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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산청여행)단속사지 삼층석탑과 정당매. 산청 3매 단속사지 삼층석탑의 정당매를 찾아서,


지리산 산청의 3매(梅)에서 이번에는 두 번째 여행지인 정당매의 단속사지입니다. 

산청 3매는 정당매, 남사예담촌의 원정매와 산천재의 남명매를 말합니다. 

남사리 하씨 고가에서는 원정매가 날씨 탓에 피지 않아서 허탕을 쳤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운리의 단속사로 향했습니다.





산청군 정당매,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 주소: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 302

산청군 정당매,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 연락처:055-970-6441

단속사지 동·서 삼층석탑 보물 제72·73호


2018/03/21 - (경남여행/산청여행)남사예담촌 산청 남사리 이씨고가. 가장 아름다운 마을 남사예담촌 산청 남사리 이씨고가

2013/06/13 - (경남여행/산청여행)남명선생 사적지 남명기념관. 시천면 덕산에서 그의 선비정신을 옅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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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지 또한, 1,000m가 넘는 웅석봉의 남쪽 청계 계곡을 끼고 자리한 곳인 만큼 아무리 남쪽을 향해 있다지만 매화가 과연 폈을까 반신반의하며 찾았습니다.

그냥 단속사지 삼층석탑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며 포기하고 삼층석탑 구경만 했습니다. 

단속사지 동·서삼층석탑은 웅석봉 달뜨기 능선과 석대산의 두 능선이 내려오는 골짜기 안에 단속사지가 있습니다.

 


단속사지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을 보면 천년을 훨씬 넘긴 고찰 터입니다. 

단속사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단속사 창건은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모두 신라 경덕왕 때입니다. 

748년(경덕왕 7년) 직장 이준은 평소에 출가해 절을 짓겠다는 뜻을 펼쳤는데 그걸 실현에 옮기며 조연에 있던 암자를 크게 중창 한 게 단속사라 합니다. 



또 다른 설은 763년(경덕왕 22년) 신충이 지리산을 찾아 ‘세속의 모든 인연과 절연하다’라는 뜻의 단속사를 창건했다는 설입니다. 

단속사는 신라의 신행, 고려의 탄연선사 등이 입적했던 곳으로 조선조까지 고승 대덕과 운수납자의 수행처였습니다.



단속사의 폐사는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으로 1568년(선조 1년) 유생에 의해 불상과 경판이 불살라졌고 정유재란에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중수했으나 폐사되었다 합니다. 

현재 단속사지에 당간지주와 삼층석탑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금당터와 강당터 등 당시 초석이 남아 있어 옛 단속사의 영화를 보는 듯합니다.





단속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금당터 앞에 이중기단으로 조성했습니다. 

그중에 아래 기단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지붕돌의 아랫면에는 5단 층급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탑 중에서 동탑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서탑은 상대적으로 파손이 심한 모습입니다. 

1967년 해체과정에서 서탑 몸돌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보관한 것으로 보이는 둥근 모양의 사리공이 나왔습니다.

 




단속사지에서 단속사지 동서 삼층석탑과 함께 유명한 게 매화입니다. 

단속사지의 매화는 정당매라고 따로 이름하여 부릅니다. 

단속사지 정당매는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이던 강희백(1357~1402)이 과거 준비를 하면서 단속사 경내에 심었던 매화나무입니다. 

그 매화를 강희백이 지낸 벼슬인 정당문학에서 따와 정당매라 부릅니다.





정당매가 늙어죽자 후손이 그 자리에다 새로운 매화나무를 갖다 심었습니다. 

그 세월이 600여년이 넘다보니 매화나무는 수도 없이 교체되어 오늘날까지 정당매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단속사의 정당매를 보고 많은 문인이 한시를 남겼습니다. 

그중에서도 생육신의 한사람인 추강 남효은과 김종직의 제자였던 탁영 김일손, 지리산 천왕봉을 노래한 조선 중기의 남명 조식 선생도 단속사의 정당매를 찾아 시를 남겼습니다.







단속사지 앞에는 까만 빗돌에 남명선생이 마침 단속사를 찾은 사명당에게 준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옮겨 보면 

“꽃은 조연(槽淵)의 돌에 떨어지고/ 옛 단속사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이별하던 때 잘 기억해 두게나/ 정당매(政堂梅) 푸른 열매 맺었을 때”

 








정당매가 과연 피었을 까하며 설레게 했던 단속사지. 

일행 중 단속사지 삼층석탑 주위의 매화나무를 유심히 보다가 “매화다”하는 소리에 흥분되어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모든 매화는 피었다가 또다시 꽃잎을 떨구며 자연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우리가 매화를 찍는다고 난리를 치니까 할머니께서 앉으시면서 요즘 매화를 찾으러 많은 사람이 온다고 했습니다. 

"여짝도 있고 저짝도 있다"하시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전각 옆의 진짜 정당매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단속사지 옆에 핀 매화를 몇 장 찍고는 빨리 이동하자며 마지막 남은 매화 여행지 산천재로 향했습니다.



산천재에 다 왔을 때 쯤 정당매에 가지 않았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차를 되돌려 갈 수도 없고 다음 일정도 있어 단속사지 정당매는 미완의 숙제로 남겨두었습니다. 

과연 폈을까 아니면 안 폈을까를 노닥거리며 아마 진짜 정당매는 안폈을 것이라면서 위안 아닌 위안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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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산청여행/지리산여행)시천면 덕산 수양산~마근담 계곡 산행 개요.


산청군 시천면 덕산은 남명조식선생을 빼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남명선생은 처가가 있는 김해 대동면 신어산자락에 산해정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다가 48세에 외가가 있는 삼가면 토리마을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조선시대의 풍습으로 양반내들은 결혼과 함께 처가입향을 하였다. 조식선생의 부친도 처가인 삼가면 외토리로 입향을 하여 남명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삼가가 외가이며 고향이 된다.  외토리에서 선생은 뇌룡정과 계부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한다. 선생은 55세에 이곳 뇌룡정에서 왕과 조정을 조롱하는 을묘사직소(단성소)를 올린 후 61세가 되어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덕산에 산천재를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양성에 매진하며 이곳에서 여생을 보낸다. 그 만큼 덕산은 남명선생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곳이다. 덕산서원과 선생이 찾아와 즐겼다는 백운계곡이 모두 덕산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국가문화재 사적 305호인 산천재와 별묘 신도비 남명기념관 그리고 묘소등이 조성 되어 있다. 산천재 뜰 앞에는 남명선생이 손수 심었다는 460년된 남명매가 남아 있다. 남명선생을 빼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이곳에 산청군에서 개설한 남명등산로가 있어 소개를 한다.






사리버스정류장의 옛 산천재 모습




덕산교를 건너면




사리마을회관 옆의 수양산 등산로 입구.











시무산 정상. 삼각점이 있다.




402m봉 갈림길 . 수양산~덕산교 나무판





☞(경남여행/산청여행/지리산여행)시천면 덕산 수양산~마근담 계곡 산행 경로.



산행경로를 보면 산천재와 남명기념관이 있는 사리 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한다. 덕산교~사리마을회관~임도~시무산 정상~402m봉~판짐재~수양산 정상~감나무 밭~벌목봉 정상~지리산 둘레길 사거리(용무림재)를 거쳐 안마근담 갈림길~마근담~사리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를 잡았다. 산행거리는 13.5㎞며 산행시간은 4시간 안팎, 휴식을 포함하면 5시간 이상이 걸린다. 그리고 지리산 둘레길 사거리인 용무림재에서 왼쪽은 마근담 계곡 방향이고 그 반대 방향인 오른쪽은 남명선생이 찾아 들었다는 절경의 백운계곡으로 여름산행지로 최적의 장소라 할  수 있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시천면 소재지와 구곡산.




수양산 정상. 작은 안내판이 정상임을 알린다.







뒷 봉우리가 벌목봉. 300m의 표고차를 극복해야 한다.







안부의 감나무 밭





☞(경남여행/산청여행/지리산여행)시천면 덕산 수양산~마근담 계곡 산행 사리마을에서 시작.



산행은 산청군 시천면 사리 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한다. 버스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산천재와 남명기념관이 나오며 하산 후 들러 보도록 하자. 수양산 산행은 그 반대인 진주방향이다. 덕산교를 건너면 사리마을회관이 나오고 맞은 편 산으로 임도길이 올라간다. 입구 나무에 리본이 많이 걸려 있어 쉽게 들머리를 찾을 수 있다. 콘크리트 임도를 따라 올라간다. 지그제그 임도 길을 잠깐 올라가면 무덤을 지나 비포장 임도로 바뀐다. 다시 앞에 무덤이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크게 꺾어 돈다. 5분 뒤 수양산 등산길은 임도를 버리고 오른쪽 산길로 올라간다. 이곳도리본이 여럿 걸려 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등산로 옆으로 오래된 철조망이 따라 올라간다





벌목봉 오르는 된비알 산길.




벌목봉 정상을 알리는 표지판.







벌목봉을 내려 오면서 보이는 백운계곡과 웅삭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




지리산 둘레길인 용무림재. 이곳에서 왼족인 마근담 방향.





☞(경남여행/산청여행/지리산여행)시천면 덕산 수양산~마근담 계곡 산행 시무산과 판짐재를 지나면 수영산.



산길은 서서히 오름길이다. 무덤 하나를 지나며 급경사 된비알로 갈지자로 이어지다 능선으로 올라간다. 능선이 완만해지면서 시무산 정상에 올라선다. 시무산의 내력은 알 수 없지만 '산청454' 삼각점이 박혀 있다. 이번 산행 내내 조망이 시원찮다. 그러나 그만큼 숲 그늘을 제공하는 산길은 완만한 능선을 따라 왼쪽 10시 방향으로 간다. 다시 시무산과 비슷한 높이인 402m봉에 닿는다. '수양산/덕산교' 방향을 알리는 작은 나무판이 걸려 있는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가파르게 내려간다. 산길은 곧 완만해지며 정면 나무 사이로 수양산 전위봉인 판짐재(454m)가 솟아 있다. 멀리서 보면 수양산으로 착각하기 쉽다.







마근담으로 내려가는 지리산들레길.








콘크리트 임도로 내려서면 왼쪽 사리 임도 방향.




안마근담 갈림길. 이곳에서도 역시 왼쪽마근잠 방향.






☞(경남여행/산청여행/지리산여행)시천면 덕산 수양산~마근담 계곡 산행 최대의 고비 벌목봉 오름길.



10분이면 사거리 고개가 나온다.왼쪽으로 내려가는 흔적이 뚜렷하다. 수양산은 직진해서 정면의 완만한 오르막을 타야한다. 15분 후 왼쪽 소나무 사이로 시천면 소재지인 덕산과 덕천강, 구곡산이 높게 솟아 있다. 잠시 뒤면 밑에서 본 454m봉 판짐재에닿는다. 수양산은 완만한 능선을 따라 간다. 묘터인지 넓은 공터를 지나면 수양산 정상이다. 정상석 대신 나무판에 수양산이라 적혀 있고 '산청455' 삼각점과 시멘트 원기둥이 서 있다. 여기도 시무산 정상 처럼 조망은 기대하기 힘들다. 오늘 산행의 최고봉인 벌목봉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표고차가 300m 이상이다. 벌목봉을 가기위해서는 정면으로 내려간다.




마근담 펜션.




감투봉의로 이어지는 능선.







필자의 모습.





☞(경남여행/산청여행/지리산여행)시천면 덕산 수양산~마근담 계곡 산행. 지리산둘레길인 용무림재에서 마금단 계곡 하산.  



안부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다. 10분이면 삼거리다. 오른쪽은 개간지라 나무를 걸쳐 막아 놓았다. 왼쪽으로 가면 곧 임도 갈림길을 만나 직진한다. 6분이면 감나무밭에 선다 봄철에는 고사리가 지천으로 올라와 있는 농장으로 등산객은 농작물에 욕심을 내면 안될 것 같다. 정면으로 직진하여 소나무 숲 방향으로 들어선다. 여기도 리본이 많이 붙어 있다. 숲에 들어서면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곧 파 놓은 물길을 지나 간다. 산길은 잠시 뒤 이번 산행의 최고 고비와 직면한다. 급격한 오르막 경사로 고도차 300m나 극복해야한다. 이곳에서는 체력안배를 잘하여 천천히 올라야하며 급경사라 쉬기도 마땅찮다.





마근담에 있는 고목.













물의 맑기가 옥수인듯 깨끗한 마근담계곡. 상수원 보호구역이라 아쉽다.






☞(경남여행/산청여행/지리산여행)시천면 덕산 수양산~마근담 계곡 산행 백운게곡을 보며...



급경사를 20여 분 올라가면 산길은 벌목봉을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간다. 잠시 후 743m 벌목봉 정상에 오른다. '벌목봉 743m'라 적힌 나무판이 걸려 있고 이곳 또한 조망이 없다. 옆에는 폐헬기장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내려간다. 고도를 그 만큼 높혀서인지 지리산 둘레길인 용무림재까지는 완만한 내리막이다. 하산 길 능선 오른쪽으로 깊게 파여진 골짜기가 백운계곡이다. 산길은 완만해지면서 지리산 둘레길과 만나는 용무림재 사거리다. 둘레길 이정표 뒤 능선길은 웅석붕으로 올라가는 산길이다. 입구에 지리산둘레길이 아니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오른쪽은 백운계곡으로 내려가는 지리산 둘레길이고 원점회귀를 하기 위해서는 왼쪽인 마근담 방향이다.








마근담계곡의 어느 집 정원의 모습. ㅋㅋ 남근석 같기더도하고







출발지 사리 버스 정류장.






☞(경남여행/산청여행/지리산여행)시천면 덕산 수양산~마근담 계곡 산행. 마근담으로 내려서는 지리산 둘레길 신바람. 



넓은 임도를 걷다 다시 잠시 길이 좁아졌다가 다시 넓어진다. 많은 둘레길 탐방객으로 인해 산길은 잘 나 있다. 산허리를 따라 이어지는 지리산 둘레길 코스답게 정비된 길을 따라 20분이면 콘크리트 임도로 내려선다. 왼쪽 내리막길이다. 다시 오른쪽으로 꺾어 6, 7분 가면 사리에서 안마근담으로 올라가는 도로와 만나는 삼거리다. 여기서도 마근담 펜션이 있는 왼쪽으로 내려간다. 오른쪽으로 마근담계곡이 보이고 20여분 넓은 콘크리트 길을 내려가면 마근담교를 건넌다. 여기서부터는 작은 폭포와 소가 이어지지만 아쉽게 상수원보호구역이라 계곡을 바라만 봐야 하는 게 안타깝다. 한참을 내려가면 새로 만든 큰 다리를 지나 아스팔트 도로로 바뀌고 더욱 도로는 넓어 진다. 마을을 지나 도로 끝까지 내려가 삼거리에서 왼쪽은 출발지 사리 버스정류장이고 산천재와 남명기념관은 오른쪽에 있다.

 




산천재와 남명매




남명기념관.





☞(경남여행/산청여행/지리산여행)시천면 덕산 수양산~마근담 계곡 산행. 교통편. 



산청군 시천면 사리는 진주에서 들어가야 한다. 진주행 버스는 사상시외버스터미널이에서 수시로 있다. 진주터미널에서 오전 8시, 8시35분, 9시5분, 9시30분, 10시 등에 출발하는 중산리나 홍계·대원사행 버스를 이용하여 기사님께 사리 정류장을 부탁하면 편리하다. 하산 후 사리에서 진주 가는 버스는 오후 8시(막차)까지 30~4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이번 코스는 원점회귀라 승용차를 이용하면 더욱 편리하다.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진주분기점에서 통영대전고속도로로 바꿔 탄다. 단성IC로 나와 20번 국도를 만나면 우회전해 중산리 방향으로 가다가 사리교차로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 들면 출발지 사리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수양산~마근담 계곡 고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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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산청여행)남명선생 사적지 남명기념관. 남명 조식선생에 대해...


남명선생 기념관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덕산마을로 말년에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제자들에게 물려준곳으로 산천재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다. 이는 남명선생 탄생 500주년에 그의 학덕을 기리고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2004년에 건물을 완공하였다. 남명조식 선생은 1501년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의 외가에서 승문원 판교를 지낸 부친 조언형과 모친  인천이씨의  3남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 자는 건중이며 남명은 호다. 19세때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처형되고 숙부도 이에 연루된 것을 보며  잘못된 정치의 모습을 아쉬워 하였다.

 그는 30세때 부터 그의 처가인 김해시 대동면 신어산 아래 산해정을 짓고 이곳에서 벼슬길에 오르지 않을 것을 작심하며 학문에 매진하고 제자를 가르쳤다. 그를 산림처사라한다. 다시 48세에 삼가의 외토리 고향으로 돌아와 뇌룡정과 계부당을 짓고  제자를 가르쳤다. 그는 55세때 이곳에서 을묘사직소(단성소)를 조정에 올리게 된다.




61세에 그는 현재의 위치인 산청 덕산으로 와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산천재를 짓고 후진 양성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남명선생의 학문은 경(敬)과 의(義) 두글자로 함축되는데 이는 주역의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직內, 義以方外)'에 따온 것으로 경은 내적수양을 통해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하여 근본을 세우는 것이고 의는 경을 근본으로 하여 제반사를 대처함에 있어 과단성 있게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선생은 학문과 삶이 일치하는  생활을 강조하며 백성을 위하는 위민정치를 역설하였다. 


그의 사후 많은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에 따라 임진왜란에 국난극복의 의병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는데 홍의장군 곽재우, 정인홍, 김면, 조종도, 전치원등 50여명에 이르고 오건, 김우웅, 최영경, 하항, 정구, 정탁등  많은 석학들이 선생의 학덕을 계승하였다.(남명학연구원의 남명선생 사적지 팜프렛 발췌)






남명기념관

 

 

 

 

 




☞(경남여행/산청여행)남명선생 사적지 남명기념관. 남명선생이 뇌룡정에서 올린 단성소...


단성소 국역비는 남명선생 동상 오른쪽에 위치를 항다. 2009년 10월10일  남명학연구원에서 선생의 사상과 학문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세웠는데 내용을 보면 단성소는 명종 10년인 1555년 선생이 단성현감을 사직하는 이유와 당시의 국정의 문란을 질타하는 상소문으로 '을묘사직소'라 한다. 임금의 권력이 절대 지존이었던 조선시대에 왕을 '고아'라하고 왕의 어머니 문정왕후를 '과부'라 칭하여 조정과 사림을 놀라게하였다. 이것만 봐도 남명선생의 곧은 성품이 잘 드러난다하겠다.

 

 

 

 

신명사도

 

 

 

☞(경남여행/산청여행)남명선생 사적지 남명기념관. 남명 조식선생의 신명사도와 같은 생활....


신명사도는 마음의  작용을 마치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이치에 비유하여 도식화 한 것으로  그림에서 보는 둥근 성곽안은 사람의 마음이고 그 성곽의 바깥은 외부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신체의 내외부로 부터 일어나는 모든일을 나타낸다 하겠다. 남명선생은 인간의 마음을 성곽에 비유한 것은 외부로 부터 들어오는 사사로운 욕심을 반드시 막아야한다는 선생의 의지를 표현한 그림이다. 선생은 합천삼가의 뇌룡정을 신명사도에 따라 지었고 그의 삶은 신명사도의 내용을 실천하려고하였다.

 

 

남명조식선생 영정

 

 

 

 

덕천서원

 

 

 

 

 

 

 

 

 

 

 

 

 

 

 

 

 

 

 

 

 

 

교지광해군 10년(1618년)내암 정인홍에게 내린 영의정 교지

 

 

유서광해군 1년(1609년)광해군이 내암장인홍에게 내린 유서

 

 

 

 

 

 

 

 

 

 

 

 

 

 

왕실하사 오경백편왕실에서 하사한 책

 

 

 

 

덕천서원사우록남명 선생 스승과 친구 그리고 봉인의 행적을 기록한 책

 

 

 

 

 

 

남명집

 

 

학기유편

 

 

사성현유상병풍남명선생이 직접 그린 공자, 주렴계,정명더, 주자의 유상병풍

 

 

 

 

 

 

 

삼가토리의 뇌룡정

 

 


뇌룡정은 선생이 처가가 있는 김해 대동면에서 48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뇌룡정을 짓고 산천재로 옮겨가기전까지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단성소를 지어 올렸다.


 

경의검

 

 

 

경의검(敬義劍으로 남명선생은 '내명자경 외단자의"라 새겨진 장도를 가슴에 항상 품고 다녔다.

 

성성자

 

 

성성자(惺惺子)라 부르며 남명선생은 평소에도 작은 두개의 방울을 옷고름에 달고 다녔다. 성은 께닮음을 뜻하며 성성자는 남명선생이 스스로 자신을 경계하며 방울소리를 들을때 마다 자신을 일깨우고자하였다.

 

 

 

 

 

 

 

 

 

 

 

여재실

 

 

☞(경남여행/산청여행)남명선생 사적지 남명기념관. 위패를 모신 여재실.


여재실은 문중에서 남명선생에게 제사를 드리는 가묘이다. 여재실에는 남명 선생과 정경부인 숙부인의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불천위로 지정되어 매년 2월8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남명선생 동상 왼쪽에 있는 비로 신도비다. 이비는 남명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잘 표현한 글로 우암송시열이 지었다 한다.

 

 

남명선생묘지

 

 

남명기념관 뒷산 임좌원에 자리잡고 있는 남명선생의 묘소. 생전에 선생이 직접 묫자리를 정하였다한다.  대곡성운 선생이 지은 묘갈명이 서 있다.

  


산해정과 신산서원




☞(경남여행/산청여행)남명선생 사적지 남명기념관. 김해 대동면 주동리 산해정과 신산서원.


신산서원과 산해정은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신어산 아래에 위치를 하고 있다. 산해정은 선생이 30세때 처가가 있는 이곳으로 옮겨와 학문에 정진하며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신산서원은 그 후 신산서원을 세워 선생을 추모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1999년 김해시에서 산해정 뒤에 사당을 건립하여 서원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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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산청여행)시천면 남명조식선생의 산천재와 남명매


‘하늘은 울어도 천왕봉은 울지 않는 다’라며 노래 하였던 조선 중기 최고의 선비 남명 조식 선생. 그는 말년에 천왕봉이 바라 보이는 이곳에 산천재를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산천재의 의미는 ‘주역의 대 축괘로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란다. 




 



☞(경남여행/산청여행)시천면 남명조식선생의 산천재와 남명매. 천왕봉 닮고자...


지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내려 두 계곡이 합쳐지는 이곳 덕산은 그 당시 처럼 현재에도 한적하고 평화롭고 덕스러운 곳이다. 천왕봉에서 울리는 기개를 받으며 천왕봉처럼 삶을 살려고 하신 남명 조식선생. 61세 때 남명선생은 거쳐를 이곳으로 옮겨 와 돌아가실 때 까지 이곳 산천재에서 실천사상을 강조하였다. 






☞(경남여행/산청여행)시천면 남명조식선생의 산천재와 남명매.현재의 산천재 단청으로 의미가 바래.


그 영향으로 그 의 사후 20년 뒤 임진란이 발발하여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처할 때 의병장 곽재우등 그의 제자 50여명은 나라를 구하는데 하나뿐인 목숨을 바쳤다. 언젠가 지금의 산천재를 찾아 간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산천재가 빛바랜 활동 사진속의 올 곧은 선비를 보는 것 같았는데 최근의 산천제 모습을 보니 단청을 입혀 놓아 분바른 기생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화려한 단청으로 인해 선생의 강직한 이미지가 퇴색되는게 아닌지 개인적으로 가슴이 아프다. 꼭 이리 단청을 올려야 했는지 의구심도 든다. 남명선생도 이런 모습의 산천재에서 후학을 양성하였을까.




☞(경남여행/산청여행)시천면 남명조식선생의 산천재와 남명매. 남명선생이 손수 심었다는 남명매.


그 산천재 앞에는 남명선생이 손수 심었다는 매화나무가 한그루 있다. 남명매로 불리며 단속사지의 정당매와 남사마을의 원정매를 일컬어 산청 3매로 부른다. 이곳 산천재 앞 왼편에 심어진 남명매는 남명선생이 손수 이곳에 심어 그의 기품과 강직한 마음을 사군자의 매화에 비유하였는 것 같다. 수령은 450년이 넘어 남명선생이 심었다하여 남명매로 부른다.





☞(경남여행/산청여행)시천면 남명조식선생의 산천재와 남명매. 산천재 교통편


이곳 산천재는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마을에 위치를 한다. 진주에서 산청의 중산리와 대원사행 버스를 이용하면 손쉽게 갈 수 있다. 사리버스정류장에 내리면 버스가 간 방향으로 100m 쯤 가면 남명기념관 맞은편에 산천재가 있다. 배차간격 약 30분.
승용차는 네비에 산천재를 치면 된다.



남명선생이 심었다는 남명매. 수령 450년



단청을 입히기의 산천재 모습. 이 모습이 더 멋스럽게 보이는 것이 올곧은 선비의 모습을 느끼게 한다.








남명선생문집책판 서고 건물













이곳에서 선생은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천왕봉을 닮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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