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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활성동 영원사지. 밀양 용두산의 잠자는 용을 깨우기 위해 세운 사찰  영원사지


영원사지

밀양시 활성동 구서원마을에는 요즘 많은 차량들이 들락거린다. 구서원 골짜기 안의 절골과 부도골을 까뭉게고 현재는 리더스란 골프장이 들어서서 많은 차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옛것과 현재의 만남이랄까.

이 골짜기는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을 배향하기 위해 절을 폐한 그 터에다 1567년에 부사이경우가 이곳에다 덕성서원을 창건하였다. 퇴계이황의 점필서원이란 현판 글씨를 걸고 강학하던 장소로 1637년인 인조15년에 운례촌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상남면 예림동 예림서원으로 옮겨 배향을 하고 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서원이 떠난 옛 서원 자리라 하여 구서원 또는 구손. 덕성동으로 불린다. 





영원사지는 칠탄산과 일자산인 산성산 즉 자씨산 아래에 자리를 잡았던 사찰로 자씨산의 형국이 용이 엎드려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자씨산 아래에 절을 세워 잠자는 용을 깨우기 위해서 창건을 하였다.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초기로 보고 있으며 고려 말에 대학자인 익재이재현의 익재집에 ‘조계종 자씨산 영원사 보감국사비명서’에 그 기록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때의 석불좌상3구와 부도탑의 귀부와 이수를 1974년 부도골에서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옛 영원사에는 선조루란 누각이 있었고 사찰의 영화는 온데 간 데 없고 지금은 산사면을 파내어 골프장이 들어서 그때의 영원사를 기억하는지 모를 일이다....

지난주 일주일 상간으로 두번이나 찾아 갔는데 하루는 잡초가 무성한 상태로 관리가 되어 있었고 재차 방문때는 잡초가 깨끗하게 제거되어 있어 내마음도 이발을 한양 가볍게 돌아 올 수 있었다.



영원사지 보감국사 묘응탑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호

경상남도 밀양시 활성동

보감국사는 1313년에 고려 충숙왕 이 왕위에 오르자 왕사로 책봉되었다. 그 후 2년 뒤 물러나 영원사로 들어와 주석하였다.
송림사에서 입적을 하였는데 보감국사는 수도승의 최고경지인 좌탈입망인 앉은자세로 입적을 하였다한다.
현재는 거북모양에 용의 머리를 올린 귀부와 용이 서로 엉켜 있는 이수만 남아 잇고 그의 행적을 기록한 비신은 행방을 알 수 없다.
밀양읍지에는 보감국사 비문은 이제현이 지었고 그의 속명은 김혼구(1250~1322)로 보각국사 일련의 제자였다.








영원사지 보감국사 부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호

사찰의 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관하는 곳이고 스님의 사리나 유골을 보관하는 곳은 부도라 한다.
여기 영원사지의 부도는 고려시대 보감국사의 부도로 현재는 몸체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지만 각 부재들이 8각으로 처리하며 통일 신라 시대 양식을 취하고 있다 하겠다.
남아 있는 받침대는 상중하대로 상대는 연꽃잎 여덟장이 겹쳐저 하늘로 향해 조각되어 있고 중대는 복잡하게 소용돌이치는 구름문양이 돌려져 있다.
하대는 팔각으로 돌려 코끼리의 눈을 형상화한 안상을 새겨 넣었다.
그 위를 덮은 지붕돌은 기왓골과 막새기와까지 나타낸 정교한 조각품으로 통일신라 말기를 계승한 고려시대 부도이다.
































찾아가는 길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밀양행 시외버스는 오전 7시부터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 주말에는 오전 9시40분과 오전 10시20분에도 있다. 1시간 소요. . 들머리인 산외면 활성2동은 밀양터미널에서 남명리 얼음골행 및 표충사행 어떤 버스를 타도 다원마을에 정차한다.
얼음골6시10분 9시35분 (직행)10시55분 7시05분 8시, 9시05분, 10시40분, 11시30분
표충사6시20분 9시10분 (직행)7시35분,8시45분 10시10분 11시20분
그리고 감물행 고례행 국전행 시내버스도 이용할 수 있다.
다원정류장에선 하차한 후 버스진행 방향으로 직진하면 '율전 구서원 또는 리더스CC'를 가리키는 팻말을 따라가면 된다. 20분쯤 걸린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울산 언양 24번~금천리 용평~굴다리 통과~(이후 리더스CC 팻말 따라 가면 됨)~금천리 남기리 용평 방향 좌회전~신동국밥, 금천마트 지나~화동 표지석~용평 용활 방향 좌회전~동천변 활성2교를 건너 골프장 가든을 지나 갈린길에서 마을 안길인 우측길을 따라 활성2통 마을회관을 지나면 대추밭에 부도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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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영천암 백운사 범종. 일제 전쟁물자로 징발되었다는 영천암 백운사범종


밀양의 옛 이름은 추화군이다. 추화군의 모태가 된 이름은 봉수대가 있는 추화산으로 밀양의 읍성을 감싸고 있는 밀양의 성지이다. 추화산 봉수는 김해 성화예산에서 시작을 하여 분산~자암산~밀양백산(종)남산~추화산~분항산~청도남산으로 연결하는데 중추적인 고리 역할을 한다.

이곳 산허리인 교동에는 아담한 사찰이 자리하고 있으며 중생들을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작은 종이 종각 안에 걸려 있다. 보통 범종루 안에는 큰 대종이 달려 스님들이 서서 두팔을 이용하여 종을 치면 은은하게 사바세계로 퍼져 나가는게 보통이지만 영천암 백운사범종은 여타 사찰과 다른 작은 철로 만든 종이 범종루에 걸려 있다. 의자에 않아 작은 망치로 때리는 종으로서 쇳소리가 울려 퍼진다. 






범종의 종소리는 땅속의 미물에서부터 사바세계와 지옥의 중생들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아침에 28번, 저녁에 33번 타종을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역활을 한다. 영천암의 종은 우리종의 형태와는 완전히 다른 종이란다. 몸통부에 세겨진 문양과 종을 연결하는 고리부분인 용뉴등이 중국의 양식을 따르고 있기 때분이다.

전국의 모든 사찰에서 보는 비천문이 그려져 있는 종이 아닌 아(亞)자와 팔괘문이 새겨져 있고 몸통을 연결하는 고리인 용뉴는 국내의 종은 용한마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 종은 두 마리가 서로 엉켜 용뉴를 형성하고 있다. 아랫부분에 돌려 놓은 팔능이 물결모양을 이루고 2중으로 돋을 새김한 연꽃무늬하며 우리종에는 소리를 맑게하고 은은하며 멀리까지 울림이 퍼지도록하는 음통이 용두에 달려 있는데 이종은 음통도 없다. 이종은 중국 원나라때 만들어진 중국종으로 몸통의 하단부에 시주를 한 사람들의 명문이 나와있고 조성연대와 만든연유는 판독할 수 없다한다.

이종이 이곳에 오게된 사연또한 기구하다. 1945년 광복직후 부산 영도의 고물상에서 이절의 주지가 구입을 하여 영천암에 오게 되었는데 아마 일제시대때 전쟁물자로 징발된것을  해방이 되자 고물상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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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봉사

신라시대 때 신라의 5대 명사찰 중 하나로 773년인 혜공왕9년에 법조라는 고승이 영남사 부속 암자로 창건을 하였는데 혜공왕이 법조로부터 받은 불은을 갚기 위해 가람을 짓고 무봉암으로 했다는 전설이 있다. 처음 출토 될 때는 불상 뒤의 광배, 대좌가 없던 상태로 영남사 터에서 나왔고 광배와 대좌도 인근에서 찾아 서로 맞추어 무봉사에 안치를 하였다. 석조여래좌상은 전체적으로 볼때 통일신라후기의 불상으로 보고 있다. 영남루가 있는 아동산은 흔히 무봉산으로도 부른다. 천년의 세월을 무봉사는 밀양시를 휘감고 나가는 밀양강에서 그 자리를 지켰다. 강물에 비치는 무봉사의 모습은 어떨까?. 주변의 영남루와 함께 무봉사는 많은 사람들로 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사찰이다. 밀양은 3대 신비가 있다. 남명리 얼음골의 시례빙곡, 나라의 변고를 알리는 땀흘리는 표충비와 만어사의 경석에서 나는 쇳(종)소리를 밀양의 3대 신비라 한다.  그러나 무봉사의 태극나비를 포함하여 밀양의 4대신비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무봉사는 석조여래좌상도 유명하지만 태극나비로 더욱 유명하다. 평소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만 이곳 무봉사에 나타난다, 이 나비는 날개에 태극문양이 있다 하며 현재 밀양시립박물관에서 그 나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무봉사 석조 여래좌상

보물 제493호 소재지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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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해남여행)두륜산 대흥사. 해남 두륜산 대흥사에는 부처님이 누워 있는 형상의 능선이 있습니다

두륜산 대흥사

해남 두륜산은 대흥사를 빼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대흥사를 중심으로 주봉인 가련봉을 비롯, 노승봉(능허대) 두륜봉 고계봉 도솔봉 혈망봉 등 8개의 봉우리가 연꽃모양으로 원형을 이루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주차장에서 걸어들어오는 숲속길 또한 운치 있는 길이지만   해탈문을 들어서면 대흥사 경내로서  정면에 대흥사를 두른 암봉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오른쪽에서부터 두륜봉 가련봉 노승대. 불심을 가지고 능선을 들여다보면 부처님이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낸다. 두륜산 산행중의 구름다리가 두륜산의 명물이라면 대흥사의 볼 거리는 누워있는 부처님의 모습이 아닐까?.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 대흥사(大興寺) 두개의 이름으로 불려졌다. 대둔사 또는 대흥사로 불렸는데 현재는 대흥사로 부른다.대흥사는 426년인 백제 구이신왕 7년에 신라의 정관존자가 만일암과 함께 창건을 하였다한다. 그러나 정관존자에 관한 정확한 자료가 없어544년 신라진흥왕5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죽미기'의 기록을 따르고 있다. 그 이후 자장과 도선스님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기록도 옅볼 수 있다. .임진왜란때는 호국사찰로서 서산대사의 의발 및 부도탑이 전해지며 풍담스님에서 초의선사에 이르기까지 13대종사가 배출되었고 만화스님부터 범해스님에 이르기까지 13대 강사가 배출된 유서 깊은 곳이다.







대흥사의 대웅전은 조선 현종 8년인 1667년 심수대사가 중수를 하였다 하나 그 이후에도 여러분 중수 과정을 거쳤다.

대웅전을 앉히기 위해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아 정면5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올렸다.
양쪽 귀퉁이의 기둥을 제외한 전면 기둥 위쪽으로 용두를 새기고 쇠서에다 연꽃을 새겼고 각 기둥사이에 빗살무늬의 2분 합문을 달았다. 조선 후기의 작품을 잘 나타내고 있다.전면 현판의 대웅보전은 글씨는 조선 후기의 명필가로 알려진 원교 이광사(1705~1777)의 글씨이다.  
http://www.daeheungsa.kr/coding/main.asp



대흥사 삼층석탑

대응사 절 마당 응진전 앞에 삼층석탑이 자리 하고 있다.
원래 탑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장소로 사용되어 불교계에서는 신성시하고 있는 신앙적인 대상이다. 탑의 형식으로 보아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디고 있으며 전체 높이는 4.3m로 간결하면서 날렵한 미미지를 가지고 있다.
1967년 래체 보수과정에서 12cm 크기의 동으로 만든 여래좌상이 기단부에서 나왔다 한다. 보물제320호
http://www.daeheungsa.kr/coding/sub2/sub2_4.asp?page=1&seq=12





만일암의 북쪽에 있다하여 북암 또는 북미륵암으로 불린다. 대둔사지』에는 '건륭갑술에 온곡영탁(溫谷永鐸) 대사가 북암을 중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1754년에 중수되었다. 북미륵암에 1985년에 마애여래좌상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로 용화전을 지었다. 국보308호로 대흥사의 관내에 유일한 국보이다.
http://www.daeheungsa.kr/coding/sub2/sub2_4.asp?page=1&seq=15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

보물제301호
북미륵암 삼층석탑은 대흥사 응진전 앞의 삼층석탑처럼 고려시대 작품으로
신라시대 불교의 영향이 이곳 서남해 까지 영향역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결하고 날렵하한 모습을 하고 있다. 

http://www.daeheungsa.kr/coding/sub2/sub2_4.asp?page=1&seq=13

찾아가기

부산에서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 순천IC~여수 벌교 17번 국도~지하도~2번·17번 국도 벌교 여수~2번 국도 벌교 낙안민속마을~순천 청암대학에서 좌회전~벌교~보성~장흥~완도 해남 강진~진도 해남(호산삼거리) 직진~두륜산 대흥사~경찰서 진도 완도~대흥사 827번 좌회전~대흥사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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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구미여행)금오산 약사암.초생달이 걸여 있는 모습이 아름다운  금오산 약사암


구미 금오산 약사암

금오산 약사암은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한다.
그러나 전해지는 유물이나 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며
1618년과 1799년에 간행된 ‘일선지’와 ‘범우고’에 금오산 약사암의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보여 진다. 




.


그리고 약사암 옆으로 돌아가면
고려시대에 조성한 마애여래입상(보물 제490호)이 조각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사찰이 있었다 보여진다.
약사암은 금오산 현월봉 암벽 바로 아래 위치를 하고 있어
보여주는 맛은 그 어디 사찰과도 비교를 할 수 없다.


천길 단애에다 자리를 잡은 절집 답게 구성 또한 단출하다.
삼성각과 약사전 일주문 요사 종각이 전부로 빈틈의 공간을 잘 활용하였다.
그래서 인지 규모면에서는 아주 작은 암자에 불과하다.
종각이 자리잡은 위치는 구름다리가 걸려 있고 송곳처럼 솟은 정수리에
종각이 세워져 보는이의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한다.


먼저 약사암을 보기 위해서는 일주문을 통과해야한다.

일반사찰은 일주문에서 계단을 밟고 올라 가야하지만 약사암은 반대로 내려서야 한다.
보통 일주문을 지나면 사천왕을 모신 천왕문을 만나지만
약사암은 천왕문 대신 좌우로 협립한 암벽이 사천왕상을 대신하고 있다.

이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들어설 수 없는
약사암은 먼저 삼성각을 돌아 내려서면
좌측에 약사전과 우측에 삼성각이 암반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맞은편 봉우리에 종각과
계단 아래 자리 잡은 요사 건물 뒤로
구미시내와 그 일대 칠곡군의 모습들이 시원하게 펼쳐집니다.


대구 팔공산이외에는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조망권은 최고의 절터이다.
근대에 와서 일제시대때인
1935년 다시 중수함이 우상학의 ‘약사암중수기’로 남아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85년에 중수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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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외동여행)경주 원원사지 삼층석탑. 조각예술의 결정체 경주원원사지 삼층석탑


경주 원원사지 삼층석탑

경주시 외동읍 모와리 산
보물 제1429호
울산에서 경주로 가는 국도변을 따라가면 외동읍 모화리가 나온다.

모화리 우측으로 큰 능선이 울산 장생포까지 이어지니 흔히 말하기를 삼태지맥이라 부른다.

봉서산과 삼태봉 능선아래 숨은 듯이 자리 잡은 천년고찰 원원사지가 자리를 하고 있다.

옛 절터의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그래도 절터임을 확인할 수 있는

쌍탑만은 오늘도 신라인의 예술성을 뽐내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원원사는 김유신이 신라를 지키기 위해 건립하였다.
사찰의 이미지 보다는 사찰로 위장을 하여 신라의 입구인 관문성을 지키는 호국사찰이었다. 





원원사지 삼층석탑은 다른 석탑보다 파손범위가 매우 크다.
그러나 석재 하나 하나에서 뿜어저 나오는 예술성은 매우 뛰어나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지금의 천불보전 뒤가 금당자리였는데 금당 앞에 파손되어
어지럽게 널려 있던 것을 1931년 복원을 한 것이다.
전체 높이는 7m이며 상륜부는 노반과 앙화 까지만 남아 있다.

2단의 기단위에 삼층으로 쌓아 올린 원원사지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며 탑신과 기단의 뛰어난 조각으로 유명하다. ]
상층인 사면에는 평복을 입은 십이지상이 3체식 조각되어 있고
1층 옥신에는 1구식 돋을 새김으로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찾아가는 길

부산 금정구 노포동 부산종합버스터미널에서 경주행 시외버스를 탄다. 오전 5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10분 간격 운행, .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모화행 600번 시내버스로 갈아타면 30분가량 걸린다. 운행 간격은 15분 안팎이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는 국도 7호선을 타고 울산 시내와 울산공항, 북구 호계동을 거쳐 경주로 진입한다. 외동읍 모화리에서 계동교를 지나면 오른쪽에 모화숯불단지 원원사 표지판을 보고 우회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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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내원암

운문사 들어가는 길 왼쪽으로 내원암 청신암 방향 흙길을 따라간다. 울울창창한 소나무와 거목들이 키 재기를 하고 있다. 그 사잇길을 따라가는 내원암 가는 길. 청신암을 지나면 내원암, 운문사의 부속암자이지만 운문사에서는 내원암의 위치 조차 가늠해 볼 수가 없다.

복호암과 지룡산을 거쳐 가는 능선의 우측으로 호박 같이 움푹파여진 깊은 골짜기에 자리를 잡고 있는 내원암. 운문사는 저잣거리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세속의 사찰이라면 한굽이 돌아선 내원암은 부처님의 나라에 들어온 것처럼 아늑하고 조용하다.

내원암의 창건은 원응국사였다 한다. 운문사를 중창할 때 같이 창건하였다한다. 그후 1694년인 조선 숙종때 설송 연초대사가 중창을 하였고 1834년인 순조31년 때 운악화상이 중수을 하였다한다.

무슨연유인지 모르지만 그때의 건물은 모두 남아 있지를 않으며 1930년경에 2차 중창을 거쳐 현재의 사찰모습을 하고 있다 한다.

1950년경에 불교정화운동에 의해 운문사와 함께 비구니의 처소가 되었다 한다. 초대 원주는 유섭스님이었고 1992년 제문스님에 의해 내원암의 초석을 다지는 삼성각 무량수전 멱우선실 요사등이 새로 지었다 한다.




운문사 청신암. 사찰의 분위기보다는 ...
내원암의 깊이를 보여주는 부도군



무량수전에 보관중인 석조아미타불상은 경주의 흰 옥돌로 만들었다 한다. 현재는 금으로 덧칠하였다.  개금시 복장유물에 나온 기록을 보면 1681년인 강희20년의 불상내력이 발견되어 조선후기에는 석불이 흔하지 않아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중앙의불상)






내원암의 약수는 청도 인근에서는 유명새를 타고 있다. 한 여름 간장을 녹일 것 같은 청량수의 물맛이 그리워 이곳을 찾는 사람도 꽤 많타 하니 운문사를 들러는 길손은 내원암의 청정 약수로  심신의 피로를 달래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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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진산은 망운산이다. 그 산자락안에는 망운사과 화방사 두 사찰이 있다, 모두 쌍계사의 말사이며 망운산화방사는 신라 신문왕때 원효대사에 의해 보리암, 용문사와 함께 창건하였다 한다. 그후 폐사되었다가 고려시대에 들어와 진각국사 혜심스님이 순천 조계산 수선사(현송광사)에서 남해를 바라보니 항상 남해 바닷에 떠 있는 섬에서 영기가 서려 있어 이곳 망운산 연죽사의 옛 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연죽사가 있던 위치에서 조금 이동하여 영장사로 지었다. 임진란때는 왜구와 맞서 싸우는 승병들의 은거지 였고 그래서 인지 임진왜란으로 영장사는 화재로 인해 전소되고 만다. 그 후 전란이 끝나고 서산대사의 제자인 계원과 영철 두 스님이 와 마을 신도들의 도움으로 중건을 하였다. 절 이름을 풍수지리로 연꽃의 중심에 앉아 있는 자리라하여 화방사로 바꾸었다. 화방사는 여러번의 화재와 전란으로 문화재등 모든 사료들이 사라지고 없다. 1981년에 화방사는 대 화재로 인해 사찰이 전소되었지만 현재의 절 규모는 그때 전소되었던 보광전 자리에 1984년 대웅전을 중건하면서부터 사찰의 규모를 갖추었다. 그러다 보니 옛 사찰의 분위기는 반감되고 현대미와 인공미가 너무 드러나 천년고찰의 분위기는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란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승병들의 근거지로 호국사찰이었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겠다.

지금 현재의 남아 있는 건물은 거의 없고 채진루만 1638년에 계원대사가 지어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일주문을 통해서 대웅전을 올라오는 계단 왼편에 대웅전과 마주 보고 있는 건물로 임진왜란때 왜구에 의해 모두 불타 버린 것을 신도들에 의해 다시 복구되었다. 채진루는 정면 5칸에 측면 3칸으로 人자인 맞배지붕으로 건립되었다.




1638년에 계원대사가 지어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일주문을 통해서 대웅전을 올라오는 계단 왼편에 대웅전과 마주 보고 있는 건물로 임진왜란때 왜구에 의해 모두 불타 버린 것을 신도들에 의해 다시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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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대비사는 고려시대 이곳으로 옮겨 왔다. 그 이전의 오갑사 사찰은 어떤 이유에선가 모두 폐찰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운문사도 폐찰되었다가 보양국사가 까치의 도움을 받아 절터를 찾아 운문사로 이어져 오고 있듯이 대비사도 그 이전의 소작갑사는 폐찰이 된 모습을 박곡리 곡란마을 뒤 베틀바위 아래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곳 대비사는 신라진흥왕 18년인 557년에 복호산 아래에 있는  북대암 옆 금수동에서 한 신승이 3년 동안 수도한후 560년에 7년간에 걸쳐 대작갑사 소작갑사,소보갑사 천문갑사 가슬갑사인 오갑사를 창건하였다. 대작갑사가 현재의 운문사이며 소작갑사가 현재의 대비사이다. 소작갑사에서 대비사로 이름이 바뀌것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자대비"'에서 따 왔다는 설과 신라시대 왕실의 대비가 수양차 이절에 머물렀다하여 대비사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비사는 신라진평왕22년인 600년에 원광법사가 운문사와 함께 중창을 하였다한다. 그후 사찰은 폐찰의 수순을 밟다가 고려시대 이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와 중건이 되었는데 현존하는 건물인 대웅전은 보물제8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중기의 건축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여지며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전체구성이 짜임새가 있고 다포계의 공포로 구성이 되어 있다 현재 대웅전의 외관은 단청을 입히지 않았는지 모를 정도로 원래의 목재건축물로 돌아가 있다.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는지 대웅전의 빚바렌 단청으로 그의 무게가 더욱 느껴진다.

교통편: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열차와 버스(2차례)를 갈아타야 한다. 부산역에서 청도행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 출발시각은 오전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과 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등이다. 1시간 걸리며 4800원(주말 5000원). 청도역 앞 청도시외버스터미널에서 운문사행 버스를 타고 금천면 동곡에서 내린다. 오전 7시40분, 9시20분, 10시40분에 있다. 1시간 걸리며 3500원. 동곡정류장에서 산행 기점인 박곡리로 가기 위해서는 마을버스를 타야 하는데 15분 걸린다. 동곡정류장 입구에 있는 개인택시(054-372-3066)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는 대구-부산 고속도로를 타고 청도TG에서 내려 밀양·청도 방면 25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했다가 곧바로 경주·운문 방면 20번 국도로 좌회전한다. 운문사 방향으로 동곡재를 지나 동곡리 사거리에서 직진한 후 남양·오봉 방면 919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 동창천을 건너 '대비사 6㎞'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해 들어가면 박곡리에 닿는다. 박곡리석조여래좌상을 지나 박곡저수지를 돌아가면 대비사앞 주차장이다.








대비사는 이무기의 전설이 남아 있다. 어느시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비사 작은 암자에 스님과 상좌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날 한방에서 잠을 자던 스님은 감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옆을 보니 상좌가 잠을 자고 있었는데 상좌의 몸을 만저 보니 몸이 얼음장 처럼 차가워 있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잠을 청하는데 그 다음날도 상좌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는게 아닌가. 다음날밤 스님은 잠자는 척 하면서 상좌의 동태를 살펴보니 상좌는 스님이 자는 것을 확인한후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와 옆에 눕고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저 들었다. 역시 몸이 차가운 상태였다. 다음날 밤이 되어 상좌는 다시 스님이 자는 것을 확인 한후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자는 척 하던 스님도 뒤따라 나와 상좌를 따라가니 상좌는 대비사 앞 연못에서 입고 있던 옷을 벗더니 연못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잠시 뒤 상좌의 몸은 이무기로 변해 물에서 수영을 하며 놀다가 다시 나와 옷을 입고는 산너머 골짜기인 이무기못안골에서 빗자루를 들고는 쓸고 있지를 않는가. 놀란 스님은 '네 이놈.상좌야. 네가 여기서 지금 무엇을 하느냐'하며 호통을 치니 상좌는 감짝놀라  이무기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며 '아 억울하다 천년을 기다렸는데. 오늘만 지나면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을 할 수 있었는데'하는 것이 아닌가. 이무기는 억울함에 꼬리로 뒷산의 바위를 힘껏치고는 뒤편의 호박소로 날아갔다는는 전설이 있는 대비사. 그 깨어진 바위가 억산의 깨진 바위가 되었다 한다.

대비사에는 오래된 연륜 만큼이나 부도밭에 고승대덕의 부도탑이 11기 남아 있다. 지금은 부도밭 뒷편의 자연석에 석가여래좌상을 새겨 놓았다.









대비사의 전신인 소작갑사터로 신라시대 신승에 의해 운문사와 함께 창건된 오갑사의 대비갑사 즉 소작갑사터다.
지금은 대추나무 밭으로 조성이 되어 있고 밭사이로 연꽃무늬대좌와 석등의 받침대 그리고 깨어진 기왓장등이 옛날의 영화를 대변해주는 것 같다.
소작갑사터에서 바라본 박곡리마을 전경. 그아래 저수지가 보이고 그 뒷 능선이 와불능선으로 명명을 하였다. 사진상으로는 안나오지만 왼쪽 끝 부분에 봉우리가 남양리에서는 부처산으로 불리고 있다 한다. 어째 이름이 맞아 들어간다는 느낌이...
소작갑사터 아래에 있는 골안저수지로 이곳이 혹 대비사의 이무기 전설이 전하는 그 연못이 아닐까.상좌로 변한 이무기가 밤마다 나와 연못에서 수영을 했다는 이야기의 대비지가 아닐까. 정면 중앙에 보이는 독립가옥 밑이 옛대비사 터인 소작갑사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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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는 560년경 신라 진흥왕21년에 북대암 금수동에서 수도를 하던 신승에 의해 창건 되었다. 그 후 608년 원광법사가 이절에 머물며 신라가 불교로서 중흥기를 맞이한다. 그 뒤 후삼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대작갑사인 운문사는 폐사가 된 것으로 보이며 보양국사가 중국에서 유학한 후 돌아오는 길에 서해용왕의 부탁으로 설법을 전하니 금색비단으로 된 가사 한 벌과 그의 아들인 이목을 딸려 보내 보양을 보필하게 하였다.

용왕이 이르길 ‘지금 삼국이 어지러워 불교를 신봉하는 임금이 없어니 그대가 작갑에 절을 중창하면 도적을 피할 수 있고 불교를 호위할 현명한 임금이 나와 삼국을 통일하게 될것이다“하니 운문사를 중창하게 대는데 보양이 운문사 북쪽 능선마루에 올라가 절터를 찾았는데 광체를 발하는 5층의 누런 전탑이 눈에 들어왔다. 내려와 찾아 보니 그 전탑을 찾을 길이 없어 다시 북대암에 올라가 보니 까치가 그 자리에서 쪼고 있어 이상하게 여겨 그곳을 파 보니 벽돌이 나왔다 한다. 벽돌을 쌓아 올리니 5층의 전탑이 되었는데 보양국사가 능선마루에서 대작갑사의 절터를 찾을 때 본 그 누런 황탑이었다. 보양국사는까치들의 도움으로 대작갑사의 절터를 찾았다하여 중창한 사찰을 작갑사라하였다. 그 후 까치들의 도움을 받은 은혜를 기리고자 작압전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작압사로 불렀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에게 보양국사가 운문사 인근의 왕건을 반대하는 잔당들을 소탕하는데 공헌을 하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왕건은 보양국사에게 전지500필과 운문선사란 사액을 하사한 후로 운문사로 바뀌었다한다. 현재의 작압은 1941년에 일제때 종무소 자리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인 관음전 옆으로 옮겨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1941년 이전 모습의 작압전은 전탑 형태를 유지하는 1층의 모습이었다 한다. 운문사 개보수를 할 때 나왔던 63cm 크기의 석불좌상과 전탑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만 할뿐 사용 용도가 불분명한 사천왕상 4기가 작압전에 함께 전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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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삼층석탑

보물 제678호
소재지: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운문사 경내

운문사 대웅보전 즉 비로전 앞의 쌍탑인 운문사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9세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원래 운문사의 탑은 금당 앞에 5층이 황탑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대웅전(비로전) 앞의 삼층석탑만 남아 있다. 대웅전 앞의 쌍탑인 삼층석탑은 운문사의 풍수지리와 관계가 있다. 운문사 사액을 보면 '호거산운문사'이며 왕건이 보양국사에게 고마움의 보답으로 내린 '운문선사'란 사액때문에  운문사로 개칭되었다 한다.
 

운문사는 여타 사찰에 비해 독특한 구조를 두고 있다.  보통 산을 등지고 가람배치를 하지만  운문사는 사찰건물과 험준한 산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상이다. 그리고 비로전인 현 대웅보전은 운문사의 행주형으로 배에 비유를 하고 있다. 배는 언제던지 침몰을 할 수 있어 그 비보로서 대웅전 앞에 삼층석탑인 쌍탑을 좌우로 배치하여 균형을 맞추었다 한다. 
    

대웅전 앞의 삼층석탑은 높이 5.4m의 쌍탑이며 상층기단 사면 안에 돌려 넣은 팔부중상의 모습은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탑을 보면 상부보다 하부가 다소 약해 보여 다소 무거운 감이 있지만 간결하면서 군더더기가 없으며 세련미와 날렵함이 한층 느껴지는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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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는 천년고찰 운문사가 자리하고 있다. 운문사는 어떤 곳이냐?. 557년 신라 진흥왕 18년에 한 신승이 현 북대암옆 금수동에서 3년 동안 수도 정진하여 도를 깨닫고 내려와 도반10여명의 도움을 받아 560년 신라 진흥왕 21년에 7년 동안 오작갑사를 창건하였다 한다, 오작갑사인 운문사는 대작갑사(현운문사), 가슬갑사, 천문갑사, 소작갑사(현 대비사.대비갑사라고도 함),  소보갑사와 함께 창건하였다는 설화를 가지고 있다. 현 대작갑사인 운문사를 중앙에 두고 동서 남북으로 사갑사를 배치하였다 한다. 600년인 신라 진평왕 22년에 원광국사가 주지로 와 중창을 하게 된다. 원광국사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서 주석을 하며 가슬갑사에서 화랑인 귀산과 추항에게 화랑도의 기본 정신인 세속오계를 전해주어 신라가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 큰 역활를 하였다. 이때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하여 국력을 키우고 군비증강을 위하여 불교와 손을 잡고 운문사 일원에 화랑도의 훈련장이 들어서게 된다. 운문사는 그만큼 전략적 요충지로서 화랑도의 병참기지 역활을 하였으며 운문면 일대에는 선사시대때 부터 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문화유적이 많이 출토 되는데 문헌상으로 남아 있는 마을의 흔적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부터만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이전의 기록들은 남아 있지 않다.이 모두 화랑도등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라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운문사의2차 중창은 보양국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한후 왕건을 도와 이 일대를 평정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왕건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보양국사에게 운문선사란 사액을 내리고 전지500결을 하사하였다. 그후 1105년에 원응국사 학일스님이 왕사로 책봉되고 운문사는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며 1277년 고려 충렬왕때 일연선사가 주지가 되어 삼국유사를 집필하게 되었다 한다. 그 후에도 여러번의 중창을 거듭하며 오늘날의 운문사로 거듭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현재의 대 가람으로 변모를 하였다.


운문사를 자세히 보면 여타 사찰과 다른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그 이유를 보면 운문사는  대웅전 비로전 금당등 모든 건물들이 운문산와 마주보고 있다. 즉 남쪽의 산을 향해 건립되었는데 풍수학적으로 보면 배산임수와는 정 반대이고 왼쪽은 복호산, 우측은 장군봉인 호거대로 운문사의 가람배치가 배산임수를 그대로 따라 운문산을 등지고  건물이 서 있었다면 현재의 운문사는 볼 수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한다. 그 이유는 운문사 옆으로 흐르는 약야계가 절 앞으로 곧장 빠져나가 재산을 모을 수 없고 운문산의 화기가 절을 덮쳐 비보 차원에서 다른 절과 반대방향인 가람배치를 하였다 한다. 

사실 운문사 경내를 들어설때 보통 일주문을 통과하는데 운문사는 일주문 대신 2층의 법종루 밑으로 통하면 된다.

영남알프스에 걸 터 앉은 절집 현판에는 모두 그 뒤 모산의 산명을 따라 이름을 붙인다. 가지산 아래 가지산석남사가 그러하고 통도사는 영축산통도사, 재약산표충사등 모든 사찰들이 그러하다. 영남알프스 운문사만은 유독 ‘운문산운문사’가 아닌 ‘호거산운문사’로 현판에 적혀 있어 어... 호구산이 어디지, 왜 운문산이 아니고 호거산으로 하였지 하며 궁금해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호거산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어느곳도 정답이 없으며 단지 현재의 우리도 옛 자료를 보며 추측을 할뿐이다. 먼저 운문사는 사찰이름에 나왔듯이 운문사란 이름이 먼저인지 아니면 운문산이 먼저인지 의문이 간다. 운문사란 937년인 태조20년에 후삼국통일을 도운 보양국사에게 왕건이 보답으로 '운문선사'란 사액과 전지500결을 내렸다한다. 그러면 운문산 보다 대작갑사로 불리던 운문사가 먼저 이름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이전부터 운문산으로 불리었을까하는 의구심도 해 본다..

호거산은 과연 어디를 두고 하는 말일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운문사로 들어서는 왼쪽으로는 바위가 절벽을 이루는 두 봉우리가 있다. 산세의 모양이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모습이라 통점과 염창등 신원마을에서는 복호산으로 부른다. 그리고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갑사를 창건 할때에도 신승이 북대암옆 금수동에서 도를 깨닫고 운문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이곳을 호거대, 호거산으로 보는 이가 많은 것 같다. 다른부류는 운문산 일대로 범봉과 억산을 포함한 이곳을 호거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또 하나는 운문사 입구 우측의 툭 튀어오른 암봉이 호거대로 보는 시각이 있다. 신원리에서는 등선바위, 등심바위, 등신바위등으로 불리는 바위로 운문사에서 이 암봉을 장군봉으로 부르고 있다. 청도 향토사학회장 경북향토 사학회장인 박윤재 선생도 운문사 옆 호거대와 그 인근을 호거산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호거산을 ‘호랑이고 걸터 앉아 있는 산’이 아닌 다른 해석을 내 놓은 것이다.

원광법사가 중국에 유학을 하였던 소주에도 똑 같은 이름의 호거산이 있는데 원광법사가 그 곳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신라로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원광법사는 운문사에 거주를 하면서 바위가 있는 호거대 일원을 호거산으로 지칭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그 사이의 계곡인 운문사를 가로자르는 큰골도 약야계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그래서 호거산은 원광법사가 중국의 소주 호거산에서 그 이름을 따 왔어며 위치는 호거대와 부근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인지 모르지만 장군평 뒤 우뚝 솟은 봉우리를 보호한다는 뜻인 호산으로 부르고 있다.




운문사의 경내로 들어서면 처음 반기는 것이 500년 된 반송이다. 가지를 밑으로 축처저 일명 처진소나무로 불린다. 봄에 25말의 막걸리를 마시는 나무로 유명하며 안내판에는 어떤 고승이 소나무 가지를 꺽어 심었다하며 높이는 6m,둘레는 3.5m로 나와 있다. 천연기념물제180호.




처진 소나무 옆으로는 만세루가 자리를 하고 있다. 정면7칸 측면4칸의 단층으로 된 팔작지붕이다. 약150평의 크기이며 목조건물이다. 넓은 우물마루에 천장은 천장은 산자를 노출시킨 연등 천장으로 기와명문에는 강희17년, 상량문에는 순치12년이라 명문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17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이 되며 용도는 대웅전과 마주 보고 있어 법회나 설법을 하던 장소로 보고 있다.


새로 건립된 대웅보전이다.
대웅보전의 내부 모습








대웅보전으로 조선 숙종 44년에 중건되었다.정면3칸 측면3칸으로 다포계 양식이며 마륵전이라고도 부른다. 운문사의 대웅보전 터는 행주행으로 전복되는 배모양이다. 그 지세를 누르기 위해 대웅보전 앞에 쌍탑인 삼층탑을 세워 놓았다. 보물제835호




삼층석탑 보물제678호



오백전안의 모습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7호

운문사 사천왕 석주 보물제318호





원응국사비 보물제316호.



이목소
보양국사가 중국 유학길에서 귀국을 할때 서해 용왕의 초청을 받고  용왕을 만나 설법등 해박한 지식으로 용왕을 감동시키니 용왕은 그에게 자신의 아들인 이목(離目)을 같이 데리고 가 스님을 도우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니 보양국사도 어쩔 수 없이 데리고 귀국울 한다. 이 후 용의 모습을 한 이목은 운문사 옆 깊은 소에서 지내며 보양국사를 도우며 지내게 되는데.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어 인근의 주민들이 기근에 시달리게 되자 스님이 이목을 찾아와 비를 내리게 하였다. 그러나 천제는 하늘의 율법을 어기고 비를 내리게 한 이목을 잡아오라고 사자를 보양국사에게 보내었다. 보양은 이목을 마루 밑에 숨기고 나서 이목을 내어 달라고 하는 사자에게 법당앞의 배나무를 가르키며 '이목 여기 있소' 하니 사자는 배나무에 벼락을 때리고는 하늘나라로 돌아 갔다 한다. 이 이야기는 일연스님이 집필한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며 용이 되지 못한 뱀을 두고 이무기 또는 꽝철이라 하는데 이무기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한다. 운문사 오백전 뒤 극락교 아래에 있는 이목소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재의 이목소는 잦은 사태로 인해 메워지고 사찰의 중창으로 메워져 볼품없는 작은 웅덩이에 불과하지만 보양국사가 부임하던 때에는 아마 둘레가 100여m나 되는 깊은 연못이었는 것 같다.

찾아가는길;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 운행. 3200원. 50분 소요. 언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구행 완행 버스를 타면 삼계리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출발. 운문사 정류소에서 하차하면 된다. 운문사 앞 버스정류소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후 2시30분, 5시25분(막차) 등에 있다. 40분 소요. 3000원.

자가용을 이용하려면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덕현삼거리에서 청도 방면으로 69번 지방도를 탄다. 운문령을 넘으면 삼계리 , 신원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운문사 매표소는 금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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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원산 아래 정확히 말하면 현성산 능선아래 두무골에 자리 잡은 가섭암지마애삼존불상은 보물 제530호로 지정 되어 있다. 바위굴의 한면에 새긴 삼존불로 바위면에 보주형의 홈을 파내어 광배인 동시에 빗물의 흐름을 자연적으로 유도하는 깔데기 역활을 하게 하였다. 삼존불의 중앙은 아미타여래불이며 오른편은 관음보살상과 왼쪽은 지장보살로 보이며. 편편한 바위면에 새겨진 삼존불상은 학창시절에 판화에 새겨 놓은 것 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양감의 효과는 거의 느껴 지지 않으며 본존불의 얼굴형태는 둔탁하며 토속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각진 어께와 부자연스러우며 부조화를 이룬 팔등 신체 부위로 보아  고려시대 부처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이곳은 자연 통풍이 잘 되는 지 900년의 세월동안 바위면에 이끼 또한 찾아 볼 수 없으며 습한 흔적 또한 볼 수 없었다. 금방 쪼개어 펼쳐진 바위면 처럼 붉은 빛이 감도는 가섭암지 마애삼존불에 생명이 느껴진다. 
이 삼존불 우측의 명문에 나타난 것 처럼 고려 예종6년인 1111년에 고려시대 작품이다.
 

찾아가는길
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거창행 버스는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40분까지 40분~1시간 간격으로 하루 13회 운행된다. 2시간40분 소요, 1만2800원. 거창터미널(시외:055-942-3601 시내:055-944-3720)에서 현성산 들머리인 위천면 상천리 금원산자연휴양림 입구까지는 오전 8시20분, 낮 12시, 오후 3시, 6시30분 등 하루 4회 운행하는 군내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1900원. 휴양림 입구에서 거창으로 가는 군내버스는 오후 1시5분, 4시15분, 7시10분에 있다. 거창발 부산행 버스는 오후 6시40분까지 40분~1시간 간격 운행.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88고속도로 거창IC에서 거창 방면으로 우회전해 절부사거리에서 함양 방면으로 좌회전, 국도 3호선을 탄다. 이어 마리삼거리에서 위천 방면으로 우회전한 후 장풍삼거리 장풍숲다리 앞에서 위천 수승대 금원산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위천면사무소 인근에서 금원산 방면으로 좌회전하면 정면에 바위투성이 산이 보이는데 바로 현성산이다. 5분이면 도착 가능한 휴양림매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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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의 원래 이름은 만덕사로 그래서 뒷산의 이름도 만덕산이 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때인 839년에 무염선사가 창건하였다하는데 1236년 백련결사란 이름으로 시작된 불교 개혁 운동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백련사를 불교계에서는 한 획을 긋는 일련의 개혁운동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백련결사란?.

"고려 고종 23년(1236년) 천태종의 요세(후일 효민국사로 추서됨) 스님이 당시 불교계의 타락을 염려하며 쇄신을 부르짖은 일종의 신앙 정화운동이다. 동시대 인물인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수선사(지금의 송광사)에서 일으킨 정혜결사(또는 수선결사)와 함께 고려 후기 양대 신앙 결사운동이다. 지눌의 정혜결사가 지해력(知解力)을 갖춘 자만을 수행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지식인 귀족 계층에 다가섰던 것과는 달리 요세의 백련결사는 염불을 통한 참회와 해탈, 구생정토(求生淨土)를 표방하며 비록 많은 죄를 지은 한낱 범부일지라도 수행하여 해탈할 수 있다고 강조, 서민과 귀족 모두에게 호응을 얻었다. 요세 스님 이후 백련사에서는 8명의 국사가 배출됐을 정도로 백련결사의 힘은 컸고, 천태종이 고려 후기 불교계의 중심으로 나아가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승렬기자-

그후 고려말 왜구에 의해 사찰은 불에 타고 폐찰이 되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행오선사에 의해 중창이 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그후 강진으로 유배를 온 다산 정약용은  백련사의 혜장선사를 만나기 위해 올랐다는 백련사... 




백련사의 만경루


대웅전은 현재 보수 공사를 진행 중이라 둘러볼 수가 없었다.


백련사 사적비는 보물 제1396호로 지정 되어 있으며 대웅전 왼쪽 맨 끝에 자리를 잡고 있다.

백련사 동백군락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백련사 원구도형의 부도는 고려시대인 14세기로 추정을 하는데 전라남도 유형 문화재 제223호로 지정 되어 있다. 부도에 당호 또는 명문으로 남겨진게 없어 누구의 부도 탑인지 알 수 없다. 탑신은 원구형이며 여타 부도탑과 특이한 점은 탑신 당산쪽에 연꽃무늬와 연주문띠를 넣었다. 동백림 숲 속 부도밭에 남아 있다. 





교통편
부산에서 남해고속도로를 이용, 순천IC에서 내린 후 시내를 통과해 순천만 방향으로 가다가 2번 국도를 만나면 보성 벌교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10분 후 삼거리에서 다시 보성 벌교 방향으로 좌회전, 계속 2번 국도를 타고 강진읍까지 간다. 강진읍 평동교차로 램프에서 다산초당 안내판을 보면서 우측으로 내려선 후 해남 진도 방향으로 좌회전, 18번 국도를 탄다. 1.6㎞쯤 가서 만나는 호산교차로에서 다산초당 백련사 방향으로 좌회전, 1㎞가량 가다가 기룡교를 지나고 강진만의 철새 전망대 그리고 백련사 입구 만덕리 신평마을,  다산초당 입구인 덕남면 만덕리 귤동마을이다. 강진콜택시(061-434-6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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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봉암은 통영의 벽방산 아래에 위치를 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벽방산과 머리를 맞대고 있는 천개산 바위 아래에 제비둥지처럼 위치하며 벽방산 정상을 올려다 보고 있다.  안정사의 일주문에는 벽방산이 아닌 벽발산 안정사로 불려지고 있지만 언제 부터인가 벽방산으로불려지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은봉암은 신라 성덕왕3년에 징파화상에 의해 창건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지만 지금은 변변한 문화재 하나 없는 볼품없는 사찰로 변하고 말았다. 은봉암은 벽방팔경의 세번째인 은봉성석을 보유하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로 많은  수도승을 배출하였다. 은봉성석은 월래는 세개가 서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한개가 남아 있다. 그 연유를 보면
세개의 성석이있을때 혜월선사와 종열선사가 수도하여 미래불로 성불을 하였을 때 한개씩 무너졌고 현재 남아 있는 성석한개도 용맹정진하여 득도의 경지에 이를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한다. 은봉암은 성철스님이 한때 머물려 동안거 하안거를 하였을 정도로 유서가 있는 사찰로 미래불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원래 세개가 서 있었다는 성석, 혜월,종파 두 선사가 나오면서 무너지고 또 한분의 성인을 기다리는 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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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암

(여느 절집과 달리 두개의 큰 바위가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다. 오봉산 정 상 바로 옆에 위치를 하고 있어 식수가 사실은 귀할 것 같다. 그래서 식수는 현재 아래로 관로를 뚫어 지하수를 올려 사용을 하고 있다 한다. )  


 



신라시대 문무왕때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낙동정맥이 오봉산을 살짝 비껴가는 형상으로 신라시대 때에는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어 산성을 쌓았다.
 이름하여 부산성, 또는 주사산성으로 창건당시부터 이절에서 죽어 나간 사람이 없다하여 불사처라 하였다 한다. 그런데 지금 주사암을 방문을 해 보니 천촌리로 내려서는 등산로 입구에 근래에 세운 부도탑 한기를 볼 수 있는데 이제 불사처라는 기록은 깨어 졌는지 궁금하다.
걸어서 주사암에 가 보면 오봉산 정상에 위치를 하고 있다. 즉 다섯봉우리인 주봉과 2봉 사이에 주사암이 위치를 하고 있는데 신평리에서 보면은 오봉산 정상에서 아화리로 내려서는 능선을 만삭의 여인내가 한손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한다.
그리고 부산성과 함께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부산성 축성 당시 의상대사는 예언을 하기를 부산성 안에다 이 주사암을 두면 신라는 언제까지라도 망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는데...산성은 주사암을 비껴가 축성을 하였다 한다.
그 예언 후 몇백년 뒤에 신라는 백제에 의해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배풀다 죽음을 당하고 의상대사의 예언대로 신라는 망하는데 예언을 어찌 받아 들여야 할지.

 

그리고 주사암의 창건설화에 대해서는 현 주사암이 있는 위치 뒷면인 북쪽으로는 바위굴이 있었는 것 같다.
그 굴속에 난승이 수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여인네 알기를 돌 같이 아는지라, 아무리 빼어난 미녀가 와도 자신의 마음을 빼앗지 못할 것이며 수도를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 호언장담을 하였다한다.
그의 말을 들은 귀신은 노승의 마음을 시험해 볼 욕심으로 반월성의 궁궐에서 궁녀를 잡아다가 노승 옆에 두기를 반복하게 되었다. 밤마다 궁녀들이 나갔다 들어오니 반월성의 왕에게 까지 이야기가 귀에 들어가고 임금은 괘씸하게 여겨 궁녀에게 붉은 모래 즉 주사를 주며 오늘밤에도 그런일이 생기면 동굴 주위에 붉은 모래를 뿌려라는 명을 내렸다.

(바위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주사암의  모습입니다. 산사면에 계단을 내어 건물을 배치하였습니다.)

궁녀가 없어진 것을 안 임금은 모든 병력을 풀어 찾아보니 오봉산 정상 부근에서 붉은 모래를 찾게 되어 뒤에 큰 동굴이 있는지라 병력을 동원하여 노승을 잡을려 하니 그 노승의 주변에는 신병들이 보호를 하고 있었다.
왕은 부처님이 보호를 하는 분으로 여겨 궁궐로 모셔 나라의 스승으로 삼았다 한다.
노승이 수도를 하였던 그 굴을 밀어 내고 그 자리에 주사암 사찰을 창건하였다 하며 1400년을 이어온 주사암은 가람의 배치 또한 다른 절과 달리 좁은 면적으로 인해 한일(一)자 가람을 하고 있다.
보통 사찰은 대웅전을 중심에 모시고 좌우로 가람을 배치하는 아(亞)자 형태이지만 주사암은 영산전을 제일 앞에 두고 가람을 배치하여 지형을 적절히 이용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도 주사암을 찾아 들어 가는 길은 여느 절집과 달리 일주문이 없다. 일주문은 두 개의 큰 바위가 일주문을 대신하고 그 사이로 들어서면 주사암 절집과 만날 수 있다.

 

주사암 옆에는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을 빼 놓을 수 없다. 수백명이 거뜬이 쉴 수 있는 마당바위가 있어 지맥석이라 불리는 이 바위는 보리를 늘어 술을 빚어 부하들과 나누어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지금도 천촌리 쪽으로 바라보는 바위의 끝에 나가보면 간담이 서늘할 정도이다.

 

입구에서 본 주사암입니다. 화장실은 아주 멀리 두고 있습니다. 좌측의 건물이 정낭입니다.

건물이 3동 길게 배치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안쪽의 석등이 보이는 곳이 영산전입니다.




영산전 위의 삼성각으로 주사암에서 가장 위쪽으로 배치를 하였습니다.

삼성각을 내려 오면서 본 주사암입니다. 앞에 영산정을 볼 수 있습니다. 

천촌리 방향으로 내려 보고 있는 범종각입니다.




주사암 영산전입니다. 주사암의 대웅전으로 이절의 중심건물 입니다. 좁은 지역의 층계식 터에더 조성을 하여 규모면에서는 아주 적은 것 같이 소박합니다. 창건연대는 조선시대 후기로 보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양식을 하고 있습니다. 

부속건물들

밑에 보이는 건물이 공양간입니다.

바위아래 자리 잡은 공양간입니다. 천촌리에 내려가는 길은 공양간 아래로 나 있습니다.

아래에서 본 주사암 모습입니다. 바위를 축대로 쌓은 것으로 봐서 아주 급한 산사면에 조성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사암 창건 이래 죽어 나간 사람이 없어 불사처라 하는데 근래에 조성 된 것으로 보이는 부도탑입니다.

주사암 옆의 마당 바위로 김유신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옵니다. 일명 지맥석으로 김유신이 마당바위에 보리를 늘어 술을 빚어 부하들과 나누어 마셨다합니다. 수백명은 거뜬히 앉을 수 있는 넓이 입니다.

만삭의 여인이 배를 쓰다듬고 있는 모습의 오봉산입니다. 신평리에서 찍은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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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산내면 심원사

심원사를 찾아가는 길은 은둔의 세계를 찾아가는 길이다.
초행길은 길 찾기가 쉽지 않은 심원사길.

산내면에서는 은둔지의 수행 처가 따로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만큼 오지의 산골이다. 가도가도 산이요, 머리를 들어도 하늘 밖에 볼 수 없다는 산내면.

그 안 골짜기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심원사는 천년고찰의 이름이란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변변한 당우하나 없는 그저 수더분한 사찰이다.

 


오가는 사람 또한 만날 수 없지만 심원사를 찾는 길손도 보기 힘들다. 내가 찾은 그날도 심원사는 주인은 간데없고 대웅전의 부처님만 어둠을 밝히며 반길 뿐이다. 봄볕을 째고 있는 노승마냥 심원사는 한가로이 졸고 있다.

심천동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심원사의 뒷 골짜기는 도수골로 부른다. 그 깊은 골짜기의 정점은 일부리에서는 애써 집뒷 산에 이름은 무슨 이름. 그저 부르기 쉬운게 좋은 것이라고 도수골 만디라 부른다하니 바라보는 쪽에서 그 이름을 달리한다. 삼계리에서는 수리덤 계곡의 정점으로 아주 오랜 옛날에 이곳에서 하늘을 비행하는 수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그런 것 갔다. 일부리, 삼계리, 대현리에서 보는 서담골봉은 삼면이 피라미드 처럼 솟았고 중간중간 직립한 암벽에 험준한 산세까지 가지고 있어 수리의 서식지로 적합하지 않았나 쉽다.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하는 지형도에는 서담골봉이라 표기가 되어 있다. 누군가 수리덤의 오기가 아닌가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심원사는 사실 들어오는 입구가 북쪽 방향 한곳이다. 심원지 우측의 방매산과 그 아래 안부가 삼계리재에서 숲고개를 있는 구름재이다. 구름재에서 문복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오르면 만나는 삼밭맥이(거산마을에서는 그래 부름)에서 우측으로 서담골봉까지 이어진다. 능선은 내려않는데 그 언저리에 삼계리재를 만들었다. 다시 옹강산으로 이어져 심원사를 둘러 싸고 있어 그야말로 연꽃속의 꽃술에 해당하며 부처님을 모시는 도량으로는 최고의 자리인 것 같다.

심원사의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심원사에서 추측하건데 신라 선덕여왕 2년에 일지선사가 창건을 하였다 하는데 그에 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애석할 따름이다. 남아 있는 기록은 1913년 화준대사가 중창을 하였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심원사를 이루는 건물은 정면3칸, 측면 2칸에다 팔작지붕과 공포를 올린 형태로 뒤의 산과 잘 어울리는 단아한 모습을 한 대웅전과 제일선원이란 편액이 걸린 당우 그리고 스님들의 처소가 전부이다. 한때는 심원사 절의 규모가 엄청 낮다 한다. 심천동 마을 방매산 아래 볼록 솟은 봉우리가 마을어른들은 “중지뿔대”라 부른다 한다. 그 당시 스님들이 농사를 짓고 밥을 하기 위해 풀을 베고 했다하니 심원사 절의 규모가 엄청난 것을 알 수 있다. 운문사와 통도사를 말사로 거닐 정도의 대가람이였던 심원사, 지금은 불국사의 말사이다. 현재의 심원사는 이제 봄의 기지게를 켜듯이 불사의 흔적을 볼 수가 있다. 대웅전 옆 밭때기에다 새로운 절집이 들어서고 있고 그리고 심원사 스님들이 천년사찰의 흔적을 되찾고자 계곡건너 절터의 흔적을 찾아 나선 것이다. 금당터도 찾아내고 절 뒤로는 암자터와 시왕상도 찾았다 한다. 그 흔한 문화재도 하나 없는 심원사는 그 나름대로 매력을 가지고 있으며 깊은 골짜기인 만큼 자랑할 만한 맑은 물을 가지고 있어 찾는 이의 목을 축여 줄 것이다.

교통편
부산 노포동터미널에서 경주행 버스를 탄다. 새벽 5시30분부터 10분 간격 운행. 4500원, 50분 소요. 경주버스터미널에서 산내까지 간 후 일부리행 352번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산내행 350번 버스는 오전 6시, 6시30분, 7시15분 등 하루 28회 운행한다. 산내에서 일부리행 버스는 오전의 경우 6시20분과 7시40분에 출발하는 2대밖에 없다. 이 버스를 놓치면 산내 개인택시(054-751-5955)를 이용한다. 심천마을까지 1만2000원 안팎. 건천ic에서 내려 우측 산내청도방면으로 우회전하면 단석산 입구인 우중골도 지나면 산내면을 알리는 표지판과 당고개(땅고개)이다. 산내면 소재지인 산내사거리에서 청도, 운문댐 방향으로 우회전 하면 20번지방도  '외칠리·일부리' 표지판을 보고 좌측으로 진입, 다리를 건넌 후 좌회전하면 외칠리에 닿는다. 다시 우측으로 상록병원 일부리 방향으로 10분쯤 가면 심천마을에 닿는다.

심원사의 절 앞 다리를 건너면 벗꽃나무가 도열해 서 있다.


심원사 대웅전으로 정면3칸, 측면2칸으로 팔작지붕과 공포를 올린 형태이다.




제일선원으로 지금은 운영을 하지 않으며


조용하고 한적하고 깔끔한 절임을 알 수 있다.

대웅전 옆 밭때기에 불사를 일으켜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부도밭으로 심원사 입구의 다리를 건너기 전에 우측 심원재로 오르는 입구에 서 있다. 1700년대에 조성된 부도의 흔적도 찾을 수 있다. 


심원사 앞의 심원지로 절을 끼고 있어 운치를 더해 준다. 저수지 끝 부분에 희게 보이는 점이 심원사이다.


심원사 옛 터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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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산 안국사)
안국사 하면 대학시절 산악부 산행 때가 생각난다. 약25년전쯤 일이지 쉽다. 지금은 안국사가 적상호의 수몰 때문에 현 위치로 올라와 새로 복원을 하였지만 그때는 지금의 적상호 자리에 안국사가 위치하고 있었다. 겨울에는 무주 지방에 많은 눈으로 적설량이 엄청나다. 그러니까 적상산 산행을 겨울방학때 올랐는데 지금이야 적상호로 오르는 드라이브 코스를 많이 이용하지만 그때 한겨울에는 신도는 물론 절에 거주하는 스님도 보기 힘든 오지중에 오지의 사찰이였다. 그 추운겨울날에 장도바위를 통해 올랐는데 엄청난 적설량으로 텐트 칠 분위기도 아니고 안국사로 찾아 들어 갔다. 안국사에 들어가니 동자승과 스님한분만 기거를 하고 있었다. 산행을 와서 하루 자고 가서면 하고 자초지종 설명을 하니 허락을 해 주었다. 그때는 극락전 아래 조금 떨어진 곳에 묵을 방이 있었는데 아무도 기거하는 분이 없어 냉골이라 동자승이 장작을 가지고 와 군불을 때 주며 나가기에 그때까지도 방이 안 뜨겁고 냉방이라 장작을 가지고 와 더 넣고 뜨끈뜨끈하게 하고 잠을 청했다. 아뿔사, 동자승이 넣어주고 간게 시간이 흘러야 구들장이 달아올라 뜨거운데 그 기에다 장작을 더 넣었서니, 밤에 뜨겁다 못해 살이 탈 지경이였다. 아랫목은 비워두고 모두 사각지대인 구들장이 없는 곳으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랫목을 보고 놀래 기절초퐁 할 뻔 하였다. 장판이 타가지고 새까만게 아닌가. 우리는 미안한 마음에 가지고 있던 양식과 부식(그때까지만해는 안국사에는 도로가 없어 몇시간을 걸어 다녔고 길이 험해 스님들도 오길 꺼리는 사찰이라 하였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야 밑의 마을에서도 사람이 올라 온다하니... 그래서 쌀, 부식도 귀한 시절이었다) 을 부처님께 공양을 하고 미안한 마음에 뒤도 안돌아 보고 하산을 했는데...

 


하산하는 오솔길이 지금은 도로로 변해 그때의 운치는 사라지고 북적이는 관광객으로 그때가 그리운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적상산성내의 유일한 고찰인 안국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이다. 고려 충렬왕 3년(1277)에 월인(月印)대화상에 의해 창건이 되었다. 조선초기에 와서 무학대사가 중창을 하였고 광해군 5년(1613)과 고종 1년(1864)에 중수를 하였다. 광해군 6년(1614) 적상산성 내에 사각이 설치되고, 인조 19년(1641)에 선운각을 설치하였다. 조선왕조 실록과 왕의 족보인 선원록이 적상산 사고에 봉안되었다. 적상산 사고를 방비하기 위해 호국사를 짓고 전부터 있던 안국사와 함께 승병들의 숙소로 사용하여 안국사로 불리워 졌다. 현재의 안국사는 양수발전소 상부댐인 적상호로 인해 수몰이 되어 옛 호국사지 자리로 옮겨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이 되었다. 안국사란 절이름도 여기에 연유하고 있다. 현재 안국사에는 보물제1267호 안국사 영산회 괘불탱과 유형문화재 42호인 극락전, 제85호 호국사비, 적상산성(사적제146호)과 적상산사고(기념물제88호)가 있다

안국사 극락전

안국사 극락전(유형문화재 제42호):안국사의 본전으로 서방극락정토와 아미타여래와 관세움보살, 대세지보살을 봉안 하였어며 무량수전이라고도 하였다. 다포계의 건물로 맞배지붕으로 조성한 특이한 형태의 건물로 앞면과 옆면에 각 3칸씩으로 구성되었다. 학이 단청을 하다 날아 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안국사 영산회 괘불탱(보물제1267호):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불교 행사를 할때 걸어두는 그림으로 법회의 성격, 의식의 종류에 따라 맞는 것을 봉안한다. 이 그림은 영조4년 안국사에서 기우재를 지낼때 조성되었다. 조선영조4년(1728)에 천진스님과 의견스님에 의해 제작되었다. 가로 7.5m 세로10.75m이다. 중앙에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시고 좌우로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대세제보살과 다보여래, 아미타여래등 여섯분을 협시보살로 모신 석가 칠존도 형식의 영산회상도이다.

 

보살의 둥그런 얼굴과 밝은 표정에서 편안함이 느껴지며, 석가모니뒤에 광채를 금색으로 채색하고 여백에 구름무늬를 넣은 점이 이채롭다.

안국사에는 성보박물관이 있다.
여러나라에서 수집한 불상이 전시 되어 있어 들러 볼 것을 권한다.

안국사 063-322-6162







극락전 내부의 모습이 화려하다. 학이 단청을 칠하다 날아 갔다는 전설이 있다.





지장전의 모습입니다.

항상 안국사는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는 사찰이 되었습니다.



안국사 천불전 내부입니다.

승보 박물관안의 불상입니다.

승보 박물관 내부입니다.


범종의 문양


안국사의 일주문으로 많은 차량과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입니다.

안국사 부도탑:안국사 역대 스님들의 사리을 봉안한 부도탑으로 적상산 사고지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청운당 사리탑과 봉골탑은 숙종43년(1717), 월인대사 영골탑은 영조 26년(1750) 보운당 사정탑은 영조 29년(1753)에 각각 세워진 것이며 석종형으로 조선후기의 부도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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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무안면 홍제사. 땀흘리는 일이 없어면  좋을 것 같은 땀흘리는 표충비와 홍제사

*표충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홍제사


 



일명 땀흘리는 이 비석은 임진왜란때 승려로서 국난을 극복한 사명당 송운대사(1544-1610)의 높은 뜻을 기린 비석으로 영조18년인 1742년에 대사의 5대 법손인 남붕선사가 경산에서 가져온 옥돌로 건립을 하였다. 국가의 길흉사를 날씨에 관계 없이 땀을 흘려 사전에 미리 알려주는 비석으로 사명대사의 나라사랑을 볼 수 있다. 선조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스승 서산대사의 뒤를 이어 승군을 통솔하였다. 임진왜란 후 선조37년에는 국서를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꾸가와 이에야스와 담판하여 포로로 잡혀간 백성 3500명을 본국의로 송환을 하였다.


표충비 보호를 위해 너무 칸막이를 한 보호각에 틈이 좁아 비문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한때 이곳에는 서산, 기허, 사명대사 세분의 영정을 모신 표충사당이 있었으나 재약산 아래 표충사로 옯기고 현재 삼비문안에는 1742년 남봉선사가 조성한 표충비와 향나무,표충비를 보호하는 수호 사찰 홍제사만 남아 있다.

뒤에서 본 표충비각으로 우측에 수령 300년 된 향나무를 볼 수 있다.

 

홍제사는 사명대사의 표충비각과 표충사당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수호사찰로 창건 연대 또한 그때로 보고있다.



표충각안의 사명대사 영정

표충각안의 박정희 전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내외분의 영정도 걸려 있다.

 

홍제사와 표충비는 밀양면 소재지 편편한 평지에 민가와 함께 자리를 잡고 있어 지나가다 들러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홍제사로 들어서면 먼저 우측에 근래에 조성한 삼층 석탑과 좌측으로는 범종각을 만날 수 있습니다. 표충비가 있는 표충비각은 우측으로 따로 중삼문을 두고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우측으로 돌면 표충각과 향나무, 땀흘리는 비석인 표충비를 볼 수 있습니다.

 

홍제사 입구입니다. 표충비각 앞인 입구에는 넓은 주차장과 쉼터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무안 고라리에서 태어나 직지사로 출가를 하신 사명대사의 영정과 땀흘리는 비석을 보시고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  땀흘리는 비석에  그분의 나라사랑의 마음을 읽어 봤서면 합니다. 무안은 이곳 말고도 홍제사 좌측 중산 표지판을 따라가면 고라리란 마을이 나옵니다. 현재 고라리는 사명대사 출생지인 생가터와 그 분의 기념관을 조성하여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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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지 동.서 삼층석탑
보물제72.73호인 단속사지 삼층석탑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 웅석봉에서 흘러내려온  두갈래의 능선 골짜기 안에 터를 잡은 천년 고찰 터이다. 단속사지 법당자리 앞에 동서로 세워졌던 통일신라시대의 쌍탑으로 이중기단으로 되어 있다. 4각의 아래 기단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어며 균형을 이룬 지붕돌 안에는 다섯개의 주름이 잡혀 있다.동탑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나 서탑은 파손상태가 심하며 1967년 해체시 서탑 아래 몸돌에서 부처님 사리를 보관한 것으로 보이는둥근모양의 사리공이 출토되었다. 9c기 작품으로 보이며 백운산과 석대산을 두고 서로 솟아 있다.


 


찾아가는길: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대진고속도로 단성IC서 지리산 방향 우회전~목화시배유지 지나~소남리 버리고 지리산 방향~남사고가마을 지나~청계 입석 1001번 지방도 우회전(단속사지 동·서 3층석탑)~호암교 다리 건너~산청 청계 3번 직진~윗진자마을(경로당)~다불민족학교~탑동 순으로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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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남산 신선암 마애불)신선암 마애불에서 기도하는 보살님

 

경주 남산은 옆의 고위산과 통 들어 남산으로 불린다. 억겁의 세월동안 깍이고 잘려나간 산사면이 바위가 되고 그 바위면을 신라인들은 가만히 두지를 못하였다. 그 바위에 신라인들은 한결 같이 바위 마다 신라인의 마음을 새겨 넣은 마애불을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1.4m 높이인 신선암 마애불이다.
보물199호로 지정 되었으며 작은 감실을 만들어 한발은 자연스럽게 내리고 다른 다리는 반가부좌를 한후 연화대에 않아 동해 쪽으로 바라보며 신라의 흥망성쇄를 생각하였을까?. 신라때는 이자리에도 작은 암자가 있었을 것이며 바위면에다 홈을 만들고 지붕을 덮어 마애불을 보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작은 암자도 그리고 마애불을 보호하였던 전각도 사라지고 없지만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만은 1000년 전에 그 모습 그대로 지켜오고 있다. 마애불을 찾은 날 마침 보살네분이 마애불에 올라와 지극정성으로 소원을 빌고 또 빌고 하는 모습이 천년전 누군가가 여기에 올라와 소원을 빌었던 그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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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금정구여행)금정산 원효암의 원효석대와 의상대. 범어사 원효암에는 특이하게 원효와 의상이 수도한 바위가 있다네요..

흔히 범어사를 영남의 3대 사찰이라 부른다.   양산 통도사, 가야산 해인사 그리고 범어사를 두고 하는 말이며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 되었다 한다. 그 범어사를 등지고 서서 원효암이란 작은 암자가 초야에 묻혀 있다.  바람 흔적만 찾아 드는 곳에  있으며 미륵사와 함께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 원효암은 아주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범어3경의 원효석대와 금정8경의 의상망해가 함께 위치를 하고 있어 흔히 의상이 있는 곳에 원효가 있고 원효가 있는 곳에 의상이 있다는 말을 증명이라 하듯이 원효석대와 의상망해는 서로 이웃집 처럼 한능선에 100여m를  두고 자리 잡고 있다.

 


 


크게 부르면 서로 대화가 가능한 위치에 있으며 서로 누구의 도력이 더 센지 내기를 하여도 될 것 같은 거리이다. 이름 그대로 의상망해에서 바라보면 멀리는 광안리 앞바다와 광안대교가 보이며 좌측으로 해동수원지와 그 주변 일대가 조망이 된다. 그리고 일반인도 쉽게 오를 수 있는 곳에 위치를 하고 있다. 원효석대는 원효암 뒷편에 자리를 잡고 있는데 상어의 이빨 처럼 솟은 여러개의 바위로 되어 있어 밑에서 쳐다 보면 위압감이 든다. 실제로 산죽지대를 헤치고 오르면 바위밑에서 보았듯이 원효가 앉아 수도 하였을 법한 편편한 바위에는 쉽게 오를 수가 없다. 그리고 그위에서 쳐다보면 금정산 정상인 고당봉을 위시하여 금정산에서 제일 먼저 새벽을 알렸다는 계명봉과 계명암이 눈에 들어오고 우측으로는 광안리 앞바다 까지 보여 그야말로 의상대와 원효대는 두 대사가 서로 수도를 하여 도를 터득하지 않았나 쉽다. 범어사에서 원효암 찾아가는 길은 20여분 발품을 팔아야만 오를 수 있다. 범어사에서 북문으로 오르는 입구에서 좌측으로 난 길이며 너덜로 된 계곡을 건너면서 시작된다. 원효봉의 산비탈을 타고 오르면 능선 갈림길에 올라서고 좌측은 의상대로 가고 원효암은 직진 또는 우측 산길를 따라가면 된다.  초라한 일주문이 어느 양반댁 대문 처럼 솟아 있고 지금은 세월의 흔적 때문인지 허물어 지기 직전이 되어 이곳이 그 유명한 원효대사의 수도처인가 싶을 정도로 의구심이 든다.  
















원효암 동편 삼층 석탑
유형문화재 제11호로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524번지 원효암에 소재하고 있다.
신라말에서 고려초의 3층석탑으로 추정되며 원효암 들어서는 입구에 큰 지대석을 기단삼아 3층의 탑신부만 남아 있다. 탑의 형식으로 미루어 이중의 기단위에 삼층의 탑신을 올리고 그 위에 상륜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기단부와 상륜부는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그후에 석탑의 부재를 수습하여  기단없이 세웠다.










원효암 서편 삼층석탑


























원효석대로 이 바위위에 올라서면 계명봉과 그아래 계명암 그리고 범어사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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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 안강 금곡사 원광법사 부도. 오지속의 사찰인 금곡사에 원광법사부도가 있어요?

 

흔히 깊은 산속을 헤매다(?) 보면 반갑다 못해 살았다는 안도감을 주는 절집을 간혹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산행중 만나는 사찰은 산꾼들에게는 하나의 구세주이며 타 종교인도 한번쯤 들러 반가움을 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까운 경주 인근에서는 만나기 힘든 이런 곳도 있나 할 정도로 한적하다 못해 적막감이 감도는 곳이 한곳 있다.
신도들의 왕래로 뻔질나게 닳아빠진 일주문의 문턱을 부산인근에서는 쉽게 만날수 있고 그래서 대웅전도 모양새를 갖추고 절다운 모습을  한 많은 사찰도 있지만 왠지 나 같은 문외한은 믿음이 가지 않는다. 사찰은 조용하면서도 한적하고 사람들이 보기 힘든 곳에 있어야 절의 참맛을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그런 절 다운 모습을 충족시켜 주는 곳이 있어 소개를 할까 한다.
경주시 안강읍 두류리 인근의 화산골 골짜기 안에 터를 잡은 금곡사는  천년의 세월은 훌쩍 뛰어 넘은 고찰이지만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최근에 와서 중건 불사를 일으켜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화산골 안의 금곡사는 원광법사가 처음 창건한 사찰로 화랑도에게 세속오계를 전수하여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초석이 되었으며 황룡사에서 입적한 원광법사가 이곳 금곡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부도탑으로 남아 있다 하니 그 연유가 궁금 할 따름이다.
임진왜란때 가람은 흔적도 없이 소실되고 최초의 부도탑인 원광법사의 부도탑도 파괴되어 화산골에 묻혀 있다 최근 발굴되어 정교하게 짜 맞추어져 하나의 부도탑으로 남아 있다. 화산골 금곡사 밑 사거리 갈림길에는 달랑 민가만 한채 있을 뿐이며 여기서 동서남북으로 민가를 만날 수 있는 곳이 10리를 산을 넘어 가야 만날 수 있어 그 만큼  오지중의 오지에 자리 잡았다. 그래서 인지 금곡사 앞까지는 아직도 비포장도로로 남아 있으며 밑의 화산골 마을 까지는 1시간10분을 걸어 가야만 마을을 만날 수 있어 찾는 신도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아 마음을 씻기에는 아주 좋은 절집인 것 같다.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이라 해보아야 초라한 모양의 기와 건물 한동이며 요사체는 가건물의 수준을 벗어 나지 못한  모습이 더욱 정감이 간다. 금곡산은 산 높이에 비해 깊은 계곡을 거느리고 있고 수량이 풍부하여 큰 저수지인 화산곡지를 가지고 있다.
가는 교통편:포항-영천간 국도를 이용하여 도덕산 옥산서원 입구를 지나면 도로 앞쪽으로 하곡지(딱실못) 재방이 보인다 이곳에서 도로 오른쪽으로 "삼기산 금곡사"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굴다리 지하도를 통과하면 현제 조성중인 두류공단을 지나고 화산골 마을을 지나고 화산곡지까지는 쉽게 접근할 수 있다.그 이후 임도급 비포장길이 금곡사 까지 이어진다.



  





























오지속의 사찰인 금곡사로 이어지는 주변풍경과 화산곡지 그리고 주변의 계곡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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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안강 금곡사 원광법사 부도. 우리나라 최초의 부도탑인 원광법사 부도.

 

이 부도탑은 원광법사의 부도탑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부도탑으로 알려져 있다.
경주 안강의 삼기산 금곡사에 있는 원광법사의 부도탑은 임진왜란 때 금곡사의 사찰은 불타고 부도탑은 파괴되면서 폐사가 되었다. 그후 작은 암자로 거듭나지만 부서진 부도탑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이 되었다. 탑의 몸돌에다 정교하게 짜 맞추어 놓은 감실속 부처님의 모습이 1400년이 지난 현재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있다.

 



원광법사(553~637)는 신라의 승려로 화랑도의 세속오계 만들었다는 사실은 익히 모두다 알고 있다. 
서라벌에서 태어난  원광의 속성은 박씨 또는 설씨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금곡사에서 수도를 하였으며 589년 중국의 진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한다. 진나라에서도 전도와 교화로 이름을 떨쳐 당속고승전에 그의 전기가 실렸으며 11년 후인 600년에 유학을 마치고 본국인 신라에 돌아오니 모든 백성과 함께 진평왕도 성인인 원광법사를 성대히 맞아 주었다 한다. 귀국후 운문산(현가지산) 아래 삼계리로 추정하는 가슬갑사에 머물며 귀산과  추항에게 화랑도의 기본 정신인 세속오계를 내려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하는데 하나의 밑걸음이 되도록 하였다.
608년 왕의 요청에 의해 수나라에 걸사표를 지었으며 637년 입적을 황룡사에서 하였다 하며 명활산에서 장사를 지낸후 그의 부도탑은 삼기산 금곡사에 모셨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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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곡성여행)곡성 동악산 도림사 여행.도승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숲을 이루었다는 곡성 동악산 도림사

 

곡성의 진산 동악산은 형제봉과 대장봉 그리고 신선대를 연결한 능선 아래에 흰 암반을 이루는 도림사 계곡인 청류동 계곡이 흐른다. 그래서 인지 예로 부터 이곳 도림사 부근인 청류동 계곡에 시인 묵객들이 들어와 글을 남기고 그것도 부족해 암반에다 흔적을 남겼다. 계곡 옆 이곳 도림사에도 원효대사 서산대사 사명대사 처익대사등 많은 선승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도인숲을 이루었다하여 그 이름 또한 도림사라 하니 사찰의 이름 또한 재미가 있다.

 



도림사는 660년 무열왕 7년에 원효대사가 구례의 화엄사에서 옮겨와 지었다고 하는 데 그해가 백제가 멸망을 하던 때였다.
도선국사가 헌강왕 2년인 876년에 다시 한번 사세를 키우고 고려때에는 지환대사가 , 그후에도 2차례나 더 중창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때는 신덕사로 불렸다는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였던 신덕왕후가 도림사를 후원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때문인지 도림사는 조선왕실의 원력 사찰이 되었으며 응진당 후불탱화에도 명성왕후가 시주를 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도림사에는 1683년에 제작된 보물제1341호인 괘불이 소장되어 있으며 당우로는 보광전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지장전 응진전 칠성각과 요사체를 둔 단출한 절집으로 변했다 한다.
도림사는 1984년 지방문화재 자료 24호로 지정되었고 청류동계곡은 전남기념물 제101호로 지정되어 관리 되고 있다.



절 입구의 부도전





일주문













보광전 앞 화단의 연리지

고광전 아래 여채의 모습을 한 나무

범종각

요사체





보광전












도승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바위로 동악산 등산로 상에 있으며 좌우측에 음각되어 있다.

찾아가는 길:부산서부버스터미널에서 구례행 버스를 이용한 뒤 구례버스터미널에서 곡성행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부산발 구례행 버스는 오전 7시부터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된다. 13600, 3시간 소요. 구례버스터미널에서 곡성까지는 광주행 또는 전주행 버스를 타고 가다 곡성에서 내리면 되는데 20분 간격으로 출발하며 요금은 2700원이다. 곡성읍에서 도림사 입구까지는 군내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20분 간격으로 탈 수 있다. 10분 소요.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호남고속도로 곡성IC에서 내린 후 27번 국도를 타고 곡성 방향으로 우회전한 후 곡성읍 방향으로 가다가 도림사 입구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도림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다. 부산에서 2시간30분가량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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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여행/구례여행)구례 오산 사성암. 떨어질라 바위절벽에 위태롭게 서 있는 구례의 사성암

사성암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33호
전남 구례군 쿤척면 죽마리
백제 성왕 22년인 544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하였서며 창건 당시에는 오산암으로 불렸는데 산이름이 오산이라 오산암으로 지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 후 여러 선성들이 수도를 하였는데 연기조사와 원효대사, 도선국사,진각선사 이 네분이 수도를 하였다 하여 사성암으로 거쳐 부르게 되었다. 사성암은 처마 끝의 제비 둥지처럼 위태롭게 보인다. 특이하게도 바위 틈을 비집고 법당을 세우기 위해 긴 다리를 세워 그 위에 건물을 올린 모습이 금강산의 보덕암과 비교하기도 한다.  구례10경의 9경에 오산과 사성암이 들어 있고 구례읍의 진산으로 여기고 있으며 최근에 종방 된 추노와 그 이전의 박경리 원작인 토지등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사성암 약사전의 모습으로 법당을 받치고 있는 기둥을 보면 위태롭게 그지없다.

약사전 밑부분으로 기둥과 벽사이에 만자와 화려한 문양을 넣었다.


약사전을 참배하고 내려 오는 관광객의 모습입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오는 듯합니다.


마애 약사 여래불
전라남도 문화재 222호 지정
사성암의 마애약사여래불은 원효스님이 득도를 한후 손톱으로 바위에다 홈을 내어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
약사전 안의 자연석에 높이가 약 25m로 음각 되어 있고 현재는 그 홈 마다 금으로 입혀져 있다. 왼손에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약사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800년된 귀목나무

지장전의 모습입니다.

지장전에 안치 된 불상입니다/


소원바위

일명 뜀바위라 불리는 소원바위는 섬진강을 따라 뗏목을 팔러 하동장에 간 지아비를 기다리다 지쳐 숨을 거둔 아내와 그 아내를 잃은 슬픔이 너무 커 낙담한 나머지 숨을 거두었다는 남편의 애뜻한 부부애를 기린 전설의 바위이다.섬진강을 바라보며 서 있는 바위로 전설이 더욱 실감난다. 한가지 소원은 들어 준다하여 많은 참배객들이 들러는 곳이기도 하다.
  



도선국사가 수도를 하였다는 도선굴로 산신각 옆에 자리를 하고 있다. 이굴은 특이하게도 앞뒤로 뚫여 있어 통과를 할 수 가 있다.

사성암 위에서 본 모습으로 바위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 서 있는 법당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바위 옆으로 좁은 통로를 내어 한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나있고 그 옆으로 돌담이 쳐져 있어 더욱 운치가 있다.





찾아가는 길
부산 서부버스터미널에서 구례행 버스는 오전 7시와 9시 11시 등 하루 6회 운행한다. 2시간50분 소요, 1만3600원. 구례터미널에서 들머리인 문척면 죽마리 죽연마을까지 가는 버스는 오전 10시, 11시40분, 12시20분 등에 출발한다. 버스를 놓쳤을 경우 택시를 이용하면 6000원 안팎이다. 산행 후 동해마을에서 구례읍까지 가는 버스는 오후 1시20분과 오후 6시30분에 있다. 택시(011-618-5125) 이용 요금은 6000원가량.

자가용의 경우 남해고속도로 하동IC에서 내린 후 국도 19호선을 타고 이정표 기준 구례 쌍계사 하동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화개장터와 연곡사(피아골) 입구 앞을 지나 구례 방면으로 좀 더 가다보면 사성암 표지판이 보인다. 간전 사성암 방면으로 865번 지방도로를 타고 좌회전, 간전교를 건넌 이후 사성암 표지판만 따라서 10㎞ 정도 가면 들머리인 죽마리 죽연마을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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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함양여행)지리산 휴천 법화산 법화사. 지리산 천왕봉의 바람소리도 정겹게 들리는 법화산의 법화사

 

지리산을 둘러 싼 많은 봉우리들이 모두 지리산을 향해 얘의를 표하 듯이 다소 곳한 모습으로 지리산을 호위하고 있다. 그 만큼 영산인 어머니의 산 지리산을 바라 보는 것 자체로도 흔분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매일 지리산을 보고 가슴에 안고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얼마아 행복할까?
금대봉의 금대암에서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지리산의 능선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면
 법화산의 법화사는 또한 어떠한가. 해발 600m에 위치를 하고 있어 코 앞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매일 눈에 넣을 수 있는 법화사의 스님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일까?.
최근에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포근한 날에 법화사를 들러 보았다.
 바람소리에 대잎이 서로 비비는 소리가 사각사각 날 뿐, 한적하다 못해 적막함만 흐르는 법화사.
보리의 개 짖는 소리가 법화사의 정적을 깨고 말았다.

 



입구에 들어서니 돌을 쌓아 축대를 만든 모습이 예스럽지 않아 보이고 경내로 들어서니 스님은 출타중이고 나그네만 절을 지키고 있다. 5단으로 쌓아 올린 법화사의 절터는 그 규모만으로도 놀란다. 이 좁은 땅에 급경사를 깍아내 조성한 모습에 또 한번 놀란다....
사적비를 둘러보니 신라 무열왕 7년에 마적조사가 창건을 한 천년고찰로 창건 당시에는 안양사로 불렸다 한다. 여러번 중수를 거쳐 오다 1950년 한국전쟁때 이곳은 밤낯으로 아군과 적군이 바뀌는 상황에서 그만 소실 되었다 한다. 그후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며 변변한 문화재나 천년 고찰의 향기는 사라지고 없지만 지리산 천왕봉을 가슴에 안을 수 있는 사찰이다.
찾아가기=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대전통영고속도로 생초IC에서 내려 이정표 기준 화계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이어 함양 마천 방향 60번 지방도를 타고 우회전한 후 임천교를 지나 마천 함양자연휴양림 방향으로 역시 60번 지방도를 타고 좌회전한다. 백무동 마천 방향으로 가다가 문정리에서 '문상마을 법화사' 표지판을 보면 우회전 한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가면 문상마을과 도정동을 지나면 법화사로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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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토함산 석굴암 여행. 앙코 없는 찐빵, 경주 토함산 석굴암

경주의 석굴암은 어릴때의 추억을 생각나게 한다. 초등 학교 수학 여행의 단골 코스로 불국사에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현재의 주차장에 올라 석굴암을 찾던 생각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석굴암을 여러번 찾아 보았지만  반백년을 앞 두고 다시 들러 보니 감회가 새롭다.
석굴암은 매표소를 지나 오솔길을 따라 걸어들어가니 최근에 많은 눈으로 잔설이 남아 있어 동심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 같다. 어느듯 석굴암 아래. 예전에는 없던 여러채의 건물이 새로 지어져 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10년 751에 재상 김대성에 의해 창건되었다.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짓게 되었다는 석굴암은 그 후 혜공왕 10년인 774년에 완공이 되었는데 23년의 긴세월이 흘렀다. 그래서 인지 김대성은 완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

았지만 그로 인해 현재의 석굴암이 남아 있어니 감사할 따름이다.. 처음에는 석불사로 불렸다 하는데 인위적으로 만든 석굴로 중앙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과 그를 둘러싼 보살상과 제자상, 역사상, 천왕상을 좌우로 모섰고 일제 강점기와 1962년 경의 대대적인 해체복원 공사로 인해 그의 잔재물인 석물들이 널려 있다. 국보24호로 1995년에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하였다.

들어서는 오솔길로 운치가 있다. 그러나 많은 관광객으로 인해 인산인해를 이룬다.

좌측의 건물이 석굴암으로 본존불을 모신 건물이다.

석굴암 건물


석굴암으로 올라가는 관광객

해체당시 나왔던 석물들

석굴암 입구. 사진촬영금지로 본존불을 찍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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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울산여행)울주군 가지산 석남사 여행. 가을에 찾아 보았던 가지산 석남사를 이제야 올려 봅니다.

 

영남알프스 안에는 많은 사찰을 품고 있다. 청도의 운문사, 밀양의 표충사. 양산의 통도사, 울산의 석남사가 그 것이다. 각 지자체를 두고 대 가람을 거느리고 있는 영남 알프스, 그 중에서도 가지산 아래에 있는 석남사를 살펴보자.
언양읍에서 밀양으로 넘어가는 24번 옛 국도상에 자리 잡은 석남사는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에 위치한 비구니 사찰이다.

 


 


석남사의 창건연대는 도의국사에 의해 824년 현덕왕 16년에 창건되어 임진왜란등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폐사됨을 반복하다가 6.25 동란후인 50년대 후반에 인홍스님에 의해 불사와 함께 비구니 사찰로 거듭나게 된다.

고색창연한 돌이끼가 세월을 짐작하게 만들고 ...

석남사를 구경하고 걸어 나오는 어느 가족...

삼층 석가 사리탑

대웅전 앞에 근래에 조성된 석탑으로 이자리에 석남사 삼층석탑이 있었고 현재의 탑에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보관하고 있다 한다.




석남사 수조로 문화재 자료 제4호이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보통 수조는 나무나 돌로 안을 깍아내어 물을 받거나 기타 용도로 사용을 하기위해서 만들어 진다. 석남사 수조는 보통의 수조 보다는 규모가 큰 것을 볼 수 있다.길이가 2.7m 높이 0.9m 너비 1m 두께가 14cm로 4각 모양에 하고 있지만 석남사 수조는 각의 모서리를 다듬어 예술성을 높였다. 현재는 관광객의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물통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마침 찾은 그날 가족과 함께 온 꼬마가 물을 퍼고 있다. 






석남사 삼층 석탑으로 유형문화재 제3호
 통일신라 시대 작품으로 보이며 2층으로 된 기단위에다 3층의 석탑을 올렸다 원래는 대웅전 앞 마당에 있었던 것을 1973년 현재의 위치에 옮겼다. 




극락전










도의 국사 사리탑으로 오르는 길로 이 길을 따라 오면 보물 369호인 부도탑을 만나 볼 수 있다. 












보물 제369호인 도의국사 부도탑

 가을에 찾아본 석남사를 바쁘다는 핑계로 이제야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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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울산여행)가지산 석남사 부도탑. 석남사의 부도탑은 누구의 것일까요?. 도의국사 아니면 낭공대사

 

영남알프스 최고봉인 가지산에는 석남사가 있다 현재는 비구니 사찰이며 도의국사가 신라 헌덕왕 16년인 824년에 창건 하였다 한다. 석남사 대웅전 옆 계단을 오르면 만나는 아름다운 부도탑이 도의국사의 부도탑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교한 조각 수법으로 보물 제369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에 해체를 하여 복원을 하였다하며 이때 기단  중앙에서 사리공이 확인되었다.
하대석에는 사자와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고  중대석은 창문 문양의  안상이 새겨져 있고 안상속에다 꽃무늬를 넣었다. 그리고 8판의 연꽃무늬위에 탑몸돌인 8면에 신장을 새겨 넣었고 통일 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도의국사 부도탑이 강원도 영양군 진전사의 진전사지에 있는 부도탑을 도의 국사의 부도탑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최초로 남종선을 전한 도의국사는 강원도에서 주로 수도를 하였다한다.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한국 선종의 종조이며 가지산문를 창시한 인물로 가지산 석남사의 부도탑도 도의국사의 부도탑으로 보고 있다하니 두곳에서 도의국사 부도탑이라 하니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미술저널사"의 논문집 2009년1/2월 62~71 쪽에서는 석남사의 부도탑을 낭공대사의 부도탑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그래서 하루 빨리 누구의 부도탑인지 진실이 밝혀지길 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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