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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댐에는 운문면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법정동인 7개리가 수몰되어 있어 우리의 문화유산인 지석묘와 많은 문화재가 수몰 되었다. 그래도 운곡정사나 원모재는 수몰지역에서 더 높은 시루봉 비탈에 자리를 옮겨와 수몰의 아픔을 면했지만 지금 처해진 문화재의 현실을 보면 찾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대천리에서 나발고개를 돌아가면 만나는 운곡정사와 원모재, 운곡정사는 본 건물 뒤로는 살림집이 있어 대문을 들어서니 개 한 마리가 어슬렁 어슬렁 댕기면서 방문객을 위협하였다. 목에는 줄을 달아 놓았지만 10m는 족히 되 보여 살림집으로 들어가는 중문을 막고 서 있어 운곡정사인 본 건물도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다. 원모재는 사실상 들어가는 입구가 잠겨 있어 관람을 할 수 없으며 담밖에서 까치발을 들고 구경을 하면 볼 수 있었다. 'ㄱ' 형태의 건물을 볼려면 우측의 담장을 따라가면 운문호와 함께 사진에 담을 수 있다.





운곡정사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순지리342-2 운문댐도로변에 위치를 해 있는 운곡정사와 는 원래 운문댐 수몰 지역에 위치를 해 있었는데 1993년 순지리 수몰지역에서 현 위치로 이전을 하였다.

이 운곡정사는 취죽당 김응명의 8대 손인 운곡 김몽노(1828~1884)의 생가로 운곡은 만년에 이곳 부근인 운문면 방음리 서지산 아래 무적천변에 낙화정을 짓고 문인들과 교류를 하며 지냈는데 낙화정이 낡고 쇠락하여 순지리로 옮겨오면서 편액도 이곳에 붙였다한다. 눈에 띠는 것은 사랑채의 온돌방 문틈에 중간설주를 설치하는등 옛 방식이 남아 있다 한다.

경상북도문화재 자료 제90호


운곡정사 앞 마당을 지키고 있는 개, 목줄을 묶어 놓은 상태지만 길이다 길어  가정집을 들어가는 중문은 물론 운곡정사 중간까지 다녀 충실하게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원모재 뒷편에서 본 모습으로 운문댐을 바라보고 있다. 우측은 운곡정사와 가징집

굳게 닫혀 있는 원모재로 운곡정사 가정집이 작은 쪽문이 있는데 그 쪽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 같다.

원모재

취죽당 김응명(1593~1647)과 그의 아들 원계 김주(1612~1678)를 모신는 재실이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지만 1967년 중수를 하였다. 원모재도 운곡정사와 함께 1993년 수몰지역인 순지리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원모재의 본건물을 보면 독특한 ‘ㄱ’자 형태의 구조로 독특한 평면구성이며 대문채는 우진각지붕으로 평삼문의 형식이다. 경상북도문화재 자료 제232호.


'ㄱ'자 형의 재실 모습






찾아가기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3200원. 50분 소요. 언양버스터미널에서 동곡 경유 대구행 완행 버스를 타면 방음리을 지나 순지리 운곡정사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운행. 대천개인택시(054-371-6997)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자가용 이용시에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35번 국도를 타고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69번 지방도를 타고 운문령을 넘어 청도 방향으로 가면 방음리 새마을동산 앞을 지나면 운곡정사, 원모재 안내판이 보인다.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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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청도군 금천면 시루봉 아래에는 특이한 이력의 가옥이 있다 2005년 1월31일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으로 중요문화재 245호이다..임당리 마을에서는 이집을 내시집으로 부른다. 그리고 내시집으로 문화재로 등록된 것은 김씨 고택이 처음이며 김씨 고택은 일반 가옥과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반 가옥은 정남향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임당리 김씨고택은 남향이 아닌 햇볕이 잘들지 않는 서북향으로 서울의 임금이 있는 궁궐방향으로 가옥을 지은 것이 이채롭다.

내력의 특성상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내시란 거세된 사람들이 임금을 보필하는 환관인데 낙향을 하여 거주 할 목적으로 집을 지었다 한다.  안채(6칸), 사랑채(4칸), 중사랑채(7칸), 큰고방채(4칸), 소고방채(4칸), 대문채(5칸), 사당(3칸)으로 구성되어 총 7동이다. 집 구조를 보면 양반가옥은 사랑채가 안채와 적당한 거리를 두며 떨어져 바깥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거주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이곳은 들어오는 출입문인 대문에 사랑채가 바짝 붙어 있고 큰사랑채는 대문을 정면으로 지켜보고 아녀자들이 거쳐하는 안채의 출입통로는 사랑채 옆 쪽문인 중문으로만 출입을 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어 안채로 출입하는 사람들의 동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지어져 있다 1500년경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 내력을 보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특성상 양자를 입양하여 내시의 가계를 이어 왔어며 김일준(1863~1954)은 정 3품 통정대부의 벼슬을 지냈고 16대까지 이어져왔다.

그리고 ‘강희 25년 병인 윤 4월’이란 명문이 재실의 막새에 새겨 있는 것으로 보아 1686년 까지 건축연대가 올라감을 알 수 있다.
 

찾아가는 길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3200원. 50분 소요. 언양버스터미널에서 동곡 경유 대구행 완행버스를 타고 동곡까지 간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운행. 동곡버스정류장(054-372-3881)에서 임당리까지는 오전 8시30분 9시50분 11시20분 등에 새마을버스가 출발한다. 10분 소요. 버스가 여의치 않으면 동곡에서 택시를 타면 된다. 5000원 안팎. 운문면 소재지인 대천 버스 정류장에서 금천면 임당리 까지 도보로 25분 소요.
자가용 이용시에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69번 지방도를 탄다. 운문사 입구를 거쳐 운문댐 아래 운문교를 건너자 마자 좌회전, 동창천을 왼쪽에 끼고 강둑길을 가다가 왼쪽 다리를 건너면 임당리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작은 사랑채와 만난다. 그 옆 중문이 안채로 들어가는 출입문으로 입구 우측 작은 공간에서 출입자의 동태를 확인 할 수 있다.
대문으로 이곳을 들어서면 왼쪽 정면으로 큰사랑채와 정면으로 작은 사랑채가 있다.
큰사랑채로 대문을 정면으로 보고 있다.
작은사랑채
재실로 들어서는 쪽문으로 이문이 안채로 연결된다.
왼쪽이 출입구인 대문이고 정면이 큰사랑채, 우측이 작은 사랑채이다.
재길건물로 이건뭉 막새에서 '강희25년 병인 윤 4월'이란 명문이 나와 처음 건축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재실에서 안채로 통하는 쪽문으로 좌측건물이 작은사랑채이며 우측건물이 아녀자들이 거주하는 안채건물이다.



아녀자들이 거주하였던 안채건물
대문으로 통할 수 있는 유일한 출입문으로 왼쪽건물이 작은 사랑채이다.


안채와 작은사랑채건물


작은사랑채에 붙어 있는 감시 구멍으로 중문을 보고 뚫여 있다. 원래에는 나뭇잎모양이었다 한다. 지금은 훼손되어 사랑의 상징인 하트 모양으로 보여 내시의 아픈 마음을 보여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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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에는 항상 전설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 청도에서 자랑하는 공암마을의 공암풍벽도
마을의 어르신들은 제2의 경북 금강산으로 자랑을 하신다.
아니나 다를까.
회룡포나 안동의 하회마을 처럼 물이 돌아가는 물도리이가 남쪽지방인 청도 동창전에도
있어니
여기또한 용의 전설을 가지고 있다.
 
공암풍벽


구룡산에서 이어지는 용의 능선이라
열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다 아홉마리는 승천을 허락하지만  
한마리는 도로 구룡산으로 떨어지니
그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여기
공암에 용의 모습이 되었는가
.
유난히 용의 전설이 많은
이곳
사룡산
구룡산
반룡산
용귀




용머리
그의 형상을
마을에서는 용암이라 부른다네
그아래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용혈이 뚫여 있어다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한다. 


물돌이 곡천대 아래 
용이 살았다는 굴이 있었다하고
명주실 한타레를 풀어넣어보니
그 명주실 다 풀려 
그아래 마당수에 
명주실 실타레가 올라 왔다는데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ㅋㅋ 



곡천대 굴에 살던 용한마리
하늘로
 올라가면서
심술을 부렸다는데
꼬리로 큰바위 절벽을 내려치니
큰바위가 둘로 갈라졌다하네.


용이 갈라 놓은 바위틈사이가
공암이라 지금은 부르고
신작로가 생기기전
통행길이 되었다하네
이길이
아니면 오도가도 못했다는데...
.

순이엄마도 자야엄마도
굴바우골창백이
이길을 넘어서 시집을 왔다하네.
대구에서 청도읍에서...
지금은 신작로가 뚫여
차들도 생생 달리지만
그때는
꿈도 못꾸어 봤네...
 

 


곡천대
물가에 노닐던 새한마리
학인지 왜가리인지..

예전에 이곳 곡천대에
학도 날아와 살았다는데
그래서 학소대라 불리었다네

지금은 잠겨버린
공암풍벽에
인간의 이기심이  마을은 수장되고
운문댐이되었다네...
















찾아가는길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3200원. 50분 소요. 언양버스터미널에서 동곡 경유 대구행 완행 버스를 타면 방음리 새마을동산을 지나 대천마을버스정류장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운행. 대천마을버스정류장에서는 동곡에서 정상 마일행버스가 09:00, 11:50, 15:30, 18:50분과 정상행 직행버스13:50,20:10 직행버스인 산내행은 07:00, 12:20, 19:00에 있다. 공암마을에 하차를 하면 되는데 공암풍벽은 버스가 왔던길을 되돌아 고개안부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직행인 코스 종착지인 공암마을에서는 대천리나 동곡버스터미널(054-372-3881)까지 가는 버스가 오후에 드물게 있다. 오후 5시10분 전후와 7시10분 등에 있는데 이 경우 대천리에서 언양행 막차(오후 5시10분 출발)를 타기 힘들다. 따라서 시간을 잘 맞추어야한다. 대천(19:05분 산내막차)에서 산내(20:30분 경주막차)로 가서 경주로 거쳐 오는 방법도 있다.대천개인택시(054-371-6997)는 대천에서 공암마을 입구 고개까지 1만5000원 안팎.
자가용 이용시에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35번 국도를 타고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69번 지방도를 타고 운문령을 넘어 청도 방향으로 가면 방음리 새마을동산을 지나 운문댐을 지나 대천리 표지석에서 경주산내방향으로 우회전하여 망향정을 지나직진한다. 운문댐을 돌아가는 도로의 최 정점에 올라서면 우측산으로 오르면 공암풍벽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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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를 가다보면 방음리 새마을동산 기념비가 서 있다.

이곳은 1972년 그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격려차 방문한 기념으로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대 이곳을 지나 오른쪽 골목으로 진입을 한다.
방음리 말음마을로 아름다운 동네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곳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선녀가 내려와 노래를 부르는데 이곳에서는 항상 끝말만 은은히 들렸다하여 말음마을로 부른다.
이곳에 지금은 선녀는 없지만 아름다운 마음으로 아름다움이 뿜어 나오는 한지로 예술을 승화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분이 있다.
영담한지미술관(054-373-3638)의 영담스님으로
 
'사실 종이 가지고 무신 예술을 하겠어' 
간단히 치부하며 쉽게 넘겨 버릴 수 있지만 보갑사 영담스님은 우리나라 전통 한지를 아름다움으로 표현하시고 계신다.
사실 사찰의 스님들에 의해서 한지 제지술의 명맥이 이어져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에서 운문사로 들어가면 억산과 운문산 사이를 넘는 재가 있다. 험준한 고개이름은 딱밭재로 예전에는 이곳에 닥나무가 밭이 있었다 한다. 그리고 그 골짜기를 천문지골이라 산꾼들 사이로 불리고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운문사란 큰 사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긍이 가는 말인 것 같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간다는 주목처럼 닥나무에서 한지로 만들어지면 한지는 일천년의 기나긴 세월을 견디어 낸다고 한다.. 비단은 고작 500년이지만 그만큼 한지의 생명력이 오랜간다.

영담스님의 한지 만들기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출가하기 이전인 한의원에서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한약봉지를 보아 왔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한지를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다.
사실 한지를 만드는 과정은 힘든 노동이다. 닥나무를 잘라와 물에불리고 껍질을 벗겨 삶아서 백피로 만들어 하는 작업은 고행이다.
그런 작업을 아흔아홉번 손이 가야만 종이가 되고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백번의 손길이 가야만 한지가 된다.
그래서 백지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어렵게 만든 한지가 흰종이로소만이 아닌 예술로 승화 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영담스님.
자연에서 나온 색감으로 자연의 작품을 연출하시는 작은 공간인 영담한지미술관은 복층 구조인 2층으로 되어 있다. 스님이 손수 만드신 예술품이 창문과 벽에서 만날 수 있다. 
  

찾아가기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3200원. 50분 소요. 언양버스터미널에서 동곡 경유 대구행 완행 버스를 타면 방음리 새마을동산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운행. 대천개인택시(054-371-6997)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자가용 이용시에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35번 국도를 타고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69번 지방도를 타고 운문령을 넘어 청도 방향으로 가면 방음리 새마을동산 앞에 닿는다.





















방음리 말음마을로 영담한지미술관 입구입니다. 여기서 우측길로 따라가면 됩니다.
운문댐에 잠겨 있는 실향민들이 심었다는 벚꽃나무가 운문댐 도로를 따라 8~9km 이어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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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의 범종루를 들어서면 운문사의 제일 큰 볼거리 중 하나는 반송이다.
모양이 여타 소나무와 다른게 운문사의 반송은 소나무 가지가 위로 치 솟아 뻗는 것이 아닌 땅아래를 보면서 밑으로 처져 가지를 치고 나간다. 일명 처진소나무로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이 되어 보호 받고 있다. 나이 또한 500살이 넘었고 매년 삼월삼짇날에는 막걸리를 먹이는 행사를 열고 있다. 봄가을로 막걸리 25말을 마신다는 처진소나무는 그래야 여름과 겨울을 거뜬히 넘길 수 있다 한다.  
옛날 어느 고승이 소나무 가지를 꺽어 심었다는 전설이 전해 오며 소나무 줄기의 높이는 6m이고 둘레는 3.5m로 우산형으로 펼쳐져 운문사를 대표하는 명물로 자리를 잡았다.

처진소나무를 밑에서 본 모습이다. 가지가 밑으로 처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지마다 큰 받침대를 공구어 두었다. 흡사 우산을 펼쳐 놓은 모습으로 비나 눈이 올시에는 반송 밑으로 피하면 될 것 같은 생각을 해본다.

그만큼 처진소나무의 모양이 특이하다. 매전면 동창리에 처진 소나무에 비해 매우 웅장한 모습으로 500년의 세월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처진소나무의 그림자가 너무 짙어 소나무 밑으로는 풀이 자란 모습을 찾아 보기 힘든다. 그만큼 소나무 밑으로는 햇빛이 차단되어 다른 풀은 자라기가 힘든가 보다. 아니면 운문사에서 일부로 반송 밑에는 잡초 제거 작업을 하는 걸까?.


처진소나무 둘레 밖으로는 잔디도 잘자라 있는데 소나무 밑에는 잔디도 뿌리를 못내리는 걸까?.

외관의 모습은 둥근바가지를 반 잘라 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찾아가는길
부산 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3200원. 50분 소요. 언양버스터미널에서 동곡 경유 대구행 완행버스를 타면 출발지인 신원삼거리를 지나 운문사터미널까지 갈 수 있다. 3000원.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운행.

자가용 이용 시에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35번 국도를 타고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덕현삼거리에서 청도 방면으로 69번 지방도를 탄다. 운문령을 넘고 삼계리마을을 지나면 신원삼거리에서 좌회전 하면 운문사주차장 앞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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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 일부리 심천동에 가면은 500년의 풍상을 이겨낸 노거수가 있다.
느티나무로 마을의 중앙에 떡 버티고 있는 노거수는 수령500년의 깊이 만큼 세월의 무게를 나무에 덕지덕지 붙이고 있다.
심천동 마을의 유래를 모두다 알고 있는 듯 마을을 굽어 보고 있는 노거수는 심천동 사람들에게는 많은 위안이 되고 있다.

 



그래서 경상북도 도나무로 1982년 10월에 지정이 되어 관리 되고 그럴듯한 이름표를 달고 있다.
느티나무 허리춤에는 세사람이 팔을 벌여야 할 정도로 겨우 손끝이 닿을 정도이며 지나가는 어르신의 얼굴에 파인 주름살처럼 느티나무도 그래 견더 왔을 것이다. 
한여름에는 심원재로 넘어가는 길손에게 그늘을 제공하였고 마을의 쉼터를 자임하며 마을사람들의 애환을 듣고 어루만지며 달래고 하였을 당수나무는 말 없아 오늘도 그 자리에 서 있다. 
심천동 계곡이 얼마나 깊으면 '지푸네'로 부를까?.
지푸네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는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 앞으로도 물 맑고 하늘 밖에 볼 수 없는 이곳에 그늘과 쉼터가 되어 주길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교통편
부산 노포동터미널에서 경주행 버스를 탄다. 새벽 5시30분부터 10분 간격 운행. 4500원, 50분 소요. 경주버스터미널에서 산내까지 간 후 일부리행 352번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산내행 350번 버스는 오전 6시, 6시30분, 7시15분 등 하루 28회 운행한다. 산내에서 일부리행 버스는 오전의 경우 6시20분과 7시40분에 출발하는 2대밖에 없다. 이 버스를 놓치면 산내 개인택시(054-751-5955)를 이용한다. 심천마을까지 1만2000원 안팎. 건천ic에서 내려 우측 산내청도방면으로 우회전하면 단석산 입구인 우중골도 지나면 산내면을 알리는 표지판과 당고개(땅고개)이다. 산내면 소재지인 산내사거리에서 청도, 운문댐 방향으로 우회전 하면 20번지방도  '외칠리·일부리' 표지판을 보고 좌측으로 진입, 다리를 건넌 후 좌회전하면 외칠리에 닿는다. 다시 우측으로 상록병원 일부리 방향으로 10분쯤 가면 심천마을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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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리서낭당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삼계리에 가면은 2007년 4월6일 마을 공동으로 세운 서낭당이 있다.

한때 이곳은 오지중의 오지로 주위에 영남알프스 연봉들이 마을을 감싸 않아 천재로 인한 피해와 맹수들의 피해로 부터 마을의 안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서낭당이 세워 져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와 관리를 하지 않아 황폐화 되었다 한다.

 


 

 1970년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홍영기씨가 주축이 되어 다시 이곳에 서낭당을 건립하였는데 40년의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흉물로 되어 버린 것을 마을 주민들이 서낭당 재건위원회를 꾸려 2007년 4월에 새로운 모습으로 서낭당을 건립하였다 한다. 이곳의 삼계리는 지리적으로 보면 언양에서 청도 땅을 넘어 오는 길중 가장 빠른길로 여겨져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어사 박문수도 언양의 관현에서 청도땅을 밟기 위해 이 운문령을 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지금은 지방도가 뚫여 있지만 언양 방향에서는 도로가 지그제그로 나 있어 힘들게 오르며 청도땅의 생금비리 계곡은 구절양장의 긴 계곡을 드리워 한낮에도 컴컴하다. 지금도 이러한데 예전에는 맹수와 도적으로 인해 넘어 다니기 힘든 고개 였을 것이다. 또 다른 고개인 배너미재는 어떠한가. 밀양 산내에서 경주로 들어가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 아랫재를 넘는 것이다.  심심이골을 내려와 배너미고개를 올라서면 삼계리가 지척이다. 이곳을 지나 수리덤계곡을 걸어 경주 산내면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삼계리재를 넘어야 한다. 심원사 옆 구름재를 다시 올라 건너편 숲고개로 넘어야만 산내면 소재지로 민가다운 곳을 만날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왕래를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만큼 삼계리는 오지중의 오지로 마을의 평안과 맹수로 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민간신앙이 그만큼 절실하였을 것으로 보고있다.


역사적으로는 어떠한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의 화랑도들이 훈련을 한 장소로 영남알프스와 그 인근을 택했다. 지리적으로 경주와 가깝고 전술적으로도 험준한 산세 때문에 고구려, 백제에 전력이 노출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잇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삼계리는 오작갑사의 하나인 가슬갑사가 있었다 한다. 가슬갑사는 원광국사가 화랑인 귀산과 추항에게 화랑의 기본이념인 세속오계를  전하였던 곳이다. 그리고 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공격할때 이곳 지룡산과 복호산 일원에 산성을 쌓아 신라를 멸망케 하였는데 현재도 지룡산성,호거산성 또는 견훤산성이라 부르고 있다. 근대에 와서는 서로  이념이 다른 무리들의 피난처로 이 깊은 골짜기를 택하여 숨어 들었다. 속칭 '뺄갱이"라 어릴적 부터 들어 왔는 소리로 군경의 소탕작전과  좌익들의 양민 학살로 인해 삼계리와 영남알프스는 조용한 날이 없었을 것이다. 생금비리골, 배넘이골, 계살피골이 만나는 삼계리 서낭당은 이러한 앙금을 다 씻어 내며 오늘도 이자리에 서서 마을의 안녕과 지나는 길손의 무사기원을 빌어 주고 있다.

찾아가는길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 운행. 3200원. 50분 소요. 언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구행 완행 버스를 타면 삼계리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출발. 운문령 너머 삼계리 정류소에서 하차하면 된다.

자가용을 이용하려면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덕현삼거리에서 가지산 온천방향인 청도 방면으로 69번 지방도를 탄다. 운문령을 넘으면 운문산 자연 휴양림을 지나면 삼계리가 금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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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하면 빼 놓을 수 없는 분이 있다. 이곳 강진에서 18년 동안 만덕산 아래에다 초당을 짓고 목민심서등 많은 저서를 남긴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유배지이기 떼문이다. 그를 신임하던 정조가 승하하자 1801년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순조에 의해 강진으로 유배되어 외가인 해남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에서 유배가 풀렸던1818년 까지 머물며 제자를 가르키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한다. 목민심서,경세유표, 흠흠신서 외에 60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하니 이곳 다산초당은 그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곳이다.

 





다산의 유배생활중 그의 스승이자 제자이기도 한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남다른 교분을 쌓았다. 그 교분을 이어준 길이 현재 천일각과 동암사로 내려오는 800여m의 오솔길로  다산이 혜장선사를 만나기 위해 오르던 길이다. 길 옆 한줌 흙과 풀 한포기를 사랑했던 다산. 이 길 옆에는 현재 야생차밭과 천연기념물인 동백숲이 그의 흔적을 대신하고 있다. 동백꽃이 뚝~뚝~ 떨어 질때 다산은 혜장선사를 만나기 위해 이길을 걷고 있지 않을까?....

천연기념물 동백숲






'천일각'은 '하늘 끝 한모퉁이'란 뜻으로 천애일각을 줄인 뜻이다. 다산의 유배 생활때는 없던 건물이며 1975년 강진군이 건립하였다. 승하하신 정조대왕과 그의 형 정약전이 흑산도에 유배를 가 있을 때 이곳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그의 마음을 달랬을 것으로 추측을 하여 정자를 세워 다산의 추억을 떠 올리게 하였다.



'송풍루'라 불리는 '동암'에다 다산이 저술을 하기 위해 읽은 책 2000여권을 보관했다 한다. 그의 유배 생활 대부분을 여기에서 보내며 그의 저술인 목민심서도 여기서 집필을 하였다 한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복원을 하였고 현판의 글씨인 보정산방과 다산동암은 추사의 친필과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다산초당은 해남 윤씨에서 거처를 제공한 장소로 해남윤씨 윤단의 산속 정자로 정약용과 교분을 나누면서 그의 거처로 제공을 하였다 한다.이곳에서 다산은 제자를 가르고고 목민심서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1957년 다산유적 보존회가 복원을 하면서 초가를 걷어 내고 기와를 얹었는데 다시 초가를 얹어 본래의 모습되로 복원을 한다하니 하루 빨리 원래의 모습이 되었어면 한다. 

다산초당 오른편에 작은 연못이 있다. 연지석가산으로 연못안에 돌로 쌓은 작은 산이다. 연못은 다산이 오기 전 부터 있었다하며 다산이 바닷가의 돌을 줏어와 연못에다 돌을 쌓아 작은 산을 만들고 잉어를 키웠다 한다. 이 잉어로 하늘의 날씨를 알아 내었고 유배가 풀려 난 후에도 제자들에게 잉어의 안부를 물었을 정도로 귀히 여겼다한다 . 



다조로 다산이 이곳에 거처를 정하기 전 부터 있었던 돌로 약천의 물을 떠와 솔방울로 불을 피워 차를 끓였던 부뚜막으로 사용을 하였다 한다. 다산초당의 3경


약천으로 다산이 초당뒤 촉촉이 습기가 베인 곳을 직접 파 만들었다는 샘으로 이물을 끓여 차를 마섰다 한다. 다산은 약천의 물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하였다,다산초당의  제2경


유배가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기전에 다산이 직접 새겼다는 '정석' 글자로 자신의 성인 丁자만 따서 새겨 놓았다.





그길을 따라 내려오면 죄우로 대나무를 잘라 펜스를 설치하여 운치를 다하고 먼저 만나는 서암은 지금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지붕이 곧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어 안타깝다. 서암은 윤종기등 18명의 제자가 머물며 차와 벗하며 학문을 연구하는 뜻으로 '다성각'이라 불렸다 한다 1808년에 지어진후 잡초에 묻혀 폐허가 된 이곳을 강진군에서 1975년 다시 복원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산초당을 내려 오는 길은 수림의 길을 찾아 내려 오는 길이다. 바람소리도 정겹게 들리는 오솔길을 따라 올라서면 먼저 산길에 뱀이 서로 몸을 꼬아 지옥의 형벌을 받는 느낌인 뿌리의 길과 만난다. 주변의 수백년된 소나무의 뿌리가 땅 위에 엉키고 설키고 하는 모습 또한 볼거리이다. 시인 정호승은 이곳 소나무의 뿌리를 보고 시를 남겼다.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교통편
부산에서 남해고속도로를 이용, 순천IC에서 내린 후 시내를 통과해 순천만 방향으로 가다가 2번 국도를 만나면 보성 벌교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10분 후 삼거리에서 다시 보성 벌교 방향으로 좌회전, 계속 2번 국도를 타고 강진읍까지 간다. 강진읍 평동교차로 램프에서 다산초당 안내판을 보면서 우측으로 내려선 후 해남 진도 방향으로 좌회전, 18번 국도를 탄다. 1.6㎞쯤 가서 만나는 호산교차로에서 다산초당 백련사 방향으로 좌회전, 1㎞가량 가다가 기룡교를 지나고 강진만의 철새 전망대 그리고 백련사 입구,  다산초당 입구인 덕남면 만덕리 귤동마을이다. 강진콜택시(061-434-6161)


먹을만한집

강진에는 한정식이 유명하지만 그래도 한정식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숯불로 돼지고기를 구워 나오는 집이 있다. 모든 그릇은 강진이 도예의 고장 답게 청자인 도자기에 음식물이 담겨져 나온다. 강진읍 영파리 소재 청자골식당(061-433-7404)은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감칠맛 나는 숯불 돼지고기 정식을 먹을 수 있다. 남도 특산 홍어와 싱싱한 상추가 곁들여져 봄철 입맛을 북돋운다. 2인분2만원,3인분2만천원, 4인분2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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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산내면 대현리 동편마을은 영남알프스 둘레길 5코스의 경유지이다. 상목골에서 디티재를 거쳐 헤미골로 내려 서면 만나는 마을로 동창천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편마을로 불린다. 이곳을 출발하여 단석산 넘어 건천읍으로 방향을 잡아 걸어 보았다. 동편교회 앞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마을 쉼터인 정자와 마을과 함께해온 당산나무를 만난다. 그 앞 농로길을 따라가면 된다.

 
독립가옥인 민가와 만나는데 이곳에는 사슴을 키우는 작은 농장을 지나간다. 외지인의 출현으로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반가운지 아니면 신기한지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있다. 사실 이길은 마을 사람 이외에는 그래 인적이 없는 길이라 외지인의 출현에 당혹해 하는 것 같았다.


이곳은  숲동네의 마을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청소년 수련마을로 조성이 되어 있었다  극기 훈련과 오토캠핑등 다양한 문화공간을 구비하여 놓은 것 같으며, 이날도 많은 가족들이 텐트를 쳐 놓으며 캠핑을 즐기고 있었다.



수련마을 뒷편의 바위벽. 

수련마을에서 본 대현저수지로 동창천을 가두어 저수지를 만들어 놓았다.


수련마을을 나오면 동창천을 건너는 다리와 만나는 데 다리에서 본 동창천의 모습. 그 뒤로 대부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련망르의 다리를 건너면 회골마을로 그 마을에서 수련마을을 보았다. 921번 지방도로를 따라간다.


대현지의 모습으로 농업용수를 위한 것 갔았다.


대현저수지를 지나면 우측으로 오래된 다리를 볼 수 있다. 상목골과 오케이 그린 목장으로 올라가는 곳이다. 이곳이 소태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이다리를 건너면 우측은 오케이 그린목장과 상목골, 좌측은 소태마을이다. 한때 이곳은 "솥"을 만들었던 마을로 "솔태"라고 불리다 "소태"로 불려 지게 되었다 한다. 이 마을이 단석산의 숨은 골짜기 단석골로 불린 계곡입구이다. 마을 뒷편으로는 조래봉이 단석산까지 능선이 이어지지만 그 중간에 잘룩이인 목을 형성하여 숨통을 열어 놓았다. 내일리와 대현리 등 자연 부락민들은 건천읍으로 나갈때에는 자연히 단석골을 넘어 원골로 갔다한다. 동창천의 물굽이가 조래봉에 막혀 좌측으로 틀어 긴 골을 형성하여 산내면 의곡리를 거쳐 청도 운문댐으로 들어가는데 그리하면 건천으로 나가는 길이 많이 돌게 되어 힘은 들지만 지름길인 이길을 따라 오르 내리곤 하였다 한다.



단석골을 찾아 가는 길로 봄이 오고 있어선지 농부가 지게에다 농기구를 올리고 단석골로 들어가고 있다.
마을 사람에게 길을 물어 보이 이길을 쭉 올라가다 좌측으로 올라가면 된다고 하니 아마 좌측길은 오케이 목장에서 원골로 이어지는 임도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래도 계곡으로 길이 나 있는 것 같다 싶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백운암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임도길의 정점에 백운암이란 작은 절집이 있다. 여기 농사일을 하시는 스님에게 제차 여쭈니 자기는 여기 온지 몇일 안되어 모르니 안에가서 물어 보고 오겠다 하며 잠시 기다려 달라신다. 점심도 못 먹은지라 점심을 먹으며 기다렸다.  둘레길 하시는 분이 언양에서 요기를 하라며 싸준 김밥을 맛있게 먹었다. 스님에게 돌아온 답은 마을 사람과 같은 대답이 돌아 왔다. 좌측의 돌무더기를 올라서니 희미한 산길이 계곡으로 이어졌다.


그것도 잠시 산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하여도 다 실려 내려가고 길의 흔적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무공해 계곡을 따라 거슬러 올라 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수량이 많지 않아 이리 저리 건너면서 넘어진 나무 사이를 빠져 나가니 제법 세찬 물소리가 들린다. 협곡의 암반사이로 4m의 작은 폭포가 걸려 있었다. 계곡으로도 올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며 주위에는 협곡을 형성하여 되돌아 나갈 수 밨에 없었다.


 되돌아 나와 우측폭포 좌측으로 무작정 올라 갔다. 옛날의 임도 길과 조우를 하는데 반갑기는 한데 반갑지가 않은 임도 길이였다. 까지덤불과 잡목으로 인해 임도의 기능을 잃은지는 오래전일이고 이리저리 길을 찾고 뽈뽈기고 하며 겨우 겨우 산길을 뚫고 나가니 오케이 목장에서 나오는 임도길과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원골마을은 좌측으로 조래봉과의 연결되는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된다.


임도에서 본 단석골로 고난의 골짜기 였다. 멀리 조금 보이는 것이 대현저수지, 그 뒤로 대부산과 문복산의 모습이 펼쳐진다,


원골마을의 한자가 새겨진 글씨바위이다.

 
당고개로 경주시 산내면과 건천읍을 잇는 경계 고개이다. 예전에는 산내쪽에 당집이 있었는데 그래서 당고개라 불렸다 한다.
 지금은 그 당집도 사라지고 없지만 터만 남아 있다 하며 새로 만든 표지석에는 땅고개로 나와 하루 빨리 수정을 하여야 겠다. 당고개는 낙동정맥길이며 역사적으로도 이길이 단석산과 영남알프스를 있는 가교 역활을 하는 중요한 고개이다.




단석산 신선사로 올라가는 우중골로 정상이 좌측 뒤로 솟아 있으며 단석산중 가장많은 사람들이 오르 내리는 등산로이다.
단석산과 신선사에는 김유신과 함께 얽혀 있는 전설이 있으며 국보인 마애불상군(199호)이 "ㄷ"자 모양 암벽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우중골마을로 신선사 들머리리며 좌측으로 휘어지는 골짜기가 신선사 입구이며 직진의 잘록이가 당고개인 낙동정맥길이다.


우중골 아래의 절골마을이다. 


송선 저수지로 절골마을에 위치를 하고 있다  꽤 큰 저수지이다.


절골에서 홈골로 들어서면 다시 작은 소류지와 만난다,


홈골소류지로 단석산 정상에서 내려 오는 물을 가두어 놓았다. 아마 단석산에서 내려 오는 골짜기가 홈통 모양으로 길어서 홈골로 불리는지...


홈골 저수지를 좌측으로 돌아 오르면 산죽과 만나는데 아마 단석산에 조릿대와 비슷한 산죽이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시대 김유신이 이 산죽을 이용하여 화살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을 해 본다.


홈골 계곡의 풍광으로 꽤 많은 수량의 물이 내려 오고 있었다.



홈골은 초입을 들어서면 "Y"자로 갈라지는데 우측 계곡이 주 게곡으로 단석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단석산으로 오르는 홈골에서 만난 "연리근"으로 두개의 나무가 뿌리가 서로 엉켜 올라가는 모습을 찾았다. 연리지는 많이 보았
지만 연리근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이곳을 오르면 만나는 월성이씨묘지로 장군봉과 단석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와 만난다.
무작정 길을 떠나 보았습니다.

길옆에는 봄나물이 추어진 날씨 때문인지 몸을 움추리고 산골의 농부들은 아직은

 
빠르지만 농삿일을 생각하며 논밭에 나가서 한해를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가 있었습니다.  곧 무척 바쁜 농촌의 일상을 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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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 둘레길인 상목골에는 오래된 당산나무가 있다. 해발 400m 이상의 고지대에 위치 하고 있는 상목골은 산내의 고원으로 통한다.

예전 부터 내려 오는 이야기를 보면 이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산의 모양이 누에의 형상을 하고 있어 이 산을 잠두산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누에에는 뽕잎이 먹이라 이골짜기를 뽕나무 상(桑)자를 붙여 상목(桑木)골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지금도 상목골은 윗상목골과 아래상목골 나누어 부르는데 아래 상목골에는 이마을과 함께한 상목골 당산나무가 있다.수령이 수백년은 넘은 두그루의 당산나무, 왼쪽에 있는 당산나무는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큰 가지가 떨어저 나가 있으며 우측의 당산나무는 온전한 상태로 남아 상목골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었다.

나무아래 누군가의 정성으로 양초가 불을 밝히고 제단위에는 과일이 놓여져 있다. 우리 민족이 예로 부터 전해 오는 민긴 신앙의 모습이며 가족과 마을의 기원을 비는 소박한 꿈을 보는 것 같아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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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여행/울주여행)두서면 백운산 김유신 기도굴. 태화강의 발원지와 김유신 기도굴이 있는 백운산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내와리를 통해 들어가는 탑곡은 울산의 오지로 통한다. 한때 이 골짜기는 천주교 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살았고 이념의 갈등속에 빨치산들이 마지막 항전을 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인지 산아래는 부슬부슬 비가 와도 오지인 이곳은 흰눈이 소복이 쌓이는 백설의 천국이다. 이곳 탑곡에는 어느때 부터 인가 이곳에 사찰이 들어서고 그 사찰이 황폐화 되면서 탑만 남아 있다가 탑이 있는 골짜기라 하여 탑곡(골)으로 불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 탑도 남아 있지 않고 이름만 남아 있는 이곳에 울산으로 흘러가는 태화강의 발원지가 숨어 있다. 백운산과 삼강봉 사이의 깊고 깊은 골짜기인 탑골샘은  47.54km의 태화강을 만들었다. 한때 가지산 쌀바위샘과 태화강의 발원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쌀바위 샘 보다도 2km 정도 더 긴 이곳이 태화강의 발원지로 확정을 하고 쌀바위 샘은 태화강의 상징적인 발원지로 교통을 정리를 하였다 한다.

 


 


영남알프스 둘레길에 있는 이곳 탑골샘 우측 낙동정맥 능선에는 포항의 호미곶까지 흘러 가는 능선이 발달되어 있다. 그 정점을 삼강봉이라 부른다. 삼강봉 꼭대기에 빗물이 떨어지면 이물은 태화강, 형산강, 밀양강으로 각각 흘러가기 때문에 삼강봉으로 부르며 내화마을의 어르신들도  삼강봉이라 이야기를 하시며 설명을 하였다. 요즘 기맥, 지맥 종주를 많이 하니까 그분들도 많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오지의 골짜기 답게 이곳에도 김유신의 전설이 있다. 김유신이 삼국을 통일하기전에 이곳 백운산 동굴에서 기도를 하는데 난승이 나타나 신검에 두줄기 빛을 내려준다는 그 김유신 기도굴이 백운산 정상인 감태봉 바위 아래에 있다. 열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있는 이굴에서 나와 김유신은 천마를 타고 감태봉 바위를 박차며 건너편 천마산으로 뛰었다는 이야기와 차리마을과  선필마을 사이에 솟아 있는 마병산에서 말과 병사를 훈련시켰다는 이야기가 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 온다.
신라때는 열박산으로 불렸으며 화랑들의 훈련장소로 많이 거론되고 있는 영남알프스와 단석산의 단석, 오봉산의 마당바위인 지맥석에서 휴식을하며 부하들과 막걸리를 나누어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속의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탑골을 찾아가는 들머리인 내와리 내와마을

내와마을 뒤로 낙동정맥이 흘러간다. 삼강봉과 백운산을 찾을 수 있다.

탑골을 찾아가는 길이다.

탑골의 모습으로 한때는 많은 가구수가 골짜기에 살았지만 지금은 한적하다.

태화강의 발원지 탑골샘을 찾아가는 입구 안내판. 안내판 우측으로 들어서면 된다.

이 계곡물이 태화강으로 흘러 동해로 빠진다.


태화강 발원지 탑골샘을 알리는 표지석이 많은 눈속에 파 묻혀 있으며 샘터의 흔적이 찾을 길 없다.




감태봉 정상아래의 동굴로 난승에게 두줄기 빛을 받았다는 김유신 기도굴

김유신기도굴로 우측으로 물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고드름이 얼어 있다. 

10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기도굴의 내부


백운산의 정상인 감태봉으로 김유신이 천마를 타고 이 바위를 박차 올랐다하며 지금도 말 발굽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다. 정면의 높은 봉우리 못가서 삼강봉이다.

백운산 정상

백운산 정상으로 이 바위 아래 김유신 기도굴이 있다.

탑골의 모습과 내와리, 천마산의 모습등을 볼 수 있다.

영남알프스 고헌산과 소호리 와항재 그리고 가지산의 모습

영남알프스 가지산과 문복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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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전마을의 늠름힌 기상과 힘을 느낄 수 있는 숫당산나무


경주시 내남면 박달리 괘전마을의 암.수 당산나무
 
시골의 마을길을 걷다 보면은 그 마을을 지키고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당산나무가 마을 입구에 서 있다.
그 마을에서는 마을의 어른으로 모시고 매년 정월 대보름에는 당제를 지내며 당산나무에 대한 예우를 한다. 영남알프스 언저리를 걷다 보면 크고 작은 마을들을 지난다. 그 마을마다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를 봐 왔다. 수 많은 당산나무는 소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서어나무 심지어는 버드나무까지 나무의 수종에 관계 없이 그 마을의 어른으로 삼고 있었다.


 


경주시 내남면 박달리 괘전마을에는 특이하게도 두그루의 당산나무를 모시고 예우를 하고 있었다. 소나무와 느티나무로 각각 다른 수종이다, 괘전마을의 어르신들은  '골매기장"이란 닉네임으로 부른다. "골목의 최고 어른"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소나무는 홍송으로 숫당산으로 불리며 높이는 약30m. 둘레는 어른 둘이서 양팔을 벌리면 잡을 수 없는 굵기로 소나무로서는 꽤 큰축에 속한다. 늠름한 기상과 힘을 느낄 수 있으며 마침 보름 뒷날 찾아 갔을 때 마을의 안녕과 기원, 평화, 그리고 마을 주민의 건강을 빌며 동제를 지냈는데 하룻동안에 다 지내지 못했다는 마을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괘전마을 안쪽에 있는 느티나무는 마을의 안쪽에 있어선지 암당산으로 부르고 있다. 수백년은 됨직한 이 암당산도 가지에는 딱다구리가 쪼아 둥지를 만들어 놓은 모습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밑둥치에는 30cm의 구멍이 나 있는데 아마 느티나무의 숨 구멍으로 보인다.  세로1m, 가로1.5m 크기의 제단이 숨구멍을 막아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한쪽을 깨내어 암당산 나무가 숨을 쉴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숫당산 나무는 박달고개에서 내려서면 마을의 입구인 큰 도로에 위치를 하고 있지만 암당산나무는 마을 안쪽에 있어 찾아가야 한다. 마을 회관 길을 100m 따라 들어가다 아담한 정원이 있는 집이 나온다. 그 앞에서 우측 감나무가 몇그루 서 있는 집으로 올라서면 암당산 나무가 그 집 뒤로 보인다  

 













괘정마을 안쪽에 있는 암당산으로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다. 





가지에는 딱다구리가 부리로 쪼아 구멍을 낸 흔적과 제단이 밑둥치의 숨구멍을 막아 깨어냉 흔적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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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리 각석을 찾아가는 도로옆,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대현마을에는 버드나무 이외에 또 하나의 노거수가 있다. 이 노거수는 다섯나무가 서로 모여 자라는데 특이하게도 서로 다른 3가지 품목이 모여 있다는 것이다. 팽나무, 서어나무, 회화나무로 수령은 각각 350년에서 400년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 높이는 15~20m, 둘레는 1~1.4m로 대현마을의 당목과 여름철에는 시원한 정자나무 역활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올해는 부산 울산 지방에도 많은 눈이 내렸다. 이날도 울산 울주군 에는 아침부터 진눈게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노거수를 배경으로 내리는 흰눈은 동화속의 마을에 찾아온 느낌이 들 정도로 평화로운 마음을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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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암각화 박물관은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333-1에 위치를 하고 있으며 2008년 5월에 개관을 하였다.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의 모형을 만들어 전시를 하였고 우리조상의 선사시대 생활상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울산암각화 박물관의 내부모습




















대곡천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휘돌아가는 물길의 모습이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집청정
경주최씨의 정자로 17c중반 운암 최신기가 세웠다. 고려말 정몽주께서 이곳 경치와 풍광에 반해 반구대에서 시를 읊은 후 이것을 애석하게 여겨 세웠다 하며 지금은 14대 손인 최원석에 의해 한국 효 정신은 부모로 부터 받은게 아니라 주의 모든이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에서 나온다하여 집청정을 예절방으로 활용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다.



반고서원
숙종38년인 1712년 언양의 유생들이 모여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 선생을 기려 반고서원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1871년인 고종 8년에 흥선대원군에 숭유억불정책에 의해 서원은 문을 닫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지역 유림들이 포은대영모비(1885), 포은대실록비(1890), 반고서원유허비실기(1901) 3기의 비석을 세우미 사인댐에 의해 수몰되어 1965년 현위치로 이전을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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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12경과 대곡천 비석사이로 보이는 반고서원유허비는 고려말 충신인 포은정몽주의 학덕을 기려 그 후세에 그의 학덕을 높이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 비석을 세웠다.포은 선생은 고려 우왕2년인 1376년에  성균관 대사성의 벼슬에 있으며 '친원배명'의 외교정책에 반대하다  이곳에서 1년 정도 귀향을 왔다 한다.이곳 반구대에 올라 '중양절감회'란 시를 짓고 그의 자취를 남겼는데 후세에 그의 발자취를 찾아 반구대를 포은대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연로개수기
반구서원에서 반구대암각화 쪽으로 가는 길에 '연로개수기(硯路改修記)'를 볼 수 있는데 훼손된 글자가 많아 전체 내용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아직 숙제로 남아 있다. 다만 순치 12년이라는 연호로 봐서 숙종조인 1655년 이전에도 이미 이 길이 있었다는 점, '연로'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벼루를 만드는 돌이 있는 길'이라는 의미로 '벼루길'을 뜻하지 않았을까 추정하는 점 등만 알려져 있다. 어쨌든 이 길이 최소 350여 년 전에도 있었던 길이다.

울주 대곡리 공룡발자국화석 유적. 천전리 공룡발자국화석과 마찬가지로 약 1억 년 전인 전기 백악기의 공룡들의 유적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울산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국보 제285호 지정되어 울산지역에 있는 두개의 국보중 하나이다.높이는 3m, 넓이는 6.5m로 중앙 바위면에  새겨진 그림을 중심으로 좌우로 300점의 그림이 산재해 있다. 이조각은 울산이 선사시대때 부터 고래잡이가 성행을 하였던 것을 보여 준다. 그림의 내용을 보며 고래,물개,바다거북, 사슴, 멧돼지,개등이 새겨져 있다. 연중 사연댐으로 인해 우기철에는 물속에 잠겨 있다가 갈수기인 11월 이후에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암각화 전망대에서는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하며 망원경으로 찾아보아야 한다. 지금은 암각화를 보존하고 그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물을 빼 놓아 뭍으로 올라와 있는 암각화를 볼 수 있다.






거북이를 닮았다는 반구대의 바위



 <찾아가는길>
자가운전시:경부고속도로 서울산 IC ~35호국도 경주,봉계방면 ~ 울산 암각화 박물관 앙애판을 보고 우회전 ~ 울산 암각화 박물관순~반구대암각화
대중교통편 이용시:
언양시외버스터미널을 나와 언양시장입구을 지나면 첫번째 사거리, 여기서 우측으로 틀면 메디팜 효성약국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언양에서 308, 313, 318버스를 타고 반구대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한후 진현마을 방향으로 들어서면 된다. 울산 암각화 박물관까지는 도보로 30분가량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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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여행/울주여행)천전리 각석. 선사시대때 새긴 암각화의 모습, 천전리 각석

 

울주군 천전리 각석(국보147호)은 1970년 12월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암각화로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곳이다. 1973년 5월4일 국보로 지정되었고 넓이는 9.5m,높이는 2.5m바위이다.물이 산을  휘감아 도는 대곡천 옆 15도 정도 앞으로 넘어 질 듯 자연 처마 형태로 된 경사진  바위에  새겨져 있다. 대곡천에 산재해 있는 암석의 종류는 중생대 백악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퇴적암류로 사암과  함께 외층을 이루어 쉽게 깨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선사시대때의 우리조상들이 뾰쪽한 돌등을 쪼아서 홈을 내는 방식으로기하학적인 무늬( 동심원, 나선형,마름모와 추상적인 문양), 또는 각종 동물문양과 인물 그리고 그림과 글씨도 함께 섞여 있고 기마행열도, 동물, 용등 다양한 내용등으로  새겨져 있다. 천전리 각석에는 선사시대 부터 신라시대의 생활상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화해설사 건물을 지나면 잠수교를 건너야 각석으로 갈 수 있다.

천전리 각석으로 현재는 접근을 막기위해 스덴봉이 설치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보다.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 풍화작용이 심해 언제 우리의 국보가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하루빨리 비바람을 막아주고 관관객의 손이 타지 않는 보호 시설이 시급하다.



기하학무늬인 둥근무늬, 우렁무늬, 마름모골무늬, 굽은무늬, 가지무늬등과 사슴,호랑이, 파충류,물고기, 서있는 입상과 얼굴상등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문양을 새겨 놓았다.
청동기 시대에도 여러문양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농경문화를 이루며 풍요와 다산을 비는 종교적상징으로 해석을 할 수 있다. 


천전리 각석은 날카로운 금속도구를 사용여 새긴 새선화, 인물상, 돛을 단 배, 말들이 행렬을 이루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신라시대때로 볼 수 있으며 신라 법흥왕의 동생인 사부지갈문왕이 을사년(525년)에 대곡천에 놀러와 새긴것과 그의 부인이 남편인 사부지갈문왕이 죽자 그의 아들(후에 진흥왕)을 대리고 남편의 흔적을 찾아 왔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한다. 


몰지각한 관광객이 낙서한 흔적을 찾을 수 있으며 현재의 보존 상태를 짐작할수가 있다.


천전리 각석에서 보면 대곡천의 아름다음에 푹 빠질 것이다. 계곡건너 공룡발자국의 흔적이 나타난 바위면이 있다. 공룡발자국을 찾아 갈려면 다시 나가 잠수교를 건너자 마자 우측으로 틀면 곧 공룡발자국이 있는 바위면이다.

대곡천 계곡의 아름다운 풍광

공룡발자국이 있는 암반의 모습으로 계곡건너 천전리 각석을 찾아 온 관광객을 볼 수 있다.



왼쪽사진을 보면 둥근홈이 파져 있는 공룡발자국으로 이일대에 200개의 공룡발자국을 찾을 수 있다 한다. 이곳은 약1억년전 전기 백악기 시대에 살았던  초식 공룡인 울트라사우루스등 중대형 공룡들의 발자국 화석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천전리 각석으로 들어오는 들머리의 모습

원시의 길로 대곡천의 산허리를 돌아 반구대 암각화로 산길이 뚫여 있다. 자연친화적인 산길로 대곡천의 아름다운 모습에 발걸음이 자꾸만 더뎌진다. 우측으로는 대곡천과 천전리 각석이 시종일관 눈길을 잡는다.


<찾아가는길>
자가운전시:경부고속도로 서울산 IC ~35호국도 경주,봉계방면 ~ 천전삼거리 ~ 대곡박물관~천전리 각석순
대중교통편 이용시:
언양시외버스터미널을 나와 언양시장입구을 지나면 첫번째 사거리, 여기서 우측으로 틀면 메디팜 효성약국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언양에서 308, 313, 318버스를 타고 천전삼거리인 구량천변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한후 대현마을 방향으로 들어서면 된다. 천전리 각석까지는 도보로 35분가량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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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여행/울주여행)두동면 대곡박물관. 고향의 정취가 생각나는 울주군 두동면 대곡박물관의 모습

 

울산시 두동면 울산 대곡 박물관은 천전리 각석을 보러가는 입구 대곡댐 하부에 위치를 하고 있다. 이 일대에 대곡댐이 들어서면서 수몰된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을 체계적으로 정리를 한 전시 공간이다. 1999년 9월경 부터 2005년까지 총 5회의 발굴조사를 거쳐 이 일대가 청동기시대,  삼국시대 부터 통일신라시대 그리고 조선시대까지 시공을 넘나더는 유물이 출토되어 2009년 6월24일 대곡박물관을 개관하여 유구와 토기류 그리고 철기류 기와와 도자기류등이  전시를 하였다.


 


40~50대이상은 고향의 정취를 물씬 느낄 것이며 요즘새대는 아버지 할아버지그리고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박물관을 이용할시에는 평일과 토,일,공휴일은 오전9시부터 오후6시까지이며 휴관은 매주 월요일과 1월1일이다 연락처는 052-229-6638 .관람료는 무료

교통편

자가운전시:

경부고속도로 서울산 IC ~35호국도 경주,봉계방면 ~ 천전삼거리 ~ 대곡박물관

    대중교통편 이용시
    언양시외버스터미널을 나와 언양시장입구을 지나면 첫번째 사거리, 여기서 우측으로 틀면 메디팜 효성약국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언양에서 308, 313, 318버스를 타고 천전삼거리인 구량천변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한후 대현마을 방향으로 들어서면 된다. 박물관까지는 도보로 25분가량 소요

    대곡 박물관까지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만 운행하는 버스가 있다 운행시간 언양출발 11:00, 13:00, 15:00

     전시관 입구를 들어서면 발아래 수몰되어 현재는 대곡댐이 된 모습을 발아래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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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전면 처진소나무
    흔히 소나무를 두고 굳은 절개에 비유를 많이 한다.
    가지도 보통 밑으로 처지지 않고 하늘을 따라 올라가거나 옆으로 가지를 뻗으며  항상 4계절 푸르름을 잃지 않아 그래 부르는 것 같다.

    그러나 유독 청도 땅에는 가지가 땅으로 처진 소나무가 두그루 있다. 그중 하나가 운문사 경내의 처진소나무와 매전면의 처진소나무이다. 매전면의 처진 소나무는 운문사의 처진소나무와 비교가 되지 않는데 그래도 당당히 천연기념물 제295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전면 소재지에서 운문사 방향의 국도상에 위치를 하고 있다.
    우측으로는 동창천을 두고 있다.
    처진소나무를 축느러진 버들나무와 비교를 하여 유송이라고도 부르는데 가지가 밑으로 처진 이유에 대해서는 주위의 다른나무에 의해 생육에 지장을 받아 밑으로 처지게 되었다는데 정확한 이유를 모르고 있다 한다.
    속리산의 정이품송처럼 이소나무도 전설을 가지고 있다.
    옛날 정승이 이길을 가게 되었다한다. 앞에 서 있던 이 소나무가 갑자기 가지를 밑으로 처지면서 엎드려 예를 갖추는 모습을 하였다 하는데 그 정승이 지나간후에도 처진 가지는 올라가지 않았다한다.

    나무의 수령은 200년으로 높이는 14m 둘레는 1.96m이며 동서로 10.3m 남북으로는 9.1m로 처진 가지가 땅에 닿일정도이다. 영남알프스 들머리에 영남알프스를 등지고 있는 매전면 처진소나무와 한폭의 풍경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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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전리 각석을 찾아가는 길에 구량천변 대현마을에는 특이한 당나무인 버드나무가 있다.

    마을을 지켜온지가 벌써 400년 그 풍상을 견디며 마을을 지키고 있다.
    상식으로 버드나무가 마을에 들어와 뿌리를 내린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마을분에게 연유를 물어보니
    지금은 구량천에 반듯한 둑이 생겨 있지만 예전에는 버드나무가 서 있는 이곳까지 구량천의 하천이였다 하니 이해가 간다.
    마을에서는 땅버들이라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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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산리 지석묘.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22호
    소재지: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향산리 286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흔히 지석묘를 고인돌이라 부른다.
    그시대의 정치권력자 또는 힘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힘를 과시하기 위하여 만든 무덤으로 울산지역의 지석묘는개석식과 바둑판식을 주로 사용하였다 한다.
    개석식이란 4개의 다리 즉 받침돌를 세우고 그 위에다 바둑판 처럼 넓은 덮게 돌을 덮는 것으로, 그 밑을 파 돌로 방을 만드는방식을 바둑판식 도는 남방식이라하며 개석식은 바둑판의 받침돌이 없이 돌방에다 바로 넓은 덮게 돌을 덮는 식을 말한다. 흔히 무지석식이라 한다.
    향산리 지석묘는 능곡마을 도로 옆에 있으며 덮게돌의 길이가 310CM 길이가300CM  두께90CM로 상북면의 지석묘에서 큰 편에 속한다. 
    이지석묘는 조선시대때 정대업 장군이 이바위에서 무술을 연마하여 흔히 장군바위로도 불리며 덮게돌에 7군데의 성혈이 있어 칠성바위라고도 부른다 한다. 예로부터 덮게돌의 성혈은 여성의 성기를 나타내며 다산과 풍요를 의미한다. 여기서도 방기리 알바위와 같은 전설이 전해 오는데 애기를 낳지 못하는 부인들이 작은 돌을 덮게 돌에 문질러 붙으면 아들을 낳는 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다.  
    찾아가는길: 언양읍에서 석남사가는 24번 국도를 따라가다 향산초등학교에서 우측으로 고개를 넘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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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시 울주군 울주군 언양읍 다개리 318번지 가면 이마을 을 지켜 주는 노거수가 있다. 2000년 5월에 노거수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으며 수령은 약350년이고 수목은 팽나무라 한다. 영남 알프스 둘레길 3구간에 한번쯤 들러 볼 수 있는 노거수로 답사 갈때 마침 흰눈을 이고 있어 더욱 운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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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여행/울주여행)상북면 작천정 계곡. 포은 정몽주 유배지 작천정 계곡의 신비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교동리에는 작천정이란 정자가 있다.
    신불산과 간월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이 작괘천을 따라 흘러오다. 봉화산과 옥산 사이의 골짜기를 빠져 나간다. 흔히 말하기를 작천정계곡이라 하는 곳이다. 계곡으로 흘러가는 물의 흐름 때문에 수천 수만년 동안 헤집은 화강석 암반은 메끈한 여인의 피부처럼 부드럽고 어떤곳은 바위에 둥근 호박 형태의 홈을 만들어 놓았다. 이모양이 술잔처럼 생겼다하여 작괘천이라 부른다. 다른 각도로 보면 여인의 생식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이 한여름철에는 물놀이 피서객으로 몸살을 앓고  봄에는 벚꽂으로 수놓는 곳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작괘천 넓은 바위


     

    위에 세워진 작천정 정자는 정면3칸에 측면 2칸으로 2005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건립되었다.
    고려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1337~1392)가 여기 작괘천으로 유배를 와 책을 읽으며 지냈다한다. 그래서 인지 이곳 바위에는 정몽주를 추모하여 "모은대"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건립연대는 그래 길지 않는데 1894년 고종31년에 언양현감인 정긍조가 1895년 봄에 이곳 작천정의 경치에 매료되어 시회를 열면서 아름다운 이곳에더 정각짓기를 주청하였다 한다. 그후 몇년의 세월이 흘러 1899년 언양현감으로 부임한 최시명에 의해 1900년 가을에 착공을 하여 2년 뒤인 1902년에 완공을 하였다 한다.
    이 너럭 바위에는 시회전의 우수작과 많은 싯귀 그리고 울산시 여류시인 이구소(1894~1991)의 이름도 찾을 수 있다.

    찾아가는길:부산 울산 인근에서는 봄여름철 관광지로 많은 입소문이 나있다.
    봄에는 벚꽃으로 교동리 작천정 입구를 수 놓을때는 장관을 연출하며 여름철에는 물놀이와 피서지로 몸살을 앓는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산ic방향으로 빠져나가  신평 통도사방면으로 좌회전 후 4km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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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여행/울주여행)상북면 구량리 은행나무. 550년 풍상을 이겨낸 구량리 은행나무

    울주 구량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제64호

    위치: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 896(중리마을)

    이야기가 있는 마을이면 마을 한 곳에 당수나무인 큰 고목이 보통 한그루 서 있다. 두서면 구량리 중리마을 뒷편에는 550년 된 은행나무가 마을의 수호신 처럼 버티고 서 있다. 그 품새가 하늘을 받치고 있을 정도로 넓고 큰 고목으로 나 또한 영동의 천태사 입구의 은행나무를 보았지만 1400년 된 천태사 은행나무와도 비교가 될 정도의 규모이다. 은행나무 뒤로는 영남알프스의  고헌산이 병풍을 두르고 고헌산을 지키는 수호장군처럼 오늘도 늠름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익제 이재현의 4대 손인 이지대 선생에 의해 서울에서 가져와 연못가에 심은 것이 이 은행나무라 하는데,.

    1394년(조선태조3년) 경상도 수군만호로 있을때 왜군이 탄 배를 붙잡아 그 공로로 임금에게 상을 받았는데 그 후로 벼슬이 높아져 한성판윤에 이르게 되었다.

    1452년인 단종즉위년에 수양대군이 김종서 왕보인등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고 하는등 정치가 혼란해지고 어지러워지자 선생은 관직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살게 되는데 그때 서울에서 함께 가져온 은행나무라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대략 은행나무의 나이는 550살이며 높이는 22m, 가슴둘레는 12m로 지금은 태풍 매미의 생체기에 옆으로 퍼져 나온 굵은 나뭇가지가 견디지 못하고 한쪽은 받침대에 의지를 하고 있다.

    지금도 은행 나무 아래에는 마을 사람들의 공동 우물로 추정되는 우물터가 매섭다는 한겨울의 추위에도 얼지 않고 포근한 온기가 느껴 질 정도 였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 은행나무에 유해를 가하면 해를 입는 다는 이야기와 아들을 못낳는 부인이 이 나무에 정성을 다해 기도를 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 오고 있다 한다.



    찾아가는 길: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를 빠져나와 언양방향으로 진입, 언양시외버스 터미널을 통과하여 35번 국도를 타고 봉계방향으로 직진한다. 송태리 ~직동리~평리 마을~반곡 초등학교를 지나면 왼쪽에 옥동 주유소를 볼 수가 있다.이곳을 지나면 왼쪽으로 작은 돌에다  송정마을이란 표지석을 볼 수 있다..

    이곳을 진입하여 구량교를 건너면 은행나무가 있는 중리마을로 이정표가 친절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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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여행/울주여행)언양지석묘 언양고인돌.영남에서 가장 큰 고인돌

     

    고인돌하면 고창의 고인돌을 생각한다. 일정한 곳에 수십기의 무덤으로 이루어진 고창의 고인돌을 두고 현재의 사람들은 고인돌 축제의 이름으로 널리 알리고 있어 고인돌을 대표하는 곳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부산 가까이인 울주군에도 규모면에서는 비교가 안되지만 소수의 고인돌이 흩어져 있어 쉽게 옛 사람들의 문화를 접할 수가 있다.

    그중에서도 울주군 언양읍내인 서부리 삼성 아파트 옆에는 독립 바위의 규모면에서는 영남에서는 가장 큰 고인돌이 있다. 지석묘라 부르는 고인돌은 선사시대인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그 당시 지배층인 재력이나 권력가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지석묘는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나누는데 북방식은 4기의 돌을 받침대 삼아 그 위에 평평한 돌을 올려 흔히 탁자식이라 하고 언양의 지석묘 처럼 땅을 파 돌구덩이인 방을 만들고 그 위에다 작은 돌을 공구어 받침대를 만들고 돌로 뚜껑을 얹어 덮은 방식을 택하였는데 남방식 또는 바둑판식이라 한다. 그러나 울산지역에는 바둑판의 돌 받침이 없는 개석식 또는 바둑판식을 많이 이용을 하였는데 언양의 지석묘는 바둑판식으로 영남지역에서는 가장 큰 지석묘로 예로부터 서부리 주민들에게는 민속신앙으로 여겨 용바위라 부르며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한다.
    사향은 고인돌 길이는 8.5m 너비는 5.3m 받침돌의 크기는 2.8m~3.1m로 매우 큰 고인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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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회 부산크리스마스 트리 문화 축제가 지금 광복로에 한창 진행중이다.
    밤을 밝히는 트리 불빛에 의해 가족 또는 연인, 그리고 수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광복로 찾고 있다.
    기간은 2010년 11월30일~2011년 1월17일
    공식홈페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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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여행/금정구여행)금정산 범어사 범어3기.  암상금정, 원효석대,자웅석계를 금정산 범어사의 범어3기라 합니다.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에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범어사가 있다. 산내 암자인 말사를 10여개 거느리고 해인사. 통도사와 함께   영남지방의 3대 사찰로 이야기를 한다. 1300여년 전인 신라 문무왕때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호국사찰인 범어사를 중앙에 두고 주변에는 범어3기가 삼각형으로 포진을 하고 있다.
    이름하여 암상금정, 원효석대,자웅석계로 암상금정은 이름그대로인 돌우물로 금정산이란 이름을 탄생하게 하였다. 고당봉 아래쪽인 범어사와의 일직선 상인 중간 큰 바위 군상에 있는 샘으로 아무리 심한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으며 그 샘에 하늘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내려온 물고가 있었다. 몸에 금빛을 내며 유유히 노는 물고가 있었다 하여 금샘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범어사의 산내 암자인 원효암은 범어사와 제법 동떨어진 원효봉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다. 범어사에서는 가장 멀리 떨어진 왜진 암자로 범어사를 등지고 있어 심산에 들어온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인지, 지금도 찾는 이가 별로 없어서 인지 원효암으로 들어서는 일주문 부터 흡사 귀곡산장으로 들어서는 느낌을 들게한다. 다 쓰러질 듯한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한글로 법당이라 적어 놓은 건물을 볼 수 있다. 이건물도 채색이 바래지고 폐가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원효스님의 기도처라고는 쉽게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 법당 뒤 왼쪽으로 톱날 같은 바위가 있으니 원효스님이 수도를 하였다는 원효석대이다. 보살님에게 원효석대의 위치를 물어보니 모른다며 입구의 의상대는 알고 있다 하신다. 자초지종 이야기하니 스님에게 물어보고 오겠다하며  요사체로 달려가 원효석대가 어딥니까 물어보니 스님께서는 이 뒤가 원효석대라며 법당뒤 바위를 이야기 하였다. 그러면서 올라가는 길이 없다고 하였다. 원효석대 부근에는 산죽이 뒤 덮혀 산길의 흔적은 없으며 산짐승들의 흔적들이 보였다. 그리고 원효석대에 올라서면 범어사 쪽은 수십길의 낭떨어지이고 칼날같은 바위들이 서로 솟아 있어 일반인들은 쉬게 올라가기 힘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또 하나는 범어사앞에서 우측 계곡 옆 도로를 따라가면 계명암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만나는데  계명암 옆에는 금정산에서 제일 먼저 새벽을 알렸다는 암,숫닭 한쌍을 한 바위가 있었다 한다. 일본인들에 의해 암닭은 처참하게 파괴되어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지금은 그 자리에 작은 석탑이 서 있다. 남아 있는 숫닭도 몰골이 말이 아니다 . 자웅석계라 생각을 하고 바라보면 숫닭의  모습을 읽을 수 있지만 아무런 생각없이 지나가면 작은 바위에 불과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범어3기가 금정산과 범어사를 대표하는 문화유적지로 대접을 받는 날이 빨리 왔어면 한다. 
    암상금정인 금샘 찾아가는 정도만 작은 안내도가 설치 되어 있고 원효석대, 그리고 자웅석계는 그 어떤 표시나 명칭은 찾을 수가 없어니 금정산을 찾고 범어3기를 알고자 하는 분들을 위하여 하루빨리 이정표와 안내판을 설치하길 권해본다.

    암상금정


    원효석대


    자웅석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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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진덕여왕 여행.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한 진덕여왕릉 찾아가기

     

    경주시 현곡면오류리 등나무에서 500m쯤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진덕왕릉 앞 주차장. 200m쯤 떨어진 소나무 오솔길을 따라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2대 여왕에 오른 진덕왕릉을 찾아 보았다. 사촌언니인 선덕여왕과는 사촌지간으로 여왕의 위치에 오른 진덕여왕. 그의 왕릉은 한적한 변두리 안태봉 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어 쓸쓸하다 못해 적막감이 감돈다.잘 닦인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올라 닿은 진덕왕릉은 그 흔한 석상조차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삼국사기에는 왕을 사량부에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왕릉은 흙을 높이 쌓아 올려 봉분을 둥글게 만들었고 높이는 4m 지름은 14m이다. 그리고 봉분의 둘레에 지대석을 돌려 안기둥을 만들었으며 그사이에 직사각형의 면석을 넣어고 그위에 눈썹돌을 올려 봉분의 아랫단을 보호할뿐 특별한 장식이 없는 수더분한 왕릉으로 안기둥 에는 12지신상을 돋을 새김하여 왕릉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1975년 보수를 하여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선덕여왕 말년에 발생했던 비담의 난을 김유신 김춘추와 함께 평정하며 즉위한 진덕여왕(647~654)은 비담과 그 일당 30명을 처형하고 백제의 계속된 침략에 맞서 김유신으로 하여금 국방을 튼튼하게 했던 신라 제28대 왕이다. 사촌 언니였던 선덕여왕과 마찬가지로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즉위 7년 만인 654년 사망, 김춘추(무열왕)에게 왕위가 이어졌지만 후일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룰 수 있도록 기틀을 다진 업적은 높이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후사가 없었던 탓인지 왕릉의 분위기가 어쩐지 쓸쓸하다. 솔숲 사이로 부는 서늘한 바람을 벗 삼아 왕릉을 돌아보며 백제의 침범에 대항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당나라와 불평등 동맹까지 맺어가며 고군분투했을 여왕의 고뇌와 삶에 대해 생각한다.


    찾아가는 길: 부산 금정구 노포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경주행 버스는 오전 5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10분 간격으로 운행되며 운임은 4000원, 소요 시간은 50분이다. 경주터미널 앞에서 현곡행 30번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 금장2리 정류장에서 하차, 오른쪽 오류리 방향으로 걷는다. 200m쯤 가면 오류리 등나무 앞을 지나고 이곳에서 진덕왕릉까지는 걸어서 15분쯤 걸린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경부고속도로 경주IC에서 내려 서라벌대로를 타고 가다 금성삼거리에서 시청 오릉 방향으로 좌회전한 후 황남동주민자치센터 앞 교차로에서 좌회전해 강변로를 따른다. 터미널과 동국대 앞을 지나 금장교 앞에서 좌회전, 1㎞쯤 가면 새로 뚫린 안강 포항 방면 68번 지방도를 타지 말고 굴다리 밑을 통과해 영천 방향으로 200m쯤 가면 우측에 진덕왕릉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우회전, 1.5㎞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왕릉 앞 주차장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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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여행/경주여행) 경주 현곡면 오류리 등나무 여행. 이루지 못한 사랑을 천년동안 이어온 나무, 경주 오류리 등나무와 팽나무

     

     천년을 이어오면서 애뜻한 사랑의 전설을 간직한 등나무와 팽나무를 아시나요?. 경주  현곡면 오류리의 등나무는 천연기념물 제89호로 지정돼 있으며 이곳은 신라 때부터 왕의 사냥터 역할을 했다고 해서 '용림'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등나무가 팽나무를 타고 올라 가는 모습이 꼭 용이 휘감으며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과 흡사하다하여 용림으로 불려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네 그루의 거대한 등나무와 두 그루의 팽나무가 있는데 등나무 두 그루가 팽나무 한 그루씩을 감아 오르는 모양이다. 높이만 17m에 달하는 이 등나무에는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신라 때 이 마을에 살던 친자매가 둘이 동시에 이웃집 총각을 연모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애가 좋았던 이 자매는 서로에게 총각을 양보하겠다는 마음을 먹으며 평화롭게 살아갔다. 그러던 중 백제군이 침범해 오자 이 총각은 전쟁터에 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을 접한 자매는 연못에 몸을 던져 숨졌다. 하지만 정작 죽었다던 총각은 늠름한 화랑이 되어 귀향했다. 그런데 자매의 소식을 들은 총각도 곧바로 연못에 몸을 던져 자매의 뒤를 따랐다. 자매가 몸을 던진 후 등나무 두 그루가 자랐고 총각이 숨지자 팽나무 한 그루가 자랐는데 두 그루의 등나무는 1000년이 넘도록 이 팽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감아 안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때 몸을 던진 연못은 사라지고 없으며 이팽나무와 등나무도  실제의 나이를 두고라도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후세에도 전해지길 바랄뿐이다.  그래서 이등나무의 꽃잎을 따서 사이가 벌어진 부부의 원앙금침에 넣으면 부부의 금실이 좋아지고 부부사이가 멀어진  부부에게도 등나무의 잎을 삶아 먹으면 부부의 금실이 좋아 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지금도 많은 부부 또는 결혼을 앞둔 연인들이 찾고 있다 한다. 


     

     



    찾아가는 길:부산 금정구 노포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경주행 버스는 오전 5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10분 간격으로 운행되며 운임은 4000원, 소요 시간은 50분이다. 경주터미널 앞에서 현곡행 30번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 금장2리 정류장에서 하차, 오른쪽 오류리 방향으로 걷는다. 200m쯤 가면 오류리 등나무 앞이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경부고속도로 경주IC에서 내려 서라벌대로를 타고 가다 금성삼거리에서 시청 오릉 방향으로 좌회전한 후 황남동주민자치센터 앞 교차로에서 좌회전해 강변로를 따른다. 터미널과 동국대 앞을 지나 금장교 앞에서 좌회전, 1㎞쯤 가면 새로 뚫린 안강 포항 방면 68번 지방도를 타지 말고 굴다리 밑을 통과해 영천 방향으로 200m쯤 가면 우측에 진덕왕릉 표지판이 보인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오류리 등나무를 찾아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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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여행/거제여행)거제시 청마유치환 생가. 거제도 둔덕골 청마유치환님의 생가와 묘소 찾아가기

     

    청마 유치환 선생의 고향은 어딜까?.
    거제도 둔덕면 산방산 인근인 방하마을 뒷산에는 한국 문단의 거목인 청마유치환님의 묘지가 있다. 앞으로는 거제앞바다가 펼쳐지고 뒤로는 산방산에 맥을 이어지는 아담한 곳이며 둔덕골 방하마을에는 그의 생가와 기념관이 복원이 되어 있어 들러 볼 수 있다.
    그의 시 거제도 둔덕골을 보면 8대째 둔덕골에서 살고 있으며 산방산 비탈알로 몇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로 시작되는 구절은그의 고향에 대한 애뜻함이 묻어 있다. 

     



    청마선생은 1908년 음력 7월14일 부친 유준수씨와 모친 박우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유년기인 11세까지는 한학을 수학하였고 그후 일본으로 건너가 토쿄 토요야마 중학에 입학을 하였고 그 후 가정 형편이 어려워 귀국을 하여 1926년 동래중학교에 5년 편입을 하였고 연희전문학교를 수료하였다.
     1931년 문예월간 제2호에 "정적"을 발표하면에 문단에 등단을 하게 된다. 형 유치진과 동인지 "생리"를 발간하고
    1939년 그의 첫시집인 "청마시초"를 발간하였다.
    부산 남여상 재임시 불의의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하게 되며 그의 유작으로는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청령일기(1949)", "청마시집(1954)"등 14권의 시집이 있으며 특히 "깃발", "거제도둔덕골", "사모곡"등 그의 주옥 같은 작품을 남겼다.

    청마기념관 앞의 300년된 거목.



    청마기념관





    청마유치환님의 흉상





























    생가







    생가에서 묘소로 가는 길 좌측으로 산방산의 모습이 웅장하다.




    찾아가는길=부산서부시외버스터미널(051-322-8301)에서 거제 고현행 버스는 오전 6시20분부터 20~3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 1만2600원, 2시간30분 소요. 고현버스터미널에서 둔덕면 산방행 시내버스를 이용, 방하리 청마기념관 앞에서 하차한다. 오전 8시, 11시, 오후 2시, 5시 등 하루 6회 운행하며 50여 분 소요. 산행 후 고현행 시내버스는 오후 3시25분, 6시25분에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남해고속도로 구지선 내서IC에서 내려 두 번째 사거리에서 좌회전한 후 곧바로 통영 거제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고성과 통영을 거쳐 신거제대교나 구거제대교를 건너자마자 1018번 지방도를 타고 둔덕면 방향으로 우회전, 10분쯤 가면 둔덕면 면소재지 농협 앞 4거리에 닿는다. 이곳에서 산방산비원 청마생가 표지판을 보고 직진하면 3분 후 청마생가 방향인 오른쪽으로 꺾어 청마기념관 앞 주차장에 주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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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여행/밀양여행) 단장면 분성허씨고가. 100년 넘은 옛집 단장리 분성허씨 고가 찾아가기

    단장리 분성 허씨 고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10호
    위치: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단장리
    단장마을의 허씨 고가는 분성허씨의 허채가 김해에서 이곳으로 이주해와 터를 잡은 곳으로 1890년 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이주 당시인 단장리 일대 모든 전답의 80%가 허채의 소유라 하였다 하니 그의 위세가 짐작을 하고도 남을 것 같다.
    허씨고가는 유학자 집 답게 건립당시에는 안채와 사랑채인 내외정으로 구분을 하여 지었는데 안채인 내정에는 정침, 별당, 내고, 중문사등을 두었고 사랑채가 있는 외정에는 중사랑채, 큰사랑채, 창고, 대문,,행랑채,가묘등을 둔 큰 저택이였다 한다. 그러나 100년의 세월을 넘기다 보니 현재는 정침, 중사랑채, 창고 가묘만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건물은 목조 기왓집으로 팔작지붕과 우진각, 맞배지붕등으로 지어 졋으며 앞으로는 단장천과 산내천이 서로 만나는 자리에 솟은 경주산을 바라 보고 뒤로는 병풍처럼 두른 계령산과 대곡산(현 가래봉)의 품안에 위치하고 있다. 100년 넘은 팽나무만 집을 지키


    고 현재는 거주 하는 사람이 없이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내부를 보지 못함이 아쉬울 따름이다. 

    단장리 허씨 고가

    100년 넘은 팽나무만 집을 지키고 있다.


    허씨 고가에서 바라 본 경주산

    허씨고가 집 뒤의 대곡산과 바람재

    찾아가는 길=밀양버스터미널에서 단장행 농촌버스 및 표충사행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부산서부버스터미널에서 밀양까지는 오전 7시부터 오후 8시까지 매시 정시에 출발하는 직행(신대구부산고속도로 이용) 버스를 타는 것이 편하다. 요금은 4000, 50분 소요. 경부선 열차를 탄다면 밀양역에서 하차 버스터미널까지 이동해야 한다. 밀양터미널에서는 표충사행 버스를 타고 가다 단장마을 입구(동국대사범대학 부속 홍제중 정문)에서 내리면 된다. 오전 735, 845, 1010, 1120분 등에 있다. 산행을 마치면 홍제중 정문 건너편에서 밀양터미널행 버스를 탄다. 오후 330, 430, 5, 510, 630분 등에 탈 수 있다. 요금은 1200(농촌버스) 1400(일반버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를 빠져나가 곧바로 울산 언양 방향으로 국도 24호선을 타고 우회전한다. 확장이 마무리돼 고속도로처럼 시원하다. 금곡교차로에서 단장 표충사 방향(1077번 지방도) 이정표를 보고 우측으로 빠져나간 후 금곡교를 건너 표충사 쪽으로 직진하면 1분 후 단장마을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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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여행/함양여행)휴천면 시암재 오도재 여행. 지리산 제일 관문 오도재

     

    함양에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산마루를 부르는 이름이 오도재이다.
    좌측으로 법화산과 우측으로 삼봉산을 두고 그 사잇 안부에 형성된 고개로 벽송사의 3대 조사였던 청매조사에 의해 "도를 깨우쳤다 '하여 오도재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기 위한 첫 관문이 두곳이 있다. 전자는 산청의 덕산을 거쳐 중산리로 오르는 고된 오르막의 산길이요. 후자는 오도재를 거쳐 백무동에서 하동바위를 거쳐 천왕봉을 오르는 길이다. 당대의 정여창 김일손등 시인묵객들은 지리산 천왕봉을 오를 때 모두 함양읍에서 이곳 오도재를 거쳐 지리산을 찾아 들었다. 그래서 함양군에서는 진정 지리산의 첫 관문은 이곳 오도재라 하며 오도재에 지리산 제일문이란 망루를 짓고 지리산의 제일관문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리산 쪽의 제일관문으로 벌써 조명이 꺼져있어 군청의 새심한 배려가 있어야 겠다.

    보름달이 휘영창창한 오도재의 밤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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