며 발전을 하였는데 운문산 중턱에 남아 있는 상운암도 그 당시의 암자로 추정되며 신라때 화랑들이 이곳에서 수련을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경남여행/밀양여행) 영남알프스 운문산 아래 석골사. 임진왜란 때는의병들 은신처 석골사.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병은 삼랑진 작원관을 함락하며 밀양으로 밀어 붙 혀 올라 왔다. 오한 손기양 이경홍 이경승 형제등은 이곳 석동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석골사를 본거지로 활동을 하였다. 1753년인 영조 11년에와 함화대사께서 빛바랜 석골사를 다시 중창하여 근래에까지 이어져 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6.25가 발발하고 빨갱이가 석골사를 은거지로 삼는 것을 우려해 우리 토벌대에 의해 고의로 불을 질러 완전히 소실되었다. 







☞(경남여행/밀양여행) 영남알프스 운문산 아래 석골사. 한국동란때 빨갱이들의 은신처로 이용될 것을 우려 소실시킴.


폐허로 내려오다 1965년 마을 신도들에 의해 중창되어 그 후 다시 대광전 산신각 요사채등을 새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골사는 일천한 역사에 비해 남아 있는 유물이 거의 없다. 대광전의 석조아미타삼존불과 절구·석탑 재료 등만 남아 있을 뿐 완전히 파괴되었다.








☞(경남여행/밀양여행) 영남알프스 운문산 아래 석골사. 석골사 석골폭포와 주목이 볼거리.


대광전 앞에는 특이한 나무가 한그루 있다. 수령이 50년 이상을 추청하는데 주목이란다. 나무가 붉은색을 띠고 있어 적백송으로 불리는데  불상과 염주등을 만드는 소재라 한다. 



 



필자는 이때까지 보리수로 알고 있었는데 최근 방문에 절의 분위기가 많이 변해 있어있다. 전라도 화순의 대원사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사찰을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았다.






이곳 종각 옆에도 낙태수술로 이세상의 맑은 공기를 마셔보지도 못하고 사라진 아이들을 위한 작은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아가야. 미안해" 
























































석골폭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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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 삼화령. 삼화령의 연꽃대좌 미륵불은 어디에...

 

경주 남산은 뚜껑없는 박물관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그만 큼 신라시대 문화재의 불상 석탑이 천년의 세월을 망각하며 오늘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 불상과 석탑이 세월의 무게앞에는 어쩔 수 없는지 올바른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을 찾기가 힘들정도이다. 불상은 불두가 달아나고 석탑은 해체되어 내가 석탑이었다며 그 흔적만 남아 있는 것도 부지기수다.

 

 

 

 

남산을 가다보면 해목령 삼화령등 고개가 현재에도 남아 있다. 삼화령은 신라시대때 부터 이용된 길로 서라벌에서 언양으로 이어지든 고갯길이다. 그 삼화령이 현재에도 우리가 이용을 하고 있는 임도길이라면 우리는 천년전의 시간여행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 삼화령. 삼화령의 연꽃대좌 전삼화령은...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일조를 올린 곳인 상서장에서 올라오면 안내판에 전삼화령 표지판이 있다. 삼화령과 전삼화령. 남산을 사이에 두고 두곳의 삼화령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 전삼화령인 이곳에서 삼화령 애기부처가 출토되어 이곳을  삼화령으로 보는 이도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 삼화령. 불국토는 경주 남산 삼화령의 연꽃대좌

 

그래서 앞에 전할전(傳)자를 붙혀 전삼화령이라 하지만 삼화령을 연꽃대좌가 있는 이곳으로 보는 이가 지배적이다. 삼화령 안내판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삼화령을  삼화수리라 하는데 수리의 뜻은 산정상 즉 봉우리를 말한다. 금오봉과 고위봉 그리고 이곳 연꽃대좌가 있는 곳을 말하며 남산을 불국토 즉 부처님 산으로 보고 세봉우리를 하나의 연꽃으로 비유한 것은 아닌지 그래서 삼화령이라 이름을 붙혔을까. 안내도에는 세개의 봉우리가 삼각형을 이룬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삼화령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 삼화령. 삼화령의 연꽃대좌 충담스님과 경덕왕의 전설...

경덕왕과 충담스님의 일화로 경덕왕은 덕망있는 스님을 찾아 가르침을 받고 왕사로 임명하려하지만 충담스님은 극구 사양을 한다. 경덕왕도 어쩔 수 없는지 스님에게 가르침으로 향가를 지어 달라고 하니 스님은 흔쾌히 허락을 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는데 "(중략)~임금은 임금같이 신하는 신하같이 백성은 백성같이 살면 나라는 태평을 지속한다"는 "안민가"로 자신의 할도리를 다하면 자연히 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이야기로 오늘남 귀감이 되는 대목이다. 이 얼마나 멋진 글인가.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 삼화령. 충담스님 삼화령의 연꽃대좌 미륵불에게 차를 공양...

 

요즘 정치인들을 위해 충담스님이 남긴 것이 아닐까. 충담스님은 이곳 삼화령  연꽃대좌의 부처님께  매년 3월3일과 9월9일날에   차를 공양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그럼 삼화령의 미륵부처는 어떤 연유로 이곳에 있게 된 것일까.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 삼화령. 삼화령의 연꽃대좌 미륵불의 전설 생의사는 어디에...

 

 

선덕여왕때로 올라간다. 어느날 생의스님의 꿈에  노승이 나타나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였다. 노승은 남산의 골짜기로 안내를 하면서 내가 이곳에 묻혀 있어니 나를 꺼내어 시원한 곳에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며 사라졌다. 스님은 그곳의 풀을 묶어 표시를 한 후 꿈에서 깨어 났다. 지난밤의 꿈이 하도 생생하여 그곳을 찾아가 보니 꿈속에서 묶어두었던 풀을 발견하고 흙을 파니 돌미륵이  나왔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 삼화령. 삼화령의 연꽃대좌 미륵불은 60대 임도 공사중 분실...

생의스님은 미륵불을 현재의 연꽃대좌가 있는 이곳에 안치를 하고  공양을 위해 생의사를 지었는데 현재도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 연꽃대좌의 미륵불도 1941년인 일제강점기때는 상반신이 잘려나간 상태로 연꽃대좌위에 남아 있었다하며 그 후 1960년대 남산에 있는 지금의 임도를 개설하면서 종적을 감추었다전한다. 혹 누군가가 임도를 개설할때 트럭이 올라오고하니 그때 업어 간것은 아닌지...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 삼화령. 삼화령의 연꽃대좌 미륵불을 위한 가림막 설치...

 

지금 연꽃대좌를 보면 지름이 2m이며 미륵불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을 설치한 흔적으로 네 귀퉁이에 기둥을 세운 것으로 보여지는 홈이 남아 있다. 연꽃대좌 아래에는 충담스님이 차를 올렸던 곳으로 보여지는 편편한 곳이 아직도 남아 있다하니 천년전의 흔적을 지금도 볼 수 있다니 놀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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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용장사곡석가여래좌상. 남산의 석불중에서 특이한 모습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용장사지에 있는 용장사곡 석가여래좌상은 남산의 석불중에서 가장 특이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황남빵 같은 삼륜대좌에다그 위에 올려진 석불좌상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하다.

 

 

 

 

이 불상은 미륵장육상으로 추정되는데 1932년 일제강점기때 일인들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에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불상의 불두는 달아나고 없다.

 

 

 

 

석불좌상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목에 3줄의 삼도가 그어져 있고 좌측 어께에는 가사의 매듭이 묶여져 있어 조각이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마무리되어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용장사곡석가여래좌상. 미륵장육상으로 추정...


용장사지에는 현재 3기의 보물이 남아 있다. 삼층석탑과 마애여래좌상 그리고 석가여래좌상인데 그 나름의 특징이 있지만 이곳 석가여래좌상이 가장 웅장하며 멋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불두까지 남아 있다면 이불상은 용장사지가 아닌 남산에서 가장 멋진 불상으로 남아 있을 것 같다. 신라 석공의  조각 기법은 남다른 것 같다. 시루떡 주무르듯이 바위를 깨어 이리 예술성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내니 말이다.

 

 

 

 

경주남산에 혹 여행을 가실분들은 이곳 용장사지는 꼭 함 들러보자. 한번 방문으로 3개의 보물을 접할 수 있는 잇점이 있다. 그것도 남산에서는 예술성이 아주 뛰어난 작품들로 힐링의 기쁨도 느끼고 올수 있다. 8세기 작품으로 추정,

 

 

 

다양하게 잡아 본 용장사곡석가여래좌상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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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통일 신라 용장사


경주국립공원 남산지구 용장골은 용장사지 옛 절터가 남아 있다. 지금은 세월의 흔적이 무디어진 만큼 용장사의 영화스러움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깡그리 사라진 상태다. 약간의 석축만 남아 이곳이 절터임을 보여 준다. 용장사는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서 금오신화를 집필했던 곳으로 유명하며 조선 세조때 까지도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국내에서 가장 높은 기단석.


용장사지 오른편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면 용장사의 옛 전성기를 보여 주는 걸작인보물이 3점 반긴다. 하나는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으로 자연석의 암벽에 보일듯 말듯 조각한 솜씨로 보아 예사롭지 않은  작품이다. 그와 함께 용장사지에서 더욱 돋보이는 문화재로 삼층석탑이 남아 있는데 아마 국내에서는 가장 크고 높은 석탑이 아닐까 싶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경주 남산을 기단석으로 사용한 삼층석탑.


이 석탑이 기존의 석탑과 다른점이 있다. 일반 석탑은 탑을 올리기 위해서 탑 밑에 기단석을 세우고 위에 탑을 올리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기단석은 생략하고 자연석 위에다 윗기단만 설치를 하고 그 위에 바로 삼층석탑을 올렸다. 남산의 자연석 암반으로 남산 전체를  기단으로 만든 것이다. 옛사람들의 생각에 다시금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남산의 상징 용장사곡 삼층석탑


그러니 전세계적으로 이리 높은 석탑은 아마 찾아 보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시대 작품으로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간결하면서도 날렵한 이미지를 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많이 훼손이되어 있다는  점이다. 귀퉁이는 날아가고 없는 모습이지만 앞으로도 그자리를 굳건히 지켜 남산의 상징처럼 지켜나가길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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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전체가 문화재 실감

 

경주에는 길거리에 뒹구는 돌맹이도 문화재란 이야기를 한다. 그만큼 흔한게 사실이고 지금 이리 굴러 다니는 돌맹이도 그 당시 부터 굴러 다닌것이기 때문이다. 그 만큼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데 얼마나 많으면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옆에 시내버스주차장이 있다. 그곳 한켠에 가면 이리 석불입상이 서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전체가 문화재 실감. 경주 노서동 석불입상

행색이야 초라한 모습이지만 엄연히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천년이상을 그 자리에서 지켜왔다. 모습이야 험난한 세월을 겪어선지 너무 안타까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불두는 처참하게 깨지고 불신은 또한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이 심하다.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국립공원 노서동 석불입상. 남항사의 석불입상...

 

광배는 머리둘레의 두광과 몸둘레의 신광이 2중선으로 처리가 되어 있으나 신광의 선은 형체도 알 수 없을 정도다. 이곳에서 북쪽 인근에 삼랑사터 당간지주가 남아 있고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삼랑사 남쪽에 남항사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곳을 남항사터로 추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이곳은 경주시내버스 주차장으로 하루 수백 아니 수천대의 버스들이 드나들고 있는 버스 주차장이 되어 버렸다. 

 

 

 

 ☞(경북여행/경주여행)노서동석불입상. 현재 경주시내버스 주차장

 

옛 절터의 흔적은 그 어느 곳에서도 전혀 알 수 없고 이곳 전각 안의 불상만이 매연을 뒤집어 쓴체 그때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나와 100m 거리에 자리한 석불입상이 주차장 한쪽 귀퉁이에서 옛 남항사 절터였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어 왠지 가슴이 먹먹하다.

 

 

 남항사에는 신라 효소왕때 11면 관음보살이  삼랑사 경흥스님의 병을 완치하게 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사찰로 현재 그 사찰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1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 156-8

찾아가기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나와 형산강 강둑 큰 도로를 따라 100m가면 경주시내버스 정류장이다. 그곳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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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 신발견 마애대불 남산 열암곡에서 발견...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였을 당시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ㅎㅎ그 기분을 알 수는 없지만 이곳 경주 남산에서 마애여래입상을 발견하였을 당시의 그 기분이 아니었을까.그래서인지 이름도 '신발견 마애대불'로 지도에 포기되어 있다. 문화재청으로 보면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흥분을 하였을 것 같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 신발견 마애대불 무게만 70톤...

이곳 열암곡의 신대륙 마애불의 발견은 참 우연의로 밖에 볼 수 없다. 기존에 있던 석가여래좌상 때문이다.  경주의 많은 불상이 머리가 떨어져 나간 상태로 불신만 발견되고 아니면 불두만 남아 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 열암골의 석불좌상도 불두는 사라지고 몸만 남아 있었는데 그게 2005년에 우연찮게 답사객에 의해 계곡에서 발견이 되었다. 2007년도에 석불좌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앞으로 넘어져 불상의 존재를 알 수 없는 바위의 석불입상을 처음 발견하게 된 것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 신발견 마애대불 천년만에 깨어나다...

 

불상이 새겨진 바위의 무게가 70톤으로 추정을 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이다. 5m의 입상으로 바위가 앞으로 넘어저  1000년의 세월을 땅속에서 묻혀 있다보니 현재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 발견 당시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이 불상은 볼 수 가 없도록 막아 놓았다. 답사때 보니 안전을 위해 막아 놓았는데 누군가 적당한 곳에 볼 수 있도록 구멍을 작게 내 놓았다. 그래서 아쉽지만 사진도 찍고 구경을 하였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 신발견 마애대불 5m의  대불...

현재의 불상 모습을 보면 아슬아슬한 기분이다. 사진으로 보는 것 처럼 절묘한 모습을 하고 있다. 맞은편 바위와 불두인 코의 간격을 보라. 잘못하면 부처님의 얼굴이 박살나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그 부근으로 센스가 설치되어 바위의 이상유무를 지금도 예의 주시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불상이 제모습을 찾는 날 남산은 또 한번 도약을 위한 계기가 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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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관음보살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관음보살은 어떤 분인가에 대해 알아보자. 관세음보살로 항상 중생과 함께하고 중생의 아픔을 보듬어주고 고난으로 부터 따뜻하게 품어 주며 어머니 같은 자애심을 가진 부처를 말한다. 그런 관세음 보살은 33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관세음보살의 대표적인 모습이 우리가 많이 보아온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 버드나무 가지, 정병을 든 관음보살

 

진통제와 피부병의 치료제로 쓰이는 버드나무가지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중생을구제하는 과음보살의 단골 모습이다. 그러나 정병을 든 관음보살도 있는데 버드나무와 마찬가지로 질병이나 전염병으로 부터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기위한 부처로 경주 남산의 마애관음보살상이 이와 같은 관음보살상임을 알수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 남산관음보살은 정병을 든 모습

 

냉골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등산로에서 불두가 달아난 석불좌상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100m만 올라가면 치 솟은 돌기둥에 돋을세김을 한 마애관음보살입상을 만날 수 있다. 머리에는 삼면보관을 쓰고 앞에 작은 불상이 모서져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 정확한 연대는 통일신라시대

 

아직도 입술에 붉은 기운이 감도는 보살상으로 입가에 화사한 미소를 띤 자애로운 부처님의 모습을 잘 나타내었다. 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는데 이는 현세에서 자비로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관세음보살임을 보여준다. 연꽃무늬 대좌 위에 서 있는 관음보살상은 정확한 조성 연대는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로 보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 자연마모가 심한 모습

 

이곳 관음불상도 남산의 여타 불상처럼 자연상태로 그대로 노출이 되어 비바람을 맞아선지 훼손이 심한 모습을 하고 있다. 불신은 윤곽자체가 많이 마모가 된 상태로 보여 진다. 이곳 마애관음보살상은 경주남산연구소에서 만든 지도에도 이 사진이 올라와 있다.

 

 

 

 

 


다음문화유산 http://heritage.daum.net/heritage/21179.daum#intro과 문화재 해설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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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상선암 마애석가여래좌상 금오산을 대표

 

경주 남산을 대표하는 불상은?. 남산에는 많은 불상과 석탑 그리고 99 암자의 암자터등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남산를  상징하는 대표적은 문화재는 어디일까. 남산에서 유일한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칠불암마애불상군일까. 아니면 금오신화를 집필하였다는 남산의 용장사지의 삼륜대좌불일까. 그도 아니면 신선암 마애불일까.

 



 

 

 각자 가지고 있는 쟁쟁한 불상이다. 그러나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위치하고 있는 상징성을 보면 이곳  상선암 위 암봉의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이 아닐까 싶다. 듬직한 7m의 크기로 이곳 냉골계곡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리고 마애불이 앉은 품새는 남산의 금오산정으로 향하고 있다. 금오산 정상에서 흘러 내려온 능선은 상사바위에 이르러 절정을 보여 주는데 그 치솟은 바위들이 소금강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규모에 비해 웅장하다. 상사바위 인근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마애불의 모습은 마치 신선이 되어 바라보는 모습이라 할 것 같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 냉골에서 가장 큰 규모

 

이곳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자연 암반을 파내어 불두쪽은 완전한 모습으로 입체감을 주었고 불신은 선을 그어 파낸 모습을 하고 있다. 문화재청의 안내판을 보면 풍만한 얼굴에 눈썹은 둥글고, 눈은 반쯤 뜨고 입은 굳게 다문 모습이다, 민머리에 턱은 주름지고 귀는 어께까지 내려오며 옷은 양어께에 걸쳐져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

 

 이 불상은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자연석을 깍아 광배를 만들었고 가슴에 드러나는 속옷의 매듭, 손가락과  발가락의 모습을 보면 섬세한 조각 예술품으로 보여진다. 마애석가여래좌상의 조성시기는 전체적인 양식으로 봐서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작품으로 보여진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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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삼릉계곡 선각육존불. 남산에 돌맹이는 문화재급...

 

경주에는 야외 박물관으로 불리는 곳이 있다. 남산이며 금오봉과 고위봉의 두 봉우리로 나누며 이곳이 신라 천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숨쉬는 곳이 아닐까싶다. 남산 중에서도 배동의 삼릉인근에 가장 많은 문화재가 분포하고 있다. 남산에 나 뒹구는 바위를 자세히 보자 혹 아는가.그게 문화재가 될지를...신라 천년의 흔적을  찾아 경주 남산으로 떠나보자.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삼릉계곡 선각육존불. 경주 남산에서는 귀한 선각육존불...

 

경주 남산 배동은 삼릉으로 불린다. 세 왕릉이 있어 삼릉이라 부르며 이곳으로 흘러 내려 오는 계곡을 냉골이라 한다. 경주 남산 산행의 대표적인 코스로 상선암을 오르다 보면 만나는 많은 문화재 증에서도 특이하게도 남산 지역에서는 좀체로 보기가 힘든 선각으로 새긴 육존불을 만날 수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손톱으로 그었나 선각육존불...

 

누군가 손톱으로 그었다 해도 믿을 수 있는 모습이다. 화강암벽에 좌우로 나누어 여섯분을 모두 새겼다. 오른쪽 바위면에는 가운데다 본존불을 모셨는데 오른쪽 어께에 법의만 걸치고 연꽃대좌에 앉아 있다. 그 좌우에도 연꽃 대좌에 서 있는 보살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세분을 '석가삼존'이라 통칭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삼릉계곡 선각육존불. 6분의 불상으로 새겨진 모습...

 

왼쪽 바위면을 보면 중앙의 본존은 연꽃대좌에 서서 있는 모습이고 좌우의 보살은  윗옷은 벗고 한쪽 다리는 꿇어 앉아 잇는 자세를 하고 있다. 이를 아미타삼존불이라 한다. 그리고 오른쪽 암벽 위에는 선각육존불을 보호하기 위해 법당을 세운 건물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선각육존불은 경북 지방유형문화재21호 

 

지금 선각육존불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72-6호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경상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21호 지정되어 있는데 문화재가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 되어 보존상태가 심각할 정도로 우려스럽다. 특히 우측은 바위면에 물이 흘러 내려오는지 바위 상태의 모습 보면 우리 문화재 관리 상태를 보는 것 같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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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 화왕산 관룡사. 1500년 전 원효가 창건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관룡사는  가야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천년고찰이다. 신라 26대 진평왕(538년)때 증법국사에 의해 창건된 관룡사는 원효대사가 화왕산 산상의 월영삼지의 연못에서 아홉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을 관룡사라칭하였다. 원효가 제자 1천여명에게 화엄경을 가르쳤던 곳으로 신라8대 사찰의 하나다. 관룡사는 화왕산군립공원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봄에는 진달레와 가을의 억새로 전국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곳으로 화왕산과 함께 늘상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곳이다.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 화왕산 관룡사. 보물 4점과 지방문화재 5점 

 

특히 압권은 사찰 뒤로 펼쳐지는 병풍바위가 설악산의 천화대나 월출산의 한 부분을 잘라온 것 같은 절경이다. 관룡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데 대웅전(보물 제212호) 약사전(보물 제146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  용선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의 4점의 보물과 약사전 삼층석탑(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 원음각등 5점의 지방문화재가 있다. 지금 부터 관룡사의 문화재를 하나하나 찾아가 보자.

 

 


 

 

관룡사를 들어서면 먼저 작은 출입구가 보인다. 계단을 올라서면 통과하게 되어 있는 문으로 이전에는 이쪽문으로 출입을 하였던 것 같다. 아담한 문을 지나면 옛 빗돌이 서 있고 관룡사와 병풍암이 펼쳐진다.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느낌이다.

 

 

 

 

 

 

 

 

 화왕산 관룡사란 황금색의 현판이 빛을 발한다.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 화왕산 관룡사. 관룡사 원음각

 

관룡사 원음각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40호로 사찰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범종각이 있다. 정면에 2층으로 된 건물이 원음각이다. 대웅전에서 바라보면 1층으로 보이는 건물은 1634년인 인조12년에 처음 세워졌다. 원음각에 있던 상량문을 보면 영조39년인 1763년에 크게 중건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숙종30년인 1704년에 발생한 산사태로 인해 다시 세운것으로 보여 진다. 정면3칸, 옆면2칸의 이익공계로 바닥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이건물의 용도는 불구를 보관하거나 설법장소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 화왕산 관룡사. 관룡사 대웅전

 

대웅이란 부처님의 몸을 의미하는데 이 건물은  1965년 당시에 해체를 하여 복원을 하였다. 복원때 1749년 중창을 할때의 기록들이 상량문에서 발견되었는데 숙종30년인 1704년 대홍수로 인해 관룡사는 산사태로 직격탄을 맞았던 것 같다. 그때 관룡사는 많은 건물들이 훼손되어 1749년에 보수가 이루어 진것으로 보인다. 처음 대웅전의 건립은 1401년에 세워졌지만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것을 1617년~1618년에 다시 세워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면3칸 옆면3칸의 다포식 건물로 겹처마이며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 화왕산 관룡사. 관룡사 약사전 삼층석탑

 

관룡사 약사전 삼층석탑은 형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따르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점은 아랫 받침대 네면에 코끼리의 두눈을 형상화한 안상이 두개씩 조각되어 있다. 이는 장식적 의미이며 탑의 지대석을 따로 세우지 않고 자연 암반을 그대로 이용한 방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ㅣ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 화왕산 관룡사. 관룡사 약사전

정면과 옆면이 각각 1칸식인 맞배지붕이다. 주위의 건물에 비해 관룡사 약사전은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보물 제146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립시기를 보면 국보로 1404년 경에 지어진 송광사 극락전과 1473년 경에 중건된  도갑사 해탈문으로 역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와 같은 건축 양식을 보여 주며 15세기로 보여진다.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 화왕산 관룡사. 관룡사 약사전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519호로 고려시대 불상이다. 머리위의 둥근 육계는 가르침을 의미하는 반달 구슬 계주가 표현되었고 법의의 겹쳐진 부분은 선각으로만 표현 되었다. 그리고 불상을 안치한 대좌를 보면은 석공이 신라 불상을 계승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대좌의 조성연대는 중좌에 나와 있는데 772년 혜공왕 8년으로 명문이 되어 있어 서로 만든 시기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관룡사는 많은 도지정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  관룡사를 방문하여 병풍바위의 절경과 반야용선을 의미하는 용선대에서 석조여래좌상을 보며 타니타닉호를 타고 부처님의 세계로 가 보는 여행은 어떨지요.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 화왕산 관룡사. 관룡사 교통편

 

일단 창녕으로 가야한다 창녕시외버스 터미널을 나와 군내버스 정류장으로 가야한다. 오른쪽으로 사거리를 건너 150m 걸어가면 오른편에 영신버스정류장이 있다. 그곳에서 옥천행 버스를 타면 된다. 오전 7:25, 10:30, 12:30 옥천에서 창녕으로 나오는 버스는 오후 2:40, 4:20, 6:30(막차). 부산에서 출발시에는 서부터미널에서 창녕행7시부터 50분 간격으로 버스가 운행한다. 창녕에서 오전10:30분을 맞추기 위해서는 부산에서 오전7:50분 버스는 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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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읍 관룡사 청룡암. 절묘하게 자리잡은 암자 청룡암.

 

산행을 다녀보면 명산의 절묘한 자리에는 절이 들어서 있다. 그 위치에 감탄을 하면서 어찌 이런곳에 자리를 잡았을까 하며 신기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창녕에도 그런곳이 있다. 창녕의 진산은 불뫼로 불리는 화왕산이다. 화왕산과 능선을  이웃한 관룡산 아래 아홉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원효대사가 자리를 잡았다는 관룡사가 1300년의 시계를 넘어서며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읍 관룡사 청룡암. 관룡사에서 청룡암으로...

 

관룡사 뒤로는 바위가 병풍을 치고 있는 형국이다. 이 바위를 마을에서는 병풍바위로 불리는데 승천한 아홉마리의 용이 관룡산 능선을 이루며 병풍바위로 굳어진 것이 아닐까싶다. 그만큼 병풍바위의 모습만을 떼어놓고 보면 월출산이나 설악산의 한 부분을 옮겨 놓은 것 처럼 절경이다.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읍 관룡사 청룡암. 관룡사에서 청룡암으로 걸어 서 올라야해...

 

병풍암 암벽 밑에 제비가 처마 밑에 집을 짓듯이 메달린 것처럼 청룡암의 작은 암자가 바위벽에 걸려 있다. 터를 보면 작은 산신각과 요사체겸용의 작은 건물이 전부인 청룡암은 그 흔한 임도도 없다. 그때문에 관룡사에서 고스락을 올라 이곳까지 800m 발품을 팔아야한다. 그러나 오르막의 산길이라 힘이 든다.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읍 관룡사 청룡암.

 

암자에 올라보니 바람소리가 더 요란하며  청룡암에 찾아가는 발자국소리도 스님의 수행에 방해가 될까봐 미안하여 숨죽여 오른다. 암자 밑 축대 밑에 한평도 될까 싶은 작은 채마밭이 수확을 끝내고 떨어진 시레기가 꽁꽁 얼어 있다. 돌담으로 둘러쳐진 아담한 청룡암으로 들어서면 스님들의 겨울 나기용 땔감이 처마 밑까지 자리를 잡고 있다. 이곳의 날씨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이  혹독한 겨울을 연상하게 한다.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읍 관룡사 청룡암. 주위에 불가의 영취산, 영축산 이름이 있어

 

자리잡은 위치만큼  180도 펼쳐진 전망은 감탄을 연발한다. 신선이 따로 없는 그런 위치다. 내려다보면 골짜기가 옥천리를 휘감고 돌아나가고 좌우로 쭈뼏쭈뼏 솟은 봉우리는 또 하나의 구룡일까. 그런까닭에 이 옥천골에는 영축산, 영취산이란 산도  있다. 모두 불가에서 나온 이름으로 인도에 있는 산이다. 석가모니께서 법화경을 설법한 곳으로 여기 산봉우리의 모습이 인도의 산과 닮았다하여 그리 부르고 있다. 그럼 여기도 그만큼 불심이 깃드는 불가의 땅이 아닐까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읍 관룡사 청룡암.

 

얼기설기 엮은 듯 지은 암자를 돌아가면 암벽에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오래전부터 있었던것으로 보이며 인공으로 뚫은 흔적에 작은석불이 안치되어있다. 이곳을 둘러보고 산신각을 올라가니 모양새를 갖춘 모습이다. 관광객이 몰려드는 유명사찰보다는 그래도 정감이 가는 암자다. 필자가 생각하는 절이라면 청룡암 같은 암자의 모습이다. 수도승의 자세로 수행하는 스님들이 있는 진정한  암자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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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 관룡산 관룡사의 부도탑

 

부도탑은 고승들이 열반에 들고난 후 그의 행적과 뜻을 기려 세우는 탑이다. 그래서인지 연륜이 있는 오래된 사찰에는 여러기의 부도를 만날 수 있다. 이곳 관룡사에도 1300년의 연륜으로 7기의 부도들이 흩어져 있다. 필자가 확인한 것만해도 4개인데 모두 종형을 이루고 있는 조선시대 부도탑으로 보였다.

 



 

 

 

☞(경남여행/창녕여행)창녕 관룡산 관룡사의 부도탑

 

관룡사의 부도탑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부도탑은 관룡사 뒤 청룡암 오르는 길에 한기가 놓여있다. 이 부도는 형태가 특이한데  꼭 쌓아 올린 탑처럼 떨어질까 불안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 부도는 탑신에 비해 지대석이 넓은 편이다. 그리고 3층의 기단석으로 받쳐져 있는데 하대석은 중심부의 방형석괴와 장대석을 서로  끼워 맞추어 만들었다.

 

 

 하나의 돌로 깍아 만든 중대석은 사방을 연판으로 처리를 하였다. 그 위의 상대석도 앙연을 이중으로 처리를 하였다. 상대석 위에 올려진 탑신은 둥근 공모양을 하고 있는데 무늬의 조각이 없는 소박함 그대로이다. 그 위에 갓 처럼 올려진 지붕돌도 팔공산 관봉의 갓바위처럼 단순한 모습에 서민적인 모습이다.

 

 

 

 그 위에 올려진 상륜부는 사라지고 없는 상태다. 부도탑의 전체적인 높이는 205cm이며 전체적으로 불안감을 준다. 조성연대는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로 추정하고 있으며 어느분의 부도탑인지 확인을 할 수 없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호며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관룡사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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