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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용두산 공원이 많은 일본 관광객과 국내의 관광객이 붐비는 명소가 되었다.
그곳 한켠에는 어디선가 본 듯한 사람이 관광객의 사랑을 받으며 같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연인이 함께 찍는 모습, 남자가 앉아 같이 찍는 모습, 할머니등 일본인 관광객이 꼭 거치며 다양한 사람들과 같이 사진을 찍는다고 항상 붐비는 장소가 용두산 공원에선 이곳이 되었다.





무엇인가 싶어 들여다 보니 최지우씨가 앉아 있는게 아닌가.
왜 여기에 앉아 있을까,
아하~

2009년 12월3일 부산 출신여배우라 부산명예관광홍보대사로 위촉이 되어 부산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라 한다. 사실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이곳에 한류스타의 원조로서 최지우씨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설치만 하였지 관리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은 것 같다. 얼굴의 코 등에 끍힌 흔적이 남아 있는등 좀더 그녀의 미관에 관심을 두는 것이 부산시로서는 홍보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가 옆에서 물어보네요,

진짜 최지우씨 맞아요하며...



현재는 그녀의 옆자리가 비어 있네요. 
여러분중 누가 이자리에 앉아 그녀의 빈 옆자리를 채워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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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정(桃源亭)

범도리의 범도마을을 돌아가는 계곡은 태극형으로 돌아가고 그 굽이 마다 웅덩이가 만들어지니 범도연, 궤어소, 소나무소을 만들어 놓았다.
이 계곡이 아홉 번 굽어 진다하여 사회동 농바위에서 사연리까지 이르는 계곡으로 채지당 박구원의 고사 구곡가에서 따온말로 구곡천이라 한다.
그 구곡은 사연, 정각산, 범도리, 승학동, 단애, 증소, 도장연, 농암대, 선소로 모두 단장천변에 위치를 하고 있다.


또한 고예천, 고사천으로도 불리워 졌는데 동리의 형국이 마치 서북쪽의 범도행주를 마고 할미가 끌어 들이고 있는 형국이라 고예라 하며 신선이 사는 곳을 가상하여 고사라 하였다.
이 굽어지는 진경속에 1916년 퇴로리 여주 이씨 문중에서 그의 선조인 도원이종극이 이곳에서 소요하며 지냈던 곳으로 별업을 지어 관리를 하고 있다.
도원이종극은 스스로 도원거사라 칭하여 은둔하며 이곳에서 풍류를 노래하며 세상사 모든 시름을 떨쳐 버렸던 곳으로 특히 이곳 박미를 좋아 하였다 한다.
 그의 후손들이 남겨 놓은 도원정기를 보면 도원정을 짓게된 내력과 고사천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며 소요하던 도원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하여 놓았다.
한때 이곳은 햇빛이 늘 드는 밝은 뫼, 즉 백산인데 박미로 표기를 하였고. 이곳에도 마을이 형성 되어 있었다는데 폐동 되고 없다.
도원정을 관리하는 가옥이 딸려 있고 그위로 심진암의 절터에 작은 암자인 봉화사가 자리하고 있다.


도원정을 가는 길은 고사천을 건너는 징검다리를 건너야 된다.













도원정 관리인 기거하는 집으로 현재 봉화사 스님이 기거를 하며 도원정을 관리하고 있다.


고사천에 피어 오른 물안개의 모습
찾아가는 길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 편으로 밀양역까지 간다. 부산역 기준 오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등 여러 편 있다. 해운대역에서 밀양행 무궁화호도 오전 7시45분에 출발한다. 밀양터미널에서 고례리행 버스를 타고 봉화사 입구에서 내린다. 오전 6시40분, 12시 등 하루 4회 운행.
 


자가용은  부산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이용, 양산IC에서 내린 후 언양 경주 방향으로 우회전 하자마자 다시 어곡공단 에덴밸리리조트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배내골 표지판을 보면서 에덴밸리리조트를 넘어야 한다. 고점사거리에서 밀양댐 단장방향 직진한다. 밀양댐 전망대를 지나고 고례교를 지나 평리대추정보화마을을 지나면 마을 입구에서 좌측으로 봉화사란 표지석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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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봄이 오고 나면 집안의 비축된 양식이 바닥나고 하여 들로 산으로 먹 꺼리를 찾아 떠나는 일이 허다했다 한다.
칡뿌리를 캐 먹는다던지 고구마 옥수수죽등 봄이면 겪는 연래행사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보릿고개라 불렸던 제5의 계절,
그 시절에는 하얀 쌀밥이 많이 그리웠던가보다.
흔히 자연의 야생화에서 보면 그 이름을 많이 찾을 수 있는데 조팝나무, 이팝나무, 백미꽃등 흰쌀밥에 비유를 하여 그런 이름을 붙혀 주었다. 
 

 



산이나 들에서 나무에 하얀 꽃잎이 소복이 붙어 있는 것을 보면 밥그릇에 흰 쌀밥이 가득히 담겨져 있는 것에 비유를 하여 눈으로라도 실컷 포식을 하였던 시절의 아픔이다. 그러나 이팝나무나 조팝나무등은 그리 크지 않은데 오늘 이야기하는 이팝나무는 천연기념물제234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꽤 큰 나무로 그 마을의 당수나무로 사랑을 받고 있다.



신전마을의 당수나무는 이 이팝나무가 당수목이다. 보통 마을의 당수목은 기목으로 불리는 느티나무, 팽나무를 주로 봐 왔는데 이팝나무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신전마을의 이팜나무는 신기하게도 밑둥치부터 갈라저 두 개의 줄기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데 뿌리는 하나라 하니 신기하다. 높이가 12m, 둘레가 4.15m로 밑둥치 부분이 석어 가마솥의 발처럼 가늘게 이어저 나이를 알 수 없는 지경이되었다.


오랜 옛날에는 내석천 건너인 상삼리 상리마을 인근에 황산역과 위천역이 있었다 한다. 그때 함께 심어졌던 것으로 유추를 해본다. 이팝나무는 입하에 흰꽃이 피기 때문에 입하목이라 하여 이팝나무, 흰쌀밥처럼 보인다하여 이밥이 이팝이 되었다는 설이다. 어찌되었던 간에 배고픈 시절 백성과 함께 해온 아픔의 나무이다. 신전마을에서는 이나무가 마을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신성한 나무로 생각하여 매년 정월대보름에 당제를 올리며 한해의 평안을 빌었다.

소재지: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신전리 신전마을

천연기념물 제234호










찾아가는길

부산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양산톨게이트를 빠져 나온다. 만나는 35번 국도 삼거리에서 우회전 통도사 신평 방향을 따라간다. 석겨리 삼계마을앞에서 좌측 석계공원묘지방향인 석계교를 건너면 상삼리 상리마을이다 여기서 통도사 방향인 우측길을 따른다. 상리교를 건너고 도륜교를 건너면 이팝나무와 만난다.

 

대중교통편은 지하철 1호선 온천장역을 나오면 좌측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12번, 13번 언양행 또는 울산ktx행을 이용하여 신전마을앞에 하차를 한다. 도로를 건너 신전교를 건너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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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주정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사 장내강이 피난처로 정한 곳으로 그 이후 인동장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1957년 옥봉 아래에다 옥봉정의 재사를 짓고 고례리 양지마을과 음지마을, 구석촌등지에서 세거를 이루고 살았다.
음지마는 현재 밀양댐 아래에 위치를 하며 순조때 진사 장창익이 살았다 한다.
구석촌은 거북모양의 바위가 많이 있다하며 인동장씨의 낙주 장선홍이 조선조 숙종때 처음 자리를 잡았다.
장창익의 아들인 장응구는 효자로 명성을 날려 광무2년인 1898년에 고례마을 입구에 삼성각이란 효자각을 세워 그의 효심을 받들고 있다.
1918년 장씨문중에서 장제산 아래인 시리소 절벽에 낙주정을 짓고 그의 선조인 낙주 장선홍과 농산장영석을 추모하기 위해 낙주정이란 누각(재사)을 지었다.
고사천이 감도는 시리소 절벽에 지은 낙주정은 그 주위의 풍경이 마치 산상의 별구에 감탄을 마다하지 않는다. 지금은 잡목으로 인해 고사천과 주변의 산들이 잘 보이지 않아 답답한 감도 있지만 뛰어난 경치로 점필재 김종직은 말년을 이곳 사회동의 농암대에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찾아와 그 뛰어난 승경에 취해 많은 시를 남겼다.
현재의 고례 이름 또한 그의 영향이 크다하겠다.
1051번 지방도에 인접해 있는 낙주정은 임경대, 강정,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고사천의 시리소 모습이다. 좌측 바위 위로 낙주정이 있다.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시릿 절벽과 그 위의 낙주정의 모습



삼성각의 효자각


옥봉정
찾아가는길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 편으로 밀양역까지 간다. 부산역 기준 오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등 여러 편 있다. 해운대역에서 밀양행 무궁화호도 오전 7시45분에 출발한다. 밀양터미널에서 고례리행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린다. 오전 6시40분, 12시 등 하루 4회 운행.

부산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이용, 양산IC에서 내린 후 언양 경주 방향으로 우회전 하자마자 다시 어곡공단 에덴밸리리조트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배내골 표지판을 보면서 에덴밸리리조트를 넘어야 한다. 고점사거리에서 우회전, 7분만 가면 선리에 닿는다. 고점사거리로 돌아가 밀양댐 단장 방향으로 우회전, 15분쯤 가면 고례마을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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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정

경상남도문화제자료 제216호
사연본동에서 당모렝이를 돌아가면 왼편 단장천 건너편으로 옛집이 보인다.
반계정으로 정각산을 타고 내려오는 산줄기의 반석위에 터를 잡은 정자이다.
1775년 영조51년에 산림처사였던 첨지중추부사인
반계옹 이숙이 세운 별서로 밀양의 장선에 사는 여주이씨 문중의 건물이다.



 반계정 앞을 흐르는 단장천을 반계옹은 청계라 부르며 정자 또한 반계정이라 하였다.
반계선생이 이곳에다 반계정을 짓게 된 이유 또한 독특한데
반계 이숙이 지인들과 매사냥을 하기 위해 매를 날려 보냈는데
매가 돌아오지 않아 찾다가 이곳 단장천에 앉아 있는 매를 보고 찾아 들었는데
그도 이곳의 풍치가 너무 아름다워 자리를 뜰 수 없어 이곳에다 정자를 짓고 강학하였다.
그 후 반계정사와 살림집으로 사용하던 건물은 화재로 인해 소실되어 다시 건립 한 것이지만 반계정은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후손의 설명이다.

이숙은 연산군때 밀양으로 내려온 교위 이사필의 8세손으로 손사익, 신국빈, 안인일, 남경의등 지역의 마음 맞는 문인들과 교류를 하며 이곳에서 어울려 지냈다한다.
반계정 건물은 강가의 넓은 반석을 이용하여 세웠는데 기둥을 세우는 주춧돌등 계곡의 지형 지물을 그대로이용하여 건물을 올렸다.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의 기와 건물로 고종때 그의 5세손인 이소구에 의해 대대적인 건물 해체 복원공사를 하였다.
그 후에도 여러번의 중수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반계정의 아름다운 경치를 ‘반계정12경’ 으로 문인들이 담아 현판으로 남겨 놓았다.

























반계정을 관리하는 후손들이 기거를 하는 집이다 반계정을 가기위해서는 이곳을 거쳐야 한다.

반계정을 지키는 강아지로 최근에 새끼를 낳아 성질이 매우 사나와 졌다.
새끼 두마리를 따라 다니면서 혹 자신의 새끼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인지 아주 사납게 짖어 된다.
반계정을 관람하는 둘레꾼들은 어미개의 성질을 건드리지 말고 조용히 구경하세요. 아님 시끄러워서 구경을 못함




찾아가기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 편으로 밀양역까지 간다. 부산역 기준 오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10시20분 등 여러 편있다. 해운대역에서 밀양행 무궁화호도 오전 7시45분에 출발한다. 밀양버스터미널에서 표충사행 또는 고례리행 버스를 타고 동화마을을 지나 석전마을에서 하차를 한다. 그 건너편이 반계정 정자가 있다. 오전 7시35분, 8시45분, 9시10분 등 자주 있는 편이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24번 국도 언양 표충사 방향 우회전 후, 금곡교차로에서 내려 금곡교를 건넌다. 표충사 방향으로 1077번 지방도를 타고 15분쯤 가면 사연리 동화전마을을 지나고 당모렝이를 돌아가면  석전버스정류소에 닿는다. 인근에 주차 할 공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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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시 단장면 사연리 사연마을에서 용회동으로 넘어가는 범머리산 아래에 침유정이란 정자가 있다.
1900년에 태동에 거주한 전 군수 안장원에 의해 별장으로 건립되었으며 
현재에도 연못이 조성 되어 있다.

 그 당시에는 범머리산 아래에 있다하여 범머리 못으로 불렀다하며
물이 맑기로 거울과 같다하여 경호정이라 불렀다.

범머리산이 의령남씨들의 선산이며 판서 남오와 침류정 남우문 부자의 무덤이 있어 
이 정자를 사촌의 의령남씨들이 1953년도에 구입 하였다 . 

후손들이 그들 추모하기 위해 구입을 하고 침류정이란 현판을 걸었다.
최근에 와서는 벽진이씨 성을 가진 분이 재차 구입을 하여 리모델링을 거친후 ‘침유정펜션’이란 고택체험장을 조성하였다.

들어서면 먼저 허리까지 오는 아담한 담장이 눈길을 끈다.
침유정 마루에 앉아 범머리못에서 배를 뛰우며 새들이 날아와 배회하는 모습과
사연리를 감싸는 취경산의 모습을 훤히 볼 수 있도록한 담장이 낮아 
세상의 눈높이에 맞추었을까. 


현재의 주인 말로는 낮은 담장에도 못으로 내려가는 중문이 달려 있었는데
수리를 하면서 중문을 없에 버리고 똑 같은 높이의 담장으로 고쳤다 한다.
아래를 보니 연못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아직 남아 있다.

그리고 침유정 정자의 색은 고색창연하다.
원래는 나무기둥과 벽채의 모든 나무에 짙은 갈색톤의 색칠이 되어 있었다하며
수리를 하면서 모두 사포로 밀어 색상을 밝게 하였다한다.
지금도 마루에 않아 있으면 나무에서 나오는 향기가 정자를 감싸며 머리를 맑게한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연못에 드리워진 고목이 특이하다.
물쪽으로 비스듬이 누워있는데 물푸레나무로 이리 큰 나무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주위에도 죽은 물푸레나무를 볼 수 있다.

침유정에 두 번 답사를 하게 되었는데 첫 번째는 수리중에 들렀다.
구경을 해도 되는냐 이야기를 하니 수리가 끝나면 그 때 와서 구경을 하라고하였지만
이왕 온김에 보고 가라하여 침류정을 보게 되었다.
영남알프스 둘레길을 하면서 많은 정자와 누각을 보았지만
이곳 침류정 만큼 내 마음에 쏙 와 닫는 곳은 없었다.

정면 4칸에 측면 2칸,  2칸은 마루를 넣었는데 양쪽 모두 문을 달아 놓았다.
그리고 2칸은 방을 넣어 방문은 양쪽으로 붙어 있지만 방은 1개로 꾸며져 있다.
방 앞으로는 툇마루를 넣어 놓아 여기 앉아 바깥세상을 바라 보며 자연을 감상을 하였을 것 같은 모습을 상상해 본다.


수리때의 침유정 모습-

















수리가 끝난후의 침유정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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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년 전인 밀양 단장면 무릉리 노곡마을의 작은 서당에는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낭하게 울려 퍼졌다.

그 글 읽는 소리가 퍼져 인근의 수많은 유생들이 이곳에 찾아 들었다.
이름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진나라때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의 별천지 모습이  이를까
논에는 막 모내기를 끝내고 한가로운 농촌의 풍경과 주변의 대추나무에는
겨울옷을 벗어버리고 이제는 초록색의 여름옷으로 바꾸어 입은 자연의 모습이
무릉리 마을 사람들이 꿈꾸는 무릉도원이 아닐까.
그래서 인지 이곳도 전원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다. 

 


선생은 수림덤산을 배경으로 산자수려한 이곳에 
유하여 지상낙원인 무릉도원을  꿈꾸었을까. 
이곳은 1913년 소눌 노상직(1854~1931)선생이 망명지 만주에서
이곳 무릉리로 돌아와 저술과 후진양성을 위해 세운 강학소이다.
‘자암’은 서당뒤 서북쪽에 있는 붉은 색을 띠는 바위로
마을에서는 뿔근바위 즉 자암에서 자암서당이라 하였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 직후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파지장서에 유림대표 137명, 문인 14명과 함께
서명 한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의 제자가 일천에 이를 정도로 그의 학문과 열의는 인근에서는 따를 자가 없었고
1930년에는 근방 사연리 말방마을에 사남서장을 짓고
후진양성과 책을 보관하였다 하는데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작금의 자암서당은 글 읽는 수많은 사람들은 온데 간데 없고 
마당에 웃자란 잡풀만이 무성하여 황량한 바람소리만 들릴뿐이다.
서당건물과 안가는 서로 담장과 서당건물이 쳐져 분리를 해 놓았다.
출입문은 두 개로 밖에서 보면 살림집으로 들어가는 문과 서당으로 들어서는 문이 있다.
현재는 안가로 들어서면 좌측에 안채가 있고 정면에는 서고가 자리하고 있다.
안채도 지금은 살림을 살지 않으며 서고문을 열어보니 책꽃이만 짜여져 있고 책은 볼 수 가 없었다.
세월 앞에 어 쩔 수 없는지 살림집의 출입문에 붙은 작은 사랑채에 후손들이 기거를 하는 것 같다.







모양세로 보아 할머니 한분만이 이 자암서당을 지키고 있는 것 같다.
할머니의 발이 되어 줄 유모차가 마당에 나딩굴고
 평상에는 살림들이 누워 있으며 수돗가 옆에는 세탁기가 자리를 하고 있다.
자암서당으로 들어서는 중문은 함석이 문 앞에 기대어져 최근에는 들어선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중문을 열고 들어서니 우측으로 서당의 출입문과 화장실이 서 있으며
두동의 건물이 서 있었다.

자암서당으로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가 없는 가 보다. 
문 짝 등 보수를 한 흔적은 찾을 수 가 있었지만 마루위에는 잡동사니등이 너부러져 있고
회칠을 한 벽들은 떨어지고 마당앞의 잡풀은 자랄대로 자라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자암서당의 간결하면서도 기품있는 모습에서
선생의 올 곧은 모습과 선생의 열의에 찬 교육열을 옅볼 수 있었다.












자암서당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4호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무릉리

자암서당은 소눌 노상직(1854~1931)선생이 망명한 만주에서 돌아와 저술과 후진 양성을 위해 세운 서당으로 선생은 이곳에서 3.1운동 직후에 파리평화회의에 보내기위한 파지장서에 서명을 하였고 그의 학업과 덕망에 천여명이 넘는 제자를 배출하였다. 선생은 이곳에서 또함 많은 저술 활동을 펼쳐 성리절요, 동국씨족고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찾아가는길

 

부산에서 신대구부산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밀양요금소를 빠져 나오면 24번 국도와 만난다.
울산 얼음골 표충사 방향으로 우회전을 하여 금곡인터체인지에서 우측 표충사로 내려선다.
금곡교를 건너면 단장면으로 1077번 지방도인 표충사 방향으로 직진한다.
단장면 소재지의 면사무소 앞에서 1077번 지방도인 무릉리 국전리 방향으로 우회전하면 된다.
곧 무릉버스 정류장과 만나고 정류장 직전 노곡교를 건너면 자암서당이다.

부산에서 밀양행 열차를 이용한다. 오전 5시10분,50분 6시35분, 55분, 7시45분, 8시35분,9시25분, 10시20분등 다양하게 있다.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하며 밀양시외버스 터미널에서는 국전행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하루 5회로 6시20분 8시40분, 12시50분, 17시, 19시이며 무릉에서 하차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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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진 만어산은 만어사를 품고 있다.
만어사란 사찰로 인해 전국적으로 알려진 산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밀양의 작은 산에 불과한 초라한 산이
땀흘리는 표충비, 무봉사 태극나비, 얼음골의 시례빙곡과 여기 만어사의 불영경석으로
밀양의 4대 신비중 하나가 된 것이다.
이곳 사찰의 근원은 대웅전 앞의 삼층석탑과 삼국유사에서 1181년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전해지는 설화에 의하면 가락국의 김수로왕까지
그 근원이 올라가는 천년이 넘은 고찰이다.
만어사를 대표하는 것은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도 아니요.
대웅전 앞의 소원을 들어주는 바위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까 만어사는 뭐니뭐니 해도 만어사 절 밑으로 깔려 있는
 너덜을 빼고는 만어사를 이야기 할 수가 없다.
그 바위 하나하나에 전설과 설화가 깔려 있는 것이다.


먼저 삼국유사에서 창건설화와 만어사 어산불영경석에 대해 알아보자.
수로왕때 가락국안의 옥지라는 연못에 못된 용이 살 고 있었는대
만어산의 나찰려와 서로 사랑에 빠졌다 한다.
그들이 사랑을 하게 되면서부터 하늘의 노여움을 산 는지
벼락과비, 우박, 가뭄으로 백성들은 흉년이 들고 4년 동안 기근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에 수로왕은 신통력으로 그들을 막아 볼려고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처님 도움을 받아 여섯 비구와 일만의 천인을 데리고와
독룡과 나찰녀의 항복을 받아
그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함께 받게 하여 설법에 감응을 받아
여섯비구와 일만의 천인들이 만어사 앞를 가득 메운 바위들이 되었다 한다.
그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수로왕이 이곳에다 절을 지었다하는 이야기가 하나이며  


또 하나는 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에 따르면
동해 용왕의 아들이 자신의 명이 다한 것을 알고
무척산의 신통한 스님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는데
그 스님이 가다가 멈춰 서는 곳이 인연이라 이야기를 하였다.
왕자가 길을 나서니 일만의 고기떼가 그를 따르고 왕자가 멈추어 선 곳이 이곳 만어사라 하였다.
지금 미륵전 안의 미륵돌은 동해용왕의 왕자가 변하였다하는 미륵바위이며
그의 뒤를 따르던 일만의 고기떼들은 바위로 변했다 한다.
사실 만어산의 바위들은 이곳뿐만 아니라 산 전체로 분포되어 있어 장관을 이룬다.
그리고 만어사 앞의 바위들을 두들겨 보면은 맑은 종소리와 또는 쇳소리를 내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여섯비구즉 용이 변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동해의 왕자와 고기떼가 만어사로 왔을 때 나왔다는
미륵전 옆의 작은 샘터가 있다.
그래서 인지 동해의 밀물과 쓸물때 샘터 물높이가 달라진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낙동강이 범람할때도 이곳 샘터의 물이 넘쳐 난다는 이야기 있다 한다.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스님은
만어사의 어산불영경석과 미륵불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는데
만어사 경석중 금과 옥의 소리를 내는 것이 있으며
미륵불은 멀리서 보면 부처 형상이 보였다가 가까이 가보면 사라져 버린다고 하였다.
문외한인 내가 바위를 가깝게도 보고 멀리서도 보았지만
그저 바위로만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방문화재 제152호에서 2011년 1월10일 천연기념물 제528호 승격되었다 합니다.



아래내용은 밀양시장님이 주민에게  만어사에 관한 답변 내용이며 일부 옮겨 왔습니다.
"1996년3월11일 경상남도 문화재(기념물 제152호)로 지정되어 관리해 오다가
만어사에 있는 경석이 오랜 풍화과정을 거치면서 암괴가 마치 양파가 벗겨
지듯 풍화되는 모습이 한반도 지질형성과정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만어산 정상부에서 700m이상 펼쳐져 있는 바위가 주변경관과
어울려 독특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는 등 탁월한 경관적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청에서 현장 심사하여 금년 1. 10(월) 국가지정 문화재(천연기념물
제528호)로 승격 지정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는 길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삼랑진IC~김해 삼랑진 58번(만어사 10㎞)~양산 삼랑진역 좌회전, 1022번 지방도~굴다리 통과(삼랑진역 앞에서) 양산 원동 좌회전~ 우곡리에서 만어사 표지판을 보고 만어사 방향~만어사 주차장 순

만어사 055-356-2010
밀양문화관광과055-359-5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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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의 한천정사와 유허비

영동 월유봉아래에는 우암 송시열(1607~1689)에 관한 유적지가 남아 있다.
예로부터 물 좋고 정자 좋고 산세 또한 좋은 곳에는 의례히 시인묵객들이 들어와 풍류를 노래하고 강학과 후진 양성을 하였다.
이곳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달도 머물고 간다는 월유봉 아래에 우암선생은 초당을 짓고 강학하며
골짜기마다  풍치 좋은 곳에 한천팔경이라 이름을 붙혀 후세에 까지 전해지고 있다.
월유봉, 사군봉, 용연대, 산양벽, 화헌악, 법존암, 청학굴, 냉천암으로 월유봉 아래에 모두 있다.

선생은 충북 옥천군 구룡리에서 태어 났다.
모친 곽씨부인은 밝은 달과같은 구슬을 삼키는 태몽을 꾸어 우암선생을 잉태하였다 한다.그
래서 인지 이곳 달도 머물렀다 간다는  한천마을에 선생도 은거를 한 것일까.
한때 후대에 와 이곳 고려시대의 암자터로 추정 되는 이곳에
한천서당을 짓고 선생을 배향 하는 제사를 지내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하는데,
고종때 대원군에 의해 서원 철폐령에 훼철 되었다가
지역 유림들에 의해 1910년에 한천정사(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28호)가
건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 한천정사는 추풍령에서 내려오는 추풍령천과 민주지산의  물한리 계곡이 초강천을 이루어 오다 서로 합수되고 백화산과 사군봉 사이를 흐르는 석천과 신흥리에서 또 다시 합수되어 
초강천을 이루며 이곳 월류봉에서 절정을 이룬다. 

한굽이 두굽이 돌아가는 이곳에다 서재를 지은 것을 보면 우암선생의 기품을 엿 볼 수 있다. 
한천정사 우측 강가에는 우암 송시열선생의 유허비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46호로 지정 되어 있다.
 이 유허비는 1779년인 정조3년에 후손과 유림들에 의해 우암선생이 이곳에 은거를 하며
후진을 양성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정면과 측면 각1칸에 맞배지붕으로 건립되었다.






우암송시열 선생의 유허비







한천정사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황간IC에서 내려 황간삼거리에서 국도 4호선을 타고 김천 방면으로 우회전한 후, 마산삼거리에서 백화산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월류교를 건너 삼거리에서 좌회전(901번 지방도) 한 후 원촌교를 건너면 다시 삼거리를 만나는데 왼쪽으로 300m만 가면 월류봉 표지판이 있다. 좌회전해 200m만 가면 월유봉 대형 주차장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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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 침수정(枕潄亭)

경상북도 기념물 제45호

경상북도 영덕군 달산면 옥계리

옥계 침수정 포항시와 청송군 영덕군의 경계지점으로 오롯이 영덕군에 속해 있다.
영덕군의 남쪽 오지를 담당하고 있다.
하옥천과 항리천이 서로 만나는 곳,
내연산과 동대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팔각산을 휘감아 돌아 옥계천을 이루니
여기에 조선정조8년 인 1784년에 손성을이 누각인 침수정을 짓고 강학을 하였다. 




침수정은 계곡 자연의 형태를 그대로 이용하여 올린 누각으로
일각문을 세워 담장을 돌려 출입로를 만들었지만
그 반대인 옥계계곡 쪽으로는 담장을 돌리지 않아 자연의 옥계계곡을 그대로 볼 수 있게 하였다.
누각은 정면2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자연상태를 이용하여 기둥을 세우고 만든 누각으로 주변의 절경과 잘 어울린다.





손성을은 이곳 옥계계곡에다 누각을 짓고
침수정(枕潄亭)이라 현판을 걸었는데
베개침(枕)자와 양치질할 수(潄), 즉 침수정이라 하였다.
이곳 옥계계곡의 풍치가 그만큼 아름다워
손성을이 세속의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이곳에 눌러 않아 목침을 베고 하늘을 쳐다보고,
옥구슬 굴러가는 물소리에 심취되어 도연명의
무릉도원이 여기가 아닐까 하였을 것이다.





침수정 주위로는
진주암과 삼귀암 학소대 병풍석 일월봉등 옥계37경이 포진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는 침수정을 두고 침수정의 아름다운 정원 역활을 톡톡히 하고 있다.
침수정 뒤편으로는 여덞자 병풍인 팔각산이 쳐져 있어
기암속에 자리 잡은 진경산수화를 보여 주고 있다.






찾아가는 길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를 기준으로 경부고속도로 경주ic~울진 포항 7번 국도~울진 영덕 28번 국도(포항외곽도로)~울진영덕 7번 국도를 타고 가다 삼사해상공원을 지나면 만나는 첫 삼거리에서 달산 방면 좌회전~옥계 주왕산 얼음골 부남 방향 좌회전~침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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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서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7호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일직손씨의 격재 손조서를 추모하기 위해
1753년에 서산서원으로 건립되었다.

격재 손조서는 조선시대 충,절,의 신하로
자는 인조 호는격재 휘는 조서 본관은 안동으로 안동 손씨라고도 한다.

벼슬은 통종대부호조참의, 집현전 학사등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로
이곳 밀양 용평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436년에 급제를 하여 사헌부 감찰 병조정랑
재임시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한직으로 물러났다.

그후 수양대군이 단종을 손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용평으로 낙향하여 용연정을 짓고 강학하였다.

그후 수양대군인 세조가 여러번 불렀으나 벼슬을 사양하며
이곳 용연정에서 세상과 문을 닫고 살았다.


그의 학덕은 점필재 김종직의 반열이요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이 스승으로 삼았던 격재선생.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으로
고종때와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면서
서원은 훼철되어 서산고택, 또는 철운재로 편액되었다..

지금 혜산서원에 들어서면
여타 밀양서원 예림서원등을 둘러 보아도 서원을 가르는 담장이 사실 없다.

그러나 혜산서원은 서원안의 건물을 담장으로 나누어 진 것을 볼 수 있다.
혜산서원은 전(田)자의 모양을 취하고 있다.
일반서원은 보통 일(一)자 형태로 교육과 제례의 배치를 하는데
혜산 서원은 북쪽에는 사당, 북동쪽에는 강당건물을 남서쪽에는 제수를 준비하는 전사청 남동쪽에는 서당으로 각각 구분을 하여 담장이 쳐져 있다.


당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한 조치로 보이며
서원이 아닌 재실과 가정집으로 위장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 진다.

1971년 옛 서원 터를 넓혀 중건한 후
각지역으로 흩어진 일직손씨 오현들을 한자리에 모셨다 한다.

현재 이곳에는 격재 선생의 문집책판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8호가 보관되어 있다.






































혜산서원의 600년 된 차나무

다죽리 혜산 서원 안에는 600년된 차나무 세그루가 있다 한다.
다죽리 인근인 엄광리에는 야생차밭이 있는데 그 유래를 보면
보두라는 중이 중국에서 가져와 차나무를 엄광사부근에 심었는데
그 차나무가 다죽리까지 번졌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일직손씨의 손관은 본관이 안동의 일직면으로
손관이 안동에서 밀양으로 세거지를 옮길 때 함께 가져 온 것으로 전해지는 국내에서는 보기드문 차나무이다.



혜산서원 앞의 차나무








찾아가는 길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밀양행 시외버스는 오전 7시부터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  1시간 소요. 부산역에서는 밀양행 열차가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 6시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10시20분등  많이 있다 밀양역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밀양시외버스터미널로 간다 .  밀양터미널에서 남명리 얼음골행 및 표충사행 어떤 버스를 타도 다원마을에 정차한다.
얼음골6시10분 9시35분 (직행)10시55분 7시05분 8시, 9시05분, 10시40분, 11시30분
표충사6시20분 9시10분 (직행)7시35분,8시45분 10시10분 11시20분
그리고 감물행 고례행 국전행 시내버스도 이용할 수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울산 언양 24번~금천리 용평~굴다리 통과~ 산외면 다원리 방향 우회전~산외면 사무소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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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산정

(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칠산정. 세월 앞에 장사 없다. 문화재 관리의 현주소 밀양 칠산정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78호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미촌리 796번지

칠탄산 아래에는 두 재실이 있다.
칠탄정을 아랫재실 칠산정을 윗재실이라 구미마을에서는 부른다.

모두 손씨 집안의 재실이지만 칠탄정은 밀성손씨의 오한 손기양이 만년을 보내던 별업이고 칠산정은 일직손씨로 본관은 안동이다.

시조는 고려시대때 중국 송나라의 전란를 피해 우리나라로 귀화하였는데 원래 순씨였다 한다.
현종의 이름이 순이라 음이 같아 현종이 손으로 사성하였다.
현종때 개국공신으로 손응이며 그의 후손으로 충정왕때의 영의정인 ‘삼중대광판삼사사’ 정평공 손홍량이고 8세대인 격재공 손조서에와 일직손씨의 꽃을 피운다.
세종14년에 진사에 그리고 1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학사로 수양대군에게 단종이 폐위되면서 정치에 환멸을 느껴 낙향을 하게 된다.
그의 '두우시'에는 옛 단종을 그리워하며 ‘두견새도 나와 같아, 밤낮으로 끊임없이 우는구나’ 하며 신하는 두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며 세조가 이조참판에 재수함에도 거절을 하고 이곳 월연정 옆 용호정(밀양시 용평동 장선마을)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평생을 단종을 그리워하며 세상을 등지며 보냈다.
산외면 다원리 혜산서원에서 봉향을 하고 있다.











칠산정은 격재공의 13세손인 처사 손응룡의 묘하재숙소이다.
손응룡의 증손자 죽암 손건이 즉 7개의 골짜기와 7개의 능선이 합해지는 곳이라하여
칠산이라하며 일곱실이라고도 하는 이곳에
1863년 9월에 창건을 하여 모선재, 구호당이라 하였다.
1895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5세손인 손기형이 1906년에 중수 하여 칠산정이라 하였다.







근대 초기 밀양지방의 양반재실로 별업을 겸한 재각이다.
정당의 마루는 재회의 장소로 좌우 온돌방은 재관들의 거처로 제수마련은 방앗간채와 고직사에서 하였다.
청송루의 누각은 온돌방과 누마루를 넣어 전사청, 직방등의 기능을 하였다.

 




문화재로 지정된 칠산정도 세월 앞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피부로 느껴진다.
새로 올린 지붕(모양만 기와 모양)이 복원공사의 전부인지 모르지만 한복에 구두을 착용 한 것 처럼 엉성한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여기도 칠탄서원 처럼 대청마루에는 쥐생원들이 이집의 주인인양 쥐똥들이 즐비하고 청송루의 누마루는 음산한 기분 마저 든다.
언제까지 방치를 할런지 모르지만 지금 이상태라면 곧 또하나의 문화재가 사라질 판이다.
칠산정을 관리하였던 후손들의 기거한 건물의 모습은 칡덩굴에 집의 흔적만 보이고 땜질하듯 문화재 보수를 한후 관리를 하지 않으니 밑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전체적으로 관리를 하지 않는 문화재는 청도의 선암서원처럼 보수를 해 임대를 하여 고택체험이나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찾을 수 있고 훈기가 있는 곳으로 먼저 바꾸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그래야만 자연적인 파괴는 면할 수 있을 것 같다.





















찾아가는 길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밀양행 시외버스는 오전 7시부터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  1시간 소요. . 들머리인 단장면 미촌리 구미마을은 감물리 시내버스를 이용한다.  오전6시10분, 8시10분 11시50분, 구미교를 건너 우측 구미마을회관앞을 지나 마을 뒤 우측깊은 골짜기를 보고 따라간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울산 언양 24번~금곡인터체인지에서 단산마을로 내려서표충사 단장면 방향으로 내려선다. 금곡교를 건너 우회전하면 사촌마을~구미마을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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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탄서원(七灘書院)

☞(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단장면 칠탄서원. 문화재라며 밀양관광책자에 나오는 칠탄서원이 흉가수준이라니...


밀양, 청도를 여행하다 보면은 많은 문화재와 만나게 된다.
유형문화재 또는 문화재자료란 이름으로 지정이 되어 있어 큰 기대를 하고 찾아간다.
기대를 하고 간 만큼 우리의 고가들을 보고 오는 기쁨 또한 매우 크다.

청도 신지리의 만화정, 운강고택, 선암서원, 삼족대등과 밀양의 오연정 월연정 금시당등 선조들의 풍류를 느끼면서 찾아가는 재미 또한 솔솔하여 만족을 하고 돌아 온다.
어떠한 경우에는 안을 들어 갈 수가 없어 까치발을 들고 고택을 보는 것으로 만족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잘 정돈되고 관리가 되고 있는 문화재를 보면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 올 수가 있었다.





밀양의 칠탄정을 찾아가는 길은 보통의 문화재 가는 길과 다르다.
단장천이 앞을 막고 있어 구서원이 있는 활성2교 다리를 건너야만 찾아 갈 수 있다.
구역은 단장면에 속하지만 단장면에서는 들어갈 방법이 애매하다.
넓은 동천(칠리탄)을 도강하던지 아니면 구미마을의 안법천을 신을 벗고 건너 가야 칠탄서원으로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 마을어른들의 이야기로는 밀양읍내나 학생들의 동굣길도 모두 이길을 따라 칠탄정을 거쳐 활성동의 살내 ~금시당 옛길을 따라 밀양으로 갔다하는데 지금은 인걸도 간데없고 옛길도 사라지고 고가 또한 흉가로 방치되고 있어니 찾아간 나로서는 황당하면서 마음이 아프다.
 


밀양시에서 발행하는 관광홍보 책자인 밀양여행 46P에 문화제자료 제72호 칠탄서원과 혜산서원이 함께 나와 있는데 관리 상태는 천차이다.
칠탄서원은 밀성손씨의 오한 손기양(1559~1617)이 임진왜란때 석동산(지금의 운문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웠서며 만년에는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학문을 가르쳤던 곳이다.
1725년에 그의 후손들이 다시 중건 하여 진암서당으로 고쳐부르다가 1844년에 청절사를 지어 손기양의 위폐를 모시고 칠탄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때와 서원 철폐령에 의해 서원은 헐려 버리고 1914년에 다시 건물을 올렸다.

 
‘ㅁ'형태의 건물로 묘우 앞에 정면 5칸인 팔작지붕의 강당이 있다.
좌우로 1칸씩 방을 넣었고 중앙의 3칸은 마루를 넣었다. 강당앞에는 좌우로 누각 형식의 동,서재가 있고 정문역시 문루를 통해 드나들게 하였다.
사실 칠탄 서원 앞을 흐르는 강은 밀양강의 지류로 동천이라 부른다.
엄연이 말하면 구미마을에서는 이곳만 잘라 칠리탄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단장리 앞의 경주산에서 두 물길이 서로 만난다.
산내천과 단장천이 서로 만나 칠리를 흐르면서 여울을 만드는데 그야 말로 아름다운 곳으로 칠리탄이라 하며 칠탄서원이 칠탄산 자락에 숨은 듯 자리 하고 있다.



칠탄서원을 찾아가면 문화재 관리 실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4동의 건물이 곳 허물어 지기 일보 직전이며 천장으로 다닌 쥐때문에 마루마다 까만 쥐똥들이 천지이며 방문과 대청을 닫고 있는 문짝들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들렁거리고 허리까지 자란 잡풀로 인해 이곳이 문화재가 되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하지만 엄연히 문화재란 안내판이 붙어 있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아마 남량특집극 전설의 고향 촬영 섭외장소로 이용하면 딱인데...









































찾아가는 길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밀양행 시외버스는 오전 7시부터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 주말에는 오전 9시40분과 오전 10시20분에도 있다. 1시간 소요. . 들머리인 산외면 활성2동은 밀양터미널에서 남명리 얼음골행 및 표충사행 어떤 버스를 타도 다원마을에 정차한다.
얼음골6시10분 9시35분 (직행)10시55분 7시05분 8시, 9시05분, 10시40분, 11시30분
표충사6시20분 9시10분 (직행)7시35분,8시45분 10시10분 11시20분
그리고 감물행 고례행 국전행 시내버스도 이용할 수 있다.
다원정류장에선 하차한 후 버스진행 방향으로 직진하면 '율전 구서원 또는 리더스CC'를 가리키는 팻말을 따라가면 된다. 20분쯤 걸린다. 구서원 입구 활성2교 다리를 건너 리더스cc 입간판에서 왼쪽 동천을 따라가는 산길이 열려 맀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울산 언양 24번~금천리 용평~굴다리 통과~(이후 리더스CC 팻말 따라 가면 됨)~금천리 남기리 용평 방향 좌회전~신동국밥, 금천마트 지나~화동 표지석~용평 용활 방향 좌회전~동천변 활성2교 부근에 주차를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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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산외면 죽원재사. 밀양시 옛고을 다원리 오한 손기양의 죽원재사를 찾아서...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다원마을은 손씨 집안의 고택들이 즐비하다.

그래서 모두 한집안의 후손들이 일가를 이루어 살고 있는 줄 알고 있지만 마을을 찾아가면 두 손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산외면사무소를 기준으로 하여 죽동과 죽서로 나누는데 왼쪽은 환경부장관을 지낸 손숙씨의 고향인 일직손씨 집성촌이 혜산서원을 매개로 하여 이루고 있으며 오른쪽인 다원2리는 조선조 초기에 생원 손겸재가 입촌한후 죽원재사의 오한 손기양의 후손인 밀성손씨가 세거를 이루고 있다.

이곳 죽포정사는 산외면 사무소 뒤 평전산 아래에 있는 오한 손기양의 재실로 5대손인 죽포 손사익에 의해 1753년에 건립되었다. 치재소인 죽원재사와 죽포 손사익의 죽포정사가 각각 보존되어 있다. 이곳 죽원재사도 건립된후 세월의 흔적을 지울 수 없어 황폐화 되어 오다가 1956년에 다시 중수를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한다.












백송

































모당천

예전에는 죽원재사를 가기위해서는 모당천을 거쳐 갔는데 이 모당천도 재미 있는 이야기가 전한다. 중국 원나라때 난리를 피해 이곳까지 피신을 온 모씨와 당씨가 식수를 구하기 위해 팠던 샘으로 모당샘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다죽리에는 모씨와 당씨는 한명도 거주를 하지 않으며 국내의 당씨성을 가진 사람들중 밀양이 본관인 사람들은 처음 이마을에 온 당씨들의 후손이라 한다.



찾아가는 길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밀양행 시외버스는 오전 7시부터 매시 정각에 출발한다.  1시간 소요. 부산역에서는 밀양행 열차가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 6시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10시20분등  많이 있다 밀양역에서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밀양시외버스터미널로 간다 .  밀양터미널에서 남명리 얼음골행 및 표충사행 어떤 버스를 타도 다원마을에 정차한다.
얼음골6시10분 9시35분 (직행)10시55분 7시05분 8시, 9시05분, 10시40분, 11시30분
표충사6시20분 9시10분 (직행)7시35분,8시45분 10시10분 11시20분
그리고 감물행 고례행 국전행 시내버스도 이용할 수 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울산 언양 24번~금천리 용평~굴다리 통과~ 산외면 다원리 방향 우회전~산외면 사무소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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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영남루,. 무더운 날에 밀양 영남루에 올라 시원한 대청마루를 생각한다.


밀양하면 먼저 떠 올리는 것이 무엇일까?. 표충사, 사명대사, 영화 밀양촬영지, 얼음골,등

생각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십중팔구는 밀양의 영남루를 먼저 생각할 것이다.
그만큼 영남루는 외지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으며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은 그런 곳이다. 영남루는 어떤 누각일까. 밀양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축물로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힌다.

1300리를 달려와 바다로 빠지기 전에 합류되는 마지막 낙동강 지류인 밀양강가에 솟은 건축물이다. 밀양읍성의 아동산 자락을 휘감아 도는 밀양강가 주위로 정면의 일자봉에서 용 한마리가 힘차게 꿈틀대며 밀양강 용두연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형상의 용두산과 좌측으로는 호두산 즉 범머리산이 월연정 앞의 월연에서 물을 뿜는다하여 호분탄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름하여 좌백호 우청용이며 용두목아래에는 밀양강이 빚어낸 최고의 절경지가 펼쳐진다. 삼문동을 감싸며 흐르는 밀양강, 종남산에서 흘러내린 말머리산인 마암산과 방울재 옆의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복호암이 감싸는 절경의 중심에 2층으로 시원하게 누각을 올리니 이를 영남루의 앞 정원이라 한다. 






영남루는 밀양강과 조화를 이루며 밖에서 보는 외적임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3대 누각답게 영남루는 내적인 아름다움도 무시할 수 없다. 화려한 단청과 영남루를 화재로부터 보호를 하기 위해 물의 수호신인 용을 영남루에 새겨 넣었고 영남루 안 내 귀퉁이에 봉황과 용 거북이를 그려 넣어 영원한 영남루를 꿈꾸었을까. 누각을 연결하는 월(月)자형 계단을 넣어 한층 영남루의 품격을 더 높혔고 밀양강에 구름이 끼여 있는 운치 있는 영남루를 생각해보라. 신선이 따로 없을 것이다. 그것을 항상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루 끝을 운상인 구름모양을 돌려놓았고 꽃병에 화려한 꽃들이 꼽혀 있는 조각들이 영남루를 돌려 놓아 사시사철 구름위에 화려한 꽃들이 장식되어진 영남루가 되게 하였다.

이런 곳에다 시가 빠질수가 있을까. 당대의 명필가인 퇴계이황, 목은이색, 문익점등 많은 분들이 시문을 현판으로 남겨 놓았다. 처음 이자리는 신라 경덕왕때에는 영남사란 사찰이 있었다 한다. 그 사찰네 부속 건물인 누각을 고려 공민왕때인 1365년 밀양부사인 김주에 의해 규모를 더욱 크게 확장을 하였다 하며 현재의 누각은 1844년에 이인재부사가 중건을 한 것으로 보물제 147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영남루 마루에 올라서면 많은 글씨체를 볼 수 있다. 영남루, 영남제일루, 교남명루등 많은 현판들 속에 1843년 7살의 이현석군과 11세의 이증석은 이인제부사의 아들이며 그들은 형제인데 어린나이에 대단한 필력으로 영남루와 영남제일루의 현판글씨를 남겨 지금도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날씨가 자꾸 무더워지고 여름으로 달려가고 있는 요즘이다. 영남루 누각마루에 올라 앉아 시골의 대청마루에 걸터 않아 여름을 달래던 추억을 생각하며 향수에 젖어 보면 어떨까.










































누각을 서로 연결하는 月자의 계단



















찾아가는 길;
부산역에서 무궁화호나 새마을호 열차로 밀양역까지 간다. 무궁화호 첫 차는 오전5시10분에 있고 20~4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43분 소요, 3800원. 밀양역 앞에서 영남루에 가는 시내버스는 수시로 있다. 1, 1-2, 5, 6번 등 다양하다. 10분 소요.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에는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밀양 방면으로 24번 국도를 타고 긴늪사거리에서 직진, 밀산교를 건넌 후 표지판을 따라 영남루 앞으로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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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과 청도를 여행하다 보면 한가문의 집성촌을 이루는 곳이 여럿있다.
특히 밀성손씨와 밀성박씨가 밀양을 대표한다하겠다. 흔히 마을의 주위에 향교가 서 있으면 그 동네이름도 자연스럽게 교동이 되는 곳이 많은데 밀양향교 주위에도 마을이 형성 되어 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교동으로 불린다.

들어서는 입구에는 밀양손씨 교동파 세거터라는 큰 표지석이 집성촌임을 알리고 있다 골목을 들어서면 먼저 교동파의 종택과 만난다. 1910년경에 건축된 정면7칸 측면 한칸반의 역 ‘ㄱ’자 형태로 지어 졌고 즐비하게 나타나는 고택들을 보면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손병순씨 고택과 손병구씨 가옥등 근대가옥이 증개축 과정을 거치면서 일제시대에서의 건물형태를 엿볼 수 도 있고 교동의 대표 가옥인 1천평 대지위에 세워진 99칸 대 저택도 만날 수 있다. 일대에서는 만석꾼 집으로 불렸다하며 17세기 숙종때 손성중에 의해 처음 지어졌다. 현재는 한정식 집으로 운영이 되는데 상호가 열두대문으로 이집의 대문 수만 12개나 달한다한다.
근방에 보기드문 대 저택이다. 향교를 거처 항교 정문을 나가면 다시 고택들을 만날 수 있다.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가면 밀성박씨들의 집성촌을 이루는 곳을 만날 수 있다.
신지리 고가촌으로 20번 도로를 따라 양편으로 고래등 같은 고가들이 이어진다.
소요당 박하담(1479~1560)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서당을 짓고 후진을 양성한 그 터에 1809년 박정주가 분가를 하면서 살림집으로 건립을 하였다
그 후 1824년 운강 박시묵에 의해 크게 확장을 하고 그의 동생인 박기묵이 1899년 합천군수로 재직시 건립을 하였다는 도일고택. 섬암고택은 박시묵의 둘째아들인 박재소(1840~1873)가 분가를 하면서 살림집으로 지어졌다 한다.
운강고택 들어가는 골목 입구에 셋째아들인 박재충이 분가를 하면서 건립한 운남고택, 박시묵의 손자인 박래현이 조선 고종때 별서로 건립한 명중고택등 고가들의 건물들이 즐비하다.
흡사 조선시대 양반가들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운강고택은 신지리를 대표하는 고택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서로 구분이 되어 두 개의 ‘ㅁ'형의 구조를 한 대 저택이다.
명중고택도 ’ㅁ'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도일고택과 섬암고택은 한일자의 평면구조와 ‘ㄱ'자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 밀양박씨 집성촌은 신지리 평야의 너른 터에 집안의 공간을 넓게 잡아 시원하게 건물을 올렸다.

(밀성손씨 교동파 손씨 고가촌)




























(청도군 밀성박씨 고가촌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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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밀양여행)밀양 아랑각.

밀양 아랑각

밀양에는 종종 남량특집극인 전설의 고향에 이곳 영남루 아래 아랑낭자의 이야기가 소재거리로 많이 나온다.

그 만큼 전국적으로 아랑낭자의 이야기는 전설이 아닌 실제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밀양의 구석구석을 다니다 보면 정절을 지키다 순절한 분들의 정려각들을 많이 만난다. 상동면의 낙화암에서 뛰어내린 민씨부인은 이 고을의 대단한 자부심으로 남아 있으며 산외면의 장씨 부인 역시 친정인 창녕의 월영대에서 뛰어내려 정절을 지켰다하여 그 마을의 이름을 정문으로 부르게 되었다하며, 단장면의 사촌마을등 숱한 이야기들이 전해 온다.

그만큼 밀양에는 부도를 목숨과 바꾸며 정절을 지키겠다는 부인들이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많이 만난다. 정려각을 대표하는 것이 이곳 영남루의 아랑낭자가 아닐까 싶다. 명종때 죽음으로 순결을 지켰다는 아랑낭자의 사당을 함 가보자. 영남루 아래 돌계단을 내려가면 아랑각을 만난다. 정절문 우측으로는 큰 노거수가 밑둥치의 절반을 도려내고도 아랑각을 지키는 수문장을 하고 있다. 계단을 올라 열린 문을 들어서면 또 한번의 계단을 만난다. 계단위 아랑낭자를 모신 사당이 자리를 하고 있다.

그곳에는 낭자의 영정과 좌우로 유모와 나들이를 나온 모습과 또 하나는 신임부사의 꿈에 나타나 낭자의 억울함을 호소하여 범인을 잡아온 그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삼문 옆 쪽문을 나서면 계단 위 낭자의 현장을 알리는 비석과 만난다.

아랑은 그 당시 밀양부사의 딸로 윤씨이며 동옥 또는 정옥으로 불렸다. 하루는 유모와 영남루에 밤나들이를 나왔다가 유모와 내통한 괴한에게 겁탈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자결을 하였다. 그의 혼백을 위로하고자 마을에서는 사당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현재는 밀양시의 대표적인 축제가 된 밀양아랑제로 아랑아가씨 선발대회를 개최하여 낭자의 혼백을 위로하고 있다.

1930년에 영남루를 중수하면서 현재의 위치에 ‘정순아랑지비’를 세우며 비각을 세워 아랑각이라 불러서며. 현재 아랑사는 1965년 비각인 아랑각을 헐고 그 자리에 맞배지붕의 3칸짜리 사당과 삼문인 중문을 세웠고 고육영수여사에 의해 이당 김은호가 그린 아랑의 영정과 위폐를 모섰다한다.

바람이 좀 불라치면 아랑각 주위를 감싸고 있는 대나무의 스산함이 그 녀의 슬픔을 대신하듯 울부짓고 낭자의 죽음이 너무나 억울한지 밀양에서는 청춘남녀들이 아랑각에서는 절대로 데이트를 즐기지 않는다 한다. 그 후 반드시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다하니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밀양 여인들의 자부심인 아랑각은 오늘도 영남루를 휘감고 가는 강물 속에 그때의 슬픔을 알고 있는지 말없이 흘러만 간다.






















찾아가는 길;부산역에서 무궁화호나 새마을호 열차로 밀양역까지 간다. 무궁화호 첫 차는 오전5시10분에 있고 20~4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43분 소요, 3800원. 밀양역 앞에서 영남루에 가는 시내버스는 수시로 있다. 1, 1-2, 5, 6번 등 다양하다. 10분 소요.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에는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밀양 방면으로 24번 국도를 타고 긴늪사거리에서 직진, 밀산교를 건넌 후 표지판을 따라 영남루 앞으로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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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관아

밀양시 내일동인 아북산 자락인 밀양시장 맞은편에는 조선시대의 밀양관아 터이다.

1895년 고종32년에는 이 곳이 밀양군청으로 사용이 되다가 1927년 삼문동으로 밀양군청이 옮겨가면서 밀양읍사무소, 밀양시청, 내일동 사무소로 변천을 하면서 사용을 하게 되었다. 2010년 국권회복 차원에서 밀양관아가 복원을 하였다.

조선시대 밀양관아를 복원하기 위해 밀양관아터를 2008년부터 발굴을 하게 되었다. 밀주구지에 따르면 밀양읍성이 축성될 당시에 함께 세워졌는데 100여칸의 웅장한 건물로 축성이 되었다 한다. 본래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인 선조25년 즉1592년에 모두 불타버린 것을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32년인 1599년에 밀양부사인 이영이 영남루 경내에서 집무를 보다가 1611년인 광해군 3년에 와서 밀양부사 원유남에 의해 현재자리에 밀양관아를 세웠다.

중건후 300년동안 관청 건물로 사용이 되었는데 조선 후기에 와 동헌, 정청, 매죽당, 북별실, 내삼문, 연훈당, 전월당, 신당등의 건물이 있었다 하나 현재에는 정확한 규모와 세워진 위치를 알 수가 없어 내삼문, 동헌, 매죽당, 북별실이 복원되어 있다.

지방의 수령이 공무를 보던 관아의 중심은 동헌으로 근민헌(近民軒)으로 불렀는데 목민관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내었다.‘백성을 친근히 하되 낮추어는 보지 않는다’. 사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큰 건물과 마주 한다. 그 중간에 집무를 담당하던 부사의 모습이 밀랍 인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동헌에 앉아 백성의 마음을 읽는 목민관을 보는 것 같아 마음 든든하다.

내삼문 계단을 올라서기 전 좌측편으로 19기의 비석이 자리를 하고 있다. 이 비석들은 조선시대 밀양 부사와 밀양을 관할하던 관찰사의 행적에 관한 기록들이 소상히 적혀 있는 유허비로 밀양 목민관의 논공행상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동헌 우측으로 담장을 둘러 중문을 달아 관아와 분리를 한 곳은 매죽당으로 관아의 별실이다. 이 건물은 부사의 비서가 사무를 보던 곳이며 밀양관아의 자재들이 공부를 하던 곳으로 이용을 하였다 한다.

좌측의 관리동 뒤로는 누각건물이 들어 서 있다 . 조선시대 대표적인 건축양식으로 ‘ㄱ’자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북별실로 정확한 용도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별실이란 이름에 의해 공무는 동헌에서 보았지만 업무 이외의 일들을 보던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찾아가는 길;부산역에서 무궁화호나 새마을호 열차로 밀양역까지 간다. 무궁화호 첫 차는 오전5시10분에 있고 20~4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43분 소요, 3800원. 밀양역 앞에서 영남루를 지나 밀양시장 앞에 가는 시내버스는 수시로 있다. 1, 1-2, 5, 6번 등 다양하다. 10분 소요.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에는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밀양 방면으로 24번 국도를 타고 긴늪사거리에서 직진, 밀산교를 건넌 후 표지판을 따라 영남루 옆으로 가면 된다.


내삼문의 모습으로 포졸 두명이 관아를 지키고 있다.

밀양 부사및 관찰사들의 행적을 소상하게 기록한 19기의 유허비


동헌의 모습으로 현판에는 목민관이 마음에 새겨야 할 '근민헌'





관아의 자재들이 공부를 하던 장소 도는 부사의 비서가 업무를 보던것으로 관아와 분리를 해 놓았다.




부사의 별업으로 업무는 동헌에서 보지만 그 이외의 일들을 본 것으로 추정을 하는 북별실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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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향교.

밀양향교는 고려 숙종5년인 1100년경 부북면 용지리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602년 밀양부사 최기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와 다시 중건을 하였고
그 당시 건축된 건물로 남아 있는 곳은 대성전으로
향교 맨 뒤편 계단을 올라서면 굳게 문이 잠겨져 있어 내부를 볼 수가 없다.
공자와 저명한 학자를 모시는 대성전은 여타 향교와 다른 배치를 두고 있다.
향교는 전학후묘로 교육을 하는 건물은 앞쪽으로 배치를 하고
제례를 올리는 건축물은 뒤쪽으로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밀양향교는 교육기관과 제례의 건물을 동서로 나란히 배치를 하였다.

학문을 탐구하는 명륜당 좌우로 일상생활을 하는 동,서재를 두어 교육을 담당하며
대성전은 제례를 올리는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1820년 교궁이건기(校宮移建記) 기록을 보면 대성전의 위치가 낮아 큰 인물이 배출되지 않아
위치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으며 대성전 이외의 건물은 1821년 부사 이현시에 의해 중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밀양향교는 영남지방에서는 진주, 경주향교와 함께 규모면에서는 큰 향교이다.
정문의 풍화루를 비롯하여 부속건물들이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조선후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향교가 있다하여 교동으로 불리며 향교 주변에는 많은 양반들과 주민들이 마을을 이루는데 여기 밀양교동에고 밀성손씨 교동파가 세거를 이루어 마을을 형성하였다.







학문을 연마하는 명륜당
풍화루 내부 모습으로 밀양학교는 물론이고 전면으로는 마을의 모습과 아북산, 아동산, 밀양읍성의 모습과 왼편의 추화산도 볼 수 있는 곳에 위치를 하고 있다.



서재로 유생들의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공자와 성현들을 모시는 곳으로 1602년 건축된 건물인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 앞의 은행나무


 동재건물로 유생들의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찾아가는 길

밀양역 또는 밀양시외버스 터미널에서는 교동가는 시내버스가 자주 있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청도 밀양방면 좌회전을 하면 긴늪사거리로 직진을 하여 밀산교를 건너면 교동이다. 밀양향교는 도로를 따라 춘복을 지나 밀양시립박물관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면 밀양향교 입구이다.
문의전화:055)354-5872,359-5637(문화관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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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연정

월연정은 담양의 소쇄원과 필적할만한
조선시대의 정자로 양반들의 거처로 사용을 하는 정자로 지었다.
중앙정부의 관료에 등용되었다가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껴
모든 관직을 버리고 낙향을 하여
고향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정자를 짓는 일이다.


월연정은 기묘사화에 염증을 느낀 월연(1483~1536) 이태선생이 1520년에 모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월영사 터에 지은 정자인데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버린 것을 1757년에 그 후손인 이지복에 의해 중수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여러번 중수를 하였는데 월영대와 쌍경당은 작은 계곡에 걸린 다리를 두고 두 개권역으로 구분을 하였다. 좌측은 쌍경당과 우측은 월연대 누각으로 쌍청교를 두고 두 개권역을 하나로 합하여 놓았다. 주변의 자연을 잘 활용하여 지은 정자인 월연대는 작은 돌을 축대로 이용하여 기단을 높이 올려 정자를 만들었고 한칸의 작은 누각은 사방으로 작은 마루를 돌려 놓았다. 



강물과 달이 너무 맑아 마치 거울같다는 쌍경당과 그 옆 월연대 아래 “한림이공대”란 돌출된 바위에 한림학사를 지낸 이태선생이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강물에 비친 달이 너무나 투명하여 마치거울에서 보는 것 처럼 아름답다 느꼈을까?. 그래서 어지러은 정치판을 버리고 낙향하였던 것을 잘하였던 생각이라 하였을까. 밀양강을 보며 북천과 동천이 합하여 남천강을 이루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여생을 정리하였을까. 지금도 그곳 이공대 위에는 백골송으로 유명한 백송이 자리하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옛 백송은 죽고 그 뒤 뿌리에서 다시 올라온 백송이 늠름한 기상으로 월연정을 지키고 있다.

월연정 주위를 감싸고 있는 키 큰 소나무와 은행나무, 그리고 오죽등 하나하나가 월연정과 어울려 한폭의 동양화를 연출한다. 특히 베롱나무에 꽃이 필 때는 월연정은 더욱 아름다워 진다. 붉게 물든 월연정이 밀양강의 월연에 붉은 색 물을 뚝뚝 떨어트리기 때문이다.


월연대는 밀양를 대표하는  아름다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월연정, 재약산 억새, 시례호박소, 위양못 이팝나무,  종남산 진달래, 영남루 야경, 만어사 운해, 표충사 사계인 밀양8경중 4경으로 밀양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강건너 살내마을 강변유원지에서 바라본 월연정. 베롱나무에 꽃이 피면 더욱 월연정은 아름다움에 치를 떨것이다.

최근인 2006년에 만들어진 월연, 옛날의 월연은 밀양강인데 그 큰 아름다움을 담기에는 지금의 연못이 너무 작은 것은 아닌지... 




'똥개'의 용평터널
1905년 1월1일 개통된 경부선 열차로
개통될시에는 단선으로 열차가 달렸지만
그후 복선으로 바뀌면서 이설되어 터널만 남게 되었다.

현재는 자동차와 사람이 통행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폭이3~4m 길이가 400m로 차 한대가 겨우 다닐 수 있어
서로 입구에서 반대편 차를 확인하고 들어서야 한다.
터널속을 걸어가는데 차가 올시에는 한쪽에 붙어 차를 보내고 걸어면 되고
 터널은 중간에 하늘로 구멍이 뚫여 있어 두개의 터널로 이루어져 있다.
중간쯤에 오면 1905년의 그때 그모습인
돌과 천장에는 벽돌로 이루어져 옛모습을 옅볼 수 있다. 
그래서 이 터널을 용평터널 또는 백송터널이라 하기도 하며 최근에는 정우성의 '똥개' 전설의 고향등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단골 촬영지 이기도하다.






















쌍경당










월연대


쌍청교


월연정의 백송

찾아가는 길
밀양역 또는 밀양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영남루옆 내일동주민센타 앞에서 내려 밀양관원좌측에 주차된 마을버스를 이용한다.(2시간간격)
 승용차 이용시는 신대구부산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밀양톨게이트를 나와 청도,밀양방향 좌회전 후 긴늪사거리에서 직진하여 밀산교를 건넌후 바로 우측 안인리 방향으로 내려서서 좌측으로 굴다리를 통과한다. 직진을 하면 영천암표지석과 만나고 좌회전한후 작은 다리를 건너면 우측으로 오연정의 빗돌이 있고 모례마을을 지나면 용평터널, 터널을 빠져 나오면 바로 우측으로 월연정가는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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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연정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5호

소재지;경상남도 밀양시 교동

동창천과 청도천이 만나 밀양강을 이루는데 상동의 빈지소를 지나 빚어 놓은 정자가 오연정이다. 밀양시 교동의 밀성손씨 큰집인 오연정은 추천 손영제(1521~1588)가 명종때 문신으로 사헌부지평, 성균관전적등의 벼슬에 올랐고 예안 현감때는 퇴계이황에게 정치와 학문적으로 서로 많은 의견을 나누는 사제지간이었다. 예안현감 재임시 도산서원 건립에도 힘을 보태었다. 그 후 고향으로 낙향을 하여 지은 별서 건물로 추천은 밀양강의 북천 추화산 언덕배기에 아담한 정자를 짓고 오연정이라 하였다. 정자앞의 북천을 추천강이라 부르고 오연정이 서 있는 그 아래를 오연이라 불렀다. 

상동의 북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산외면의 동천에서 돌아오는 강바람에 오연의 강물은 춤을 추고 추화산에 드리워진 노거수는 오연정의 자취를 감추어 유심히 보지 않으면 찾을 수 가 없다. 오연정을 오르는 길은 좌우로 느티나무, 소나무의 사열을 받으면서 올라선다. 짙은 나무 그림자에 의해 따가운 여름의 햇살도 차고 들어오지 못할 것 같으며 그속에 있는 오연정이 운치 또한 있다. 입구에는 수백년은 됨직한 키큰 은행나무가   출입문을 지키고 그 문을 들어서면 'ㄷ'자형의 관리를 위한 건물이 자리한다. 중문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고 그 문을 들어서면 먼저 넓은 앞뜰의 정원이 나타난다. 잔듸의 푸르름과 누각앞의 배롱나무가 녹색으로 치장을 하고 2층의 누각건물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편의 드라마속 사극의 전경이다. 뒤쪽으로 돌아가면 우측 한켠에 심어진 단풍나무가 가을에는 오연정과 어우러저 멋스러움을 더 할 것 같다.



건물은 임진왜란때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다시 중건을 하였지만  1717년 다시 화재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다. 1771년 추천의 8세손인 행남 손갑동에 의해 다시 중건을 하였다. 순조때는 경내에 모례서원을 두었는데 고종때인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서원은 훼철되고 오연정만 남았다. 1935년 다시 화재로 인해 일부 불타버린 것을
1936년 복원을 하였다. 그때의 위치 보다 조금 더 올려 후손들에 의해 더욱 확장을 하였고 1997년에 와 추천의 문중과 당국이 대대적인 보수를 하여 현재 정비가 가장 잘된 정자중 하나이다.
 
‘ㄱ'자 형의 돌출부에 누마루를 두었고 누마루 뒤와 맨 우측으로 온돌방을 넣었다. 문이 달린 중앙의 2칸은 대청마루를 넣었다. 사실 밖에서 보면 대청과 방이 구분이 안갈 정도로 문이 붙어 있으며 전면으로는 ’ㄱ'자형이만 뒷면은 ‘1’자형으로 뒤와 우측 누마루 쪽으로 작은 마루를 돌려 놓아 앞면과 뒷면이 구분이 안갈 정도로 우수한 건축물이다. 1930년대 건축물이지만 조선후기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모례서원 서원터
오연으로 연못안에 오리들만 꽥꽥 하고 다니고 있다.

찾아가는 길
밀양역 또는 밀양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영남루옆 내일동주민센타 앞에서 내려 밀양관원좌측에 주차된 마을버스를 이용한다.(2시간간격)
 승용차 이용시는 신대구부산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밀양톨게이트를 나와 청도,밀양방향 좌회전 후 긴늪사거리에서 직진하여 밀산교를 건넌후 바로 우측 안인리 방향으로 내려서서 좌측으로 굴다리를 통과한다. 직진을 하면 영천암표지석과 만나고 좌회전한후 작은 다리를 건너면 우측으로 오연정의 빗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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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시당백곡재(今是當, 栢谷齋)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28호

소재지:경남 밀양시 활성동 582-1

금시당은 금시당 이광진(1513~1566)선생이 만년에 내려와 몸과 마음을 닦고 학문을 연구하며 수양을 하기 위해 1566년에 창건을 한 별업이다.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생활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 보니
그의 결정이 옳았다는 뜻의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와 금시당,
뒤로는 일자봉(산성산)이 둘러처져 있고
그 우측으로 용의 능선이 내려가고 좌측으로는 범의 머리가 내려 가는 호두산 즉 범머리산 아래 위치를 하고 있다.
마을 주민인 이곳 여주이씨 후손에게 물어보니
버머리깡과 범설이란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용과 범이 서로 엉켜 있는 일명 용쟁호투를 연상케 한다.
금시당의 안고 있는 위치 또한 범이 입을 벌리고 있는 위치에 있다.




지형도를 들여다 보면 틀림없는 범의 형상을 하고 있어 선인들의 통찰역을 볼 수 있다.
금시당 앞으로는 넓은 밀양강을 안고 있는데
남천 또는 응천이라하며
위로는 북천과 동천강이 서로 만나는 월연정이 자리하고
밑으로는 용머리가 용두연의 물을 들이키고 있서 가히 밀양의 절경이라 일컫는다.



금시당은 조선조명종때 좌승지를 지낸분으로

창건 당시의 건물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영조20년인 1744년에 그의 5대 후손인 백곡 이지운 선생이
임진왜란때 불타버린 것을 다시 복원을 하였다 한다.
그후 그의 후손들이 1867년에 와 문중들의 뜻을 모아
원래 건물을 해체하고 크게 중수를 하여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정면 4칸 측면2칸의 금시당은 소로수장의 팔작형 지붕을 올렸고
좌우로 개방된 마루와 온돌방을 2칸식 넣었다.


그 좌측 백곡재는 조선 영조때 재야의 선비로 이름을 알렸던
교남처사 백곡 이지운(1681~1763) 선생을 추모하여
문중들에 의해 건립된 재사건물이다.
건물의 크기와 모양은 금시당과 비슷하나
마루와 온돌을 서로 반대로 배치를 하였다.
백곡재 바로 앞에 120년이 넘었다는 금시매와 정원의 백송
우측 쪽문 옆으로는 금시당 이광진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440년 된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이광진선생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

금시당건물




백곡재건물

금시당과 백곡재그리고 백송과 배롱나무의 모습





찾아가는 길
밀양역 또는 밀양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영남루옆 내일동주민센타 앞에서 내려 밀양관원좌측에 주차된 마을버스를 이용한다.(2시간간격)
 승용차 이용시는 신대구부산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밀양톨게이트를 나와 청도,밀양방향 좌회전 후 긴늪사거리에서 직진하여 밀산교를 건넌후 바로 우측 안인리 방향으로 내려서서 좌측으로 굴다리를 통과한다. 직진을 하면 영천암표지석과 만나고 좌회전한후 모례마을을 통과 백송(용평)터널을 통과한후 심경루누각 앞 왼쪽 용활교를 건너 금시당 표지판인 우측으로 따라가면 된다. 
문화관광과 055-359-5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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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상동 박연정. 강물에 노니는 물고기 수를 헤아렸다는 수어대가 있는 밀양의 박연정

조선 중기 학자이자 최초의
 운문산 유람기인 '유운문산록(遊雲門山錄)'을 남긴
 수헌(壽軒) 이중경(李重慶·1599~1678)선생은 운문산을 들어서는 들머리를 이곳 박연정이라하였다.


박연정은 양무공 김태허(1555~1620)장군의 별장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원래는 이곳이 능성 현감을 지낸 이담용의 관란정이란 정자 터 였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이곳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터에다 양무공이 박연정을 지었다.





그후 중창과 확장을 거쳐 박연정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약70년  뒤인 1682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소실이 되고 말았다.
이곳은 양부공의 박연정이 있었다는 곳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180년 뒤인 양무공의 9대손인 영장 김난규가 폐허가 된 이곳에 다시 정자를 중건하였다.



일제시대때인 1938년에 후손들에 의해
충의문이 세워지고 1966년에 추유재가 새워졌다.
박연정 뒤로 돌아나가는이곳에 수어대의 천길절벽이 서있다.
동창천의 물이 맑아 수어대 아래 연에서 노니는 물고기의 수를 헤아렸다.
그 위 갂아지른 절벽은 빙허대로 바위절벽을 돌아올라 동창천을 바라보면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암반이 튀어 나와 있다.그래서 빙허대인가.


이방위 또는 아방위로 불리는 빙허대
바위의 모양이 어린애의 모습과 같다하며
주변의 오례산성과 그 아래 빼어난 절경으로 인해
넋을 잃고  허공에 의지하게 된다는 빙허대
 그 암반위에 푸른노송이 용트림을 하듯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 만년송이라 부른다.
만년송과 빙허대 수어대 박연정이 함께 어울려 빼어남을 더한다.


'박연'은 임진왜란 때
밀양부사와 울산군수를 역임하며 전공을 세웠고
전후 정일품인 호위대장에 이른 무신인 양무공 김태허의 호(號)이다.
그는 관직을 버리고 이곳 고정리 뒷말리산(소천봉) 끈티인 박연정에서 만년을 보냈다.
이 쪽문을 통해 박연선생이 빙허대에 올랐을까.











암반인 빙허대와  그위에 자라는 만년송


빙허대에 올라서면 북으로 동창천과 오례산성등 주위의 경치가 빼어나다.



모정마을 가는 길의 양무공의 가묘터





찾아가는길
부산역에서 상동역 무궁화 열차는 7시45분. 상동역에서는 신곡리행 버스가 상동파출소앞 정류장에 오전9시5분경에 지나간다(밀양터미널에서 8시50분출발).모정마을 박연정 앞 하차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밀양 방향으로 가다가 첫 번째 만나는 사거리(긴늪사거리)에서 청도 방향으로 우회전, 25번 국도를 탄다. 상동역 지나서 상동교를 건너지말고 고정리 매화리 방향 직진한다. 고정리를 지나 매화리 방향을 진행하면 모정마을 표지석과 만나고  그뒤로 박연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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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청도여행)금천면 입암정. 청도군 신지리 입암정 찾아가기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입암마을 선암서원 옆에는 입암정이란 정자가 있다.
국헌정이라고도 부르며 마주보는 어성산과 그 우측에는
소요당 박하담이 매사냥을 즐겼다는 방응봉이 솟아 있고

 그 아래 동창천이 굽이쳐 소와 애암을 만드니 봉황애라 부른다.
임진왜란때 동래성이 함락당하고
종과부적으로 청도땅까지 밀려들어 온 왜적과 맞서 싸운 신지리 밀양박씨 문중의 14의사 중 한분으로
동창천 굽이치는 이곳에 국헌 박경윤선생이 낙향하여 말년을 보내던 곳이다.
소요당박하담의 손자이며 임진왜란때는 구국의 정신으로 왜적과 싸운 창의공신이며
제우당 박경전과 국헌선생은 형제지간로

임진왜란으로 적천사에 보관중이던 예부운락이 소실되자
충북영동으로 달려가 원판을 구해
1573년 선조6년에 다시 복각한 만력판이 현재 남아 있다.
입암정의 이건물은 여러번의 중수를 거쳐 1901년에 후손들에 의해 다시 지어 졌다.
그러나 세월의 무게는 견디지 못하고  
2010년 7월에 후손들에 의해 다시 그 때 모습 그대로  건립을 하였다 한다.  
지금은 옛 모습은 사라지고 없지만
봉황애와 용두암인 선암의 전설을 안고 또 한세기를 버틸수 있을 것 같다. 
입암정과 마주보고 있는 건물은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고 폐가 수준에 이르고 있다.
입암정에 간 날이 마침 국헌정의 문중에 행사가 있어 이곳에 많은 후손들이 왔다한다. 
평소에는 거주하는 후손 없이 문이 잠겨진 상태로 있어 들러 볼 수 없지만
선암서원 만하정과 함께 선조들의 충의정신을 옅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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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청도여행)금천면 선암서원. 청도 선암서원에서 전통 고택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다네요


선암서원은 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박하담의 위폐를 모신 곳이다.
매전면에 있던 위폐를 조선 선조때 이곳으로 옮겨와 선암서원을 개창하였다.
고종때 재차 중건을 하여 선암서당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암서당은 여타 서당과 달리 가정집인 살림집과 함께 건립이 되어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살림집이 위치를 하는데 좌측으로 안채이며
우측으로는 사랑채인 득월정이 서로 담하나를 두고 경계를 짓고 있다.
득월정 옆 중문을 들어서면 소요당인 서원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소요당은 정면5칸 측면2칸으로 좌우로 전퇴를둔 방을 두었다.
중앙의 마루에는 뒤를 문을 달아 서로 통하도록 하였고
 천장의 공포는 서원으로서는 보기 힘든 조각품으로 짜 맞추어져 있다.
방을 꾸민 기둥은 평주로 꾸몄다. 일반적으로는 보통 고주로 기둥을 세우는데
선암서원은 특이한 기법을 사용하였다.






청도땅 신지리 선암서원 뒤편에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교과서나 책에서는 듣지 못했던
충의 의미를 돼세기는 한집안의 이야기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임란창의14의사전적비'로 임진왜란때 왜적이 동래성을 함락하고 물밀듯이 청도땅으로 쳐들어 왔다. 

이곳 밀양박씨 박하담의 후손들이 분연히 일어나
삼촌과 조카,형제,부자지간의 14의사가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하고자 어성산에서 산성을 구축하고 왜적과 싸웠다.  
이 전쟁에서 천성만호 박경선은 전쟁중 손목이 잘려 나가는 부상을 입고서도
왜장을 끓어 안고 봉황애에서 떨어저 전사를 하였다.
그 봉황애가 전적비 뒤에 보인다.






파련형의 안초공을 사용하여 평주를 세운 선암서원 모서리 기둥의 모습

소요대




선암서원 뒤 쪽문을 내려서면 이마을 지명이 유래된 입암, 죽 선바위가 있다.

마을에서는 용두암으로 부르며 그 아래 소를 용두소라 부른다.
마을의 이야기로는 지금 바위 밑에 용머리 형상의 바위가 붙어 있었는데
태풍의 폭우로 인해 쓸려 내려 가

현재는 용의 머리 부분은 떨어저 나가고 물길도 돌려저 버렸다 한다.
 이 용두소 일대를 소요대라 통칭하여 부른다.

선암서원을 들어서는 출입문


안채의 모습

사랑채인 득월정과 돌담을 하나 두고 갈라저 있다.

사랑채인 득월정은 정면4칸 측면 1칸으로 구성이 되어 있고
정면 2칸은 마루를 넣었고 2칸은 방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뒤로는 문을 달아 놓아 수시로 열 수 있도록 처리를 하였다.






소요당 선암서원과 살림집을 갈라 놓은 중문의 모습

중문을 들어서면 수백년은 됨직한 백일홍 두그루가 뒷문옆에 심어저 있다.
이 배롱나무가 꽃을 필때는 선암서원은 더욱 한폭의 그림 같이 
탐방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것이다.


선암서원 천정의 다포식공포로 예술성이 돋보이며
서원으로서는 보기드물게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현재는 박향숙 씨가 서원을 관리하면서

전통고택 숙박체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백일홍 꽃이 활짝 피는 여름 휴가철에는 방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인터넷홈페이지(http://sunam.co.kr)
또는 전화(070-4150-8445)로 예약 문의를 할 수 있다.







선암서원의 뒤 건물로 장판각이다.

선암서원의 보물을 보관하였다.
배제예부운략판목, 지방문화재인 해동속소학판목, 14의사록판목을 보관하였는데
현재는 안동국악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










찾아가는길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청도역에서 내린다. 부산역 기준 오전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 6시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10시20분 등 자주 있는 편이다. 1시간 소요, 4800원. 청도역에서 나와 왼쪽으로 5분 거리에 있는 청도버스터미널에서 운문사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신지리에서 하차한다. 오전 7시40분, 9시20분, 10시40분, 11시30분 등 하루 8회 출발한다. 3200원.

자가운전의 경우 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린 후 좌회전, 긴늪사거리에서 청도방향 25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한다. 상동역 지나 신곡삼거리에서 좌회전, 상동교를 건넌 후 25번 국도를 버리고 오른쪽 매전 금천 방향 58번 국도를 탄다. 동창천을 따라가다보면 매전면 소재지의 처진소나무를 지나 매전교를 만난다. 우회전 해 매전교를 건너 진행하면 금천면 신지리 들어서면 선암서원 입간판이 보인다. 좌측으로 들어서면 곧 서원 앞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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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청도여행)금천면 운강고택, 조선시대 양반가의 대 저택 청도 운강고택

운강고택(雲岡故宅)

본 건물은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1479~1560)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 청도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하며 후학 양성을 위해 서당을 지은 자리에
조선선조9년인 1809년에 박정주가 분가를 하면서 지은 살림집으로
그후 운강박시묵과 그 후손인 박순병에 의해 크게 확장을 하여 지어졌다.
집안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 모두 독특한 'ㅁ'자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그 당시 양반가문의 생활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주위의 여러 고택속에서도 보존 상태가 양호한 운강고택은
돌담으로 둘러 처진 골목을 따라 들어가야 한다.
'ㄱ'자 형태의 골목길을 들어서면

막다른 골목 끝 오른편으로
솟을대문이 운강고택의 분위기를 말해준다.

지금은 모두 떠나고 비어있어 항상 문은 잠겨져 있다.

그문을 열고 들어서니 정면에 이 집안의 주인이 머물며 손님을 맞이하였던 사랑채가 있다.
왼쪽으로 또 하나의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의 모습을 보면....



대문과 함께 붙은 행랑채로 아마 그집에서 일을 하던 하인들의 숙소로 사용되어 진것 같다,

큰 사랑채 왼쪽으로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연결된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안채로 들어서면 마주보이는 곳이 곳간

우측은 안주인이 거주하였던 안채 건물이 나온다.
















안채건물


안채건물은 치마를 입은 아녀자들을 배려하기 위해 마루 밑으로 하나의 발판이 더 붙어 있는 것이 이채롭다.





안채의 화장실모습으로 안에는 큰 볼일 바깥에는 남자용인 작은 볼일을 보는 곳이다.

그 중간을 가로 막는 벽 위에 문양의 그림








 찾아가는길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청도역에서 내린다. 부산역 기준 오전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 6시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10시20분 등 자주 있는 편이다. 1시간 소요, 4800원. 청도역에서 나와 왼쪽으로 5분 거리에 있는 청도버스터미널에서 운문사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신지리에서 하차한다. 오전 7시40분, 9시20분, 10시40분, 11시30분 등 하루 8회 출발한다. 3200원.

자가운전의 경우 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린 후 좌회전, 긴늪삼거리에서 청도방향 25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한다. 상동역 지나 신곡삼거리에서 좌회전, 상동교를 건넌 후 25번 국도를 버리고 오른쪽 매전 금천 방향 58번 국도를 탄다. 동창천을 따라가다보면 매전면 소재지의 처진소나무를 지나 매전교를 만난다. 우회전 해 매전교를 건너 진행하면 금천면 신지리리에 하차를 하면 고택이 즐비한곳에 운강고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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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양산여행)배내골 풍호대. 막으면 벙어리, 뚫어면 바람이 난다는 배내골 풍호대 이야기

배내골 풍호대(風乎臺)
흔히 양산시 원동면에는 물에 배 맛이 난다는 골짜기가 있다.
 예로 부터 물맛이 시원하여 배맛을 느낄 정도로 최고의 수질을 자랑하는 이곳은 배내골이다.
흔히 이천(梨川)으로도 불리는 배내골은 한때는 부산 양산, 울산의 휴양지로 각광을 받아 여름철에는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것도 잠시 이제는 양산과 밀양의 경계지점에 배내골 물을 모조리 담아먹는 밀양댐이 생겨 식수원보호지역으로 묶여 버렸다.
 그래도 배내골의 풍호대는 예나 지금이나 배내골 입구를 지키고 서 있다. 고점에서 석남사 방향으로 뚫인 도로를 따라 20여분 따라가면 우측편으로 노송이 우거지고 그 아래 배내골의 맑은 물이 소를 이룬곳이 나온다. 풍호대로 주변에 둘러 쌓인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워 조선조때 시인묵객이 꽤 드나들은 것 같다. 그중 천은 박기섭선생이 여기에다 대(臺)를 쌓고 글 공부를 하며 여생을 보냈다 한다.





풍호대 아래에는 특이한 바위굴이 있다.

두륜산의 명물인 코끼리 코 모양인 구름다리 처럼 생긴게 여기 풍호대 아래에도 있다.
그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평소에는 수량이 적어 물이 내려 가지 않으며 여름철 우기시에는 이 아래로 물이 흘러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바위굴에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전해 온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마을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다.
전해내려오는 전설은 바위굴을 막아 버리면 이마을에 벙어리가 태어나고 그대로 뚫은 상태로 놔 두면 동네 아낙네들이 바람이 난다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마을에서는 차라리 막는 것 보다는 뚫인 상태로 두는게 낫다하여 그대로 두었다 하는 바위굴이다. 


찾아가는길

승용차는 경부고속도로 양산IC~언양 35번 국도~배내골 어곡터널 어곡양산지방공단 좌회전~어곡터널~배내골 어곡지방산업단지 우회전~용선 배내골 1077번 지방도~에덴벨리CC 안내판~신불산고개~에덴벨리~배내골~하양교 지나 석남사 배내골 69번 우회전~고점교~풍호대



예전의 풍호대 마을에 지금은 펜션이 들어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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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청도여행)금천면 만화정과 세심정, 한국동란때 이승만대통령이 머물렀다는 만화정과 그뒤 세심정

흔히 옛 양반들의 집성촌으로 아직까지도 그 당시의 건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 여럿 있다.
안동 하회마을의 풍산류시 집성촌,
지리산 가는길의 남산예담촌 그리고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등 여럿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부산에서 가까운 곳 중 찾기는 쉽지가 않다. 
최근까지 알려지지 않은 곳이 청도 땅에도 있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그곳에 버금가는 고가들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곳이 영남알프스 둘레길에도 있다.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로 한때는
이곳이 금천면의 면소재지로 이름을 날리던 곳으로 도로 좌우편으로 옛 고가들이 줄을 서 있다.
도암고택, 운강고택등 밀성박씨의 한집안이 가계를 이루어 내려 오는 곳으로
운강고택의 부속건물로 지어진 만화정을 이야기하려 한다.
 동창천변 절벽에 자리를 잡은 정자 만화정(萬和亭)은 한옥마을의 백미로 꼽힌다.
청도의 여러 한옥 마을중에서도 여기 신지리의 고택이 으뜸이며
만화정은 동창천과 주위의 영남알프스의 풍광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한옥마을의아름다움을 더욱 빛네고 있다.

 





만화정은 본래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소요당(逍謠堂) 박하담(1479~1560)이 건립한 서당 터였는데
그의 11세 손인 박정주(1789~1850)가 분가해서 살림집으로 지은 것이다.
이후 박정주의 아들인 운강(雲崗) 박시묵이 더욱 확장,
현재의 모습처럼 정자 형태로 변형했고 이곳에 강학소를 열어 지역 후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으며
그의 아들인 진계 박재형은 해동속소학 등 38권의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주변의 선암서원 등과 함께 청도 지역 학문의 요람 역할을 했다.


 


운강과 진계가 이곳에서 학문을 갈고 닦고
후학들에 대한 교육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원래 이곳에 서당을 세웠던
소요당의 높은 인품과 학풍을 이어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요당은 조선 중종 때
사마시에 합격했지만 여러 관직을
모두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저술과 학문연구에 매진한 성리학자였다.
.
.
.
소요당 박하담의 후손들이 이곳 만화정 앞 뜰에 모여
형제 삼촌 조카 부자지간의 14명이 의병을 궐기하여  임진왜란때
동래성이 왜군에게 떨어져 15일만에 청도로 밀려 올라왔을때
밀양박씨 14명이 의연히 일어나 어성산에서 싸웠다한다.



특히 무오사화 등을 거치면서 더욱더 세속적인
출세와 벼슬길에 대한 마음을 접게 된 소요당은 본격적으로 지역 발전에 이바지하게 된다.
그는 삼족당 김대유 등과 함께 운문사 아래에 최초의 사창(社倉)을 지어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던 백성에게 환곡법을 실시하는 등 빈민구제사업에 매진했다.
또 남명 조식, 삼족당 김대유 등 당대의 대학자들이 소요당을 찾아와 학문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같은 학풍과 인품이
12대손인 운강 박시묵대와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것이다.


찾아가는 길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청도역에서 내린다. 부산역 기준 오전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 6시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10시20분 등 자주 있는 편이다. 1시간 소요, 4800원. 청도역에서 나와 왼쪽으로 5분 거리에 있는 청도버스터미널에서 운문사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신지리에서 하차한다. 오전 7시40분, 9시20분, 10시40분, 11시30분 등 하루 8회 출발한다. 3200원.

자가운전의 경우 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린 후 좌회전, 긴늪삼거리에서 청도방향 25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한다. 상동역 지나 신곡삼거리에서 좌회전, 상동교를 건넌 후 25번 국도를 버리고 오른쪽 매전 금천 방향 58번 국도를 탄다. 동창천을 따라가다보면 매전면 소재지의 처진소나무를 지나 매전교를 만난다. 우회전 해 매전교를 건너 진행하면 금천면 신지리 만화정 앞에 닿는다.















만하정 뒤 쪽문을 열고 나가면 세심정으로 갈 수 있다.
안강의 옥산서원의 세심정처럼
 마음을 씻는다는 뜻의 정자가 있었다한다. 











만화정을 화폭에 담는 노 화백의 모습







지금 세심정의 정자는 사라지고 없지만 동창천편에
외로이
만하정과 함께 옛 선현의 글씨가 또렷이 남아 있다. 
잡초가 웃자라 있고 주변의 상태로 보아서는 버려진체로 남아 있는
이곳에도하루빨리 문화재의 대책을 수립하여 잡초를 제거하고 보호책을 마련하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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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호서원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마을 입구 우측에 옛 고가의 건물을 볼 수 있다.

임호서원으로 박경신과 그의 쌍둥이 아들인 지남과 철남을 배향하고 있다.

박경신은 밀성박씨로 1539년 9월9일(조선중종34년)출생하여 자는 중선이며 호는 삼우정이다.

31세때 무과 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복시에 급제를 하였다. 그후 삼우정은 35세때 장원급제를 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임진왜란때는 선조를 호위하여 피란길에 올랐고 그의 쌍둥이 아들 지남, 철남과 함께 청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도를 지켰으며 1594년 6월5일 56세로 순직을 하였다. 임란후 선무원종공신1등, 호성원정공신2등에 올랐다.

장남인 지남은 1565년 출생하여 자를 인경 호는 계애라 하였다. 부친인 박경신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청도등 인근의 전투에 참여를 하였다. 선무원종공신2등에 올라 임호서원 뒤 경의사에 배향되었다.

그의 동생인 철남은 지남의 쌍둥이 동생으로 아버지 박경신, 형 지남과 함께 의병에 참여를 하였고 형과함께 선무원종공신2등에 올라 삼부자가 함께 이곳 임호서원뒤 경의사에 모서져 있다.


밀성박씨삼우정파종중소장문적

보물제1237호

밀성박씨 삼우장 박경신과 그의 쌍둥이 아들인 지남 철남에게 내린 포상문서로 선무원종공신록운인증서13매와 삼우정 박경신에게 내려진 선무원종공신록권1책과 순조 년간 박경신부부에게 내려진 교지 2매와 그의 모친 장씨가 장원급제를 축하하는 별급문기 1매등이다.


임호서원과 경의사를 찾아가도 거주하는 사람이나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문을 잠궈 놓아 빈집 상태이다.
 그래서 인지 임호서원안을 빼꼼이 쳐다보니 관리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벽채는 회칠이 벗겨져서인지 시멘트로 덧칠이 되어 있고 그것도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지금 선조들의 옛 고가 상태가 비단 임호서원 뿐만 아니다. 현재 그의 후손들이 모두 외지에 나가 살고 있으니 관리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안되고 그래서 1년에 한두번 집안 행사때 들러 보는 것이 고작 아니겠는가. 그런 상태에서는 외지인들이 고가를 관람할려고 찾아오면 문이 잠겨 실망한채로 돌아가고 고가는 황폐화의 수순을 밟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또 한개의 우리의 문화제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선암서원 담장안을 들여다 본 모습


시멘트로 덧칠한 임호서원 뒷벽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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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삼족대(靑道三足臺)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89호

소재지: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 901

<사방으로 토담벽을 한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삼족대는 조선중종 14년인 1519년에 삼족당 김대유(1479~1552)가 후진을 교육하기위해 처음건립하였다. 그의 호를 따와 삼족대라 불렀다. 김대유는 정암, 조광조의 문인으로 중종2년(1507) 정시에 장원급제한 후 정언, 철원현감등을 지냈다.1519년 기묘사화 이후 관직을 사임하고 낙향을 하여 향리에 은거하였다. 동창천의 암벽위 솔밭속에 있는 삼족대는 소나무와 암반과 동창천이 어울리는 한국적인 정자와 어울리는 경관을 자랑한다. 낙동정맥의 지맥이 이어져 학일산을 거쳐 갓모양의 갓등산에서 다다러 여기 동창천에 잠드는 자리에 위치한 삼족대는 한편의 시와 같은 곳이다. 입구에는 1973년에 세운 김대유 신도비가 있고 참봉 김용희의 중수기문이 있다.

<작은 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삼족대로 앞 토담 밖으로 동창 천이 흘러간다.>

삼족대의 건축물은 1체의 기와로 이루어진 건축물로 정면3칸 측면2칸으로 된 팔작지붕으로 사방에 도담을 쌓고 일각문을 두어 그 안에 정자를 배치하였다.

 

방두칸과 부엌을 우물마루가 “ㄱ”자로 배치되었다. 1519년에 건립되었다하나 후대에 이르러 여러번의 중수를 거치는 과정에서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으로 변했다.

정면의 문과 반대편으로 에도 똑 같은 문이 일각문으로 기묘사화후 낙향하여 머문 삼족대이다.

일각문과 신도비



근래에 지어진 팔각정자로 동창천의 푸른물과 매전교가 잘 어울리는 그림같은 곳이다.




삼족대 뒷모습으로 토담과 굴뚝이 보이고 최근에도 문짝을 다시 고친 것이 보인다.


삼족대 내부의 모습으로 우리 문화재의 현 주소를 보는 것 같아 안타갑습니다. 삼족대 내부의 모습입니다. 정면3칸, 측면2칸으로 방과 부엌, 마루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삼족대 건물 밖에서 본 모습입니다. 동창천의 이강이 흘러 밀양강으로 그리고 낙동강으로 흘러갑니다


동창천 건너에서 바라본 삼족대입니다.



찾아가는 길: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청도IC~밀양 청도 25번~경주 운문 좌회전 20번~매전면~매전면사무소 지나~매전면 처진소나무 지나~경주 운문 20번~삼족대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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