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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뜻.서백당(書百堂).

 

우리 속담에 참을 인(忍)자 세번을 쓰면 살인도 면한다는 옛말이 있다. 아무리 밉고 죽이고 싶은 철천지 원수라도 기껏해야 忍자 세번으로 그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 진다고 하는데 그럼 매일 하루에 참을 인(忍)자 100번을 쓴다면 어찌 될까. 철천지 원수라도 33번은 살릴수 있다. 이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당호를 가진 곳이 있다. 경주 양동마을의 서백당으로 원래는 서인백(書忍百)이었다한다. 서인백의 유래를 보면 어느 해 중국에 9대가 한집안에 살았는데 왕이 이곳을 지나다 그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어찌 9대가 이리 한집에 살 수 있었냐고 물어니 그는 붓과 종이를 들고 오더니 참을 인(忍)자를 100번 쓴다음 임금에게  이러면 안될 것이 없다며 빙긋이 웃었다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 경주손씨 종택.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곳이 경주 양동마을의 서백당이다. 월성(현 경주)손씨 손소(1433년)~1484년)가 이곳에 처가 입향을 하면서 이곳에다 집을 지었는데 이곳이 월성손씨의 종택이다. 흔히종택은 어떤곳인가 종손은 문중을 위하여 자신은 버려야하는 무거운 자리다. 그럼 얼마나 많은 참을 인(忍)자를 가슴에 새겼는지 알 수있다. ㅎㅎ 뜬 구름 같은 이야기는 접어두고,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 물자형 명당..

 

양동마을에 있는 서백당에 대해 알아보자. 서백당의 입지는 양동마을을 감싸고 있는 설창산과 문장봉에서 뻗어 내려온 네줄기의 능선이 물(勿)자 형을 이루는 독특한 지형을 이룬다. 이는 양동마을 주차장이 있는 입구에서는 그 마을 존재 조차 보이지 않으며 안으로 들어서야만 양동마을의 모습이 들어나 온전하게 볼 수있는 물자형세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 3명의 현인 배출.

양동마을은 예로부터 이중환의 택리지와 일제강점기때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풍수에도 삼남의 4대 길지로 언급한 명당터로 알려져 있다. 손소는 세조2년에 서백당을 지을때 지관으로 부터 이곳의 지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곳을 정한것으로보여진다.  서백당이 있는 이곳은 혈이 모이는 지점으로 3명의 현인이 배출된다는 곳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 손중돈과 이언적 배출 또 한명은.

손소때에 벌써 두명의 현인이 태어 난것을 알 수 있다. 손소의 둘째 아들이 우재 손중돈(1463년~1529년)으로 정2품 의정부 우참잔의 벼슬에 올랐던 분이며 손소의 외손자며 손중돈의 생질인 동방5현의 회재 이언적이 또  한분이다.

 

 

사랑채와 내실을 가르는 작은 담장으로 왼쪽은 사랑채며 담장 오른쪽은 3명의 현인중 두명은 배출 되었지만 남은 한분은 반드시 월성손씨에서 배출 되어랴 한다며 며느리만 해산을 할 수 있다는 산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 550년 향나무 손소가 직접 심어.

아직도 월성손씨 종택에서는 한분의 현인이 태어날만을 학수 고대하고 있는데 이곳 서백당에서는 손씨의 며느리는 서백당의 산실에서 해산을 할 수 있지만 출가한 딸은 서백당의 산실에서 몸을 풀수 없다고 하며 몸을 풀러온 딸들은 이웃의 일가 친척집으로 내려 보낸다한다. 마지막 남은 현인 한분은 반드시 월성손씨에서 나와야 한다는 뜻이며 다른 문중에 빼앗길 수 없다는 것으로 보인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양동마을 서백당. 매일 참을 인자를 백번 쓴다는 서백당의 구조는.

서백당의 구조를 보면 먼저 한일자형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앞에 사랑채와 만난다. 사랑채와 연결되는 안채는 'ㅁ'자 형태를 취하며 오른쪽으로 손소를 모신 사당이 있다. 안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고 사랑채는 지붕의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사랑방과 잠을자는 침방이 대청을 두고 'ㄱ'자 모양으로 놓여 있다. 그리고 대청을 사이에 두고 사랑방과 작은 사랑방이 서로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작은 사랑방을 모서리쪽에 두었다. 툇마루가 작은 사랑방과 대청으로 연결된 점이 이채로우며  서백당 현판의 맞은 편에는 손소가 이 집을 짓고 기념하기 위해 직접 심었다는  550년된 향나무를 보며 월성손씨에게는 서백당의 존재가 어떠한지 알 수 있을 것다.

 

 

 

현재에는 안채 방향으로 가는 입구는 출입을 통제하는 바리게이트가 설치되어 있다. 양동마을의 여러 건물이 현재에도 그의 후손들이 함께 거쳐를 하고 있어 건물의 보존상태가 얼마나 양호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550년의 풍진 세월도 잘 견디며 이어온 건축물 서백당. 우화하며 화려한 것 같으면서도 단정한 여인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아름다운 고가의 모습이다.

 

 

 

 

 

 

세월의 때가 켜켜히 배어나오는 기둥과 마루에는 그 당시 손중돈과 이언적이 태어났을때의 븐주한 모습이 그려지며 지금 보고 있는 향나무를 그 당시 두 현인도 보았다고 생각하니 그  흔적을 찾아보며 서백당을 내려와 향단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월성손씨 며느리에게만 내어 준다는 산실.

 

 

 

 

 

 

 

 

 

 

 

 

 

 

 

 

 

 

 

 

 

양동아을 문화관에 있는 서백당 미니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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