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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사 수미광명탑의 안내문입니다.

보성 대원사에 가면은 2001년 7월에 개관을 한 티벳박물관이 있습니다. 이 박물관은 개관을 할때 달라이라마는 축하메세지를, 티벳 신탁승 툽덴 린포체는 가습불사리 1과를 그리고 네팔의 불안불탑으로 유명한 슈얌부사원의 주지스님은 카일라스(수미산)사리 33과를 보내 왔다합니다. 이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높이 15m의 티벳식 불탑 수미 광명탑을 발원하였다 합니다. 108분을 모아 2002년 3월 기공식을 갖고2003년 5월에 수미광명탑을 완공하였다 합니다.
 



<백옥으로 만들었다는 수미광명탑입니다.티벳양식으로 조성을 하였다 합니다>

수미광명탑은 상륜부 첨탑을 황동으로 제작을 하였고 11면천수관음상을 모신 감실등이 티벳 망명정주의 협조로 인도에서 제작되어 순금으로 옷을 입혔다합니다. 불탑의 바닥과 탑신은 백옥으로 장엄하였으며. 불탑 내부에는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해주기 위해 약초와 약함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삼존불을 모섰습니다. 삼존불은 네팔의 석가족의 장인들이 직접 조성을 하였다하며. 법당내부에는 티벳 왕궁화가인 락쌈과 체링부부가 1년간 공들어 그린약사여래, 석가여래,아미타여래,미륵존여래의 사방불국토와 칼라챠크라 만드라가 그려져 있다합니다.


 <수미광명탑안의  약사여래 삼존불입니다. 약초와 약함을 들었으며 석가족의 장인들이 직접제작을 하였다 합니다. 삼존불 뒤 배경의 그림은 티벳 왕궁화가 부부가 1년 동안 공들여 그린 그림이라 합니다. >



대원사 주차장에 서면 흰색의 탑을 볼 수가 있다. 백옥으로 만들었다는 수미광명탑이다. 그 탑앞으로 박물관이 마주 위치하고 있다. 티벳박물관은 현장스님이 티벳을 여행하시면서 모은 티벳미술품 1000여점을 상설 전시한 건물로 국비가 4억5천만원, 도비와 군에서 각각5천만원을 지원, 자체조달 2억5천만원 총 8억원의 기금으로 건립되었다 한다.


1층 전시실에는 달라이라마 기념실과 제1전시장으로 달라이라마 기념실에서는 가섭불사리탑에 봉안할 사리를 친견할 수 있으며 티벳 신탁승 쿠덴이 보내온 4과의 사리가 증식되어 현재는 48과가 되었으며 계속 자라는 신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합니다.

2층 전시실에는 석가모니의 직계후손인 석가족의 장인들이 만든 불상을 모신 법당과천수관음상, 6년고행상, 시청각실이 갖추어져 있다. 지하전시장에는 김지장스님 기념관과 저승체험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관람은 하절기:오전10시~오후6시.
동절기:오전10시~오후5시
년중관람이 가능하며
입장료는 2000원
티멧박물관 061-852-3038

*자세한 정보는 티벳박물관 홈페이지를 클릭하시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http://www.tibetan-museum.org/*

*필자는 산행후 촉박한 시간으로 인해 안을 둘러 보지 못한 아쉬움이 내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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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봉산 대원사

소재지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 831번지

<대원사 경내입니다. 그리고 극락전으로 유형문화재제8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대원사는 1500년경 전인 백제 무령왕 3년(503)에 아도화상에 의해 천봉산 골짜기에 창건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5교9산중 열반종의 대 가람으로 위세를 떨쳤으며 고려시대에는 조계산 송광사의 16국사중 제5대인 자진원오국사가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여 선원 승방을 크게 중창을 하여 대가람의 위세를 갖추었다. 그후 조선 영조 7년때(1731)에 탁오대사가 중창을 하였다. 그러나 26년뒤인 1757년에 발생한 대화재로 대가람은 잿더미가 되고 만다.




영조35년에 와 현정선사가 다시 불사를 일으켜 중창을 하여 주위에 12암자를 거느린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지만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한국전쟁때 또다시 극락전만 남기고 모든 전각들이 전소되는 불운을 맞는다. 그후 1990부터 불사를 일으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을 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원사는 자진원오국사 부도탑과 극락전 그리고 극락전 안의 관세음보살과 달마대사의 벽화가 사찰벽화의 진수로 꼽을 만하다합니다.

대원사 경내로 가기위해서 두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꽃이란 이 문 앞에서 넓은 길을 그냥 따라가도 되구요, 또 하나는 이문을 통과하여 천봉산 대원사 일주문을 지나시면은 대원사로 갈 수 있습니다. 필자가 최근에 댕겨 왔을 때에 마지막 단풍이 대원사를 감싸며 절정이였습니다. 그 단풍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직진을 하면 좌우 쌍돌탑과 만나고 넓은 길을 따라가면 바로 대원사로 갈 수가 있습니다.

돌탑을 지나 뒤돌아 본 모습입니다.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과 단풍나무가 장관입니다.


우리는 한꽃이란 문을 들어서니 이런 단풍나무가 반겼습니다. 황홀한 단풍이 일주문 주위를 뒤 덮고 있었습니다.

단풍나무 아래 연못에 둘러 싸인 정자가 더욱 운치 있는 모습으로 주차장에서 저 정자를 지나서 바로 일주문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천봉산 대원사의 일주문입니다. 이문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다시한번 단풍과 함께 잡은 일주문을 보게되겠습니다.


이제는 경내로 들어갈여고 하는데 단풍나무가 자꾸 나를 잡습니다.
한번만 더 둘러 보고 대원사 경내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눈여겨 보시면 이 단풍나무 뒤쪽으로 건너온 우리는 한꽃이란 작은 문이 보입니다.

그리고 일주문 앞에서 봤습니다 걸어오는 사람 뒤로 연못에 둘러 쌓인 정자도 보입니다.

이제 미련없이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니 우측으로 나무아미타불이란 각자가 보입니다.
발아래 깔린 낙엽들 함 보세요. 이쁘게도 깔려 있습니다. 

이 지점이 천봉산 산행과 대원사로 갈 수 있는 갈림길입니다. 산행은 우측길, 대원사 절집구경은 직진을 하면 됩니다. 그럼 직진을 합니다.  

여기가  두길이 서로 만나는 곳입니다. 왼쪽에 화장실입니다. 그 뒤로 단풍이 옛집모양인 화장실과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영의정 황희정승 영당



조선 세종때 명재상으로 24년 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청렴결백으로 청백리의 표상인 익성공, 방촌, 황희정승의 영정이 1460년에 대원사 경내에 봉안되었다한다. 그러나 그후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유허지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역사유물복원차원에서 다시 영당을 복원하고 존영은 광주 전남 황씨 종친회에서 표준영정을 묘사하여 복원을 하였다 한다.

대원사 귀자모신

부처님 당시 아기를 잡아 먹는 “하리티”라는 야차귀신이 있었다. 그는 아기를 유괴해서 잡아먹어므로 사람들이 부처님을 찾아 뵈어 호소를 합니다. 부처님은 하리티에게는 500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중 막내인 “빈가라”를 신통력으로 발우속에 7일동안 감추버립니다. 이에 하리티는 막내 자식인 빈가라를 잊어버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어며 부처님께 찾아와 아이를 찾아 달라고 도움을 청합니다. 이에 부처님은 아리티를 꾸짖어며 500명의 자식을 두고도 내마음이 그리 아픈데 1명의 자식을 두고 그를 잃어 버린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봤느냐며 크게 호통을 치니 야차귀신은 크게 깨닫고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받아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한다. 그후 하리티는 어린 유아들을 보호하고 산모들의 출산을 돕는 사랑의 신이 되었다합니다. 대원사에 가면 유아양육과 해산의 신인 귀자모신을 모시고 있다.

태아들의 영가입니다.

대원사 부모공덕불

전면의 아버지불입니다.

뒷면은 어머니불로 한을 가슴에 안은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울고 있는 아버지 모습입니다. 가까이 가 봤습니다. 눈물을 삭이시며 묵묵히 바라보시는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성철 큰스님은 “집안에 부처님이 계시니 바로 부모님이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님은 안계시면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대원사에 봉안된 부모공덕불은 부모님에 대한 불효와 원망심을 참외하고 부모님의 깊은 은혜를 감사를 드리게 하는 지혜와 자비의 부처님입니다.

여기 부모공덕불의 앞면에는 우리들의 아버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언제나 묵묵히 괴로움을 속에 삼키시고 속으로 눈물을 흘리시는 아버지 그 눈믈 흘리는 아버지 불상이 모서져 있고 뒷면에는 모든 아픔을 가슴에 안고 그 아픔을 삮여 가슴에 한으로 남아 맺힌 것이 많은 어머니 불을 모시고 있습니다. 대원사 주지 현장스님은 공덕불에 부처님 진신사리1과와 부모은중경, 오곡, 오약, 오보등을 넣어 봉안하였다 합니다.

*대원사의 머리를 맑게하는 왕목탁*



대원사에 가면 머리로 치는 왕 목탁이 나무에 걸려 있습니다,

목탁을 머리로 치는게 아니라 머리로 박아 봐야 겠지요,

그러면 남이 나에게 나쁜말이나 행위들을 간직하고 있으면 병이 되고 나쁜 업이 되고 그것이 나의 삶을 고통으로 만들고 불행을 만들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을 소멸하게 하고 항상 맑은 생각과 맑은 기운을 받아라는 왕목탁에 머리한번 세게 박아봅시다.

지도 머리가 복잡해 대원사에 관해서는 나누어 올리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머리가 복잡하여 왕목탁에다 냅다 머리를 꽉 박아 내머리 부터 맑게 하고 오겠습니다. 

연못과 담장 그 뒤로 금종각입니다. 종이 전부 누런 황금을 입혀 놓았습니다. 요기까지입니다. 극락전 부터는 2부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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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양등마을 안 골짜기에는 작은 암자가 있다. 영남알프스의 외진 오두산 자락의 치마폭 같은 넓은 골짜기에 터를 잡은 밀봉암은 어느 산길 처럼 번들나게 찾는 그런 절집이 아니다. 골 수 산꾼 들만 하산시나 등산시 가끔 찾아 올 뿐 그만큼 외진곳에 위치를 하고 있다.
오두산과 송곳산 사이에서 흘러 내리는 골짜기에 숨어 있는 밀봉암은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 수 가 없지만 조선후기로 추정을 할 뿐이다. 




상북 읍지인 1919년 불우조에 밀봉암은 "고을 서쪽 15리되는 양등리 금산 아래에 있다(在縣西十五里楊等里錦山下)"고 되어 있다.
전해오기는 신라 고찰이라고 하지만 남아 있는 자료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현재 대웅전 좌측으로 바위에 음각 글씨가 있는 옆에 천태각이 있는데 1883년 고종20년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조선후기로 추정을 하고 있을 뿐이다.
 1939년에 새로 중수를 하였고 1959년 사라호 태풍때 대웅전이 산사태로 매몰되고 사찰 또한 풍지박산이 되었다.
그 후 1964년에 현 대웅전 우측에 작은 규모의 대웅전을 건립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말사로 '밀봉암(蜜蜂庵)'은 최근에 중창을 하여 대웅전과 칠성각을 새로 건립하였다.

최근에 불사를 일으켜 중창한 대웅전으로 옛 대웅전의 좌측에 터를 닦고 새로운 대웅전을 건립하였다

옛 대웅전의 모습이다.

반듯한 칠성각의 모습으로 화려한 단청을 칠하였다.

대웅전 좌측으로 가지산에서 흘러온 능선이 배내고개를 거쳐 능선은 갈라지는데 좌측의로 흘러 내리는 오두산 능선에 터를 잡고 있다. 앉은 폼새가 예사롭지 않다.

최근에 중창을 하여서 그런지 단청의 색깔 또한 화려하고 곱게 치장을 하였다.

문살아래 사천왕상의 문양을 험상궂게 표현을 한 것으로 보아 잡귀신은 얼씬도 못할 것 같다.



외벽의 벽화들...

1883년 고종 20년인 조선후기에 천태각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 후기의 사찰로 보고 있지만 신라시대때 에 창건을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천태각 옆 큰 암벽에 새겨진 글씨로  예사롭지 않은 글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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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인각사지

사적제374호

소재지: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612






들어 오는 입구의 부도탑으로 조선시대 부도로 추정하고 있다 . 건너편의 바위가 학소대


석조여래좌상

황량한 절 맞은편으로 옥녀봉이 다가와 있고


인각사는 신라시대 선덕여왕 11년인 64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을 하였다. 절의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기린의 뿔을 이 바위 위에 얹었다하여 절 이름을 인각사라 한다. 현재 인각사는 그때의 당우는 사라지고 그 명맥만 이어져 내려오는 작은 절집에 불과 하지만 당대의 보각국사 일연스님이 주석을 하며 삼국사기를 여기서 집필하였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끈다.

1284년 고려충렬왕 10년때 중수를 하였고 조선 숙종 25년에 증축하였다 한다. 충렬왕때 일연(1206~1289)스님이 고령의 노모를 모시기위해 인각사에 거쳐를 하면서 구산문도회를 두 번이나 개최하였다 한다. 경내인 극락전 뒤로 중극의 명필인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보각국사의 탑이 있고 조선시대 새롭게 지어진 극락전 명부전 강서루 요사등의 건물과 석조불상, 부도등이 남아 있다.

*인각사 보조 국사 탑 및 비

보물제428호



고려시대 보각국사 일연의 부도와 비다. 부도는 높이가 2.42m로 자연석으로 된 지대석위에 희미하게 복련이 새겨진8각의 하대석을 설치한 형태이다. 중대석에는 동물상이 조각되어 있고 상대석도 8각의 옅은 굄을 이루고 있으며 그주위에 작은 연꽃을 조각하였다. 몸돌도 8각인데 정면에는 탑명이 새겨져 있으며 후면에는 문비가 본떠 새겨져 있고 나머지 여섯면에는 사천왕상과 보살입상이 돋을 새김되어 있다. 보각국사비는 점판안의 석재로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비신의 높이가 1.8m 너비는 1.06m이다. 자체는 중국의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겼다하며 비문에 고려 충렬왕 21년(1295)에 건립되었다고 나와 있어 건립연대를 알 수 있으며 그것으로 볼때 부도탑도 입적후인 1289~1295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을 할 수 있다.

*관점이 있는 뉴스에 인각사에 관한 자료를 링크하였습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71231113153&Section=

*문화재청의 보각국사 탑및 비입니다.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12,04280000,37&queryText=V_KDCD=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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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사는 신라 선덕여왕 20년인 537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그 후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조선 철종 함풍 7년 무오(1858)에 이우인이 중수하였다하며 고종 융희 2년 무시(1908)에 원인 모르는 불이나 대웅전을 전소시키는 화재가 일어나 유금사는 쇄락의 길을 걷다가 주지 김화한 스님이 다시 중수하여 사세를 키워왔다. 그뒤 이현호 스님이 다시 중수하면서 현재의 사세를 갖추었다. 유금사는 관내에서는 아주 오래된 사찰로 많은 문화재급 유물이 있었으나 잦은 화재와 도난으로 유실 또는 도난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현재는 대웅전 좌측으로 향로전과 우측으로는 서운루와 요사체를, 대웅전 우측으로 산왕각을 두고 있다. 대웅전 뒤에는 원래 대웅전 앞에 있던 삼층석탑이 자리를 하고 있다.





칠보산 유금사는 일곱보물을 간직한 산으로 두가지 이야기가 전한다한다.

첫 번째가 선덕여왕시절 일곱 공주가 이곳 유금사에 와서 보살이 되어 살다가 모두 선화한 선녀가 되었다는 이야기와 중국의 두사충이 이곳을 지나다가 물맛을 보고는 이산에 일곱가지의 보물이 있다하여 칠보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원래는 바닷가의 영향으로 항상 칠보산이 구름을 이고 있어 등운산으로 불였는데 칠보산으로 부르게 되었고 지형도를 보면 등운산은 그 아래 767m로 따로 독립되어 있슴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 이전까지는 대웅전과 종각, 장화부인 신령각 등을 갖추고 제법 큰 규모를 자랑했던 사찰로. 그러던 어느날 주지스님이 불국사에서 법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절 앞 용소에서 두 마리 용이 교미하는 것을 보고 고약하게 여겼는데 스님이 절에 도착하기도 전에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로 절이 무너졌다고 한다. 그 뒤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그리고 유금사는 장화부인을 모신 신령각을 두고 있었는데 애뜻한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신라 말엽에 마의태자에게 연정을 품은 장화부인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 유금사 금선암에 찾아와서는 마의태자가 왕에 오르기를 축원하고 기도하였다. 신라가 망하자 마의태자는 경주를 떠나 금강산으로 가게 되면서, 마의태자가 종적을 감춘것을 보고 아마 마의태자가 죽었다는 전갈은 받은 장화부인은 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다 그 자리에서 죽어 마을 사람들이 크게 장사를 지내주고 유금사에 장화부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신령각을 지었지만 현재는 유실되어 폐허가 되었다 한다. 유금사 동남쪽 약 500m 지점에 석축으로 조성된 거대한 고분이 남아 있는데 신라 경순왕의 후비 장화부인능이라고 마을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삼국시대때 부터 손으로 금을 주울 정도로 많이 생산되어 유금마을이라부르며 유금사는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불국사 말사이다
찾아가는 길은 경부고속도로 건천IC~경주 영천 20번 좌회전~포항 영천 경주 좌회전~포항 20번~건천터널~경주 포항~경주터널~포항~말구불터널~포항천북20번~포항경주7번(북경주)~포항7번~울진포항7번~울진영덕7번28번~울진영덕28번~울진영덕7번~흥해읍~울진영덕28번(성곡ic)~울진영덕7번~영덕군~강구~울진평해7번~칠보산8km자연휴양림. 유금사6km좌회전~금곡리유금사2km~유금마을순

<자료 : 칠보산유금사 주지 玄煜 스님> 글을 정리함

 


칠보산 유금사의 일주문



대웅전 좌측으로 있는 향로전으로 하필 역광이네요.

향로전 안에 모서져 있는 불상입니다.


대웅전 안의 삼존불입니다











유금사에 들런 그날 겨울 준비가 한창인 김장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유금사 삼층석탑
보물제674호
소재지: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금곡리 815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양식으로 2중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얹었고 높이는 3.2m이다.

모연문. 유금사 삼층석탑에거 나온 금동불상인 피리부는 동자 악천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가는 바람에 화강암으로 조성을 하여 모신다고 한다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으나 법당이 무너지면서 뒷뜰로 옮겼는데 그때 탑안에서 금동보살을 찾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현재 보관을 하고 있다 한다.

현재 탑은 지대석과 아래층 중앙부가 약간 꺼져있고 상층기단 면적이 일부는 시멘트로 보안을 하였다.


상륜부는 없어 졌지만 현재 보관 상태가 아주 양호하다.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1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각층 몸돌마다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은 수평으로 받침수는 각층4단으로 되어 있다.

지대석과 아래층 중앙주가 꺼진곳을 볼 수 있다.


기단부는 여러개의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놓고 그위에 하대석과 중석을 하나의 돌로 놓아 얹었으며 중석 각면 모서리 기둥과 안기둥1주가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기단부의 크기와 각층의 체감 비율이 안정감을 주는 우수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자세한 정보는 문화제청 홈페이지입니다.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12,067400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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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방어산 마애불

보물제159호

지정연대 1963년 1월21일

소재지:경남 함안군 군북면 하림리 산131로 마애사 우측 방어산 7부인 해발 350m에 위치하고 있다.





초창기 근교산 취재산행때 마애사를 출발하여 마애불을 거쳐 괘방산으로 산행을 하였는데 그때의 마애사는 지금에 비해 한적한 절집으로 한창 불사가 진행중이었다. 절의 스님이 동행을 하였는데 마애불을 안내해 주신다. 붉은 바위벽면에 새겨진 마애불상으로 그 당시에는 그냥 대충보고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는 위치한 자리도, 화강함이 아닌 푸석바위 같은 바위면에 새겨져 있어 품새가 아주 초라하게 느껴졌다. 또한 찾는 이가 더문 한적한 사찰의 마애불에 불과하였다. 최근 어식재에서 산행을 하여 방어산으로 가는 도중 들러본 마애불상은 그 때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크기 또한 그때보다 웅장하며 마애불상 앞을 참배할 수 있도록 넓게 조성을 하여 누구나 쉬고 갈 수 있도록 해 두었다. 그 당시의 볼품없는 붉은바위벽의 마애불이 문화재적인 가치에 눈을 뜬 것 같았다.

통일 신라 시대 애장왕 2년인 801년에 조성된 마애불로서 조성연대가 정원17년 신사3월이라고 정확하게 새겨져 있는 작품이다. 방어산 마애불은 절벽 바위벽에 새겨진 마애약사삼존불로 입상의 형태이다. 중앙에 모서진 본존불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아 약사여래불임을 알 수 있다. 8세기 까지 이어오든 불상의 형태에서 변화를 느껴지는 작품으로 긴장감과 작품에 활력이 넘쳐 생동감이 느껴지는 모습은 사라지고 사실적인 양식에서 현실적인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양쪽의 협시보살은 중앙의 본존불로 향해 보고 있으며 왼쪽의 일광보살은 남성적인 강렬한 인상을 풍기며 우측의 월광보살은 여성적으로 느껴지며 달을 상징한다. 그래서 눈썹사이에 달무늬를 새겨 넣었다.

중앙의 본존불인 약사여래불로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얼굴은 타원형이며 길게 표현 되었고 큰 몸집에 비해 어깨는 좁게 표현을 하였다.

협시보살인 월광보살로 여성적인 모습이며 눈썹사이에 달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월광보살 좌측으로 조성연대등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협시보살인 일광보살로 남성인 모습인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마애불상 앞을 넓게 조성을 해 놓아 쉬어가며 참배하도록 배려하였다.

산에서 본 마애사. 지금 불사를 많이하여 사찰의 규모를 갖추었다.

산아래 마애사와 그 뒤로 능선 아래 마애불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입니다.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12,01590000,38

*불법천지의 블로그에서 방어산 마애불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였습니다 .
http://cafe.naver.com/xyz0707.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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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국보 제199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89



많운 등산객들이 찾는 신선사의 마애불상군으로 누군가 카메라 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입구 좌측 상단에 모셔진 독립여래 한분과 미륵보살, 석가모니불,제화갈라보살을 모신 삼존불 




 버선 같은 모자를 쓰고 손에 나뭇가지를 든 공양상 2구


미륵 장육 여래 입상


경주 단석산은 신라 오악중 중악으로 단석산은 김유신과 뗄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다. 삼국통일의 염원을 안고 단석산 석굴인 상인암에서 수행을 하던중 괴승으로부터 비보를 받아 보검으로 바위를 잘랐다는 이야기는 일찍이 들어 왔다. 그 단석산은 항상 경애의 대상으로 여러번 찾아 왔지만 하나의 지나가는 경유지에 불과하였다. 오늘 또 산행 중 일부로 신선사를 경유지로 정해 신선사 마애불을 찾아보았다. 그래도 바쁜 산행으로 그냥 보지 못하고 지나간 불상이 여러 개 있어 그저 아쉬울 뿐이다.

“신선사 우측 산사면에 큰 바위들이 여러개 겹쳐져 서 있는 바위 군을 볼 수 있다. 신선사 마애불상군으로 반대편에서 보면 ㄷ 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 안쪽으로 하나의 석실형태를 하고 있으며 인공으로 지붕을 만들어 덮은 신라최초의 석굴사원으로 기록을 하고 있다. 남쪽 바위 보살상 안쪽에 새겨진 명문에 의해 선석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한다. 본존불인 미륵 장육상이며 안쪽 바위 면에는 여래상과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 있고 그 밑으로는 버선 같은 모자를 쓰고 손에 나뭇가지를 든 공양상 2구등 불,보살 10구가 돋을 새김되어 있다. 신라 7세기 불상군의 중요한 자료로 가치가 인정되며 신라 최초의 석굴사원으로 고 신라 불교미술이나 신앙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평가 받고 있다한다.“

그러나 일부로라도 다시 들러 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 마지막 단풍과 함께 어울려 장관을 연출하는 신선사 일원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ㄷ 자의 석실형태로 신라시대 최초의 석굴사원으로 좌우 벽면과 전면으로 석불상이 돋을 새김되어 있다.



좌협시보살 입상

우협시 보살입상으로 현재 마모 상태가 심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대웅전과 마애불상군 사이에 붉은 단풍잎으로 치장을 하였다.







대웅전 법당 앞에 걸려 있는 범종



대웅전 우측으로 올라서면 만나는 산령각

최근에 새로 불사를 한 대웅전 앞으로 등산객들과 참배객으로 분주하다.

선석사 대웅전에서 우측으로 울긋불긋한 단풍길을 따라가면 국보 제199호 마애불상군이 기다리고 있다. 

현재 ㄷ 자의 석실위에 인공구조물을 설치하여 비로인한 마모를 방지하고 있다.






단석산 신선사 마애입상군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술 되어 있습니다. 
http://www.silla.or.kr/gyeongju/ntltrs-p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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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선석산 선석사

대웅전: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13호

위치: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217번

성주군에 유난히 명당자리가 많은 곳이다. 옛 임금과 왕자의 태실을 보관한 태봉이 3곳이나 있다하니 말이다 그 3곡중 유일하게 조선 세종의 왕자 태실이 이곳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마을 바로 옆 작은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다.
수양대군을 비롯한17왕자의 원손인 단종의 태가 안장 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다한다. 이태실의 수호사찰이 선석사이다. 서진산으로도 불리는 선석산은 아래의 선석사로 인해 산 이름이 자연히 선석산으로 불리게 된 경우이다. 




신라 효소왕1년 69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을 하였다. 그때는 선석사 서편에 신광사란 이름으로 창건 되었으며 고려 공민왕 10년 1361년에 나옹선사가 지금의 자리에 옮겨 지었다 한다.
그때 절터를 닦다가 절 터 자리에 큰 바위가 나와 선석사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한다. 지금도 대웅전 앞 왼쪽에 배의 돛대처럼 땅에 솟아 오른 바위를 볼 수 있다.
조선영조 원년인 1725년에 다시 옛 신광사 터로 절을 다시 옮겼다가 순조4년인 1804년에 서윤대사께서 현재 자리로 다시 옮겨와 대웅전 명부전 정법료 산신각 칠성각등을 건립하였다.
대웅전은 돌로 쌓아서 길게 다듬은 2층 기단위에 작은 규모의 대웅전을 올렸는데 1800년대 초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 주는 다포식 건물이다.
선석사는 대웅전과 함께 괘불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m옆 세종대왕자 태실 수호 사찰답게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며 아기의 건강을 기원하는 태실 법당 건립을 현재 추진중이라 한다.

선석사  안으로 들어서면 대웅전이 정면에 위치하고 그 앞 작은 바위가 빗돌처럼 올라온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가 1361년 나옹선사가 현재의 절터를 닦기 위해 바닥을 고르는 중 아래에 엄청 큰 바위가 나와 할 수 없이 그 위에 절을 짓고 선석사로 부르게 되었다한다.

대웅전으로 1800년 조선시대의 건축물 양식을 보여주며  다포식 건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제113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의 단청이 아직도 화려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색이 퇘색 되었지만 기품이 있는 모습이다. 



선석의 이름을 간직한 비밀의 바윗돌.
배의 돛대 처럼 솟아 있다.  

세종대왕자태실지로 수호사찰인 선석사와 200m 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며 건강을 기원하는 태실법당을 추진하고 있다. 

교통편은 자가이용시 남해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 서울 김천 방향~성주IC~왜관 성주 33번~무주 성주 30번~경산교 건너자마자 무주 김천 왜관 30분 좌회전~김천 구미 왜관~김천 초전 905번 지방도 좌회전~선석사 13.1㎞~세종대왕 자태실 선석사 직진~김천 남김천IC(선석사)~김천 구미 남김천IC 905번~어산 세종대왕 자태실 선석사~선석사 갈림길~선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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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자대사탑과 탑비

보물 제274호와 제275호

동리산 태안사에는 두 개의 부도탑과 탑비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적인선사조륜청정탑과 광자대사탑과 탑비로 모두 정교하고 우아하며 세련된 조각 솜씨를 뽐내고 있는 수작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을 흔히 부도라 하는데 불교에서는 신성시하며 예배의 대상으로 여긴다. 사찰의 큰 스님이 열반에 들어 다비식을 한후 사리를 보관하기 위해 부도탑을 세워 보관을 하는데 보통 부도탑을 사찰의 입구에 만들어 둔 것을 볼 수 있다. 태안사도 일주문 옆에 광자대사부도탑과 함께 부도 밭을 조성하였는데 적인선사 혜철부도탑은 대웅전 뒤에 안치를 하였다. 태안사의 창건주이자 동리산파를 개창한 혜철선사의 부도탑을 보지 못하고 온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고려초 태안사를 중창한 광자대사 윤다스님의 탑과 비로 고려 제4대 광종원년인 950년에 세워졌다. 이부도는 팔각원당형으로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을 잘 따르고 있으며 탑의 기단부 부터 옥개석, 지붕돌과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팔각을 고수하고 있다.있다.

팔각 하대석 각면에는 당초문이 있고 그 위의 상단에는 각면에 안상 2좌씩 배치 되었다.

그 위에 16엽의 이중 연꽃잎이 아래로 향하고 있고 그위 중대석에 안상 1좌씩 있다. 상대석 또한 팔각으로 16엽 연꽃앞을 두텁게 새겼다. 이 상면에는 2단의 팔각형 받침이 있다. 탑신의 각면에는 탁상에 놓인 향로 문양을 새기고 그 좌우로 사천왕 입상이 양각되었다. 옥개석은 목조건축의 양식을 따와 기와골, 암막새,숫막새까지 잘 나타내고 있다. 상륜부는 꽃부리가 위로 향한 모양의 앙화와 반구형 탑의 꼭대기층 위에 바리때를 엎은 것처럼 만든 복발과 바퀴모양의 보륜, 구슬모양의 보주등이 완전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 부도는 상하 비례가 우아하고 정교하며 완전한 상륜부 조각 또한 매우 우수하다.

팔각원당형으로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을 잘 따르고 있으며 탑의 기단부 부터 옥개석, 지붕돌과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팔각을 따르고 있다.

앞의 광자대사탑과 좌측 뒤 파괴된 비문과 탑비만 남은 이수와 귀부가 보인다.



탑신의 각면에는 탁상에 놓인 향로 문양을 새기고 그 좌우로 사천왕 입상이 양각되었다.





옥개석은 목조건축의 양식을 따와 기와골, 암막새,숫막새까지 잘 나타내고 있다. 상륜부는 꽃부리가 위로 향한 모양의 앙화와 반구형 탑의 꼭대기층 위에 바리때를 엎은 것처럼 만든 복발과 바퀴모양의 보륜, 구슬모양의 보주등이 완전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수작이다.



팔각 하대석 각면에는 당초문이 있고 그 위의 상단에는 각면에 안상 2좌씩 배치 되었다.

광자대사탑비

태안사에 있는 탑비로, 고려시대 승려 광자대사 윤다(允多)의 탑비이다. 
광자대사는 태안사를 두 번째로 크게 번성케 한 스님으로, 경문왕 4년(864)에 태어나, 8세에 출가하였다. 사방을 다니다가 동리산에서 수도를 하였고, 그 뒤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계(戒)를 받아, 다시 동리산으로 돌아와서 승려가 되었다. 혜종 2년(945)에 82세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광자 라 내리었다. 

비는 비문이 새겨진 몸돌이 파괴되어 일부 조각만이 남아 있으며, 거북받침 위에 머릿돌만 얹혀져 있는 상태이다. 거북은 목이 짧아보이기는 하지만, 머리의 표현이나 몸 앞쪽의 조각이 사실적이고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다. 등 위로는 비를 얹기 위한 받침대가 새겨져 있는데, 옆면에 보이는 무늬가 어떤 것을 표현한 것인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머릿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이무기의 머리조각이 돌출되어 있고, 앞면에는 극락조로 보이는 새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이러한 새 종류의 조각은 연곡사 동부도(국보 제53호)나, 북부도(국보 제54호)에서 잘 나타나 있다. 

비문은 거의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지만 다행히 『조선금석총람』에 일부 글자가 빠진 채로 그 전문이 실려있어, 광자대사가 출가하여 법을 받고 전하는 과정, 공양왕의 옆에서 불심에 대한 문답을 한 일, 고려 태조 이성계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았던 일 등을 기록하고 있다.<곡성군청 홈페이지http://www.simcheong.com/kor2002/tourist/tr_index.htm>

이수와 귀부만 남아 있는 광자대사 탑비



 거북은 목이 짧아보이기는 하지만, 머리의 표현이나 몸 앞쪽의 조각이 사실적이고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는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귀부로 비문은 파괴되어 판독이 불가하며 일부만 남아 있다 한다. 머릿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이무기의 머리조각이 돌출되어 있으며

극락조로 보이는 새가 돋을 새김 되어 있다.
 


교통편: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 석곡(구례)IC~구례 석곡 태안사(19㎞) 좌회전~구례 순창 옥과 좌회전~구례 압록~태안사 압록유원지 직진~죽곡면~구례 압록 18번~(태평삼거리에서)구례 압록 우회전~태안사 840번 지방도 우회전~순천 태안사 방향 좌회전~태안사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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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산 태안사 대웅전으로 화려한 단청을 하고 있으며 6.25때 불탄 것을 그후 다시 복원을 하였다.













태안사로 들어오면 만나는 매표소 우측으로 태안사 표지석과 아름다운 숲길이 조성되어 있다

<동리산 태안사>
동리산 태안사는 통일 신라 말기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를 이루며 신라 경덕왕 742년에 세 스님에 의해 태안사가 창건되었다. 적인선사 혜철, 광자대사에 의해 대사찰로 변모를 하였다.
풍수지리사상의 대가인 도선국사도 혜철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한다. 신라시대때는 대안사. 조선후기때부터 태안사로 불렸다 하며. 태안사를 품고 있는 동리산은 봉황이 먹고 산다는 오동나무가 열리는 숲속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고려 중기에 태안사의 말사였던 송광사가 독립을 하고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태종의 둘째 왕자인 효령대군도 머물렀으며 정유재란때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다시 복원되고 6.25동란으로 대웅전이 불타는 등 큰 피해를 입는다.
경내에는 적인선사조륜청정탑(보물제273호), 광자대사탑과 탑비(보물제274호~275호), 대바라(보물제956호), 천순명동종, 능파각등 일주문과 고려후기 3층석탑등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일주문과 능파각만 남고 모두 불타버린 것을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6.25전쟁의 소실을 피한 능파각은 계곡의 물과 경치가 넘 아름다워 능파라한다.



능파각은 세속의 모든 번뇌를 벗어버리는 금강문의 역활을 가지고 있어  능파각의 다리를 건너면 불교의 셰계로 들어 온다는 뜻이 있다한다.


<태안사 능파각>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제82호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20

능파각은 문성왕 12년인 850년에 태안사가 창건될 때 혜철선사가 함께 지었고 그후 고려 태조24년에 광자선사가 고쳐 지었다 한다.

그 뒤 다시 파손되었던 것을 영조43년(1767)에 다시 복원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능파각은 정면3칸 측면1칸으로 옆에서 보면 사람인자 인(人) 모양으로 맞배지붕이다. 계곡 좌우로 석축을 쌓아 석축위에 통나무를 걸치고 나무위에 판자를 깔았다. 그위에 주초를 대신한 하인방을 걸치고 기둥을 세워5량의 맞배지붕을 올였어며 처마는 겹치마이다.

계곡의 물과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워 능파라 하는데 능파각의 특징은 다리와 금강문 누각을 함께 구성하여 이다리를 건넘으로 해서 세속의 모든 번뇌를 벗어 던 저 버리고 불교의 세계로 들어 온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한다. 능파각은 태안사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태안사 일주문은 태안사에서 6.25전쟁때에 소실이 되지 않은 건물로 화려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능파각을 지나 태안사 일주문까지 이어지는 오솔길이 주변의 풍치와 함께 오래 남을 아름다운 구간이다. 일주문을 향해 걸어 가는 관광객.

봉두산인 태안사는 일주문 현판에 동리산 태안사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봉두산과 동리산은 서로 관계가 있는 산명으로 봉황이 먹고산다는  오동나무가 열리는 숲속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태안사 일주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제83호

태안사 일주문은 6.25전쟁에서 능파각과 함께 화를 면하였다. 고려 태조 20년(937)경에 광자선사에 의해 건립되었는데 일주문은 각현선사, 영월선사가 중수하였다 하며 1980년에 보수공사를 하였다 한다.

건축 양식은 단층 팔작집으로 전후 주칸에는 3구, 측면에는 1구의 공간포를 짜 올린 다포식 건물로 앙서로 된 살미첨차들로 내외 사출목의 공포를 짜서 아주 화려한 건출물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원래는 태안사입구 광자대사 부도탑 옆에 있었는데 복원을 하며 이곳으로 옮겼다 한다.

삼층 석탑 주위로 연못을 조성하여 웅장하며 신비감이 감돌며  태안사와 함께 잘어울려 관광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태안사 삼층석탑>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제170호

원래 사찰입구 부도탑이 있는 광자대사 부도 바로 옆에 있었는데 기단부와 탑신부 일부의 부재가 유실 된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복원을 하여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한다.

탑의 구조는 원래 2층 기단인 3층 석탑으로 연못으로 옮기면서 기단의 지대석을 높게하여 전체적으로 높게 보이며 웅장하게 보인다. 그리고 360도를 호수로 조성하여 더욱 웅장하며 신비감이 도는 석탑으로 구성미가 태안사와 함께 조화를 이룬다.

탑신부의 각 옥개석 층급받침은 4단이며 옥개석 상면에는 2단 괴임을 조출하여 고식을 보여 주고 있다. 상륜부는 모두 새부재를 보충 사용하였고 고려초기 작품으로 보고있다.

교통편은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 석곡(구례)IC~구례 석곡 태안사(19㎞) 좌회전~구례 순창 옥과 좌회전~구례 압록~태안사 압록유원지 직진~죽곡면~구례 압록 18번~(태평삼거리에서)구례 압록 우회전~태안사 840번 지방도 우회전~순천 태안사 방향 좌회전~태안사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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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동사 대웅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7호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보현리 1683번지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거동사는 조선시대까지도 대가람을 이어온 사찰로 보인다. 대웅전의 기단은 가구식으로 이루어 졌으며 고석이나 갑석이 모두 없어졌고 소맷돌이 있는 돌층계가 남아 있다.




대웅전의 건물은 다포계 양식에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공포는 내의 3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면 공포의 구조는 두공부터 연초각하여고 초제공, 2제공 역시 초각하였으며 살미 끝은 수두형으로 조각을 하였다.전면은 매우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으며 후면은 장식적인 요소가 없이 간결하게 마무리 되어 있다. 전면의 분합문도 문살을 초각장식하였으며 단청을 입힌 색조는 장중함이 있다. 그리고 부도탑에는 3기의 사리탑이 있는데 그중 추월당 상휘선사(秋月堂尙輝禪師)의 부도탑이 있다. 대웅전 우측으로 산신각이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거동사는 단풍이 매우 아름다운 산으로 정평이 나있다




산신각

산신각 우측의 기도터



거동사를 지키는 멋진 순돌이지만 짐승을 잡는 덪에 걸려 다리를 잃고 말았다.





교통편은 자가 운전시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경부고속도로 경주IC~울진 포항 7번 국도~포항 보문관광단지~포항 7번~울진 포항 위덕대학교~포항 안강 7번~영천 안강 28번 우회전, 양동마을~안강 28번~대구 영천 28번~기계 안강 31번~기계 31번~달성교 건너~청송 기계 서포항IC 31번 좌회전~포항시 기계면 안내판~청송 기계 31번~청송 죽장 31번~한티터널~죽장휴게소 지나 영천 69번 좌회전~영천시 자양면 안내판~화북 35번(보현산 천문대 거동사) 우회전~보현청소년수련원(옛 자양중학교)~천년고찰 거동사 가는 길~보현골 돌공원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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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칠선계곡엔 명성에 비해 명찰이 별로 없다. 백무동 안에만 해도 영원사를 비롯한 수십개의 암자나 절이 포진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만큼 칠선계곡의 유명세에 비해 벽송사와 그의 암자 서암정사만 달랑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나 벽송사는 어떠한 절인가. 조선중종때인 벽송지엄대사에 의해 1520년 창건되었다. 다른 사찰에 비해 창건 연도가 많이 늦었지만 서산 사명 두 대사가 도를 딱 고 깨달은 유서 깊은 사찰이다.
조선시대 불교의 선맥을 보면 벽개정심. 벽송지엄, 부용영관, 경성일선, 서산휴정 부휴선수, 사명유정, 청매인오, 환성지안, 호암체정, 희암정혜, 경암응윤, 서룡상민등 큰스님들이 수행 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가 되었다. 




벽송사는 선교를 겸수한 대종장 108분을 배출하여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이라는 별칭을 얻어서며 많은 도인을 배출하여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을 한다”고 할 정도 였다.
벽송사는 지리산의 천봉만학을 그리고 앞뒤 동산과 정원으로 하여 연꽃이 활짝 핀 것과 같은 부용만개. 푸른학이 알을 품고 있는 청학포란형의 명당자리로 이름난 스님들이 거쳐갔다. 벽송산문의 제2대 제자가 부용영관 선사인데 그의제자가 바로 서산대사라 불리는 청허휴정과 부휴선수이다.
벽송사의 3대 조사인 서산대사는 벽송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팔도도청섭이 되어 승군을 모집하였고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데 진력을 기우렸다.

서산대사의 문하에는 사명대사. 청매조사 두분이 있는데 이곳 벽송사에서 오도하여 불법을 깨우쳤어며 특히 함양 넘어가는 오도재는 청매조사의 설화가 깃들어 있다.

1704년(숙종30년) 환성지안대사때 벽송사는 크게 중수 번창을 하였다. 최대의 위기는 한국전쟁때 빨치산들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는 바람에 국군에 의해 불태워지는 수난을 당하여 완전 소실되었다.
1960년대 이후 불태워진 벽송사를 구한원응대사에 의해 다시 중건을 하였다. 신라 양식을 계승한 삼층석탑(보물제474호)과 목장승은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깃들어져 있으며 천년의 세월을 견더온 도인송과 미인송은 벽송사를 대표하고 있다.
예로부터 목장승에 기원을 하면 부부간의 애정이 돈독해지고 도인송에다 기원을 하면 건강하고 한가지 소원을 꼭 이루어진다한다.
미인송은 미인이 된다하여 많은 선남선녀들이 이곳 벽송사를 찾고 있다. 단풍이 물들고 떨어진 낙엽으로 인해 지리산을 더욱 가까서 볼 수 있는 가을의 벽송사를 추천해 본다.

벽송사와 서암정사를 찾아가는 길은 두길이다. 먼저 칠선계곡 입구인 의탄교를 건너면 승용차를 이용한 길과 지리산길을 이용하여 도보로 자연을 느끼며 우리의 옛길을 걸어가는 길이다.
승용차를 이용하면 칠선계곡입구인 추성동까지 가면 마을입구에서 도로는 갈린다. 좌측으로 광점동과 벽송사 방향. 다시 갈림길로 좌측 벽송사로 오르는 오르막 도로이다. 또 한길은 의탄교 건너 100M 걸어가면 좌측으로 지리산 길임을 알리는 표지막대를 따라가면 된다. 산길을 오르는 오붓한 지리산길이다.


벽송사를 알리는 벽송산문이다 한면에는 벽송산문글귀와 한면에는 사천왕상 같은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석상이...

벽송사 서암정사 안내표지판. 삼거리 길로 좌측 서암정사 가는 길, 우측은 벽송사 가는길. 서암정사를 보고 다시 이곳 까지 되돌아 나와야 벽송사로 갈 수 있다. 




삼거리 이정표와 우측 사진은 서암정사를 알리는 두 기둥안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사천왕상이 서 있습니다,

우측 벽으로 조각 되어진 사천왕상의 모습, 절안으로 들어오는 잡귀와 악귀를 몰아 내는 역활을 한다.

뒤돌아본 모습, 멀리 지리산 능선이 펼쳐지는 전망좋은 곳에 터를 잡았음을 알수 있다.


사천왕상

일주문 격인 대방광문으로 많은 등산객이 들어서고 있다.

대방광문의 모습


대방광문 안에서 본 서암정사.그리고 뒤돌아 본 대방광문

서암정사. 정면에 요사체가 보인다.

암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가 벌써 가을이 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굴법당 입구의 모습이며 많은 탐방객들이 찾아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관음보살상이 들고 있는 우측 호리병에서 약수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가뭄으로 관음상의 약수까지도 말라 버린 지경이다.

굴법당 내부의 모습입니다. 한국불교예술를 보여주는 굴법당입니다. 한분이 정성스럽게 기도를 하고 있다.

아미타불


지장보살






서암정사는 원응스님이 6.25를 전후에 전쟁과 빨치산등으로 많은 대중들이 희생이 되어 그분들의 원혼을 달래고 기도하면서 발원하기 위해서 서암정사 굴법당인 극락전을 조성한다는 내력이 적혀 있다.






서암정사에서 본 전망으로 아래 마을이 칠선계곡으로 들어서는 마을인 추성동이며 마을 뒤로 난길을 따라 오르면 두지터로 갈 수 있다.


새로 조성한 목장승입니다. 나무로 만들어 비바람을 견뎌내기 때문에 새로 벽송사 입구에 만들어둔 목장승입니다.

벽송사의 가을 단풍. 지금쯤 벽송사에도 완전 단풍으로 물들었을 것 같습니다.








목장승입니다. 지방기념물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찰에 들어 서는 악귀를 막고 사찰경내에서 행해지는 불법어로. 사냥을 금지하며 풍수지리상의 비보 역할등 다향한 목적으로 세워졌다한다. 이 목장승은 바깥에서 비바람등을 맞으면서 서 있어 올해 가지는 못한다. 그래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일제시대 초기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좌측인 금호장군은 왼쪽의 큰 왕방울 눈만 남아 있어 목장승의 모습을 잃었지만 우측의 호법대신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며 서 있다. 20여년전에 방문을 해 본 석장승의 모습은 금호장군의 머리부분이 검게 탄 흔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탄 흔적이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빨치산들이 야전병원으로 사용을 할때 한겨울에 워낙 추워불을 피울 땔감으로 사용을 해 불에 태웠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벽송사의 목장승은 머리와 큰눈, 큰코,일자형의 입과 수염등이 매우 인상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험악하게 무서운 것 같으면서도 시골 할아버지의 순박한 모습을 가진 익살스러운 목장승은  재치가 넘치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오늘도 벽송사를 지키는 수문장 역활을 하고 있다.


벽송사 현판입니다.

벽송사의 대웅전 격인 법당입니다.


법당 안에는 부처님이 모서져 있고 우측 사진은   벽송사 부속 건물입니다.


삼층석탑 옆의 부도탑과 내려오면서 본 벽송사 뒷 모습입니다.


도인송과 미인송입니다. 도인송에 기원을 하면 건강하고 한가지 소원을 꼭 이루어지게 하고 미인송은 미인이 된다하여 많은 선남 선녀들이 찾고 있다.

벽송사 삼층탑(보물제474호). 원래 이탑은 벽송사 대웅전 동편에 세워졌는데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사용되는 바람에 방화로 소실된 것을 원응스님에 의해 다시 중건되었다. 그때 사찰이 아래로 옮겨 져 사찰뒤에 현재 미인송과 도인송 탑만 남아 있다. 2중기단위에 방형의 3층 탑신부를 이룬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조성연대는 1520년 조선시대에 벽송사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높이는 3.5m

 

미인송과 도인송 그리고 삼층석탑이 함께 어울려 서 있는 모습이 그림 같습니다.


잘 단장된 벽송사의 모습입니다.

벽송사 입구 마을인 추성동으로 갈여면 함양까지가 버스를 갈아타야 합니다.
교통편을 참고 해주세요.
부산 서부버스터미널에서 함양행 직행버스는 오전 7시, 9시에 있다. 2시간 소요. 1만2100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길건너 위치한 군내버스 터미널에서 추성행 군내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린다. 매시 정시와 30분에 각각 출발한다. 1시간 걸리고 3300원. 백무동에서 함양터미널행 버스는 낮 12시30분, 오후 1시20분, 2시, 2시30분, 3시30분, 4시, 4시30분, 5시30분, 6시, 6시30분, 7시, 7시40분에 있다.

함양서 부산행 시외버스는 오후 4시, 6시, 6시30분(막차)에 있다. 시간이 여의치 않으면 진주로 가서 부산행 버스를 타면 된다. 늦게까지 자주 있다. 승용차를 추성리에 주차했을 경우 백무동에서 택시(055-962-5110, 011-678-5119)를 불러야 한다. 1만2000원.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대전·통영고속도로 생초IC~화계 방면 좌회전~함양 마천 우회전~마천 함양 자연휴양림 좌회전~백무동 마천 좌회전~지리산 마천 직진~지리산 백무동 칠선계곡 마천~의탄교~칠선계곡 벽송사 서암 우회전~ 벽송사 서암정사 광점동 좌회전~벽송사 서암정사 좌회전~벽송사주차장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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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곡동 왕산마을에서 무장골을 따라 40여분 올라가면 왼쪽 담벼락에 걸려 있는 무장산사지 안내판. 여기서 우측으로 무장골을 건너간다. 




무장사지터로 우측은 무장사지 삼층석탑가는 길 좌측은 무장사지 아미타불조성사적지 가는길이다.

무장사지아미타불 조성 사적비 이수및 귀부로 보물 제125호, 계화부인이 소성왕의 극락왕생을 빌며 조성한 아미타불의 기록을 적은비문으로 현재 비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빗돌을 받치고 있는 거북이를 귀부라한다. 두마리의 거북이가 빗돌을 받치고 있다. 장수를 의미하는 거북이로 알려져 있는데 계화부인이 부왕 소성왕이 일찍 승하하여 아마 귀부를 깔고 명복을 비는 것은 아닌지....

귀부위에 빗돌을  받치는 테두리에 12지신을 돌여 놓았다. 앞뒤로 4개씩. 좌우로 2개씩으로 마모가 심하여 확인이 힘들다.

12지신상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보통 비석을 받치고 있는데 귀부라한다. 목이 달아나고 없습니다.

거북이와 거북이 사이에 역삼각형으로 있는 조각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여성 또는 여성의 성기를 의미한다함

빗돌위에 얹혀 있는 머리로 용이여의주를 받치고 있는 형상같이 보인다.


이수에 새겨진 용

이수의 측면 조각입니다.

측면의 전체적인 모습입니다.


무장사지

이절터는 경주시 암곡동 산1번지에 위치한다. 보문단지 뒤 덕동호 인근에 위치한 암곡동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서울(옛 서라벌)에서 아주 멀고도 험한 골짜리임을 알수있다.
그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무장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능선 끝에 자리를 잡은 절터이다. 무장사란 절이름에서 보면 아주 강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사연을 간직한 절터로 짐작을 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절 이름부터 뜻이 있었다. 문무왕때 이르러 삼국을 통일하였지만 태종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지긋지긋한  전쟁은 끝났다 하며 이제는 피폐한 백성을 생각하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병기와 투구를 감추어 나라의 평화를 기원했다는 뜻에서 무장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신라38대 원성왕의 부친인 효왕이 그의 숙부 파진찬을 위하여 세운 절이라 한다.
삼국유사에도 무장사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소성왕의 왕비인 계화부인이 소성왕이 임금의 자리에서 일찍 승하하자 무장사에 그의 극락왕생을 빌기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하게 되었다한다.
무장사지에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는 계화부인이 소성왕의 명복을 빌면서 조성한 아미타불상을 만들면서 그에 관한 내용을 기록해 놓은 기록비문이라한다.
1915년 귀부와 이수만 덩그런히 남아 있었는데 주변에서 비석조각을 발견하였다한다. 그 조각에 새겨진 내용을 보고 무장사지임을 알게 되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그 비문이 보관되어 있다한다.
비문에는 금석학의 대가 추사김정희가 32세 때인 순조17년에 무장사지를 두 번이나 방문한 기록을 써 놓았고 당나라 왕희지의 글을 모아 집자해서 써 놓았다고 되어 있다.

무장사지 아미타불조상사적비 이수및 귀부(보물제125호)와 무장사지 삼층석탑(보물제126호)만 현재 남아 있다.
먼저 이수및 귀부를 살펴보면 비문은 없어지고 비석을 받쳤던 거북모양의 받침대인 돌을 귀부라 한다.
그 귀부위에 있던 비석은 파손된 조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비석 위에 올려져 있던 용모양을 새긴 비석머리를 이수라 한다.
귀부인 거북이 두 마리 위에 12지신을 모시고 그위에 비문을 세웠서며 이수인 용이 새겨진 비석의 머리돌에는 아미타불ㅇㅇ란 여섯글자가 두줄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무장사지삼층석탑은 기단을 2단으로 만들고 그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려 놓았다. 1층 기단에는 모서리 기둥과 2개의 안기둥을 조각하고 덮개인 돌을 올려 놓았다. 덮개돌 위의 2층 기단은 8개의 돌로 짜 맞추었다. 2단 기단 네면에 두 개의 돌에다 안상을 넣었다. 둥근 창모양 같은 문양을 모서리기둥과 안기둥에 새겨 넣었다. 1층 2층3층 각각 몸돌과 몸돌을 덮은 지붕돌인 덮게 돌은 모두 1개씩의 돌로 만들었고 아랫면은 5단 그리고 모서리 기둥을 조각하였다.
1963년 무너져 있던 것을 일부 다른 돌을 넣어 다시 세웠다한다. 높이는4.95m


무장사지 삼층석탑 보물제126호. 1962년 복원 작업을 할때 일부 자재를 추가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다합니다.

증명사진입니다.

2층 기단에는 창모양의 안상을 조각하였습니다

기단위에 하나의 돌로된 지붕돌을 놓았고 그의에 몸돌도 하나의 돌로 만들어 사각 모서리를 안쪽으로 조각을 하여  놓았다, 지붕돌은 덮게돌로 5단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돌이다.

옆에서 본 모습으로 안상하며 지붕돌이 5단으로 역층의 모습을 하며 몸돌의 네면에 안쪽으로 조각을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장사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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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단석에 연꽃문양이 좌우로 정면과 귀로는 인왕상을 돋을 새김하여 놓았다. 그리고 연꽃좌대을 아래위로 두어 서로 대칭을 두었어며 탑신의 문양과 연꽃봉우리 또한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산스크리스트 글자를 새겨 놓았다..

연꽃좌대를 서로 돌여 놓아 안정감과 부도탑의 전체적인 균형감각과 예술성을 배가 시켰다.

앞뒤로 인왕상을 돋을 새김해 놓았다.

좌우로는 연꽃문양을 돋을 새김하였어며




부도란 흔히 유명한 스님들의 사리를 보관하는 탑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오래된 사찰이나고승들이 수도를 하였던 사찰에 가면 절 입구 한 켠 에 부도 탑이 전시되어 있어며 그 사찰의 전통을 나타내고 있다.
부도탑에 이끼류가 끼여 있어면 어쩐지 모르게 옷메무시를 정리하고 다시한번 그 부도탑을 보게 된다. 어느분의 사리탑인지를...

남암산 아래에는 고색창연한 사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청송사지란 절터가 있다. 신라 효소왕때 처묵(處默)이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으며 그 외의 정확한 자료는 찾을 수 가 없다 한다.
청송마을로 불리는 그 자리가 청송사 절터로 부도탑과 삼층탑등을 보면 규모가 엄청 큰 절이 들어 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송사지의 부도탑은 유형문화제 재3호로 지정되어 있어며 망해사의 부도탑과 다른 형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망해사의 부도탑은 탑의 형태를 보여주는 현재 보기 드문 형태의 모습이고 신라시대 부도탑이며 청송사지 부도탑은 지금 많이 볼 수 있는 석종형태의 부도탑이다.
현재 청송사지의 부도는 모두 3기로 두기는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한기는 돌종형태의 모습만을 하고 있다.
좌측의 부도탑은 높이가 3M로 꽤 큰편이며 4단의 형태로 지대석 기대석 연꽃좌대, 탑신으로 짜여져 있다.
맨 밑단인 지대석위에다 기대석을 쌓았는데 남북 양면에다가 인왕상을 동서 양면에는 연꽃 문양을 돋을 새김하였다.
문양이 매우 아름답게 세겨져 있어며 독특하다. 그리고 연꽃좌대 위에다 석종형태의 탑신을 놓아 균형을 맞추었어며 탑신아래에다 산스크리스터 글자가 새겨져 있고 윗부분에는 연꽃 봉우리가 크게 새겨져 있다.
가운데 부도는 기대석 네면에 연꽃문양을 돌여 돋을 새김 해 놓았어며 탑신에는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서응당 진흡대사”란 글자가 아래부분에는 구름무늬(고사리무늬)를 새겨 놓았다.
우측의 부도는 높이 1.2M로 1982년에 복원을 하여 기단도 없이 놓여져 있으며 문양도 없는 깨끗한 모양을 하고 있다.



서응당 진흡대사란 글이 새겨져 있다.

기대석에는 연꽃문양과  탑신의 아래부분에는 구름문양을 그려 놓았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문화재청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21,00030000,26&queryText=V_KDCD=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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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 문수초등학교 뒤편 남암산 아래에는 청송사지터가 있다 대여섯채가 옹기종기 모여 생활하는 이곳 일대가 신라시대 청송사지터이다. 지금은 옛 절터가 미나리깡이나 논 밭으로 변해 있지만 절의 규모가 엄청 커 부도탑의 거리와 삼층석탑 그리고 부추밭의 바위에 일부 남아있는 예술조각의 흔적들이 그 당시의 청송사 규모를 말해준다. 청송사지로 갈려면 영해마을 문수암 올라가는 길로 가야한다. 영축사지터를 지나 문수암 갈림길에서 좌로 틀어 일방통행로 길을 따라가면 철탑의 성불암 갈림길에서 다시 좌측 문수분교방향으로 내려선다. 호젓한 대나무 숲길이다. 대나무 숲길을 나오면 청송사지 삼층석탑과 만난다. 눈에 펼쳐지는 관경은 호리병속의 입구를 지나면 눈앞의 삼층석탑과 한가로운 농촌의 들녁 풍경이 펼쳐진다. 외부와 단절된 느낌이다. 신선이 산다는 청학동이 따라 있을까? 여기가 청학동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 본다. 청송사지 삼층석탑은 보물 제38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전체적인 느낌은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느낌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은 각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기고, 마감돌 위에 다른 돌로 2단의 모난 괴임돌을 끼워서 각각 윗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이 특히 길고 크며, 2층 몸돌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각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이 있고, 추녀가 두꺼워 지붕 네 귀퉁이의 치켜올림이 약하며 처마는 수평으로 길이가 짧다.
 꼭대기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이 탑은 기단의 짜임새가 정연하지 못하고, 1층 몸돌이 지나치게 큰 반면 지붕돌이 작아서 좋은 비례로 보기 어려우나, 지방에 분포된 신라 석탑의 한 예로 주목할 만하다. 또한 1층 몸돌의 괴임돌이 다른 돌로 되어 있는 점은 탑의 특이한 조형과 아울러 9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을 짐작하게 한다.

1962년 해체, 수리할 당시 위층 기단에서 동제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 청동여래입상 1구를 비롯하여 유리구슬 16점, 수정으로 만든 곱은옥 1점, 관옥 1점 등 30여 점이 발견되었다. <문화재청의 자료를 인용함>


우바이 백화당 낭옥님의 부도로 청송사지 부도중에 유일하게 청신녀의 부도이다. 울주군 청량면 율리 산1183번지 부도골 논둑에 묻혀 있던것을 1990년 수집상에 의해 전라도까지 유출된 것을 지안스님외 마을주민이 함께 되찾아 왔다한다. 현재 삼층탑 앞에 송덕비와 함께 있다.

청송사지의 규모는 얼마나 큰지 부추밭의 담벽 바위에도 무엇인가 둘러 산 문양이 새겨져 있고  뜯겨나간 바위면에도 문양이 새겨져 있을 것이라고 짐작을 할 수 있다.

현 청송사는 최근에 다시 불사를 일으켜 세중건한 절로서 삼층석탑 우측 청송마을에 위치를 하고 있는 조용한 사찰이다




처마 끝의 단청이 우아하게 색칠이 되어 있어며 대웅전 주변에도 깨끗하개 주변을 정리하였다.
대웅전 기둥의 부처님과 옛 청송사지터의 규모를 보여 주고 있다.

걸어서 청송사지 가기위해....
문수산  남암산 아래 청량면 율리 마을에는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이번 답사에서는 문수암은 빼고 하였다. 그래서 먼저 답사한 곳이 망해사지, 망해사지 보도탑을 보고 걸어 문수산 등산로를 넘어 내려서면 영해마을, 그기서 길을 따라 뚜벅뚜벅 걸어오르면 문수암으로 가는 도로를 따르지 않고 굿당이란 안내판을 보고 올라간다.청송사지를 만나기 위함인데 문수암도로를 따라가면 지겹고 안그래도 안좋은 무릅도 아플 것 같고 우회하고 해서 위치를 가늠해 대충 산길을 잡아 올라가며 농사 일을 하는 몇분에게 청송사지 삼층탑을 물어니 거의 돌아오는 답이 모른다. 가보지 않았다. 탑이 있나요하는 대답뿐이다. 부산에 있는 나도 그것쯤은 아는데 혹 이마을 쪽에서 청송사지로 넘어가는 반듯한 길을 물어볼여고 했더니 대 실망이다. 요즘은 복잡한 도시를 떠나 노후를 농촌에서 보내는 분이 많은 것 같아 그런분들인가 생각을 한다. 이제 농촌의 어른신들은 다 어디갔는가요? 그것이 궁금합니다.
굿당 밑에서 농사일을 하는 분에게도 길을 물어보니 시원한 답이 없다. 굿당을 통과할여고 하니 그놈의 똥개(?)가 자꾸 짓는다.내가 ?라 해서 그런지 엄청 짓어 할 수 없이 돌아나와 능선을 돌아 굿당을 우회하여 산길을 잡고 치고 오른다. ?야 메롱하며 능선에 오르니 희미한 갈림길.좌측의 중간길로 길을 잡아 내려갈려고 보니 능선의 형태가 너무 밑으로 떨어 질 것 같아 우측으로 능선을 따라 오른다. 길의 흔적도 나타나고 끊어지고, 우회하고하여 문수가든 뒤 족구장으로 떨어졌다 문수가든을 나와 우측으로 틀면 바로 청송사지터였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문화재청 청송사지 삼층석탑을 보세요.
http://www.cha.go.kr/unisearch/Uniresult_Db_View.jsp?VdkVgwKey=12,03820000,26&queryText=청송사지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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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 마을에서 내려 걸어 들가면 별장같은 집 뒤로 문수산이 솟아 있다. 옛 영축산으로 청량산으로도 불려 청량면의 기원이 되었다.





망해사 가는 길. 망해사 안내문을 보고 넓은 길을 따라 올라간다. 대형버스는 여기가 끝으로 마을 입구에 차단봉이 설치 되어 있다. 



망해사 입구로 영축산망해사란 표지석이 있으며 등산로와 망해사지석조부도는 우측으로 오른다고 안내판이 설치 되어 있다. 



망해사로 들어서면 먼저 정면으로 대웅전이 반긴다. 어느절 처럼 정 중앙에 대웅전이 자리하고 좌우로 요사체와 산신각등이 위치를 하고 있다. 석조부도는 대웅전 우측뒤에 있다. 1957년 전 주지인 김영암화상이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법당안에 모서져 있는 불상


법당 천장을 올려다 보니 동해용왕을 위해 지은 사찰이라 네귀퉁이에 용을 만들어 놓았다. 


화려한 천장의 연꽃무늬에 용의 모습까지 있어 더욱 헌강왕의 전설인 동해용왕을 위해 지은 절이라 실감을 한다.


건물 외벽에 그려진 벽화로 부처님의 설법 모습과  열반에 드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바깥 단청의 화려한 모습이 눈길을 끈다.


작은 범종각의 종소리가 동해로 퍼질때 용왕은 아직도 망해사가 자신을 위해 지은 절이라 기뻐하겠지요. 


석조부도탑으로 가기위해서 대웅전을 우측으로 돌아 산신각, 범종각을 지나 올라서면 만날 수 있다. 뒤돌아 본 대웅전

영축산 망해사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에 있다.
부산에서는 노포동 종합터미널(노포역)에서 울산행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영해마을 또는 망해사 입구에 하차를 하면 된다.
망해사 안내판을 따라가는 길은 많은 별장형 집들이 들어서 있다.
최근에 생긴 도로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세상사의 실타레를 보는 것 같이 복잡하다.
정면에는 영축산이 우뚝솟아 있고 그 아래 망해사지와 현 망해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
망해산를 안고 있는 산이 영축산으로 불교에서 따온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인도의 천축국왕사성에 있는 영축산으로 부처님이 이곳에서 법화경을 설법하였고 영축산 아래서 열반에 들어 불자들의 성지가 되었다한다.
그후 중국의 당나라로 건너가 당나로로 유학을 온 자장율사에 의해 영축산이 국내에 들어오게 되었다.
양산의 영축산, 창녕의 영축산등 모두 인도의 영축산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
지금은 망해사 뒷산이 영축산으로 범위가 많이 축소 되었지만 신라시대에는 지금의 문수산이 영축산으로 불렸다한다. 또 한편으로는 청량산으로 불려 지금의 울주군 청량면의 유래가 여기서 온것일 것이다.
망해사는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이름처럼 현재는 바닷가가 보이지 않는 내륙의 사찰이다
한때는 이부근까지 바닷물이 들어 왔는지는 모르지만 망해사의 창건연대는 매우 길다. 
신라 헌강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약1100여년 헌강왕이 창건한 사찰로 되어 있어 그 연유 또한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다..

신라 49대 헌강왕(875~886)때는 서라벌(현경주)에서 지방에 이르는 모든 마을이 태평성대를 누리며 평안하게 살았다.
이에 헌강왕은 울산의 세죽이란 곳으로 나들이를 나왔다. 물가에서 앉아 쉬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에 구름과 안개가 끼여 천지를 분간할 수 없어 그 연유를 알아보니 동해의 용왕이 한 짓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헌강왕은 그의 신하에게 명령을 하여 부근에 동해용왕을 위한 절을 짓게하니 구름과 안개는 사라졌고 개운포라는 이름으로도 현재 불리고 있다.
이에 동해용왕은 헌강왕이 자신을 위해 절을 짓고 망해사라 하였다는 이야기에 크게 감복을 하여 일곱 왕자들과 함께 헌강왕 앞에 나타나 왕의 성덕을 찬양하였고 용왕의 왕자중 한명은 궁궐에 남아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울산의 바닷가인 처용암은 처용이 나온 바위라 하며 현재도 개운포에는 처용암이 남아 있다.
그후 망해사는 언제 폐사를 하였는지 모르지만 임진왜란으로 추정을 할 뿐이며 옛 터만 있던 자리에 1957년 김영암화상이 중건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망해사 위의 망해사지에는 현재 두기의 부도가 남아 있다.
망해사지 석조부도로 보물 제 173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부도란 유명한 스님들의 사리를 보관하던 곳이며 망해사와 함께 세워 졌다한다.
폐사와 함께 동서 두 탑이던 것이 동쪽에 있던 부도탑은 무너져 방치되어 있다가 1960년 11월에 다시 세웠지만 상륜은 두탑 모두 없어졌다한다.
 

망해사지 석조부도로 보물 제173호이며 울산광역시 울주군 청량면 울리산 16-3 망해사 위에 있는 동서 쌍탑으로 동탑은 폐사와 함께 무너져 있던 것을 1960년 11월에 다시 맞추어 세웠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동탑은 많이 깨져 있다. 형재 탑위 상륜은 남아 있지 않다.
서쪽에서 본 모습


동쪽에서 본 모습으로 그때의 주춧돌과 기단의 모습 등을 볼 수 있으며

그 우측으로 돌종 형태의 깔끔한 조선후기의 부도탑을 볼 수 있다.

쌍탑중 서탑으로 방치된것을 새로 세웠다. 서탑의 높이는 3.3m이며



동부도탑은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높이는 3.4m이며 두 부도탑모두 같은 쌍탑이다.

8각원당형(八角圓堂形) 기본양식을 따라, 지대석(地臺石)은 정4각형으로 마련하고 기단(基壇)을 구성하였다.


8각상대(八角上臺)의 각면 상부에는 얕은 턱을 두고, 그 밑의 각면에 안상(眼象)을 1좌씩 얕게 조각하였다.

이 지대석 위에 복련석(覆蓮石)을 놓았으며, 복판(複瓣) 8엽(八葉)의 연꽃을 둘렀고,

 그 꽃잎 끝에는 귀꽃을 새겼으나 평면적이다.

중앙에 팔각형의 높직한 4단의 굄이 얕은 중대석(中臺石)을 받치고 있고, 중대석에는 각 우각(隅角)에 기둥모양이 모각(模刻)되어 있을 뿐 다른 조식(彫飾)은 없고,

그 위에 앙련석(仰蓮石)이 놓여 있다. 앙련석은 밑에 3단의 각형(角形) 받침이 있는 위에 단판(單瓣) 연꽃이 상하 6잎씩 2중으로 조각되었다. 이와 같이 기단을 구성한 위에 탑신을 받치기 위한 딴 돌이 있다.




이 돌은 갑석형(甲石形)으로 지나치게 내민 턱을 중심으로, 밑에는 8각 각면에 기단에서와 같은 수법으로 된 안상이 있고 위에는 24잎의 연꽃을 돌렸다.



이 돌은 갑석형(甲石形)으로 지나치게 내민 턱을 중심으로, 밑에는 8각 각면에 기단에서와 같은 수법으로 된 안상이 있고 위에는 24잎의 연꽃을 돌렸다.

탑신도 역시 8각으로 각 우각에 기둥모양을 모각하였고, 각면에는 위에 영창 의 형태를 나타냈으며, 밑에는 전후좌우 4면에만 호형(弧形)을 새겼다. 옥개석도 8각으로 각 부재(部材) 중에서 가장 많은 손상을 입었다.

옥리(屋裏)는 반원을 그리며 연목(椽木)을 번안(飜案)하였고, 추녀는 수평으로 넓은 편이다. 옥상에는 높직한 우동(隅棟) 8가닥이 흘렀고 곡선은 매우 완만하다. 상륜(相輪)은 양 부도가 모두 상실하고 있으나 그 일부가 따로 보관되어 있다.

 







현재 서부도탑의 모습으로 훼손이 심하며 이 두 부도는 각부의 구성과 조각수법이 다소 섬약(纖弱)한 편이다. 특히 얕게 새겨진 안상이나 복련석 귀꽃은 입체감을 잃었다. 그러나 8각원당의 기본형을 계승하였고, 석재의 결구(結構)에서 짜임새 있는 비율을 잃지 않아 통일신라 후기의 가작이다.<망해사홈페이지>



부도탑에서 본 망해사이며 현 위치에서는 바다를 볼 수 가 없다.

문수산 등산로 우측으로 터를 잡은 망해사로 등산로에서 본 대웅전 그뒤로 영축산도 보인다

망해사 홈페이지 가시면 더욱 자세한 망해사의 내력과 망해사지 부도탑을 만날 수 있습니다.
http://www.manghaesa.or.kr

그리고 문화재청 망해사지석조부도 : 문화재청
URL : 

http://www.cha.go.kr/newinfo/Culresult_Db_View.jsp?VdkVgwKey=12,017300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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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자장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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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암 법당은 거북형상의 자연바위위에다 법당을 지어 바위가 건물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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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모든 만물이 하나의 원이랄까?. 이원을 통해 자장암으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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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암 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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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과 마애불 사이로 들어서면 금와보살이 산다는 바위에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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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와보살이 살고 있다는 바위에 구멍이 나 있다. 자장율사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엄지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어 개구리 한쌍을 살게했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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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 좌측벽면에 붙어 있는 동전. 동전이 바위에 붙어 있으면 어떤 소원이 이루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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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4m의 정면 중앙에 있는 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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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벽면에 새겨져 있는 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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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의 마애불 불두 뒤로 광배가 선명하다. 전체적에 비해 가락지 모양을 한 손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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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손과 섬세하게 나타낸 도포자락의 선 또한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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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와보살로 유명한 통도사 산내암자인 자장암은 진평왕(646년)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암자가 들어서기 전에는 자장율사가 현 자장암이 있는 바위 밑에 움막을 짓고 용맹정진하며 수도를 하였다한다.

어느날 개구리 한쌍이 나타나 달아나지않고 주위를 맴도니 기이하게 여긴 자장율사는 바위벽에 엄지손가락으로 구멍을 만들어 거기서 개구리를 살게하였다한다.
그 개구리가 금와보살로 수 많은 불자들이 금와보살을 보기 위해 자장암을 찾고 있다.
 자장율사이후 중건사실이 뚜렷하게 나와 있는 기록은 없지만 회봉대사에 의해 중건되었다한다.
1987년부터 1993년에 걸쳐 현문화상에 의해 오늘날의 자장암이 모습을 갖추었다. 감원실 금와당 취현루등 3동의 건물이 중건되고 법당은 암벽에 기대어 선채 서쪽을 보고 있다,
거북모양의 자연 바위위에 그대로 올린 관음전은 그래서 법당안에도 바위가 튀어나와 있다. 관음전 뒤편에는 개구리를 살게하였다하는 금와공의 바위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석간수가 흘러 나온다.
 
관음전 우측으로는 1896년 조성된 높이 4m의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통도사와 산내암자를 통틀어 마애불은 자장암에만 조성되어 있으며 ㄷ자모양의 바위벽을 이용하여 삼면에다 조각을 한 모습이 애사롭지 않다. 자장암 앞으로는 자장동천의 계곡을 끼고 있으며 건너편 영축산의 웅장한 모습이 조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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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문살의 개구리 문양과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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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처마부분 천장의 화려한단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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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 우측으로 자장전, 자장율사의 영정이 모서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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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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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 담장위로 모습을 드러낸 소나무의 모습과 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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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암아래에서
 볼 수 있는 영축산의 장쾌한  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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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양산여행)통도사 자장암 금개구리. 통도사 자장암 금개구리를 보섰나요

자장암 관음전 뒤편 바위인 금와공으로 자장율사가 개구리 한쌍을  살게 하였다 한다.
실제 구멍의 높이를 보면 밑에 기단과 발받침대를 생각하면 꽤 높은 곳에 구멍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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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율사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구멍을 만들어 금개구리를 살게 하였다하는 금와공

 

통도사에가면 산내 암자중 통도사가 창건되기 이전부터 통도사 창간주 자장율사께서 수도한 수도처가 있다. 자장방으로 불렸다는 자장암은 개구리로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금개구리, 즉 금와보살

자장율사가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바위에 손가락 하나 크기 만큼 구멍을 만들어 개구리 한쌍을 살게 하였다한다. 이구멍은 자장율사가 현 자장암 자리에서 수도에 정진할 때 개구리 한쌍이 떠나지 않아 기이하게 여겨 금와공에 살게 하였는데 이들은 벌과나비로도 변환을 한다는 신통력이 있다한다. 실제 금와공에 뚫인 구멍의 높이을 보면 성인의 키와 비슷한 위치에 있어 실제 개구리가 안으로 들어 갈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스파이드맨도 아닌 개구리가 암벽을 그것도 수직의 암벽을 타고 오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와공 안의 개구리를 본 많은 불자의 이야기가 있어며 필자도 실제로 구멍안의 개구리를 본적이 있다. 구멍안에서 두눈만 껌벅껌벅하며 있었다. 최근에 다시 찾은 자장암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많은 불자들이 금와보살을 친견하기위해 금와공에 눈을 대고 구멍안을 들어다 보았지만 현재는 컴컴한 공간으로 비어 있다. 보살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올 봄에 한쌍의 금와보살이 있었는데 봄에 출타를 하여 아직 돌아 오지 않았다 한다. 자장암을 찾아가면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볼 수도 아니면 못 볼수도 있다. 금와보살의 친견은 불심이 지극한 사람에게만 보인다하니 지금 부터라도 다시 마음을 씻어 봐야 할 것 같다.

금와보살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불교통사” 하권에 기술되어 있다.

“축서산(현영축산이라 칭함) 통도사 자장암 바위벽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구멍이 있어니

그 안에 작은개구리 한쌍이 있다.

몸은 청색이고 입은 금색인데 어떤데는 벌과 나비가 되어 수없이 변화한다한다, 여름철에는 바위가 가마솥처럼 뜨거워도 바위위를 활보하며 뛰어다닌다. 사승이 이를 일러 금개구리 즉 금와라 하더라. 그런데 이 금개구리는 산문 밖을 나가지 않는다고 하여 관리가 이를 믿지 아니하고 개구리를 함에 넣어 나가다 함을 열어 보니 개구리가 사라지고 없었다한다. 세존에 그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으로 나타난 것으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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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와보살을 친견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볼 수도 있고 못볼수도 있다한다. 마음을 비우고 여러분도 한번 도전해 보시길...
이 받침대는 항상 비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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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전 살문 아래에 새겨진 금개구리 한쌍과 중앙의 연꽃이 자장암은 금와보살과 함께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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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률사 대웅전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4호
경부고속도로 경주 IC에서 포항으로 가는 외각도로를 따라가면 보문단지 갈림길을 지나면 우측으로 작은 산이 나타난다. 경상북도 경주시 봉천동에 소재를 하고 있는 백률사는 일명 소금강산으로 불리는 동네 뒷산의 나즈막한 산에 터를 잡은 유서 깊은 사찰이다. 지금은 그때의 절규모는 사라지고 암자의 틀을  갗추었지만 한때는 만만찮은 절의 규모를 자랑하였을 것이다. 백률사는 삼국유사등의 기록에 나오는 자추사란 절일 것이라 한다. 만약에 자추사가 맞다면 신라 법흥왕 14년(527)에 불교를 신라의 국교로 삼도록 순교한 이차돈를 기리기 위한 유서 깊은 절이기때문이다. 대웅전은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그후 다시 지어졋는데 단층의 목조건물로 옆에서 보면 사람인(人)자인 맞배지붕이다. 기단부는 신라시대의 양식을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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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률사 아래 굴불사지 석불상은 보물제121호로 백률사 아래에 있다.
주사위 같은사각의 바위면에 불상을 조각하였다. 경주의 북쪽인 소금강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어며 높이 약 3m의 사방불 형태이다. 불상의 서쪽은 아미타 삼존불, 동쪽은 약사여래좌상, 남쪽은 삼존입상, 북쪽으로는 보살상 두분이 새겨져 있다. 북쪽의 보살상 중 한분은 팔이 여섯달린 관세음 보살입상으로 국내에서는 보기드문 예술품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은 신라경덕왕이 백률사를 찾았을때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나 땅을 파보니 사각모양의 바위가 나와 바위의 사방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굴불사로 불렀다고 한다. 최근 발굴조사에서는 고려시대 건물터가 확인되었서며 출토된 유물중에는 굴석사란 명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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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은 순교로서 불교의 중흥을 꾀하였는데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다

"법흥왕(신라 제23대 왕(재위 514∼540))이 창생(세상의 모든 백성)을 위해..

수복멸죄(복을 닦고 죄를 소멸하는..)의 성스런 곳으로서 사원을 지으려 하였으나..

조신(신하)들이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다만 사인(12-13등급의 낮은 직책, 신라는 16관등제)인 위촉(이차돈)만이..

그 뜻을 알아 자신의 목숨을 바쳐 왕의 뜻을 실행할 것을 서원하고 결국 죽임을 당하였는데..

 베인 목에서 우유가 솟고 천지가 진동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결국 그로 말미암아 불교가 흥하게 되고 사찰이 창성하게 세워지고..

탑이 즐비하게 이어지게 되니 이것은 삼성(아도화상, 법흥왕, 이차돈)의 공이다."

- ≪삼국유사≫ 3권 원종흥법 염촉멸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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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제374호 율곡사 대웅전은 조선 초중기작품이며 정면3칸 측면3칸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정수산 산행의 들머리는 산청읍내에서 상여봉을 올라 이어지는 종주산행과 짧은 척지에서 오르는 산길,
그리고 정수산의 대표적인 사찰인 율곡사로 오르는 산길이 있다.
그 정수산의 대표적인 들머리인 율곡사는 경남 산청군 신등면 율현리 1034번지에 의 유서 깊은 사찰로 신라 경순왕 4년에 감악조사(感岳祖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대웅전 안내판에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을 하였어며 신중동국여지승람에는 단성현에 있는 절로 기록되어져 있다한다.
 (산청군청에서는 원효대사가 창건을 하고 감악조사가 중창을 하였다고 정리가 되어져 있다)
 
율곡사에서 대표할 만한 보물은 대웅전(보물제374호)과 율곡사괘불탱(栗谷寺掛佛幀)화(보물제1316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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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현재의 대웅전은 2003년 해체복원과정에서 어칸 종도리 하부에서 “강희십팔년기미월일상량기(康熙十八年己未月日上樑記)”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조선 숙종(1679년)때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슴을 알 수 있다.
율곡사는 대웅전에 관해 내려오는 전설 있다. 정수산 취재 산행시 궁금해 율곡사 스님에게 물어 보았다. 파랑새의 전설에 관해서....

“국내에서는 두군데 절집에서 똑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 한군데가 율곡사 창건시에 대웅전을 짓고 난뒤 단청에 색칠을 하는데 화공이 이레동안 대웅전 안을 들여다 보지 말것을 당부하며 작업에 들어 갔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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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랑새가 그림을 그리다가 미완성으로 남은 산수와 두점. 2003년 대웅전 해체 복원시에 찾았다한다.

상좌승이 대웅전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하여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만 하루를 남기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파랑새가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본 상좌승은 소스라치제 놀라고 파랑새는 물고 있던 붓을 놓고 날아가 새신바위로 숨어 들었다”는 이야기를 여쭈어 보니 스님도 내소사의 전설은 자기도 잘 알고 있지만 율곡사 대웅전의 파랑새 전설은 최근에 와서 여러 관광객들이 와서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며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들여주었다.

그러나 최근 2003년에 해체 작업을 할때 건물 천장에는 우물정자로 만들어져 있어 구조가 복잡하게 되어 있어 아래에서 보면은 볼 수가 없었지만 해체작업때 확인을 한 산수화 두점을 찾았다 한다.

미완성의 산수화는 전설속의 파랑새가 그리다 날아간 그 그림인지 알 수 없지만 대웅전 안에 산수화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고 스님이 들여주었다. 그리고 대웅전은 정면3칸과 측면3칸으로 작은 규모를 이루며 팔작지붕을 얹었다. 지붕의 무게를 받치는 기둥인 3단 목조장은 복잡하면서도 아름답게 장식되었어며 조선조 중기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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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다가 상좌승이 문틈으로 들여다 보자 입에 물었던 붓을 떨어트리고 여기 새신바위에 날아 앉았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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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사이에 두짝의 문을 달아 여러모양의 문살을  넣어 대웅전을 더욱 아름답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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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철에 찾아가면 특히 붉은 감이 홍시가 되어 대웅전과 함께 아늑한 산사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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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현리 도로가의 율곡사 안내석, 여기서 좌회전을 하여 도로를 따라간다.


율곡사 대웅전의 자세한 기록은 문화재청 홈페잊로 들어가보세요.http://www.cha.go.kr/unisearch/Uniresult_Db_View.jsp?VdkVgwKey=12,03740000,38&queryText=율곡사대웅전

산청군청 홈페이지 율곡사
http://tour.sancheong.ne.kr/program/assert/out.asp?menucode=030405&assertcode=9916&stype=&sstring=&sMcode=&open_main=3&open_sub=5&open
_sub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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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의 경내로 들어설여면 반드시 이문을 통과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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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 경내로 들어서면 먼저 사찰을 에워싸고 있는 산세를 보면 명산에 대찰임을 실감할 것이다.왼쪽으로 천황산의 암봉이 오롯하고 우측으로 재약산에 걸린 암봉이 웅장하며 문수봉과 관음봉이 나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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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으로 향로산과 재약봉이 하늘금을 긋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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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류동천에서 본 표충사이며 범종루 우측으로 천황산과 재약산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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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종루 좌측으로 붓끝형상의 문필봉도 확인된다. 표충사에서 본 필봉 끝에는 힘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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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에서 다양한 각도에서 본 필봉이다. 이리보아도 붓끝, 저리보아도 붓끝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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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끝에 걸린 필봉과 백일홍이 더욱 조화를 이루며 백일동안 꽃을 피운다는 백일홍이 지금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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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문을 통과하면은 대가람 표충사을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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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귀를 쫒는다는 좌청룡 우백호 격인  수문장을 만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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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467호 표충사 삼층석탑으로 통일신라 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높이 7.7m의 삼층석탑이다.


흔히 사명당 하면 생각나는 곳이 있다.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시 비석에서 땀을 흘리며 앞으로의 변고를 예고해주는 표충비각, 보통 그 땀흘리는 표충비각이 현 재약산 표충사에 있는 줄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러나 표충사 어디를 둘러 보아도 땀흘리는 비석은 없었다.

땀흘리는 비석인 표충비각은 밀양시 무안면에 있다.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무안면 소재지에 자리잡고 있어 땀흘리는 표충비각까지는 동서로 극과극을 달리고 있다.

여기 재약산 표충사는 경남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31-2번지이다.
654년에 신라진덕여왕때 원효대사가 삼국통일을 기원하며 죽림정사란 이름으로 산문을 처음 열었다.
 
천황산과 이웃한 재약산 맞은편으로 향로봉, 마지봉, 법수봉, 우측은 재약봉, 문필봉,문수봉,보현봉,관음봉,지장봉, 미륵봉,사자봉이며 우측으로는 수미봉, 화엄봉, 미타봉, 중앙에는 사자봉, 전방에는 노적봉과 백마봉이 에워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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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의 사진은 영정약수로 신라 흥덕왕 4년에 셋째왕자가 불치병인 나환에 걸여 재약산의 산초와  약초 그리고 영정의 샘물로 완치를 하였다하여 영정사로 불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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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광전 안의 석가모니불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 대광전은 표충사 중심으로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안치하고 동쪽으로 질병과 무지를 다스리는 약사불, 서쪽으로는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봉안하였다. 신라시대에 처음 건축되었지만 전란등으로 소실되어 1929년에 다시 지어졌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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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9년 신라 흥덕왕4년에 인도의 고승인 황면선사께서 부처님 진신 사리를 가져와 주석하였다. 그리고 흥덕왕의 셋째아들이 나환에 걸려 재약산 죽림정사에서 영정의 샘물과 재약산의 약초를 먹고 치유를 하니 임금이 기뻐하며 영정사란 절이름을 하사하였다한다.

그 후 1596년 선조 29년 임진왜란의 발발로 왜적이 퇴각을 할때 사명당은 영정사에서 승병을 모집하여 사자평에서 승병 훈련을 하였고 전장에 나가 왜적과 싸웠다.

그 후 무안면의 표충사당에 있던 서산, 사명, 기허 삼대선사 영정이 영정사로 옮긴후 표충서원이란 사액을 받아 재약산표충사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표충사를 둘러 싸고 있는 산을 천황산과 재약산으로 불여지고 있다.

그러나 산꾼들에게는 재약산 사자봉, 수미봉으로 더 많이 불여지고 있다. 천황산이 일재시대때 일본인이 일본천황을 의미하며 붙였다 하여,밀양시에서 재약산 사자봉과 수미봉으로 명칭변경을 건의하였지만 그이전에도 천황산으로 불였다고 한다합니다. 그래서 현재에도 천황산 재약산으로 나누어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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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사진은 철확으로 직경 113.6cm철제솥으로 많은 사람들의 식사준비를 할 때 국 또는 밥을 하는 대 사용되었어며 목재함도 너비85cm 길이597cm인 목재함 역시 많은 수의 사람들이 밥을 담는 용도로 사용 한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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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각과 우측 팔상전은 유형문화재 자료141호로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가지 모습으로 나누어 표현을 한 탱화와 존상을 모시는 법당이라 합니다. 팔상이란 하천, 탁태,강탄,출가, 항마, 성도, 전법륜,입열반으로 구성되어 있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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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사진은 통일신라시댜 비석으로 추정되며 표충사 삼층석탑(보물 제467호)이 500여년전에 무너질 위기에 처해 대중100여명이 뜻을 모아 개보수 한다는  기념비석이라하며 우측은 표충사 일주문이다.

재약산 표충사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고 싶다면은 표충사 홈페이지로
http://www.pyochungs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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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암벽의 모서리에 좌우로 조각된 특이한 마애보살입상으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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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마애보살 입상, 보물제490호로 구미시를 내려다 보고 있다.

구미 금오산은 구미시를 대표하는 산이다.

금오산은 도립공원 1호로서 자연보호 운동이 처음으로 실시하였던 곳이 대혜폭포 밑

이다. 30m의 높이에서 굉음을 울리며 떨어지는 물소리는 천지를 진동한다하여 명금폭

포로도 불린다. 그 폭포를 돌아 8부 능선상의 바위 모서리에 새겨진 보살상을 볼 수 있

다. 금오산 마애 보살상으로 보물 제 490호 1968년 12월 19일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구

미시 남통동 산 24-1이 주소지이며 금오산 현월봉 북쪽 할딱 고개를 거쳐 오르는 능선

상 좌측 자연 암벽 모서리를 깍아 조각한 특이한 보살상을 만날 수 있다.

모서리 좌우를 이용하여 입체감을 주어 살아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교하다.

크기는 5.5m로 전체에 비해서 손이 큰 것이 눈에 들어오며 세심한 옷 주름, 연꽃대좌
 
위의 발 또한 묘사가 투박하다. 그리고 마애보살입상 좌측 뒤로

광배를 처리한 것과 반원형 연꽃대좌등 고려시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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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상에 새겨진 정교한 옷주름과 전체적으로 큰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풍만한 얼굴모습과 가는 눈 작은 입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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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뒤로 처리한 전신광배가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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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하게 묘사된 옷주름과 근엄한 모습까지 보이는 마애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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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을 하다 보면 여러 종류의 불상을 볼 수 있다. 바위 모서리를 이용하여 좌우로 균형을 주어 만들어진 마애보살입상. 편편한 바위에 새겨진 입상은 여럿 보았지만 돌출된 바위 모서리를 이용한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같다.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12,04900000,37#
문화재청 홈페이지 가시면 더욱 자세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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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0월에 착공을 하여 10년만에 영도와 송도를 있는 다리로 이번 6월30일 준공을 눈앞에 둔 남항대교 야경입니다.
현재 야간 조명을 설치하여 실험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배가 드나들 수 있는 상판은 푸른색을 넣어 조명의 색상을 조절하였어며 좌우로는 바둑판 모양의 사각으로
조명을 처리하였습니다.
다른 다리와 달리 남항대교는 인도를 설치하여 시민이 통행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남항의 중간에서 자갈치를 바라볼 수 있어며 망망대해의 바다를 바라볼 수 있도록하여
하나의 관광자원으로 활용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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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주논개의 약사
1574년 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출생
부친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남
집안은 대대로 훈장집으로 주위의 존경을 받았서며 논개는 4갑술(갑술년,갑술월,갑술일,갑술시)의 사주를 안고 태어났다 한다. 그래서 주달문은 딸아이의 사주가 예사롭지 않아 여자애지만 장차 크게 될 인물임을  알았다한다.
논개란? 딸이 술(戌)시에 낳았으니까 개을 낳은 것과 같고, 거꾸로 읽어면 "놓은 개"즉 논개가 되므로 역신도 시샘을 하지 않을 것이란 뜻이란다.
1578년 5세때 부친 주달문 사망 후 모녀는 숙부 주달무집에 의탁함.
숙부는 어린 조카 논개를 김풍현집에 민며느리로 보낸다고 약조한후 금품을 받고 달아남.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어린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신을 하지만 김풍헌의 제소로 장수관아로 잡혀와
재판을 받게된다. 재판관은 최경회현감으로 모녀에게 무죄로 석방을 하니 갈곳이 없는 논개모녀는 최경회의 집에 머물며 잔심부름을 하며 지냄.
논개나이 17세(1590년)때 담양부사인 최경회와 부부의 연을 맺음.
그후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한 후 고향인 화순을 가면서 논개는 고향 장수로 보낸다.
2년뒤 1592년 임진년에 임진왜란이 터져 상중이지만 최경회는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어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진주성 전투때 패한후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을 한다.
논개는 남편 최경회가 순국했다는 소식에 논개는 왜놈들이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에 관기들과 함께 촉석루에 들어간다. 관기처럼 곱게 단장한 주 논개는 촉석루 아래 바위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안고 남강물에 투신하여 순국한다. 그후 뜻을 같이한 민관군이 논개의 주검을 안고 고향인 장수군 장계로 떠나지만 고향인 주촌의 논개집안에서는 출가외인으로 논개의 주검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을 하여 , 할 수 없이 함양군 서상면 깃대봉 아래 논개의 주검을 안장한다.   (사)의암주논개정신선양회에서  발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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