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여행/계산성당)뾰쪽탑으로 불렸다는 대구 계산성당 찾아가기
1899년 12월 25일 봉헌 축성된 한국식 건축의 십자형 성당은 축성후 40일 만인 1900년 2월 4일 때마침 대구 지방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촛대가 넘어져 화재가 일어났다. 김보록 신부님은 그 해 2월10일에 다시 새로운 성전을 세우기 위한 계획을 발표하였고 파리외방선교회의 프와넬 신부님이 적화벽돌 구조의 계산성당을 설계를 하여 그 이듬해인 1901년에 성당 착공을 시작하였다. 그 당시 조선에는 양오집 짓는 기술자가 없어 중국의 건축 기술자가 성당 건축에 참여하였다.
12사도의 스테인드 글라스와 함석류등 그당시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건축자재는 불란스에 주문하여 들어오고 1902년 5월에 완공을 되었다. 계산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번째로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성당으로 유명하다.
현재의 계산 성당은 2개의 종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립 당시 두 개의 종은 서상돈 아우구스띠노와 정규옥의 부인 김젤마나가 기증을 하여 종의 이름도 아우구스띠노와 젤마나로 불려지고 있다.
1911년 주교좌성당이 되면서 종각을 두배 높이는 증축공사를 하여 계산성당 외각의 모습이 완성 되었다.
1991년 6월21일에는 1902년 성당 완공 후 처음으로 보수공사를 착공하여 1992년 8월14일 공사를 마쳤다. 이때 지붕의 함석을 동판으로 바꾸고 목재였던 바닥을 대리석으로 교체하였다. 현재의 창호에 스테인글라스등의 공사가 이루어져 오늘의 계산성당이 되었다한다. 건립당시 대구에서는 처음 세워진 서양식 건물로 두개의 종각 때문에 ‘뾰쪽탑’의 애칭을 얻었다. (워키백과 참조)
김보록신부님의 흉상
사적 제290호(1981년 지정)
소재지:대구중구 서성로 20(계산동2가)
소유자:대구교구천주교회유지재단
1950년 12월12일 계산성당에서 박정희 전대통령과 육영수여사의 결혼식이 열렸다. 주례사에서 "육영수군과 박정희양"으로 불려 식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며 계산성당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방문과 김수환 추기경이 이곳에서 사제 성품을 받았다.
성당 내부의 모습
성당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한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을 볼수 있다.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때 순교한 성인의 모습을 의미한다.
이인성 나무
이인성(1912~1950) 대구출신의 천재화가로 1930년대 그린 계산 성당의 배경이 된 나무로 현재 100년으로 추정하며 이인성나무로 이름 지어졌다.
1899년 한국형 건축양식으로 짓고 있는 십자형 계산성당 사진(계산성당 홈페이지 캡쳐)
1935년 계산 성당과 계산동 주위 모습(계산성당 홈페이지 캡쳐)
계산성당 찾아오는 길(계산성당 홈페이지 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