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여행)가야산 홍제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왜!! 사명대사 석장비는 쪼개졌을까요?, 부도에는 왜! 대사의 명문을 새기기 않았을까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임진왜란 때 승군으로 참여한 분을 꼽으라면 전쟁에 참여한 이름 모를 스님들도 많습니다만 모두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 서산대사를 떠올릴 것입니다. 이 두 큰스님은 너무나 유명하고 모두 다 알고 있어 새삼 거론하는 게 쑥스럽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서산대사는 임란 때 묘향산에서 입적하신 것을 알지만, 사명대사께서 입적한 곳이 항상 궁금했는데 부산과 그리 멀지 않은 합천 해인사 홍제암임을 알고 이번 해인사 여행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사명대사 석장비




 


사명대사는 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서 출생하셨는데 현재 그의 출생지에 생가 복원과 기념관이 조성되어 많은 관광객이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며 찾고 있습니다. 필자도 대사의 출생지인 고라리는 여러 번 방문했지만, 대사의 입적지는 처음이라 과연 어떤 모습일까 많이 궁금했습니다.


 

 


해인사와 가까운 곳에 홍제암이 있습니다. 단아한 사찰의 규모에 비해 부도전의 규모가 대단한 모습을 하여 홍제암의 사격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곳 홍제암의 부도전에는 ‘사명대사의 부도와 석장비’가 현재 남아 있습니다. 막상 여러 기의 부도와 석장비가 있어 어느 탑이 사명대사의 부도와 석장비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석장비는 비신이 열십자로 깨어져 있다는 안내판과 석장비 앞을 가린 가림막을 보고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스님의 부도는 금방 찾을 수 없었습니다. 보통 부도와 석장비가 함께 세워져 있는데 사명대사의 부도와 석장비는 따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부도는 석장비에서 뒤쪽 50m 거리인 산 능선에 홀로 안치되어 있습니다.


 

 


부도를 알리는 안내판도 따로 있는 게 아니고 하여 보통석장비를 보고 부도를 찾다가 그냥 내려갈 것 같았습니다. 우리도 엉뚱한 부도를 보고 사명대사 부도 인가하며 머리를 꺄웃거렸습니다. 아무래도 미심쩍어 홍제암의 보살에게 문의했더니 친절하게 알려주어 쉽게 찾았습니다. 먼저 사명대사 석장비를 보겠습니다.


 

 


석장비는 스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문으로 그 높이가 3.15m의 규모입니다. 사명대사의석장비는 지금까지 두 번의 수난을 겪었습니다. 사명대사 석장비의 비문은 홍길동전을 썼던 교산 허균이 직접 지었습니다. 그 후에 허균은 역적 모반을 꾀했다는 죄명으로 광해군에 의해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참수와 함께 허균의 모든 행적은 지워졌으며 사명대사의석장비 또한 허균이란 이름은 사라졌습니다.


 

 

 

 


현재 석장비는 열십자로 쪼개어졌던 것을 붙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인 1943년 일본인 합천경찰서장 죽포가 법보학원 학생들의 노트에 기록한 사명대사와 가토 기요마사가 나눈 대화 조선의 보물은 당신의 머리라는 “통쾌하고 능란한 대답”의 비문 내용이 조선의 민족혼을 일깨운다 하여 형사와 석수를 동원하여 깨부수려고 했습니다.


 

 


대사의 비신을 땅바닥에 눕혀 사 등분으로 쪼개려하자 하늘도 노했는지 뇌성벽력과 폭우에 놀란 석수는 작업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3일 후에 끝끝내 석장비를 결딴냈고 네조각중 한조각을 당시 합천 해인사 경내 주재소 출입문의 계단 돌로 사용하여 출입객이 밟고 들어오게 했습니다. 이에 죽포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통영서장으로 옮겨갔고 다시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충렬사의 현판과 영정을 훼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치 않았는지 10여 일 뒤에 그는 피를 토하고 급사했다 합니다.


 

 


사명대사의석장비를 쪼갠 사람도 있지만, 사명대사의석장비를 보고 그의 행적을 찬탄한 시를 남긴 일본인도 있습니다. ‘아부충가의 송운탑’ 시로 그는 1929년 불교 제64호, 43쪽에 ‘법지종자 해인사 배관기’를 실었습니다. 그는 새로 부임한 총독 일행을 수행하여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판과 사명대사 부도를 보고 감탄하며 “해인사의 장경판은 참으로 세계적인 지보라 하겠다. 또 송운대사(사명대사)의 부도를 참관할 때에 참으로 감개무량함을 이기지 못하였다"며 칠언절구 한시를 남겼습니다.


 

 


‘합천의 숨결 해인사의 향기’(내암사상연구회)에 수록된 그 시를 옮겨보면

“공산일편석부도(空山一片石浮圖) 빈산 한쪽에 돌로 만든 부도

심장사리부산우(深藏舍利負山隅) 산기슭에 사리 고이 묻고 서 있네

당년장사하안색(當年將士何顔色) 그때의 장군, 어떤 풍모를 하고 있었을까?

일임치의날호수(一任緇衣虎鬚) 의연하게 승복 걸쳐 입고 호랑이 수염 쓸고 있거늘“


 

 


쪼개진 석장비는 1958년 네 조각을 붙여 복원하였으며 그 흉한 모습이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때마침 필자가 찾았을 때 다시 석장비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현수막이 앞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새롭게 복원된 석장비의 모습을 기대해봅니다.


 

 


허균이 직접 썼다는 사명대사의석장비 내용을 한글로 요약하여 세운 비문을 옮겨 보았습니다.

'자통홍제존자사명당 석장비'


“대사의 이름은 유정 자는 이환 호는 사명 또는 송운이라 히였고 풍천임씨다. 1544년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유학을 공부하였고 13세에 직지사에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1561년에 선과에 합격하였고 특히 시를 잘 지어서 당시의 문인대가들과 시를 교환하여 명성이 크게 떨쳤다. 1575년 선종의 주지에 추대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서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서산은 그에게 마음을 닦는 공부를 제시해주었다. 대사는 크게 깨닫고 지금까지 흥미를 붙여온 문학과 학문에 대한 모든 상념을 버리고 마음공부를 체험하기 위한 고행의 수련을 3년 동안 계속한 뒤에 다시 국내 여러 명산을 두루 다니며 수행을 계속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대사는 유점사에 있었는데 고성에 침입한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을 설득하여 인민을 살상치 못하게 하였다. 선조가 의주에 피난했음을 듣고 수백 명의 승군을 모집하여 순안으로 달려갔다. 이때 서산대사가 전국의 승군을 총지휘하고 있었는데 나이가 늙었으므로 이 책임을 대사가 대신 맡도록 나라에 추천하여 대사는 이 승군을 거느리고 명나라 장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는데 참가하였고 다시 도원수 권율의 부하에 들어가서 경상도 의령에 주둔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나라에서는 대사에게 당상관의 계급을 내렸다. 1594년 봄에 명나라 장군의 지시를 받고 부산에 있는 일본군 진영에 들어가 적장 청정과 세 번이나 회담하여 그의 사명을 완수하였다. 이때 청정이 조선에 보물이 있느냐고 물으니 대사는 서슴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는 보물이 없고 당신의 머리가 곧 우리의 보물이다라고 한 것은 유명한 애기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사는 군무에서 떠나지 않고 어떤 때는 팔공산과 금오산에 성을 쌓았고 또 명나라 장군 유정, 마귀 등을 따라 전공을 세우기도 하고 군량 조달에 힘쓰기도 하였다. 나라에서는 대사에게 동지중추부사의 관직을 내렸다. 1604년에, 사절로 일본에 가서 가강과 만나 평화회담을 마치고 우리의 포로 1,600명을 찾아서 돌아왔다. 뒤에 가야산에 들어가 있다가 1610년 8월에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골은 해인사 서쪽 기슭에 부도를 세워 안치하였다. 제자들은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올리고 대사의 화상을 모신 곳을 홍제암이라 하였다. 대사가 지은 시문이 많았으나 병란에 분실되고 제자들이 수집한 사명집 7권이 있다. 1612년에 허균이 짓고 한호가 써서 비를 세웠는데 이제 이를 한글로 요약하여 이 비를 따로 세운다

서기 1979년 12월“

 


 

 

 

석장비에서 오른쪽 돌계단을 50여m 오르면 산기슭에 단아한 모습을 한 석종형 부도가 있습니다. 사명대사의 부도로 높이 1.8m, 둘레 3.32m 규모로 매우 소박하여 사명대사의 풍모를 그대로 닮은 듯합니다. 그러나 사명대사 부도는 많은 석종형 부도와는 다르게 당당한 모습과 조형미를 갖춘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승탑이라 합니다.



사명대사 부도



 

 

 


돌을 깎아 2단의 기단을 만들었으며 둥근 형태의 윗단과는 달리 아랫단은 밋밋한 모습을 한 사각형에 반해 윗단의 윗면은 연꽃무늬를 돌렸으며 그 위에 종모 양인 몸돌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화룡점정의 마무리는 석종형의 부도 위에 연꽃봉우리 모양의 보주를 올려 더욱 세련된 모습입니다.


 

 


 

 


석종형 부도에는 현재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게 명문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왜인들이 사명당의 부도를 훼손하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한 조치라 합니다. 임진왜란 때 많은 분이 전장에 나가 나라를 지키며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신분으로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운명을 보지 못하고 ‘살생을 금한다’는 규율을 깨고 활인검을 휘둘렀던 사명대사의 석장비와 부도 앞에서 다시금 머리를 조아려 봅니다. 

보물제1301호


 


 

 

 

 

 



◆사명대사 석장비및 부도 홍제암 정보 안내◆

★홍제암

★홍제암 주소: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홍제암 전화:055-932-7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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