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가야산 해인사.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고려대장경 판전 불법종찰인 가야산 해인사를 여행하다. 합천 가야산 해인사. 



합천의 명산인 가야산은 해인사를 품고 있습니다. 가야산이 해인사고 해인사가 가야산으로 통할 정도로 서로 떼고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불교 성지로서 가장 신령스런 산중 한곳입니다. 가야산의 산 이름에서도 불교색채가 아주 강한데 '가야(Gaye)'의 뜻은 ‘최상의’라는 뜻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드신 ‘붓다 가야’에서 가야산을 따왔다고 하며 또한, 옛날 가야국이 있던 산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만큼 가야산은 성스러운 장소로 알려졌으며 이런 곳에 해인사가 창건한 것은 어쩜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2016/08/24 - (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 유정이 입적했던 암자 가야산 해인사 홍제암을 여행하다. 홍제암

2016/08/23 - (합천여행)가야산 홍제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왜!! 사명대사 석장비는 쪼개졌을까요?, 부도에는 왜! 대사의 명문을 새기기 않았을까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2016/08/20 - (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가야산 홍류동천 농산정. 고운 최치원이 갓과 짚신을 걸어놓고 신선이되었다는 명경산수의 해인사 소리길 농산정을 여행하다. 농산정





해인사가 가야산에 창건하기 훨씬 이전에 중국 남북조시대의 지공(418~514)스님이 예언하기를 “해동의 가야산에 대가람이 세워져 불법이 번창하리라”고 하셨다는데 약 300년쯤 후인 802년 신라 애장왕 3년에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해인사를 창건하여 오늘날까지 부처님의 법등은 꺼지지 않고 이어져왔습니다.





해인사의 이름을 보면 화엄경의 ‘해인삼매’에서 나왔다 합니다. 해인삼매란? 석가모니가 ‘화엄경’을 말할 때 들어간 선정의 이름으로 “바다에 풍랑이 그치면 모든 형상이 온전히 비치듯이 법계의 실상을 본래 모습 그대로 자각할 수 있는 상태” 즉 ‘마음의 고요함’을 뜻합니다. 사부대중인 필자는 해인사 이름에서 벌써 복잡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내 마음이 평정심을 되찾은 듯 평안함을 느꼈습니다.





해인사는 창건과 함께 화엄종의 근본 도량으로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선원, 강원, 율원을 포함한 최초의 총림으로 지정했으며 국보인 고려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한 법보종찰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95년에 유네스코에서 고려팔만대장경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여 장경판전을 세계문화 유산에 이름을 올렸으며, 2007년에는 고려팔만대장경경판과 해인사의 모든 경판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하였습니다. 이런 문화재의 보고인 해인사를 늦었지만 여행하고 왔습니다.





먼저 부도전을 지나면 독특한 유래를 가진 ‘길상탑’이 있습니다. 길상탑의 유래는 신라 진성여왕 9년인 895년을 전후하여 7년간 궁예와 견훤의 싸움에 흉년으로 굶주린 장병을 위해 해인사 훈혁스님이 탁발하여 군량미를 조달하고 그 나머지로 길상탑을 세워 문수사리보살의 가피를 빌고자 무명으로 전쟁터에 나가 죽은 승병 56위의 넋을 기린 위렵탑입니다.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른 삼층석탑으로 높이는 약 3m이며 1965년 탑 속에서 최치원이 지은 ‘운양대묘길상탑지’와 157개의 소탑 등 유물이 나와 당시 사회 상황과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탑의 건립 내력을 소상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그리고 특이하게도 길상탑앞 도로에는 지금은 없지만 해방 이후까지 홍살문이 존재했으며 당간 석을 지나면 일주문이 나옵니다. 해인사 일주문은 1940년대 주지였던 변설호스님 때 대목장 이화백에 의해 중건하였습니다. 정면 현판의 ‘가야산 해인사’ 글씨는 해강 김규진이 섰으며 판각은 임환경 스님이 새겼고 뒷면의 ‘해동제일도량’ 현판은 박해근이 걸었습니다.





 

 

 

 


만해 한용운 선생도 해인사를 찬미하였는데 “해인사의 사기는 가야산의 전국적 중심지로 그 자세가 당당하고 그 환경이 수려 명미 하여 아려한 위인이 칼을 잡고 설교하는 것 같다. 완연히 움직이는 활화일폭이다. 해인사는 명구라고 하느니보다 승지이며 승지라고 하느니보다 성경이다. 나는 국내외 사찰들을 많이 보았으니 해인사에 필적할만한 사기를 보지 못하였다. 거룩하다는 한 말 이외에 무슨 형용사를 붙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합천의 숨결 해인사의 향기/내암사상연구회)


 

 


 

 

 

 

 

 

 

 소원나무

 

 

 

 

 

 

 

 

 

 

 

 


해인사의 중심건물인 대적광전을 가기 위해서는 마당을 가로질러 갑니다. 그전에 먼저 석등을 만납니다. 석등은 부처님의 광명을 상징하며 사찰 경내를 어둠에서 밝히는 진리의 빛입니다. 해인사의 석등은 섬세하고 우아한 조각수법을 보면서 그 뒤쪽의 삼층석탑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여덟 잎 연꽃무늬가 엎어진 복련과 팔각의 화사석 아래에 연꽃무늬가 위로 향한 모양의 앙련 사이에 세운 팔각석간이 짧은 것은 1926년 석탑을 개축하면서 함께 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석등 북쪽에는 정중삼층석탑이 있습니다. 탑은 부처님의 사리 등을 봉안하는 곳입니다만 정중삼층석탑은 불상을 봉안한 탑으로 9세기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아마 해인사가 창건하면서 함께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며 대적광전 앞마당 한 쪽에 석등과 함께 약간 비켜 서 있습니다.


 

 

 

 


비로탑은 높이 6m 삼층석탑으로 기단은 원래 통일신라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2층 기단이었지만 1926년 중수하면서 3층 기단으로 탑을 높이고 확장하였습니다. 석등과 석탑 사이에 바닥 돌이 놓여있는데 정례석으로 이는 멀리 부처님을 향해 이마를 땅에 대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을 하는 곳입니다.


 

 

 



비로탑과 석등이 있는 마당 좌우에는 궁현당과 관음전이 있으며 궁현당 뒤에는 적묵당, 진영전, 정수당 등 전각 대부분이 해인사 승가대학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사용합니다. 이제 대적광전이 있는 높은 축대를 오릅니다. 가운데 대적광전이 있으며 왼쪽으로 대비로전과 독성각, 오른쪽은 명부전과 응진전 등 예불공간입니다.


 

 


이제 해인사의 중심법당이자 큰 법당인 대적광전을 보겠습니다. 법당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셨습니다. 원래는 해인사를 창건하면서 비로전이 중심법당이었고 비로자나불을 모셨는데 6번이나 화재로 중창하면서 1488년에 대적광전으로 편액을 바꾸어 달았습니다. 지금의 대적광전은 단층이지만 겸재 정선(1676~1759)이 남긴 해인사 그림에 2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1817년 화재로 중창되기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큰 전각으로 추정됩니다.


 

 


대적광전의 의미는 비로자나불이 항상 계시면서 시공을 통하여 화엄경을 늘 두루 설하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대적광전의 수미단에는 모두 일곱분의 불보살을 봉안한 아주 특이한 사례입니다.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을 가운데 모시고 그 왼쪽으로 지장보살, 보현보살, 법기보살을, 오른쪽에는 이전의 본존불이었던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관세음보살입니다. 이중 관세음보살과 법기보살은 쇠로 불상을 만들었으며 그 외 불상은 모두 목조로 만들었습니다.


 

 

 

 


대적광전 수미단에 모셔진 본존 비로자나 부처님은 고려 시대 불상으로 은행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불상의 높이는 233.3cm이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과 함께 처음에는 경북 성주군의 금당사에 봉안된 부처님이었는데 절이 폐사하면서 가야산의 용기사로 옮겨갔고 용기사 마저 폐사하면서 1897년 법운스님이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해인사 대적광전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현재 해인사 대적광전은 팔작지붕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웅장하며 큰 규모입니다. 네 면의 대적광전에는 모두 각각의 현판을 달고 있는데 이는 앞면의 대적광전 현판 글쓴이는 현재 알 수 없으며 뒷면 대방광전, 동쪽 면의 금강계단, 서쪽 면의 법보전은 해강 김규진(1868~1933) 선생의 글씨입니다.


 

 


현재의 대적광전은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17년 (순조17년) 제월당 스님과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로 경상도 관찰사였던 김노경에 의해 중수되었으며 상량문의 글씨는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이 직접 썼다 합니다 해인사의 주련은 당시 명필가로 이름을 떨쳤던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니 해인사의 대적광전은 당대 명필들의 글씨로 더욱 유명합니다.


 

 


해인사 대적광전의 흥선 대원군이 썼다는 주련을 옮겨보겠습니다.

“불신보방대광명(佛身普放大光明) 부처님이 큰 광명을 두루 놓으시니

색상무변극청정(色相無邊極淸淨) 색과 모양이 가없이 청정하네

여운충만일체토(如雲充滿一切土) 구름이 온 국토에 충만하듯이

처처칭양불공덕(處處稱揚佛功德) 곳곳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네

광명소조함환희(光明所照咸歡喜) 광명이 비치는 곳마다 넘치는 환희여

중생유고실제멸(衆生有苦悉除滅) 중생들의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네“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장경각



2016/08/25 - (합천여행/합천가볼만한곳)해인사 고려팔만대장경, 대장경전, 고려각판. 부처님의 원력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려했던 고려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을 여행하다.



 

 

 


가야산이 있는 해인사의 지세는 거대한 방주형으로 가야산이 선체라면 해인사는 선실이고 중봉의 마애석불이 키를 잡는 선장이며 장경각 가운데에 큰 바위가 돛대바위였다 합니다. 그러나 1926년 대적광전 석축 보수를 하면서 이곳 바위를 깨어 사용하였습니다. 배의 돛대를 없애버렸는데 60년만인 1986년에 돛대바위 자리에 돛대를 대신하여 수미정상사리탑을 세워 이제 해인사는 앞으로 순풍에 돛단 듯이 순항할 일만 남았습니다.


 

 

 

 


여기는 학사대입니다. 신라말의 대문장가인 고운 최치원(857~?)이 만년에 가야산에 은거하여 시와 글씨를 쓰면서 보냈던 곳입니다. 그는 특히 가야금에도 능했는데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면 전나무에 수많은 학이 날아와 가야금 소리를 들었다고 전합니다. 학사대의 전나무는 최치원이 집고 다니던 지팡이를 거꾸로 꽂았는데 그게 살아남아 지금도 가지가 아래로 처져 거꾸로 자라는 듯 보인다고 합니다.


 

 

 



비로전은 비로자나불을 보신 법당입니다.  법당에는 중화 3년인 883년에 조성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동형쌍불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 있습니다. 


 

 

 

 

 

 

 

 


끝으로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해인사를 찬미한 한시를 해석해 놓은 글을 옮겨 보겠습니다.

“옛 가야에 묻혀 있는 울창한 가람

천리 구름이 떠 있는 산을 대하며 참선을 한다

새가 내려 않은 정원에서 스님은 선정에 들고

담비가 나무를 타고 개염의 달콤함을 맛본다

글 바위 바둑 누각 어느 뉘 살고 있나?

잣나무 오동나무 소곤소곤 이야기 주고 받는다

객은 떠날 날 꼽으며 잠 못 이루고

깊은 밤 달빛은 소나무 탑 사이를 비춘다“


(참고:합천의 숨결 해인사의 향기/내암사상연구회 발행)

 



성철스님의 사리탑


2016/05/12 - (경남여행/산청여행)산청군 단성면 겁외사,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산은 산이요 물은물이로다" 성철스님 생가 율은고거와 겁외사 여행. 산청 겁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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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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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녁노을* 2016.08.31 06:01 신고

    해인사 다녀오셨군요.
    잘 ㅏ보고갑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공감버튼이 안 보이네요^^

  2. 핑구야 날자 2016.08.31 07:36 신고

    요즘 같이 서선한 날에는 괜찮은 여행지네요



 


☞(합천여행)가야산 홍제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왜!! 사명대사 석장비는 쪼개졌을까요?, 부도에는 왜! 대사의 명문을 새기기 않았을까요? 사명대사 석장비와 부도


임진왜란 때 승군으로 참여한 분을 꼽으라면 전쟁에 참여한 이름 모를 스님들도 많습니다만 모두 사명대사와 그의 스승 서산대사를 떠올릴 것입니다. 이 두 큰스님은 너무나 유명하고 모두 다 알고 있어 새삼 거론하는 게 쑥스럽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서산대사는 임란 때 묘향산에서 입적하신 것을 알지만, 사명대사께서 입적한 곳이 항상 궁금했는데 부산과 그리 멀지 않은 합천 해인사 홍제암임을 알고 이번 해인사 여행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사명대사 석장비




 


사명대사는 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에서 출생하셨는데 현재 그의 출생지에 생가 복원과 기념관이 조성되어 많은 관광객이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며 찾고 있습니다. 필자도 대사의 출생지인 고라리는 여러 번 방문했지만, 대사의 입적지는 처음이라 과연 어떤 모습일까 많이 궁금했습니다.


 

 


해인사와 가까운 곳에 홍제암이 있습니다. 단아한 사찰의 규모에 비해 부도전의 규모가 대단한 모습을 하여 홍제암의 사격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곳 홍제암의 부도전에는 ‘사명대사의 부도와 석장비’가 현재 남아 있습니다. 막상 여러 기의 부도와 석장비가 있어 어느 탑이 사명대사의 부도와 석장비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석장비는 비신이 열십자로 깨어져 있다는 안내판과 석장비 앞을 가린 가림막을 보고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스님의 부도는 금방 찾을 수 없었습니다. 보통 부도와 석장비가 함께 세워져 있는데 사명대사의 부도와 석장비는 따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부도는 석장비에서 뒤쪽 50m 거리인 산 능선에 홀로 안치되어 있습니다.


 

 


부도를 알리는 안내판도 따로 있는 게 아니고 하여 보통석장비를 보고 부도를 찾다가 그냥 내려갈 것 같았습니다. 우리도 엉뚱한 부도를 보고 사명대사 부도 인가하며 머리를 꺄웃거렸습니다. 아무래도 미심쩍어 홍제암의 보살에게 문의했더니 친절하게 알려주어 쉽게 찾았습니다. 먼저 사명대사 석장비를 보겠습니다.


 

 


석장비는 스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문으로 그 높이가 3.15m의 규모입니다. 사명대사의석장비는 지금까지 두 번의 수난을 겪었습니다. 사명대사 석장비의 비문은 홍길동전을 썼던 교산 허균이 직접 지었습니다. 그 후에 허균은 역적 모반을 꾀했다는 죄명으로 광해군에 의해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참수와 함께 허균의 모든 행적은 지워졌으며 사명대사의석장비 또한 허균이란 이름은 사라졌습니다.


 

 

 

 


현재 석장비는 열십자로 쪼개어졌던 것을 붙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일제강점기인 1943년 일본인 합천경찰서장 죽포가 법보학원 학생들의 노트에 기록한 사명대사와 가토 기요마사가 나눈 대화 조선의 보물은 당신의 머리라는 “통쾌하고 능란한 대답”의 비문 내용이 조선의 민족혼을 일깨운다 하여 형사와 석수를 동원하여 깨부수려고 했습니다.


 

 


대사의 비신을 땅바닥에 눕혀 사 등분으로 쪼개려하자 하늘도 노했는지 뇌성벽력과 폭우에 놀란 석수는 작업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3일 후에 끝끝내 석장비를 결딴냈고 네조각중 한조각을 당시 합천 해인사 경내 주재소 출입문의 계단 돌로 사용하여 출입객이 밟고 들어오게 했습니다. 이에 죽포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통영서장으로 옮겨갔고 다시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충렬사의 현판과 영정을 훼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치 않았는지 10여 일 뒤에 그는 피를 토하고 급사했다 합니다.


 

 


사명대사의석장비를 쪼갠 사람도 있지만, 사명대사의석장비를 보고 그의 행적을 찬탄한 시를 남긴 일본인도 있습니다. ‘아부충가의 송운탑’ 시로 그는 1929년 불교 제64호, 43쪽에 ‘법지종자 해인사 배관기’를 실었습니다. 그는 새로 부임한 총독 일행을 수행하여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판과 사명대사 부도를 보고 감탄하며 “해인사의 장경판은 참으로 세계적인 지보라 하겠다. 또 송운대사(사명대사)의 부도를 참관할 때에 참으로 감개무량함을 이기지 못하였다"며 칠언절구 한시를 남겼습니다.


 

 


‘합천의 숨결 해인사의 향기’(내암사상연구회)에 수록된 그 시를 옮겨보면

“공산일편석부도(空山一片石浮圖) 빈산 한쪽에 돌로 만든 부도

심장사리부산우(深藏舍利負山隅) 산기슭에 사리 고이 묻고 서 있네

당년장사하안색(當年將士何顔色) 그때의 장군, 어떤 풍모를 하고 있었을까?

일임치의날호수(一任緇衣虎鬚) 의연하게 승복 걸쳐 입고 호랑이 수염 쓸고 있거늘“


 

 


쪼개진 석장비는 1958년 네 조각을 붙여 복원하였으며 그 흉한 모습이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때마침 필자가 찾았을 때 다시 석장비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현수막이 앞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새롭게 복원된 석장비의 모습을 기대해봅니다.


 

 


허균이 직접 썼다는 사명대사의석장비 내용을 한글로 요약하여 세운 비문을 옮겨 보았습니다.

'자통홍제존자사명당 석장비'


“대사의 이름은 유정 자는 이환 호는 사명 또는 송운이라 히였고 풍천임씨다. 1544년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유학을 공부하였고 13세에 직지사에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1561년에 선과에 합격하였고 특히 시를 잘 지어서 당시의 문인대가들과 시를 교환하여 명성이 크게 떨쳤다. 1575년 선종의 주지에 추대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서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서산은 그에게 마음을 닦는 공부를 제시해주었다. 대사는 크게 깨닫고 지금까지 흥미를 붙여온 문학과 학문에 대한 모든 상념을 버리고 마음공부를 체험하기 위한 고행의 수련을 3년 동안 계속한 뒤에 다시 국내 여러 명산을 두루 다니며 수행을 계속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대사는 유점사에 있었는데 고성에 침입한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을 설득하여 인민을 살상치 못하게 하였다. 선조가 의주에 피난했음을 듣고 수백 명의 승군을 모집하여 순안으로 달려갔다. 이때 서산대사가 전국의 승군을 총지휘하고 있었는데 나이가 늙었으므로 이 책임을 대사가 대신 맡도록 나라에 추천하여 대사는 이 승군을 거느리고 명나라 장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는데 참가하였고 다시 도원수 권율의 부하에 들어가서 경상도 의령에 주둔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나라에서는 대사에게 당상관의 계급을 내렸다. 1594년 봄에 명나라 장군의 지시를 받고 부산에 있는 일본군 진영에 들어가 적장 청정과 세 번이나 회담하여 그의 사명을 완수하였다. 이때 청정이 조선에 보물이 있느냐고 물으니 대사는 서슴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는 보물이 없고 당신의 머리가 곧 우리의 보물이다라고 한 것은 유명한 애기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사는 군무에서 떠나지 않고 어떤 때는 팔공산과 금오산에 성을 쌓았고 또 명나라 장군 유정, 마귀 등을 따라 전공을 세우기도 하고 군량 조달에 힘쓰기도 하였다. 나라에서는 대사에게 동지중추부사의 관직을 내렸다. 1604년에, 사절로 일본에 가서 가강과 만나 평화회담을 마치고 우리의 포로 1,600명을 찾아서 돌아왔다. 뒤에 가야산에 들어가 있다가 1610년 8월에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유골은 해인사 서쪽 기슭에 부도를 세워 안치하였다. 제자들은 자통홍제존자라는 시호를 올리고 대사의 화상을 모신 곳을 홍제암이라 하였다. 대사가 지은 시문이 많았으나 병란에 분실되고 제자들이 수집한 사명집 7권이 있다. 1612년에 허균이 짓고 한호가 써서 비를 세웠는데 이제 이를 한글로 요약하여 이 비를 따로 세운다

서기 1979년 12월“

 


 

 

 

석장비에서 오른쪽 돌계단을 50여m 오르면 산기슭에 단아한 모습을 한 석종형 부도가 있습니다. 사명대사의 부도로 높이 1.8m, 둘레 3.32m 규모로 매우 소박하여 사명대사의 풍모를 그대로 닮은 듯합니다. 그러나 사명대사 부도는 많은 석종형 부도와는 다르게 당당한 모습과 조형미를 갖춘 조선 후기의 가장 대표적인 승탑이라 합니다.



사명대사 부도



 

 

 


돌을 깎아 2단의 기단을 만들었으며 둥근 형태의 윗단과는 달리 아랫단은 밋밋한 모습을 한 사각형에 반해 윗단의 윗면은 연꽃무늬를 돌렸으며 그 위에 종모 양인 몸돌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화룡점정의 마무리는 석종형의 부도 위에 연꽃봉우리 모양의 보주를 올려 더욱 세련된 모습입니다.


 

 


 

 


석종형 부도에는 현재 누구의 부도인지 알 수 없게 명문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왜인들이 사명당의 부도를 훼손하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한 조치라 합니다. 임진왜란 때 많은 분이 전장에 나가 나라를 지키며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스님의 신분으로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운명을 보지 못하고 ‘살생을 금한다’는 규율을 깨고 활인검을 휘둘렀던 사명대사의 석장비와 부도 앞에서 다시금 머리를 조아려 봅니다. 

보물제1301호


 


 

 

 

 

 



◆사명대사 석장비및 부도 홍제암 정보 안내◆

★홍제암

★홍제암 주소: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10

★홍제암 전화:055-932-7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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