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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남기리 정려각과 가곡리 민씨 정려각. 정절과 정려각, 옛길을 가다 만난 슬픈 이야기


시골의 옛마을을 찾다보면은 마을 어귀에 효자각 또는 열녀각을 가끔 만난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비각은 그 마을의 자랑이며
그 마을의 마음을 보여 주는 것 같아 마을 주민들의 자긍심 또한 대단하다.
그래서 인지 시골 농촌을 찾아가는 길손 또한 그곳을 지날 때 면
옷깃을 여미고 마음가짐을 자연히 새롭게 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밀양에는 충과 효를 숭상하는 양반골로 마을 마을마다 자긍심이 하늘을 찌른다.
그래서인지 경부고속도로도 마을을 통과하면 시끄럽다고
밀양박씨와 손씨 문중등 밀양을 대표하는 문중들이 반대를 하여 경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와
한일합섬등 공장들이 들어올려고 해도 조용히 살고 싶다고 반대를 하여 마산으로 갔다는 이야기등
밀양은 그만큼 자존심을 가지고 사는 도시이다.



 

 그래서인지 효자와 열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분들의 이야기 또한 많이 전해온다.
상동면과 산외면은 능선을 하나 두고 각각 열녀각이 하나씩 서 있다.
모두 임진왜란때 정절을 지키기 위해 투신한 분들이다.
산외면 남기리 입구에는 정문마을이 있다.
이마을 이름도 정려각에서 따왔다.
밀양손씨 손기후의 처인 창원장씨로 친정인 창원에 있을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변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월영대에서 뛰어내려 정절을 지켰다한다.




창원장씨 열녀각은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어
안을 보니 좌우 앞면에 사군자인 매화, 난초,국화, 대나무
그리고 소나무가 그려져 있어 더욱 숙연한 마음이다






가곡리의 민씨 정려각 또한 박희량의 부인이자
삼매당 밀양박씨인 민구서의 딸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마을로 왜구들이 들이닥치자 뒷산 바위굴로 피신을 하였다 한다.
왜구들이 그곳까지 따라오자
민씨 부인은 화를 피하기 위해 바위에서 몸을 던지니
마을에서는 한송이의 꽃잎이 떨어졌다하여
낙화암이라 부르며 그 봉우리를 낙화듬으로 현재 부르고 있다.



내가곡마을의 전경과 마을 뒤의 낙화듬돠 정상아래 바위가 민씨부인이 투신 하였다는 낙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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