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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둘레길 12코스)고정리 박연졀~남기리정려각. 초록 융단 깔린 밀양 옛길 영남알프스둘레길 12코스
근교산&그너머 <726> 제12코스 : 밀양 고정리 박연정~남기리 정려각
밀양 옛길에 초록 융단 깔렸네
밀양 옛길에 초록 융단 깔렸네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첫발을 내디뎠던 개척단이 울산 경주 청도 지역을 두루 거쳐 어느새 경남 밀양 땅으로 들어섰다. 그동안 되도록 걷기 좋고 한적한 옛길을 찾아내서 이 길들을 연결함으로써 도보꾼들에게 걷기 여행의 참맛을 느끼게 하고자 노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주 답사한 제12코스 역시 밀양 사람들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는 옛길을 따라가는 길이다. 이 길에는 왜군들로부터 정절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지역 부녀자들의 애틋함과 일제강점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던 항일독립투사들의 저항정신이 녹아 있다. 그리고 옛길을 따라가면서 간간이 초현대식 길의 대명사인 고속도로(신대구부산고속도로)를 만나고 최신형 길의 위 아래를 통과하거나 나란히 걸으면서 옛길과 오늘의 길을 비교하며 걸을 수 있기도 하다. ◇ 매화 고정리 등 산골 주민 밀양장 가던 길 14㎞ 코스
바위 절벽인 수어대(數漁臺) 아래 있는 박연정에서 큰길을 버리고 모정마을 쪽으로 길을 잡는다. 곧이어 4분 후 양무공 김태허의 가묘터를 지난다. 모정마을 방향으로 걷다 보면 정면 고답마을 뒤에 낙화산(626m)이 우뚝 솟았고 모정마을 뒤에는 일명 '뒷말리성', '작은 하늘 방우산' 등으로도 불리는 소천봉(632m)도 눈에 들어온다. 모정마을은 노진촌(盧津村)으로도 불리는데, 동창천을 일명 '노진강'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마을의 옛 이름에서 따왔을 정도로 한때는 일대에서 중심이 된 마을이기도 하다. 아니, 고정리 전체가 경부선 철도와 신작로가 뚫리기 이전까지 밀양 상동면의 면소재지이자 중심 마을이었다. 모정마을 복지회관에서 우측으로 꺾어 100m쯤 가면 당산나무가 있다. 당산나무 앞 버스정류소를 우측에 두고 계속 직진, 들판길을 걷는다. 300m쯤 가면 들판 한가운데 사거리. 왼쪽 고답마을로 향한다. 작은 연못을 지나 마을 앞 아스팔트 도로에 닿을 무렵 우측 20m 지점에 승용차 한 대 크기의 바위가 있다. 고답마을 칠성바위 중 하나다. 마을에 산재해 있는 북두칠성의 모양을 닮은 칠성바위는 그 기원을 알 수는 없지만 이 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속설이 전해온다. 특히 부녀자가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게 된다고 한다. 아스팔트 도로 작은 사거리에서 용황사 표지판을 보며 좌회전, 100m쯤 가면 오른쪽 밭 안에 약산 김원봉 백민 황상규 등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자취가 밴 옛 고명학교 터 있다. 아무 표식이 없으니 개척단이 부착해 놓은 노란색 안내리본을 보고 접근해야 한다. ◇ 옛 고명학교터 칠성바위 당산나무… 고정리 볼거리 가득
오르풀의 칠성바위를 본 후 다시 마을 앞 사거리로 복귀, 왼쪽으로 꺾어 아스팔트길을 따른다. 노란색 씀바귀꽃이 싱그럽다. 고답버스정류소 앞 갈림길에서 왼쪽 골목으로 오른다. 자두밭을 통과한 후 만나는 쌍무덤에서 우측으로 꺾어 들어가면 포구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들이 고답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다. 그늘이 짙고 넓어서 더운 날 걷는 도보여행자들에게는 썩 훌륭한 쉼터가 되겠다. 무덤으로 되돌아간 후 첫 번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내려서면 특이한 구조의 이층 한옥을 지나 아스팔트 도로에 닿는다. 왼쪽으로 꺾어 가면 달성 서씨 재실인 경선재(景先齋)가 있고 곧바로 모정초등학교 교적비를 지난다. 44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도시화에 따른 이농현상의 파도를 넘지 못해 1995년 폐교된 사실을 기록한 이 교적비에 동문들의 안타까움이 절절히 묻어난다. ◇ 가지산서 시작된 운문지맥 끝자락 넘는 숲길 호젓
6~7분쯤 내려가면 왼쪽 개울의 물맛이 시원하고 달콤하다. 곧이어 작은 계곡을 건너면 다시 눈 앞에 고속도로가 펼쳐진다. 고정1터널이라는 도로표지판도 눈에 띈다. 왼쪽에는 보담산 오른쪽에는 고속도로를 끼고 가다가 굴다리를 통과하면 가곡리 비암골의 가곡저수지다. 이곳 주변에는 한국전쟁 때까지 비암마을이 있었는데 전쟁 중에 없어지고 지금은 마을 흔적만 남아 있다. 저수지는 주변에서 민물낚시터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능선길을 버리고 왼쪽 내리막을 택한다. 산외면 엄광리로 내려서는 이 길은 그윽한 숲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호젓한 길이다. 10분 후 눈앞이 탁 트이며 엄광리 일대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보담산 낙화산 중산 석이바위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과 동쪽 서쪽이 모두 산줄기에 싸였고 남쪽만 뚫려 있는 지세의 엄광리는 박연구 삼호산업 대표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형제의 고향이기도 하다. ◇ 회화나무 빼곡한 엄광리 숲촌숲 훌륭한 쉼터 역할 엄광리 숲촌 마을은 마을 앞 숲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골목에 마실 나온 동네 할머니 세 분이 개척단을 반갑게 맞아준다. 시원한 보리차 한 잔 마시고 가라며 집 냉장고의 물을 꺼내 와서 건네주는 할머니의 인정스러움이 고맙기만 하다. 골목길을 통과해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고속도로 교각 못 미친 곳에 멋진 소나무 7그루가 있는데, 그 앞에서 왼쪽으로 엄남천 잠수교를 건너 숲촌숲으로 간다. 100년을 넘게 산 회나무와 단풍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는 체육공원 겸 쉼터다. 점점 더워지는 계절에 도보꾼들이 쉬었다가 가기에 참 좋은 장소다. 숲 쉼터에서 조금 전 건넌 잠수교 왼쪽으로 하천을 따른다. 교각 아래를 통과하고 10분 후 만나는 작은 다리 앞 사거리에서도 직진한다. 엄남천을 우측에 끼고 걷는 둑길이다. 왼쪽의 보리밭 너머 저편에 꾀꼬리봉이 보인다. 엄남교를 건너 계속 직진해서 내려가면 남기리 남가동 마을회관을 지나 옛 국도에 닿는다. T자 갈림길인 이곳에서 우측으로 틀어 100여m만 가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로부터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열부(烈夫) 창녕 장씨 정려각 앞에 닿는다. 12코스의 종착점이다. 운문지맥이 끝나는 곳이기도 하다. # 떠나기 전에 - 임진왜란때 정절 지킨 두 부인 애틋한 뜻 기려
# 교통편 - 부산역 오전 7시45분 출발 무궁화호 타면 딱 좋아 부산역에서 밀양 상동역까지 가는 무궁화호 열차는 오전 7시45분에 출발한다. 요금 4100원. 오전 8시40분 상동역에 내리면 신곡리행 새마을버스가 오전 9시05분에 출발하기 때문에 이 버스를 이용해 고정리 박연정 앞까지 간다. 이 버스는 밀양버스터미널에서 오전 8시50분 출발한다. 상동역 인근에서 택시를 이용해도 된다. 요금은 5000원 안팎이다. 둘레길 순례를 마친 후에는 산외면 남기리 정문마을에서 밀양역 또는 밀양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운행되기 때문에 편리하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밀양 방면으로 24번 국도를 탔다가 곧바로 긴늪사거리에서 청도 방향으로 우회전, 25번 국도를 탄다. 상동역을 지난 후 상동교 앞에서 다리를 건너지 말고 직진, 고정 매화 방향으로 10분만 가면 박연정 앞에 도착한다. 답사를 마친 후 차량 회수를 하려면 종점인 정문마을에서 콜택시(055-356-6000, 355-5000)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요금 1만2000원 안팎. # 비운의 항일 영웅 김원봉 장군을 아십니까 - 의열단 결성 단장 맡았던 항일투사 - 남한 단독정부 반대해 월북 후 숙청
1946년의 어느 날. 당시 밀양 읍내 시가지가 밀양은 물론이고 주변 경남 지역에서 운집한 20만여 명의 함성과 만세 소리로 들끓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밀양이 낳은 불세출의 항일독립운동가인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의 수십 년만의 귀향 환영식 참석을 위해서였다. 당시 밀양국민학교 행사장 주변에는 그가 밟을 수 있도록 광목 카펫이 깔릴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광복군 부사령관, 조선의용대 대장 등을 역임한 그였으니 '장군'이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았다. 망명 항일독립운동가 가운데 백범 김구와 유일하게 쌍벽을 이룬 대표적인 독립투사였던 그였다. 그러나 요즘 중고생들을 붙잡고 물어보라. 백범 김구는 알아도 약산 김원봉을 아는 학생은 거의 없다. 약산 김원봉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리고 왜 잊혀야만 했을까.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 경찰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항일무장테러조직인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하고 단장을 맡았던 민족의 영웅이었다. 의열단은 23차례가 넘는 일본 요인 암살 및 주요 기관 폭파 등의 의거를 감행한 극강의 항일투쟁단체로서 나라 잃을 설움에 빠져있던 국민의 타들어가는 가슴을 적셔주는 단비와 같은 조직이었다. 그랬으니 김원봉에 대한 당시 국민들의 성원과 기대감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해방 후 3개월 만에 그는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군무부장 자격으로 귀국했다. 그의 부인이자 부산 동래여고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박차정 여사가 1944년 이국땅에서 숨진 지 갓 1년여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는 부인 박 여사의 유해를 안고 돌아와 밀양에 묻었다. 그러나 그는 해방 후 돌아온 고국에서 오히려 더 큰 시련과 수모를 겪게 된다. 미국의 비호 아래 이승만이 주도한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이데올로기에 휘둘리지 않는 영세 중립국을 표방하는 남북합작 자주독립국 건설을 주장하면서 우익 세력으로부터 끊임없는 괴롭힘을 당했다. 그가 존경했던 몽양 여운형이 1947년 암살당하는가 하면 그 자신도 친일경찰 출신 경찰에게 붙잡혀 뺨을 맞는 등 수모를 당하고 암살의 위협까지 높아지자 결국 김일성의 초청으로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회의에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했다가 혼자만 북에 남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진 월북한 사람으로 취급됐고 북한 정권 초기 검열상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 등을 거쳤지만 1958년께 연안파 숙청 당시 함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족의 영웅이었지만 남북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했던 비극적 인물이 바로 약산 김원봉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일컬어 "일제강점기 조선이 낳은 '최고의 별'이자 '가장 비극적인 영웅'"이라고 묘사한다. 둘레길을 걸으며 방문한 옛 고명학교터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길은 없다. 1907년 개교한 이 학교에 다닐 무렵 의협심 강하고 용맹했던 김원봉은 일장기를 변소에 처박아 넣는 등의 기개를 떨쳤다고 전해지지만 이제는 학교 터마저 희미하다. 그냥 평범한 과수원 밭의 일부로 쓸쓸히 방치돼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일제 당국은 이 학교를 문제학교로 낙인 찍었고 결국 개교 14년 만인 1919년 폐교되는 운명을 맞게 된다. 같은 해 이미 중국 망명길에 올랐던 김원봉은 의열단을 결성했다. 문의=주말레저팀 (051)500-5169 이창우 개척단장 010-3563-025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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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풀마을의 칠성바위로 마을 부녀자들이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바위
은방울꽃
내가곡마을의 모습. 그 뒤로 밀양의 옥교산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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