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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교산&그너머 <721> 제8-1코스 : 청도 운문면 방음리 ~ 공암리 굽이굽이 운문호 50리길 걸으니 '천하절경' 공암풍벽이… 현재의 운문댐 을 돌아가는 도로의 모습이다. 지금 운문산 8코스와 8-1 코스는 벚꽃 터널을 이루고 있다. |
또 가을에는 청도8경 중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공암풍벽(孔岩楓璧)'에서 단풍의 멋을 즐길 수 있다. 이번 주 개척단이 찾아간 제8-1코스는 운문호를 한 바퀴 돌아 공암풍벽을 찾아가는 길이다. 동창천이 운문천과 만나기 직전 큰 물돌이를 이루는 곳에 우뚝 솟은 절벽인 공암풍벽은 옛날부터 청도 제일의 풍광을 뽐낸 곳으로 유명하다. 그곳을 물들인 단풍이 너무도 아름다워 단풍 풍(楓)자를 썼을 정도이니 가을 경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코스 막바지에서 공암풍벽을 만나는 순간 그동안의 피로와 지겨움이 단번에 사라져 버린다. ■ 운문호 순환하는 20㎞ 장거리·6시간 걸려
새마을동산 앞에서 운문댐 방향으로 69번 지방도로를 따른다. 봄바람에 살랑대는 운문호 물비늘이 곱다. 35분쯤 갔을까. 왼쪽 언덕에 경북도민속자료 제90호인 고택(古宅) 운곡정사(雲谷精舍)가 있다. 조선 중기 학자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많은 공을 세운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의 8대손인 운곡 김몽노(金蒙魯·1828~1884)의 생가다. 지금도 그 후손이 살고 있다. 그 옆의 원모재(遠慕齋)는 김응명과 그의 아들 김주를 모시는 재실이다. 홍매화 백매화 개나리 목련 등 봄꽃이 두 고택을 감싸고 있다. 뒤돌아서서 운문호를 바라보니 정면에 볼록한 개산(317.4m)이 눈에 든다. 운문댐 방향으로 이동한다. 마주 오는 자전거 동호회원들이 반가운 인사를 건네준다. 호산 약간 못 미친 곳에서 아주머니들이 길이 1~1.5m짜리 참나무 둥치에 홈을 파서 표고버섯 파종을 하고 있다. 수몰지구 이주민들의 여러가지 생계 대책 가운데 하나가 표고버섯 재배다. 인건비와 종자구입비 등의 비용은 한국수자원공사 측이 지원해 준다고 한다. 올 봄에 파종하면 내년 가을에 수확할 수 있다. ■ 조망 좋은 호산 정상 왕복 급경사길 조심
올랐던 길로 되돌아 내려서는 데는 15분쯤 걸린다. 묘지에서 막 도로로 합류할 즈음 눈앞에 멀리 보이는 억산 구만산 방향의 산세가 예사롭지 않다. 특히 억산 우측 구만산 부근에서 오른쪽으로 그려진 능선 모양이 마치 미륵불이 누워 있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어 신기하다. 개척단원 중 누군가 "와불(臥佛) 능선이다. 새로운 발견인데…"라고 외친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 나발고개를 내려와 왼편으로 펼쳐 지는 풍경으로 와불을 확인 할 수 있다. ■ 운문면 대천리는 수몰지 주민 이주단지
삼거리에서 우측 경주 방향 20번 국도를 탄다. 곧바로 왼쪽에 보이는 재실은 이모정(二慕亭).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의병장인 이모당(二慕堂) 박경전(朴慶傳)을 모신 밀양 박씨 집안의 사당이다. 완만한 오르막을 5분쯤 가면 운문댐. '운문호'라고 적힌 입석이 있고 댐 건너편에는 호산이 솟아 있다. 호랑이가 웅크린 채 호수를 내려다 보는 듯한 모습이다. 운문호 풍광을 굽어보면서 20분쯤 가면 문명중고 망향비와 망향정을 만난다. 수몰 이주민들이 호수를 바라보며 향수를 달래는 곳이다. 정자에는 수몰 전 마을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대천리 순지리 서지리 공암리 방음리 오진리 지촌리 등 7개 마을이 전부 또는 일부 잠겼다. 망향정은 점심 식사를 하기에 좋은 장소다. 100m쯤 가면 갈림길. 왼쪽은 한내고개를 거쳐 경산으로 가는 길이다. 계속 직진하면 20분 후 개산 북쪽 자락을 지난다. '창말'로 불리는 이곳은 수몰 전 대천리의 곡식과 소금 등을 보관한 창고가 있던 곳. 댐이 만들어지기 전 대천리는 동창천과 운문천, 2개의 큰 물길이 합쳐지는 곳에 자리 잡아 물난리가 많이 났기 때문에 이곳에 따로 보관창고를 두었다고 한다. ■ 코스 막바지 공암풍벽 보며 감탄사 연발
전망대에서 100m만 더 가면 구멍 뚫린 바위가 보인다. 그것이 바로 '공암'이다. 옛날 전설에 따르면 공암풍벽 아래 곡천대 용굴에 살다가 승천하던 용이 꼬리로 바위를 내려쳐서 생긴 구멍이라고 전해진다. 이곳은 경주와 청도를 오가던 유일한 길목이었다. 소 한 마리가 거뜬히 통과했다고 한다. 다시 가리봉 정상을 거쳐 20번 국도로 복귀, 코스 종점인 공암마을 버스정류소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 떠나기 전에 - 호랑이를 사랑한 처녀 이야기 호랑이를 사랑한 처녀의 전설이 있는 호산 영남알프스 둘레길을 걷다 보면 마치 '전설따라 삼천리'를 따라가는 착각이 들곤 한다. 발길 닿는 곳마다 전설이 없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코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전설은 호산(虎山·일명 범뫼)에 전해 내려오는 '호랑이를 사랑한 처녀이야기'이다. 옛날 인근 골짜기에 단란한 가정이 있었다. 10대 후반의 아리따운 외동딸은 매일 저녁 숯 굽는 아버지와 밭일하는 어머니를 마중하러 동구밖으로 나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사라져 버렸다. 딸은 그 후 10년 넘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부모는 체념한 채 늙어갔다. 그런데 하루는 이 집에 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와서는 부부를 봉긋하게 솟은 앞산 정상부의 한 무덤 앞으로 데려갔다. 호랑이에게 납치됐던 딸의 무덤이었다. 그런데 처녀는 호랑이를 사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잔뜩 겁에 질렸으나 자신을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먹이를 구해 온 호랑이의 정성에 감복해 결국 사랑에 빠졌다는 것. 동굴에서 살던 처녀는 세월이 흘러 결국 병에 걸렸다. 처녀는 호랑이에게 고향집이 보이는 높은 곳에 묻어 줄 것과 부모님에게 소식을 전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호랑이가 부모를 데리고 간 것이다. 사람들은 이후 이 산 이름을 호산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 교통편 - 종착지 공암리서 대천 개인택시 이용하길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3200원. 50분 소요. 언양버스터미널에서 동곡 경유 대구행 완행 버스를 타면 방음리 새마을동산까지 갈 수 있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운행. 코스 종착지인 공암마을에서는 대천리나 동곡버스터미널(054-372-3881)까지 가는 버스가 오후에 드물게 있다. 오후 5시10분 전후와 7시10분 등에 있는데 이 경우 대천리에서 언양행 막차(오후 5시10분 출발)를 타기 힘들다. 따라서 늦어도 오후 4시20분 이전에는 완주 한 후 개인택시(054-371-6997)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1만5000원 안팎. 자가용 이용시에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35번 국도를 타고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언양교차로에서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69번 지방도를 타고 운문령을 넘어 청도 방향으로 가면 방음리 새마을동산 앞에 닿는다. 차량 2대를 이용해 종점인 공암마을에 1대를 먼저 주차하면 편하다. # 댐이 앗아간 것들 - 곡천대·용굴 등 명소까지 삼킨 운문호
조상 대대로 내려온 삶의 터전이던 고향마을과 고향집, 어린 시절 뛰어놀던 그림 같은 놀이터와 청운의 뜻을 펼치기 위해 공부하던 모교도 모두 물 속에 잠겨버렸다. 이번 코스를 걷다 보면 운문호 건설로 수몰된 7개 마을 주민들이 실향의 아픔을 달래는 망향정(望鄕亭)을 지난다. 실향민들은 이곳에서 운문호를 바라보며 설움을 달랜다. 특히 망향정 앞에 있는 '망운교비(望雲校碑)'의 내용을 찬찬히 읽다 보면 그 아쉬움을 십 분의 일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1932년 개교해서 50년 만인 1982년 폐교된 운문국민학교 제7회 동기생들이 건립한 망운교비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말인 '수구초심(首丘初心) 망운지정(望雲之情)'이 새겨져 있다. 이뿐일까. 저수지 축조는 청도 제일의 풍광을 자랑했던 공암풍벽의 많은 것들을 앗아갔다. 운문면 공암리 하수호(66·청도군 이장협의회장) 이장은 "옛날 경주·청도 지방의 선비들이 시류를 논하고 풍류를 즐겼다는 곡천대, 절벽에서 돌을 던져 넣으면 10여 분 동안 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깊었던 용굴, 공룡발자국, 옛날 신라 때 장육산에서 무술 연마를 하던 여섯 장군이 말을 탄 흔적이라는 전설이 서린 바위의 말발굽 자국 등도 모두 수몰됐으니 그 아쉬움을 어떻게 말로 다할까"라며 옛일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마을 북쪽의 왕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통일신라 말기에 인근에서 후백제 견훤군과 전투에서 패한 후 추격군을 피해 도주했던 길목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뭔가 굵직한 물건을 찾았거나 대물급 물고기를 잡았을 때 '왕건이 잡았다'는 말을 하는데 아마도 왕건과 왕재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인근 최고의 경승지였던 공암풍벽은 이제 상수원보호구역에 묶여 버려서 마을을 통해서는 가까이 가 볼 수 없는 곳이다. 가리봉 능선을 통해서나마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또 하나, 공암풍벽으로 연결된 기다란 능선에 있는 '가리봉'이란 이름에 대해 공암리 주민들은 생소해한다. 주민들은 오히려 이 봉우리에 옛날부터 불이 자주 났다는 뜻에서 불 화(火)자를 써서 '화고난'이라고 부르고 있다. |
# 운문면은 '별들의 고향'… 윤필용 장군 등 다수 배출 운문호가 자리 잡은 경북 청도군 운문면은 '별들의 고향'으로 불리기도 한다. 여기서 '별'이란 다름 아닌 국군 장성급, 즉 장군을 일컫는 비유어다. 청도군 자체가 경북 지역에서는 장군이 많이 배출되기로 유명하지만 그중에서 운문면 출신자가 특히 많다는 것이다. 우선 대표적인 사람이 지난해 작고한 '풍운의 군인' 윤필용 장군이다. 1961년 군사정변 이후부터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회의 의장의 특별한 신임으로 의장 비서실장을 역임했고 이후 국군방첩부대장과 수경사령관(소장) 등을 역임했지만 1973년 유명한 '윤필용 사건'에 휘말린 장본인이다. 윤 씨의 고향이 바로 이번 코스의 종점이자 공암풍벽에 둘러싸인 마을인 공암리다. 제3사관학교 1기생으로 비육사 출신 최초의 장군, 최초의 대장 등의 기록을 세운 박영하 전 2군 사령관 역시 청도 운문면에서 태어났다. 오진리 출신인 박 장군은 둘레길 제7, 8코스에서 거쳤던 운문사 입구 신원삼거리 부근의 문명초교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또 '영원한 빨간마후라'로 알려진 김상태 전 공군참모총장 역시 운문면이 배출한 장군이다. 문의=주말레저팀 (051)500-5169 이창우 개척단장 011-563-0254 GPS·동영상 http://www.kookje.co.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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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정사 :조선 중기 학자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많은 공을 세운 취죽당(翠竹堂) 김응명(金應鳴)의 8대손인 운곡 김몽노(金蒙魯·1828~1884)의 생가다. 지금도 그 후손이 살고 있다. 그 옆의 원모재(遠慕齋)는 김응명과 그의 아들 김주를 모시는 재실이다
원모재 뒤에서 본 운문댐
호산 전망대 정면으로 가야 할 길과 개산.
이모정임진왜란때 의병장 제우당 박경전을 위한 사당으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것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그의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부모에 대한 효심을 옅볼 수 있다.원래는 순지리뒤에 세워져 있었는데 192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이 댐 아래가 운문댐이 생기기 이전에는 건도랑이란 지명으로 불렸다. 그때는 이곳이 운문면과 금천면의 경계로 대천리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대천리 옛어른의 말을 빌리자면 건도랑, 즉 호산과 종지봉 아래인 동창전에는 도적들이 우글우글 그려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모든 물건, 돈을 강탈당하고 목숨만 겨우 부지하여 통과를 하였는데 도적을 피해 찾아 올라가는 곳이 호산과 시루봉사이의 나발고개 였다 . 나발고개로 올라가는 골짜기가 도둑놈골이라 부르며 지금의 도로가 넘어 다니는 재가 아니고 호산쪽으로 독립가옥 뒤가 옛날의 나발고개이다.
운문댐을 걷다 보면 재미 있는 이야기가 한 토막 있어 소개를 한다. 지금은 어실마을이 운문댐에 잠겼지만 어실 마을뒷산을 어실산으로 불렸다. 그래서 어실 어른이 총산에 가서 총을 들고 개산에 올라가 사냥개를 몰고 호산에 있는 호랑이를 잡으러 갔다는 이야기가 마을에 전해 오는데 운문댐 망향정 주위로 어실산, 총산, 개산, 범산이 포진을 하고 있다. 개산과 호산은 풍수적으로 보면 호랑이는 개를 잡아 먹을라고 웅크리며 노려보고 개는 36개 도망을 칠려고 호랑이를 등지고 도망갈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운문댐을 휘감아 도는 20번 국도에서 본 공암풍벽의 모습으로 흡사 한마기의 용이 호수에 물을 마시러 내려오는 모습을 하고 있다. 끝 봉우리를 공암마을에서는 용암이라 부르고 있다.
공암풍벽을 보러가는 능선상에 만나는 가리봉 정상으로 운문댐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공암풍벽의 모습으로 지금은 수몰되어 현재의 모습은 마을에서 보기가 불가능하다. 공암풍벽의 끝 부분에 돌아가는 곳이 곡천대로 불리는 곳이다. 이곡천대 아래 용굴이 뚫여있었다는데 깊이를 알 수가 없었다 한다.여기 굴에다 명주실 한타레를 풀면 2km밑 웅덩인 마당수에 그 실타레가 나왔다하는 전설과 학굴이 있어 항상 학이 노닐었다하여 학소대라 부른다.
공암이란 이름을 얻게 된 바위로 바위와 바위사에 길이 나있다. 마을에서는 굴바위골 창배기로 불리며 도로가 뚫리기 이전에는 경주 산내와 청도로 오가는 중요한 길목으로 이고개를 넘지 못하면 가는 길이 없었다 . 곡천대에 아래 용굴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면서 꼬리로 내리쳐 공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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