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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창녕여행)관룡사 용선대 석가여래좌상.반야용선을 의미하는 용선대

 

용선대의 용선(龍船)의 한자 뜻은 용의 배를 의미한다. 그러나 불가에서 용선은 고통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반야용선(般惹龍船)이다.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의 중생을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해주는 구제의 배다. 그래서 악착같이 반야용선에서 안떨어질라고 발버둥치며 메달려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중생을 두고 악착동자가 나왔나 보다. 사자(死者)가 극락으로 들어 갈 때 타고 간다는 반야용선 그 배가 관룡산의 용선대다. 그 키잡이는 물론 용선대 석가여래좌상으로 이곳을 오르는 사부대중은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으로 편하게 들어 갈 수 있는 모양새가 된다.

 



 

 

 

☞(경남여행/창녕여행)관룡사 용선대 석가여래좌상. 1300년 역사 관룡산 용선대

 

관룡사에서 산허리 길을 500m 돌아가면 관룡산 능선 끝에 솟은 듯이 자리 잡은 바위에 살포시 앉아 있다. 큰 덩치의 석불이 어떤 경로로 이곳에 올라왔는지 알수없지만 신비할 정도다. 그만큼 불심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는 가 보다. 1300년을 이곳에서 내려보며 사부대중을 구제하는 용선대가 어찌 마을을 지켜 보는게 아니라 허허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경남여행/창녕여행)관룡사 용선대 석가여래좌상. 일제의 만행으로 방향이 틀어져...

 

일제시대때 일본인들이 저질렀던 만행 때문이란다. 원래 용선대는 옥천마을을 굽어보며 남쪽으로 보고 있었는데 일인들이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버렸다한다. 동쪽 일본 땅에도 반야용선이 와서 고해의 바다를 항해하며 일본인도 살펴봐 달라는 것인지...그 후로부터 이곳 용선대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석가여래좌상을 원래의 위치에서 돌리는 바람에 좌대와 용선대의 바닥이 어긋나 틈이 생기게 되었다. 그것이 점차 벌어져 이제는 그곳에다 작은 돌을 넣어 메워야 하는 정도라하니 일인의 행태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경남여행/창녕여행)관룡사 용선대 석가여래좌상. 보물제295호로 지정

 

용선대 석가여래좌상을 보면은 보물 제295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는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로 관룡사 왼쪽 산 능선 암반위에 있다.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조성연대는 722년 전후로 추정하는 명문이 연꽃좌대에서 나왔다 한다. 석불의 전체 높이는 2.98m. 불신높이는 1.81m, 대좌높이는 1.17m로 덩치가 큰 석불좌상이다. 온화하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는 모습에 항마촉지인의 자세를 하고 앉아 있다. 원래는 등 뒤로 광배가 있었지만 없어졌다.

 

 

 

 

 

 

 

 

 

 

 

 

 

 

 

 

 

 

 

 

 

 

 

☞(경남여행/창녕여행)관룡사 용선대 석가여래좌상. 관룡사 교통편

 

일단 창녕으로 가야한다 창녕시외버스 터미널을 나와 군내버스 정류장으로 가야한다. 오른쪽으로 사거리를 건너 150m 걸어가면 오른편에 영신버스정류장이 있다. 그곳에서 옥천행 버스를 타면 된다. 오전 7:25, 10:30, 12:30 옥천에서 창녕으로 나오는 버스는 오후 2:40, 4:20, 6:30(막차). 부산에서 출발시에는 서부터미널에서 창녕행7시부터 50분 간격으로 버스가 운행한다. 창녕에서 오전10:30분을 맞추기 위해서는 부산에서 오전7:50분 버스는 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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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정상에 백련꽃이 피었다하여 창건한 연화사가 전신


 부산에서 수다사를 가기위해서는 대구부산고속도로를 타고 동대구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상행선인 서울방향으로 달린다 . 구미를 지나 김천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또 바꾸어 타 선산인터체인지에서 내린다. 이곳에서도 68번 지방도를 타고 상주방면으로 달리는데 주위로는 유순한 모습을 한 5~600m의 낮은 산들이 솟아 있다. 무을면사무소를 지나 상송리가 수다사 들머리다.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입구의 연리지 쌍정자 전설 


천년고찰답게 수다사로 들어가는 도로가 넓게 조성이 되어 있어 찾기는 쉽다. 마을을 지나 수다사로 가다보면 저수지 옆에 큰 느티나무가 양쪽에 서 있다.  쌍정자로 불리는데 나무의 모습이 특이하다. 서로 몸이 붙어 있는 연리목으로 이나무 아래에서 연인들이 사랑을 약속하면 그 사랑이 이루어 진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서인지 유독 이나무에서 젊은 연인들이 찾아와 사랑의 약속을 하고 간다고 한다.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진감국사가 연화사로 창건 그 연혁


구미시와 상주시의 경계선상에 기양산으로 불리는 산이 있다. 그 산 정상 부근에 백길바위로 불리는 바위가 있다. 이바위가 백련봉으로 불리는데 그기에는 이런 연유가 있다. 수다사연혁인 '수다사약전'의 기록을 보면 진감선사 혜소스님이 연악산 정상에 흰연꽃 한송이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830년 문성왕때에 이곳을 사찰을 짓고 연화사를 창건하였다. 흰연꽃은 백길바위인 백련봉을 두고하는 것 같다. 



 

 

그 후 976년에 화재로 불타고 명종15년인 1185년에 각원대사께서 중창을 하여 성암사로 개칭을 하였다. 그러나 1273년에 뜻하지 않게 수해로 인해 사찰은 큰 피해를 보았다. 그러한 어려운 과정을 넘겨오다 선조5년인 1572년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대사가 크게 중수를 하여 감로수를 의미하는 수다사로 고쳐 불렀다. 사명대사에 의해 수다사는 임진왜란때 승병 일만여명이 '의국법회'를 열정도로 중흥기를 맞다가 1684년인 숙종 10년에 수다사는 또다시 화재로 잿더미가 되고 대웅전과 시왕전 극락당등 현재의 건물만 남게 되었다.현재 직지사말사이다.



 

 


수다사를 찾아간 이날에도 전국은 한파에 많은 눈이 내렸다. 수다사 일주문을 들어서서 경내로 올라가니 그야말로 적막강산이 이를 두고하는 말이랴. 바람소리만이 들리는 절마당에 난데 없이 개 짓는 소리가 나더니 어디선가 시커먼스한 놈이 나타나는게 아닌가.  깜짝이야. 너 늑대야 멍멍이야.... 생기기는 험상궂게 생겼지만 달려 들지는 않는다. 그래도 스님도 달려 안나오는 곳에 멍멍이가 달려 나오니 반갑기도하다. 사찰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다.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명부전 경상북도유형뮨화재 139호 


명부전은 앞면3칸 옆면2칸 크기로 지붕의 옆 모습이 사람인(人)자 모양의 겹치마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위에만 있는 주심포형식으로 이 양식은 신라시대때 사용되었던 양식이며 원래의 규모는 더 큰 것으로 여겨진다. 내부에는 각원대사가 조성한 지장보살좌상등의 불상이 모서져 있다. 그리고 내부 벽에는 영조42년인 1771년에 그렸다는 '지옥도'는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다.


 

 명부전의 지장보살좌상과 불상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수다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334호 


수다사 대웅전 내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개금불사로 인해 외형상 목조의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소나무의 결을 찾을 수 있다. 


특징을 보면 DAUM문화유산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발의 두정(頭頂)에 약간의 육계의 흔적이 보이고, 가늘게 뜬 눈, 코, 입술 등의 조각 수법이 정제되어 있으며, 우너만한 상호와 짧은 양 귀, 목에 둘러진 삼도가 조화를 이루어 위엄이 있어 보인다. 법의는 통견으로 의무늬 조각이 세련되었으며, 무릎 부분이 높고 넓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수다사 사찰측에 의하면 원래 삼존상으로 조성 되었다한다. 구미시 선산읍 원각사에 있는 대세지보살상의 복장에서 수다사불상조성연기가 나왔다한다. 원래는 삼존상이었으나 양 협시는 외부로 반출되어 대세지보살상은 구미시 선산읍 원각사에 봉안하고, 관세음보살상은 대구서봉암에 옮겨 봉안되었다. 


조성연기의 기록을 보면 1650년 효종1년 9월에 연악산 수다사에서 아미타불과 두 협시 불상의 삼존상 조성했다는데 현재 수다사 대웅전에 모서져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그 당시 조성된 주존불로 여겨진다. 복장유물에 나왔던 조성연기의 종이질도 검사를 하니17세기에 만들어졌다한다.아미타불과 두 협시보살의 삼존상을 조성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바로 당시 조성된 주존불이었던 것이다.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수다사 석가모니 후불탱화



대웅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후불탱화는 1731년 제작된 것으로 그 당시 17세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 주는 우수한 작품이다. 현재의 본존불 뒤에 걸린 탱화다. 후불탱화에 대해 '디지털구미문화대전'에서 잘 설명하여 그것을 인용하자면

 '수다사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화는 주존 탱화로서, 폭 39~40㎝ 정도의 세마포(細麻布)를 7폭 연결하여 종이를 여러 겹으로 배접(褙接)한 바탕의 중앙 연화좌에 석가모니불이 항마촉지인으로 결가부좌하고 있다. 정수리로부터 상부로 퍼져나가는 광명은 석가모니의 설법이 시방 세계를 비추는 것을 상징한다.


좌우에 8명의 보살과 사천왕이 자리 잡고 있는데, 보살은 석가모니불 좌대 양옆에 붉은 연화(蓮花)를 들고 서 있는 두 명의 보살을 제외하고는 모두 합장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화면 하단의 좌우에 있는 사천왕은 비파, 검, 용과 여의주, 창 등의 지물을 들고 있다.

보살상 위 좌우에는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이 양옆에 배치되어 있는데, 범천은 3목(目)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 외 상단에는 다른 세계에서 온 부처, 가섭(迦葉)과 아난(阿難)을 포함한 10대 제자, 신장(神將) 들이 에워싸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 「수다사 대웅전 석가모니후불탱화」의 주제는 석가모니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법하던 영산회(靈山會)를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이 탱화는 모사본이며 진품은 직지사에 보관하고 있다.

http://gumi.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1201942


 

 

 

 ☞(경북여행/구미여행)연악산 수다사. 수다사 건륭37년명 동종


수다사 건륭37년명 동종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건륭 37년 명문이 뚜렷하다, 즉 1772년(영조 48)에 조성된 것이며  '디지털 구미 문화대전'을 보면 '범종의 형태나 보살상과 유곽, 용뉴 등의 양식 및 수법은 다른 예와의 비교, 연구에 기준이 되는 귀중한 자료이다. 수다사 대웅전 내에 위치한다. 대웅전 불단 오른쪽 아래에 있으며, 사찰내에 있는 유일한 동종이다. 4구의 보살상과 유곽 사이에 대를 만들고 그 안에 명문을 새겼다. 명문은 9곳에 1행씩 모두 9행이 새겨졌는데, 그 내용은 ‘건륭삼십칠년임진 삼월일 화주근징장승통광능 경상우도 선산 서령 연악산 수다사 중종개조 중이백근야 삼강(乾隆三十七年壬辰三月日 化主僅澄將僧統廣能 慶尙右道 善山 西嶺 淵岳山 水多寺 中鍾改造 重二百斤也 三綱)’이다.'

http://gumi.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1201942


 

 

또하나의 볼거리는 이곳의 300년된 배롱나무는 봄이면 화려한 백일홍으로 장관을 이룬다. 수다사를 방문하였을때는 눈이 와 있었는데 기양산(연악산)~수선사 산행을 할때 폭설이 내려 하산 후 수다사는 그야말로 설국을 보여 주었다. 그때 다시 담은 사진을 함께 올렸다. 수다사는 겨울의 설국도 아름답지만 단풍이 드는 가을철에는 붉은 색으로 치장을 하여 더욱 화려한 수다사가 된다. 



 

 

 

 

 

 

 

 

 

 

 

 

흰연꽃을 의미하는 백길바위, 백련봉이라 부른다.



 ☞(경북여행/구미여행)구미 연악산 수다사 교통편


부산에서 구미를 거쳐 선산읍으로 가서 수다사 방향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동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구미 가는 버스는 오전 830, 940분에 있다구미터미널에서는 20번 버스를 타고 선산터미널로 가서 21, 21-1, 121번 버스를 갈아타고'상송수다사입구정류장에 내려 수다사까지 걸어 들어가면 된다구미에서 부산 행 버스는 오후 435, 740, 850(막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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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여행/금정구여행)금정산 범어사 보제루. 기존 보제루를 헐고 새롭게 태어난 보제루

 

금정산 범어사는 천년 고찰로 통도사 해인사와 함께 영남의 3대 사찰에 손꼽힌다.  그 규모만큼 이번에는 범어사가 총림으로 지정되는 경사를 맞았다. 그리고 최근에 화재로 소실된 천왕문을 복원하고 일제의 잔재라며 기존의 보제루를 헐고 새로 지은 보제루가 단청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 포스팅한 곳은 범어사 보제루이다.

보제루는 어떤 곳인가. '어리석은 사부대중을 부처님의 진리와 가르침으로 중생을 깨우쳐 교화'를 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기존의 보제루는 본당의 대웅전과 마당과 계단을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보제루는 아침저녁으로 스님들이 예불을 올리고 49재등 법회와 각종법요식등 사찰에서 큰 행사를 할때  이곳을 사용한다. 강당의 의미이다. 큰스님들의 법회등 모두 이곳에서 열린다.




 

 

 

 

 ☞(부산여행/금정구여행)금정산 범어사 보제루의 역사는..... 

 

금정산 범어사의 보제루는 기록으로 나와 있는것이 1699년 숙종15년 자수스님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도 보제루의  기능을 한 건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범어사의 규모로 보면 존재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1813년인 순조13년 신정스님에 의해 중수를 하였다. 그 얼마뒤인 1827년에도 일부 중수를 하였다. 그 이후 작은 수리는 있었겠지만 1910년인 일제 강점기때 보제루는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하게 된다. 이때 보제루는 기존의 조선시대사찰 건축물인 아닌 일본식이 접목되었고 1963년 동산스님때에도 일부 보수가 이루어졌다.

 

 

 

 

 ☞(부산여행/금정구여행)금정산 범어사 보제루. 기존 보제루를 헐고 새롭게 태어난 보제루

 

2010년 10월23일 범어사 보제루는 해체 수순을 밟고 사라져 조선시대 사찰 기법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현재는 마무리 단계로 이제 일부 조경공사와 단청만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기존 범어사 보제루와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 보세요.

 

 

 

 좋아 보이지만 겨울에는 추워서 어찌한데요.

 

 

 

 

 

 

 

 

 

 

 

 

 

 

 

 

 

 일제의 잔재라 헐렸던 옛 보제루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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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여행)범어사여행. 화재로 소실된 천왕문이 복원되다. 


2010년 12월15일 밤 10시20분경에 범어사 경내의 천왕문이 화재로 전소하였다는 뉴스가 다음날 전국을 강타하였다. 서울의 숭례문 화재가 발생되어 안그래도 우리 문화재의 관리가 또 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된 사건이다. 그 당시 상황을 보면' 범어사 경내로 들어서면 먼저 보물인 일주문(조개문)을 만나게 된다. 이 건물 30m 뒤에 4천왕상을 모신 천왕문이 있다. 문을 열고 한남자가 들어와 서성이다가 이남자가 나가고 난 뒤 곧 바로 천왕문에 불길이 치솟았다한다' 천왕문은 문화재는 아니지만 조선숙종때의 건축물로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범어사를 지켜 왔고 그 안에 모셔진 4대천왕상은 천왕문안에다 모사품을 세우고 보수를 위해 경내의 성보박물관에 보관을 하던 중이라 화재의 참사에서 피할 수 있었다. 





 

 화재 당시 소실된 천왕문이 현제 말끔히 복원이 되었다. 범어사로 들어서는 길은 천왕문을 지나 대웅전 방향으로 올랐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도 이 천왕문을 통하고서는 대웅전 방향으로 오를 수 없다. 또 하나의 공사가 있어 그러한데 일제의 잔재 건물인 보제루를 헐어내고 예전의 모습으로 복원을 하고 있는 중이라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조만간 다시 옛날의 멋진 모습으로 범어사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복원된 천왕문과 4천왕상을 구경하세요

 

 

 

 

 

 

 

 

 

 

 

 

 

 

 

 

 

 

 

 

 

 

 

 

 

 

 

 

 

 

 

 

 

 

 

 

 

 

 

 

 

 

 

 밑의 사진은 화재전의 천왕문 모습과 4대천왕상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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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사천여행)곤명 다솔사 여행. 마지막 단풍이 장관이었던 다솔사.

 

11월 마지막 주말에 찾아간 사천 곤명의 다솔사는 붉은 단풍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나타내고 있었다.  그 때 한창이었던 단풍나무에 눈이 휘둥그레 졌는데 단풍이 아직도 그리 남아 있을지 생각을 못하였다. 절집을 올라가는 입구의 마지막 남은 단풍을 원없이 보았는데 늦은 시간이라  벌써 주위는 컴컴하여 아쉬움이 남았다.




 

 

 

☞(경남여행/사천여행)곤명 다솔사 여행. 천년고찰 다솔사

 

신라 지증왕 4년인 503년에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창건당시에는 영악사로 불렸는데 선덕여왕 5년인 636년에 건물 2동을 올리고 다솔사로 개칭을 하였다. 그 후 자장율사, 의상대사등 고승대덕이 머물며 사세를 더욱 키워 영봉사로 고쳐 불렀다.신라말에와 도선국사가 이곳에 머물려 다솔사는 최고의 부흥기를 맏는다. 부속건물 4동을 짓고나서 영봉사던 이름을 다솔사로 다시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남해안으로 들어오는 왜구에 의한 전란으로 화마는 피해 갈 수 없었다.그런 과정에서  다솔사도 여러번 중수가정을 거치며 현재에까지 이어 왔다.  

 

 

 

 ☞(경남여행/사천여행)곤명 다솔사 여행. 다솔사에서 먼저 만나는 대양루

 

조선 영조24년안 1748년에 지은 건물이다. 다솔사의 중심건물인 적멸보궁과 서로 마주 보고 있다.대양루의 용도는 강단이다. 신도들에게 설법을 전하거나 여러 불구들을 저장하기 위해 지은 용도로 정면5칸 측면 4칸의 익공계 맞배지붕으로 지었다. 정면의 기둥 간격이 3m로 웅장하며 위풍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건물의 특징은 입구에서 보면 2층이지만 적멸보궁에서 바라보면 1층의 건물이다. 아랫층의 기둥과 윗층에 시용한 기둥이 서로 다른데 윗층은 잘 다듬어진 기둥을 사용하였지만 아랫층은 울퉁불퉁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여 흡사 이중적인 분위기를 보여 준다. 큰 건물에 기둥도 적은데 건물 가운데 10m가 넘는 대들보를 사용하여 지붕의 하중을 모두 감당하고 있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경남여행/사천여행)곤명 다솔사 여행.  다솔사 적멸보궁.

 

이곳은 양산의 통도사와 같이 부처님 사리를 모셨다. 적멸보궁으로 부처님 사리가 있어 원래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이곳은 누워있는 부처님을 적멸보궁안에 모셔 두었고 그 위에 구름형상의 작은 창문을 두어 사리탑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경남여행/사천여행)곤명 다솔사 여행.  다솔사 응진전.

 

진전은 나한 또는 아라한이라 하는 부처님을 따르는 수행자중 최고의 경지에 오른 스승들로 16나한을 모신곳이다. 이 전각도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신라 자장율사에 의해 지어 졌다가 임진왜란때 소실 되었다. 그 후 1690년 죽마대사에 의해 중건되었다.  다시 건물은 노후되어 1930년에 만해 한용운 선생이 다시 중수를 하였다. 정면3칸 측면2칸의 이익공계 맞배지붕으로 극락전과 기법이 비슷하다고 한다.

 

 

 

 

 

 

 

 

 

 부처님 사리탑

 

 ☞(경남여행/사천여행)곤명 다솔사 여행.  다솔사 극락전

 

아미타불을 본전으로 모시는 건물이다. 중생을 제도하는 서방정토의 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 신라 자장율사께서 건립을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여러번 건립과 중수를 거쳐 1910년 새로 지은 건물이다, 정면3칸 측면2칸의 익공계 맞배지붕으로 정면과 측면 좌 우측에 창호와 마름 벽체가 특이하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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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여행)대만여행. 타이베이 용산사. 하나의 돌기둥이 볼거리...

 

타이베이의 용산사는 북쪽에 위치를 한다. 지하철 용산사역에서 1분거리로 접근성이 아주 편하다. 용산사는 타이베이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중국의 불교역사가  오래 되지 않아선지 이곳 용산사도 약270년 전에 세워진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국내의 사찰 연륜에 비하면은  일천하다.

 



 

 

 

 

☞(타이완여행)대만여행. 타이베이 용산사. 짧은 역사 용산사.

1738년 청나라 때  복건성의 이주민에 의해  창건되었다한다. 그 후 소실 되었다가 1957년 새로 지었다. 용산사는 국내의 사찰과달리 대만의 사찰은 불교와 도교가 혼합이 된 형식이다. 그래서 이곳 용산사는 앞에는 불교예식이 거행되고 뒷 건물은 도교예식이 치루어진다.

 

 

 

 

 

☞(타이완여행)대만여행. 타이베이 용산사. 용산사는 불교와 도교의 혼합

 

이곳 용산사의 볼거리는 건물을 받치고 있는 돌기둥들이다. 하나의 기둥을 이용하여 조각한 솜씨가 가희 예술이라 할만하다. 그 만큼 신기로울 정도인데 인간의 힘으로 어찌 이리 조각을 할까 할 정도로 아름답다. 용과 조화 그리고 춤추는 모습등 다양한 조각들로 새겨져 있어 꼭 한번 둘러 볼 것을 권한다.

 

 

 

 

☞(타이완여행)대만여행. 타이베이 용산사. 용산사는 완전 돗데기 시장판...

 

용산사는 인근에 화시제야시장이 있다. 큰 사원이 있어 불교용품들도 볼거리였고 이곳 용산사를 우리의 사찰과 비교를 하면 급 실망을 하게 된다. 절이라면 조용하고 수도하는 느낌을 연상시키는데 이곳은 시골 장날의 돗데기 시장을 연상 시킬 정도이다.

 관람은 오전7시 부터 오후 10시까지이며 관람료는 무료

 

 

 

 

 

 

 

 

 

 

 

 

 

 사진의 기둥을 눈여겨 보세요. 예술 그 자체입니다. 하나의 돌기둥을 조각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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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여행)포항 법광사지. 비학산 법광사는 언제....


포항 신광면의 비학산은 학이 알을 품고 있다가 하늘을 나는 형상을 하고 있어 '학포지란'형이라 한다. 흥해에서 신광면을 바라 보면 정면에 보이는 산이 마치 신광벌판을 학이 날개를 펼치며 나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이곳은 예로 부터 천하의 명당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비학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있다. 정상 아래 동쪽의 낮은 봉우리를 등잔혈로 불린다. 이곳에서 정상까지 묘를 쓰면 그 당사자의 후손들은 번창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 아래 마을은 가뭄과 흉년으로 마을이 황폐화 된다는 전설로 마을에서는 누구든지 이곳에다 묘자리를 하는 것은 금기시하였다. 그런 소문 때문에 밤에 몰래 묘지를 암장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였는데 그때마다 비학산아래 마을에는 가뭄과 흉년으로 주민들이 기근에 시달렸다. 그러면 이곳에 올라와 묘지를 찾아내고 파헤쳐 버렸다한다.






 

 

 

☞(포항여행)포항 법광사지. 비학산 법광사지는 1300년 역사...


법광사지는 비학산 산행 들머리에 있다. 법광사지를 학이 알을 품는 자리로 비유를 하는데 이곳 상읍리 법광마을의 아주 넓은 곳 까지 옛 법광사지터이다. 지금 한창 법광사지 발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라 진평왕때 창건하였다.그러나 현재의 법광사는 법광사지 터에 새로 세운 사찰이다. 2008년도에 이 일대 법광사지가 사적 제493호로 지정되었다.그 규모를 보면 창건당시는 500칸이 넘는 대 가람을 유지하였는데 임진왜란과 여러번의 전란으로 인해 법광사는 화재로 소실되었다한다. 


 

 

 

현재 법광사 뒤에 있는 삼층석탑과 연화석불좌대 쌍두귀부등 온전한 유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파괴가 되어 세월의 허망함을 탓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건너편 법광마을앞에는 지금 한창 발굴 작업이 진행중인데 발굴 현장중간에 두개의 당간 지주 만이 솟아 있어 그 때의 규모를 짐작만 할 뿐이다. 



 

 

발굴현장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는데 현장의 인부들이 사진 촬영은 안된다는게 아닌가. 왜 안되느냐고 물어보니 문화재라서 안된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한다. 아니 철조망을 쳐 놓으면서 공사를 하는데 그리 중요하면 밖에서 못보도록 천막을 치고 발굴을 하는 것으로 해야지 무조건 사진은 못찍는다하니 참 황당함.그 자체....



 

 


요즘 문화재 발굴은 포크레인이 들어가서 바닥을 그냥 막 훌터버리는데   그래가지고는 우리의 옛 문화재가 온전히 그 자리에 있을 지 의문이 간다. 섬세한 손길로 작업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공사판의 포크레인 처럼 작업을 하니 돌이나 유물들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지 문화제 발굴작업에 많은 우려를 가지게 되었다. 포크레인 현장은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해서 담아 오지 못했네요.



 

 

가끔 뉴스에 보면 붓으로 섬세하게 쓸고하는 것을 보는데 우리의 문화재가 온전하게 남아 있기를 기대해본다. 얼렁 법광사지의 옛 모습을 하루 빨리 만나고 싶어 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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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의 배경...

 

현재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였다.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이곳 남쪽에 삼층석탑이 남아 있어 배반동 탑곡이라 불린다. 마애불상군 아래 큰바위에 그 당시 목조 건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으로 추측을 해보면 탑곡마애불상군의 남쪽면인 삼존불상을 주존으로 모신 것으로 여겨진다.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탑곡마애불상군의 명칭은 왜...

 

탑곡마애불상군은 탑곡마애조상군으로도 불린다. 높이 약9m. 넓이가 30m의 바위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곳 바위에 34점의 많은 불상군이 새겨져 있어 그리 부르고 있다.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탑곡마애불상군 북쪽면..

 

먼저 바위 앞으로 다가가면 정면에 보이는 바위가 북쪽면이다. 현재 이곳에는 9층탑과 7층탑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그 중간에 석가여래가 연꽃위에 좌정을 하고 두 탑 앞에는 사자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마모가 심해서 본인의 눈으로는 사자인지 확인을 할 수 없었다.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동쪽바위면

중앙에 여래상을 새겼고 그 주위로 비천상 승려상 보살상 인왕상 나무등을 새겼다. 불상과 보살상등은 연꽃 무늬를 조각한 대좌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를 모두 갖추었다. 비천상은 하늘을 날고 승려는 불상과 보살에게 공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노출로 인해 자연 마모로 아쉬움이 많다.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남,서쪽바위면

 

남쪽면의 삼존불에는 여래상과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서쪽 바위면은 석가가 그 아래에 앉아 도를 깨우쳤다는 보리수 나무 두그루와 여래조상을 새겨 놓았다.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조성시기

 

통일신라시대 마애불상군으로 이곳에서 신인사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나왔다. 8c에는 불상에 입가에만 옅은 미소가 나타나지만 이곳 불상군은 눈가에까지 옅은 미소가 표현 된 것으로 보아 7c 후반 통일신라시대때로 추정을 하며 신인사가 7c중엽 명랑스님에 의한 신인종의 종파이다.

 

위의 내용은 'daum 문화 유산(http://heritage.daum.net/heritage/16540.daum#intro)'의 내용을 기초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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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여행)보리사 마애석불경주 남산 보리사 마애.석불은...

통일 신라 시대때 만들어진 보리사 마애 석불은 전망이 뛰어난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앞으로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릉과 망덕사터 그리고 배반동의 벌지지 들판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는 곳에 위치를 하고 있다그래서인지 세속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미소가 아름다운 것 같다.










(경주남산여행)보리사 마애석불. 경주 남산 보리사 마애석불은 돋을새김...


보리사 마애석불을 바라보면은 앉은 품새도 보통이 아니다 바위가 앞으로 경사지게 누워있어 비로부터 안전하며 .편편한 바위를 광배 형태로 파내어 마애석불을 조각하였는데 그 기법이 돋을새김으로 처리하였다. 둔닥한 바위를 어찌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 같이 얇은 옷을 걸쳐 입은 모습으로 처리를 하였는지 그때의 석공에게 찬사를 보낸다.   







(경주남산여행)보리사마애불. 경주 남산 보리사 마애석불은 통일신라 작품


보리사 마애석불은 머리카락을 나선형으로 표현을 하였다. 뚜렷한 이목구비에서 퍼져 나오는 엷은 미소는 신라조각 예술의 모습을 담고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3







(경주남산여행)보리사 마애석불. 경주 남산 보리사 마애석불


신라의 수도는 서라벌이었다. 그 서라벌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는 산이 남산이다. 남산이란 지명은 참 편안하다. 그래서 인지 경주 남산 지명도 듣고 있는 내내 편안한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경주에 있는 남산은 여느 남산과는 다르다. 신라인들이 불교에 대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데 남산을 하나의 불국토인 부처님이 계시는 곳으로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래서남산에는 수많은 암자터와 신라 예술의 걸작품들이 가득한 보물창고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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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양산여행)천성산 원효암. 천성산 원효암에서 왜 천성산이라 하나요....

천성산은 먼저 대운산 척판암에서 주석하시던 원효스님이 하루는 혜안으로 중국 당나라 태화사의 사부대중이 산사태로 매몰될 위기에 처하자 원효는 급히 부엌문을 떼어 해동원효척판구중이라 적어 던져 일천명의 사부대중을 구하니 이들이 이곳 원효를 찾아 제자가 될 것을 간청하니 원효가 친히 마중을 나가 1천명의 제자와 함께 천성산에서 기거한다. 원래 천성산은 원적산으로 불려 지고 있었는데 원효의 당나라 제자 천명이 모두 득도하여 성인이 되었다하여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 만큼 이곳 천성산 대운산 일원은 원효대사의 전설을 두고는 이야기 할 수 없는 곳이다.






 

 

 (경남양산여행)천성산 원효암, 천성산의 암자는...

원효대사는 천명의 제자와 함께 천성산인 지금의 내원사 입구에 도달하니 이곳 천성산의 산신이 친히 나와 원효와 그의 제자를 안내하니 그 후 원효는 산신을 처음 만난 곳에 산신각을 세웠는데 현재에도 그 곳에 산신각이 세워져 있다. 천성산에는 그들이 머물 수 있는 암자를 세웠는데 89암자가 될 정도로 많았다 한다. 그 중의 한 암자가 현재의 천성산 원효암이다.




 

 


(경남양산여행)천성산 원효암. 천성산의 암자 원효암

천성산 원효암은 한때 원효산 원효암으로 불렸다. 양산시 지명 위원회에서 천성산으로 고쳐 부르게 되어 현재 원효산은 불리지 않는다. 부산 인근에서는 이 곳 원효암이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암자로서 주위의 경관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천명의 제자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였다는 화엄벌이 인근에 있어 더욱 원효의 전설이 흥미롭다.




 

 


(경남양산여행)천성산 원효암. 천성산 원효암 창건은,,,,

646년 선덕여왕 15년에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 되었다. 그 후 1905년 효은스님에 의해 중창이 되었고 원효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의 내원사 말사에 속한다. 원효암은 깎아지른 절벽에 자리를 잡다 보니 앉은 터가 몹시 좁은 형세로 법당에는 1648년 인조 26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안치 되어 있고 본당 건물 오른쪽 바위벽에는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431호인 마애아미타삼존불이 섬세한 조각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최근에 불사를 끝내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는 원효암은 천성산을 등지고 있는데도 바다와 대마도 까지도 볼 수 있다하니 원효암 암자중에서는 최고라 할만하다.



  

 

 

 

 

 

 

 마애아미타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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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의 쌍봉사는 천년고찰로 통일신라시대인 839년 이전에 창건되었다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해에 혜철선사가 하안거를 지냈다는 기록이 전해졌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 후 855년에 철감선사가 중국에서 건너와 금강산에 머물다 이곳에 내려 왔다하며 사찰의 앞과 뒤에 봉우리가 두 개 솟아 쌍봉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곳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화순군에선 유일한 국보가 이곳에 있다. 국보57호인 철감선사 탑의 모습은 경지에 이른 조각가의 솜씨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보물인 철감선사 탑비와 함께 쌍봉사를 대표한다.

주지 시공스님은 대숲에 앉은 바람은 ‘사랑해 사랑해“하고 풍경에 앉은 바람은 ’그러마 그러마”하며 인사 글을 올렸는데 이곳 쌍봉사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그 만큼 찾는이가 드문 한적한 골짜기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숙종16년인 1690년에 대웅전을 중건하고 대웅전 석가삼존불과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하였다 한다. 대웅전은 여러번 중수과정을 거쳐 1950년 6.25 한국동란때에도 전쟁의 화마 속에서도 대웅전과 극락전은 보존이 잘 되어 오다가 1984년 뜻하지 않은 화재로 대웅전이 전소되었다. 그 후 1986년 원형의 모습을 유지하며 복구를 하였는데 1962년 대웅전을 해체하여 중수를 하였다 한다. 그때 발견된 기록을 가지고 옛 모습으로 복원을 하였다는데 어쩐지 엉성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정면 1칸, 측면 1칸인 통으로 연결된 3층 목탑형식인 대웅전이 원형 그대로 보존이 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내내 남는다.

 

 



 

 

 

 

 

 

 

 

 

 

 

 

 

 

 

 

 

 

  



쌍봉사는 구산선문중의 일문인 사자선문의 개조인 철감선사께서 통일신라 48대 경문왕8년인 868년에 창건하였다. 대웅전의 모습은 단 국내에서는 두점으로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과 이곳 쌍봉사 대웅전으로 193653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198443일 신도의 부주의로 소실 되었다. 평면이 방형인 3층 전각으로 사모 지붕의 목조탑파 형식이다. 현재는 86년 복원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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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에는 쌍봉사란 사찰이 있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혜철 선사가 이곳에 여름을 지냈다는 기록과 855년 경에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철감선사가 이곳 쌍봉사에서 머물렀다는 것으로 보아 839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쌍봉사에 대해서는 차후 포스팅을 하기로 하고 이번 포스팅은 화순군에서는 유일한 국보 한 점과 그리고 보물 한 점을 소개할까 한다. 모두 철감선사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국보인 탑은 스님 사후의 부도탑으로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모셔 놓은 곳을 말하는데 그의 정교한 기술이 예술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철감선사는 798년인 원성왕 14년에 출생하여 18세에 불가에 귀의 하였고 28세때 중국 당나라로 건너가 수학하였다 그 후 847년에 범일 국사와 함께 귀국하여 금강산에 머무르며 수도에 전념하였다. 경문왕때 그는 이곳 산수의 아름다움에 거처를 정하고 그의 호를 따 쌍봉이라 하였다하는데 쌍봉이란 현재 쌍봉사의 앞 뒤로 솟은 봉우리를 의미한다. 868년 경문왕 8년 이곳에서 입적을 하였고 경문왕이 철감이란 시호를 내리고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현재의 국보 57호와 탑신은 사라지고 없는 상태로 이수와 귀부만 남아 있다. 탑의 형태는 전체가 8각형으로 꼭대기의 상륜은 남아 있지 않다. 이탑의 모든 부분도 눈여겨 볼 일이지만 특히 막새기와 안에 연꽃무늬를 새긴 솜씨는 석공 필생의 역작이라 할 정도로 정교하며 신앙에 기인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 룰 수 없는 작품이라 하겠다.

문화재청의 사이트를 인용하면

탑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모습이며, 대부분 잘 남아 있으나 아쉽게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밑돌·가운데돌·윗돌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으며, 특히 밑돌과 윗돌의 장식이 눈에 띄게 화려하다. 2단으로 마련된 밑돌은 마치 여덟마리의 사자가 구름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 흥미롭다. 윗돌 역시 2단으로 두어 아래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윗단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가 악기를 타는 모습을 도드라지게 새겨두었다. 사리가 모셔진 탑신(塔身)은 몸돌의 여덟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다 문짝모양, 사천왕상(四天王像), 비천상(飛天像) 등을 아름답게 조각해 두었다. 지붕돌에는 특히 최고조에 달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어서,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다.

http://www.cha.go.kr/unisearch/Uniresult_Db_View.jsp?VdkVgwKey=11,00570000,36&queryText=쌍봉사철감선사탑

 



 

 

 

 

 

 

 

 

 

 

 

 

 

 

 

 

 

 

 

 

 

 

 

 

 

 

 

 

 

 

 

 

 

 

 

 

 

 

 동리산 태안사의 광자대사탑  보물 제274호

국보와 비교 함 해보세요.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보물 170호

철감선사탑비와 마찬가지로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경문왕이 시호를 철감으로 내린후 탑과 탑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도윤(798~868)의 탑비로 현재 거북받침돌인 귀부와 위에 얹혀진 이수만 남아 있다. 귀부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머리에 거북이의 형태를 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오른쪽 발은 올려진 모습이다. 이수는 운상인 구름문양으로 새겨져 있고 삼각형의 돌출형의 바위가 두 개 남아 있는데 한 개는 사라진 상태이다.  

http://heritage.daum.net/heritage/16509.daum

 

 

 

 

 

 

 

 

 

 

 

 

 

 

 

 

 

 

 

 

 

 

 

 

 

 

 

 

 

동리산 태안사의 광자대사탑비 보물 제275호

철감선사와 같은 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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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오대산 상원암, 영축산 통도사로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ㅋㅋ 모두 산 밑의 사찰.

예 사찰 맞습니다.

그리고요...

“적멸보궁”입니다.

예 맞습니다. 맞고예...

흔히 말하는 5대 적멸보궁이라 일컫는 사찰입니다.

 

 






적멸보궁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들 사찰에 가보면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이고 어디를 가던지간에 부처님 모습의 불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 일까요.



이곳 사찰들은 석가모니불의 진신 사리를 모셔 놓았기 때문에 따로 부처님의 모습인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합니다. ㅎㅎ.

그럼 영축산 통도사로 함 찾아 가 봅시다.



실제 통도사 대웅전의 그 큰 법당안에도 들어서 보면 따로 부처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대신 북쪽으로 큰 창문이 붙어 있습니다. 그 안으로 보이는 것은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의 모습인 사리탑이 눈에 들어오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장중한 그 모습에 입이 쩍 벌어집니다.



대웅전 좌우로 금강계단 안으로 들어 설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 있습니다. 통도사의 가장 큰 중심건물인 대웅전과 금강계단은 신라선덕여왕 15년인 646년 자장율사에 의해 세워졌다합니다. 어마어마하게 오래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하 왜 하필 금강계단이라 이름을 붙였을까 궁금하네요. 계단(戒壇)의 의미는 불교의 계(戒)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하는 장소라 합니다. 이곳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것은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통도사의 근본정신은 이곳 금강계단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통도사를 삼보 사찰중 불보사찰이라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금강계단 모습은 자장율사가 처음 세운 그 당시의 모습은 아니라고 합니다.
세월의 무게만은 어쩔 수 없는 지 이곳 금강계단도 여러번의 중수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합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기록를 찾아보면 그 기본 골격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 보여 집니다하니 자장율사가 처음 세운 금강 계단의 모습도 이 모습과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습니다.






고려, 조선시대에와 금강계단을 수호하는 천인상과 신장상, 불좌상등이 새롭게 조성된 것으로 보이네요.



그리고 금강계단의 앞 대웅전도 임진왜란때 소실 된후 인조23년인 1645년에 우운대사에 의해 다시 중건되었다 합니다.
보통 기존의 대웅전은 일(一)자 형태로 장중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게 보통인데 여기 통도사의 대웅전은 정(丁)자 형태를 하고 장중과 위엄을 모두 갖추고 있는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 서, 남 모두 정면의 모습을 취하고 있어 그 당시의 통도사 대웅전의 위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 용의해인 2012년 임진년입니다.

흑룡의 기운과 부처님의 가피로 블로그님들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길 빌어 봅니다.

찾아가기

부산에서 이동할 경우 부산도시철도 1호선 명륜동역 앞에서 새벽 5시32분부터20~3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언양행 버스를 타고 통도사 입구인 신평에서 내린다. 매표소인 일주문을 거쳐 통도사 소나무 숲길을 따라 들어서면 통도사이고 맨 끝 부분에 금강계단이 있다.

또 KTX 울산역을 이용하면 수도권 시민들도 2시간30분만에 통도사 일주문까지 도착 가능하다.
울산역 앞에서 새벽 5시2분부터 25~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13번 버스를 타면 30분만에 통도사에 닿는다.
자가용 이용자는 경부고속도로 통도사IC에서 내려 35번 국도를 타고 통도사 방향으로 좌회전, 1㎞쯤 가다가 통도사 표지판을 보고 우회전하면 된다.매표소가 있는  일주문을 통과하면 다리를 건너 통도사 대형 주차장이 나온다.




통도사대웅전과금강계단
국보제290호
소재지: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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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양산여행)통도사 안양암. 임진왜란때 왜구가 활시위를 당겼다가 주변 경치에 반해 그만 두었다는 통도사 안양암

통도사의 산내암자는 20여개로 그마다 특색을 가지고 있다.




자장암은 자장율사가 통도사 창건전에 이곳에서 먼저 움막을 직고 수도하며 바위에 검지로 구멍을 내어 금개구리를 살게 하였는데 이를 금와공 도는 금와보살이라 부른다.


이 부근이 임진왜란때 왜구들이 활을 쏘려고 활 시위를 당겼다가 그곳에서 보는 경치기 너무 아름다워 그만 활을 쏘지 못하고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 장소이다


극락암은 한국근대불교의 정신적 지주인 경봉스님이 1953년부터 조실로와 주석하였던 곳으로 암자입구의 극락영지는 절 뒤 영축산의 모습이 아름답게 비추며 그 영지를 가로 지르는 홍교 와 함께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서운암은 절 마당에 정돈된 5000여개의 장독대로 장관을 이룬다. 그리고 봄이면 100여종의 야생화가 만발하고 전통천연염색및 약된장으로 일반인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산내 암자이다.



백운암 비로암등 많은 암자들이 있지만 오늘 소개하는 암자는 통도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안양암을 소개할 까 한다.
흔히 안양 동대라고 하는 작은 암자로 아마 산내 암자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한다.


북극전의 모습

암자의 독성각 우측 바위가 있는 부분에 석축이 쌓여져 있는데 이곳에서 임진왜란때 왜구들이 활을 쏘려고 활 시위를 당겼다가 그곳에서 보는 경치기 너무 아름다워 그만 활을 쏘지 못하고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곳에서 보는 영남알프스 영축산의 모습이 노송과 함께 장관을 연출하며 발아래는 통도사의 모습에 왜구도 차마 활을 쏘지 못하였던 걸까..




그리고 안양암은 편편한 암반위에 조성되어진 암자로 이바위를 동대라고 부른다. 이곳 안양암에는 타 사찰에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전각이 있다.
안양암 북극전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7호로 안양암의 건립연대는 고려 충렬왕 21년인 1295년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스님들의 수도공간으로서 사용되어졌는데 현재의 모습을 이루게 된 것은 고종2년인 1865년에 중건 되었다.




원래 안양암은 스님이 거처하는 요사채등이 3채만 있었는데 최근의 중건으로 6동의 건물이 포진하고 있다.
그중 돋보이는 건물이 북극전으로 사람의 장수를 도와주는 북두칠성을 봉안하는 불전이다. 그래서 칠성전이라고 한다. 그 당시에는 북극전만을 안양암이라하였다 한다.























찾아가기


부산에서 이동할 경우 부산도시철도 1호선 명륜동역 앞에서 새벽 5시32분부터20~3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언양행 버스를 타고 통도사 입구인 신평에서 내린다. 일주문을 거쳐 통도사를 거쳐 좌측으로 오르면 된다.
또 KTX 울산역을 이용하면 수도권 시민들도 2시간30분만에 통도사 일주문까지 도착 가능하다.
울산역 앞에서 새벽 5시2분부터 25~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13번 버스를 타면 30분만에 통도사에 닿는다.
자가용 이용자는 경부고속도로 통도사IC에서 내려 35번 국도를 타고 통도사 방향으로 좌회전, 1㎞쯤 가다가 통도사 표지판을 보고 우회전하면 된다.매표소가 있는  일주문을 통과하면 다리를 건너 범어사 대형 주차장이 있는 곳에서 좌측 으로 진입하면 안양암으로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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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양산여행)통도사 봉발탑. 암, 스님의 밥그릇이 이정도는 되어야지. 통도사 봉발탑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보여지는 봉발탑은 양산 통도사의 보물 제471호가 유일하다한다. 봉발탑은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스님들의 밥그릇으로 발우라 부른다. 템플스테이에 종종보면 물에다 밥그릇의 밥풀 묻은 것까지 씻어 먹는 그릇이 발우인것이다. 






이것을 두고 발우공양이라 하는데 그만큼 발우는 스님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수행을 떠날 때도 자신의 발우는 챙겨간다고 하지 않는가. 통도사 봉발탑의 의미는 석가모니의 발우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이 봉발탑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용화전 앞으로 미륵불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굳이 왜 이곳에다 봉발탑 조형물을 세웠을까. 석가모니께서 입적한 후 56억 7천만년 후에 이 땅으로 내려와 부처가 되라는 석가모니의 뜻을 받들어 미래에 나타날 미륵불이 나타남을 기다린다는 것으로 보여진다.



상하대 모두 연꽃무늬를 넣었고 이를 받치는 기둥인 간주를 세웠다. 상대 위에다 뚜껑이 있는 발우를 올려 웅장하며 크기에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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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가면 볼거리가 너무 많은 곳이다. 얼마나 많은 곳이면 경주 남산을 두고 노천박물관이라 하겠는가. 그래서 경주에 가면 이곳 저곳 둘러 보면 사실 시간 가는줄 모르고 보내는 게 허다하다. 그래서 다시 찾아본 작은 금강산, 얼마나 아름다우면 소금강산이라 하였을까. 그래서 이차돈은 이곳에서 순교를 하였을까. 소금강산은 야트막한 야산 수준이다. 







경주ic에서 포항으로 가기위해서는 보문단지로 가는 외곡도로를 타고 가는데 이번 목적지인 소금강산의 굴불사지석불입상을 보기위해서는 직진하여 다리를 건너면 우측으로 굴불사지석불입상의 이정표를 볼 수 있다. 큰 주차장이 있고 오솔길을 따라 2분이면 오늘의 목적지인 굴불사지석조사면불상.




주사위 모양의 3m 바위를 양사방으로 틈도 없이 보살상을 새겨 놓은 사방불 형태의 바위로 이 바위에 얽힌 전설 또한 재미가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때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나 땅을 파 보니 이 바위가 나왔다 한다.


그래서 사방으로 불상을 새기고 굴불사로 불렀다하는데 그 후 어떤 연유로 폐사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발굴조사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건물터가 확인 되었고 발굴된 유물 가운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금고에 굴석사란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한다.



이 석불상은 남산의 칠불사 보살상보다도 더 많은 보살상이 새겨져 있어 장관이다. 바위를 돌아가면서 정성을 들여 기도하는 기도객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그때가 대입 수능을 앞 두고 있어서 더더욱 그러한 것 같았다.


사방석에 새겨진 불상의 모습을 하나하나 보면 서쪽 면에는 아미타삼존불을 모셨고, 그 반대편인 동쪽면에는 약사여래좌상, 남쪽으로는 삼존입상을 새겨 놓았다.
주목할 것은 북쪽으로 두분의 보살상이 새겨져 있는데 그 중 한분은 관세음보살입상으로 얼굴이 열하나 팔이 여섯달린 보살상을 하고 있어 국내에서는 보기드문 모습을 하고 있다.





세월 앞에는 장사 없다고 그 화려한 신라 불교 예술품의 모습이 그때의 모습을 다 보여 주지는 못하지만 천년 넘게 이어온 이 불상이 깨어나 다시 한번 염불 소리 를 들려 주었서면 하는 게 나의 바램이다.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보물 제121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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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의 영은사는 우연한 기회가 닿아 찾게 되었다. 아들 군 면회로 인해 삼척 갈 기회가 있어 돌아오면서 관광안내 표지판을 보고 무조건 찾아간 곳이 삼척의 영은사이다.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7번국도의 궁촌IC에서 약 6km 시골길을 따라 들어가야만 만날 수 있는 영은사는 산골의 은은함이 묻어 나는 깨끗하면서 한적한 사찰이었다.
그러나 그 사찰의 멋스러움은 어느 사찰과 비교하여도 떨어지지 않으며 역사성 또한 간직한 유서 깊은 사찰을 찾게 되어 내게는 행운인 것 같았다.


 






영은사의 건립연대는 진성왕 5년인 891년에 범일국사가 이곳 궁방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마전평에다 법등을 처음 받들었다 한다. 창건 당시에는 궁방사라 하였는데 지금의 영은사 법통을 이었다 보고 있다.
그후 궁방사는 어느날 화재로 인해 전소 되었다가 사명대사 유정이 1567년인 명종22년에 현재의 위치에다 궁방사를 중창하며 사명을 운망사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것도 잠시 1592년 임진왜란의 전란은 운망사를 비켜가지 않았다.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운망사는 다시 금당등 모든 건물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고 만다.
전란도 끝나고 화평할때인 1641년(인조19년) 벽봉스님에 의해 운망사는 재차 중창을 하고 현재의 영은사로 이름을 고쳤다 한다.

 


영은사의 법등은 꺼지지 않은 채 이어 오다가 160년 뒤인 1804년 순조때 또다시 영은사는 알 수없는 화재로 인해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
 금당을 포함한 전각 대부분인 10여채가 전소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그러나 팔상전만은 화마로부터 온전하게 남았다한다.
전소후 1805년 10월에 서곡스님이 삼척부사 심공저의 지원을 얻어 다시 중창을 하게 된 사찰로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는 현재 문화재등 6점이 남아 있는데 영은사괘불로 1855년 서암스님에 의해 조성되었다 하며 특이하게도 이 괘불을 펼치면 비가 오고 바람이 심하게 분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요즘 보기 드문 해우소(화장실)

특이한 구조로 측면에서는 2층구조로 되어 있는 조선 후기의 건축물



심검당과 설선당은 대웅보전의 앞에 서로 마주 보고 지어진 건축물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건물로 심검당은 정면에서 보면은 단층의 건물이지만 측면에서는 2층으로 된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요사체로 사용되는 곳이지만 화려함이 절제된 건축물로서 웅장함과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물로서 평가를 받고 있다.






설선당의 모습




영은사의 금당인 대웅보전은 1805년 중창때 새로 지어진 건물로 정면3칸에 측면3칸의 다포계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어 있다.
좌우로 설선당과 심검당의 요사체를 두고 그 뒤 중앙에 대웅보전을 두었는데 단을 올려도 너무 높지 않으며 깔끔한 모습에다 화려하지 않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대웅전의 규모에 비해 낮은 기단으로 대웅보전은 넓은 널판지를 짧게 잘라 끼워 놓은 기법인 ‘우물마루’기법을 사용하였고 위 가운데 두 개의 고주가 대들보를 받치고 불단을 형성하고 있다.
중앙 불단위에는 우물천장으로 그 외 여타 부분은 빗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대중들을 수용하기 위해 큰 규모로 지어진 조선후기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대웅전에는 1810년에 조성되었다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석가여래좌상, 노사나불좌상의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1641년 벽봉스님의 중창때 지어진 팔상전은 1804년 화재에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 한다.
이익공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유일하게 남아 있던 팔상전으로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7호. 건물내부에 1760년(영조36)에 그려진 부처님의 일생 탱화 8점이 1980년경에 도난을 당하였다한다.
팔상전 내부에는 최근에 그려진 석가여래탱화와 신중탱화가 있다.

















 

찾아가기
부산에서는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여 경주IC에서 빠져나와 서라벌대로 2.1KM 이동후 오릉네거리에서 포석로 시내방면으로 2.2KM 이동후 좌회전한다. 내남네거리에서 태종로 시청, 시의회(울산,감포)방면으로 우회전 후 697M이동한다. 팔우정삼거리에서 원화로 경주시청(포항)방면 으로 좌회전후 2.1KM 이동하면 원화로 지하차도 진입후 9.9KM 이동한다. 7번국도를 따라 산업로 고가도로 진입후 7.5KM 이동후 유금IC에서 영덕(울진)방면 우측도로로21.3KM 이동한다. 광명휴게소에서 동해대로를 따라가다 삼척시 근덕면 궁촌IC에서 영은사 표지판을 보고 우측으로 내려서면 된다. 약6km를 시골길을 따라가면 된다. 이정표가 잘되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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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사찰은 대개 산속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곳 용궁사는 바닷가 해안선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로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있다. 관세음보살님은 용을 타고 나타나는데 그 용이 물을 다스리는 신이다. 그래서인지 관음신앙이 섬이나 해안가에서 주로 나타남으로 양양의 낙산사나 남해 보리암 그리고 여수 금오산 향일암등 모두 바닷가를 끼고 있는 사찰에 공통적으로 모시고 있다. 이들 절이 모두 관세음보살상을 모신 관음성지이며 동해의 최남단인 시랑리 동암마을 시랑대에 관음성지가 용궁사가있다. 1376년인 공민왕의 왕사인 나옹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대사께서 경주분황사에 주석하시며 수도를 하는데 그해 나라에는 큰 가뭄이 들어 밭과 들에는 곡식이 타 들어가고 흉년으로 인해 온나라가  기근이 들어 세상의 민심이 흉흉하여 만백성이 하늘에 비오기만을 학수고대하게 되었다. 하루는 스님의 꿈에 동해 용왕이 나타나 말하기를 봉래산 끝자락에 절을 짓고 기도하면 우순풍조(雨順風調)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한다고 하였다한다.
이에 대사는 이곳을 도착하여 지세를 보니 앞으로는 바다요 뒤로는 산이라 이곳에 절을 세워 아침에 불공을 드리면 저녁에 복을 받는 복지라하는 명당터라 이곳에다 절을 세우고 산을 봉래산이라하고 절이름을 보문사라 하였다.

그러나 1592년 전국을 전란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해안에 위치한 보문사는 소실되고 말았다. 그후 300여년이 지난 1930년경에 통도사 운강화상이 옛보문사의 법통을 이어받아 법등을 받들게 되었다. 1974년 정암스님에 의해 관음도량으로 복원할것을 발의하고 백일기도를 드리니 회향일(回向日) 꿈에 백의관음이 오색광명을 놓으며 용을 타고 승천하는 것을 친견하였다 한다.

그 후 사찰명을 해동용궁사로 바꾸게 되었다하는데 최근의 용궁사는 너무 번잡하다 못해 시장 장터나 하나의 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 평일, 주말 가릴것 없이 몰려드는 인파에 북새통을 이루며 주말에는 줄을 써서 입장을 할 정도이며 나오는 출구에도 일렬로 줄을 서서 나오는 진풍경을 연출하였다. 필지도 토요일 오후6시가 넘은 시각에 용궁사를 찾아 사진이 미흡하여 일요일 다시 찾아갔는데 입구에서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일렬로 줄을 서서 들어가는 광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칠층탑인 교통안전기원탑 사진과 12지신상, 그리고 관음보살상 조각사진이 주말에 찍은 사진으로 줄을 서서 입장하고 있다. 나머지 사진은 토요일 늦은 시각의 사진이다.



















































찾아가기

해운대구 도시철도 2호선 센텀시티역에서 181번 기장행 버스를 이용하여 시랑리 동암마을 용궁사, 국립수산원에 하차를 하면 된다. 배차간격은 약20분 정도

이미지지도 발췌 용궁사 홈페이지 (http://www.yongkungs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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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조계산의 양대 산맥은 동서로 자리 잡은 선암사와 송광사를 이야기한다. 선암사는 아름다운 여인이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수줍어하며 절제된 미를 보여 다시금 찾아 가고 싶은 사찰의 분위기여서 그런지 이번 유홍준교수님에 의해 전국 최고의 사찰로 자리매김을 하여 연일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아름다운 사찰로 평가를 받았다,

그와 반대로 송광면의 송광사는 양장을 차려 입은 도시처녀의 발랄한 모습을 가졌다 할까, 관광지로 크게 개발되어 서로 상반된 분위기를 연출한다. 송광사는 신라말에 혜린선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이래 중창을 거듭하며 고려시대에는 16명의 국사를 배출한 유서 깊은 사찰로 불보사찰의 통도사,법보사찰의 해인사 그리고 승보사찰의 송광사로 삼보사찰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송광사를 대표하는 승보전은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법하시던 모습을 장엄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재현하였고 부처님과 10대제자, 16나한, 1250명의 스님을 모신 전각으로 송광사 8차 중창때 대웅보전을 지어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한다. 그옆의 대웅보전은 1951년에 화재로 소실된후 1988년 8차 중창때 다시 지었다하며 보물 제303호의 영산전은 법화전을 설법하고 있는 부처님을 모시는 곳이라 한다.
 
보물제302호의 약사전은 송광사 경내에서는 가장적은 법당으로 17세기 무렵에 건립되었고 중생들의 모든 질병을 고쳐 주는 약사여래불을 모신 곳이다. 관음전은 성수전으로 1903년에 고종황제의 성수망육(51세)때 임금이 이름을 지어 편액을 하사한 황실 기도처 역할을 하였다하며 그 후 1957년 성수전을 해체하여 관세음보살을 이곳으로 옮겨 관음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목감삼존불감, 국사전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는 곳으로 주로 선암사와 함께 둘러보면 좋다. 송광사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천지암봉 중허리에 위치한 전자암 쌍향수도 볼거리이다. 이가을에 찾을 만한 곳으로 허접한 사진이지만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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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 대장동의 성흥사는 사찰의 유명세 보다는
성흥사 계곡이나 굴암산(또는 팔판산)의
들머리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지금이야 굴암산의 등산로가 다양하게 개발되어
김해의 장유등에서 오를 수 있지만
예전에는 이곳 성흥사를 들머리로 거쳐야만 오를 수 있었다.


그래서 항상 거치게 되는 이 사찰은 사찰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않은 폼새가 요란하지 않으며 다소곳한 여인내의 모습이 느껴지는 깔끔한 사찰이다. 사찰경내를 들어서면 우선 군더더기 하나 없는 정갈한 배치이다. 정면에 대웅전과 좌측으로 나한전, 사천왕상을 모신 일주문을 통과하면 우측 2층의 범종각이 반겨주고 어느 고급주택의 정원처럼 관리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이곳 성흥사의 역사 또한 오래되어 창건연대는 신라흥덕광 8년인 83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건 동기도 여타 사찰과는 특이한데 이곳에는 남해안으로 왜구의 출몰이 잦았고 약탈이 심해 재임 초인 흥덕왕은 많은 고민을 하였다.
하루는 흥덕왕의 꿈에 하얀 옷에 수염의 노인이 나타나 흥덕왕에게 말하기를 지리산에서 수도를 하고 있는 도승을 불러와 평정하라고 하고 하니 지리산 도승을 찾아 이곳 왜구들을 평정케 하였다.
그 도승은 무염국사로 도승은 팔판산으로 올라가 한손은 지팡이를 잡고 한손은 배를 두드리니 왜구들은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치니 이소리가 신라군의 함성으로 착각하여 놀라 혼비백산하며 도망갔다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범어사14교구 말사
로 성흥사 대웅전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에 흥덕왕은 무염국사에게 재물과 전탑을 주어 구천동에 절을 짓게 하였고 그 후 500명의 승려들이 기거하는 대찰이 되었다 한다. 1109년, 1668년의 큰 화재로 사찰은 소실되어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다가 1789년 정조13년 이곳 웅동 팔판산 아래에다 성흥사를 중창하게 되었다 한다. 현재의 대웅전은 중창때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잦은 중수로 인해 그때의 모습은 많이 잃었다한다.
정면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이지만 맞배지붕으로는 드물게 화려한 포작을 구성하고 치마 끝을 들어 올려 간결함과 화려함을 같이 나타내었다.
그리고 성흥사 옆에는 이 사찰과 함께하는 노거수가 서 있다. 성흥사 중창과 때를 같이하며 약 220년된 시지정 보호수이다.





이곳 현판에는 불모산 성흥사로 표기하고 있다 이 뒤의 산은 굴암산(팔판산)으로 이산을 인근으로 여덞정승이 나왔다하여 팔판산으로 불리며 팔판산의 모산은 불모산이다. 부처님의 산으로 김해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 허왕옥이 일곱왕자를 이곳 불모산에서 출가 시킨데서 유래를 하고 있다.











찾아가는길

부산에서는 서부시외버스 터미널이나 지하철 하단역에 정차하는 20~25분 배차간격의 진해행 버스를 이용하여 웅동에서 하차를 한다. 30여분 발품을 팔면 성흥사 입구로 갈 수 있다.

승용차는 남해고속도로 서부산 톨게이트진입후 가락IC를 빠져나와 부산신항방면으로 진출후 9.3km 이동하면송정사거리가 나온다. 낙동남로 창원방면 우측으로 5.5km이동하여 마천삼거리에서 마천1길를 따라 성흥사 방면으로 우회전하고 다시 대장길 우회전후 550m 이동한다. 좌회전 후 2.2km이동을 하면 성흥사 주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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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사람들은 명당이란 말에 수긍을 할 것이다. 아니면 그런 자리가 어디있서 하며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미천한 서민은 살아서도 명당자리를 찾고 죽어서도 명당자리에 안장되길 원하는 것 같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화장을 원하지만....



현재에도 이런데 예전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명당자릴 찾았을까.
뜬금없이 갑자기 웬 명당자릴 운운하느냐 할 것인데 오늘 포스팅의 주제가 명당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볼까 한다.
법수사 대웅전이 자리잡은 이 자리가 명당의 혈로 고려말 공민왕때인 1371년에 순찰사 이전생이 왕명을 받고 전국을 순찰하면서 양산땅에 도착을 하여 주위의 산세를 보니 뒤로는 영남알프스 영축산이 병풍을 두르고 앞으로는 정족산과 천성산이 솟아 있어 주위의 산세가 빼어나고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이곳이 삼장수가 나올 명당자리임을 발견하고 그는 뛸듯이 기뻐하였다 한다.


왕명의 소임을 마치고 우왕6년인 1380년 그는 이곳에 내려와 밀양박씨와 결혼을 한후 3남2녀를 얻었다.
아들 삼형제는 징석, 징옥, 징규이며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하여 모두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무과의 최고 벼슬인 종1품 판중추원사에 모두 올라 마을이름 또한 삼수리가 되었다.
이전생은 조선 태조때 공조판서, 태종때는 예조판서 영중추원사에 올라 1407년인 태종7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하니 태종은 그의 공을 치하하고 양산부원군으로 책봉을 하였다 그 후인 1416년에 지명마저 양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진짜 명당자리를 알고 이곳으로 내려와 터를 잡아 아들이 모두 장수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모두 쟁쟁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 된 것으로 보아 삼형제의 부단한 노력과 명당이 어울려 모두 장수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 그 자리에는 법수사란 작은 사찰이 자리를 하고 있다. 대웅전의 모습은 군더기 없는 단아한 모습으로 간결하게 지어져 있는데 건너편 천성산(옛 원효산) 아래 홍룡사에서 낡은 대웅전을 새로 건립하면서 나온 대웅전 건축 부재를 이리로 옮겨와 지었다 한다.



어느 사찰과 다른점은 보통 화재로부터 절을 보호하는 물을 다스리는 용을 조각하는데 법수사 대웅전은 봉황을 조각한 것이 여느 사찰과 다르다 하겠다. 현재의 법수사는 누가 봐도 아 이런곳이 하며 명당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경관이 빼어나다.
그래서 인지 이곳은 그림 그리는 스님으로 유명한 일당 김태신스님이 기거하며 그림을 그린 사찰이다.
현재 대웅전 앞에는 이름모를 불상이 있다. 국내에서는 보기가 힘든, 의자에 걸터 앉아 있는 모습을 하여 궁금하여 스님에게 여쭈어보았다.

“스님 이 불상 아주 오래된 것 같습니다.”

“예. 몇천년 되었습니다.”

“아. 그러면 보물 같은 문화재인가요.”

“문화재로 지정 된 것은 아니고예”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불상을 보니 우리나라의 불상 재질과는 다른 사암으로 만든 불상이였다. 그래서인지 여기저기서 모래 알갱이가 떨어져 나가 있어 다시 물어보았다.

“스님. 이불상은 화강암으로 만든 것이 아니네예. 우리나라 불상은 화강암으로 많이 만들던데...”하며 말것을 흐리니.

스님들은예

“중국 부처님이나, 미국 부처님이나 다 똑 같은 부처님 입니다”하면서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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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객들에게는 순천의 조계산을 봄의 산으로 여기고 많이 찾는 명산의 대열에 올린다.
그래서인지 봄이면 빠지지 않고 한번씩 가는 산으로 여겨 선암사에서 장군봉을 경유 송광사로 하산을 하는 종주산행을 주로 한다.
그러다보니 꼭 빠지지 않고 들리게 되는 선암사 절집. 승선교와 강선루의 절묘한 사진이야기는 작가분들의 촬영장소로 유명하여 한번쯤은 흉내를 내어 사진을 찍어보기도 하지만 선암사는 사실 들어가 보지 않고 바로 통과를 하는게 산꾼들에게는 관례로 여기고 있다.

 


조계산 산행을 수도 없이 하고 취재산행도 하였건만 정작 선암사와 송광사에 대한 남아 있는 사진이 별로 없어 잊어 버리고 있었는데 아마 2009년 6월17일에 조계산 산행을 하게 되었다.
그때 선암사에서 아주 큰 행사인 선암사 재적 승려 총회를 하는지 많은 신도와 관광객으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래서 궁금함에 사찰 구경을 하고 가기로 하였는데 선암사 경내는 어수선하여 정신이 없었고. 한켠에는 돌아가신 고노무현대통령님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어 묵념을 잠시하고 사진 몇컷 찍고 나왔다.
사진도 시원찮고 차일피일 미루다 그만 포스팅할 시기를 놓쳐 쳐박아 두었는데 이번 무릎팍에 유홍준교수가 나와 선암사가 매우 아름답고 한국적인 사찰분위기로 추천을 한다는 말씀을 듣고 생각이나 용기를 내어 포스팅을 해본다.

비록 철지난 사진이지만 당시 승려들이 승무도 추고 하였는데 산행시간에 쫒겨 그냥 간게 아직도 두고두고 후회가 되는 대목이다.



선암사는 조계산의 주봉인 장군봉 아래에 자리잡은 천년고찰로 창건시기는 불분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제의 아도화상과 신라말 도선국사의 창건설이 전하는데 남아 있는 유물로서는 통일신라시대로 보기도 하는 사찰이다.
고려시대에 와 대각국사의천이 선암사의 암자인 대각암에 머물며 선암사를 중창하였다 한다. 사세가 번창하여 법당13동,전각12동등 많은 승려가 머물며 수도를 하였고 거느린 암자만해도 19개가 되었다 한다.
이많은 유물들이 정유재란때 왜군의 침입으로 전각등 많은 건물과 암자가 소실되었다 하며 1660년 정유재란 이후 경잠, 경준, 문정대사 세분이 8년간의 각고 끝에 중창을 하였다.
그후 여러번의 중창불사를 거듭하며 순조23년인 1823년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대웅전과 명부전등 많은 전각이 불에 타고 만다.
다시 해붕, 눌암, 익종대사께서 6번째 중창불사를 단행하였고 청량산으로 고쳐 불리던 산이름도 다시 조계산으로 혜천사의 사찰이름도 원래이름인 선암사로 고쳐부르게 되었다.
선암사는 1948년인 여순반란사건과 한국전쟁때 좌우의 대립과 갈등속에서 많은 피해를 보게 되는 운명을 맞았고 조계종과 태고종의 갈등을 겪었던 사찰이다.
사적 및 명성 8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하촌애서 1.5km인 흙길을 따라 사찰 경내를 걸어가는 오솔길은 짙은 녹음으로 이어지고 부도탑을 지나면 왼쪽에 걸린 무지개다리인 승선교가 아치형으로 남아 있다.

'신선이 되어 오르는 다리'인 승선교와 '신선들이 내려와 노니는 누각' 강선루을 보기 위해서이다.



보물제400호로 승선교 아래에서 강선루를 바라보는 것이 사진작가들의 포인트로 유명하다. 화강암으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다리로 규모가 꽤 큰편이며 반원형의 아치로서 가운데부분에는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숙종39년인 1713년에 호암대사가 6년에 걸쳐 완공하였다 한다. 최근에 해체복원공사를 다시하여 현재는 깔끔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삼인당

전라남도기념물 제46호

삼인당은 긴 알모양의 연못안에 작은 섬을 조성 하였는데 선암사 사적에 의하면 신라경문왕 2년인 862년에 도선국사에 의해 축조하였다 한다. 삼인이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삼법인을 일컫는 말로 모든 것은 변하여 머무른것이 없고 나라고 할만한 것도 없으므로 이릏 알면 열반에 들어간다는 불교사상으로 이러한 모양과 이름을 가진 연못은 선암사에만 남아 있다.





















선암사 마애여래입상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57호

불상의 높이는 7m, 넓이는 2m의 암벽에 음각으로 새겨 놓은 마애불이다. 고려하대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불상은 나발의 머리 위에는 육계가 솟아 있고 상호는 원만하며 이마에는 백호가 둥글게 표시되어 있다.











국제신문 이흥곤 기자의 선암사 해우소에 대한 글을 보면 우리나라 화장실 중 가장 깊고 아름다워 지방문화재로 지정됐다. 몸속의 오물과 함께 마음의 욕심도 모두 버리고 가는 곳이다. 아마도 화장실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듯하다.

선암사 곽창남 문화유산해설사는 "이 해우소는 냄새 또한 전혀 나지 않아 지금도 대학 건축 관련 학생들이 찾아와 사진과 함께 짜임새를 조사하는 등 연구대상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목장승

이목장승은 조선시대 말엽에 세워진 목장승의 모조로 1987년 9월에 다시 세운 것으로 장승에 새긴 호법선신은 불법을 수호하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성불을 하게 만드는 착한 신을 뜻한다. 방생정계를 새긴 장승은 이곳 부터는 더욱 모든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며 매인 것들에게 자유를 베풀어야 함을 뜻한다. 두분 모두 험상 궂고 위엄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찾아가는길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 승주IC~우회전 승주 낙안민속마을 선암사 방향~낙안온천 낙안민속마을~삼거리~857번 지방도~선암사 주차자순으로 도로 이정표는 잘 정비돼 있어 길 찾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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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양산여행)통도사 국장생석표. 천년동안 통도사의 경계를 표시했던 국장생석표가 보물로 남아 있네요.


통도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15년인 646년에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온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 되었다.

삼보사찰의 하나로 불보사찰로 유명하다. 삼보란 불교의 뿌리가 되는 불(佛:부처님), 법(法:불법), 승(僧:승단)을 뜻하는 말로서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가 봉안되어 있어 대웅전에는 불상이 모서져 있지 않은 사찰로 유명하다. 








팔만대장경을 모신 해인사가 법보사찰, 보조국사 이후 16국사를 배출한 조계산 송광사가 승보사찰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모시고 있는 통도사를 삼보의 으뜸이라 치고 있는데 그러한 규모인 통도사의 경계가 궁금한 것은 사실이다.



영축산 아래에 자리잡은 통도사는 현재 영축산 동남쪽인 통도사 뒤 골짜기가 모두 통도사 소유의 땀으로 알려져 있다. 지산마을에서 영축산을 거쳐 오룡산에 이르는 능선과 해운자연농원이 있는 뒷산인 늪재(봉화산)에서 통도사 매표소까지 이어지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지금도 이러한데 옛날의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시대의 사찰 규모는 더 확장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생각해 본 것이 통도사의 경계를 표시한 보물 제74호인 통도사 국장생석표이다.



통도사에서 먼 거리에 위치한 이 표석은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 35번 국도상에 위치하고 있다. 일주문에서 동남쪽 2km 지점이다. 예전 그 영화는 간데 없고 쓸쓸히 밭고랑 사이에 그때의 흔적만 남기고 있다.
통도사의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 기록에 따르면 사방 산천의 기를 보충하기 위해 12곳에다 장승인 표석을 세웠다고 하며 국명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1085년 고려시대때 세웠다고 되어 있는데 다시 세운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국장생석표가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167cm의 돌 기둥에다 해서체로 새겨진 통도사 국장생 석표의 원문글씨로 '通度寺孫仍川國長生一坐段寺所報尙書戶部乙丑五月日牒前 判兒如改立令是於爲了等以立 太安元年乙丑十二月日記(다음백과사전인용) '
네줄로 새겨진 글자는 이두문이 함께 사용되었고 금석문 연구의 중요한 자료라 한다. 넓이는 60cm 정도의 크기이다. 국장생석표의 역할은 사찰의 경계를 표시하며 땅의 기운을 보충하여 절에 들어오는 액운을 막기위한 고려시대의 풍수사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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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불원은 옛합판 왕국 동명목재 고강석진 회장께서 사재를 털어 창건을 하여 부산시에 헌납을 하였다 합니다.
1977년 5월22일 개원하여 처음으로 불법을 펼쳐진 날이라 합니다. 사실 동명불원에 가 보면 우리네 절집같은 푸근한
마음이 들지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왜 일까요.
지금까지 생각하고 왔는 우리 사찰의 건물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동남아의 영향을 받아 올린 건물이라 용마루가 길게 뻗어 나와 있으며 외관 또한 화려하게 지어졌습니다. 건물의 규모는 엄청 큰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님들이 있는 절집의 분위기 보다는 어느 사원에 들어선 것 같은 분위기는 나만의 생각일까. 



먼저 일주문과 만나게 됩니다.

사찰을 들어서는 이 건물은 용당으로 넘어가는 도로위에 지어져 모든 차들이 이 밑으로 통과하게 지어져 있습니다. 

건물을 들어서는 입구입니다. 동명불원이란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그 위에 전각을 올려 범종각이 조성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모든 번뇌에서 구재해 준다는 범종은 무게가 27톤으로 경주 에밀레종보다 6톤이나 더 무겁다하며 국내에서는 최대의 종이라하네요.


부산시 남구 용당동 비룡산 동명불원은 동남아시아의 영향을 받아 전체적으로 건물들이 용마루가 뻗어 나간 형태로 지어 졌다. 대웅전을 본전으로 부속건물로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관음전,극락전,나한전의 당우가 있다.





사찰을 들어서기 위해서는 일주문을 지나 좌측으로 틀면 천왕문 격인 사천왕상을 통과해야 한다. 불국정토를 지키고 불법을 수호한다는 사천왕상은 악귀들을 밟고 서 있으며 사천왕문의 설계는 입상작으로 결정되어 지어졌다 한다.



대웅전

안의 내부에는 석가세존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미륵보살을 우측에는 제화갈라보사릉 3본을 모섰다. 법당의 높이는 16m로 가운데는 기둥을 세우지 않아 전체적으로 공간의 활용과 시원한 공간배치를 할 수 있도록 하였고 양쪽 벽에는 비천상과 천장의 중앙에는 4마리의 용머리로 꾸며 놓았다. 큰 대웅전에 걸맞게 목조개금불상은 국내 현존하는 불상중에서는 가장 큰 것이다.




대웅전 우측의 관음전입니다. 들어오는 입구 건물의 종각 반대편에 있는 건물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신 곳으로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삼존불 즉 중앙의 아미타불과 좌우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보시는 곳이다.



화려하게 꾸며진 대웅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화려하고 큰 것 이외에는 감응이 전달 되지 않는 건물입니다.그리고 모든 건축물이 목재로 지어진 것이 아니고 시멘트로 올린것 같습니다. 자연의 조화가 아쉬운 마음입니다


 

 

 

 

 


 

 



불교에서는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사찰 당우인 극락전읩니다.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극락보전, 무량수전,무량전, 보광영전, 아미타전이라고도 합니다.


 
산신각 방향으로 올라가면서 본 동명불원입니다. 왼쪽 건물이 대웅전이며 덕망탑과 부덕탑도 보이는 군요. 전면에 보이는 건물이 관음전입니다. 건물의 형태는 'ㅁ'자로 지어져 있으며 대웅전 앞에는 주차공간으로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대웅전 앞으로는 두 개의 석탑이 서 있는데 좌측의 탑은 효자효부를 기리는 뜻에서 덕망탑이라 하고 우측의 탑은 부덕탑으로 젊은 선남선녀가 불법에 귀의하여 덕망과 부덕을 잘 닦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탑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처음 보는 탑의 형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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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단장면 보문사의 대웅전과 선바위모습

밀양 단장면 보문사

밀양시 단장면 무릉리 노곡마을 뒤산을 수리덤산이라 부른다.

산 정상일대에 바위 층덤이 절벽을 이루고 있어 이곳에 수리매가 서식을 하였다 한다.
이곳 아래에 보문사란 작은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절의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앉은 폼새 만은 천년고찰의 고승대덕이 수도하였을 법한 그런 위치이다.
발아래로는 이상향인 꿈속에라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도연명의 ‘무릉원기’인 무릉도원에서 따 왔다는 무릉리 마을이 펼쳐지고
 흡사 산 아래로 구름 바다가 펼쳐지면 신선이 되어 다닐 것 같은 그런 곳이다.
필자가 걸음을 옮겨 걸어 올라가니 꽤나 다리품을 팔아야 하며 경사도 또한 만만치 않아 힘이 들었다.




그래서 올라가는 중간중간 고급 전원주택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옛집들을 몰아내고
텃줏 대감인양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모습이 여기의 풍경과 어울리지가 않은 것 같았다.
이곳 보문사는 올해 나이로 68세이다.
창건연대는 어느 천년고찰에 비유할때가 되지 못하지만
노스님 한분과 기거하는 보살님의 자비로움이 관광지의 고찰에서 볼 수 없는
그런 사찰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노스님은 올해 나이로 79세이며 법랍은 56세인 주지 신행스님으로
아직고 텃밭을 일구시며 할 일을 찾아 호미를 덜고 나가신다.
잘 쉬시다가 가’란 말씀과 함께,

이곳 보문사에는 신기한 바위가 3개 있다.
대웅전과 붙어 있는 선바위로 마을에서는 입암으로도 부른다.
이 바위의 모습에 보문사를 창건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모습이 신기하다.
이리보면 사람의 얼굴이요. 저리보면 부처님의 모습이라.
그래서 사람이 곧 부처란 그 말이 실감나는 곳이다.

그 밑으로 자리 잡은 작은 바위는 흔들바위로 멀리서 보아도 흔들리는 그 모습이 확인된다.
또 하나는 요사채 좌측의 마당바위로 옛 밀양땅에서 관직을 버리고
국전리에서 여생을 보내며 이곳에 올라 시 한수 읊조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늑한 공간으로 소나무가 둘러져 있다.

그래서 인지 보문사는 더욱 정갈하며 정감이 가는 작은 암자이다.




 











흔들바위

마당바위


찾아가는 길

부산에서 밀양행 열차를 이용한다. 오전 5시10분,50분 6시35분, 55분, 7시45분, 8시35분,9시25분, 10시20분등 다양하게 있다.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하며 밀양시외버스 터미널에서는 국전행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하루 5회로 6시20분 8시40분, 12시50분, 17시, 19시이며 무릉에서 하차를 한다.

 

부산에서 신대구부산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밀양요금소를 빠져 나오면 24번 국도와 만난다. 울산 얼음골 표충사 방향으로 우회전을 하여 금곡인터체인지에서 우측 표충사로 내려선다. 금곡교를 건너면 단장면으로 1077번 지방도인 표충사 방향으로 직진한다. 단장면 소재지의 면사무소 앞에서 1077번 지방도인 무릉리 국전리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된다. 곧 무릉버스 정류장과 만나고 정류장 직전 노곡교를 건너면 자암서당을 지나 보문사 주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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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삼랑진에는 만어산이란 작은 산이 있다.
그곳에는 만어산의 명성을 알리는 작은 사찰이 자리 하고 있어 더 유명하다.
만어사로 고려시대 명종10년인 1180년에 보림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 한다.
그러나 만어사의 창건은 그 이전부터 창건설화를 가지고 있어
그 설화로 인해 만어사의 존재감은 더욱 부각 되고 있다.

실제로 만어산을 올라보면 만어사에만 그런것이 아니라
산 골짜기 마다 바위들이 에워싸고 있어 신비감 마저 든다.

그 수많은 바위들은 물고기의 설화를 가지고 있어 더욱 신비롭다.
밀양의 3대 신비로 불가사의로 분류된다.
창건연대는 가락국의 수로왕까지 연대가 올라간다.
못된 독룡을 불법으로 버릇을 고쳐 주기 위해 부처님에게 부탁을 하는데
여섯 비구와 일만의 천인을 대리고 왔다는 전설로
지금 대웅전 앞의 너덜들이 비구와 천인들이 변해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또 하나는 동해 바다의 왕자가 자신의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무척산의 스님을 찾아가 자신이 거쳐 할 곳을 부탁하니
그 스님이 가다가 서는 곳이 인연이라 이야기를 하였다.
왕자 뒤를 일만의 물고기가 따랐다하는데 현재 만어사 위치에서 인연이 닿아 서 버렸다.
그래서 왕자는 하나의 바위로 변하고 지금은 그 바위를 왕자가 변한 미륵불이라 한다.
왕자를 따르던 일만의 물고기 떼는 지금 대웅전 앞의 너덜인 바위로 변했다 한다.
이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전설 같은 바위들이 이리 보면 물고기 같은,
저리 보면 사람 같은 수많은 바위들이 얽키고 설키고 하여 계곡을 메우고 있다.
그중에는 여섯비구가 변해버린 바위에는 청아한 종소리나 쇳소리가 난다하여 더욱 신비롭다.
지금 만어 불영 경석을 보면 바위 마다 쇳소리 종소리를 확인해 볼려고
돌맹이를 두들겨 바위마다 맞은 상처가 여기저기 나 있는 것 또 한 사실이다.

많은 탐방객들이 얼마나 두들겨 대면

거주하시는 스님 왈

‘만어사 바위 다 깨진다’며 고래고래 고함을 다 치실까.

근래에 와서는 전에 없던 소원바위가 있다.
큰 나무 밑에 둥근 바위가 놓여져 있다. 먼저 바위를 들어보면 잘 들리지만 내려 놓은 뒤 소원을 이야기하고 들면 잘 들리지 않는다는 소원바위가 탐방객들의 발걸음을 잡고 있다.

창건설화대로라면 이 사찰은 2000년이 되어 가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지금은 가람의 형태가 단출하지만 한때는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선사가 이곳에 들러 미륵불을 직접 참배를 하였다 한다.

‘멀리서 보면 나타나고 가까이서 보면 사라져 부처영상이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고 하였다.
바위의 미륵불을 보면 대단한 힘을 느낄 수 있다.
부처 영상의 모습을 떠나 바위에서 느낄 수 있는 힘이랄까.

그 무언가 생각을 하게 해 준다.

만어사 8부 능선에 자리잡은 만어사는 허왕후가 도래한
고대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해 주는 전통 고찰이다.

이곳은 오랜 가뭄이 지속되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신라 왕의 공불처였다고 되어 있다한다.

만어사불영경석이 지방기념물 제152호에서 2011년 1월 천연기념물로 제528호호 승격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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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어사 삼층석탑

보물 제466호

소재지: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일연선사가 쓴 삼국유사의 어산불영조(魚山佛影條)에 보면은
만어사삼층석탑은 고려시대 명종10년인 1180년에
동량 보림스님이 만어사를 창건하면서 함께 건립된 삼층석탑이라 한다.

 

1단의 기단 위에 올린 삼층석탑으로 총 높이가 3.7m이며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이 모두 한 개 씩의 돌로 만들어 올렸다.
기단이나 탑신부는 모두 완전하게 보존되고 있으나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안아 후에 다른 석재를 이용하여 보주를 올렸다.
전체적으로 탑신부의 비율이 안정감 있게 만들어 졌고 단아한 모습의 고려시대 탑이다.
현재 삼층 석탑이 서 있는 자리 뒤로 넓은 터가 옛 법당자리이며
지금의 대웅전은 원래의 법당지에서 옮겨 건립되었다 한다.
그러나 삼층석탑만은 창건될때의 그 자리에 위치를 하고 있다 한다.






위의 만어산 삼층석탑은 몇해전의 모습으로 현재는 탑신부의 이끼며 바위의 이물질이 모두 정리가 된 모습입니다. 

찾아가는 길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삼랑진IC~김해 삼랑진 58번(만어사 10㎞)~양산 삼랑진역 좌회전, 1022번 지방도~굴다리 통과(삼랑진역 앞에서) 양산 원동 좌회전~ 우곡리에서 만어사 표지판을 보고 만어사 방향~만어사 주차장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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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장안사라는 사찰이 3군데이다.

김춘주가 삼국통일을 이룬후 나라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염원하여 전국에 장안사를 세웠다한다.
금강산과 남쪽의 부산 좌천(그 당시 양산) 장안사 그리고 중앙에 위치한 예천 장안사이다.

예천의 비룡산 장안사는 바닷속의 용궁으로서
내성천이 비룡산을 감싸고 있는 곳에 세운 사찰로
신라시대 경덕왕인 759년에 운명조사께서 장안사를 창건하였다.
그후 고려시대때는 지도림화상이 조선시대로와 덕잡, 법립 두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
장안사는 고려때 당대의 문장가인 백운 이규보가 머물며 글을 짓는 등
많은 인물들이 이곳을 스쳐간 유사 깊은 곳이다.



최근에 조성된 아미타 대불







 물돌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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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신산 쌍계사

경남 하동을 대표하는 사찰은 쌍계사이다.
쌍계사 입구의 십리 벚꽃길이 아니라도 쌍계사 만으로도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하는 쌍계사는 지리산 남부 능선의 삼신봉 아래에 위치를 하고 있다.

일반 사찰의 일주문에는 지리산과 별 관계가 없어도
지리산을 앞에 붙여 지리산00사라 붙이는데 왜 쌍계사는 지리산의 일개봉우리인 삼신봉을 앞에 갖다 붙였을까.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쌍계사를 가기위해서는 쌍계사 주차장에서 화개천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먼저 최치원이 바위에 새겼다는 쌍계석문을 지나야 한다.
정강왕이 두계곡이 만난다하여 쌍계사란 이름을 하사해
그것을 기념해 새겼다는 쌍계석문을 통과하면 큰 주차장과 만난다.
주차장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쌍계사로 들어선다.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22년인 723년에 대비, 삼법 두스님이
당나라 남선종의 6대 혜능 스님의 머리뼈를 모셔와 꿈속의 계시대로
눈속에 칡 꽃이 핀 자리에다 머리뼈(頂上)를 모시고 절을 지었는
현재의 금당자리가 칡꽃이 피어 있던 자리였다 한다.
그 후 어찌되었는지 절은 황폐화 되었다가
서기830년에 진감혜소국사게서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와 이곳에다 혜능의 영당을 짓고 크게 중창을 하여 옥천사라 하였다.
886년인 정강왕때 사명이 쌍계사로 바뀌었는데
입구의 화개란 명칭도 겨울에 칡꽃이 피었다는 전설로 생겨났다.
그래서 인지 봄메는 벚꽃이 십리를 뒤 덮고
산에는 이른 봄부터 많은 꽃들이 피어 쌍계사를 더욱 화려하게 만든다.
부도탑을 지나면 일주문과 만난다.

 



쌍계사 일주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6호로 속세를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서는
경계의 문으로 마음을 정갈이하고 옷깃을 다시 한번 여미어 본다.
일주란 양쪽에 한 개씩의 기둥을 세워 지붕을 받치게 하고 있다하여 부르는데
1641년인 인조19년에 벽암스님에 의해 세워졌는데
1977년에 고산스님에 의해 중수를 하였는데
세월의 무게에 의해 보조기둥을 세워 일주문의 성격을 잃어버렸다.
겹처마에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왜관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쌍게사 금강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금강이란
사찰에 들어갈 때 불법을 받들고 속세의 더러운 때를 씻고 들어간다는 의미로
사천왕이 있는 천왕문과 유사하며 840년 신라문성왕2년에 진감선사가 창건을 하였다.
그후 인조19년인 1641년에 벽암스님에 의해 중수되었고 근래
1979년 고산스님에 의해 중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악을 물리치고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를 모시는 곳으로
정면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으로 밀적금강과 나라연 금강을 모시고 있다.
현판은 벽암스님의 글씨이다

 




쌍계사 천왕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6호 사
천왕은 부처에 귀의하여 부법을 수호하고 수도승과 불자를 돕는 4명의 사천왕으로
부처가 거처하는 이상향인 수미산에는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국천왕이 동서남북으로 각각 다스리며
이곳을 들어서면 수미산 즉 부처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다.
순종30년인 1704년에 백봉스님에 의해 창건되었고 1
825년과 1978년에 각 중수를 하였다.
불교음악인 범패의 창시자
진감선사가 여기 섬진강에서 노니는 물고기를 보고
여덟음률로 작곡을 하였다하여 팔영루라 한다.






팔영루 앞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것으로
최근에 조성된 구층석탑이다.










쌍계사 대웅전

보물제500호

임진왜란때 소실 된 것을 1632년 벽암대사에 의해 중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에는 여래불을 모시고 정면5칸 측면3칸의 큰 규모로
팔(八)자모양의 팔작지붕을 얹었다.
건물의 외관은 정교한 수법으로 조각되었고
화려한 단청으로 인해 더욱 돋보이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불교 건축물이다.


쌍계사 적묵당 과 설선당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6호, 제153호

요사체로 스님들이 기거하고 공부를 하는 곳으로
진감선사가 840년인 문성왕2년에 대웅전과 함께 창건을 하였다.
1641년 중창을 하고 1978년애 고산스님에 의해 중수되었다.
정면6칸 측면3칸으로 규모가 꽤 크고 홑처마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로

국보제47호이며 쌍계사에서 유일한 국보이다.

진감선사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 신감대사에게 계를 받고
수행에 전진하다 830년 신라로 돌아왔다.
그의 범상치 않은 법력과 학문에 왕과 백성들에게 많은 신망을 얻었다.
그후 77세때 옥천사(현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헌강왕은 885년에 ‘진감선사대공탑’를 세우게 하였고 2년후인 887년에 완공되었다.
탑비의 글은 고운 최치운이 짓고 썻는데 그의 사산비명의 하나로 꼽힌다.
현재 탑비를 보면 6.25한국동란과 빨치산 소탕때 총탄에 의해 깨어진 자국을 볼 수 있다.

 







쌍계사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8호

석등은 빛으로 부처님의 진리를 비추어
중생을 깨우치게 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의미로
절에서는 중요하게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탑과 함께 대웅전인 법당 앞 에 위치를 한다.




쌍계사 마애불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

자연석의 바위 한 면을 돋을 새김을 한 마애불로 고려시대 작품으로 보인다.

감실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 불상 주위를 깊이 파 내었고
전체적으로 품기는 느낌이 너무 소박하여 부처의 모습보다는 승려의 모습 같은 느낌이 든다.













쌍계사 명부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3호

명부전은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의식이 행해지는 곳으로
지장전 시왕전으로도 불린다.
조선후기에 와 민간 신앙이 불교와 혼합이 되는 양식을 보여 주는 것으로
명부전에는 지옥의 중생을 구한다는 지장보살을 중심에 두고
그 좌우에는 죽은자의 잘 잘못을 따져 영혼이 가야 할 곳을 정해주는 명부의 10대 제왕을 모신 곳이다.
1687년 숙종13년에 성안대사에 의해 창건되었고 1710년 신민대사에 의해 중수를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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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산 흥국사

☞(부산여행/강서구여행)월명산 흥국사. 김수로왕과 허왕후가 폐백을 올렸다는 사찰 월명산 흥국사 찾아가기


월명산은 보배산과 마병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에 지능선을 여럿 두고 있다.
명동 마을로 내려서는 능선에 솟은 작은 봉우리이며 보배산은 보개산으로도 알려져 있다.
부산 강서구와 창원시를 경계하며 옛날 보배산에서 보물이 나왔다한다.

산마다 전설이 없는 산이 없듯이 여기 보배산에도 허왕후에 관한 전설이 숨겨져 있는 산이다. 
강서구 지사동 명동마을의 골짜기를 타고 오르면 월명산 흥국사란 작은 사찰을 만나게 된다.










천태종의 이 사찰은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전설이 전해 오는 사찰로 명월사의 옛 터로 보고 있다.
1706년 증원의 ‘월명산흥국사사적비문’를 보면 김수로왕이 48년에 명월산 밑에서 친히 왕후 허씨를 맞이하여 환궁을 하였는데 허왕후는 입고 온 비단바지를 벗어 이산의 산신에게 바쳤다 하며 김수로왕과 허왕후가 이산에서 폐백을 올렸다 한다.
왕은 허왕후의 아름다움을 달에 비유하여 이산을 월명산으로 칭하였다.

 











가락국 태조왕 양후 유허비


흥국사에는 칠성각 건립 때 출토된 사왕석1개가 있는데
중앙에는 앉아 있는 부처님의 모습하며
그 좌우로 코부라뱀이 부조가 되어 있다. 이를 사왕석이라 한다.
열반에 든 부처를 보호한다는 뜻이란다. 

우리나라 불교 조각에서는 유래가
없는 조각품으로
인도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증거로 보고 있다.








흥국사를 들어가는 길은 큰 산으로 들어서는 착각이 든다,
우거진 숲속에 자리잡은 흥국사는 최근에 창건되어 깨끗한 절의 이미지를 하고 있다.
규모 또한 작지만 사찰의 면모를 갖추고 부처님의 도량으로 법통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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