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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사하여행)다대포 몰운대. 꽃속에서 화장하는 여인의 모습에 비유하는 몰운대를 만나다.


부산의 경계는 해안가를 두르고 있어 많은 절경을 품고 있습니다. 황학대 해운대 이기대 신선대 자성대 태종대 몰운대등 이름만 들어도 아!.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 모두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 중 부산을 대표한 3대(臺)는 몰운대와 태종대, 해운대입니다. 이름난 절경으로 모두 명승지입니다.

 



 

그럼 몰운대를 걸어봅니다. 몰운대는 옛날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감질나게 한 모양입니다. 지금 도 바닷가에 해무가 끼고하면 섬이 보일랑 말랑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조았다 풀었다 하는데 아주 오래전부터도 몰운대는 뭍사람들에게는 눈에서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였던 것 같습니다.

 

 

몰운대는 “안개와 구름이 낀 날에는 그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구름속에 잠긴 섬이라 하였습니다. 16세기까지도 몰운도라는 섬으로 불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육지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닌 바닷가의 섬으로 배를 타고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낙동강에 홍수가 나고 하면 내륙지방의 많은 토사가 밀려 내려오게 되고 그럼 낙동강 하구언에는 대마도 진우도며 많은 모래섬이 생겼습니다. 그 모래가 이곳 다대포에도 쌓이고 쌓여 육지와 떨어저 섬이던 몰운도는 육지와 연결되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듯 요즘 산줄기 걷기인 낙동정맥은 이곳 몰운대를 기종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대포에서 목을 쭉 빼듯이 낮은 구릉이 몰운대와 연결되면서 그곳은 상가로 변하였고 고운 모래사장인 다대포 해수욕장도 자리를 합니다. 소나무 숲이 울울창창한 몰운대 숲길을 걸어보면 기분까지 상쾌해집니다. 사람이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명확한 해답을 주는 몰운대 소나무 숲길. 지금은 시민들의 휴식공원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가덕도, 몰운대와 다대포는 충무공 이순신을 빼 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부산포해전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서 왜선 100여척을 파괴하며 대승를 하지만 그의 휘하 장수 정운장군을 잃는 아픔을 겪습니다. 그의 '정운공 순의비'가 이곳 몰운대에 있지만 통제지역이라 출입을 할 수 없습니다.

 

  

 

몰운대를 걷다보면 만나는 섬입니다. 동섬 쥐섬 동호섬입니다. 몰운대 앞에서 가장 잘 보이는 섬입니다. 


몰운도를 이루는 섬은 몰운대와 화손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통틀어 몰운대로 불려지고 있는데  화손대의 경치 또한 절경으로 아미산에서 내려온 완만한 능선에 지어진 고층아파트의 모습이 마천루를 보는 것 같습니다. 길게 늘어선 용의 능선 두송반도와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다대포항의 모습도 가까이서 볼 수 있습니다.




 

용의 능선 두송반도.......그 뒤로 태종이 와서 활을 쏘며 쉬었다는 태종대가 구름 속에 잠겨 있습니다.


 

 

다대포 최고의 경치를 자랑하는 몰운대 전망대를 향하고 있습니다. 끊어 질듯 이어지는 능선을 걷습니다. 

 

 

 “부산광역시 섬 이름 찾기”를 보면은 1763년 9월3일 조선통신사로 참여한 조엄이 일본으로 향하다가 이곳에 들렀습니다. 그의 '해사일기'에서 ”몰운대는 신라 이전에는 조그마한 섬으로 고요하고 조용한 가운데 아름다워 아리따운 여자가 꽃속에서 치장을 한 것 같다“며 몰운대를 칭송하였습니다. 몰운대방향을 보면서 왼쪽 능선 끝 부분에  화손대가 있습니다. 



오른쪽으로는 자갈마당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만들어져 있습니다. 쨔르륵 쨔르륵.  ‘조선통신사의 길에서 오늘을 묻다(한태문 저. 도서출판 경진)’에도 정사 조엄이 몰운대를 두고 ”몰운대는 작은 섬들이 곳곳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다 산들이 흡사 바다를 품고 있는 형상이다“며 몰운대를 치켜 세우고 있습니다



길게 내려간 능선은 현재 출입을 할 수 없는 통제지역입니다.  저 곳에 '정운공 순의비'가 있습니다.


 

몰운대 좌측에서 본 전망대입니다. 끝없는 바다가 펼쳐지며 맑은 날에는 지네형상이라는 대마도가 보입니다. 금정산은 새벽을 알리는 봉우리 계명봉이 닭의 형상이라 지네는 닭 앞에서는 꼼짝을 하지 못합니다. 계명암에는 자웅석계로 불리는 바위가 있습니다. 암,수 닭의 형상을 한 바위로 범어사에서는 '자웅석계'라 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때 일본인에 의해 암닭은 파괴되었고 지금은 장닭만 외로이 대마도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몰운대 앞바다는 워낙 쥐가 많이 뜰끓었던 모양입니다. ㅎㅎ 섬의 모양이 쥐처럼 보이나요. 동섬 쥐섬 동호섬입니다. 쥐섬에 구름이 걸려 넘어 갈때는 장관이었습니다. 


 

부산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다대포 객사입니다.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3호인 다대포 객사는 다대 첨절제사영에 있었던 객사입니다. 다대 1동 부산유아교육진흥원 내에 있던 것을 1970년 이곳 몰운대로 옮겨와 원형 그대로 복원을 하였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상좌도 7진중의 하나로 부산진과 함께 왜구를 막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을 하여 첨사는 정3품 당상관이 상주하였습니다. 건물의 규모는 회원관의 현판이 걸린 정면5칸, 측면 2칸에 팔작홑처마지붕이며 이전 할때 벽을 없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을 하였습니다.


 


키큰 해송 숲길을 따라 걸어 봅니다. 더욱 심호흡도 크게 해 봅니다.  잠시 뒤  시비가 있습니다. 


 

1999년 사하지역발전협의회가 세운 이춘원의 몰운대 시비입니다.1607년(선조40년) 7월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남겼던 몰운대 시는

“호탕한 바람과 파도 천리요 만리

하늘가 몰운대는 힌구름에 묻혔네

새벽바다 돋는 해는 붉은 수레바퀴

언제나 학을 타고 신선이 온다“

동래부지(1704년)에 전하고 있는 이춘원의 몰운대는 1608년 2월까지 짧은 기간동안이지만 부산의 여러곳을 답사한 뒤 남긴 시입니다.


 

 

 

 

 

구름에 잠긴 몰운대를 빠져나오면 갑자기 신세계가 펼쳐집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1592년 임진왜란과 1700년대의 몰운대까지 만나보고 온 터라 더욱 그런것 같습니다.  과거로의 여행은 이런 재미가 있습니다. 부산에서 과거로의 여행 특히 다대포 몰운대는 더욱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2014/09/28 - (부산여행/사하여행)몰운대 다대포객사. 부산의 3대인 몰운대 다대포객사.


2014/08/13 - (부산맛집/사하구맛집)다대포해수욕장, 몰운대맛집 가마솥추어탕. 50년 전통의 가마솥 추어탕 한그릇에 무더위를 훅~~ 날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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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사하여행)몰운대 다대포객사. 부산의 3대인 몰운대 다대포객사.


부산은 예로부터 사방팔방 조망권이 좋은 곳을 대(臺)라 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조망을 즐기며 글을 남겼습니다. 그만큼 시가 저절로 떠오르는 곳이 많을 정도로 많은 전망대가 있으며 혹자는 부산의 3대, 5대, 8대로 나누어 분류를 합니다.

 




사람에 따라 조금은 다르지만 부산의 3대 몰운대, 태종대, 해운대를 말합니다. 부산사람이라면 모두 수긍을 할 정도 쟁쟁한 조망처 입니다. 또한 내륙의 전망대가 아닌 모두 바다를 끼고 있는게 특이합니다. 부산의 3대중 몰운대를 다녀 왔습니다.

 


몰운대는 16세기까지 몰운도라는 섬으로 불렸습니다. 지금이야 육지화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낙동강의 토사가 하류로 내려와 퇴적되었기 때문입니다. “안개와 구름이 끼는 날에는 그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다”는 뜻으로 몰운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일본과 가까이 있어 많은 부침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있던 정운장군이 이곳 부산포 해전에서 순절을 하였던 곳으로 현재 “정운공 순의비”가 몰운대에 있습니다. 일반인들 들어갈 수 없는 통제지역이라 너무 아쉬움이 남습니다. 부산포 해전은 100여척의 왜군을 격퇴한데서 정운장군이 큰 공을 세워 승리한 해전으로 지금도 부산 서구에 있는 장군산은 정운장군의 뜻을 기려 장군의 산이라 부르게 되었다합니다.






몰운대 정상부에는 다대포 객사가 있습니다. 조선 후기 다대 첨절제사영에 있었던 객사로 다대1동 부산 유아교육진흥원 내에 있던 것을 1970년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원형 그대로 복원을 하였습니다. 객사는 지방으로 출장을 나온 관리나 사신의 숙소를 말합니다.



다대포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폐를 보관하였고 고을의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한양의 임금을 향해 신하의 예를 갖추어 망배를 드리던 장소로 사용이 되었고 또한 손님의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객사라면 본채와 좌우에 방이 딸려 있어야 하는데 다대포 객사는 본체만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다대포 객사는 정면 5칸, 측면2칸에 팔작지붕을 하였고 벽이나 기둥을 겹으로 두른 건물안쪽에 벌여 세운 기둥(안두리기둥)위에 마주보고 있는 두 기둥을 연결하는 나무인 들보를 올린 5량 건물로 벽은 두르지 않았습니다. 창건 연대는 불분명하지만 1825년(순조25년)에 중수를 하였습니다.



다대포 객사는 임진왜란 이후 더욱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담당하여 경상좌도 7진중의 하나가 되었고 부산진과 함께 일반진의 두배인 병선을 거느리며 정3품 당상관이 상주를 하였던 곳입니다. 부산광역시 사하고 다대1동 산144번지에 위치하며 부산광역시 지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몰운대

화손대

다대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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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제주 배편 여행/부산항연안여객터미널)서경 카훼리 아일랜드호, 파라다이스호를 타면서 제주 여행을 하다.

대한민국의 오아시스는 단연코 제주입니다. 사막에서 만나는 옹달샘 처럼 제주는 그 만큼 반갑고 가보고 싶은 동경의 섬입니다. 육지와 또 다른 세계인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는 제주 여행길...... 파라다이스 제주 여행길을 떠났습니다.




 

제주도는 섬입니다. ㅎㅎ 사방팔방 모두가 바다물로 덮혀 있습니다. ㅎㅎ 조오련 선수처럼 저는 수영을 하며는 건너 갈 수 없습니다. 왜냐고요, 맥주병이니까요. 그럼 제주도는 가야하는데 어떻게 가야하나요. 그리고 재미도 있고 가장 즐거운 여행 방법은, 그것을 찾기위해 고민을 하였습니다.


 

현재 제주도를 갈 수 있는 방법은 비행기와 배를 이용하는 두가지 방법. 공항에서 비행기를 이용하면 쓕~~~~~ 여기는 제주공항입니다. 어느 광고 맨트처럼 "벌써 깬거여"가 아닌 "벌써 도착한거여", 빠르면 너무 싱겁잖아요. 


 

그래서 필자가 선택한 방법은 배를 타고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걱정되는게 있었습니다. 지난 4월16일 세월호 사고입니다. 그래서 배편도 조금은 주저하게 되었는데 배를 탄 뒤 많은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후 서경카훼리도 피나는 노력과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는 설명이였습니다.


 

배를 이용한 제주여행은 여러곳에서 가고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부산과 장흥, 목포, 삼천포, 인천등 당일 또는 1박2일 일정으로 운항을 합니다. 물론 집이 부산이라 당연히 저는 부산항 연안 여객 터미널을 이용하였습니다.

 

 

부산항에서 제주항을 운행하는 정기여객선은 (주)서경카훼리의 아일랜드호와 파라다이스호가 격일로 운항중입니다. 수속이야 간단합니다. 예약을 하고 절차를 밟으며 됩니다.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야만 탈 수 있습니다. 출항 1시간 전까지 도착.

 

 

부산항 연안여객터미널을 배를 타면서 본 모습입니다. 목요일 출항하는 배는 아일랜드호입니다. 19시출항. 참고로 아일랜드 부산 출항은 화, 목, 토. 제주출항은 월,수,금 19시. 파라다이스호는 부산출항 월, 수,금 19시. 제주 출항 화, 목, 토 출항을 하며 화, 목은 19시, 토요일만 19:30분에 제주을 출항합니다. 예약및 문의 전화는 대표전화 1688-7577.


 

용두산 공원의 부산타워도 가깝게 보입니다.


 

목요일 제주도로 출항하는 배는 아일랜드호입니다. 5,223톤으로 평균속력이 17노트, 여객정원은 880명까지 승선 가능합니다. 제주까지 배하면 대학다닐때 부산에서 도라지호를 타고 가던 생각이 납니다. 배 밑 바닥에 일반실이 있어 배멀미도 하면서 까만밤을 하얗게 지새웠던 기억에 두번다시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나봐라 몇번 다짐을 해도 방학때만 되면 다시 배를 타고 제주 한라산을 찾던 기억이 지금은 추억이 되어 있습니다. 


 

배는 서서히 바다속으로 미끄러져 갑니다. 모두 갑판 위로 나와 떠나는 항구를 봅니다. 그리고 부산항의 멋진 전경이 지금부터 펼쳐지며 제주 여행이라 그런지 들뜬 기분이 됩니다. 제주항을 나오면서 바라보는 모습은 들뜬 기분에 기름을 붓기에 충분한 전경입니다.


 

많은 관광객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면서 연신 감탄과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기에 바쁜 모습입니다. 필자도 연신 스마트폰을 눌렀습니다. 요즘 스마트폰이 너무 좋아서 그런지 요 사진들 모두 스마트폰으로 찍었습니다.



 부산연안여객터미널과 국제선 터미널은 서로 이웃하고 있어 일본등으로 출항하는 배를 볼 수 있습니다. 역시 국제선이라 그런지 배가 엄청 크고 좋아보입니다. 한마디로 떼깔있고 삐까번쩍합니다. 


 

 

부산 북항에도 서서히 여명이 젖어듭니다. 붉게 물든 하늘과 홍조를 띤 관광객의 얼굴이 너무나 보기가 좋고 아름답습니다. 또한 수평선에도 붉은 피를 토하고 있는 모습에 내일의 장도가 자뭇 기대됩니다. 


 

북항에 건설된 부산항 대교의 모습입니다. 올해 개통을 하였습니다. 광안대교와 남항대교를 잇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부산항의 관문이 되었습니다.


 

다리가 완공되고는 처음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ㅎㅎ 너무 멋진 다리입니다.


 

부산항 대교를 완전히 빠져나온 모습입니다. 저 뒤로 출항한 부산항연안여객터미널이 어둠에 묻혔습니다.


 

배안으로 들어왔습니다. 2인 침대가 좌우로 놓여 있습니다. 여느 장급 모텔의 숙박 시설과 똑 같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옆 우측에 세로로 세워진 통안에 구명동의가 있습니다.



먼저 구명동의를 확인합니다. 조끼형태로 좌우 6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발생하는 불상사를 생각하여 반드시 확인법을 익혀둬여 합니다.


 

아일랜드 내부의 모습입니다. 좌우로 더블침대가 놓여 있고 냉장공와 에어컨, 티비가 벽에 붙어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샤워실이 포함된 화장실도 좌우로 똑같이 있습니다. 화장실이두개라는 말씀. 아마 다른 가족이 함께 동승을 할때는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냉장고 안에는 제주 삼다수가 두병 들어 있습니다. 오! 가동 중이라 생수가 시원합니다.


 

출입구의 모습입니다. 좌우로 화장실 손잡이를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밖으로 나와 맨 윗층으로 올라 갑니다. 식당칸을 통해서 후미로 나갈 수 있습니다. 마침 외국인 부부로 보이는 분이 태극기를 배경으로  부산항을 보고 있습니다. 멋진 그림입니다.





배 내부의 모습입니다. 


일반실입니다. 세월호 참사 후 배는 텅텅 빈 상태로 운항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심각한 재정상태란 생각이 들었고 하루 빨리 안정을 되찾았서면 합니다. 제가 오고 갈때 각 50여명 쯤 배를 탔습니다.




이곳이 식당칸에서 나오면 만나는 곳입니다. 관광객은 이곳까지 나올 수 있습니다.



부산의 상징인 오륙도 입니다. 



식당칸의 밥




 멀리 동쪽 수평선 끝에 해가 솟아 아침이 온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편안하게 잠을 잔뒤라 그런지 조금 늦었네요 ㅎㅎ 





제주도의 모습과 한라산입니다. 



드녀 제주항에 도착을 하여 하선을 하였습니다.



제주 출항은 토요일 파라다이스호를 이용하였습니다. 출항시간은 19시30분 입니다. 신분증은 반드시 필수입니다.





파라다이스호입니다. 아일랜드호보다는 조금 더 큰 6,626톤입니다. 그런데 배는 더 큰데 승객정원은 613명이며 개인적으로 배도 큰데(?) 이상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부산으로 돌아올때도 침대칸을 이용하였는데 제 개인적으로 아일랜드호가 더 좋았습니다. 아일랜드호는   화장실과 샤워실이 방 내부에 있지만 파라다이스호는 화장실과 샤워실을 공동으로 이용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부산~제주 배편 서경카훼리 부산항연안여객터미널 안내

부산항연안여객터미널

★주소: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6가. 롯데백화점 광복점 뒤

★전화:051-400-3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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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서구여행)아미동비석문화마을. 감천문화마을만 아시나요. 일본인 공동묘지 위의 동네 비석문화마을과 최민식 갤러리도 만나보세요.

어릴 때 TV 드라마중 여름날 단골소재가 있었습니다. 무시무시한 공동묘지에서 하얀 소복을 입고 머리를 길게 내린 여인이 흐느껴 울면서 옆으로 눈을 돌릴 때 눈에서 붉은 광채가 나면 심장이 쪼그라들면서 본 한여름 밤의 공동묘지이야기.


 

무섭다며 이불 밑으로 숨고하며 깜짝깜짝 놀라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빼꼼히 눈만 보이며 TV의 공동묘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 헤어나지 못한 기억이 납니다. 아마 모두 무섭고 끔찍하다 하였을 것입니다.


 

 

부산 아미동의 산비탈에서 평생을 공동묘지 위에서 생활한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 것도 대도시인 부산에서 말입니다. 지금도 공동묘지위에 집을 지어 생활하고 있는 동네인 비석마을이 있어 소개를 하겠습니다.



 한국의 산토리니, 또는 마추피추라하며 국내는 물론 동남아등 심지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감천문화마을은 너무 잘 아실 것입니다. 사하구의 감천문화마을과 함께 붙어 있는 마을이 서구의 아미동입니다. 감천문화마을 입구에는 감정초등학교가 있으며 아미고개(감천고개)라 부릅니다.


 

 

고개를 넘으면 오른쪽 담벼락에 ‘산복도로 르네상스’ 일환으로 ‘아미동 비석문화마을’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부산 서구 아미동 산 19번지 아미동 산상교회가 있는 산복도로 오른쪽 산비탈이 일제강점기때 일본인 공동묘지였습니다.


 

 

지금은 그 많은 공동묘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차곡차곡 집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미로 같은 골목길로 연결되어 있는데 골목 폭이 좁은 것은 50cm 안팎이며 사람이 옆으로 서서 빠져나가야 할 정도입니다. 아미동 공동묘지에 마을이 들어서게 된 연유를 알아 보겠습니다.


 

 

 

 

 

 

 

 

해방이 되면서 서구에서 살았던 일본인들은 모두 본국으로 떠나고 일본인 공동묘지는 그대로 남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끌려갔던 귀환동포가 돌아오고 1950년 6.25한국 전쟁으로 피란민이 모두 부산으로 몰려들면서 그 많은 사람을 좁은 땅에서 수용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둘 이곳 아미동 공동묘지에 올라와 비바람을 피할 움막을 치고 무덤위에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워낙 까꾸막이다 보니 무덤의 상석과 비석을 빼내어 바닥을 공구고 한 것이 지금은 축대로 드문드문 박혀 있습니다.


 

 

 

 

축대에 돌출된 비석을 보면 가문의 문양인 사꾸라가 새겨져 있는 것도 보이며 일본의 연호인 대정과 소화, 무덤 주인의 이름도 세겨져 있는데 누군가 인위적으로 지운 흔적도 볼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동떨어 진게 아닌 함께 살아간다고 하겠습니다.




지금도 마을 주민 중에는 그 당시 무덤 속 주인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향을 태우는 집이 있다하니 한여름밤의 남량 특집을 주민들은 매일 경험할 것 같습니다. 그런 어둠 칙칙한 분위기를 걷어내기 위해 비석마을이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부산만이 겪을 수 있는 독특한 산복도로마을에 거미줄처럼 연결된 골목 하나하나가 주민들의 삶과 애환이 묻어 있습니다. 감천문화마을이 인위적이라면 아미동 비석마을은 자연 발생적인 형태의 마을입니다.




담벼락과 옹벽의 벽화가 마을을 더 산뜻하게 하며 부산항과 남북항의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조망은 감천문화마을과 또 다른 매력입니다. 비석마을를 내려서면 도시철도 1호선인 토성역으로 향하는 산복도로를 걸어갑니다. 이곳은 또 다른 볼거리가 있습니다.





















곧 남부민동 산복도로 갈림길에 이정표가 붙어 있습니다. ‘아미문화학습관 50m', '최민식갤러리 50m', '기찻집 예술체험장 30m' 방향인 오른쪽  도로를 걸어갑니다. 왼쪽에는 새로운 부산의 광경이 펼쳐집니다. 






부산의 상징인 용두산 공원과 영도대교, 영도의 봉래산등 부산의 옛 중심지였던 중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집이 기차처럼 길어 기찻집으로 불렸던 곳이 지금은 '기찻집 예술체험장'이 들어섰고 지난 일요일 커피라도 마시며 분위기라도 낼까 싶어 계단을 올라보니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 옆 아미문화학습관은 비석마을과 함께 꼭 찾아봐야 할 곳입니다. 물론 전망대로도 최곱니다. 3층 건물로 2층에는 대한민국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가 최민식 갤러리가 있습니다. 마침 도착한 시간이 오후 5시라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주말에는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다며.....ㅋㅋ 주말에 찾는 사람들이 많은데 평일 날 차라리 조금 늦게 문을 열고 주말에는 조금 더 길게 시간 조정이 있어야 겠습니다. 감천문화마을과 아미동비석마을을 보고 내려오는 관광객을 위해서라도예.........이날은 헛탕을 쳤지만 다음기회라도 꼭 보고 싶은 곳입니다.

 


부산의 감천문화마을만 찾고 다 봤다며 횡하니 떠나지 말고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의 모습과 그 당시을 상상도 해보고 최민식 갤러리를 꼭 방문하여 살아 있는 부산 모습을  만나면 한층 더 가깝게 부산속으로 들어갈 것 같습니다.



2013/01/19 - (부산여행/감천문화마을여행)한국전쟁으로 형성된 마을로 한국의 산토리, 마추피추 감천문화마을


2012/09/02 - (부산사하맛집)한국의 마추피추에서 먹는 얼얼한 팥빙수 맛은-감천문화마을 우인(友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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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부산깡통야시장 여행)부산에서 유일한 야시장 부평동깡통야시장 돌아보고 왔습니다. 


야~~~~호. 부산에도 야시장이 생겼습니다. ㅎㅎ 대만 여행시 보았던 수많은 야시장의 모습과 특히 화시졔 야시장은 별천시 중에 별천지였습니다. 없는게 없을 것 같은 대만야시장을 보고 내고장 부산에는 왜 없지 했는데  부평동 깡통시장이 부평동깡통야시장으로 개장을 했습니다.



 

부평동에 있는 깡통시장은 6.25 한국전쟁 후 수많은 미군의 군수 물자가 흘러나와 시작되었습니다. 통조림등 전쟁 물자에서 다변화되어  전자제품등 모든 수입물품이 이곳에서 판매가 되었던 깡통시장. 지금이야 여행 자유화와 함께 자유롭게 무역상들이수입을 할 수 있어 깡통시장의 기능은 많이 줄었습니다. 



 

그 당시 부산에서 진귀한 상품은 이곳 깡통시장에 와야만 만날 수 있다 하였습니다. 부산의 애환과 함께 한 부산 깡통시장은 요즘 많은 먹거리로 유명합니다. 부평동 돼지족발골목 다 이시죠. 야들야들 입안에서 녹는다는 그 맛........요즘 방송에도 많이 맛집으로 소개되었던 유부 주머니등 모든 맛집이 이곳 부평동 깡통시장과 인근에 몰려 있습니다.


 

가끔 깡통야시장에 들렀지만 추석 명절을 앞두고 찾아갔습니다. 이곳 부평동깡통야시장은 주야 모두 영업을 합니다. 주간은 좌우 점포가 문을 열어 부평깡통시장의 역할을 하고 저녁이 찾아들 무렵은 오후6시 부터 통로에 작은 이동식 손수레가 자리를 잡습니다. 


 

맛있는 먹거리가 즐비합니다. 요즘 다문화 가정이 많이 늘어서 인지 동남아등 그지역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들도 이곳 깡통야시장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대만등 세계의 야시장에 비해 작은 규모지만 입소문을 타 외지의 관광객과 부산을 찾는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부산 여행을 하신다면 이곳 부평동깡통야시장 꼭 찾아보세요, 부산의 색다른 부산만의 여행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근의 자갈치시장과 남포동 광복동과 연계가 되어 걸으면서 둘러 볼 수 있습니다.





 

깡통야시장에서 맛있게 먹고 즐겼다면 야경을 블길 수 있는 곳을 추천하겠습니다. 용두산 공원입니다. 부산을 상장하는 120m 부산타워와 함께 펼쳐지는 용두산 공원의 야경. 한마디로 끝내줍니다. 



 부산 타워 전망대에 올라가 보면 맑은 날에는 대마도도 보이고 밤에는 크리스탈 처럼 반짝이는 부산항의 불빛에 넋을 빼앗기게 됩니다. 부산야경도 구경하고 부평동깡통야시장에서 추억도 쌓고 부산여행 무지무지하게 볼게 많은 곳입니다. 


 

부평깡통야시장 영업시간은  18시 부터 부평동깡통야시장이 열리고 24시에 문을 닫습니다. 부산여행시 참고하세요. 교통편은 도시철도 1호선을 이용하여 남포역 또는 자갈차역에 하차를 하면 됩니다. 버스는 다양하게 많이 있습니다.


용두산 공원 야경



2014/08/06 - (부산맛집/중구맛집)부평동깡통야시장 보수동책방골목 맛집 수목횟집. 까탈스러운 국제시장 부평동깡통시장 상인들의 입맛을 평정한 숨은 맛집 수목횟집이요


2014/04/15 - (부산맛집/중구맛집)부평동시장, 깡통시장, 국제시장맛집. vj특공대 간판없는 식당의 김치찌개가 한국인이 좋아할 김치찌개 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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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강서여행)대저수문(대동수문). 김해평야와 낙동강 삼각주를 곡창지대로 바꾼 낙동강 하구의 대저수문입니다.


강원도 태백시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525km를 남쪽으로 달려와 부산 하단에서 바다로 흡수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낙동강은 하류로 내려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강을 기대며 살고 있습니다. 강을 우리는 젖줄이라 합니다.





낙동강 주위로는 수려한 비경을 만들어 내고 비옥한 들판을 적시며 곡창지대를 만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모유를 주어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듯이 강물은 그 어머니의 품처럼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 주며 우리를 살게하였습니다. 지금의 낙동강은 예전과는 모습이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대구와 밀양을 지나 낙동강은 부산경계로 들어서면서 강물이 낙동강 본류와 서낙동강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나 근대 이전에는 서낙동강이 낙동강의 본류였습니다. 항상 황토물이 흘러 내려 와 양산쪽에서는 황강으로 부릅니다.


 




그만큼 낙동강이 길다보니 여름 우수기에는 골짝 골짝에서 많은 물을 한꺼번에 쏟아 내었고 낙동강하구로 와서는 물바다를 이루며 홍수가 매년 발생하였습니다. 부산 강서구는 낙동강에 토사가 쌓여 만들어져 생성된 삼각주입니다. 김해평야와 함께 여름철이면 항상 물난리를 겪어야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34년 4월에 처음으로김해시 대동면 서낙동강 입구에 대동수문을 세웠습니다. 그 이후에 부산시 강서구로 편입이 되면서 대저수문으로 바뀌었는데 지금도 옛 대동수문으로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서낙동강 하구에도 녹산수문이 1934년 9월에 함께 준공되었습니다.


  




수문의 역할은 홍수조절입니다. 장마로 강물이 범람하여 흘러 내려오면 이곳 대저수문을 막아 낙동강 하구로 바로 흘러 가도록하였고 또한 녹산수문은 김해 평야로 역류하는 바닷물을 막고 대저수문으로 들어오는 강물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두 수문으로 수량 조절을 하여 서낙동강 일대 부산시 강서구 삼각주와 김해평야는 홍수가 발생하지 않게 되었고 관개용수를 풍부하게 확보하여 명실상부한 우리나라의 곡창지대가 되었습니다. 부산시 강서구 대저동과 김해시 대동면을 연결한 대저수문은 낙동상 하구 바라기에 너무 좋은 곳입니다.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는 낙동강의 강둑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화명대교와 함께하는 대저수문을 한번쯤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낙동강에서 바라본 대저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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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동구여행)초량이바구길. 근대의 역사길을 따라가는 초량 이바구길을 만나다.


 부산의 주거는 다른 도시와 다르게 산비탈을 깎아 집을 지었습니다. 그 이유를 보면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수도 서울을 내어주고 후퇴를 하게 됩니다. 낙동강을 경계로 부산만을 남겨두었는데 전쟁통의 피난민들이 모두 몰려들어 그야 말로 인산인해를 이룰정도였다 합니다. 자연스럽게 피난민들은 비탈진 산속으로 올라가 움막을 짓고 생활하게 되었고 그 당시 마을이 동구 중구 서구 영도구에 다닥다닥 붙어 산비탈에 현재의 모습을 이루고 있습니다.



 

 

 부산의 지형적인 특성으로 인해 생긴 대표적인 마을이 감천문화마을이며 요즘 한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산복도로가 많은 부산에는 이런 감천 문화 마을과 같은산간마을의 형태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산항에는 외국선적의 배가 많이 입항합니다. 특히 밤에 정박할때는 선원들이 부산의 발전상에 기절초풍을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멀리서 배를 타고 들어오면 마천루 같은 빌딩이 모두 불을 밝히며 수도 없이 솟아 있는 모습에 모두 어안이 벙벙 한 상태에서 잠을 잔 뒤 또 한번 더 놀라게 됩니다. 혹시 잘못보았나 싶어 눈을 비벼 본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밤 보았던 그 많던 빌딩인 마천루는 사라지고 판잣집 같은 집들이 바둑판에 그어진 선 같이 붙어 있는 모습에 어젯밤의 그 상황을 신기루에 비교를 합니다.



옛 백제병원

 

 

 

마천루에 비유되는 대표적인 곳이 부산 동구입니다. 6.25 한국동란때 피난민들로 마을을 이루었던 산복도로는 망양로라 부르고  이 거리에는 서민의 애환과 이바구(이야기)가 많은 곳입니다. 동구청에서는 이곳에 1.5km의 산복도로 골목길을 이어 이바구 길을 만들었습니다.



 

 

 

이별의 부산정거장인 부산역 맞은편에서 출발을 합니다. 부산역 일대인 초량동은 화교인들이 많이 몰려 있어 ‘차이나특구’로 지정되어 있으며 부산속의 또 다른 모습으로 만두와 중국요리 등을 먹을 수 있는 곳입니다.


  

옛 남선창고 담벼락

 

 

 

50년이 넘었다는 금호 보리밥집 앞의 이바구길 안내판을 일별한 뒤 골목길을 갑니다. 유독 러시아 간판이 눈에 많이 보이는 골목길을 쭉 빠져나가면 먼저 오른쪽에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이 있습니다. 구 백제병원입니다. 1922년 한국인이 설립한 부산 최초의 근대식 개인 종합병원으로 개원하여 10년만인 1932년에 문을 닫았습니다. 그 뒤 건물은 중국집인 봉래각에서 일본 아까즈끼부대의 장교 숙소로 사용되며 해방과 함께 치안대 사무소, 중화민국영사관, 신세계 예식장으로 주인이 바뀌는 등 세월의 시류따라 흔들리다 현재에 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백제병원 건물 우측에는 남선 창고자리입니다. 현재는 탑마트가 들어서 있는 곳이 1910년 부산상인 정치국을 중심으로 세웠던 부산 최초의 창고로 명태를 보관하여 명태고방, 북선창고로 불렸습니다. 명태고방으로 불리던 창고 건물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마트 주차장 담벼락에 그 당시 모습을 보여주는 담장만 현재 보존되고 있습니다.


 

 

 

 

백제병원 건물앞으로 돌아와 진행방향으로 직진을 합니다. 초량2동 주민센터를 지나면 오거리길과 만나고 왼쪽 '늘푸른포스트빌' 왼쪽 골목에 '이바구길' 안내판이 붙어 있습니다. 



 

 

 

골목길을 100m 오르면 담장갤러리와 만나며 옛 동구 초량동의 모습들을 사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옛 건물과 현재의 건물들이 서로 만나는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담장갤러리를 지나면 다시 도로에 올라서며 초량초등학교 정문 앞입니다. 이바구길은 오른쪽의 초량교회 앞에서 이어집니다. 골목안으로 들어서면 초량초교 담장에 동구 인물사가 꾸며져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 동구의 모습이 사진으로 글로 남아 있고 특히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을 쏟은 독립운동가가 많이 배출된 곳입니다. 장건상, 박재혁등과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성산 장기려 박사님 또한 피난 온뒤 이곳에서 환자를 보시며 이시대의 성자로 동구에서는 빼 놓을 수 없는 분입니다.

 




 

 

 

 

 

 

 

 

 

 

 

 

 

 

 

 

 

 

 

 

 

 

 

 

 

 

 

 

 

 

 

 

 

 

 

 

 

 

 

 

 

 

 

 

 

경남여고 교장으로 초량동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청마유치환, 연극연출가 이윤택 등과 초량초등학교 출신으로 가수 나훈아, 개그맨 이경규, 음악감독 박칼린등 다재다능한 분들이 동구에서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옛 부산역 모습

 

 

 

 

 

 

 

 

 

 

이제 기다리는게 168계단입니다. 오른쪽으로 ‘이바구 정거장 분식집이 있습니다. 출출하여 국수와 파전을 먹고 식당 뒤에 있는 색다른 곳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방공호로 'ㄷ'자 형태입니다. 일제강점기때 뚫었다는 대피소로 주택가 아래에 있습니다. 출입을 막기 위해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데 두 입구가 서로 통한다고 합니다.


 

 

 

 

 

 

 

 


지짐이 1500원, 김밥 1500원

 

 

 

 

 

 

이제 과거 산복도로의 생활상이 엿보이는 우물터의 모습과 168계단을 보고 고단한 피난 생활을 생각해 봅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러 수도 없이 오르내리던 계단길, 겨울철에는 새끼줄에 달린 연탄을 양손에 들고 오르던 168계단, 지금 이 길은 이제 추억을 찾아 오르는 관광객의 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기다리는 마음'의 김민부 시인의 전망대입니다. 이곳에서 진한 커피를 마시며 동구와 북항 멀리 영도등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산 장기려박사 기념관 '더 나눔'을 찾아갑니다. 이바구길에서 따로 떨어져 있어 필자는 이곳까지 갔다가 되돌아 오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고 평생을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눔을 실천하며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효시인 청십자의료보험을 설립한 박사님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관입니다. 



 

 

 

 

 

 

 

 

 

 

 

 

다시 돌아와 이제 초량의 당산을 찾아갑니다. 큰 나무와 함께 초량민을 굽어 살펴주는 당 신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요즘 도심에서는 흔치 않은 모습입니다. 이제 망양로인 산복도로에 도착합니다. 



 

 

 

이곳 버스정류장에는 '이바구 공작소'가 있습니다. 건물 옥상은 전망대로 동구를 바라 볼 수 있으며 해방과 6.25 한국동란, 월남파병등 역사의 부침속에 살아 있는 산복도로의 이야기를 수집 스토리텔링화 하여 초량이바구길로 탄생 시키는 곳입니다. 이바구공작소의 전시실과 내부를 둘러 보았습니다.

 

 

 

 

 

 

 

 

 

 

 

 

 

 

 

 

 

 

 

 

 

 

 

 


 

 

 

 

 

 

 

 

 

 

 

 

 

 

망양로를 따라 부산역 방향 삼거리길을 직진하면 그림이 있는 유치환 우체통이 나옵니다. 경남여고 교장을 두차례 역임하신 청마유치환을 기리며 부산항을 바라보는 모습은 너무 시원합니다. 찾아간 이때는 주경업씨의 펜화전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초량이바구길의 마지막 여정인 까꼬막에 들렀습니다. 산복도로에서 내려와 비탈에 자리한 까꼬막은 부산항의 야경이 가장 잘 바라보이며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물론 모퉁이를 돌면 까꼬막카페에서 부산항을 바라보며 커피도 한잔하고  여행을 마무리 할 수 있습니다



 

 

 

 

 

 

 

 

 

 

 

 

 

 

 

 

 

 

 

 

 

 

 

 

 


◆초량이바구길 약도◆

부산동구청 홈페이지캡쳐


 



◆초량이바구길 예약및 대표전화◆


 







2014/03/19 - (부산여행/동구여행)동구 이바구길 장기려 기념관. 바보의사의 이색 처방전 "환자에게 닭두마리 값을 내주시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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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해운대여행/해운대모래축제)이게 모래로 만든 작품이라 믿기 어려운 예술품. 제10회 해운대모래축제 보고 왔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여름 해수욕장 1번지하면 해운대로 모두 이야기합니다. 영화 해운대의 흥행이 아니라도 해운대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장 유명하여 지금 이맘때부터는 전국의 해수욕객과 관광객을 끌어 모웁니다.



 




6월1일부터 해운대해수욕장이 개장을 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6월6일부터 제10회 세계모래축제가 9일까지 4일간 열리고 있습니다. 지난 토욜 해운대를 찾아 갔습니다. 모래축제의 모래조각전도 볼 겸하여 찾아간 해운대 너무 많은 인파로 밀려다닐 정도였습니다.



 




비수기 관광객을 유치하여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한다는 취지로 2005년 6월2일 처음 열린 후 10회 이제는 국내 모래축제를 대표하며 해운대의 이미지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 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올해는 특히 동물 케릭터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먼저 싱가폴 조작가인 탕주행의 작품으로 ‘라이온 킹’에 나왔을 것 같은 정글의 왕 사자의 포스가 장난이 아닙니다. ㅎㅎ. 이곳 사자에 특히 많은 관광객이 붐볐습니다.




 




 




 




 




 



아프리카의 코끼리가 금방이라도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뛰어 나올 것 같은 코끼리 형제들....



 




 




 




 




 



날개를 펼치며 창공을 나는 독수리의 모습은 역시 하늘의 제왕 같고 아프리카 밀림에서 아~~~~아~~~하며 타잔이 금방이라도 내려 올 것 같은 웅장한 모습이 실감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정글의 왕 사자가 나왔다면 이제는 백수의 왕 호랑이가 있습니다. 사자와 호랑이는 밀림에서 서로 용호상박일 정도로 밀림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앵무새와 곰가족등 동물원을 걷고 있는 기분입니다.



 




 




 




 




 




 




 




 



모래 언덕에는 거북이의 모습이 너무 앙증맞습니다. 나무 그늘아래에서 턱을 괴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일까요, 그 옆의 카멜로온은 나무색으로 변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밀림에서는 역시 거미를 조심해야죠. 너무 징그럽습니다.



 




 




 




 




 




 




 





 



다람쥐도 보고 고릴라와 함께 어릴 때 티비 앞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던 타잔, 제인, 치타 모래 조각품에 푹 빠져 봅니다.



 




 




 



올해 해운대 모래축제의 컨셉은 해운대 해수욕장은 매년 모래의 유실이 심했는데 금년에 모래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해운대 백사장이 예전같이 엄청 넓어 졌습니다. 정글의 환경 지킴이인 타잔과 제인처럼 우리도 우리의 자연환경을 잘 지키는 환경 파수꾼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ㅎㅎ 한편의 그림책을 보는 이제 책장을 덮습니다. 



 




해운대의 바다를 에머랄드에 비유를 합니다. 그만큼 깨끗한 바다 해운대에서 열리는 제10회 해운대모래축제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많은 작품으로 눈요기 잘 하고 왔습니다.


 

 




 




 




 




 




 




 






 




 




 




 




 




 




 




 




 




 




 




 




 




 





 




 




해운대 모래축제속의 아빠와 따님. 따님이 너무 귀엽습니다.

 




 




 





 







2010년  제9회 해운대모래축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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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여행/동구여행)동구 이바구길 장기려 기념관. 명의가 뽑은 명의 성산 장기려 박사 기념관을 가다. 


다음 사전에는 “어리석고 못나게 구는 사람을 얕잡거나 비난하여 이르는 말” 또는 “지능이 부족하고 어리석어서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을 바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바보하면 언뜻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바보 노무현’ 그러나 오늘 포스팅 할 분은 ‘바보의사’로 부르는 성산 장기려 박사님입니다.



 

 

성산 장기려 박사님은 전국의 내 노라 하는 명의가 뽑은 명의인데 왜 바보의사라 부르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였습니다. 바보의사 성산 장기려 박사님은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 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전를 졸업하고 일본 나고야 국제대학에서 의학박사를 취득하였습니다.



 

 

그때가 일제 강점기인 1940년이었습니다. 귀국하여 1943년 우리나라 최초인 간암 환자의 설상절제수술을 성공하여 당시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수술로 의학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해방 후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장기려 박사님은 평양의과대학과 김일성 종합대학 외과교수로 근무를 하였습니다.



 

 

1950년 6.25 한국 전쟁으로 가족을 남겨 두고 차남과 함께 월남을 하여 피난을 와 장기려박사님과 부산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피난민과 행려환자를 무료진료하면서 가족처럼 돌보며 1951년 1월에 부산 영도에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워 무료진료를 함으로서 참의사의 표본이 됩니다.



 

 

또 한 1968년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의료보험 조합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 받을 수 있게 하여 현재의료보험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1975년 복음병원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부산 동구 수정동에 무료 진료와 사회봉사 활동을 위한 청십자 병원을 설립하여 가난한 환자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부산진역 옆에는 장기려 박사님을 기억하는 청십자병원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평생을 환자와 사회활동에 헌신을 하고 청빈한 삶을 살다보니 은퇴 때 거처할 집이 없어 복음병원의 옥상에다 마련해준 관사에서 생활을 하였고 1995년 눈을 감을 때도 병원의 옥탑방에서 84세의 일기로 이북에 두고 온 가족을 그리며 눈을 감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날 수 있는 특권을 2번이나 거부를 하였습니다. 일반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1980년 첫 번째 상봉 기회는 미국에 있는 제자들이 제3국에서 만날 수 있도록 주선을 하지만 선생은 “이산가족이 어디 나 혼자 뿐이냐며 통일이 되면 모두 함께 가서 만나지”하며 거절을 하였습니다.


 

 

 

1985년 남북고향방문단으로 서울과 평양을 교차 방문할 때 정부인사가 이산가족 상봉 추진을 제안하지만 거절을 하였고 1994년 2차 남북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확정되었지만 교환합의가 무산되면서 그 충격으로 쓰러져 끝내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1950년 월남을 하면서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며 눈을 감을 때 까지 독신으로 사셨던 장기려 박사님, 그분의 순애보적인 사랑이 요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찌 비추어 질지 궁금합니다.



 

 

한 평생을 베풀며 나눔을 실천한 삶으로 국민훈장 동백장, 적십자 인도장 금상, 막사이사이 사회봉사부문 등 많은 상을 수상하셨고 사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한국의 슈바이처’이자 ‘바보의사’로 부르고 있습니다.



 

 부산시 동구 수정동 산복도로에는 특별한 길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바구길’로 불리는데 경상도 버전의 이바구는 이야기의 사투리입니다. 이곳 동구 수정동은 6.25한국동란과 함께 많은 피난민이 몰려와 비탈진 곳을 깎아 판자 집을 짓고 살게 되어 현재에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당시의 생활상을 이야기로 엮어 내어 만든 이바구길 중간에 ‘더 나눔 센터- 장기려 기념관’이 있습니다. 더 나눔 센터는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박사님을 기념하고 그 분의 신념인 무소유의 삶으로 의술을 인술로 베풀어 가난한 사람들의 의사였던 그분을 기려 2013년 4월1일 개소하였습니다.



 

 

1층에는 북카페, 일자리 나눔방, 작은 도서관으로 꾸며져 있고 2층에는 장기려 기념관, 마음나눔방, 건강 나눔방으로 보건복지 문화 복합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장기려박사님의 인간 생명존중의 철학을 기리고 있다 합니다. 자라나는 자녀와 함께 한국의 슈바이처이자 바보의사 장기려 기념관을 방문하는 것도 좋은 교육이 될 것 같습니다.



 

 

장기려 박사의 일화 한토막. 무엇보다 잘 먹어야 하는 환자에게 써 준 약 처방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합니다. 지금이야 의약이 분업된 상태지만 그 당시에는 병원에서 모두 약까지 조제를 하여 주었습니다. 그 당시 병원 원장이던 장기려 박사가 써준 처방전을 환자는 간호사에게 내 주었는데  "이 환자에게 닭 두마리 값을 내주시오-원장"  



 

 

장기려 기념관 교통편

산복도로에서 내려오기

버스노선:38번, 86번, 186번, 190번

정류소명:동일파크맨션

초량2동 공영주차장 밑 도로 180m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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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영도여행)변호인촬영지 절영해안산책로에서 봄을 마중하다. 흰여울길.


 부산은 해양도시라 합니다. 그와 함께 영화의 도시로도부릅니다. 그 만큼 부산에서 많은 영화가 촬영되었고 현재에도 촬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중 최근 1000만 관중의 흥행 돌풍을 일으킨 영화도 부산에서 촬영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변호인'입니다.

 

 

 

 

변호인 영화가 촬영되었던 영도 절영해안산책로의 흰여울길을 찾아가봅니다. 아름다은 이름을 가진 흰여울길의 뜻은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흰여울길은 예전에 봉래산 기슭에서 여러갈래의 물줄기가 바다로 굽이쳐 내림으로서 마치 흰눈이 내리는 듯 빠른 물살의 모습과 같다하여 붙혀진 이름"이라 합니다.

 

 

 

 

흰여울길을 찾아가는 길은 두갈래입니다. 해안가를 따라가는 절영산책로길과  2송도로 이어지는 도로를 걸어가면 됩니다. 그래도 영도는 뭐니뭐니 해도 바다가 최고입니다. 절영해안산책로의 출발점인 반도 아파트 앞에서 해안을 끼고 걸어 봅니다.

 

 

 

지난주는 폭설로 부산에도 날씨가 지꾸젔고 일주일 내내 비가 오락가락 한 날씨였습니다. 그 뒤 끝에 맞는 주말에다 짱짱한 날씨 때문에 많은 분들이 절영 해안 산책로를 걷기 위해 찾아 왔습니다.

 

 

 

오른편의 남항에는 모박지라 많은 배들이 바다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고 왼쪽은 영도의 주산인 봉래산에서 흘러내린 급경사가 마치 절벽 같습니다. 덩덜아 무너짐을 막기 위해 콘크리트 구조물을 세운 것이 마치 고대 로마의 성벽을 연상케 합니다.

 

 

 

 

터벅터벅 등산화의 걸음걸이가 둔탁하지만 발아래 느낌은 너무 좋습니다. 흰여울길 안내판을 봅니다. 이곳에서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되었다합니다.

 



 

 

 

영화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 '범죄와의 전쟁', 드라마 '영도다리를 건너다'등과 최근에는 '변호인'이 이곳에서 촬영되었습니다. 2011년에는 지역민과 함께 문화예술인을 위한 골목으로 만들어 예술인의 문화예술 창작공간으로 활용하며 '흰여울 문화마을'이 되었습니다.

 

 

 

 

 

안내판 오른쪽의 계단을 올라갑니다. 계단길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이 끝이 없습니다. 한발한발 밟아 계단길 막바지에서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 봅니다. 흰여울길에서 보는 절경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그 어떤 미사여구를 같다 붙혀도 아깝지 않을 해안의 모습입니다.

 

 

 

 

일단 흰여울길을 처음 부터 걷기 위해 왼쪽 골목길을 따라갑니다. 일명 '하얀집'이 나옵니다. '전원가족연구소'란 작은 안내판이 달랑달랑 걸려 있습니다. 이집에서 많은 영화가 촬영되었다합니다.

 

 

 

이집안에서 보는 경치가 그저그만이라 합니다. 흰여울길은 사실상 여기부터 시작됩니다. 그럼 걸어 가보도록 합니다.

 

 

 

편편한 담벼락에는 요즘 유행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이 화려하지 않으며 수수하여 그저 마을의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립니다. 골목이 예술인들의 문화창작 공간 같습니다.

  

 

 

골목길에서는 머리만 돌리면 바다를 보고 걸을수 있으며 오른편에 적당한 높이의 담벼락이 함께 달려갑니다. ㅎㅎ 담벼락 넘어에는 절개지입니다. 

 

 

 

 

올해는 청마의 해입니다. 영도는 말과 관계가 깊은 지명이라 2014년 올해를 영도구의 해라 말하고 싶습니다. 벽화에는 펄쩍 펄쩍 뛰는 적토마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자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빠른 말이 있었다는 영도에 흰여울길....

 

 

 

 그럼 벽화를 보고 걸어가 볼까요. 갑니다.

 

 

 

 

 

 

 

새들의 조잘거림이 이곳까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평온한 풍경의 벽화가 마음까지 편안하게 합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장독대에 몸을 숨기며 아이가 숨박꼭질을 하고 있습니다. 아가야 장독 깬다. 술레잡기는 다른 곳에서 해야지...

 

 

 

 

오!. 이곳은 영화 변호인이 촬영된 곳입니다. 길게 이어진 골목이 보이나요 그리고 좁은 계단에 누군가를 기다리며 남자가 앉아 있습니다. 변호인에서 국밥집 아주머니의 집앞 계단에서 송강호가 밤을 새우며   김영애를 기다리는 모습이 언뜻언뜻 보입니다. 조기 보이는 계단에서 말입니다.

 

 

 그림을 따라가며 변호인을 그려보고 영선동의 옛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번듯번듯한 양옥집 사이에는 아직도 스레트 지붕과 양철지붕이 잇대어 우리의 6,70년대 모습입니다. 집은 옛 모습인데 분을 발라 새색씨 같은 모습의 벽화를 그려 놓은 흰여울길.

 

 

 

 

 

 

 

 

 

 

 

 

 

 

 

흰여울길에도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렸습니다. 벌써 봄은 바다를 통해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매화가 예쁘지예...봄을 맞으러 아름다운 흰여울길을 함 걸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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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복원 선박




☞(부산여행/영도구여행)국립해양박물관. 국내 유일 해양박물관이 너무 볼것이 많아요.


국내에서 유일한 해양박물관이 해양 도시로 불리는 부산에 있습니다. 부산시 영도구 동삼동에 건설된 국립해양박물관은 지하1층, 지상4층의 건물 형태를 갖추며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인지 2013년 한국건축문화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연면적이 45,444㎡에다 1,142억원의 경비가 투입되었습니다.





국립해양박물관을 방문해 보면 2층은 기획전시실과 어린이 박물관이 자리하고 3층은 해양생물과 체험 그리고 해양사 인물과 국내 인물, 항해선박과 문화등 바다에 관한 모든 것이 상설 전시되는 곳입니다.



지구의



지난 국립해양박물관의 1.2회 포스팅에서 먼저 첫 번째 기획전시관의 반구대 암각화 전시를 소개하였습니다. 두 번째 포스팅으로 3층의 대형수족관이 있는 해양생물과 해양체험을 하였습니다.







국립해양박물관의 중요한 요소로서 요번 포스팅은 국내해양의 역사와 세계해양의 인물, 문화, 항해 선박등을 소개합니다. 우리의 바다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해상왕 장보고와 임진왜란에서 바다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불멸의 영웅 성웅이순신장군을 전시한 공간도 만날 수 있습니다.


 

구스의 해도첩



일본과의 교류인 조선통신사와 통신사 배의 복원과정을 볼 수 있으며 다양한 자료를 만날 수 있습니다. 국립해양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해양관련 유물은 1만점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중요하며 문화재의 가치도 있는 유물도 있다합니다.





덴마크의 코팬하겐바이킹박물관에 있던 바이킹 배와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콘돌라, 거북선의 자료와 관련문서 이외에도 지금 아배가 독도를 침탈하기 위한 만행을 시도하고 있지만 1837년 일본 나가타 해안에 지네 선조들이 세운 ‘죽도제찰’에서 “죽도는 조선 땅이므로 항해를 금지한다”를 기록한 경고판도 전시하고 있습니다.





아배는 이런데도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로 우기며 침탈할려고하니 참 기가 찰 노릇입니다. 또 ‘구스의 해도첩’도 있습니다. 1666년 네덜란드의 지도제작자 피터구스가 제작한 해도첩 초판으로 총 41개의 해도를 수록하였습니다. 또 만날 수 있는 유물로 ‘지구의와 천구의’입니다.





1846년 영국의 뉴튼 일가가 제작한 지구의와 천구의 한쌍으로 지구의 제작 장인이 만들었습니다. 지구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나타내는 것으로 우리의 동쪽을 단독으로 동해로 표기하고 있으며 천구의는 하늘의 별과 별자리를 둥근 공에 표현하여 야간 항해시 별의 위치로 방향을 보며 지구의와 함께 사용을 하였다합니다.





조행일록은 1863년 임교진이 작성한 조운일기입니다. 관직에 있으면서 세곡을 배로 운반하면서 세곡 내역과 노정을 날짜별로 기록하여 현존하는 조운일기 중 가장 오래되었다합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유물을 접할 수 있으며 우리 고유의 소금이 천일염으로 알았는데 자염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해안가에서의 풍습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국립해양박물관은 현재 4D 영상관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료 관람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와 함께 방문을 하여 우리의 바다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국립해양박물관 관람안내◆



◆국립해양박물관 관람 무료 버스 운행 안내◆




◆국립해양박물관 관람안내도◆











☞2014/01/04 - (부산여행/영도여행)영도 국립해양박물관. 해양박물관에서 반구대 암각화를만나다.국립해양박물관


☞2014/01/16 - (부산여행/영도구여행)영도 국립해양박물관. 이 모든것이 무료관람, 바다속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국립해양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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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해운대구여행)솔밭예술마을 창착공예공방, 모두가 손으로 만들어요, 젊은 예술가들의 창작활동 솔밭예술마을,  


요즘 농촌의 폐교를 이용하여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하는 공간은 여럿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산에 그것도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해운대에 예술가의 창작마을인 솔밭예술마을이 최근에 생겼다하여 우연한 기회에 찾아가보았습니다. 멋들어진 소나무가 감싸는 아담한 분위기가 너무 좋은 곳입니다.





해운대구 중동은 부산에서는 좌동과 우동과 함께 신시가지에 속합니다. 해운대역이 이전 전까지만 해도 해운대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최근에 개발 바람을 타고 인근에 아파트 신축 허가가 나 이곳도 헐리게 될 예정이었습니다. 해운대구에서는 소나무도 살리면서 인근을 공원화하여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안을 내었고 지역 예술가들에게 창작활동공간을 제공하기로 하며 ‘해운대 솔밭예술마을 창작공예공방’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총 공사비는 21억이 들었지만 20여그루의 굵은 소나무가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 여겨집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때 해운대역에서 일하던 노무자들이 소나무 숲이 우거진 이곳에 천막을 치고 생활을 하였던 곳이라합니다. 예전에는 이보다 소나무가 더 많았던 곳으로 보입니다.





개발의 바람으로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그 당시 소나무의 역할은 마을에 태풍을 막아주는 방풍림 역할을 하였던 것은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이곳에 들어선 솔밭예술마을의 공예공방은 6개의 공방이 독립적인 공간을 가지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수작업으로 만드는 인형공방, 작은 가마도 갖추고 있는 도자기공방, 우리한지로 가방과 옷 등을 만드는 한지공예. 아름다운 향기의 양초공방, 사진예술 공방 등 대부분 젊은 예술인들이 모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가장 눈에 띠었던 것은 수작업으로 만드는 인형이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못 만드는 것이 없다지만 손으로 한땀한땀 기워 정성으로 만드는 것을 보면 할아버지가 목각 인형 피노키오를 깎아 만든 그런 정성으로 인형 하나하나에 작가의 혼이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지공예 작품을 보고도 어안이 벙벙하였습니다.







여자 분의 가방이 전시가 되어 있었는데 한지로 만들었다하여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우리의 한지로 이런 가방과 옷을 만들 수 있다하니 우리의 한지가 대단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이곳은 훌륭한 젊은 작가들이 만든 작품들을 직접 보고 접할 수 있으며 또 수강도 할 수 있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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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영도구여행)영도 국립해양박물관. 바다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국립해양박물관.


부산 영도구 동삼동의 국립해양박물관 하늘공원에는 다양한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볼거리는 외관도 볼거리지만 더욱 눈에 띠는 것은 복원한 10m 높이의 ‘조선통신사’ 돛대로 1층에서 시작하여 4층까지 그 높이를 이루고 있다합니다. 그럼 국립해양박물관 중 2층의 전시실은 최근에 포스팅을 하였습니다.





오늘은 3층에 해양생물 등의 전시품을 포스팅 하겠습니다. 수족관과 해양생물은 국립해양박물관의 꽃이라 할 정도로 관람객의 눈을 사로잡는 곳입니다. 그럼 차근차근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시주제가 생명이 역동하는 광활한 바다-해양생물을 전시한 공간으로 398t의 대형 수족관이 있습니다. 수족관 밑으로 관람객들이 다닐 수 있도록 설계가 되어 있어 아주 가까이에서 물고기를 볼 수 있습니다.


 



수족관 안에는 국내어종 21종과 국외어종 21종등 900여마리의 물고기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국내 해안에 살고 있는 물고기는 상어류와 자라면서 암수가 바뀌는 능성어나 감성돔, 그리고 독 가시가 달려 있는 독가시치와 까치상어등 평소에 만나기 힘든 물고기도 전시되고 있습니다.





수족관 밑을 지날 때 머리를 들면 바닥에 누워있는 큰 물고기를 볼 수 있습니다. 제브라상어로 잠꾸러기 인가 봅니다. 방문하였을 때도 축 늘어져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 옆으로 작은 물고기들이 많이 몰려 있었는데 아마 상어 옆이라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는 천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를 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제브라 상어는 어렸을 때는 얼룩말 줄무늬가 있는데 크면서 줄무늬가 사라지고 몸 전체에 검은 반점이 생겨난다합니다. 낮에는 모래 바닥 등에서 푹 쉬었다가 밤이면 행동을 시작한다는 제브라상어, 또 눈에 확 들어오는 어종이 있습니다. 색상이 화려한 쏠배감펭으로 너무 예쁜 물고기입니다.





제주 방언으로 ‘산방우럭’이라하며 지느러미가 사자의 갈기같이 생겨 ‘라이언 피쉬’라 하는데 아름답지만 독을 가지고 있어‘전갈 물고기’로도 불리는 무시무시한 고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남해와 제주도 근방에도 분포를 합니다. 우리나라 해안에 복어 이외에도 독을 가진 물고기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무서움이 듭니다.





화려하며 다양한 색상의 산호와 해마등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는 국립해양박물관입니다. 바다는 물고기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하는 어부도 있지만 생활의 활력소인 다양한 해양레저가 요즘은 대세입니다.


 



그와 함께 즐거운 우리 바다-해양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보트 체험를 할 수 있는 수조와 해양 레저 스포츠의 관심 등을 자연스럽게 유발하여 바다와 친숙해 질수 있는 공간으로 국립해양박물관은 꾸며 놓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이루어 저 있습니다. 그 만큼 우리에게는 바다가 우리의 영토만큼 중요합니다.





앞으로는 해양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만큼 해양박물관에는 대한민국의 해양영토도 다루며 해양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조선통신사 배를 복원하였고 해상왕 장보고와 임진왜란과 정우재란에서 해군역사상 전무후무한 23전승의 혁혁한 기록을 가진 이순신장군과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현장도 전시해 놓아 다음에 다시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제브라상어




























 

 

 

 

 

 

 

 

 

 

 

 

 

 














 




 

 


 

 

 

 

 

 

 


 







쏠배감펭




 


 


 




























◆국립해양박물관 관람 안내◆



◆국립해양박물관 무료 써틀 버스 운행 안내◆



◆국립해양박물관 안내도◆




◆국립해양박물관 하늘공원 3층 안내도


★국립해양박물관 홈페이지 캡쳐 ★






☞2014/01/04 - (부산여행/영도여행)영도 국립해양박물관. 해양박물관에서 반구대 암각화를만나다.국립해양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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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낙동강 뱃길)을숙도에서 물금까지 낙동강에 배를 타고 가다. 낙동강뱃길


부산시에서 올 7월 낙동강 뱃길을 잇는 생태 탐방선을 운영한다고 하여 지난 .10월 중순에 미리 댕겨 왔는데 이제야 포스팅을 합니다. 부산하면 생각나는 게 바다입니다. 부산의 바다 하면 해운대해수욕장, 그리고 광안리해수욕장 송정과 송도해수욕장등 바다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부산은 꼭 바다만 있는 게 아닙니다.

 


 

 

태백의 황지에서 시작한 낙동강이 1300리를 쉼 없이 달려와 이곳 부산 하단의 하구언에서 생을 마감하며 바다로 스며들어가는 곳입니다. 그와 함께 부산은 바다와 함께 강도 있습니다. 동쪽과 남쪽에는 동해와 남해 바다가 경계를 짓고 서로는 낙동강이 서부산을 관통하여 흔히 부산을 명실상부한 해양도시라 합니다.

 

 



 

 

일찍부터 부산은 바다 관광이 그 어느 도시 보다 발달하였습니다. 해양레포츠는 물론이며 유람선 또한 부산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낙동강을 이용한 관광은 바다 관광에 비해 너무 미진하여 부산시관광공사에서 낙동강 뱃길을 살려 보자는 계획을 야심차게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관광사업으로 낙동강의 뱃길을 추진하지만 이곳 낙동강에는 삼국시대부터 뱃길이 있어 내륙으로 생필품을 나르는 운송수단으로 낙동강의 뱃길이 이용 되었습니다. 그 낙동강의 뱃길을 현재에는 관광상품화 하기 위해 시범운항을 추진중입니다.

 

 

 

 

 

필자와 일행도 생태탐방선이 여의치 않아 한국수자원 공사의 수질 검사선을 타고 을숙도에서 양산 물금취수장까지 25km의 뱃길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편도 1시간 30분으로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이날 낙동강 문화원의 이동주 관장이 동승하여 낙동강에 얽힌 전설과 강에 기대어 살던 주민들의 애환이 담긴 이야기 보따리를 하나둘 들려 주었습니다.

 

 

 

 

배는 을숙도에 있는 하굿둑의 한국수자원 공사 옆 간이 선착장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지금이야 을숙도에 하굿둑이 건설되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지만 60~70년대는 쉽게 갈 수 없는 그런 곳 이였습니다. 그야말로 철새들만 집을 짓고 살던 곳이란 뜻의 을숙도(乙宿島)로 불렸는데 현재는 그 뜻이 약간 변해 새을(乙)자에 맑을숙(淑)자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자 선착장을 출발해서 달려갑니다. 작은 배는 시속 20노트(약18km) 정도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강물을 가르며 요란스럽게 달려 나갑니다. 낙동강을 가운데 두고 왼쪽은 부산시 강서구이며, 오른쪽은 사하구, 사상구, 북구로 낙동강에 기대며 많은 부산 시민이 살고 있습니다.

 

 

 

 

기댄다는 의미는 이곳 주민들은 하루에 낙동강을 한번 씩은 안볼 수 없는 삶의 일부분 같이 가까이에 낙동강이 있습니다. 낙동강과 함께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고 할까요. 지금이야 각 가정마다 화장실도 모두 수세식으로 바뀌었지만 30~40년 전까지만해도 낙동강에는 똥다리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화학비료의 발달로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지 않아 집집마다 똥지게를 지고 낙동강을 찾아 들었습니다. 강물에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똥지게를 지고 나무다리로 올라가 강으로 인분을 흘러 보냈다하여 똥다리로 불렀습니다.  지금은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1950년경 낙동강에는 일제 강점기때 건설된 구포대교만 있었습니다. 근대문화유산 이야기가 나오다가 몇 해 전 태풍으로 그만 다리가 두 동강나 철거되고 민족의 수난과 함께 역사를 간직한 구포대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졋습니다. 지금이야 낙동강위에 구포대교보다 더 큰 수많은 다리가 놓여지고 또 건설도 되고 있습니다. 그 만큼 부산과 낙동강은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6.25 한국동란 때 만 해도이곳 낙동강을 두고 연합군과 북한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 낙동강이 있어 부산을 지켜 내었습니다.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할 수 있었고 대반격의 기회가 될 수 있었던 고마운 낙동강입니다. 다시 배는 달려갑니다.

 

 

 

 

지금은 사하구, 사상구, 북구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아파트가 솟아 있습니다. 낙동강을 두고 틈도 없이 솟아 있는 모습의 고층아파트를 보면 중국의 만리장성을 생각나게합니다. 과장이 아닌게 낙동강 주위로는 틈도 없이 아파트가  빼곡이 둘러싸고 있어 부산을 보는 마음은 그저 먹먹합니다.

 

 

 

 

부산의 낙동강에서 가장 큰 포구는 구포입니다. 구포는 거북이에 얽힌 전설이 있습니다. 백양산에서 흘러 내린 능선이 낙동강으로 살포시 꼬리를 감춥니다. 그 모습이 뭍으로 올라오는 거북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 구포라 부르게 되었다합니다. 이곳에 올라가면 거북 모양의 바위도 있어 거북산이라 주민은 부르고 있습니다. 현재는 아파트 건설로 파헤쳐져 거북산도 위태로울 지경입니다.

 

 

 

 

부산사람에게는 잊을 수 없는 열차사고가 있습니다. 그 사건이 이곳 거북산의 도로와 무관하지 않다는 풍수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북산 옆에 새로지은 아파트의 진입도로를 만들기 위해 거북산을 절개하게 되었는데 그 절개부분이 거북이 목 부분 이었답니다. 거북이의 목을 짜르고 난 뒤 구포역 열차사고가 터졌습니다. 거북산이 노하여 사고가 났다며 주민들 사이에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지금은 도로위에 끊어진 거북 목을 연결하는 육교를 설치해 놓았다합니다.

 

 

 

 

구포를 지나면 최근에 건설된 화명대교를 볼 수 있습니다. 두 개의 첨답이 장관입니다. 그와 함께 오른쪽으로 보면 대저 수문이 있습니다. 이 대저수문은 부산과 김해의 경계인 서낙동강에 설치된 수문입니다. 처음에는 서낙동강이 낙동강의 본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때 윗 지방에 홍수가 나면 하류인 이곳 서 낙동강 일대가 물바다를 이루어 홍수를 막기 위해 이곳에 수문을 달고 지류로 물길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지류가 현재 낙동강이 되어 이제는 낙동강의 원류가 되었습니다. 대저수문도 원래는 대동수문으로 불렀습니다. 김해시 대동면에 속해 있었는데 부산시로 이관되면서 부산 강서구 대저동의 지명을 따 대저수문으로 바뀌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낙동강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부산, 김해, 양산의 시계를 지나게 됩니다. 강이라 시계의 표시는 없지만 배는 부산시를 벗어나 김해와 양산시계로 접어 듭니다. 오른쪽으로는 양산시 물금읍이 나옵니다. 이곳 물금은 삼국시대부터 김해와 연결하는 나룻터가 있었습니다. 신라와 가야의 국경지대로 서로 상업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습니다.

 

 

 

 

물금(勿禁)의 뜻은 ‘금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이며 허용하는 물품은 마음대로 거래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곳 물금은 한양으로 올라가는 가장 빠른 길인 영남대로길입니다. 세 개의 영남대로 중 중도였는데 험하기로 가장 악명 높은 구간이 이곳에 있습니다. 옛날에는 낙동강을 황산강이라 불러 황산잔도라 불렀습니다.

 

 

 

 

국어사전을 보면 잔도는 ‘사람이 다니기 힘든 벼랑에 선반을 달아 내듯이 만든 길’을 말합니다. 그 만큼 험한 산길입니다. 이와 이웃한 삼랑진에도 작원잔도가 있어 이 구간을 마의 길이라 하였습니다. 지금은 옛 영남대로 길은 일제강점기때 수탈 목적으로 경부선이 가설되면서 모든 길이 사라지고 최근에 4대강사업으로 낙동강 위에 자전거 길인 육교가 가설되어 심심찮게 자전거 동호인을 보게 됩니다.

 

 

 

 

물금 취수장이 있는 이곳에서 일단 배를 돌려 을숙도 선착장으로 귀환하였는데 시원한 낙동강 바람을 맞은 하루였습니다. 낙동강은 지금도 말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과 함께 반만년을 흘러온 낙동강은 많은 이야기 보따리가 포도 송이 처럼 주렁주렁 메달려 어떻게 잘 풀어나가는야가 부산관광 사업의 낙동강 뱃길이 승패를 좌우 할 것 같습니다. 7월 이 후의 낙동강 뱃길은 어떤 모습이 될지 벌써 부터 기대가 됩니다. 미리 달려가본 낙동강 뱃길이였습니다.

 

◆낙동강 뱃길에서 본 부산 구경하기

 

 

 

 

 

 

도시철도 3호선 구포역사 모습

 

 

 

 

 

 

 

 

 

 

 

 

 

 

 

 

 

 

 

 

 

 

 

 

 

 

 

대저수문

 

 

 

 

 

 

화명대교

 

 

현재에도 다리 건설중

 

 

4대강 사업으로 건설된 낙동강 자전거길인 황산잔도 구간.

 

 

 

 


 

 

 

 

 

 

 

 

 

 

 





 






2013/12/22 - (경남여행/밀양삼랑진여행)삼랑진 작원관, 영남대로의 관문이며 임진왜란때의 결사 항전지 작원관을 찾아가다.작원관지


2013/12/19 - (경남여행/양산여행)김정한의 소설속 수라도의 배경인 미륵당이 지금의 용화사.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2013/12/21 - (경남여행/양산원동여행)낙동강 가야진사. 신라와 가야의 접경지 원동 용당나루터와 조강지처를 버린 용의 전설 가야진사.


2013/12/24 - (경남여행/양산여행)낙동강 자전거길이 영남대로길, 물금역~삼랑진역(황산잔도~작원잔도)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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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영도여행)영도 국립해양박물관. 해양박물관에서 반구대 암각화를만나다.


지난 주말에 부산시 영도구 동삼동에 있는 국립해양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현재 국립해양박물관에는 다양한 전시가 진행중이였습니다. 안내데스크가 있는 2층이 중앙홀로 좌우로 기획 전시실과 어린이 박물관이 꾸며져 있습니다. 3층에는 해양문화와 해양역사인물, 항해선박, 수족관과 해양생물 그리고 해양체험을 할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습니다. 4층에는 해양영토와 해양과학, 해양산업 등의 전시실과 4D영상관으로 꾸며져 있어 명실공히 해양부산에 어울리는 해양박물관입니다.


 



필자는 먼저 2층 중앙홀의 기획전시실을 둘러보았습니다. 이곳은 반구대 암각화 전시를 하고 있는 곳입니다. 반구대 암각화는 뉴스에서 심심찮게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반구대 암각화가 있는 곳에 사연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사연댐은 비가 내리는 양에 따라 급격하게 물이 유입되어 해발 60m 높이까지 수위가 상승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공사 이전에는 발견하지 못한 암각화가 사연댐 공사 이 후에 발견되었습니다.




 



암각화가 해발 53m 높이에 있다보니 여름철 장마때등 보통 1년에 8개월은 물에 잠겨 지내게 됩니다. 수시로 물에 잠겼다사 햇볕에 노출되었다가 하다보니 반구대 암각화의 보존상태가 심히 걱정이 됩니다. 문화재청에서는 물을 빼고 당장 수위를 조절해야 된다하고 울산의 지자체는 시민들의 식수가 부족하여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치는 사이 우리 문화재는 23.8% 정도가 손상이 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현재 반구대 암각화 앞에 물을 막는 칸막이를 쳐 보호를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는데 잘 될지 걱정이 됩니다.





먼저 암각화에 대해 알아볼까요? 바위면에 도구를 이용하여 새긴 그림을 암각화라 합니다. 반구대 암각화는 1971년 발견이 되었습니다.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잡이, 동물사냥 등 그 당시 선사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림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995년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었고 울산시에서는 천적리 각석과 함께 단 두 점의 국보가 모두 암각화와 각석입니다. 2010년에는 천전리 각석 주변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과 함께 세계유산 등재의 준비단계로 잠정목록에 올라 있습니다.


 



 

반구대 암각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반구대 암각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연대는 신석기 후기부터 청동기에 걸쳐 새겨진 것입니다.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하여 윤곽선을 새기고 내부를 쪼아내거나, 긁어내기, 면이나 점을 새기는 등의 방법을 이용하였습니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크고 작은 그림들이 300여점 있다고합니다.


 



 

고래를 비롯한 해양 동물과 호랑이 등의 육지동물이 가장 많이 그려져 있습니다. 동물이외에도 사람, 얼굴, 배, 작살, 그물 등의 그림을 새겨 놓았습니다. 지금도 울산에는 고래가 유명합니다. 선사시대부터도 울산에는 고래잡이가 성행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곳 반구대의 암각화가 그것을 입정해주니 말입니다. 또한가지 반구대 인근인 울주군 언양읍 다개리에는 ‘고래섬’이란 고래의 지명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마을주민에게 물어 보니 옛날 울산 바다에서 잡아 온 고래를 이곳까지 운반해왔다는 마을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울산의 고래잡이는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동삼동의 국립해양박물관에서 어린이와 함께 반구대 암각화를 둘러 보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해양박물관 전시 꼭 둘러보세요. 

 





국립해양박물관 반구대 암각화 전시기간

일시:2013.12.17~2014.01.26

장소;국립해양박물관 기획전시실(2층)

입장료:무료

 

반구대 암각화 전시실 둘러보기

포토존



































































★국립해양박물관 관람안내★




★국립해양박물관 무료 셔틀 버스안내★

부산역에서 국립해양박물관을 경유하는 66번 버스를 이용해도 됩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










울산 천전리 각석



(위의 내용은 해양박물관 홈페이지(www.nmm.go.kr)와 반구대 암각화 팜프렛의 내용을 발췌및 참고하였습니다.)








☞2011/02/19 - 억겁의 시간속을 걷는 영남알프스둘레길제3-1 울주구량리~반구대입구


☞2011/02/27 - 억겁의 세월이 묻어나는 반구대 암각화와 포은 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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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운대에 있는 레디움 아트센터에서 독특한 그림을 보고 왔습니다. '고전과 만나는 현대 모야' 전인데요 그림을 보면 모두다 어디서 본듯한 느낌입니다. 자세히 보면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램브란트,카라밧지오등의 작품인 담비를 안은여인, 모나리자, 비너스의 탄생 , 최후의 만찬, 아담의 창조등이 파트릭 모야에 의해 새로운 모습으로 그려져 전시중입니다. 유명인의  원작 작품을 새롭게  재해석을하여 보여 준 모야의 작품은 저로서는 처음 접하여 본 그림으로 너무 독특한 모습입니다.


 


 

레디움 아트센터 개관기념으로 유럽의 파트릭 모야를 초청하여 그의 작품과 세계관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2013년 8월20일 부터 2014년 1월19일까지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일반 미술관은 작가의 그림을 전시하여 판매를 하여 운영이 된다면 레디움은 전시관의 입장료로 운영이 된다 합니다.

 






이곳에서는 전시관의 작품을 활용하여 미술교육등 다양하게 운영이 되다보니 초중고와 직장인등 단체 관람객이 줄을 잇고 있다합니다. ㅎㅎ 해운대 해수욕장의 독특한 미술관인 레디움의 모야 전시  한번쯤은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림에 문외한인 저도 많은 공부하고 왔습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작가의 작품으로 기획 전시를 계획중이라하니 레디움 아트센터의 전시를 다음에도 가보고 싶습니다. 현재 이곳에 전시된 모야의 작품중에 아이들의 대통령인 뽀로로와 기장경찰서의 모순경이 모야가 한국 방문때 작품으로 해석되어 전시되어 있습니다. 많은 작품을 접하며 영상으로도 만날 수 있는 모야의 작품세계 이번기회에 구경해 보세요. 일반 12,000원.

 

바로가기 레디움 아트 센터 http://www.radiumartcen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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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금정구여행)부산대학교 후문에도 벽화거리가 있어요.


지난 목욜 우연찮게 부산대학교 후문쪽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부산대학교에는 부산의 국립대학으로 3곳의 출입문이 있습니다. 초창기 시계탑이 있던 정문이 현재는 구정문이라 부르며 도시철도 부산대학역에서 올라는 오는 출입구를 정문이라 부릅니다. 또 한곳은 후문으로 장전1동과 부산대학교 캠퍼스와 경계를 이루는 곳입니다. 이곳 후문쪽은 대학가에서 당연히 있는 화려한 상가로 꾸며진 그런곳이 아니라 학생들의 자취방과 원룸, 고시텔등 기거하는 곳으로 미리내마을로 불리고 있습니다. 





마을 전체가 무거운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을 내려오는데 부산대학교 축대와 담벼락에 벽화그림이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벽화의 상태나 주변의 상황으로 보면 작업을 하고 있는 그런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아직 미완성 상태라할까요. 어떤 연유로 여기 이런곳에 벽화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요즘 많은 도시의 마을에서 벽화그림으로 지역과 연계를 하여 활성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이곳 장전1동의 미리내마을도 외관으로 보면 마을이 많이 침체하여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마 마을의 분위기도 쇄신을 꾀하는 일환으로 벽화작업을 시작한 것은 아닌지...사실 필자도 여러곳의 벽화 마을을 댕기고 그림을 보았습니다. 여수 전주 수원 대구 이광석거리등 수없이 벽화의그림을 많이 보았지만 부산대학교 후문의 벽화 그림은 더욱 인상깊게 다가왔습니다.


 





무엇인가 이끌리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곳의 벽화를 좀더 정리하고 보충을 하여  부산대학교 정문 앞의 화려한 상가 조명등과 연계를 하면 좋은 관광지가 될 것 같습니다. 특히 부산대학교의 특수성을 살린다면 타 지역에서도 많은 여행객들이 올것으로 생각되는데 벽화가 완성이 되어 좋은 벽화거리가 될 것을 바래 봅니다. 


◆부산대학교 벽화거리 구경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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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대교 47년만에 들어 올려지는 장면

 



영도대교 47년만에 내려오는 장면 





☞(부산여행/중구 영도여행/영도대교)47년만에 영도대교 다리가 들리다.


11월27일 오후 2시에 영도대교가 하늘로 향해 두팔을 벌렸다. 1934년 완성된 중구와 영도를 잇는 영도대교는 그 당시에는 영도다리로 불렸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유행가 가사의 배경이 되었던 영도대교는 현재에도 초승달이 영도다리 난간위에 외로이 걸리며 그때의 애환을 노래하고 있다. 세월이 흘렀지만 피난민에게는 그 당시의 생활이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가 보다.


 





☞(부산여행/중구 영도여행/영도대교)47년만에 영도대교 다리가 들리다. 부산의 상징이 될 영도대교 개도장면.


영도대교 개통식때에는 워낙 복잡하였고 필자또한 시간이 맞지 않아 영도대교가 끄떡끄떡 들려 올라가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그날 '영도대교 개통식 이모저모'를 포스팅하여 올렸지만 정작 개도된 영도대교 사진을 올리지 못해 2013년 11월29일 개도시간을 맞추어 찾아간다. 영도대교는 이제 매일 정오에 15분간 영도대교가  다리를 들어 하늘을 찌르게 된다. 3번째 들어올려진 영도대교지만 오늘도 많은 관광객이 영도대교의 개도장면을 보기위헤 골목을 메워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관광객에 치여 빠져나가질 못할지경이었는데 모두 연로하신분이 많이 영도대교 개를 보기위해 찾아오셨다. 우리의 어머님 아버님의 연세이신 어르신들은 그만큼 영도대교에 얽힌 추억이 많은 것 같다. 





☞(부산여행/중구 영도여행/영도대교)47년만에 올라가는 영도대교 부산여행에서 빠질 수 없어.


영도대교는 1934년 개통되어 1966년 까지 매일 끄떡끄떡 다리를 올려 부산의 명소가 되었지만 경제발전과 영도로 들어가는 상수관의 관로로 인해 개도하던 영도대교는 완전히 주저 앉아 다리로서의 기능만하였다. 그런 영도대교가 47년만에 잠룡에서 깨어나 하늘로 승천을 준비하고 있다. 영도대교 복원공사에 롯데건설이 6년간 공정을 마무리하고 새로깨어나게 된 것이다. 부산의 트레이드 마크인 부산탑과 함께 명실공히 영도대교가 부산의 상징으로 자리잡을 것 같다. 






부산을 찾아오는 관광객은 매일 정오 시간을 맞추어 이곳을 찾아온다면 영도대교 개도장면을 그 당시 노래와 함께 즐길수 있다. 추억의 영도대교도 찾아보고 영화에서나 보았던 장면인 하늘로 올라가는 다리의 모습도 이제 국내에서도 즐겨보자. 앞으로 부산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이다.


  

























남포역 도시철도의 영도다리로 나가는 6번 출구 벽에 붙은 사진을 찍어 왔습니다.(다른 방향에서 본 영도대교 개도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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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중구 광복로 부산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제5회 부산 크리스마스트리 문화축제 미리보고 왔습니다.

★제5회 부산 크리스마스트리 문화축제

행사기간:2013년 11월30일(토요일)~2014년 1월5일(일요일) -(37일간)

올해로 벌써 5회째를 맞는 부산 크리스마스트리 문화축제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광복로에서 37일간 열린다. “사랑과 치유”란 주제아래 주최측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 그리고 사랑을 체험케 함으로서 상처받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축제를 통한 치유를 통해 새해 희망의 메시지를 담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한다. 올해 “사랑과 치유”의 크리스마스 트리 문화축제로 소외된 이웃도 함께 따뜻한 나눔의 장이 될 수 있기를 주최측은 바라고 있다.


★개막식:2013년 11월30일(토) 오후 7시(식전행사 6시부터)

★폐막식:2014년 1월 5일 (일) 오후 9시

 



2013년 메인트리인 '성탄의 별' 트리로 광복로 삼거리에 화려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부산여행/중구 광복로 부산크리스마스트리문화축제)제5회 부산 크리스마스트리 문화축제 메인트리는 '성탄의 별'


광복로 부산크리스마스 문화축제의 메인트리는 당연히 광복로 삼거리에 있는 ‘성탄의 별’이다. 주최측은 트리 밑을 걷는다는 컨셉으로 트리밑으로 들어가면 머리위로 하트가 쏟아질 듯 빛을 발하며 12면의 삼각형이 연결된 별모양의 트리를 하고 있다. 높이만 17m에 바닥에서 부터는 20m의 대형 트리다. 4회까지의 메인트리보다 더 크며 화려하여 올해 제5회 부산 크리스마스트리 문화축제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 것 같다. 2013년 11월27일 저녁에 찾은 광복로는 일부 크리스마스트리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낮에 영도대교 복원 공사를 거쳐 47년만에 다리가 개도되었는데 그 행사에 맞추어 일부는 오늘부터 트리에 빛을 발하여 행사가 진행중이다. 그래서 미리 제5회 부산크리스마스 트리 문화축제 사진을 담아와 올려 본다. 아직 불을 다 밝히지 않은 곳도 있다.


◆제5회 부산 크리스마스트리 문화축제 구경하기◆  


































































































































★제5회 크리스마스트리 문화축제 홈페이지 캡쳐.(http://www.bctf.kr/)



★제5회 크리스마스트리 문화축제 홈페이지 캡쳐.(http://www.bctf.kr/)


◆자세한 정보는 제5회 크리스마스트리 문화축제 홈페이지.(http://www.bctf.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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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중구영도여행)영도대교(영도다리) 개통식 이모저모. 


영도대교20013년 11월27일 자갈치 매립지에서 영도대교 복원공사를 끝내고 47년만에 영도대교를 들어 올리는 행사를 하였다. 1934년 일제 강점기때 영도와 남포동을 잇는 영도다리는 그당시에는 획기적인 다리였다. 다리가 들려지는 개도 기능을 갖춘 다리라 전국적으로 영도대교는 소문을 나게되었다. 그 영향으로 한국동란때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은  영도다리가 하나의 만남의 장소로 여겨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고한 추억 어린 장소였다. 그러다 1966년 산업의 발달과 영도로 들어가는 상수도관의 공사로 인해 영도대교는 개도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다리 기능 만을 유지하여 오다가 2000년들어 노후등으로 헐릴 위기에 처한것을 부산시민들의 노력으로 문화재가 되며 6년간의 복원공사를 거쳐 오늘 영도다리가 끄떡끄덕 들어 올려지는 개도행사를 하게 되었다. 2시에 올려진 다리는 15분동안 창공에 걸려 있다 무사히 내려와 다리로 연결되었는데 그당시 부산으로 내려온 피난민등 영도다리에 얽힌 이야기가 많은 만큼 연로하신 노인분이 오늘 개도행사를 보기위해 몰려 들었다. 필자는 오래동안 볼수 없어 오후1시경에 행사장과 영도대교 옆을 가보았지만 2시에 개도행사를 하는데도 벌써 많은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이사진은 오후 1시경에 촬영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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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대교는 빨강 네모 부분이 들려진다.




☞(부산여행/영도/중구여행)부산 영도대교, 영도대교(다리)가 끄떡끄덕 올라가요. 영도대교 개통식 


필자가 어렸을때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영도다리가 끄떡끄떡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면 영도다리가 들렸던 이야기를 '영도다리가 끄덕끄떡' 하며 흔들리며 들렸던 것 같다. 필자는 영도 다리가 들리는 것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며 다리가 어찌 들리지 하며 신기해 하였던 기억이 난다.  다리가 들려질때면 양쪽 도로에 차들이 모두 기다리며  일대는 들리는 다리를 구경하기위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하니 지금 생각을 해봐도 신기한 모습일 것 같다. 그 당시의 모습이 2013년 11월27일 47년만에 현실이 되어 영도다리가 끄떡끄덕하며 들려지게 되었다. 




사진 이미지는 롯데백화점 광복점 홈페이지에서 가져 왔습니다. 롯데 건설에서 복원공사를 하였고 다리가 올라간 모습의 사진입니다. (롯데백화점 홈페이지:http://store.lotteshopping.com/handler/Main-Start)






☞(부산여행/영도/중구여행)부산 영도대교, 일제 강점기에 개통된 영도대교(다리). 영도대교 개통식 


영도다리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 11월에 개통되었다. 그 당시 영도구와 중구를 있는 유일한 다리로 그 이전에는 자갈치 시장에서 도선을 이용하여 건너다녔는데 그 추억의 도선이 몇해전까지도 운영을 하다가 현재는 폐쇄된 상태다. 그만큼 영도가 육지와 가까와지게한 영도다리는 피난민들에게는 '40계단'과 함께 피난 설움의 애환이 서린 다리로 유명하다. 


 



☞(부산여행/영도/중구여행)부산 영도대교, 피난민이 모여들던 영도대교(다리)가 끄떡끄덕 올라가요. 영도대교 개통식 


'굳세어라 금순아'의 노랫말에도 나오듯이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중략~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질 때 영도다리 난간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떴다" 

노래가사를 보면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1.4후퇴를 하게되고 한미연합군은 고립되어 맥아더 장군의 지시로 흥남철수작전을 감행하게 된다. 그당시 아군과 함께 10만명이 넘는 피난민들이 배에 매달려  포항과 거제도로 옮겨오게 되었다. 흥남항에서 일가친척들이 함께 오지 못하고 헤어지면서 꼭 부산가서 만나자며  살아서 '40계단'과 '영도다리'에서 서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이별을 하였다. 이별의 약속이 흥남항만이 아닌 모든 피난 행열에서의 약속이었고 혹 영도다리와 40계단에 가면 일가친척이나 고향사람들의 안부를 듣는다던지 만날 수 있을까 싶어 피난민이 매일 이곳을 찾았다한다. 





☞(부산여행/영도/중구여행)부산 영도대교, 1966년 영도대교(다리) 도개중단. 영도대교 개통식 


영도다리가 한국동란의 피난시절에는 이산가족 상봉의 장소로 우리와 함께 아픔을 겪었다. 그런 아픔이 있었던 영도다리는 대한민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으로 차량행렬과 상수도 관로로 인해 1966년  도개기능을 중단하며 다리만의 기능을 하였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유일한 도개기능의 다리였고 동양 제일의 도개교 였다.






☞(부산여행/영도/중구여행)부산 영도대교, 영도대교(다리)가 끄떡끄덕 올라가요. 영도대교 개통식 


도개하는 영도다리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2013년 11월27일 정식 개통이 되는 영도다리는 롯데건설에 의하여 6년여의 복원공사를 거쳤다. 예전의 모습과는 조금은 다르지만 그래도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였고 도개시설은  영도대교 전체길이가 214m로 그중 중구쪽의 왼쪽 첫번째 교각까지 도개가 된다. 길이는 31m이며 무게가 무려 590t으로 어마어마하다. 상판의 최대 각도는 75도까지 올라 가도록 설계가 되었다. 상판이 올라간뒤 내려오는 시간은 5~10분 쯤 소요된다. 매일 정오인 12시에 영도대교의 상판이 올라가며 하루 1회로 제한 되어 있다. 부산을 여행하거나 계획중인 분들은 요 시간을 잘 맞추어 부산 영도대교가 끄떡끄떡하며 상판 올라가는 다리도 구경하고 부산여행도 즐기면 더욱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자갈치 시장에서 자갈치 아지매와 함께 부산의 싱싱한  회도 먹고 즐거운 여행하세요.







◆2013년 영도대교 개통식◆

★일시:2013년 11월 27일 오후 2시 

★장소:자갈치 매립지. 개통식때 연예인 축하공연도 한다는군요.

★개통당일에는 오전11시~오후4시까지 영도대교에 차량이 전면 통제가 된다. 

★도시철도 1호선 남포역에서 하차하여 롯데백화점 방면으로 올라가면 된다. 

★개통당일 오후6시에 불꽃도 15분간 쏘아 올린다. 



자갈치와 신동아 어패류 시장의 모습










부산 자갈치 아지매








왼쪽의 첫번째 교각까지가 도개가 되는 부분이다.


































영도대교는 양쪽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면서 다리가 들리도록 설계가 되었다.













갈매기가 그려 있는 부분이 도개되는 부분입니다.







톱니처럼 물려 있는 모습이 보이나요 . 왼쪽은 도개부분이며 오른쪽은 그냥 다리입니다.







영도대교와 뒤로 롯데백화점과 공사중인 롯데호텔 신축현장의 모습.



영도경찰서 담벼락에 그당시 영도다리와 주변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볼수 있도록 해놓았다.









































영도대교에서 보면 부산의 상징인 부산탑도 보입니다. 영도대교가 들릴때는 더욱 멋질 것 같습니다.




개통식을 위해 현재 마무리 작업이 한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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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서구여행)임시수도기념관 부산밀면이야기, 부산에서 밀면이 유명한 이유를 아세요.

 

부산에서 자생한 음식은 어떤 종류가 있을까. 그리고 보면 근대 이전의 부산 음식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적 특성 탓인지 알 수 없지만 부산의 음식은 한국동란 이후로 모아진다. 한국동란때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밀려들듯이 몰려들어 국제시장과 40계단 그리고 영도다리에는 이북이 고향인 피난민들의 주 활동무대가 되었다. 자연적으로 북한의 음식이 그 당시 상황과 맞물려 탄생했는데 냉면이 친자라면 밀면은 서자로 태어난 음식이다. 밀면과 함께 태어난 음식이 부산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돼지국밥이며 그 당시 서민들의 영양보충을 책임졌던 부산의 대표 음식이다.




☞(부산여행/서구여행)임시수도기념관 부산밀면이야기,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은  밀면과 돼지국밥 숨은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부산에는 현재 부산 밀면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전시해 놓은 곳이 있다. 부산시 서구 임시 수도 기념관에서 2013년 10월15일~12월15일까지 두달간 전시를 하며 이곳에가면 그동안 궁금하였던 부산 밀면의 역사와 밀면의 애환을 밀면원조집과 함께 만날 수 있다.



 

밀면의 역사는 함경도 흥남의 피난민 역사와 같이 한다. 6,25 한국동란때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막혀 한미연합군은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전세는 역전된다. 그와 함께 아군의 퇴로가 차단되면서 한미 연합군은 맥아더 장군의 후퇴명령에 따라 흥남항에서 배를 이용한 철수 작전을 감행하게 된다.

 


 



몰려드는 피난민과 연합군은 배에 함께타고 부산을 향해 내려오는데 그때 10만여명이 배를 타고 탈출하였다며 이를 두고 흥남 철수 작전이라 한다. 작전으로 불려진 것을 보면 그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포항에서 내린 피난민은 거제도로 이송되어 부산에서 정착을 하며 그 당시 상황을 노래말로 불려진 유행가가 1953년 현인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로 시작되는 이 노래, 뜬금없이 흥남철수니 굳세어라 금순아니 하는 이야기는 밀면 원조인 양대산맥의 고향이 흥남이고 이분들이 노랫말속의 '굳세어라 금순이' 처럼 흥남철수작전에 의해 배를 타고 부산에 정착을 하며 오뚝이 인생을 살아 오셨기 때문이다.




피난 1세대인 내호냉면의 정한금님과 서호냉면의 임윤숙님은 흥남에서 냉면장사를 하였던 분들로 흥남의 내호리와 이웃한 서호리가 고향이다. 피난민인 정한금님은 1952년 남구 우암동 시장안에 흥남 고향의 이름을 따 내호냉면을 열었고 그 뒤를 이어 자갈치 농협뒤에서 임윤숙님이 흥남면옥으로 냉면집 간판을 달았다. 이 두 분이 부산 밀면의 1세대다.

 




밀면이란 이름 두 글자가 이곳 내호냉면에서 처음 시작된 사실을 부인 할 수가 없다. 여기서부터 부산 밀면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함경도 흥남 내호에서 흥남철수작전때 정한금씨는 친정어머니와 함께 피난을 오게 되었다. 친정어머니는 피난 오기 전 내호리에서 냉면집을 하였고 피난을 온 후 고향의 시원한 냉면 맛을 잊을 수 없었다. 흥남 고향의 향수를 달래기 위해서는 냉면을 꼭 먹어야 되겠다 싶어 시작하였지만 냉면은 메밀로 만들어 전쟁통에 메밀을 구할수가 힘이 들었다.




때 마침 거제도에 미군 구호품인 밀가루가 들어오게 되었다. 그걸 부산에서 나누어 주었는데 그 밀가루로 만들어 본 게 부산 밀면의 시초이다. 밀면은 ‘밀가루로 만든 면’이란 뜻이다.



 

 

밀가루만 반죽을 하면 찰지지 않아 고구마 전분이나 감자가루를 섞어 면을 뽑아 내었다.여기다가 사골로 육수를 만들어 말아 먹으며 고향에서 말아 먹었던 냉면을 생각하며  두고온 고향의 향수를 달랬다. 내호냉면은 현재도 이북의 고향 맛을 느끼기 위해 고령의 실향민들이 많이 찾는다.


 




피난 1세대때는 양쪽 집안이 서로 왕래가 잦았다는데 2~3세대로 내려가면서 왕래가 뜸해지다가 지금은 아예 단절된 상태라 이야기를 하시는 피난2세대 흥남서호냉면 최동훈사장님의 우수에 찬 눈빛이 지금도 선하다.

 



 

최사장님 모친이신 임윤숙님이 피난을 와 처음 문을 열었다는 흥남면옥은 그 후 함흥냉면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현재 충무동 자갈치역 인근에 ‘55년 된 함흥냉면’집은 이집에서 직원으로 있던 최씨 분이 장사를 하고 있다.

 




자갈치 함흥 냉면집은 부평동 족발골목으로 옮겼고 고향마을의 서호리 이름을 따 ‘흥남서호냉면’으로 사용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3대 70년 세월이란 이름이 간판에 새겨져 있어 그 세월을 짐작하고도 남았는데 그러나 아쉽게도 서호냉면은 얼마전에 70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영업을 마감하였다. 현재 부산밀면 1세대는 우암동의 ‘흥남내호냉면’ 한곳만 남아 있는 상태다. 



 

 

오늘의 부산 밀면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그 유명세가 서울로까지 진입을 할 정도라니 부산 밀면의 기세는 이제 지역의 한계를 벗어나 전국적인 음식으로 발돋한 상태다. 부산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밀면에 ‘부산 밀면 이야기’를 관람하여 그 역사를 알면 서민의 음식 밀면의 맛은 더욱 맛있게 느껴진다. 부산밀면 이야기를 보기 위해 찾아가는 '임시수도기념관'은 한국동란때 이승만대통령이 머물렀던 관저로 이곳에서 대통령의 집무를 보았다. 대통령의 관저와 그때의 모습도 둘러보고  도시철도 1호선 토성역에서 임시수도기념관을 찾아 올라가는 도로에는 그당시의 생활상을 나타낸 벽화와 조형물을 볼 수 있어 아이와 찾는다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임시수도기념관
























◆앞으로의 부산 밀면 이야기는  이분들에 의해 쓰여질 것 같다.

내가 찾아가본 밀면 냉면집으로 '부산밀면이야기'에서 만나볼 수 있는 집들도 있다.


 


우암동 흥남내호냉면



지금은 문을 닫은 흥남서호냉면




개금동 개금밀면




남포동 원산면옥




남포동 할매가야밀면




남부민동 함흥냉면




암남동 송도제일밀면




수안동 동래밀면




수정동 장수밀면




영주동 황산밀면





초량동 초량밀면




초량동 초량영동밀면




충무동 함흥냉면




교대앞 국제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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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광장



☞(부산여행/서구여행/부산항빛축제)송도해수욕장 부산항빛축제. 부산항빛축제 천년의 빛으로 송도해수욕장을 적시다


제4회 부산항 빛 축제가 부산시 서구 송도해수욕장 일원에서 열리고 있다. 올해로 벌써 4회 부산시 서구, 중구, 영도구에서 돌아가면서 개최가 되었다. 올해는 부산 서구 송도해수욕장에서 송도해수욕장 개장 100주년 기념으로 열리고 있다. 1913년 일제 강점기때 개장한 송도해수욕장은 맑은물과 황금빛 모래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유서 깊은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설해수욕장 이었던 송도해수욕장은 현재 바닥분수와 현인광장, 화려한 조명이 들어간 수변공원과 송도폭포는 송도해수욕장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올해 부산항 빛축제의 주제는 '천년의 빛-추억 담은 100년, 행복 담을 천년 송도'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밤을 수놓고 있다.





◆제4회 부산항 빛 축제 여행정보◆

일시:2013년 11월8일(금)~17일(일)(10일간)

장소:송도해수욕장 일원(특별전:중구 광복로입구)





◆부산항 빛축제 구경하기◆













지금이야 없지만 아주 옛날에는 송도해수욕장에 케이블카가 설치 되어 있었다.

지금이야 없지만 아주 옛날에는 송도해수욕장에 케이블카가 설치 되어 있었다. 현재 복원공사를 한다지만 그것을 기념하여 모형을 만들어 두었다.








송도 거북섬에 설치되어 있던 구름다리로 100주년 기념공원의 조형물이다.



조랑말 빛마차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ㅎㅎ 아이들과 함께 참여를 하였다면 너무 즐거워 할 것 같다. 조랑망 체험도 하며 즐겨보세요









송도해수욕장 100주년 기념 조형물.









철근인지 쇠파이프인지 포크레인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다. 






행운의 열쇠 유등 띄우기 행사장 









송도해수욕장 해상에 설치된 65m짜리  행운의 열쇠 모양을 한  조형물을 이용하여  소원을 적은 유등을 바다에 띄우는 행사가 열리고 있는 현장. 시민들이 행사참여를 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자동차 사과 궤짝으로 만들어 달릴것 같지는 않습니다. 밤에 조명을 달아 두니 너무 멋지군요.







귀여운 거북이가 뭍으로 기어 올라오고 있네요 ㅎㅎ

 너무 귀엽습니다.




































































































자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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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 금정산성을 만리장성에 비유, 금정산 남문

 

금정산에는 부산의 만리장성인 금정산성이 있다. 산성의 총 길이만도 장장 18km로 동래산성으로 불렸던 금정산성은 동서남북으로 사대 성문을 두고 있는데 오늘 포스팅한 남문은 고당봉에서 직선거리로 가장 먼곳에 위치를 하지만 고당봉을 가장 잘 바라 볼 수 있는 곳이다. 남쪽으로 만덕과 백양산을 연결할 수 있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다. “금정산성부설비”의 기록을 보면은 “1808년 초봄에 기둥과 들보를 100리 밖에서 옮겨오고 벼랑 끝에서 험준한 바위를 깎아내어 메고 끌어당기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 들어서 만사람이 일제히 힘을 쓰니 149일 만에 남문의 초루가 완성되었다”고 되어 있다. 금정산성 남문은 제2망루와 망미봉 사이의 움푹하게 꺼진 곳에 절묘하게 자리를 잡았다. 복쪽인 금성동 마을과 만덕마을 방향에만 완만한 경사를 이루지만 동서는 깎아놓은 듯 바위들이 옹립하여 사실 험준한 산세를 이룬다. 금정산의 그많은 바위를 마다하고 그것도 100리 밖에서 이 무거운 바위들을 밀고 당기고 하였을 것을 생각하니 옛 선조들이 만든 금정산성을 잘 보존하여 후손에게 꼭 물려 주어야 할 것 같다. 남문은 평거식문으로 문의 상부에 세운 누각은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꽤 규모가 큰 누각이었다.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 금정산성 남문은 1808년에 완공, 금정산 남문

 

금정산의 산성중에 가장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이 남문으로 만덕동과 연결된다. 서문은 금정산성중에 유일하게 계곡을 끼고 솟아 있는 성문으로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다. 그리고 멋스럽게 만들어졌다.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등 숱한 외침으로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1703년(숙종23년)에 축성되었다. 그러나 금정산성은 신라시대때 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1701년(숙종27년)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로 착공이 되었다하며 1807년(순조7년)에 동래부사 오한원이 동문을 준공하였고 그 이듬에 서문, 남문, 북문에 문루를 세웠다. 세월이 흘러가며 일제강점기때 일인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2년 부터 동, 서, 남문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에 일부 마무리가 되었다. 1989년에 북문을 복원 준공하여 4대문중 가장 마지막에 복원이 된 상태로 지금은 산성에 대한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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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불꽃축제)밤하늘을 수놓는 보석이 따로 없어, 제9회부산불꽃축제의 황홀경에 빠지다.


천륜국화, 나이아가라 폭포수, 이과수등 8만발의 불꽃이 광안리 해수욕장과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밤하늘을 수 놓는 보석처럼 박혀 빛을 발한 밤이였다. 10월26일 오후 8시 부터 9시까지 불꽃축제의 화려한 막이 열렸는데 화려한 불꽃의 향연은 꺼질줄 모르고 타 올랐다. 이날 100만 인파가 운집한 바닷가를 가을바람이 촉촉히 적시고도 남았다. "부산시 직할시 승격 50주년 기념"을 함께 축하하기 위한 제9회 부산불꽃축제를 보기 위해 광안리 해수욕장, 황령산, 이기대,누리마루,장산등 나만의 명단자리에서 다채로운 불꽃놀이를 마음것 보았다. 올해 처음으로 쏘아올린 천륜국화는 터질때 국화가 만발한 모습으로 탄성을 자아내게 하였는데 그 지름이 400m에 이르고 500m 상공에서  대형 불꽃이 터졌다하니 부산밤하늘을 밝히고도 남았을 정도다. 

필자는 나만의 명당터를 찾아 장산 유격대 바위 봉우리에 올라 갔다. 마침 그날 광안리해수욕장 의자에서 편안히 앉아서 볼 수 있는 입장고리를 마다하고 전체가 눈에 들어오는 광경을 보기위해 봉우리에 올라가는 수고를 하였는데 벌써 많은 사진작가분들이 이곳에 포진하여 그야 말로 바위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역시 초자는 초자라고 삼각대 뭉치 숫놈을 빠트리고 가 대충 찍는데 만족 할 수 밖에 ㅎㅎ. 그러나 밤하늘을 수 놓은 부산불꽃축제를 사진으로 찍는다는 것은 초자에게는 가당치 않는 것 같다. 허접한 사진과 동영상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는다고 담았습니다. 


 







































































 






 







 



 








필자가 본 곳은 지도의 오른쪽 산위고 불꽃축제는 광안대교 일원에서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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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동문.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동래산성으로도 불렸던 금정산성 총길이는 18km,

 

금정산에는 필자가 어릴때 동래산성으로 불렸던 긴 산성이 남아 있다. 지금은 일부분이 복원이 되어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지만 서문의 좌우로는 아직도 허물어져 있고 개인사유지로 인해 황폐화가 되어 있다. 금정산성의 전체 길이는 18km로 흡사 고구마를 닮아 있는 모양세로 남북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뽁쪽에는 금정산의 주봉인 고당봉이 솟아 있고 남쪽으로는 파리봉이 솟아 있어 서로 대치를 이룬다. 금정산성에도 동서남북으로 4대문을 두고 있다. 북문은 금정상 정상 아래의 편편한 평지에 자리를 잡았고 동문은 금정산의 입구답게 항상 많은 인파로 쌓여 금정산성을 대표하는 성문이다.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동래읍성에서 접근성이 가장 좋은 동문,

 

금정산의 산성중에 가장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이 남문으로 만덕동과 연결된다. 서문은 금정산성중에 유일하게 계곡을 끼고 솟아 있는 성문으로 가장 웅장하고 규모가 크다. 그리고 멋스럽게 만들어졌다.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등 숱한 외침으로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1703년(숙종23년)에 축성되었다. 그러나 금정산성은 신라시대때 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1701년(숙종27년)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로 착공이 되었다.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1807년 오인환이 동문 준공,

 

1807년(순조7년)에 동래부사 오한원이 동문을 준공하였고 그 이듬에 서문, 남문, 북문에 문루를 세웠다. 세월이 흘러가며 일제강점기때 일인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2년 부터 동, 서, 남문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에 일부 마무리가 되었다. 1989년에 북문을 복원 준공하여 4대문중 가장 마지막에 복원이 된 상태로 지금은 산성에 대한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동래산성으로도 불렸던 금정산성 총길이는 18km

 

동문은 금정산의 주능선인 해발 415m 고갯마루에 세워져 있다. 이곳을 넘어서면 금성동 산성마을로 바로 넘어 갈 수 있는 주 통행길에 위치를 한다. 금정산성 4대문중에서 가장 접근성이 좋은 곳으로 이곳에 올라 바라보는 경관도 매우 뛰어나다. “금정산성 부설비”에 보면은 “1807년 늦가을에 공사를 시작하여 한달만에 완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만큼 민,군,관이 힘을 보태어 완공을 한 것으로 보인다.

 

 

홍예문식의 동문.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스승과 재자의 전설이 있는 동문과 서문 완공이야기.

 

금정산성의 동문은 무지개 형태를 갖춘 홍예문식으로 폭은 3m, 홍예문의 높이는 3.4m로 바위를 깎아 끼워 맞추어 돌려놓은 예술성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금정산성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문과 동문에 얽혀 있는 전설도 산성과 함께 전한다. 동래부사 오한원이 성문축조를 위해 요즘 말하면 장인의 석공을 수소문 하였다. 마침 그때 스승과 제자가 동문과 서문을 세우기 위해 나타났는데 스승은 동문을 만들고 제자는 서문을 짓기로 하였다. 제자의 석공 솜씨가 스승보다 더 뛰어나 먼저 서문을 완공을 하였다.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동문과 서문을 완공한 승과 제자 밀양의 영남루를 공사하다.

 

서문의 규모는 웅장하고 예술성에 모두들 놀라며 제자의 솜씨를 칭송하였다. 스승은 옹졸한 성격에 그의 제자를 질투하며 시기하여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샀는데 그 뒤 동문과 서문을 완공한 스승과 제자는 화해를 하고 둘이 힘을 합쳐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인 밀양의 영남루를 완공하였다는 훈훈한 전설이 전한다. 현재에 서문과 동문은 그 당시 모습을 복원하였다. 남아 있는 주춧돌과 성문으로 복원되었지만 동문보다는 서문이 더 웅장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동문은 시기심 많은 스승이 완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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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북문.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국내에서 만리장성으로 통하는 금정산성.


범어사에서 정상인 고당봉을 가기위해서는 반드시 거치게 되는 성문이 북문이다. 금정산성의 총길이가 18km로 산성의 모양이 흡사 고구마를 닮아 있는데 동서 남북으로 4대문을 두고 있다. 북문은 금정상 정상 아래의 편편한 평지에 자리를 잡고 있다. 북으로 고당봉이 솟아 있고 남으로는 금정산 주능선인 원효봉을 거쳐가는 최저점에 설치된 성문이다.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등 숱한 외침으로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1703년(숙종23년)에 축성되었다. 그러나 금정산성은 신라시대때 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1701년(숙종27년)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로 착공이 되었다.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국내에서 만리장성으로 통하는 금정산성북문. 원효스님이 화엄경을 강설, 화엄벌로 불려


1807년(순조7년)에 동래부사 오한원이 동문을 준공하였고 그 이듬에 서문, 남문, 북문에 문루를 세웠다. 세월이 흘러가며 일제강점기때 일인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2년 부터 동, 서, 남문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1974년에 일부 마무리가 되었다. 1989년에 북문을 복원 준공하여 4대문중 가장 마지막에 복원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북문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세심정과 금정산 문화 탐방 지원센타 건물이 있는 일대를 북문광장이라 부른다. 미륵사를 창건한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화엄경을 펼쳐 놓고 설파를 하였다하여 화엄벌로 전해지며 임진왜란때는  범어사,국청사 해월사 미륵암등의 스님이 승병이되어 훈련을 받았던 장소이다.다. 근대에 와서는 일제 강점기때인 1919년 범어사 3월 만세 운동의 거사를 위해 기미독립선언서을 가지고 왜경의 눈을 피하기 위해 경부선 물금역에 내려 금정산 고당봉(801.5m)을 넘어 이곳 북문을 통과하여 청련암으로 향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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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국내에서 만리장성으로 통하는 금정산성북문. 규모가 가장 작은 익공계 팔작지붕.


금정산성 북문은 4대문중 규모가 가장 작다. 그러다 보니 동문 서문 남문은 웅장하며 규모가 큰  문루의 형태를 갖추었지만 북문은 아치형의 장식도 없고 초라한 문루는 정면1칸, 측면 1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의 단층으로 금정산의 망루 규모와 비슷하다. 그러나 '금정산성부설비"의 기록을 보면 "만사람이 모두 힘을 합해 149일만에 북문의 초루가 완성되었다"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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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


 예로 부터 우리나라에는 외세로 부터 많은 침입을 당하였다 . 그 중 우리에게 가장 참담함을 안겨준 전쟁이 임진년에 일어난 임진왜란(1592~1598)이다. 이이의 10만 양병설의상소도 무시하지만 않았서도 우리나라는 이런 참혹한 수모를 당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 당시 왜놈과 가까운 동래(지금의 부산)는 왜적의 침입을 막는다고 막아보지만 종과부적으로 왜적에게 짓밟혀 버리게 된다.    





☞(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1592년 임진왜란 왜적에 놀라 박홍과 원균 성을 버리고 도망.



도요토미히데요시의 명령으로 4월13일 대장  '고니시 유키나와가'와 그의 사위 '소 요시토시'가 병력 1만8700명과 병선 700척을 이끌고 영도에 상륙을 하였다. 그 광경을 보고 놀래 자빠진 경상좌수사 '박홍'은 전투한번 치르지 않고 보유하고 있던 배를 수장시키고 식량창고에다 불을 지르고 도망을 치고 그와 덩달아 거제도 경상우수사 '원균'도 우수영을 부하장수에게 맏겨둔 후  혼자 살기위해 도망을 쳐 버리니 왜적은 손쉽게 부산진성으로 진격한다. 


 




☞(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 부산진성 정발장군 모숨을 버리다.



그때 부산진성을 지키고 있던 장수는 지금 초량로타리에 동상으로 모셔져 있는 부산진 첨사 '정발'장군이었다. 왜적이 정발장군에게 '명나라를 칠려고 하니 길을 내어 달라'는 말을 하였다. 정발은 단칼에 '내어줄 길이없다'며 일축하고  목숨을 걸고 군관민과 합세하여 끝까지 싸웠지만 정발장군은 적의 조총에 절명하시고 부산진성의 군관민 3000여명은 몰살하였다.  







☞(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 송상현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며 순국.


그 후 4월15일 동래성으로 진격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그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은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문루에 올라 있었다. 이를 본 소서행장은 송상현에게  '싸울테면 나와서 싸우고  그렇치 않으면 길을 빌려 달라'고 하였다. 이에 장군은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 하며 군관민 모두 합세하여 장렬히 전사하게 된다. 

  


 






☞(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지하철 공사중에 발견된 동래읍성 해자.



현재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지하에는 지하철 공사도중에 우연히 발견된 동래읍성 해자의 흔적을 전시하고 있다.  지하에서 발견된 동래읍성 해자의 흔적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 당시 동래읍성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알 수 있다. 한국판 킬링필드의 모습을 연상하게하는 동래읍성의 해자, 본성에서 약 30m 떨어져 땅을 1.7m~2.5m 파고 그 폭을 5m 정도로 돌을 쌓아 축조하였다. 지금 해자 내부에는 그 당시 참상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칼에 베이거나 두개골에 구멍이 슝슝 뚫어진 인골과 칼, 화살촉, 목궁등 무기류가 해자에 그대로 묻혀 있는 모습으로 전시를 되고 있다.








☞(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



안내도의 기록을 보면 "그당시 일본의 기록인 '길야일기(吉野日記)'에는 여자던 아이들과 개, 고양이 할것없이 움직이며 피를 흘릴수 있는 모든 것들은 살해하였다고 되어 있다. 우리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희생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송상현 부사를 쫒아 성가운데로 모여든 백성들이 같은 시간에 피바다로 화하고 쌓인 시체 밑에 몸을 던져 천백명중에 한 두명이 삶을 보존할 정도였다하니 우리의 희생이 얼마나 많았는지,전쟁이 끝나고 생존자는 4월15일 이날에 친족의 제사를 지내고 통곡을 했다고 되어 있다."



 





☞(부산여행/동래여행)도시철도 수안역에 동래읍성 해자, 한국판 킬링필드.동래읍성해자 자녀와 함께 역사 교육 장소.


그 분들의 원한이 뼈에 사무쳐 영혼이 구천에 떠도는 것일까. "임진왜란 후 17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은 '동래맹하유감'이라는 글에서 4월15일 새벽에 집집마다 곡 소리가 일어나 천지가 소슬하고 처참한 바람이 숲을 진동하기에 놀라서 나이 많은 아전에게 물으니 이날이 임진년 성이 함락된 날이라 하였다". 수안역 지하에 전시된 '동래읍성해자' 자녀와 함께 찾아 보세요. 역사교육과 함께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던져 지켜온 현장을 보여주어 자녀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가르쳐 주세요. 입장료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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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기장여행)기장향교. 선현들의 가르침과 옛스러움이 묻어나는 기장향교 둘러보기

지방마다 꼭 빠지지 않는 지명이 있다. 그것은 교촌이나 교리, 교동으로 불리는 마을이름으로 그 마을에 향교가 들어서 있었기에 자동적으로 마을이름도 교동으로 불리워져 내려 오기 때문이다.
여기 기장군의 읍내에도 향교가 있다 그곳의 지명은 물론 교동이다.
교동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좌측 흙시루 안내판이나 교리초등학교 왼쪽 담장을 끼고 따라가면 된다.
기장향교는 ‘흙시루’ 옆에 위치를 하고 있어 누구나 찾기가 쉽고 멀리서도 눈에 뛴다.

 


 





위엄과 장대함이 느껴지는 옛 교육기관으로 먼저 향교 앞에 다달으면 돌계단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
그리고 외삼문인 솟을대문에는 마음을 씻는 다는 세심문을 통과해야 한다.
언제나 이문을 지날때는 마음을 깨끗하게 씻고 단정한 마음가짐으로 학문에 임하고 제자는 스승에게 제자로서 학생의 도리를 다하고 스승은 참스승의 마음가짐을 다지는 문인 세심문을 요즘 교육기관인 학교 정문에다 세웠서면 한다.
그러면 요즘 전국을 도가니로 몰아 넣고 있는 인화학교의 ‘도가니’같은 스승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

 



기장향교는 1617년 광해군 9년에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철종6년인 1855년 새로 중수를 거치면서 ‘성묘중수기’를 남겼다하는데 지금 남아 있는 건물도 대부분 이때 조성되었다한다.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39호.

 




 


모든 항교의 배치도가 그러하듯 기장학교도 전학후묘의 기법을 따르고 있다. 일직선으로 배치되는 대성전은 옛 선현들의 위폐를 받들어 모시며 그 아래 유생들의 강학장소인 명륜당을 배치하였다.
명륜당 좌우로 유생들의 숙소인 동,서재를 두어 여타 향교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밀양향교, 동래향교등 모든 향교의 건물을 보면 외삼문의 존재가 없으며 누각을 대문과 같은 기능을 두었는데 기장향교는 세심문을 두었다. 그 세심문 뒤로는 풍화루로 정면3칸 측면2칸의 중층으로 지어졌고 익공양식으로 겹처마의 형태이며 팔작지붕의 조선후기 양식을 따르고 있다.
외관의 장식 또한 네 귀퉁이에 화려한 기법으로 황룡과 청룡을 조각하여 물을 다스리는 용이 이곳을 화재로 부터 보호하도록 하였다.
풍화루의 내부 또한 좌우로 용을 넣었고 연꽃의 모습이 누각 천정에 표현되어 있어 예사롭지 않은 건물이다. 유생들의 강학장소인 명륜당도 경사진 절개지를 적절히 이용하여 대성전과 함께 서로 계단을 만들어 위계 질서를 나타내었고 선현들의 위폐를 봉안한 대성전은 좌우로 동서무가 없으며 정면3칸 측면3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
다른 건물과는 특이한 점은 정면의 기둥중간부분까지 초석이 올라와 있고 양측벽에도 잡석을 쌓아 올려 방화벽의 역할과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장향교 교통편
대중교통편은 요즘 도시철도 4호선이 생겨 기장으로 가기가 아주 편리해 졌다. 4호선 종점인 안평역에 내려 하다. 시내버스 183번 좌천행을 타고 교동에 하차를 하면 된다.

승용차 이용시에는부산시청앞에서 출발하면 왼쪽으로 꺽어 동래방면인 연산교차로 방향으로 4.8km 내려가면
연산교차로와 만나고 충렬사 방향으로 직진한다. 명장교차로-금사교차로에서 반송로 반송 또는 기장방면 우측도로로 12.2km 이동한다. -금사램프교차로를 지나  석대사거리를 통과하면 해운대 반송동과 만나고 도시철도 안평역을 지나  14번 국도를 따라 기장휴계소 고개를 넘어면 기장읍, 내리막도로를 따라가다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중앙사거리 직진후 만나는 사거리에서 차성로 418번길인 원조청진동해장국집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이길을 따라 직진하면 교리초등학교 사거리길에서 직진 교리초교 왼쪽 담장을 따라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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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해운대여행)해운대 센텀시티. 센텀시티 영화의 전당 옆에 평범함을 거부하는 초고층건물들 둘러보기

영화의 전당이 있는 해운대 센텀시티 부근에는 요즘 진화를 하고 있다.

평범한 건물과 낮은 건물은 가라를 외치는 듯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위로 쭉쭉 뻗어 올라가 어느새 빌딩 숲을 이루었다. 영화의 전당 옆 세계최대의 백화점이라는 신세계백화점이 위측이 될 정도이니 여타 건물들은 명암도 못 내미는 해운대 센텀거리. 그 빌딩의 숲을 함 찾아보았다. 빌딩 끝을 확인해 본다고 밑에서 머리를 들고 하도 쳐다 봤더니 오늘 목이 다 아프다. 두산 위브와 현대 아이파크등 모든 건물들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그것도 모자라 새로 올라가는 건물들은 더더욱 높이면에서 그리고 예술적인 감각을 포함하며 지금도 진화중이다. 어디선가 로보캅이 집에서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은 부산의 별천지 센텀시티 빌딩 구경가기...

 


 

숲을 찾아 다니며 입을 쩍쩍 벌리며 감탄사를 날렸지만 빌딩 사잇길을 걸으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사를 날리기는 처음이다.

아 그리고 최근에 누런 황금색 빌딩의 화재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 그 빌딩도 있더군요, 지금은 여타 빌딩에 명함도 못 내미는 평범한 빌딩으로 보이는게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높이면에서는 낮지만 예술적인 감각이 뛰어난 건물인 누리마루의 정상회담 건물과 영화의 전당이 그래도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찾아가기

제일 편한 방법은 도시 철도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연산역에서 수영방면 3호선을 타고 종점인 수영에서 내려 다시 장산방면의 2호선으로 갈아타 센텀역에서 하차하여 신세계 백화점방향으로 오른다. 영화의 전당은 신세계백화점 뒷편에 있다. 남포동에서는 139번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신세계백화점 건너편인 센텀에 내리면 되고 서면에서는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센텀역에서 하차를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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