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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여행/의성가볼만한곳)경상북도 의성 비봉산 대곡사. 의성 대곡사 여행을 하다.


경상북도 의성군을 여행하면서 찾아간 비봉산 대곡사. 외진 곳의 사찰로서는 아주 대찰이었습니다. 비봉산 대곡사는 1368년 고려 공민왕 17년에 당시 선승이었던 지공·나옹선사 두 분의 왕사가 중건했으며 원래는 대국사라 불렀습니다.

 




의성 대곡사 주소: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봉정리 895

의성 대곡사 전화:054-862-4222


2016/11/15 - (의성군여행)의성군 비봉산 대곡사 대웅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보여주는 의성 대곡사 대웅전 여행.

2016/11/07 - (경북의성여행)대곡사 적조암. 비봉산 대곡사 적조암의 독특한 건축양식인 구포루 인법당.



지금 대곡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한국 향토사 연구 전국협의회’의 1989년 향토사연구 자료집에 대곡사의 창건연대를 신라말과 고려 초로 확신하고 1196년 8월 17일의 백운 이규보가 지은 ‘십칠일입대곡사 탐방시’와 대웅전 앞의 다층석탑 양식 그리고 1960년에 대곡사 텃밭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후기 양식의 금동불상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대곡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겪으면서 완전히 소실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다 1605년인 선조 38년에 탄우대사가 대곡사 재건을 시작하면서 중창하였으며 1687년 숙종 13년에 대전 선사께서 중건하면서 대곡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전성기의 대곡사는 9 암자를 거느린 대찰이었습니다. 모두 전란으로 전소와 황폐되었으며 지금은 산내암자로 적조암만 남아 있습니다.

 




현재 대곡사에 남아 있는 문화재는 대곡사 대웅전 (보물 제1831호), 경상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61호 대곡사 범종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9호 대곡사 명부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05호 대곡사 다층석탑이 있으며 부속건물로 나한전, 산신각, 종무소, 요사채가 있습니다. 의성 대곡사을 들어서는 일주문의 장대함에 먼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굵은 두 기둥에 달아 올린 공포의 화려함은 천년고찰 대곡사의 풍모를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먼저 만나는 게 대곡사 범종각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2층의 누각 형태로 보아 대곡사 범종루가 맞는 것 같습니다. 현재 사찰의 범종은 따로 범종각을 지어 그곳에다 달아 놓았으며 현재는 대곡사의 출입문을 지키는 누각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대곡사 범종각은 1368년 고려 공민왕 대 처음 건립됐습니다.

 

대곡사 범종각



그러나 1598년 정유재란 때 대부분 소실되면서 범종각 또한 불탔습니다. 지금의 범종각은 대곡사를 중창한 탄우대사와 중수한 태전선사에 의해 건립됐다 합니다. 범종각은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으로 중층의 누각입니다. 공포는 외2출목에 내3출목을 두었으며 건축양식을 보면 조선 후기에 지어졌습니다. 아마 대웅전의 건축을 범종각에 접목하여 모방한 것으로 보이며 종각 안에 있던 범종은 용문사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대곡사 다층석탑





대곡사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게 개인적으로 대웅전과 다층석탑입니다. 이런 형태의 석탑은 이곳 외에도 두 번 정도 더 본 것 같은데 지금 기억이 잘 나지 않으나 아주 특이한 석탑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다층석탑 기단부는 45cm의 화강암이며 점판암의 연화 대좌로 된 탑신부는 20cm, 탑신의 높이는 108cm입니다. 그러나 상륜부는 현재 유실된 상태입니다.

 








다층석탑의 전체 높이는 173cm로 12층이며 6층과 7층 옥개석 간의 체감비율이 차이가 다른 층에 비해 급격한 것은 그사이의 한 층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처음 만들어졌을 때 13층의 석탑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다층석탑은 각층 옥신석이 남아있지 않으며 옥개석도 부분적으로 손상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초기의 청석탑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남아 있는 이런 형태의 탑은 12기 정도로 문화적 가치가 아주 높은 편입니다.




대곡사 명부전



대곡사 명부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이 건물 또한 1605년과 1687년에 탄우와 대선 두 스님에 의해 중창·중건하였지만, 현재 명부전의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건물의 구조와 건축양식인 오량과 겹처마 맞배지붕을 보면서 17~18세기의 형식으로 지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성의 비봉산 대곡사는 의성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여행지입니다. 

 











대곡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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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군여행/의성군가볼만한곳)의성군 비봉산 대곡사 대웅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보여주는 의성 대곡사 대웅전 여행.


의성군의 비봉산 아래 고찰인 대곡사 여행을 하고 왔습니다. 대곡사는 산이 낮지만, 봉황이 날개를 펼친 듯 옹골찬 모습을 한 비봉산 기슭에 1368년 고려 공민왕 17년 지공스님이 원나라와 고려를 왕래하면서 불법을 펼친 것을 기념해 지은 절이라 합니다. 이는 처음 세운 목적에 따라 대국사로 불렀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대국사는 대부분 소실되었습니다.





의성 대곡사 주소: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봉정리 894

의성대곡사 전화:054-862-4222


2016/11/07 - (경북의성여행)대곡사 적조암. 비봉산 대곡사 적조암의 독특한 건축양식인 구포루 인법당.


 


그러다 1605년 선조 38년에 탄우대사가 중창하였는데 그 뒤부터 대곡사로 절이름이 바뀌었습니다. 대곡사의 창건에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1960년 대곡사 앞의 작은 텃밭에서 통일신라 후기 것으로 보이는 금동 불상이 나왔고 고려 초기로 보이는 대웅전 앞의 다층석탑, 백운 이규보의 대곡사 탐방시구 등을 보면서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 초기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의성 비봉산 대곡사에는 현재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대곡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문화재는 대웅전입니다. 대웅전은 원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0호였다가 보물 제1831호로 2014년 6월에 승격 지정되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보물로 승격된 대곡사 대웅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왜 보물로 지정되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한데 대곡사 대웅전은 앞면 3칸에 옆면 2칸 규모의 다포계양식의 팔작지붕으로 5량가 건물입니다. 1605년 탄우대사가 중창했던 대웅전을 1687년 숙종 13년에 태전선사께서 다시 중건했습니다.





대웅전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불단이 뒷줄의 평주선 보다 뒤쪽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불단의 위치가 평면구성이 같은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인 불전에서는 18세기 이후 점차 줄어드는 추세로 대곡사 대웅전은 17세기 후반인 중건 당시의 불교 건축물의 건축사적 흐름을 읽게 해줍니다.





또한 후면 서측협칸에는 창호 중간에 기둥을 두어 창문을 두 개처럼 보이게 하는 영쌍창구조이며 좌우 측면과 배면의 벽체에는 중인방 없이 세로 벽선을 세웠으며 정면과 양 측면의 기둥 아래쪽에는 쪽마루를 달아 낸 흔적인 큰 구멍이 남아 있습니다.





불전 정면에 마루를 둔 사례나 영쌍창과 세로 벽선은 18세기 이전 건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오래된 양식입니다. 다포계 형식의 포작은 내외 3출목이며 건물의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 면 기둥 간격을 똑 같게 하고 주간에 두 구씩의 공포를 배치하여 지붕 하중을 안정되게 받게 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건축공간계획과 구조계획이 함께 설계된 세심하고 능숙한 기법을 볼 수 있습니다. 기둥과 보 등의 부재를 보면 섬세한 가공이나 미적인 의장성은 최소화하고 가구의 구조는 간결하며 명확하게 결구된 양식입니다.





한마디로 대곡사 대웅전의 특징은 공포의 동일한 내외출목수, 배면 개구부의 영쌍창, 불단의 배치와 건의 마루 흔적 등을 보면서 대곡사 대웅전의 중건 당시 시기적 경향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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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사 대웅전은 의성지역의 불교사찰이 부흥하던 시기의 건축 양식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건축사적으로 대단한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화재청 보도자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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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성여행/경북의성가볼만한곳)대곡사 적조암. 비봉산 대곡사 적조암의 독특한 건축양식인 구포루 인법당. 


경북 의성을 여행하다가 찾았던 비봉산 대곡사 적조암. 적조암은 대곡사의 9개 암자 중에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습니다. 먼저 적조암을 거느린 대곡사를 간략하게 언급하면 1368년인 고려 시대 공민왕 17년에 인도 승려 지공과 당시 왕사였던 나옹선사 혜근에 의해 창건하였다 합니다.



 

대곡사 적조암 주소: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대곡사길 200

 대곡사 적조암 문의전화 054-862-6322


 


그러나 대곡사의 창건연대를 두고 다른 설도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말에서 고려 초로 보는 견해입니다. 백운 이규보의 대곡사 탐방에 관한 시와 인도 승려 지공 생몰연대, 그리고 대웅전 앞 다층석탑의 양식 등을 종합해 보면 더욱 그러하며 또한, 1960년에 통일신라 후기의 금동불상이 대곡사의 텃밭에서 발견되어 통일신라말에서 고려 초의 창건연대에 더욱 신빙성을 높여줍니다.



이번 포스트는 대곡사의 암자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적조암입니다. 대곡사 부속암자로 적조암만 남게 된 연유가 있습니다. 이는 정유재란으로 인해 대곡사와 함께 9 암자가 전란으로 모두 소실하였기 때문입니다. 대곡사에서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암자 적조암에는 여느 산속 암자의 단출한 전각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높은 계단을 올라 적조암 경내에 들어서면 왼쪽에 조선 시대 사대부 집의 누마루식 건축 양식에 눈길이 갑니다. 사찰에 이런 건축양식은 좀체 볼 수 없는데 특이하게도 대곡사 적조암서 볼 수 있었습니다. 적조암을 품은 산은 비봉산입니다. 적조암의 상량문을 보면 "봉황이 머문다는 뜻이며 비봉산의 주맥에 적조암이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적조암 구포루 인법당



현재 독특한 건축 양식과 희소성으로 2014년 12월 18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2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대곡사 적조암의 구포루는 인법당으로 19세기 중반인 1847년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18세기의 구포루 중창설을 보면 그 이전에도 건물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지금과 같은 건물 모습과는 다르겠지만 구포루 인법당은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대곡사에 머물렀던 고승들의 진영을 모시는 진영각으로 사용했지만, 현재는 불교중앙박물관을 이관한 상태입니다. 구포루 인법당은 앞면 4칸에 옆면 4칸 규모의 ‘ㄱ' 자형이며 5량가의 이익공건물입니다.





건물은 경사진 대지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앞쪽에다 앞면 2칸, 옆면 2칸은 마루를 넣었습니다. 누마루 밑을 보면 마루를 받치는 기둥을 세웠고 누마루 주위로는 툇마루를 달아내어 그 끝에는 계자 난간을 둘렀습니다.







뒤쪽 2칸은 온돌방을 넣었으며 이외에도 처마에는 활주를 세우고 사자 모양의 화반을 설치하는 등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당이 방으로 바뀌고 벽장을 내는 등 부분적인 건물의 변형으로 인해 아쉬움은 많으나 건축물의 문화재적 의미는 상당한 가치가 있다는 평가입니다.










조계암의 중심건물인 극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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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의성여행/상주·의성가볼만한곳)낙동강 관수루. 위풍당당한 관수루, 낙동강 3대누각인 관수루에 오르다. 

 

상주와 의성을 경계하는 낙동강 강변에 안동의 영호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낙동강의 3대 누각으로 불렸던 관수루가 위풍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관수루가 지어졌을 때는 고려 중엽으로 보고 있으며 관수루의 중건기에는 지금의 위치가 아닌 반대편에 새워졌습니다. 그러나 홍수로 떠내려갔는지 조선 초에 지금의 자리인 동쪽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1653년, 1734년, 1842년에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다 조선말인 1874년 갑술년에 불어난 홍수로 유실되었습니다. 관수루는 창건과 함께 여러 번의 중수와 중창을 거듭하였으며 지금의 관수루는 1990년에 의성군에서 지역민의 힘을 모아 현재 모습으로 복원하였습니다. 관수루의 ‘관수’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따왔으며 누각은 이익공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5량가 기와 건물입니다.





앞면 4칸에다 옆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2층은 통칸으로 개방하였고 우물마루에. 그 끝은 계자난간을 돌렸습니다. 관수루 누마루에는 많은 현판이 걸려 있으며 예로부터 관수루의 절경이 빼어나 많은 시인 묵객을 불러들였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조선 시대 성리학의 태두 점필재 김종직, 성종실록에 김종직의 사초로 극형을 당한 탁영 김일손의 현액은 스승 김종직과 함께 나란히 걸려 있습니다. 퇴계 이황, 백운 이규보, 수헌 권오복, 봉창 유항, 총계 조동좌, 강고 류심춘, 성재 허부 등의 현액이 사방을 빽빽하게 채우며 이곳을 읊은 한시를 보면서 조선 시대 선비들 사이에서 관수루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의 고고한 강물은 말없이 흘러 바위 절벽을 깎아내리는 게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선비 정신에 비유해선지 유달리 낙동강을 노래한 한시는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점필재 김종직은 낙동강의 관수루에서 한시를 통해 당시 탐관오리의 횡포를 질타하며 자신 또한 벼슬아치로서 뒤돌아 보게 된다는 민용풍의 한시를 남겼으며 점필재집에 수록된 ‘낙동요(洛東謠)’의 현액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낙동요_점필재 김종직


黃池之源?濫觴(황지지원재남상:황지의 시원은 겨우 잔을 넘칠 정도인데)

奔流倒此何湯湯(분류도차하탕탕:이곳까지 흘러와서 어찌 이리 넓어졌나)

一水中分六十州(일수중분육십주:한 물이 육십 고을의 한가운데를 가르니)

津渡幾處聯帆檣(진도기처연범장:나루터마다 돛대가 줄을 서있네)

海門直下四百里(해문직하사백리:바다까지 사백리를 바로 흘러)

便風分送往來(편풍분송왕래상:편풍을 이용해 오고가는 상인의 배는 분주하고

暮宿觀水樓(모숙관수루:저녁에 관수루에서 머무네 )

樓下綱船千萬緡(누하강선천만민:누각 아래 배에는 천만냥을 실은 배가 묶였으니)

南民何以堪誅求(남민하이감주구:남쪽 백성들은 어찌 노략질을 견디리 )

缾缾已罄橡栗空(병앵이경상률공:쌀독은 비었고 도토리와 밤마저 없는데)

江干歌吹椎肥牛(강간가취추비우:강가에서는 풍악을 울리며 살찐 소를 잡네)

皇華使者如流星(황화사자여유성:임금이 보낸 사람은 떨어지는 별처럼 빠르게 지나가니)

道傍觸誰問名(도방촉루수문명:길 옆 해골에게는 누가 이름이라도 물어보겠는가)

少女風王孫草(소녀풍왕손초:왕손초에 소녀 바람이 불어 )

望眼悠悠入飛鳥(망안유유입비조:아득하게 멀리 보니 새는 날아들고)

故鄕花事轉頭新(고향화사전두신:고향의 꽃소식은 계절따라 피며)

凶年不屬嬉遊人(흉년불속희유인:흉년이라 봄놀이를 즐기는 사람 아무도 없고)

倚柱且高歌(의주차고가:기둥에 기대어 노래나 불러보리댄체 )

忽覺春興(홀각춘흥간:봄의 흥취는 어느 듯 가고 )

白鷗欲笑我(백구욕소아:갈매기는 나를 비웃으려는 듯 )

似忙還似閑(사망환사한:바쁜듯 되려 한가하게 )





그리고 점필재 김종직은 ‘낙동요‘ 이외에도 ’낙동나루‘ 현액도 함께 걸려 있습니다.

津吏非瀧吏 官人卽邑人(진리비농리 관인즉읍인·나루의 아전은 농의 아전이 아니며 그 관리는 바로 읍사람이구나 )

三章辭聖主 五馬慰慈親(삼장사성주 오마위자친·삼장으로 임금님을 떠나와 오마로서 인자한 어머님을 위로하구나)

白鳥如迎棹 靑山慣送賓(백조여영도 청산관송빈·흰 새는 배 맞이하는 듯하며 청산은 손님 보내기에 익숙하구나)

澄江無點綴 持以律吾身(징강무점철 지이율오신·맑은 강은 한 점 티끌조차 없으니 이를 나의 계율로 삼으려네





그리고 퇴계이황 선생의 한시 ‘관수루’입니다.


洛水吾南國(낙동오국남·낙동강 물은 우리 남국의 자랑)

尊爲衆水君(존위중수군·뭇 강물의 으뜸이라네)

樓名知妙悟(누명지묘오·누각 이름은 묘리의 깨달음을 알게 하고)

地勢見雄分(지세견웅분·지세는 웅대하게 분리됨을 보네)

野濶烟凝樹(야활연응수·들은 넓어 안개가 나무숲에 엉기고)

江淸雨捲雲(강청우권운·강물은 맑아 비온 뒤 구름이 걷히었네)

匆匆催馹騎(총총최일기·총총히 역마를 재촉해 달리니)

要爲趁公文(요위진공문·공문을 진달하기 때문일세)


 한시 풀이는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의 퇴계학맥 누정편 관수루를 인용했습니다.




성재 허부 관수루(觀水樓)


公事頻過洛 공무(公務)로 인해 자주 낙동강을 지나니

舟人識使君 뱃사공도 또한 나를 알아보네.

江聲千里大 강물 소리는 천리 길에 확대되고

地勢二州分 지세는 웅장하게 두 고을로 나뉘었네.

漁戶排津樹 어부의 집 앞에는 나룻나무 즐비하고

鹽帆掣海雲 소금 실은 돛단배는 바다구름 끌고 왔네.

陶山空悵望 도산(陶山) 쪽을 향해 공연히 슬프게 바라보는데

歌短不成文 노래 짧아 글 이루지 못하겠네.

한시 풀이는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의 퇴계학맥 누정편 관수루를 인용했습니다.







봉창 유항 관수루(觀水樓)

 

宿客携琴夜入樓(숙객휴금야입루·자고 갈 손님 거문고 들고 누각에 오르는 밤)

碧簷星月耿新秋(벽첨성월경신추·푸른 처마 머리엔 별과 달이 빛나니 가을이 새롭네)

櫓聲驚夢江天曉(노성경몽강천효·노 젓는 소리에 놀라 꿈을 깨니 강가에 하늘이 밝아 오는데)

身世渾疑幻白鷗(신세혼의환백구·내 신세 혼연히 흰 갈매기로 화신한 신선인 듯 의심해보네)

한시 풀이는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의 퇴계학맥 누정편 관수루를 인용했습니다.




수헌 권오복 관수루(觀水樓)


客裏羈懷惡(객이기회악·객지에서 나그네 마음이 울적한데)

逢君又送君(봉군우송군·그대를 만나자마자 또다시 보내다니)

孤帆和雁落(고범화안락·외로운 돛은 기러기와 함께 떠나가고)

遠岫點螺分(원수점나분·먼 산봉우리 소라껍질같이 나뉘어섰네)

樓上一盃酒(누상일배주·누각 위에서는 한잔 술이 오고 가는데)

洛東千里雲(낙동천리운·낙동강에는 천리 길 구름만 이네)

蒼茫天欲暮(창망천욕모·창망히 저 하늘마저 저물고자 하니)

吟斷不成文(음단불성문·읊는 소리 막히어 글을 지을 수 없네)

 한시 풀이는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의 퇴계학맥 누정편 관수루를 인용했습니다.




탁영 김일손 관수루(觀水樓)


晩泊沙汀葉葉舟(만박사정접주·모래톱에 늦게 댄 조각배)

紛紛去馬與來牛(분분거마여내우·어지러이 마소들이 지나가네)

江山萬古只如此(강산만고지여차·강산은 만고에 다만 이 같은 것)

人物一生長自休(인물일생장자후·인물의 일생 또한 길이 쉬누나)

西日已沈波渺渺(서일이침파묘·저녁 해 벌써 지니 파도는 아득하고)

東流不盡思悠悠(동류불진사유유·흐르는 물 쉬지 않아 생각이 길어지네)

停舟獨立矄黃久(정주독립훈황구·배가 멈춰 홀로 서니 황혼이 깊은데)

掠水飛回雙白鷗(약수비회쌍백구·쌍쌍이 나는 갈매기는 물을 치며 돌아가네)

 한시 풀이는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의 퇴계학맥 누정편 관수루를 인용했습니다.




탁영 김일손의 관수루(觀水樓)


江花江月十登船(강화월십등선·강가에 꽃피고 강물에 달이 비치어 십여 명이 배에 오르니)

司馬靑衫已五年(사마청삼이오년·사마에 오른 청삼 벼슬 벌써 오년이나 지났구나)

莫謂宦遊無所得(막위환유무소득·벼슬길에 노니는 몸 소득이 없다고 이르지 마오)

風流長夜鏡中天(풍유장야경중천·풍류를 즐기는 경중천(鏡中天)의 아름다움이여!)

 한시 풀이는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의 퇴계학맥 누정편 관수루를 인용했습니다.




탁영 김일손 관수루(觀水樓)

 

落日長程畔(낙일장정반·해는 지고 가는 길 먼 들판 가에서)

把盃持勸君(파배지권군·잔을 잡아 그대에게 권하노라)

危樓天欲襯(위루천욕친·높은 누각은 하늘에 가깝고)

官渡路橫分(관도로횡분·나루터에는 길이 가로로 나뉘었네)

去客沒孤鳥(거객몰고조·손님 떠나니 외로운 새만 부침하고)

浮生同片雲(부생동반운·부평초 같은 삶이 조각구름과 같구나)

江風不解別(강풍불해별·강바람 우리 이별을 풀어주지 못하고)

吹到動波文(취도동파문·물위로만 불어대어 물결 일으키네)


 한시 풀이는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의 퇴계학맥 누정편 관수루를 인용했습니다.


수헌 권오복 관수루(觀水樓)


是身天地一虛舟(시신천지일허주·이 몸은 이 세상에 한 빈 배와 같은 것)

劒氣當年射斗牛(검기당년사두우·무술을 닦던 그 당시엔 두우성을 쏠 듯 했네)

羈思向來何落落(기사향래하락락·나그네 생각 돌이켜 보니, 낙낙할 뿐)

宦情從此便休休(환정종차편휴휴· 벼슬길 이로부터 쉬게 되리라)

英雄萬古幾人在(영웅만고기인재·만고의 영웅들이 몇 분이나 계셨던가)

烟月空江引興悠(연월공강인흥유·연하에 가린 달빛만이 빈 강에서 흥을 돋우네)

觀水觀山皆可樂(관수관산개가악·산수(山水)에 관심 두는 것은 모두 즐거운 것)

鷗來忘我我忘鷗(구래망아아망구·갈매기는 나를 잊고 나도 갈매기를 잊네)


 한시 풀이는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의 퇴계학맥 누정편 관수루를 인용했습니다.





총계 조동좌 관수루(觀水樓)

 

東風孤倚驛西樓 (동풍고의역서루·봄바람 의지하고 관수루에 달려오니)

物色蕭然滿兩眸(물색소연만량모·물색은 쓸쓸하게 두 눈에 가득 차네)

沙伐江山餘百戰(사벌강산여백전·사벌(沙伐)의 옛 강산은 백 번 전쟁 치른 터 남아있고)

徐羅時事杳千秋(서라시사묘천추·신라 때 찬란한 일 천추에 아득하네)

依俙芝曲商顔裏(의희지곡상한이·지원의 곡조는 상안 속에 의회하고)

寂寞龜書洛水頭(적막구서낙수두·거북에 쓴 글은 낙수 위에서 적막하네)

往蹟微茫何處問(황적미망하처문·지난 사적 미망하여 물을 곳 어디 있는가)

碧江無語夕陽流(벽강무어석양류·푸른 강물만 대답 없이 석양 따라 흐르네)


 한시 풀이는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의 퇴계학맥 누정편 관수루를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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