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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달성여행)최정산 남지장사·청련암·백련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의 승병훈련소였던 천년고찰 남지장사·청련암·백련암 여행.


대구와 경상북도 청도를 경계하는 곳에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가 있습니다. 우록동으로 불리는 우록리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이었던 사야가 김충선(1571~1642)장군의 녹동서원이 있습니다. 일본인 장수로서 조선에 귀화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워 사성 김해김씨 성과 이름 ‘충선’을 하사받았으며, 임진왜란·병자호란·이괄의 난에 전공을 세운 삼란공신으로 말년을 이곳에 낙향하여 안빈낙도의 삶을 살며 후학을 지도하고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곳 우록리는 사방팔방 산으로 둘린 꼭 호박 속 같은 모습이며 하늘만 열리는 별천지였습니다. 이런 골짜기에 이런 넓은 지대가 있는 게 신기할 정도며. 그래서 사슴이 뛰어노는 평화스러운 마을인가 봅니다. 산세 빼어난 곳에 대찰이 없을 리 없습니다. 이곳에도 오래전부터 천년고찰이 있었습니다.

최정산 아래 남지장사는 신라 신문왕 4년인 684년에 왕명을 받고 양한대사가 창건을 했습니다. 당시 신라 조정에서도 일찍이 이곳이 명당자리임을 간파했는가 봅니다. 지세에 문외한인 필자가 봐도 남지장사가 위치한 우록리가 명당임을 단박에 느끼겠습니다. 저도 나중에 늙어 노후를 이곳에 보내고 싶은 곳 중 한 곳으로 추가합니다.

 세상과 단절된 듯한 우록리 남지장사는 지장보살을 모신 사찰로 창건당시에는 8암자에 3천여 명의 승려가 모여들었을 정도로 번창했습니다. 그러나 신라와 궁예간의 전쟁에서 절은 폐사하고 1263년인 고려 원종4년에 일연선사가 중창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을 개국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고려말~조선 초의 고승 무학대사도 이곳에서 수도했다합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당 유정이 이곳에서 승병훈련을 진두지휘했던 호국사찰이었습니다. 나라가 왜군의 침입으로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자 승려들이 분연히 털고 일어나 승병 훈련을 받았으며 의병 우배순의 휘하 의병과 함께 그 수가 무려 3천여 명이나 되었을 정도로 승병훈련의 본거지였습니다.

 한양도성을 향하던 왜군은 청도로 들어왔으며 대적사를 불 지르고 남성현을 넘었습니다. 그런데 왜장은 이곳 남지장사에 사명대사와 함께 승병들의 훈련 본거지라는 첩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대구 경상감영 공격을 잠시 미루고 남지장사를 공격하여 사찰은 불바다가 되었고 남은 전각이 하나 없을 정도로 초토화되며 폐사되었습니다.

 남지장사

 사찰은 황폐해졌으며 1653년인 효종 4년에 인혜가 중건하여 다시금 사찰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1769년인 영조 45년에 모계, 풍흡이 다시 중수하였습니다. 모계가 중수하면서 팔공산 동화사의 북지장사와 대칭된다는 뜻으로 남지장사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현재 남지장사 당우는 1940년대 신원이 중수하였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인 대웅전과 설현당, 삼성각, 광명루, 요사와 부속암자인 청련암과 백련암 등 12동의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남지장사를 들어서는 입구에 종각이 있는 빛바랜 출입문이 남지장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여겨질 정도로 퇴색되었으며 종각 옆에는 1653년과 1769년 중건과 중수를 했던 모계, 운계, 경운의 송덕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남지장사를 가운데 두고 좌청룡 우백호인양 부속암자로 청련암과 백련암이 자리합니다. 좌청룡은 백련암, 우백호에는 청련암이라 불러도 괜찮아 보입니다. 

 

청련암 오솔길

 

 눈여겨볼 건물이 청련암입니다. 청련암도 신라 신문왕 때 남지장사를 창건하면서 양한조사가 함께 세웠는데 사명당 유정이 승병훈련을 지휘하면서 이곳에서 지냈습니다. 임진왜란 때 남지장사와 함께 소실되었으며 1653년과 1714년에 중건과 중수를 하였습니다.

 또 다시 1806년 뜻하지 않은 화재로 청련암은 소실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2년 뒤인 1808년에 중건한 건물로 건물 가운데에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법당을 두고 앞뒤로 툇마루를 달았는데 이는 특이한 경우입니다. 건물의 왼쪽 앞과 오른쪽 뒤를 돌출시킨 ‘乙’자 형태의 평면배치에 많은 방이 딸린 것을 보면 아마 스님들의 생활공간인 요사와 법당을 함께 접목한 '인법당'의 법식을 갖춘 건물이라 하겠습니다.

 청련암(대구광역시유형문화재제34호)

 

 

 

 

 

 

 

 

 

 

 

 

 

 청련암 건물은 1990년 보수하면서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백련암은 비구니 수행처라 그런지 단아한 모습을 한 암자였습니다. 남지장사를 찾는다면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길에 백련암과 청련암을 함께 찾아보세요. 사명당 유정과 승병들의 함성이 우록동을 잠에서 깨어나게 합니다.

 백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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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금정구여행)금정산 국청사. 국난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승장병이 머물렀던 호국사찰 국청사.


 우리나라는 전란 때 마다 의병과 승병들이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초계와 같이 버리며 외세와 싸워 이 나라를 지켰습니다. 특히 부산은 지리적인 위치로 일본과 가까이 있다 보니 툭하면 왜적의 약탈과 침입이 잦았습니다. 왜적의 칩입을 막기 위해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에는 18km의 거대한 산성을 축성하였고 금정산성을 방어하기 위해 승군 작대의 승장병이 거주하였던 승장소가 있었습니다. 만호승장, 성관승장이 머물렀던 승장소가 금정산 국청사입니다.



 신라시대 의상대사(625~702)께서 범어사와 함께 창건한 국청사는 1703년인 숙종 29년에 금정산성을 보수 하면서 승당과 선당등 승려가 거쳐하는 곳이 많이 세워 졌는데 그 수가 족히 100칸 규모였습니다. 침입해 오는 왜적을 막고 지키며 보호한다하여 국청사라 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금정산성을 지키든 승장이 국청사에 머물면서 왜적의 침입을 막았습니다.


 

승병을 관할한 승장의 직인인 ‘금정산성승장인’이 부산시 문화재자료 제 44호로 지정되어 범어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보물제 1733호인 청동북이 있습니다. 국청사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난극복에 앞장을 썼던 때문인지 당우는 모두 최근에 지어졌습니다.


 지장보살 본원 삼층석탑

 

일주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연지의 삼층석탑은 전란 중 숨진 의병과 승군의 혼령을 천도하기 위해 1982년 연못가운데 지장보살 본원 삼층석탑을 조성하였습니다. 또한 금정산 국청사는 뚜렷한 볼거리는 사실 없습니다. 그러나 금정산성을 얘기 할 때는 빼 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전통 사찰 제 18호이며 국청사 주소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북문로 42(금성동)


 

 

 

 

 

 

 

 

 

 

 

 

 

 금정산성승장인 모형



금정산성 동문



2008/06/04 - 부산 금정산(802m) 금정산성일주 (上)


2008/06/04 - 부산 금정산(802m) 금정산성일주 (下)


2013/10/02 -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동문)금정산성 동문, 동래산성으로도 불렸던 금정산성 총길이는 18km,


2013/10/29 -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 금정산성을 만리장성에 비유, 금정산성 남문


2013/09/25 - (부산여행/금정여행/금정산성) 금정산성 북문."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를 상기 시켜주는 금정산성


2013/01/01 - (부산여행/금정산산행)용과 호랑이의 싸움. 용쟁호투가 벌어지는 용호등의 산길에 경악, 부산의 산 금정산 원효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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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진산은 망운산이다. 그 산자락안에는 망운사과 화방사 두 사찰이 있다, 모두 쌍계사의 말사이며 망운산화방사는 신라 신문왕때 원효대사에 의해 보리암, 용문사와 함께 창건하였다 한다. 그후 폐사되었다가 고려시대에 들어와 진각국사 혜심스님이 순천 조계산 수선사(현송광사)에서 남해를 바라보니 항상 남해 바닷에 떠 있는 섬에서 영기가 서려 있어 이곳 망운산 연죽사의 옛 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연죽사가 있던 위치에서 조금 이동하여 영장사로 지었다. 임진란때는 왜구와 맞서 싸우는 승병들의 은거지 였고 그래서 인지 임진왜란으로 영장사는 화재로 인해 전소되고 만다. 그 후 전란이 끝나고 서산대사의 제자인 계원과 영철 두 스님이 와 마을 신도들의 도움으로 중건을 하였다. 절 이름을 풍수지리로 연꽃의 중심에 앉아 있는 자리라하여 화방사로 바꾸었다. 화방사는 여러번의 화재와 전란으로 문화재등 모든 사료들이 사라지고 없다. 1981년에 화방사는 대 화재로 인해 사찰이 전소되었지만 현재의 절 규모는 그때 전소되었던 보광전 자리에 1984년 대웅전을 중건하면서부터 사찰의 규모를 갖추었다. 그러다 보니 옛 사찰의 분위기는 반감되고 현대미와 인공미가 너무 드러나 천년고찰의 분위기는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란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승병들의 근거지로 호국사찰이었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겠다.

지금 현재의 남아 있는 건물은 거의 없고 채진루만 1638년에 계원대사가 지어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일주문을 통해서 대웅전을 올라오는 계단 왼편에 대웅전과 마주 보고 있는 건물로 임진왜란때 왜구에 의해 모두 불타 버린 것을 신도들에 의해 다시 복구되었다. 채진루는 정면 5칸에 측면 3칸으로 人자인 맞배지붕으로 건립되었다.




1638년에 계원대사가 지어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일주문을 통해서 대웅전을 올라오는 계단 왼편에 대웅전과 마주 보고 있는 건물로 임진왜란때 왜구에 의해 모두 불타 버린 것을 신도들에 의해 다시 복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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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산 안국사)
안국사 하면 대학시절 산악부 산행 때가 생각난다. 약25년전쯤 일이지 쉽다. 지금은 안국사가 적상호의 수몰 때문에 현 위치로 올라와 새로 복원을 하였지만 그때는 지금의 적상호 자리에 안국사가 위치하고 있었다. 겨울에는 무주 지방에 많은 눈으로 적설량이 엄청나다. 그러니까 적상산 산행을 겨울방학때 올랐는데 지금이야 적상호로 오르는 드라이브 코스를 많이 이용하지만 그때 한겨울에는 신도는 물론 절에 거주하는 스님도 보기 힘든 오지중에 오지의 사찰이였다. 그 추운겨울날에 장도바위를 통해 올랐는데 엄청난 적설량으로 텐트 칠 분위기도 아니고 안국사로 찾아 들어 갔다. 안국사에 들어가니 동자승과 스님한분만 기거를 하고 있었다. 산행을 와서 하루 자고 가서면 하고 자초지종 설명을 하니 허락을 해 주었다. 그때는 극락전 아래 조금 떨어진 곳에 묵을 방이 있었는데 아무도 기거하는 분이 없어 냉골이라 동자승이 장작을 가지고 와 군불을 때 주며 나가기에 그때까지도 방이 안 뜨겁고 냉방이라 장작을 가지고 와 더 넣고 뜨끈뜨끈하게 하고 잠을 청했다. 아뿔사, 동자승이 넣어주고 간게 시간이 흘러야 구들장이 달아올라 뜨거운데 그 기에다 장작을 더 넣었서니, 밤에 뜨겁다 못해 살이 탈 지경이였다. 아랫목은 비워두고 모두 사각지대인 구들장이 없는 곳으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랫목을 보고 놀래 기절초퐁 할 뻔 하였다. 장판이 타가지고 새까만게 아닌가. 우리는 미안한 마음에 가지고 있던 양식과 부식(그때까지만해는 안국사에는 도로가 없어 몇시간을 걸어 다녔고 길이 험해 스님들도 오길 꺼리는 사찰이라 하였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야 밑의 마을에서도 사람이 올라 온다하니... 그래서 쌀, 부식도 귀한 시절이었다) 을 부처님께 공양을 하고 미안한 마음에 뒤도 안돌아 보고 하산을 했는데...

 


하산하는 오솔길이 지금은 도로로 변해 그때의 운치는 사라지고 북적이는 관광객으로 그때가 그리운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적상산성내의 유일한 고찰인 안국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이다. 고려 충렬왕 3년(1277)에 월인(月印)대화상에 의해 창건이 되었다. 조선초기에 와서 무학대사가 중창을 하였고 광해군 5년(1613)과 고종 1년(1864)에 중수를 하였다. 광해군 6년(1614) 적상산성 내에 사각이 설치되고, 인조 19년(1641)에 선운각을 설치하였다. 조선왕조 실록과 왕의 족보인 선원록이 적상산 사고에 봉안되었다. 적상산 사고를 방비하기 위해 호국사를 짓고 전부터 있던 안국사와 함께 승병들의 숙소로 사용하여 안국사로 불리워 졌다. 현재의 안국사는 양수발전소 상부댐인 적상호로 인해 수몰이 되어 옛 호국사지 자리로 옮겨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이 되었다. 안국사란 절이름도 여기에 연유하고 있다. 현재 안국사에는 보물제1267호 안국사 영산회 괘불탱과 유형문화재 42호인 극락전, 제85호 호국사비, 적상산성(사적제146호)과 적상산사고(기념물제88호)가 있다

안국사 극락전

안국사 극락전(유형문화재 제42호):안국사의 본전으로 서방극락정토와 아미타여래와 관세움보살, 대세지보살을 봉안 하였어며 무량수전이라고도 하였다. 다포계의 건물로 맞배지붕으로 조성한 특이한 형태의 건물로 앞면과 옆면에 각 3칸씩으로 구성되었다. 학이 단청을 하다 날아 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안국사 영산회 괘불탱(보물제1267호):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불교 행사를 할때 걸어두는 그림으로 법회의 성격, 의식의 종류에 따라 맞는 것을 봉안한다. 이 그림은 영조4년 안국사에서 기우재를 지낼때 조성되었다. 조선영조4년(1728)에 천진스님과 의견스님에 의해 제작되었다. 가로 7.5m 세로10.75m이다. 중앙에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시고 좌우로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음보살, 대세제보살과 다보여래, 아미타여래등 여섯분을 협시보살로 모신 석가 칠존도 형식의 영산회상도이다.

 

보살의 둥그런 얼굴과 밝은 표정에서 편안함이 느껴지며, 석가모니뒤에 광채를 금색으로 채색하고 여백에 구름무늬를 넣은 점이 이채롭다.

안국사에는 성보박물관이 있다.
여러나라에서 수집한 불상이 전시 되어 있어 들러 볼 것을 권한다.

안국사 063-322-6162







극락전 내부의 모습이 화려하다. 학이 단청을 칠하다 날아 갔다는 전설이 있다.





지장전의 모습입니다.

항상 안국사는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는 사찰이 되었습니다.



안국사 천불전 내부입니다.

승보 박물관안의 불상입니다.

승보 박물관 내부입니다.


범종의 문양


안국사의 일주문으로 많은 차량과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입니다.

안국사 부도탑:안국사 역대 스님들의 사리을 봉안한 부도탑으로 적상산 사고지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청운당 사리탑과 봉골탑은 숙종43년(1717), 월인대사 영골탑은 영조 26년(1750) 보운당 사정탑은 영조 29년(1753)에 각각 세워진 것이며 석종형으로 조선후기의 부도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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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경주 봉서산~삼태봉 산행. 서라벌의 관문을 지키는 산,경주 봉서산~삼태봉

근교산&그너머 <678> 경주 봉서산~삼태봉

불국토 관문 지킨 원원사(遠願寺) 감싸 안다

원원사 가운데 두고 한 바퀴 도는 원점회귀 코스

오름길 곳곳 전망대… 봉서산 정상 위치 정립 필요

은방울 군락지·진달래 동산 등 봄 산행에 매력적

 


 

경주와 울산의 경계선 가운데 동해안에 치우친 부분에는 삼태봉~동대산~무룡산으로 연결되는 커다란 산줄기가 있다. 울산역에서 북구 호계를 거쳐 국도 7호선을 타고 경주 불국사 방향으로 가면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바로 그 산줄기다. 가장 남쪽의 무룡산(452m)은 울산의 진산으로 일컬어지는 산이고 이곳에서부터 북쪽으로 동대산과 삼태봉을 거쳐 경주 토함산에 이르는 약 30㎞의 산줄기를 일명 '동대산맥' 또는 '삼태지맥'이라 부르기도 한다. 동해의 푸른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내륙으로는 멀리 영남알프스 줄기까지 바라보이는 산줄기로 해발 고도가 높지는 않지만 바다에 인접해 있어 상대적으로 고도감은 꽤 있는 편이다.

 

경주 외동읍 모화리 봉서산 능선을 오르면서 뒤돌아보면 모화리와 원원사를 중심으로 동쪽의 삼태봉 능선과 서쪽의 봉서산 능선을 연결한 원점회귀 코스는 길이 편해 당일 근교산행지로 추천할 만하다.

 

이번 주 '근교산&그 너머' 취재팀은 이 산줄기 중간에 솟은 경주 삼태봉(三台峰·630.5m)을 찾았다. 삼태봉은 흔히 독립된 봉우리로 대접받기도 하지만 경주시 외동읍 주민들 중 많은 이들은 동대산의 최고봉으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봉서산(鳳棲山)의 최고봉으로 보기도 한다. 취재팀 역시 10여년 전 삼태봉 답사 때 '봉서산 삼태봉'으로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주 답사를 통해 우선 봉서산과 삼태봉은 엄연히 다른 산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봉서산은 '호국 천년고찰' 원원사(遠願寺)의 서쪽과 북쪽에 걸쳐 있는 아담한 산줄기의 최고봉을 가리키는 것이고, 삼태봉은 동대산 자락의 최고봉으로 본다는 것이다. 물론 공식 지형도 상에는 봉서산과 삼태봉은 각각의 이름을 가진 채 따로 표기돼 있는데, 봉서산의 위치가 원원사 서쪽 361봉으로 잘못 표기돼 있어 이 또한 논란의 소지가 있다. 원원사 주지인 현오(賢悟) 스님은 "봉서산은 '봉황이 깃든 산'이라는 의미인데 원원사 서쪽과 북쪽을 감싼 줄기의 가장 높은 곳을 정상으로 본다"며 "삼태봉은 동대산(東大山) 줄기로 봐야 하며 동대산은 서쪽 내륙의 치술령 국사봉 줄기에 대비해 '동쪽에 있는 큰 산'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결국 봉서산과 삼태봉은 별개이며, 현재의 지형도에 나와 있는 봉서산 위치도 잘못 표기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이유로 취재팀은 원원사를 중심에 두고 서쪽의 봉서산 줄기를 거쳐 삼태봉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를 택했다. 원원사에서 출발해도 되겠지만 거리가 조금은 짧은 느낌이어서 더 아래쪽인 저수지 댐 부근에서 왼쪽 능선으로 오르기로 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전후해 산행을 한다면 천년고찰을 순례해 볼 수도 있는 썩 괜찮은 근교산행 코스다.

전체 산행은 저수지 둑 왼쪽 들머리~무덤~능선 전망대~오리바위 전망대~361봉~제주 고씨 묘~532.8봉(삼각점)~봉서산 정상~철탑삼거리~진등대(이정표)~토함산 갈림길~이정표(임도 이탈)~질매재~옛 삼태봉~이정표 2개~삼태봉~(되돌아 내려가서)모화찜질방행 이정표~돌탑지대~계곡 갈림길~계곡 바닥(저수지공사장)~모화찜질방~댐 옆 출발지 순으로 연결된다. 총 11㎞에 순수하게 걷는 시간만 5시간, 휴식 및 식사 시간을 합치면 6시간~6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원원사 방향으로 비포장 도로를 따라가다가 공사 중인 저수지 둑 약간 못 미친 곡각지에서 왼쪽 작은 계곡 방향을 보면 등산로 입구가 보인다. 들머리다. 주변에 특별한 지형지물은 없지만 근교산 안내리본을 참조한다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3분 후에 무덤 5기가 보이는데 한 단계 올라서서 마사토가 무너진 듯한 편평한 곳에서 왼쪽으로 10m쯤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지능선을 타고 오른다. 사람 발길이 별로 닿지 않은 '묵은 길'이지만 의외로 뚜렷하다. 10분이면 봉서산 주능선 전망대에 닿는다. 동쪽의 삼태봉 동대산 능선과 서쪽 국사봉 치술령 마석산 줄기가 시원하게 드러난다.

봉서산 정상으로 가던 도중 만난 바위에 뿌리 내린 소나무.

 

길은 뚜렷하지만 바닥 토양이 마사토여서 미끄러운 편이니 주의해야 한다. 15분 정도 능선을 따르면 오리바위 전망대. 바위에 올라서 보면 주변 조망이 무척 시원스럽다. 2분 후 361봉 삼거리. 국토지리정보원 발행 2만5000분의 1 지형도에 '봉서산'으로 표기된 곳이다. 하지만 실제 지역민들의 인식 및 각종 전통적 자료들이 가리키는 봉서산과는 거리가 먼 표기다. 삼거리에서 철탑이 보이는 우측 능선을 따른다. 곧바로 첫 송전철탑을 지난다. 철탑에서부터 다음 봉우리 정상부에 있는 제주 고씨 묘까지는 13분가량 걸린다. 고씨 묘는 오른쪽 아래 원원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다. 무덤 뒤 큰 바위 옆으로 통과 능선을 이어간다. 높이 3m가량의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한적한 산행길에 운치를 더한다.

오르막을 25분쯤 타면 532.8봉에 닿는다. 널따란 정상부에는 수풀이 무성해 삼각점 찾기도 힘들다. 주변에는 드문드문 피어난 철쭉이 하나 둘씩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다. 포근한 능선길을 따라 5분쯤 걷다보면 등산로 오른쪽 무덤가에 은방울 군락이 펼쳐진다. 둥굴레도 은방울 사이에 섞여 있지만 분포도 면에서는 열세다. 은방울 꽃봉오리가 이제 막 활짝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3~4일만 기다리면 그 뽀얗고 앙증맞은 은방울꽃을 원 없이 볼 수 있겠다.


원원사와 보물 제1429호 원원사지 삼층석탑. 감은사지탑처럼 쌍탑이다.

 

은방울 군락지를 지나 15분 정도 오르막을 치면 해발 571m인 봉서산 정상이다. 원원사 서편 산줄기 중 가장 높은 봉우리다. 소나무와 굴참나무 등이 둘러선 정상에서의 조망은 그다지 볼품없다. 정상석도 없다. 다만 그동안 잘 보이지 않던 안내리본이 10여 개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산꾼들도 이 봉우리에 중요한 의미를 두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취재팀은 노란색 근교산 리본에 '봉서산 정상'이라 표시한 후 좌우 갈림길 중 오른쪽 길을 택한다. 왼쪽은 입실리 방면으로 하산하는 길이니 주의하자. 그런데 20여 m나 갔을까. 시야가 탁 트이며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은 토함산을 중심으로 왼쪽의 남산과 오른쪽 함월산 자락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정상에서 다소 기대에 못 미쳤던 조망에 실망했다면 이 전망대에서 고스란히 보상받을 수 있다.

오른쪽 내리막을 탔다가 다음 봉우리의 오른쪽 허리를 타고 우회하는데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 오르막을 택해 오른다. 50m쯤 가면 또 한 번 갈림길이 나오는데 직진할 경우 철탑삼거리를 생략한 채 길을 진행할 수 있지만 취재팀은 길 확인을 위해 다시 왼쪽 오르막을 탄다. 1분 뒤 철탑이 있는 능선삼거리. 능선 너머로 하산하는 길이 보이지만 우측 능선을 따라 살짝 내려선다. 2분 후 길이 합쳐지고 계속 능선을 따른다. 7분 뒤 안부를 지나면 계속 오르막이다. 10분 뒤 폐무덤 옆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인 진등대에 닿는다. '삼태봉 2.4㎞' 표시를 보면서 왼쪽 능선을 다시 10분 정도 밟으면 배전반과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 도착하는데 이곳이 바로 '토함산 갈림길'로 불리는 곳이다.

삼태봉 정상의 정상이 설치돼 있다.

 

왼쪽을 택하면 토함산까지 갈 수 있다. 삼태봉 방향은 직진이다. 꽤 넓은 임도. 중간에 양남면 용암마을로 하산하는 갈림길이 있지만 무시한다. 3분쯤 더 가면 '마우나오션'과 '삼태봉' 표시가 있는 이정표에서 임도를 이탈, 우측 산길로 접어든다. 300m쯤 가면 진달래군락지 표시가 있다. 4월에는 온통 진달래 천지겠다. 능선길을 계속 따르면 질매재에 닿는다. 이정표는 '삼태봉 1.1㎞'를 가리킨다. 산 허리를 감아 도는데 발아래 풍광이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3분 후 작은 갈림길. 왼쪽의 봉우리가 있어 20여 m 올랐는데 예상치도 않았던 '삼태봉 정상 나무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GPS와 지형도 등을 종합할 때 삼태봉 정상으로 보기엔 무리다. 다시 갈림길로 돌아나와 가던 길을 이어가는데 이정표가 잇따라 나타난다. 두 번째 이정표는 오른쪽 모화찜질방 방향을 가리키고 직진하는 삼태봉은 0.3㎞ 남았음을 알려준다. 4분 뒤 도착한 삼태봉 정상에서는 동해바다가 조금이나마 보이고 대리석으로 만든 정상석도 번듯하다. 지형도 상에 표시된 삼각점(630.5m)도 있다. 그러나 정상석은 높이 629m라고 표기돼 있다.

이제 하산이다. 300m 전에 거쳤던 이정표까지 돌아가서 모화찜질방 방향 내리막을 탄다. 초반에는 다소 가파른 것 같지만 이내 걷기 수월한 길로 바뀐다. 10분 뒤 돌탑무더기를 지나고 10분만 더 가면 계곡 갈림길이다. 직진하지 말고, 계곡을 건너 오른쪽 산길로 붙는다. 산죽밭이 무성하지만 길은 분명하다. 능선을 따르다가 오른쪽 작은 계곡을 한 차례 더 감아 돌며 우측 능선에 붙는다. 이곳부터는 능선만 놓치지 말고 15분만 가면 저수지 공사 중인 계곡 바닥에 도착한다. 오른쪽으로 3분만 더 가면 모화찜질방을 통과한다. 차도를 따라 10분쯤 걸어 내려오면 출발지에 도착한다.

 

◆ 떠나기 전에

- 김유신 장군 건립 원원사에는 쌍둥이 삼층석탑이 보물

봉서산과 삼태봉 사이에는 신라 문무왕 때 창건된 원원사(遠願寺)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통일신라 때부터 호국사찰로 자리매김했다. 삼국유사 등에 기록된 원원사 창건 이야기만 봐도 그렇다. 이 절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이 신라 신인종의 창시자인 명랑법사의 후예인 안혜 남융 등과 함께 창건했는데, 그 목적이 실은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을 지키는 숨겨진 병영 기지화였다고 한다. 계곡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서라벌의 관문이었던 관문성(일명 만리성)을 내려다볼 수 있고, 반대로 관문성에서는 이 절이 보이지 않으니 천혜의 전진기지였던 셈이다. 병사들이 일부러 머리를 깎고 승려로 변장해 이 절에 머물렀다고 한다. 절 이름도 '신라의 영원한 번영을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다. 또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는 경주 일대의 의병장과 승병장들이 이 절에 모여 작전회의를 하고, 동래를 거쳐 경주로 진격하던 왜군과의 일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현재의 천불보전 뒤 언덕은 옛 금당터인데 그 앞에 삼층석탑이 동서 쌍탑 형태로 버티고 서 있다. 보물 제1429호인 원원사지 삼층석탑은 기단부에 12지신을 양각하고 그 위에는 4천왕상을 새겼는데 그 기법과 솜씨가 빼어나기로 명성이 높다. 한편 모화리는 신라 때부터 서라벌의 관문 역할을 한 마을이다. 털 모(毛)자에 불 화(火)자를 쓰며, 도성 전체가 불국토나 마찬가지였던 서라벌에 들어가려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머리를 깎았고 그 머리털을 태운 곳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머리털 대신 소고기를 굽는 모화숯불단지가 유명하다.

◆ 교통편

- 경주버스터미널에서 모화행 600번 버스 15분 간격 운행

부산 금정구 노포동 부산종합버스터미널에서 경주행 시외버스를 탄다. 오전 5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10분 간격 운행, 요금 4000원.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모화행 600번 시내버스로 갈아타면 30분가량 걸린다. 운행 간격은 15분 안팎이다.

자가용을 이용할 경우는 국도 7호선을 타고 울산 시내와 울산공항, 북구 호계동을 거쳐 경주로 진입한다. 외동읍 모화리에서 계동교를 지나면 오른쪽에 모화숯불단지 원원사 표지판을 보고 우회전한다. 계곡 쪽으로 진입해 원원사로 향하다가 공사 중인 저수지 둑 왼쪽 곡각지 들머리에 주차할 수 있다. 400m쯤 더 올라가 등산안내판 앞 주차장을 이용해도 된다.

문의=국제신문 주말레저팀 (051)500-5169 이창우 산행대장 011-563-0254 (http://yahoe.tistory.com)

 

글=이승렬 기자 bungs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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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동 구봉산(구계산)아래에는 사명대사의 족적이 남아 있는 구계산 금수사란 사찰이 있다. 금수사란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은 사명대사와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의 금수사에서 보면 바로 아래가 바다로 전망과 경치가 매우 뛰어난 사찰이었을 것이다. 6.25가 끝난후 피난민 들이 사찰 아래에 까지 올라와 터전을 잡고 있었지만 그 이전에는 꽤 깊숙한 사찰이었을 것이다.
금수사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최근 3.1일절에도 민족 대표 3.3인을 모시고 그외 애국독립지사 김좌진 안중근 안창호 윤봉길등 22인의 위폐를 모시고 추모 법회를 모셨다. 임진왜란과 정류재란으로 일본으로 잡혀간 우리 백성을 구하기 위해 선조는 1604년에 사명대사를 일본으로 보내게 되는 데 사명대사는 일본에 가기전에 이곳에 와 머물렀다 한다. 구계산 아래의 물맛과 뛰어난 경치를 보고는 감탄을 하며 감로금정수라 격찬을 하였다 한다. 그 후 대사의 제자가 이곳에 머물며 금수암이란 작은 움막을 짓고 현재의 금수사란 명맥으로 발전 되어 왔다. 이곳에 머물다 일본으로 건너간 사명대사는 우리 백성3500명을 데리고 귀국을 하였고 6.25한국전쟁 때에는 전쟁을 피해 내려온 피난민을 모두 받아 경내에 머물게 하였고 피난민들의 수용소를 건립하기도 하여 대중들과 함께한 사찰이다..





현재는 원효대사의 법통을 잇는 원효종의 총본산이며  사명대사와의 깊은 인연으로 대중불교에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버스는 52번 86번 186번 38번 22번 금수사하차
연락처 051~467~3316


금수사 입구 계단으로 일명 108계단이다. 사진 작가들이 일몰을 찍기 위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금수사 뒷산이 구봉산이라 부르는 데 언제부터 구봉산이라 부르게 되었는 지는 모르지만 구계산금수암이란 표지석을 볼 수 있다.


공덕탑과 부도탑

금수사 일주문

일주문 안의 사천왕상

삼성각













법당의 본존불



금수사 입구에서 본 부산항. 멀리 용호동 신선대 부두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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