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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김해여행)무척산 다이아몬드 흔들바위,  다이아몬드의 모습을 한 김해 무척산 흔들바위

 

설악산의 대표적 명소는 울산암과 흔들바위이다. 수학여행의 단골 메뉴로 흔들바위를 꼭 올라 궁금증에 너도나도 흔들바위를 밀어보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전국적으로 흔들바위가 여럿있지만 김해 무척산에도 흔들바위가 발견되어 새인들의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다. 한쪽에서 보면 다이아몬드 모양이고 다른 한쪽에서 보면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 자연의 조화에 신기할 따름이다.

 


 


10m의 바위위에 얹혀 있는 흔들바위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지금도 산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다. 김해 생림면에서 창작소설을 만들어 흔들바위를 더욱 상품화 할려고 노력하고 있다.
"김해문인 협회 가인"씨에 의해 만들어진 창작 소설의 내용을 보면 "가야국 거등왕이 어머니 허 수로왕비를 위해 모은암을 지었고 천상의 어머니 영혼은 자식을 위해 석달열흘을 천지신명에게 염원을 하니 무척산 아래 모은 암 옆에 여인의 모습을 한  바위가 생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시작되는 흔들바위는 정면에서 쳐다보면 흡사 여인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다. 가야국을 수호하기 위해 아직도 때를 기다리는지 모를 일이다.
흔들바위를 가기 위해서는 모은 암 입구에서 좌측으로 500m,20분을 발품을 팔면 큰바위를 기단으로 삼아 서 있다. 그의 모습이 좌측으로  돌아서 보면 다이아 몬드가 박혀 있는 모습이라 하여 명명된 다이몬드 흔들바위는 옆 모서리 툭 튀어난 곳을 밀어 보니 전해져 오는 느낌이 있다. 그 큰바위가 흔들리는 느낌을 손으로 직접 느낄 수 있어 신기할 따름이다.

찾아가는 길=자가용을 이용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삼랑진 IC를 빠져나와 김해 방향 58번 국도를 이용하여 낙동강을 건너 무척산 모은암 입구 주차장으로 가면 되고 대중 교통편은 부산에서 김해행 버스 123번,128번,1004번 버스를 타고 김해시청을 지나 금강병원앞에서 하차한다. 여기서 생림행 버스인 60번과 61번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30분 소요.


허왕후가 화하여 변한 모습된 며인상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모습의 흔들바위. 모습이 위태롭다.

옆 모서리를 밀어 보고 있는 취재팀 뒤로 생림면 생철리 일대의 모습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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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사하여행)까치고개 벽화마을. 까치고개의 환경 개선 사업으로 마을의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부산시 서구와 사하구를 경계 짓는 까치고개 인근 사하구  대티마을 5길인 피오니 파그 아래 절개지를 단장하여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마을의 빈촌인 이곳에 최근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마을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함인지 스레트 지붕과 담벼락에
화려한 꽃무늬를 그려 환경을 개선하였다.

 


 


그래서인지 마을의 분위기가 많이 밝아져 주위의 아파트와 조화를 이룬다.
또한 이 길은 낙동정맥의 끝부분인 구덕산을 지나 옥녀봉으로 가는 중간 능선상에 있어 산을 찾는 정맥 꾼들에게도 좋은 볼 거리를 선사 할 수 있을 것 같으며  까치고개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가슴아픈(?)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
까치고개는 최근에야 환경이 많이 개선되어 번듯한 집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수십년 까지만 해도 이일대는 공동묘지로 이름을 날렸다 한다. 지금도 옥녀봉 일대와 까치고개 부근에 아직도 많은 묘지들이 조성 되어 있다. 그 당시 많은 묘지로 인해 이일대에는 화장막이 있었다 한다. 그래서 항상 死者를 화장 시켰고 그래서  주위에 까마귀와 까지가 몰려 들어 까치고개란 이름을 얻었다 하니 산뜻한 벽화로 인해 새로운 까치고개로 태어 나길 빌어 본다. .

 













화공이 절개지의 담벼락에 장미를 그리고 있는 모습과 윗 사진은 최근에 완성된 그림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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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울산여행)배내골 철구소 여행. 비 오는 날 이무기의 전설이 있는 철구소를 찾아 보니..

 

흔히 마을 인근 계곡의 깊은 소에는 전설이 없는 곳이 없다.
하나씩은 마을과 함께 그 마을의 유래에 전하여 오고 있어며 이무기의 전설과 기우제를 지냈다는 이야기는 꼭 가지고 있다. 울산시와 양산시를 연결하는 영남알프스에도 수많은 계곡과 그 계곡에 기대어 생활하는 무리들이 있다. 그 속에서 또 하나의 전설이 전해 내려 오고 있다.
영남알프스하면 생각나는 계곡은 무엇일까?.
십중 팔구는 배내골을 이야기 할 것이다.

 



물맛이 그만큼 시원하고 배 맛이 난다고 하여 배내골로 불리는 이계곡 상류인 철기곡에도 깊은 소가 이무기의 전설을 가지고 있다.이천리의 이천 분교와 주암마을 사이에 있는 철기소는 사진으로 보는 것 처럼   
절구통 모양을 하고 있어 철기소로 불리고 있다.
그 전설의 내용을 보면 옛날 이 소에 이무기가 살았다 한다. 이 이무기는 어디서 왔을 까?.
그 것이 궁금해진다.

 


억산의 깨진 바위 전설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청도 대비사의 동자승으로 변신한 이무기는 용으로 승천 할 날을 하루 남겨두고 그만 노승한테 신분이 탈로나 도망을 치다가 꼬리로 내리쳐 억산의 바위를 깨고 이무기 못안골에서 다시 반대편에 있는 호박소로 몸을 숨겼다 한다. 그러나 호박소는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깊어 명주실 한타레를 풀어 넣어니 그 끝이 배내골 파래소 폭포로 나왔다 한다. 결론은 호박소와 파래소 폭포가 서로 이어져 있어 이무기가 은신하기 꼭 좋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파래소가 있는 백련계곡과 철구소의 철기곡은 배내골에서 서로 만나니 이무기가 쉽게 왕래를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을 해 본다.   
너무 허무 맹랑한 이야기 인가. 
지금도 철기소 부근에 가면 넓은 암반이 되어 있어 그 당시에도 휴식과 놀기에 아주 좋았을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도 이천리의 마을 청년들이 올라와 암반에서 물고기를 잡아 구워먹고 멱을 감았을 것이다.   철구소의 이무기는 하루하루 물고기를 잡아 먹고 여유롭게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밑의 마을 청년들이 올라와 고기를 잡아 구워 먹을 욕심에 철구소에 제피(계피)가루를 서말 풀었다 한다.  한참을 기다려도 고기들이 죽어 올라오지 않아 보니 이무기 한마리가 죽은체 물위로 모습을 들어내니 그때 이무기의 노여움인지 마을에 때아니 불이나 온 마을을 불 태웠다 한다. 할 수 없이 마을에서는 이무기의 후한이 두려워서 다시 살지 못하도록 그의 몸을 토막내어 장사를 지내주고 그의 혼을 위로 해 주었다 한다.  


암반을 타고 철구소로 들어가는 계곡 물 주위의 바위가 흡사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의 흔적은 보는 것 같다. 그 만큼 주위의 계곡이 깊고 풍광 또한 뛰어나,
여름 철에는 물놀이와
가을에는 철구소에 스며든 단풍에 모두 감탄을  한다.
필자는 초겨울의 시작인 11월 말 
비오는 날에 철구소를 찾아 보았다. 
부슬부슬 겨울비가 오는 철구소에서 한서리 이무기의 모습을 생각하며 쓴 웃음을 지어 본다.

철기소 앞에 가설된 다리.








철기곡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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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순천여행)송광사 천자암의 쌍향수, 천자암의 쌍향수 곱향나무 줄기가 곱창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요

 

쌍향수인 천자암의 곱향나무
천연기념물 제88호
소재지:전라남도 순천시 송광읍 이읍리 1
천자암의 곱향나무는 상향수로 두그루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향나무과로 상록침엽교목이다.
세월의 깊이 만큼 곱향나무는 현재는 외형적으로 많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 처럼 이 나무도 외과적으로 수술을 하여 향나무 줄기에 시멘트로 수술을 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래도 푸르름과 늠름함을 잃지 않은 조계산을 대표하는 향나무이다. 
오래된 만큼 전해 오는 전설은 한두가지 있을 법 한데 곱향나무를 자세히 보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습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계산에서 수도하던 보조국사와 그의 제자인 담당국사가 중국에서 들어 올때 짚고 온 지팡이를 여기 천자암에 나란이 꽂아 놓았는데 뿌리가 내려 지금의 곱향나무가 되었다 한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의 예를 다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래서 인지 마을 주민들이 향나무에 한번씩 손을 데면 죽어서 극락에 간다는 속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 향나무를 보기 위해 찾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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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 경주남산 약수계곡 마애입불상. 불두는 달아나고 없지만 경주남산에서 섬세하고 가장 큰 경주 약수계곡 마애 입불상

 

경주 약수계곡 마애 입불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4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산1-1

 

경주 남산 금오봉 아래 약수골 골짜기 바위면에 새겨진 마애불로 남산에서 가장 큰 마애불이다. 경주 배리 삼릉 입구에서 하차를 하여 상선암 방향으로 따라 오르면 삼릉을 지나 소나 숲길을 따라 오르다 냉골의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서 상선암 방향을 버리고 계곡을 건너 우측 능선을 따라 금오봉으로 오르는 능선길을 따라간다. 정상 못미쳐 우측으로 약수골의 골짜기에 위치를 하고 있다. 

 



불두는 달아나 없지만 새겨진 몸의 높이가 8.6m의 거대한 조각상이다.
남산의 거대한 바위기둥의 한면을 다듬어 마애불을 조각하였고 불두인 머리는 다른 돌에 조각을 하여 따로 얹었는데 현재 불두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다.
길게 늘어진 겉옷은 양 어께에 걸쳐져 있으며 옷주름이 수직으로 길게 흘러 내린다.
속옷은 주름이 층층이 표현된 반원으로 새겨진 특이한 기법으로 보여지며  두발도 불두 처럼 따로 조각하여 붙였는데 한발이 아래에 떨어진 것을 찾아 마애불 앞으로 옮겨 놓았다.
섬세하게 조각되어 오른손은 내려서 엄지와 셋째 손가락을 붙이고 왼손은 가슴까지 올려 엄지와 셋째,넷째손가락을 붙인 것을 볼 수 있다. 이불상의 방향은 고위봉방향으로 보고 있으며 약수골의 급한 내리막에 위치를 하고  있다



 

급한 약수골의 산사면에 위치하여 있으며 짙은 숲으로 인해 조망권은 찾을 수 없다. 워낙 바위가 커 키큰 나무위에 올라와 있어 시원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달아난 불두의 모습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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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욜 찾은 불일 폭포는 근래에 와서 보기 드물게 많은 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겨우내 바짝 마른 계곡이었지만 지난 밤 내린 봄비로 인해 엄청난 수량을 자랑하며 폭포도 신이 난 듯 굉음을 내고 있었다. 그에 덩달아 신이난  방문객도 흥분된 마음을 진정 시키며 불일폭포에 눈도장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불일 폭포는 지리산 10경으로 평소에도 무지개가 자주 나타나는 폭포인데 때마침 찾은 그날도 오색무지개가 영롱하게 산사나이의 마음을 흔들었다. 불일평전에서 400m 거리에 좁은 계단 길을 따라가면 불일암과 그 밑으로 불일폭포를 볼 수 있다. 높이가 60여m로 2단으로 이룬 폭포로 지리산에서는 최고의 높이를 자랑한다.

좌우로 깍아 지른 절벽 사이로 떨어지는 불일 폭포는 그 아래 용소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을 하며 무슨 심술인지 꼬리로 내려쳐 백학봉과 청학봉을 만들고 그 사이로 험준한 계곡을 만들어 불일폭포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고려 희종대 보조 국사 지눌스님이 폭포 근처에 수도를 하였다 한다.스님이 입적후 희종은 그에게 "불일 보조"를 내렸고 그 시호를 따 불일 폭포로 부른다 한다. 



탐방객이 무지개가 뜬 것을 보며 손으로 가르키며 주위의 사라들이 신기한 듯 보고있다.


떨어지는 물줄기를 보면 전날 얼마나 많은 비가 왔냐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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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가는 길목인 산청군 남사마을은 담장이 예쁘 문화재로 지정 된 곳이 있다.

남사마을로 흔히 남사예담촌으로 부른다. 흙과 돌을 혼합하여 쌓아 올린 흙담이
수백년을 비바람 앞에서도 견디며 지내온 것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도 담벼락 안의 고가에는 후손들이 생활하며 선조들이 지켜온 옛집과 토담을 지켜나가고 있다.
담쟁이가 드리워진 토담에 마음이 가고 필자도 어릴때 토담을 울타리 삼아 살아온 기억이 새록새록 생겨나 옛생각에 젖어 본다. 선비와 덕망있는 명문가들이 살았던 남사마을은 현재에도 최씨고가 이씨고가,이사제등을 비롯하여 많은 문중의 고가들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이제의 개국공신교서가 보물제1294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 할때의 행로지이며, 문화재자료 제196호인 이동서당과 초포정사,사효제,망추정등 많은 문화유적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웅석봉을 거쳐 석대산으로 내려와 마을 뒷산인 이구산과 그 아래를 흐르는 사수인 남사천에 둘러 쌓인 남사마을은 숫룡과 암룡이 서로 머리와 꼬리를 무는 쌍룡교구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의 모양이 반달모양이라 반달모양은 마을터를 배모양으로 생각하여 배의 중심부에는 무거운것도 두지못하도록 하였고. 그리고 우물을 파는 것도 금지하도록 하였다 한다. x자의 이 나무는 남사마을 을 대표하는 풍경으로 많은 사진가들이 사진을 찍는 것으로 유명하다.

x자 나무 사이로 이씨고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남사마을은 돌담길이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된 곳이다. 향촌마을의 아른다움과 정서를 고이 간직하고 있어 이를 잘 가꾸어 후손에게 넘겨 주고자 한다는 2006년 12월 4일 문화재청장의 내용과 함께...

산청 남사리 최씨고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
소재지: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285-2
최씨고가는 남부지방의 사대부 한옥이다.
건물은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 익랑채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르며,
사채좌우에는 중문이 두 곳 설치되어 있다.동쪽 동문을 들어서면 안체가 한눈에 들어오지만 서쪽 중문을 들어설 경우 ㄱ자형 담으로 막고 있서 아녀자들이 거주하는 안채와 사랑채를 볼 수 없도록 구조가 되어 있다. 유교사상에 따른 남녀의 생활공간을 엄격하게 하고자 하였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남사마을의 고가를 보면 유교사상이 뿌리를 내린 사대부 집으로
남여의 거주 공간을 정확하게 나누어 아녀자들은 외부에서 볼 수 없도록 차단된 안채에서 생활하도록 하였고 남자는 사랑채에서 거주를 하여 외부에서 찾아 오는 손님을 맞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부 안내문에서 내용 발췌>


사랑채도 정면5칸, 측면3칸 규모에 툇간이 있으며
들보 5량으로 조성된 팔작지붕 건립으로 겹집형식을 취하고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3칸에 앞뒤 툇간이 있고 들보5량으로 조성된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다.
뒤 툇간은 폭이 넓어 저장기능의 벽장이 설치되거나 방으로 분할되고 있으며, 겹집형식으로 벽장이 설치 또는 방으로 분할된 것으로 보아 겹집형식으로 변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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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변산의 봉래구곡으로 불리는 골짜기에 직소폭포가 암벽을 비집고 흘러 내린다. 깍아내린 암벽사이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변산의 지축을 흔들고  크고 작은 폭포와 소가 이루어져 부안호으로 들어간다. 망포대, 신선봉,관음봉에서 흘러 내리는 계곡물이 모두 직소폭포로 들어가고 20m의 높이는 흡사 모습이 설악산의 비룡폭포와 빼어 닮았다.
봉래구곡을 거슬러 오른 용이 직소폭포 아래 용소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하늘로 승천하였는 지는 모르지만 주변의 나무들과 함께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며 변산8경의 하나이다. 직소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용소에서 휘돌아 제2폭포로 빨려 들어가는 분옥담, 그 아래가 선녀탕로 한사람이 들어 가 목욕할 수 있을 정도의 물이 항상 일정 하게 담겨져 있는 봉래구곡의 변산은 봄에는 진달래와  가을에는 단풍잎과 떨어지는 낙엽이 아쉬워 속살까지 보여주는변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찾아가는 길은 남여치에서 산행을 한 후 월명암을 거처 봉래 구곡으로 가는 방법과 내변산산의 사자동에서 봉래구곡의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방법. 또 하나는 내소사옆 원암마을에서 제백이고개를 거쳐 직소폭포로 가는 방법이 있다.
교통편은  부안버스 터미널에서 내소사행 버스는 30분 간격으로 출발하며 사자동행 버스는 8회 있다. 부안금일여객 163-583-2624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 정읍IC~30번 국도~곰소~격포~변산~남여치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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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틀굴

남근바위

사실 산행을 하다 보면 자연의 오묘함에 감탄을 자아 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고래 모양의 고래바위, 기차바위등 그사물의 모양에 따라
새로운 이름이 붙게 된다. 여기 월출산에도 남성의 심볼과 여성의 중요 부분이 서로 마주 보고 같은 능선으로 배열 되어 있어 음양의 조화가 신기할 따름이다.
월출산 정상을 지나 바람재로 내려서는 능선상에 솟은 남근석은 남성을 상징하는 바위로 봄이 되면 남근바위 상단에 철쭉 꽃이 피어 생명의 탄생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와 마주 보고 있는 도갑사 산행길의 구정봉 아래 여근석인 베틀굴은 임진왜란 대 이부근의 아낙네들이 난을 피해 올라와 이곳에서 베를 짰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 입니다.
굴의 깊이는 10m정도이며 굴속에는 항상 음수가 고여 있다하여 음굴
또는 음혈이라 부르기도 한다합니다.지난 일욜 산행시에도 가뭄으로 먼지 펄펄 날린 산행길과는 달리 베틀굴 바닥은 습기가 차 있어 바닥이 축축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그래서 굴 내부의 모습이 여성의 중요부분인 국부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합니다.




남근바의 꼭데기에 철쭉 나무가 보인다. 저 위에 자리 잡은 자연의 신비를 볼 수 있다.

남근석의 석문을 빠져 나와서 본 뒤돌아 본 모습

다른 각도에서 본 남근석의 모습으로 남근석은 천황봉에서 바람재 방향으로 올때만 남근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계단을 올라 우측으로 돌아가면 월출산의 명물인 남근바위가 나타나고 그 우측으로 큰 바위가 여근석인 베틀바위가 있는 구정봉이다.


베틀굴 안에서 밖으로 본 모습

베틀굴 내부의 모습

베틀굴이 있는 구정봉으로 사진상 가운데 소나무가 있는 곳이 베틀굴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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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른 봄이라 고목은 새싹을 다 피우지 못하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서 있었다.

봄이면 새잎을 달고 오고가는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독차지 할 것 같다. 가지가 좌우로 뻗어 여름철에는 넓은 그늘을 만들어 쉼터 역활을 할 것이며 도갑사를 450년 동안 지켜온 터줏대감이 이 팽나무이다.
허리둘레는 장골 둘이서 양팔을 뻗어 겨우 잡을 수 있는 4.4m이며 팽나무의 높이 또한 8m로 낮지만 풍겨오는 무게감은 보는 이를 압도 하고도 남는다.  
1924년 12월 3일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 있고 위치는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58-2번지 도갑사 상가건물 한켠에 서 있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고목 답게 가지를 받이는 기둥이 여러개 서 있어 세월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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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용궁면 회룡포

경북 예천군에는 용과 관계된 지명을 가진 곳이 여럿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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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룡대에서 바라본 회룡포마을, 내성천이 휘감아 육지속의 섬으로 만들어 버렸다.

회룡포,용포,비룡산,용궁면등 용이 하늘로 승천하기 위해서는 필수 조건이 물이있어야 하는 법, 예천군에는 용왕이 살고 있는 바다의 용궁이 뭍으로 올라와 있어니 용이 승천을 하기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하늘로 올라 갈 날을 기다리는 중인 것 같다,낙동강과 태백산에서 발원한 내성천 그리고 죽월산에서 발원한 금천이 서로 만나는 삼강 인근의 회룡포는 내성천이 내려오다 다시 거슬러 역류하는 모습으로 물리 흘러 오메가 형상을 하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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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몸을 틀 듯이 휘감은 물동이 마을

국내에는 3곳으로 안동의 하회마을과 동강의 병방치등 물돌이로 한국의 비경이 아닐 수 없다. 그증에서 회룡포는 단연 으뜸으로 한삽만 떠 버리면 육지속의 섬으로 만들 수 있는 곳이다.산은 물을 가르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하는 산태극 수태극의 평범한 순리를 자연은 그대로 순응을 하며 따르다 보니 물동이 현상이 생겨나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또한 회룡포에는 명물이 있다. 공사 현장에 가면 구멍이 뚫인 철판을 볼 수 있다. 그것으로 내성천을 건너 가는 유일한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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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을 건너 회룡포로 들어서는 유일한 뽕뽕다리, 가을동화 촬영으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일명 뽕뽕다리로 얼마전 모방송국 에서 가을동화를 촬영하여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 비룡산을 휘감은 내성천과 만나는 지점을 삼강이 만난다하여 삼강이라 부른다. 그 강에는 예전부터 강가를  가로지르는  나룻배와 주막이 있어 강을 건너는 민초들에게 삶의 질펀한 이야기를 나누며 오고가는 장터 같은 모습이였을 것이다. 지금은 새로 생긴 다리로 주막과 나룻배는 옛 꿈속의 동화 같은 이야기가 되어 지나가는 차량들에게는 한낮 추억에 불가 할 것이다. 삼강나루터에는 유옥연 할머니께서 마지막으로 주막을 지켰지만 90세를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었어니, 님의 흙벽에 걸린 외상장부만 세월을 잊고 주인을 기다리고있다. 현재는 주막이 경북 민속자료 제134호 지정되어 복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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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내성천 금천이 만나는 삼강 나루터. 지금은 새로생긴 다리로 나루터는 사라지고 흔적만이 느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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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천을 도강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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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제횟집(055-643-3876). 사량면사무소 바로 옆에 있으며, 사량도 지리산 옥녀봉을  벗어나 만나는 첫 번째 횟집이다. 도다리회와 도다리쑥국 전문이다. 굳이 이 집을 택한 것은 도다리 김치말이와 도다리쑥국 때문. 맛있게 익은 신김치에 싸먹는 담백한 도다리회의 조합은 먹지 않고선 상상할 수 없는 별미. 해풍을 받아 향긋함이 육지의 그것보다 진한 쑥을 곁들인 도다리쑥국은 봄처녀 같은 여린 맛이 잃었던 입맛을 돋우기에 충분하다. 4인 기준 한 접시 6만 원, 도다리쑥국 1인당 1만 원. 도심과 비교해 가격은 별 차이 없지만 양은 아주 푸짐하다.




특히 이집 김형주 사장은 이곳 토박이이자 산꾼. 사량도 지리산의 밧줄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설치된 것이라고 보면 될 정도로 지리산 전문가이다



도다리회 김치말이

도다리 쑥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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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진지성 자성대

흔히 자성대라 불리는 부산진성은 정발 장군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동래읍성은 송상현장군, 다대포성은 윤홍신이 지켰고 여기 부산진성은 정발장군이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진 앞 바다에서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과 싸우다 종과부적으로 후퇴하여 부산진성에서 성을 사수하기 위해 성문을 걸어 잠거고 일전을 벌리지만  4월14일 전사를 하게 된다. 





그후 1593년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함락을 하여 주둔을 하며 성의 형태가 많아 바뀌었다. 일본장수 모리 테루모토가 주둔을 하며 쌓아 일본식 성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자성대가 부산진성의 외성이었다고 하며 자성대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부산진성을 모성이라 하면 외성인 자성대는
자식의 성 즉 자성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산 정상에 자성을 만들고 장대를 사용하였다는 데서 자성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임진란때는 일본 장수 고니시가 주둔을 하였다 하여 고니시성이라 불렀다하며 그후 명나라의 만세덕이 주둔을 하였고 그후 만공단이 있었는데 이때 만공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 난때는 현재의 자성대가 바로 바다와 연결이 되어 바닷물이 성벽아래까지 들어왔다한다. 그래서 외세의 침입에 가장 민감한 곳으로 추정된다.
 
그후 일제시대때 시가지정비사업으로 성의 일부가 훼손되고 자성대 앞 바다가 매립이 되어 지금은 부산을 대표하는 자성대부두가 설치되어 있다. 지금도 자성대공원에 가보면 그때 석성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높이는 최고 10m에서1.5m까지 쌓은 흔적을 볼 수 있다.1974년 시작한 정화사업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이 되었는데 진동문인 동문, 서문인 금루관,정상에는 장대인 진남루가 복원이 되어 있다. 진남루 옆에는 명나라 이여송과 함께온 천만리장군 기념비와 최영장군의 비각이 보전되어 있다.

진남대로 1974년 복원이 되었고  2층구조로 자성대공원의 정상에 있다. 현재는 출입을 할 수 없도록 쇠창살로 보호각을 설치하였다.


진동문인 동문


서문인 금루관의 모습


이 기념비는 두산위브의 포세이돈아파트 한견에 설치된 기념비로 기념비가 서 있는 이자리는 부산진성의 관문이다. 1592년 4월13일 밤에 왜적은 불시에 이곳을 통하여 부산진성을 침공하니 하룻밤사이에 성주 정발첨사는 이 성을 지키다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원래 자성대는 본성과 지성이 있었는데 이 지성이 오늘날의 자성대이다.

정유재란이 지나 우리나라에서는 자성대를 대대적으로 수축하고 첨사영을 이곳으로 옮겨 왜적의 제침에 대비하였다. 이때 사대문이 동서남북에 설치되고 성안에는 객사 군기소 장대 관청등도 설치 되었다.또 서문 양쪽에는 "남요인후 서문쇄약"이라 새긴 돌기둥이 있었다. 이말은 곧"나라 남쪽문은 들목에 해당하니들어오는 적을 경계하고 서쪽문은 적이 들어 올 수 없도록 단단히 자물쇠를 잠궈놓으라 "는 뜻으로 자성대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진동문





영가대의 모습입니다. 영가대는 1614영 광해군때경상도 순찰사 권반이 부산진지성 서쪽 해안에 선착장을 축조하면서 퍼 올린 토사가 쌓여 작은 언덕이 생겼고 그 언덕위에 8칸의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어 조성한 곳으로 누각을 짓고 1624년 인조때 선위사 이민구가 이곳에 파견되어 와서 권반의 고향인 안동의 옛이름인 영가를 따서 영가대라 하였다. 1617년 광해군 9년 통신사로 파견된 오윤겸이 처음 영가대에서 일본으로 파견 된후 1811년 이루 순조때까지 통신사 일행이출발하여 돌아 오던 장소로 안전 항해를 위한 해신제를 올리는 장소였다.  그러나 1910년 경부선 철도의 부설과 부산 항만의 매립공사로 소실된지 90년만인 2003년 9월25일에 복원하여 준공을 하였다 한다.







영가대 내부의 모습이다.


자성대 컨테이너 부두가 앞을 가로막고 그 뒤로 보이는 산이 영도의 봉래산이다.

현재는 도심으로 둘러 쌓여 아파트와 도로가 밀집되어 있다.





조선 통신사란1607년인 조선 후기에 일본 에도막부의 요청에 의해 1811년 까지 열두차례에 걸쳐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통신이란 신의를 교환한다는 뜻으로 조선국왕이 일본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조선 국왕의 공식적 외교사절이었다.

진남대로 천만리 장군의 기념비와 함께 서 있다.










진남루 아래에서 산책을 즐기는 주민들. 


충장공 천만리 장군 기념비. 임진 왜란의 일등 공신인 천만리 장군은 중국 영양사람으로 자는 원지 호는 사암으로 1592년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원병의 영양사로서 이여송과 함께  출정을 하여  평양 곽산 등시에서 전공을 세웠고 정유재란때에는 마귀 장군과 함께 와 울산 동래등의 전투에 싸웠다. 그 후 명나라로 원군이 철 수를 할때 천만리 장군은 조선에 머물러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충장공이란 시호와  화산군에 봉책하였다.







서문 성곽 우주석으로 부산 광역시 지정기념물 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돌기둥을 세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어나 임진왜란 후 부산진지성을 축성 할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돌기둥에는 "남요인후 서문쇄약"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국경이라, 서문의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는 뜻이라한다. 원래 부산진 지성 서문자리였던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것을 1975년 부산진지성 복원공사때 이곳 서문 금루관에 좌우 기둥석으로 사용을 하였다 한다. 좌측272m, 우측277m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듯이 강직하고 총렴한 장군으로 왜적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1316년 고려 충숙왕3년에 출생을 한 최영장군은 공민왕때 대호군이 되어 내란 과 왜란에 참가를 하여 평정을 하고 홍산싸움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러 왜적은 최영장군의 장군기만 보면은 벌벌 떨 정도로 무서워 하였다 하며, 그후 "백수최만호"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해안의 바닷가에가면은 최영장군의 사당을 볼 수 있다. 민간신앙으로 승화되어 그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며 무속인들 사이에서도 최영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사람도 볼 수 있다. 사량도, 감만동,수영동 영도 자성대등 여러곳에서 그의 사당을 볼 수 있다. 자성대에서는 음력 5월5일인 단오날에 그의 제사를 지낸다 한다 

그의 영정을 모신 자성대의 사당 내부로 철문으로 닫혀 있다.

서문과 동문은 복원이 되어 있지만 북문은 복원이 되어 있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북문이었다는 흔적만 볼 수 있는 안내석으로 지금 현재는 많은 주민들의 휴식처로 자성대 공원으로 부르고 있다.
  


북문으로 올라 진남대로 올라 갈 수 있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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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수지방의 건축 양식으로 실내에는 마루와 다다미방, 온돌방이 설치 되어 있다. 한때는 200명이 넘는 기생이 있었다하며 일본인만 출입할 수 있는 기생집으로 해방후 한국인이 운영을 하였다 한다.




도심한복판에 위치하며 지금은 주변에 건물들이 들어서 작은 가장집 분위기 같은 느낌이 날 정도로 초라하다.

부산에는 지리적인 영향으로 인해 일제시대때 일본인이 많이 거주를 하였다. 필자가 동래 온천장에 거주를 할 때 그 집도 한켠 방에는 다다미 방이 설치 되어 있었는데 아마 일제시대때 일본인이 거쳐를 하였던 것 같은 유년 시절의 기억이 있다. 그만큼 부산에는 일본풍의 집들이 도처에 있다. 일본에서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제일관문이기 때문 일 것이다. 그래서 수정동 범천동 가야 주례 대신동을 품안에 거느린 산을  우리들은 예로 부터 엄광산이라 불렀는데 일본인들이 부관페리호를 타고 부산항으로 올때 저 멀리 바다에서도 보인다하여 고원견산으로 불러 한때는 산명이 고원견산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그 산아래 수정동에는 지금도 일본 풍의 건축물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 이름하여 정란각으로 쉬운말로 기생집이다. 큐수지방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일제시대때 일본인인 철도청장이 거주를 할 목적으로 지어져 별장으로 이용을 하였다 한다. 해방이후 한국인이 인수를 하여 정란각이란 기생집으로 영업을 하였다 하며. 60~70년대에는 그래도 잘나간 방석집으로 200명이 넘는 많은 기생들이 있었다 한다. 내국인은 출입을 할 수 없었다하며 주로 일본 관리들이 출입을 하였다 하는데 쉬운 말로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거나하게 차려 나와 질펀하게 놀고가는 그런집으로 현재에도 요식업의 문패가 붙어 있다. 1993년 영화 장군의 아들1편의 촬영 장소로 이용을 하였고 일본식 건물 답게 다다미방과 온돌방이 함께 되어 있다 . 지금은 근대문화 유산 330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어며 한 단면의 우리 역사를 볼 수 있는 것 같아 씁슬하다.

찾아가는 길은 지하철 부산진역 또는 버스는 부산일보 또는 고관입구에서 내려 고관입구 사거리 홍골길을  100m 따라가면 된다. 새로운 주소는 홍골길195호




홍등가를 알리는 초롱불이 켜졌을 문앞의 등불은 꺼져 있고 이제는 옛이야기로만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입구에 들어서면 항상 현관에 대낮인데도 불을 밝히고 있다. 구조는 2층으로 목조건물로 전형적인 일본풍이 느껴진다.




1.2층의 모습으로 내부를 볼수 없도록 문이 잠겨져 있는 것이 아쉽다.
아마 저기 방안에서 거나한 술상이 차려지고 기생들과 술판이 벌어졌을 것 같다.






2층의 외벽은 얿은 판자를 데고 나무로 모양을 낸 정교한 모습으로 건축적으로 인정을 받아 근대문화유산이 된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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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동에 가면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적을 모아 복천박물관을 개관해 놓았다.

국가사적 제273호인 복천동고분군의 조사 내용을 종합하여 전시해 놓은 곳으로1996년 10월 부산지역의 가야와 신라문화를 복원하여 개관하였다.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과 무덤방식은 가야의 신비를 풀어줄 열쇠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1전시실은 삼국시대의 모태가 된 삼한시대의 역사와 문화, 삼국문화의 비교, 그리고 가야 멸망이후의 복천동 고분군의 무덤규모와 내부를 볼 수 있다.

부산지역의 삼국시대에 변한 12국에 속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화려한 가야문화가 꽃피었다가 5C 중기 이후 신라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노포동고분군, 복천동 고분군,연산동고분군이 이러한 과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제2전시설은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을 장르별로 전사하였고 인접지역애서 출토된 유물을 비교 전시하여 복천동 고분군의 성격을 볼 수 있다. 복천동 고분군에는 굽다리접시, 그릇받침, 목항아리등 다양한 종류의 도기가 나왔다. 특히 신발모양토기,오리모양토기, 말머리모양뿔잔 등은 뒤어난 조형미를 보여줄 뿐 아니라, 당시의 의식행위나 죽은자에 대한 영혼사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관람안내*

*관람시간:09:00~18:00(오후5시 매표마감)

*관람료:어른500원, 청소년.군인 300원, 어린이.65세 이상.장애인 무료

*휴관일:매년 1월1일, 매주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 경우 그다음날)
(복천박물관 팜프렛 발췌)

*복천박물관의 전시유물*

먼저 1층의 부산의 역사 방입니다.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도기류등 많은 문화재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복천동 고분군에서 볼 수 있는 무덤의 형태는 덧널무덤과 구덩식돌덧널무덤을 볼 수 있다.

복천박물관 전경

복천동고분군

*복천박물관에 들어서면 사진촬영금지란 안내판이 있어 사진을 다 촬영하지 못하였습니다. 안내장에 보면 플레쉬와 삼각대를 사용하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마 마음 놓고 찍는 건데...괜이 양심이 쪼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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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시 무안면 향나무

경상남도 기념물 제119호

소재지: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홍제사

향나무는 향나무과에 속하는 사철 푸르고 키가큰 교목(喬木)이다. 상나무 노송나무로도 불리는 향나무는 줄기에 갈색의 비닐 모양의 껍질을 갖고 있다.

무안리 향나무는 땀흘리는 표충비각 앞에 위치를 하고 있다. 1742년 영조 18년에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인 남붕선사가 사명대사의 표충비를 세우고 그 기념으로 심은 나무라 한다.

향나무는 높이1.5m, 둘레1.1m 정도의 크기로 수령은 300년 쯤 되었다. 보통 향나무는 하늘로 가지를 쭉쭉 뻗어 올라가는 형태이지만 무안리 향나무는 우산을 펼쳐 놓은 형상의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향나무의 원가지를 자르고 가지를 사방, 팔방으로 뻗게하였더니 지금과 같은 형태로 갖추게 되었다 한다. (안내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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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경주남산여행)경주 남산의 배동 삼릉과 경애왕릉 구경가기


경주 남산의 배리인 삼릉에는 현 재 다섯기의 왕릉이 위치를 하고 있다. 삼릉 좌우로 우측에는 경애왕릉. 좌측에는 지마왕릉이 있어 한번 들러보면 좋을 것 같다.

모두 소나무 숲 사이에 안장된 왕릉은 경주 남산을 배경으로 무심한 세월의 흔적을 남기며 현재까지 남아 있다.

현재의 왕릉이 자료나 전해 내려오는 기록에 의해 의구심이 들기도 하지만 현재는 모두 하나의 역사속에 살아 있을 뿐이다.

이곳을 가기 위해서는 터미널에서 500번501번502번등을 이용하여 삼릉에 하차한후 삼릉과 경애왕릉을 본후 삼존불 지마왕릉 포석정등을 둘러보면 하루 해 가 짧음이 아쉬울 뿐이다.

<삼릉숲>




*경애왕릉

사적 제222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73-1

신라55대 경애왕(재위924~927)을 모신 왕릉으로 삼릉의 우측에 있다. 53대 신덕왕의 아들로 927년 남산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다.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죽는 비운의 임금이다. 삼국사기에는 경애왕을 해목령에서 장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일부에서는 경애왕릉이 해목령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아니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 부근의 일성왕릉이 경애왕이 아닌가하고 추정을 하는 사람도 있다. 높이가 4.2m로 흙으로 둥글게 쌓은 봉분으로 현재 남아 있다.





*배리 삼릉

사적 제219호

신라8대 아달라왕제 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의 무덤을 함께 모아 삼릉으로 부른다.

남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나무 숲을 자랑하고 냉골을 올라 남산을 오르는 산행로 또한 가장 많은 배동 삼릉에는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년중 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아달라왕은 즉위시절 백제에서 침공을 하여 신라인을 잡아가자 아달라 왕은 친히 전장으로 달려갔고 백제군이 화친을 제의하자 포로를 석방하였다 한다. 능의 규모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18m

효공왕이 후손이 없어 죽자 백성들과 문무백관들이 헌강왕의 사위인 신덕왕(912~917재위. 박경휘)을 추대하였다. 견훤과 궁예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을 하였다. 능의규모는 밑둘레 61m. 높이5.8m. 지름18m로 두차려에 걸쳐 도굴을 당하였다. 1953년과 63년에 내부조사가 진행되어 깬돌로 쌓은 횡혈식동방 형태의 무덤으로 밝혀 졌다.

경명왕(917~924재위. 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을 공격하여 물리쳤다. 능의규모는 밑둘레50m. 높이4.5m. 지름16m.





*지마왕릉

사적제 221호경북 경주시 배동 산30

황금대 능선 아래 포석정 인근에 있는 왕릉으로 신라6대 지마왕(112~134 재위)의 능이다.왕은 파사왕의 아들로 태어나 23년간 즉위하며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으로 부터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능의 규모는 밑둘레38m. 높이3.4m





<안내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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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재의 태고송 소나무

조선시대 태종왕때 본 문각 건립 당시 천연수로 자라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나무둘레가 2.8m이며 높이가 20m로 하나의 줄기가 대각선으로 휘어져 올라가는 벽송사의 미인송과 흡사하다. 여러개의 가지 중 한가지는 아래로 처진 모습을 보인다. 본 태고송은 바람이 심하게 불때는 바람에 의해 서 소나무가 우는 소리를 내게 된다. 그 소나무의 울음 소리로 기상을 예측할 수 있다 하며 그 아래 제실을 장천재라  부르는데 천관산 정상에서 부터 긴계곡을 이루고 있다는 뜻이란다.

(수령 600년의 소나무로  태고송으로도 부른다. 벽송사의 미인송과 흡사하다.) 

장천재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2호로 1978년 9월22일 지정 되었는데 현재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라 안으로 들어 갈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원래 장천재는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장천암이란 암자로 창건되어  조선 중중때 강릉 참봉 위보현이 어머니를 위해 장천동에 묘각을 짓고 장천암 스님에게 묘각을 관리하도록 한 것에서 유래가 되었다. 1659년에 기존의 장천암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장천재를 건축하고 여러번의 개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중에서도 존재위백규(魏伯珪:1727∼98)는 어려서 부터 영민하여 천문, 지리에도 밝고 율력, 도불, 산수, 의학서를 탐구하였으며 이곳 장천재에서 수학을 하였고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한다.  현재는 장흥위씨 방촌계파의 제실로 사용을 하고 있으며 장천팔경으로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천관산을 찾는 관광객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장천재는 현재 2008년 12월14일 보수공사가 진행중으로 관람을 할 수 없는 상태이다.

(태고송은 장천재의 얼굴마담이지만 현재 장천재는 내부 공사가 진행중이다.)
천관산을 찾는 많은 관람객들이 산행후 주변의 빼어난 경치와 함께 있는 장천재를 구경하고 하산을 서두르고 있다. 지금 내부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인 것을 볼 수 있다
천관산 정상에서 흘러 내려온 긴계곡이 이곳 도화교를 지난다. 그래서 장천재로 부른다 한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장흥 장천재입니다.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21,00720000,36&queryText=V_KDCD=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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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동래여행)동래 복천동고분군. 도심한복판의 U.F.O가 가야시대 고분인 복천동고분군

 

복천동 고분군

사적 제273호

소재지: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50일원

<반구 돔형태의 건물로 안으로 들어서면 발굴현장의 모습과 출토된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덧널무덤과 구덩식돌덧널무덤을 출토당시의 모습으로 보여 주고 있다.>

 복천동 고분군은 현재 동래마안산의 중심부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은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산에서는 대표적인 고분이다.

 

1969년 주택공사를 하면서 고분군 일부가

 


 

 

 파괴되며 이세상에 존재를 알리게 되었는데 1995년 까지 부산대학교와 시립박물관이 중심으로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현재까지 출토된 유구는 130여 기에 달하고 출토유물은 9천점에 이른다 한다. 출토된 유물의 분포를 보면 토기류, 철기류, 장신구류, 인골, 말 이빨 같은 동물의 몸체 일부도 같이 출토되었다.

동래구청이 있는 동래시장을 통과하여  우성베스토피아 아파트 앞을 지나면 복천동 고분군으로 갈 수 있다.

고분공원으로 무덤자리는 회양목을 심어 돌여 놓았으며  까만 빗돌로 고분임을 표시 하였다. 



도심한 복판에서 가야 신비를 경험할 수 있다. 1969년 주택공사 과정에서 고분군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동서남은 시내와 접하고 북으로는 동래읍성이 둘러 쳐져 있어 시민공원으로 많은 주민들이 고분군을 산책하며 야와고분군은 무료로 관람을 할 수 있다. 




복천고분군의 53호인 구덩식돌넛무덤(수혈식석곽묘)의 내부로 출토된 당시의 모습으로 전시를 하고 있다.




복천동 고분군 54호 무덤인 덧널무덤(목곽묘) 내부로 출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밤이 아름다울 것 같은 복천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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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기념관)

(사명대사 생가터인 유적지는 4만9146㎡의 부지에 사당인 숙청사,어린 유년기를 보낸곳을 육영당, 그리고 거처를 하던 사랑채를 사명당으로 각각 복원하였다 합니다)

(경남여행/밀양여행)사명대사 생가와 기념관. 사명대사의 고향 마을인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 댕겨 왔습니다.


1992년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됨
소재지: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번지
연락처:055-359-5647
사명대사는 조선 중종 39년인 1544년에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풍천임씨 집안의 둘째아들로 태어 납니다.
사명당이 태어난 고라리는 풍수지리설에 의 한 명당으로 주변에 하서산에서 이어진 능선이 영취산 종암산으로 흘러내린 그 중심에 서 있습니다.
고라리에서 그의 조부 때 부터 터를 잡아 살았는데 사명당은 커면서부터 매우 독특하였던 어린이 인 것 같습니다.




“번뇌를 하지 않고 쓴 글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하며. 부모님이 세상을 떠 자 그는 명종14년인 1559년에 김천의 황학산 직지사로 찾아가 신묵대사에 의해 출가를 하게 됩니다.

그후 그는 또다시 금강산의 보현사에 찾아가 서산대사의 제자가 됩니다. 1592년 사명당은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를 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승문을 나와 승려들과 규합하여 평안도 순안으로 가 스승 서산대사가 이끄는 승병과 합세를 합니다. 그는“의승도 대장”이 됩니다.
여러번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또한 1593년 명나라의 구원군과 함께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하는 전투에서도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번 왜구의 적진으로 찾아가 왜군의 상황을 염탐하기도 하고 휴전협정의 담판을 벌이기도 합니다.
사명당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선조37년인 160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적장과 담판을 하여 전쟁 중에 잡혀간 백성 3000여명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쾌거도 올립니다.
8개월간 일본에서 머문뒤 돌아와 그는 모든 공직을 버리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수도에 전념하였다 합니다.
그후 그는 해인사에서 입적하게 되는데 광해군이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내렸다 합니다.

지금도 해인사에 가면 홍제암이란 암자가 있습니다. 여기서 입적한 사명당의 시호에서 따 왔다 합니다. 사명대사의 부도탑도 현재 홍제암에 있다합니다

사명대사 유적지인 기념관과 생가지에서는 최근까지 입장료 2000원을 징수하였는데 지난 10월24일 입장료를 폐지하고 무료관람을 실시하고 있다합니다. 우리 부산의 충렬사와 대조가 됩니다.

*생가터 둘러보기









*기념관 둘러보기






 찾아가는 길: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신대구부산 고속도로 밀양IC~밀양 청도 방향~창녕 밀양 24번~마산 창원 시청 법원 검찰청 방향~창녕 부북 24번 우회전~창녕 청도면 24번~합천 창녕~무안면~무안 부곡 30번 좌회전~창녕 부곡온천~사명대사 유적지(5㎞) 크게 우회전(영산정사)~갈림길에서 왼쪽(영농법인 농정, 갈탄보일러)~영취산 하서산 등산안내도 지나~영산정사 방향~다례 서가정 사명대사 유적지 영산정사 우회전~다례 서가정~사명대사 유적지순입니다.

*사명대사 기념관과 유적지는 밀양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를 클릭하시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http://tour.miryang.go.kr/01/04_01.php?pT_idx=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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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향교

1972년 6월26일
부산유형문화재제6호지정
부산시 동래구 명륜동 235번지 명륜초등학교옆에 위치

동래향교인 정면의 2층누각으로 반화루이다. 그 뜻이“성인을 따라 덕을 쌓고 임금을 받들어 공을 세우기를 원한다”는 교육이념을 나타낸다.


 



학생들이 수업을 하던 곳으로 명륜당이라 한다.

대성전으로 성현들을 모셔 놓은 곳이다. 

동래향교는 조선태조1년 때인 1392년에 신설된 교육기관으로 현재 동래읍성 밖의 동래고등학교 자리에 위치하였다 한다. 그후 현재의 위치에는 순조12년인 1812년에 동래부사 홍성만에 의해 지금의 명륜동 명륜초등학교 옆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향교의 기능은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국립교육기관이었다. 지금의 중등교육기관에 해당을 한다. 동래향교는 교육을 담당하는 명륜당과 성현을 모신 대성전을 나누는데 그사이에 내삼문을 두고 있다. 그리고 명륜당과 일치하지 않고 명륜당 우측으로 비껴나 않게 대성전이 위치하고 있는 점도 다른 향교와 특이한 점이라 하겠다.

정문인 반화루가 있는 2층 누각은 특별한 행사 이외에 현재는 밑으로 출입을 할 수 없으며 좌측 관리사무소 옆으로 쪽문이 열려 있다. 쪽문으로 들어서면 좌측 반화루와 서로 마주보게 앉은 명륜당이 자릴 잡고 좌측으로 서재, 우측은 동재로 3동의 건물이 있다. 명륜당은 요즘 말하는 수업하는 교실이라면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인 것이다. 그리고 반화루 옆에는 많은 빗돌을 볼 수 있는데 동래부사로 부임한 관리들의 빗돌로 동래향교에서 부사들의 공적비를 세운 것이라 하였다. 이 공적비를 흥학비로 부른다.

명륜당과 대성전은 정면5칸이고 측면이2칸인 겹치마 맞배지붕으로 건축되었고 그 앞 부속건물인 동재와 서재는 정면3칸과 측면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양식으로 지어졌다. 동래향교의 중심건물인 명륜당과 마주하고 있는 반화루는 그 뜻에 걸맞게 동래향교의 교육이념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성인을 따라 덕을 쌓고 임금을 받들어 공을 세우기를 원한다”는 2층 누각 반화루는 정면3칸 측면2칸이며 주심포양식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올려 중후한 맛을 내게하였다. 대성전 아래 동무와 서무는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동재와 서재와 비슷하지만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렸다. 명륜당 좌측에는 수령220년 된 은행나무가 지금 노란 물을 들이고 있고 보호수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동래향교의 학사관리를 위해 학전7결이 지급되었고 종6품의 교수1명과 70명의 학생이 수업을 받았다 한다.

필자가 동래향교를 찾아가기 위해 자신을 하고 찾아갔는데 동래향교를 찾을 수가 없었다. 30년전 고등학교를 다닐때 그 훤하던 길들이 지금은 샛길이 되어 있고 많은 도로가 새로 생겨 30년 전의 기억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우성베스토피아 입구의 전봇대에서 안내판을 찾았는데 그 안내판을 보고 찾을 수가 없어 부근의 여중생2명에게 동래향교를 물어보니 그런곳 모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200m 거리의 문화재도 모른다고 하니 말이다. 아님 요즘 어린이 납치범들이 많아 얼른 짜리를 피할여고 그런지... 내 기억으로도 명륜초등학교 옆에 있다고 기억을 하는데 그 예들도 그 학교를 졸업을 하였을 껀데 모른다고 하니 뭔가 교육이 잘못되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동래향교와 복천동고분군, 박물관을 한 이정표에 삐딱하게 붙이고 비슷한 방향으로 화살표를 그어 놓아서 그것을 보고는 복천동고분군과 박물관은 찾아갈 수 있는데 동래향교는 찾을 수가 없었다. 동래구청에 부탁하고 싶은 게 안내판을 나누어 동래향교의 안내판은 그 방향에 제대로 붙여주었으면 한다.

반화루 앞 입구에 넓은 주차장을 두고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 명륜당 좌측에 서재 우측에 동재로 학생들의 기거할 수 있는 공간이다.

동재와 서재로 정면3칸과 측면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의로 되어 있다

흥학비로 동래부의 관리로 부임한 부사들의 공적비를 적은 빗돌이다.

명륜당에서 마주 바라본 반화루로 2층 누각을 이루고 있다.




명륜당 내부 모습입니다.

명륜당 현판과 내부 천장의 모습입니다.




대성전으로 성현들을 모시고 재사를 지내던 곳

동무와 서무로 성현들의 위폐를 모신 곳이다.


명륜당과 대성전을 가르는 내삼문

안내판의 그림대로라면 같은 골목으로 이해가 되지만 실제 찾아가면 고분군과 읍성지는 같은 길이지만 동래향교는 엉뚱한 방향의 길입니다. 같은 도로가 아닌 길입니다. 그리고 작고 너무 높이 붙여 놓아 쉽게 안내를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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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넘은 전통의 동래시장 부근에는 많은 문화 유적이 있다. 동래 읍성을 비롯해 송공단, 동래부 객사터, 동래향교, 복천동 고분군등 하루에 돌아보기 힘이 들 정도로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송공단 입구로 앞으로는 동래시장이며 안내판과 문화재임을 알리는 빗돌이 서 있다.


 




송공단으로 대통령 박정희란 각자가 선명하다.



 들어서면 정 중앙에 송상현 순절비가 서 있고 동단에는 조영규, 노개방등을 서단에는 문덕겸등을 모섰다.

좌측으로 별도의 첨단을 만들어 송상현의 첩 금섬등을 따로 모섰다.


양정로타리에 있는 송상현 동상으로 주변에 빌딩 숲으로 가려 있어 상대적으로 외소한 느낌이다.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11호

동래시장 건물 뒤인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229-78에 송공단의 건물이 있다. 임진왜란때 동래읍성을 지키다 순절한 병사와 그리고 끝까지 싸우다 성은 함락되자 송상현은 정원루에서 순절을 하였는데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제단을 영조18년(1742)에 동래부사 김석일에 의해 세웠다. 여기에서 송상현이 충절에 관한 이야기가 전한다.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들이 송상현이 지키고 있는 동래읍성으로 쳐들어와 길을 내주기를 요구한다.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여 달라”는 통첩을 받고 답글을 보낸다.“싸워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여 주기는 어렵다”는 송상현은 군사들의 수도 열세이지만 서울로 올라가는 길을 내 줄수 없다며 결전을 벌리지만 성은 함락되고 죽음으로 결말을 맺지만 그의 충절을 모신 곳이 송공단이다. 송공단 이전에는 현 동래경찰서 자리가 예전에는 농주산이었다. 그 자리에 임진왜란때 순절한 분의 전망제단을 세웠는데 동래부사 송상현과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등 동래읍성 전투에서 순절한 분을 모셨다 한다. 1742년에 송공단이 세워지자 이곳으로 옮겨 왔다. 처음에는 동서남북으로 재단을 만들어 북단에는 송상현 조영규 노개방을, 동단에는 유생 문덕겸등을, 서단에는 송상현의 첩 금섬등을, 남단에는 향리 송백등을 모섰다. 처음에는 다대포에서 전사한 윤홍신과 부산진에서 전사한 정발장군을 모두 함께 모섰지만 그후 윤공단에는 윤홍신, 정공단에는 정발장군의 위패를 따로 모시게 되었다하며 송공단에는 동래읍성 전투에서 전사한분만 모시게 되었다 한다. 일제시대 때부터 동래 기영회에서 매년 음력 4월15일에 향사를 지낸다.

그리고 현재의 송공단 안의 모습은 2005년 11월에 충렬사지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을 하여 정면에는 송상현의 순절비와 동단에는 조영규 노개방을 서단에는 문덕겸등을, 별도로 첨단을 만들어 송상현의 첩 금섬을 모시었고 송공단에는 7단 16기를 현재 모시고 있다.

입구 송공단의 현판을 자세히 보면 대통령 박정희라 되어 있다.

송공단의 가을 모습으로 중문을 통해 들어서야 송상현 순절비를 만날 수 있다.

중문의 모습, 이문을 들어서면 된다.

그중에 동래시장 본 건물 좌측의 골목에 작은표지석이 서 있다.
동래부 객사터로 봉래관으로 불렸다며 지금은 모습을 찾을 수가 없고 위치만 알리고 있다. 객사에는 조선시대때 왕의 초상을 대신하여 목패를 봉안하여 배례를 올리던 곳이며 서울에서 지방으로 관리가 내려 오면 관원들의 유숙장소로 이용을 하였다, 그리고 외부의 손님들이 찾아오면 영접하고 회의실로도 이용을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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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최영장군이 제주도에서 발발한 민란을 평정하고 무주현을 거쳐 서울로 가던중 붉은 단풍이 온산을 뒤 덮고 바위가 병풍를 친 이곳의 산세에 이끌여 적상산을 오르게 되었다.
급한 산세를 올라 보니 7부능선에 큰 암벽이 앞을 막으니 대장부가 정상을 목전에 두고 내려 갈 수가 없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긴 칼을 가지고 바위를 내리치니 바위가 쪼개져 길을 내 주어 산 정상으로 오를 수 있었다 한다.
그 바위가 장도 바위이며 폭은 사람 한사람이 겨우 다닐정도의 길이 나 있다. 그곳을 벗어나면 적상산성으로 서문이 위치하고 있다.
최영장군이 산 정상에 올라보니 산세가 험하고 하여 이곳을 군사적 요충지로 보고 산성을 축조할 것을 건의 하였다 한다. 




총길이는 8km가 넘는 산성으로 적상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축성하였다. 그리고 서창으로 오르면 서문으로 오를 수 있다. 일명 용담문이라 하였다. 축성 당시에는 문루가 있었다는데 2층이며 3칸이었다고 “적상산성조진성책”에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은 산성의 흔적만이 남아 여기가 문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폐허가 된 것을 최근에 돌을 쌓아 올려 서문 터임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성문 밖에는 서창과 고경사가 있었다하며 서창은 미창과 군기창이 있었다한다.
험한 산세로 인해 성안까지 운반이 힘들어 사고지 옆으로 옮겼다하며 등산로 입구마을이 아직도 서창으로 불려지고 있다.

최영장군이 적상산을 오를 때 암벽이 앞을 막아 장도를 쳐 산길을 만들었다는 장도 바위로 사람 한사람이 겨우 빠져 나갈 정도의 폭이다.


장도바위와 주변의 산세가 험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장도 바위를 지나면 만나는 적상산성의 서문으로 일명 용담문이라 불린다.
누각은 사라지고 없지만 산성이라도 제 모습으로 복원을 하였다.

사적제146호로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사천리에 위치하며 서창마을에서 오르면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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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실록 5대 사고지는 오대산 마니산 적상산 태백산 묘향산이다,
그러나 묘향산에 있던 사고지가 적상산으로 옮겨와 보관을 하였다. 잦은 전란으로 조선왕실실록 사고지는 더욱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 선다.
그리고 관군을 배치하였어며 주변의 수호사찰에서 관리를 하였다.
태백산사고지는 각화사에서, 오대산은 월정사, 적상산은 안국사로 안국사의 사찰이름도 여기에서 나왔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조선실록 4대 보관지가 모두 남한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아마 북방에 있는 오랑케인 후금이 세력이 커짐으로 인해 사고지를 안전하게 하기 위함으로 보여진다 
마니산 사고지에서 보관하였던 실록은 서울대 규장각, 태백산 사고지는 부산의 국가기록원, 오대산사고지의 실록은 일본에 반출되어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 되었고 일부 일본 동경대에 있던것을 소진본 47책을 환수하여 서울대 규장각에서 보관을 하고 있으며 적상산사고지에서 보관을 하였던 실록은 6.25전쟁때 사라졌는데 현재 김일성대학에 보관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복원된 적상산 사고지 모습입니다. 아래에는 적상댐 양수 발전소의 상부댐으로 인해 물에 잠기게 되는 것을 현재 위치로 옮겨와 1997년 부터 복원을 하였다 합니다.

적상산 사고지 우측 건물에  정면에 붙어 있는 사각 현판



적상산 사고지에 대해 살펴보면
전라북도 기념물제88호
위치는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로 현재 적상댐 위에 안국사 올라가는 도로 옆에 복원이 되어 있다.
조선시대 조선왕조 실록과 족보를 보관하던 사고였다. 천혜의 절벽으로 둘러쳐진  적상산성내에 실록을 보관하기위해 광해군6년(1614) 실록각을 짓고 4년 뒤 1618년 선조실록을 보관하였다. 적상산에 사고가 설치되면서 무주현에서 무주도호부로 승격을 하였어며 무주도호부사는 수성장과 토포사를 겸하였다 한다.
인조 12년(1634)년 평안도 묘양산에 보관하고 있던  있던  조선왕조 실록을 일부 옮겨왔다. 인조19년(1641)에 선원각을 건립하고 선원록을 봉안하였다.
사고내에는 승장청, 군기고, 화약고, 수사당, 문루등이 있었서며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 의궤등을 보관하였다.
1910년 일제에  병탄된후 조선왕조실록등이 서울규장각으로 옮겨지면서 사고는 황폐화 되었다.
1992년 양수발전소 상부댐에 의해 사고지가 수몰되면서 현재의 위치에 유구가 옮겨져 1997년 선원각, 1998년 실록각이 복원되었다. 


두동의 건물로 선원각과 실록각을 1997년 98년에 각각 복원을 하였다.

<내부에 전시되고 있는 자료들>




4대 실록지의 현재 보관 상황과 사고 변천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적산산성과 사고의 위치 안국사등 그때 당시의 모습을 지형물로 복원을 하여 알기 쉽게 해 놓았다.

 사고 건물 밑으로 들어서면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그 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내부를 관람하도록 되어 있으며 많은 관광객이 조선왕조실록등을 보고 있다.


 
무주군청 문화관광 사이트에 더욱 자세하게 설명 되어 있습니다.
http://www.mujutour.com/tourplace/index.jsp?page_gubun=page7_view&no=121&page=1&resource_gubun=CP&resource_gubun2=CP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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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숙도 A지구 탐조대에서 본 철새 들의 모습입니다. 아직 많은 철새들을 볼 수 없지만 11월 말경이면 철새들로 장관을 이룬다합니다.

을숙도에도 문화재가 있습니다.
생뚝맞게 무선 문화재요하고 반문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 있습니다.
철새들을 위한 천연기념물 제179호 입니다. 해마다 이맘대 쯤이면 낙동강 하구는 철새들로 자기네들 나름대로 사회를 만들며 쉬어가고 있습니다. 그 쉼터를 잘 쉬어 가라고 보호를 하는 곳입니다. 아울러 한쪽은 개방을 하여 탐조대를 설치하여 가까이서도 철새를 구경할 수 있도록 갈대로 위장을 하여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부산시에서 생태계를  복원한 곳으로 예전에는 농작물을 짓기위해 주민이들어가 파 농사를 하던 곳입니다. 지금은 완전히 자연생태계 그대로 복구를 하여 을숙도 안으로 들어서면 특히 핵심보전지구인 C지구에는 어른 키 보다도 더 큰 갈대가 숲을 이루었고 관리를 위해 다니는 통행로 좌우측으로도 갈대가 숲을 이루어 철새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를 하는 것에 놀랬습니다. 철새를 보호하고 습지및 생태계보전을 위해 을숙도를 3개 구역으로 나누어 관리를 하고 있는데 A지구는 개방지역으로 교육 이용지구이며 B지구는 완충지역 C지구는 핵심보전지구로 나누어 낙동강하구 에코센터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합니다.
철새들의 고향 윽숙도는 1966년 7월13일 천연 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되어 해마다 약167종 13여만마리가 월동을 한다합니다. 민물가마우지,큰고니,큰기러기, 혹부리오리,재두루미,검은머리갈매기,마도요등 과 국제적으로 멸종위기종인 노랑부리 백로,황새,저어새,가창오리,흰꼬리수리,참수리, 매두루미,적호갈매기등 많은 철새들이 월동을 하고 간다고 합니다.
을숙도 철새공원 위치는 부산시 사하구 하단동 1212번지이며 주요시설은  낙동하구에코센터, 피크닉광장, 자연학습장,생태주차장,탐조대,야생동물치료센타를 두고 있습니다.
*이용시간:08:00~20:00
*이용방법:도보
*이용시설:야외공원(주차장, 초화원)

철새들을 위해 이용자 준수사항입니다.
*개방공간 이외에는 습지와 철새 보호를 위해 무단 출입 금지
*야간시간대인 20:00~익일 08:00까지 공원출입을 제한
*위시간에는 주차장 폐쇄 및 공원내 가로등 소등
*철새의 서식에 주장을 주는 행위
*애완동물 동반시에는 반드시 목줄 착용과 배변봉투 지참
*났시, 어로행위,동식물채취,경작행위등을 할 경우에는 관련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합니다.
찾아가는 방법
*버스:58,58-1,58-2,221,300,520번 이용 을숙도 휴계소 하차
(마을버스 3,7,7-1,9,9-1,10,12,13,14,15,16,17,17-1번 이용)
*지하철:1호선 하단역 5번 출구로 나와 위 을숙도 번호 버스를 환승하면 됩니다.
*승용차:시내방면에서 출발할때:괴정방면~하단로터리~낙동하구둑~을숙도휴계소~낙동강하구 에코센터
경남,김해에서 출발시:김해공항로~명지교차로(하단방향)~을숙도~낙동강하구에코센타.
아참 입장료가 있습니다.어른1000원. 청소년.군인500원
에코센터연락처는 tel:051-888-6861~2, 209-2000

홈페이지: http://wetland.busan.go.kr/

 

 

을숙도 낙동강 하구 에코 센터 모습입니다. 일본인 야마시타 야스히로씨가 설계를 했다는군요, 이곳에서 교육밎영상실, 탐조 전망대를 갖추어  관램객을 맞이하고 있다합니다.


모든 가로등이 새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에코센터 입구의 새모양 조각입니다. 귀여운 모습입니다.



에코센터 바로 건물 옆 우측의 습지와 갈대밭입니다. 바람에 따라 춤을 추는 모습이 장관입니다.


최근에 개장을 한 동물 치료센터입니다. 을숙도 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문은 C지구호 핵심보전지구입니다. 지금부터 안으로 들어 갑니다.



























탐조대로 내려오는 터널입니다.. 그리고 탐조대에서 밖을 보고 있네예


 



<을숙도 철새 공원 안내도>



<낙동강 하구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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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대교는 부산사하구 신평동과 강서구 명지동을 잇는 다리로 길이는 5.2km이며 6차선 도로로 설계되어 있다. 착공전부터 환경단체와 부산시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던 명지대교는 철새들의 보금자리 을숙도를 관통한다하여 많은 불란을 야기하였다.
그러나 공사는 2004년 시작을 하였고  공사비 4200억원, 2009년 10월에 완공을 한다며 최근 녹색산단을 찾은 허남식 시장이 공언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진객들을 맞기위해 공사가 중지된 상태이다. 




북쪽의 시베리아 등 추운 지방에서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따뜻한 곳을 찾아 내려오기 때문이다. 낙동강하구가 철새들의 먹이 감과 따뜻한 기후등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추어서 해마다 많은 철새가 낙동강 하구를 찾고 있다. 겨울의 진객 철새들을 맞기위해 2009년 2월까지는 공사를 중단한다고 하니 그 나마 다행이다 싶다.
부산시에서 발주를 하였기 때문에 공사를 중단하였다지만 민간업체가 참여를 하였다면 공사중단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하기야 하루하루 수지타산을 계산하고 공기단축을 위해 주야 일할껀데...그러면 철새들은 다른곳으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날껀데, 그래서 공사현장 부근에는 세우다만 다리의 골격과 "H"빔등이 겨울잠을 하고 있다. 그래도 추운델 피해 내려오는 철새를 위해 공사를 중단하였다 하니 고마울 따름이다.

(철새로 인해 현재 중단된 명지대교 공사 현장입니다)

대교를 받치는 기둥과 H빔의 철기둥만 서 있습니다. 공사는 현재 중단 된 상태입니다.

명지대교 건설 현장에 올라서니 기둥위에 상판을 들어 올리는 작업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년 2월까지는 중지되어 있어 상판 끝부분에 천막지로 덮었는데 떨어져 나갔내요. 그리고 우측으로는 학장동의 아파트와 공단도 확인됩니다.

상판 다리 아래입니다, 늦은 오후라 일몰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바다와 강이만나는 곳으로 가덕도 연대봉도 보이네요.

상판을 다리 기둥에 올리기 위해 옆에 안치된 상태입니다. 내년 봄부터는 옆 기둥에 올리는 작업을 하겠지요

갈대숲 사이로 널부러진 작업대입니다. 그리고 옆의 강 건너 명지의 모텔건물과 그 뒤로 녹산 수문 뒷산인 봉화산도 보입니다.

 상판이 기둥위에 올라가 있고요. 아래 시멘트 포장은 상판을 들어 올리는 기계가 너무 무거워 시멘트 포장을 하지 않으면 땅이 꺼져 기울어 상판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포장을 하였다 합니다. 공사가 끝나면 완전히 철거를 하여 갈대 숲으로 복원을 한다합니다.

바다를 바라보는 등대 같은 모습입니다. 현재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합니다.

겨울잠을 자는 공사현장입니다. 지금은 철새를 위해 손을 놓은 상태입니다.

상판이 기둥위에 올라갈 날만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이 상판을 들어 올리기 위해 밑에 시멘트 포장을 했다합니다.

옆에서 본 명지대교 공사현장입니다. 주위에 철새들이 한창 먹이를 먹기위해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습니다.
(명지대교 공사장에서 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을숙도 갈대밭입니다. 예전에는 이일대가 전부 파밭이라 합니다 지금은 복원을 하여 원래의 모습이 되어 가고 있는데 주위에 명지대교가 건설되니 자연히 파괴가 따를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맨 뒤로 보이는 김해의 신어산에서 동신어산으로 이어지는 낙남정맥의 마지막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역시 갈대밭입니다. 그 뒤로 하단의 승학산입니다. 학이 날아가는 모습으로 보입니까?

가덕도 연대봉과 그 왼쪽 끝부분에 거제도의 산도 어렴풋이 보입니다.

이 모습을 보니 광활한 김해평야의 수확을 기다리는 벼 같습니다. 철새들의 보금자리인 c지구로출입을 할 수 없는 핵심보전지구라합니다.

명지를 가까이서 본 모습입니다. 작업중인 배도 떠 있습니다. 역시 핵심보전지구입니다.






이른시간이지만 철새가 드문드문 보이입니다. 청둥오리 고니등이 현재 내려와 있다합니다. 본격적으로 찾는 시기는 11월 말 부터라합니다.

무리지어 날아가는 모습입니다. 예정에 없던 방문이라 렌즈가 망원이 아니라 작게 나왔습니다.

순천만의 s라인 같은 물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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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길게 늘어진 모래섬이 도요등으로 쇠제비갈매기의 번식지이며 현재에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원도 태백시 황지연못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1300리를 유유히 흘러 경상남북도를 비옥한 토지로 만들며 부산을 거쳐 바다와 만난다.
한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의 사이에 강을 형성하여 이곳 을숙도와 만나는 낙동강, 동고서저로 인해 한반도는 서쪽으로 길고 많은 강을 만들었지만 동쪽은 작은 하천에 불과할 정도로 열악하다. 




그러나 남쪽은 어떤가. 국내에서 두 번째로 긴 낙동강을 형성하고 있다.
금호강, 남강, 밀양강, 황강등 많은 샛강들이 합쳐져 525km를 쉼없이 달여와 여기 을숙도에서 바다와 만난다.
이름하여 낙동강하구, 아미산과 을숙도 가덕도를 연결하는 낙동강하구는 넓은 갯벌과 모래톱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솔개들의 날개 짓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해질녁 떨어지는 낙조 또한 이곳 아미산 전망대에서의 볼거리다.
하구를 형성하는 이곳에 모래톱으로 인해 크고 작은 자연섬을 만들었다. 흔히 삼각주라 한다. 진우도 장자도 백합등 대마등 신자도 맹금머리등 도요등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섬들로 지도에 등재되어 있으며 이곳 하구 을숙도를 위시한 낙동강의 자연환경이 철새들의 보금자리로 자라를 잡았다.
1966년 7월13일 낙동강하구는 천연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내도 부속섬들을 비교해 보세요.

 



아미산 전망대에 만들어 놓은 안내판으로 섬들의 이름과 지형을 대조해 보는 재미 또한 수월찮다.

*을숙도:1904년 제일 먼저 지형도에 등재되었다. 대파등 밭작물을 재배하였는데 1987년 낙동강하구가 건설되면서 두 개의 섬이든 일웅도와 을숙도가 합해져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지금은 생태계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맹금머리등:하구둑이 만들어지면서 생겨난 섬으로 장림쪽에 있는 어민들의 선박통행을 위하여 을숙도의 아랫부분인 십리등의 중간부분을 잘라 배수로를 만들었다. 삼각형 모양의 이곳에는 솔개, 참수리,,물수리등 맹금류가 서식하고 있어 맹금머리등으로 불린다.

*백합등:1955년 지형도에 등재, 백합조개가 많이 난다고 하여 얻은 이름으로 최근의 빠른 지형 변화로 인해 나무싯등과 연결되어 "ㄷ“형태를 하고 있다.

*대마등:1904년 지형도에 등재. 파밭으로 이용되었으나 철새보호를 위해 1996년 섬을 동서로 양분하여 물길을 만들었다.

*장자도:1916년 지형도에 등재. 모래섬으로 자연생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섬이다.

*신자도:1975년 지형도에 등재. 현재까지도 북서쪽으로 계속 커 나가는 섬이며, 여름철에는 쇠제비갈매기가 번식을 위해 찾아드는 섬이다. 하구에서는 동서로 길게 형성되어 태풍때는 선박등이 좌초를 하기도 한다.

*진우도:가덕도 옆 눌차도와 가장 가깝게 형성된 낙동강하구의 진주로도 불리는 섬으로 12.5km의 꽤 큰 덩치를 가지고있다. 북쪽 육지인 신호까지는 썰물때는 갯벌으로 걸어 갈 수 있다한다.

*도요등:막내둥이 섬으로 현재에도 덩치를 기우며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쇠제비갈매기의 주 번식지이다.

맨 왼쪽이 도요등, 그 우측 역U(유)자 모양의 섬이 백합등이다. 백합등 뒤로 진우도도 확인된다. 왼쪽의 산이 가덕도 연대봉이며 우측의 건물은 신호공단이다.

이곳 아미산 전망대는 낙동강하구의 부속섬들과 시베리아등에서 추위를 피해 날아든 철새들의 화려한 군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추천을 하며 이 겨울에 한번쯤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낙동강하구를 관찰할 수 있는 아미산 전망대 모습입니다.

정면의 백합등 모습입니다. 그리고 우측은 맹금머리등으로 서로 모래톱이 퇴적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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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자태실

국가 지정 사적제444호

위치=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번지

세종대왕자태실
 
선석산 아래 세종대왕자태실은 선석산 애래 위치한 이곳 태봉(胎峯 258.2m)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세종대왕의 장자 문종을 제외한 모든 왕자의 태실과 단종이 원손으로 있을 때 조성한 태실등 모두 19기가 모여 있다.




태실은 세종20(1438)년부터 24년 사이에 조성되었다. 석물은 화강암으로 사용을 하였어며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온전한 형체로 모습을 유지하며 남아 있다. 그러나 수양대군(세조)의 즉위에 반대한 금성대군 이외 네왕자는 현재 태실의 경우 사각형 기단만 남아 있고 비석과 기간위의 석물은 모두 파괴되어 권력암투에서 밀려난 세력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수양대군(세조)의 태실로 태봉으로 봉하고 앞에다 가봉비를 세웠다.

세조인 수양대군 태실의 경우에는 왕위에 오른 후 태실을 옮기지 않았다. 그것은 세종이 평소에도 형제들 간의 우예를 강조하였기예 세조는 태실을 옮기지 않고 그 대신 임금의 태실을 태봉으로 봉하고 앞에다 가봉비를 세웠다한다.

태실의 석물을 살펴보자.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지상으로 나온 맨 밑에는 사각형의 기단을 두었다. 그리고 그위에 편구형의 중동석을 올 였다. 맨 위에 보주형의 상륜을 가진 개천석을 올린 구조로 되어 있다. 기단석 아래 지하에는 편평한 판석형의 개석아래에 사각형의 석함을 둔 형태로 되어 있다.각 태실앞에 세워둔 태실비에는

전면에

(大)君名胎藏(우측)

皇明正統*年*月*日 입석(좌측)의 명문을 세로 2줄로 각자하여 태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하였다. 1977년 정비사업의 과정에서 도자기류 4점과 지석3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경주와 대구박물관 그리고 경북대학 박물관에 소장을 하고 있다.

태실을 오르는 산길 아래로 선석마을과 그리고 관광안내소 주차장, 뒤로 보이는 산이 선석산이다. 태실지를 감싸는 형국으로 좌청룡 우백호에 연꽃의 꽃술에 위치하는 천하의 명당자리라 한다.

태실지를 오르내리는 길은 소나무로 둘러져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을 한다고 관광 가이드분이 귀뜸을 해준다.

세종대왕태봉 가봉비문

태실구조도

세종대왕자태실 분포도




진양대군의 태실

단종의 태실로 끝에 구석에 따로 위치해 있다.
단종의 태실은 가천면의 태실지에서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을 하여 이곳으로 옮겼다하는데, 그래서 다른 태실의 석물에 비해 이끼가 전혀 끼지 않았다. 


왕자들의 태실



19기의 석물중 금성대군등 수양대군의 왕위즉위에 반대한 다섯왕자의 석물은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다.


왕자들의 태실



태실석물을 보면 지상으로 나온 맨 밑에는 사각형의 기단을 두었다. 그리고 그위에 편구형의 중동석을 올 였다. 맨 위에 보주형의 상륜을 가진 개천석을 올린 구조로 되어 있다. 기단석 아래 지하에는 편평한 판석형의 개석아래에 사각형의 석함을 둔 형태로 되어 있다.

태봉바위에서 본 태실이 안치되어 있는 태봉산으로 연꽃의 꽃술에 비유를 하는 명당

 
이자리에 올라 세종대왕자태실 자리를 잡았다하여 태봉바위로 불린다.

신라 효소왕1년(692)에 창건된 유서있는 사찰로 세종대왕자태실지 와는 500m 떨어져 있어 세종대왕자태실 수호사찰이다. 
세종대왕자태실지를 정리하고 인터넷에 탯줄을 검색하니 깜짝 놀랬습니다.
탯줄을 넣어 밀봉을 한후  도장을 만들어 준다는 업체가 있어서예...
세종대왕자태실도 지금쯤이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명당자리도 필요없고 각자 탯줄도장이나 탯줄 악세사리를 만들어서 몸에 지니고 다닐수 있어니까예. 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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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방문한 그날에는 이국적인 외국인이 자신의 모습을  도화지에 담고 있었다. 주위로 많은 시민과 관광객이 둘러 작품을 감상하는 진풍경을 연출하였다.

용두산 공원에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 처럼 미술의 거리가 생기다.

  부산에는 관광 활성화를 위한 명물 길이 여럿인다.
중구만 해도 백산기념관 앞의 백산길, 40계단 문화테마거리, 그리고 이번에는 용두산 공원 언저리에 미술의 거리를 오는 25일 개장을 앞두고 있다.
어릴적 용두산 공원은 부산타워만 바라보아도 뒤로 넘어갈 것 같은 어마어마한 부산의 상징건물이었다. 그 부산타워가 이제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미술의 거리로 말이다.
최근까지 개장 준비에 바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개장 준비를 끝내고 하여 관광객을 상대로 인물화 및 풍경화등을 그려주기도 하고 판매도 하였다.
미술 애호가나 시민들이 한번 쯤 가든 발길을 멈추고 작업장을 둘러 보기도 하고 화가들의 작품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하였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몽마르트의 언덕" 처럼 용두산 공원 미술의 거리가 시민과 관광객 함께 어울리는 예술의 마당이 되었서면 하는 바람이다.
미술의 거리에는  작업실 부스가 7개 들어서 있으며 공예품을 판매하는 부스를 따로 두고 있다.
개관은 평일인 화요일부터 일요일 오전까지 나와 작업을 하며 월요일은 휴관을 한다.

미술의 거리 모습입니다. 부스에는 제각각 작가의 의미를 담아 부스마다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미술의 거리는 이 용두산 공원의 빗돌 앞으로 계단을 내려서면 만날수 있습니다. 이계단이 광복로와 연결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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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철에는 전국의 산이 붉은 색으로 뒤 덮힌다.

설악산에서 내려 오는

단풍이 남으로 남하하여

지리산 칠선계곡 비선담

일원에도 붉른 빛을 토해 내고 있다.

어제 주말에 찾은 칠선계곡은

이제 단풍이 시작되는 단계이지만

올해 단풍은 가뭄이 심해 단풍이 붉게 물들기 전에

먼저 말라 버리는 현상으로

예년만 못할 것 같다.

그래도 계곡물에 비치는 붉은 단풍잎을 보니 모두 소녀처럼

들뜬 기분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선녀탕의 모습입니다.


10월 12일 벽송사의 단풍입니다. 조금씩 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풍은 사람에 따라 보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모든 것도 마찬가지지만 단풍도 한발 멀리서 보는 맛이
단풍감상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가까지서 보는 단풍은 너무 추한 이미지에 실망만 안고 만다. 벌레먹은 잎, 아니면 말라 비틀어져 있는 단풍잎그래도  단풍잎이 여러개 모여 빛을 받아 화려함을 뽐낼때가 단풍이 아름답다고 느끼는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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