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무더운 여름철에 생각나는 과일이 있습니다. 얼음을 잘게 쪼개어 화채로 만들어 먹으면 그야말로 오장육부가 얼어버릴 정도가 된다는 수박은 한 여름철 과일 중 단연 으뜸으로 칩니다.
그러나 어릴 적 추억에는 지금은 수박에 까만 씨가 별로 없지만, 그 당시에는 크지도 않은 수박을 쪼개면 까만 게 죽은 깨처럼 박혀 있었습니다. 수박 조각을 입 안에 넣으면 수박 반 씨가 반일 정도로 입에 꽉 차고 입안에서 오물오물하다가 마당에 따발총을 발사하곤 했는데 많은 수박씨는 참 성가신 존재였습니다.
그런 수박하면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씨 없는 수박하면 우리는 우장춘 박사님 하며 생각합니다. 1960년대 말에서 70대 초까지 필자가 다닌 초등학교는 부산시 동래구에 있는 온천초등학교였습니다. 그때 동래원예학교가 옆에 있었으며 ‘씨 없는 수박’의 우장춘 박사님 이야기를 들었고 자유천과 동상이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자유천
지난 주말 사직동 아시아드 경기장에 갔다가 40년이 넘은 어릴 적 추억을 더듬으며 우장춘 박사 유적지를 찾아갔습니다. 기억으로만 간직한 온천 초등학교 주변의 환경이 너무 많이 변해 어릴 적 그 황량했던 유적지의 기억을 일순간 까뭉개 버렸습니다. 그래도 자유 천과 작은 우장춘 기념관이 주택 사이에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어 엄청 반가웠습니다.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하신 분으로 여태 알고 있었는데 이번 방문으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인 기하라 히토시가 씨 없는 수박을 처음 개발했고 우장춘 박사는 1950년 일본에서 영구 귀국 후 만년 되어 있는 국산 신품종의 불신을 불식시키기 위해 씨 없는 수박을 재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하라 히토시는 우장춘 박사가 주창한 ‘종의 합성’ 이론을 기초로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할 수 있었다며 증언을 해 우장춘박사는 씨 없는 수박의 개발에 기초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국내 육종학의 선구자인 우장춘 박사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장춘 박사님은 부친 우범선(명성왕후 시해와 관련)과 모친인 일본인 사카이 나카 사이에 일본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유년기 조선인이라는 핍박과 집안의 어려운 환경 속에 일본 히로시마 현 구레의 중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도쿄 제국대학 농학부에 입학하며 4년 뒤인 1919년 졸업과 함께 일본 농림성의 농사 시험장에 근무합니다. 그곳에서 육종학 연구에 관한 2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육종학으로 세계적인 권위자가 됩니다.
광복과 함께 일본에서 들어오던 채소 종자가 중단되면서 국내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우장춘 박사를 귀국시켜 종자 산업 발전을 모색하였는데 박사님은 남은 생애를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 뼈를 묻을 것을 약속하며 1950년 귀국을 합니다. 3월 18일 동래원예학교에서 귀국환영식과 함께 고국에서 육종학을 더욱 발전시키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김치의 배추, 무 등의 채소와 과일 대부분이 그 당시 우장춘 박사님과 함께한 제자의 연구 결과로 이루어졌으며 그 이전의 채소와 과일 대부분은 지금 모습과는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합니다.
우장춘 기념관 야외에는 기와를 얹은 사각 건물이 있습니다. 자유천(慈乳泉)으로 불리는 우물입니다. 우물은 선생이 귀국 후인 1953년 일본에 계신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지만,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하고 그가 묵고 있는 원예 시험장에서 할 수 없이 어머니의 위령제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전국에서 조의금이 답지해 그 돈으로 선생님은 원예시험장과 지역민의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우물을 판 뒤 ‘자애로운 어머님의 젖과 같은 샘’의 뜻인 자유천으로 명명했으며 지금도 우물물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장춘박사는 타계직전인 1959년 8월 9일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정부로부터 받고 다음날 8월 10일 숨을 거두며 사회장으로 유해는 수원 농촌진흥청 내 여기산에 안장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죽기직전 까지도 볍씨 품종 개량에 힘써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쌀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시금석을 마련했습니다.
우장춘 박사 기념관은 박사 탄생 1백주년을 맞아 생전 연구를 했던 유적지가 남아 있는 동래구 온천2동 850-48번지에 1999년 10월 세워졌습니다. 300평의 대지에 지상2층 규모의 콘크리트 건물에 아담한 전시실을 꾸몄습니다. 야외에는 자유천과 우장춘박사의 흉상이 조경시설과 함께 잘 가꾸어져 도심 속의 정원을 연상시켰습니다.
그런데 필자가 방문하고 나오는데 연세 지긋한 마을 분의 하소연을 들었습니다. “명색이 우장춘박사 기념관이면 우박사가 육종개발에 힘쓴 채소와 과일 수는 보이지 않고 화려한 정원수만 가득 심겨 있노”며 불만을 토로하였고 그분의 뼈 있는 말이 일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우장춘박사 기념관은 워낙 외진 곳에 붙어 있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에 귀화를 하지 않고 우장춘이란 이름을 지켰고 퇴직 후 조국의 부름에 남은여생은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위해 살겠다며 귀국한 육종학의 선구자 우장춘 박사, 그분의 유적지가 부산시 동래구 온천2동에 있는 것을 부산시민도 모르는 분이 많습니다. 이번 주말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님의 유적지를 찾아보면 어떨까요? 우장춘 박사 기념관에서는 어린이를 위한 생활 과학 교실도 열고 있습니다.
◆우장춘박사 기념관 관람안내◆
★우장춘박사 기념관
★관람시간 :09:00~18:00
★정기휴관: 매주 월요일 휴관(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 휴관), 1월1일, 설날 추석날 연휴
부산 동래구와 연제구를 관통하는 온천천은 지금 벚꽃이 만개를 하여 꽃대궐 길입니다. 파란하늘과 온천천을 흐르는 맑은 물. 봄을 맞아 피어 난 꽃까지 함께 어울려 그야말로 꽃잔치를 벌리고 있습니다. 지난 3월28일 부터 꽃잎을 벌리기 시작한 벚꽃은 지금 최고의 화려함을 유지하며 4월5일 까지 온천천의 벚꽃이 절정을 이룰 것 같습니다.
아직 어디갈까며 벚꽃구경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면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은 온천천을 찾아 벚꽃 구경을 만끽하세요. 낮에는 갑자기 기온이 급상승하여 무척 많이 덥습니다. 그러나 강을 타고 오는 봄바람이 이른 더위도 식혀주고 편안한 휴식도 제공해 줍니다.
온천천 벚꽃의 규모가 강변을 따라 워낙 넓어 평일에는 많은 사람이 붐벼도 한적한 모습입니다. 봄나들이하기 좋은 온천천에 온천천벚꽃축제가 이번 주말까지 열린다합니다. 가벼운 봄나들이 하기 좋은 곳 온천천벚꽃축제 많이 많이 놀러 오세요.
예로 부터 우리나라에는 외세로 부터 많은 침입을 당하였다 . 그 중 우리에게 가장 참담함을 안겨준 전쟁이 임진년에 일어난 임진왜란(1592~1598)이다. 이이의 10만 양병설의상소도 무시하지만 않았서도 우리나라는 이런 참혹한 수모를 당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 당시 왜놈과 가까운 동래(지금의 부산)는 왜적의 침입을 막는다고 막아보지만 종과부적으로 왜적에게 짓밟혀 버리게 된다.
☞(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1592년 임진왜란 왜적에 놀라 박홍과 원균 성을 버리고 도망.
도요토미히데요시의 명령으로 4월13일 대장 '고니시 유키나와가'와 그의 사위 '소 요시토시'가 병력 1만8700명과 병선 700척을 이끌고 영도에 상륙을 하였다. 그 광경을 보고 놀래 자빠진 경상좌수사 '박홍'은 전투한번 치르지 않고 보유하고 있던 배를 수장시키고 식량창고에다 불을 지르고 도망을 치고 그와 덩달아 거제도 경상우수사 '원균'도 우수영을 부하장수에게 맏겨둔 후 혼자 살기위해 도망을 쳐 버리니 왜적은 손쉽게 부산진성으로 진격한다.
그때 부산진성을 지키고 있던 장수는 지금 초량로타리에 동상으로 모셔져 있는 부산진 첨사 '정발'장군이었다. 왜적이 정발장군에게 '명나라를 칠려고 하니 길을 내어 달라'는 말을 하였다. 정발은 단칼에 '내어줄 길이없다'며 일축하고 목숨을 걸고 군관민과 합세하여 끝까지 싸웠지만 정발장군은 적의 조총에 절명하시고 부산진성의 군관민 3000여명은 몰살하였다.
☞(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 송상현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며 순국.
그 후 4월15일 동래성으로 진격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은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문루에 올라 있었다. 이를 본 소서행장은 송상현에게 '싸울테면 나와서 싸우고 그렇치 않으면 길을 빌려 달라'고 하였다. 이에 장군은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 하며 군관민 모두 합세하여 장렬히 전사하게 된다.
☞(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지하철 공사중에 발견된 동래읍성 해자.
현재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지하에는 지하철 공사도중에 우연히 발견된 동래읍성 해자의 흔적을 전시하고 있다. 지하에서 발견된 동래읍성 해자의 흔적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 당시 동래읍성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알 수 있다. 한국판 킬링필드의 모습을 연상하게하는 동래읍성의 해자, 본성에서 약 30m 떨어져 땅을 1.7m~2.5m 파고 그 폭을 5m 정도로 돌을 쌓아 축조하였다. 지금 해자 내부에는 그 당시 참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칼에 베이거나 두개골에 구멍이 슝슝 뚫어진 인골과 칼, 화살촉, 목궁등 무기류가 해자에 그대로 묻혀 있는 모습으로 전시를 되고 있다.
☞(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
안내도의 기록을 보면 "그당시 일본의 기록인 '길야일기(吉野日記)'에는 여자던 아이들과 개, 고양이 할것없이 움직이며 피를 흘릴수 있는 모든 것들은 살해하였다고 되어 있다. 우리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희생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송상현 부사를 쫒아 성가운데로 모여든 백성들이 같은 시간에 피바다로 화하고 쌓인 시체 밑에 몸을 던져 천백명중에 한 두명이 삶을 보존할 정도였다하니 우리의 희생이 얼마나 많았는지,전쟁이 끝나고 생존자는 4월15일 이날에 친족의 제사를 지내고 통곡을 했다고 되어 있다."
☞(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동래읍성해자 자녀와 함께 역사 교육 장소.
그 분들의 원한이 뼈에 사무쳐 영혼이 구천에 떠도는 것일까. "임진왜란 후 17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은 '동래맹하유감'이라는 글에서 4월15일 새벽에 집집마다 곡 소리가 일어나 천지가 소슬하고 처참한 바람이 숲을 진동하기에 놀라서 나이 많은 아전에게 물으니 이날이 임진년 성이 함락된 날이라 하였다". 수안역 지하에 전시된 '동래읍성해자' 자녀와 함께 찾아 보세요. 역사교육과 함께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던져 지켜온 현장을 보여주어 자녀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가르쳐 주세요. 입장료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