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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태종무열왕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면 그의 아들 문무왕에 와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죽어서도 동해의 용왕이 되어 바다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기 위해 유언을 남겼다 한다.
그래서 신문왕은 그의 아버지를 경북경주시 감포 앞바다에 수장을 시켰는데 그를 수중릉 또는 대왕암이라 부르며 호국의 용이라 한다. 그 호국의 용이 뭍에서 흔적을 남긴곳이 있다.

 




지금 삼척의 죽서루 옆 자연석으로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용이 지나간 흔적의 자연석에 큰 구멍이 뚫여 있는데 이곳을 두고 신라30대 문무왕이 죽은 후에 동해바다를 지키다가 오십천을 타고 올라와 죽서루의 벼랑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만들었다 한다.
문무왕이 화한 호국용이 이곳 죽서루 옆의 자연석을 뚫고 지나간 흔적이라 하여 이곳에서는 용문바위라 부런다.




지금은 이 바위의 아름다움과 나라를 지킬려고 호국용으로 변한 문무왕의 전설때문이지 이굴을 통과하면 무병하고 장수하며 그리고 다복을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와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이곳을 찾고 있다. 문무왕은 죽어서라도 이 나라를 지킬려고 한 그의 모습에서 용문바위에 내려오는 그의 전설이 허구가 아님을 믿고 싶다.


그리고 이 용문바위에는 선사시대때부터 내려온 암각화가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가까운 울산의 방기리알바위처럼 여자의 생식기를 나타내는 둥근 구멍이 뚫여 있는데 이를 두고 성혈암각이라 한다.
성혈은 선사시대부터 내려오는 원시신앙으로 다산, 풍요, 생산등을 의미한다. 지금도 전국적으로 확인되고 있는 성혈암각은 죽서루의 용문바위 부근에도 10여개 확인되고 있다.




















 

1991년 2월에 문화부는 송강정철의 날로 정하고 그의 가사문학의 업적을 기리기위해 관동팔경의 1경인 이곳 죽서루와 담양의 성산별곡의 무대인 식영정 인근에 각각 기념하는 탑을 세웠다 한다.

지금도 죽서루 한켠에는 그의 ‘송강정철가사의터’라는 비가 남아 있으며 높이 2m의 팔각기둥에 8각의 기단을 두었는데 각 면마다 그의 대표작과 친필, 수결, 가사창작의 배경등이 세겨져 있다.






 

 

찾아가기
부산에서는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여 경주IC에서 빠져나와 서라벌대로 2.1KM 이동후 오릉네거리에서 포석로 시내방면으로 2.2KM 이동후 좌회전한다. 내남네거리에서 태종로 시청, 시의회(울산,감포)방면으로 우회전 후 697M이동한다. 팔우정삼거리에서 원화로 경주시청(포항)방면 으로 좌회전후 2.1KM 이동하면 원화로 지하차도 진입후 9.9KM 이동한다. 7번국도를 따라 산업로 고가도로 진입후 7.5KM 이동후 유금IC에서 영덕(울진)방면 우측도로로21.3KM 이동한다. 광명휴게소에서 동해대로 159.6KM 이동한다. 동해대로 새천년도로 삼척항(강릉 동해)방면으로 우측도로 328M 지난후 삼척교사거리에서 오십천로 시청 태백 방면으로 좌회전후 1.8KM 이동한다. 죽서루앞 삼거리에서 죽서루길, 삼척문화원(죽서루) 방향으로 좌회전 하면 죽서루가 보인다. 네비게이션에 삼척 죽서루 검색을 하면 된다. (다음지도 이용)



공양왕릉

 

삼척 근덕면 궁촌리에 가면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릉이 있다 한다. 궁촌왕릉이라 부르는 이왕릉은 그의 아들 왕석, 왕우 3부자의 묘로 전해지고 있다.
1392년 공양왕 4년인 7월에 이성계가 이씨조선을 건국하며 왕위에 오르자 8월에 전왕을 폐하여 공양군으로 강등하여 강원도 원주로 귀양을 보내게 되었다.
혹 모를 옛 고려충신들과의 접촉등을 꺼려 불안한 나머지 다시 3부자를 간성으로 옮겼다.
그곳에서도 불안함을 떨칠 수 없어 1394년 태조3년인 3월 14일 지금의 왕릉인근인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로 귀양지를 옮기게 한후 한달 뒤인 4월17일 사약을 내려 모두 죽였다.



그 후 귀양 온 공양왕이 죽어 묻혔던 곳으로 전해지게 되는데 다시 경기도 고양시 식사리로 옮겨 갔다고도 한다. 그곳에도 공양왕릉이라하여 왕비릉와 함께 사적19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연유를 보니 1421년인 세종3년 1월13일에 공양왕의 공주였던 단양군 이성범의 처가 임금에게 상소를 하여 자신의 아버지를 다시 공양왕으로, 그의 어머니를 왕비로 추봉을 하여 공양왕릉을 정릉으로 정한 기록이 현재 남아 있다.
이곳은 1837년 헌종3년 가을에 삼척부사 이규헌이 개축하였고, 1977년 삼척군수와 근덕면장에 의해 개축 보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강원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어 있다.

 








 

찾아가기
부산에서는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여 경주IC에서 빠져나와 서라벌대로 2.1KM 이동후 오릉네거리에서 포석로 시내방면으로 2.2KM 이동후 좌회전한다. 내남네거리에서 태종로 시청, 시의회(울산,감포)방면으로 우회전 후 697M이동한다. 팔우정삼거리에서 원화로 경주시청(포항)방면 으로 좌회전후 2.1KM 이동하면 원화로 지하차도 진입후 9.9KM 이동한다. 7번국도를 따라 산업로 고가도로 진입후 7.5KM 이동후 유금IC에서 영덕(울진)방면 우측도로로21.3KM 이동한다. 광명휴게소에서 동해대로를 따라가다 삼척시 근덕면 궁촌IC에서 공양왕릉 표지판을 보고 우측으로 내려서면 된다. 약1km를 옛 도로를 따라가면 된다. 이정표가 잘되어 있고 우측으로 공양왕릉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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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두번째 큰 섬인 영도는 예로부터 신선이 살만한 곳으로 여겨져 마을의 지명도 신선동이니 청학동 그리고 봉래산등 이상향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영도 또한 절영도에서 나왔다. 한때 이곳은 명마를 키우는 목마장이 봉래산아래 존재를 하고 있었는데 말이 달리면 자신의 그림자도 따라 오지 못할 정도 즉 말의 그림자를 끊을 정도로 빨리 달리는 명마를 키웠다 한다. 그래서 영도를 절영도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후 영도가 되었다.




그 남쪽 끝에 천길 단애를 이루는 태종대가 자리를 하고 있으니 선경이야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등대에서 바라보는 남해의 바닷가와 저멀리 수평선에 떠 있는 대마도도 시야에 잡히는 그야 말로 부산 관광의 중심이다.
태종대는 부산을 대표하는 암석 해안으로 파도에 의한 침식으로 자연발생적으로 생성 되었다.
우거진 나무와 숲 그 아래는 수직 100m의 천길 절벽을 좌우로 만들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지금 이곳은 국가명승지 제17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데 동래부지에 의하면 신라시대때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통일 한 후 이곳에 시찰과 휴양차 들러 활쏘기를 하였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가뭄이 들면 동래 부사가 이곳까지 행차를 하여 기우제를 지낸곳이며 일본에 끌려간 지아비를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는 망부석 전설과 선녀가 하강을 하여 그 절경에 취해 도끼자루 썩는 줄 도 모르고 놀고 올라갔다는 신선대의 이야기등이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도 부산의 갈맷길이 조성이 되어 있다.
서구 암남동의 암남공원에서 이어지는 볼레길을 따라 송도해수욕장을 거쳐 남항대교를 건너 절영해안산책로를 끼고 이어지는 이 코스는 17.8km로 8시간이나 소요되는 코스이다.
사실 바위와 포장길의 연속인 이 길을 그래 걷는 것은 무리이며 길을 걷는 이유에서도 거리가 먼 것 같아 세 번 잘라서 걷게 되었다.
걷기는 여유와 생각을 하고 주변의 경치를 음미하며 걸어 가는 것이 그 취지이다.
땀을 흘릴 요량으로 운동이라 생각하면 학교 운동장을 달리는게 시간이나 금전적 면에서 훨씬 좋을 것이다. 이번에는 태종대 입구에서 시작을 한다.







 예전에는 매표소가 서 있던 자리로 지금은 무료로 입장을 할 수 있게 시민의 품으로 돌아 왔다.
이곳을 지나면 갈림길로 좌측은 차량의 일방길인 내려 오는 길이다.
안내도에는 등대자갈마당 신선바위 영도등대 태종사 순환도로라 되어 있다.
우측은 전망대 남항조망지 구명사 태원자갈마당 진행방향의 순환도로로 되어 있어 우측으로 들어선다. 먼저 우측의 유람선 선착장으로 내려 간다.
 이날 누이파의 영향으로 유람선은 발이 묶여 보이지 않으며 세찬 파도만 밀려오고 있었다. 다시 나와 순환도로를 따라가면 우측으로 자갈마당과 전망대 가는 길이 나온다.
기암의 전망대인 이곳은 송도와 암남공원 감지해변 그 뒤로 중리산을 볼 수 있어 많은 관광객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다시 남항전망대에서 보는 조망도 바닷 건너 서구의 천마산 가덕도등 별 다르지 않으며 예전에는 자살바위로 한때는 불리던 곳으로 지금은 모자상과 상가로 변모를 하여 그때의 상처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자상의 연유를 아는지 모르는지 모두 모자상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바쁘다.
태종대 최고의 볼거리는 뭐니뭐니 해도 등대와 신선대로 태종대의 진 면목을 아낌없이 보여 주는 곳이다. 시원한 바람을 직접 맞을 수 있고 밀려드는 파도를 피부로 느낄 수 있으며 등대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게 전망대로 개방을 하였다.
그 외에도 최근에 많은 기념탑을 조성하여 더욱 풍성한 볼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넘 화려하지 않으며 그리고 주변의 경치와도 도드라지지 않은 이곳에 어울리게 조성을 하여 쉼터가 되고 있다. 

















다시 계단을 올라와 진행 방향을 따라가면 이번에는 태종사와 6.25참전 기념비가 나온다.
영도유격부대 작전지비로 동해 3도 출신으로 1950년 10월부터 1952년 12월까지 피나는 훈련을 거쳐 적후방에 침투를 하여 특수전을 감항하였다 한다.
태종사에는 스리랑카에서 모시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보관하고 있다하며 법당의 부처님 또한 국내의 부처님과 모습이 조금은 달라 보이는 스리랑카 풍의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을 지나면 들어온 태종대 입구로 다시 나간다.








총 길이가 약 4.3km의 이길을 여유를 가지며 2시간 정도 소요 되었다.
태종대 유원지의 총 면적은 54만2천평이며 해발 250m의 최고봉인 태종산,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해송과 120여종의 자연식물과 수목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맑은 날에는 56km 떨어져 있는 대마도(쓰시마섬)가 보이며 일제시대때부터 군 요새지로 사용된 바람에 출입의 통제를 받아 왔고 그 당시의 시설물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지금 이용하고 잇는 순환도로는 1970년에 착공을 하여 3년만에 완공을 하였다한다. 현재는 태종대유원지로 변모를 하여 전국적으로 사랑받는 관광지가 되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태종대를 도는 길은 순환도로의 보도블럭을 걷는 길인데 보도블럭을 걷어 내고 흙길을 조성하면 더 좋은 길이 되지 싶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남포동 6번출구를 나와 8번,30번, 88번을 이용하면 되고 부산역방면 9번 출구에서 88번 101번을 이용하면 태종대까지 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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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에 와 활을 쏘았다는 태종무열왕은 과연 어디에서 활을 쏘고 망중한을 즐겼을까.

그곳은 등대 아래편에 천길의 단애가 휘둘러져 있는 태종바위와 신선바위가 아닐가 싶다. 태종대를 한때는 신선대로도 불렸는데 태종바위와 신선바위를 합해서 모두 신선대로 불렸다. 언제부턴가 왼쪽의 바위를 무열왕이 쉬었을 법 하다하여 태종바위라 부르고 우측의 망부석이 있는 바위를 신선바위라 부른다.


그 이전에는 공룡들의 놀이 공간이였나보다. 태종바위 일원에 무수히 많은 공룡발자국이 발견되어 학계의 많은 관심을 가졌다. 공룡의 멸종기때 후기 백악기말인 6500만년~7000만년전에 생선된 발자국화석이다. 그 후 하늘의 선녀들이 하강하여 평평한 이곳 바위에 내려와 놀고 갔다는 전설과 신선들이 이곳의 절경에 반해 장기를 두며 '과연 여기가 무릉도원일쎄' 무릎을 치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하여 오늘날에 신선대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곳 신선바위에는 선녀들이 내려와 놀고 아이를 낳고 갔다는 이야기와 그의 흔적들이 도처에 남아 있다 한다. 바위에는 아이의 태를 끊은 가위와 실패의 흔적이 있으며 출산한 선녀의 왼쪽과 오른쪽의 무릎이 닿은 흔적이 남아 있는데 오른쪽의 흔적이 더 깊게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하는데 그것은 출산할 때 오른쪽 다리에 더 힘이 가해지기 때문이란다.

 


신선바위위에는 삼각뿔 모양의 바위가 올려 져 신기하기 까지하다. 그 바위를 망부석이라 부른다. 이 바위는 왜구에게 끌려간 지아비를 이 바위에 올라 일본쪽을 바라보며 비가 오나 눈이오나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다 바위로 굳어 졌다는 전설이 있다.



비단 이 여인내만의 이야기일까. 임진왜란 때 끌려간 수많은 우리 백성과 도공등의 이야기 일 것이다. 그런 아픔이 스며 있는 이곳 태종대 신선바위는 주말의 무이파로 인해 그때의 울분을 토하는 듯 파도 소리만 더욱 요란하게 울릴 뿐이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남포동 6번출구를 나와 8번,30번, 88번을 이용하면 되고 부산역방면 9번 출구에서 88번 101번을 이용하면 태종대까지 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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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하면 제일 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이 등대가 있는 신선바위와 망부석 일원일 것이다.
부산지역 명승지 일번지인 태종대는 신라시대인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여기 태종대에 들러 활쏘기를 하였다는 곳으로 이곳은 현재 활쏘기를 하는 태종무열왕은 찾을 수 가 없지만 바닷길을 안전하게 유도하는 등대 불빛이 활을 대신하고 있다.



태종대의 등대는 흔히 태종대 등대로 알고 있지만 영도등대라 부른다.
정식면칭은 영도항로표지관리소이다. 영도등대는 1906년 12월에 국내에서 10번째 설치 되어 100년을 넘긴 등대로 부산에 있는 유인등대인 가덕도 등대, 오륙도 등대보다도 규모면에서는 최고를 자랑한다. 2004년에는 영도등대가 새롭게 태어났다,

총 45억원의 공사비를 들여 영도등대를 개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을 하였다.
등대는 항해하는 선박들의 안전한 뱃길을 밝혀 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낮이나 밤이나 이곳을 지키는 파수꾼인 것이다. 등대의 불빛은 50만촉광의 빛을 18초 간격으로 3번의 흰 빛을 내보낸다. 모두 4명이 근무하는 이곳은 근무환경이 여타 등대보다는 괜찮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맑은날에는 대마도등 주변의 조망이 탁월하다.

현재 영도등대는 무료로 개방을 하였다 등대탑이 전망대로 개방을 하여 누구나 쉽게 올라가 볼 수 가 있으며 갤러리및 자연사 박물관도 꾸며져 있어 알차게 하루를 즐길수 있다.












등대 전망대로 올라가는 계단 길

등대 전망대에서 본 모습









자연사 박물관








찾아가는 길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남포동 6번출구를 나와 8번,30번, 88번을 이용하면 되고 부산역방면 9번 출구에서 88번 101번을 이용하면 태종대까지 갈 수가 있다.
이용시간은 오전10시~오후5시까지이며 모두 무료로 이용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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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곡동 왕산마을에서 무장골을 따라 40여분 올라가면 왼쪽 담벼락에 걸려 있는 무장산사지 안내판. 여기서 우측으로 무장골을 건너간다. 




무장사지터로 우측은 무장사지 삼층석탑가는 길 좌측은 무장사지 아미타불조성사적지 가는길이다.

무장사지아미타불 조성 사적비 이수및 귀부로 보물 제125호, 계화부인이 소성왕의 극락왕생을 빌며 조성한 아미타불의 기록을 적은비문으로 현재 비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빗돌을 받치고 있는 거북이를 귀부라한다. 두마리의 거북이가 빗돌을 받치고 있다. 장수를 의미하는 거북이로 알려져 있는데 계화부인이 부왕 소성왕이 일찍 승하하여 아마 귀부를 깔고 명복을 비는 것은 아닌지....

귀부위에 빗돌을  받치는 테두리에 12지신을 돌여 놓았다. 앞뒤로 4개씩. 좌우로 2개씩으로 마모가 심하여 확인이 힘들다.

12지신상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 보통 비석을 받치고 있는데 귀부라한다. 목이 달아나고 없습니다.

거북이와 거북이 사이에 역삼각형으로 있는 조각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여성 또는 여성의 성기를 의미한다함

빗돌위에 얹혀 있는 머리로 용이여의주를 받치고 있는 형상같이 보인다.


이수에 새겨진 용

이수의 측면 조각입니다.

측면의 전체적인 모습입니다.


무장사지

이절터는 경주시 암곡동 산1번지에 위치한다. 보문단지 뒤 덕동호 인근에 위치한 암곡동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서울(옛 서라벌)에서 아주 멀고도 험한 골짜리임을 알수있다.
그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면 무장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능선 끝에 자리를 잡은 절터이다. 무장사란 절이름에서 보면 아주 강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사연을 간직한 절터로 짐작을 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절 이름부터 뜻이 있었다. 문무왕때 이르러 삼국을 통일하였지만 태종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지긋지긋한  전쟁은 끝났다 하며 이제는 피폐한 백성을 생각하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병기와 투구를 감추어 나라의 평화를 기원했다는 뜻에서 무장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신라38대 원성왕의 부친인 효왕이 그의 숙부 파진찬을 위하여 세운 절이라 한다.
삼국유사에도 무장사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소성왕의 왕비인 계화부인이 소성왕이 임금의 자리에서 일찍 승하하자 무장사에 그의 극락왕생을 빌기위해 아미타불상을 조성하게 되었다한다.
무장사지에 남아 있는 귀부와 이수는 계화부인이 소성왕의 명복을 빌면서 조성한 아미타불상을 만들면서 그에 관한 내용을 기록해 놓은 기록비문이라한다.
1915년 귀부와 이수만 덩그런히 남아 있었는데 주변에서 비석조각을 발견하였다한다. 그 조각에 새겨진 내용을 보고 무장사지임을 알게 되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그 비문이 보관되어 있다한다.
비문에는 금석학의 대가 추사김정희가 32세 때인 순조17년에 무장사지를 두 번이나 방문한 기록을 써 놓았고 당나라 왕희지의 글을 모아 집자해서 써 놓았다고 되어 있다.

무장사지 아미타불조상사적비 이수및 귀부(보물제125호)와 무장사지 삼층석탑(보물제126호)만 현재 남아 있다.
먼저 이수및 귀부를 살펴보면 비문은 없어지고 비석을 받쳤던 거북모양의 받침대인 돌을 귀부라 한다.
그 귀부위에 있던 비석은 파손된 조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비석 위에 올려져 있던 용모양을 새긴 비석머리를 이수라 한다.
귀부인 거북이 두 마리 위에 12지신을 모시고 그위에 비문을 세웠서며 이수인 용이 새겨진 비석의 머리돌에는 아미타불ㅇㅇ란 여섯글자가 두줄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무장사지삼층석탑은 기단을 2단으로 만들고 그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려 놓았다. 1층 기단에는 모서리 기둥과 2개의 안기둥을 조각하고 덮개인 돌을 올려 놓았다. 덮개돌 위의 2층 기단은 8개의 돌로 짜 맞추었다. 2단 기단 네면에 두 개의 돌에다 안상을 넣었다. 둥근 창모양 같은 문양을 모서리기둥과 안기둥에 새겨 넣었다. 1층 2층3층 각각 몸돌과 몸돌을 덮은 지붕돌인 덮게 돌은 모두 1개씩의 돌로 만들었고 아랫면은 5단 그리고 모서리 기둥을 조각하였다.
1963년 무너져 있던 것을 일부 다른 돌을 넣어 다시 세웠다한다. 높이는4.95m


무장사지 삼층석탑 보물제126호. 1962년 복원 작업을 할때 일부 자재를 추가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다합니다.

증명사진입니다.

2층 기단에는 창모양의 안상을 조각하였습니다

기단위에 하나의 돌로된 지붕돌을 놓았고 그의에 몸돌도 하나의 돌로 만들어 사각 모서리를 안쪽으로 조각을 하여  놓았다, 지붕돌은 덮게돌로 5단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돌이다.

옆에서 본 모습으로 안상하며 지붕돌이 5단으로 역층의 모습을 하며 몸돌의 네면에 안쪽으로 조각을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장사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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