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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구미여행)금오산 마애보살 입상. 90도 각진 모서리를 깎아 섬세함이 돋보이는 금오산 마애보살 입상.


구미 금오산은 도립공원 1호입니다. 경북 구미시를 대표하는 명산으로 많은 문화재를 품고 있습니다. 고려 충신인 야은 길재의 충설을 모신 채미정과 고려시대 때부터 군사적인 요충지로 쌓았다는 금오산성, 그리고 금오산 마애보살 입상 등이 있습니다.



금오산은 역사적인 깊이만큼 고려시대 유적이 많습니다. 자연보호 운동의 효시로 알려진 구미 금오산 대혜폭포는 27m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울림이 금오산을 들었다 놓았다 할 정도로 우렁차다하여 명금폭포로도 구미에서는 부릅니다. 그 만큼 구미시민에게는 금오산을 민족의 영산인 구미의 백두산으로 할 만큼 신성시 합니다.



금오산의 8부 능선에는 어느 할배의 애틋한 손자사랑이 오형돌탑으로 만들어지게 된 슬픈 사연 만나고 그곳 언저리를 돌아서면 보물 제 490호 금오산 마애 보살상이 있습니다. 1968년 12월 19일 보물 제490호로 일찍부터 지정된 우리의 고려시대 문화재입니다.



금오산의 최고봉 현월봉을 바라보는 모습인 금오산 마애 보살 입상은 90도로 꺾인 자연 암벽 모서리를 깎아 조각한 특이한 보살상입니다. 주위에 편편한 넓은 바위도 많은데 왜 하필 각진 모서리에 보살상을 깎았는지 속세의 한사람으로 이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꺾인 모서리 좌우를 이용하여 조각을 하여 입체감을 잘 나타내어 꼭 살아 있는 보살상의 느낌이 들 정도로 정교한 모습입니다. 크기는 일반 불상보다 엄청 큰 5.5m로 보살상 전체 크기에 비해서 손이 두드러지게 크며 옷 주름, 연꽃대좌등을 세심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연꽃대좌 위 발의 묘사는 투박하며 마애보살입상 좌측 뒤로 광배와 반원형 연꽃대좌등을 처리한 것으로 보면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합니다.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 산 24-1 번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2014/11/09 - 금오산 마애보살 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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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여행/사하여행)몰운대 다대포객사. 부산의 3대인 몰운대 다대포객사.


부산은 예로부터 사방팔방 조망권이 좋은 곳을 대(臺)라 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조망을 즐기며 글을 남겼습니다. 그만큼 시가 저절로 떠오르는 곳이 많을 정도로 많은 전망대가 있으며 혹자는 부산의 3대, 5대, 8대로 나누어 분류를 합니다.

 




사람에 따라 조금은 다르지만 부산의 3대 몰운대, 태종대, 해운대를 말합니다. 부산사람이라면 모두 수긍을 할 정도 쟁쟁한 조망처 입니다. 또한 내륙의 전망대가 아닌 모두 바다를 끼고 있는게 특이합니다. 부산의 3대중 몰운대를 다녀 왔습니다.

 


몰운대는 16세기까지 몰운도라는 섬으로 불렸습니다. 지금이야 육지화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낙동강의 토사가 하류로 내려와 퇴적되었기 때문입니다. “안개와 구름이 끼는 날에는 그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다”는 뜻으로 몰운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일본과 가까이 있어 많은 부침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 있던 정운장군이 이곳 부산포 해전에서 순절을 하였던 곳으로 현재 “정운공 순의비”가 몰운대에 있습니다. 일반인들 들어갈 수 없는 통제지역이라 너무 아쉬움이 남습니다. 부산포 해전은 100여척의 왜군을 격퇴한데서 정운장군이 큰 공을 세워 승리한 해전으로 지금도 부산 서구에 있는 장군산은 정운장군의 뜻을 기려 장군의 산이라 부르게 되었다합니다.






몰운대 정상부에는 다대포 객사가 있습니다. 조선 후기 다대 첨절제사영에 있었던 객사로 다대1동 부산 유아교육진흥원 내에 있던 것을 1970년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원형 그대로 복원을 하였습니다. 객사는 지방으로 출장을 나온 관리나 사신의 숙소를 말합니다.



다대포 객사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폐를 보관하였고 고을의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한양의 임금을 향해 신하의 예를 갖추어 망배를 드리던 장소로 사용이 되었고 또한 손님의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객사라면 본채와 좌우에 방이 딸려 있어야 하는데 다대포 객사는 본체만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다대포 객사는 정면 5칸, 측면2칸에 팔작지붕을 하였고 벽이나 기둥을 겹으로 두른 건물안쪽에 벌여 세운 기둥(안두리기둥)위에 마주보고 있는 두 기둥을 연결하는 나무인 들보를 올린 5량 건물로 벽은 두르지 않았습니다. 창건 연대는 불분명하지만 1825년(순조25년)에 중수를 하였습니다.



다대포 객사는 임진왜란 이후 더욱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담당하여 경상좌도 7진중의 하나가 되었고 부산진과 함께 일반진의 두배인 병선을 거느리며 정3품 당상관이 상주를 하였던 곳입니다. 부산광역시 사하고 다대1동 산144번지에 위치하며 부산광역시 지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몰운대

화손대

다대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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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함안여행) 함안대산리석불, 함안여행에서 만날 수 있는 함안 대산리 석조삼존상을 보고 왔습니다.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의 대사골 마을에 3구의 불상이 현재 남아 있으며 '함안 대산리 석조삼존상'이라 부릅니다. 불상이 고려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어 그 당시 창건된 사찰터로 추정을 합니다.

 

 

그러나 왜, 언제 폐사되었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현재는 절터에 마을을 이루고 있습니다. 좌우의 협시보살 사이에 머리와 손 , 다리등이 훼손된 석불이 있습니다.


 

 

석불 뒤로 일부 광배만 남아 있는데 불상을 깎은 돌의 질과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불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리 처참하게 파괴가 되었는지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좌우의 협시보살을 보면 두 불상의 모양이 서로 비슷하게 조각이 되어 있고 손모양만 약간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두 보살상의 대좌는 모두 상대와 하대로 나누어졌고 팔각으로 된 하대에는 코끼리 눈을 본떠 만든 문양인 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안상 안에 귀꽃이 새겨져 있으며 상대는 원형이며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좌대위의 보살상은 긴 얼굴을 하고 눈, 코, 입은 훼손되었는데 특히 눈 주위로 더 파괴가 심합니다.

 


 

두 보살상 모두 머리에는 두건 같은 복두를 쓰고 우리 고유의 한복 같은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단정하게 여민 옷은 가슴에서 서로 교차되어 길게 내려온 옷 위로 왼쪽 어깨에 매듭을 한 고리로 고정을 한 편단우견 차림의 겉옷을 또 하나 걸치고 있습니다.

 

 

허리에는 끈 묶음을 하였고 주름이 긴 옷은 무릎 부위에서 타원형으로 묘사 된 게 이런 특징은 고려시대의 불상 양식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약간은 무거운 느낌의 옷을 표현하였고 왼쪽의 보살은 가슴과 배에 손을 대고 있으며 오른쪽의 보살은 왼손을 배에 올리고 오른손은 물병을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공식명칭은 ‘함안 대산리 석조삼존상’으로 불리며 1963년 1월 보물 제71호로 지정되었고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던 것을 전각을 지어 보호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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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함안여행)함성중학교 교정의 함안 주리사지 사자석탑.  해태상을 보는 것 같아요. 주리사지 사자석탑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소재지 인근에 있는 함성중학교에는 독특한 불교 유적이 현재 세워져 있습니다. 교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공적비와 사자석탑 등 절터에 있던 파석을 옮겨 놓았는데 그 연유가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현재의 유물은 함안군 여항면 여항산의 주리사터에 있었던 것으로 일제시대때 함안면사무소로 옮겨왔고 그 후 광복을이 된 뒤 다시 이곳 함성중학교로 옮겨 오면서 기단부와 몸돌등도 하나 없이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합니다. 현재의 남아 있는 석재와 그 당시 조성 방식과 석탑의 규모를 볼때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5층 석탑으로 추정이 됩니다.





몸돌은 남아 있지 않지만 지붕돌은 완만한 흐름으로 균형감을 잘 이루었고 네 귀퉁이의 처마 끝을 살짝 올려 곡선의 아름다움을 살린 석탑입니다. 상륜부는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주리사지 사자석탑은 기존의 석탑과 다른 특징을 보여 줍니다.



네 마리의 사자로 몸돌을 떠받들도록 한 것은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석탑과 제천 월악산 사자빈신사지석탑 등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석탑입니다.

 



주리사지 사자석탑의 네 마리 사자를 보면은 모두 앉아 있는 모습을 하며 밖으로 들어 낸 이빨에서 사자의 위용을 나타내었습니다. 우람한 눈은 살아 있는 듯 생동감이 넘치고 휘날리듯 섬세하게 조각된 갈기는 백수의 왕 사자를 잘 표현하였다는 평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함주지’를 보면은 주리사터는 현재 주서리 좌촌마을과 대촌마을 사이로 추정하며 함안면 북촌리 함안 중학교 교정에 주리사지 사자석탑을 복원 해 놓았습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으며 복원을 할 때 제작연대가 비슷한 월악산 사자빈신사지석탑의 사자탑재 부분을 참고하였고 상륜부는 지리산에 있는 실상사삼층석탑을 보고 3층 규모로 복원을 하였습니다.



현재의 주리사터 사자석탑은 수려하며 완벽한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네 마리의 사자도 기쁜지 금방이라도 사자가 몸을 세우며 포효할 것 같습니다. 현재의 모습으로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함안 주리사지 사자석탑 안내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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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여행/고흥여행)고흥 존심당과 아문. 목민관 도리를 다하는 사또의 모습이 연상되는 존심당과 아문

 

 전라남도 고흥군청 옆에 조선시대에 수령과 관리들이 업무를 보던 관청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늦은 시간에 찾아간 고흥 존심당과 아문은 따로 관람시간이 있는 게 아니라 군청 옆에 있어 잠시 들러 보았습니다.



 

 

 

조선 영조41년(1765)에 고흥 현감 김시건이 건립을 하였는데 일제 강점기 이후부터 전면에 유리문을 교체하고 주변에 건물을 지어 고흥 군청 건물로 사용을 하였습니다. 1987년에 와 새로이 군청을 짓고 난 뒤 완전해체하여 원형 그대로 복원을 하였습니다.



 

 

 

본체인 존심당은 정면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그 중 2칸은 온돌방을 넣었고 3칸은 마루를 깔았으며 건물의 지붕은 여덟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입니다. 존심당에서 정사를 돌보는 사또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백성만을 생각하는 목민관의 도리를 다하는 관리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존심당을 가기 위해 들어서던 정문인 아문은 3칸의 삼문형식으로 가운데 칸의 지붕이 좌우 지붕보다 높습니다. 3칸 모두 두 짝의 넓은 문을 달았지만 현재는 사용을 하지 않습니다.


 

 

 

 

존심당의 아문은 조선시대 솟을삼문으로 옛 삼문의 형태를 잘 간직하였고 전국적으로 조선시대 관아의 형태로 남아 있는 건물이 몇 없어 관아 건물연구에 중요한 자료라 합니다.



 

 

 

고흥 존심당과 아문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습니다.(다음 문화유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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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부북면 퇴로리 '오구' 촬영지 여주이씨 고가를 보고 왔습니다.

 

경북에는 안동이 있다면 경남에는 밀양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하나요. 조선시대때 경북에는 안동이 양반들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면 경남에는 밀양이라는 이야기입니다. ㅎㅎ 밀양에도 많은 양반촌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밀양 교동이고 또한 손숙장관이 나왔던 산외면 다죽리 그리고 부북면의 퇴로리등 손을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양반의 득세가 얼마나 센지 박정희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대구에서 밀양으로 통과하게 하였는데 밀양의 양반님들이 시끄럽다고 우리 동네로는 통과 할 수 없다며 강력 반대 하여 경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할 정도입니다.

 

 






지금이야 신대구고속도로가 생겼지만 밀양의 발전이 그 덕택으로 더 늦어졌다네요. 이야기가 옆길로 빠진 것 같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밀양 부북면 퇴로리의 여주이씨 고택입니다.

 




 

퇴로마을에도 유독 고가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황토 담장을 돌려놓은 기와집의 모습은 그 당시 세도가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특히 퇴로리의 중심에는 여주이씨 고가가 마을을 대표할 정도로 큰 규모입니다.

 









퇴로마을 버스 정류장에 내려 오른쪽 개울을 따라 마을 안으로 돌면 큰 고택의 담장이 연결 됩니다. 그 왼쪽으로 따라 갑니다. 마을 길 끝에 ‘오구’ 촬영지라며 안내판이 붙어 있습니다. 먼저 만나는 이병수 고가로 근대문화유산이며 등록문화재 제15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에도 그의 후손이 살고 있고 담장이 높아 발끝을 들어도 집안 내부는 볼 수가 없습니다. 오른쪽으로 흙 담장을 따라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주이씨 고가의 규모가 엄청 큰 데요. 필자는 이병수 고가에서 왼쪽 골목으로 돌면 좌우로 아름다운 흙 담장과 연결되고 오른쪽으로 한바퀴를 돌면 이익구 고가 앞에 닿습니다.

 




이곳에는 문이 열려 있으며 최근에 대문이 수리가 된 것 같습니다. 여주이씨 자유헌공파의 종갓집으로 1890년 이만백의 7대손인 항재 이익구(1838~1912)가 마을에 입주하면서 세웠다합니다. 조선시대 후기 지방 선비의 집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합니다.




 

필자가 대문을 통해 들어가 보았습니다. 흙과 돌을 섞어 기와를 올린 담장으로 구분을 하였는데 같은 형태의 고가가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먼저 정침 안채는 정면 7칸, 측면2칸의 규모로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어져 청덕당이라는 당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서익랑과 정면5칸과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에 ‘성헌’의 현판이 걸려 있는 중사랑이 안채와 마주보며 자리하고 출입문 왼쪽에 종가사당 건물이 배치되었습니다. 중사랑 앞의 작은 문이 열려 있는데 그 문으로 나가보니 또 하나의 건물이 비슷한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별채로 청덕당인 안채의 동쪽에 있습니다. 이 건물은 항재 이익구의 손자인 후강 이재형(1891~1970)이 결혼과 함께 분가를 하여 지어진 건물로 안채와, 동서익랑, 사랑채로 지어졌습니다.

 



 

안채는 정면7칸과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어져 '사현합‘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사랑채는 정면5칸에 측면 1칸 반의 크기로 팔작지붕을 이루며 쌍매당의 당호가 걸려 있고 또한 후강유서, 담재, 청덕고가의 현판이 함께 걸려 있어 있습니다.


 





 


 


쌍매당의 남쪽으로 통하는 쪽문이 이병수의 고가로 통하는 문으로 보입니다만 문을 걸어 놓았습니다. 항재 이익구의 차남이 분가하였던 집으로 마당을 중심으로 북쪽에 ’一‘자형 안채와 서쪽에는 ’ㄱ‘ 사랑채, 안채와 마주보고 곳간채가 자리한 형태입니다.

 







특이한 점은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과 건물의 배치를 따랐지만 전, 후퇴 공간의 확장과 건물의 내부 수납공간을 크게 하는 등 근대 한옥의 특징을 보여 주며 사용된 재료 또한 기존과 다르게 근대 재료를 사용하여 건축하였습니다.

 




퇴로마을에는 앞으로 퇴로 수리못 또는 가산저수지, 용호, 남호로 불리는 큰 저수지가 있습니다. 1931년 일제 강점기때 만들어진 저수지로 둘레가 10리나 됩니다.  퇴로마을은 앞으로는 가산저수지, 뒤로는 돛대산이 둘러 싸여 아늑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돛대산 정상 인근에는 인위적으로 지맥을 끊은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장수였던 이여송이 조선의 산천지리를 술사와 살피며 큰 인재가 날 만한 곳은 산의 맥을 끊었다합니다. 그 때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퇴로마을에는 명당으로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여주이씨의 청덕당과 쌍매당터가 예로부터 명당터로 마을에서도 명당이라 부릅니다. 따뜻한 봄이 왔습니다. 5월의 꽃 이팝나무가흐트러지게 꽃을 피우는 위양지와 함께 밀양의 고가 여행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2014/04/01 - (경남여행/밀양여행)밀양 위양못(위량지). 5월이면 사진작가의 단골 출사지인 위양못에 댕겨 왔습니다. 이팝꽃은 없지만 역시 밀양8경의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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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행/중구여행)남대문시장 숭례문. 국보1호 숭례문 화재후 부실 논란에 큰 상처


연일 매스컴에서 터져 나오는 문화재에 관한 뉴스는 숭례문이야기입니다. 2008년 2월10일은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린 날입니다. 누군가의 방화로 인해 대한민국의 상징인 국보1호 숭례문(남대문)이 불타고 온 국민은 분노하며 울었습니다.





그 후 숭례문 복원공사에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국보 1호의 명예회복을 위해 발 벗고 나서 숭례문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국보 1호를 바라보는 국민의 하나같은 염원을 짓밟아 버린 사건이 터졌습니다.





숭례문 부실 논란과 우리 소나무 금강송이 빼 돌려졌다는 의혹이었습니다. 드디어 어제(26일) 숭례문 수사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금강송 4주와 국민 기증목 154본을 빼돌렸다는 사실에 지금 숭례문을 바라보는 대한민국 국민은 2008년 숭례문이 쓰러질 때 보다도 더 참담함을 느낌입니다.





온 국민의 하나같은 염원을 외면해 버린 신○○대목장, 우리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그릇된 판단으로 수천년을 후손들에게 이어가야 할 우리 문화재가 그것도 국보1호인 숭례문에 또 한번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이제 만신창이 국보1호 숭례문은 어찌해야하나요? 참 황당할 따름입니다.











언론의 중심에 하루도 비껴갈 날이 없었던 숭례문을 지난 3월7일 이른 아침 서울역에 도착하여 시간의 여유가 생겨 구경을 갔습니다. 국보 1호인 숭례문을 몇 번 본 게 고작이고 더군다나 화재로 소실 된 뒤는 처음이라 찾아가는 발걸음은 숭례문을 본다는 기쁨에 가벼웠습니다.





숭례문 앞에 가니 경비를 하시는 분이 9시부터 관람이 된다 하였습니다.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좀 일찍 보면 안됩니까 하니 ‘절대 안된다’며 화재 이후 엄청 경비가 강화 된 것 같습니다.








경비실 입구에서 쳐다보고 사진도 찍고 하며 남대문 시장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서울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 숭례문 앞을 지나는데 그때가 9시였습니다. 그래서 얼렁 구경 할 욕심으로 뛰어 다니며 보았는데 숭례문 포스팅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오늘에야 하게 되었습니다. 안성마춤이라 해야 하나요. 때마침 숭례문 부실 중간발표를 보게 되어 참담한 기분으로 숭례문 포스팅을 합니다.




  







한국전쟁때 총탄 흔적



서울에는 4대문이 있습니다.돈의문, 숙정문, 흥인지문 그리고 남대문으로 불리는 숭례문입니다. 숭례문은 1962년 12월20일 대한민국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한양도성의 남문으로 세워졌고 그 후 세종 30년(1448년), 성종 10년(1479년)과 조선 말기인 고종에 와서 대대적인 수리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한양도성 성문은 매일 밤 인정인 10시 무렵에 성문을 닫아 걸고 다음날 아침 파루인 4시에 굳게 닫았던 성문을 열었습니다. 1980년 초까지 있던 통행금지와 같은 것으로 이때는 성문의 출입을 막았고 문루에 종을 달아 시간을 알렸다 합니다.








숭례문의 건축기법을 보면 석축위에 중층누각을 세웠는데 장식이 간결하고 내부구조가 견실하며 조선 초기의 건축 특징과 사료적 가치가 뛰어나다하겠습니다. 한일 늑약이후 1907~1908년 일본의 황태자가 방한하여 "대일본 제국의 황태자가 머리를 숙여 문루를 통과할 수 없다"하여 왜인의 자행으로 숭례문 좌우의 성곽이 철거 되어 도로가 생겼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지금도 성곽의 석축을 보면 그 당시 총에 맞았던 탄흔의 흔적이 여럿 남아 있습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숭례문을 해체보수하며 전쟁의 상처를 씻겨 오늘에 이르다가 2008년에 얼빠진 사람의 방화로 인해 소실된 것을 2013년 5월에 좌우 성곽과 함께 복원을 완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는 화재로 국보1호를 잃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지봉유설에 따르면 숭례문 현액은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글씨고 성곽사이에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정면5칸 측면2칸의 중층건물로 다포형식의 건물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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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 서부도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동부도 서부도. 예술성이 빼어난 보림사 동부도 서부도 보고 왔습니다.

 

전남 장흥군 유치면의 보림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습니다. 6.25 한국동란등 많은 전란속에서 전각은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아름다운 통일신라의 삼층석탑과 석등, 철조비로자나불상 그리고 보조선사 창성탑비와 탑, 동부도와 서부도, 여러기의 부도탑이 남아 보림사의 전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보림사는 9산선문 가지산파의 중심도량으로 헌안왕이 보조선사 체징을 주지로 권하게 되어 창건되었습니다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를 인도와 중국의 보림사와 함께 동양의 3보림이라 합니다.

 

 

보림사 동부도

 

 

보림사의 많은 문화재중 스님의 무덤인 보림사 동부도와 서부도에 대해서 찾아 보았습니다. 보통 부도는 사찰의 입구에 위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도골 또는 부도밭이나 비석골로 부르는데 이곳 보림사 부도밭은 동부도와 서부도 그리고 보림사 경내의 보조선사승탑등 세 곳으로 나누어져 특이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넘어 오면서 보림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 인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특히 동부도와 서부도의 거리는 족히 700m 는 됨직 떨어져 있는 거리입니다. 늦은 오후에 먼저 보림사 입구에 있는 보림사 동부도를 찾아보았습니다.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동부도 서부도. 예술성이 빼어난 보림사 동부도 구경하기

 

동부도는 여러 기의 부도들이 모여 있는 비탈에 가장 위에 모셔진 부도로 그 중 가장 뛰어난 보도입니다. 1963년 1월에 보물 제155호 지정되었고 전체적인 높이는 3.6m로 날렵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부도의 양식으로 보아 서부도와 보조선사 탑비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묘탑의 형식으로 보여 집니다.

 

 

 

 

 

 

부도를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지면에 지대석을 놓습니다. 보림사 동부도는 8각의 얇고 넓은 지대석 위에 상중하대석을 올렸는데 하대석과 상대석은 연꽃잎을 돌렸습니다. 하대석은 8장의 연꽃잎을 돌려 새겨 놓았고 각 귀퉁이마다 꽃 장식을 달아 조형미을 더 한 것 같습니다.

 



 

 

 

연꽃잎 밑으로 낮은 기둥을 8각으로 돌려 각 면마다 안상을 조각하여 받치고 있습니다. 중대석은 상대석보다 가늘고 낮은 8각의 기둥으로 표면에는 아무런 조각을 넣지 않았습니다.

 

 

 

 

상대석은 큰 연꽃잎 8장을 돌려놓았고 밑에는 3단의 낮은 받침이 있고 윗면에는 2단의 탑신 받침을 두었습니다. 8각형의 돌기둥인 탑신은 한 면에 자물쇠가 붙은 문이 새겨있고 지붕돌은 낮은 편으로 탑신과 만나는 부분에 3단의 받침을 두었다.

 

 

 

 

지붕돌 위로는 상륜부가 남아 있는데 간석이 있고 그 위에 꽃장식이 새겨진 보개를 놓았고 보륜과 이중연판위에 보주를 차례로 올렸습니다. 보림사 동부도는 세련된 조각 기법이지만 전체적으로 밋밋하고 입체감이 떨어지며 상대석에 비해 중대석이 낮고 가늘어 전체적인 불안감이 나타납니다.

 

 

 

 

 

 

 

 

 

 

보림사 서부도와 함께 있는 또하나의 부도.

 

 

 

 

 

 

 

 

 

 

보림사 서부도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동부도 서부도. 예술성이 빼어난 두기의 보림사 서부도 구경하기.

 

보림사 서부도는 보림사와는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구석마을에 자리한 서부도는 두기의 부도가 남아 있습니다. 두기 모두 기단, 몸체돌, 지붕돌이 8각원당형으로 기본형태는 닽으나 조각수법에서 차이가 난다. 전체 높이는 3m가 약간 넘고 1963년 1월 보물 제156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보림사 서부도는 네모난 지대석에 변형된 8장의 연꽃잎이 겹쳐져 아래로 향하여 놓였습니다(복련).중대석은 8각이며 상대석은 8장의 연꽃 무늬가 위를 향한 모양(앙련)을 하고 있습니다. 몸체돌은 8각으로 1단의 받침이 있으며 지붕돌은 약간 좁고 경사가 급하며 추녀 끝에 꽃 장식이 없습니다.

 

 

 

부도의 상륜부는 원형의 복발이 있고 그 위로 구름무늬와 연꽃잎이 새겨진 구슬모양의 보주가 겹쳐저 올려져 있습니다. 높이는 3.6m

 

 

 

 

다른 하나는 하대석의 각 판의 끝부분에 꽃장식이 있고 얇은 면을 돌려 8각을 이룹니다. 그리고 탑신의 한면에 문짝에 자물쇠 모양이 새겨져 있는게 앞의 부도와 다릅니다.

 

 

 

지붕돌은 추녀가 거의 파손되었고 경사가 급하며 부도의 상륜부인 보개, 보륜, 보주가 올려져 있습니다. 전체 높이는 3.2m 이며두 부도는 고려시대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고려 중기의 부도로 추정합니다.(내용은 문화재 안내판과 민족문화대백과를 참고하였습니다.

 

 

 

 

 

 

 

 

 

 

 

 

 

 


 

 

 

 

 

 

 

 

 

 

 

 


 

2014/02/25 -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 탑비와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 탑이 보물로 지정.


2014/02/19 -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석탑과 석등, 철조비로자나불좌상.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통일 신라 보림사 석탑과 석등



 

2014/02/08 - (전남여행/장흥여행)가지산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국내 모든 사천왕상의 표준 모델이 된다는 보림사 목조사천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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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열암곡석불좌상. 입을 닫고 살기위함인지 마스크를 한 열암곡석불좌상.



◆경주 열암곡 석불좌상◆

경주 열암곡석불좌상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13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산 119

남산에는 많은 불상과 삼층석탑등 신라시대의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곳이다. 흔히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경주 남산. 남산에서 삼릉과 화랑교육원이 있는 남산리를 서남산과 동남산의로 분류한다. 두곳의 문화재는 사실 여러번 포스팅을하였다. 열암곡 석불좌상이 남남산도 봄에 다녀왔던 곳으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 석불좌상 주위로 눈이 그 당시에도 남아 있어 계절상 다시 곧 겨울이 올 것 같아 더 늦기전에 포스팅을 하였다. 남산에서면 인간과 함께 공존해온 숨결의 변화를 느껴보게된다. 남산 노곡리 열암계곡 7부 능선에 능선에 자리한 열암곡석불좌상은 항마촉지인의 자세로 연꽃좌대에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2005년 처음으로 주변에 파손된 상태로 남아 있던 불두가 발견되어 정비를 하게 되었는데 주변에 흩어져 나뒹굴던 파편을 찾아내어 끼워맞추는보수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열암곡석불좌상을 보면은 육계는 낮고 넓다. 얼굴은 양감이 있지만 코와 입주변은 깨어진 상태로 꼭 마스크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불상을 보면은 당당한 자세로 안장감이 느껴지는 모습으로 혼신을 다하여빚어낸 어느 석공의 걸작품이다. 석불좌상의 광배는 화염문과 당초문 그리고 9구의 화불을 섬세하게고 세세하게 새겨 놓았다. 석불좌상을 받치고 있는 연화좌대는 상대는 앙련을 3단으로 두고 하대는 복련을 새겼다. 상하대 사이의 팔각 기둥인 중대석은 만들어 끼웠다. 이 불상은 석굴암의 본존불과 비슷하며 8~9C 통일신라시대의 조각양식과 수법을 따르고 있다.





 







광배의 모습.







마스크를 한 열암곡석불좌상




열암곡석불좌상.
















열암곡신발견마애불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열암곡석불좌상 때문에 열암곡신발견마애불도 이곳에서 발견, 열암곡석불좌상.


이곳에는 전국을 떠들석하게 만들었던 열암곡신발견마애불 발견되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곳 열암곡의 신대륙 마애불의 발견은 참 우연이라 할 수 있다. 기존에 있던 열암곡석불좌상 때문이다.  경주의 많은 불상이 머리가 떨어져 나간 상태로 불신만 발견되고 아니면 불두만 남아 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 열암골의 석불좌상도 불두는 사라지고 몸만 남아 있었다. 그게 2005년에 우연찮게 답사객에 의해 계곡에서 불두가 발견이 되었다. 2007년도에 석불좌상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앞으로 넘어져 불상의 존재를 알 수 없는 바위의 석불입상이 또 발견하게 된 것이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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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여행/해남여행/달마산미황사)달마대사의 법신이 머무는 곳인 달마산 미황사.

 

해남읍에서 땅끝마을 방향으로 가다보면 독특한 산세에 눈이 절로 간다. 해남의 명산으로 미황사를 감싸고 있는 달마산이다. 능선으로 삐쭉삐쭉 솟아 있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만개의 부처님 모습과 닮았다는 달마산. 산세의 기운이 땅끝을 더 세워서 그런지  항상 달마대사의 법신이 머무는 곳이라 달마산이라 부른다.


 

 

달마산 미황사의 대웅보전 보물 제947호.


 

 

 ☞(전남여행/해남여행/달마산미황사) 독특한 미황사의 창건 유해. 달마산 미황사.

 

달마산에는 미황사가 있다면 미황사는 달마산에 있다. 미황사의 창건 설화를 보면 미황사의 설화가 왜 이곳에다 사찰을 창건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1692년인 숙종 18년에 지은 '미황사 사적기'에 나와 있는 기록을 보면 신라 경덕왕 때인 749년에 돌배가  달마산 아래 포구에 닿았다. 당시 의조화상이 마을 주민과 함께 포구로 나가 돌배를 맞이하였는데 배안에는 많은 경전과 불상이 실려 있었다.

 

 

미황사 일주문.

 

 

 ☞(전남여행/해남여행/달마산미황사)달마대사의 법신이 머무는 곳인 달마산 미황사. 검은 소의 전설이 있는 미황사.

 

화엄경 80권과 법화경 7권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성중, 16나한 그리고 탱화, 금환, 검은 돌을 함께 싣고 사람이 아닌 금인이 돌배를 젓어 이곳에 도착하였다 .  갑자기 검은돌이 갈라지더니 그곳에서 난데 없이 검은소가 나왔다. 그날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게 되었는데 금인이 나타나 '나는 돌배를 저어 왔는 우전국의 왕인데 부처님을 모실곳을 찾아 여러나라를 다니다 이곳에 이르게되어 달마산 꼭데기를 바라보니 만불(萬佛)이 나타남으로 여기에 부처님을 모시려하오. 그러니 검은소에 경전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거든 그곳에다. 부처님을 모시도록하시오'하며 사라졌다. 금인도 달마산의 기암이 설악산 천불동 계곡의 비유처럼 달마산에 솟은 기치창검들이 모두 부처님의 모습으로 여겨진것 같다. 

 

 

일주문의 용 조각.

 

 

 ☞(전남여행/해남여행/달마산미황사)달마대사의 법신이 머무는 곳인 달마산 미황사. 미황사의 뜻은.

스님은 깨보니 꿈이라 꿈도 회괴하다며 소등에다 경전을 올리고   뚜벅뚜벅 가는데 갑자기 소가 땅바닥에 눕더니 다시 일어서서 걸음을 옮기는 것이 아닌가. 달마산 아래 골짜기에 다다라 검은 소가 땅바닥에 눕더니 꿈쩍도 하지 않으며 일어서지 않았다. 의조화상은 처음에 소가 잠시 누웠던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그 뒤에 눌러 앉은 자리에다 '미황사(美黃寺)'를 창건하였다.

 

 

 

 

 ☞(전남여행/해남여행/달마산미황사)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이 고색창연.  달마산 미황사.

미황사는 소와 인연이 깊은 사찰로 그 뜻을 보면  '미'는 소의 울음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따온 것이고 '황'은 금인의 색상이 누런 금빛에서 따왔다 한다. 이런 달마산 미황사가 1989년까지 비어진 사찰로 남아 있었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미황사에는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특히 대웅보전은 보물947호이며 응진당과 명부전 또한 보물11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남여행/해남여행/달마산미황사)전국의 사진작가를 끌어 모우는 미황사의 독특한 매력. 달마산 미황사.

 

달마산 미황사의 대웅보전은 전국에서 사진작가를 많이 불러 모우는 곳 중의 한곳이다. 대웅보전과 달마산, 고색창연한 대웅보전과 함께 작품이 아닌곳이 없을 정도다. 특히 나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대웅보전 안쪽 천장인 공포의 아름다움에 감탄사만 연발을 하였다. 혹 미황사를 방문하시거나 그럴 계획이 있다면 꼼꼼히 살펴보자. 대웅보전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 하나에도 전설과 이야기가  전하고 있는 천년고찰이다.

이야기 줄거리는 미황사 홈페이지에서 내용을 발췌하였습니다.

 

 

 

 

 

 

 

 

 

 

 

 

 

 

 

 

 

 

 

 

◆ 미황사 대웅전의 내부 모습◆


 

 

 

 

 

 

 

 

 

 

 

 

 

 

 

 

 

 

 

 

 

 

 

 

명부전

 

 

 

 

 

 

 

 

 

 

 

 

 

 

 

 

대웅보전의 기둥에도 용이 그려져 있다. 물을 다스리는 용이 화재를 막는 다는 의미로 보인다.

 

 

대웅보전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 거북이와 연꽃문양.

 

 

 

 

 

 

 

 

 

 

 

 

응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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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단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건물인 행랑채. 무슨 요새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동마을 향단. 99칸의 대 저택 경주 양반마을 향단.


현재의 향단 가옥은 회재 이언적(1491년~1553년)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때 병환중인 모친을 돌 볼 수 없어 중종이 지어준 건물이다. 다시 이언적이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그의 동생 이언괄에게 물려 준 후 여주이씨 향단파의 종가가 되었다.  향단이란  이언괄의 손자인 향단공 이의주의 호에서 이 집의 이름을 따왔다. 





향단의 솟을 대문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동마을 향단. 집주인 개성이 독특한 99칸의 대 저택 경주 양동마을을 대표.



조선 중기 살림집의 모습이 아닌 집주인 개성이 묻어나는 독특한 건축물로 지금의 행랑채는 1976년 보수 공사를 할때 위로  더 올라 안채와 더욱 가깝게 되었다. 원래 99칸의 양반가옥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지만 6.25 한국동란때 전화로 인해 소실되어 현재 56칸이 남아 있다. 향단은 양동마을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오는 건물로 그 만큼 자리한 곳이 양동마을을 대표할 만한 곳이다. 보물 제 412호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동마을 향단. 99칸의 대 저택 경주 양반마을 향단. 풍수지리를 이용한 요새 같은 모습.


향단의 구조를 보면 일반 양반 기와집과는 달리 독특한 평면 구조이다. 몸체는 풍수지리에 따라 월(月)자 모양을 하고 여기다 한일(一)자 모양의 행랑채와 칸막이를 두어 용(用)자 모양을 이루었다. 행랑채 사랑채 안채가 모두 한몸체이고 마당이 두개인 특색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동마을 향단. 99칸의 대 저택 경주 양반마을 향단. 밖에서는 안의 모습을 볼 수 없어.


행랑채 뒤편에 있는 본채는 행랑채와 똑 같은 규모로 중앙과 좌우 양쪽 끝을 이어서 방으로 연결한게 흥(興)자 모양의 한건물 처럼 배치가 되어 있다. 이곳을 방문하면 아쉬움 점이 많다. 아름답고 독특한 구조의 향단 건물은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눈에 들어오는 일자형의 행랑채 모습만이 볼 수 있다, 빠삐용의 요새 같은 모습으로  향단안의 구조는 밖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동마을 향단. 99칸의 대 저택 경주 양반마을 향단. 멀리서 보는 향단의 모습 너무 아름다워.


이곳은 현재에도 여주이씨 향단파의 후손들이 거주를 하고 있어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을 언뜻언뜻 볼 수 있는데 아쉬움을 뒤로하고 할 수 없이 내려와 연밭이 있는 입구쪽의 먼발치에서 전체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한다. 멀리서 본 향단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멀리서 본 향단의 모습




☞(경북여행/경주여행/양동마을)경주 양동마을 향단. 99칸의 대 저택 경주 양반마을 향단. 양동마을 의 유래는


경주의 대표적인 양반마을은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의 유래를 보면 경주(월성) 손씨 입향조인 양민공 손소(1433~1484)선생이 청송 안덕에서 560여년전에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처가인 양동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아 살면서 벼슬길에 오르게 된다.

여강이씨 찬성공 이번(1463~1500)과 손소의 딸이 혼인을 하면서 처가인 양동에 이주하여 살았다. 두분 사이에 큰 아들로 동방오현의 한사람인 회재 이언적을 낳았다. 결국 회재 이언적은 손소의 외손자로 이곳 양동마을에는 손씨와 이씨가 서로 마을을 형성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동마을은 어떠한 특징이 있는 마을일까. 손소도 장가를 들어 처가인 이곳에 이주하였고 그의 사위인 이번도 이곳으로 이주와 살면서 처가입향의 마을로 불린다. 그러나 처음 이 마을에 입향한 손소의 처 류씨부인은 그 당시 무남독녀였던 관계로 풍덕 류씨는 절손되어 현재에 외손인 손소의 문중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양동마을 문화관의 향단 미니어쳐







향단 건물의 독특한 구조(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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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 홀로 즐긴다는 독락당.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의 사랑채.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는 동방 오현의 한분인 회재 이언적이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지은 사랑채다. 그는 이곳에 앉아 책을 보며 소일을 하였다하는데 아쉽게도 여러번 가봤지만 어찌 이곳은 갈때마다 이리 문화재 공사로 출입을 삼가해 달라고 하는지 모를일이다. 할 수 없이 오른쪽 자계천에 구름처럼 걸린 정자 '계정'을 보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경북여행/경주여행) 홀로 즐긴다는 독락당.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의 사랑채 최고 건물은 자계천의 계정.

독락당은 건물 자체가 보물 제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에도 그의 후손이 거주를 하고 있으며 안으로 빼꼼히 보니 가정집이라 출입을 삼가해 달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독락당을 못보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가장 멋스런 건물은 자계천에 반쯤 발을 빠트리고 있는 독특한 계정이다. 널따른 암반위에 생긴 그대로 자연석을 이용해 쌓아 올린 2층 누각은 계곡과도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경북여행/경주여행) 홀로 즐긴다는 독락당.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의 사랑채 자연석의 암반위에 세운 계정.

 

계정의 독특한 면은 계곡쪽의 아궁이다. 바닥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닌 1m이상 올려져 있다. 자연상태의 암반을 그대로 이용을 하다 보니 이런 독특한 모양이 된것 같다.  그날 자계천 작은 소에  누군가 낚시줄을 드리우며 세월을 낚았다. 일을 끝내고 소일삼아 고기를 잡는다며 부자지간이라 소개 하였다.

 

 

 

 

☞(경북여행/경주여행) 홀로 즐긴다는 독락당.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의 사랑채 옥산정사로도 불려.

짙은 그늘을 드리운 이곳에서 회재선생도 낚시줄을 드리우며 세월을 보낸것은 아닌지. 그때의 모습이나 지금의 자계천은 변하지 않고 500년을 이어져 왔다. 독락당은 조선중종 11년인 1516년에 세워졌고 옥산정사로도 불린다. 안내판을 보면 낮은 단위에 세워진 정면4칸 측면2칸의 여덟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대청은 3칸에 2칸이고 나머진 1칸에 2칸의 온돌방을 넣었다. 독락당 옆 자계천 천변으로 담장을 세웠는데 그 곳에 나무살을 달아 독락당 대청에서 계곡을 바라 볼 수 있도록 처리를 하였다는 게 이색적이다.

 

 

 

 계정은 양진암이라 불리며 회재 선생이 1533년에 완공을 하였다한다. 이곳 마루에 앉아 계곡을 바라보며 회재선생은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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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상선암 마애석가여래좌상 금오산을 대표

 

경주 남산을 대표하는 불상은?. 남산에는 많은 불상과 석탑 그리고 99 암자의 암자터등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남산를  상징하는 대표적은 문화재는 어디일까. 남산에서 유일한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칠불암마애불상군일까. 아니면 금오신화를 집필하였다는 남산의 용장사지의 삼륜대좌불일까. 그도 아니면 신선암 마애불일까.

 



 

 

 각자 가지고 있는 쟁쟁한 불상이다. 그러나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위치하고 있는 상징성을 보면 이곳  상선암 위 암봉의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이 아닐까 싶다. 듬직한 7m의 크기로 이곳 냉골계곡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리고 마애불이 앉은 품새는 남산의 금오산정으로 향하고 있다. 금오산 정상에서 흘러 내려온 능선은 상사바위에 이르러 절정을 보여 주는데 그 치솟은 바위들이 소금강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규모에 비해 웅장하다. 상사바위 인근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마애불의 모습은 마치 신선이 되어 바라보는 모습이라 할 것 같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 냉골에서 가장 큰 규모

 

이곳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자연 암반을 파내어 불두쪽은 완전한 모습으로 입체감을 주었고 불신은 선을 그어 파낸 모습을 하고 있다. 문화재청의 안내판을 보면 풍만한 얼굴에 눈썹은 둥글고, 눈은 반쯤 뜨고 입은 굳게 다문 모습이다, 민머리에 턱은 주름지고 귀는 어께까지 내려오며 옷은 양어께에 걸쳐져 있다.

 

 

 

☞(경북여행/경주여행/남산여행)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

 

 이 불상은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을 하고 있다. 자연석을 깍아 광배를 만들었고 가슴에 드러나는 속옷의 매듭, 손가락과  발가락의 모습을 보면 섬세한 조각 예술품으로 보여진다. 마애석가여래좌상의 조성시기는 전체적인 양식으로 봐서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작품으로 보여진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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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남창역사

등록문화재 제105호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남창리42-1

여행을 다니다 보면 시골의 한적한 역사의 건물에 마음을 빼앗겨 본적이 있을까. 사실 요즘 역사의 건물들을 보 면은 예전의 건물들을 헐고 새로운 역사의 건물로 거듭나고 있다. 마음속 어느 한 켠에 간직하였던 옛 역사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이곳 동해 남부선을 따라 많은 건물들이 역사의 흐름속에 사라지고 이제는 몇 안 되는 건물이 등록문화재란 이름으로 보존이 되고 있어 다행 아닌 다행으로 여겨진다. 울산의 남창역사도 일제 강점기인 1935년에 12월 16일에 보통 역으로 출발을 하였다.

 

 

 

 

 

 1978년에 온산공단으로 온산선을 내면서 역을 확장한 것 말고는 시골 역사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남창역사의 특징은 시골 역사이면서도 건물 후 면부 지붕의 중앙부에 두 개의 박공을 중첩시켜 건물의 무게감을 더 주었고 전체 건물 형태에서 정면임을 나타낸 것으로 보여 진다.

 

 

 

 

 

 

 

 일제 강점기 때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고 한다. 2002년에 남창 역사를 전면 보수를 하였는데 그때도 기본 틀은 유지를 하면서 평 슬레이트 지붕에서 맞배지붕으로 개량을 하고 창호 및 창문틀을 교체하였다 한다.

 

 

 

 

 

 

보수 정비로 인하여 건물 부분 부분의 건축 재료는 바뀌었지만 평면의 형태는 남창역사 준공당시의 모습에서 변형이 거의 없고 지붕을 빼고 벽면의 재료도 바뀌었지만 건립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건축물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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