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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양산여행)천성산 내원사, 여승들이 수행하는 비구니 사찰인 천성산 내원사

 

내원사하면 최근에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ktx 고속전철 천성산 통과를 반대하며
단식투쟁을 한 지율스님이 있다. 천성산의 자연 환경과 생태계를 파괴 한다고
목숨을 건 단식 투쟁으로 천성산과 내원사는 언론의 중심에 서기도 하였고 현재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새를 탄 사찰이다.

 



내원사는 어떤 절인가. 13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원효가 불광산 척판암에서 참선중 당나라 구화산 태화사의 뒷산이 산사태로 무너질 것을 미리 예견하시고 척판암의 부엌 문짝을 떼어 "원효척판구중"이란 글씨를  써 하늘로 던져 태화사로 날려 보내니 태화사 대웅전에서 참선중인스님들이 하늘에 빙빙 돌며 떠 있는 물체를 보고 신기하게 생각하여 모두 밖으로 나오니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뒷산이 무너져 내려 천명의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천명의 대중은 원효의 신통력과 도력에 모두 그의 제자가 되기를 위해 원효를 찾아오고 원효는 그들을 기거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니니 원적산 산신이 나타나 원적산으로 안내를 하였고 지금의 산신각 자리에서 산신은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한다. 원효은 원적산에다 내원사를 위시한 89암자를 짓고 당나라 천명대중을 머물게 하였다 한다. 내원사는 그 후 여러번의 중창을 거쳐 왔는데 한국전쟁인 6.25때 모두 소실 되는 불운을 맞아 1955년 정수옥스님에 의해 비구니 사찰로 거듭나게 되었다.

원효가 천명의 대중을 데리고 기거할 곳을 찾아 다니니 원적산 산신이 마중을 나와 산신각이 있는 지점에서 홀연이 사라지니 원효는 그자리에다 산신각을 지었다 한다. 그 산신각 앞에 700년 된 소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수옥노사 부도답으로 1955년 6.25 한국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내원사를 일으키는 데 깃털을 마련하신분으로 내원사 입구 좌측에서 만날 수 있다.

내원사 계곡 숲속에 자리 잡은 절로서 비구니 사찰 답게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 내원사로 올라 갈 수 있다.


돌담으로 아담하게 치장을 한 모습으로 내원사 현판 족은 현재 수행 공간으로 일반인의 출입일 금하고 있다.


금강 역사문으로 스님들의 수행 공간임을 알리는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다.

일반 신도와 관광객은 이곳으로 들어설 수 있다.  


샘터와 아기자기한 익살스런 동자들의 모습이 해학적이다.






가마솥으로 추정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가마솥의 크기로 보아 옛날에는 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였던 곳으로 짐작을 할 수 있다.

도 유형 문화재 58호 내원사 금고
불구는 사찰의 행사때 사용하는 도구를 말하며 소리를 내는 것으로 징 모양을 하고 있다.
반자라고도 하는 데 한쪽 면만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원사의 반자는 한쪽면만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것으로 가운데 부분에 2중선을 돌렸다. 안쪽 원에는 8개의 잎을 가진 꽃을 새겼고, 바껕 원에는 구름과 꽃무늬를 4곳에 새겨 두었다. 옆면 위로는 둥근 구멍을 가진 돌출된 귀를 달았고 아래에는 선종8년(1091)에 금인사에서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위의 제품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내원사 성보 박물관에 소장을 하고 있다 한다.

선나원으로 보통 사찰의 큰 법당이다.


선나원(큰법당)


선나원 앞의 애기 동자들 모습

큰법당안의 부처님



일을 하지 않으면 먹지를 마라는 가르침에 따라 두 비구니 승려가 수행(?)을 하고 있다.


큰 법당 앞에는 스님들의 수행 공간으로 출입을 삼가해 달라는 문구가 있다.


큰 법당


죽림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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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하동여행)화개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지리산 쌍계사 중앙에 자리잡은 진감선사 대공탑비의 화려한 예술성입니다.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雙磎寺 眞鑑禪師 大空塔碑)
국보 제47호
소재지: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하동군 쌍계사 대웅전 앞뜰에는 통일신라말의 승려인 진감선사 혜소의 덕을 기려 세운 탑비가 서 있다 진감선사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 시킨 승려로
진감선사의 속세의 성은 최씨이며 애장왕때인 804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신감대사에게 계를 받았고 승려가 되었다. 흥덕왕 5년인 830년에 신라로 돌아와 역대의 왕에게 숭앙을 받았다. 77세의 나이로 옥천사 즉 쌍계사에서 입적을 하였다. 헌강왕은 885년에 진감선사대공탑비를추시하여 세우도록 하였고 정강왕(886~887제위)은 옥천사를 쌍계사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이비석은  887년에 건립되었는데 당시의 대표적인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글을 짓고 비문을 쓴것으로 유명한데 그의 사산비명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전체높이는 363m, 비신의 높이 213m,너비는 약1m,두께는 22.5m, 이수와 귀부는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지만 비신은 훼손이 심한 모습으로 지지대로 고정을 하여 안치되어 있다. 이수는 좌우로 두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서로 구슬을 사이에 두고 다투는 모습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형식이며 거북의 머리는 용의 머리로 조각을 하였고 등에는 6각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이수 위 꼭대기 부분에는 연꽃이 새겨진 위에 구슬을 새겨 놓았다. 귀부는 거북이가 비신을 받치고 있는 뛰어난 예술품으로 비석의 몸돌을 끼울 수 있도록 비석의 놓을 자리가 큼직하게 만들어져 있고 4면마다 인상인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훼손은 되었지만 이수와 귀부, 몸돌이 온전하게 모습을 갖춘 탑비이다.

 이수는 좌우로 두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서로 구슬을 사이에 두고 다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수 위 꼭대기 부분에는 연꽃이 새겨진 위에 구슬을 새겨 놓았다.



비석의 몸돌을 꼽은 자리에 4면 마다 인상의 구름무늬를 볼 수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을 따라 몸은 거북이이며 머리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대웅전 앞 중앙에 위치를 하고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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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 범어사 계명암 여행. 하늘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금정산 계명암

 

금정산은 예로 부터 여러 봉우리들이 모여 하나의 금정산을 이루고 있다. 최고봉을 고당봉이라고 하며 그 동쪽으로 금샘이 있다.
그 금샘에 금어가 놀아 범어사와 금정산의 어원이 되었다는 것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파리봉, 상계봉, 계명봉의 봉우리가 있었는데 그외의 장군봉,의상봉. 원효봉, 대륙봉등의 이름은 최근에 붙여졌다. 범어사를 감싸고 있는 봉우리는 고당봉과 장군봉 그리고 계명봉이다. 범어사의 우측에 우뚝 솟은 계명봉은 마치 피라미드와 같은 독립봉의 형태를 가지고 고당봉의 동쪽에 솟아 있어 계명산으로도 부르는 이가 있다.

 




 


계명암에는 계명이란 이름을 낳은 닭의 형상을 한 바위가 있다.
계명암 위 30m 근방 등산로 상에 있는 작은 바위로
이 바위가 자웅석계로 "범어3기"의 하나로 기록 되어 있다. 한때는 이 바위옆에 닭의 형상을 한 바위가 한개가 더 있었다 한다.
한쌍의 닭형상, 즉 수탉과 암탉의 모습을 한 바위가  나란히 있어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다.
용맹정진하는 스님들이 새벽예불을 드릴 시간에 정확하게 하늘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들렸다하여 계명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금은 암탉의 모습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정기를 말살시키기위해 무참하게 깨어버려 훼손되어 없고 수탉만 남아 있지만 그 수탉 마저 온전한 모습이 아닌듯하다.
위의 사진은 수탉의 모습이다

범어사 청련암 입구에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약 해발 500m에 위치한 계명암 일주문과 만난다.
일주문을 지나면 길게 늘어선 담장이 운치가 있으며 한적한 산사의 멋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은 그때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지만 계명암 앞 마당에서 보는 고당봉과 범어사 경내 그리고 멀리 부산의 앞바다를 볼 수 있는 뛰어난 전망을 자랑한다.



경내로 들어서는 돌담위에 앙증맞은 작은 모습의 부처들을 만날 수 있다.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계명암의 전설은 아는지 모르는지...

경내로 들어서면 먼저 만나는 스님의 수행공간이 좌측으로 있으며 법당은 앞으로 방을 내어 기도처로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부처님오신날도 지난 후지만 신도들의 발걸음이 잦은 절이다.

우측으로 통유리를 넣은 곳이 본법당이며

동자들의 해학적인 모습이 더욱 정감이 간다.

암탉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석탑이 세워져 있고

한반도의 국운이 다시 굳건하게 될때쯤 장탉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계명암 마당에서 본 금정산 고당봉과 운치 있는 절의 담장

<법당안의 모습들>







본전에 모서진 부처님 앞에 작은 동자가 앉아 있는 모습이 다른절과 특이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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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佛日)
고려 희종때 지눌 보조국사께서 입적하신후 내린 시호로 그의 시호를 따
 불일폭포가 되었서며 불일폭포 옆 작은 토굴은 보조국사가 수도를 하였던 곳으로
불일암으로 부르게 되었다. 현재의 불일암은 요사체와 대웅전의 두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1980년 대에 화재로 인해 새로 불사를 일으켜 2005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갖추어졌다.
60m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와 물보라를 맞으면 그 어느 누가 도를 통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느누가 신선이 되지 않을까?. 그 만큼 불일폭포는 비온뒤에 보면 장관을 연출한다.
지리산 남부능선인 삼신봉을 등지고 서 있는 불일암은 무심의 마음이요. 신선의 경계라 할만하다.
흔히 제비둥지 같은 암자 터에 자리 잡은 불일암은 두동의 건물도 겨우 들어 설 정도로 산사면을 깍아 만든 바위 절벽 위에 걸려있다. 그러한 불일암에서 내려보면 빗장을 잠근 듯한 신비의 계곡인 내원골의 깊은 계곡에 마음을 두고 도시에서 찾아 오는 중생을 모두 구원해 줄 것 같은 부처님의 집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내만의 생각일까.
작은 절집을 지키는 효성스님 한분만 보일 뿐이며 오늘도 적막감만 감도는 조용한 절집이다.

대웅전 내부의 모습

불일암 앞 마당에서 본 전경,
불일암을 오르는 계단길을 걷고 있는 산꾼들...









비 온 뒤의 불일 폭포로 자주 무지개가 나타나는 지리산 최대의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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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산은 불가에서는 천불산으로 부른다. 흔히 설악산의 주계곡을 천불동 계곡이라 하듯이.매화산 골짜기를 에워싸고 있는 바윗돌 하나하나가
부처님을 나타내는 것일까.  이 이름과 맥락을 같이하는 뜻으로 그 만큼 매화산은 바위가 많은 산이다.
그 무수한 부처님이 계신 산 안에 번듯한 사찰하나 없을까?.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신라때 고운 최치운이 말년을 여기서 유유자적하며 기거한 것으로 보아 신라때로 창건 연대를 보고 있다. 그후 청량사는 폐허가 되다 시피 하다가 1811년에 회은스님이 중수하였고 최근에는 경암스님이 연재의 모습으로 중수를 하였다. 청량사 경내에는 보물인 삼층석탑, 석등, 석조석가여래좌상이 남아 있다.


청량사 삼층석탑

보물 제266호
이중기단위에 삼층의 탑신을 갖춘 전형 적인 신라시대 석탑이다. 지붕돌의 낙수면은 완만하나 네모서리에서 경쾌하게 반전되고 있으며, 아래에는 각층 다섯 단의 지붕돌 주름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만이 남아 있고 탑 주위를 석재로 넓게 구획을 하였다.
조화와 비례가 우수하여 9세기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이다. 높이는 4.85cm
<안내문 발췌>

보물 제253호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황산리
네모난 지대석 위에 하대석은 8각으로 안상에 사자와 운상누각이 교대로 새겨져 있다.
복련석에는 반전한 귀꽃이 있으며 간석은 고동형으로 앙련과 복련으로 장식하였다.
화사석은 팔각으로 네면에는 화창이 나머지에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비교적 얇은 편이며 상륜은 일부 부재가 올려져 있을 뿐 원형을 상실하였다.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지 않아 안정감을 보이고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등이다. 
석탑을 보아 제작시기는 9세기로 추정
<안내문 발췌>


청량사 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 제265호
소재지;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황산리
삼단의 사각형 대좌위에 항마촉지인 즉 석가모니불의 별인으로 모든 악마를 굴복시켜 없애버리는 모습으로, 결가부좌한 채 오른손을 풀어 오른쪽 무릎위에 얹고 손가락 끝을 가볍게 땅에 댄것이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서 배꼽앞에 놓는 자세로 결가부좌 하였고 걸친 옷은 우견편단으로 왼쪽 어께에 옷을 걸치고 오른쪽 어께는드러낸 모습으로 상대편을 공경의 뜻을 나타내는 하나의 예법을 하고 있다.
머리는 나발형이고 얼굴은 비교적 풍만하며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제작시기는 9세기 전반으로 추정하는데 머리위의 육계가 낮아지고 옷 주름에서 형식화 경향이 엿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불상높이는 210cm, 대좌 높이 75cm
<안내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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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동굴의 금륜사
금정산 북단인 양산시 동면, 동면 초등 학교 아래에서 장군봉을 산행 하다 보면 만나는 특이한 굴이 있다. 흔히 은동굴로 불리며  바닥은 편편하게 되어 있고 두개의 굴로 되어 있다. 위의 동굴은 입구는 좁지만 내부는 10여평에 30여명이 누울 수 있는 규모로 꽤 넓은 편이며 여러사람이 앉아 기도를 드릴수 있다. 아래에 있는 굴은 입구도 넓지만 굴이라 하기 보다는 움푹 들어간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금륜사 주지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은동굴에 대해서 밑의 마을 주민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여주었다. 임진왜란때는 마을 밑의 아낙네들이 굴에 몸을 숨기고 베틀을 놓고 베를 잤다하여 베굴로 불리고, 또 전란때 마을 사람들이 동굴에 올라와 몸을 숨겼다하여 隱동굴이라 한다하였다.  두굴에서 모두 약수가 나오는데 윗굴에서는 심한 가뭄이나 한겨울철에는 물이 마르지만 아래의 굴은 마른적이 없다하며 약수굴 또는 암굴이라 부르고 그리고 은을 캤다하여 은동굴로 불린다고하였다. 은동굴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굴에 피난을 와 거주를 하던 부락민이나 아니면 수도승들에 의해 좁은 벽면과 입구등을 정으로 쫓아 넓인 흔적을 볼 수 있다 . 은동굴에는 또 가지산의 쌀바위와 같은 전설도 가지고 있으며 아랫마을 내송부락에서 매년 삼월삼짓날에는 모든 부락민이 올라와 특이하게 용왕제를 지낸다 한다. 그리고 가뭄이 심하게 들때도 올라와 기우제를 지내고 임진왜란의 전란때에는 여섯성씨가 올라와 8년을 같이 기거하였다는 특이한 동굴인 은동굴. 현재 금륜사 사찰은 1968년 조창현스님에 의해 창건되어 40여년의 연륜밖에 되지 않았고 은동굴 앞에 가건물을 지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아래로 옮겨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을 새로 지어 번듯한 사찰다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윗굴 입구의 모습과 아래 사진은 내부의 모습으로 산신을 모서 두었다.

안에서 밖으로 본 모습으로 임진왜란때에는 앞에 나무가 울창하고 입구가 좁아 동굴을 찾기가 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부락민들이 난을 피하기 위하여 올라와 숨어 지냈다는 전설도 가지고 있다.
바위 틈에 모서 놓은 우스광스러운 모습의 동자 
바위 틈새에 모서둔 불상





새로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의 모습이 웅장한 금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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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산 미타암(彌陀唵)
소재지:양산시 웅상읍 소주리 171
천성산의 동쪽편에는 원효대사사 창건한 미타암이 있다. 큰 바위 아래 석굴을 파고 자리잡은 보물 제998호가 안치된 미타암은 험한 산사면을 깍아 절터로 만들다 보니 좌우로 길게 건물을 형성하고 있다.
최근에 많은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등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옛절의 멋은 사라지고 없지만 절의 앉은 폼새는 원효대사가 당나라 천명대중을 구한 후 당나라 승려를 천성산으로 인도하여 모두 성불시켰다는  전설과 맞물려 더욱 각광을 받고 있는 사찰이다.
미타암의 미타는 아미타불에서 따온 말로서 서방정토에서 중생을 남김없이 제도하여
죽어서도 극락세계로 인도하여 중생을 구한다는 아미타불. 신라 선덕여왕때 창건 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타암은 현재 암자 뒷편의 큰 바위 아래 굴인 미타굴에서 사찰명이 나왔다 한다.


양산 미타암 석아미타불입상
보물제998호
소재지;경상남도 양산시 웅상읍 소주리
감산사 아미타불입상과 미륵보살입상이 미타암의 아미타불과 함께 한장의 돌로 불상을 깍아만든점과 불상의 양식과 수법이 서로 비슷한 것으로 보아 통일 신라시대의 불상으로 보고 있어며.  삼국유사에는 서방극락세계로 날아간 다섯비구가 수도하던 석굴에 봉안 된 것으로 유명한 아미타불로 양산의 석굴암으로도 부르는 아미타불.

미타암 미타굴에 안치 되어 있는 아미타불상은 불신과 광배가 한장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나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큼직하며 두 귀는 어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얼굴은 둥굴며 양감이 있어 자비로운 상호를 나타내고 신체역시 양감이 풍부하며 건강하고 둥글게 처리된 어께는 부드러우면서도 탄력 있는 체구를 만들고 있다.
봉견의 법의는 전신에 걸쳐 유려한 옷주름을 이루며  가슴앞에 군의를 묶은 띠매듭이 표현되었다.
U자형의 옷주름이 길게 흘러 내리며 광배는 주형거신광으로 안에 2줄의 굵은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고 그 사이에 좌우대칭으로 꽃무늬를 넣어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돌렸다. 연화좌의 대좌에는 안상을 조각하였다.




미타암으로 오르는 계단길
주차장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서면 만나는 절입구. 일주문은 따로 없고 기암의 형상이 사찬왕상을 대신하고 있다.


미타굴의 아미타불

찾아가는 길:
미타암 들머리인 주진교까지는 부산 노포동 종합터미널(전철 1호선 종점)에서 수시 운행하는 웅상행1002번 좌석버스 , 301번, 또는 울산행1127·1137·2100·2300번  노선버스 이용 주진마을 하차를 한후 미타암 아래 주차장까지는 걸어가는 방법과 미타암 서틀버스를 이용하면 된다.7번 국도상 웅상읍 주진리 웅상도서관 맞은편 동해주유소 부근의 미타암 버스정류장에서 1일 8회(07:10, 08:10, 09:10, 10:10, 12:10, 13:10, 15:10, 15:10). 미타암 전화 055-365-4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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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의 월명암은 쌍선봉 즉 정확하게 말하면 낙조대 아래 자리 잡고 있는 산상 암자이다.
예로 부터 월명암을 호남의 삼대영지라 말하는 명당 터인데 백암산의 운문암, 대둔산의 태고사와 함께 호남의  삼대 영지라 한다.
변산 월명암에는 四聖과 八賢人 十二法師가 나올 명당 터로 월명암의 창건주 부설거사와 그의 부인 묘화, 아들인 등운 딸인 월명을 일컬어 四聖이라 하고 8현인은 성암, 행암, 학명의 3현이 났고 앞으로도 5현과 12법사가 더 나올 자리라 한다. 부설거사가 창건한 월명암은 사적기에 따르면 1300여년전에 통일신라시대 신문왕11년 691년에 경주사람인 부설거사에 의해 창건 되었고 흔히 부설거사는 요즘 말로  대처승의 신분이였다. 그러나 출가후 파계승이 되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둔 스님이지만 득도하여 도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부설전에 전해 온다.
부설거사의 속명은 진광세로 20세때 출가하여 불국사 원정스님의 제자가 되어 전국의 명산을 두루다니며 수도에 전념하다가 도반인 영조, 영희스님과 변산의 쌍선봉 아래에 현 월명암 자리에 작은 암자를 짓고 수도에 전념하게 된다.
그러나 더 큰 공부를 위하여 오대산으로 가던 세사람은 김제에 도착하여 두릉의 백련지에 있는 구무원의 집에서 묵게 되는데 그의 딸 묘화가 부설거사에게 반해 결혼 해 줄 것을 청하지만 부설거사는 일연지하에 거절을 한다. 간곡한 묘화의 청에 의해 할 수 없이 오대산가는 것을 포기하고 파계하여 묘화부인과 혼인을 하고 등운과 월명을 두게 된다.
그리고 월명과 부목한의 색보시 이야기가 전하는데 부목한은 월명에게 반해 연정을 품고 있었는데  밤마다 치근되며 요구를 하니 월명은 오빠 등운에게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니 등운은 월명에게 한번 그의 요구를 들어 주라 하여 월명은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는데 다시 요구를 하니 월명이 또 다시 오빠에게 이야기를 하니 한번 더 들어 주라고 한다.
그러나 그후에도 계속 요구를 하니 할 수 없이 등운과 월명은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고 있는 부목한을 아궁이에 밀어 넣고 불에 태워죽이니 두 남매는 더욱 수도 정진하여 도를 깨우쳤다하는 이야기이다. 부설거사는 부인과 남매를 데리고 변산으로 들어와 공부하던 옛 자리에 부설암을 짓고  딸 월명을 위해 월명암, 아들 등운을 위해 등운암, 그리고 그의 부인 묘화을 위해서는 낙조대 아래에 묘적암을 짓고 수도 정진하여 네분모두 득도하였다 한다. 주로 월명암은 남여치에서 쌍선봉옆을 돌아 가는 방법과 사자동이 있는 내변산 탐방소가 들머리이다.


부설전(浮雪傳)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40호
소재지: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월명암을 처음 세웠다는 부설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책으로
행서체로 쓴 한문 필사본이다. 표지에는 부설전이란 책의 제목이
표기되어 있으며 표지 안쪽에는 월명암 연역표를 적어 놓았다.
내용에는 부설스님이 월명암에서 영희, 영조 스님등과 수도생활을
하던 중에 있었던 일화와 부설선사가 지은 시등이 수록되어 있다

월명암 뒤로 변산8경인 낙조대가 펼쳐진다. 


월명암 마당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부안댐 건너편의 쇠뿔바위봉과 군사시설물이 있는 의상봉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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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의 내소사
전라북도 기념물 제78호
소재지: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내소사는 백제무왕 34년인 633년에 혜구두타(惠丘頭陀)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 창건당시에는 소래사로 불려 지게 되었는데 대소래사와 소소래사가 있었다 한다. 대소래사는 폐사되고 지금의 내소사는 소소래사가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인조 11년인
1633년과 고종 6년인 1869년에 중창을 하였다.
내소사는 소래사로 불렸으나 임진왜란 이후
내소사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대웅보존은 조선 인조때 청민스님이 지었고 문살의 아름다움과 단청 솜씨 또한
일품으로 정평이 나 있다. 조선 태종 15년 어느 이씨 부인이 사별한 남편의 명복을 빌며 묘법연화경을 필사하여 만든 법화경 묘법연화경도 이사찰의 자랑거리이다. 경내에 있는 고려시대 종은 청람사지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며 새겨진 문양이 세련된 작품이다. 


내소사 대웅보전

보물 제291호
소재지:전라북도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내소사 대웅전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우측에 보현보살, 좌측에 문수보살을 모신 내소사의 중심건물인 본전이다
조선 후기에 건립한 대웅보전은 건축과정에서 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목침의 나무만으로 서로 엮어 건물을 완공하였다.
천장의 화려한 장식과 연꽃 국화꽃을 가득 조각하여 마치 화려한 꽃밭에 들 정도의 착각을 일으킬 문살의 예술이 인상적이다.
반대로 법당 안에서 보면은 단정한 마름모꼴 상의 그림자만 비친다한다.



일주문에서 내소사로 들어서는 유명한 전나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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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도갑사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79호
소재지: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8
도갑사는 통일신라말 헌강왕 6년인 880년에 도선국사(826~898)가 창건을 하였다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 도갑사는 번창하였서며 영암 츨신인 수미왕사가 1457년에서 1464년 가지 도갑사를 대대적으로 중창을 하여 966칸의 대가람으로 변모를 하였다 한다. 1597년인 정유재란때 도갑사는 화재로 인해 많은문화재가 불에타 소실되는 불운을 맞이하였다.
그 후에도 중창을 거듭하였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역시 도갑사는 잿더미가 되고 만다. 그래서 도갑사는 뚜렷한 문화재 하나 남아 있는 것은 없지만








도갑사 해탈문(解脫門)
국보 제50호
소재지;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8
해탈문은 속세를 벗어나 불교세계로 들어가는 문으로 이문을 지나면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 근심 없는 부처님의 품안에 들어선다는 의미이다. 도갑사의 해탈문은 신라시대 승려인 도선국사에 창건 되었고 고려 말에 크게 증흥 되었다 한다. 이 해탈문은 1960년에 해체하여 수리를 할때 발견 된 상량문에 따르면  조선 성종 4년인 1473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석조 기단 위에 중앙칸은 통로가 되고 좌우 한 칸씩에 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기둥은 약하게 배흘림을 한 기둥으로 사용 되었고전체적인 건축양식은 경북 영주 부석사 조사당과  유사하다. 기둥 위의 구조가 주심포식(하나의 기둥위에 하나의 공포만을 짜 올린 양식)과 다포식(기둥과 기둥사이에도 짜 올린 양식)
양식이 엮인 형태로 국내에서는 유래가 드문 건축물이다.









1995년~1999년 까지 도갑사는 네 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옛 가람의 배치를 확인하고 현재는 복원불사를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대웅전 뒤편 건물지 발굴 조사에서 백제시대 기와편이 출토되어 통일신라시대 이전 부터 이미 사찰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도갑사 석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50호
소재지;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8
석조는 큰 돌의 내부를 파서 물을 담아 사용하거나 곡물을 씻는데 쓰는 일종의 돌그릇이다.
물을 채워 연꽃을 심는 그릇으로 사용 되기도 하였서며 이 석조는 화강암을 재료로 하여 만든 작은 통나무배와 같은 모양으로 아래부분에 배수구를 갖추었다.
길이 467cm, 폭116cm, 높이 85cm.
강희 21년 임술이라 새겨진 글자가 확인 됨에 따라 조선 숙종 8년인 1682년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도갑사 오층석탑
보물 제1433호
소재지: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8
도갑사 탑은 5층으로 돌을 깍고  다듬어서 만든 탑으로 기단과 몸체에
해당하는 탑신, 탑의 몸체들을 덮고 있는 지붕 모양의 옥개석과 탑의 머리 부분을 장식하는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탑 전체를 받치는 즉 기단을 만들기 위해 쌓은 돌인 지대석과 하나의 층으로 된 기단부의 면석 즉 기단의 받침돌과 포개어 얹는 납작한 돌 사이에 대는 넓은 돌은 4장의 널찍한 돌로 짜 맞추었다.
1층에서 4층으로 올라 갈 수록 각층의 몸체들이 낮아져 안정감이 있고 한층의 몸체들은 보통 하나의 돌로 처리를 하는 데 4자의 평돌로 짜 맞춘 것이 특이하다. 조성시기는 고려시대 초기로 보고 있다.





영암 월출산의 대웅전이 최근 복원 불사를 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다. 영암 월출산 도갑사(주지 월우스님)가 550여 년 만에 대웅보전을 중층으로 복원하고 지난 11일 낙성 봉행하였다 합니다. 이 사진은 4월 19일 촬영한 사진 입니다.






도갑사 수미왕사비(道岬寺 守眉王師碑)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152호
소재지: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8

수미왕사비는 영암 출신 수미왕사의 활동과 자취를 기록한 비로 수미왕사는 조선 세조 때의 승려로 13세에 도갑사에 출가를 하였다. 법주사 등지에서 경전공부후  황폐화 된 도갑사로 돌아와 도갑사 중창에노력하였다. 그리고 한문으로 된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간경도감에서 불경을 번역하였고 세조는 그에게 묘각(妙覺)이란 호를 내리고 왕사로 책봉하였다 한다.






수미왕사비는 돌거북인 귀부와 비의 몸체 그리고 용을 아로 새긴 비의 머리부분인 이수가 잘 남아 있다.
돌거북의 머리는 특이하게 인상을 찌푸린 용의 얼굴을 형상화 하였고 목이 짧아 등 껍질이 두꺼워 보인다. 이수에는 꽃잎처럼 화사하게 피어오른 구름 무늬와 서러 어굴을 마주 보고 있는 두마리의 용이 섬세하게새겨져 있다.
비의 총 높이는 3.34m, 비신의 높이 2m, 비신의 폭 1.08m, 비신의 두께 21cm. 숙종 15년인 1689년에 만들어
19년인 1693년에 세웠고 고려 전기의 양식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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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 도선수미비(道岬寺 道詵守眉碑)
보물1395호

위치: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8
이비석은 도갑사 도선 수미비로 도갑사를 중창한 수미선사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이비를 만드는데 17년이 소요 되었다하며 조선효종 4년인 1653년에 완성 되었다 한다. 빗돌을 받치고 있는 돌 거북이는 여의주를 입에 물고 고개를 절쪽으로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며 돌거북의 등 가장자리에 말린 연꽃잎이 세겨져 있다. 용의 모습을 새긴 비의 머리인 이수는 두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항하고 있다. 이와 같이 구름이나 연꽃잎이 아닌 연잎으로 비의 무게를 받치고 있는 것은 조선시대의 양식으로 볼 수 있다한다. 비의 높이는 4.8m, 폭은 1.4m이며 1500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비석의 몸체 앞뒤로는 글씨가 새겨지고 양쪽 면은 용의 모습이 새겨져 더욱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도갑사 절에서 미륵전 방향으로 향하는 월출산 미황재 방향으로 오르는 길에 계곡을 건너면 기와를 인 팔작지붕을 만날 수 있다. 이 곳이 도선수미비로 수미선사의 행적을 기록하여 놓은 비석으로 보통 귀부와 이수만 남고 빗돌은 파괴 된 경우가 많은데 수미비는 깨끗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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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 미륵사

금정산 북문옆에서 한적한 소나무 숲길을 따라가면 미륵사와 만난다.
통일신라시대 문무왕 18년인 678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한다.
미륵사는 독특한 모습을 한 암봉을 뒤로 하고 있다.
염화전 뒷쪽의 큰 암봉이 미륵봉으로 미륵봉의 암봉이 병풍을 두른듯이
솟아 있는 그 아래 즉 미륵사가 위치하고 있다.
미륵사는 창건때 부터 산문이 없다 들어서는 입구 양쪽으로 큰 바위가 산문을 대신하며
노적가리 같은 모습이라하여 끼니 걱정을 안해도 된다는 사찰이다.
 범어사는 의상대사가 미륵사는 원효대사가 각각 창건을 하였는데
미륵사와 함께하는 원효대사의 일화는 유명하다.
지금도 미륵봉 중간의 바위 암반에 위치한 독성각 앞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원효대사가 호리병 다섯개를 구해 왜구 5만 병선을 물리치고 왜구 첩자를 유인하기 위해
장군기를 꽂았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그 구멍이다.
"모든 것에 꺼리낌 없는 사람이  번뇌에서 벗어 난다"는 가르침으로  유명하며
미륵불과 독성불을 모신 기도도량으로 알려저 있다. 
미륵사는 절 중앙에 염화전을 모시고 그 뒷편인 미륵봉 중간에
큰 바위들이 얽켜 있는 좌선바위를 볼 수 있다.  엉켜 있는 바위들이 해가 지고 난후
그 틈새가 보이지 않을 때 쯤 좌선하는 스님의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한다...
좌선바위 뒤인 즉 미륵봉이 미륵불이라 하면 그 아래 좌선을 한 스님의 모습을 한 좌선바위가 미륵불을 향해
좌선을 한 모습이라   함께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그 아래 원효대사가 미륵암을 창건하였고
사찰이름인 미륵암도 여기서 유래 되었다 한다.



염화전 뒤로 미륵불을 닮았다는 미륵봉과 바위들이 서로 엉켜 있는 중앙의 좌선바위를 볼 수 있다.

미륵사는 대웅전 대신 염화전을 중앙에 배치를 하였는데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1952년에 지었다. 내부에는 1985년에 조성한 석가삼존불은 중앙에 석가여래와 좌우로 미륵보살과 문수보살을 안치하였다.
1974년에 조성한 후불탱이 중앙에 모서져 있고 신중탱과 지장탱등 모두 최근에 조성을 하였고 석정스님의 작품이다.

염화전 내부의 모습


칠성각


칠성각에서 본 미륵사 전경

오백전

오백전 내부




현재 독성각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 보면 작은 샘터가 있다. 이 샘터는 쌀바위의 전설이 전해오는데
매일 아침 작은 구멍에서 한톨 한톨 쌀이 떨어져 스님이 이 쌀로 끼니를 이었다 한다. 그런데 사미승이 구멍을 크게 하면 한거번에 더 많은 쌀이
나오라고 구멍을 작대기로 쑤신뒤 부터 쌀은 나오지 않고 물이 나왔다 한다. 현재도 독성각아래인 미륵 바위아래에 작은 샘터가 있다.

독성각

독성각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바위밑의 모습

 
독성각 처마 끝 모서리에걸린 자연 암벽에 미륵바위의 장삼자락을 양각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독성존불의 본 이름은 나반존자로서 미륵존불이 출현하실때 까지
천태산에서 선정삼매에 들어 있다가 미륵존불이 세상으로 나오시면  좌보처가 되어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님으로 현재도 독성각 입구 우측에 그 흔적이 뚜렸하다.



장군기를 꽂았다는 독성각 앞의 구멍.
원효대사는 미륵암에 주석을 하며 미륵삼부경중 상생경종요을 집필하였다하며 왜적 5만병선이 동래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첩자를 육지로 올려 보냈는데 미륵사에 머물고 있던 원효대사가 사미승에게 호리병 5개를 구해오게하여  탑앞네 나란히 세운뒤 가장 높은 바위에
신라 장군기를 꽂았다 한다. 그 장군기를 보고 두명의 첩자가 미륵암까지 올라와
대사는 호리병으로 신통력을 부려  첩자의 목을 졸랐다. 첩자들이 살려 달라고 하자 호리병 3개를 적장의 대장에게 주라며 돌려 보냈다. 화가난 적장은 호리병을 단칼에 내리쳤고 그 순간 적장은 그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죽었다 한다.









염화전의 문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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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는 후백제를 개국한 견훤 빼 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경상도 상주땅의 가현현에서 농민이었던 아버지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는 광주북촌의 부잣집 딸과 지렁이와의 사이에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어 호족의 집안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신라말에 나라의 기강이 헤이해지고 가뭄과 기근으로 전국에 농민의 반란이 자주 일어 났다. 이때를 틈타 견훤이 자신의 사병을 동원하여 무진주(현 광주)를 공격하여 무진주를 함락하고 완산(현 전주)주도 공격하여  도읍을 완산주로 정하고 스스로 백제의 왕이라 불렀다.
세력을 점차 넓혀 신라와 대적을 하고 신라와 접경지역을 함락하여 그 위세를 떨쳐 이윽고 927년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게 된다.
그 후 고려 왕건과 신라의 공산전투에서 치열한 싸움을 하여 왕건을 패하게 하고 신숭겸장군의로 인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왕건 군사와 안동에서 최후의 결전을 하지만 안동전투에 패한 견훤은 국운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전주로 돌아온 견훤은 왕이계승을 첫째인 신검에 주지 않고 네째 금강에게 왕위를 물여줄여고 하니 신검과 둘째인 양검,용검이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살해하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 미륵전 지하에 유폐시키니 견훤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망을 쳐 왕건에게 투항을 한다.
견훤은 자신이 세운 백제를 정벌 할 것을 권하며 선산에서 신검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여 왕건에게 패하고 양검과 함께 왕건에게 투항을 하니 삼국통일이 이루어진다. 금
산사의 돌무지개문은 견훤이 신검에게 유폐될때 이문으로 통해 금산사로 들어 갔다합니다. 비운의 석문은 그 때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월의 흐름 앞에는 위풍당당한 돌무지개문도 어쩔 수 없는지 복원공사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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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악산 금산사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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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금산사계곡에 걸쳐 있는 해탈교를 올라서야만 금산사 경내로 들어 갈 수 있다.
 세속의 모든 번뇌와 찌꺼기를 벗어 버리고 오라는 뜻 인지 그 이름 또한 의미가 크다. 먼저 반기는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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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문이다.
속새의 인간은 금강이란 예기만 들어도 무엇인가?
특이하고 깨끗함이 있어 근접하기가 힘이 들 것으로 생각한다.
야생화에도 애기나리보다 금강애기나리, 금강초롱등 수많은 꽃에도 금강 이름만 붙어도 한층더 고귀함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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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밀적금강, 나라연금강, 문수동자, 보현동자 의 모습이 수호신 처럼 모서져 있다.
아쉬움은 앞으로 그물망이 쳐져 있어 보는 이를 안타갑게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밀적금강:금강의 무기를 가지고 부처님을 경호하는 야차신입니다.항상 부처님에게 친근하여 부처님의 비밀한 서적을 들으려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밀적금강:금강의 무기를 가지고 부처님을 경호하는 야차신입니다.
항상 부처님에게 친근하여 부처님의 비밀한 서적을 들을여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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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연 금강:천상의 역사로서 그 힘은 코끼리의 백만배쯤 된다고 합니다. 나라연과 같은 힘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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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동자:보현보살이 동자로 화현 한 것으로 석가모니불의 우협시보살로 진리의 광대행을 맡고 있으며 행원의 실천을 나타내기 위해 코끼리를 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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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동자:문수보살이 동자로 화현한 것으로 석가모니불의 좌협시보살로 지혜를 맡고 있으며
위험과 용맹을 나타내기 위해 사자를 타고 있습니다. 금강문을 지나면 기다리는 하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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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왕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문을 들어서면 속세와 선계의 경계선상을 가르는 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금산사를 지키는 4대천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절을 지키며
1994년 금산사를 새롭게 중수할때 건립을 하였다 합니다.
천왕문안에도 마찬가지로 4분의 수호신이 지키고 있습니다.
일명 4대천왕이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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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문울 빠져 나오면 넓은 우측 돌기둥 두개를 볼 수 잇습니다. 가지런하게 서 있는 돌 기둥은 당간지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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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보물제28호. 사찰을 상징하는 괘불이나 깃발을 세울때 버팀목으로 사용하는 석조물이다.
이 지주는 높이가 3.5m이며 양지주가 남북으로 마주보며 서 있다. 기단석과 간대를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는
국내유일의 당간지주이다. 통일신라 시대인8세기 이후에 건립되었어며 간결한 것 같습니다.
범어사 당간지주 보다는 더 기품이 있어 보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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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 거북이
흔히 빗돌의 받침으로 많이 사용을 한다.
그 빗돌의 주인을 기다리는 용과 거북이는 우리에게는 친근감을 준다. 거북이는 무병장수를 뜻하며 용은 전설속의 짐승으로 신비감을 우리에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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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루: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에 이어 만나는 보제루는 누각으로 1976년 신축을 한 현대건물이며 1998년 증축하여 금산사 개산1400주년 기념관으로 바꾸었다합니다. 지금은 학술회의, 미륵십선수련회등 강당으로 활용한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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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제루 밑을 들어서면 넓게 조성된 광장을 만나게 됩니다.
금산사를 대표하는 모든 보물들이 이름표를 달고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면에 대적광전이 우측에는 그 유명한 금산사 미륵전. 좌측으로는 대장전과 석등등 짜임쇠 있는 구조와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찬찬히 둘러보면 금산사의 역사를 피부로 느낄 수 있어며 견훤의 한숨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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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 넓은 광장입니다. 어디부터 둘러 볼까? 고민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래도 학창시절 국사 교과서에서 본 3층 미륵전이 우선이겠지예.
우측으로 압도하는 거대한 미륵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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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도 단단한 미륵전.
견훤의 아픔을 다 받아주고 그의 설음을 다 어루만져준 미륵전입니다.
3층 건물이지만 안으로 들여다 보면 뚫여 있어 1층 입니다.
미륵전은 진표율사가 미륵장육상을 봉안하기 위해 766년 혜공왕 2년애 건립한 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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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내에는 삼존상으로 미륵불, 법화림보살, 대묘상보살이 조성되어 있다. 미륵전은 원래 용리 살고 있던 연못이었으나 참숯으로 연못늘 메워 용을 쫒아내고 그자리에 미륵전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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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련대;보물 제23호로 지정,
연화대 형식으로 조각한 불상의 좌대로 높이가 1.52m, 둘레가 10m에 달하는 거대한 연화대이다.
전체가 한개의 돌로 되어 있어나, 여러개의 돌로 만든것처럼  상중하의 3단 양식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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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동 구봉산(구계산)아래에는 사명대사의 족적이 남아 있는 구계산 금수사란 사찰이 있다. 금수사란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은 사명대사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금수사에서 보면 바로 아래가 바다로 전망과 경치가 매우 뛰어난 사찰이었을 것이다. 6.25가 끝난후 피난민 들이 사찰 아래에 까지 올라와 터전을 잡고 있었지만 그 이전에는 꽤 깊숙한 사찰이었을 것이다.
금수사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최근 3.1일절에도 민족 대표 3.3인을 모시고 그외 애국독립지사 김좌진 안중근 안창호 윤봉길등 22인의 위폐를 모시고 추모 법회를 모셨다. 임진왜란과 정류재란으로 일본으로 잡혀간 우리 백성을 구하기 위해 선조는 1604년에 사명대사를 일본으로 보내게 되는 데 사명대사는 일본에 가기전에 이곳에 와 머물렀다 한다. 구계산 아래의 물맛과 뛰어난 경치를 보고는 감탄을 하며 감로금정수라 격찬을 하였다 한다. 그 후 대사의 제자가 이곳에 머물며 금수암이란 작은 움막을 짓고 현재의 금수사란 명맥으로 발전 되어 왔다. 이곳에 머물다 일본으로 건너간 사명대사는 우리 백성3500명을 데리고 귀국을 하였고 6.25한국전쟁 때에는 전쟁을 피해 내려온 피난민을 모두 받아 경내에 머물게 하였고 피난민들의 수용소를 건립하기도 하여 대중들과 함께한 사찰이다..





현재는 원효대사의 법통을 잇는 원효종의 총본산이며  사명대사와의 깊은 인연으로 대중불교에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버스는 52번 86번 186번 38번 22번 금수사하차
연락처 051~467~3316


금수사 입구 계단으로 일명 108계단이다. 사진 작가들이 일몰을 찍기 위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금수사 뒷산이 구봉산이라 부르는 데 언제부터 구봉산이라 부르게 되었는 지는 모르지만 구계산금수암이란 표지석을 볼 수 있다.


공덕탑과 부도탑

금수사 일주문

일주문 안의 사천왕상

삼성각













법당의 본존불



금수사 입구에서 본 부산항. 멀리 용호동 신선대 부두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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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청도여행)금천면 미륵당 박곡동석가석조여래좌상. 부처님의 얼굴일까?. 함몰된 얼굴이지만 예술성이 뛰어난 박곡동석조석가여래좌상입니다.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미륵당마을안에는 보호각안에 불상이 안치 되어 있다. 대비사 가는 길목에 예사롭지 않은 모습으로 않아 있는 석조석가여래좌상으로 보물제203호로지정 되어 있다. 전체적인 크기는 276CM이며 어굴은 윤곽을 알 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이 심한 상태이지만 석굴암의 본존불과 조각수법이 비슷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불두는 함몰되었지만 지금의 그 모습으로도 예술적 가치를 인정 받고 있어며, 떡 벌어진 어께하며 힘과 기상이 넘치는 뛰어난 작품이다.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상,중,하대로 구분되며 8각으로 연꽃모양을하고 있다.




박곡리 마을에 안치되어 있는 보물203호 석조석가여래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다.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먼저 탑의 일부분을 볼 수 있다.









석조석가여래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각


찾아가는 길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열차와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부산역에서 청도행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 출발시각은 오전 5시10분, 5시45분, 6시40분과 50분, 7시50분, 9시10분, 10시30분 등이다. 1시간 걸리며 4800원(주말 5000원). 청도역 앞 청도시외버스터미널에서 운문사행 버스를 타고 금천면 동곡에서 내린다. 오전 9시20분, 10시10분, 10시50분에 있다. 1시간 걸리며 3500원. 동곡정류장에서 산행 기점인 박곡리로 가기 위해서는 마을버스를 타야 하는데 15분 걸린다. 박곡리 입구 정거장에 하차. 오전 9시45분, 11시30분, 오후 4시10분, 6시10분 등 하루 6회 운행한다. 요금은 1000원. 동곡정류장 입구에 있는 개인택시(054-372-3066)를 이용할 경우 요금 5000원.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는 대구-부산 고속도로를 타고 청도TG에서 내려 밀양·청도 방면 25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했다가 곧바로 경주·운문 방면 20번 국도로 좌회전한다. 운문사 방향으로 동곡재를 지나 동곡리 사거리에서 직진한 후 남양·오봉 방면 919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 동창천을 건너 '대비사 6㎞'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해 들어가면 박곡리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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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증심사*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

소재지:광주시 동구 운림동



통일신라시대 철감선사 도윤스님(798~868)에 의해 창건 되었다 한다.

1094년인 고려 선종 11년에 혜조국사가 다시 짓고 세종25년인 1443년에 세 번째로 지었다 한다. 그후 정유재란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1년인 1609년 석경, 수장, 도광 세 선사에 의해 네 번째 중수되었다. 그러나 그후 6.25전쟁때 모든 건물이 불타 버리고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지만 1970년대부터 현재의 건물로 복원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등산 증심사의 일주문
천년의 세월만큼 많은 부도탑이 서 있다.



증심사의 화려한 대웅전으로 6.25전쟁때 소실된 것을 1970년 이후에 중건되었다.








사문유관상과 유성출가상의 그림글이 대웅전 한켠에 그려져 있다.
지장전












*증심사 석조보살입상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







고려시대에 만든 불상으로 원래에는 담양군 남면 정곡리 서봉사지에 있던 것을 증심사로 옮겨 온 것으로 전해진다.상중하의 대석과 바닥돌을 갖추고 머리에는 원통형의 보관을 올리고 얼굴은 갸름하면서 은은힌 웃음을 띠고 있고 우아항 기품이 흘러나온다. 대석에 세겨진 화려한 연꽃무늬와 목에 장식한 목걸이, 부드러우면서도 고운 옷무늬의 선은 따뜻한 숨결을 느끼게 한다. 이와 비슷하게 보관을 서고 있는 형상은 국보 제124호 한송사석조보살좌상과 보물제139호 월정사석조보살좌상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증심사 오백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제13호


오백전이 안치된 건물은 정면 3칸, 측면3칸의 단층의 맞배지붕으로 단아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거친돌 허튼 층 쌓기 기단위에 기둥을 세우고 소의 혀 같은 장식을 낸 겹처마집이다.

1443년에 세 번째 지어진 건물이 정유재란 대 모두 불타버려 광해군1년인 1609년 석경, 수장,도광스님에 의해 다시 지어 졌으며 현재의 오백전도 그 때 지어졌다 한다. 6.25 전쟁때에도 증심사의 모든 건물은 소실 되었지만 오백전만 살아남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한다.


*증심사 삼층석탑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제1호




높은 2중기단에 3층으로 탑을 쌓았고 노반위의 상륜부 유실되었다.

지붕돌의 층급은 4단으로 층을 이루고 지붕모서리의 치올림한 곡선이 매우 아름다운 신라하대의 작품이다.1971년 12월에 해체후 복원을 할때 석탑안에서 유물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도굴 된 것으로 추측이 된다.

*증심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

보물제131호


증심사 비로전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좌상은 장흥의 보림사, 철원의 도피안사 불상과 함께 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철불상이다. 부처의 손모양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이 감사쥔 지권인을 하고 있으며 신체비례가 인체와 비슷한 등신상이다.

1934년에 대왕사 절 또는 계냇개게 절에서 옮겨 왔다고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안내판 발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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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600호

소재지: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산11 약사암


약사암 대웅전 안에 안치 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시대인 9c때의 작품으로 1976년 8월4일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의 불상에서 보면 광배가 떨어져 나가고 없어며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호남지방에서는 극히 보기드문 불상이다. 현재 원형이 거의 보존되어 있으며 불두는 나발위에 육계가 사발처럼 넓고 억굴은 둥글 넓적하다. 불상을 보면은 우리부리한 모습으로 보이며 백호와 초생달 같은 짙은 눈썹과 옆으로 긴 눈과 깨어진 코, 입술이 도톰하게 조각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귓밥이 짧은 모습이며 어께는 남성미가 물신 풍기며 앞가슴 또한 뚜렷하게 나타난다. 법의는 오른쪽 어께를 드러낸 한쪽만 걸친 모습으로 옷주름은 다리의 아래까지 덮고 있다.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상중하대로 연꽃무늬로 1개의 돌로 각각 다듬어 놓았다.




(좌상 뒷면에 새겨져 있는 관음보살상의 모습입니다.)

*무등산 약사암
소재지: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산11

약사암은 의제 백물관에서 0.8km 더 올라가면 새인봉 삼거리 직전에 좌측으로 약수암을 만날 수 있다. 철감선사가 증심사를 짓기 전에 먼저 약수암을 지었서며 약수암에서 기거하며 증심사를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다. 약사암의 대웅전에서 정면으로 바라 보이는 바위 암봉이 새인봉으로 사인암(舍人岩)이라 이야기를 하며. 천제단을 향하여 임금과 신하가 서로 받드는 형국이라 한다. 그리하여 새인봉과 천제단, 대웅전이 서로 일직선상에 위치를 하여 명당 터로 알려져 있다.







약사암의 대웅전에서 정면으로 바라 보이는 사진상의 좌측 바위 암봉이 새인봉으로 사인암(舍人岩) 또는 사인봉이라 이야기를 하며. 천제단을 향하여 임금과 신하가 서로 받드는 형국이라 한다. 그리하여 새인봉과 천제단, 대웅전이 서로 일직선상에 위치를 하여 명당 터로 알려져 있다.

석조여래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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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뒤로 솟은 유가바위의 암봉을 볼 수 있다. )
비슬산에는 천년 고찰 유가사가 있다.
흔히 천왕봉을 최근에 와서는 대견봉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대국 즉 중국의 당나라 태종이 세숫대야에서 보았다하여 비슬산 최고봉을 대견봉이라 부른다한다.
그 대견봉아래 유가종의 총본산격인 유가사가 천년의 풍경소리를 이어오고 있다. 신라 흥덕왕 2년인 827년에 도성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한다.
유가사 뒤의 암봉이 유(瑜:아름다운 구슬) 가(伽:부처님) 즉 아름다운 구슬이 부처님을 형상화하였다 하여 유가사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실제로 유가사 뒤 유가바위를 보면 둥근 구슬 같기도 하고 부처님 같기도 한 모습으로 유가사를 지키고 있다.
889년인 진성여왕3년때 원잠선사가 중수하였고 천년의 세월을 이어오는 동안 학변선사, 일행선사등 여러 스님들에 의해 중수되는 과정을 거쳐 1682년인 숙종때 도경화상이 대웅전을 보수하고 그 뒤에 낙암선사가 다시 중수하였다한다.
천년의 역사동안 많은 고승대덕이 열반에 들었는데 유가사 서쪽 500m에 부도밭이 있어 15기의 부도탑이 조성되어 있다. 지
금 유가사 아래편 화강암 바위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을 하고 있다. 시의 구절구절을 바위에다 글을 새겨 유가사를 더욱 풍요롭게 하고 있다.

(유가사 일주문. 유가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며 주차장 인근에 있다.)

*유가사 석조여래좌상

유형문화재 제50호

소재지:대구시 달성군 유가면 양리144


유가사 석조여래 좌상은 불상과 대좌가 모두 같은 재질의 화강암으로 조성 되어 있어며 얼굴과 무릎은 부분적으로 시멘트로 덧칠을 하여 보수를 하여 눈에 거슬리지만 전체적으로불상의 원래 모습을 그대로 유지를 하고 있다.
불상의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고 상투머리인 육계가 정수리에 높이 솟아 있다.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가 뚜렷하고 얼굴은 갸름한 형태를 하고 있다.

유가사 입구의 소나무와 등산객들...
유가사입구에 있는 비슬산가는길 싯귀





좌측의 둥근바위가 유가바위로 아름다운 구슬같은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측의 큰바위는 병풍암이다
유가사 부속암자인 수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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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지리산 칠선계곡 입구인 추성동 서암정사의 석굴에 조각된 불상을 현대 불교의 예술품으로 극찬을 하고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는 꽤 이름 난 절이다.
 서암정사와 상벽을 이룰 수 있는 곳이 부산 금정산에도 있어 소개를 한다.

(화병을 든 11면 관음보살상)

예로부터 금정산에는 만덕고개가 있다. 동래에서 구포로 넘어 다닌 이 고개에는 도적들이 숨어 있어 산 아래 주막집에서 사람들을 모아 고개를 넘어 다녔다 하여 만명 즉 많은 사람들을 모아 넘어 다닌 고개라 만덕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만덕고개 옆에는 만덕사지란 폐사된 절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만덕고개로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만덕고개 위에 1930년에 조성된 암자가 있으니 이름하여 병풍암 석불사라 하였다.

유년 시절 소풍을 간 기억으로 보면 병풍암에 들어가서 입 쩍 벌리며 나온 신기한 추억도 있다. 그 만큼 나의 유년시절에 병풍암(그 당시 병풍암이라 기억됨)은 경주 남산의 문화유적지 그 이상이였다. 최근 들러본 병풍암은 석불사을 잘못 알고 있었는 것 같다. 조각이 된 바위 전체를 병풍암으로 불렀는데 그게 나의 뇌리에 각인이 되어 있었는 것 같다.


1930년에 조용선 선사에 의해 조성된 젊은 사찰로 범어사 말사로 소속이 되어 있다. 먼저 입구를 들어서면 볼 수 있는 법당의 모습이 여느 사찰과 다른 돌집을 만난다. 일반 절집과 달리 팔작지붕이 아닌 돌집으로 된 사연이 있다.
창건 당시에는 변변한 산길 조차 없을 때라 법당을 짓는 다고 건축자재를 나를 수도 없고 하여 병풍암의 바위를 불상으로조각하며 나온 석재조각을 가지고 건물을 올리다 보니 종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돌로 지어지게 되었다 한다.
지금이야 차도 오를 수 있는 도로가 뚫여 있어 쉽게 오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아주 아주 오지속의 사찰이었다.

석불사 창건후 1940년부터 "ㄷ“자 면의 바위에 하나하나 조각하여 내려간 불사는 장장 30년의 세월속에 이루어 졌다 한다. 각면마다 새겨진 예술품은 29개로 단위 사찰로는 전국에서 최다이며 그 중에서도 입구에서 보면 정면에 새겨진 11면 관음보살상은 현대 예술의 대표작으로 꼽아도 남음이 있다.
관음보살 좌우로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사천왕, 16나한등 석불사의 큰 암벽에 새겨진 조각 예술품에 압도를 당하고도 남는다.
석불사에서 바라보는 전망 또한 예사롭지 않아 수영 벡스코와 광안리 앞바다, 광안대교 그리고 영도 봉래산 백양산등 남쪽의 산들을 모두 볼 수 있어 빼어난 경관에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사천왕상과 비로자나불

앉아 있는 사람과 사천왕상의 크기를 비교해 보세요.





병풍암에서 조각을 하고 떨어져 나온 돌로 쌓아 올린 대웅전의 모습. 그 뒤의 바위가 병풍암입니다. 그 아래 바위면에 29개의 예술품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석불사 입구의 모습으로 지금은 절 입구까지 도로가 뚫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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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석불입상
1963년 1월23일 지정
보물제63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65-1

경주 남산 기슭의 선방사터 인근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 이 석불들은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三尊佛)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인  7c 작품으로 보인다. 삼존불 인근에는 삼불사란 작은 사찰이 있다.



본존불은 머리에 상투모양으로 된 육계가 이중으로 처리 되어 있으며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표면이 매끄러우며 얼굴이 풍만하고 보조개가 뚜렷하게 처리되었고 아래로 내려 뜬 눈, 지긋이 다문 입, 통통하게 살이 오른 빰, 둥근눈썹은 인자하고 온화한 불성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불균형 스러운 모습으로 조각되어 더 친근감이 간다. 한장의 바위에 조각을 하였다.






관음보살상으로 화려한 수법으로 조각을 하였다. 머리에 보관을 쓰고 만면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보살상으로 입체감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왼손을 가슴까지 올리고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내려 굵은 목걸이를 잡고 있다. 머리 뒷부분인 보관에 새겨진 4기의 좌불상 을 볼 수 있다. 발아래에도 연꽃대좌로 처리를 하였고 한 장의 바위에 조각을 하였다.













대세지 보살상은 좌측의 관음보살상 보다는 간결하게 처리를 하였다. 그러나 본존불에 버금가는 중후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불상으로 입가에 퍼지는 온화한 미소와 장식을 간결하게 두른 것으로 처리를 하였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올리고 왼손은 자연스럽게 내려 보병을 잡고 있다. 한장의 바위로 조각을 하였다.







삼존불을 찾아간 이날 추운 날씨에도 기도를 하시는 분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환한 미소를 머금은 삼존불이 이분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삼불사의 모습입니다.


삼불사의 삼존불을 안치하는 보호각입니다. 한때는 이보호각 밖으로 담장을 둘러 놓았는데 최근에 문화재를 보호하는 보호각이 문화재를 훼손한다는 지적에 따라 담장을 철거하였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석불입상은 온화한 미소를 가진 불상으로 자연채광에 의해 미소짓는 불상의 모습이 압권이라 하는데 아직은 보호각이 천장을 덮고 있어 어두운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하루 빨리 특별한 대책을 세워 햇빛을 받고 미소를 짓는 삼존불을 만나고 싶습니다.



*찾아가는길:경주터미널에서 500번501번502번등 봉계행 방향의 버스를 이용하여 망월사,삼불사 정류장에 하차를 하면 됩니다. 요금1500원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unisearch/Uniresult_Db_View.jsp?VdkVgwKey=12,00630000,37&queryText=경주배리석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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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근곡과 유학사

(여근곡 입구의 유학사 전경)

삼국유사 선덕여왕의 지기삼사에서 보면 여근곡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라 27대 선덕여왕 5년인 636년 영묘사 옥문지에서 한겨울철인데도 불구하고 개구리가 사나흘을 계속 울어데니 신하들이 괴이한 일이라 여겨 선덕여왕에게 보고를 하니 선덕여왕은 알천과 필탄 두 장수에게 병력 2000명을 주어 서쪽 오봉산 아래 백제군이 숨어 있어니 습격하여 죽여라 명을 내린다.
오봉산 아래 여근곡에 당도해 보니 선덕여왕의 말대로 500명의 백제군이 매복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기습하여 전멸을 시키고 돌아와 궁금함을 왕에게 여쭈어 보았다.

선덕여왕은 말하기를 “밤낮 없이 울어데는 성난 개구리는 병사의 상이요. 옥문은 곧 여근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색은 곧 서쪽을 의미하여 서쪽 여근곡에 적이 숨어 있슴을 알았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기마련이라 쉽게 백제군을 섬멸할 수 있었다”하며 들여준다. 이야기는 선덕여왕 지기삼사의 두 번째 이야기이다.



(여성의 중요부분 중심부로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일정한 수량의 샘물이 흘러나온다)

그 여근곡이 경주시 건천읍 신평리로 그 아래 들판을 썹들이라 부른다. 유별난 사람들은 발음이 씹들과 비슷하고 그 뒷산을 여근곡이라 하여 농으로 씹들이라 부르기도 한다.
여근이 있으면 남근이 있는 법. 여기 여근곡에도 남근의 산이 있다 한다. 한때 오봉산에서 내려온 능선이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건너편의 용명리까지 연결 된 곳에 남성을 상징하는 ?산이 있었다 한다. 지금은 도로가 새로 생겨 깍여 나가 원래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지만 마을 사람들의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지금은 큰 하천인 대천이 흘러가고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지만...여근곡 찾아가는 길은 윗장시 마을에서 하차를 하여 여근곡. 여근곡 전망대 안내판을 보고 좌측으로 걸어 들어가면 된다. 불지를 지나 여근곡전망대를 참관하고 다시 나와 유학사 표지판을 따라간다. 유학사는 여근곡의 중심부인 우측 아래에 위치를 하고 있다. 창건연대는 60여년전에 창건을 하였는데 옥문지를 지키는 수호사찰로 인정이된다. 별다른 단청도 하지 않은 원래의 모습 그대로 수수함을 간직한 사찰이다. 유학사는 특이하게도 두 신을 모시고 있다. 제일 왼쪽에는 산신각을 그리고 그 아래 용왕당을 모시고 있다. 그 좌측으로 여근곡의 샘터에서 흘러나오는 청정수가 있다. 샘터 좌측 돌계단을 오르면 여근곡으로 갈 수 있다. 여자의 핵심 부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샘으로 한때는 외지에서 온 남성들이 이 핵심에다 막대기로 휘저어면 동네에 있는 아낙들이 바람이 난다며 장난삼아 샘터를 휘젓었는데 유학사에서 언제 부터인가 호스를 연결하여 아예 여근의 흔적을 찾을 수 없도록 해 놓았던 것을 보았다. 최근에 방문을 다시 해보니 연결해 놓은 호스는 따로 있고 그 부분에도 샘을 조성하여 물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다시 해두었다. 이 여근곡은 조정의 관아에서 관리를 파견하면 영천을 거쳐 경주로 내려 오면 빠른데 여근곡 앞을 지나면 재수 없다고 영천에서 지릿재를 거쳐 안강으로 해서 돌아 왔다고 하는등 여근곡을 두고 무수한 이야기가 있다. 그 여근곡이 지금은 새로운 관광명소로 거듭나게 될 것 같다. 경주시에서 새롭게 여근곡을 관광명소화할 움직임을 볼 수가 있었다.



용왕당괴 산신각을 모시고 있다.



대웅전 안의 모습


여근곡 샘터에서 호스를 연결하여 물맛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여근곡 맞은편의 산으로 앞의 작은 능선에 남근을 상징하는 산이 있다한다. 지금은 도로 개설로 인해 확인하기 힘들지만 마을 사람들의 구전으로 확인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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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배리 윤을곡 마애불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5호

소재지:경주시 배동 산72-1


경주 남산에 있는 윤을곡 마애불좌상은 포석정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포석정 주차장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남산 순환도로 올라가는 임도 길이 있다. 그 임도를 따라 900m올라가면 좌측으로 70m를 알리는 이정표와 만난다. 윤을곡 마애불 좌상은 "ㄱ“자 형태의 모습인 암벽에 새겨진 불상으로 동쪽면의 한분을 새겨놓은 분은 약사여래불이며 북쪽면인 좌측 두분중에도 한분은 약사여래불를 돋을 새김하였다.

 


 

 

바위면 양 안쪽에 계시는 두분은 안쪽을 파고 밖의 선을 돌리는 기법을 사용하였서며 중앙의 불상은 본존불로 연꽃대좌에 앉아 있는 약사여래불이며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얼굴은 크고 양족의 귀는 어께까지 내려와 크게 표현을 하였고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를 크게 나타내었다. 몸은 목을 약간 움츠리고 어께를 들어 올렸으며 가슴은 볼륨이 없는 빈약한 편이다. 오른쪽 독립적으로 있는 불상은 좌측 본존불 보다 조금 작은 108cm이다. 얼굴이 길고 턱은 각이 졌고 양감이 있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다. 본존불 처럼 몸은 움츠리고 양 어께는 올라가 있으며 상체에 비해 하체가 높아 서로 비례가 맞지 않는다.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손가락을 약간 구부린 형태이며 왼손은 배에다 대고 약함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여래불로 보고 있다.

왼쪽 불상은 세불상 중에 가장 예술성이 떨어지는 불상으로 이불상 어께 위 부근에 태화 9년 을묘라는 명문이 새겨진 것이 확인되어 신라 흥덕왕 10년인 835년에 조각된 불상임을 알 수 있고 한곳에 약사여래불을 두분 모신것이 특이하다. (안내문에서 내용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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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입곡 석불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4호
지정일:1979년1월25일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86-3

경주 국립공원의 남산을 야외 박물관이라 말한다. 금오봉에서 내려온 능선인 삿갓봉 아래 삿갓골 마을 인근에 위치를 하고 있다. 배동 함월사 좌측에 위치한 입곡석불두는 모두 세 개로 나누어져 전시되어 있다. 2개 바위돌을 조각하여 1개는 입상의 부처님을 만들고 1개의 바위는 대좌를 만들었는데 입상의 부처님은 중간에 두동강이 나 있고 대좌 또한 께어져 주위에 나뒹굴고 있던 것을 근래에 붙여 놓았다 한다. 입상과 함께 뒷 광배의 조각솜씨도 매우 섬세하며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배를 보면 연꽃 위에 앉아 합장하고 있는 좌불상이 하늘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 들고 광배와 부처님을 하나의 바위에 조각하여 예술성을 더욱 높였다. 아쉬운점은 훼손상태가 심해 광배의 윗부분도 깨어지고 석불의 코를 떼내 갈아 먹어면 아들을 낳는 다는 민간신앙 때문인지 코 부분이 떨어져 나가 있다. 불두는 머리 위에 상투처럼 불쑥 올라와 있고 근엄하면서 이목구비가 뚜렷한모습이다. 어께 위 까지 축 처진 큰 귀와 목에는 삼도로 3개의 선을 표현하였다. 대좌는 하나의 바위에 홈을 파고 연꽃으로 마무리를 한 연꽃대좌로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시대 여래입상으로 추측하고 있다.
*교통편은 대릉원이 있는 네남사거리 앞 정류장이나 터미널, 경주역에서 500번501번 502번등 봉계방면의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1500원 .배동 삼릉앞에서 하차하며 함월사 좌측에 있다.





불두를 보면 코가 훼손되어 있고  축처진 귀가 매우 크며 근엄한 형상을 하고 있다.
큰 귀와 목에 3개의 선을 그어 삼도를 표현하였다. 

광배에는 연꽃위에 합장을 하며 좌불하고 있는 부처님이 새겨져 있으며 연꽃대좌로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입곡석불두의 뒷모습입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21,009400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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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관사는 천관산의 북서쪽인 관산읍 농안리의 용소 골짜기인 해발 300m에 위치를 하고 있다. 절터의 앉은 지형이 특이한 모습으로 갑자기 바닷가에서 솟은 특이한 지형위에 넓은 분지를 이루는 이곳에 신라시대 진흥왕때 영통화상이 창건을 하였다 한다. 창건당시에는 화엄사란 꽤 큰 사찰로 주위에 89암자를 거느린 대 사찰이었다 하나 지금은 그저 조계산의 승보사찰인 송광사 말사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천관사의 폐찰에 대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어나 바닷가에 위치한 관계로 임진왜란등 많은 외침으로 인해 사찰의 규모는 급격하게 축소된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래도 1659년 에 간행된 지제산사적기에서도 천관사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으며 조선 후기에 와서도 천관사 극락보전을 중수하며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까지도 절의 규모가 남아 있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현재 사찰의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은 1963년 와서 장한택 스님이 대웅전과 칠성당을 중건하면 서 부터이다 현재는 대웅전이 극락보전으로, 칠성당은 도통스님이 다시 중창을 하며 삼성각으로 바뀌었고 아마 최근에 와 범종각이 새로운 모습으로 건립이 되었다. 현재 천관사는 2008년 10월부터 너른 터에 문화재 발굴작업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천관사삼층석탑(보물795호) 석등(전남유형문화재제134호), 5층석탑(전남유형문화재제135호)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고 천관산의 특이한 산세로 인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한다.


대웅전이었는데 1963년에 극락보전 바꾸어 오늘에 이름
극락보전 내부에 모습으로 삼존불이 모서져 있다.
칠성각의 건물을 삼성각으로 바꾸었다 한다.

*천관사삼층석탑(天冠寺三層石塔)

보물 제795호
지 정 일: 1984.11.


극락보전 좌측 한켠에 떨어져 있는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깔끔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천관 보살을 모섰다는 천관사의 삼층석탑은 기단은 2단이고 3층의 탑신을 올린 고려시대 작품이다.

탑신을 받치고 있는 기단은 아래·위층 모두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본떠 새겨두었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아 올렸으며, 층마다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 형태의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게 4단씩이고, 윗면에 흐르는 경사가 아래로 내려올수록 완만하며, 네 귀퉁이에서는 경쾌하게 치켜올라 세련된 느낌을 준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露盤)과 둥그런 복발(覆鉢)이 한돌에 새겨져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비례감이 알맞아 안정감이 느껴지며 단아함을 풍긴다. 기단 각면의 가운데기둥이 생략되고, 지붕돌의 받침이 얇아져 퇴화된 수법을 보여주는데, 이는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시대가 바뀌면서 일부 양식이 지방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들을 통해 이 탑은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 입니다.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12,07950000,36

*천관사 석등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4호)
지정일:1986년 2월7일
소재지:장흥군 관산읍 농안리 740


천관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석등으로 절에 불을 밝혀두었을 때 사용을 하는 것으로 등불을 밝히는 부분을 화사석(火舍石)이라 한다. 화사석은 동서남북 네군대에 창을 만들어 불빛이 퍼저 나가도록 하였다 . 아래에는 3단으로 받침을 두었고 받침부분에는 아래로 향하는 연꽃을 세기고 윗받침에도 연꽃을 새겨 서로 대칭을 주었다. 그 중간에 육각의 기둥을 세웠다. 연꽃 무늬를 새긴 아랫단 아래에는 8각으로 된 1개의 넓은 돌을 깔고 각면에는 안상을 넣은 것을 볼 수 있다. 지대석은 4각의 넓은 돌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주었다. 화사석 위로는 지붕돌을 올렸는데 아랫부분은 평면이지만 위선은 귀퉁이가 모두 올려간 것을 볼 수 있다.



그 위로 연꽃봉우리를 올려 놓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입니다.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21,01340000,36&queryText=V_KDCD=21

*천관사5층석탑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5호
지정일 : 1986.02.07


천관사에 서 있는 5층 석탑으로, 1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좌우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윗면은 경사가 매우 급하며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남아 있다.

2층기단이 주류인데 반해 1층으로 줄어들고, 지붕돌 받침도 3단으로 줄어드는 등 통일신라의 전형 양식에서 벗어나 있어 고려시대의 석탑임을 추정 할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입니다.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21,01350000,36&queryText=V_KDCD=21

2008년 10월 부터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천관사 좌측에서 본 모습입니다.

극락보전과 삼성각은 초라한 모습이지만 최근에 조성된 범종각은 화려하고 사찰의 규모에 비해 웅장하다.

종의 문양



천관사 뒤편의 천관산은 하늘의 면류관을 쓴듯 각종 바위의 전시장으로 천관사에서 보는 산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찾아가는길:승용차 이용시 순천I.C~장흥~벌교 장흥 순천만 2번~고흥 벌교 장흥 강진 낙안민속마을 2번 좌회전~청암대학앞 장흥 보성 벌교 2번~장흥 벌교 나로 우주센타~목포 벌교 2번~목포 보성 장흥~목포 장흥 보성차밭~목포 장흥 제암산 천관산~천관산 목포 장흥2번도로~목포 강진 ~천관산 관산 23번 지방도 우회전 후 좌회전(순지교차로)~굴다리~대덕 관산 23번지방도~천관산9.5km안내판~관산 우측 837번 지방도~관산읍소재지~ 칠량 837번 우회전~ 용전리 와룡마을~천관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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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는 많은 사찰들이 있다 이름만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유명한 사찰인 금정산 범어사 삼광사 해동용궁사등 많은 사찰이 있지만 부산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사찰이 기장군에 위치를 하고 있다. 벌써 아~ 그 절. 하시는 분이 있을 것이다. 장안사계곡에 터를 잡아 주위 연봉이 연꽃 봉우리 속의 꽃술에 해당하는 터에 자리를 잡은 장안사는 그 깊이 만큼 내면으로 들여다 보는 맛이 있는 절집이다. 

<불광산 장안사의 대웅전과 부처님 진신사리 7과를 봉안한 삼층석탑>

불광산 장안사는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척판암을 창건한 원효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쌍계사로 부르다가 애장왕이 들런 후 장안사로 개칭을 하였다한다. 장안사는 별 두렷한 문화재는 보유하고 있지 않지만 원효대사가 “해동원효척판구중”의 척판암과 함께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1592년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인조16년인 1638년에 대의 선사에 의해 다시 중건을 하였고 1654년 효종5년에 원정, 학능,충묵스님에 의해 대웅전을 중건하였다한다, 대웅전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 37호이며. 경내 에는 대웅전 (大雄殿)이외에도 명부전 (冥府殿), 응진전 (應眞殿), 산신각 (山神閣) 등이 있다. 장안사 홈페이지를 보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대웅전

부산기념물 제37호

지정연도 1995년 3월 1일

소재지 부산 기장군 장안읍 장안리 598


대웅전은 모든 사찰의 중심건물로 장안사도 예외가 아니다.

대웅은 부처님의 덕호(德號)로 대웅전은 석가여래 부처님을 봉안한 곳을 말해 모든 사찰의 중심건물이 된다. 장안사 대웅전은 여느 사찰과 마찬가지로 삼존불을 모시고 있는데 가운데 석가여래 부처님을 좌측으로 약사여래불, 우측으로 아미타여래불을 모시고 있다. 1654년 중건 된 것을 1948년에 각현이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1975년에 단청을 새로 하였다 한다. 대웅전의 건축양식은 팔작지붕을 얹었고 겹처마로 공포는 다포양식이다. 정면3칸 측면 3칸으로 규모가 큰편이다.

*명부전



지장보살님과 10대 대왕을 모셔놓은 곳으로 지장전 (地藏殿) 또는 시왕전(十王殿)이라고 한다 지장보살님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이 없어질때까지 성불을 하지 않겠다고 서원을 세운 지옥세계의 부처님으로 추앙받는 보살님이고 십대대왕(十王殿)이란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 있는 명부시왕들(십대대왕)에게 심판을 받게 되는데, 49일간 일곱명의 왕에게 심판을 받아서 죄의 경중에 따라 다음생의 갈 곳이 전해진다고 한다. 우리가 49제를 지내는 것도 49일 동안 망자의 공덕을 짓기 위해 지내는 것이다

*응진전




나한전을 응진전이라고도 하는데 응진(應眞)이란 '존경받을 만하다','공양받을 만하다' 라는 의미를 뜻한다한다. 나한전의 나한은 석가모니불의 직제자 가운데 정법을 지키기로 맹세한 16나한이나, 경전결집에 참여했던 500나한을 모시기도 한다. 또한 나한은 미래불인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중생들을 제도하라는 부처님의 수기를 받은 분들이라

*극락전

와불복당에 부처님 진신사리 봉안. 장안사에서도 불기 2535년 부처님 진신사리 7과를 봉정받아 3층 석탑에 봉안하였다. 이 진신사리는 불기 2523년 혜명선사께서 태국에서 모시고 오신것이다. 그리고 불기 2543년 사부대중의 지대한 원력으로 부처님 진신사리 3가를 봉정받아 극락전 와불 부처님 복장에 봉안하였다.

이 진신사리는 미얀마 마웅매이 절 원로의장이신 고승 우뚜리야 샤야도우 스님이 장산스님께 봉정한 것을 큰 인연으로 장안사에 봉안하게 되었다 한다.

장안사로 걸어가다 보면 우측으로 볼 수 있는 글씨입니다.

주차장에서 장안사로 들어서는 입구에 대형 표지석이 서 있다.
들어서는 우측에 석불과 석탑, 석등이 진열되어 있다.
달마대사께서 오신 뜻은 의 아리송한 글귀와 동그라미가 무엇을 의하는지...모든 만물은 둥근 우주에서 온다는 뜻일까?
달마대사상과 주변의 불석들...
2층으로 된 일주문을 들어서면 사천왕상이 조각되어져 있어 특이하고 2층의 누각은 법종각이다.
<사천왕상의 모습입니다>

일주문에서 본 대웅전과 삼층석탑입니다.


대웅전 안의 삼존불로 중간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셨고 우측으로 아미타여래불,좌측으로 약사여래불을 모셨다.
대웅전의 문살입니다.
1975년 단청을 새로 하였지만 지금 현재의 모습은 빛바랜 전통의 건축물로 바뀌어 있다.
대웅전 현판의 모습과 화려한 단청으로 보는 사람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이 찾는 유서 깊은 좌천 장안사

산신각입니다.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는 산신의 모습입니다.

천년을 이어온 불상
지장보살입니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이 없어질때까지 성불을 하지 않겠다고 서원을 세운 지옥세계의 부처님입니다.

주차장에서 본 장안사 모습입니다.
위에서 본 장안사의 모습입니다.대웅전등 짜임새 있는 구조입니다.

찾아가는 길:대중교통편은 기장군 동부리 기장시장으로 가서 마을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기장시장으로 가려면 해운대 쪽에선 39, 180, 181, 1003번, 동래 쪽에서는 183, 반송에선 188번을 타야 한다. 기장시장 앞에선 일해교통 9번 마을버스를 타고 장안사 입구 상장 안마을 슈퍼 앞에서 내린다. 오전 6시45분, 7시10분, 8시20분, 9시15분, 10시5분 11시. 20분 걸리며 1000원. 장안사에서는 오후 2시30분, 3시40분, 4시30분, 5시30분, 6시15분, 7시10분, 8시10분에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송정해수욕장 입구~기장체육관~울산 온양~월내 장안사~장안사 순.

장안사 홈페이지입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더욱 많은 정보와 접힐 수 있습니다.
http://www.jangans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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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달성여행)비슬산 대견사지. 중국 당태종이 세숫대야에서 본 비슬산 대견사지와 삼층석탑

 

국립지리원의 지형도를 펼쳐보면 낙동정맥의 마루금이 사룡산에서 곁가지를 치니 이름하여 비슬기맥으로 부른다. 비슬기맥의 최고봉인 비슬산 정상을 비껴 남으로 내려간다. 대견사지는 비슬산 정상에서 남동쪽인 비슬기맥을 타고 내려서면 능선이 갈래를 진다.
좌측은 조화봉을 거쳐 화악산 또는 열왕산으로 이어지고 우측은 유가사 방향으로 대견사지를 거처 내려가는 원점 회귀 능선이다.


1035봉을 한때는 대견봉으로도 부르고 하였지만 지금은 비슬산 주봉을 대견봉으로 부르고 있다.
1035봉 아래 넓게 조성된 절터의 흔적과 삼층석탑이 자리를 하고 있다. 큰 바위들이 얽혀 있는 이곳에 석굴과 함께 비슬산의 경관을 자랑하는 전설이 중국의 당나라 황제와 함께 소문이 연관되어 있어 비슬산의 풍치가 그만큼 빼어나다는 것을 입증한다.
한때는 이 비슬산을 국립공원 까지 승격을 논의한 모국회의원이 있지만 지금은 유야무야되었다. 규모는 작은 비슬산이지만 당태종에 얽힌 사연을 알아보자.
대국에서 보았다는 뜻의 대견은 비슬산 정상의 대견봉을 두고 하는 말이다.
중국의 당태종이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세숫대야에 물을 떠와 세수를 할여는데 대야속에 산세가 빼어나고 험준한 바위 위에 지어진 사찰이 보였다 한다.
그래서 태종은 중국의 구석구석을 알아보고 수소문을 하였지만 세숫대야에서 본 그 곳을 찾지 못하고 급기야 신라에 까지 사람을 보내어 찾아보라하였는데 지금의 비슬산 대견사지를 찾아내어 지형의 산세를 그려가 당태종에거 보여주니 세숫대야에서 본 모습과 똑 같아 그곳에 절을 짓게 하였다.
이 절이 중국에서 보였던 절이라하여 대견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대견사의 축대는 아직도 온전한 모습으로 그대로 남아 있는데 골짜기를 메운 그때의 토목기술의 우수성을 짐작할 수 있다.

 

 


 

 

 

 

9세기(九世紀) 신라 헌덕왕(新羅 憲德王)때 비슬산에 지어진 대견사와 삼층석탑은 그러나 아쉽게도 임진왜란 앞에 빈대들이 많이 들끓어 폐사가 되고 만다.

속담에 “빈대 잡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것 같다. 빈대 때문에 망한 절이 대견사 말고도 울산 울주의 대원사도 있다하니 말이다.
그후 1900년경에 영친왕의 즉위를 축하 하기위해 이재인이란 사람이 절을 다시 세웠다가 1908년 이후에 다시 폐사되는 불운을 맞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견사지의 절터를 보라. 그리고 대견사지 삼층 석탑의 앉은 품새가 보통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대견사지 삼층 석탑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2호

지정일:1995년 5월12일
소재지: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용봉리 산1

(석굴안에서 바라본 삼층 석탑.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하게 연출을 해 준다.)

 


 신라 헌덕왕(新羅 憲德王)때 세워진 대견사지 삼층 석탑은 대견사지 터에 흩어져 있던 것을 달성군에서 1988년에 새로 복원을 한 것이다. 안내판을 보면은 이탑은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식으로 기단부는 2단으로 되어 있다. 탑이 위치하고 있는 큰 암반을 지대석으로 깔고 앉아 그 위에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암반위에 바로 하대기단을 그리고 그 위에다 상대면석과 상대 갑석을 다른 돌로 다듬어서 올렸다.

 

하대석에서는 양쪽의 모서리 기둥과 버팀기둥 하나을 돋을 새김 했어나 상대면석에는 양쪽에 모서리 기둥만 돋을 새김을 하였다한다. 옥개와 탑신은 돌 하나로 다듬어 올렸다. 옥개석은 4단의 지붕돌 받침과 2단의 괴임을 탑신은 모서리 기둥만 돋을 새김하였다. 기단부에 퇴화현상이 나타나고 탑모양이 전체적으로 가늘게 높이 올라가 신라시대 석탑을 벗어나 고려초기에 접어들어 조성된 것으로도 보고있다 

 

 

(정면으로 보이는 바위 틈이 석굴로 앞과 우측으로 서로 통과가 되도록 되어 있어 대견사  창건당시 부터 이용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위위에서 본 대견사 터와 삼층석탑. 그 뒤로 관기봉을 확인할 수 있다.

찾아가는길: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옛 구마고속도로) 현풍IC~대구 현풍 5번 국도~유가 1093번 지방도~유가사 소재사 비슬산자연휴양림 방향 좌회전~유가면사무소 우회전~유가사 소재사 자연휴양림 4번 좌회전~비슬산군립공원 유가사 좌회전~비슬초등~유가사~주차장 순.

<비슬산 대견사지 위치입니다=국제신문>



유가사 홈페이지를 클릭하시면 더욱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http://www.yugasa.net/bbs/bogi-bisulsan-gensel.htm?PHPSESSID=96a44a56370e2b65a460912d8e0992b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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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여행/울주여행)대운산 내원암. 빈대로 폐사된 절 대원암이 대운산 내원암으로 된 사연

대운산 내원암
소재지: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운화리 1312번지
연락처:052-238-5088

부산에 가까운 산행지는 여럿 있다. 그중 대운산은 부산 울산 양산의 산꾼들이 즐겨 찾는 산행코스이며 봄이면 진달래가 만발하고 여름철에는 수량이 풍부한 계곡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산행지이다.
한때는 대운산을 불광산으로도 불리어 졌지만 지금은 대운산으로 완전히 굳어져 불리고 있다. 대운산은 여러개의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그 연꽃송이 같은 봉우리의 중심이 영남제일의 명당이라 극찬하고 신라시대 고봉스님은 그 자리에 대원사를 창건하였다. 지금은 절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고 대원사지의 흔적도 느낄수 없지만 500년이 넘은 팽나무 한그루가 그 흔적을 대신하고 있다.
현재 그 노고의 팽나무가 신비스럽게도 코끼리의 모습을 하고 있다하여 불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수령 500년이 넘은 팽나무로 대원사지를 지키고 있다. 나무의 모습이 코끼리 형상을 하고 있는 노거수이다>


온양읍 면사무소 홈페이지에 보면은 다음과 같이 대원사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온양읍 운화리 상대(上大)마을의 절터골에는 옛날 대원사라 하는 큰 절이 있었다. 이 절은『동국여지승람』에 남목(南牧)의 열암사(裂菴寺), 연암의 백연암(白蓮庵), 웅촌의 운흥사(雲興寺), 율리의 망해사(望海寺)와 청송사(靑松寺), 언양의 연고사(連高寺),삼남(三南)의 석수사(石水寺)와 같이 등재 되었던 이름 난 절이었다.

 

그러나 대원사는 정조(正祖) 10년(1786)에 폐사되고 지금은 그 절터만 남아 있다.

대원사의 내력은 절터에 남아있던 현하당(縣河堂)이라 음각된 부도를 통해 짐작할 뿐이다.

이 부도에 새겨진 이름을 보아 현하당이란 스님이 대원사(大原寺)에 계셨던 것만 알 뿐 아무것도 남긴 사적(寺蹟)은 없다. 그러나 이 절이 망하게 된 사연에는 사람의 구전으로 내려온 전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오를 정도로 크고 이름난 절이었으니 신도들이 많이 찾아들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절에는 괴이한 주지가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아드는 것을 몹시 귀찮게 생각하여 왔다. 수도승의 입장에서 본다면 지금의 불국사(佛國寺)처럼 매일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관광 하는 것을 싫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느 날 한 도사가 절을 찾아와서 잠시 쉬게 되었다. 이때 주지의 입에서 사람들이 하도많이 와 귀찮으니 사람들이 적게 오게 할 수없을까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 말을 듣게된 도사는"그런 일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니 그리 근심치 않아도 될 일이 올시다"하였다. "마을로 내려가는 산모퉁이에 큰길을 내게 되면 소원대로 될 것이요" 하고 그 도사는절을 떠나 버렸다.

도사의 이야기를 듣게 된 주지는 산모퉁이를 헐어 길을 열게 되었다. 그런데 왠일인지 작업 중에 석불한 구가 솟아 나왔는데 이 부처는 그만 삽과 괭이에 찍혀 목이 떨어지고 떨어진 목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의 일이었다.

절에는 갑작스럽게 빈대가 들끓었다. 많은 빈대 속에서 사람들은 견디어 낼 수가 없어 쓰레받기에 쓸어담아 웅덩이에 버렸는데 이곳을 빈대소라고 한다.지금도 절터의 바위를 뒤져보면 빈대의 껍질이 나올 정도라고 이곳 사람들은 말을 하고 있다.“

대원사의 절터자리에 내원암의 절집이 아담하게 자리를 잡아 대원사를 대신하며 아래로 흘러내린 계곡을 절터골로 현재는 내원골이라한다.
이별바위, 소원바위, 나한바위, 금강폭포등 많은 기암들로 둘러 싸인 내원암 부근을 흔히 소금강산으로 부를 만큼 풍치 또한 뛰어나다.
대운산은 장안사를 위시하여 불국토의 산으로 박치골, 도통골 내원골이 상대계곡의 상류를 이루며 도통골을 올라 대운산 정상을 향하는 험준한 오르막에는 큰바위란 용심지가 있다.
이곳에 절터의 흔적과 샘터가 있어 원효의 전설이 내려온다. 원효대사께서 용심지 작은 암자에서 참선을 하고 있어니 경주 불국사에 화재가 난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옆의 제자에게 체를 주며 물을 퍼오라하니 재자는 대나무로 만든 구멍이 숭숭 뚫인 체에다 물을 받아 오라하는지 이해를 못하며 열심히 체에다 물을 담아보니 물이 빠져 담을 수가 없었다. 수십번의 노력 끝에 겨우 체에다 물을 담아 원효에게 가지고 가니 그 체를 불국사 방향으로 날여 보내 불국사의 화재를 진화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도통골인지 모르지만 ....

현재 내원암의 대웅전으로 모습이 화려하며 팔작지붕을 이고 있다.

최근에 조성한 석탑



내원암의 부속건물



대웅전 안의 삼존불상

화려한 단청의 모습과 구조입니다.





문살아래 새겨진 문양들

대웅전에 그려진 화려한 벽화들












찾아가기: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부산과 울산을 잇는 14번 국도를 타면 된다. 송정해수욕장 입구 지나~울산 온양~기장군청 지나~울산 울주군 온양읍 입간판 지나~장안사 입구 지나~상대 하대 대운산(입구에 '산여울' 간판)~대운산 내원암 계곡~굴다리 통과~대운산 제3주차장 순. 주차비 무료.

온양읍 홈페이지 바로가기
http://onyang.ulju.ulsan.kr/introduction/legend.js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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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기장여행)불광산 척판암. 판자를 던져  당나라 천명대중을 구한 원효의 척판암 가보기

 

부산시 기장군의 불광산에가면 장안사가 있다 그러나 장안사 보다도 더 유명한 사찰이 있다. 바위 절벽 밑에 붙어 있는 아주 작은 척판암은 절의 규모는 보잘 것 없지만 원효대사에 얽힌 전설이 있다. 모든 사찰치고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안 엮어진 사찰은 사실 보기 힘들다. 그 만큼 두분을 엮어야만 사찰의 대열에 끼는 것일까. 그러나 불광산 척판암은 자뭇 진지한 설화을 가지고 있다.


 

<척판암은 절의 규모가 장안사에 비해 초라하지만 원효와의 설화와 함께 전국적으로 알려진 작은 암자이다>

척판암은 신라 문무왕 1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을 하였다 한다. 그러던 어느날 스님이 참선중에 혜안으로 살펴보니 당나라 종남산 태화사의 천명대중이 장마로 인한 산사태로 매몰될 위기에 처한 것을 보시고 문짝을 떼어 해동원효척판구중(海東元曉擲板救衆) 즉 "바다 건너 신라의 원효가 판자를 던져 대중을 구한다"고 적힌 판자를 태화사로 던져 보냈다. 태화사의 대중들은 그 사실을 모른고 법당에 머물러 있는데 밖을 보니 판자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모두 그것을 쫒아 밖을 나오니 기다렸다는 듯이 산사태가 법당을 덥치니 큰 법당이 매몰되고 말았다. 이에 천명의 대중은 원효의 신통력으로 던진 판자로 인해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을 알고 신라의 불광산 척판암으로 찾아와 원효대사의 제자가 되니 원효스님은 그들을 기거할 곳을 찾아서 원적산의 내원사로 들어서니 산신이 나와 인도를 하였다 한다. 현 산신각 자리에 도착을 하니 산신은 사라지고 스님은 대둔사를 창건하고 상,중,하내원암과 천성산 골짜기에 89암자를 지어 그곳에 대중들을 머물게 하였다 한다. 흔히 천성산 공룡능선을 산행하면 집북재란 고개와 만나는데 원효스님은 1,000명의 중국스님을 통솔하기 위해 중내원암에 북을 메달아 치며 통솔 하였다 하여 집북재라하며 그옆 봉우리를 집북봉이라 한다. 그리고 1천명의 대중을 모아 화엄경을 설법한 곳이 현재 천성산의 더 넓은 화엄벌로 봄에는 철쭉이 만개하고 가을은 억새로 산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현재에도 화엄경을 놓은 자리에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1천명의 스님들이 모두 성인이 되었다 하여 원적산으로 부르던 이름이 천성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만큼 척판암은 불광산에서 대단한 조망권을 자랑한다. 앞으로는 대운산과 동해바다가 시원하게 펼처져 누구나 올라보면 넓은 혜안을 가질 수가 있을 것 같다.


부산시 기장군 장안사 옆 주차장에서 백연사 방향의 포장길을 따라가면 왼편으로 척판암으로 오르는 옛길을 볼 수 있다. 표지석과 안내판을 만나니 쉽게 찾을 수 있다.

척판암의로 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일주문으로 들어선다. 대웅전의 건물이 한일(一)자로 달랑 한채뿐인 절집이다.

일주문에 붙은 현판으로 불광산 척판암으로 적혀 있다.

이문을 들어서면 먼저 척판암의 유래가 적힌 안내판과 만난다.

척판암의 현판이 걸린 법당건물로 여기서 원효는 판자를 던져 천명의 대중을 구한 것이다.





문살의 무늬가 화려하며 연꽃무늬를 하고 있다.

문살 밑에 다른 절과 달리 보통 사천왕상의 험상궂은 얼굴을 새겨 놓은 곳은 여럿 봤지만 용을 세겨 놓은 곳은 쉽게 보지 못한 것 같다.

2007년 12월 겨울에 찾은 척판암입니다. 그때는 일주문에 단청이 입혀지지 않았는데 최근 방문시 곱은 색으로 칠한 모습이었습니다.



 

찾아가기;대중교통편은 기장군 동부리 기장시장으로 가서 마을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기장시장으로 가려면 해운대 쪽에선 39, 180, 181, 1003번, 동래 쪽에서는 183, 반송에선 188번을 타야 한다. 기장시장 앞에선 일해교통 9번 마을버스를 타고 장안사 입구 상장 안마을 슈퍼 앞에서 내린다. 오전 6시45분, 7시10분, 8시20분, 9시15분, 10시5분 11시. 20분 걸리며 1000원. 장안사에서는 오후 2시30분, 3시40분, 4시30분, 5시30분, 6시15분, 7시10분, 8시10분에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송정해수욕장 입구~기장체육관~울산 온양~월내 장안사~장안사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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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봉소형국(鳳巢形局)의 보성대원사에 가면은...에서 이어 받습니다.

앞에 연못에 걸린 작은 다리가 있군요?. 이다리를 건너 계단을 올라서면  됩니다.




연지문이란 이문을 들어서면 대원사 극락전 앞 마당으로 들어 설 수 있습니다

먼저 만나는것이 둥근 화강암위에 발문양이 새겨진 부처님의 발이라 합니다. 이 밑으로 발 예배법관한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대원사 극락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7호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 831

극락전입니다. 한국전쟁에도 화마를 비껴간  대원사에서 남아 있는 유일한 건축물입니다

극락전안에는 아미타 불을 모시고 있습니다.

극락전은 불교의 이상향인 서방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건물이다.지금 현재 남아 있는 극락전은 1757년인 영조 33년에 대화재로 소실된후 4년에 걸쳐 새로 지어진 건축물로 한국전쟁(6.25)때에는 모든 건물이 화재로 인해 불탔지만 극락전만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어 1982년에 다시 해체를 한후 복원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미타불을 모신 대원사 극락전은 앞면3칸 옆면3칸의 규모로 사람인(人)자 형태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 지붕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위 와 기둥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축양식이다. 공포는 비교적 복잡한 형태로 이루고 있으며 연꽃 봉우리등이 조각되어 있서 화려한 조선후기의 작품임을 나타내고 있다.

다포식 건물은 보통 팔작지붕인데 반해 대원사는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하겠다.

*대원사 자진국사 부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5호








자진국사 부도는 한국 전쟁때 극락전과 함게 소실되지 않고 원형 그대로 모습을 갖추고 있는 부도탑입니다. 부도는 승려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 둔 탑을 의미합니다. 자진국사는 조계산 송광사의 5대 국사로 여기 대원사에 주석하며 대원사를 고려 원종 1260년에 중건을 하였다 합니다. 자진원오국사청조탑(慈眞圓悟國師浮照塔)이라 새겨져 있으며 대원사 극락전 옆 계단위 평평한 넓은 터에 조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붉은 기운이 돌며 보기에는 바위로 조각한 것이 아닌 느낌이 들었다. 꼭 시멘트로 버물러 그 위에다 뭘 다른 분말이라 해야 할까 그런 것을 뿌려 놓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자진국사부도는 팔각원당형의 부도로 군더더기가 없는 늘씬하고 갈끔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바닥을 11개의 판석을 깔고 그위에다 2단의 지대석은 하단은 4매의 판석을, 상단은 한판의 넓은 판석을 그대로 깔고 위에다 기단석을 만들었다. 기단도 2단으로 만들었는데 아랫단은 8각형으로 한면마다 안상을 2개 새겨 넣었서며 윗단은 16판의 복련을 위아래로 균형을 주었다. 팔각형의 탑신에는 자진원오국사정조탑(慈眞圓悟國師浮照之塔)이라 음각이 되어 있고 각면에는 사천왕상의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위의 옥개석은 기왓골로 처리를 하여 무게감과 예술성을 주었다 상륜부는 평범한 3개의 둥근돌을 올려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더욱 자세한 자진국사부도탑에 대해서는 여기로http://cafe.daum.net/ygtour/7tlL/16?docid=18Qwj|7tlL|16|20080528211110&q=%C0%DA%C1%F8%BF%F8%BF%C0%B1%B9%BB%E7%BA%CE%B5%B5&srchid=CCB18Qwj|7tlL|16|20080528211110

*대원사 성모각



대원사에 가면 특이한 산신을 모셔두고 있다, 다른 사찰에 가면 산신각안에는 수염이 있는 할아버지가 옆에다 호랑이를 두고 있는 산신을 모시고 있지만 여기 대원사에는 어머니인 성모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 한국전쟁때 소실 된것을 1969년 5월 불자들의 힘으로 복원을 하여 성모각을 모셨다 한다. 어머니는 보통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하기 힘든 말은 어머니에게는 서슴없이 모든 이야기를 하듯이. 여기 성모각의 어머니산신에게도 대중들의 사소한 고민도 털어 놓을 수 있는 우리네 어머니입니다.

*신라왕자 김지장 기념관



중국 안휘성 구화산에 가면 김교각스님의 동상건립을 위해 1999년9월9일 기공식을 갖고 현재 공사중이라 합니다. 696년 신라 성덕왕의 왕자로 태어난 김교각 스님은 24세에 출가를 하여 지장이란 법명을 받았다 합니다. 스님은 신라에서 선청이란 삽살개와 오차송이란 소나무종자, 황립도라는 볍씨와 조, 금지차란 신라차를 가지고 중국 구화산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각고의 수행을 정진하고 법력으로 그곳 사람을 교화하다가 99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합니다. 794년 음력7월30일 “내가 열반한 뒤 내몸을 화장하지 말고 돌함에 넣어 두었다가 세해가 지난 뒤 열어보아라, 만일 그때까지 썩지 않으면 그대로 개금하여라”는 말씀에 따라 세해뒤 열어보니 육신이 그대로 살아 있는 모습이라 구화산 남대에 등신불을 모시고 그위에 법당을 지어니 오늘날 구화산의 육신보전이라 한다합니다. 대원사에서는 2002년 5월 김지장스님의 탄상 1306주년과 열반1208년에 맞이하여 김지장전을 건립하고 삼존상을 모섰다합니다.

*대원사 태안지장보살

태안지장보살 아래 붉은 모자를 쓴 동자는 이세상에 태어나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죽은 태아 영가들입니다. 슬픈일입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의 중생을 모두 구제하지 않고 자신은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저승의 어머니를 말합니다. 그중에서도 태안지장보살은 부모와의 인연을 맺어젔지만 이세상의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져간 태아의 영혼을 고통과 원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비의 어머니를 말합니다.

태안지장보살에게는 슬픈전설이 있다합니다.

지금의 태안지장보살상을 보면은 오른손에는 아미타불을 모신 석장을 짚고 왼손으로는 동자을 안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불교설화에서 유래하였다합니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삼도의 강이 흐른다합니다.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삼도의 강가 모래 밭에서 태어나보지도 못한 어린 영가들이 탑을 쌓아 올린다합니다. 부처님께 공덕을 쌓아 삼도의 강을 건너 저승으로 가기위해서 말입니다. 돌을 하나 올리며 어머니 또하나의 돌을 올리면 아버지를 부르며 갖은 고생을 하며 하나의 탑을 다 세워가면 저승에서 도깨비들이 나타나 영가들이 쌓아 올린 탑을 부숴버리고 갖은 행패를 부린다합니다. 그러면 어린영가는 삼도를 건너가지 못하는 서러움과 지쳐서 모래밭에서 눈물을 흘리며 잠든다 합니다. 그때 지장보살님 눈물을 흘리며 나타나 나를 어머니라 불러라하며 삼도의강을 건너게 해준다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어보니 참 슬프네요. 흔히 영혼이 구천을 떠돈다는 이야기 처럼 어린 영혼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삼도의 강을 가기위해서 갖은고생을 한다는 이야기가...

어딜가도 나쁜놈이 있는가 봅니다.

미륵전 우측에서 본 모습입니다, 정면에 금종각을 볼 수가 있습니다.

금종루의 모습입니다. 온 절이 환한 것 같습니다

일행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빨리 안내려 온다고... 저 사람들 뒤를 따라 지도 내려가봐야 겠네예
아침 그리고 죽음에 관하는 정자인 수관정이 이절입니다.



이외에도 볼것과 생각하게 하는 것이 많은 절인 것 같습니다.
현장주지스님의 정성이 곳곳에 묻어납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 주암(송광사)IC~순천 벌교 송광사 22번 좌회전~고흥 벌교 송광사 보성 우회전~송광면~보성 벌교 27번~광주 보성 우회전 15번~보성군 문덕면~광주 화순 우회전 15번~대원사 백민미술관 좌회전~대원사 주차장 순.

*보성 천봉산 대원사의 궁금증은 홈페이지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http://www.daewons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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