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가야산 해인사.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고려대장경 판전 불법종찰인 가야산 해인사를 여행하다. 합천 가야산 해인사. 



합천의 명산인 가야산은 해인사를 품고 있습니다. 가야산이 해인사고 해인사가 가야산으로 통할 정도로 서로 떼고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불교 성지로서 가장 신령스런 산중 한곳입니다. 가야산의 산 이름에서도 불교색채가 아주 강한데 '가야(Gaye)'의 뜻은 ‘최상의’라는 뜻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드신 ‘붓다 가야’에서 가야산을 따왔다고 하며 또한, 옛날 가야국이 있던 산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만큼 가야산은 성스러운 장소로 알려졌으며 이런 곳에 해인사가 창건한 것은 어쩜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2016/08/24 - (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 유정이 입적했던 암자 가야산 해인사 홍제암을 여행하다. 홍제암

2016/08/23 - (합천여행)가야산 홍제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왜!! 사명대사 석장비는 쪼개졌을까요?, 부도에는 왜! 대사의 명문을 새기기 않았을까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2016/08/20 - (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가야산 홍류동천 농산정. 고운 최치원이 갓과 짚신을 걸어놓고 신선이되었다는 명경산수의 해인사 소리길 농산정을 여행하다. 농산정





해인사가 가야산에 창건하기 훨씬 이전에 중국 남북조시대의 지공(418~514)스님이 예언하기를 “해동의 가야산에 대가람이 세워져 불법이 번창하리라”고 하셨다는데 약 300년쯤 후인 802년 신라 애장왕 3년에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해인사를 창건하여 오늘날까지 부처님의 법등은 꺼지지 않고 이어져왔습니다.





해인사의 이름을 보면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나왔다 합니다. 해인삼매란? 석가모니가 ‘화엄경’을 말할 때 들어간 선정의 이름으로 “바다에 풍랑이 그치면 모든 형상이 온전히 비치듯이 법계의 실상을 본래 모습 그대로 자각할 수 있는 상태” 즉 ‘마음의 고요함’을 뜻합니다. 사부대중인 필자는 해인사 이름에서 벌써 복잡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내 마음이 평정심을 되찾은 듯 평안함을 느꼈습니다.





해인사는 창건과 함께 화엄종의 근본 도량으로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선원, 강원, 율원을 포함한 최초의 총림으로 지정했으며 국보인 고려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한 법보종찰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95년에 유네스코에서 고려팔만대장경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여 장경판전을 세계문화 유산에 이름을 올렸으며, 2007년에는 고려팔만대장경경판과 해인사의 모든 경판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였습니다. 이런 문화재의 보고인 해인사를 늦었지만 여행하고 왔습니다.





먼저 부도전을 지나면 독특한 유래를 가진 ‘길상탑’이 있습니다. 길상탑의 유래는 신라 진성여왕 9년인 895년을 전후하여 7년간 궁예와 견훤의 싸움에 흉년으로 굶주린 장병을 위해 해인사 훈혁스님이 탁발하여 군량미를 조달하고 그 나머지로 길상탑을 세워 문수사리보살의 가피를 빌고자 무명으로 전쟁터에 나가 죽은 승병 56위의 넋을 기린 위렵탑입니다.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른 삼층석탑으로 높이는 약 3m이며 1965년 탑 속에서 최치원이 지은 ‘운양대묘길상탑지’와 157개의 소탑 등 유물이 나와 당시 사회 상황과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탑의 건립 내력을 소상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그리고 특이하게도 길상탑앞 도로에는 지금은 없지만 해방 이후까지 홍살문이 존재했으며 당간 석을 지나면 일주문이 나옵니다. 해인사 일주문은 1940년대 주지였던 변설호스님 때 대목장 이화백에 의해 중건하였습니다. 정면 현판의 ‘가야산 해인사’ 글씨는 해강 김규진이 섰으며 판각은 임환경 스님이 새겼고 뒷면의 ‘해동제일도량’ 현판은 박해근이 걸었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도 해인사를 찬미하였는데 “해인사의 사기는 가야산의 전국적 중심지로 그 자세가 당당하고 그 환경이 수려 명미 하여 아려한 위인이 칼을 잡고 설교하는 것 같다. 완연히 움직이는 활화일폭이다. 해인사는 명구라고 하느니보다 승지이며 승지라고 하느니보다 성경이다. 나는 국내외 사찰들을 많이 보았으니 해인사에 필적할만한 사기를 보지 못하였다. 거룩하다는 한 말 이외에 무슨 형용사를 붙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합천의 숨결 해인사의 향기/내암사상연구회)


 

 


 

 

 

 

 

 

 

 소원나무

 

 

 

 

 

 

 

 

 

 

 

 


해인사의 중심건물인 대적광전을 가기 위해서는 마당을 가로질러 갑니다. 그전에 먼저 석등을 만납니다. 석등은 부처님의 광명을 상징하며 사찰 경내를 어둠에서 밝히는 진리의 빛입니다. 해인사의 석등은 섬세하고 우아한 조각수법을 보면서 그 뒤쪽의 삼층석탑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여덟 잎 연꽃무늬가 엎어진 복련과 팔각의 화사석 아래에 연꽃무늬가 위로 향한 모양의 앙련 사이에 세운 팔각석간이 짧은 것은 1926년 석탑을 개축하면서 함께 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석등 북쪽에는 정중삼층석탑이 있습니다. 탑은 부처님의 사리 등을 봉안하는 곳입니다만 정중삼층석탑은 불상을 봉안한 탑으로 9세기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마 해인사가 창건하면서 함께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며 대적광전 앞마당 한 쪽에 석등과 함께 약간 비켜 서 있습니다.


 

 

 

 


비로탑은 높이 6m 삼층석탑으로 기단은 원래 통일신라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2층 기단이었지만 1926년 중수하면서 3층 기단으로 탑을 높이고 확장하였습니다. 석등과 석탑 사이에 바닥 돌이 놓여있는데 정례석으로 이는 멀리 부처님을 향해 이마를 땅에 대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는 곳입니다.


 

 

 



비로탑과 석등이 있는 마당 좌우에는 궁현당과 관음전이 있으며 궁현당 뒤에는 적묵당, 진영전, 정수당 등 전각 대부분이 해인사 승가대학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사용합니다. 이제 대적광전이 있는 높은 축대를 오릅니다. 가운데 대적광전이 있으며 왼쪽으로 대비로전과 독성각, 오른쪽은 명부전과 응진전 등 예불공간입니다.


 

 


이제 해인사의 중심법당이자 큰 법당인 대적광전을 보겠습니다. 법당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셨습니다. 원래는 해인사를 창건하면서 비로전이 중심법당이었고 비로자나불을 모셨는데 6번이나 화재로 중창하면서 1488년에 대적광전으로 편액을 바꾸어 달았습니다. 지금의 대적광전은 단층이지만 겸재 정선(1676~1759)이 남긴 해인사 그림에 2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1817년 화재로 중창되기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큰 전각으로 추정됩니다.


 

 


대적광전의 의미는 비로자나불이 항상 계시면서 시공을 통하여 화엄경을 늘 두루 설하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대적광전의 수미단에는 모두 일곱분의 불보살을 봉안한 아주 특이한 사례입니다.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을 가운데 모시고 그 왼쪽으로 지장보살, 보현보살, 법기보살을, 오른쪽에는 이전의 본존불이었던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관세음보살입니다. 이중 관세음보살과 법기보살은 쇠로 불상을 만들었으며 그 외 불상은 모두 목조로 만들었습니다.


 

 

 

 


대적광전 수미단에 모셔진 본존 비로자나 부처님은 고려 시대 불상으로 은행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불상의 높이는 233.3cm이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과 함께 처음에는 경북 성주군의 금당사에 봉안된 부처님이었는데 절이 폐사하면서 가야산의 용기사로 옮겨갔고 용기사 마저 폐사하면서 1897년 법운스님이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해인사 대적광전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현재 해인사 대적광전은 팔작지붕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웅장하며 큰 규모입니다. 네 면의 대적광전에는 모두 각각의 현판을 달고 있는데 이는 앞면의 대적광전 현판 글쓴이는 현재 알 수 없으며 뒷면 대방광전, 동쪽 면의 금강계단, 서쪽 면의 법보전은 해강 김규진(1868~1933) 선생의 글씨입니다.


 

 


현재의 대적광전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17년 (순조17년) 제월당 스님과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로 경상도 관찰사였던 김노경에 의해 중수되었으며 상량문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이 직접 썼다 합니다 해인사의 주련은 당시 명필가로 이름을 떨쳤던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니 해인사의 대적광전은 당대 명필들의 글씨로 더욱 유명합니다.


 

 


해인사 대적광전의 흥선 대원군이 썼다는 주련을 옮겨보겠습니다.

“불신보방대광명(佛身普放大光明) 부처님이 큰 광명을 두루 놓으시니

색상무변극청정(色相無邊極淸淨) 색과 모양이 가없이 청정하네

여운충만일체토(如雲充滿一切土) 구름이 온 국토에 충만하듯이

처처칭양불공덕(處處稱揚佛功德) 곳곳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네

광명소조함환희(光明所照咸歡喜) 광명이 비치는 곳마다 넘치는 환희여

중생유고실제멸(衆生有苦悉除滅) 중생들의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네“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



2016/08/25 - (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해인사 고려팔만대장경, 대장경전, 고려각판. 부처님의 원력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려했던 고려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여행하다.



 

 

 


가야산이 있는 해인사의 지세는 거대한 방주형으로 가야산이 선체라면 해인사는 선실이고 중봉의 마애석불이 키를 잡는 선장이며 장경각 가운데에 큰 바위가 돛대바위였다 합니다. 그러나 1926년 대적광전 석축 보수를 하면서 이곳 바위를 깨어 사용하였습니다. 배의 돛대를 없애버렸는데 60년만인 1986년에 돛대바위 자리에 돛대를 대신하여 수미정상사리탑을 세워 이제 해인사는 앞으로 순풍에 돛단 듯이 순항할 일만 남았습니다.


 

 

 

 


여기는 학사대입니다. 신라말의 대문장가인 고운 최치원(857~?)이 만년에 가야산에 은거하여 시와 글씨를 쓰면서 보냈던 곳입니다. 그는 특히 가야금에도 능했는데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면 전나무에 수많은 학이 날아와 가야금 소리를 들었다고 전합니다. 학사대의 전나무는 최치원이 집고 다니던 지팡이를 거꾸로 꽂았는데 그게 살아남아 지금도 가지가 아래로 처져 거꾸로 자라는 듯 보인다고 합니다.


 

 

 



비로전은 비로자나불을 보신 법당입니다.  법당에는 중화 3년인 883년에 조성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동형쌍불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끝으로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해인사를 찬미한 한시를 해석해 놓은 글을 옮겨 보겠습니다.

“옛 가야에 묻혀 있는 울창한 가람

천리 구름이 떠 있는 산을 대하며 참선을 한다

새가 내려 않은 정원에서 스님은 선정에 들고

담비가 나무를 타고 개염의 달콤함을 맛본다

글 바위 바둑 누각 어느 뉘 살고 있나?

잣나무 오동나무 소곤소곤 이야기 주고 받는다

객은 떠날 날 꼽으며 잠 못 이루고

깊은 밤 달빛은 소나무 탑 사이를 비춘다“


(참고:합천의 숨결 해인사의 향기/내암사상연구회 발행)

 



성철스님의 사리탑


2016/05/12 - (경남여행/산청여행)산청군 단성면 겁외사,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산은 산이요 물은물이로다" 성철스님 생가 율은고거와 겁외사 여행. 산청 겁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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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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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녁노을* 2016.08.31 06:01 신고

    해인사 다녀오셨군요.
    잘 ㅏ보고갑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공감버튼이 안 보이네요^^

  2. 핑구야 날자 2016.08.31 07:36 신고

    요즘 같이 서선한 날에는 괜찮은 여행지네요



 


☞(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해인사 고려팔만대장경, 대장경전, 고려각판. 부처님의 원력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려했던 고려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여행하다. 



합천에 가야산이 있다면 가야산에는 법보사찰 해인사가 있습니다. 그 해인사를 대표하는 게 법보사찰의 상징인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입니다. 그 큰 해인사 경내를 둘러보면서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관광을 했습니다. 그러나 해인사의 중심건물인 대광보전 뒤쪽 팔만대장경 현판이 걸린 전각 밑 계단에 올라서면 벌써 샤~ 하고 느끼는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대장경의 엄숙한 분위기도 있지만, 그보다는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대장경의 보안 시스템 때문이었습니다. 곳곳에 CCTV가 설치되었고 많은 경비원이 물샐틈없는 관리를 하고 있는게 역시 팔만대장경은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보배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팔만대장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려 때 부처님의 원력으로 오랑캐의 침입을 막아보고자 국가적인 사업으로 두 차례 간행되었습니다.


 

 

 

 


먼저 1011년 간행된 대장경판은 구판대장경이라 합니다. 거란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부처님의 원력으로 1087년까지 77년간 작업을 하여 완성하였습니다. 구판대장경은 대구 팔공산의 부인사에 보관하던 중 1232년(고종 19년) 몽골군이 침입하여 그만 불타고 말았습니다. 그 뒤 1236년 재차 대장경판 간행 작업을 추진하여 16년만인 1251년 완성하였습니다. 그때의 대장경판이 지금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중인 고려대장경이며 팔만대장경으로도 부르고 있습니다.


 

 

 

 

 

 


왜 팔만대장경이라 할까요? 경전이 새겨진 장경판 수가 팔만 장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불교에서는 아주 많은 숫자를 가르칠 때 팔만 사천이라 쓰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만사천법문이라 하는 데서 기인한다 합니다.


 

 

 

 


팔만대장경은 정확하게 81,350판이며 목판에 양각으로 새겼습니다. 이는 한역 경전에서 가장 오래된 원판 본으로 수정할 곳이 없이 완벽하다고 합니다. 총 1,514 경전에 52,382,960 글자, 6,791책으로 되어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경판으로 해인사를 모두 법보종찰이라 알고 있습니다.


 

 

 

 


대장경판에 사용된 나무는 산벚나무 등이며. 해충의 피해를 막고 조각을 쉽게 하기 위해 펄 밭에 담그거나 바닷물에 오랫동안 통째 쪘다 합니다. 대장경을 만들던 곳이 경남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로 추정하는데 이곳은 조석간만의 차가 커서 밀물 때는 나무 운반이 쉽고 뻘밭과 소금물, 조각에 사용하는 칼과 쇠붙이를 만드는 대장간, 인쇄에 필요한 한지를 만드는 한지마을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대패로 곱게 다듬은 판자에 경문을 새겼는데 먼저 붓으로 한지에다 경문을 쓰고 경판에 다시 글을 쓴 한지를 풀칠하여 조각칼로 하나하나 깎아내었다니 그 작업의 정밀도가 말할 수 없이 힘들었을 듯합니다. 얼마나 가슴이 조마조마했을까요? 아차 하는 한 번의 실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을 정도이며 한글자 한글자 새길 때마다 절을 한번 했을 정도로 온 힘을 다하여 작업을 했던 것 같습니다.


 

 

 

 


구양순체로 붙여진 글자는 꼴이 한결같으며 아름다워 꼭 한 사람이 쓴 듯 일정하다 합니다. 이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손재주가 정말 뛰어난가 봅니다. 손으로 하는 기술이나 양궁, 골프 등 운동은 세계 최고인 게 이를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글자가 새겨진 경판 면과 경판 양 끝에 각목으로 덧댄 마구로로 만들어졌는데 경판의 총 길이는 약 70cm, 폭은 약 24cm, 두께는 약 2.8cm이며 무게는 대략 3.25kg입니다. 글자는 경판 양면에 돋을새김하였으며 한 면에다 글자를 새긴 새로 줄 수는 23행이며 행마다 14자 정도의 글자를 새겼습니다.


 

 

 

 


그런데 이리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팔만대장경판은 보관이 가장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재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은 대적광전 뒤 가파른 계단 위에 네 동의 건물로 이루어졌습니다. 팔만대장경 현판이 걸린 출입문을 지나면 먼저 한일(一)자로 길게 이어진 건물은 수다라장이고 그 뒤 같은 길이의 건물은 법보전입니다.


 

 

 

 


고려팔만대장경은 이 두 건물 안에 봉안되었으며 두 건물 사이의 동서 양쪽 끝에 있는 작은 건물은 고려 각판을 안치한 사간판전입니다.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한 장경판전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장식을 갖추지 않은 그저 평범한 건물에 불과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건물에 장경판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놀라운 과학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하나 보면 장경판전이 자리한 위치부터 건물의 배치와 좌향 그리고 건물의 구조와 창호 처리 및 판가의 구조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따졌으며, 경판 배열은 원활한 통풍과 적당한 일조량 등 목판을 보존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도록 힘썼습니다. 목판 보관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항온, 항습의 상태 유지를 위해서 판전 외벽의 앞뒷면에 크기가 다른 살창이 칸마다 아래위로 나 있어서 건물 뒤쪽에서 들어오는 습기는 억제하고 판전으로 들어온 바람은 건물 안에서 골고루 퍼진 다음 바깥으로 나가도록 설계되어 오늘날까지도 팔만대장경판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 사진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의 가림막에서 찍은 사진 6장 중 한장입니다.   

 

여기 사진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의 가림막에서 찍은 사진 6장 장 한장입니다.   


요즘 전자동 전자동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이곳 장경판전이 모든 기후 환경에 가장 잘 조절되는 전자동 시스템으로 설계된 것 같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선조의 혼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조각을 했던 것을 하늘도 알았는지 해인사에 7차례나 불이 났어도 장경판전은 화마로부터 안전했다 합니다.


대장경판 국보 제32호, 대장경전 국보 제52호, 고려각판 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


 


팔만대장경판은 현재 아무나 관람할수 없습니다. 여기 사진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의 가림막에서 찍은 사진 6장 중 한장입니다.  

 

여기 사진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의 가림막에서 찍은 사진 6장 중 한장입니다.   

 

여기 사진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의 가림막에서 찍은 사진 6장 중 한장입니다.   

 

 

 

 여기 사진은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의 가림막에서 찍은 사진 6장 중 한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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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1 | 해인사 장경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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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핑구야 날자 2016.08.25 08:15 신고

    팔만대장경은 정말 소중한 문화유산이라 앞으로도 잘 지켜가야 할 것 같아요

  2. 공수래공수거 2016.08.25 09:09 신고

    가본지 얼마 되지 아노은곳이라 기억이 새록 새록합니다

  3. *저녁노을* 2016.08.26 05:09 신고

    잘 보고갑니다.
    합천 근무하면서도 잘 안가게 되네요.

    편안한 하루 되세요

  4. 영도나그네 2016.08.26 17:09 신고

    합천하면 해인사가 생각나고 해인사 하면 팔만대장경이
    생각날 정도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보관된 곳이라
    언제나 고즈녁한 정겨움이 묻어 있는곳 같더군요..
    잘보고 갑니다..
    오늘도 좋은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 유정이 입적했던 암자 가야산 해인사 홍제암을 여행하다.


합천 가야산의 해인사 여러 부속 암자 중에서 임진왜란 때 승병을 모집하여 선봉장이 되었고 백척간두의 나라를 구하시는데 힘썼던 사명대사에게 1608년 전란이 끝나자 선조 대왕의 하사로 지었으며 대사는 말년에 이곳에서 은거하며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 암자를 이름하여 홍제암이라 합니다.







☞2016/08/23 - (합천여행)가야산 홍제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왜!! 사명대사 석장비는 쪼개졌을까요?, 부도에는 왜! 대사의 명문을 새기기 않았을까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2016/08/20 - (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가야산 홍류동천 농산정. 고운 최치원이 갓과 짚신을 걸어놓고 신선이되었다는 명경산수의 해인사 소리길 농산정을 여행하다. 농산정




 


홍제암은 67세에 스님이 입적하실 때까지 머물렀으며 광해군 2년에 스님이 입적하자 광해군은 ‘자통홍제존자’의 익호를 내리고 대사를 기리는 석장비와 부도를 세웠으며 암자는 익호를 따라 홍제암이라 하였습니다.


 

 


1614년인 광해군 6년에 혜구 스님이 영자전을 짓고 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규대사의 영정을 봉안하였습니다. 1674년에 현종에 의해 홍제당(암)을 사액하였습니다. 홍제암은 여섯 차례 보수하였지만, 건물이 너무 퇴락하여 박종성 스님의 원력으로 중수코자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예산문제로 1977년과 1978년 연차 중수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러나 1977년 5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곳에 참배하고자 들리게 되었습니다. 홍제암의 전후 중수과정을 들으시고는 임란공신 사명대사의 구국 얼이 깃던 곳이니 특별 예산 조치를 편성하여 한꺼번에 보수 할 것을 지시하여 1979년 10월에 홍제암은 현재의 모습으로 완전하게 해체 복원하였습니다.


 


 

 

 


홍제암은 처음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6호로 지정되었으나 문화재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0년 9월에 보물 제1300호에 승격되었습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홍제암의 편액이 걸린 100여 평의 인법당 건물과 영자각 요사채 등이 있으며 인법당에는 지장보살과 후불탱화를 봉안하였고 영자각에는 16명의 고승 영정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서산대사 사명대사 영규대사

 

 사명당영정

 

 


 

 

 

홍제암 왼쪽에는 부도전이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홍제암은 사명대사께서 입적하신 곳입니다. 이곳에 사명대사의 행장을 기록한 석장비와 대사의 부도가 있습니다. 석장비는 스님이 입적 후 2년 후인 1612년에 세워졌는데 최초의 한글 소설을 쓴 교산 허균이 글을 지었습니다.



 

 

 


워낙 천재성을 뛰었다는 허균의 글이다 보니 사명대사의 기록으로서는 가장 오래되었으며 문장이 수려하여 빼어나 당 대 최고의 기록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석장비는 현재 네 동강이 났는데 이는 1943년 일본인이었던 합천경찰서장이 법보학원 학생들의 노트에 기록된 “통쾌하고 능란한 대답”이 조선의 민족혼을 깨운다는 핑계를 대며 석수를 대동하여 사 등분으로 깨트렸습니다.


 

 

 

 


 

 


사명대사의 통쾌하고 능란한 대답의 발단을 보면 사명대사와 가토 기요마사와 담판하였는데 가토 기요마사가 사명대사에게 “조선의 보배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명대사가 말하기를 “조선에는 보배가 없고 일본에 있으며 그것은 바로 당신의 머리이다”며 통쾌하게 한 방 먹입니다.


 

 

 

 


이러한 기록이 비문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 사명대사 석장비는 깨어지는 수난을 당했습니다. 광복과 함께 사명대사의 석장비는 수습되어 명월당에 보관해오다. 1958년 쇠파이프로 속을 연결하고 석회로 파괴된 부분을 때워서 현재 선명하게 열십자 모양으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사명대사의 부도는 사명대사 석장비에서 산기슭으로 50m쯤 고샅길을 올라가면 숲 속에 독야청청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사명대사의 입적과 함께 1610년 그해 만들어진 부도는 고려 시대의 전통을 계승한 석종형 부도이며 부도의 주인인 사명대사의 명문도 새기지 않은 상태입니다. 혹시나 모를 왜군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이며 꼭꼭 숨겨두다시피 400년을 이어왔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치욕적인 역사에 사명대사의 행장이 기록된 석장비는 수난을 당했지만, 사명대사의 승탑인 부도는 훼손된 기록이 확인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부도는 3단의 연화 대좌 위에 종모양의 몸돌을 올리고 맨 꼭대기에 연꽃봉우리 모양의 보주를 올렸습니다. 해인사 홍제암에서 나라사랑 사명대사님의 얼을 만나보세요. 홍제암 보물 제1300호


 

 

 


합천서장의 만행으로 열십자로 쪼개어진  사명대사 석장비


 

 

 

 

왜군의 만행을 막기 위해 대사의 명문도 새기지 않은 사명대사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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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수래공수거 2016.08.24 09:03 신고

    홍제암 기억하겠습니다
    직지사에서 승려가 되시고 이곳에서 입적하셨군요



 


☞(합천여행)가야산 홍제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왜!! 사명대사 석장비는 쪼개졌을까요?, 부도에는 왜! 대사의 명문을 새기기 않았을까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임진왜란 때 승군으로 참여한 분을 꼽으라면 전쟁에 참여한 이름 모를 스님들도 많습니다만 모두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 서산대사를 떠올릴 것입니다. 이 두 큰스님은 너무나 유명하고 모두 다 알고 있어 새삼 거론하는 게 쑥스럽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서산대사는 임란 때 묘향산에서 입적하신 것을 알지만, 사명대사께서 입적한 곳이 항상 궁금했는데 부산과 그리 멀지 않은 합천 해인사 홍제암임을 알고 이번 해인사 여행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사명대사 석장비




 


사명대사는 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서 출생하셨는데 현재 그의 출생지에 생가 복원과 기념관이 조성되어 많은 관광객이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며 찾고 있습니다. 필자도 대사의 출생지인 고라리는 여러 번 방문했지만, 대사의 입적지는 처음이라 과연 어떤 모습일까 많이 궁금했습니다.


 

 


해인사와 가까운 곳에 홍제암이 있습니다. 단아한 사찰의 규모에 비해 부도전의 규모가 대단한 모습을 하여 홍제암의 사격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곳 홍제암의 부도전에는 ‘사명대사의 부도와 석장비’가 현재 남아 있습니다. 막상 여러 기의 부도와 석장비가 있어 어느 탑이 사명대사의 부도와 석장비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석장비는 비신이 열십자로 깨어져 있다는 안내판과 석장비 앞을 가린 가림막을 보고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스님의 부도는 금방 찾을 수 없었습니다. 보통 부도와 석장비가 함께 세워져 있는데 사명대사의 부도와 석장비는 따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부도는 석장비에서 뒤쪽 50m 거리인 산 능선에 홀로 안치되어 있습니다.


 

 


부도를 알리는 안내판도 따로 있는 게 아니고 하여 보통석장비를 보고 부도를 찾다가 그냥 내려갈 것 같았습니다. 우리도 엉뚱한 부도를 보고 사명대사 부도 인가하며 머리를 꺄웃거렸습니다. 아무래도 미심쩍어 홍제암의 보살에게 문의했더니 친절하게 알려주어 쉽게 찾았습니다. 먼저 사명대사 석장비를 보겠습니다.


 

 


석장비는 스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문으로 그 높이가 3.15m의 규모입니다. 사명대사의석장비는 지금까지 두 번의 수난을 겪었습니다. 사명대사 석장비의 비문은 홍길동전을 썼던 교산 허균이 직접 지었습니다. 그 후에 허균은 역적 모반을 꾀했다는 죄명으로 광해군에 의해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참수와 함께 허균의 모든 행적은 지워졌으며 사명대사의석장비 또한 허균이란 이름은 사라졌습니다.


 

 

 

 


현재 석장비는 열십자로 쪼개어졌던 것을 붙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인 1943년 일본인 합천경찰서장 죽포가 법보학원 학생들의 노트에 기록한 사명대사와 가토 기요마사가 나눈 대화 조선의 보물은 당신의 머리라는 “통쾌하고 능란한 대답”의 비문 내용이 조선의 민족혼을 일깨운다 하여 형사와 석수를 동원하여 깨부수려고 했습니다.


 

 


대사의 비신을 땅바닥에 눕혀 사 등분으로 쪼개려하자 하늘도 노했는지 뇌성벽력과 폭우에 놀란 석수는 작업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3일 후에 끝끝내 석장비를 결딴냈고 네조각중 한조각을 당시 합천 해인사 경내 주재소 출입문의 계단 돌로 사용하여 출입객이 밟고 들어오게 했습니다. 이에 죽포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통영서장으로 옮겨갔고 다시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충렬사의 현판과 영정을 훼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치 않았는지 10여 일 뒤에 그는 피를 토하고 급사했다 합니다.


 

 


사명대사의석장비를 쪼갠 사람도 있지만, 사명대사의석장비를 보고 그의 행적을 찬탄한 시를 남긴 일본인도 있습니다. ‘아부충가의 송운탑’ 시로 그는 1929년 불교 제64호, 43쪽에 ‘법지종자 해인사 배관기’를 실었습니다. 그는 새로 부임한 총독 일행을 수행하여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판과 사명대사 부도를 보고 감탄하며 “해인사의 장경판은 참으로 세계적인 지보라 하겠다. 또 송운대사(사명대사)의 부도를 참관할 때에 참으로 감개무량함을 이기지 못하였다"며 칠언절구 한시를 남겼습니다.


 

 


‘합천의 숨결 해인사의 향기’(내암사상연구회)에 수록된 그 시를 옮겨보면

“공산일편석부도(空山一片石浮圖) 빈산 한쪽에 돌로 만든 부도

심장사리부산우(深藏舍利負山隅) 산기슭에 사리 고이 묻고 서 있네

당년장사하안색(當年將士何顔色) 그때의 장군, 어떤 풍모를 하고 있었을까?

일임치의날호수(一任緇衣虎鬚) 의연하게 승복 걸쳐 입고 호랑이 수염 쓸고 있거늘“


 

 


쪼개진 석장비는 1958년 네 조각을 붙여 복원하였으며 그 흉한 모습이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때마침 필자가 찾았을 때 다시 석장비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현수막이 앞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새롭게 복원된 석장비의 모습을 기대해봅니다.


 

 


허균이 직접 썼다는 사명대사의석장비 내용을 한글로 요약하여 세운 비문을 옮겨 보았습니다.

'자통홍제존자사명당 석장비'


“대사의 이름은 유정 자는 이환 호는 사명 또는 송운이라 히였고 풍천임씨다. 1544년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유학을 공부하였고 13세에 직지사에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1561년에 선과에 합격하였고 특히 시를 잘 지어서 당시의 문인대가들과 시를 교환하여 명성이 크게 떨쳤다. 1575년 선종의 주지에 추대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서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서산은 그에게 마음을 닦는 공부를 제시해주었다. 대사는 크게 깨닫고 지금까지 흥미를 붙여온 문학과 학문에 대한 모든 상념을 버리고 마음공부를 체험하기 위한 고행의 수련을 3년 동안 계속한 뒤에 다시 국내 여러 명산을 두루 다니며 수행을 계속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대사는 유점사에 있었는데 고성에 침입한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을 설득하여 인민을 살상치 못하게 하였다. 선조가 의주에 피난했음을 듣고 수백 명의 승군을 모집하여 순안으로 달려갔다. 이때 서산대사가 전국의 승군을 총지휘하고 있었는데 나이가 늙었으므로 이 책임을 대사가 대신 맡도록 나라에 추천하여 대사는 이 승군을 거느리고 명나라 장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는데 참가하였고 다시 도원수 권율의 부하에 들어가서 경상도 의령에 주둔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나라에서는 대사에게 당상관의 계급을 내렸다. 1594년 봄에 명나라 장군의 지시를 받고 부산에 있는 일본군 진영에 들어가 적장 청정과 세 번이나 회담하여 그의 사명을 완수하였다. 이때 청정이 조선에 보물이 있느냐고 물으니 대사는 서슴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는 보물이 없고 당신의 머리가 곧 우리의 보물이다라고 한 것은 유명한 애기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사는 군무에서 떠나지 않고 어떤 때는 팔공산과 금오산에 성을 쌓았고 또 명나라 장군 유정, 마귀 등을 따라 전공을 세우기도 하고 군량 조달에 힘쓰기도 하였다. 나라에서는 대사에게 동지중추부사의 관직을 내렸다. 1604년에, 사절로 일본에 가서 가강과 만나 평화회담을 마치고 우리의 포로 1,600명을 찾아서 돌아왔다. 뒤에 가야산에 들어가 있다가 1610년 8월에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골은 해인사 서쪽 기슭에 부도를 세워 안치하였다. 제자들은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올리고 대사의 화상을 모신 곳을 홍제암이라 하였다. 대사가 지은 시문이 많았으나 병란에 분실되고 제자들이 수집한 사명집 7권이 있다. 1612년에 허균이 짓고 한호가 써서 비를 세웠는데 이제 이를 한글로 요약하여 이 비를 따로 세운다

서기 1979년 12월“

 


 

 

 

석장비에서 오른쪽 돌계단을 50여m 오르면 산기슭에 단아한 모습을 한 석종형 부도가 있습니다. 사명대사의 부도로 높이 1.8m, 둘레 3.32m 규모로 매우 소박하여 사명대사의 풍모를 그대로 닮은 듯합니다. 그러나 사명대사 부도는 많은 석종형 부도와는 다르게 당당한 모습과 조형미를 갖춘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승탑이라 합니다.



사명대사 부도



 

 

 


돌을 깎아 2단의 기단을 만들었으며 둥근 형태의 윗단과는 달리 아랫단은 밋밋한 모습을 한 사각형에 반해 윗단의 윗면은 연꽃무늬를 돌렸으며 그 위에 종모 양인 몸돌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화룡점정의 마무리는 석종형의 부도 위에 연꽃봉우리 모양의 보주를 올려 더욱 세련된 모습입니다.


 

 


 

 


석종형 부도에는 현재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게 명문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왜인들이 사명당의 부도를 훼손하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한 조치라 합니다. 임진왜란 때 많은 분이 전장에 나가 나라를 지키며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신분으로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운명을 보지 못하고 ‘살생을 금한다’는 규율을 깨고 활인검을 휘둘렀던 사명대사의 석장비와 부도 앞에서 다시금 머리를 조아려 봅니다. 

보물제13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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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가야산 홍류동천 농산정. 고운 최치원이 갓과 짚신을 걸어놓고 신선이되었다는 명경산수의 해인사 소리길  농산정을 여행하다. 농산정


빼어난 가야산 홍류동계곡 하면 얼른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857~?)으로 시대의 풍운아이자 대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던 분입니다. 필자는 고운 선생을 여행가라 말하고 싶습니다. 부산, 지리산, 가야산 등 영남에서 고운의 발자취를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000년도 훨씬 넘은 지금도 전국의 명산 대천에는 해운이니 고운이니 임경이니 하면서 선생의 발자취가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고운 선생은 말년을 가야산에서 보냈습니다. 가야산 정상에서 흘러내리는 계곡 물은 섬섬옥수가 되어 바위를 돌고 넘고 뚫고 휘몰아쳐 빼어난 절경을 연출합니다.


 



선생은 가을 단풍이 붉게 온산을 뒤덮어 흐르는 계곡 물까지 붉게 물들인다 하여 홍류동천이라 이름 짓고 이곳에서 은둔하며 수도하고 유유자적한 안빈낙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곳이 오늘날의 농산정입니다.


 



농산정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칠언절구 둔세시 ‘제가야산독서당(濟伽倻山讀書堂)“에서 따왔는데 그 한시를 보면

“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상공시비성도이(常恐是非聲到耳) 늘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고교류수진농산(故敎流水盡籠山) 짐짓 흐르는 물로 온산을 둘러버렸네“





지금의 농산정 건너편에 치원대 또는 제시석으로 불리는 암벽에 새겨져있습니다. 그 한시의 맨 끝부분 ‘농산(籠山)’의 한 구절을 따와 농산정이라 하였는데 맨 끝에 ‘우암’이란 각자가 남아있어 우암 송시열의 한시가 아닌지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정자는 앞면 2칸에 옆면 2칸 크기의 정방형 목조기와 건물입니다. 농산정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1936년경 후손과 이 지역 유림에 의해 중건되었고, 여러 번 수리를 거치면서 1990년에 전체적인 보수공사를 하였습니다. 지금도 단청이 입혀지지 않은 서까래 등을 보면서 최근에 다시 한 번 부분적인 수리를 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농산정 현판에는 김영한이 쓴 농산정기와 찬양사 4수가 새겨져 있으며 고운 선생의 둔세시를 차운한 시 8수도 있습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12세에 홀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그곳에서 빈공과에 급제하여 지방관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 후 산동에서 황소가 난을 일으키자 선생은 ‘토황소격문’를 지어 최치원이란 이름을 널리 각인시켰습니다.





선생은 17년만인 29세에 고국 신라에 돌아왔으나 나라의 국운이 쇠퇴함을 알고 자천으로 변방을 전전하다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을 상소하였습니다. 신라의 국운은 난세로 세상이 혼탁해지자 894년 가솔을 거느리고 가야산으로 은거했습니다. 그때 입산하면서 남긴 시가 있습니다.





“승호막도청산호(僧乎莫道靑山好) 스님아! 푸른 산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

산호여하복출산(山好如何腹出山) 산이 좋은데 무슨 일로 다시 산을 나오는가!

시간타일오종적(試看他日吾踪跡) 시험 삼아 이다음에 나의 종적을 보아라.

일입청산갱불환(一入靑山更不還) 한 번 푸른 산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지금 농산정 옆 계곡에 홍류동 각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어느 해 엄청난 물난리로 ‘홍류’ 두 글자는 떨어져 나가고 지금은 ‘동’ 자만 남아 계곡에 남아 있습니다.


선생은 “다시는 시류에 얽매이어 속세로 나가지 않겠다”는 시처럼 그의 결연한 의지를 들어내었습니다. 고운은 가야산 홍류동계곡과 해인사. 매화산의 청량사 등에서 신선 같은 삶을 살다가 어느 날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는데 갓과 짚신만 지금의 농산정 자리에 남아있었습니다. 후세사람들은 이를 보고 농산정 뒤 골짜기로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며 최취밭골로 부릅니다.





농산정은 많은 선비가 이곳을 찾아들었으며 고운 최치원을 흠모하며 많은 차운시를 남겼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시 몇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점필재 김종직의 농산정 차운시입니다.

“청시광염사창만(淸詩光焰射蒼巒) 맑은 시의 광염은 푸른 봉우리 내쏘는데

묵지여흔궐륵간(墨漬餘痕闕?間) 먹으로 쓴 흔적은 새긴 바위에 희미해라

세상단운시해거(世上但云尸解去) 세상에서는 신선 되어 떠났다고 말을 할 뿐

나지마렵재공산(那知馬?在空山) 빈산에 무덤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네“





그리고 가야산 홍류동 계곡의 농산정에는 예은 최동식 거사의 칠언절구가 있습니다.

“何日文昌入此巒(하일문창입차만) : 최치원께서 언제 이 산에 들어왔던가?

白雲黃鶴渺然間(백운황학묘연간) : 흰 구름과 황학이 아득히 어우러진 때였도다.

已將流水紅塵洗(이장유수홍진세) : 이미 흐르는 물로서 세상의 때를 씻었으니

不必中聾萬疊山(불필중농만첩산) : 만 겹산으로 귀 막을 필요는 없으리라“




‘고운최선생둔세지’





선생은 1918년 해인사 이회광 주지스님의 부탁을 받고 홍류동 계곡에서 가야산 정상인 상왕봉에 이르기까지 19 명소를 설정하고 칠언절구의 시를 남겼는데 ‘가야십구명소제영’에서 유래한다 합니다 허목선생의 ‘가야산기’에서 “홍류동, 취적봉, 광풍뢰, 음풍뢰, 제월담, 분옥폭, 완재암, 낙화담, 첩석대, 무릉교, 칠성대, 채필암 등 무흘 12곡 모두 고운 선생이 이름을 붙였다”고 했습니다.




갓과 짚신을 벗어 놓고 최취밭골로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는 농산정.





농산정에는 사방으로 농산정 편액이 걸려있습니다. 그 중 한 곳에 걸린 최영하의 ‘농산정’ 칠언절구입니다.

“流水聲中聳翠巒(류수성중용취만) 흐르는 물소리에 푸른 산 우뚝하니

淸風百世在斯間(청풍백세재사간) 맑은 바람 백 세 동안 여기에 있네

詩登雅譜亭名擅(시등아보정명천) 시의 족보에 등재되어 이름을 떨치니

長使人○仰若山(장사인○앙약산) 오래도록 사람이 산을 우러르게 하네“





이외에도 고운 최치원의 농산정 차운시는 여러 사람이 남겼습니다. 그중 영재 이건창(1852~1898)과 매천 황현(1855~1910)선생의 한시를 옮겨보겠습니다.

영재 이건창 선생은 당시 부친인 이강학이 안의 현감으로 재직 중에 이곳 농산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百丈紅流萬疊巒(맥장홍류만첩만) 백 발의 홍류동 만 겹 봉우리인데

神仙詩句墮人間(신선시귀타인간) 신선 시구가 인간 세상에 떨어졌네

白雲一片孤飛去(백운일편고비거) 흰구름 한 조각 외로이 날아가니

疑是先生尙在山(의시선생상재산) 선생이 아직 이 산에 계시는가“





그리고 매천 선생은 광양에서 태어나 구한말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 빼앗기게 되자 통분하여 구례의 매천 정사가 있는 서재에서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애국지사입니다. 매천 황현 선생은 1887년 이곳 농산정을 올라 차운시를 남겼는데

“雷?百折鎖重巒(뇌랑백절쇄중만) 구불구불 겹겹 산 잠긴 속을 울리며

玉洞春流紫翠間(옥동춘류자취간) 옥동의 봄물이 붉고 푸른 사이로 흐르네

山自孤雲詩益著(산자고운시익저) 산은 고운의 시로 더욱 드러났지만

(籠山未必善藏山(농산미필선장산) 산을 에워쌌으나 반드시 산을 잘 감춘 건 아니구나“.





옛 선인들은 홍류동 계곡의 정취와 농산정의 빼어난 절경을 흠모하며 많은 시와 차운시를 남겼습니다. 실제 농산정을 여행하면 올곧은 소나무의 자태와 함께 비류낙화하는 계곡에서 고운 최치원 선생의 체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역시 선인은 명경산수를 알아보는 것 같습니다. 이제 입추도 지났고 다시 처서를 지나면 곧 홍류동천은 하늘과 나무와 바위와 흐르는 계곡 물이 온통 이름처럼 붉은 단풍이 드는 장관을 연출합니다.


농산정 주소: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 1

농산정: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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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군 가야면 구원리 1 | 농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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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녁노을* 2016.08.21 09:00 신고

    아직 가보질 못했습니다.

    보기만해도 좋으네요.

    잘 보고가요^^

  2. 핑구야 날자 2016.08.22 08:27 신고

    수박 한덩어리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지네요

  3. 공수래공수거 2016.08.22 10:31 신고

    해인사 소리길도 참 좋지요
    한번 걷고 싶은길입니다
    그런데 요즘 너무 덥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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