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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여행/군위가볼만한곳)인각사 여행,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 탑 및 비. 삼국유사 일연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했던 보각국사 탑 및 비


일연대선사하면 삼국유사를 남기신 분으로 아마 모르시는 분이 없을 정도로 알려진 스님입니다. 일연 스님의 부도와 탑비가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의 인각사에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 탑 및 비’로 전하고 있습니다. 일연스님은 1289년 고려 충렬왕 15년에 입적했으며 그의 행적을 소상하게 기록한 탑비와 보각국사 일연의 사리탑인 부도가 인각사 경내에 세워져 있습니다.





군위 인각사 주소: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삼국유사 250

군위 인각사 전화:054-383-1161


☞2009/04/05 - (경북여행/군위여행)군위 아미산. 부처의 눈썹이 과연 이럴까?-경북 군위군 아미산(402.4m)

2008/11/28 - (경북여행/군위여행)군위 인각사. 보각국사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인각사 찾아가기=1

2014/12/02 - (경북여행/군위여행)화본역과 화본마을 추억여행. 화본역과 화본마을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어릴적 추억 여행을 떠나보세요.

2014/12/05 - (경북여행/군위여행) 중앙선 화본역. 아름다운 간이역 화본마을의 화본역을 여행하다.

2014/12/13 - (경북여행/군위여행)산성면 화본마을, 화본역 '엄마 아빠 어렸을 적에'





부도와 탑비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데 부도는 원래 부도골에 나뒹굴고 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에 다시 세웠다합니다. 먼저 보각국사 일연스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206년인 고려 희종 2년에 경산시(당시는 장산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속성은 김씨이며 자는 희연·일연이고 아명은 견명이라 했습니다.



1214년 9세 때 광주광역시 무량사에서 수학하다가 5년 뒤인 1219년 설악산 진전사에서 대웅스님에게 수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22세에 승과에 급제하였으며 1237년 삼중대사, 1246 선사. 1259년 대선사에 올랐습니다.

 


1250년 정안의 초정으로 정림사에 주석하면서 남해 분사도감의 증의로 팔만대장경 조성에 깊이 관여했으며 1283년에 국존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의 호를 받았습니다. 이듬해 조정으로부터 토지 100경을 받아 모친을 봉양하기 위한 인각사를 중건하였습니다. 일연대선사는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했다 합니다.



보각국사 일연스님의 사리탑은 자연석을 깐 바닥에 세워져 있습니다. 탑은 받침돌과 몸돌, 지붕돌로 구성하며 팔각의 받침돌은 3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중 가운데 부분에는 동물 조각이 희미하게 남아 있으며 윗부분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팔각의 몸돌에는 정면에 ‘보조국사정조지탑(普覺國師靜照之塔)’이 새겨져 있으며 그 뒷면에는 감실을 뜻하는 문 모양의 조각을 새겼습니다. 그리고 남은 여섯 면에는 사천왕 입상과 연꽃 위에 서있는 보살상을 새겨 놓았습니다.

 


지붕돌을 보면 두꺼운 추녀 밑은 위로 살짝 들렸고, 낙수면은 경사가 급하며 지붕선 귀 끝에 꽃장식이 달렸습니다. 지붕돌 위에는 앙련이 새겨진 큼지막한 머리 장식인 보개와 보주를 올려 위엄과 무게감이 더욱 있어 보입니다.

 


보각국사 일연 부도는 통일신라 시대에 성행했던 팔각원당형을 따랐지만, 형태와 조각수법을 보면 섬세하지 않고 약간은 둔중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1295년에 비문이 세워진 것을 보면 그 이전에 부도가 세워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각국사 일연 탑비는 깨어져 훼손이 심한 편입니다. 탑비는 일연의 제자였던 법진스님이 세웠다 합니다. 비문은 당시 문장가였던 민지가 왕명을 받들어 전면의 본문을 지었으며 후면은 산립이 지었습니다. 비는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들었을 정도로 정성을 다했던 거 같습니다.



비신의 앞면에는 일연스님의 행적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스승에 대한 추모의 정을 새겼다면 뒷면에는 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다비식 때 일어난 영험, 제자들의 이름을 함께 새겨 넣었다 합니다. 비신을 보면 드문드문 글씨가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훼손이 심해서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이는 후대로 와 왕희지의 글씨를 얻겠다는 욕심으로 수많은 탁본을 하였고 그로 인해 일연의 탑비는 많은 훼손이 되었다합니다. 군위 여행시 군위댐과 인근의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 탑 및 비를 꼭 챙겨보시길 권합니다.  보물 제4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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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팔공산파계사)팔공산파계사. 고즈넉하니 가을 풍경이 너무 좋았던 팔공산 파계사 절집구경하기.


대구 팔공산 파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 말사입니다. 804년 애장왕5년에 심지왕상이 창건을 하였는데 파계사의 유래를 보면 ‘파계(把溪)’란 ‘물길을 잡는다’란 뜻으로 절 주위로 아홉 갈래의 계곡이 어지럽게 흩어져 땅의 기운을 한곳에 모우기 위해 절 아래 연못을 파고 파계사를 창건하게 되었다합니다.

 


현응대사나무

그 후 1605년인 선조38년에 계관이 중창을 하였고 1695년 숙종21년에 현응이 삼창을 하여 오늘날의 파계사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특히 파계사는 영조임금과 깊은 인연이 있는 사찰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에도 영조대왕의 도포와 영조임금 나무인 느티나무가 파계사에 남아 있습니다.



왜 영조대왕의 원찰을 파계사라 할까요. 그 이유를 보면은 조선의 19대 임금은 숙종입니다. 숙종은 후궁 화경 숙빈 최씨를 위해 파계사의 현응에게 세자 잉태를 위한 백일기도를 부탁 합니다. 백일기도가 끝나는 날 숙빈 최씨의 꿈에 농산화상이 전세의 과보에 따라 숙종의 왕자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을 현몽하였고 훗날 백일기도로 태어난 분이 연잉군입니다.



연잉군은 숙종과 장희빈에서 태어난 20대 경종의 뒤를 이어 조선 제21대 임금에 오른 영조입니다. 왕자를 생산하게 된 숙종은 그 보답으로 파계사 주위의 40리를 파계사에서 세금을 거둘수 있도록 명을 내리지만 현응은 그 대신 선대임금의 위패를 모실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올려 선조, 숙종, 덕종, 영조 네 분의 신위를 기영각에 모심으로 조선 후기에와 더욱 기세가 높았던 숭유억불정책의 칼바람을 피해 갈 수 있었다합니다.



1979년 파계사 원통전 관음보살상을 금칠하게 되었는데 불상안에서 영조의 어의가 나왔다 합니다. 1740년 건륭 5년 9월에 제작된 도포와 발원문에는 ‘탱불 일천불’을 희사하고 파계사를 왕실의 원당으로 삼으며 대왕의 청사상의를 복장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럼 파계사의 문화재를 하나하나 만나 보겠습니다.



먼저 매표소 전에 만나는 오래된 나무를 현응대사 나무라 부릅니다. 현응대사는 파계사를 삼창하고 숙종의 부탁을 받아 백일기도로 숙빈최씨에게 훗날 영조대왕인 왕자를 잉태케하였습니다. 수령이 260년 쯤 된 느티나무로 현응대사의 공덕을 기려 부르는데 팔공산에 단풍이 한창 들때 찾아간 파계사. 천년세월의 절집과 함께 너무 잘 어룰리는 고목이었습니다. 

 


파계사는 문화재 관람을 위해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통과해야 합니다. 일반 1,500원이며 승용차 주차비는 2,000원입니다.일주문을 통과하고도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파계사 주차장에 닿기 전에 왼쪽에 파계지로 불리는 저수지입니다. 파계사의 아홉갈래 물길을 한곳에 모아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팠다는 연못으로 파계사 창건 유래와 함께 합니다. 

 


먼저 파계사 안내도를 일별합니다. 파계사 경내를 들기위해서는 반드시 만나게 되는 큰 나무가 있습니다. 영조임금나무로 키가 엄청 큰 나무입니다. 


영조임금나무

수령이 약 250년 느티나무로 보호수며 높이가 17m, 둘레는 3.8m. 영조임금의 치적과 현응대사의 백일기도로 영조임금이 탄생하였고 왕실의 원당에 영조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어 영조임금나무로 이름을 붙였다합니다.




먼저 진동루 입니다.진동루는 파계사의 유래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절 주위로 아홉갈래의 물줄기를 따라 새어나가는 땅의 기운을 잡기 위해 연못을 파고 파계사라 하였는데 그것으로는 이곳의 기운을 모두 다스릴 수 없어 경내로 들어오는 입구에 문을 세우고 ‘진동’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먼저 계단을 올라 1층의 누문을 들어서면 파계사 경내에 들어서게 됩니다. 100여평의 넓이에 정면5칸, 측면3칸의 2층 규모로 팔작지붕을 올렸습니다. 현판에 팔공산 파계사가 걸려 있습니다. 정면으로 원통전과 좌측에 설선당, 우측에 적묵당입니다. 




 원통전을 기준으로 오른쪽은 파계사 적묵당입니다. 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9호이며 조선 광해군 12년인 1620년에 처음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 후 숙종21년인 1695년 현응이 삼창을 한 후 1920년에 중건을 한 후 보수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적묵은 ‘눈을 감고 조용히 명산한다’는 뜻으로 스님의 수양 공간 같습니다. 정면 5칸, 측면 6칸의 규모로 지붕은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팔작지붕이며 기둥 위에 공포를 두지 않고 기둥사이에 작은 접시 모양을 한 소로를 끼운 조선후기 건물로 소박한 분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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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전을 기준으로 왼쪽은 설선당입니다.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이며 대중의 공양간과 강습소로 사용하였던 건물입니다. 1623년 인조 1년에 계관법사가 중수를 하였으며 1646년과 1725년에 중건을 거듭하여 1976년에 현재의 모습을 하였습니다. 건물은 정면7칸, 측면7칸의 규모로 적묵당과 함께 아름다운 곡선를 가진 팔작지붕입니다. 초석은 북을 엎은 모양으로 그 위에 공포를 두지 않은 둥근 기둥을 세웠습니다. 간결하며 견실한 모양의 민도리집 구조양식입니다. 








원통전에는 중요민속문화재 제220호 영조임금의 도포와 보물 제992호인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좌상 및 복장 유물이 있습니다. 파계사는 다른 사찰과 다르게 대웅전이 아닌 원통전에 관세움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있습니다. 원통은 ‘진리는 원만하여 모든 것에 통해 있다“는 뜻으로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을 올렸습니다. 지붕 처마를 박치기 위해 커다란 역삼각형으로 짜 맞춘 공포를 두 기둥사이에 장식한 다포양식으로 17세기 후반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좌상은 삼베에 여러번 옻칠을 도포한 방식의 불상입니다. 1979년 불상을 금칠할 당시 복장유물로 영조임금의 도포와 발원문이 함께 나왔고 1447년 세종29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1m8cm이며 머리에는 3중의 화관을 씌었고 목의 삼도와 오른손과 왼손에 나타난 손가락과 손바닥 모양을 보면 고려 후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보물 제1214호 파계사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담은 불화입니다. 1707년인 숙종33년에 연잉군이 왕자일 당시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시주한 불화이며 길이가 340cm, 폭은 254cm.  



파계사 기영각은 연인군이 탄생하면서 그 보답으로 현응의 청원을 받아들여 조선왕실의 위패를 모신 전각입니다. 숙종35년인 1696년에 현응이 창건. 정면3칸 측면2칸으로 팔작지붕이며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혀처럼 앞으로 나온 두 개의 익공에 연화와 연봉 등으로 위와 아래에 화려한 장식을 한 조선 후기 이익공계 양식을 한 모습입니다.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11호.

  





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8호인 파계사 산령각의 창건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1976에 중건을 한 후 1979년에 보수를 하였습니다.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옆면에서 보면 사람인자인 맞배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기영각과 같은 공포를 사용하였는데 익공에 연봉과 연화로 장식하고 보 머리에 봉황머리를 끼운 초익공 양식을 하고 있습니다.  



팔공산 파계사를 찾았을 당시 추색으로 완전 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특히 지장전 가는 길에서 본 파계사 왼쪽 언덕은 그야말로 만추의 분위기를 보여 주어 아름다운 절집에 매료되어 넋을 빼고 바라보다가 일행의 그만 내려가자는 말에 부랴부랴 내려 왔습니다. 고즈넉한 파게사의 가을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안내판을 참고하였습니다. 





영조임금나무












2014/11/06 - (대구여행/팔공산 산행)팔공산 서봉~파계봉 산행. 알찬 팔공산 산행코스 서봉~파계봉 산행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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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행/팔공산 산행)팔공산 서봉~파계봉 산행. 알찬 팔공산 산행코스 서봉~파계봉 산행을 하다.


대구의 북쪽을 병풍 치듯 두른 산이 팔공산입니다. 흔히 팔공산맥으로 부를 정도로 능선이 장쾌하여 대구시민은 물론이고 전국의 산꾼을 팔공산으로 끌어 모우고 있습니다. 서쪽의 가산에서 동쪽의 갓바위까지 수많은 골짝 골짜기마다 절집과 문화재가 들어차 있어 이야기 보따리가 가득합니다. 또한 팔공산은 비록 비로봉(1192m) 정상 등정은 할 수 없지만 좌우로 거느린 동봉과 서봉이 정상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웅장한 산세로 이루어진 팔공산은 신라때에는 오악으로 부악, 중악, 공산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에 와서 공산으로 불렸습니다. 그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현재의 팔공산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팔공산은 그 면적만 해도 30.6㎢의 광대한 넓이로 대구광역시와 군위군, 경산시등과 경계를 짓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기암괴석과 깊은 계곡으로 인해 산세가 빼어나고 영험한 산으로 알려져 많은 시인묵객들이 팔공산을 찾아 들었습니다.

 

 

팔공산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왕건과 신숭겸장군의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팔공산의 관문격인 파군재는 신숭겸이 견훤과의 전투에서 병사들을 각 방향으로 흩어지게 하였다는데서 유래되었는데 팔공산을 찾는 분이라면 모두 알것입니다. 후백제가 신라를 침입 하면서 신라는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고려에 구원병을 요청합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구원을 나서며 팔공산에서 후백제의 견훤과 일전을 벌리게 되었고 그러나 고려 왕건은 공산전투에서 수많은 부하를 잃고 위험에 봉착을 하게 되고 그때 그의 장수 신숭겸이 왕건을 피신시키고 대신하여 장렬하게 전사를 합니다.  후에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그의 여덟 장수를 기리는 뜻에서 팔공산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과 팔공산의 봉우리가 여덟개라 팔공산이라는 설입니다. 왕건과 신숭겸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팔공산을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산행하고 왔습니다.

 

 

산행 경로를 보면 수태골~수릉봉산계 표지석~수태골암장~서봉, 동봉 갈림길~오도재~팔공산 마애약사불 좌상~서봉~톱날능선~마당재~부인사 갈림길(대구올레길)~팔공산 학생 야영장 갈림길~파계봉~파계재~파계사 순으로 전체 거리는 이정표 상 약 11km입니다만 전체적인 거리는 더 길것 같습니다. 산행시간은 휴식시간을 포함하여 6시간 30분 안팎 소요.

 

 

산행을 위해서는 수태골 입구로 찾아갑니다. 대구광역시의 팔공산 계곡중 동화사 계곡과 함께 수태골이 가장 유명합니다. 많은 수량과 아름다운 계곡으로  산꾼들이 수태골로 동봉과 서봉 산행을 합니다. 필자도 이번 산행을 수태골로 올라 서봉을 거쳐 파계재로 해서 파계사로 하산을 하였습니다. 원래 한티재로 하산 계획인데 파계재에 이르자 갑자기 우중충한 날씨가 가을비를 퍼 부어 일정을 끊고 파계사로 급히 수정 하여 내려 왔습니다.

 

 

등산로 입구 왼쪽에는 팔공산 수태골의 물을 가두어 놓은 수태저수지가  가을색으로 완전 옷을 갈아 입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모두 웃음을 머금고 단풍색에 젖어든 얼굴은 오랜만의 외출이라 그런지 이번 산행이 더욱 즐거운 표정입니다. 수태골의 유래를 알아보면 "아낙이 수태골을 오르내리며 간절히 기도하면 아기를 얻게 된다"에서 유래가 되었다는 설과 "수태골 계곡의 물이 유난히 맑고 깨끗하다"는 뜻에서 나왔다 합니다. 실제 산행에서 만나는 수태골의 물은 옥구슬 구르듯이 청아하고 맑아 바로 마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입구의 이정표를 보면 동봉3.5km, 서봉 3.3km 입니다. '용수동 팔공로' 안내판에 '2009 대구의 아름다운 거리'로 지정되었다는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보도블록길을 따라 수태골 안내소를 지나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됩니다.

 

 

 

산길은 흙길로 바뀌고 편안하게 수태골을 끼고 시작합니다. 지대가 낮아서 그런지 아직 단풍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흥겨운 마음으로 오르면 왼쪽 수태골에 와폭이 걸려 있습니다. 대부분 이곳을 지나쳐 가지만 계곡으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청아한 물소리에 내 귀를 씻어 내고 마음까지 씻으면서 산행의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다시 산길로 나오면 수태골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발아래에 낙엽이 깔리고 키큰 소나무가 듬성듬성 나타납니다. 곧 수릉봉산계 안내판 옆에 중형차 크기의 바위가 있습니다. 수릉은 익종의 능을 말하는데 수릉의 유지 관리와 제사에 사용되는 경비 조달을 위해 이 구역의 산림을 보호림으로 정하여 일반백성은 함부로 벌목 할 수 없으며 입산도 금지한다는 표석입니다. 일종의 봉산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등산로로 복귀합니다. 편안하고 넓은 산길를 따라가면 갑자기 약간의 오르막이 시작되면서 바위들이 등산로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도 이끼긴 계곡의 물소리가 너무 좋아 아직은 힘든 줄 모르고 올라갑니다. 갑자기 앞이 훤해집니다.

 

 

수태골 암장으로 불리는 넓은 슬랩바위가 나타납니다. 대구의 클라이머 연습장으로 이곳에서 초보 교육을 시키는 곳입니다. 중간중간에 확보용 볼트가 보입니다.

 

 

산길은 조금씩 가팔라지고 바닥은 숫제 바위 길입니다. 수태골 폭포 갈림길 안내판에서 등산로를 벗어나 왼쪽 수태골폭포 방향으로 갑니다. 폭포를 본 뒤 다시 기존 등산로를 따라가게 됩니다.

 

 

 

입구에서 출발한지 60여분쯤이면 너덜길에 수태골 계곡을 건너는 곳에 이정표가 있습니다. 동봉(1.1km)과 서봉(0.9km)이 이곳에서 갈라집니다. 필자는 서봉 방향인 왼쪽 길을 따라 갑니다. 줄곧 오르막길이 이어지지만 그리 힘은 들지 않습니다. 돌아보면 암봉을 이룬 동봉이 어서 오라 손짓합니다.  그래나 서봉을 오르기로 했는데 동봉에게 쉽게 마음을 줄수 없습니다.

 

 

 

쉬엄쉬엄 20여분이면 능선인 오도재 갈림길에 오릅니다. 누군가 도를 깨치고 난 뒤 이길을 따라 하산을 한 것 같습니다. 오도재에서 서봉은 0.4km 거리며 왼쪽입니다. 그래도 이곳까지 왔는데 비로봉 아래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을 보지 않을 수 없어 오른쪽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0.7km 동봉 방향입니다. 필자도 오래 전에 몇번 가본터라 지금은 긴가민가 합니다. 위치는 대충 알고 있어 왼쪽으로 오르는 갈림길이 있어 그 길을 올라갑니다. 마애불 입상이 나올때가 되었는데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만 내려갈까 하다 조금더 올라보기로 합니다.

 

뚜렷한 산길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넓은 터가 나오는게 마애불좌상을 바로 찾았습니다.  ㅎㅎ섬세하게 세겨진 불상이며 팔공산에서 꽤 높은 위치에 자리한 불상입니다. 왜 이곳까지 올라와 마애불을 조각하였는지 너무 너무 궁금합니다. 일반인은 걸어오기도 힘이 드는데.....말입니다.

 

 

대구 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고 자연석에다 관봉의 갓바위 약사불과 같이 약병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좌상입니다. 불상의 연대는 여래불의 가슴에서 옷깃이 한번 뒤집어 진 것이 8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약사여래불입니다.

 

 

다시 오도재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제보니 능선에는 나무들이 모두  옷을 벗었습니다. 참 나무는 신기합니다. 추운 겨울에는 따뜻하게 자신의 몸을 보호해주는 나뭇잎을 털어내고 무더운 여름이면 다시 거추장 스러운 새옷을 입는지 말입니다.


 

오도재를 통과하여 직진합니다. 서봉은 400m 거리로 빤히 보입니다. 반대편  군위군쪽에서 동장군이 찾아 온듯한 세찬 바람이 더욱 나를 움추려 들게 만들며 옷을 여미고 몸을 데우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움직여 봅니다.  


 

가야할 서봉입니다. 서리를 이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세찬바람으로 지난 주말 날씨가 엄청 추웠습니다. 서봉 정상부 인근에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저곳을 향해 올라가야 합니다. 


 

밑에서 보았던 나무계단을 올랐습니다. 길고 급한 경사로 만들어져 서봉을 오르는데 사람의 진을 빼기 딱 좋습니다. 마지막 봉우리에 서니 팔공산 비로봉이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며 비행하는 모습입니다. 


 

이제 서봉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특이한 바위가 보여 한 컷 찍었습니다. 우주선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가운데로 틈이 갈라져 있습니다. 그 밑으로 좌우 똑같은 모양으로 언뜻 보면 성모마리아나 부처님을 모신 감실 같은 모습입니다. ㅎㅎ 여긴 팔공산이니까 부처님이 가까울 것 같습니다. 


 

헬기장을 지나면 비슷한 두개의 암봉에 각각 정상석이 있습니다. 삼성봉과 서봉이며 두 곳의 정상석은 위태로워서 인증샷 사진 찍기에 지랄 같습니다. 그런데 조망권은 너무 좋습니다. 비로봉과 동봉이 가까이 보이고 멀리 관봉의 갓바위쪽 봉우리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끝내주는 풍경입니다. 역시 명산으로 팔공산 서봉이란 말이 빈말이 아닙니다.   


 

 

서봉에서 누군가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정상에 올라 왔다는 인증 샷을 남기기 위함인지 모두 정상에 오르면 정상석을 안고 사진 찍기를 원합니다.다시 이정표가 있는 등산로로 복귀합니다. 


 

파계재 5.1km, 한티재 7.2km  이정표가 가르키는 방향으로 따라 갑니다. 지금 부터 파계재 까지 산길은 뚜렷하지만 오르내림이 심한등산로입니다. 그리고 바람도 무섭게 불고하면 더더욱 힘든 길로 바뀌게 됩니다. 팔공산을 가벼운 마음으로 찾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팔공산 서봉에서 파계재로 떠나는 산꾼들의 복장이 완벽해 보입니다. 겨울산행은 준비가 철저하여야만 사고를 미연에 예방할 수 있습니다. 


 

 

내려가는 길에 덱 계단이 나옵니다 왼쪽에 뾰쪽하니 창끝 같은 바위가 있습니다. 찔리면 엄청 아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들어보면 가장 멀리 파계봉의 모습도 보입니다


 

 

가까이 보이는 삼각형의 봉우리를 연결하는 바위 능선을 톱날능선이라 합니다. 위험하여 우회하게 되어 있습니다. 파계봉까지 갈길은 멀고 어서 빨리 걸음을 제촉합니다


 

 

소나무가 강한 바람으로 한방향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그 사이로 난 능선길을 따라 산꾼이 걷고 있습니다.  



능선에는 특이한 바위 군상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모바위, 네모바위 등 독특한 바위로 인해 바위에 이름도 붙혀 봅니다. 

 

 

 사람의 발걸음이 무섭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잠시 만에 서봉이 저 만큼 달아나 있습니다. 이제는 파계재까지 탈출로가  두곳 뿐입니다. 부인사로 내려가는 마당재와 학생야영장 갈림길 뿐이라 죽어나사나 파계재까지 go 입니다. 


 

바위를 잡고 올라오는 지점입니다. 먼저 올라온 산꾼이 일행을 걱정스런 모습으로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역시 멋진 자세로 전문 산꾼 같습니다. 


 

편편한 암반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 한숨을 돌려 봅니다. "떡 본 김에 재사 진낸다"고 바위 쉼터에서 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쉴때에는 반드시 체온 유지를 위해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합니다. 산에서 게으름은 바로 죽음이니까요.


 

자연의 경이로움을 이곳에서도 보게 됩니다. 바위 틈새를 비집고 뿌리를 내린 소나무의 생명력이 너무 대단합니다. 이를 두고 끈질긴 우리의 민족성에 비유를 하는 것 같습니다. 발로 밟으면 일어서는 잡초처럼 말입니다.


 

 

어려운 자연환경을 극복하며 소나무의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이래서 소나무를 사군자와 함께 선비들이 좋아하여 물가 정자와 함께 풍치림으로 심었나 봅니다. 능선으로 큰바위가 많습니다. 위험하여 돌아가기도 하지만 잡고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곳을 지나면 산길은 언제 그랬나 하면서 다시금 부드러운 육산으로 모습을 바꿉니다. 


 

안전로프를 잡고 올라야 하는 곳이 수시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안전에 최대한 신경을 써야 하며 특히 요즘 같은 날에는 바위가 많이 미끄럽습니다. 무턱대고 이끼를 밟았다가는 큰 사고로 이어지게 됩니다. 

 

 

뒤돌아 본 모습입니다. 앞에 보이는 봉우리가 우회한 톱날 능선입니다. 이 바위 왼쪽으로 등산로가 나 있지만 수월한 구간은 아닙니다. ㅎㅎ 비로봉이 더 멀리 달아나 있습니다. 

 

톱날 능선을 지나 봉우리에 올라서고 파계봉으로 가는 산길은 다시 쏟아 질 듯 떨어집니다. 

 절벽에 뿌리를 내린 낙락장송입니다. 팔공산 능선 종주를 하면 이런 소나무를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물을 머금고 있는 바위가 등산로에 많이 있습니다. 이런 길은 항상 미끄러움에 주의를 하고 조심조심 올라야 합니다. 

 

이제 첫번째 갈림길 마당재입니다. 서봉에서 90분이면 도착합니다. 왼쪽으로 하산길이 열려 있습니다. 부인사로 내려가는 길이며 '대구 올레' 이정표만 달랑 붙어 있습니다. 정작 목적지는 없이 그저 방향 표시만 있는게 너무 아쉽습니다. 파계봉을 가기위해서는 능선을 직진합니다.


 

 살짝 오르는 산길로 이어지며 등산길 표시를 알리는 '현위치 번호' 표지목이 100m도 안되는 간격으로 정비가 잘되어 있어 길을 잃어 버릴 염려는 없습니다.

 

 

 

심심찮게 나무에 묶인 '대구올레' 안내판을 만납니다. 운동화가 예쁘게 그려져 있는데 이길은 운동화를 신고는 오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마당재에서 25분, 왼쪽으로 학생야영장 갈림길을 지나고 파계봉은 오른쪽입니다. 파계봉은 이제 다 왔는 것 같습니다. 



 곧 만나는 파계봉 정상석입니다. 대구공산 산악회에서 세운 정상석이며 높이 또한 991.2m로 만만치 않습니다. 이제는  1.1km 만 내려가면 사거리 갈림길인 파계재입니다. 

 

 

파계재로 내려서는 길은 급한경사와 낙엽으로 인해 길이 많이 미끄럽습니다. 조심조심해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때까지 참았던 하늘이 금방이라도 울것 같은 날씨입니다. 산행 내내 찌뿌둥하던 날씨였고 이제는 조금만 더 참아 주면 될 것 같은데 팔공산의 하늘은 우리를 저버리는 듯 가을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합니다. 



파계봉에서 파계재까지 20분이면 충분합니다. 이제 한티재까지는 2.1km 남았습니다. 가야할 길도 만만치 않는데 앞선 일행들로 부터 파계재로 하산 한다는 연락이 옵니다. 오, 재수........완전 횡재한 기분입니다. ㅎㅎ 파계재는 십자길 안부로 오른쪽은 제2석굴암 방면으로 내려가며 파계사는 왼쪽입니다.


 

파계사 방향으로 꺾자마자 너도나도 비옷을 꺼내 입는다고 난리입니다. 산행에서 장비의 중요성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항상 비옷등 필수 장비는 배낭안에 꼭 넣어와야 합니다. 

 

 

 

파계사 방향으로 조금 내려오니 이곳은 아직 가을의 문턱을 넘고 있습니다. 울긋불긋 단풍이 막바지 손님에게 멋자랑을 한껏 뽐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서 인지 너무 한가롭고 조용한 하산길입니다. 그와 함께 역광을 받은 빨간 단풍이 더욱 화려한 색상으로 바뀌며 눈부십니다. 올해 마지막 단풍을 이곳 파계사에서 보고 올 가을은 빠이빠이 할 것 같습니다.

 

 

여러번 찾아 온 곳이지만 너무 이쁜 하산길입니다.


 

 

 오, 이제 다 내려왔습니다. 파계사 지장전이 조금 보이는게 말입니다. 마지막 힘을 쏟아 봅니다.

 

 

파계사는 완전 가을이 머물고 있는 듯 절정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ㅋㅋ 달랑달랑  하나남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기전 까지는 가을이 아직 떠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파계사 경내입니다. 가을비도 그치고 절집구경을 합니다. 파계사는 주전이 원통전입니다. 통일신라 애장왕 5년인 804년에 심지화상이 창건하였습니다. 그 후 임진왜란에 의해 소실 된 것을 1605년 조선 선조38년에 중건을 하여 1695년 숙종21년에 다시 중수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행으로 부터 모두 내려 갔다고 빨리 내려가자는 연락이 옵니다. 아직 절집 구경을 다 못한터라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내려 왔습니다. 주차장을 지나면 파계사 저수지를 만나게 됩니다. 이 연못으로 파계사가 유래되었습니다. 파계란? "물줄기를 잡는다"는 뜻입니다. 파계사 주위로 9개의 계곡물이 흘러내려 오는데 그것으로 인해 땅의 기운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절 아래에 연못을 파고 아홉갈래의 물길을 한곳에 모았다하여 파계사가 되었다는 이야기.

 

 

파계사 일주문입니다.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는 파계사를 따로 한번 정리를 하여야 겠습니다. 이제는 도로를 따라 내려 가는 길만 남았습니다.오랜만에 찾아오니 너무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파계사는 문화재 관람료(일반 1500원, 주차비 2000원)가 있습니다. 매표소를 지나면 250년된 느티나무가 세월의 무게를 안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선승인 현응대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현응대사 나무로 부른다 합니다. 이곳에서 이번 팔공산 서봉~파계봉 산행은 마무리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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