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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기념관의 안희제 선생님의 흉상입니다.




지하1층으로 내려서면 정면에 처음 만날 수 있습니다.

백산기념관은 부산 중구 백산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위의 회사원들이나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뛰였습니다.



현재 백산 기념관의 모습입니다. 옛 백산상회가 있던 곳으로 특이하게도 이 전시관은 지하에 설치 되어 있습니다. 지하1층이 백산기념관이며. 지하2층은 제2전시실로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정면으로 만나는 액자입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지하실로 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지하1층에 내려서면 먼저 백산선생님의 흉상을 만나게 됩니다.

입구에 쌀 수집통이란 단지가 있습니다.

 백산선생님은 의령군 부림면에서 출생하였어며, 생가 한학을 공부하였던 재실등이 스크랩되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전시관 내부의 모습입니다.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 백산선생님의 일대기를 보기가 쉽습니다.

 백산상회의 설립목적과 운영등에서도 설명을 하였어며 1970년과 1990년 때의 옛  백산상회모습이 사진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백산상회 운영에 관한 내용과 백산선생의 친필서한문등을 볼 수 있다.

 

 

 백산선생님이 사용하시던 유품이 전시되어 있어며

 백산선생님의 초상화입니다.

 국내에서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비밀결사 단체의 활동과 대동청년당 단규등이 나와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명예학사학위 증서

백산기념관이란?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1885~1943)선생의 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중앙동 옛 선생님이 운영하던 백산상회 그 자리에 기념관을 세워습니다.
이름하여 백산기념관.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운영을 하시며 독립운동의 자금을 마련하였다 합니다.
그 뒤에는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였다 합니다.
범위를 확대하여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와 국내 및 외국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뛰는 단체에 활동자금을 지원하였다합니다.
그리고 독립을 위해 백산상회는 그들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어며 백산안희제선생님의 애국심을 기리며 후세에 그뜻을 길이 전하고자 백산기념관을 건립하였다 합니다.

선생은 일제식민지 아래에서도 민족교육, 민족기업육성,항일운동등 여러방면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한 민족독립운동가였습니다.

자는 태약(泰若), 호는 백산, 본관은 강진입니다.

안희제 선생님의 기념관을 살펴보면 출생과 성장, 교육구국운동, 국내 비밀결사 단체 활동, 백산상회 설립과 운영 언론학회활동,국외독립운동 기지건설과 대종교의 활동으로 나누어져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1885.8.4 경남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부농의 아들로 출생을 하였어며 그후 1905년에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을 하고 1907년에 구명학교, 의신학교를 설립하셨다.
1909년에는 대동청년당을 결성, 1911년에는 러시아로 망명도 하였다한다,
1914년에 귀국을 하여 백산상회를 설립하는 과정등을 볼 수 있으며 3.1운동 때는 영남일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동아일보 창립발기인에 참여를 그리고 중외일보 사장으로 취임을 하며 자력사를 설립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합니다.
국외에서는 발해농장을 경영하여 둑립운동의 기지로 이용을 하였어며 1942년 11월19일에 임오교변때 일경에 체포되어 그 이듬해 8월3일 순국을 하였다 한다.
백산선생의 일생은 나라의 독립를 위해 당신의 삶은 뒤로하고 오직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분입니다.

하늘 높은 가을날 백산안희제 기념관과 40계단 기념관을 찾아보세요. 불과 200여 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더욱 자세한 내용의 백산선생님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백산선생님의 교육열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합니다. 구명학교 의신학교 창남학교를 설립하셨고 1918년 서간도에서 망명생활을 할때 안효제의 부음을 듣고 애통한 심정과 장례절차등을 적어 안효제의 동생에게 보낸 조위문이
아래 액자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사용하시던 도장입니다.









터치스크린으로 선생님의 일대기, 업적등을 화면으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지하2층의 전시실 모습입니다.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전시 되어 있습니다.










백산기념관은
개관일:매주 화요일~일요일(월요일은 휴관)
관람시간:09~18:00(단 토.일요일은 17:00까지)
관람료:무료
교통편:지하철 1호선을 이용하여 중앙동역에 하차, 3번 출구로 나오면 3분거리에 위치
버스정류소:백산기념관.부산데파트, 연안여객터미널
홈페이지:www.baeksan.bsjunggu.go.kr
문의전화:051-600-4067~8
주소:부산광역시 중구 백산거리 62(동광동3가 10-2) 60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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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계단 여인상"입니다. 40계단을 대표하며 양동이를 이고 아기를 업고 있는 우리의 어머님의 모습입니다. 이 동상은 인쇄골목 40계단 문화관 건물 앞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양동이를 이고 애기를 업은  어머님이 40계단을 내려오고 있네요. 40계단 여인상의 모델로 수도 없이 오르내렸을 이계단을....이분은 지금 어디예 계시는 궁금합니다. 40계단 문화관 5층에 전시를 해 두었습니다.

현재의 40계단 모습입니다. 중간에 아코디언을 켜는 아저씨가 않아있네요.
그분 등뒤에는 스피커가 들어 있는 박스가 있습니다 이박스의 보턴을  누르면 박재홍님의 경상도아가씨가 흘러 나옵니다.

 

그시절에는 계단 좌우로 아무것도 없었는데 지금은 계단 옆으로 집이 꽉 들어서 있습니다.

아코디언을 켜는 아저씨의 모습입니다. 그때 그시절에는 길거리의 악사들이 많은 시절이였습니다.

어려운 시절에 생각나는 모습입니다. 뻥티기를 하는 아저씨와 그옆에 꼬마의 모습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이 그때의 모습이 생각이 납니다. 뻥 소리와 함께 김이 무럭무럭나며 주위로 박상이 튀어나와 떨어져 있는 것을 주워 먹을여고 두 귀를 막고 서 있는 모습... 

피난시절 고달픔도 잊고 자식에게 젖을 물리는 우리 어머님의 모습
입니다. 지금 난장의 옷가게가 진을 치고 있어 그때의 모습과 너무 대조적입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물이 귀한 시절입니다. 지금이야 집집마다 수도꼭지를 틀면 뜨거운 물 찬물이 콸콸 쏟아지지만 그때는 공동우물로 물이 귀한 시절이였습니다. 온 가족이 총 출동하여 이고 지고하여 물을 져 나르는 모습입니다.

고단한 삶의 모습입니다. 전쟁후 먹고 살기 힘들때 지게를 지고 물건을 져 나르는 역전지게꾼이나 막노동을 하며 하루 날품팔이를 하는 우리 아버님의 모습입니다.
지게에 등을 데고 누워 있는 모습에 한켠에 고무신을 벗어 놓은 그 모습이 얼마나 힘이 드시는지...우리 모두의 아버님입니다. 아버지의 휴식

 테마 거리의 모습입니다. 전봇대하며 전봇대위의 까치집 그리고 중간의 영화 벽보하며 생각나는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40계단 테마거리를 알리고 있습니다. 중앙동 팔성관광에서 동광동으로 오르는 길이 중앙동 국민은행 옆으로 이어지는 테마거리를 알리는 안내판입니다. 팔성관광 건너편에 설치 되어 있습니다.


중앙동 국민은행 옆의 40계단 조형물입니다. 평화의 문으로 기찻길에는 희망찬 내일을 향한 등불을 형상화 했다합니다.

부산역을 나타내는 기찻길의 모습이 있어며

부산항을 나타내는 항구의 모습을 형상화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힘든 고비를 넘기기 위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터온 세월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1950년 6.25가 발발하고 전세는 불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부산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으로 다 수용을 못하고 피난온 사람들은 부산의 대표적인 엄광산 구봉산 용두산 아래 터를 잡고 계단식으로 거적 데기나 판자로 엮어 만든 동네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판자촌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게 중앙동의 40계단입니다.
 40계단이 생긴지는 뚜렷하게 알 수 없지만 중앙동에 새마당이 생긴게 1908년이니까 미루어보건데 동광동5가 언덕베기 윗길에서 중앙동4가 새마당으로 내려오는 길로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 40계단이 널리 알려져 피난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곳이 된 것입니다.
6.25로 인해 피난민들이 이곳 40계단에서 구호물자로 흘러 나온 물건을 거래하는 난장이 생기고 국제시장과 함께 피난민들에게는 애환이 서린 곳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피난민들이 모두 모이다 보니 전쟁통에 잃어버린 가족과의 상봉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합니다.

지금도 부모님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박재홍님이 부른 “경상도 아가씨”로 첫구절에 “사십계단 층층대에 앉아우는 나그네”로 시작되는 이노래는 가사가 피난민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 사십계단이 지금의 40계단으로 부산시 중구 동광동에는 40계단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40계단 문화관으로 동광동 인쇄골목에 위치를 하며 40계단과 함께 테마거리를 조성하여 부모님들에게는 피난살이의 힘겨웠던 추억을 생각하게하고 자라는 청소년들에게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되도록하기 위해 그때의 물품이나 모형을 만들고하여 전시를 해 놓았습니다.

40대 후반 필자인 나도 추억이 떠 오르는 게 있었습니다.
양은으로 만든 도시락 구슬 딱지등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물건이 꽤 많아 꼭 한번 부모님과 자녀분과 함께 찾아 가 보길 권해봅니다.


이제 부터는 40계단 문화관의 모습입니다.



5층 입구에 들어면 만나는 모습입니다. 상설 전시실로 1876년 개항이전부터 개항기를 거쳐 일제 강점기, 광복 6.25등 중구의 역사를 이야기한 중구 연표가 전시되어 있다.


광복전후 부산의 사회상과 6.25로 인한 피난시절 부산 모습을 잘 나타내었어며



밥벌이 물전쟁 삶의 애환이 묻어 있는 그시절의 물품을 전시하여 장년층의 애환을  되살리고 있다.


피난시절의 꿀꿀이 죽 옥수수죽등 그때의 먹거리를 나타내었어며





전쟁중에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으며 어려움 속에서도 배움의 꿈을 키워 왔던 천막교실의 모습입니다. 봉숭아학당의 저요저요 하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풍금에서 흘러나오는 반주에 노래도 부르고....

박재홍님의 경상도 아가씨와 그 당시의 음반들과 전축

어렵던 시절 가지고 놀던 장남감입니다. 생각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양은 도시락과 교복, 추억의 책가방등 그때의 학용품하며...

전쟁물자를 이용하여 필요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을 하였습니다. 재떨이하며. 사물함 그리고 호롱불대신으로 사용을 하였다합니다.





닥종이로 그때의 모습을 만들어 6층 특별전시실에 일부 전시를 해 놓았습니다.
천막으로 엮은 집 앞에서 피난민들의 모습입니다.

망~개~떡~ 외치는 망개떡장수의 외침이 귓전에 맴돕니다. 



6층 특별전시실 중앙에 전시된 그 당시의 군용석유램프 그리고 화덕, 불을 피우기위한 시설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4개의 사각 기둥안에는 그 때의 모습을 찰흙으로 나타내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상영을 할때 돌리는 영사기입니다. 한참 재미 있을 때 보면 필름이 지지지~하며  끊어져 다음장으로 넘어가면 휙~하고 휘파람을 불며 난리를 치던 그때그시절의 영사기입니다.

풀빵입니다.지금이야 추억으로 먹지만 그때는 한끼를 때우기 위한 식사였습니다.

전쟁통에 죽이라도 얻어먹을여고 줄을 서는 모습입니다.

많은 식구가 단칸방에 칼잠을 자던 시절입니다. 자세히 보니 흥부네 가족입니다.


그때 난전의 모습입니다. 아무것도 없던 배고픈 시절에는 부러울 것이 없는 가게 아저씨입니다.

가마니로 엮은 움막입니다. 움막안에 자는 꼬마와 밖에서 뭔가를 열심히 하는 엄마 그때의 모습입니다.

40계단 문화관 전경입니다. 5~6층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번쯤은 둘러볼 것을 권해봅니다.  


참고로 중구문화의집 051-600-4541
40계단기념관 051-600-4041
주소:부산시 중구 인쇄골목 2길81(동광동5가 44-3)
개관일:매주 화요일~일요일(월요일휴관)
관람시간:오전10시~오후7시까지이며 토.일요일은 오후5시까지
교통편은 지하철 1호선 중앙동역하차, 13번 출구로 나와서 5분거리임
버스는 17,26,27,40,41,61,81,82,85,87,88,103,134,508번임
홈페이지:www.bsjungg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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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동 동아대학 부민갬퍼스 좌측으로 들어서면 만나는 임시수도기념관입니다.


주변에 아파트로 둘러 싸여 이제는 도심 한복판의 정원구실을 하는 것 같습니다.

들어서면 만나는 임시수도기념관 입구입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우측으로 응접실 내부입니다.

서재에 걸린 사진과 텅빈 방입니다.

이승만대통령이 집무실에서 타자치는 모습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또 한방에는 대통령의 영정이 걸려져 있습니다.











내고장 부산에는 특이한 이력의 기념관이 있다. 이름하여 임시수도 기념관, 수도란 서울을 의미하지만 부산에 수도기념관이 있다니 그것도 앞에 임시란 수식어를 붙여가지고...1950년 6월25일 역사의 소용돌이는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바늘 마냥 거꾸로 거꾸로 돌아 가고 있었다. 그 산물의 하나인 임시수도기념관, 부산 서구 부민동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뒤에 위치하고 있다, 그이전에는 경남 도지사 관사로 사용하기위해 1926년에 준공되었지만 6.25의 발발로 전세가 불리하여 서울에서 수도를 대전으로 옮기고 종과부적으로 다시 대구로 물밀듯이 내려오는 괴뢰군으로 대구까지 내주고 수도는 다시 부산으로 옮긴다.


그때 이승만대통령의 관사로 사용을 하게 되었다. 낙동강에서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는양 다시 서울을 수복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를 하고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대통령관사로 사용을 하게 된다. 건물의 양식은 2층으로된 목조건물로 일제치하라서 그런지 일본풍을 많이 느끼는 건물이다. 특이한 점은 1.2층 모두 바닥은 마루를 깔아 놓았다. 밟고 걸어가니 꼭 일본의 왕궁 마루바닥을 걷는 것 처럼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입구에 들어서면 좌우로 갈린다. 좌측은 2층으로 오르는 집무실, 우측은 응접실로 들어선다. 외국에서는 볼 수 있었던 것처럼 한쪽벽에 벽난로가 있고 그 당시의 대형사진이 걸려 있다. 옆으로 서재 내실 를 지나면 이승만 대통령의 편지, 자수로된 우리나라지도.이승만휘호 호집, 대통령 이승만박사유교 담화집,이승만대통령훈시집등이 전시되어 있고 우측으로는 이승만대통령의 군용방한복, 프란체스카여사의 의류가 전시되어 있다.

식당등 1층은 대통령의 거쳐를 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어며 경비실 옆으로 오르는 2층계단길이 집무실로 오를 수 있다. 2층 집무실은 현관쪽과 경비실에서 연결된 계단이 이어진다. 정면으로 집무실이며 미닫이 문 안으로 들어서면 우측으로 대통령이 밀랍인형으로 않아 있다. 무심결에 들어선 나는 감짝 놀랐다. 책상에는 오래된 타자기와 책 그리고 시계가 땅바닥에는 앉은뱅이 선풍기가 자리하고 있다. 2층집무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운치가 대단하다. 멀리 천마산을 볼 수 있어며 주위로 도심 속에 둘러싸여 있지만 녹색의 수림으로 덮혀있어 재잘 되는 새소리가 요란하게 크게 들린다. 한켠에는 “어느듯 가을빛도 짙어저서”로 시작되는 이기붕의 편지로 끝부분에 국방부장관 이기붕으로 되어 있다. 사진첩, 사진화보, 부산시보, 헌법개정공포문, 대통령 담화문등이 전시되어 있고 역시 벽면은 흑백사진으로 둘러져 있어 그때의 생활상을 옅볼 수 있다.



밖으로 나와서 정원을 둘러보니 그 당시 이승만대통령도 관사를 돌아보았을 것을 생각하니 역사는 돌고도는 것 같다. 뒤쪽에는 키큰나무와 특이한 대숲 그리고 울창한 숲속 벤치에 앉아 마을 할머니여러분이 마실을 나와 막바지 더위를 식히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모습을 보니 프란체스카여사와 이승만대통령께서도 저런 한가한 모습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암울한 전쟁으로 전세는 밀리고...피말리는 하루하루를 생각하니 지금 저분들의 여유가 행복해 보인다.


2층 집무실의 모습입니다. 처음2층에 올라 깜짝 놀랐습니다. 왠사람. 자세히 보니 밀립인형입니다. 오래된 타자기하며 고서 시계 앉은벵이 선풍기의 모습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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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시내 동부동 KT 건물 뒤에 도심지의 있는 고려 시대 돌로 만든 경주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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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옛 경주읍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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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경고이 쌓은 석성의 모습이 90m정도 남아 있다.

경주읍성을 보면서...

제 고향은 경주입니다. 경주의 이야기나 남산의 이야기가 나오면 옛 추억들이 나도 모르게 생각이 나곤합니다. 이번에도 벌초를 한다고 고향에 하늘 밑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벌초후 경주시내의 경주 읍성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산을 다니다 보니 산성의 흔적은 여러번 보았지만 평지인 마을의 성은 보기가 힘든 구경입니다.
금전산 밑의 낙안읍성과 서울 장안의 4대 문등 경우 떠오를 정도입니다. 금전산을 산행하다가 잘 보존되고 있는 낙압읍성의 현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랬는데 도심한복판의 서울 4대분이나 경주의 읍성은 모든 성이 주택가가 들어차서 성의 흔적을 찾아 보기 힘들정도입니다. 그래서 경주에서는 읍성의 존재를 생각도 못했습니다.
이번에 찾아본 경주읍성은 현재 90m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예전에 여기가 성이였다는 흔적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이것도 주택의 담장에 걸쳐져 있어 옛 성터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가 않을 것 같습니다.
석성의 위의 큰 고목만 세월의 깊이를 짐작할 뿐입니다. 경주읍성은 사적 제96호이며 경주시 북부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경주에는 열매시장인 성동시장과 아랫시장이 있습니다. 그 대로변 중간에 kt 건물이 있어며 그 건물 뒤에 석성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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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무게에 이기지 못하고 남은 석성의 흔적은 담쟁이가 덮혀 있는 어느집 돌담역활도 하고 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적, 행정적 기능을 함께한 성을 의미한다합니다. 경주읍성은 고려시대 현종 3년(1012)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동부동 북부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의 둘레가 4,075자(尺:2400m)이며 높이가 12자(尺:3.6m)인 돌로 만든 석성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도 경주읍성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합니다. 이곳에 조선 태조의 어진을 모신 집경전과 관아, 우물80여개를 있었다하니 많은 주민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동서남북으로 사대문을 두어 향일문인 동문, 망미문인 서문, 남문인 징례문, 북문인 공진문을 두었다 하며 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해자(垓字)도 갖추었다 한다.
남문인 징례문에는 현제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성덕대왕 신종을 걸어 매일 시각을 알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때는 경주읍성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퇴하였는데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였다한다.
일제강점기때 대부분 헐리고 읍성의 흔적을 알 수 없을 정도인 90m 남아 현재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경주시에서 최근 경주 읍성 복원계획을 실행을 하고 있다 한다. 고려 태종 왕건이래 역대고려왕들은 경주읍성을 중요시하여 940년에 안동대도독부를 설치 994년에동경유수관을 두는 등 지방통치의 중심을 삼은 경주읍성을 복원하기위해 2002년부터 주위의 토지보상과 건물철거등으로 83억원을 투입하였고 2012년 까지 총605억원을 들여 동북성곽 1100m및 동문의 향일문과 북문인 공진문을 복원한다고 한다.

하루빨리 복원이 되어 옛 경주의 모습을 보았서면하고 낙안읍성처럼 하나의 관광상품이 되었서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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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읍성에서 출토된 주춧돌과 경주읍성을 알리는 초라한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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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복원된 모습을 보이는 경주 읍성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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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복원된 성곽의 모습과 그 뒷면으로 돌아가면 보는 모습으로 쓰레기가 나뒹굴고 자라난 나무등으로 곧 허물어질 태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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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현장의 오래된 고목, 밑둥치만 남기고 있지만 고목에 그래도 싹이 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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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휴게소의 마이산 전망대 관광객들이 들러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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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산과 똑 같은 모습으로 만든 조형물 뒤로 실제 마이산과 모습을 같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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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를 알리는 안내판과 팔각정자안에서 마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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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귀를 쫑긋세아  말의 귀를 닮았다는 마이산은 암마이와 숫마이로 나누어져 두개의 독립봉으로 이우어져 있다

요즘 국내의 고속도로 사정은 사통발달로 뚫여 일일생활권을 넘어 반나절이면 목적지까지 도달을 할 수 있다. 지금도 많은 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을 하고 있어 더욱 편하게 목적지 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고속도로를 이용하다보면 꼭 한번은 들러보는 곳이 있다. 휴식을 위해 또는 식사를 위해 찾게 되는 휴게소가 음식의 맛을 둘째치고라도 이제는 쉬는 기능을 넘어 최고의 전망대에 않아 오고가는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남해고속도로상의 남강휴게소는 주위의 방어산과 남강의 잔잔한 물흐름으로 많은 관광객이 머물고 대진통영고속도로상의 덕유산 휴게소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덕유산은 보이지 않는 먹통 휴게소이며 함양휴게소는 지리산의 고장답게 휴게소 건물 옥상에서 멀리 있는지리산을 산세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해 놓아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런 휴게소 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곳이 생겼다. 최근 개통된 장수~익산간 고속도로로 아직은 찾는이가 없어 한가롭다 못해 지나가는 차량을 보기가 힘들 것 같은 한적한 고속도로상에 진안휴게소가 상하 설치되어 있다.
 진안하면 마이산이 먼저 떠오르는 만큼 그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곳에 마이산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생겨 지나가는 차량들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휴게소 들머리입구에 전망대 가는 길과 휴게소 건물 좌측으로 팔각정자에서 보는 마이산과 똑같이 만든 조형물을 번갈아 보며 암마이와 숫마이를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또  보이는 그대로 마이산과 일치하도록 만들어 놓아 보는 맛이 그 만큼 좋다. 한번쯤 지나가는 길이면 들러 볼만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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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소 건물 좌측의 팔각전망대에서 본 마이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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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각정와 마이산


마이산에 대해서....
마이산은 1979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어며 신라때는 서다산, 고려때는 솟아 올랐다하여 용출산으로 불려지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속금산으로 불였다. 조선 태종이 지나다 말의 귀를 닮았다 하여 마이산으로 부르게 되었어며 시멘트로 어겐 것 처럼 타포니 지형을 이루고 있다. 계절에 따라 불리는 이름도 여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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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는 배의 돛과 같다해서 돛대봉, 여름에는 용의 뿔을 의미하는 용각봉,  가을엔 마이산,겨울에는 붓처럼 보여 문필봉으로도 불리며, 먼  옛날 산신부부가 이곳에서 두 자녀와 함께 살다가 하늘로 되돌아갈 때가 됐다. 남신이 자신들의 승천 모습을 아무도 봐서는 안되니 밤에 떠나자고 하자 여신은 밤에는 무서우니 새벽에 떠나자고 했다. 그러나 새벽에 떠날 즈음 한 아낙이 그 모습을 보고 소리를 질러 승천에 실패하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바위산을 이루었으며, 이때 화가 난 남신이 여신으로부터 아이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숫마이봉은 작은 암봉 두개를, 암마이봉은 자세를 돌려 않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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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서원(禮林書院)
서원이란?.
조선시대 사설 교육기관을 말한다. 대유학자인 선현을 모시고 제를 올리는 곳으로 예림서원은 밀양출신인 점필재(店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여 1567년(명종22년)에 덕성서원으로 건립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1634년 인조12년에 현재의 위치인 후사포리에 옮겨와 예림서원으로 개칭을 하였다.1669년 현종10년에 친이 임금이 편액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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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예림서원은 1985년에 복원을 시작하여 1987년에 마쳤어며, 독서루와 구영당,육덕사를 일직선으로 배치를 하여 전면에는 교육기관을 두고 뒤로는 제를 올리도록 하였어며 예림서원을 들어서는 정문은 문이 3개인 2층의 누각을 이루고 있다. 독서루로들어올때는 맨 우측 문으로 들어와 나갈때는 맨 좌측문으로 나오는게 유교의 법도라고 관리하는 할머니가 일러주신다. 그리고 좌우로 돈선재와 직방재를 두어 공부하는 유생들을 기거하도록 하였어며, 독서루 2층 누대응 공부하는 유생들이 쉬면서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사용을 하였다 한가. 지금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남무를 걸쳐놓아 출입을 삼가하도록 하고 잇었다. 2층 마루가 썩어 혹 다리가 빠지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 까 싶어 출입을 막고 있었다. 할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2층에 올라가보니 군대군대 마루가 꺼져 있어 발리 복원이 필요할 것 같았다.  

중앙의 사당인 육덕사는 점필재 김종직을 모시고 좌측에는 오졸재 박한주(1459~1504),우측에는 송계 신계성(1499~1562) 선생을 모시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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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전야제는 모두 해 뜨는 관광지로 서로 가려고 아우성이다. 주로 동해 정동진, 낙산사등 강원도를 먼저 생각을 할 것이다. 그 것도 아니면 공업도시인 포항, 호랑이 꼬리인 호미곶이 아닌가 추측을 할 것이다. 그러나 틀 린 말이다. 한반도 아니 유라시아 대륙에서 가장 먼저 뜨는 해를 볼 수 있는 곳이 울산시 울주군과 양산시에 자리하고 있다. 산으로 치자면 영남알프스의 최고봉인 가지산이다. 가지산이 가장 먼저 해뜨는 것을 볼수 있어나 바닷쪽으로 긴산등성이가 가로막아 바다에서 떠 오르는 해를 볼 수 없고 양산시 상북면과 웅상읍에 걸쳐 있는 천성산이 현재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해를 볼 수가 있는 곳이다. 그럼 산이 아닌 우리 주위에서는 어디일까. 가장 빠른 일출 장소는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의 간절곶 이다, 그래서 2000년 1월1일부터 매년 해 맞이 행사를 하고 있어며 간절곷이란?,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 먼바다로 나가면서 육지쪽으로 바라보면 서생면의 돌출된 지형인 간절곶이 긴 간짓대처럼 보여 이름이 유래 되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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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에 설치된 등대로 한반도에서 가장 빠른 일출을 볼 수 있다 한다.

 

그 간절곶에는 등대와 소망우체국, 대마도로 건너간 부군을 기다리는 박제상의 가족 동상, 새천년의 비상이란 기념비와 동방의 햇불이 여기 간절곶에 조형물로 만들어져 오고가는 관광객들에게 볼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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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곶 등대는 동해 바다를 지나 다니는 선박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1920년 3월부터 등대의 불 빛은 꺼지지 않고 동해바다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그 불빛은 46km밖에서도 등대불을 볼 수 가 있다 한다. 등대탑의 높이는 17m이고 8각 콘크리트로 설치되어져 있다. 현재는 개방되어 오전 10시부터 오후 4~5시까지 관람을 할 수 있다 한다. 그 앞에는 2000년 1월1일 새천년을 기원하며 세운 “새천년의 비상”이란 조형물이 웅장하게 서 있다. 신성하며 장수와 복을 가져다 주는 거북이로 기단을 만들어 울주군의 번영을 기원하고 있다. 그옆으로는 소망우체통을 볼 수 가 있다. 높이 5m, 둘레 2.4m, 무게 7t으로 규모가 엄청 큰 우체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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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큰 우체통으로 소망을 담아 보내는 소망우체통


세계에서 가장 큰 우체통이 무료엽서로 인해 선거법 위반의 논란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울주군에는 독특한 산이름이 있다. 이름하여 치술령, 치술령을 올라보면 동해바다를 훤히 볼 수 있는 망부석 또한 볼 수가 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미사흔을 구하고 대마도에서 화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신라충신 박제상, 그 망부석에 올라 돌아 올 부군을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 그의 혼이 파랑새가 되어 은을암에 숨어 들었다는 이야기가 모두 간절곶의 세모자 동상에서 볼 수 있다.

박제상을 기다리는 세모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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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끈쥔 주먹의 어부과 모습과 함께 동해의 파도가 춤을 추는 간절곶에서 추억을 한번 만들어 보세요. 그리고 간절곶 옆 서생면 대송리 평동의 수연횟집(대표 지연근 052-238-9023)을 소개한다. 자연산 회만을 고집하는 이집은 주인장이 직접 바다에 나가 잡아 오기 때문에 계절에 맞는 횟감을 내 놓아 항상 싱싱한 육질의 회맛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식사와 함께 매운탕 맛이 자연산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맛에 담백하며 숟가락이 절로간다. 밑 반찬 또한 바닷가에서 채취한 자연식단을 채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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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만을 고집하는 수연횟집, 광어 참돔 우럭 달게이 꼬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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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초류인 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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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봉은 88고속도로에서 가조T,G 못미쳐 좌측으로 머리를 풀어헤치고 누워있는 여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산이 미녀봉으로 88고속도로 건너편에는 우두산의 끝 장군봉 아래 돌출된 기암을 볼 수 있다. 기개있는 장군의 모습으로 미녀봉과 함께 애뜻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옛날 바다였던 이곳에 표루하는 배한척이 있었어니, 그 배에는 장군이 타고 있었다. 기개가 하늘을 찌르고 늠름하며 자태또한 사내라 하늘의 옥황상제는 그 장군을 아깝게 여겨 자신의 딸인 공주를 지상으로 보내 장군을 구하도록 한다. 그러나 장군과 공주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옥황상제는 진노하여 장군과 공주에게 형벌을 내려 영원히 산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다. 그 산이 미녀봉과 장군봉으로 일년에 딱 한번 그들은 서로 만나 회포를 풀게 하였다니 그날이 바로 칠월칙석날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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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가조 들판을 내려다 보고 있는 장군바위,
그 좌측으로 미녀봉이 머리를 풀고 누워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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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풀고 누워 있는 여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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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정상이 이마로 그아래 눈썹 눈 오똑한 코, 악간벌린 입이 뚜렷하다*

흔히 대구에서 88고속도로를 달리면 거창 휴계소를 지나게 된다. 곧  가조 인터체인지 직전까지 왼쪽으로 쳐다보면 머리를 풀어헤쳐 여자의 모습을 한 산이 있다. 이 산을 인근 가조에서는 미녀봉이라 부른다.
구미에는 그 보다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누워 있는 부처님 즉 와불산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큰 부처님의 모습으로 산덩어리 전체가 인자한 부처님의 모습이니 기네스 북 감이다.  

칠곡에서 구미로 이어지는 경부고속도로상에서 보면 구미의 금오산이 꼭 사람이 누워 있는 형상으로 보인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사람이 누워있는 모습이라고 난리다. 미녀봉이 여기도 있다고....

차장밖으로 보니 구미의 금오산으로 안동방향에서 보면 누워있는 부처님의 모습이라 하여 와불산으로 부른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여기 칠곡에서 구미방향으로 고속도로상에서도 금오산이 누워있는 부처님(?)의모습으로 보이니 달리는 버스안에서 찍은 모습이라 다 잡을 수는 없지만 오똑한 코와 입의 모습이 사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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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산은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의 산인것 같다. 도립공원1호가 금오산이며 자연보호 발상지가 금오산 대혜폭포이며. 대혜폭포란 구미의 모든 시민들은 대혜폭포에서 흐르는 물로 식수도하고 농사도 짓는다고 큰은혜를 입었다하여 대혜폭포라 부른다. 그 대혜폭포가 물떨어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는 명금폭포로도 불리며 와불산인 금오산 자락에 있다.금오산은 예로부터 임금이 나올 자리라는 무학대사의 예언 처럼 금오산 효자봉 아래 상모동 아래서 고박정희가 태어 났어니 그의 예언은 적중한 것 같다. 지금의 금오산은 자세히 들여다 보면 부처의 이마에 철탑 즉 침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가 있다. 누워있는 부처가 일어날여고 해도 이마에 침이 꽃혀 활동을 못하는 것은 아닌지...하루 빨리 지금은 무용지물인 미군기지를 정리하여 누워 있는 부처님이 일어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철탑을 제거하여 주면 우리나라의 국운이 되살아 나지 않을 까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달리는 경부고속도로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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