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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향교.

밀양향교는 고려 숙종5년인 1100년경 부북면 용지리에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602년 밀양부사 최기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와 다시 중건을 하였고
그 당시 건축된 건물로 남아 있는 곳은 대성전으로
향교 맨 뒤편 계단을 올라서면 굳게 문이 잠겨져 있어 내부를 볼 수가 없다.
공자와 저명한 학자를 모시는 대성전은 여타 향교와 다른 배치를 두고 있다.
향교는 전학후묘로 교육을 하는 건물은 앞쪽으로 배치를 하고
제례를 올리는 건축물은 뒤쪽으로 두는 것이 일반적인데 밀양향교는 교육기관과 제례의 건물을 동서로 나란히 배치를 하였다.

학문을 탐구하는 명륜당 좌우로 일상생활을 하는 동,서재를 두어 교육을 담당하며
대성전은 제례를 올리는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1820년 교궁이건기(校宮移建記) 기록을 보면 대성전의 위치가 낮아 큰 인물이 배출되지 않아
위치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으며 대성전 이외의 건물은 1821년 부사 이현시에 의해 중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밀양향교는 영남지방에서는 진주, 경주향교와 함께 규모면에서는 큰 향교이다.
정문의 풍화루를 비롯하여 부속건물들이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조선후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향교가 있다하여 교동으로 불리며 향교 주변에는 많은 양반들과 주민들이 마을을 이루는데 여기 밀양교동에고 밀성손씨 교동파가 세거를 이루어 마을을 형성하였다.







학문을 연마하는 명륜당
풍화루 내부 모습으로 밀양학교는 물론이고 전면으로는 마을의 모습과 아북산, 아동산, 밀양읍성의 모습과 왼편의 추화산도 볼 수 있는 곳에 위치를 하고 있다.



서재로 유생들의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공자와 성현들을 모시는 곳으로 1602년 건축된 건물인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 앞의 은행나무


 동재건물로 유생들의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찾아가는 길

밀양역 또는 밀양시외버스 터미널에서는 교동가는 시내버스가 자주 있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청도 밀양방면 좌회전을 하면 긴늪사거리로 직진을 하여 밀산교를 건너면 교동이다. 밀양향교는 도로를 따라 춘복을 지나 밀양시립박물관 앞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면 밀양향교 입구이다.
문의전화:055)354-5872,359-5637(문화관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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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봉사

신라시대 때 신라의 5대 명사찰 중 하나로 773년인 혜공왕9년에 법조라는 고승이 영남사 부속 암자로 창건을 하였는데 혜공왕이 법조로부터 받은 불은을 갚기 위해 가람을 짓고 무봉암으로 했다는 전설이 있다. 처음 출토 될 때는 불상 뒤의 광배, 대좌가 없던 상태로 영남사 터에서 나왔고 광배와 대좌도 인근에서 찾아 서로 맞추어 무봉사에 안치를 하였다. 석조여래좌상은 전체적으로 볼때 통일신라후기의 불상으로 보고 있다. 영남루가 있는 아동산은 흔히 무봉산으로도 부른다. 천년의 세월을 무봉사는 밀양시를 휘감고 나가는 밀양강에서 그 자리를 지켰다. 강물에 비치는 무봉사의 모습은 어떨까?. 주변의 영남루와 함께 무봉사는 많은 사람들로 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사찰이다. 밀양은 3대 신비가 있다. 남명리 얼음골의 시례빙곡, 나라의 변고를 알리는 땀흘리는 표충비와 만어사의 경석에서 나는 쇳(종)소리를 밀양의 3대 신비라 한다.  그러나 무봉사의 태극나비를 포함하여 밀양의 4대신비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무봉사는 석조여래좌상도 유명하지만 태극나비로 더욱 유명하다. 평소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만 이곳 무봉사에 나타난다, 이 나비는 날개에 태극문양이 있다 하며 현재 밀양시립박물관에서 그 나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무봉사 석조 여래좌상

보물 제493호 소재지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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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연정

월연정은 담양의 소쇄원과 필적할만한
조선시대의 정자로 양반들의 거처로 사용을 하는 정자로 지었다.
중앙정부의 관료에 등용되었다가
당파싸움에 염증을 느껴
모든 관직을 버리고 낙향을 하여
고향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정자를 짓는 일이다.


월연정은 기묘사화에 염증을 느낀 월연(1483~1536) 이태선생이 1520년에 모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월영사 터에 지은 정자인데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버린 것을 1757년에 그 후손인 이지복에 의해 중수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여러번 중수를 하였는데 월영대와 쌍경당은 작은 계곡에 걸린 다리를 두고 두 개권역으로 구분을 하였다. 좌측은 쌍경당과 우측은 월연대 누각으로 쌍청교를 두고 두 개권역을 하나로 합하여 놓았다. 주변의 자연을 잘 활용하여 지은 정자인 월연대는 작은 돌을 축대로 이용하여 기단을 높이 올려 정자를 만들었고 한칸의 작은 누각은 사방으로 작은 마루를 돌려 놓았다. 



강물과 달이 너무 맑아 마치 거울같다는 쌍경당과 그 옆 월연대 아래 “한림이공대”란 돌출된 바위에 한림학사를 지낸 이태선생이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강물에 비친 달이 너무나 투명하여 마치거울에서 보는 것 처럼 아름답다 느꼈을까?. 그래서 어지러은 정치판을 버리고 낙향하였던 것을 잘하였던 생각이라 하였을까. 밀양강을 보며 북천과 동천이 합하여 남천강을 이루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여생을 정리하였을까. 지금도 그곳 이공대 위에는 백골송으로 유명한 백송이 자리하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옛 백송은 죽고 그 뒤 뿌리에서 다시 올라온 백송이 늠름한 기상으로 월연정을 지키고 있다.

월연정 주위를 감싸고 있는 키 큰 소나무와 은행나무, 그리고 오죽등 하나하나가 월연정과 어울려 한폭의 동양화를 연출한다. 특히 베롱나무에 꽃이 필 때는 월연정은 더욱 아름다워 진다. 붉게 물든 월연정이 밀양강의 월연에 붉은 색 물을 뚝뚝 떨어트리기 때문이다.


월연대는 밀양를 대표하는  아름다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월연정, 재약산 억새, 시례호박소, 위양못 이팝나무,  종남산 진달래, 영남루 야경, 만어사 운해, 표충사 사계인 밀양8경중 4경으로 밀양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강건너 살내마을 강변유원지에서 바라본 월연정. 베롱나무에 꽃이 피면 더욱 월연정은 아름다움에 치를 떨것이다.

최근인 2006년에 만들어진 월연, 옛날의 월연은 밀양강인데 그 큰 아름다움을 담기에는 지금의 연못이 너무 작은 것은 아닌지... 




'똥개'의 용평터널
1905년 1월1일 개통된 경부선 열차로
개통될시에는 단선으로 열차가 달렸지만
그후 복선으로 바뀌면서 이설되어 터널만 남게 되었다.

현재는 자동차와 사람이 통행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폭이3~4m 길이가 400m로 차 한대가 겨우 다닐 수 있어
서로 입구에서 반대편 차를 확인하고 들어서야 한다.
터널속을 걸어가는데 차가 올시에는 한쪽에 붙어 차를 보내고 걸어면 되고
 터널은 중간에 하늘로 구멍이 뚫여 있어 두개의 터널로 이루어져 있다.
중간쯤에 오면 1905년의 그때 그모습인
돌과 천장에는 벽돌로 이루어져 옛모습을 옅볼 수 있다. 
그래서 이 터널을 용평터널 또는 백송터널이라 하기도 하며 최근에는 정우성의 '똥개' 전설의 고향등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단골 촬영지 이기도하다.






















쌍경당










월연대


쌍청교


월연정의 백송

찾아가는 길
밀양역 또는 밀양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영남루옆 내일동주민센타 앞에서 내려 밀양관원좌측에 주차된 마을버스를 이용한다.(2시간간격)
 승용차 이용시는 신대구부산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밀양톨게이트를 나와 청도,밀양방향 좌회전 후 긴늪사거리에서 직진하여 밀산교를 건넌후 바로 우측 안인리 방향으로 내려서서 좌측으로 굴다리를 통과한다. 직진을 하면 영천암표지석과 만나고 좌회전한후 작은 다리를 건너면 우측으로 오연정의 빗돌이 있고 모례마을을 지나면 용평터널, 터널을 빠져 나오면 바로 우측으로 월연정가는 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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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라는 이름이 생기기 이전 '영남'이라는 이름을 단 장소 가운데 국민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무엇일까. 물론 영남권, 영남지방 등의 광범위한 지역명을 제외하고 말이다. 추측건대 그것은 단연코 밀양의 '영남루(嶺南樓)'가 아닐까 싶다. 대한민국 건국 훨씬 이전인 조선시대 중반 이후부터 영남루는 진주 남강의 촉석루,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와 함께 '조선 3대 누각'으로 명성을 날렸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누각을 찾아 밀양강과 용두산 줄기, 종남산을 바라보며 시를 짓고 학문과 삶의 길, 정세 등을 논했다. 그래서일까. 영남루는 밀양 8경 가운데 으뜸인 제1경으로 불린다. 오늘날 영남루는 밀양 여행의 1번지로 자리잡았을 뿐 아니라 주변에 산재한 수많은 볼거리와 이야깃거리로 인해 더욱 많은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다.


◇ 밀양읍성 추화산성 너머 손씨 고택까지 가볍게 9㎞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단이 추화산으로 오르고 있다. 산성과 봉수대가 있는 추화산 오름길은 가파르긴 하지만 갈 지(之)자 모양의 옛길을 닮아 큰 힘 들이지 않아도 걸을 수 있다. 김성효 기자 kimsh@kookje.co.kr
이번 주는 지난주에 이어 제12-1코스 하편으로 영남루에서 시작해 밀양향교까지 가는 길을 엮었다. '하늘이 내린 축복의 땅'이라고 하는 밀양의 어제와 오늘을 흠뻑 느낄 수 있는 짧지만 알찬 걷기 코스다. 옛날부터 밀양 읍내를 지켜 온 두 개의 산성 성곽을 따라 걷기도 하고 천년고찰 무봉사와 조선시대 정절녀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아랑의 전설을 엿보기도 한다. 또 영남권의 대표적인 고택 마을인 교동 손씨 고택을 찾아 옛 사람들이 꾸며놓은 고건축물과 돌담길의 정취도 느낄 수 있어서 자녀들과 함께 걸어도 교육적으로 썩 괜찮은 길이다.

총거리는 9㎞ 남짓이고 순수하게 걷는 시간만 따지면 3시간 정도 걸린다. 하지만 영남루, 밀양관아, 아랑각, 무봉사, 밀양읍성, 추화산 봉수대와 산성, 충혼탑, 밀양시립박물관, 교동 손씨 고택, 향교까지 여유있게 찬찬히 둘러 보려면 5시간 정도 잡으면 넉넉하다.

   
밀양시 교동 손 씨 고택 마을의 흙돌담 골목길에 옛 정취가 물씬하다.
제12-1코스 상편의 종착점이었던 밀양교 부근 밀양시 내일동 영남루 앞에서 우선 밀양관아(密陽官衙)로 향한다. 북쪽으로 인도를 따라 3분쯤 가면 내일동사무소 건너편에 포졸 2명의 밀랍인형이 보초를 서는 밀양관아가 있다.


다시 영남루 입구 광장으로 돌아가서 영남루를 바라볼 때 오른쪽인 1시 방향 강변길로 내려선다. 석화(石花)와 아랑각을 먼저 본 후 영남루로 오르기 위해서다. 곧바로 석화가 나타난다. 동심원을 그리는 듯한 돌의 모양이 국화꽃을 닮았다고 해서 석화라 불리는 이 돌들은 영남루 경내 안팎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자연 현상이다. 석화 안내판 바로 옆에는 아랑각이 있다. 조선 명종 때 밀양 부사 윤 씨의 딸인 아랑이 영남루에 달구경 나왔다가 유모와 밀통한 괴한에게 겁탈당할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 자결했고, 그 이후 주민들은 그녀의 혼백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사당인 아랑사에는 영정이 모셔져 있고 왼쪽 쪽문으로 나가 보면 '사건의 현장'을 알려주는 비석이 있다. 지금도 밀양 최대의 축제인 '아랑제'가 열리고 있고 아랑아가씨까지 선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랑이 밀양에 미치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능히 짐작할 만하다.


◇ 아랑각 석화 천진궁 박시춘옛집까지 이야기거리 즐비

   
아동산이라고도 불리는 밀양읍성 성곽 위를 걷는 둘레길 개척단.
아랑각에서 계단을 오르면 왼쪽에 보물 제147호인 영남루가 보인다.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 찬찬히 건물도 돌아보고 남쪽의 밀양강과 일자봉(산성산) 용두산 줄기, 종남산 일대와 밀양시가지를 감상하노라면 신선이 따로 없다. 스피커에서는 지역의 민요인 '밀양아리랑'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영남루 뒤의 천진궁(天眞宮)을 둘러보고 밀양이 낳은 한국 가요계의 거목인 작곡가 박시춘 선생(1996년 작고) 생가 복원지도 돌아 본 후 무봉사(舞鳳寺)로 향한다. 신라 혜공왕 9년(773년) 법조 대사가 현재 영남루 자리에 있던 영남사의 부속 암자로 건립한 무봉사는 보물 제493호인 석조여래좌상도 유명하지만 '태극나비'로 더욱 유명하다. 날개에 태극무늬가 그려진 이 나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무봉사에서만 발견되는 것인데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만 나타난다고 전해온다. 표충비, 얼음골, 만어사 경석 등과 함께 '밀양 4대 신비'로 통한다.


   
밀양교에서 바라본 영남루 아래로 밀양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무봉사를 나와 일주문 우측의 샛길로 오르면 사명대사 동상을 만나고 조금 더 오르면 아동산에 위치한 밀양읍성이다. 사위가 탁 트인다. 날씨 맑은 날에는 동쪽의 영남알프스 능선까지 보인다. 성곽을 따라 올라 망루 겸 정자인 무봉대에서 심호흡을 한 후 동문고개다. 일단 도로를 건넌 후 오른쪽으로 30m쯤 가서 왼쪽 작은 마을 앞 공터 쪽으로 꺾는다. 샛길이 나오고 텃밭 우측 길을 따라 5분만 가면 다시 왕복4차로인 큰 도로를 만나는데 건너편에 '대공원' 방향을 가리키는 조그마한 이정표가 보인다. 오른쪽에 조금 떨어진 횡단보도를 건너 이정표에서 대공원 방향으로 산길을 탄다.

첫 갈림길에서 왼쪽 밀성 박씨 묘 방향으로 간 후 무덤 뒤 능선 갈림길에서 다시 왼쪽 길을 택한다. 공동묘지 옆 길을 따라 살짝 내리막을 걸으면 작은 임도 사거리가 나온다. 왼쪽에는 화장장, 직진하면 대공원 방향이지만 우측으로 임도를 따른다. 5분쯤 가면 수십 개의 둥치가 세월이 가면서 서로 엉겨붙은 것 같은 특이한 모양의 커다란 모과나무를 지난다. '밀양 독립운동의 선구자'로 불리는 을강 전홍표 선생의 묘소 안내판을 통과한다. 추화산성(推花山城)으로 오르는 길이다. 솔 향기 짙은 길을 따라 20분쯤 오르면 해발 240m인 추화산 정상 봉수대. 추화산은 신라시대에 이 산의 이름을 따서 밀양 일대를 추화군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지역의 역사와 함께 한 산이다. 특히 추화산성은 가야와 신라, 후백제와 신라 등이 서로 치열한 전투를 벌인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반증해 주는 유적이다. 봉수대에서 내려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산성을 한 바퀴 도는 길을 걷는다. 벤치 우측 길로 접어 들어 임도를 따라 5분쯤 가면 우측에 성곽 복원물이 있는 갈림길. 왼쪽으로 돌아서 계속 임도를 따른다. 10분 후 만나는 갈림길에서는 일단 왼쪽으로 100m쯤 올라가서 왼편에 있는 성내 우물을 본 후 다시 돌아온다. 우측 내리막을 따라 가면 영천암 입구 삼거리. 우측에 영천암이 있는데, 물 맛 좋은 샘터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인 백운사 범종이 있다.


◇ 박물관 독립운동기념관까지… 자녀 동반 코스로 적합


다시 삼거리로 돌아 나와 포장길을 따라 200m쯤 내려서면 왼쪽으로 살짝 벗어나는 흙길을 만난다. 포장길을 버리고 이 흙길을 택한다. 3분 후 무덤 몇 개가 있는 제사고개에서 내리막을 타면 7분 후 충혼탑. 최근에 완공된 이 충혼탑은 한국전쟁과 월남전 등에서 산화한 이 지역 출신 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곳이다. 충혼탑에서 5분 거리에 밀양시립박물관이 있다. 밀양에서 발굴된 선사시대 유적과 근현대의 유적들, 밀양 백중놀이를 비롯한 민속놀이, 약산 김원봉을 비롯한 항일독립투사들의 기록 등이 소중하게 전시돼 있는 곳이니 천천히 둘러볼 만하다. 박물관 앞 뜰에는 바닥분수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며 인근 어린이들의 여름철 놀이터 역할을 톡톡히 한다.



박물관 정면 도로 우측 사거리를 대각선으로 건넌 후 200m쯤 가면 교동 손 씨 고택에 닿는다. 우측의 운치 그윽한 돌담길을 따라 들어가면 크고 작은 고택들이 길손을 맞아준다. 그 중 '열두대문'이라는 한정식집으로 운영되고 있는 고가는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집으로 한 때 99칸에 달하는 대 저택이었다. 조선 숙종 때인 17세기 중반 손성증이 최초로 지었다고 전해온다. 손 씨 고가 뒤에는 밀양 향교가 있다. 1602년 건립된 밀양 향교는 대문 역할을 하는 풍화루(風化樓)와 대성전 등이 있는데, 크기가 유독 커서 경주향교 진주향교와 함께 영남 지역에서는 가장 큰 향교로 손꼽힌다. 이 향교로 인해 동네 이름도 교동이 됐다.



향교에서 바라봤을 때 오른쪽에 문이 있는데 이 문을 지나서 2분쯤 골목길을 걸어나오면 교동농협 앞 버스정류소다. 이곳에서 코스를 마무리한다.


# 교통편

- 밀양역에서 영남루 행 시내버스 수시로 있어

부산역에서 무궁화호나 새마을호 열차로 밀양역까지 간다. 무궁화호 첫 차는 오전5시10분에 있고 20~4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43분 소요, 3800원. 밀양역 앞에서 영남루 가는 시내버스는 수시로 있다. 1, 1-2, 5, 6번 등 다양하다. 10분 소요. 코스 종점인 교동농협앞 버스정류소에서도 밀양역 행 시내버스가 자주 있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에는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밀양 방면으로 24번 국도를 타고 긴늪사거리에서 직진, 밀산교를 건넌 후 표지판을 따라 영남루 앞으로 가면 된다.



# 떠나기 전에

- 답사 후 '똥개' 촬영지 삼문동 '추억의 거리' 가 볼만


'영남제일루'라고도 불리는 영남루는 원래 밀양의 손님들을 머무르게 했던 건물이다. 최초 건립은 고려 말인 1365년 밀양 군수 김주가 한 것으로 전해지며 이후 조선시대 들어 여러 차례 중건을 거치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1844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거대한 건물인 영남루는 좌우의 건물과 복도 또는 계단으로 연결돼 더욱 웅장하면서도 조화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특히 천정에 조각된 문양과 용의 몸통을 형상화 한 대들보, 용 그림, 네 귀퉁이의 남주작 북현무 좌청룡 우백호 그림 등이 모두 빼어난 예술 작품을 이룬다. 이 건물에 특히 용 조각과 그림이 많은 것은 옛날 사람들이 화재에 취약한 목조 건물을 화마로부터 지키기 위해 물과 가까운 용을 많이 이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믿거나 말거나' 속설도 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연인들이 영남루와 아랑각 일대에서 데이트를 하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속설 때문에 요즘도 젊은 연인들은 영남루에서는 데이트 하기를 꺼린다고 한다. 시집을 가지 못한 아랑 낭자의 심술때문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코스 탐방을 마치고 시간이 남는다면 영화 '똥개'의 주 촬영지인 삼문동 '추억의 거리'를 방문해 볼 만하다. 골목마다 1970년대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 밀양 천진궁의 영욕

- 역대 시조王 위패 모신 성소, 일제가 헌병대 감옥으로 악용
- 독립운동가·우국지사 고초 겪어
- 광복 후 밀양시민 노력으로 천진궁으로 이름바꾸고 복원


   
경남 유형문화재 제 117호로 지정된 밀양시 소재 천진궁.
밀양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영남루. 이곳을 방문하면 반드시 보게 되는 또 하나의 오래된 건축물이 하나 있다. 영남루와 뒷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는 천진궁(天眞宮)이 바로 그것이다. 1665년(조선 현종 6년)에 건립됐으며 현재 경남 유형문화재 제117호로 지정된 천진궁 건물은 우리 민족이 건설했던 역대 국가 시조 왕들의 위패를 모셨던 성스러운 곳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치욕적인 수모를 겪는 등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당초 이 건물은 시조 왕들의 위패를 모신 공진관(拱振館)의 부속 건물이었다가 1722년부터 공진관을 대신해 위패를 모신 사당 겸 객사 건물로 이용됐다고 한다.

위패의 배치는 남쪽을 향해 봤을 때 중앙에 민족의 시조왕인 단군왕검의 위패를 두고 왼쪽 벽에 부여와 고구려, 가야 시조왕과 고려 태조의 위패를 봉안했다. 또 오른쪽 벽에는 발해와 백제 신라의 시조왕 및 조선 태조의 위패를 둔 성스러운 장소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 일본의 행패가 시작되면서 수난을 겪게 된다.

조선을 침략하고 강제로 이 땅을 빼앗은 일본 측은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말살하기 위해 이곳에 모셔져 있던 역대 시조왕들의 위패를 지하 땅에 묻어버리고 헌병대 감옥으로 이용한 것이다. 숱한 우국지사와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고초를 겪었음은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광복 이후 공진관의 복원을 위한 밀양 시민들의 노력이 펼쳐졌다. 그리고 1957년에 건물 이름을 천진궁으로 바꾸고 정문을 만덕문으로 지어 시조왕들의 위패를 다시 모심으로써 민족 정통성 확립을 위한 노력이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된다. 대리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가진 주심포식 건물인 천진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웅장한 위상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건물의 건축적 의미를 떠나 일제에 의한 고난의 역사를 되새기는 것 또한 둘레길을 걷는 이의 의무가 아닐까 싶다. 매년 봄에 어천대제(음력 3월15일), 가을에는 개천대제(음력 10월3일)가 열린다.

한편 영남루와 밀양읍성 망루 사이에 있는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생가 복원지 안내판을 읽다 보면 또 하나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914년에 태어나 1996년 작고할 때까지 애수의 소야곡, 전우야 잘자라,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한국인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감정을 달래 준 숱한 명곡을 남긴 박 씨지만 '친일 작곡가'라는 오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에 작곡한 아들의 혈서, 목단강 편지, 결사대의 안해, 혈서지원 등 단 4곡의 노래로 인해 2005년 9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 인사 명단 발표 때 그의 이름이 포함됐다. 한국 가요계의 거목으로서 대중가요 작곡가 최초로 1982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을 서훈받기도 한 그였지만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천진궁을 코앞에 둔 그의 옛집 앞에 서면 누구라도 착잡한 심정을 가눌 수 없을 것이다.

주말레저팀 (051)500-5169 이창우 개척단장 010-3563-0254

  • 이승렬 기자 bungs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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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연정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15호

    소재지;경상남도 밀양시 교동

    동창천과 청도천이 만나 밀양강을 이루는데 상동의 빈지소를 지나 빚어 놓은 정자가 오연정이다. 밀양시 교동의 밀성손씨 큰집인 오연정은 추천 손영제(1521~1588)가 명종때 문신으로 사헌부지평, 성균관전적등의 벼슬에 올랐고 예안 현감때는 퇴계이황에게 정치와 학문적으로 서로 많은 의견을 나누는 사제지간이었다. 예안현감 재임시 도산서원 건립에도 힘을 보태었다. 그 후 고향으로 낙향을 하여 지은 별서 건물로 추천은 밀양강의 북천 추화산 언덕배기에 아담한 정자를 짓고 오연정이라 하였다. 정자앞의 북천을 추천강이라 부르고 오연정이 서 있는 그 아래를 오연이라 불렀다. 

    상동의 북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산외면의 동천에서 돌아오는 강바람에 오연의 강물은 춤을 추고 추화산에 드리워진 노거수는 오연정의 자취를 감추어 유심히 보지 않으면 찾을 수 가 없다. 오연정을 오르는 길은 좌우로 느티나무, 소나무의 사열을 받으면서 올라선다. 짙은 나무 그림자에 의해 따가운 여름의 햇살도 차고 들어오지 못할 것 같으며 그속에 있는 오연정이 운치 또한 있다. 입구에는 수백년은 됨직한 키큰 은행나무가   출입문을 지키고 그 문을 들어서면 'ㄷ'자형의 관리를 위한 건물이 자리한다. 중문에는 자물쇠가 걸려 있고 그 문을 들어서면 먼저 넓은 앞뜰의 정원이 나타난다. 잔듸의 푸르름과 누각앞의 배롱나무가 녹색으로 치장을 하고 2층의 누각건물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편의 드라마속 사극의 전경이다. 뒤쪽으로 돌아가면 우측 한켠에 심어진 단풍나무가 가을에는 오연정과 어우러저 멋스러움을 더 할 것 같다.



    건물은 임진왜란때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다시 중건을 하였지만  1717년 다시 화재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다. 1771년 추천의 8세손인 행남 손갑동에 의해 다시 중건을 하였다. 순조때는 경내에 모례서원을 두었는데 고종때인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서원은 훼철되고 오연정만 남았다. 1935년 다시 화재로 인해 일부 불타버린 것을
    1936년 복원을 하였다. 그때의 위치 보다 조금 더 올려 후손들에 의해 더욱 확장을 하였고 1997년에 와 추천의 문중과 당국이 대대적인 보수를 하여 현재 정비가 가장 잘된 정자중 하나이다.
     
    ‘ㄱ'자 형의 돌출부에 누마루를 두었고 누마루 뒤와 맨 우측으로 온돌방을 넣었다. 문이 달린 중앙의 2칸은 대청마루를 넣었다. 사실 밖에서 보면 대청과 방이 구분이 안갈 정도로 문이 붙어 있으며 전면으로는 ’ㄱ'자형이만 뒷면은 ‘1’자형으로 뒤와 우측 누마루 쪽으로 작은 마루를 돌려 놓아 앞면과 뒷면이 구분이 안갈 정도로 우수한 건축물이다. 1930년대 건축물이지만 조선후기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모례서원 서원터
    오연으로 연못안에 오리들만 꽥꽥 하고 다니고 있다.

    찾아가는 길
    밀양역 또는 밀양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영남루옆 내일동주민센타 앞에서 내려 밀양관원좌측에 주차된 마을버스를 이용한다.(2시간간격)
     승용차 이용시는 신대구부산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밀양톨게이트를 나와 청도,밀양방향 좌회전 후 긴늪사거리에서 직진하여 밀산교를 건넌후 바로 우측 안인리 방향으로 내려서서 좌측으로 굴다리를 통과한다. 직진을 하면 영천암표지석과 만나고 좌회전한후 작은 다리를 건너면 우측으로 오연정의 빗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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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시당백곡재(今是當, 栢谷齋)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28호

    소재지:경남 밀양시 활성동 582-1

    금시당은 금시당 이광진(1513~1566)선생이 만년에 내려와 몸과 마음을 닦고 학문을 연구하며 수양을 하기 위해 1566년에 창건을 한 별업이다.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생활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 보니
    그의 결정이 옳았다는 뜻의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와 금시당,
    뒤로는 일자봉(산성산)이 둘러처져 있고
    그 우측으로 용의 능선이 내려가고 좌측으로는 범의 머리가 내려 가는 호두산 즉 범머리산 아래 위치를 하고 있다.
    마을 주민인 이곳 여주이씨 후손에게 물어보니
    버머리깡과 범설이란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용과 범이 서로 엉켜 있는 일명 용쟁호투를 연상케 한다.
    금시당의 안고 있는 위치 또한 범이 입을 벌리고 있는 위치에 있다.




    지형도를 들여다 보면 틀림없는 범의 형상을 하고 있어 선인들의 통찰역을 볼 수 있다.
    금시당 앞으로는 넓은 밀양강을 안고 있는데
    남천 또는 응천이라하며
    위로는 북천과 동천강이 서로 만나는 월연정이 자리하고
    밑으로는 용머리가 용두연의 물을 들이키고 있서 가히 밀양의 절경이라 일컫는다.



    금시당은 조선조명종때 좌승지를 지낸분으로

    창건 당시의 건물은 임진왜란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영조20년인 1744년에 그의 5대 후손인 백곡 이지운 선생이
    임진왜란때 불타버린 것을 다시 복원을 하였다 한다.
    그후 그의 후손들이 1867년에 와 문중들의 뜻을 모아
    원래 건물을 해체하고 크게 중수를 하여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정면 4칸 측면2칸의 금시당은 소로수장의 팔작형 지붕을 올렸고
    좌우로 개방된 마루와 온돌방을 2칸식 넣었다.


    그 좌측 백곡재는 조선 영조때 재야의 선비로 이름을 알렸던
    교남처사 백곡 이지운(1681~1763) 선생을 추모하여
    문중들에 의해 건립된 재사건물이다.
    건물의 크기와 모양은 금시당과 비슷하나
    마루와 온돌을 서로 반대로 배치를 하였다.
    백곡재 바로 앞에 120년이 넘었다는 금시매와 정원의 백송
    우측 쪽문 옆으로는 금시당 이광진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440년 된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이광진선생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

    금시당건물




    백곡재건물

    금시당과 백곡재그리고 백송과 배롱나무의 모습





    찾아가는 길
    밀양역 또는 밀양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영남루옆 내일동주민센타 앞에서 내려 밀양관원좌측에 주차된 마을버스를 이용한다.(2시간간격)
     승용차 이용시는 신대구부산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밀양톨게이트를 나와 청도,밀양방향 좌회전 후 긴늪사거리에서 직진하여 밀산교를 건넌후 바로 우측 안인리 방향으로 내려서서 좌측으로 굴다리를 통과한다. 직진을 하면 영천암표지석과 만나고 좌회전한후 모례마을을 통과 백송(용평)터널을 통과한후 심경루누각 앞 왼쪽 용활교를 건너 금시당 표지판인 우측으로 따라가면 된다. 
    문화관광과 055-359-5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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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알프스둘레길 12-1코스)밀양 월영정 금시당  영남루. 비밀의 정원 밀양시 영남알프스 둘레길 12-1 상코스

    근교산&그너머 <727> 제12-1코스(상) : 밀양 남기리 정려각~내일동 밀양교

     밀양강변 '비밀의 정원'들 … 마침내 빗장 열다




     
    경남 밀양은 흔히 시가지보다 외곽 지역의 여러 명소들이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표충사 천황산 재약산 얼음골 호박소 등. 상대적으로 밀양 시가지의 보석 같은 명소들은 외지인들에게 미답의 공간으로 남아 있다. 한자 뜻 그대로 풀이하자면 '비밀스러운 양지'를 뜻하는 밀양(密陽)이 뜻하지 않게 숨겨 두었던, 그러나 엄연히 그 빼어난 존재감을 속으로 갈무리하며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는 숨은 진주 같은 곳을 찾아가는 일은 영남알프스 둘레길을 걷는 둘레꾼들에게는 좀처럼 잊히기 힘든 경험이 될 것이다. "아, 밀양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이것 역시 영남알프스 자락의 힘인가"라고 되뇌며 경탄하게 되리라. 밀양 시가지가 꼭꼭 숨겨 두었던 '비밀의 화원'으로 가는 코스를 엮었다. 밀양의 속살과 가슴 떨리는 접촉을 시도한 것이다. 그 속에서 아름다운 정자와 정원, 희귀 노거수와 백송(白松·일명 백골송, 흰 소나무), 그리고 꿈결 같은 산책로를 만나며 정녕 아름다운 경험을 했다는 희열에 몸을 떨었다.






    ■ 12.5㎞ 짧은 구간 볼거리 많아 5시간 잡아야 넉넉

     
      건물 배치, 풍경과의 조화, 분위기 등 여러 측면에서 담양 소쇄원과 쌍벽을 이룬다는 조선시대 정원 월연정. 영남알프스 둘레길 밀양 8경의 하나이기도 한 월연정을 둘러보고 있다. 오른쪽 작은 돌다리는 쌍청교다.
    출발은 제12코스의 종착지였던 산외면 남기리 정문마을 창녕 장씨 정려각(旌閭閣) 앞에서 한다. 긴늪솔밭유원지를 거쳐 밀산교를 건너고 이어서 오연정(鼇淵亭)~용평터널(일명 백송터널)~월연정(月淵亭)~용호정(龍湖亭) 심경루(心鏡樓)~살내마을 정자나무~금시당 백곡재(今是堂 栢谷齋)~일자봉 산책로~용두취입보~팔각정~천경사~용두교~소나무거리숲~밀양교까지 이어지는 총12.5㎞의 길이다. 순수하게 걷는 시간은 3시간30분 정도지만, 하도 볼거리가 많아서 걸음이 느려진다. 5시간 이상 여유를 잡고 걸으면 좋다. 사실 서두를 일도 없지 않은가. 걷는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이 바로 천천히 가면서 자세히 보고 느끼며 평정심 속에서 감동을 쌓는 것일 테니까.

    정문마을 정려각에서 긴늪유원지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10분 후 새 국도아래 굴다리를 통과하면 눈앞에 긴늪솔밭(일명 기회송림)이 보인다. 100m쯤 가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입구가 있다. 전도연 주연의 영화 '밀양' 촬영지라는 입간판이 보인다. 긴늪솔밭은 100여 년 전부터 기회마을 주민들이 방풍림으로 조성하기 시작한 것. 이제는 수천 그루의 우람한 솔밭으로 변모해 지역민들의 큰 사랑을 받는 유원지가 됐다. 1970~1980년대에는 기업체 야유회나 계모임 나들이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오연정의 전면)
     
      GPX & GTM 파일 / 고도표 jpg파일
    긴늪사거리에서 밀양 시가지 방향인 왼쪽 밀산교를 건넌다. 발밑에 밀양강이 흐른다. 왼쪽 가까이 보이는 산은 산성이 있는 추화산이다. 다리를 건널 때는 왼편 갓길을 이용하자. 다리가 끝나자마자 왼쪽 추화산 방향으로 내려선다. 블루베리농장 앞 사거리에서 직진한다. 곧이어 추화산 아래 T자 갈림길. 우측에는 영천암 표지석이 있지만 왼쪽으로 간다. 2분 후 이번 코스에서 만나는 첫 번째 정자인 오연정 입구다. 오른쪽 언덕으로 오른다. 우거진 소나무와 느티나무 밑을 지나는 길. 짙은 녹음이 내뿜는 청정 산소가 코를 간질인다. 오연정은 조선 명종 때 문신인 추천(鄒川) 손영제(1521~1588)가 낙향해서 지은 정자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8세기에 다시 지었다. 본당 건물은 'ㄱ자' 형태로 왼쪽에 누마루를 내고 본체의 앞과 뒤에 같은 폭만큼 마루를 설치했다. 앞뜰에는 배롱나무, 뒤뜰에는 단풍나무가 운치를 더한다. 누마루에서 보면 밀양강 물줄기가 유유히 흐르고 멀리로는 영남알프스 산줄기가 강을 함께 달린다. 오연정 울타리 뒤에는 모례서원 유허비가 있다.

     
      추화산 자락에 자리잡은 오연정. 누마루와 배롱나무가 조화를 이룬다.
    다시 오연정 입구로 복귀, 길을 이어가면 10분 후 모례마을 버스정류소를 지나 일제강점기 때 경부선 철로로도 사용됐던 용평터널 입구에 닿는다. 길이 300m 너비 4m 안팎의 좁은 터널로 차량도 다니기 때문에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 일명 백송터널로도 불리는 이 터널을 나서면 정우성이 주연한 곽경택 감독의 영화 '똥개' 촬영 기념 입간판이 있다.

    (월연정의 모습)
    영화 촬영 기념 입간판 왼쪽으로 걸어서 강을 따라 들어가면 월연정이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과 쌍벽을 이룰 만큼 아름다운 조선시대 정원으로 평가받는 곳이다. 가운데 작은 개울에 놓인 쌍청교를 중심으로 왼쪽은 쌍경당, 우측은 월연대다. 월연대 앞에는 국내에서 보기 힘든 희귀종인 백송이 밀양강을 내려보며 자라고 있다. 흰색 비늘 같은 껍질을 가진 이 나무는 원래 중국이 본산지다. 조선 초기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하면서 그 씨를 가져와서 국내에 심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월연정에는 백송 외에도 오죽(烏竹), 행단 등 희귀한 나무가 많아서 그 분위기를 더 심오하게 한다.


    ■ 오연정 월연정 용평터널 금시당… 밀양 숨은 명소 거쳐

     
      왼쪽부터 월연정 백송, 금시당 은행나무, 금시당과 백송.
    터널 출구로 돌아와서 길을 이어간다. 우측 용호정, 심경루를 지나서 왼쪽의 활성교를 건넌다. 강 건너엔 야트막한 산성산 줄기. 밀양 시가지에서 보면 한일(一)자처럼 보인다고 해서 일자봉이라고 불리는 산이다. 다리 건너 갈림길. 금시당 가는 방향은 오른쪽이지만 일단 왼쪽으로 간다. 강마을 식당을 지나 우측 살내마을로 들어선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 고가교인 금시교 아래를 통과하면 눈앞에 어른 다섯 아름이나 되는 거대한 둥치의 느티나무를 만난다. 사실 이 나무를 보려고 일부러 이 마을에 들른 것이다. 영남알프스 둘레길에서 만난 수많은 노거수 중 둥치의 굵기로만 따질 때 이 나무가 단연 으뜸이기 때문이다.

    다시 고속도로 밑 '금시교' 안내판까지 돌아간 후 왼쪽으로 간다. 고속도로를 머리 위에 이고 가는 길이다. 곧바로 작은 사거리에서 철조망 사잇길로 직진. 강물을 만나면 왼쪽으로 틀어 금시당으로 향한다. 5분 후 환상적인 금시당 산책로가 시작된다. 조선 명종 때 승지를 지낸 금시당 이광진(1513~1566)이 만년에 지은 정자인 금시당이 있다. 주변의 울울창창한 소나무뿐 아니라 '암새들'을 굽어도는 밀양강 물줄기를 내려다보는 고택의 배치 역시 호젓한 분위기를 북돋운다. 금시당에는 이광진이 1566년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 450년이 넘는 이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돼 있는데, 가을 어느 날 황금빛 잎을 번쩍이다가 어느 순간 털어내고 또 한 겹의 나이테를 두를 테다. 문이 잠겨 있는 경우가 많은데 왼쪽으로 돌아가면 담장 너머로 경내를 볼 수 있다. 뜰에는 은행나무뿐 아니라 배롱나무가 있고, 그 유명한 금시당 금시매화도 낮은 담장만큼이나 낮게 서 있다.

    (월연정)
     
      금시당에서 팔각정으로 가는 산책로는 밀양이 자랑하는 명품길이다.
    금시당 뒤에서 산성산(일자봉)으로 직접 오르는 등산로와 강줄기를 따라 팔각정까지 가는 1.8㎞ 길이의 산책로로 갈라지는데, 평편한 산책로를 따른다. '환상적'이라는 표현으로는 모두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호젓한 길이다. 달콤한 꿈속의 길 같다. 밀양 시내 주민들이 첫손에 꼽는 산책로이기도 한 이 길은 소나무와 아카시아, 참나무, 화살촉을 만드는데 사용됐다는 대나무 등이 울창하게 늘어서 있다. 오른쪽 아래에 밀양강을 끼고 돌아가는 길목마다 김남주의 '고목', 서정주의 '꽃', 천상병의 '강물' 등 서정성 뛰어난 명시(名詩)들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 밀양강 따라 가는 일자봉 산책로 환상적 분위기에 매료

     
      밀양시 활성동 살내마을의 노거수. 어른 다섯 명이 안을 만큼 굵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밑을 통과하고 기도터를 지나 호젓한 산책로가 좀 더 이어진 후 갈림길이다. 일단 오른쪽 내리막 계단을 타고 내려가서 용두취입보 보고 다시 올라오면 우측에 곧바로 팔각정 매점이 있다. 팔각정을 지나면 곧바로 천경사 입구. 오른쪽으로 내려서는 계단길을 따른다. 3분이면 강가에 닿는다.

    (월연정)
    강변을 따라나가면 경부선 철로 밑을 통과하고 강을 가로지르는 3중 보를 잇따라 지나 용두교를 건넌다. 다리 건너 밀양사회복지관 앞에서 우측으로 틀어 강둑길을 걷는다. 강둑이 왼쪽으로 꺾어질 즈음, 강 건너에서 봤던 송림으로 내려선다. 지난 2002년 제3회 전국 아름다운 숲 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차지한 '소나무거리 숲'이다. 강가에는 지역 출신의 이재금(1941~1977) 시인의 시비가 서 있다. 그의 작품인 '도래재'가 새겨져 있는데, 그의 밀양 사랑이 절절히 녹아 있다.

    소나무길을 통과하면 강 건너에 밀양읍성과 무봉사, 영남루가 보인다. 둔치를 따라가다가 영남루 맞은편에 앉아 강물에 비친 거대한 누각의 그림자를 본다. 밀양교를 건너면 오늘 코스의 종점이다.

    (금시당백굑제)
    ◆ 교통편

    - 밀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정문마을 행 버스 30분 간격

     
      밀양 영남루 건너편 고수부지에 있는 소나무거리숲.
    부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밀양역으로 간다. 무궁화호는 오전 5시10분 첫차를 시작으로 20~4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43분 소요, 운임은 3800원. 밀양역에서 밀양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한 뒤, 정문마을행 새마을버스 또는 얼음골 표충사행 직행버스를 이용한다. 새마을버스는 오전 6시10분부터 약 30분 간격으로 있고 직행버스도 7시05분부터 약 20~4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린 뒤 밀양 방향으로 가다가 첫번째 사거리인 긴늪사거리에서 좌회전, 200m쯤 가다가 다시 좌회전 굴다리를 통과해 우측으로 2분쯤 가면 남기리 정문마을회관앞에 닿는다. 정려각은 50m쯤 떨어져 있다.


    # 일제가 건설한 터널과 보 아직도 사용중


     
      일제가 경부선 철로용으로 건설한 용평터널. 폐선된 지금은 사람과 자동차가 다닌다(왼쪽). 용두취입보 전경.
    이번 주 밀양 시가지 길에서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는 두 곳을 지난다. 첫 번째가 한때 경부선 철로로 사용됐던 용평터널(일명 백송터널)이고 또 하나는 용두산 팔각정 아래에 있는 '용두취입보'다. 둘 다 100년이 지난 유산들이다.

    월연정 인근에 위치한 용평터널은 1905년 경부선 철길이 개통될 당시에 일본인들의 설계 하에 건설된 철로용 터널이다. 35년 동안 서울과 부산을 오가던 열차의 길로 역할을 다했지만 1940년 선로 복선화가 이뤄지면서 인근에 새 터널이 뚫리자 도보용 터널로 바뀌었다. 길이는 약 300m이고 높이 4~5m, 너비 3.5~4m 규모인 용평터널은 현재는 사람과 자동차가 이용하고 있다. 특히 차량은 교행이 안되기 때문에 멀리서 보고 반대편에서 한 대가 진입하면 이쪽에서 대기했다가 지나가야 한다. 걸을 때도 차량을 피하기 위해 한쪽 벽에 바짝 붙어야 한다. 그런데 이 벽면 중 일부는 106년 전 건설 당시 때부터 유지돼 온 것으로 보이는 화강암이 그대로 남아 있고 천장에도 벽돌로 마감을 처리한 흔적이 남아 있어 고풍스러움을 풍긴다.

    터널의 구조도 특이하다. 전체가 하나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중간에는 자연절벽과 뻥 뚫린 하늘이 있어 굳이 따지자면 두 개로 나뉘어 있는 셈이다. 이곳을 지날 때면 짙은 녹음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어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연출한다. 그래서 일부 사진작가들에게는 출사지로 인기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곽경택 감독은 월연정 들머리 방향의 터널 앞에서 인기 배우 정우성을 내세워 영화 똥개를 촬영하기도 했다.

    또 다른 일제강점기의 흔적인 '용두취입보'는 비록 일본인의 구상과 설계로 건설된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 원래의 목적대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인상 깊은 곳이다.


    현재 이 용두취입보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한국농어촌공사 밀양지사에 따르면 이 관개시설은 1909년 일본인 마쓰시타 데이지로가 구상해서 만들어낸 자연유화식 인공 터널 수로다. 밀양강에 보를 만들고 용두산 아래로 터널을 뚫어 물길을 낸 다음 산줄기 건너편 멀리 있는 상남면 일대 예림리 등 4개 마을 592㏊의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에서 건설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도 이 수로는 이들 지역의 농사를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보석 같은 수리시설 역할을 한다. 전체 수로의 길이는 6438m이고 산 아래를 관통하는 터널의 길이만 433m에 달한다.

    (금시당의 모습으로 금시당 이광진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낙향하여 있는 것 즉 현재 자신의 처신이 옳았다는 뜻이 금시당이다)
    농어촌공사 밀양지사 관계자는 "요즘에는 펌프를 통해서 낮은 지대의 물을 끌어 올리는 등의 방법으로 농업용수를 댈 수도 있지만 100여 년 전에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면서 "그렇다 하더라도 표고차를 이용해 밀양강의 물을 산 밑으로 연결해 농업용수를 공급하겠다고 구상하고 그것을 실행한 것을 보면 지금 입장에서 봐도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용평터널이나 이 용두취입보는 모두 일본인들의 설계와 구상으로 건설돼서 일면 유용하게 사용됐거나 현재도 사용 중이지만 그 터널들을 뚫기 위해 동원됐을 한국인 인부들의 아픔을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애잔한 마음도 지울 수 없다. 일제의 유산이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해서도 안되겠지만, 그 속에 배여 있는 조상들의 아픔까지 잊어서는 안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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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이승렬 기자 bungse@kookje.co.kr




    교동의 오연정은 전면으로는 ㄱ자 형태의 돌출된 마루를 넣었고 뒷면에도 일자형의 마루를 넣어 어느쪽이 전면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아름다운 누각이다. 추천손영제가 지은 정자로 경남문화재자료 제215호이다.(사진은 뒷면의 모습)








     지형도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어떤 모습의 동물을 상상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있는 호랑이의 모습을 연상할 것이다.
    실제로 살내마을에서도 뒷산을 범의 얼굴로 생각을 하여 용과 호랑이가 서로 엉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생각을 한다
    그래서 살내마을 우측능선 끝부분을 범의 머리로 마을에서는 버머리깡이라 부르며 그 윗부분을 범설이라 부른다고 마을분이 이야기를 하였다. 일명호두산으로 불리며 그 앞으로 흐르는 천이 호랑이가 물을 뿜는 형상이라 호분탄이라 부른다.

    긴늪유원지유래석

    긴늪유원지

    긴늪유유ㅓㄴ지 앞의 북천으로 마을에서는 밀양강이 아닌 북천으로 부른다. 산외방향에서 내려오는 하천은 동천이라 부르며 두 물줄기가 합하는 곳에 월연정이 있다.





    월영정의 백송

    금시당의은행나무

    오연정 입구

    살내마을의 당산나무로 느티나무껄이라 부르며 400년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북천과 동천이 서로 만나는 월연으로 그 뒤로 운문지맥의 끝부분인 비학산 보담산 낙화산 중산능선이 펼쳐진다. 그 안의 골짜기가 엄광리로 영남알프스 둘레길 12코스이다.

    밀양손씨의 용호정

    용두산과 그아래 용두연의 모습





    금시당 산책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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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남기리 정려각과 가곡리 민씨 정려각. 정절과 정려각, 옛길을 가다 만난 슬픈 이야기


    시골의 옛마을을 찾다보면은 마을 어귀에 효자각 또는 열녀각을 가끔 만난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비각은 그 마을의 자랑이며
    그 마을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 같아 마을 주민들의 자긍심 또한 대단하다.
    그래서 인지 시골 농촌을 찾아가는 길손 또한 그곳을 지날 때 면
    옷깃을 여미고 마음가짐을 자연히 새롭게 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밀양에는 충과 효를 숭상하는 양반골로 마을 마을마다 자긍심이 하늘을 찌른다.
    그래서인지 경부고속도로도 마을을 통과하면 시끄럽다고
    밀양박씨와 손씨 문중등 밀양을 대표하는 문중들이 반대를 하여 경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와
    한일합섬등 공장들이 들어올려고 해도 조용히 살고 싶다고 반대를 하여 마산으로 갔다는 이야기등
    밀양은 그만큼 자존심을 가지고 사는 도시이다.



     

     그래서인지 효자와 열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분들의 이야기 또한 많이 전해온다.
    상동면과 산외면은 능선을 하나 두고 각각 열녀각이 하나씩 서 있다.
    모두 임진왜란때 정절을 지키기 위해 투신한 분들이다.
    산외면 남기리 입구에는 정문마을이 있다.
    이마을 이름도 정려각에서 따왔다.
    밀양손씨 손기후의 처인 창원장씨로 친정인 창원에 있을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변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월영대에서 뛰어내려 정절을 지켰다한다.




    창원장씨 열녀각은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어
    안을 보니 좌우 앞면에 사군자인 매화, 난초,국화, 대나무
    그리고 소나무가 그려져 있어 더욱 숙연한 마음이다






    가곡리의 민씨 정려각 또한 박희량의 부인이자
    삼매당 밀양박씨인 민구서의 딸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마을로 왜구들이 들이닥치자 뒷산 바위굴로 피신을 하였다 한다.
    왜구들이 그곳까지 따라오자
    민씨 부인은 화를 피하기 위해 바위에서 몸을 던지니
    마을에서는 한송이의 꽃잎이 떨어졌다하여
    낙화암이라 부르며 그 봉우리를 낙화듬으로 현재 부르고 있다.



    내가곡마을의 전경과 마을 뒤의 낙화듬돠 정상아래 바위가 민씨부인이 투신 하였다는 낙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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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알프스둘레길 12코스)고정리 박연졀~남기리정려각. 초록  융단 깔린 밀양 옛길 영남알프스둘레길 12코스

    근교산&그너머 <726> 제12코스 : 밀양 고정리 박연정~남기리 정려각

    밀양 옛길에 초록 융단 깔렸네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단이 길을 연결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은 길' 취급당하는 옛길을 찾아내고 그 길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자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길도 살리고 그 길을 걷는 사람도 활력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지 않는 길은 곧 '죽은 길'에 지나지 않지만 사람이 그 길을 다시 이용하게 되면 길은 길로서의 생명력을 회복한다. 복잡하고 메마른 길에 지친 현대인들은 자연의 일부이면서 숲의 향기와 옛사람들의 발자취가 가득한 옛길을 걸어 봄으로써 심신의 휴식을 취하고 또 다른 생명의 기운을 얻게 된다.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첫발을 내디뎠던 개척단이 울산 경주 청도 지역을 두루 거쳐 어느새 경남 밀양 땅으로 들어섰다. 그동안 되도록 걷기 좋고 한적한 옛길을 찾아내서 이 길들을 연결함으로써 도보꾼들에게 걷기 여행의 참맛을 느끼게 하고자 노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주 답사한 제12코스 역시 밀양 사람들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는 옛길을 따라가는 길이다. 이 길에는 왜군들로부터 정절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지역 부녀자들의 애틋함과 일제강점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던 항일독립투사들의 저항정신이 녹아 있다. 그리고 옛길을 따라가면서 간간이 초현대식 길의 대명사인 고속도로(신대구부산고속도로)를 만나고 최신형 길의 위 아래를 통과하거나 나란히 걸으면서 옛길과 오늘의 길을 비교하며 걸을 수 있기도 하다.


    ◇ 매화 고정리 등 산골 주민 밀양장 가던 길 14㎞ 코스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단이 경남 밀양시 상동면 가곡리에서 산외면 엄광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의 호젓함을 만끽하고 있다. 신작로가 뚫리기 전 수많은 인마의 주통로였던 이 고갯길도 머잖아 활력을 되찾을 것이다.
    제12코스는 경남 밀양시 상동면 고정리 모정마을의 박연정(博淵亭)에서 출발해 산외면 남기리 정문마을의 창녕 장씨 정려각(旌閭閣)까지 가는 총거리 14㎞ 구간이다. 순수하게 걷는 시간만 4시간20분, 휴식 포함 5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줄곧 영남알프스 산줄기인 운문지맥의 끝자락에 위치한 낙화산 보담산 비학산 등을 보면서 걷다가 기어코 이 산줄기를 넘게 된다.

    바위 절벽인 수어대(數漁臺) 아래 있는 박연정에서 큰길을 버리고 모정마을 쪽으로 길을 잡는다. 곧이어 4분 후 양무공 김태허의 가묘터를 지난다. 모정마을 방향으로 걷다 보면 정면 고답마을 뒤에 낙화산(626m)이 우뚝 솟았고 모정마을 뒤에는 일명 '뒷말리성', '작은 하늘 방우산' 등으로도 불리는 소천봉(632m)도 눈에 들어온다. 모정마을은 노진촌(盧津村)으로도 불리는데, 동창천을 일명 '노진강'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마을의 옛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한때는 일대에서 중심이 된 마을이기도 하다. 아니, 고정리 전체가 경부선 철도와 신작로가 뚫리기 이전까지 밀양 상동면의 면소재지이자 중심 마을이었다.

    모정마을 복지회관에서 우측으로 꺾어 100m쯤 가면 당산나무가 있다. 당산나무 앞 버스정류소를 우측에 두고 계속 직진, 들판길을 걷는다. 300m쯤 가면 들판 한가운데 사거리. 왼쪽 고답마을로 향한다. 작은 연못을 지나 마을 앞 아스팔트 도로에 닿을 무렵 우측 20m 지점에 승용차 한 대 크기의 바위가 있다. 고답마을 칠성바위 중 하나다. 마을에 산재해 있는 북두칠성의 모양을 닮은 칠성바위는 그 기원을 알 수는 없지만 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속설이 전해온다. 특히 부녀자가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게 된다고 한다.

    아스팔트 도로 작은 사거리에서 용황사 표지판을 보며 좌회전, 100m쯤 가면 오른쪽 밭 안에 약산 김원봉 백민 황상규 등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자취가 밴 옛 고명학교 터 있다. 아무 표식이 없으니 개척단이 부착해 놓은 노란색 안내리본을 보고 접근해야 한다.


    ◇ 옛 고명학교터 칠성바위 당산나무… 고정리 볼거리 가득

     
      GPX & GTM 파일 / 고도표 jpg파일
    고명학교 터에서 사거리로 되돌아간 후 왼쪽 '오르풀' 방향으로 살짝 들어가면 나머지 칠성바위 들도 이곳저곳에 눈에 띈다. 주택 마당에도 있고 논바닥에도 있다.

    오르풀의 칠성바위를 본 후 다시 마을 앞 사거리로 복귀, 왼쪽으로 꺾어 아스팔트길을 따른다. 노란색 씀바귀꽃이 싱그럽다. 고답버스정류소 앞 갈림길에서 왼쪽 골목으로 오른다. 자두밭을 통과한 후 만나는 쌍무덤에서 우측으로 꺾어 들어가면 포구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들이 고답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다. 그늘이 짙고 넓어서 더운 날 걷는 도보여행자들에게는 썩 훌륭한 쉼터가 되겠다. 무덤으로 되돌아간 후 첫 번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내려서면 특이한 구조의 이층 한옥을 지나 아스팔트 도로에 닿는다. 왼쪽으로 꺾어 가면 달성 서씨 재실인 경선재(景先齋)가 있고 곧바로 모정초등학교 교적비를 지난다. 44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도시화에 따른 이농현상의 파도를 넘지 못해 1995년 폐교된 사실을 기록한 이 교적비에 동문들의 안타까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 가지산서 시작된 운문지맥 끝자락 넘는 숲길 호젓

     
      보담산 낙화산 중산 석이바위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엄광리를 감싼다.
    50m쯤 가면 갈림길. 왼쪽 골안마을 쪽으로 간다. 신작로가 뚫리기 전까지 매화리 신곡리 고정리 도곡리 등 상동면 4개리 사람들이 밀양장을 오가던 옛길을 찾아가는 길이다. 15분 후 골안마을 표지석 앞 갈림길에서 우측 오르막으로 간다. 바람에 실려오는 아카시아꽃 향기가 참 달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가 눈앞에 펼쳐지고 곧바로 굴다리를 통과한 후 왼쪽 오르막을 잡는다. 옛길과 새길이 평행선을 그리며 함께 달린다. 7분 후 은행나무 앞 갈림길에서 콘크리트길을 버리고 우측 비포장 임도를 따른다. 길바닥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10분 후 갈림길에서 왼쪽 길로 좀 더 오르면 능선에 닿는다. 여기서 우측으로 꺾어 20m쯤 가면 움푹 파인 고개다. 일명 고답고개 또는 비암고개로 불리는 곳이다. 왼쪽 내리막을 탄다. 무덤 언저리에 은방울 은대난초 금대난초 등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6~7분쯤 내려가면 왼쪽 개울의 물맛이 시원하고 달콤하다. 곧이어 작은 계곡을 건너면 다시 눈 앞에 고속도로가 펼쳐진다. 고정1터널이라는 도로표지판도 눈에 띈다. 왼쪽에는 보담산 오른쪽에는 고속도로를 끼고 가다가 굴다리를 통과하면 가곡리 비암골의 가곡저수지다. 이곳 주변에는 한국전쟁 때까지 비암마을이 있었는데 전쟁 중에 없어지고 지금은 마을 흔적만 남아 있다. 저수지는 주변에서 민물낚시터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동네 이름까지 숲촌이라 짓게 만든 밀양 엄광리 숲촌마을 회화나무숲.
    저수지 왼쪽 길을 따라가다가 둑 못미쳐 중간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길을 잡는다. 살짝 언덕을 넘는데 오른쪽 산 정상부에 가파른 절벽이 보인다. 그 바위가 일명 '낙화암(落花岩)'이다. 임진왜란 당시 밀양 박씨의 부인 여흥 민씨가 왜군들로부터 화를 당하지 않으려고 투신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가건물 앞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오르면 10분 후 공동묘지를 통과하고 곧이어 운문지맥 마루금에 닿는다. 일명 공동산고개다. 왼쪽으로 능선만 타고 가면 보두산 낙화산 중산을 거쳐 운문산 가지산까지 갈 수 있다. 일단 살짝 올라섰다가 곧바로 우측 비학산 쪽으로 능선을 탄다. 150m쯤 가면 다시 한번 고개에 닿는다. 부산의 원로 산꾼이자 국제신문 '가고싶은 근교산' 2대 산행대장인 최남준 선생의 트레이드 마크인 '준·희' 푯말이 보인다.

    능선길을 버리고 왼쪽 내리막을 택한다. 산외면 엄광리로 내려서는 이 길은 그윽한 숲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호젓한 길이다. 10분 후 눈앞이 탁 트이며 엄광리 일대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보담산 낙화산 중산 석이바위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과 동쪽 서쪽이 모두 산줄기에 싸였고 남쪽만 뚫려 있는 지세의 엄광리는 박연구 삼호산업 대표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형제의 고향이기도 하다.


    ◇ 회화나무 빼곡한 엄광리 숲촌숲 훌륭한 쉼터 역할


    엄광리 숲촌 마을은 마을 앞 숲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골목에 마실 나온 동네 할머니 세 분이 개척단을 반갑게 맞아준다. 시원한 보리차 한 잔 마시고 가라며 집 냉장고의 물을 꺼내 와서 건네주는 할머니의 인정스러움이 고맙기만 하다. 골목길을 통과해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고속도로 교각 못 미친 곳에 멋진 소나무 7그루가 있는데, 그 앞에서 왼쪽으로 엄남천 잠수교를 건너 숲촌숲으로 간다. 100년을 넘게 산 회나무와 단풍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는 체육공원 겸 쉼터다. 점점 더워지는 계절에 도보꾼들이 쉬었다가 가기에 참 좋은 장소다.

    숲 쉼터에서 조금 전 건넌 잠수교 왼쪽으로 하천을 따른다. 교각 아래를 통과하고 10분 후 만나는 작은 다리 앞 사거리에서도 직진한다. 엄남천을 우측에 끼고 걷는 둑길이다. 왼쪽의 보리밭 너머 저편에 꾀꼬리봉이 보인다. 엄남교를 건너 계속 직진해서 내려가면 남기리 남가동 마을회관을 지나 옛 국도에 닿는다. T자 갈림길인 이곳에서 우측으로 틀어 100여m만 가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로부터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열부(烈夫) 창녕 장씨 정려각 앞에 닿는다. 12코스의 종착점이다. 운문지맥이 끝나는 곳이기도 하다.


    # 떠나기 전에

    - 임진왜란때 정절 지킨 두 부인 애틋한 뜻 기려

     
      남기리 창녕 장씨 정려각(왼쪽). 가곡리 여흥 민씨 정려각.
    둘레길 제12코스 구간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정절을 지킨 부인 2명의 흔적을 만난다. 그 중 하나는 코스 종착점인 밀양시 산외면 남기리 정문마을의 창녕 장씨 정려각(旌閭閣)이다. 밀성 손씨인 손기후의 처인 장씨는 왜란 당시 친정인 창원에 갔다가 그곳에서 왜군에게 화를 당할 위기에 처하자 창원 월영대에서 뛰어내려 부도를 지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문(旌門)'이라는 동네 이름도 바로 이 정려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또 다른 열부인 여흥 민씨 정려각은 제12코스 구간에서 살짝 비켜 있다. 밀양IC인근 긴늪사거리에서 25번 국도를 타고 차량으로 출발지인 박연정 방향으로 가다보면 상동역 못 미친 곳에 가곡리가 있는데 국도 변에 그를 기리는 정려각이 세워져 있다. 밀양 박씨인 박희량의 부인이자 삼매당 민구서의 딸인 민 씨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마을을 침범해 오자 마을 뒷산 동굴로 몸을 피했지만 결국 벼랑을 타고 추격해 온 왜군들로부터 몸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내려 정절을 지켰다. 그녀가 뛰어내린 정려각 뒷산을 낙화봉 또는 낙화듬이라하고 그 바위를 낙화암이라고 한다. 걷기를 시작하기 전이나 후에 여흥 민씨 정려각도 한번쯤 찾아가 볼만하다.


    # 교통편

    - 부산역 오전 7시45분 출발 무궁화호 타면 딱 좋아

    부산역에서 밀양 상동역까지 가는 무궁화호 열차는 오전 7시45분에 출발한다. 요금 4100원. 오전 8시40분 상동역에 내리면 신곡리행 새마을버스가 오전 9시05분에 출발하기 때문에 이 버스를 이용해 고정리 박연정 앞까지 간다. 이 버스는 밀양버스터미널에서 오전 8시50분 출발한다. 상동역 인근에서 택시를 이용해도 된다. 요금은 5000원 안팎이다. 둘레길 순례를 마친 후에는 산외면 남기리 정문마을에서 밀양역 또는 밀양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운행되기 때문에 편리하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밀양 방면으로 24번 국도를 탔다가 곧바로 긴늪사거리에서 청도 방향으로 우회전, 25번 국도를 탄다. 상동역을 지난 후 상동교 앞에서 다리를 건너지 말고 직진, 고정 매화 방향으로 10분만 가면 박연정 앞에 도착한다. 답사를 마친 후 차량 회수를 하려면 종점인 정문마을에서 콜택시(055-356-6000, 355-5000)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요금 1만2000원 안팎.


    # 비운의 항일 영웅 김원봉 장군을 아십니까

    - 의열단 결성 단장 맡았던 항일투사
    - 남한 단독정부 반대해 월북 후 숙청

     
      김원봉 장군이 다닌 밀양 고명학교의 터. 지금은 과수원 밭으로 변해 흔적도 없다.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낙화산이다.
    "김원봉 장군이 돌아왔다. 만세 만세. 김원봉 장군 만세. 대한 독립 만세."

    1946년의 어느 날. 당시 밀양 읍내 시가지가 밀양은 물론이고 주변 경남 지역에서 운집한 20만여 명의 함성과 만세 소리로 들끓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밀양이 낳은 불세출의 항일독립운동가인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의 수십 년만의 귀향 환영식 참석을 위해서였다. 당시 밀양국민학교 행사장 주변에는 그가 밟을 수 있도록 광목 카펫이 깔릴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광복군 부사령관, 조선의용대 대장 등을 역임한 그였으니 '장군'이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았다. 망명 항일독립운동가 가운데 백범 김구와 유일하게 쌍벽을 이룬 대표적인 독립투사였던 그였다. 그러나 요즘 중고생들을 붙잡고 물어보라. 백범 김구는 알아도 약산 김원봉을 아는 학생은 거의 없다.

    약산 김원봉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리고 왜 잊혀야만 했을까.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 경찰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항일무장테러조직인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하고 단장을 맡았던 민족의 영웅이었다. 의열단은 23차례가 넘는 일본 요인 암살 및 주요 기관 폭파 등의 의거를 감행한 극강의 항일투쟁단체로서 나라 잃을 설움에 빠져있던 국민의 타들어가는 가슴을 적셔주는 단비와 같은 조직이었다. 그랬으니 김원봉에 대한 당시 국민들의 성원과 기대감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고명학교터로 답사당시 나를 가이드 해준 할머니)
    해방 후 3개월 만에 그는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군무부장 자격으로 귀국했다. 그의 부인이자 부산 동래여고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박차정 여사가 1944년 이국땅에서 숨진 지 갓 1년여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는 부인 박 여사의 유해를 안고 돌아와 밀양에 묻었다.

    그러나 그는 해방 후 돌아온 고국에서 오히려 더 큰 시련과 수모를 겪게 된다. 미국의 비호 아래 이승만이 주도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이데올로기에 휘둘리지 않는 영세 중립국을 표방하는 남북합작 자주독립국 건설을 주장하면서 우익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괴롭힘을 당했다. 그가 존경했던 몽양 여운형이 1947년 암살당하는가 하면 그 자신도 친일경찰 출신 경찰에게 붙잡혀 뺨을 맞는 등 수모를 당하고 암살의 위협까지 높아지자 결국 김일성의 초청으로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회의에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했다가 혼자만 북에 남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진 월북한 사람으로 취급됐고 북한 정권 초기 검열상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 등을 거쳤지만 1958년께 연안파 숙청 당시 함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족의 영웅이었지만 남북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했던 비극적 인물이 바로 약산 김원봉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일컬어 "일제강점기 조선이 낳은 '최고의 별'이자 '가장 비극적인 영웅'"이라고 묘사한다.

    둘레길을 걸으며 방문한 옛 고명학교터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길은 없다. 1907년 개교한 이 학교에 다닐 무렵 의협심 강하고 용맹했던 김원봉은 일장기를 변소에 처박아 넣는 등의 기개를 떨쳤다고 전해지지만 이제는 학교 터마저 희미하다. 그냥 평범한 과수원 밭의 일부로 쓸쓸히 방치돼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일제 당국은 이 학교를 문제학교로 낙인 찍었고 결국 개교 14년 만인 1919년 폐교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같은 해 이미 중국 망명길에 올랐던 김원봉은 의열단을 결성했다.

    문의=주말레저팀 (051)500-5169
    이창우 개척단장 010-3563-0254
    글·사진=이승렬 기자 bungse@kookje.co.kr 






    모정마을을 통과하는 둘레길 취재팀 

    고답마을의 당산나무로 마을에서는 이곳을 당등이라 부른다.

    오르풀마을의 칠성바위로 마을 부녀자들이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바위

    고정분교터이며 맞은편 삼거리 길안마을 큰 표지석 뒤가 마전평이라 부른다. 예전에는 밀양에서 말을 타고 고답고개를 넘어와 이곳에서 말을 쉬게하였다하여 마전평이라 부르며 나루터에서 청도읍방향이나 산동방향으로 이동을 하였다 한다.

    골안마을 작은 표지석 앞으로 둘레길이 열린다.

    골안마을


    은방울꽃

    보담산아래의 볼수바위로 가곡마을에서부르는 지명이며 평능에서는 상여를 닮았다하려 생이바위라 부른다. 

    당고개(비암고개)로 지금도 고개마루에는 그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내가곡마을의 모습. 그 뒤로 밀양의 옥교산이 펼쳐진다.

    낙화듬으로 임진왜란때 정절을 지키기 위해 민씨부인이 왼쪽봉우리 바로 아래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다하여 낙화암이라 부른다.

    공동산고개로 엄광리 숲촌마을로 이어진다.

    고개를 넘어서면 왼편으로 운문지맥의 마루금인 보두산 낙화산 중산 석이바위 능선이 부채살 처럼 펼쳐진다.

    호젖한 옛길을 걷고 있는 둘레길 취재팀

    운문지맥의 끝부분인 비학산 아래 장씨 정려각

    가곡리의 민씨 정려각

    둘레길에서 볼 수 있는 돌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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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마을을 여행하다 보면그 마을의 수호신을 만날 수 있다.
    느티나무 팽나무 은행나무등을 심어마을의 무사안녕을 기원한다.
    짧게는 100년에서 길게는 1000년을 이어오며 그마을과 역사를 같이한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마을의 신으로 모시며 받들고 있다. 






    청도군 매전면 내리 안마을의 당산나무도

    안내동마을의 얼굴마담이다.
    수령350년인 이 느티나무는 인물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매끈한 몸매와 위험과 기품을 한께 갖춘 당산나무로
    사방 팔방으로 그의 너른 품으로 그늘을 제공한다.  


    마을사람만을 위한 나무가 아닌
    여행자 또한 그 넓은 품안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해본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의 향기에
    어느새 짧은 토막잠도 청해 본다. 
    그래서 한여름의 당산나무는 좋은 것이다.
    곧 메미가 울것이며 그메미가 마을에 진동할때쯤
    다시 당산나무 아래는 동네사람으로 북적이겠지...
    새참의 기쁨을 나누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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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여행/밀양여행)상동 박연정. 강물에 노니는 물고기 수를 헤아렸다는 수어대가 있는 밀양의 박연정

    조선 중기 학자이자 최초의
     운문산 유람기인 '유운문산록(遊雲門山錄)'을 남긴
     수헌(壽軒) 이중경(李重慶·1599~1678)선생은 운문산을 들어서는 들머리를 이곳 박연정이라하였다.


    박연정은 양무공 김태허(1555~1620)장군의 별장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원래는 이곳이 능성 현감을 지낸 이담용의 관란정이란 정자 터 였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이곳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터에다 양무공이 박연정을 지었다.





    그후 중창과 확장을 거쳐 박연정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약70년  뒤인 1682년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소실이 되고 말았다.
    이곳은 양부공의 박연정이 있었다는 곳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180년 뒤인 양무공의 9대손인 영장 김난규가 폐허가 된 이곳에 다시 정자를 중건하였다.



    일제시대때인 1938년에 후손들에 의해
    충의문이 세워지고 1966년에 추유재가 새워졌다.
    박연정 뒤로 돌아나가는이곳에 수어대의 천길절벽이 서있다.
    동창천의 물이 맑아 수어대 아래 연에서 노니는 물고기의 수를 헤아렸다.
    그 위 갂아지른 절벽은 빙허대로 바위절벽을 돌아올라 동창천을 바라보면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암반이 튀어 나와 있다.그래서 빙허대인가.


    이방위 또는 아방위로 불리는 빙허대
    바위의 모양이 어린애의 모습과 같다하며
    주변의 오례산성과 그 아래 빼어난 절경으로 인해
    넋을 잃고  허공에 의지하게 된다는 빙허대
     그 암반위에 푸른노송이 용트림을 하듯이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 만년송이라 부른다.
    만년송과 빙허대 수어대 박연정이 함께 어울려 빼어남을 더한다.


    '박연'은 임진왜란 때
    밀양부사와 울산군수를 역임하며 전공을 세웠고
    전후 정일품인 호위대장에 이른 무신인 양무공 김태허의 호(號)이다.
    그는 관직을 버리고 이곳 고정리 뒷말리산(소천봉) 끈티인 박연정에서 만년을 보냈다.
    이 쪽문을 통해 박연선생이 빙허대에 올랐을까.











    암반인 빙허대와  그위에 자라는 만년송


    빙허대에 올라서면 북으로 동창천과 오례산성등 주위의 경치가 빼어나다.



    모정마을 가는 길의 양무공의 가묘터





    찾아가는길
    부산역에서 상동역 무궁화 열차는 7시45분. 상동역에서는 신곡리행 버스가 상동파출소앞 정류장에 오전9시5분경에 지나간다(밀양터미널에서 8시50분출발).모정마을 박연정 앞 하차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밀양 방향으로 가다가 첫 번째 만나는 사거리(긴늪사거리)에서 청도 방향으로 우회전, 25번 국도를 탄다. 상동역 지나서 상동교를 건너지말고 고정리 매화리 방향 직진한다. 고정리를 지나 매화리 방향을 진행하면 모정마을 표지석과 만나고  그뒤로 박연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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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여행/청도여행)영남알프스둘레길 11코스. 감꽃대궐을  이루는 동창 천변 영남알프스 둘레길 11코스


    근교산&그너머 <725> 제11코스 : 청도 장연리 장수골~밀양 고정리 박연정

    '은자(隱者)의 강' 동창천 따라, 감꽃대궐 속으로…



     
    고헌산에서 발원해 경주 산내와 청도군 운문면 금천면 매전면을 남북으로 관통해 밀양 상동면 유천에서 청도천과 합쳐져 밀양강을 이루는 동창천.

    동창천은 주변 산세와 어우러진 풍광이 더없이 빼어나고 기묘한 절벽과 소가 즐비해 옛날부터 선비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벼슬을 사양하거나 버리고, 또는 소임을 마치고 향리에 은거했던 이 선비들은 하천 자락 풍광 좋은 곳에 정자나 서당을 짓고 소탈하게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그들은 때로는 물길을 따라 걸으며 사색을 즐기고 시를 짓거나 하천 동쪽의 큰 산인 운문산을 위시한 영남알프스 산군을 두루 유람하기도 했고 나라가 위급한 순간에는 떨쳐 일어나 침략자와 맞섰다.

    수많은 젊은이가 기꺼이 이슬처럼 스러져간 격전의 현장이기도 한 동창천은 '은자(隱者)의 강'이면서 '구국의 강'이다. 이 하천은 영남알프스 산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최초 발원지도 영남알프스이고 중간 중간 합류하는 지류 대부분도 영남알프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오늘날 영남알프스라고 불리는 거대한 산군의 서쪽과 북쪽 경계선 역할을 한다. 산은 강을 넘지 못하지만, 산이 없으면 강도 없다.





    ■ 장연사지 보물 보고 박연정까지 17㎞… 5시간30분 걸려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단원들이 경북 청도군 매전면 장연리 감나무밭길을 걷고 있다. 5월 중순부터 주변은 온통 연노랑 감꽃으로 뒤덮이는 '감꽃대궐'로 변한다. 오른쪽 봉우리는 부처산이다.
    영남알프스 둘레길 제11코스는 동창천 물줄기가 절정에 달하는 구간을 따라가며 경북 청도의 특산물인 '청도 반시(盤枾)'가 열리는 감나무 밭 사이로 여유롭게 걷는 길이다. 드디어 경상북도의 길이 경상남도의 길로 이어지는 구간이기도 하다.

    출발지는 경북 청도군 매전면 장연리 장수골마을 경로회관 앞이다. 동창천과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총 17㎞를 걷는다. 종점은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이 빛나는 정자인 경남 밀양시 상동면 고정리 박연정(朴淵亭) 앞이다. 걷는 시간은 4시간, 휴식과 식사 포함이면 5시간30분 정도 걸린다.

    본격적인 출발에 앞서 장수골 경로회관 인근 장연사지3층석탑(동서 쌍탑·보물 제677호)과 당간지주 등을 둘러보면 좋다.

     
      GPX & GTM 파일 / 고도표 jpg파일
    경로회관에서 마을 안쪽으로 길을 잡는다. 눈앞에 보이는 산줄기는 부처산~육화산 능선이다. 2분 후 다리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는다. 주변은 온통 감나무밭. 연둣빛 감잎이 싱그럽다. 노란 애기똥풀꽃이 지천으로 널렸다. 계당마을 오른쪽 뒤 우뚝한 봉우리는 고깔모자처럼 생겼다고 해서 고깔봉이라 불린다. 계당마을 안 '계당길 28번지' 앞에서 우측으로 꺾어 내리막길을 탄다. 3분 후 아스팔트 도로를 만나면 왼쪽으로 꺾는다. 5분 후 장연사지 당간지주 1개와 함께 서 있는 길명마을 은행나무 앞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틀어 마을로 들어서면 곧바로 장연리 경로당이다. 이 경로당 앞 '길명길 10번지'를 감아 우측 작은 골목길로 들어서야 한다. 왼쪽 도랑 건너 시골집 돌담이 평화롭다.

    감나무밭 사잇길로 10분쯤 오르면 키 큰 소나무 앞 갈림길. 왼쪽으로 200m쯤 가면 작은 가건물 앞 또 한 번의 갈림길을 만나는데 이번에는 오른쪽 오르막길로 들어선다. 10분 후 길 양쪽에 높이 1m 안팎, 두께 7㎝가량의 쇠파이프가 있는 곳에서 왼쪽 10시 방향 숲길로 들어서야 한다. 안내리본을 참고하자.


    ■ 감나무 지천인 마을길에 순박한 흙돌담 어우러져

     
      이서국 군사와 말들이 전멸했다는 마전암과 그 아래 말구르소.
    내동고개로 오르는 옛길이 나타난다. 내리 사람들이 장연리를 거쳐 동곡장까지 오갈 때 걷던 길이다. 삼림욕 하듯 편안하게 숲길을 오르면 내동고개. 오른쪽은 고깔봉, 왼쪽은 육화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직진해서 내려선다. 솔잎이 융단처럼 깔린 환상적인 숲길이다. 김해 배씨 묘를 지나면 다시 임도를 만나고 이내 주황색 지붕이 인상적인 독립가옥인 윤원훈씨 집에 닿는다. 인정스러운 윤 씨 집 마당에서 왼쪽을 올려다보면 육화산 정상부가 우뚝하다.

    10분가량 더 내려서면 청도군 매전면 내2리 안내동마을 삼거리. 감나무에 둘러싸인 한적한 마을이다. 5월 중순부터는 감꽃이 마을을 휘감을 것이다. 일단 왼쪽에 보이는 잘생긴 느티나무를 향한다. 수령 350여 년 된 보호수인 이 느티나무 쉼터는 점심 먹을 자리로 안성맞춤이다. 느티나무 뒤쪽에 관리는 잘 안된 듯한 석천서당이 있다.


    이 마을에서 계속 임도를 타고 골짜기 안으로 가면 오치고개를 넘어 밀양 산내면으로 가게 되지만 개척단은 마을 입구를 거쳐 동창천 쪽으로 간다. 잘 지어진 재실을 3개나 지나 동창천 중남교 다리 앞에서 왼쪽 둑길로 들어선다. 동창천 건너 오른쪽 멀리 오례산성이 눈에 들어온다. 둑길 왼쪽 아래 들판에는 보리가 파랗게 자라고 있다. 6분 뒤 둑길이 끝나는 곳에서 당황하지 말고 오른쪽 둑 아래 강변으로 내려선다. 때 묻지 않은 강변길. 오른쪽은 큰 냇물이고 발 딛는 곳 왼쪽으로는 폭 1m 안팎의 측구로 물이 흐른다. 버드나무와 인사하며 수풀을 밟고 가는 '야생의 길'이다. 조금만 정비한다면 참으로 정감 어린 길이 되겠다.

    ■ 동창천 갓길은 수풀 스치는 소리 정겨운 야생의 길

     
      둘레길 개척단원들이 감나무와 돌담 정겨운 덕정마을 지나고 있다.
    15분쯤 가면 첫 번째 콘크리트 배수로를 만난다. 왼쪽 작은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물맛이 달콤하다. 여름철 도보 여행꾼들의 목을 축여줄 샘터로 삼아도 되겠다. 강변길을 7분쯤 더 진행하면 갈림길. 강변길을 버리고 콘크리트 측구 왼쪽 언덕으로 오르는 길을 따른다. 언덕을 넘으면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그림 같은 집을 만난다. 집도 예쁘지만 뜰을 뒤덮은 갖가지 꽃들이 더욱 어여쁘다. 다듬고 가꾼 집 주인의 정성을 알만하다.

    곧이어 구촌리 동산마을회관 앞 사거리에서 직진한다. 10분 후 덕정마을을 앞두고 Y자 갈림길에서 왼쪽 완만한 오르막길을 택한다. 살짝 휘어지며 언덕을 넘는 길에 멋들어진 소나무가 도열해 있다. 언덕 너머 '덕정길 18-2'번지 앞 갈림길에서 직진, 흙길로 들어선다. 150m쯤 가서 큰 나무 앞 갈림길에서 왼쪽 흙길로 200m쯤 가면 덕정고개다. 이곳이 바로 청도와 밀양의 경계선이자 경북과 경남으로 나뉘는 곳이다. 오른쪽 아래로 동창천이 유유히 흐르고 하천 건너에는 오례산성의 위용이 압도적이다.

     
      동창천 변 길은 다듬어지지 않아 더욱 정겹다. 정면의 산은 오례산성.
    덕정고개 너머의 쌍무덤 앞을 지나 3분 후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꺾어 내려선 뒤 다시 갈림길에서 왼쪽 밀양시 상동면 신곡리 오곡마을 방향으로 향한다. 정자나무 앞에서 우회전, 신곡천 작은 다리를 건너 100m쯤 가면 크지 않은 은행나무 앞 Y자 갈림길. 이곳에서 오른쪽 감나무밭 사잇길로 들어선다. 노란 애기똥풀꽃이 흐드러진다. 10분 후 왼쪽에 집 한 채, 오른쪽에 비닐하우스가 있는 갈림길에서 우측 내리막길을 따른다. '오대(梧臺)'를 둘러본 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예정. 5분쯤 내려서면 신곡양수장이 나오고 그 우측 개울을 건너면 소나무 울창한 '오대'다. 조선 중기 학자이자 최초의 운문산 유람기인 '유운문산록(遊雲門山錄)'을 남긴 수헌(壽軒) 이중경(李重慶·1599~1678)이 18년간 오대정사(梧臺精舍)를 짓고 살면서 오대구곡가, 수헌집 등의 시와 저작을 남긴 유서깊은 곳이다. 지금도 여러 개의 정자 터가 남아 있고 바위에는 그가 직접 새겼다는 '한벽당(閑僻堂)…'이라는 글씨와 후손들이 새긴 '수헌선생 전의 의공 장구지소(壽軒先生 全義 李公 杖屨之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중경은 운문산 유람 당시 이곳에서 여생을 마치기로 다짐을 했지만 만년에는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 수헌 선생 체취 밴 오대·마전암 등 역사적 명소 가득

     
      제11코스 날머리인 박연정. 임진왜란 이후 양무공 김태허가 지었다.
    수헌 선생의 발자취를 뒤로하고 다시 비닐하우스 앞 갈림길로 돌아온 후 오른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예쁘장한 집을 잇따라 지나면 길은 다시 흙길로 변하고 옛길의 흔적을 더듬으며 나아가면 오른쪽 아래가 깎아지른 절벽인 마전암(馬轉岩)이다. 서기 1세기 전후 청도의 고대국가 이서국 군사와 말들이 침략군인 신라군과 맞서 백병전을 벌이다 이곳에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전멸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전암 아래 동창천의 물빛 짙푸른 '소(沼)'는 '말구르소'라고 불린다. 말구르소 물 밑에는 몰락한 부자 전설이 전해오는 장자바위가 있다.

    마전암을 지나 소나무 울창한 길을 이어가면 곧바로 '엘림'이라는 간판을 단 기독교회 수련관이 나오고 곧이어 아스팔트 포장도로와 합쳐진다. 6분 후 매화마을 버스정류소 왼쪽에 보면 밀양박씨 재실인 경무재(景武齋)와 수령 450년이 넘는 보호수인 매화리 은행나무가 있다. 버스정류소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15분쯤 더 가면 종착점인 상동면 고정리의 아름다운 정자인 박연정(博淵亭·경남도 지정문화재 제235호)에 닿는다. '박연'은 임진왜란 때 밀양부사와 울산군수를 역임하며 전공을 세우고 전후 정일품인 호위대장 이른 무신인 양무공 김태허의 호(號)이다. 양무공은 만년에 들어 이곳에 정자를 짓고 살았다.


    ◆ 떠나기 전에


    - '오대어부구곡가' '운문구곡가' 등 옛 시가의 산실

    제11코스 출발 전에 들러보는 장연사지 3층석탑은 보물677호로 지정된 동서 쌍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탑은 하천 변에 무너진 채 버려져 있던 것을 1980년에 복원했는데 최근 다시 보수 작업을 위해 해체했으며 현재도 공사 중이다. 경주 감은사지 탑이나 원원사지 탑과 형식이 유사하다. 동탑에서는 1984년 해체 보수 공사 때 몸돌 1단 내부에서 특이한 목재 사리함과 그 안에 장치했던 푸른색 사리병이 발견돼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코스 중간에 들리게 되는 오대는 수헌 이중경 선생이 '오대어부구곡가(梧臺漁夫九曲歌)'라는 시를 남긴 곳이다. 이는 중국의 주자가 무이산에 은거하며 지은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본따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경치 좋은 곳에서 짓곤 하던 '구곡가'의 하나다. 퇴계 이황의 도산구곡가,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가, 한강 정구의 무흘구곡가, 우암 송시열의 화양구곡가 등과 궤를 같이한다. 또 하나 영남알프스 둘레길을 걸으며 주목할 점은 이 같은 조선 성리학자들의 '구곡가'류의 효시 격인 작품이 바로 제10코스의 시발점인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의 만화정에서 소요당 박하담 선생이 읊은 '운문구곡가(雲門九曲歌)'라는 점이다.

    한편 수헌 이중경은 44세의 나이에 운문산과 동창천 일대를 유람하며 쓴 '유운문산록'을 통해 밀양 상동 유천에서 시작된 발길이 박연정에 이르는 순간 "비로소 운문동에 들어섰다"고 읊었다. 그는 박연정을 운문산 자락의 들머리로 인식했던 것이다.


    ◆ 교통편

    - 청도역까지 간 후 유천 경유 동곡행 버스로 갈아타야

    무궁화호 열차 편으로 청도역까지 간 뒤 청도버스터미널에서 유천 경유 동곡행 버스를 타야 한다. 부산역 기준 오전 5시10분부터 40~5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1시간 소요, 4800원. 청도에서 유천을 경유해 동곡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온막리에서 내린다. 오전 7시40분, 9시20분, 10시40분 등에 있다. 30분 소요. 코스 종점인 밀양시 상동면 고정리 버스정류소에서는 오후 4시10분, 5시50분, 8시10분 등에 밀양행 버스가 있다. 밀양에서 부산행 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밀양 방향으로 가다가 첫 번째 만나는 사거리(긴늪사거리)에서 청도 방향으로 우회전, 25번 국도를 탄다. 상동역 지나서 상동교를 건너자마자 58번 국도를 따라 유천교를 건너 동곡 방향으로 가다가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매전초등학교 못미친 곳에서 우측 장연사, 장연리 방향으로 꺾는다. 동창천을 건너 청도학생야영장 입구를 지나면 장수골마을로 들어서게 된다. 경로회관 앞에 주차장이 있다.

    길명마을의 예쁜 흙담벼락

    # 부산서 귀농한 윤원훈씨 가족

    - "적적한 이곳에 둘레길 열린다니 반갑죠"

     
    "복잡하고 바쁜 도시생활을 접고 육화산 자락에 묻혀 사니 참으로 여유롭고 행복합니다. 다만 가끔 느껴지는 적적함은 부인할 수 없는데, 영남알프스 둘레길이 집 앞으로 열린다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어요."

    제11코스를 걷다가 내동고개를 넘자마자 만난 예쁜 주황색 지붕의 외딴 집. 이 집 주인인 윤원훈(61) 씨와 박석순(56) 씨 부부는 취재팀으로부터 둘레길 개척 중이라는 말을 듣고 반색을 한다. 한사코 "생강꽃과 산수유꽃을 섞어 만든 신토불이 우리 차 한 잔씩 마시고 가라"며 마당 한켠의 파라솔 아래 탁자로 취재팀을 이끈 윤 씨 부부가 이곳에 새 보금자리를 잡은 것은 지난 2008년. 부산 초읍동에서 개인사업을 하던 윤 씨 부부는 "평소 산행을 즐기고 틈만 나면 자연 속으로 길을 떠나던 습관이 있어서인지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귀농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들이 느끼는 자연 속의 삶은 어떨까? 부인 박 씨는 "여러가지 채소를 텃밭에 가꿔 먹고 숲에서는 수리취 참취 곰취 등 취나물 종류를 비롯한 제철 나물을 따서 먹는다. 새벽마다 새소리 물소리에 잠이 깨고 다리 다친 수리부엉이도 치료해주며 사람이 다가가도 경계심 없이 반겨주는 산토끼와 친구 하며 재미나게 산다"고 말한다. 만년의 삶을 이곳에서 보내기 위해 집도 예쁘게 지었지만 그래도 외로움은 어쩔 수 없단다.

    윤 씨는 "육화산 등산객들이 가끔 집 앞을 지나가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가끔 부산의 친구나 친지들을 초청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사람 냄새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이제 둘레길이 열리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 좋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귀농을 할 수는 없는 일. 이들이 귀농에 성공,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진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윤 씨는 "아내가 선뜻 동의해 주지 않았다면, 여러가지 불편함도 감내하고 이해하며 여유로움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넓은 가슴이 없었다면 아마도 실패했을지도 모르겠다"며 아내 박 씨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금낭화 곱게 핀 집 앞 화단까지 따라나와 손님들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흔들며 배웅해 주는 윤 씨 가족이 더욱 행복하기를 개척단원 모두가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문의=주말레저팀 (051)500-5169
    이창우 개척단장 010-3563-0254 
    GPS·동영상 www.kookje.co.kr
    글·사진=이승렬 기자 bungse@kookje.co.kr  




    운막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장연리로 찾아가는 길목에 있는 노거수로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원래 똑 같은 크기의 느티나무가 두그루였는데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가면서 배를 만든다고 베어가 지금은 한그루가 남았다 한다.

    장수골의 재실 화장실로 세월의 무게를 짐작 할 수 있다.

    장연사지의 당간지주로 재실의 앞 마당에도 그리고 길명마을의 입구에도 장연사지에서 나온 유물을 찾을 수 있었다.


    장연리 길명마을에서 내동고개로 올라가는 취재팀 그 뒤로 감나무가 지천이다,

    안내동마을의 350년된 느티나무로 보호수이다. 여기서 점심식사를 하기에는 그만이다.

    안내동 마을 전경 그뒤로 취재팀이 내려온 내동고개가 보인다.

    내동의 안내동마을에 있는 석천서당

    동창천에서 다슬기를 잡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동산마을의 동화같은 집들과 오례산성



    청도군의 마지막 마을인 덕정마을로 덕정고개만 넘어면 경남 밀양 땅이다.

    밀양땅에 들어선 취재팀. 상동면 신곡리이다.

    밀양박씨 재실인 경무재(景武齋)와 수령 450년이 넘는 보호수인 매화리 은행나무


    동창천의 물이 맑아 고기를 헤아린다는 수어대로 그  속에 경치가 수려하여 까마득하게 허공에 의지한다는 수지 절벽 빙허대.
    바위의 모양이 아이와 같이 생겼다하여 이방위 또는 아방위로도 불린다.


    빙허대에서 바라본 동창천과 영남알프스둘레길

    빙허대 위의 만년송

    박연정의 모습으로 문이 잠겨 있어 내부를 볼 수 없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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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여행/청도여행)금천면 선암서원. 청도 선암서원에서 전통 고택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다네요


    선암서원은 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박하담의 위폐를 모신 곳이다.
    매전면에 있던 위폐를 조선 선조때 이곳으로 옮겨와 선암서원을 개창하였다.
    고종때 재차 중건을 하여 선암서당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암서당은 여타 서당과 달리 가정집인 살림집과 함께 건립이 되어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살림집이 위치를 하는데 좌측으로 안채이며
    우측으로는 사랑채인 득월정이 서로 담하나를 두고 경계를 짓고 있다.
    득월정 옆 중문을 들어서면 소요당인 서원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소요당은 정면5칸 측면2칸으로 좌우로 전퇴를둔 방을 두었다.
    중앙의 마루에는 뒤를 문을 달아 서로 통하도록 하였고
     천장의 공포는 서원으로서는 보기 힘든 조각품으로 짜 맞추어져 있다.
    방을 꾸민 기둥은 평주로 꾸몄다. 일반적으로는 보통 고주로 기둥을 세우는데
    선암서원은 특이한 기법을 사용하였다.






    청도땅 신지리 선암서원 뒤편에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교과서나 책에서는 듣지 못했던
    충의 의미를 돼세기는 한집안의 이야기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임란창의14의사전적비'로 임진왜란때 왜적이 동래성을 함락하고 물밀듯이 청도땅으로 쳐들어 왔다. 

    이곳 밀양박씨 박하담의 후손들이 분연히 일어나
    삼촌과 조카,형제,부자지간의 14의사가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하고자 어성산에서 산성을 구축하고 왜적과 싸웠다.  
    이 전쟁에서 천성만호 박경선은 전쟁중 손목이 잘려 나가는 부상을 입고서도
    왜장을 끓어 안고 봉황애에서 떨어저 전사를 하였다.
    그 봉황애가 전적비 뒤에 보인다.






    파련형의 안초공을 사용하여 평주를 세운 선암서원 모서리 기둥의 모습

    소요대




    선암서원 뒤 쪽문을 내려서면 이마을 지명이 유래된 입암, 죽 선바위가 있다.

    마을에서는 용두암으로 부르며 그 아래 소를 용두소라 부른다.
    마을의 이야기로는 지금 바위 밑에 용머리 형상의 바위가 붙어 있었는데
    태풍의 폭우로 인해 쓸려 내려 가

    현재는 용의 머리 부분은 떨어저 나가고 물길도 돌려저 버렸다 한다.
     이 용두소 일대를 소요대라 통칭하여 부른다.

    선암서원을 들어서는 출입문


    안채의 모습

    사랑채인 득월정과 돌담을 하나 두고 갈라저 있다.

    사랑채인 득월정은 정면4칸 측면 1칸으로 구성이 되어 있고
    정면 2칸은 마루를 넣었고 2칸은 방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뒤로는 문을 달아 놓아 수시로 열 수 있도록 처리를 하였다.






    소요당 선암서원과 살림집을 갈라 놓은 중문의 모습

    중문을 들어서면 수백년은 됨직한 백일홍 두그루가 뒷문옆에 심어저 있다.
    이 배롱나무가 꽃을 필때는 선암서원은 더욱 한폭의 그림 같이 
    탐방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것이다.


    선암서원 천정의 다포식공포로 예술성이 돋보이며
    서원으로서는 보기드물게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현재는 박향숙 씨가 서원을 관리하면서

    전통고택 숙박체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백일홍 꽃이 활짝 피는 여름 휴가철에는 방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인터넷홈페이지(http://sunam.co.kr)
    또는 전화(070-4150-8445)로 예약 문의를 할 수 있다.







    선암서원의 뒤 건물로 장판각이다.

    선암서원의 보물을 보관하였다.
    배제예부운략판목, 지방문화재인 해동속소학판목, 14의사록판목을 보관하였는데
    현재는 안동국악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










    찾아가는길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청도역에서 내린다. 부산역 기준 오전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 6시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10시20분 등 자주 있는 편이다. 1시간 소요, 4800원. 청도역에서 나와 왼쪽으로 5분 거리에 있는 청도버스터미널에서 운문사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신지리에서 하차한다. 오전 7시40분, 9시20분, 10시40분, 11시30분 등 하루 8회 출발한다. 3200원.

    자가운전의 경우 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린 후 좌회전, 긴늪사거리에서 청도방향 25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한다. 상동역 지나 신곡삼거리에서 좌회전, 상동교를 건넌 후 25번 국도를 버리고 오른쪽 매전 금천 방향 58번 국도를 탄다. 동창천을 따라가다보면 매전면 소재지의 처진소나무를 지나 매전교를 만난다. 우회전 해 매전교를 건너 진행하면 금천면 신지리 들어서면 선암서원 입간판이 보인다. 좌측으로 들어서면 곧 서원 앞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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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여행/청도여행)금천면 만화정과 세심정, 한국동란때 이승만대통령이 머물렀다는 만화정과 그뒤 세심정

    흔히 옛 양반들의 집성촌으로 아직까지도 그 당시의 건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 여럿 있다.
    안동 하회마을의 풍산류시 집성촌,
    지리산 가는길의 남산예담촌 그리고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등 여럿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부산에서 가까운 곳 중 찾기는 쉽지가 않다. 
    최근까지 알려지지 않은 곳이 청도 땅에도 있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그곳에 버금가는 고가들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곳이 영남알프스 둘레길에도 있다.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로 한때는
    이곳이 금천면의 면소재지로 이름을 날리던 곳으로 도로 좌우편으로 옛 고가들이 줄을 서 있다.
    도암고택, 운강고택등 밀성박씨의 한집안이 가계를 이루어 내려 오는 곳으로
    운강고택의 부속건물로 지어진 만화정을 이야기하려 한다.
     동창천변 절벽에 자리를 잡은 정자 만화정(萬和亭)은 한옥마을의 백미로 꼽힌다.
    청도의 여러 한옥 마을중에서도 여기 신지리의 고택이 으뜸이며
    만화정은 동창천과 주위의 영남알프스의 풍광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한옥마을의아름다움을 더욱 빛네고 있다.

     





    만화정은 본래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소요당(逍謠堂) 박하담(1479~1560)이 건립한 서당 터였는데
    그의 11세 손인 박정주(1789~1850)가 분가해서 살림집으로 지은 것이다.
    이후 박정주의 아들인 운강(雲崗) 박시묵이 더욱 확장,
    현재의 모습처럼 정자 형태로 변형했고 이곳에 강학소를 열어 지역 후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으며
    그의 아들인 진계 박재형은 해동속소학 등 38권의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주변의 선암서원 등과 함께 청도 지역 학문의 요람 역할을 했다.


     


    운강과 진계가 이곳에서 학문을 갈고 닦고
    후학들에 대한 교육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원래 이곳에 서당을 세웠던
    소요당의 높은 인품과 학풍을 이어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요당은 조선 중종 때
    사마시에 합격했지만 여러 관직을
    모두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저술과 학문연구에 매진한 성리학자였다.
    .
    .
    .
    소요당 박하담의 후손들이 이곳 만화정 앞 뜰에 모여
    형제 삼촌 조카 부자지간의 14명이 의병을 궐기하여  임진왜란때
    동래성이 왜군에게 떨어져 15일만에 청도로 밀려 올라왔을때
    밀양박씨 14명이 의연히 일어나 어성산에서 싸웠다한다.



    특히 무오사화 등을 거치면서 더욱더 세속적인
    출세와 벼슬길에 대한 마음을 접게 된 소요당은 본격적으로 지역 발전에 이바지하게 된다.
    그는 삼족당 김대유 등과 함께 운문사 아래에 최초의 사창(社倉)을 지어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던 백성에게 환곡법을 실시하는 등 빈민구제사업에 매진했다.
    또 남명 조식, 삼족당 김대유 등 당대의 대학자들이 소요당을 찾아와 학문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같은 학풍과 인품이
    12대손인 운강 박시묵대와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것이다.


    찾아가는 길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청도역에서 내린다. 부산역 기준 오전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 6시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10시20분 등 자주 있는 편이다. 1시간 소요, 4800원. 청도역에서 나와 왼쪽으로 5분 거리에 있는 청도버스터미널에서 운문사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신지리에서 하차한다. 오전 7시40분, 9시20분, 10시40분, 11시30분 등 하루 8회 출발한다. 3200원.

    자가운전의 경우 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린 후 좌회전, 긴늪삼거리에서 청도방향 25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한다. 상동역 지나 신곡삼거리에서 좌회전, 상동교를 건넌 후 25번 국도를 버리고 오른쪽 매전 금천 방향 58번 국도를 탄다. 동창천을 따라가다보면 매전면 소재지의 처진소나무를 지나 매전교를 만난다. 우회전 해 매전교를 건너 진행하면 금천면 신지리 만화정 앞에 닿는다.















    만하정 뒤 쪽문을 열고 나가면 세심정으로 갈 수 있다.
    안강의 옥산서원의 세심정처럼
     마음을 씻는다는 뜻의 정자가 있었다한다. 











    만화정을 화폭에 담는 노 화백의 모습







    지금 세심정의 정자는 사라지고 없지만 동창천편에
    외로이
    만하정과 함께 옛 선현의 글씨가 또렷이 남아 있다. 
    잡초가 웃자라 있고 주변의 상태로 보아서는 버려진체로 남아 있는
    이곳에도하루빨리 문화재의 대책을 수립하여 잡초를 제거하고 보호책을 마련하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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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문사내원암

    운문사 들어가는 길 왼쪽으로 내원암 청신암 방향 흙길을 따라간다. 울울창창한 소나무와 거목들이 키 재기를 하고 있다. 그 사잇길을 따라가는 내원암 가는 길. 청신암을 지나면 내원암, 운문사의 부속암자이지만 운문사에서는 내원암의 위치 조차 가늠해 볼 수가 없다.

    복호암과 지룡산을 거쳐 가는 능선의 우측으로 호박 같이 움푹파여진 깊은 골짜기에 자리를 잡고 있는 내원암. 운문사는 저잣거리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세속의 사찰이라면 한굽이 돌아선 내원암은 부처님의 나라에 들어온 것처럼 아늑하고 조용하다.

    내원암의 창건은 원응국사였다 한다. 운문사를 중창할 때 같이 창건하였다한다. 그후 1694년인 조선 숙종때 설송 연초대사가 중창을 하였고 1834년인 순조31년 때 운악화상이 중수을 하였다한다.

    무슨연유인지 모르지만 그때의 건물은 모두 남아 있지를 않으며 1930년경에 2차 중창을 거쳐 현재의 사찰모습을 하고 있다 한다.

    1950년경에 불교정화운동에 의해 운문사와 함께 비구니의 처소가 되었다 한다. 초대 원주는 유섭스님이었고 1992년 제문스님에 의해 내원암의 초석을 다지는 삼성각 무량수전 멱우선실 요사등이 새로 지었다 한다.




    운문사 청신암. 사찰의 분위기보다는 ...
    내원암의 깊이를 보여주는 부도군



    무량수전에 보관중인 석조아미타불상은 경주의 흰 옥돌로 만들었다 한다. 현재는 금으로 덧칠하였다.  개금시 복장유물에 나온 기록을 보면 1681년인 강희20년의 불상내력이 발견되어 조선후기에는 석불이 흔하지 않아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중앙의불상)






    내원암의 약수는 청도 인근에서는 유명새를 타고 있다. 한 여름 간장을 녹일 것 같은 청량수의 물맛이 그리워 이곳을 찾는 사람도 꽤 많타 하니 운문사를 들러는 길손은 내원암의 청정 약수로  심신의 피로를 달래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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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호서원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마을 입구 우측에 옛 고가의 건물을 볼 수 있다.

    임호서원으로 박경신과 그의 쌍둥이 아들인 지남과 철남을 배향하고 있다.

    박경신은 밀성박씨로 1539년 9월9일(조선중종34년)출생하여 자는 중선이며 호는 삼우정이다.

    31세때 무과 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복시에 급제를 하였다. 그후 삼우정은 35세때 장원급제를 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임진왜란때는 선조를 호위하여 피란길에 올랐고 그의 쌍둥이 아들 지남, 철남과 함께 청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도를 지켰으며 1594년 6월5일 56세로 순직을 하였다. 임란후 선무원종공신1등, 호성원정공신2등에 올랐다.

    장남인 지남은 1565년 출생하여 자를 인경 호는 계애라 하였다. 부친인 박경신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청도등 인근의 전투에 참여를 하였다. 선무원종공신2등에 올라 임호서원 뒤 경의사에 배향되었다.

    그의 동생인 철남은 지남의 쌍둥이 동생으로 아버지 박경신, 형 지남과 함께 의병에 참여를 하였고 형과함께 선무원종공신2등에 올라 삼부자가 함께 이곳 임호서원뒤 경의사에 모서져 있다.


    밀성박씨삼우정파종중소장문적

    보물제1237호

    밀성박씨 삼우장 박경신과 그의 쌍둥이 아들인 지남 철남에게 내린 포상문서로 선무원종공신록운인증서13매와 삼우정 박경신에게 내려진 선무원종공신록권1책과 순조 년간 박경신부부에게 내려진 교지 2매와 그의 모친 장씨가 장원급제를 축하하는 별급문기 1매등이다.


    임호서원과 경의사를 찾아가도 거주하는 사람이나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 문을 잠궈 놓아 빈집 상태이다.
     그래서 인지 임호서원안을 빼꼼이 쳐다보니 관리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벽채는 회칠이 벗겨져서인지 시멘트로 덧칠이 되어 있고 그것도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지금 선조들의 옛 고가 상태가 비단 임호서원 뿐만 아니다. 현재 그의 후손들이 모두 외지에 나가 살고 있으니 관리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안되고 그래서 1년에 한두번 집안 행사때 들러 보는 것이 고작 아니겠는가. 그런 상태에서는 외지인들이 고가를 관람할려고 찾아오면 문이 잠겨 실망한채로 돌아가고 고가는 황폐화의 수순을 밟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또 한개의 우리의 문화제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선암서원 담장안을 들여다 본 모습


    시멘트로 덧칠한 임호서원 뒷벽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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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교산&그너머 <723> 제10코스 : 청도 신지리 만화정~장연리

    동창천 본류 따르는 솔숲길에 옛 선비 대쪽 기품 깃들었네

    (선암사원 뒷 운치있는 소나무 길, 그 아래 소요대라 부르는 용두암과 용두소 맞은편의 똥뫼(주산)가 있다.)


     
    경북 청도는 옛날부터 학문의 도가 높고 충성심이 강한 선비들이 많이 배출된 지역이다. 특히 이번 주 답사한 영남알프스둘레길 제10코스에는 이 선비들의 향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 많다. 전체 구간을 약 350㎞로 잡고 있는 둘레길 답사코스 가운데 반환점을 돌게 되는 구간이기도 한 이번 10코스에서는 또한 이 선비들이 걸었던 옛길을 따라 솔향기에 흠뻑 빠져볼 수도 있다. 그만큼 소나무숲이 울창해서 상쾌한 호흡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운치 그윽한 정자와 한옥들도 방문, 선현들의 멋과 풍류를 흠뻑 느낄 수도 있다. 야트막한 산을 넘을 때는 풍치 만점의 전망대도 여러 차례 들르기 때문에 지겨울 틈이 없다. 햇볕 따뜻한 봄날, 알록달록 피어난 야생화가 반겨주는 길을 걷다보면 진정으로 '살아 있음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세심대에 새겨진 글씨로 이와 세심대,산고수장이란 글씨도 볼 수 있다)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단원들이 경북 청도군 매전면 당호리 입구에서 애암고개로 가는 산길을 걷고 있다. 진달래 허벅진 능선길에 수백년은 된 것 같은 소나무가 인상적이다.
    제10코스 출발점은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동창천 변의 운치 만점의 정자인 만화정(萬和亭) 앞이다. 이후 금천교를 건너 어성마을로 진입한 후 어성산 능선을 타고 오르다가 '봉황애(鳳凰崖)' 위쪽 능선으로 내려선 후 동창천을 따른다. 삼족대(三足臺)를 지난 후 매전교를 건너고, 당호리 입구에서 우측 산길을 타고 354봉(일명 호화동산) 능선으로 진입, 애암고개를 거쳐 장연리마을회관 앞에 도착, 코스를 마무리한다. 총 길이 14.5㎞, 순수하게 걷는 시간만 4시간 걸린다. 휴식 시간까지 포함하면 5시간가량 소요된다는 점도 참고하자.

    만화정은 제9코스(영남알프스9코스참조) 답사기에서도 소개한 바 있듯이 조선 중종 때의 대학자이자 교육자인 소요당 박하담(1479~1560) 선생과 그 후손들의 향학열과 지역 인재 양성 의지가 오롯이 배어 있는 곳. '청도의 한옥마을'로 통하는 신지리에는 만화정 외에도 둘러볼 만한 한옥들이 많다. 운강고택 운남고택 섬암고택 선암서원 등이 만화정에서 불과 10분 안팎의 거리에 있다.

    ■어성산성 삼족대 거쳐가는 14.5㎞ 코스

    (소요대라 불리며 용두소와 용두암의 전경 뒤로 어성산이 보인다)

     
      GPX & GTM 파일 / 고도표 jpg파일
    답사팀은 이들 고택을 찬찬히 둘러보고 만화정 뒤 언덕 너머 동창천 변의 바위에 한자를 새겨 놓은 '세심대(洗心臺)'까지 찾아본 후에 출발했다. 세심대는 만화정 인근 금천초등학교 정문 입구 삼거리에서 임당리 방향으로 200여m 가다가 왼쪽 논 옆 수풀을 해치고 하천쪽으로 가야 만날 수 있다. 옛 선비들이 마음을 씻은 곳이라고 하지만 현재는 인근 주민들 조차 그 존재를 거의 모를 정도로 버려진 채로 남아있을 뿐이다. 세월의 무심함이다.

    만화정에서 금천교를 건너 왼쪽 10시 방향을 보면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왜적의 격전장이었던 어성산성이 있는 어성산과 봉황애가 보인다. 다리 건너 150m쯤 가서 만나는 도로표지판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대추나무밭 사잇길로 진입, 5분만 가면 어성교다. 이 다리를 건너면 어성마을. 원래는 왜적과 맞서 싸운 곳이라는 뜻으로 '의로운 성'을 의미하는 의성(義城)마을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어성마을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전해진다. 당산나무 오른쪽에 그릇 굽던 황토 폐가마가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어 찬찬히 살펴볼 만하다.

    당산나무 뒷길을 따라 왼쪽으로 꺾어 마을을 통과하면 능선으로 오르게 된다. 조금 가파르지만 널찍한 임도 수준의 길이다. 서서히 소나무 군락이 나타나고 주변에는 진달래가 지천이다. 마을 주민들은 '꽃이 많이 피는 곳'이라고 해서 이 능선 주변을 '꽃반티'라고 부른다. 길은 어느새 포근한 흙길로 바뀌었다. 20분 정도 천천히 오르면 쇠울타리가 설치된, 예쁘장한 무덤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울타리를 휘감아 돌면서 왼쪽 능선을 타고 내려서야 한다. 하지만 무덤에서 직진, 100m쯤 가면 돌로 쌓았던 어성산성 흔적이 있으니 둘러보고 와도 된다.

     
      어성산 오르는 편안한 길에 봄기운이 물씬하다.
    본격적으로 내리막 능선을 타면 솔숲 우거진 산길. 왼쪽 아래에는 천애절벽인 봉황애가 있다. 15분쯤 가면 왼쪽에 전망대. 발아래 동창천과 그 건너 한옥마을인 신지리가 보이고 그 뒤로는 영남알프스 주봉인 가지산을 비롯해 쌍두봉 범봉 억산 사자봉 구만산 흰덤봉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천혜의 조망처다. 10분만 더 내려서면 동창천 당호보 옆으로 떨어진다. 주변에 키 높이까지 자란 갈대밭이 무성하다. 그 사이로 난 널찍하고 평편한 길을 따른다. 10분 후 자그마한 오거리. 직진 방향 두 갈래 길 중에 오른쪽 포장로를 따른다. 길 주변에는 광활한 대추밭이다. 가을에는 탐스럽고 붉은 대추가 주렁주렁 열릴 것이다. 10분 후 수령 250년 된 보호수인 당호리 왕버드나무를 만난다. 정자 형태의 쉼터가 있는 왼쪽 길 대신 직진하는 길을 따라 계속 대추나무 사잇길로 15분 정도 더 가면 당호경로당. 여기서 150m쯤 가다가 콘크리트길을 버리고 오른쪽 희미한 길을 따라 들어가서 산줄기 쪽으로 붙는다. 길이 없을 것 같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훌륭한 길이 나타난다. 개척단의 안내리본을 참고하자. 무덤을 지나고 살짝 오르면 산허리를 타고 삼족대로 가는 호젓한 숲길이 이어진다.

    ■솔 향 진동하는 포근한 산길 걷기도 좋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운강고택으로 가는 골목.
    10분 후 능선 갈림길. 갓등산 등산로와 연결된 길이다. 왼쪽으로 살짝 내려서면 곧바로 조선 중종 때 학자인 삼족당 김대유 선생이 낙향 후 후진양성을 위해 지었다는 삼족대다. 유유히 흐르는 동창천 물길을 굽어보며 한동안 상념에 잠겨본다. 삼족대 아래의 팔각정은 지난 2007년께 지은 것이다. 우측으로 돌아 내려가면 20번 국도. 왼쪽으로 꺾어 5분쯤 가면 매전교를 만난다. 매전교를 건너면서 바라본 삼족대와 동창천의 어우러짐이 정겹다. 삼족대 뒤쪽 멀리 갓등산과 학일산 줄기도 눈에 들어온다. 다리 건너 5분쯤 가면 당호버스정류소 앞의 당호리 표지석이 보인다. 우측 아스팔트길로 직진하면 곧바로 도로표지판이 나타나고 우측 산 능선으로 접어드는 산길이 있다. 완만하고 걷기 적당하면서도 바닥에는 솔잎이 융단처럼 깔린 길이다. 이 능선길에도 진달래가 한창이다.

    포근한 흙길을 따라 올라 경주 이씨 묘를 지나고 진달래와 참철쭉이 뒤섞인 길을 5분만 더 오르면 해발 285m 삼각점봉이다. 이어서 평편한 길을 따르는데 솔향 실은 봄바람이 나그네 이마의 땀을 씻어준다. 10분쯤 가다가 만나는 갈림길에서는 주의가 필요하다. 직진하는 내리막을 계속 타기 쉽지만 오른쪽 2시 방향의 완만한 길을 따라야 한다. 역시 안내리본을 참고하자. 200m쯤 가다가 다시 갈림길이 나타나면 이번에도 우측 전방의 봉우리를 보면서 오른쪽 길을 따른다. 길이 조금씩 둔탁해지는 느낌이다. 암릉길 옆 멋들어진 소나무를 지나 살짝 오르면 왼쪽이 탁 트인 전망대. 억산과 구만산 북서쪽 자락이 드러난다. 여기서 본 산은 바다와 같다. 서로 겹치는 능선들은 물결치는 파도를 닮았다. 산이 바다라면, 그 자락에서 산나물 캐는 봄 아낙은 해녀 또는 잠녀(潛女)인가.

    (관하정)
    ■전망대 설 때마다 영남알프스 풍광 만끽

     
      삼족당 김대유 선생이 후학양성을 위해 지은 삼족대.
    잠시 후 이번에는 오른쪽이 탁 트이는 또 다른 전망대다. 동창천 자락의 무심암과 성주바위가 손에 잡힐 듯하고, 눈을 들면 용당산 비룡산 효양산(호랑산)이 가깝게 다가선다. 또 그 뒤로는 오래산성과 대남바위산 선의산 학일산 등 청도 일대의 아기자기한 산들이 서로 어깨 걸고 춤을 춘다.

    354봉을 넘고 전망대를 한 차례 더 지난 후 내려서면 안부사거리. 우측 동화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뚜렷한데 왼쪽 사곡마을 쪽 길은 희미하다. 개척단은 직진해서 살짝 오르막을 친다. 10분 후 307m봉에 오르면 주변 수목이 초토화된 산불지대. 저만치 부처산을 보면서 산불지대를 통과해 살짝 솟은 곳에서 왼쪽으로 본격적인 내리막길을 따르면 10분 후 임도인 애암고개에 닿는다. 왼쪽은 마을 입구의 애암이라는 바위 때문에 옛날에는 애암마을로 불리기도 했던 남양리 아음마을로 가는 길이지만 우측 장연리 쪽으로 간다. 부처산 자락 허리춤을 휘돌아가는 길이다. 부처산은 제8코스와 9코스에서 보이던 일명 '와불능선' 중 부처의 발꿈치 부분에 해당하는 산인데 정식 명칭이라기 보다는 인근 주민들이 부르는 이름으로 이해해야 한다. 내리막인 줄 알았던 임도가 갑자기 오르막으로 변하지만 당황할 필요는 없다. 살짝 올랐다가 다시 내리막이 연결되니까. 종점인 장연리마을회관까지는 20분 정도 걸린다.

    (삼족대)

    ◆ 떠나기 전에

    - 선암서원서 고택 숙박체험 해볼 만

    (선암서원의 천정 공포 모습으로 국내 서원에서는 보기가 드문 모습이란다)

     
    제10코스 출발지인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선암서원(仙巖書院·사진)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인 소요당 박하담과 삼족당 김대유를 함께 모신 곳이다. 경북유형문화재 제79호인 이 서원의 본관 격인 강당은 대청마루 천정에 다포식 공포를 설치한 이색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 또한 강당 앞문을 나서면 동창천 변의 용두암과 용두소 등이 노송들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강당 앞뜰의 수백 년 된 배롱나무 두 그루는 여름이면 붉고 화사한 꽃을 피워 서원 전체를 뒤덮는다. 서당 건물 자체의 기품과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은 안동 도산서원에 비견될 만큼 높은 미학적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는 박향숙 씨가 서원을 관리하면서 전통고택 숙박체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백일홍 꽃이 활짝 피는 여름 휴가철에는 방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인터넷홈페이지(http://sunam.co.kr) 또는 전화(070-4150-8445)로 예약 문의를 할 수 있다.

    한편 삼족대 인근 매전교에서 10분 정도만 면소재지인 동산리 쪽으로 가면 천연기념물 제295호로 지정된 '매전면 처진소나무'도 볼 수 있다.


    ◆ 교통편

    - 청도발 운문사행 버스 타고 신지리서 하차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청도역에서 내린다. 부산역 기준 오전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 6시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10시20분 등 자주 있는 편이다. 1시간 소요, 4800원. 청도역에서 나와 왼쪽으로 5분 거리에 있는 청도버스터미널에서 운문사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신지리에서 하차한다. 오전 7시40분, 9시20분, 10시40분, 11시30분 등 하루 8회 출발한다. 3200원. 코스 종착지인 장연리마을회관에서는 매전면 온막리 버스정류소까지 걸어야 한다. 25분 소요. 동곡에서 출발해 밀양시 상동면 유천 행 버스를 탄다. 상동역이 있는 곳이다. 오후 3시05분, 4시05분, 5시35분, 6시35분, 7시35분 등에 탈 수 있다. 장연리에서 온막리까지 매전 개인택시(054-372-8434)를 이용해도 된다. 7000원 안팎. 밀양 상동역에서는 오후 5시45분, 7시40분(막차) 등에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를 탄다. 자가운전의 경우 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린 후 좌회전, 긴늪삼거리에서 청도방향 25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한다. 상동역 지나 신곡삼거리에서 좌회전, 상동교를 건넌 후 25번 국도를 버리고 오른쪽 매전 금천 방향 58번 국도를 탄다. 동창천을 따라가다보면 매전면 소재지의 처진소나무를 지나 매전교를 만난다. 우회전 해 매전교를 건너 진행하면 금천면 신지리 만화정 앞에 닿는다.


    # 임진왜란때 의병 일으킨 밀양박씨 14義士

     
      청도 선암서원 뒤뜰에 있는 '임란창의 의사 전적비'를 둘러보고 있는 개척단원들.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보다 그렇지 않은 옛이야기가 훨씬 많은 것을 알지만, 영남알프스 둘레길을 걷다 보면 이같은 사실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특히 이번 주 답사한 제10코스에서도 마찬가지다. 경북 청도군 금천면과 운문면 매전면 일대에 신화처럼 전해져 오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지역 의병들의 활약상과 숭고한 희생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집안의 부자지간, 형제지간, 사촌지간 등 밀양 박씨 가문의 '14 의사(義士)' 이야기를 듣다 보면 "왜 이런 이야기가 교과서에는 빠져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인상 깊다.

    물론 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겠지만 현지 주민의 입을 통해 직접 들으면 더욱 실감나기 마련이다. 둘레길 개척단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은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만화정에서 만난 박성규(61) 씨. 그는 만화정을 처음 지었던 소요당 박하담 선생의 후손이다. 과거에 장원급제하고도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매진했던 소요당의 후손 답게 박 씨 역시 대구에서 고교 교감선생님으로 재직하다가 명예퇴직하고 낙향, 만화정과 운강고택 등 고향의 문중 고택들을 관리하고 있다.
    (봉황애)
    만화정 내부를 속속들이 보여주던 박 씨는 "우리 역사상 한집안 출신 14명이 한날한시에 침략자들과 맞서 싸우기로 결의하고 전장에 나선 일은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가상한 일 아닌가"라며 운을 뗐다. 박 씨에 따르면 밀양 박씨 가문 14의사는 만화정 앞의 버드나무 뜰에서 창의(倡義), 의병을 조직해 어성산성에서 왜적과 함께 싸웠다. 그 가운데 천성만호 박경선 공은 전투 중 한쪽 팔목이 잘려나가는 부상에도 적장을 끌어안고 어성산의 절벽인 봉황애에서 동창천으로 함께 몸을 던져 순국했다. '청도 14의사 공훈록'에 따르면 그는 이후 승정원좌승지로 추증됐다. 조정에서는 전쟁이 끝난 후 이들 대부분 의사들에게 무훈을 따져 1~3등 공신에 책봉했다.

    박 씨의 안내를 받아 선암서원 뒤뜰에 있는 '임란창의의사 전적비'도 둘러볼 수 있었다. 1974년에 건립된 이 전적비는 선암서원 서쪽 동창천 건너에 자리 잡은 어성산과 봉황애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선암서원과 만화정 운강고택 등을 두루 안내한 박 씨는 "고택들의 내력과 건축물의 기품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곳 전적비까지 들러서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떨쳐 일어섰던 선현들의 조국애도 함께 느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 세심한 배려 눈에 띄는 운강고택의 특이한 구조

    (운강고택)
    소요당 박하담의 12대손인 박시묵이 19세기 후반에 크게 확장해서 지었다는 운강고택(중요민속자료 제106호)은 안채와 사랑채가 모두 별도로 'ㅁ'자 형태로 지어진 대저택이다. 생활의 필요에 따라 공간구성이 짜임새 있게 이뤄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안채 대청마루와 축대 사이의 나무 발받침과 사랑채 옆의 화장실 구조가 눈에 띈다. 안채 마루 발받침은 대청마루와 축대 사이에 계단 높이의 받침을 한 층 더 둠으로써 여성들이 오르내리기 수월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사랑채 옆 화장실은 소변기와 '푸세식' 대변기가 분리된 구조에다 목재를 사용한 깔끔한 마감처리가 눈에 띈다. 집주인을 비롯한 양반들은 이 화장실을 사용했고, 하인들이 사용하던 뒷간은 따로 있다. 운강고택으로 들어서는 돌담길도 운치가 그만이다.


    문의=주말레저팀 (051)500-5169 이창우 개척단장 010-3563-0254 / GPS·동영상 www.kookje.co.kr
    글·사진=이승렬 기자 bungse@kookje.co.kr 





    운강고택을 찾아가는 길로 주위에 한집안으로 내려온 고택이 여럿 있다

    선암서원(仙巖書院·사진)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인 소요당 박하담과 삼족당 김대유를 함께 모신 곳이다.

    선암서원의 수백년 된짐한 베롱나무와 소요대로 나가는 쪽문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지역 의병들의 활약상과 숭고한 희생 이야기를 기록하고 한집안의 부자지간, 형제지간, 사촌지간 등 밀양 박씨 가문의 '14 의사(義士)'를 남기기 위해 세운 '임란창의의사 전적비'

    '임란창의의사 전적비 아래에 있는 입암제 제실이다. 원래의 건물은 너무 낡아 2010년 7월 그때의 모습 그대로 복원을 하였다 한다.

    동창천에서 본 관하정, 이제는 봄이 왔는지 수목들이 푸른빛을 띠고 있다.

    선암서원 맞은편의 똥뫼로 이산은 용두암의 여의주로 주산이라고도 한다.

    선암서원으로 용두암과 용두소

    어성산의 봉황애 절벽의 모습. 천성만호 박경선 공은 전투 중 한쪽 팔목이 잘려나가는 부상에도 적장을 끌어안고 어성산의 절벽인 봉황애에서 동창천으로 함께 몸을 던져 순국한 장소이다. 아래 사진은 봉황애의 모습...




    어성산 오르는 둘레길 모습

    어성산성으로 밀양박씨 14의사가 임진왜란때 동래성이 함락되고 15일만에 이곳 청도까지 들어온 왜군들하고 격전을 벌린 현장이다.
    전망대에서 본 영남알프스 모습




    동호리릐 왕버들나무로 보호수이며 뿌리가 서로 붙어 연리근이다.
    삼족당 김대유 선생이 머문 곳으로 삼족대이다.
    동창천변의 삼족댜 모습으로 매전교에서 본 모습
    매암고개로 가는 둘레길의 모습들...


    애암고개로 가는 둘레길 전망대에서 본 영남알프스와 그 둘레의 산들...



    매전면 소재지인 동산리 동창마을과 그뒤로 통내산의 모습
    바위가 있는 부처산으로 남양리에서는 부처산으로 부른다.

    애암고개로 남양리와 장연리 장수곡을 있는 고개이다.
    사실 둘레길 취재팀은 많은 고심을 하였다. 남양리 마을을 통과하여 애암고개를 넘어 장연리 장수곡으로 넘어가는야 아니면 200~300m대의 야산을 넘어가느냐?.를 두고 두 코스를 다 답사를 하였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 호화리와 남양리 사잇의 작은 능선을 둘레길 노선으로 확정을 하고 남양리 마을길로 오르는 시멘트 포장길은 우회길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 우회길도 여기 사진을 남겨 놓았다. 
    도로변에 있는 남양리 당산나무로 뿌리가 큰 방구를 감고 올라가고 있었다. 
    아음마을로 예전에는 애암마을이라 불렀다한다. 입구의 바위절벽 때문인 것 같다.
    배씨효자각뒤로 부처산이..
    사곡저수지에 본 애암고개가 v자의 파여진 곳이며 좌측이 부처산이고 우측능선이 영남알프스둘레길이다.
    애암고개로 이어지는 흙길과 시멘트길이 번갈아가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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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문댐에는 운문면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법정동인 7개리가 수몰되어 있어 우리의 문화유산인 지석묘와 많은 문화재가 수몰 되었다. 그래도 운곡정사나 원모재는 수몰지역에서 더 높은 시루봉 비탈에 자리를 옮겨와 수몰의 아픔을 면했지만 지금 처해진 문화재의 현실을 보면 찾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대천리에서 나발고개를 돌아가면 만나는 운곡정사와 원모재, 운곡정사는 본 건물 뒤로는 살림집이 있어 대문을 들어서니 개 한 마리가 어슬렁 어슬렁 댕기면서 방문객을 위협하였다. 목에는 줄을 달아 놓았지만 10m는 족히 되 보여 살림집으로 들어가는 중문을 막고 서 있어 운곡정사인 본 건물도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다. 원모재는 사실상 들어가는 입구가 잠겨 있어 관람을 할 수 없으며 담밖에서 까치발을 들고 구경을 하면 볼 수 있었다. 'ㄱ' 형태의 건물을 볼려면 우측의 담장을 따라가면 운문호와 함께 사진에 담을 수 있다.





    운곡정사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순지리342-2 운문댐도로변에 위치를 해 있는 운곡정사와 는 원래 운문댐 수몰 지역에 위치를 해 있었는데 1993년 순지리 수몰지역에서 현 위치로 이전을 하였다.

    이 운곡정사는 취죽당 김응명의 8대 손인 운곡 김몽노(1828~1884)의 생가로 운곡은 만년에 이곳 부근인 운문면 방음리 서지산 아래 무적천변에 낙화정을 짓고 문인들과 교류를 하며 지냈는데 낙화정이 낡고 쇠락하여 순지리로 옮겨오면서 편액도 이곳에 붙였다한다. 눈에 띠는 것은 사랑채의 온돌방 문틈에 중간설주를 설치하는등 옛 방식이 남아 있다 한다.

    경상북도문화재 자료 제90호


    운곡정사 앞 마당을 지키고 있는 개, 목줄을 묶어 놓은 상태지만 길이다 길어  가정집을 들어가는 중문은 물론 운곡정사 중간까지 다녀 충실하게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원모재 뒷편에서 본 모습으로 운문댐을 바라보고 있다. 우측은 운곡정사와 가징집

    굳게 닫혀 있는 원모재로 운곡정사 가정집이 작은 쪽문이 있는데 그 쪽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 같다.

    원모재

    취죽당 김응명(1593~1647)과 그의 아들 원계 김주(1612~1678)를 모신는 재실이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지만 1967년 중수를 하였다. 원모재도 운곡정사와 함께 1993년 수몰지역인 순지리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원모재의 본건물을 보면 독특한 ‘ㄱ’자 형태의 구조로 독특한 평면구성이며 대문채는 우진각지붕으로 평삼문의 형식이다. 경상북도문화재 자료 제232호.


    'ㄱ'자 형의 재실 모습






    찾아가기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3200원. 50분 소요. 언양버스터미널에서 동곡 경유 대구행 완행 버스를 타면 방음리을 지나 순지리 운곡정사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운행. 대천개인택시(054-371-6997)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자가용 이용시에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35번 국도를 타고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69번 지방도를 타고 운문령을 넘어 청도 방향으로 가면 방음리 새마을동산 앞을 지나면 운곡정사, 원모재 안내판이 보인다.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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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대비사는 고려시대 이곳으로 옮겨 왔다. 그 이전의 오갑사 사찰은 어떤 이유에선가 모두 폐찰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운문사도 폐찰되었다가 보양국사가 까치의 도움을 받아 절터를 찾아 운문사로 이어져 오고 있듯이 대비사도 그 이전의 소작갑사는 폐찰이 된 모습을 박곡리 곡란마을 뒤 베틀바위 아래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곳 대비사는 신라진흥왕 18년인 557년에 복호산 아래에 있는  북대암 옆 금수동에서 한 신승이 3년 동안 수도한후 560년에 7년간에 걸쳐 대작갑사 소작갑사,소보갑사 천문갑사 가슬갑사인 오갑사를 창건하였다. 대작갑사가 현재의 운문사이며 소작갑사가 현재의 대비사이다. 소작갑사에서 대비사로 이름이 바뀌것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자대비"'에서 따 왔다는 설과 신라시대 왕실의 대비가 수양차 이절에 머물렀다하여 대비사로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비사는 신라진평왕22년인 600년에 원광법사가 운문사와 함께 중창을 하였다한다. 그후 사찰은 폐찰의 수순을 밟다가 고려시대 이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와 중건이 되었는데 현존하는 건물인 대웅전은 보물제8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중기의 건축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여지며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으로 전체구성이 짜임새가 있고 다포계의 공포로 구성이 되어 있다 현재 대웅전의 외관은 단청을 입히지 않았는지 모를 정도로 원래의 목재건축물로 돌아가 있다. 세월의 흔적은 어쩔 수 없는지 대웅전의 빚바렌 단청으로 그의 무게가 더욱 느껴진다.

    교통편: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열차와 버스(2차례)를 갈아타야 한다. 부산역에서 청도행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 출발시각은 오전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과 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등이다. 1시간 걸리며 4800원(주말 5000원). 청도역 앞 청도시외버스터미널에서 운문사행 버스를 타고 금천면 동곡에서 내린다. 오전 7시40분, 9시20분, 10시40분에 있다. 1시간 걸리며 3500원. 동곡정류장에서 산행 기점인 박곡리로 가기 위해서는 마을버스를 타야 하는데 15분 걸린다. 동곡정류장 입구에 있는 개인택시(054-372-3066)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는 대구-부산 고속도로를 타고 청도TG에서 내려 밀양·청도 방면 25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했다가 곧바로 경주·운문 방면 20번 국도로 좌회전한다. 운문사 방향으로 동곡재를 지나 동곡리 사거리에서 직진한 후 남양·오봉 방면 919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 동창천을 건너 '대비사 6㎞'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해 들어가면 박곡리에 닿는다. 박곡리석조여래좌상을 지나 박곡저수지를 돌아가면 대비사앞 주차장이다.








    대비사는 이무기의 전설이 남아 있다. 어느시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비사 작은 암자에 스님과 상좌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날 한방에서 잠을 자던 스님은 감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옆을 보니 상좌가 잠을 자고 있었는데 상좌의 몸을 만저 보니 몸이 얼음장 처럼 차가워 있었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잠을 청하는데 그 다음날도 상좌의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는게 아닌가. 다음날밤 스님은 잠자는 척 하면서 상좌의 동태를 살펴보니 상좌는 스님이 자는 것을 확인한후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와 옆에 눕고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저 들었다. 역시 몸이 차가운 상태였다. 다음날 밤이 되어 상좌는 다시 스님이 자는 것을 확인 한후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자는 척 하던 스님도 뒤따라 나와 상좌를 따라가니 상좌는 대비사 앞 연못에서 입고 있던 옷을 벗더니 연못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잠시 뒤 상좌의 몸은 이무기로 변해 물에서 수영을 하며 놀다가 다시 나와 옷을 입고는 산너머 골짜기인 이무기못안골에서 빗자루를 들고는 쓸고 있지를 않는가. 놀란 스님은 '네 이놈.상좌야. 네가 여기서 지금 무엇을 하느냐'하며 호통을 치니 상좌는 감짝놀라  이무기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며 '아 억울하다 천년을 기다렸는데. 오늘만 지나면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을 할 수 있었는데'하는 것이 아닌가. 이무기는 억울함에 꼬리로 뒷산의 바위를 힘껏치고는 뒤편의 호박소로 날아갔다는는 전설이 있는 대비사. 그 깨어진 바위가 억산의 깨진 바위가 되었다 한다.

    대비사에는 오래된 연륜 만큼이나 부도밭에 고승대덕의 부도탑이 11기 남아 있다. 지금은 부도밭 뒷편의 자연석에 석가여래좌상을 새겨 놓았다.









    대비사의 전신인 소작갑사터로 신라시대 신승에 의해 운문사와 함께 창건된 오갑사의 대비갑사 즉 소작갑사터다.
    지금은 대추나무 밭으로 조성이 되어 있고 밭사이로 연꽃무늬대좌와 석등의 받침대 그리고 깨어진 기왓장등이 옛날의 영화를 대변해주는 것 같다.
    소작갑사터에서 바라본 박곡리마을 전경. 그아래 저수지가 보이고 그 뒷 능선이 와불능선으로 명명을 하였다. 사진상으로는 안나오지만 왼쪽 끝 부분에 봉우리가 남양리에서는 부처산으로 불리고 있다 한다. 어째 이름이 맞아 들어간다는 느낌이...
    소작갑사터 아래에 있는 골안저수지로 이곳이 혹 대비사의 이무기 전설이 전하는 그 연못이 아닐까.상좌로 변한 이무기가 밤마다 나와 연못에서 수영을 했다는 이야기의 대비지가 아닐까. 정면 중앙에 보이는 독립가옥 밑이 옛대비사 터인 소작갑사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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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시루봉 아래에는 특이한 이력의 가옥이 있다 2005년 1월31일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으로 중요문화재 245호이다..임당리 마을에서는 이집을 내시집으로 부른다. 그리고 내시집으로 문화재로 등록된 것은 김씨 고택이 처음이며 김씨 고택은 일반 가옥과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반 가옥은 정남향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임당리 김씨고택은 남향이 아닌 햇볕이 잘들지 않는 서북향으로 서울의 임금이 있는 궁궐방향으로 가옥을 지은 것이 이채롭다.

    내력의 특성상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내시란 거세된 사람들이 임금을 보필하는 환관인데 낙향을 하여 거주 할 목적으로 집을 지었다 한다.  안채(6칸), 사랑채(4칸), 중사랑채(7칸), 큰고방채(4칸), 소고방채(4칸), 대문채(5칸), 사당(3칸)으로 구성되어 총 7동이다. 집 구조를 보면 양반가옥은 사랑채가 안채와 적당한 거리를 두며 떨어져 바깥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거주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이곳은 들어오는 출입문인 대문에 사랑채가 바짝 붙어 있고 큰사랑채는 대문을 정면으로 지켜보고 아녀자들이 거쳐하는 안채의 출입통로는 사랑채 옆 쪽문인 중문으로만 출입을 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어 안채로 출입하는 사람들의 동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지어져 있다 1500년경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 내력을 보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특성상 양자를 입양하여 내시의 가계를 이어 왔어며 김일준(1863~1954)은 정 3품 통정대부의 벼슬을 지냈고 16대까지 이어져왔다.

    그리고 ‘강희 25년 병인 윤 4월’이란 명문이 재실의 막새에 새겨 있는 것으로 보아 1686년 까지 건축연대가 올라감을 알 수 있다.
     

    찾아가는 길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3200원. 50분 소요. 언양버스터미널에서 동곡 경유 대구행 완행버스를 타고 동곡까지 간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운행. 동곡버스정류장(054-372-3881)에서 임당리까지는 오전 8시30분 9시50분 11시20분 등에 새마을버스가 출발한다. 10분 소요. 버스가 여의치 않으면 동곡에서 택시를 타면 된다. 5000원 안팎. 운문면 소재지인 대천 버스 정류장에서 금천면 임당리 까지 도보로 25분 소요.
    자가용 이용시에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69번 지방도를 탄다. 운문사 입구를 거쳐 운문댐 아래 운문교를 건너자 마자 좌회전, 동창천을 왼쪽에 끼고 강둑길을 가다가 왼쪽 다리를 건너면 임당리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작은 사랑채와 만난다. 그 옆 중문이 안채로 들어가는 출입문으로 입구 우측 작은 공간에서 출입자의 동태를 확인 할 수 있다.
    대문으로 이곳을 들어서면 왼쪽 정면으로 큰사랑채와 정면으로 작은 사랑채가 있다.
    큰사랑채로 대문을 정면으로 보고 있다.
    작은사랑채
    재실로 들어서는 쪽문으로 이문이 안채로 연결된다.
    왼쪽이 출입구인 대문이고 정면이 큰사랑채, 우측이 작은 사랑채이다.
    재길건물로 이건뭉 막새에서 '강희25년 병인 윤 4월'이란 명문이 나와 처음 건축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재실에서 안채로 통하는 쪽문으로 좌측건물이 작은사랑채이며 우측건물이 아녀자들이 거주하는 안채건물이다.



    아녀자들이 거주하였던 안채건물
    대문으로 통할 수 있는 유일한 출입문으로 왼쪽건물이 작은 사랑채이다.


    안채와 작은사랑채건물


    작은사랑채에 붙어 있는 감시 구멍으로 중문을 보고 뚫여 있다. 원래에는 나뭇잎모양이었다 한다. 지금은 훼손되어 사랑의 상징인 하트 모양으로 보여 내시의 아픈 마음을 보여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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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에는 항상 전설이 있기 마련이다.
    여기 청도에서 자랑하는 공암마을의 공암풍벽도
    마을의 어르신들은 제2의 경북 금강산으로 자랑을 하신다.
    아니나 다를까.
    회룡포나 안동의 하회마을 처럼 물이 돌아가는 물도리이가 남쪽지방인 청도 동창전에도
    있어니
    여기또한 용의 전설을 가지고 있다.
     
    공암풍벽


    구룡산에서 이어지는 용의 능선이라
    열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다 아홉마리는 승천을 허락하지만  
    한마리는 도로 구룡산으로 떨어지니
    그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여기
    공암에 용의 모습이 되었는가
    .
    유난히 용의 전설이 많은
    이곳
    사룡산
    구룡산
    반룡산
    용귀




    용머리
    그의 형상을
    마을에서는 용암이라 부른다네
    그아래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용혈이 뚫여 있어다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한다. 


    물돌이 곡천대 아래 
    용이 살았다는 굴이 있었다하고
    명주실 한타레를 풀어넣어보니
    그 명주실 다 풀려 
    그아래 마당수에 
    명주실 실타레가 올라 왔다는데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ㅋㅋ 



    곡천대 굴에 살던 용한마리
    하늘로
     올라가면서
    심술을 부렸다는데
    꼬리로 큰바위 절벽을 내려치니
    큰바위가 둘로 갈라졌다하네.


    용이 갈라 놓은 바위틈사이가
    공암이라 지금은 부르고
    신작로가 생기기전
    통행길이 되었다하네
    이길이
    아니면 오도가도 못했다는데...
    .

    순이엄마도 자야엄마도
    굴바우골창백이
    이길을 넘어서 시집을 왔다하네.
    대구에서 청도읍에서...
    지금은 신작로가 뚫여
    차들도 생생 달리지만
    그때는
    꿈도 못꾸어 봤네...
     

     


    곡천대
    물가에 노닐던 새한마리
    학인지 왜가리인지..

    예전에 이곳 곡천대에
    학도 날아와 살았다는데
    그래서 학소대라 불리었다네

    지금은 잠겨버린
    공암풍벽에
    인간의 이기심이  마을은 수장되고
    운문댐이되었다네...
















    찾아가는길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3200원. 50분 소요. 언양버스터미널에서 동곡 경유 대구행 완행 버스를 타면 방음리 새마을동산을 지나 대천마을버스정류장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운행. 대천마을버스정류장에서는 동곡에서 정상 마일행버스가 09:00, 11:50, 15:30, 18:50분과 정상행 직행버스13:50,20:10 직행버스인 산내행은 07:00, 12:20, 19:00에 있다. 공암마을에 하차를 하면 되는데 공암풍벽은 버스가 왔던길을 되돌아 고개안부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직행인 코스 종착지인 공암마을에서는 대천리나 동곡버스터미널(054-372-3881)까지 가는 버스가 오후에 드물게 있다. 오후 5시10분 전후와 7시10분 등에 있는데 이 경우 대천리에서 언양행 막차(오후 5시10분 출발)를 타기 힘들다. 따라서 시간을 잘 맞추어야한다. 대천(19:05분 산내막차)에서 산내(20:30분 경주막차)로 가서 경주로 거쳐 오는 방법도 있다.대천개인택시(054-371-6997)는 대천에서 공암마을 입구 고개까지 1만5000원 안팎.
    자가용 이용시에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35번 국도를 타고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69번 지방도를 타고 운문령을 넘어 청도 방향으로 가면 방음리 새마을동산을 지나 운문댐을 지나 대천리 표지석에서 경주산내방향으로 우회전하여 망향정을 지나직진한다. 운문댐을 돌아가는 도로의 최 정점에 올라서면 우측산으로 오르면 공암풍벽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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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문사를 가다보면 방음리 새마을동산 기념비가 서 있다.

    이곳은 1972년 그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격려차 방문한 기념으로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대 이곳을 지나 오른쪽 골목으로 진입을 한다.
    방음리 말음마을로 아름다운 동네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곳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선녀가 내려와 노래를 부르는데 이곳에서는 항상 끝말만 은은히 들렸다하여 말음마을로 부른다.
    이곳에 지금은 선녀는 없지만 아름다운 마음으로 아름다움이 뿜어 나오는 한지로 예술을 승화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분이 있다.
    영담한지미술관(054-373-3638)의 영담스님으로
     
    '사실 종이 가지고 무신 예술을 하겠어' 
    간단히 치부하며 쉽게 넘겨 버릴 수 있지만 보갑사 영담스님은 우리나라 전통 한지를 아름다움으로 표현하시고 계신다.
    사실 사찰의 스님들에 의해서 한지 제지술의 명맥이 이어져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에서 운문사로 들어가면 억산과 운문산 사이를 넘는 재가 있다. 험준한 고개이름은 딱밭재로 예전에는 이곳에 닥나무가 밭이 있었다 한다. 그리고 그 골짜기를 천문지골이라 산꾼들 사이로 불리고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운문사란 큰 사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긍이 가는 말인 것 같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 간다는 주목처럼 닥나무에서 한지로 만들어지면 한지는 일천년의 기나긴 세월을 견디어 낸다고 한다.. 비단은 고작 500년이지만 그만큼 한지의 생명력이 오랜간다.

    영담스님의 한지 만들기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출가하기 이전인 한의원에서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한약봉지를 보아 왔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한지를 접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다.
    사실 한지를 만드는 과정은 힘든 노동이다. 닥나무를 잘라와 물에불리고 껍질을 벗겨 삶아서 백피로 만들어 하는 작업은 고행이다.
    그런 작업을 아흔아홉번 손이 가야만 종이가 되고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백번의 손길이 가야만 한지가 된다.
    그래서 백지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어렵게 만든 한지가 흰종이로소만이 아닌 예술로 승화 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영담스님.
    자연에서 나온 색감으로 자연의 작품을 연출하시는 작은 공간인 영담한지미술관은 복층 구조인 2층으로 되어 있다. 스님이 손수 만드신 예술품이 창문과 벽에서 만날 수 있다. 
      

    찾아가기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3200원. 50분 소요. 언양버스터미널에서 동곡 경유 대구행 완행 버스를 타면 방음리 새마을동산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운행. 대천개인택시(054-371-6997)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자가용 이용시에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35번 국도를 타고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69번 지방도를 타고 운문령을 넘어 청도 방향으로 가면 방음리 새마을동산 앞에 닿는다.





















    방음리 말음마을로 영담한지미술관 입구입니다. 여기서 우측길로 따라가면 됩니다.
    운문댐에 잠겨 있는 실향민들이 심었다는 벚꽃나무가 운문댐 도로를 따라 8~9km 이어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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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교산&그너머 <721> 제8-1코스 : 청도 운문면 방음리 ~ 공암리

    굽이굽이 운문호 50리길 걸으니 '천하절경' 공암풍벽이…

    현재의 운문댐 을 돌아가는 도로의 모습이다. 지금 운문산 8코스와 8-1 코스는 벚꽃 터널을 이루고 있다.



     
    경북 청도군 운문면에 자리잡은 운문호는 밀양호와 더불어 영남알프스 둘레길에서 만나는 2대 호수 중 하나다. 1996년 완공됐다. 대구시 영천시 경산시 청도군 등 4개 지역의 상수도 취수원으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홍수 조절 기능, 수력발전 기능 등 다목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호산(314m)과 종지봉(367m) 사이 협곡에 건설된 길이 407m 높이 55m 규모의 댐에 갇힌 호수는 이 같은 현실적인 기능 외에도 주변의 영남알프스 자락과 어우러지며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그 아름다운 풍광과 호젓한 분위기로 인해 언제부턴가 드라이브 및 하이킹 여행지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순환도로 상 발길 멈추는 곳 어디서든 호수 주변 풍경이 다르게 보이고, 하늘과 구름이 비친 수면도 시시각각 다른 표정을 짓기 때문에 지겨울 새가 없다. 운문호가 품고 있는 다양한 볼거리와 이야깃거리를 즐기며 걷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되는 길이다.


     
      경북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의 공암풍벽은 동창천이 굽어지는 곳에 있는 거대한 절벽이다. 운문호 축조 이전 청도 최고의 절경으로 손꼽혔다. 50리 길을 걸어서 공암풍벽에 도착한 둘레길 개척단이 주변 풍광을 살피고 있다.
    특히 봄과 가을이 좋다. 4월 중순부터 말까지는 수몰지구 실향민들이 '수구초심'의 염원을 담아 심은 벚나무에서 새하얀 벚꽃이 피어나 길의 정취를 더욱 높여준다. 영남알프스 주봉인 가지산과 운문산을 넘어온 봄바람에 흩어진 꽃잎은 스스로 '꽃비'가 되어 물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잔잔한 호수에 처연히 내려앉는다. 고향집을 잃은 실향민의 정서를 닮았다.

    또 가을에는 청도8경 중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공암풍벽(孔岩楓璧)'에서 단풍의 멋을 즐길 수 있다. 이번 주 개척단이 찾아간 제8-1코스는 운문호를 한 바퀴 돌아 공암풍벽을 찾아가는 길이다. 동창천이 운문천과 만나기 직전 큰 물돌이를 이루는 곳에 우뚝 솟은 절벽인 공암풍벽은 옛날부터 청도 제일의 풍광을 뽐낸 곳으로 유명하다. 그곳을 물들인 단풍이 너무도 아름다워 단풍 풍(楓)자를 썼을 정도이니 가을 경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코스 막바지에서 공암풍벽을 만나는 순간 그동안의 피로와 지겨움이 단번에 사라져 버린다.

    ■ 운문호 순환하는 20㎞ 장거리·6시간 걸려

     
      GPX & GTM 파일 / 고도표 jpg파일
    제8코스의 중간 지점인 운문면 방음리 '방음동 새마을동산'에서 출발, 공암리 버스정류소까지 가는 이번 코스의 총 길이는 20㎞. 지금까지의 코스 가운데 가장 길다. 순수하게 걷는 시간만 5시간, 휴식 등을 포함하면 6시간은 잡아야 한다.

    새마을동산 앞에서 운문댐 방향으로 69번 지방도로를 따른다. 봄바람에 살랑대는 운문호 물비늘이 곱다. 35분쯤 갔을까. 왼쪽 언덕에 경북도민속자료 제90호인 고택(古宅) 운곡정사(雲谷精舍)가 있다. 조선 중기 학자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많은 공을 세운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의 8대손인 운곡 김몽노(金蒙魯·1828~1884)의 생가다. 지금도 그 후손이 살고 있다. 그 옆의 원모재(遠慕齋)는 김응명과 그의 아들 김주를 모시는 재실이다. 홍매화 백매화 개나리 목련 등 봄꽃이 두 고택을 감싸고 있다. 뒤돌아서서 운문호를 바라보니 정면에 볼록한 개산(317.4m)이 눈에 든다.

    운문댐 방향으로 이동한다. 마주 오는 자전거 동호회원들이 반가운 인사를 건네준다. 호산 약간 못 미친 곳에서 아주머니들이 길이 1~1.5m짜리 참나무 둥치에 홈을 파서 표고버섯 파종을 하고 있다. 수몰지구 이주민들의 여러가지 생계 대책 가운데 하나가 표고버섯 재배다. 인건비와 종자구입비 등의 비용은 한국수자원공사 측이 지원해 준다고 한다. 올 봄에 파종하면 내년 가을에 수확할 수 있다.


    ■ 조망 좋은 호산 정상 왕복 급경사길 조심

     
      망향정에서는 개산(왼쪽)과 호산이 좌우에 보인다.
    볼록하게 솟은 호산으로 오르는 길은 예전에는 나발고개 내리막이 시작되기 직전 오른쪽으로 난 임도를 타고 들어가 곧바로 산행로로 진입하면 됐지만 지금은 막혔다. 할 수 없이 나발고개 내리막 포장도로를 타고 8분쯤 간다. 운문교 약 200m 못미친 오른쪽 공동묘지 옆 버섯농장 옆 길로 올라야 한다. 오르막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다. 땀을 한 바가지 쏟으면 호산 정상. 아담한 정상석을 지나 3분쯤 더 가면 무덤 터 옆 전망대다. 이곳이 '호랑이를 사랑한 처녀의 전설에 나오는 처녀의 무덤 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발아래 드러난 운문호의 풍광 만은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올랐던 길로 되돌아 내려서는 데는 15분쯤 걸린다. 묘지에서 막 도로로 합류할 즈음 눈앞에 멀리 보이는 억산 구만산 방향의 산세가 예사롭지 않다. 특히 억산 우측 구만산 부근에서 오른쪽으로 그려진 능선 모양이 마치 미륵불이 누워 있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어 신기하다. 개척단원 중 누군가 "와불(臥佛) 능선이다. 새로운 발견인데…"라고 외친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

    나발고개를 내려와 왼편으로 펼쳐 지는 풍경으로 와불을 확인 할 수 있다.
    ■ 운문면 대천리는 수몰지 주민 이주단지

     
      공암풍벽 능선의 가리봉에서 본 운문호 풍경.
    운문교를 지나면 운문면 소재지인 대천리다. 이 마을은 수몰 주민들이 이주해 온 이주단지다. 원래의 운문면 소재지인 대천리는 동창천과 운문천이 만나는 개산 남쪽에 있었는데 수몰됐다. 이후 금천면 방지리의 3개 마을 중 상방지마을에 속했던 이곳에 이주단지가 건설된 것이다.

    삼거리에서 우측 경주 방향 20번 국도를 탄다. 곧바로 왼쪽에 보이는 재실은 이모정(二慕亭).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의병장인 이모당(二慕堂) 박경전(朴慶傳)을 모신 밀양 박씨 집안의 사당이다. 완만한 오르막을 5분쯤 가면 운문댐. '운문호'라고 적힌 입석이 있고 댐 건너편에는 호산이 솟아 있다. 호랑이가 웅크린 채 호수를 내려다 보는 듯한 모습이다. 운문호 풍광을 굽어보면서 20분쯤 가면 문명중고 망향비와 망향정을 만난다. 수몰 이주민들이 호수를 바라보며 향수를 달래는 곳이다. 정자에는 수몰 전 마을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대천리 순지리 서지리 공암리 방음리 오진리 지촌리 등 7개 마을이 전부 또는 일부 잠겼다. 망향정은 점심 식사를 하기에 좋은 장소다.

    100m쯤 가면 갈림길. 왼쪽은 한내고개를 거쳐 경산으로 가는 길이다. 계속 직진하면 20분 후 개산 북쪽 자락을 지난다. '창말'로 불리는 이곳은 수몰 전 대천리의 곡식과 소금 등을 보관한 창고가 있던 곳. 댐이 만들어지기 전 대천리는 동창천과 운문천, 2개의 큰 물길이 합쳐지는 곳에 자리 잡아 물난리가 많이 났기 때문에 이곳에 따로 보관창고를 두었다고 한다.

    ■ 코스 막바지 공암풍벽 보며 감탄사 연발

     
      표고버섯 파종 작업 중인 운문면 주민들.
    호수를 휘돌아가는 국도 20호선을 타고 50분쯤 완만한 오르막을 걷는다. 이 오르막이 정점에 달하는 고갯마루가 바로 이번 코스의 하이라이트인 '공암풍벽'으로 향하는 입구다. 도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난 산길을 5분쯤 오르면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가리봉(361m) 정상. 운문호와 주변 산들의 모습이 온전히 눈에 들어온다. 공암풍벽이 가장 잘 보이는 전망대까지는 내리막을 타고 15분쯤 더 가야한다. 무덤을 지나 공암풍벽 전망대에 서면 '아, 운문호 자락에 이런 절경이 있었던가'라며 입을 다물지 못할 경이로운 풍광이 펼쳐진다. 예천 회룡포나 안동 하회마을처럼 물돌이가 일어나는 곳이긴 하지만 물돌이 안쪽이 평탄한 그곳들과는 달리 공암풍벽은 이탈리아 반도처럼 툭 튀어나온 능선이 가파른 절벽으로 이뤄져 있어 좀 더 특별하다.

     
      운문교 주변에서 왼쪽(남서쪽)에 보이는 와불능선.
    공암풍벽은 운문호 건설 이전,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인근에서 소문난 명승지였다. 이미 그 당시에 절벽 밑 공암리에 케이블카 설치 움직임이 있었을 정도다. 지금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묶여 버려서 공암마을을 통과해 절벽 아래로 갈 수가 없게 됐다. 공암리 주민들의 아쉬움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특히 가을 풍광만큼은 전국 어느 명승지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기에 더욱 그렇다.

    전망대에서 100m만 더 가면 구멍 뚫린 바위가 보인다. 그것이 바로 '공암'이다. 옛날 전설에 따르면 공암풍벽 아래 곡천대 용굴에 살다가 승천하던 용이 꼬리로 바위를 내려쳐서 생긴 구멍이라고 전해진다. 이곳은 경주와 청도를 오가던 유일한 길목이었다. 소 한 마리가 거뜬히 통과했다고 한다. 다시 가리봉 정상을 거쳐 20번 국도로 복귀, 코스 종점인 공암마을 버스정류소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 떠나기 전에

    - 호랑이를 사랑한 처녀 이야기

    호랑이를 사랑한 처녀의 전설이 있는 호산


    영남알프스 둘레길을 걷다 보면 마치 '전설따라 삼천리'를 따라가는 착각이 들곤 한다. 발길 닿는 곳마다 전설이 없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코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전설은 호산(虎山·일명 범뫼)에 전해 내려오는 '호랑이를 사랑한 처녀이야기'이다. 옛날 인근 골짜기에 단란한 가정이 있었다. 10대 후반의 아리따운 외동딸은 매일 저녁 숯 굽는 아버지와 밭일하는 어머니를 마중하러 동구밖으로 나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사라져 버렸다. 딸은 그 후 10년 넘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부모는 체념한 채 늙어갔다. 그런데 하루는 이 집에 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와서는 부부를 봉긋하게 솟은 앞산 정상부의 한 무덤 앞으로 데려갔다. 호랑이에게 납치됐던 딸의 무덤이었다. 그런데 처녀는 호랑이를 사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잔뜩 겁에 질렸으나 자신을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먹이를 구해 온 호랑이의 정성에 감복해 결국 사랑에 빠졌다는 것. 동굴에서 살던 처녀는 세월이 흘러 결국 병에 걸렸다. 처녀는 호랑이에게 고향집이 보이는 높은 곳에 묻어 줄 것과 부모님에게 소식을 전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호랑이가 부모를 데리고 간 것이다. 사람들은 이후 이 산 이름을 호산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 교통편

    - 종착지 공암리서 대천 개인택시 이용하길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3200원. 50분 소요. 언양버스터미널에서 동곡 경유 대구행 완행 버스를 타면 방음리 새마을동산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운행. 코스 종착지인 공암마을에서는 대천리나 동곡버스터미널(054-372-3881)까지 가는 버스가 오후에 드물게 있다. 오후 5시10분 전후와 7시10분 등에 있는데 이 경우 대천리에서 언양행 막차(오후 5시10분 출발)를 타기 힘들다. 따라서 늦어도 오후 4시20분 이전에는 완주 한 후 개인택시(054-371-6997)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1만5000원 안팎. 자가용 이용시에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35번 국도를 타고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69번 지방도를 타고 운문령을 넘어 청도 방향으로 가면 방음리 새마을동산 앞에 닿는다. 차량 2대를 이용해 종점인 공암마을에 1대를 먼저 주차하면 편하다.


    # 댐이 앗아간 것들

    - 곡천대·용굴 등 명소까지 삼킨 운문호

     
      운문댐 건설로 수몰된 7개 마을 주민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지은 망향정.
    개발은 늘 상실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이를 일컬어 '개발의 그림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인근 도시들의 상수도취수원, 홍수조절, 수력발전 등 현실적 기능을 목표로 지난 1996년 완공된 운문호는 영남알프스 북쪽 자락에 아름다운 호수가 됐지만 수몰지구에서 살아오던 주민들에게는 그에 못지않은 상실의 아픔을 남겼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삶의 터전이던 고향마을과 고향집, 어린 시절 뛰어놀던 그림 같은 놀이터와 청운의 뜻을 펼치기 위해 공부하던 모교도 모두 물 속에 잠겨버렸다. 이번 코스를 걷다 보면 운문호 건설로 수몰된 7개 마을 주민들이 실향의 아픔을 달래는 망향정(望鄕亭)을 지난다. 실향민들은 이곳에서 운문호를 바라보며 설움을 달랜다. 특히 망향정 앞에 있는 '망운교비(望雲校碑)'의 내용을 찬찬히 읽다 보면 그 아쉬움을 십 분의 일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1932년 개교해서 50년 만인 1982년 폐교된 운문국민학교 제7회 동기생들이 건립한 망운교비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말인 '수구초심(首丘初心) 망운지정(望雲之情)'이 새겨져 있다.

    이뿐일까. 저수지 축조는 청도 제일의 풍광을 자랑했던 공암풍벽의 많은 것들을 앗아갔다. 운문면 공암리 하수호(66·청도군 이장협의회장) 이장은 "옛날 경주·청도 지방의 선비들이 시류를 논하고 풍류를 즐겼다는 곡천대, 절벽에서 돌을 던져 넣으면 10여 분 동안 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깊었던 용굴, 공룡발자국, 옛날 신라 때 장육산에서 무술 연마를 하던 여섯 장군이 말을 탄 흔적이라는 전설이 서린 바위의 말발굽 자국 등도 모두 수몰됐으니 그 아쉬움을 어떻게 말로 다할까"라며 옛일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마을 북쪽의 왕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통일신라 말기에 인근에서 후백제 견훤군과 전투에서 패한 후 추격군을 피해 도주했던 길목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뭔가 굵직한 물건을 찾았거나 대물급 물고기를 잡았을 때 '왕건이 잡았다'는 말을 하는데 아마도 왕건과 왕재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인근 최고의 경승지였던 공암풍벽은 이제 상수원보호구역에 묶여 버려서 마을을 통해서는 가까이 가 볼 수 없는 곳이다. 가리봉 능선을 통해서나마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또 하나, 공암풍벽으로 연결된 기다란 능선에 있는 '가리봉'이란 이름에 대해 공암리 주민들은 생소해한다. 주민들은 오히려 이 봉우리에 옛날부터 불이 자주 났다는 뜻에서 불 화(火)자를 써서 '화고난'이라고 부르고 있다.


    # 운문면은 '별들의 고향'… 윤필용 장군 등 다수 배출

    운문호가 자리 잡은 경북 청도군 운문면은 '별들의 고향'으로 불리기도 한다. 여기서 '별'이란 다름 아닌 국군 장성급, 즉 장군을 일컫는 비유어다. 청도군 자체가 경북 지역에서는 장군이 많이 배출되기로 유명하지만 그중에서 운문면 출신자가 특히 많다는 것이다.

    우선 대표적인 사람이 지난해 작고한 '풍운의 군인' 윤필용 장군이다. 1961년 군사정변 이후부터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회의 의장의 특별한 신임으로 의장 비서실장을 역임했고 이후 국군방첩부대장과 수경사령관(소장) 등을 역임했지만 1973년 유명한 '윤필용 사건'에 휘말린 장본인이다. 윤 씨의 고향이 바로 이번 코스의 종점이자 공암풍벽에 둘러싸인 마을인 공암리다.

    제3사관학교 1기생으로 비육사 출신 최초의 장군, 최초의 대장 등의 기록을 세운 박영하 전 2군 사령관 역시 청도 운문면에서 태어났다. 오진리 출신인 박 장군은 둘레길 제7, 8코스에서 거쳤던 운문사 입구 신원삼거리 부근의 문명초교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또 '영원한 빨간마후라'로 알려진 김상태 전 공군참모총장 역시 운문면이 배출한 장군이다.

    문의=주말레저팀 (051)500-5169 이창우 개척단장 011-563-0254 GPS·동영상 http://www.kookje.co.kr
    글·사진=이승렬 기자 bungse@kookje.co.kr




    운곡정사 :조선 중기 학자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많은 공을 세운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의 8대손인 운곡 김몽노(金蒙魯·1828~1884)의 생가다. 지금도 그 후손이 살고 있다. 그 옆의 원모재(遠慕齋)는 김응명과 그의 아들 김주를 모시는 재실이다

    원모재 뒤에서 본 운문댐

    호산 전망대 정면으로 가야 할 길과 개산.


    이모정임진왜란때 의병장 제우당 박경전을 위한 사당으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것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그의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부모에 대한 효심을 옅볼 수 있다.원래는 순지리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192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이 댐 아래가 운문댐이 생기기 이전에는 건도랑이란 지명으로 불렸다. 그때는 이곳이 운문면과 금천면의 경계로 대천리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대천리 옛어른의 말을 빌리자면 건도랑, 즉 호산과 종지봉 아래인 동창전에는 도적들이 우글우글 그려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모든 물건, 돈을 강탈당하고 목숨만 겨우 부지하여 통과를 하였는데 도적을 피해 찾아 올라가는 곳이 호산과 시루봉사이의 나발고개 였다 . 나발고개로 올라가는 골짜기가 도둑놈골이라 부르며 지금의 도로가 넘어 다니는 재가 아니고 호산쪽으로 독립가옥 뒤가 옛날의 나발고개이다.

    운문댐을 걷다 보면 재미 있는 이야기가 한 토막 있어 소개를 한다. 지금은 어실마을이 운문댐에 잠겼지만 어실 마을뒷산을 어실산으로 불렸다. 그래서 어실 어른이 총산에 가서 총을 들고 개산에 올라가 사냥개를 몰고 호산에 있는 호랑이를 잡으러 갔다는 이야기가 마을에 전해 오는데 운문댐 망향정 주위로 어실산, 총산, 개산, 범산이 포진을 하고 있다. 개산과 호산은 풍수적으로 보면 호랑이는 개를 잡아 먹을라고 웅크리며 노려보고 개는 36개 도망을 칠려고 호랑이를 등지고 도망갈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운문댐을 휘감아 도는 20번 국도에서 본 공암풍벽의 모습으로 흡사 한마기의 용이 호수에 물을 마시러 내려오는 모습을 하고 있다. 끝 봉우리를 공암마을에서는 용암이라 부르고 있다.


    공암풍벽을 보러가는 능선상에 만나는 가리봉 정상으로 운문댐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공암풍벽의 모습으로 지금은 수몰되어 현재의 모습은 마을에서 보기가 불가능하다. 공암풍벽의 끝 부분에 돌아가는 곳이 곡천대로 불리는 곳이다. 이곡천대 아래 용굴이 뚫여있었다는데 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 한다.여기 굴에다 명주실 한타레를 풀면 2km밑 웅덩인 마당수에 그 실타레가 나왔다하는 전설과 학굴이 있어 항상 학이 노닐었다하여 학소대라 부른다.

    공암이란 이름을 얻게 된 바위로 바위와 바위사에 길이 나있다. 마을에서는 굴바위골 창배기로 불리며 도로가 뚫리기 이전에는 경주 산내와 청도로 오가는 중요한 길목으로 이고개를 넘지 못하면 가는 길이 없었다 . 곡천대에 아래 용굴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면서 꼬리로 내리쳐 공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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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는 천년고찰 운문사가 자리하고 있다. 운문사는 어떤 곳이냐?. 557년 신라 진흥왕 18년에 한 신승이 현 북대암옆 금수동에서 3년 동안 수도 정진하여 도를 깨닫고 내려와 도반10여명의 도움을 받아 560년 신라 진흥왕 21년에 7년 동안 오작갑사를 창건하였다 한다, 오작갑사인 운문사는 대작갑사(현운문사), 가슬갑사, 천문갑사, 소작갑사(현 대비사.대비갑사라고도 함),  소보갑사와 함께 창건하였다는 설화를 가지고 있다. 현 대작갑사인 운문사를 중앙에 두고 동서 남북으로 사갑사를 배치하였다 한다. 600년인 신라 진평왕 22년에 원광국사가 주지로 와 중창을 하게 된다. 원광국사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서 주석을 하며 가슬갑사에서 화랑인 귀산과 추항에게 화랑도의 기본 정신인 세속오계를 전해주어 신라가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 큰 역활를 하였다. 이때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하여 국력을 키우고 군비증강을 위하여 불교와 손을 잡고 운문사 일원에 화랑도의 훈련장이 들어서게 된다. 운문사는 그만큼 전략적 요충지로서 화랑도의 병참기지 역활을 하였으며 운문면 일대에는 선사시대때 부터 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문화유적이 많이 출토 되는데 문헌상으로 남아 있는 마을의 흔적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부터만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이전의 기록들은 남아 있지 않다.이 모두 화랑도등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라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운문사의2차 중창은 보양국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한후 왕건을 도와 이 일대를 평정하고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왕건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보양국사에게 운문선사란 사액을 내리고 전지500결을 하사하였다. 그후 1105년에 원응국사 학일스님이 왕사로 책봉되고 운문사는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며 1277년 고려 충렬왕때 일연선사가 주지가 되어 삼국유사를 집필하게 되었다 한다. 그 후에도 여러번의 중창을 거듭하며 오늘날의 운문사로 거듭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현재의 대 가람으로 변모를 하였다.


    운문사를 자세히 보면 여타 사찰과 다른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그 이유를 보면 운문사는  대웅전 비로전 금당등 모든 건물들이 운문산와 마주보고 있다. 즉 남쪽의 산을 향해 건립되었는데 풍수학적으로 보면 배산임수와는 정 반대이고 왼쪽은 복호산, 우측은 장군봉인 호거대로 운문사의 가람배치가 배산임수를 그대로 따라 운문산을 등지고  건물이 서 있었다면 현재의 운문사는 볼 수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한다. 그 이유는 운문사 옆으로 흐르는 약야계가 절 앞으로 곧장 빠져나가 재산을 모을 수 없고 운문산의 화기가 절을 덮쳐 비보 차원에서 다른 절과 반대방향인 가람배치를 하였다 한다. 

    사실 운문사 경내를 들어설때 보통 일주문을 통과하는데 운문사는 일주문 대신 2층의 법종루 밑으로 통하면 된다.

    영남알프스에 걸 터 앉은 절집 현판에는 모두 그 뒤 모산의 산명을 따라 이름을 붙인다. 가지산 아래 가지산석남사가 그러하고 통도사는 영축산통도사, 재약산표충사등 모든 사찰들이 그러하다. 영남알프스 운문사만은 유독 ‘운문산운문사’가 아닌 ‘호거산운문사’로 현판에 적혀 있어 어... 호구산이 어디지, 왜 운문산이 아니고 호거산으로 하였지 하며 궁금해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호거산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어느곳도 정답이 없으며 단지 현재의 우리도 옛 자료를 보며 추측을 할뿐이다. 먼저 운문사는 사찰이름에 나왔듯이 운문사란 이름이 먼저인지 아니면 운문산이 먼저인지 의문이 간다. 운문사란 937년인 태조20년에 후삼국통일을 도운 보양국사에게 왕건이 보답으로 '운문선사'란 사액과 전지500결을 내렸다한다. 그러면 운문산 보다 대작갑사로 불리던 운문사가 먼저 이름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이전부터 운문산으로 불리었을까하는 의구심도 해 본다..

    호거산은 과연 어디를 두고 하는 말일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운문사로 들어서는 왼쪽으로는 바위가 절벽을 이루는 두 봉우리가 있다. 산세의 모양이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모습이라 통점과 염창등 신원마을에서는 복호산으로 부른다. 그리고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갑사를 창건 할때에도 신승이 북대암옆 금수동에서 도를 깨닫고 운문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이곳을 호거대, 호거산으로 보는 이가 많은 것 같다. 다른부류는 운문산 일대로 범봉과 억산을 포함한 이곳을 호거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또 하나는 운문사 입구 우측의 툭 튀어오른 암봉이 호거대로 보는 시각이 있다. 신원리에서는 등선바위, 등심바위, 등신바위등으로 불리는 바위로 운문사에서 이 암봉을 장군봉으로 부르고 있다. 청도 향토사학회장 경북향토 사학회장인 박윤재 선생도 운문사 옆 호거대와 그 인근을 호거산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호거산을 ‘호랑이고 걸터 앉아 있는 산’이 아닌 다른 해석을 내 놓은 것이다.

    원광법사가 중국에 유학을 하였던 소주에도 똑 같은 이름의 호거산이 있는데 원광법사가 그 곳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신라로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원광법사는 운문사에 거주를 하면서 바위가 있는 호거대 일원을 호거산으로 지칭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그 사이의 계곡인 운문사를 가로자르는 큰골도 약야계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그래서 호거산은 원광법사가 중국의 소주 호거산에서 그 이름을 따 왔어며 위치는 호거대와 부근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인지 모르지만 장군평 뒤 우뚝 솟은 봉우리를 보호한다는 뜻인 호산으로 부르고 있다.




    운문사의 경내로 들어서면 처음 반기는 것이 500년 된 반송이다. 가지를 밑으로 축처저 일명 처진소나무로 불린다. 봄에 25말의 막걸리를 마시는 나무로 유명하며 안내판에는 어떤 고승이 소나무 가지를 꺽어 심었다하며 높이는 6m,둘레는 3.5m로 나와 있다. 천연기념물제180호.




    처진 소나무 옆으로는 만세루가 자리를 하고 있다. 정면7칸 측면4칸의 단층으로 된 팔작지붕이다. 약150평의 크기이며 목조건물이다. 넓은 우물마루에 천장은 천장은 산자를 노출시킨 연등 천장으로 기와명문에는 강희17년, 상량문에는 순치12년이라 명문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17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이 되며 용도는 대웅전과 마주 보고 있어 법회나 설법을 하던 장소로 보고 있다.


    새로 건립된 대웅보전이다.
    대웅보전의 내부 모습








    대웅보전으로 조선 숙종 44년에 중건되었다.정면3칸 측면3칸으로 다포계 양식이며 마륵전이라고도 부른다. 운문사의 대웅보전 터는 행주행으로 전복되는 배모양이다. 그 지세를 누르기 위해 대웅보전 앞에 쌍탑인 삼층탑을 세워 놓았다. 보물제835호




    삼층석탑 보물제678호



    오백전안의 모습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317호

    운문사 사천왕 석주 보물제318호





    원응국사비 보물제316호.



    이목소
    보양국사가 중국 유학길에서 귀국을 할때 서해 용왕의 초청을 받고  용왕을 만나 설법등 해박한 지식으로 용왕을 감동시키니 용왕은 그에게 자신의 아들인 이목(離目)을 같이 데리고 가 스님을 도우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니 보양국사도 어쩔 수 없이 데리고 귀국울 한다. 이 후 용의 모습을 한 이목은 운문사 옆 깊은 소에서 지내며 보양국사를 도우며 지내게 되는데.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어 인근의 주민들이 기근에 시달리게 되자 스님이 이목을 찾아와 비를 내리게 하였다. 그러나 천제는 하늘의 율법을 어기고 비를 내리게 한 이목을 잡아오라고 사자를 보양국사에게 보내었다. 보양은 이목을 마루 밑에 숨기고 나서 이목을 내어 달라고 하는 사자에게 법당앞의 배나무를 가르키며 '이목 여기 있소' 하니 사자는 배나무에 벼락을 때리고는 하늘나라로 돌아 갔다 한다. 이 이야기는 일연스님이 집필한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며 용이 되지 못한 뱀을 두고 이무기 또는 꽝철이라 하는데 이무기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한다. 운문사 오백전 뒤 극락교 아래에 있는 이목소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재의 이목소는 잦은 사태로 인해 메워지고 사찰의 중창으로 메워져 볼품없는 작은 웅덩이에 불과하지만 보양국사가 부임하던 때에는 아마 둘레가 100여m나 되는 깊은 연못이었는 것 같다.

    찾아가는길;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 운행. 3200원. 50분 소요. 언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구행 완행 버스를 타면 삼계리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출발. 운문사 정류소에서 하차하면 된다. 운문사 앞 버스정류소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후 2시30분, 5시25분(막차) 등에 있다. 40분 소요. 3000원.

    자가용을 이용하려면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덕현삼거리에서 청도 방면으로 69번 지방도를 탄다. 운문령을 넘으면 삼계리 , 신원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운문사 매표소는 금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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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문사 대웅보전은 보물제835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안의 천장을 올려다 보면 화려한 채색으로 문양을 하였다. 그리고 밖에서 보면 기둥을 안쪽으로 하나만 넣어 부처님의 모습을 정면에서 시원스럽게 볼 수 있도록 처리를 해 놓았다.
    천장은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꾸며 놓았는데 그 좌측으로 보면 무언가 천장에 대롱대롱 메달려 안떨어 질려고 악착같이 붙어 있는 악착동자를 만날 수 있다.

    왜 이리도 악착같이 떨어지지 않을려고 할까요?.
    알고보면 인간은 미미한 존재이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버리는 한낮 먼지 같은 존재이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한길 불국토인 극락정토로 가는 길은 이 반야용선을 타고 가야만 갈 수 있는데 어디서나 꼭 늦게오는 사람이 있는지라 이날도 늦게도착한 보살을 버리고 갈 수 없어 밧줄을 던저 그 줄을 잡고 따라오도록 하여 극락정토로 인도하였다는데 그 지각생이 악착동자.
    오늘도 대웅보전 천장에 붙어 늦은 누군가를 대신하여 극락정토로 인도하기 위해 악착같이 줄을 잡고 있다.
    꼭 무리중에 늦게 도착하는 지각생이 있기 마련인데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여행에서도 늦게 오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앞으로 10분 일찍 도착 하는 버릇을 키워야 겠다. 나중에 마지막 여행을 하면서 반야용선에 줄을 잡고 악착같이 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ㅎㅎ 편안한 여행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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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문사의 범종루를 들어서면 운문사의 제일 큰 볼거리 중 하나는 반송이다.
    모양이 여타 소나무와 다른게 운문사의 반송은 소나무 가지가 위로 치 솟아 뻗는 것이 아닌 땅아래를 보면서 밑으로 처져 가지를 치고 나간다. 일명 처진소나무로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이 되어 보호 받고 있다. 나이 또한 500살이 넘었고 매년 삼월삼짇날에는 막걸리를 먹이는 행사를 열고 있다. 봄가을로 막걸리 25말을 마신다는 처진소나무는 그래야 여름과 겨울을 거뜬히 넘길 수 있다 한다.  
    옛날 어느 고승이 소나무 가지를 꺽어 심었다는 전설이 전해 오며 소나무 줄기의 높이는 6m이고 둘레는 3.5m로 우산형으로 펼쳐져 운문사를 대표하는 명물로 자리를 잡았다.

    처진소나무를 밑에서 본 모습이다. 가지가 밑으로 처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지마다 큰 받침대를 공구어 두었다. 흡사 우산을 펼쳐 놓은 모습으로 비나 눈이 올시에는 반송 밑으로 피하면 될 것 같은 생각을 해본다.

    그만큼 처진소나무의 모양이 특이하다. 매전면 동창리에 처진 소나무에 비해 매우 웅장한 모습으로 500년의 세월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처진소나무의 그림자가 너무 짙어 소나무 밑으로는 풀이 자란 모습을 찾아 보기 힘든다. 그만큼 소나무 밑으로는 햇빛이 차단되어 다른 풀은 자라기가 힘든가 보다. 아니면 운문사에서 일부로 반송 밑에는 잡초 제거 작업을 하는 걸까?.


    처진소나무 둘레 밖으로는 잔디도 잘자라 있는데 소나무 밑에는 잔디도 뿌리를 못내리는 걸까?.

    외관의 모습은 둥근바가지를 반 잘라 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찾아가는길
    부산 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3200원. 50분 소요. 언양버스터미널에서 동곡 경유 대구행 완행버스를 타면 출발지인 신원삼거리를 지나 운문사터미널까지 갈 수 있다. 3000원.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운행.

    자가용 이용 시에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35번 국도를 타고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덕현삼거리에서 청도 방면으로 69번 지방도를 탄다. 운문령을 넘고 삼계리마을을 지나면 신원삼거리에서 좌회전 하면 운문사주차장 앞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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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교산&그너머 <719> 제8코스 : 청도 신원리 염창마을 ~ 임당리

    쉬엄쉬엄 옛정취 물씬한 고갯길… 숨은 볼거리는 덤



     
    옛 사람들은 산너머 큰 장터를 오갈때 평편하지만 거리가 먼 우횟길 대신 산등성이를 넘는 짧은 고갯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천 가 편한 길을 따라가면 될텐데 왜 굳이 힘든 산길을 애용했을까. 물론 요즘 사람들에 비해 걷기에 익숙해서 고개를 넘는 일이 별로 부담스럽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옛길을 따라 가보면 꽤 높은 마루금을 넘는데도 별로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리 근육의 피로도 역시 산 아래를 휘감는 하천 길을 걸을 때와 별 차이가 없다. 이유가 뭘까. 그 비밀은 바로 일명 '지그재그형'으로 불리는 갈 지(之)자 형 길에서 찾을 수 있다. 오르막인데도 숨이 차지 않는다. 소나 당나귀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길이다보니 무거운 짐은 이들의 힘을 빌리면 된다. 갈지자형 길. 이것이 바로 선조들이 지름길인 고갯길을 쉽게 넘어가는 생활의 지혜였다.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의 무적숲 인근 용신소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단.
    제8코스는 경북 청도에서 선조의 지혜가 돋보이는 예쁜 고갯길을 넘는 길이다. 영남알프스가 숨겨 놓은 아기자기한 볼거리들을 발견하는 즐거움은 덤이다.

    운문사 들머리인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본동 격인 염창마을 신원삼거리에서 출발, 금천면 임당리 마을회관 앞에서 마무리한다. 신원리 문명분교~국시당~신원1교~용신소~소진마을 입구~옹강산(오진마을) 입구~고갯마루 쉼터~방음동 새마을동산~영담한지미술관(보갑사)~무적암(폭포)~영담한지미술관~안마을못~이끼계곡~화전민 집터~정거고개(쇠등)~쌍무덤~임당리 김씨고택~임당리마을회관 순. 총 길이 16㎞에 걷는 시간만 5시간 걸린다. 휴식 등을 포함하면 6시간은 잡아야 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전반부는 아스팔트길, 후반부는 포근한 옛길이다.

    ■국시당·무적숲·용신소… 발끝마다 스토리텔링

     
      GPX & GTM 파일 / 고도표 jpg파일
    신원리 본동 염창(鹽倉)마을은 '운문사의 소금 창고' 역할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원천과 운문천이 합수점에 터를 잡았으니 경관이 수려하고 볼거리도 많다.

    신원삼거리에서 69번 지방도를 따라 문명분교와 신원교를 지나면 대리마을. '솥계'라고 불리는 곳이다. 오랜 옛날부터 솥 굽는 가마가 있다고 해서 붙은 별칭이다. 대화슈퍼 맞은 편 밭이 바로 신라 때부터 솥을 구웠던 가마터다.

    이어지는 운학사 표지판 앞에서 왼쪽 운학사 방향 마을길로 들어선다. T자형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20m쯤 가다가 왼쪽 좁은 골목길로 가면 막다른 집이 나온다. 우측 대나무숲 쪽 무덤 위로 오르면 3분 후 바위벼랑 앞에 닿는다. 그 앞의 수백 년 된 굴참나무에 당줄이 메여져 있다. 이 나무가 바로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주민들이 나라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낸다는 '국시당나무'다. 바위벼랑은 제단이다. 제사를 지낼 때 부정한 사람이 끼어 있으면 음식 담긴 그릇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는 전설도 함께 전한다. 자기 마을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국가의 안녕까지 염원하는 풍습에서 유달리 강한 신원리 사람들의 애국심을 엿볼 수 있다.

    다시 69번 지방도로. 청도 방향으로 간다. 신원1교에서 왼쪽을 보면 운문천 신원천 합수점에 낮고 길게 뻗은 절벽이 보인다. 마치 용의 몸통 같다. 다리를 건너면 '무적(舞笛)숲'이라고 불리는 곳. 신라의 왕이 아름다운 주변 풍광에 반해 피리 소리에 맞춰 춤추며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원래는 훨씬 울창했지만 한국전쟁 때 이곳에 숨어 있던 빨치산부대를 토벌하려고 벌목을 한 이후로 듬성듬성해졌다고 한다.

    '하얀집민박' 안내판에서 잠시 왼쪽 하천으로 내려선다. 왼쪽 10시 방향을 보면 짙은 녹색의 물빛이 인상적인 웅덩이, 즉 '용신소'가 보인다. 뒤편 절벽을 용의 몸통으로, 웅덩이에 담긴 바위는 용의 머리로 보고 '용이 물을 마시는 곳'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실제로 용머리를 닮은 바위가 웅덩이에 걸쳐 있어 신비감을 더한다. 이 하천을 특별히 '무적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시 길을 이어간다. 이 동네 가로수는 감나무다. 참, 그랬지. 여기는 청도 땅이다. 눈앞의 웅장한 산은 옹강산. 신원2교를 건너 오진리 소진마을 입구와 옹강산 등산로 출발점이자 오진마을 입구를 잇따라 지난다. 짤막한 오르막을 거쳐 정자 쉼터를 지나 내리막을 걸을 때 오른쪽 아래로 운문호 상류가 펼쳐진다. 수량이 많이 줄었다. 수몰 마을의 옛 골목길과 다리 돌담 등의 흔적만 휑하다. 이 길의 가로수인 벚나무는 실향민들이 애틋한 마음이 담긴 '망향의 나무'다.

    ■노루귀 활짝 핀 임도옆에 숨은 이끼계곡

     
      청도 운문면 방음리에 있는 방음동 새마을동산.
    방음리 말음마을 입구 삼거리에서 왼쪽 계곡으로 들어서야 하지만 잠시 오른쪽 '방음동 새마을동산'에서 쉬어간다. 1972년3월24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 선진 마을 방문차 다녀간 것을 기념한 곳이다. 대통령과 주민들이 함께 찍은 사진, '새마을 정신(精神)'이라는 박 대통령의 친필 글씨 등은 새마을 운동 발상지라는 경북 청도에서도 가장 모범적인 마을이 바로 이곳 방음리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흔적들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범적이었던 마을도 호수에 잠겨 버렸다. 동산 뒤편에 남양 홍씨 가문의 재실 겸 묘택인 운암정사(雲巖精舍)가 있다.

    삼거리에서 '막바우골' 쪽으로 들어선다. 15분 후 보갑사 내 영담한지미술관. 영담 스님의 한지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관람료는 2000원.

    미술관 건너편 작은 지계곡 산길로 일단 길을 잡는다. 잠시 '무적암'에 다녀오기 위해서다. '무적골'이라고 불리는 이 계곡을 따라 15분쯤 오르면 높이 30m짜리 바위가 나온다. '무적암'이다. 폭포이기도 한 무적암은 웬만큼 영남알프스를 안다는 사람도 모르는 숨은 볼거리다. 왼쪽으로 우회, 상단부에 오를 수도 있다.

    다시 미술관 앞으로 복귀, 임도를 타고 계곡 상류로 향한다. 안마을못을 지나면 흙길로 바뀌는데, 길가에 대표적 봄 야생화인 노루귀가 지천이다. 5분쯤 더 가면 임도 오른쪽에 원시적 분위기의 이끼계곡. 비록 규모는 작지만 영남알프스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어서 모두 탄성을 내지른다.

    3분쯤 더 오르면 갈림길. 길 찾기에 주의해야 한다. 임도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살짝 내려선 후 계곡을 건너야 하는데, 초입이 희미하다. 리본을 참고하자. 계곡을 건너면 화전민들의 밭 터가 나온다. 30m 정도 가서 왼쪽으로 꺾어 다시 5분쯤 가면 가마솥이 있는 화전민 집터. 여기서 주 계곡을 버리고 집터 위(오른쪽)로 오른다. 20m쯤 가면 지계곡을 만나는데 이 작은 골짜기를 따라 오른다. 이번 8코스에서 가장 험한 구간이다.

    ■정거고개 앞뒤로 갈지자 옛길 환상적

     
      영남알프스의 숨겨진 비경 막바우골 이끼계곡.
    10분 후 다시 걷기 좋은 길을 만난다. 오른쪽으로 살짝 돌아가는 길. 2분 후 지능선을 만나면 왼쪽으로 오른다. 드디어 옛길의 특징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갈지(之)자 길'이 시작된다. 10분 후 또다시 지능선 갈림길을 만나면 그대로 직진한다. 길이 확 넓어진다. 3분 후 8코스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정거고개. 해들게봉~도롱굴산(일명 까치산) 산행 시 반드시 거쳐 가는 이 고개는 '쇠등'이라고도 불린다. 옛날 방음리 사람들이 동곡장이나 청도장에 소 팔러 갈 때 넘던 고개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정거고개를 넘으면 환상적인 옛길이 이어진다. 산허리를 돌아서 내려가는 이 길은 산행로와는 달리 그 흔한 리본 하나 보이지 않는 깔끔한 길이다. 직선이다 싶으면 어느새 갈지자로 이어지고, 다시 부드러운 곡선 길이 이어진다. 저 멀리 임당리 마을과 동창천, 조금 눈을 들면 학일산이 눈에 들어온다. 30분쯤 가면 쌍무덤과 폐축사를 잇따라 지난다. 마을 길로 들어서서 작은 개울을 따르다가 동네 중간쯤에서 우측으로 다리를 건넌다. 전신주에 '임당2길' 표시가 된 난간없는 다리다. 골목으로 100m쯤 가면 고래등 같은 대저택이 나온다. 통정대부 정삼품 김씨고택. 일명 '임당리 내시집(29면 둘레길 이야기 참조)'으로 알려진 고택이다. 다리로 돌아와서 개울을 따라 2분만 가면 종착점인 임당리 마을회관 앞 버스정류소에 도착, 8코스를 마무리한다.


    ◆ 떠나기 전에

    - 신라왕이 무적숲 찾은 까닭은… 당시 전략적 요충지였을 수도

    제8코스의 주요 지점마다 숱하게 나오는 이름이 하나 있다. 바로 무적숲 무적천 무적들 무적골 무적암 등에서 발견되는 '무적(舞笛)'이라는 말이다. '피리 소리에 맞춰 춤을 춘다'는 의미인데, 청도 운문면 신원리 방음리 등의 주민은 이 말이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말이라고 믿고 있다. 즉 신라 왕이 이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 즐겨 찾았고 흥겹게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교통수단이 지극히 불편했을 당시에 경주(당시 금성)에 있던 왕이 가까운 곳에 더 빼어난 절경지도 많은데 어째서 굳이 이곳까지 찾아 와야 했을까.

    이와 관련, 이창우 본지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단장은 다소 독특한 주장을 한다. 운문사를 중심으로 한 주변 일대가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면서 병참기지 및 화랑도 훈련장이었고, 왕이 전략적 요충지를 점검차 방문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왕이 방문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무적숲 등에서 잠시 쉬었거나 장수와 병사들에게 연회를 베풀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청도 지역 향토사학계에서도 운문사 인근 지명인 '장군평' 등을 들어 이 일대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기는 하니 그럴듯하다.

    세속오계를 전한 원광법사가 대작갑사(현 운문사)와 가슬갑사 등에 머무를 때 진평왕이 국사를 논하기 위해 자주 찾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무적숲은 여름 휴가철이면 인산인해를 이루는 피서지로 둔갑했다.


    ◆ 교통편 & 먹을 곳

    - 언양서 대구행 완행버스 오전 9시에 출발

    부산 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3200원. 50분 소요. 언양버스터미널에서 동곡 경유 대구행 완행버스를 타면 출발지인 신원삼거리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운행. 코스 종착지 임당리에서는 오후 5시10분, 오후 7시30분 등에 동곡행 버스(동곡버스정류소 054-372-3881)가 있다. 하지만 언양행 시외버스 막차가 동곡에서 오후 5시, 운문면 소재지인 대천리에서 오후 5시10분에 출발하기 때문에 임당에서 오후 5시1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도 놓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적어도 오후 4시 전후까지는 종착지에 도착해 운문면 대천리까지 걸어가거나(약 20분 소요) 대천 개인택시(054-371-6997)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8000원.

    자가용 이용 시에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35번 국도를 타고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덕현삼거리에서 청도 방면으로 69번 지방도를 탄다. 운문령을 넘고 삼계리마을을 지나면 신원리 문명분교 앞에 도착한다.


    # 금천면 임당리 김씨고택

    - 사랑채에서 안채 감시, 독특한 내시 집

     
    영남알프스 둘레길 제8코스의 종착지인 경북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에는 흔히 보기 어려운 특이한 고택이 있다. 바로 중요민속자료 제245호로 지정된 '청도 임당리 김씨고택(사진)'이다.

    마을의 중심에 해당하는 위치에 자리 잡은 이 조선시대 가옥은 궁중 내시의 신분으로 통정대부 정3품의 관직에까지 올랐던 이색적인 내력을 지닌 김일준(金馹俊)이라는 인물이 만년에 낙향해 건립한 집이라고 한다. 이 마을에 임진왜란 전부터 400여 년간 내시가계가 이어왔다고 알려져 있지만 김일준이라는 인물이 정확히 어느 시대의 인물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강희 이십오년 병인 윤사월'이란 연기가 표시된 기와가 사용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청나라 강희제 20년, 즉 1685년 전후로 예상할 수 있지만 건물의 전체적 구조는 19세기 양식을 취하고 있어 적어도 이마저 분명하지 않다. 현재로서는 19세기 초반에 건립됐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총 7동으로 된 김씨고택은 안채(6칸), 사랑채(4칸), 중사랑채(7칸), 큰고방채(4칸), 소고방채(4칸), 대문채(5칸), 사당(3칸)으로 구성돼 있는데 배치가 다소 특이하다. 대문에서 사랑마당을 거쳐 안마당으로 출입하는 중문까지 모든 통과 공간을 사랑채에서 한눈에 볼 수 있게 해 일반 사대부 저택보다 한층 더 엄격하게 내외공간이 구분돼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랑채에서 집 안팎의 출입, 특히 안채의 출입을 철저히 관리(감시)할 수 있게 돼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내시가 집 주인이었음을 감안하면 어쩌면 이같은 엄격함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랑채의 마루를 두르고 있는 목판마다 보통 사람의 양쪽 눈 간격 정도의 거리를 가진 구멍이 나 있는 것도 특징이다. 이 구멍으로 집주인은 감시의 눈을 번득였을까. 이 고택에 현재 거주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소란스럽지 않게 조용히 둘러볼 수는 있다.


    # 시민 개척단원 홍선화 씨

    - "아름다운 길 걷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영남알프스 둘레길을 걸으면서 그동안 살아온 내 삶의 길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도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행복해져요. 행복이라는 것이 멀리 있는 것 아니잖아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아름다운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행복이지요."

    본지 둘레길 개척단에 시민단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홍선화 씨(47). 그는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둘레길을 걷다 보면 삶의 의욕이 샘솟는다고 말한다. 코오롱스포츠 남포점 대표로서 아웃도어 의류 및 장비 판매업을 하는 홍 씨이지만 사실 부산의 웬만한 산악인이라면 알 만한 여류 산악인이기도 하다. 20대 중반까지 서울에 살 때는 북한산 인수봉 등에서 밤낮 가리지 않고 암벽타기에 매진했다. 또 부산에 정착한 후에는 낙남정맥과 낙동정맥 등 주요 산줄기 종주를 거뜬히 해냈을 정도로 산행에는 일가견이 있다.

    그런 그가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단의 제1코스 답사 때부터 지속적으로 참가하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걷는 것이 가져다주는 행복 때문이다. 홍 씨는 "세상이 너무 빠르게 돌아가잖아요. 그런데 아주 천천히 걷는 둘레길은 그런 속도전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주는 휴식처입니다. 맑고 청아한 공기를 마시고 숲의 소리를 들으며 걸을 때 비로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죠. 모르고 있던 새 길을 개척하는 보람은 덤이고요"라고 말한다. 그는 길을 걷다가 간혹 쓰레기나 빈병이 보이면 말없이 주워서 배낭에 넣는다. 묵묵히 '착한 걷기, 행복한 걷기'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문의=주말레저팀 (051)500-5169 이창우 개척단장 011-563-0254

    GPS·동영상 http://www.kookje.co.kr
    글·사진=이승렬 기자 bungse@kookje.co.kr



    운문면 신원리 솥계마을의 야철지로 예전에는 솥을 구워낸 가마터의 자리이다. 지금은 밭으로 변해 세월의 무성함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신원리의 바깥 당산나무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당신으로 모시고 있다. 안당산 나무는 국시당으로 마을 뒤 뒷골 중턱에 노거수인 참나무로 나라의 국운과 안녕을 기원하는 곳이다.

    국시당의 당산나무를 보기 위해 거치는 곳으로 신원마을의 전경과 복호산의 모습을 담을 수 있다.

    용신소로 신원천에 용의 머리가 물을 마시고 있는 형상의 바위이다. 이마을에서는 용신웅덩이라 하였다.

    새마을 동산으로 1972년도에 박정희대통령이 이마을에 찾아 왔다는 내력과 박통나무등 다양한 볼 거리를 제공한다.

    새마을 동산의 새마을정과 새마을연못

    방음리 말음마을에 들어서면 영담스님의 한지미술관과 만난다. 입장료2000원

    막바우골의 노루귀로 봄이 성큼 다가 왔는 것을 볼 수 있다.

    막바우골의 이끼게곡으로 찾는 사람이 없어 한적한 계곡이다.





    운문면 방음리 말음마을에서 금천면 임당리로 넘어 다닌 옛길의 만당으로 지형도상에는 정거고개로 나와 있는데 임당리 노인분에게 여쭈어보니 그곳을 쇠(소)등이라 이야기를 하신다. 임당리로 내려 오는 모든능선에 이름이 있는대 그곳이 쇠등이 내려 오는 능선이고 정거등은 마을뒤의 긴 능선을 말씀하였다. 산길은 옛길 그대로로 조금만 손질하면 둘레길의 백미가 될 수 있는 멋진 코스가 될 것 같다.


    임당리의 고가로 내시집으로 불리는 임당리 김씨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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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도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반시, 소 싸움, 복숭아, 역전 앞의 추어탕 그리고 운문사다. 비구니 사찰의 운문사 정류장 앞에는 실내장식이 특이한 음식점이 있다. 음식점 겸 찻집도 겸해 하는 집을 소개할까한다. 운문사 매표소와 버스정류소 사이에 있는 '어화벗님(054-372-6638)'이다. 이름도 실내장식처럼 특이하다. 후배가 지어준 이름으로  "어화 둥둥 내사랑아" 할때 어화를 따 오고 그 뒤에 벗님을 붙혔다 한다. 사진 작가인 배춘옥 씨가 6년째 운영중인 이 집은 손칼국수와 녹두감자전 등이 특히 맛있다. 그리고 동동주는 안주인이 직접 담구어 판매를 하며 내부의 실내장식은 부군께서  직접 꾸몄다하니 안.밖으로 재주가 많은 분들이다. 다양한 야생화 차와 직접담근 동동주에 안주는 역시 창밖에 보이는 영남알프스 경관이다.  2층 모서리 창가 자리는 주변 풍광이 한눈에 들어와 인기 있는 테이블. 배씨가 직접 키운 봄꽃도 예쁘다. 운문사 스님들도 자주 들른다.


    교통편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 운행. 3200원. 50분 소요. 언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구행 완행 버스를 타면 운문사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출발. 운문령 너머 삼계리를 지나 운문사  정류소에서 하차하면 된다. 운문사 앞 버스정류소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후 2시30분, 5시25분(막차) 등에 있다. 40분 소요. 3000원.

    자가용을 이용하려면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덕현삼거리에서 청도 방면으로 69번 지방도를 탄다. 운문령을 넘으면 신원리 운문사 주차장까지 금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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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 일부리 심천동에 가면은 500년의 풍상을 이겨낸 노거수가 있다.
    느티나무로 마을의 중앙에 떡 버티고 있는 노거수는 수령500년의 깊이 만큼 세월의 무게를 나무에 덕지덕지 붙이고 있다.
    심천동 마을의 유래를 모두다 알고 있는 듯 마을을 굽어 보고 있는 노거수는 심천동 사람들에게는 많은 위안이 되고 있다.

     



    그래서 경상북도 도나무로 1982년 10월에 지정이 되어 관리 되고 그럴듯한 이름표를 달고 있다.
    느티나무 허리춤에는 세사람이 팔을 벌여야 할 정도로 겨우 손끝이 닿을 정도이며 지나가는 어르신의 얼굴에 파인 주름살처럼 느티나무도 그래 견더 왔을 것이다. 
    한여름에는 심원재로 넘어가는 길손에게 그늘을 제공하였고 마을의 쉼터를 자임하며 마을사람들의 애환을 듣고 어루만지며 달래고 하였을 당수나무는 말 없아 오늘도 그 자리에 서 있다. 
    심천동 계곡이 얼마나 깊으면 '지푸네'로 부를까?.
    지푸네의 터줏대감인 느티나무는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 앞으로도 물 맑고 하늘 밖에 볼 수 없는 이곳에 그늘과 쉼터가 되어 주길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교통편
    부산 노포동터미널에서 경주행 버스를 탄다. 새벽 5시30분부터 10분 간격 운행. 4500원, 50분 소요. 경주버스터미널에서 산내까지 간 후 일부리행 352번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산내행 350번 버스는 오전 6시, 6시30분, 7시15분 등 하루 28회 운행한다. 산내에서 일부리행 버스는 오전의 경우 6시20분과 7시40분에 출발하는 2대밖에 없다. 이 버스를 놓치면 산내 개인택시(054-751-5955)를 이용한다. 심천마을까지 1만2000원 안팎. 건천ic에서 내려 우측 산내청도방면으로 우회전하면 단석산 입구인 우중골도 지나면 산내면을 알리는 표지판과 당고개(땅고개)이다. 산내면 소재지인 산내사거리에서 청도, 운문댐 방향으로 우회전 하면 20번지방도  '외칠리·일부리' 표지판을 보고 좌측으로 진입, 다리를 건넌 후 좌회전하면 외칠리에 닿는다. 다시 우측으로 상록병원 일부리 방향으로 10분쯤 가면 심천마을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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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계리서낭당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삼계리에 가면은 2007년 4월6일 마을 공동으로 세운 서낭당이 있다.

    한때 이곳은 오지중의 오지로 주위에 영남알프스 연봉들이 마을을 감싸 않아 천재로 인한 피해와 맹수들의 피해로 부터 마을의 안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서낭당이 세워 져 있었는데 근래에 들어와 관리를 하지 않아 황폐화 되었다 한다.

     


     

     1970년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홍영기씨가 주축이 되어 다시 이곳에 서낭당을 건립하였는데 40년의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흉물로 되어 버린 것을 마을 주민들이 서낭당 재건위원회를 꾸려 2007년 4월에 새로운 모습으로 서낭당을 건립하였다 한다. 이곳의 삼계리는 지리적으로 보면 언양에서 청도 땅을 넘어 오는 길중 가장 빠른길로 여겨져 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어사 박문수도 언양의 관현에서 청도땅을 밟기 위해 이 운문령을 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지금은 지방도가 뚫여 있지만 언양 방향에서는 도로가 지그제그로 나 있어 힘들게 오르며 청도땅의 생금비리 계곡은 구절양장의 긴 계곡을 드리워 한낮에도 컴컴하다. 지금도 이러한데 예전에는 맹수와 도적으로 인해 넘어 다니기 힘든 고개 였을 것이다. 또 다른 고개인 배너미재는 어떠한가. 밀양 산내에서 경주로 들어가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 아랫재를 넘는 것이다.  심심이골을 내려와 배너미고개를 올라서면 삼계리가 지척이다. 이곳을 지나 수리덤계곡을 걸어 경주 산내면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삼계리재를 넘어야 한다. 심원사 옆 구름재를 다시 올라 건너편 숲고개로 넘어야만 산내면 소재지로 민가다운 곳을 만날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왕래를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만큼 삼계리는 오지중의 오지로 마을의 평안과 맹수로 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민간신앙이 그만큼 절실하였을 것으로 보고있다.


    역사적으로는 어떠한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의 화랑도들이 훈련을 한 장소로 영남알프스와 그 인근을 택했다. 지리적으로 경주와 가깝고 전술적으로도 험준한 산세 때문에 고구려, 백제에 전력이 노출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잇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삼계리는 오작갑사의 하나인 가슬갑사가 있었다 한다. 가슬갑사는 원광국사가 화랑인 귀산과 추항에게 화랑의 기본이념인 세속오계를  전하였던 곳이다. 그리고 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공격할때 이곳 지룡산과 복호산 일원에 산성을 쌓아 신라를 멸망케 하였는데 현재도 지룡산성,호거산성 또는 견훤산성이라 부르고 있다. 근대에 와서는 서로  이념이 다른 무리들의 피난처로 이 깊은 골짜기를 택하여 숨어 들었다. 속칭 '뺄갱이"라 어릴적 부터 들어 왔는 소리로 군경의 소탕작전과  좌익들의 양민 학살로 인해 삼계리와 영남알프스는 조용한 날이 없었을 것이다. 생금비리골, 배넘이골, 계살피골이 만나는 삼계리 서낭당은 이러한 앙금을 다 씻어 내며 오늘도 이자리에 서서 마을의 안녕과 지나는 길손의 무사기원을 빌어 주고 있다.

    찾아가는길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 운행. 3200원. 50분 소요. 언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구행 완행 버스를 타면 삼계리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출발. 운문령 너머 삼계리 정류소에서 하차하면 된다.

    자가용을 이용하려면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덕현삼거리에서 가지산 온천방향인 청도 방면으로 69번 지방도를 탄다. 운문령을 넘으면 운문산 자연 휴양림을 지나면 삼계리가 금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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