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 남산 감실부처 할매부처로 불리는 경주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
경주 남산을 지탱하는 바위는 모두 소홀히 취급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남산의 수많은 바위에 신라인의 숨결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경주 남산을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지붕 없는 박물관 또는 야외박물관이라 말합니다. 이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보 1점에다 수많은 문화재가 보물로 지정되었고 단일장소로서 남산은 가장 많은 문화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확인되지 않은 많은 문화재가 바위 속에서 세상에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는 말인데 경주 남산에서 유행하는 웃스게 소리가 있습니다. 발에 채는 돌멩이도 문화재 일줄 모르니까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시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문화재가 있나 싶어 ㅎㅎ 보물찾기하는 심정으로 경주 남산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번 경주 남산여행에서는 아직 가보지 못했던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입니다. 경주 남산 불곡마애여래좌상은 주변의 보리사 석조여래좌상과 탑곡 여래불상군이 골짜기를 달리하며 몰려 있습니다. 항상 보리사와 옥룡암의 불상은 여러 번 찾았으나 조금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불곡마애여래좌상은 좀체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터에 이번에 답사하게 되어 저에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감실에 모신 부처님은 여럿 있지만 바위를 조각한 석조불상과 바위면을 새긴 마애불에서 비해 상대적으로 그 숫자가 많지 않습니다. 하물며 경주 남산의 많은 부처님에서는 더 귀한 존재입니다. 경주 남산에서 만나는 감실 부처라는 신선암 마애불도 있지만, 이는 감실 흉내만 조금 낸 수준이라 한다면 불곡마애여래좌상은 온전하게 자연석을 1m 쯤 깊숙하게 파내고 그 안에다 돋을새김으로 1.42m 부처님을 조각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경주 남산의 감실부처는 남자가 아닌 여자의 모습입니다. 처음 불곡 마애여래좌상을 보고 “어! 우리 엄마내”하며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습니다. 진짜 엄마를 닮았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인 단아한 여인상인데 그 모습 때문인지 경주 남산 할매부처라는 애칭이 붙었습니다.
불곡 마애여래좌상의 제작 시기는 조금은 차이가 있지만, 선덕여왕 재위 때인 7세기 전반에 제작되었으며 감실부처의 모델은 신라 여인으로 보기도 하지만 일부에서는 선덕여왕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는 당시 여왕의 이미지와 함께 황룡사 구층목탑, 첨성대, 배동석불, 경주 남산 삼화령 애기부처 등 융성했던 신라불교 시기였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불곡 마애여래좌상을 보면 마음씨 좋으며 후덕한 엄마의 모습에 왜! 이제야 찾아왔는지 많이 후회되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뵙고 싶어 바위를 올랐습니다. 누구의 정성인지 모르겠지만 굵은 양초가 여러 개 불을 밝히며 꺼지지 않고 제 몸을 태우고 세상을 밝히는 게 꼭 할매 부처의 마음을 보는 듯했습니다.
할매부처의 머리부분은 두건이 귀부분을 덮은 듯 보였으며 둥근 얼굴에 눈은 돌하르방의 왕방울 같이 큼지막하게 표현했습니다. 어깨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옷은 양쪽 어깨에 걸친 통견입니다. 양손은 축 늘어진 소매 속에 서로 포개어 감춘 듯 보이며 부자연스러운 자세에서 발은 오른쪽만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할매부처는 고개를 살짝 숙인게 성당의 마리아상과도 모습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두 종교의 관점이 같아서인가봅니다. 감실부처는 감실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자연채광을 한 온화한 부처의 얼굴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는 하루해가 가장 낮게 비칠 때인 동지를 전후해서 불그레한 빛이 바위를 비추면 꼭 살아 움직이는 듯 따뜻한 피가 흘러 바위가 화색이 돌면서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온전한 부처님이 드러납니다.
이 감실 부처님으로 인해서 부처님이 계시는 골짜기를 뜻하는 불곡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경주 남산은 많은 부처님이 있습니다.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지만 그 이전의 고신라 부처는 몇분 남아 있지 않는데 그중에 감실할매부처는 고신라 부처로서 현재 남아 있는 초고령 부처님 중 한 분입니다. 경주 남산 여행에서 꼭 보고와야 할 부처님입니다.
이번에는 동남산 자락에서 필자가 처음 만나는 전 염불사지 삼층석탑입니다. 워낙 문화재가 많아 염불사지 삼층석탑은 따로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으며 절터인 염불사지만 사적 제31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전 염불사지 동탑
염불하면 다 아시지요.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외우는 독경 소리를 말합니다. 많은 사찰 이름에서 염불사는 사실 생소한데 이곳에는 삼국유사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어느 스님이 하루에 몇 번씩 시간을 정해 놓고 염불을 외우셨습니다. 그 소리가 서라벌 내 동서남북 360방 17만 호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목탁을 두드리며나무아미타불을 외우셨습니다. 매일 스님의 독경 소리를 듣다 보니 사람들은 그를 공경하게 되었고 스님을 염불사(念佛師)라 불렀습니다. 그 후 스님이 입적하자 흙으로 스님의 소상을 만들어 민장사(敏藏寺)에 모시게 되었고 스님이 목탁을 치며 나무아미타불을 외웠던 동남산 아래 피리사(避里寺)를 염불사(念佛寺)로 고쳐 부르며 스님의 극락왕생을 빌었습니다.”
전 염불사지 서탑
전 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모두 무너져 있었고 탑재는 도지동의 이거사지 삼층석탑의 1층 옥개석과 조합하여 1963년 불국동 구정광장에 삼층석탑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다 2008년 1월 염불사지 삼층석탑을 복원하고자 해체하였고 2007년 6월부터 시작된 복원작업은 2009년 1월에 동·서 쌍탑인 삼층석탑을 복원 완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서탑에는 사리장엄구를 봉안했던 사리함이 다른 석탑에서 볼 수 없는 2개가 들어 있었고 3층 탑신의 방형 사리공이 투공되고 탑재 등을 종합해보면 전 염불사지 삼층석탑은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경주 남산은 뚜껑없는 박물관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그만 큼 신라시대 문화재의 불상 석탑이 천년의 세월을 망각하며 오늘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 불상과 석탑이 세월의 무게앞에는 어쩔 수 없는지 올바른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을 찾기가 힘들정도이다. 불상은 불두가 달아나고 석탑은 해체되어 내가 석탑이었다며 그 흔적만 남아 있는 것도 부지기수다.
남산을 가다보면 해목령 삼화령등 고개가 현재에도 남아 있다. 삼화령은 신라시대때 부터 이용된 길로 서라벌에서 언양으로 이어지든 고갯길이다. 그 삼화령이 현재에도 우리가 이용을 하고 있는 임도길이라면 우리는 천년전의 시간여행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 삼화령. 삼화령의 연꽃대좌 전삼화령은...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일조를 올린 곳인 상서장에서 올라오면 안내판에 전삼화령 표지판이 있다. 삼화령과 전삼화령. 남산을 사이에 두고 두곳의 삼화령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 전삼화령인 이곳에서 삼화령 애기부처가 출토되어 이곳을 삼화령으로 보는 이도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 삼화령. 불국토는 경주 남산 삼화령의 연꽃대좌
그래서 앞에 전할전(傳)자를 붙혀 전삼화령이라 하지만 삼화령을 연꽃대좌가 있는 이곳으로 보는 이가 지배적이다. 삼화령 안내판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삼화령을 삼화수리라 하는데 수리의 뜻은 산정상 즉 봉우리를 말한다. 금오봉과 고위봉 그리고 이곳 연꽃대좌가 있는 곳을 말하며 남산을 불국토 즉 부처님 산으로 보고 세봉우리를 하나의 연꽃으로 비유한 것은 아닌지 그래서 삼화령이라 이름을 붙혔을까. 안내도에는 세개의 봉우리가 삼각형을 이룬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삼화령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 삼화령. 삼화령의 연꽃대좌 충담스님과 경덕왕의 전설...
경덕왕과 충담스님의 일화로 경덕왕은 덕망있는 스님을 찾아 가르침을 받고 왕사로 임명하려하지만 충담스님은 극구 사양을 한다. 경덕왕도 어쩔 수 없는지 스님에게 가르침으로 향가를 지어 달라고 하니 스님은 흔쾌히 허락을 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는데 "(중략)~임금은 임금같이 신하는 신하같이 백성은 백성같이 살면 나라는 태평을 지속한다"는 "안민가"로 자신의 할도리를 다하면 자연히 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이야기로 오늘남 귀감이 되는 대목이다. 이 얼마나 멋진 글인가.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 삼화령. 충담스님 삼화령의 연꽃대좌 미륵불에게 차를 공양...
요즘 정치인들을 위해 충담스님이 남긴 것이 아닐까. 충담스님은 이곳 삼화령 연꽃대좌의 부처님께 매년 3월3일과 9월9일날에 차를 공양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그럼 삼화령의 미륵부처는 어떤 연유로 이곳에 있게 된 것일까.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 삼화령. 삼화령의 연꽃대좌 미륵불의 전설 생의사는 어디에...
선덕여왕때로 올라간다. 어느날 생의스님의 꿈에 노승이 나타나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였다. 노승은 남산의 골짜기로 안내를 하면서 내가 이곳에 묻혀 있어니 나를 꺼내어 시원한 곳에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며 사라졌다. 스님은 그곳의 풀을 묶어 표시를 한 후 꿈에서 깨어 났다. 지난밤의 꿈이 하도 생생하여 그곳을 찾아가 보니 꿈속에서 묶어두었던 풀을 발견하고 흙을 파니 돌미륵이 나왔다.
생의스님은 미륵불을 현재의 연꽃대좌가 있는 이곳에 안치를 하고 공양을 위해 생의사를 지었는데 현재도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 연꽃대좌의 미륵불도 1941년인 일제강점기때는 상반신이 잘려나간 상태로 연꽃대좌위에 남아 있었다하며 그 후 1960년대 남산에 있는 지금의 임도를 개설하면서 종적을 감추었다전한다. 혹 누군가가 임도를 개설할때 트럭이 올라오고하니 그때 업어 간것은 아닌지...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 삼화령. 삼화령의 연꽃대좌 미륵불을 위한 가림막 설치...
지금 연꽃대좌를 보면 지름이 2m이며 미륵불을 보호하기 위해 지붕을 설치한 흔적으로 네 귀퉁이에 기둥을 세운 것으로 보여지는 홈이 남아 있다. 연꽃대좌 아래에는 충담스님이 차를 올렸던 곳으로 보여지는 편편한 곳이 아직도 남아 있다하니 천년전의 흔적을 지금도 볼 수 있다니 놀래지 않을 수 없다.
최치원은 868년인 문성왕때 약관 12세의 나이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7년만인18세에 귀국하여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를 하였다. 그러나 신라 말기의 조정은 그에게 그 어떤 것도 뜻을 펼칠 수 없어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란 상소문을 이곳 상서장에서올렸고 그것이 더욱 조정대신들로 부터 미운털이 되었다. 이에 40세에 그는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여행길을 오르는데 그의 행적을 보면 놀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부산 해운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여진다. 동백섬에 그의 호를 딴 해운대란 각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낙동강 하구였던 물금 임경대에서 그는 낙동강의 저녁노을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지리산 쌍계사 위 불일폭포에서 학을 불러 타고 다녔고 재임시에는 함양의 태수로 있으면서 상림숲을 조성하여 물난리 등 재난을 막기 위해 인공림을 조성하여 현재에도 그 덕을 후대에서 관광지로 덕 보고 있다.
말년에는 가야산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생활을 하며 짚신 한짝을 남겨두고 홀연히 학을 불러타고 신선이 되었다 한다. 현재 경주최씨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경주최씨는 원조 최소벌도리공의 24대 손이 최치원공이다.
이곳 상서장은 진성여왕에세 나랏일을 걱정하며 '시무십여조'를 올린곳으로 조선 순조 이후에 건립한 것이라 한다. 그만큼 최치원은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분으로 생각된다. 최치원은 신라말의 정치상황에 높은 학식과 능력을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산천을 떠돌며 여생을 마감한 최초의 풍운아가 최치운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46호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274번지로 서라벌 대로에 위치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전국의 사찰에는 원효의 전설이 없다면 사찰로서 대접을 못 받고 전국의 명승에는 고운 최치원의 전설이 없는 곳이 없는데 이를 보면 두분은 모두 신출귀물한 분이 아닌가 싶다.
현재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였다.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이곳 남쪽에 삼층석탑이 남아 있어 배반동 탑곡이라 불린다. 마애불상군 아래 큰바위에 그 당시 목조 건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으로 추측을 해보면 탑곡마애불상군의 남쪽면인 삼존불상을 주존으로 모신 것으로 여겨진다.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탑곡마애불상군의 명칭은 왜...
탑곡마애불상군은 탑곡마애조상군으로도 불린다. 높이 약9m. 넓이가 30m의 바위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곳 바위에 34점의 많은 불상군이 새겨져 있어 그리 부르고 있다.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탑곡마애불상군 북쪽면..
먼저 바위 앞으로 다가가면 정면에 보이는 바위가 북쪽면이다. 현재 이곳에는 9층탑과 7층탑이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그 중간에 석가여래가 연꽃위에 좌정을 하고 두 탑 앞에는 사자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마모가 심해서 본인의 눈으로는 사자인지 확인을 할 수 없었다.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동쪽바위면
중앙에 여래상을 새겼고 그 주위로 비천상 승려상 보살상 인왕상 나무등을 새겼다. 불상과 보살상등은 연꽃 무늬를 조각한 대좌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를 모두 갖추었다. 비천상은 하늘을 날고 승려는 불상과 보살에게 공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노출로 인해 자연 마모로 아쉬움이 많다.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남,서쪽바위면
남쪽면의 삼존불에는 여래상과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서쪽 바위면은 석가가 그 아래에 앉아 도를 깨우쳤다는 보리수 나무 두그루와 여래조상을 새겨 놓았다.
☞(경주남산여행)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조성시기
통일신라시대 마애불상군으로 이곳에서 신인사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나왔다. 8c에는 불상에 입가에만 옅은 미소가 나타나지만 이곳 불상군은 눈가에까지 옅은 미소가 표현 된 것으로 보아 7c 후반 통일신라시대때로 추정을 하며 신인사가 7c중엽 명랑스님에 의한 신인종의 종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