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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는 대원군의 척화비가 몇 개나 남아 있을까.
기장과 가덕도에 현재 남아 있으며 학창시절의 기억을 총동원해 보니 강화도에 서양 오랑케의 출몰이 잦아지는데 1865년 독일인 오베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묘를 도벌한 것을 보고 대원군은 분개해 있던차에 1866년에 천주교 탄압의 병인양요때 프랑스 신부의 죽음을 구실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하였고 1866년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의 제너럴셔먼호가 습격을 받아 침몰하게 되자 이것을 빌미로 1871년 신미양요가 발발하였다.
그 당시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섭정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며 쇄국을 강화하기 위에 나라의 빗장을 걸게 되는데 백성들에게 서양 오랑케의 침략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비석을 세우게 된다. 고종즉위8년인 1871년 4월에 서울과 전국에다 세운 화강암 비석이 척화비다.
주된내용은 12자로 된 한자로 ‘서양 오랑케가 침범 하였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의 내용이며 그 옆 작은 글씨에는 ‘우리들의 자손만대에 경고한다’.내용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란 한자가 세겨져 있다.
이곳 가덕도의 척화비는 성북동의 건축 공사장에서 발견되었는데 1995년 12월 이곳 천가초등학교로 옮겨 놓았다. 척화비가 철거된 것은 고종즉위 19년인 1882년 임오군란때 청나라에 대원군이 납치되고 우리나라가 여러나라와 교역하자 일본공사의 요구로 철거되었다 한다.
가덕도의 천가초등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큰 은행나무가 두그루 양쪽을 지키고 있다. 이곳 학교의 역사를 말해주는 은행나무 한켠에 작은 비석이 서 있다. 화강암의 재질로 외로이 서 있는 이 비석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반영하는 척화비로 이곳까지 척화비가 서 있었다 하니...
가까이는 기장과 경북청도, 함양의 상림등 전국의 주요 장소에 설치되어 있던 척화비는 현재 전국적으로 몇개만 남아 있다하는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찾아가기
가덕도 선창마을까지 시내버스를 타고가야 된다. 하단역과 동아대학교 앞에서는 58번 버스를 탈 수 있고 부산 북구 금곡동에서는 김해공항을 경유하는 1009번 좌석버스가 운행된다. 여기서 걸어서 천가초등학교로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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