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경북여행/ 영양울진여행) 낙동정맥 구주령이 아닌 구실령.옥녀당의 전설이 있는 구실령 너무 아름다운 고개입니다.


전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곳에는 고개가 있습니다. 수많은 고개에는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요즘은 당산나무와 당집에서 고개를 안전하게 넘어가게 해달라며 길손이 작은 돌을 올린 후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모습은 전설의 고향에서나 종종 볼 뿐 만나기 힘든 모습이 되었습니다.





한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은 물론이며 낙동정맥 또한 동서를 가르다 보니 수많은 고개가 만들어 졌습니다. 모든 고개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다 있습니다. 전설 없는 고개가 없을 정도로 우리 민초와 밀접하게 연결된 수많은 고개 중 육지속의 섬으로 불리는 경북 영양군 수비면과 울진군 온정면을 연결하는 곳에는 구주령(九珠嶺:표지석에 구주령으로 표기)이 있습니다.






지금은 88번 지방도가 뚫여 있어 수월하게 자동차를 이용하여 넘어 갈 수 있습니다. 이곳 구주령에는 특이하게도 현재 옥녀당의 당집이 남아 있습니다. 그 이유를 보면 조선시대 인조 때입니다. 영해부사로 근무하던 지방관리 황씨에게는 옥녀라는 예쁜 딸이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서로 행정관할이 영양군으로 나누어 져 있지만 그 당시에는 영양은 영해부에 예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옥녀는 아버지의 명을 받아 아흔 아홉 구비를 돌 정도로 험준한 구주령을 넘어 수비의 영양관아에 공문서를 전달하고 다시 영해로 돌아가다 이곳 구주령에서 그만 병을 얻어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본신리 주민들은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죽은 옥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구주령에 봉분을 올리고 옥녀당의 사당을 세워 매년 음력 정월 보름달에 동제를 지내왔습니다.


 



현재까지도 옥녀의 무덤은 관리가 잘 된 상태며 이는 아이를 원하는 부인이 옥녀의 무덤에 먼저 벌초를 하면 득남을 하거나 바라는 소원을 이루게 해준다는 속설로 주민과 고개를 넘는 분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성으로 돌보아온 때문입니다.





이곳 온정면 구주령 안내석에는 “이곳이 구슬 아홉 개를 꿰어 놓은 형상”이라 구주령이 되었다는 설명이며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는 사진 찍기 좋은 녹색명소로 지정을 한 아름다운 곳입니다. 특히 동해에서 솟아 오른 해돋이는 장관이라 합니다.

 



 



울진신문 2010년 8월9일자 김용주님 기고에는 구주령이 아닌 구실령으로 불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필자(김용주)의 유년기 시절에도 구주령이 아닌 구실령으로 불렀고 구지재, 도부재로도 불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근거를 제시하였는데 임진왜란때 탄액을 받은 영의정 이산해(토지 이지함의 조카)는 평해에 유배를 와 ‘기성록’을 남기게 됩니다. 그 책속 달촌기내용중 김용주님의 글을 인용하면 “산이 영동(嶺東)과 접하게 되어서는 서남쪽이 가장 높은데, 기성(箕城, 평해의 옛 이름)에서는 주령(珠嶺)이 되며, 주령의 한 가닥이 다시 동쪽으로 30여 리를 뻗어 삼성산(三聖山 : 이는 지금 평해읍의 뒷산 삼성봉)이 된다.”에서 주령(珠領)의 주는 ‘구슬주’자로 구슬은 경상도 일부에서 사투리 ‘구실’로 발음을 하여 구실령입니다. 또한 1776년 이긍익의 ‘연려길기술’, 1808년 서영보의 인문지리서 ‘만기요람’에도 주령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주잠(珠岑)으로 표기를 하여 잠은 령과 함께 고개를 뜻하니 주령이 되어 구주령으로 불리는 고개는 잘못된 이름이며 구실령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구지재는 구실령의 한 골짜기 이름에서 유래가 되었고 도부재는 경북 북부쪽에서는 보부상을 도부꾼으로 부릅니다. 평해와 영양에서 생산된 해산물과 농산물은 도부꾼을 통해서 험준한 구실령을 넘어 거래가 되어 도부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고개라 도부재로도 불렸다 합니다. 하루빨리 자신의 이름인 구실령을 찾아야 겠습니다.(참고:울진신문 김영주님 기고글)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