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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과 청도를 여행하다 보면 한가문의 집성촌을 이루는 곳이 여럿있다.
특히 밀성손씨와 밀성박씨가 밀양을 대표한다하겠다. 흔히 마을의 주위에 향교가 서 있으면 그 동네이름도 자연스럽게 교동이 되는 곳이 많은데 밀양향교 주위에도 마을이 형성 되어 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교동으로 불린다.

들어서는 입구에는 밀양손씨 교동파 세거터라는 큰 표지석이 집성촌임을 알리고 있다 골목을 들어서면 먼저 교동파의 종택과 만난다. 1910년경에 건축된 정면7칸 측면 한칸반의 역 ‘ㄱ’자 형태로 지어 졌고 즐비하게 나타나는 고택들을 보면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손병순씨 고택과 손병구씨 가옥등 근대가옥이 증개축 과정을 거치면서 일제시대에서의 건물형태를 엿볼 수 도 있고 교동의 대표 가옥인 1천평 대지위에 세워진 99칸 대 저택도 만날 수 있다. 일대에서는 만석꾼 집으로 불렸다하며 17세기 숙종때 손성중에 의해 처음 지어졌다. 현재는 한정식 집으로 운영이 되는데 상호가 열두대문으로 이집의 대문 수만 12개나 달한다한다.
근방에 보기드문 대 저택이다. 향교를 거처 항교 정문을 나가면 다시 고택들을 만날 수 있다.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가면 밀성박씨들의 집성촌을 이루는 곳을 만날 수 있다.
신지리 고가촌으로 20번 도로를 따라 양편으로 고래등 같은 고가들이 이어진다.
소요당 박하담(1479~1560)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와 서당을 짓고 후진을 양성한 그 터에 1809년 박정주가 분가를 하면서 살림집으로 건립을 하였다
그 후 1824년 운강 박시묵에 의해 크게 확장을 하고 그의 동생인 박기묵이 1899년 합천군수로 재직시 건립을 하였다는 도일고택. 섬암고택은 박시묵의 둘째아들인 박재소(1840~1873)가 분가를 하면서 살림집으로 지어졌다 한다.
운강고택 들어가는 골목 입구에 셋째아들인 박재충이 분가를 하면서 건립한 운남고택, 박시묵의 손자인 박래현이 조선 고종때 별서로 건립한 명중고택등 고가들의 건물들이 즐비하다.
흡사 조선시대 양반가들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운강고택은 신지리를 대표하는 고택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서로 구분이 되어 두 개의 ‘ㅁ'형의 구조를 한 대 저택이다.
명중고택도 ’ㅁ'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도일고택과 섬암고택은 한일자의 평면구조와 ‘ㄱ'자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 밀양박씨 집성촌은 신지리 평야의 너른 터에 집안의 공간을 넓게 잡아 시원하게 건물을 올렸다.

(밀성손씨 교동파 손씨 고가촌)




























(청도군 밀성박씨 고가촌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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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청도여행)금천면 입암정. 청도군 신지리 입암정 찾아가기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입암마을 선암서원 옆에는 입암정이란 정자가 있다.
국헌정이라고도 부르며 마주보는 어성산과 그 우측에는
소요당 박하담이 매사냥을 즐겼다는 방응봉이 솟아 있고

 그 아래 동창천이 굽이쳐 소와 애암을 만드니 봉황애라 부른다.
임진왜란때 동래성이 함락당하고
종과부적으로 청도땅까지 밀려들어 온 왜적과 맞서 싸운 신지리 밀양박씨 문중의 14의사 중 한분으로
동창천 굽이치는 이곳에 국헌 박경윤선생이 낙향하여 말년을 보내던 곳이다.
소요당박하담의 손자이며 임진왜란때는 구국의 정신으로 왜적과 싸운 창의공신이며
제우당 박경전과 국헌선생은 형제지간로

임진왜란으로 적천사에 보관중이던 예부운락이 소실되자
충북영동으로 달려가 원판을 구해
1573년 선조6년에 다시 복각한 만력판이 현재 남아 있다.
입암정의 이건물은 여러번의 중수를 거쳐 1901년에 후손들에 의해 다시 지어 졌다.
그러나 세월의 무게는 견디지 못하고  
2010년 7월에 후손들에 의해 다시 그 때 모습 그대로  건립을 하였다 한다.  
지금은 옛 모습은 사라지고 없지만
봉황애와 용두암인 선암의 전설을 안고 또 한세기를 버틸수 있을 것 같다. 
입암정과 마주보고 있는 건물은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고 폐가 수준에 이르고 있다.
입암정에 간 날이 마침 국헌정의 문중에 행사가 있어 이곳에 많은 후손들이 왔다한다. 
평소에는 거주하는 후손 없이 문이 잠겨진 상태로 있어 들러 볼 수 없지만
선암서원 만하정과 함께 선조들의 충의정신을 옅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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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청도여행)금천면 선암서원. 청도 선암서원에서 전통 고택 숙박 체험을 할 수 있다네요


선암서원은 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박하담의 위폐를 모신 곳이다.
매전면에 있던 위폐를 조선 선조때 이곳으로 옮겨와 선암서원을 개창하였다.
고종때 재차 중건을 하여 선암서당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암서당은 여타 서당과 달리 가정집인 살림집과 함께 건립이 되어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살림집이 위치를 하는데 좌측으로 안채이며
우측으로는 사랑채인 득월정이 서로 담하나를 두고 경계를 짓고 있다.
득월정 옆 중문을 들어서면 소요당인 서원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소요당은 정면5칸 측면2칸으로 좌우로 전퇴를둔 방을 두었다.
중앙의 마루에는 뒤를 문을 달아 서로 통하도록 하였고
 천장의 공포는 서원으로서는 보기 힘든 조각품으로 짜 맞추어져 있다.
방을 꾸민 기둥은 평주로 꾸몄다. 일반적으로는 보통 고주로 기둥을 세우는데
선암서원은 특이한 기법을 사용하였다.






청도땅 신지리 선암서원 뒤편에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교과서나 책에서는 듣지 못했던
충의 의미를 돼세기는 한집안의 이야기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임란창의14의사전적비'로 임진왜란때 왜적이 동래성을 함락하고 물밀듯이 청도땅으로 쳐들어 왔다. 

이곳 밀양박씨 박하담의 후손들이 분연히 일어나
삼촌과 조카,형제,부자지간의 14의사가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하고자 어성산에서 산성을 구축하고 왜적과 싸웠다.  
이 전쟁에서 천성만호 박경선은 전쟁중 손목이 잘려 나가는 부상을 입고서도
왜장을 끓어 안고 봉황애에서 떨어저 전사를 하였다.
그 봉황애가 전적비 뒤에 보인다.






파련형의 안초공을 사용하여 평주를 세운 선암서원 모서리 기둥의 모습

소요대




선암서원 뒤 쪽문을 내려서면 이마을 지명이 유래된 입암, 죽 선바위가 있다.

마을에서는 용두암으로 부르며 그 아래 소를 용두소라 부른다.
마을의 이야기로는 지금 바위 밑에 용머리 형상의 바위가 붙어 있었는데
태풍의 폭우로 인해 쓸려 내려 가

현재는 용의 머리 부분은 떨어저 나가고 물길도 돌려저 버렸다 한다.
 이 용두소 일대를 소요대라 통칭하여 부른다.

선암서원을 들어서는 출입문


안채의 모습

사랑채인 득월정과 돌담을 하나 두고 갈라저 있다.

사랑채인 득월정은 정면4칸 측면 1칸으로 구성이 되어 있고
정면 2칸은 마루를 넣었고 2칸은 방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뒤로는 문을 달아 놓아 수시로 열 수 있도록 처리를 하였다.






소요당 선암서원과 살림집을 갈라 놓은 중문의 모습

중문을 들어서면 수백년은 됨직한 백일홍 두그루가 뒷문옆에 심어저 있다.
이 배롱나무가 꽃을 필때는 선암서원은 더욱 한폭의 그림 같이 
탐방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것이다.


선암서원 천정의 다포식공포로 예술성이 돋보이며
서원으로서는 보기드물게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현재는 박향숙 씨가 서원을 관리하면서

전통고택 숙박체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백일홍 꽃이 활짝 피는 여름 휴가철에는 방 예약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인터넷홈페이지(http://sunam.co.kr)
또는 전화(070-4150-8445)로 예약 문의를 할 수 있다.







선암서원의 뒤 건물로 장판각이다.

선암서원의 보물을 보관하였다.
배제예부운략판목, 지방문화재인 해동속소학판목, 14의사록판목을 보관하였는데
현재는 안동국악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










찾아가는길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청도역에서 내린다. 부산역 기준 오전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 6시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10시20분 등 자주 있는 편이다. 1시간 소요, 4800원. 청도역에서 나와 왼쪽으로 5분 거리에 있는 청도버스터미널에서 운문사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신지리에서 하차한다. 오전 7시40분, 9시20분, 10시40분, 11시30분 등 하루 8회 출발한다. 3200원.

자가운전의 경우 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린 후 좌회전, 긴늪사거리에서 청도방향 25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한다. 상동역 지나 신곡삼거리에서 좌회전, 상동교를 건넌 후 25번 국도를 버리고 오른쪽 매전 금천 방향 58번 국도를 탄다. 동창천을 따라가다보면 매전면 소재지의 처진소나무를 지나 매전교를 만난다. 우회전 해 매전교를 건너 진행하면 금천면 신지리 들어서면 선암서원 입간판이 보인다. 좌측으로 들어서면 곧 서원 앞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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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청도여행)금천면 만화정과 세심정, 한국동란때 이승만대통령이 머물렀다는 만화정과 그뒤 세심정

흔히 옛 양반들의 집성촌으로 아직까지도 그 당시의 건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 여럿 있다.
안동 하회마을의 풍산류시 집성촌,
지리산 가는길의 남산예담촌 그리고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등 여럿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부산에서 가까운 곳 중 찾기는 쉽지가 않다. 
최근까지 알려지지 않은 곳이 청도 땅에도 있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그곳에 버금가는 고가들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곳이 영남알프스 둘레길에도 있다.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로 한때는
이곳이 금천면의 면소재지로 이름을 날리던 곳으로 도로 좌우편으로 옛 고가들이 줄을 서 있다.
도암고택, 운강고택등 밀성박씨의 한집안이 가계를 이루어 내려 오는 곳으로
운강고택의 부속건물로 지어진 만화정을 이야기하려 한다.
 동창천변 절벽에 자리를 잡은 정자 만화정(萬和亭)은 한옥마을의 백미로 꼽힌다.
청도의 여러 한옥 마을중에서도 여기 신지리의 고택이 으뜸이며
만화정은 동창천과 주위의 영남알프스의 풍광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한옥마을의아름다움을 더욱 빛네고 있다.

 





만화정은 본래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소요당(逍謠堂) 박하담(1479~1560)이 건립한 서당 터였는데
그의 11세 손인 박정주(1789~1850)가 분가해서 살림집으로 지은 것이다.
이후 박정주의 아들인 운강(雲崗) 박시묵이 더욱 확장,
현재의 모습처럼 정자 형태로 변형했고 이곳에 강학소를 열어 지역 후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으며
그의 아들인 진계 박재형은 해동속소학 등 38권의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주변의 선암서원 등과 함께 청도 지역 학문의 요람 역할을 했다.


 


운강과 진계가 이곳에서 학문을 갈고 닦고
후학들에 대한 교육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원래 이곳에 서당을 세웠던
소요당의 높은 인품과 학풍을 이어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요당은 조선 중종 때
사마시에 합격했지만 여러 관직을
모두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저술과 학문연구에 매진한 성리학자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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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당 박하담의 후손들이 이곳 만화정 앞 뜰에 모여
형제 삼촌 조카 부자지간의 14명이 의병을 궐기하여  임진왜란때
동래성이 왜군에게 떨어져 15일만에 청도로 밀려 올라왔을때
밀양박씨 14명이 의연히 일어나 어성산에서 싸웠다한다.



특히 무오사화 등을 거치면서 더욱더 세속적인
출세와 벼슬길에 대한 마음을 접게 된 소요당은 본격적으로 지역 발전에 이바지하게 된다.
그는 삼족당 김대유 등과 함께 운문사 아래에 최초의 사창(社倉)을 지어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던 백성에게 환곡법을 실시하는 등 빈민구제사업에 매진했다.
또 남명 조식, 삼족당 김대유 등 당대의 대학자들이 소요당을 찾아와 학문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같은 학풍과 인품이
12대손인 운강 박시묵대와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것이다.


찾아가는 길

부산역에서 출발하는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청도역에서 내린다. 부산역 기준 오전 5시10분, 5시50분, 6시35분, 6시55분, 7시45분, 8시35분, 9시25분, 10시20분 등 자주 있는 편이다. 1시간 소요, 4800원. 청도역에서 나와 왼쪽으로 5분 거리에 있는 청도버스터미널에서 운문사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신지리에서 하차한다. 오전 7시40분, 9시20분, 10시40분, 11시30분 등 하루 8회 출발한다. 3200원.

자가운전의 경우 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린 후 좌회전, 긴늪삼거리에서 청도방향 25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한다. 상동역 지나 신곡삼거리에서 좌회전, 상동교를 건넌 후 25번 국도를 버리고 오른쪽 매전 금천 방향 58번 국도를 탄다. 동창천을 따라가다보면 매전면 소재지의 처진소나무를 지나 매전교를 만난다. 우회전 해 매전교를 건너 진행하면 금천면 신지리 만화정 앞에 닿는다.















만하정 뒤 쪽문을 열고 나가면 세심정으로 갈 수 있다.
안강의 옥산서원의 세심정처럼
 마음을 씻는다는 뜻의 정자가 있었다한다. 











만화정을 화폭에 담는 노 화백의 모습







지금 세심정의 정자는 사라지고 없지만 동창천편에
외로이
만하정과 함께 옛 선현의 글씨가 또렷이 남아 있다. 
잡초가 웃자라 있고 주변의 상태로 보아서는 버려진체로 남아 있는
이곳에도하루빨리 문화재의 대책을 수립하여 잡초를 제거하고 보호책을 마련하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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