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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진지성 자성대

흔히 자성대라 불리는 부산진성은 정발 장군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동래읍성은 송상현장군, 다대포성은 윤홍신이 지켰고 여기 부산진성은 정발장군이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진 앞 바다에서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과 싸우다 종과부적으로 후퇴하여 부산진성에서 성을 사수하기 위해 성문을 걸어 잠거고 일전을 벌리지만  4월14일 전사를 하게 된다. 





그후 1593년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함락을 하여 주둔을 하며 성의 형태가 많아 바뀌었다. 일본장수 모리 테루모토가 주둔을 하며 쌓아 일본식 성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자성대가 부산진성의 외성이었다고 하며 자성대라고 부르게 된 연유는 부산진성을 모성이라 하면 외성인 자성대는
자식의 성 즉 자성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산 정상에 자성을 만들고 장대를 사용하였다는 데서 자성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임진란때는 일본 장수 고니시가 주둔을 하였다 하여 고니시성이라 불렀다하며 그후 명나라의 만세덕이 주둔을 하였고 그후 만공단이 있었는데 이때 만공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 난때는 현재의 자성대가 바로 바다와 연결이 되어 바닷물이 성벽아래까지 들어왔다한다. 그래서 외세의 침입에 가장 민감한 곳으로 추정된다.
 
그후 일제시대때 시가지정비사업으로 성의 일부가 훼손되고 자성대 앞 바다가 매립이 되어 지금은 부산을 대표하는 자성대부두가 설치되어 있다. 지금도 자성대공원에 가보면 그때 석성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높이는 최고 10m에서1.5m까지 쌓은 흔적을 볼 수 있다.1974년 시작한 정화사업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이 되었는데 진동문인 동문, 서문인 금루관,정상에는 장대인 진남루가 복원이 되어 있다. 진남루 옆에는 명나라 이여송과 함께온 천만리장군 기념비와 최영장군의 비각이 보전되어 있다.

진남대로 1974년 복원이 되었고  2층구조로 자성대공원의 정상에 있다. 현재는 출입을 할 수 없도록 쇠창살로 보호각을 설치하였다.


진동문인 동문


서문인 금루관의 모습


이 기념비는 두산위브의 포세이돈아파트 한견에 설치된 기념비로 기념비가 서 있는 이자리는 부산진성의 관문이다. 1592년 4월13일 밤에 왜적은 불시에 이곳을 통하여 부산진성을 침공하니 하룻밤사이에 성주 정발첨사는 이 성을 지키다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원래 자성대는 본성과 지성이 있었는데 이 지성이 오늘날의 자성대이다.

정유재란이 지나 우리나라에서는 자성대를 대대적으로 수축하고 첨사영을 이곳으로 옮겨 왜적의 제침에 대비하였다. 이때 사대문이 동서남북에 설치되고 성안에는 객사 군기소 장대 관청등도 설치 되었다.또 서문 양쪽에는 "남요인후 서문쇄약"이라 새긴 돌기둥이 있었다. 이말은 곧"나라 남쪽문은 들목에 해당하니들어오는 적을 경계하고 서쪽문은 적이 들어 올 수 없도록 단단히 자물쇠를 잠궈놓으라 "는 뜻으로 자성대가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진동문





영가대의 모습입니다. 영가대는 1614영 광해군때경상도 순찰사 권반이 부산진지성 서쪽 해안에 선착장을 축조하면서 퍼 올린 토사가 쌓여 작은 언덕이 생겼고 그 언덕위에 8칸의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어 조성한 곳으로 누각을 짓고 1624년 인조때 선위사 이민구가 이곳에 파견되어 와서 권반의 고향인 안동의 옛이름인 영가를 따서 영가대라 하였다. 1617년 광해군 9년 통신사로 파견된 오윤겸이 처음 영가대에서 일본으로 파견 된후 1811년 이루 순조때까지 통신사 일행이출발하여 돌아 오던 장소로 안전 항해를 위한 해신제를 올리는 장소였다.  그러나 1910년 경부선 철도의 부설과 부산 항만의 매립공사로 소실된지 90년만인 2003년 9월25일에 복원하여 준공을 하였다 한다.







영가대 내부의 모습이다.


자성대 컨테이너 부두가 앞을 가로막고 그 뒤로 보이는 산이 영도의 봉래산이다.

현재는 도심으로 둘러 쌓여 아파트와 도로가 밀집되어 있다.





조선 통신사란1607년인 조선 후기에 일본 에도막부의 요청에 의해 1811년 까지 열두차례에 걸쳐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통신이란 신의를 교환한다는 뜻으로 조선국왕이 일본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조선 국왕의 공식적 외교사절이었다.

진남대로 천만리 장군의 기념비와 함께 서 있다.










진남루 아래에서 산책을 즐기는 주민들. 


충장공 천만리 장군 기념비. 임진 왜란의 일등 공신인 천만리 장군은 중국 영양사람으로 자는 원지 호는 사암으로 1592년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원병의 영양사로서 이여송과 함께  출정을 하여  평양 곽산 등시에서 전공을 세웠고 정유재란때에는 마귀 장군과 함께 와 울산 동래등의 전투에 싸웠다. 그 후 명나라로 원군이 철 수를 할때 천만리 장군은 조선에 머물러게 되었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충장공이란 시호와  화산군에 봉책하였다.







서문 성곽 우주석으로 부산 광역시 지정기념물 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돌기둥을 세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어나 임진왜란 후 부산진지성을 축성 할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돌기둥에는 "남요인후 서문쇄약"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국경이라, 서문의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는 뜻이라한다. 원래 부산진 지성 서문자리였던 성남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것을 1975년 부산진지성 복원공사때 이곳 서문 금루관에 좌우 기둥석으로 사용을 하였다 한다. 좌측272m, 우측277m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듯이 강직하고 총렴한 장군으로 왜적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1316년 고려 충숙왕3년에 출생을 한 최영장군은 공민왕때 대호군이 되어 내란 과 왜란에 참가를 하여 평정을 하고 홍산싸움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러 왜적은 최영장군의 장군기만 보면은 벌벌 떨 정도로 무서워 하였다 하며, 그후 "백수최만호"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해안의 바닷가에가면은 최영장군의 사당을 볼 수 있다. 민간신앙으로 승화되어 그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며 무속인들 사이에서도 최영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사람도 볼 수 있다. 사량도, 감만동,수영동 영도 자성대등 여러곳에서 그의 사당을 볼 수 있다. 자성대에서는 음력 5월5일인 단오날에 그의 제사를 지낸다 한다 

그의 영정을 모신 자성대의 사당 내부로 철문으로 닫혀 있다.

서문과 동문은 복원이 되어 있지만 북문은 복원이 되어 있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북문이었다는 흔적만 볼 수 있는 안내석으로 지금 현재는 많은 주민들의 휴식처로 자성대 공원으로 부르고 있다.
  


북문으로 올라 진남대로 올라 갈 수 있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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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최영장군이 제주도에서 발발한 민란을 평정하고 무주현을 거쳐 서울로 가던중 붉은 단풍이 온산을 뒤 덮고 바위가 병풍를 친 이곳의 산세에 이끌여 적상산을 오르게 되었다.
급한 산세를 올라 보니 7부능선에 큰 암벽이 앞을 막으니 대장부가 정상을 목전에 두고 내려 갈 수가 없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긴 칼을 가지고 바위를 내리치니 바위가 쪼개져 길을 내 주어 산 정상으로 오를 수 있었다 한다.
그 바위가 장도 바위이며 폭은 사람 한사람이 겨우 다닐정도의 길이 나 있다. 그곳을 벗어나면 적상산성으로 서문이 위치하고 있다.
최영장군이 산 정상에 올라보니 산세가 험하고 하여 이곳을 군사적 요충지로 보고 산성을 축조할 것을 건의 하였다 한다. 




총길이는 8km가 넘는 산성으로 적상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축성하였다. 그리고 서창으로 오르면 서문으로 오를 수 있다. 일명 용담문이라 하였다. 축성 당시에는 문루가 있었다는데 2층이며 3칸이었다고 “적상산성조진성책”에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은 산성의 흔적만이 남아 여기가 문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폐허가 된 것을 최근에 돌을 쌓아 올려 서문 터임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성문 밖에는 서창과 고경사가 있었다하며 서창은 미창과 군기창이 있었다한다.
험한 산세로 인해 성안까지 운반이 힘들어 사고지 옆으로 옮겼다하며 등산로 입구마을이 아직도 서창으로 불려지고 있다.

최영장군이 적상산을 오를 때 암벽이 앞을 막아 장도를 쳐 산길을 만들었다는 장도 바위로 사람 한사람이 겨우 빠져 나갈 정도의 폭이다.


장도바위와 주변의 산세가 험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장도 바위를 지나면 만나는 적상산성의 서문으로 일명 용담문이라 불린다.
누각은 사라지고 없지만 산성이라도 제 모습으로 복원을 하였다.

사적제146호로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사천리에 위치하며 서창마을에서 오르면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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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 적상산

붉은치마 두른 晩秋 '수줍은 유혹'

치마바위 단풍과 낙엽길 '일품'

연중 등산객 80% 가을에 집중

안국사 · 적상산 사고도 볼거리

안렴대 서면 덕유산 연봉 장관



안렴대에서 바라본 덕유산 산줄기. 왼쪽 주봉 향적봉을 비롯 오른쪽으로 중봉 백암봉 무룡산 삿갓봉 남덕유산 서봉이 장쾌하게 펼쳐져 있다. 주봉인 향적봉 앞에는 케이블카 종착지인 설천봉과 스키장 슬로프도 보인다.

덕유산 국립공원에 속하는 무주 적상산(1,038m). 덕유산 주봉 향적봉에서 북서쪽으로 12㎞쯤 떨어져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정상 일대는 흙으로 덮인 육산이지만 산허리부터 곧추선 암벽이 병풍처럼 겹겹이 둘러싸여 있다. 이름하여 치마바위.

매년 이 맘때 치마바위 주변에 단풍이 물들면 다소곳한 여인네가 붉은 치마를 두른 듯 온 산이 활활 타오른다. 마치 산 전체에 각양각색의 물감을 흩뿌려놓은 것 같다. 그래서 붉을 적(赤), 치마 상(裳)자를 조합해 적상산이라 불린다.

하여튼 만추의 적상산은 '치마바위에 활짝 핀 단풍꽃'으로 요약된다. 그 자태는 한국백경 중 하나로 손꼽혀 가을이면 전국의 산꾼들이 꼬리를 물고 모여든다.

통계도 적상산이 가을산임을 뒷받침해준다. 국립공원 덕유산 관리사무소 적상분소 서영수 계장은 "연중 등산객의 80% 정도가 단풍 절정기인 10월말에서 11월초에 집중된다"고 말했다.

안렴대

서문지

안국사 극락전

조선5대 사고지중 적상산 사고지
산행 중 역사적 볼거리도 제법 있다. 안렴대,적상산성과 안국사, 그리고 조선 5대 사고(史庫)인 적상산 사고 등은 눈여겨 볼 만하다.

산행은 서창 매표소~철문~샘터~전망대~장도바위~적상산성 서문지~주능선(삼거리)~향로봉(왼쪽)~주능선(삼거리)~사거리~적상산 정상(기봉·KBS 송신소)~안렴대~안국사~일주문~적상산 사고~안국사 부도군~전망대~송대~치목마을 순. 4시간 정도 걸린다.

들머리는 서창 매표소. 정면에 울긋불긋 단풍으로 치장한 치마바위가 시야에 들어온다. 포장로를 따라 100m쯤 오르면 오른편에 등산로 이정표. 돌계단부터 시작된다. 탐방로 안내판을 지나 철문으로 들어선다.

계속되는 돌계단. 형형색색으로 물든 숲터널이 하늘을 가린다. 이제 본격적인 가을속으로 들어간다.

25분쯤 지나면 약간은 지겹기도 했던 돌계단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흙길을 만난다. 하지만 오르막길은 계속된다. 급경사길이 늘 그렇듯 갈 지(之)자로 이어진다.

5분 뒤 탐방로 안내판에 표시된 샘터. 이곳에서 한 굽이 올라서자 산허리를 돌아가는 오솔길이 기다린다. 오솔길 주변에는 이제 단풍이 완연히 물들어 절정에 달하고 있다.

이어지는 오르막길 우측에 전망대. 정면에 대진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내달리고 있고, 좌측 능선쪽의 단풍은 마치 봉홧불이 번지듯 활활 타오르고 있다.

전망대를 지나 집채 만한 바위를 에돌면 역시 큰 바위가 기다린다. 길은 두 갈래. 등산로는 왼쪽으로 자연스레 연결되지만, 오른쪽에도 하늘을 찌를 듯한 바위 사이로 한 사람이 지날 수 있는 틈이 열려있다. 장도(將刀)바위다. 고려말 최영 장군이 이 길을 오르다 길이 막히자 장도를 내리쳐 길을 내고 올랐다는 전설이 서려있다.

왼쪽으로 가 모퉁이를 돌면 아담한 돌담이 앞을 막는다. 적상산성 서문지(西門址)다. 고려말 최영 장군이 산세가 요새로서 적지임을 알고 왕에게 축성을 건의했다는 적상산성은 둘레가 8.1㎞로 주변 단풍과 어울려 한층 운치를 더해준다. 서문지를 통과하면 곧 이정표. 장도바위를 통과해 올라가면 이 이정표 앞에서 만난다.

지금부터 평탄한 길. 이곳부터 산은 완연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숲이지만 앞뒤좌우가 확 트인 황홀한 공간이며, 신기하리만치 소나무 한그루 없는 활엽수림이다.

낙엽이 온 사방에 깔려있고 고개들면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는 듯 현란하다. 부는 바람에 단풍잎들이 흩날리면 감탄은 극에 달한다. 화려한 외양의 붉은 치마 속도 알고보니 그야말로 장관이다.

야생화 군락지임을 알리는 푯말을 지나면 이내 주능선. 왼쪽 향로봉, 오른쪽이 주봉인 적상산 기봉. 기봉은 현재 모 방송국 송신소 철탑이 세워진 접근 금지구역.

기봉보다 4m 낮으면서 주봉 역할을 하는 향로봉으로 간다. 낙엽과 단풍으로 발걸음이 아주 가벼운데다 우측엔 양수발전소 상부댐 저수지가 보여 분위기를 더해준다. 20분이면 닿는다. 정면 구봉산이, 북쪽인 우측엔 금산의 서대산이, 남쪽인 좌측엔 봉화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왔던 길로 되돌아 간다. 25분 정도 환상적인 능선길을 걸으면 사거리. 직진하면 안렴대, 왼쪽은 안국사, 135도쯤 크게 왼쪽으로 돌면 적상산 정상인 기봉이다.

안렴대로 간다. 고려때 거란의 침입으로 삼도 안렴사가 군사들을 이끌고 와 난을 피한 곳이라 붙여진 이름. 바위절벽으로 난간이 설치돼 있는 멋진 전망대다. 왼쪽으로 덕유산의 내로라하는 봉우리가 전개된다. 덕유산 주봉인 향적봉을 중심으로 왼쪽에 칠봉, 오른쪽에 무룡산 삿갓봉 남덕유산 서봉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무주리조트 슬로프도 확인된다. 과히 덕유산 전망대라 부를 만하다.

장도바위. 이 바위는 고려말 최영 장군이 이 길을 오르다 길이 막히자 장도를 내리쳐 길을 내고 올랐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불방지 무인감지시설 밑으로 난 길로 내려서면 안국사(安國寺). 무학대사가 삼재가 들지 않고, 나라를 편안케 한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 원래는 산 밑에 있었지만 양수댐 축조로 물에 잠기게 되면서 과거 적상산 사고사(史庫寺)가 있던 이곳으로 옮겨왔다. 안국사에선 티베트 미얀마 등 세계 각국 불상과 도자기 300여점이 전시돼 있는 성보박물관은 꼭 들르자.

발길은 일주문을 지나 아스팔트길로 내려선다. 10분 뒤 상부댐이 내려다 보이는 지점에서 왼편에 적상산 사고 건물이 보인다. 조선 광해군때 설치된 이곳에는 한때 승가청 군기고 등 40칸의 건물이 있어지만 지금은 텅 비어 썰렁하기만하다. 다시 아스팔트길로 나오면 '치목 2.7㎞'라고 적힌 이정표가 서있는 하산길이 열려있다.

이제 본격 하산길로 들어선다. 안국사 부도탑을 지난다. 숲은 인적이 드문 원시림인데다 단풍마저 화려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절벽 위 아래로 화려한 단풍색이 아름다운 전망대와 울창한 송림 사이의 기암절벽이 장관을 이루는 송대를 지나 치목마을까지는 1시간정도 걸린다. 의외로 길이 괜찮다.

#떠나기 전에 - 단풍산행 지금이 최적기

가을에는 누구나 훌쩍 떠나고 싶어 한다. 산과 들로 단풍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고 싶은 계절이기 때문이다. 단풍하면 우선 떠오르는 산이 무주의 적상산. 얼마나 곱고 아름다우면 여인네의 붉은 치마와 비교하겠는가. 지금의 적상산은 붉다 못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최영 장군의 전설과 산성, 안국사, 적상산 사고(사진), 적상호에 비치는 붉은 단풍 등은 탐방객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안겨준다.

적상호로 올라오는 도로 이외 두 코스만 열려 있고 나머지는 모두 입산 통제로 묶여 있어 취재팀은 산길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치목마을로 하산길을 잡았다.

하산길에 만나는 송대계곡은 협곡으로 붉은 단풍에 젖어 내내 여운에 남는다.

날머리인 삼베짜는 마을인 치목은 한가하다 못해 가을 빛에 졸고 있다. 가을날 어디로 갈까 고민하는 산꾼들에게 가족과 함께 떠나길 권한다.

/ 글 = 이흥곤기자 hung@kookje.co.kr / 문의 = 국제신문 산행팀 (051)500-5151

사진=이창우 산행대장 www.yahoe.co.kr

교통편=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서진주 분기점~대진고속도로~무주IC~진안 무주리조트 무주구천동 방면~3~4㎞후 서창마을. 유의할 점 하나. 적상산 안내 이정표는 반대편 도로에서 와야 볼 수 있기 때문에 국립공원 향로봉이란 입간판에서 좌회전해야 한다.

날머리인 치목마을에서 들머리 서창까지 거리는 10㎞. 버스는 오후 6시30분에 있기에 적상모범택시(063-324-5526, 011-464-5527)를 불러야 한다


서창매표소 부근에 물든 단풍



치마바위 주변에 단풍이 물들면 다소곳한 여인네가 붉은 치마를 두른 듯 온 산이 활활 타오른다. 마치 산 전체에 각양각색의 물감을 흩뿌려놓은 것 같다. 그래서 붉을 적(赤), 치마 상(裳)자를 조합해 적상산이라 불린다.

적상산의 산길.2008년 10월26일 산행










정상인 기봉은 kbs송신소가 자리잡고 있어 향로봉이 정상을 대신하고 있다.

치목마을 하산후 집집마다 건조하고 있는 태양초로 적상산 산행의 마지막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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