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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기장여행)기장 죽성 해송 국수당과 왜성. 멋스러운 소나무가 어울리는 바닷가 기장 해송 국수당과 왜군이 쌓았다는 죽성왜성.

부산시 기장군 기장군청에서 죽성리로 나가는 도로가 있다.
이곳을 따라가면 처음으로 바다와 만나는 곳이 죽성리로 이곳은 조선조 고산 윤선도가 해남으로 떠나기전 7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였던 곳으로 황학대라 불린다.
황학대 언덕빼기에 특이한 소나무를 찾을 수 있다.
이곳 마을에서는 국수당으로 할배신당을 모신 곳이며 흔히 당산으로 부른다.
여섯그루(필자의 확인으로는 다섯그루)의 소나무가 마치 한그루로 보이는 특이한 소나무로 수령은 300년쯤 보고 있다.
높이는 15m정도이며 소나무의 둘레 직경인 수관은 30m로 가지가 아래로 쳐져 있어 하나의 꽃봉우리처럼 보인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이곳이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국수대가 있던 곳으로 국수당이라 한다.
국수대는 국내에 두군데 서해안과 이곳의 죽성리 국수당으로 국가의 위급시 국가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였던 제를 올리던 장소라 한다.
해방이 되면서 국수당인 이곳에 죽성리 마을 어부의 풍어를 기원하는 풍어제와 당제를 지내게 되면서 국수당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곳과 서로 마주보고 있는 죽성리 왜성은 죽성리 마을 뒷산에 남산봉수대가 있어 봉대산이라 부른다. 동쪽의 죽성리로 내려오는 능선에 임진왜란때 왜장인 구로다 나가마사가 1594년 5월 왜장 모리 데루모토 이하 20여명의 장수에게 명하여 쌓았다는 성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막고 남해안에 장기간 주둔하기 위한 포석으로 쌓은 왜성중의 하나이다.
둘레가 약960m이며 높이는 4m, 3단으로 축성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이성을 기장성으로 부르는데 일본에서도 죽성리 왜성처럼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산성이 없다하여 일본의 고고학자와 학생들이 자기네 산성의 축성법을 연구하기 위해 많이 찾는 곳이다.
































































찾아가기

부산시청앞에서 출발하면 왼쪽으로 꺽어 동래방면인 연산교차로 방향으로 4.8km 내려가면
연산교차로와 만나고 충렬사 방향으로 직진한다. 충렬사앞의 금사교차로와 만나고 여기서 반송로 반송 도는 기장방면 우측도로로 11.5km 이동한다. 도시철도 안평역을 지나고 고개를 넘어면 기장읍, 직진하면 65번 고속도로를 지나고 차성로와 만난다. 기장군청앞의 차성로를 따라가면 신천마을, 신앙촌 후문을 지나고 죽성리 성당 드림셋트장이다. 시내로 돌아오는 길은 기장의 해변길을 따라 돌아 올것을 권한다. 부산 최고의 드라이브코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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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해운대여행)폐선 동해남부선 송정역. 가을에 옛추억을 찾아 떠나는 여행, 송정역에 내리면 바다가 보인다.

 

한때 여행을 떠나는데는 꼭 열차를 이용해야만 진짜 여행을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인지 유행가에도 많은 가사에 기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잘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의 대전블루스, 그리고 송창식의 고래사냥 은 한때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여행가라 해야될 정도였다, 한밤에 캠프파이어를 하면서 통키타와 꼭 따라 나오는 노래로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요~’, 그리고 동요인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칙~폭~, 칙칙~ 폭폭~’이모든 노래의 공통점은 기차이다.





오늘 포스팅은 기차가 아니라 기차가 서는 정거장인 역을 이야기 할려고 한다. 이 기차가 국내에 들어 온지도 100년이 넘어 건물이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있는 곳이 있다. 전국에 간이역이 800여곳 쯤 되는데 그중에서도 문화재로 등록된 곳이 23곳이라 한다. 서울신천역과 화랑대역, 부산송정역, 충북심천역등 등록된 문화재인 간이역들은 모두 일제강점기때 만들어져 시민들의 발이 되어 주었다.



한때는 그런 개념이 없이 오래된 간이역들이 무분별하게 헐어버리고 그곳에 새로운 간이역들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늦게나마 문화재로 보호를 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인근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겸하였던 역 그 역을 찾아보았다. 부산에는 문화재로 등록된 곳이 송정역으로 대학 다닐 때에는 낭만이 실려 있는 열차였다. 한때 친구들과 동해남부선으로 불리는 이열차를 이용하여 송정, 월내, 진하, 좌천, 기장등 해수욕장이 있는 바닷가로 m.t를 가기위해 숱하게 내리던 간이역이었지만 이곳인근의 주민들은 생활을 하기 위한 몸부림이였다.


기장 월래 좌천 송정등에서 바구니에 야채등 그날 팔 채소를 이고 우리의 어머님들이 새벽기차를 타고 부전시장에 가시는 삶의 기차였지만 야채를 다 팔고 오전에 다시 그 완행열차를 타고 돌아갈 때 항상 우리와 만나 같이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간이역 중에서 송정역이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 있다. 이 얼마나 반갑지 아니한가. 이번에 십수년 만에 방문한 송정도 너무 많이 바뀌어 버렸는데 건널목 옆 송정역은 옛모습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얼마나 반가웠던지, 지금 복선화 작업이 진행 중이라 앞으로도 너의 모습을 계속 보았서면 한다.


등록문화재 제302호. 1934년 12월16일 처음으로 역무원 없는 간이역으로 출발을 하여 1941년 4월1일 보통역으로 승격되었다. 여객승강장이 1개소이며 여객열차가 하루 22회 지나가는데 12회가 이곳 송정역에 정차를 한다고하며, 화물열차는 17회 정차하는 작은 역이다. 그런데 이곳 송정역이 해운대역과 기장역의 중간에 있어 여름철이면 많은 해수욕객이 붐비는 곳이며 지금은 영화촬영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




1940년 12월 건립된 송정역사는 목조 단층 기와지붕형태로 경북안동시 운산역, 의성군 단촌역과 유사한 형태로 지어져 1940년대 우리 역사의 건축물을 보여 주고 있다. 이곳 간이역들을 통과하면서 오고가는 숱한 이야기 보따리들을 싣고 다니는 기차가 오늘도 칙칙폭폭 하며 힘차게 이곳 송정역을 지나가고 있다. 요즘은 굉음도 없어니 옛 기차의 운치가 없어 진 것 같은 느낌...










찾아가기

 

부전역을 출발하는 동해 남부선 열차는 오전6시, 6시50분, 7시35분, 9시20분, 11시50분으로 송정역에 내리면 된다. 대중교통편인 버스를 이용시에는 충무동에서 139번을 이용하여 단번에 송정까지 갈 수 있으며 도시전철 2호선인 센텀시티역에서 181번 기장행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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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사하여행)까치고개 벽화마을. 까치고개의 환경 개선 사업으로 마을의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부산시 서구와 사하구를 경계 짓는 까치고개 인근 사하구  대티마을 5길인 피오니 파그 아래 절개지를 단장하여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마을의 빈촌인 이곳에 최근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마을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함인지 스레트 지붕과 담벼락에
화려한 꽃무늬를 그려 환경을 개선하였다.

 


 


그래서인지 마을의 분위기가 많이 밝아져 주위의 아파트와 조화를 이룬다.
또한 이 길은 낙동정맥의 끝부분인 구덕산을 지나 옥녀봉으로 가는 중간 능선상에 있어 산을 찾는 정맥 꾼들에게도 좋은 볼 거리를 선사 할 수 있을 것 같으며  까치고개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가슴아픈(?)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
까치고개는 최근에야 환경이 많이 개선되어 번듯한 집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수십년 까지만 해도 이일대는 공동묘지로 이름을 날렸다 한다. 지금도 옥녀봉 일대와 까치고개 부근에 아직도 많은 묘지들이 조성 되어 있다. 그 당시 많은 묘지로 인해 이일대에는 화장막이 있었다 한다. 그래서 항상 死者를 화장 시켰고 그래서  주위에 까마귀와 까지가 몰려 들어 까치고개란 이름을 얻었다 하니 산뜻한 벽화로 인해 새로운 까치고개로 태어 나길 빌어 본다. .

 













화공이 절개지의 담벼락에 장미를 그리고 있는 모습과 윗 사진은 최근에 완성된 그림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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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진지성 자성대

흔히 자성대라 불리는 부산진성은 정발 장군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동래읍성은 송상현장군, 다대포성은 윤홍신이 지켰고 여기 부산진성은 정발장군이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진 앞 바다에서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과 싸우다 종과부적으로 후퇴하여 부산진성에서 성을 사수하기 위해 성문을 걸어 잠거고 일전을 벌리지만  4월14일 전사를 하게 된다. 





그후 1593년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함락을 하여 주둔을 하며 성의 형태가 많아 바뀌었다. 일본장수 모리 테루모토가 주둔을 하며 쌓아 일본식 성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자성대가 부산진성의 외성이었다고 하며 자성대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부산진성을 모성이라 하면 외성인 자성대는
자식의 성 즉 자성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산 정상에 자성을 만들고 장대를 사용하였다는 데서 자성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임진란때는 일본 장수 고니시가 주둔을 하였다 하여 고니시성이라 불렀다하며 그후 명나라의 만세덕이 주둔을 하였고 그후 만공단이 있었는데 이때 만공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 난때는 현재의 자성대가 바로 바다와 연결이 되어 바닷물이 성벽아래까지 들어왔다한다. 그래서 외세의 침입에 가장 민감한 곳으로 추정된다.
 
그후 일제시대때 시가지정비사업으로 성의 일부가 훼손되고 자성대 앞 바다가 매립이 되어 지금은 부산을 대표하는 자성대부두가 설치되어 있다. 지금도 자성대공원에 가보면 그때 석성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높이는 최고 10m에서1.5m까지 쌓은 흔적을 볼 수 있다.1974년 시작한 정화사업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이 되었는데 진동문인 동문, 서문인 금루관,정상에는 장대인 진남루가 복원이 되어 있다. 진남루 옆에는 명나라 이여송과 함께온 천만리장군 기념비와 최영장군의 비각이 보전되어 있다.

진남대로 1974년 복원이 되었고  2층구조로 자성대공원의 정상에 있다. 현재는 출입을 할 수 없도록 쇠창살로 보호각을 설치하였다.


진동문인 동문


서문인 금루관의 모습


이 기념비는 두산위브의 포세이돈아파트 한견에 설치된 기념비로 기념비가 서 있는 이자리는 부산진성의 관문이다. 1592년 4월13일 밤에 왜적은 불시에 이곳을 통하여 부산진성을 침공하니 하룻밤사이에 성주 정발첨사는 이 성을 지키다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원래 자성대는 본성과 지성이 있었는데 이 지성이 오늘날의 자성대이다.

정유재란이 지나 우리나라에서는 자성대를 대대적으로 수축하고 첨사영을 이곳으로 옮겨 왜적의 제침에 대비하였다. 이때 사대문이 동서남북에 설치되고 성안에는 객사 군기소 장대 관청등도 설치 되었다.또 서문 양쪽에는 "남요인후 서문쇄약"이라 새긴 돌기둥이 있었다. 이말은 곧"나라 남쪽문은 들목에 해당하니들어오는 적을 경계하고 서쪽문은 적이 들어 올 수 없도록 단단히 자물쇠를 잠궈놓으라 "는 뜻으로 자성대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진동문





영가대의 모습입니다. 영가대는 1614영 광해군때경상도 순찰사 권반이 부산진지성 서쪽 해안에 선착장을 축조하면서 퍼 올린 토사가 쌓여 작은 언덕이 생겼고 그 언덕위에 8칸의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어 조성한 곳으로 누각을 짓고 1624년 인조때 선위사 이민구가 이곳에 파견되어 와서 권반의 고향인 안동의 옛이름인 영가를 따서 영가대라 하였다. 1617년 광해군 9년 통신사로 파견된 오윤겸이 처음 영가대에서 일본으로 파견 된후 1811년 이루 순조때까지 통신사 일행이출발하여 돌아 오던 장소로 안전 항해를 위한 해신제를 올리는 장소였다.  그러나 1910년 경부선 철도의 부설과 부산 항만의 매립공사로 소실된지 90년만인 2003년 9월25일에 복원하여 준공을 하였다 한다.







영가대 내부의 모습이다.


자성대 컨테이너 부두가 앞을 가로막고 그 뒤로 보이는 산이 영도의 봉래산이다.

현재는 도심으로 둘러 쌓여 아파트와 도로가 밀집되어 있다.





조선 통신사란1607년인 조선 후기에 일본 에도막부의 요청에 의해 1811년 까지 열두차례에 걸쳐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통신이란 신의를 교환한다는 뜻으로 조선국왕이 일본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조선 국왕의 공식적 외교사절이었다.

진남대로 천만리 장군의 기념비와 함께 서 있다.










진남루 아래에서 산책을 즐기는 주민들. 


충장공 천만리 장군 기념비. 임진 왜란의 일등 공신인 천만리 장군은 중국 영양사람으로 자는 원지 호는 사암으로 1592년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원병의 영양사로서 이여송과 함께  출정을 하여  평양 곽산 등시에서 전공을 세웠고 정유재란때에는 마귀 장군과 함께 와 울산 동래등의 전투에 싸웠다. 그 후 명나라로 원군이 철 수를 할때 천만리 장군은 조선에 머물러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충장공이란 시호와  화산군에 봉책하였다.







서문 성곽 우주석으로 부산 광역시 지정기념물 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돌기둥을 세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어나 임진왜란 후 부산진지성을 축성 할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돌기둥에는 "남요인후 서문쇄약"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국경이라, 서문의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는 뜻이라한다. 원래 부산진 지성 서문자리였던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것을 1975년 부산진지성 복원공사때 이곳 서문 금루관에 좌우 기둥석으로 사용을 하였다 한다. 좌측272m, 우측277m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듯이 강직하고 총렴한 장군으로 왜적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1316년 고려 충숙왕3년에 출생을 한 최영장군은 공민왕때 대호군이 되어 내란 과 왜란에 참가를 하여 평정을 하고 홍산싸움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러 왜적은 최영장군의 장군기만 보면은 벌벌 떨 정도로 무서워 하였다 하며, 그후 "백수최만호"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해안의 바닷가에가면은 최영장군의 사당을 볼 수 있다. 민간신앙으로 승화되어 그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며 무속인들 사이에서도 최영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사람도 볼 수 있다. 사량도, 감만동,수영동 영도 자성대등 여러곳에서 그의 사당을 볼 수 있다. 자성대에서는 음력 5월5일인 단오날에 그의 제사를 지낸다 한다 

그의 영정을 모신 자성대의 사당 내부로 철문으로 닫혀 있다.

서문과 동문은 복원이 되어 있지만 북문은 복원이 되어 있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북문이었다는 흔적만 볼 수 있는 안내석으로 지금 현재는 많은 주민들의 휴식처로 자성대 공원으로 부르고 있다.
  


북문으로 올라 진남대로 올라 갈 수 있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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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수지방의 건축 양식으로 실내에는 마루와 다다미방, 온돌방이 설치 되어 있다. 한때는 200명이 넘는 기생이 있었다하며 일본인만 출입할 수 있는 기생집으로 해방후 한국인이 운영을 하였다 한다.




도심한복판에 위치하며 지금은 주변에 건물들이 들어서 작은 가장집 분위기 같은 느낌이 날 정도로 초라하다.

부산에는 지리적인 영향으로 인해 일제시대때 일본인이 많이 거주를 하였다. 필자가 동래 온천장에 거주를 할 때 그 집도 한켠 방에는 다다미 방이 설치 되어 있었는데 아마 일제시대때 일본인이 거쳐를 하였던 것 같은 유년 시절의 기억이 있다. 그만큼 부산에는 일본풍의 집들이 도처에 있다. 일본에서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제일관문이기 때문 일 것이다. 그래서 수정동 범천동 가야 주례 대신동을 품안에 거느린 산을  우리들은 예로 부터 엄광산이라 불렀는데 일본인들이 부관페리호를 타고 부산항으로 올때 저 멀리 바다에서도 보인다하여 고원견산으로 불러 한때는 산명이 고원견산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 그 산아래 수정동에는 지금도 일본 풍의 건축물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 이름하여 정란각으로 쉬운말로 기생집이다. 큐수지방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일제시대때 일본인인 철도청장이 거주를 할 목적으로 지어져 별장으로 이용을 하였다 한다. 해방이후 한국인이 인수를 하여 정란각이란 기생집으로 영업을 하였다 하며. 60~70년대에는 그래도 잘나간 방석집으로 200명이 넘는 많은 기생들이 있었다 한다. 내국인은 출입을 할 수 없었다하며 주로 일본 관리들이 출입을 하였다 하는데 쉬운 말로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거나하게 차려 나와 질펀하게 놀고가는 그런집으로 현재에도 요식업의 문패가 붙어 있다. 1993년 영화 장군의 아들1편의 촬영 장소로 이용을 하였고 일본식 건물 답게 다다미방과 온돌방이 함께 되어 있다 . 지금은 근대문화 유산 330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어며 한 단면의 우리 역사를 볼 수 있는 것 같아 씁슬하다.

찾아가는 길은 지하철 부산진역 또는 버스는 부산일보 또는 고관입구에서 내려 고관입구 사거리 홍골길을  100m 따라가면 된다. 새로운 주소는 홍골길195호




홍등가를 알리는 초롱불이 켜졌을 문앞의 등불은 꺼져 있고 이제는 옛이야기로만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입구에 들어서면 항상 현관에 대낮인데도 불을 밝히고 있다. 구조는 2층으로 목조건물로 전형적인 일본풍이 느껴진다.




1.2층의 모습으로 내부를 볼수 없도록 문이 잠겨져 있는 것이 아쉽다.
아마 저기 방안에서 거나한 술상이 차려지고 기생들과 술판이 벌어졌을 것 같다.






2층의 외벽은 얿은 판자를 데고 나무로 모양을 낸 정교한 모습으로 건축적으로 인정을 받아 근대문화유산이 된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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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동래여행)동래 복천동고분군. 도심한복판의 U.F.O가 가야시대 고분인 복천동고분군

 

복천동 고분군

사적 제273호

소재지: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50일원

<반구 돔형태의 건물로 안으로 들어서면 발굴현장의 모습과 출토된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덧널무덤과 구덩식돌덧널무덤을 출토당시의 모습으로 보여 주고 있다.>

 복천동 고분군은 현재 동래마안산의 중심부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은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산에서는 대표적인 고분이다.

 

1969년 주택공사를 하면서 고분군 일부가

 


 

 

 파괴되며 이세상에 존재를 알리게 되었는데 1995년 까지 부산대학교와 시립박물관이 중심으로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현재까지 출토된 유구는 130여 기에 달하고 출토유물은 9천점에 이른다 한다. 출토된 유물의 분포를 보면 토기류, 철기류, 장신구류, 인골, 말 이빨 같은 동물의 몸체 일부도 같이 출토되었다.

동래구청이 있는 동래시장을 통과하여  우성베스토피아 아파트 앞을 지나면 복천동 고분군으로 갈 수 있다.

고분공원으로 무덤자리는 회양목을 심어 돌여 놓았으며  까만 빗돌로 고분임을 표시 하였다. 



도심한 복판에서 가야 신비를 경험할 수 있다. 1969년 주택공사 과정에서 고분군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동서남은 시내와 접하고 북으로는 동래읍성이 둘러 쳐져 있어 시민공원으로 많은 주민들이 고분군을 산책하며 야와고분군은 무료로 관람을 할 수 있다. 




복천고분군의 53호인 구덩식돌넛무덤(수혈식석곽묘)의 내부로 출토된 당시의 모습으로 전시를 하고 있다.




복천동 고분군 54호 무덤인 덧널무덤(목곽묘) 내부로 출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밤이 아름다울 것 같은 복천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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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숙도 A지구 탐조대에서 본 철새 들의 모습입니다. 아직 많은 철새들을 볼 수 없지만 11월 말경이면 철새들로 장관을 이룬다합니다.

을숙도에도 문화재가 있습니다.
생뚝맞게 무선 문화재요하고 반문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 있습니다.
철새들을 위한 천연기념물 제179호 입니다. 해마다 이맘대 쯤이면 낙동강 하구는 철새들로 자기네들 나름대로 사회를 만들며 쉬어가고 있습니다. 그 쉼터를 잘 쉬어 가라고 보호를 하는 곳입니다. 아울러 한쪽은 개방을 하여 탐조대를 설치하여 가까이서도 철새를 구경할 수 있도록 갈대로 위장을 하여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부산시에서 생태계를  복원한 곳으로 예전에는 농작물을 짓기위해 주민이들어가 파 농사를 하던 곳입니다. 지금은 완전히 자연생태계 그대로 복구를 하여 을숙도 안으로 들어서면 특히 핵심보전지구인 C지구에는 어른 키 보다도 더 큰 갈대가 숲을 이루었고 관리를 위해 다니는 통행로 좌우측으로도 갈대가 숲을 이루어 철새들이 안심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를 하는 것에 놀랬습니다. 철새를 보호하고 습지및 생태계보전을 위해 을숙도를 3개 구역으로 나누어 관리를 하고 있는데 A지구는 개방지역으로 교육 이용지구이며 B지구는 완충지역 C지구는 핵심보전지구로 나누어 낙동강하구 에코센터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합니다.
철새들의 고향 윽숙도는 1966년 7월13일 천연 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되어 해마다 약167종 13여만마리가 월동을 한다합니다. 민물가마우지,큰고니,큰기러기, 혹부리오리,재두루미,검은머리갈매기,마도요등 과 국제적으로 멸종위기종인 노랑부리 백로,황새,저어새,가창오리,흰꼬리수리,참수리, 매두루미,적호갈매기등 많은 철새들이 월동을 하고 간다고 합니다.
을숙도 철새공원 위치는 부산시 사하구 하단동 1212번지이며 주요시설은  낙동하구에코센터, 피크닉광장, 자연학습장,생태주차장,탐조대,야생동물치료센타를 두고 있습니다.
*이용시간:08:00~20:00
*이용방법:도보
*이용시설:야외공원(주차장, 초화원)

철새들을 위해 이용자 준수사항입니다.
*개방공간 이외에는 습지와 철새 보호를 위해 무단 출입 금지
*야간시간대인 20:00~익일 08:00까지 공원출입을 제한
*위시간에는 주차장 폐쇄 및 공원내 가로등 소등
*철새의 서식에 주장을 주는 행위
*애완동물 동반시에는 반드시 목줄 착용과 배변봉투 지참
*났시, 어로행위,동식물채취,경작행위등을 할 경우에는 관련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합니다.
찾아가는 방법
*버스:58,58-1,58-2,221,300,520번 이용 을숙도 휴계소 하차
(마을버스 3,7,7-1,9,9-1,10,12,13,14,15,16,17,17-1번 이용)
*지하철:1호선 하단역 5번 출구로 나와 위 을숙도 번호 버스를 환승하면 됩니다.
*승용차:시내방면에서 출발할때:괴정방면~하단로터리~낙동하구둑~을숙도휴계소~낙동강하구 에코센터
경남,김해에서 출발시:김해공항로~명지교차로(하단방향)~을숙도~낙동강하구에코센타.
아참 입장료가 있습니다.어른1000원. 청소년.군인500원
에코센터연락처는 tel:051-888-6861~2, 209-2000

홈페이지: http://wetland.busan.go.kr/

 

 

을숙도 낙동강 하구 에코 센터 모습입니다. 일본인 야마시타 야스히로씨가 설계를 했다는군요, 이곳에서 교육밎영상실, 탐조 전망대를 갖추어  관램객을 맞이하고 있다합니다.


모든 가로등이 새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에코센터 입구의 새모양 조각입니다. 귀여운 모습입니다.



에코센터 바로 건물 옆 우측의 습지와 갈대밭입니다. 바람에 따라 춤을 추는 모습이 장관입니다.


최근에 개장을 한 동물 치료센터입니다. 을숙도 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문은 C지구호 핵심보전지구입니다. 지금부터 안으로 들어 갑니다.



























탐조대로 내려오는 터널입니다.. 그리고 탐조대에서 밖을 보고 있네예


 



<을숙도 철새 공원 안내도>



<낙동강 하구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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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기념관의 안희제 선생님의 흉상입니다.




지하1층으로 내려서면 정면에 처음 만날 수 있습니다.

백산기념관은 부산 중구 백산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위의 회사원들이나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뛰였습니다.



현재 백산 기념관의 모습입니다. 옛 백산상회가 있던 곳으로 특이하게도 이 전시관은 지하에 설치 되어 있습니다. 지하1층이 백산기념관이며. 지하2층은 제2전시실로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입구를 들어서면 정면으로 만나는 액자입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지하실로 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지하1층에 내려서면 먼저 백산선생님의 흉상을 만나게 됩니다.

입구에 쌀 수집통이란 단지가 있습니다.

 백산선생님은 의령군 부림면에서 출생하였어며, 생가 한학을 공부하였던 재실등이 스크랩되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전시관 내부의 모습입니다.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 백산선생님의 일대기를 보기가 쉽습니다.

 백산상회의 설립목적과 운영등에서도 설명을 하였어며 1970년과 1990년 때의 옛  백산상회모습이 사진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백산상회 운영에 관한 내용과 백산선생의 친필서한문등을 볼 수 있다.

 

 

 백산선생님이 사용하시던 유품이 전시되어 있어며

 백산선생님의 초상화입니다.

 국내에서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비밀결사 단체의 활동과 대동청년당 단규등이 나와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명예학사학위 증서

백산기념관이란?

백산 안희제(白山 安熙濟, 1885~1943)선생의 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중앙동 옛 선생님이 운영하던 백산상회 그 자리에 기념관을 세워습니다.
이름하여 백산기념관.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운영을 하시며 독립운동의 자금을 마련하였다 합니다.
그 뒤에는 백산상회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였다 합니다.
범위를 확대하여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와 국내 및 외국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뛰는 단체에 활동자금을 지원하였다합니다.
그리고 독립을 위해 백산상회는 그들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어며 백산안희제선생님의 애국심을 기리며 후세에 그뜻을 길이 전하고자 백산기념관을 건립하였다 합니다.

선생은 일제식민지 아래에서도 민족교육, 민족기업육성,항일운동등 여러방면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활동한 민족독립운동가였습니다.

자는 태약(泰若), 호는 백산, 본관은 강진입니다.

안희제 선생님의 기념관을 살펴보면 출생과 성장, 교육구국운동, 국내 비밀결사 단체 활동, 백산상회 설립과 운영 언론학회활동,국외독립운동 기지건설과 대종교의 활동으로 나누어져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1885.8.4 경남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부농의 아들로 출생을 하였어며 그후 1905년에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에 입학을 하고 1907년에 구명학교, 의신학교를 설립하셨다.
1909년에는 대동청년당을 결성, 1911년에는 러시아로 망명도 하였다한다,
1914년에 귀국을 하여 백산상회를 설립하는 과정등을 볼 수 있으며 3.1운동 때는 영남일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동아일보 창립발기인에 참여를 그리고 중외일보 사장으로 취임을 하며 자력사를 설립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합니다.
국외에서는 발해농장을 경영하여 둑립운동의 기지로 이용을 하였어며 1942년 11월19일에 임오교변때 일경에 체포되어 그 이듬해 8월3일 순국을 하였다 한다.
백산선생의 일생은 나라의 독립를 위해 당신의 삶은 뒤로하고 오직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분입니다.

하늘 높은 가을날 백산안희제 기념관과 40계단 기념관을 찾아보세요. 불과 200여 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더욱 자세한 내용의 백산선생님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백산선생님의 교육열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합니다. 구명학교 의신학교 창남학교를 설립하셨고 1918년 서간도에서 망명생활을 할때 안효제의 부음을 듣고 애통한 심정과 장례절차등을 적어 안효제의 동생에게 보낸 조위문이
아래 액자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사용하시던 도장입니다.









터치스크린으로 선생님의 일대기, 업적등을 화면으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지하2층의 전시실 모습입니다.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전시 되어 있습니다.










백산기념관은
개관일:매주 화요일~일요일(월요일은 휴관)
관람시간:09~18:00(단 토.일요일은 17:00까지)
관람료:무료
교통편:지하철 1호선을 이용하여 중앙동역에 하차, 3번 출구로 나오면 3분거리에 위치
버스정류소:백산기념관.부산데파트, 연안여객터미널
홈페이지:www.baeksan.bsjunggu.go.kr
문의전화:051-600-4067~8
주소:부산광역시 중구 백산거리 62(동광동3가 10-2) 60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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