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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여행/양산여행)김정한의 수라도 무대였던 소설속의 미륵당이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을 보다.

 

양산시 물금읍의 물금역을 나오면 물금취수장을 따라가는 길이 나옵니다. 이 길은 조선시대 한양으로 올라가는 3곳의 영남대로 중 한곳으로 부산을 거쳐 양산에서 낙동강을 따라 올라가는 중도의 영남대로입니다. 이 초입에 용화사의 작은 절집이 있습니다. 또한 한양으로 가는 영남대로상에는 위험한 길로 알려진 곳이 세 곳입니다. 황산잔도와 작원잔도 그리고 토끼벼루로 세 곳 중 두 곳이 이곳 물금과 원동 그리고 삼랑진을 잇는 낙동강 길에 있습니다.

 


 

 

 

낙동강을 예전에는 황산강이라 불렀습니다. 그 이름을 따온 황산잔도는 험하기로 익히 알려져 한양으로 올라가는 선비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황산잔도의 초입에 있는 용화사는 절의 사세에 비해 보물인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 연유를 보면 부산의 문인이었던 요한 김정한의 중편소설 ‘수라도’에 잘 나와 있습니다. 수라도의 배경은 이곳 화제리를 배경으로 쓴 소설입니다. 수라도의 내용 속에는 미륵당이 등장합니다.

 

 

 

 

☞(경남여행/양산여행)가야부인이 창건한 미륵당이 용화사, 수라도 무대였던  미륵당 석조여래좌상을 만나다.

가야부인이 시아버지 허진사의 제사장을 보고 오다 이곳 골짜기에 반쯤 묻혀 있는 미륵불을 발견합니다. 가야 부인은 그곳에 절을 세우기로 작정을 하지만 조선시대 사대부의 유교 관습에 의해 집안의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사위가 가야부인의 뜻을 알고 절을 짓는데 그곳이 지금의 용화사로 소설속의 미륵당입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지 미륵당에 얽힌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안내판에도 언급을 하고 있지만 낙동강 건너 김해시 상동면 감로사지에 있던 불상이라 합니다.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이 본국으로 가져가기 위해 옮겨 오다가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낙동강변에 버렸다는 전설입니다. 소설속에는 가야부인이 그것을 발견하게 되어 미륵당을 짓게 되는 것으로 나옵니다. 지금 용화사에는 용왕대재의 행사를 봄이면 한다고 합니다. 낙동강의 강물에서 건져 올렸다하여 용왕대재를 지낸고 있습니다.

 


 


 

 

 

용화사는 사실 미륵으로 불리는 석조여래좌상을 빼면 너무 초라한 절집입니다. 그럼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문화재 안내문을 보면 보물 제491호이며 소재지는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입니다.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항마촉지인여래상으로 양산에서는 유일하다고 합니다. 광배는 파손된 상태였고 불상은 낙동강의 뻘밭에서 건져 올렸는지 백색의 호분이 범벅되어 원형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지금 용화사의 석조여래좌상은 광배와 대좌가 완벽한 모습으로 갖추어진 상태입니다. 이는 복원과정을 거쳐 현재의 완벽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대좌도 대좌지만 대좌 뒤의 광배가 화려하며 조각수법이 매우 우수하다합니다. 하늘을 날고 있는 천인상과 구름을 세겨 본존상이 구름위에 떠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이 합천 청량사 석조여래좌상의 광배에도 나타난다합니다. 광배의 뒷면에는 하늘에서 하강하는 천인상 2구가 음각되어 있어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광배 뒷면에 공양천인상이 세겨진 것은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뿐이라합니다. 그만큼 아름다운 광배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무뚝뚝해 보이는 석조여래좌상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용화사에서는 낙동강이 보이지 않습니다. 강가 옆이면서도 낙동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가보면 용화사 앞으로 서울로 올라가는 경부선 선로가 놓여져 있어 항상 덜커덕 거리는 열차의 소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낙동강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낙동강을 볼 수 있는 굴다리가 뚫여 있습니다. 일제강점기때 수탈의 목적으로 놓여진 경부선은 처음에는 단선으로 놓였습니다. 단선일때 붉은 벽돌을 돌려 놓은 동굴의 내부에 사각의 돌을 깍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모습이 그때의 상황을 그대로 굴안에서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선이 되어 확장을 했던 굴다리의 모습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곳이 4대강 사업으로 자전거 길이 연결되어 시원하게 황산잔도를 볼 수 있어 여행삼아 가면 너무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을 둘러 보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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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교산&그너머 <722> 제9코스 : 청도 임당리 ~ 신지리 만화정
깨진바위 밑 대비사 청정함 머금고 운치 만점 한옥마을로…



 
영남알프스 둘레길은 그동안 정상에 오르는 것만이 전부인 양 하염없이 높은 곳으로만 향하던 산꾼들의 발길을 돌려놓았다. 산에 오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산 아래에도 소중한 것이 많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또, 비록 산꾼이 아닌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영남알프스의 깊고 풍부한 멋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길이기도 하다. 특히 이번 주 소개하는 제9코스는 산과 계곡을 품고 살아온 사람들의 소박하지만 고고한 삶의 궤적을 엿볼 수 있는 속 꽉 찬 길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남긴 고인돌 유적과 신라 불교의 기풍을 느낄 수 있는 천년고찰 및 석불을 만난다. 또 오늘날 영남알프스라고 불리는 큰 산군을 터전 삼아 살아온 조선시대 선비들의 충절과 향학열, 멋과 여유를 느낄 수 있다. 보물급 문화재만 3개나 만날 수 있는 이번 코스에는 청도 지역의 고택들이 즐비하다.


 
  청도 동창천 변의 유서깊은 고택 만화정(萬和亭)에 봄이 왔다. 만가지가 다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염원하는 뜻으로 강 건너 '만화(萬和)들판'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영남알프스 둘레길 개척단원들도 만가지 조화 속을 거닌다.
사위가 온통 봄 빛깔로 물든 4월 중순 '깨진바위' 우뚝한 억산(954m)을 원 없이 바라보며 고개를 넘고 호숫가를 거닐다 보면 저절로 영남알프스 자락의 풍요로움에 감사하게 된다. 불과 46m가 모자라서 해발 1000m급 봉우리에 속하지는 못했지만, 억산은 깨진바위의 웅장한 면모만으로도 영남알프스의 웬만한 봉우리들과 견줘 절대 뒤처지지 않는 명산이다. 그리고 이왕 억산을 바라볼 요량이면 깨진바위의 위용을 제대로 접할 수 있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보는 것이 좋은데 이번 코스가 바로 그런 특징을 갖고 있다.

출발점은 경북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 임호서원이다. 박실고개를 넘어 박곡리석조석가여래좌상을 친견하고 아름다운 박곡저수지길을 따라 천년고찰 대비사(大悲寺)에 들른 후 동창천을 바라보는 운치 만점의 고택인 신지리 만화정(萬和亭)에서 마무리한다. 총길이 17㎞, 순수하게 걷는 시간은 4시간30분이다. 휴식과 문화재 감상 등을 포함해도 6시간이면 충분하다.

◇ 총 6시간 17㎞ 코스 보물급 유물·유적 즐비

 
  GPX & GTM 파일 / 고도표 jpg파일
제8코스의 종착점이기도 했던 금천면 임당리마을회관 앞에서 본격적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먼저 들릴 곳이 있다. 마을 입구 임당교를 건너 폐교 쪽으로 가다 보면 폐교 맞은편에 '당등'이라고 불리는 작은 언덕이 바로 그곳이다. 만발한 벚꽃 아래 아담한 정자가 있는 이곳에는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고인돌이 여러 개 놓여 있는 아늑한 공간이다.

다시 마을회관 쪽으로 되돌아가는 길 삼거리에서 오른쪽을 보면 고풍스러운 전통 가옥들이 보인다. 왼쪽이 임호서원(林湖書院)이고 오른쪽은 보물 제1237호로 지정된 '밀성 박씨 삼우정파 종중소장 문적'을 보관했던 보물전시각인 경의관(景義館)이다. 임호서원은 무과 장원급제자로서 임진왜란 때 두 아들 지남, 철남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고 선조 임금의 호송까지 책임졌던 삼우당 박경신(1539~1594) 선생 및 두 아들을 향배한 곳. 또 경의관은 종전 후 선무원종공신 1등에 책봉된 삼우당과, 호성원종공신 2등에 봉해진 두 아들에게 조정에서 내린 각종 문서 등의 보물을 전시했던 전각이다. 이 문서들은 대구국립박물관에 위탁 보관 중이다. 또 임호서원에 보관 중이던 말 안장 1점은 도둑맞았다가 지난 2005년 문화재관리청과 검·경 합동 단속 때 회수되기도 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임호서원에서 임당리마을회관앞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9코스로 접어든다. 일단 마을 안으로 흐르는 개울을 따라간다. 제8코스 막바지에 거쳤던 길이다. 200m쯤 가서 처음 만나는 왼쪽의 다리 건너 골목 안에 일명 '내시집'으로 불리는 임당리 통정대부 김씨 고택이 있다. 직진한 후 두 번째 작은 다리를 건너 개울을 오른쪽에 끼고 걷는다. 오른쪽에는 오봉산이, 정면에는 해들게봉 뒤편 독종골만당에서 도롱굴산(일명 시루봉, 까치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인다. 능선 중간 오목한 곳이 정거고개다.

◇ 총천연색 봄꽃 환대 속에 박실고개 넘어


 
  박곡지를 돌아서 대비사 가는 길. 멀리 억산 깨진바위가 뚜렷하다.
5분쯤 가면 갈림길. 오른쪽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 20m쯤 가다가 재차 갈림길에서 우측 임도를 따라 오른다. 길가에는 진달래와 개나리 사과꽃이 만발하다. 35분가량 완만한 임도를 따라 오르면 어느새 박실고개. 임당리와 박곡리를 이어주는 길목인 박실고개에 오르면 남쪽 멀리 억산의 깨진바위가 확연히 드러난다. 고갯마루 주변에도 진달래 향기가 진동한다.

이제부터는 줄곧 내리막. 커다란 오동나무가 많이 보이는 '얌전한' 길을 따르다 보면 어느 순간 오봉산 정상부의 베틀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임진왜란 때 인근 백성들이 산성을 쌓고 베틀로 베를 짜며 피난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바위다.

15분 후 묘관음사(옛 약왕사) 입구. 오래된 사찰은 아니지만 잘 생긴 소나무가 멋진 법당 앞뜰에서 바라본 억산 구만산 능선을 조망할 수 있으니 한번쯤 방문할 만하다.

묘관음사에서 5분쯤 내려서면 '소작갑사터'에 닿는다. '신라 진흥왕 21년(560년)에 한 신승이 나타나 대작갑사(현 운문사)를 짓고, 인근에 소작갑사(또는 대비갑사) 가슬갑사 천문갑사 소보갑사 등 4개 절을 더 지었다'는 운문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바로 그 소작갑사다. 지금은 불상과 전각은 온데간데없고 석등 받침 등 일부 흔적만 남아 있다. 현재 억산 아래 박곡지 상류에 있는 대비사의 전신이 바로 이 절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 박곡지 돌아 대비사 갈 때 억산이 성큼

 
  대비사 대웅전 앞 뜰에 자목련이 곱게 피었다.
봄꽃 만발한 길을 따라 5분쯤 가면 골안못을 지나고 이어지는 박곡리 곡란마을 골목을 통과한다. 담쟁이넝쿨, 황토벽이 멋스러운 반시 저장고, 흙돌담과 탱자나무 울타리 등 시골마을 골목길 분위기가 물씬한 곳이다. 마을 주민이 볍씨 심은 모판을 경운기에 조심스레 담아 못자리로 옮기고 있다. 가을의 황금빛 벼 수확을 위해 첫발을 내딛는 소중한 과정이다.

정자나무 쉼터에서 아스팔트 도로를 만난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대비사까지 왕복하는 거리가 7㎞다. 일단 대비사 방향으로 길을 잡아 걷다 보면 보물 제203호인 박곡리 석조석가여래좌상이 미륵당 안에 있다. 석굴암 불상과 비슷한 시대의 석불로, 풍만함과 강건함이 수려한 조각 솜씨에 녹아 있다. 다만 얼굴 부위가 훼손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기록에 따르면 18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두툼한 듯 부드러운 입술과 크지는 않지만 엷은 웃음을 띤 눈매가 잘 살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훼손 시기는 일제강점기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임당리에서 박곡리로 넘어가는 박실고개.
10분쯤 더 가면 박곡지에 닿는다. 인근 지역의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축조된 이 저수지 갓길을 따라 걷노라면 남쪽에 우뚝 솟은 억산의 위용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30분쯤 더 가서 정심교를 건너면 대비사다. 이 절의 전신은 박곡리 소작갑사터에 있던 소작갑사다. 고려시대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는데, 절 이름은 대자대비(大慈大悲)에서 따 왔다는 설과 신라시대 대비가 이 절에서 수양을 했기 때문에 붙었다는 설이 있다. 또 보물 제834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조선 숙종 11년(1685년) 때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조선 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 대웅전 뜰 앞에 자목련과 사과꽃이 꽃망울을 활짝 열어 봄날의 천년고찰 분위기를 더욱 화사하게 만들어준다.

대비사에서 박곡리 정자나무까지는 45분 정도 걸린다. 그 길을 따라 옛 금천면 소재지이자 이 일대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신지리까지는 또다시 40분 정도 소요된다. 길부마을에서 길부저수지 둑길을 한 바퀴 돌아 나와 작은 고개를 넘어가면 금천면 신지리와 동창천 건너에 있는 현 면소재지 동곡리가 눈에 들어온다. 완만한 내리막길 오른쪽의 솔밭에는 쭉 뻗은 소나무 수천 그루가 밀림을 이루고 있어 운치를 더한다. 운강고택을 거쳐 만나는 신지리 삼거리슈퍼 앞에서 보면 만화정이 보인다. 동창천 변에 자리 잡은 만화정 앞 왕버드나무의 연둣빛 새 잎들이 햇살에 반짝거리고 만화정 정문인 유도문(由道門) 옆 담장 아래에는 노란 개나리가 바람에 살랑거린다.


# 떠나기 전에

- 버리지 말고 손대지 말고 '착한 걷기'

출발지인 임당리에서 박실고개로 오르는 길과 고개 너머 박곡리로 내려서는 길 양쪽에 감나무 사과나무 복숭아나무 등이 심어져 있는 과수원들이 많다. 봄철에는 화사한 꽃잎이 바람에 날려 그윽한 운치를 더한다. 그러나 여름과 가을로 접어들면 탐스러운 과실들이 주렁주렁 매달린다.그런데 염려되는 것이 하나 있다.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길을 걷는 사람들이 함부로 이 과실들에 손을 댄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길 걷기에 나선 사람들은 걷는 것에만 충실해야 한다. 과실들은 모두가 향토 주민의 삶과 직결된 생산물이다.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칠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걷는 사람들의 마땅한 의무요 예의다.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것만이 착한 걷기라고 할 수는 없다. 주인 없는 풀과 나무도 함부로 손대지 않아야 하건만 하물며 버젓이 주인이 있는 유실수의 열매들까지 손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영남지역 트레킹의 명물로 영남알프스 둘레길이 더욱 발전하려면 이같은 착한 걷기가 정착돼야 할 것이라는 점, 모두가 공감하고 실천에 옮겼으면 하는 것이 개척단원 모두의 바람이다. '아니온 듯 다녀가소서'라는 말을 되새겨 주기 바란다.


# 교통편

- 동곡에서 언양행 버스 오후5시 막차

부산노포동버스터미널에서 언양행 버스는 오전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2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3200원. 50분 소요. 언양버스터미널에서 동곡 경유 대구행 완행버스를 타고 동곡까지 간다. 오전 9시, 10시30분 등 하루 5회 운행. 동곡버스정류장(054-372-3881)에서 임당리까지는 오전 8시30분 9시50분 11시20분 등에 새마을버스가 출발한다. 10분 소요. 버스가 여의치 않으면 동곡에서 택시를 타면 된다. 5000원 안팎. 코스 완주 후 만화정 앞에서는 다리를 건너 동곡리까지 걸어 가는 편이 낫다. 15분쯤 걸린다. 동곡에서 언양행 버스 막차가 오후 5시에 출발한다. 이 버스를 놓치면 동곡에서 오후 6시와 7시40분에 출발하는 청도행 버스를 타고 청도읍으로 간 후 열차편으로 부산으로 가면 된다.

자가용 이용시에는 경부고속도로 서울산IC에서 내려 언양 경주 방면으로 가다가 밀양 석남사 방향 24번 국도로 옮겨 탄다. 덕현교차로에서 우측 석남사 청도 방향으로 빠져나간 후 69번 지방도를 탄다. 운문사 입구를 거쳐 운문댐 아래 운문교를 건너자 마자 좌회전, 동창천을 왼쪽에 끼고 강둑길을 가다가 왼쪽 다리를 건너면 임당리다.


# 대학자들 토론하던 학문의 요람 '만화정'


 
  청도 동창천변의 정자 만화정
영남알프스 둘레길 제9코스의 종착점인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동창천변 정자인 만화정(萬和亭)은 청도 한옥마을로 불리는 신지리의 여러 고택 가운데 주변 풍광과 가장 잘 조화된 곳으로 유명하다.

한국전쟁기에 남쪽으로 피난했던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이곳에서 숙식했을 만큼 빼어난 풍치를 자랑하며 설계 또한 섬세함이 빛나는 건물이다. 만화정은 본래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소요당(逍謠堂) 박하담(1479~1560)이 건립한 서당 터였는데 그의 11세 손인 박정주(1789~1850)가 분가해서 살림집으로 지은 것이다. 이후 박정주의 아들인 운강(雲崗) 박시묵이 더욱 확장, 현재의 모습처럼 정자 형태로 변형했고 이곳에 강학소를 열어 지역 후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으며 그의 아들인 진계 박재형은 해동속소학 등 38권의 저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주변의 선암서원 등과 함께 청도 지역 학문의 요람 역할을 했다.

운강과 진계가 이곳에서 학문을 갈고 닦고 후학들에 대한 교육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원래 이곳에 서당을 세웠던 소요당의 높은 인품과 학풍을 이어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요당은 조선 중종 때 사마시에 합격했지만 여러 관직을 모두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저술과 학문연구에 매진한 성리학자였다.

특히 무오사화 등을 거치면서 더욱더 세속적인 출세와 벼슬길에 대한 마음을 접게 된 소요당은 본격적으로 지역 발전에 이바지하게 된다. 그는 삼족당 김대유 등과 함께 운문사 아래에 최초의 사창(社倉)을 지어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던 백성에게 환곡법을 실시하는 등 빈민구제사업에 매진했다. 또 남명 조식, 삼족당 김대유 등 당대의 대학자들이 소요당을 찾아와 학문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같은 학풍과 인품이 12대손인 운강 박시묵대와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것이다.


# 승천 못한 이무기가 쪼갰다는 억산 '깨진바위'


경북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골짜기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 대비사에는 억산 깨진바위와 밀양 호박소 등과 연관 있는 이무기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여서 이미 알고 있는 이도 많을 것이다.

옛날 대비사에는 고승 한 분과 동자승이 함께 살고 있었다. 스님과 동자승은 같은 방에서 잠을 자곤 했는데, 어느 날 밤 잠에서 깬 스님은 옆에 누워 있는 동자승의 몸이 마치 냉수목욕을 한 것처럼 차갑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스님은 다음날 자는 척하면서 동자승의 동태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방을 빠져나간 동자승이 다음날 새벽이 돼서야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그 다음날 밤 살며시 동자승의 뒤를 밟은 스님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절 가까운 곳에 있던 연못으로 간 동자승이 옷을 벗고 들어가서는 이무기로 변신, 유유히 헤엄을 치며 노는 것이 아닌가. 이무기는 스님이 지켜보는 것을 모른 채 연못에서 나와 산 너머 이무기못안골로 가서는 빗자루를 들고 주변을 쓸어댔다.

결국 스님은 "네 이놈. 상좌야. 네가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라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에 놀란 이무기는 슬픈 울음을 터뜨리며 날아올랐다. 이무기는 "아, 하루만 더 있으면 용이 되어 승천하는 1000년 동안의 염원을 이룰 수 있었는데…"라며 절 뒷산의 정상 바위를 꼬리로 내려친 뒤 그 너머의 호박소로 들어가버렸다. 억산의 명물인 깨진바위는 바로 이 이무기의 꼬리가 만들어낸 자국이며, 운문사 위 이무기못안골에 마치 빗자루로 쓸어 댄 것 같은 자국이 바위에 많은 것도 모두 그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문의=주말레저팀 (051)500-5169 이창우 개척단장 011-563-0254
글·사진=이승렬 기자 bungse@kookje.co.kr




 임호초교 폐교 맞은편에 작은 언덕인 '당등'. 만발한 벚꽃 아래 아담한 정자가 있는 이곳에는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고인돌이 있다 .

박실고개을 올라서면 정면에 억산의 깨진바위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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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행/청도여행)금천면 미륵당 박곡동석가석조여래좌상. 부처님의 얼굴일까?. 함몰된 얼굴이지만 예술성이 뛰어난 박곡동석조석가여래좌상입니다.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박곡리 미륵당마을안에는 보호각안에 불상이 안치 되어 있다. 대비사 가는 길목에 예사롭지 않은 모습으로 않아 있는 석조석가여래좌상으로 보물제203호로지정 되어 있다. 전체적인 크기는 276CM이며 어굴은 윤곽을 알 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이 심한 상태이지만 석굴암의 본존불과 조각수법이 비슷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불두는 함몰되었지만 지금의 그 모습으로도 예술적 가치를 인정 받고 있어며, 떡 벌어진 어께하며 힘과 기상이 넘치는 뛰어난 작품이다.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상,중,하대로 구분되며 8각으로 연꽃모양을하고 있다.




박곡리 마을에 안치되어 있는 보물203호 석조석가여래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다.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먼저 탑의 일부분을 볼 수 있다.









석조석가여래좌상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각


찾아가는 길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열차와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부산역에서 청도행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 출발시각은 오전 5시10분, 5시45분, 6시40분과 50분, 7시50분, 9시10분, 10시30분 등이다. 1시간 걸리며 4800원(주말 5000원). 청도역 앞 청도시외버스터미널에서 운문사행 버스를 타고 금천면 동곡에서 내린다. 오전 9시20분, 10시10분, 10시50분에 있다. 1시간 걸리며 3500원. 동곡정류장에서 산행 기점인 박곡리로 가기 위해서는 마을버스를 타야 하는데 15분 걸린다. 박곡리 입구 정거장에 하차. 오전 9시45분, 11시30분, 오후 4시10분, 6시10분 등 하루 6회 운행한다. 요금은 1000원. 동곡정류장 입구에 있는 개인택시(054-372-3066)를 이용할 경우 요금 5000원.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는 대구-부산 고속도로를 타고 청도TG에서 내려 밀양·청도 방면 25번 국도를 타고 우회전했다가 곧바로 경주·운문 방면 20번 국도로 좌회전한다. 운문사 방향으로 동곡재를 지나 동곡리 사거리에서 직진한 후 남양·오봉 방면 919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 동창천을 건너 '대비사 6㎞'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해 들어가면 박곡리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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