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고서원 은행나무
☞(영천여행/영천가볼만한곳)임고서원. 절개와 의리의 상징인 고려말 충신 포은정몽주의 영천 임고서원, 포은 유물관 여행. 영천 임고서원
우리나라에 삼국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서 충과 절의를 가진 인물을 논할 때 반드시 빠지지 않는 분이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입니다. 또한, 포은 선생을 우리는 무너져가는 고려에 끝까지 신의와 절개의 지킨 충신이자 “신하는 두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임고서원
임고서원주소: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
임고서원안내전화:054-334-8982
포은 정몽주 선생하면 생각나는 게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에게 철퇴로 죽임을 당하는 사건입니다. 그 원인을 보면 1388년 우왕 14년 2월에 명나라는 고려에다 철령 이북. 이동, 이서의 땅이 원래 원나라 땅이니 요동의 관할에 두겠다는 통보를 하자 최영은 격분하여 요동 정벌 계획을 세웁니다.
선죽교
이에 이성계는 4가지 이유를 들어 출정을 반대하지만, 우왕은 최영을 팔도 도통사에, 좌군에는 조민수를, 우군에는 이성계를 임명하고 정벌군을 출병시켰습니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의주의 위화도에서 장마에 발이 묶여 진퇴양난이 됩니다. 이런 심리를 이용하여 이성계 장군은 조민수와 심덕부, 이무, 왕인덕 등 지휘부를 설득하여 명을 치기 위해 요동을 정벌하러 출병했지만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며 회유하여 마침내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정합니다. 이름하여 이를 ‘이성계의 난’이라 합니다.
고려의 국운은 이제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최영은 유배로 뒤에 개경에서 참형을 당하고 우왕은 폐하고 창왕을, 그 이듬해 공양왕을 다시 옹립합니다. 그러나 공양왕마저 쫓아내고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새로운 왕조인 태조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이성계와 정도전, 포은 정몽주, 이방원이 중심에 서게 되는데 위화도 회군 후에 이성계는 정몽주와 함께 왕씨가 아닌 신씨라는 의혹이 파다했던 우왕을 몰아내고 우왕의 아들 창왕을 옹립하였다가 신씨 논란으로 다시 공양왕을 옹립하는 일련의 과정에 정몽주는 모두 참여합니다.
임고서원
그러나 1392년 정몽주는 이성계가 고려가 아닌 신왕조 창업의 야심을 알게 되면서 서로 반목하며 권력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 상황인데 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 낙마하여 벽란도에서 치료 중이라는 정보를 들은 정몽주는 이참에 조준 등 이성계의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단심가와 백로가 비
이를 이방원이 눈치 채고 벽란도로 달려가 아버지 이성계를 급하게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고 정몽주 제거 계획을 세웠습니다. 정몽주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이성계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문병하면서 이방원은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서로 대화를 나누는데 그 유명한 정몽주의 ‘단심가’로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與之(향주일편단심 영유개리여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방원의 ‘하여가’는
“此亦何如 彼亦何如(차역하여 피역하여)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성황당후원 퇴락역하여)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아배약차위 불사역하여)"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백년까지 누리리라"며
선문선답을 나누었습니다.
이방원은 정몽주가 자신들과 뜻을 같이할 수 없다는 것을 단심가로 다시 한 번 확인하였습니다. 정몽주는 이방원과 헤어져 돌아오던 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에게 철퇴를 맞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후에 정몽주가 죽었던 자리에 충의와 절의의 상징인 대나무가 자라 선죽교라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최선매의 공적비
포은선생의 ‘단심가’와 함께 항상 쌍으로 나오는 ‘하여가’ 말고도 포은의 모친인 이씨 부인이 쓴 ‘백로가’입니다.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오롯이 드러난 시로 포은은 어머니의 백로가가 정신적 지주가 되어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개와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나 봅니다. 그럼 백로가를 풀이하여 옮겨 보겠습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올세라
청강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러일까 하노라“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 해야 하나요.
경북 영천에는 고려의 삼은 중 한분인 포은 정몽주를 모신 임고서원이 있습니다. 개성에서 돌아가신 분이 어찌하여 영천에 그를 모신 서원이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생각할 것 같습니다. 정몽주는 포항 오천의 오천 정 씨로 그의 고향은 영천시 임고면입니다.
정몽주 신도비
임고서원은 1553년(명종8년)에 노수, 김응생, 정윤량, 정거 등 유림에 의해 임고면 고천리 부래산 아래 처음 세워졌습니다. 그 이듬해 임고서원에 명종은 많은 위전과 사서오경을 하사하고 백운동 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임고서원에다 사액서원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603년(선조 36년)에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건하여 재 사액을 받았으며 1643년에 장현광을 1727년 왕보인을 추가로 배향하였습니다. 그러나 1871년 흥선대원군은 개경의 숭양서원에서 포은 선생을 배향한다는 이유로 서원철폐령에 의해 임고서원은 훼철됩니다.
1879년에 존영각을 세워 포은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1965년 임고서원을 복원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임고서원은 1980년에 시작된 성역화 사업을 1999년에 끝내고 세운 건물로 묘우는 문충사, 내삼문은 유정문, 강당은 흥문당, 동협는 경의협, 서협은 명성협, 동재는 수성재, 서재는 함육재, 문루는 영광루, 경내에는 심진각과 전사청, 포은 선생 신도비와 단심가 비, 백로가 비 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2001년에 다시 지봉 황보인을 함께 배향하였습니다.
임고서원을 방문하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경상북도 기념물 제63호인 임고서원 은행나무입니다. 이 은행나무는 높이가 약 20m이며 둘레가 5.95m로 500년 된 은행나무로 추정합니다. 원래 임고서원이 부래산에 창건될 때 함께 심어진 나무로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소실되면서 1603년 지금의 자리로 서원을 옮겨 세울 때 함께 옮겨 심은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임고서원의 역사를 고스란히 알고 있는 나무라 하겠습니다. 지금도 생육상태가 아주 좋아 늦가을 노란 단풍으로 물들면 임고서원도 최고의 절정을 이룬다 합니다.
임고서원에는 은행나무와 함께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개성의 선죽교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선죽교는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입니다. 처음에는 선지고라 불렀는데 이방원의 문객인 조영규에게 피살되던 날밤 다리 옆에서 참대나무가 솟았다 하여 선죽교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선죽교는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으로 약 1km 거리인 자남산 남쪽 개울에 있는 다리입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919년 개성 (옛 송도) 시가지를 정비하면서 세운 다리로 추정하는데 길이 8.35m에 너비 3.36m의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만들어질 당시인 고려 시대에는 돌난간이 없었는데 1780년(정조 4년) 정몽주의 후손인 개성 유수 정호인이 선조인 정몽주가 피살된 장소에 우마차가 다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난간을 설치하고 통행을 막고 그 옆에다 다른 돌다리를 만들어 선죽교 대신 통행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임고서원 문루인 영광루 왼쪽 끝에는 통정대부 공조참의로 추증된 최선매의 공적비가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서원이 소실될 위기에 처했을 때 임고서원의 유생으로 있으면서 포은의 영정과 위판을 기룡산 석굴에 안전하게 숨겨 난리가 끝나고 서원을 중건하면서 다시 모시게 됩니다. 그 후 그 공을 인정해 지역유림의 상소로 1891년 고종은 공조참의에 추증하였습니다.
포은 유물관
임고서원과 함께 포은 유물관, 충효관이 있습니다. 포은 유물관은 포은관과 임고관으로 나누어 전시했는데 포은선생의 출생과 효행, 충의, 동방이학의 조종으로 평가받는 그의 학문 등 포은 정몽주의 일대기를 고문서와 영상으로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임고관은 임고서원의 내력과 영남 사림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영천지방의 성리학과 성리학자들을 옛 문서로 만나고 임고서원 축소모형이 전시 중입니다.
포은집
포은정몽주 영정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고려를 멸망케 하고 신왕조를 세운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에게 목숨까지 빼앗겼던 포은 정몽주입니다. “포은선생이 조선의 건국에 반대한 것은 천명과 인심의 향배를 몰랐던 것이 아니라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도 바쳤으니 그 큰 절개를 포상해야 한다”는 권근의 상소로 당시 태종에 오른 이방원에 의해 신원이 회복되어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감 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에 추증 되고 시호를 문충으로 재수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어제의 역적이 오늘의 충신이 되는 게 그래서 역사는 돌고 도는 것 같습니다.
개경의 선죽교에서 돌아가신 포은선생의 묘는 현재 경기도 용인시에 있습니다.
그 내용이 궁금하다면......
포은 정몽주 묘소 포스팅은
☞2015/06/19 - (경기도여행/용인여행)포은 정몽주의 묘.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참살당한 포은 정몽주와 저헌 이석형의 묘소를 참배하다.
선죽판
◆포은 정몽주 포은 유물관 정보 안내◆
★개관일:매주 화요일~일요일(공휴일 포함)
★휴관일:매주 월요일(공휴일시 다음날), 1월1일, 설날, 추석당일
★관람시간:10:00~17:00
★주소: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포은로 447(양항리 501)
★문의 전화:054-334-89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