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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중구여행)경상감영공원. 대구 시민의 도심공원인 경상감영공원을 방문하였습니다.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를 합해 부르는 이름입니다. 그 연유를 보면 경상도를 관할하는 감영이 조선 초기에는 경주부에 있다가 너무 넓고 광범위하다보니 좌도와 우도로 분리를 하게 됩니다. 그 때 좌도는 경주의 부윤이 맡고 우도는 상주 목사가 맡아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업무의 효율도 떨어지고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서로 통합과 분할을 거듭하다가 경상감영은 선조 34년인 1601년 이덕형의 건의를 받아들어 통합되어 대구부로 옮겨오게 됩니다.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공원으로 조성된 선화당 일대가 그 당시 경상감영이 있던 곳입니다.



경상감영공원이 자리한 터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명나라에서 구원병으로 파병 온 이여송의 부관 두사충은 전쟁이 끝나고 회군을 할 때 명나라의 패망을 미리 알고 혼자남아 조선에 귀화를 합니다. 두사충은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로서 대구부로 내려와 정착을 합니다. 그가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오늘날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의 선화당 터로 하루에 천냥은 능히 나오는 명당 터임을 알고 집터를 정 합니다. 두사충이 살던 집은 선조31년인 1601년 그 당시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던 경상감영 부지로 결정이 나 두사충에게 부지를 내어 줄 것을 부탁합니다. 두사충은 두말하지 않고 포정동의 집을 내어주고 지금의 중구 ‘뽕나무거리’로 불리는 계산동으로 옮겨 두씨 일가의 뿌리가 됩니다.



조선의 행정구역인 8도제가 1896년 갑오개혁을 거치면서13도제로 바뀝니다. 경상감영은 조선시대 경상도를 관할하던 행정 관청으로 경북도청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1910년에는 경상북도 청사로 이용을 하다가 1965년 도청을 산격동으로 이전하면서 1970년 중앙공원으로 조성이 되며 다시 복원과정을 거쳐 1997년 옛 이름인 경상감영공원으로 바뀌었습니다.



대구 중구 근대골목 투어를 하면서 찾아간 경상감영공원은 더 넓은 부지위에 키 큰 나무와 경상감영과 함께 하였을 것 같은 고목이 주위를 감싸고 있어 도심 한가운데 조성된 최고의 도심공원이었습니다.


 


경상감영공원 안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두 곳의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선조 34년인 1601년에 세워진 경상감영의 중심건물 선화당과 징청각입니다. 안내석을 보면 관찰사가 공무를 보던 선화당 건물과 숙소로 사용된 징칭각은 1670년, 1730년, 1806년 등의 세 차례 화재로 소실됩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인 선화당과 징칭각은 순조 7년인 1807년에 각각 지어진 건물로 1970년 중수되어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와 2호로 지정되어 대구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입니다.



경상감영공원 내에는 관찰사와 대구를 거쳐 간 관리의 선정를 기리는 29기의 선정비 또한 볼거리입니다. 경상감영공원과 대구근대역사관을 함께 둘러보면 대구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참고:워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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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사는 신라 선덕여왕 20년인 537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그 후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며 다만 조선 철종 함풍 7년 무오(1858)에 이우인이 중수하였다하며 고종 융희 2년 무시(1908)에 원인 모르는 불이나 대웅전을 전소시키는 화재가 일어나 유금사는 쇄락의 길을 걷다가 주지 김화한 스님이 다시 중수하여 사세를 키워왔다. 그뒤 이현호 스님이 다시 중수하면서 현재의 사세를 갖추었다. 유금사는 관내에서는 아주 오래된 사찰로 많은 문화재급 유물이 있었으나 잦은 화재와 도난으로 유실 또는 도난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현재는 대웅전 좌측으로 향로전과 우측으로는 서운루와 요사체를, 대웅전 우측으로 산왕각을 두고 있다. 대웅전 뒤에는 원래 대웅전 앞에 있던 삼층석탑이 자리를 하고 있다.





칠보산 유금사는 일곱보물을 간직한 산으로 두가지 이야기가 전한다한다.

첫 번째가 선덕여왕시절 일곱 공주가 이곳 유금사에 와서 보살이 되어 살다가 모두 선화한 선녀가 되었다는 이야기와 중국의 두사충이 이곳을 지나다가 물맛을 보고는 이산에 일곱가지의 보물이 있다하여 칠보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원래는 바닷가의 영향으로 항상 칠보산이 구름을 이고 있어 등운산으로 불였는데 칠보산으로 부르게 되었고 지형도를 보면 등운산은 그 아래 767m로 따로 독립되어 있슴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 이전까지는 대웅전과 종각, 장화부인 신령각 등을 갖추고 제법 큰 규모를 자랑했던 사찰로. 그러던 어느날 주지스님이 불국사에서 법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절 앞 용소에서 두 마리 용이 교미하는 것을 보고 고약하게 여겼는데 스님이 절에 도착하기도 전에 폭우가 쏟아져 산사태로 절이 무너졌다고 한다. 그 뒤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그리고 유금사는 장화부인을 모신 신령각을 두고 있었는데 애뜻한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신라 말엽에 마의태자에게 연정을 품은 장화부인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 유금사 금선암에 찾아와서는 마의태자가 왕에 오르기를 축원하고 기도하였다. 신라가 망하자 마의태자는 경주를 떠나 금강산으로 가게 되면서, 마의태자가 종적을 감춘것을 보고 아마 마의태자가 죽었다는 전갈은 받은 장화부인은 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다 그 자리에서 죽어 마을 사람들이 크게 장사를 지내주고 유금사에 장화부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신령각을 지었지만 현재는 유실되어 폐허가 되었다 한다. 유금사 동남쪽 약 500m 지점에 석축으로 조성된 거대한 고분이 남아 있는데 신라 경순왕의 후비 장화부인능이라고 마을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삼국시대때 부터 손으로 금을 주울 정도로 많이 생산되어 유금마을이라부르며 유금사는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불국사 말사이다
찾아가는 길은 경부고속도로 건천IC~경주 영천 20번 좌회전~포항 영천 경주 좌회전~포항 20번~건천터널~경주 포항~경주터널~포항~말구불터널~포항천북20번~포항경주7번(북경주)~포항7번~울진포항7번~울진영덕7번28번~울진영덕28번~울진영덕7번~흥해읍~울진영덕28번(성곡ic)~울진영덕7번~영덕군~강구~울진평해7번~칠보산8km자연휴양림. 유금사6km좌회전~금곡리유금사2km~유금마을순

<자료 : 칠보산유금사 주지 玄煜 스님> 글을 정리함

 


칠보산 유금사의 일주문



대웅전 좌측으로 있는 향로전으로 하필 역광이네요.

향로전 안에 모서져 있는 불상입니다.


대웅전 안의 삼존불입니다











유금사에 들런 그날 겨울 준비가 한창인 김장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유금사 삼층석탑
보물제674호
소재지: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금곡리 815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양식으로 2중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얹었고 높이는 3.2m이다.

모연문. 유금사 삼층석탑에거 나온 금동불상인 피리부는 동자 악천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가는 바람에 화강암으로 조성을 하여 모신다고 한다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으나 법당이 무너지면서 뒷뜰로 옮겼는데 그때 탑안에서 금동보살을 찾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현재 보관을 하고 있다 한다.

현재 탑은 지대석과 아래층 중앙부가 약간 꺼져있고 상층기단 면적이 일부는 시멘트로 보안을 하였다.


상륜부는 없어 졌지만 현재 보관 상태가 아주 양호하다.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1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각층 몸돌마다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은 수평으로 받침수는 각층4단으로 되어 있다.

지대석과 아래층 중앙주가 꺼진곳을 볼 수 있다.


기단부는 여러개의 장대석으로 지대석을 놓고 그위에 하대석과 중석을 하나의 돌로 놓아 얹었으며 중석 각면 모서리 기둥과 안기둥1주가 새겨져 있다.


전체적으로 기단부의 크기와 각층의 체감 비율이 안정감을 주는 우수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자세한 정보는 문화제청 홈페이지입니다.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VdkVgwKey=12,067400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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